2020/01/09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모든 교리 대신 오직 평화를 존중합니다.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모든 교리 대신 오직 평화를 존중합니다.
wy 0 2019.06.05 10:27







철원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포천으로 뚫린 새 길을 강남에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리니 도착했다.
개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철원, DMZ의 봄은 이미 지났고 녹슨 기차 길에 녹음이 울창했다.

평화학교를 안내하기 위해 마중 나온 정지석박사가 온화한 미소로 필자를 반겼다.
그는 퀘이커 교도이고 국경선 평화학교 교장이며 목사님이다.
얼마 전 성공리에 마친 “4 27DMZ민+평화 손잡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최: 우선 ‘4 27평화 손잡기’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정: 공식 명칭은 “4 27DMZ민+평화 손잡기운동”입니다.

남북의 분단이 너무 길고 아파서 이제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남북 평화 통일의 열망과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는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운동입니다.

이 일은 시민들의 안전과 삶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적극적으로 평화 통일에 대한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작년 4월 27일, 남북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손을 잡은 지 1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DMZ 500Km의 국경선 마을에 시민들이 평화의 손잡기 운동을 하자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런 운동을 한 것이지요.

최: 상당히 감격적이고 성공적인 행사였습니다. 어려운 점도 많으셨지요?

정: 네, 저희들은 처음부터 확실히 잘 된다는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많은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런 큰 관심과 행사 일정에 대한 세부적인 질문에 충분한 설명과 안내가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조직적 단체가 아니고 순수히 시민들의 마음을 합쳐서 시작하다 보니까 그런 면에서 당황도 좀 했고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좀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 일을 하자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이 별로 신통치 못했던 점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일을 하실 만한 분들, 주로 지식인들인데 이분들을 만나면 “뜻은 좋은데 과연 되겠느냐” 며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이럴 때 힘이 좀 빠졌습니다.

최: 네 워낙 엄청난 일이라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지요.



반면에 이 일을 추진하는데 같이 동참한 분 들도 많이 계시지요?







정: 우선 이 일은 종교적인 체험으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하지만 실질적인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저도 어떤 때는 현실감이 좀 없었어요.





몇몇 목사님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계속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안바나바 목사님이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해 나가자는 권유에 다시 활력을 얻었습니다.









왼쪽부터: 백용석 정동수 노정선 한정석 정지석 이환진 나핵집 안바나바 김찬수 (존칭생략)





최: 구불구불한 DMZ 500km를 시민들이 손을 잡아 연결하려면 50만명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20만이 넘는 분들이 이 평화 손잡기에 동참하였습니다.



참 많이 오셨네요.







정: 저는 처음에는 100만이 오실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ㅎㅎ



다만 이분들이 왔을 때 어떻게 안전하고 즐거운 행사가 되게 하느냐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여 인원의 윤곽이 잡히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의 헌신적 봉사가 이번 행사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해 철원에서는 영접 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또 어디서 어떻게 손을 잡고 서야 할지거리 곳곳에서 실측을 해주셨어요.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이 이번 행사 성공의 큰 힘이었지요.











최: 이번 일로 DMZ 주위 시민들이 이런 행사에 동참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년 4 27에도 계속 이러한 행사를 하실 건가요?







정: 저는 그런 생각이 없고요…그때가 되면 또 그런 뜻을 가진 분들이 하실 수 있겠지요.



다만 이 손잡기 운동이 평화의 불길 운동이라면 이 불길이 생각지 못한 다른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평화 컨퍼런스도 열었는데 여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교 선생님들이 참석하였지요.





이 분들이 4 27행사를 보시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 운동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지대에서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했고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오신 어느 신부님은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서도 이런 운동을 하자는 제안에 내년 9월에 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6Ydb2Uvk0&t=256s




최: 네 한국의 평화 손잡기 운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박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국경선 평화학교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정: 국경선 평화학교는 ‘피스메이커’, 남북한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로서 2013년 3월 1일 개교를 했습니다.





그 전에는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러한 피스 메이커를 길러야 한다고 말만 해왔는데, 어느 순간 내가 직접 해야겠다는 각성이 들면서 미국에서 철원으로 2011년에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 이 학교는 아직까지 한국의 교육 제도에는 없는 학교입니다.



대안학교도 아니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신앙 운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간혹 고마운 분들이 학교 재정에 보탬이 되라고 얼마씩을 주시는데 현 제도상으로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 자발적으로 기여한 돈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통일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평생교육기관으로 등록을 해서 정식으로 교육부의 산하 기관이 되려고 합니다.







최: 국경선 평화학교의 뜻에 동참하여 강의를 하시는 분들 중 저명인사도 많이 있으시지요?







정: 네, 석좌교수 중에 한완상박사님, 서광선목사님, 박경서박사님 등이 있으시고요, 해외의 평화학자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최: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정박사님은 퀘이커 교도로 알고 있는데 퀘이커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공식명칭은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정: 네, 이사람들은 교단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개신교는 독일의 루터로부터 시작 되었지만 퀘이커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국 퓨리탄으로 시작 되었는데 퀘이커는 퓨리탄의 spiritual 좌파입니다.







최: spiritual 좌파가 무슨 뜻인가요?







정: 여기서 좌파라는 것은 종교적 의미이고, 제도권을 싫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도에 종속되는 순간 영적인 자유가 손상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최: 전통적 기독교로서는 생소한 개념인데요…교리도 일종의 제도라고 보는 건가요?







정: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라는 것은 어떤 신앙단체의 방향이나 믿음의 근간을 규정하는 것이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런데 퀘이커는 이런 제도적 교리들을 일체 거부합니다.



퀘이커가 가장 철저히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 것은 평화입니다.







최: ‘4 27 평화손잡기’나 국경선 평화학교가 모두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정박사님이 하는 일들은 이런 퀘이커리즘의 평화 정신과 직결 된 것 같습니다.





퀘이커 자체는 기독교이지만 교리가 없고 폭이 넓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도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더군요.







정: 네, 사실 퀘이커만큼 포용적인 기독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퀘이커들을 보면서 좀 어색하고 이상했는데 이들의 포용력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단이라는 생각, 그런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꾸로 제도권 기독교에서 퀘이커를 약간 이단시 하고 있지요 ㅎㅎ







최: 지금 한국 전통 교회에서는 퀘이커를 이단으로 보고 있나요?







정: 감리교나 통합 측에서는 이단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외에 근본주의 보수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퀘이커 창시자 조지 폭스





최: 정박사님이 쓰신 ‘퀘이커리즘으로의초대’ 라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서 박사님은 ‘퀘이커리즘은 오랫동안 잃어버린 기독교의 원형과 본질을상기 시켜준다’ 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정: 퀘이커들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Faith and practice 입니다.





믿음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은 미신이고 실천만 있고 믿음이 없는 것은 단순한 행동주의겠지요.



그래서 믿음과 실천의 일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저는 거기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그 일을 세상 속에 들어와서 실천하신 분이니까요.







최: 그렇게 좋은 퀘이커를 믿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정: 네, 퀘이커 교도는아직 극소수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전도’ 라는개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퀘이커는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 신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전도를 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모든 지구촌이 교회라고 봅니다.







최: 한국에 퀘이커가 들어온 지는 얼마 안되지요?







정: 퀘이커는 6 25가 나고 1953년에 한국에 처음 들어 왔습니다.



주로 개인적으로 와서 구호 봉사와 함께 병원을 했습니다.





군산에 있는 군산 의료원이 바로 퀘이커 개인 의사들이 처음 와서 시작한 겁니다.



이후 함석헌선생이 무교회주의 신앙을 거쳐 퀘이커가 되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또 퀘이커는 상당히 개인주의 같으나 동시에 공동체의 영성을 추구합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조직이 아닌 공동체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영성을 보장하면서같이 성장하는 것이지요.







최: 퀘이커가 역사적으로 이룩한 최초가 참 많더군요.





노예제도 반대부터 시작해서 전쟁 반대, 여성 투표권 보장 등 어느사회 단체 보다 이런 운동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는 것도 여호와의 증인보다 먼저지요?







정: 네, 그래서 처음에는영국 사회에서 퀘이커들에 대한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은 전투에는 참여 안 하지만 전쟁터에는 나갑니다.





나가서 전투 못지 않게 위험한 일들을 하는 데 전쟁터에서 부상 당하여 쓰러진 사람들을 나르는 작업 등이지요.



자신을 방어할 무기인 총도 들지 않은 채 말이지요.





독일 폭격기가 런던에 폭탄을 퍼부을 때도 퀘이커들은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시내 곳곳에서 폭탄의 잔해에 깔려있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운반하는 일을 했지요.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러한 일들을 하는 퀘이커를 보고 당시 영국 사회의여론이 퀘이커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점차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습니다.





그 결과, 단체로는 최초로 1947년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는 줄어들고 있는데 퀘이커는 2만 명을넘어서는 성장을 하고 있지요.



주로 젊은이들이 퀘이커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 왜 젊은이들이 그런가요?







정: 우선 그들은 퀘이커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 모임은 한 시간 동안 침묵 기도만 하니까 누가 나와서 이것을 따르라거나 무엇을 회개하라등의 지시가 없는 겁니다.



목사 없이 침묵 기도 후 원하는 사람은 느낀 바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종교성을 체험할 수 있으니 젊은이들이 모이는 듯합니다.





다음에는 Peace , 사실 토니 블레어가 미국 클린턴의 요청으로 이락을 폭격 할 때에도 퀘이커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렇게 퀘이커의 유일한 교리랄 수 있는 평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영국만 아니라 미국 북동부, 청교도의 후예들이 많은 곳에서도 퀘이커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 한국에서는 아직 좀 이상한 이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ㅎㅎ







최: 퀘이커의 침묵기도도 특이하지만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도 특이합니다.







정: 네, 형식으로는 정반대지요.



퀘이커 침묵의 핵심은 체험입니다.





무엇을 체험 하느냐 하면 신적 체험, 신과의 만남을 침묵 속에서 하는것입니다.



이를 위해 침묵 속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waiting, 기다림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퀘이커의 침묵은 그래서 적극적 침묵입니다.



이 것의 핵심은 mystic. 신비입니다.



통성기도 하는 분들은 오순절 파인데 형식은 다르지만 내적인 신비체험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 퀘이커는 이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보나요?







정: 이 사람들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이 세상이 곧 죄로 멸망하고, 이 땅은 마귀가 공중 권세 잡았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Original sin이 아니라 Original goodness로 보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아주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최: 정박사님이 미국에서 아무 연고 없는 철원으로 오신지 8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기서 지내온 느낌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말씀 해주시지요.







정: 50이 넘어서 기도 중에 인생의 후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하면서 그 길을 찾은 게 여기 였는데.. 저는 하나님께 행복하게 그리고 허무하지 않게 살고 싶다고 기도 했습니다.







최: 그 동안에는 좀 허무하게 사셨나 봅니다. ㅎㅎ







정: ㅎㅎ 네 사실 그런 느낌이 많았습니다.



목사로 일하면서도 그러한 허무감이 점점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이 여기 철원인데 처음에는 너무 엉뚱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지요.



제가 2011년 9월에 철원에 왔는데 그 후에는 허무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을 지켜 주셨고 저도 이 곳에서 지금처럼 학교일과 평화운동을 계속 하려 합니다.



철원이 공기도 좋고 먹거리도 참 건강식입니다.



모든 면에서 분에 넘치게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최: 네, 정지석박사님.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퀘이커를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좋은 사람’ 동시에 ‘좋은 기독교인’ 이란 말이 있던데 이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오늘의 만남을 퀘이커의 침묵 기도로 끝냈으면 합니다.







정: 네, 좋은 대화 감사합니다.



잠깐 침묵하고 마치겠습니다.







파주 '온생명교회' 에서 2019 5 27

18 김조년 -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Backhouse Lecture 2018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

김 조 년(Cho-Nyon Kim)




* 왜 나는 이 강의를 맡았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서 항상 경험하는 것이 변화다. 관점도 달라지고, 세계도 달라진다.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철학도 그 내용이 달라지면서,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달라짐은 때때로 있던 것들이 사라짐이지만 동시에 새로 운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이요 풍부하여짐이다. 그래서 동시에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 로운 것은 덧붙여진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과 정체성의 문제이 면서 새롭게 첨가되는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뒤부터 퀘이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어떤 것도 규정하거나 기준이나 신조를 만들려 하지 않는 퀘이커의 전통과는 아 주 먼 시도였다. 그러나 내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정식 등록 된 뒤에도 이에 대한 노력을 끝없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퀘이커 됨이란 무엇인가를 내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 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형성된 퀘이커됨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찾는 자(seeker)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노력할수록 퀘이커들이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잡히기보다

는 모두 추상적이었다. 막연하였다.

예를 들면,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 안에 계신 그 님’. 퀘이커들이 말하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유교와 도가와 한국 고유의 생활(민속)종교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 따위, 또는 기독교인이 된 뒤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온 ‘하느님’, ‘성령’, ‘메시아’, ‘그리스도’, ‘구 원’, ‘해방’이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Tao), ‘진인’(眞人), ‘자연’ 또는 불가(佛家)에 서 말하는 ‘내 안의 부처’나 ‘성불(成佛; 부처가 됨)’, 해탈 등이 모두 추상적으로 다가왔

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러한 추상개념들은 일상생활과 매우 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런 개념들의 설명이나 이해보다는 좀 더 일상생활과 긴 한 관계가 있다는 퀘이커들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더 끊임없이 궁금하였다. 다시 말해서 퀘이커가 매우 좋 아하고, 모두가 실천하려고 하는 말들, 즉 평화(Peace), 단순함(Simplicity), 평등 (Equality), 컴뮤니티(Community), 진리(Truth),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진실 (Integrity) 등도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이것들 역시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매우 쉽지가 않다. 그 말들에 대해 매우 깊은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하여 실 천하려 할 때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상황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생활공동체는 깨지고, 평화보다는 다툼과 전쟁의 위험으로 가 득하고, 통합과 함께하는 삶보다는 분별, 분열이 가득하고, 점점 더 차등이 심화되며, 자 연파괴를 넘어 생명의 종말을 촉구하는 문명의 발달과 사건들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런 퀘이커의 전통처럼 내려온 삶을 실현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특히 가장 단순하게 산다는 것이 곧 복잡하고 화려하게 살도록 규정된 현대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 삶의 전통을 지 키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세계는 전과 같이 민족과 나라와 지역을 넘어 인류를 생각하고 전 지구를 하나로 보며 문화의 융합과 공존을 꾀하는 지금, 어느 한 종교의 종파성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고 본다. 퀘이커는 어떤 종파성에 얽매는 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끊 임없이 하여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함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때 동양의 고전 중에서 가장 평화롭고, 단순하며,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아 끼고 귀하게 보며, 형식과 규범을 넘어 자연(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장한 도가의 이론과 삶을 찾아보는 것은 퀘이커 종교성 확장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교하 는 것이 아니라 퀘이커를 보충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도가의 영성, 또는 신비를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성과 신비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건들에서 들어나기 때 문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내가 낳고 자란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생활, 종교성과 나의 성

장을 살펴보고, 한국사회를 오래도록 이끌어 온 유교, 불교, 민속종교들의 진화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의 토착과정을 간단히 살핀 뒤, 퀘이커가 추구하는 것들과 도가에서 추구 하는 핵심점들의 만남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살아간 한국의 초기 퀘이커 중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퀘이커로서의 내 삶의 방향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주로 질문 형태로 정리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주장이 아니라 내 궁금함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퀘이커 됨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요구이다. 이것은 동시에 미래의 퀘이커를 걱정할 만큼 젊 은 퀘이커들이 현격하게 줄고, 퀘이커들의 노화현상은 바로 직면한 문제다. 이것은 퀘이 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러한데도 많은 사람들은 바로 퀘이커 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 퀘이커를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화전통과 종교전통의 진수와 퀘이커의 진수를 접목시켜 확장된 종교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퀘이커의 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 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것을 매우 큰 기쁨이요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동시에 매우 큰 삶 의 부담으로 느낀다. 신앙과 그 믿음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문제에서 퀘이커들이 모 범이 되어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싶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 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형식화한 세계에서 실제를 살고 싶은 맘에서는 내 자신 이 퀘이커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믿음에 성실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내가 퀘이커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주저스럽게 한다. 특히 초기의 퀘이커 선배들, 조지 폭스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는 그런 감동과 떨림과 진리에 대한 헌신의 움직임 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흘 던 것같은 느낌이 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흐름과 기성종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 등에서 사회 전체 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러한 때이지만 조지 폭스 등 초 기의 친우들의 삶은 매우 곤고하였으며 이상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 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곧 진리를 따르려는 그 삶은 매우 감동스럽다. 그것은 마치 신약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과 같다. 내 자신도 그런 삶 속에 있고 싶다. 그 러나 지금은 매우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종교없는 종교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사는 느 낌이다. 물론 종교라는 조직과 교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지만, 형식화한 종교에서 내용에 충실한 종교생활을 실천하는 수는 매우 적다. 동시에 종교,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일상생활의 친분과 교류에서 비종교적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이러 한 때 깊은 종교성을 띈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초기의 퀘이커 친우들이 가졌던 철저한 진리추구와 그 삶을 실 현하려다가 겪은 고난의 경험이 없다. 매우 평범하고 평이한 종교의 삶을 살아왔다. 그 러므로 내 말 속에서 종교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을 찾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내 속에 있는 빛의 작동을 따라서 내 일상생활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철저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퀘이커의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을 던져 주기가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서도 이 강좌를 하겠다고 대답한 것은 단순히 이런 내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문화체계 속에서 어떻게 종교와 비종교가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펼치겠다. 그러니까 이 말 은 나의 퀘이커 깨달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묻 는 것이다.



1. 나의 성장과 내 주변의 종교성 나는 무종교적이지만, 유교적 가정생활의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가정은 유 교전통의 교육과 생활윤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불교나 무속 또는 한국 적 샤마니즘의 생활풍속이 우리 가정에는 없었다. 우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무 속신앙의 전통을 우리 가정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점을 치거나 절을 찾아 부처에게 기도하고 시주하는 일이 없었다. 그분들의 언어생활에서 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

다. 그 대신 사람이 죽고 나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살아 있 때는 하나였던 것이 어떻게 죽 은 다음에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각각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가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그에 대 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신 적도 없다. 그러나 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할 때, 그 하늘 이라는 곳이 어디일까가 몹시 궁금했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채 그 냥 자랐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집안에 차려놓은 빈소에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혼백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른이 돌아가시면 집에는 빈소를 차렸다. 빈소에는 종 이상자로 만든 혼백함이 있었다. 그 안에는 청색실과 홍색실을 꼬아서 혼백을 상징하는 실무더기를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빈소를 차리는 동안은 그 혼백상자가 죽은 사람을 상 징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 빈소에 아침과 점심과 저녁 세 번의 상식(밥상)을 올렸다. 그 때는 언제나 혼백함을 열어서 죽은 혼령이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완전히 상 징을 통한 의식행위(儀式行爲)지만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삼년이나 일 년이 되어 탈상할 때는 그 혼백함 속에 있는 청실과 홍실을 꺼내어 땅에 묻거나 불에 태 웠다. 백을 상징하는 청실은 무덤 앞에 묻고, 혼을 상징하는 홍실은 불에 태워 날렸다. 이렇게 하여 죽은 사람은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예식을 치 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집에서 하는 유일한 종교행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 은 엄 히 따지면 종교행위라기보다는 단순히 조상신을 섬기는 효도행위에 속하는 것이 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를 이끌어 왔던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계통의 신유교를 생활 윤리로 믿었던 가정 전통은 다른 종교행위에 대하여 배타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 유교와 성리학 전통과 위배되거나 배치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매우 크게 배척을 받았 던 조선시대의 전통이 우리 가정에는 일상생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이변이 생겼다. 내 증조할머니의 큰아들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며

느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큰 손자가 죽었다. 이에 그녀는 매우 크게 상심하였다. 이 때 예수교전도사를 만나서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된다. 그 뒤 그녀는 매우 열심히 교회 에 나갔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 방식은 한국 전통가정의 기도방 식과 같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두 손을 모으거나 비비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젊어서 죽은 영혼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 남은 큰 아들의 안녕된 삶을 비는 기도였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몸을 단장하 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생활신앙전통과 일치하는 행위였다. 가정 에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멀리 떠난 가족을 위하여 빌 때는 언제나 그 와 비슷한 기도를 하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였다. 그렇게 빌고 난 뒤 일 상에서 일을 하면서 찬송가를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많이 부른 것이 ‘예 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네’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그녀의 며느리에게 내려 졌고, 나중에는 손주며느리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녀가 직접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 지만, 그런 가정의 영향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 할아버지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큰 갈등은 아니었지만, 유교전통의 가정분위 기와 기독교 신앙이란 새로운 흐름 사이에 묘한 갈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물 론 내 증조할머니나 할머니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에, 유교식의 가정윤리나 조상에 대한 제사행위를 진행하는 데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중국에 가톨릭이 전달되었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 때 한반도 에 전달된 가톨릭과 유교 사이에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제사갈등 같은 것이 우리 가 정에서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의 삶이 나 일상생활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고향 마을에는 불교사원도 없었고, 유교식 사당도 없었다. 향교나 서원이 있는 마 을이 아니었다. 내 고향마을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양반들이 사는 곳 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식 예식이나 예법으로 마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한 해를 시작하는 날 동네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이 있었고, 성황당이 있었으며, 마을 입구에는 마을수호신으 로 장승이 세워졌었다. 많은 사람들은 절기에 따라서, 각자 자기집의 전통에 따라서 자 기들이 믿는 신에게 빌었다. 때로는 부엌신에게, 때로는 장독대신에게, 때로는 우물신에 게, 때로는 나무신에게 빌었다. 묘하고 큰 바위나 몇 백년 묵은 큰 나무나 깊은 골짜기 나 우물은 또한 기도터가 되었고, 그것들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애니미즘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에게 신은 일상생활 속에 있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을 지키는 지킴이, 즉 업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 는 것같은 유일신 개념이 없었다. 신은 매우 다양하였고, 많았으며, 각각 기능을 담당하 는 것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신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념상의 신이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조상에 대한 숭배심은 매우 강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 런 모든 제사와 비는 행사에는 언제나 음식이 마련돼 있었고, 그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마련하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그에 맞는 의식행위가 있었다. 그러할 때는 언제나 전통으 로 내려오는 신의 이름들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개별적이지 체 계를 갖춘 조직이 아니었다. 아플 때나 깊은 병에 걸렸을 때, 가정이나 한 사람에게 어 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 것들은 조직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종교적 예식행위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에 나갔다. 매우 낯설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다. 열심히 다녔지 만 의심스러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중에 왜 기도할 때 꼭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하 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빌고 기도하는 것이지, 꼭 누구를 대신 불 러서 그의 이름으로 내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라 고 하였다. 내 죄를 그가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점 이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렇게 나를 대신 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요 그는 그인데 그가 어떻게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교나 기도 또는 찬송가를 부를 때 피, 죄, 원죄, 죽음, 구원, 부활, 영생, 멸망, 지옥, 천당, 천사, 마귀, 싸움, 승리, 사랑, 평화 따위의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피와 죄라는 말이 들어간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매우 거북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찬송가의 내용들이 매우 전투적인 것이 많아서 함께 부르기가 많이 불편하였다. 사랑과 저주나 멸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평화와 싸움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없었다. 유교나 도가에서, 또는 일반 민속신앙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 았기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원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받은 교육은 유

교식 윤리교육이었다. 그것은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이 자기를 갈고 닦아 가는 생활윤리를 매우 귀중한 것으로 알고 지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흠결이 없이 사는 것을 매우 훌륭한 덕목으로 알고 지내기를 바랐

다. 인(仁)한 삶, 즉 자비와 사랑의 삶과 의(義)의 삶, 즉 정의로운 삶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조화하면서 살 것인가를 배웠다. 오랜 논쟁의 유교전통인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냐 아니면 악한 것이냐 라는 결론 없는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지만,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무조건 모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수히 많이 설교하였지만, 그것을 들으면서도 시원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대신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없이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듣기 전에 살았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두가 다 멸망의 구 텅이 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인가? 아직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 은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매우 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을 발견하 였다. 그것을 내가 따라 믿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전혀 심각하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 는 서방정토, 또는 극락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물론 끊없는 윤 회를 말하는 불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인간은 인격존재다.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결

정하는 아주 고유한 분야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어느 인간이든 남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지 않던 가?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으 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 러나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맴도는 논리였다. 여러 신학적인 글들 을 읽을 때도 이 부분에 대한 논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서 계속하여 교회에 나갔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인격을 가진 나라는 존재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과정이 곧 나의 기독교교회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중에 하워드 브린턴(Howard H. Brinton)의 책 『퀘이커 300년』이 함석헌의 번

역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다.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한 공감을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함석헌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 퀘이 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의 퀘이커 모임에 가끔 참석하고, 독일에 서 머무는 동안 퀘이커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차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면서 퀘이커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 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함께 독 일 북서부 4계회에서 회원이 되었다. 물론 이 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왜 내가 퀘이커가 되는 형식절차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하였다. 독일에 계 속하여 있겠다면 회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면 회원이 아닌 데 퀘이커모임을 주관하는 것은 이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백을 하였고 인 터뷰를 통하여 정식 독일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전에서 몇 친구들과 함께 퀘이커리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 하였다. 처음에는 매일요일마다 짧은 고요예배에 긴 공부를 하였다. 차차 고요예배 시간 을 늘려 한 시간의 고요예배를 마친 뒤에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여러 참여자들이 정식으로 퀘이커 월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공부를 시작한 지 6년만에 대전 월회로 출발하고 FWCC에 등록하였다. 나는 종교경전을 다양하게 읽는다. 기독교의 성 경 신약과 구약을, 불교경전과 도가경전을 읽으며, 때때로 유교의 경전을 읽는다. 이러할 때 나의 기독교에 바탕을 둔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폭넓은 종교성을 얻게 된다. 이미 내 성장배경을 말하면서 밝혔듯이 내 삶 속에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 가와 민속신앙의 전통이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체계있는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삶과 사회공기로서 내 속에 그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낀 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기독교와 퀘이커리즘의 삶이 나를 이끈다.



2. 한국의 종교다원성; 유교, 불교, 도교, 생활(민속)신앙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다원성을 가진다. 국가지배이데올로기와 생 활윤리로 유교, 불교가 오래도록 지배하였고, 도교와 민간신앙은 바로 이러한 외래 종교 들과 조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왔다. 다시 말하면 학자들의 주장들이 서 로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재래종교로 도가 또는 도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에 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이 어떠한 것과 상관 없이 도가사상과 도교신앙은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넓고 깊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중국과는 달리 도가 사상이나 도교신앙이 한국 역사상의 어떤 왕조의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적은 없

다. 그렇지만 근 1천년 가까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불교나 그 뒤를 이어 유교가 역할하던 시대에도 이것들은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체계를 잡거나 거대한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민간신앙 위 에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가 지배한 뒤,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유입되었 다. 이 두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문화계에서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였다. 때로는 박해 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된 적은 없다. 그러 니까 왕조가 바뀌거나 사회 질서가 기존 이데올로기로 지탱할 수 없이 되었을 때는 언제 나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들어와 새로운 기운을 사회에 불어 넣었다. 고대국가들 이 기틀을 잡기 시작할 때 민간신앙으로는 국가제도를 이끌거나 새로운 국민정신을 집합 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의 힘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고대국가 형성과 틀을 같이 한다. 한반도에 있었던 왕조들을 이끈 종교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그러나 달라진 사회와 국제간의 교류는 새로운 종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들어온 것이 신유교였다. 신유교는 조선 왕조의 굳 건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협한 유교유일체제는 정신세계뿐 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경제, 정치생활에 매우 좁은 한계를 가지게 했다. 이 때 중국을 거쳐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도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에 들어온 가톨릭이 었다. 아주 철저한 신분체계와 현실중심의 유교윤리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이들 은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소식은 신분사회에 살던 그들에게 복음 이었다. 그러한 사상과 믿음은 지배계층에게는 기존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 개혁성향을 가지거나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엘리트집단들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일반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킴 에 새로운 종교이데올로기를 도입하기에 이르 다.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지배계층은 아 주 강력하게 새로 유입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논란이 된 제식논쟁과 직결된다.

그 뒤 백년이 지나서 개신교가 새로 유입되었다. 가톨릭은 당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여 매우 큰 저항에 부딪혀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낸 반면, 그 뒤 들어온 개신교는 전교의 어려움은 없었다. 의료와 교육과 자연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개신교는 많은 일반 사람들과 왕조와 지배엘리트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 이 됐다. 특히 왕조가 힘을 잃고 일본에 의한 강제 통합과 통치가 시작되면서 한국민의 민족의식과 개신교는 일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여 발생한 민족의식과 새로 들어온 개신교는 공통의 관심사항을 가지게 됐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한국은 미국과 유럽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들의 과학과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러한 것들은 민족주의와 함께 성장하였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때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상은 이제까지 한 국을 지배했던 유교나 불교의 생활관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 때에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역사상에 있었던 종교체계들을 다시 정리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크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중 동학(東學)은 려오는 서양의 문물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민간에 깊이 파고들었으나 양반지배계층을 중심으 로 정치를 이끌던 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핵심 은 기존의 유교나 불교에서 주장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 간신앙으로 깊게 자리를 잡았고 널리 퍼졌다. 이 동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할 때 개신 교와 함께 민족 독립의 입장에서 공동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정부의 강력한 박해로 공개활동을 금지당했으며,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상호 경쟁과 공존의 과정을 겪는다. 동학, 천도교 등으로 이름이 바뀐 이 신흥종교는 한 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통합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결국 한국사회에는 역사적으로 불교, 유교, 재래종교와 기독교가 차례로 유입되어 사 회에 매우 중요한 정신활동과 일상생활에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체계가 들 어왔을 때는 언제나 기존의 종교나 사상체계와 갈등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는 과거로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존의 정신세계와 사상체계, 그리고 생활습관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신유교는 불교의 것을 흡수하 였고, 불교는 새로 들어온 유교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맨 뒤에 들어온 기독교 역시 이미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 그리고 민간 신앙의 이데올로기와 생활습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리와 교리 상으로는 서로 배치되는 점이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혼용하고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사상체계는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를 부분적으로 받 아들여 자신의 것을 개선하였고,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는 기존의 사상과 생활습관을 받 아들여 토착화하거나 정착하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갈등과 공존을 가능 하게 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혼용, 또는 혼합은 곧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체계 들 속에서 자기 종교나 사상체계의 핵심사상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완전 히 배제할 수밖에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수용할 가능성이 큰 유사성이나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갈등과 공존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가져오게 한다. 자신의 종교나 사상체계를 확정하고 유지하기 위하여는 다른 종교나 사상체계와 다르다 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들 속에 있는 핵심요소들을 활용하거나 차용할 수밖 에 없다. 그것은 곧 현실 종교의 모순과 딜레마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과 같은 다원종 교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교섭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 여 진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극단적 진보론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 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다원성은 곧 종교일원성에서 만난다. 즉 개별 종교들의 다양한 차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갔을 때 궁극에서 만나는 것은 한 점이라 는 것이다. 바로 궁극의 그 한 점을 찾기 위하여 모든 종교는 각각 자기의 자리에서 자 기의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궁극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고 인정하게 되는 데, 그것의 이면에는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일 원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확신이 뒷받침한다. 바로 이 점이 종교의 진화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나 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의 것들은 중국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

다. 중국으로부터 왔거나 중국을 통하여 왔기 때문이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왔지만, 불교와 가톨릭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많이 진화된 모습이 거나 토착화와 전교의 갈등을 경험한 뒤에 들어왔다. 그 대신 개신교는 부분적으로 중국 을 통하여 왔고, 큰흐름은 미국과 서양의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다. 일찍 들어온 것들 은 민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고, 뒤에 들어온 것들은 앞에 들어온 외래종교와 민 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큰 종교들,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는 고유한 민속종교와 다른 외래종교들과 부딪치면서 융합된 복합성을 띈다. 그렇 게 하여 한국화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 개인 자신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옛날이 야기나 선조들의 이야기 또는 생활이야기를 통하여 유교, 도교, 불교와 민속신앙이 혼합 된 삶의 지혜, 체험, 학문, 도덕과 종교의 체험담을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자랐다. 체계 있는 교육이나 종교행위로서가 아니라, 비공식 일반 삶의 이야기와 생활을 통하여 여러 종교들이 녹은 생활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내 속에는 한국사회의 오랜 종교전통들이 녹아서 흘러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가형성을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민속종교와 유, 불, 도 교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영향은 그 뒤 국가가 형성되고, 견고하게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을 때에도 다른 사상들과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대개의 흐름은 서로 용납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3. 한국의 종교들과 기독교의 만남 어떤 종교가 되었든 새로운 지역에 전파 되어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것을 주장하고 유지할 수가 없다. 종교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곳의 긴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문화 속에 정착되는 것을 말한다. 한 종교가 새로운 사 회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한 사회가 새로운 종교를 유입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왔던 삶의 자세들, 생각들, 의 식(儀式)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개념) 속으로 들어가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전래되는 종교들의 변이가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는 굉장히 심한 갈등에 부딪치게 된다. 때로는 대화라는 상황으로, 때로는 박해라는 양 상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란 자세로 나타난다.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이 미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다. 이런 과정에서 종교들은 새롭게 진화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종교들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됐고, 생활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종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있었던 종교와 생활문화는 주류의 자리에서 곁 가지로 려 났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삶과 생각과 제도와 의식 속 이나 밑바닥에 남아서 기능한다. 새로운 체제에서 살아남는 것과 새로운 지역에서 널리 퍼지는 것은 바로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접촉점이 바로 공 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종교들의 대화가능성과 토착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보편성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인류라 는 존재가 어떤 상황, 어디에 있든지 꼭 가지게 되는 공통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

다. 이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근거가 되며, 모든 종교들이 다른 종교에 의하여 진화하는 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에 있었던 많은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해 볼 이유가 생긴다. 한국에 고유하게 오래도록 전통으로 내려오는 종교들과 기독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 가능하고 의미가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 개념들이나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화 되었으며, 같은 존재를 두고 각각 다르게 이름을 붙이고 있기도 하지만, 같은 이름을 쓰 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 다. 때로는 신, 하늘, 도, 절대자 따위로 각각 불리지만 그것들은 궁극존재 즉, 최초, 최 후, 지고하고 심오하며, 개인 안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데서는 일치한다. 신앙의 대상으로 서 그것들은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동시에 인간 삶의 실천에서도 역시 용어와 이미지가 각각 달랐다. 죄로부터 벗어나며, 고통을 넘어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노력이었

다. 그러니까 믿음과 실천의 부분에서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가를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점과 비슷한 점 또는 같은 점을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 미가 있을 것이다.

유교와 도가 또는 도교는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

왔다. 물론 중국에서도 많은 변화를 거치고, 새로 들어온 종교들과 공존하고 다투면서 변화된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각 종교들은 또 한 번 굴절 내지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쓰지만 내용은 매우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나 도가에서는 직접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인격존재로서의 신개념이 그들에게는 없지만, 신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는 궁극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그것들의 종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비인격적이고, 비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또 인격적이 다. 그러니까 신이 어떠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나 교리가 아니라 만남의 체험이라고 보아 야 한다. 비록 개념 설명에서는 인격과 비인격이라는 것이 구별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만남은 모든 곳에서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격적 만남이 아니고는 결코 삶의 변화 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궁극존재와 직접 만남을 통하여 자신과 그가 하나 가 되는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각종 신들에게 빌고 기도 를 하지만, 그것은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집단인 국가와 민족(종족) 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현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과 집단이 할 일의 핵심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었

다.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양, 곧 성인에 이르는 자기 닦음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인 (仁)을 행하는 것이면서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큰 갈등을 일 으켰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종교행위는 아니지만 가족전통의 예식행위였다. 그 문제는 온갖 가족행사에서 항상 부딪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도 크게 부각된 것이었 고, 한국에서도 꼭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과의 갈등은 지금은 해소 되었으나 개신교와는 아직까지도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았다. 기독교인도 물론 조상에 대 한 생각을 깊이 하지만, 예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한 유연성 을 가진다. 즉 상당한 부분 타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윤리문제에 서는 크게 부딪칠 문제가 아니다.

민속종교와 기독교의 관계: 샤마니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교와 민속종교는 한국사 회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서양식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신앙이 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 신이 있었지만 그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종 족, 가족, 시대에 따라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신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변하였다. 이 경우 모든 신들은 일종의 기능상의 신이었다. 다신인데 어떤 우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능상의 문제로만 일상생활에 대두되었다. 이 민속신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예식과 생 활에도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민속종교 즉 무교는 지금도 살 아서 계속하여 생성되는 현대종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유교는 생활윤리로 작용할 뿐, 어떤 종교적 교육이나 체계있는 조직으로 존재하

지는 않는다. 사원이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위 있는 유교교사나 학파의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이 유교사회라고 서양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화된 문화들이 있기 때문만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정당 한 것인지는 매우 궁금하다. 유교는 인간과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윤리를 강조하였기에, 그것이 곧 일상생활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숭상하는 입장 에서가 아니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유교사회라고 할 때는 의미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맹자와 순자로 나뉘는 인간의 본 성이 선하냐 악하냐는 논쟁을 통하여 인간은 온전함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 정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수양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받아들임에도 계속된 자기성장과 성찰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자 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많은 사원이 있고 승려를 양성하는 학교가 많았다. 여러 해 전부터 학생수가 줄고 승려지망생들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신도들에게서 불교신앙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고 있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대학, 고등학교가 있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 관이 많다.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극락에 이르는 길을 찾고,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힘든 이들이 고요함을 찾고 평안을 누리기 위한 프로그램 을 절에서 많이 진행한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한 희망을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를 주 장하는 파가 있지만, 어느 것을 주장하든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상대 안에 절대가 있고, 삼라 안에 열반이 있으며, 속된 것 안에 성스러움이 있음을 인정하는 대승 불교의 입장이 한국불교에서는 강하다. 불교 내 종파들끼리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지 만, 불교와 민속종교인 무교와의 결합은 특이하다. 이것은 불교가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전파하는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의 예식이 불교식으로 정착되기 도 하였다. 열반과 해탈의 전통과 서방정토나 극락을 그리워하는 정서는 구원과 천당을 말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도교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당도 없고, 교사도 없다. 다만

일을 마친 사람들,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도 교나 도가적 삶을 흠모하여 추구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힘있게 삶을 영 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도가스러운 삶을 사는 것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바닥의 정서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문명비판적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가철학은 현대인들의 쉼없는 삶, 끊임없이 급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무의미성을 체험할 때 도가에서 강조하는 관조와 놓음 의 삶은 새로운 숨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반 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를 운영하며 특히 기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병원과 각종 사회서비스기관을 운영하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사회전반에 서 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운동을 벌여 정치와 경제계에 깊이 관 여한다. 진보경향이 있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지지만, 보수경향 의 기독교는 개종과 선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진다. 종교간 갈등은 이러한 분파에서 많이 심화돼 있다. 각 종교를 신봉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토착화를 생각하는 이들은 서로 교류가 많다. 에큐메니칼 차원의 기독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나 신도들과 교류를 많이 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개종을 전제로 하는 논쟁은 지금은 별로 없다. 다만 자기 종교 속에 타종교 의 교리나 윤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인정하고 생활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한다. 진보 경향이나 보수 경향의 종교인들은 각각 자기들이 관심을 가지 는 부분들에 대한 공동대응을 많이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 진 보와 보수 경향의 흐름들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와 보수 끼리, 진보와 진보끼리는 풀어야 할 문제들을 놓고 다른 종교들과 함께 할 때가 많다.





4. 기독교 또는 퀘이커에서 주의할 도가사상의 핵심

도가에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할 수 있는 도(道, Dao)는 유한한 우리 인 간의 생각, 연구, 언어, 느낌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 터 나왔다는 도는 무한히 신비롭고 오묘하다. 모양이 없고 이미지가 없다. 이름도 없고 성질도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유나 추 리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다만 상징으로만 이야기 될 뿐이다. 이미 도라고 말한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이라고 이름한 순간 그것이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결국 부정을 통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존재다. 다 시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함으로 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그램이 없는 퀘이커에서 예배나 일상생활에서 하는 고요히 함은 불교에서 하 는 참선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은 혼탁해진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방법 이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다. 맘을 깨끗이 하는 것이 첫째 길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상태로 접어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 여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초월한 궁극의 실재로서의 무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면의 세계를 직관하므로 그 속에 있는 불성을 만나는 일이다. 이것 은 기독교 수행자들이 드린 기도, 즉 마음을 비워 생각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오로지 내맡기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찾고 말씀 을 기다리는 퀘이커의 예배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부정을 통한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에 도달하려는 도가의 사상체계는 퀘이커 리즘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도가의 사상체계를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정리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가 있다고 본다. 관계 또는 사회윤리의 실천으로서의 무위, 박(樸; 소박, 단순), 도 그리 고 근본으로 돌아감을 간단히 살펴본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 위로감은 무엇일까? 거기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 지극한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실되게 하면 다 이룬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다 시 말하면 사람이 도달해야 할 고정된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능력 상황 처지에 따른 진실된 과정을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청장년과 노인이 도달 할 기준을 일정하게 설정할 수가 없다. 각자 그들에게는 각각 다른 기준이 제시된다. 다 양한 기준은 곧 다양한 사람들의 그들 나름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도가의 신비체험은 황홀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중립적이며 불확실하다. 그래서 믿음 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직접 체험에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체험 이란 단순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삶의 신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 히 도가철학을 원칙과 역동적 힘과 행위 또는 삶의 실천자세를 나누어 생각하여 본다. 우선 도(道, Dao)에 대한 이해다. 도는 궁극적 절대실재로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 자애롭고 생산하는 실재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이미지를 그릴 수 없는 무의 존재다. 부정으로서만 설명이 되는 없음의 존재다.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냥 작용만 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원천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까 맣고 까만 카오스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주 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꼭 설명이 필요하다면 텅 비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깊은 골짜기, 가장 낮은 넓고 깊은 바다, 어머니 또는 낮은 곳으로만 흘러드는 물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계시성과 구원성을 가진다. 그래서 영생의 개념을 가진다. 구원과 영생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도는 어떤 특정한 상층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도의 나타남과 실현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 지만 언제나 일상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로고스이면서 길이다. 길은 곧 길을 가는 것이

다. 원칙과 삶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 원칙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상대성과 평등성이다. 균형을 잡기 위한 작용은 언제나 상대세계를 이용하면서 그것을 넘는 절대 적 평등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귀함이나 천함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빠르 고 느림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도(道)가 작용하거나 인간들이 그 도를 따라 올바르게 활동하고 생활하는 자세

는 바로 무위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이나 흐름을 보면 ‘하지 않음으로 함’이란 모순스런 해석이 된다. 도는 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그릇이나 연못에 물이 차면 넘쳐흐르듯 이, 길이 기울면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하면 새싹이 돋아나 듯이, 더위가 극에 달하면 차차 기온이 내려가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기온이 올라가듯 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인간의 힘을 더하여 작용하지 않게 하 는 일이다. 이것은 때를 기다리는 일이요, 기다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지나치 게 문명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규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위는 도덕과 예법과 형식을 떠나는 삶을 추구한다. 아나키스트적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드럽고, 자비롭고, 겸손하며, 약하고 비우는 삶의 자세는 무위의 한 가 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다툼과 폭력의 사회양상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모순스런 용어, 즉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러한 삶은 원초적 상태, 즉 박(樸, natural disposition)으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박의 상태는 쉽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소박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물이 들여지지 않은 상태, 타고난 그 모습 그대로의 상태, 영아와 같은 상태, 뿌리로 돌아간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다 섯 가지 소리는 귀를 어둡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더럽힌다. 이러한 꾸밈들은 사 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여 탐심에 가득한 삶으로 이끈다. 그것이 잘못된 문명과 삶을 유 발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언제나 투박하지만 갈고 닦이지 않은 원시상태를 희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생명본질인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이미지로 표시하고 설명해보자. 도가의 신비주의와 궤이커 신비주

의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에 대한 설명을 위의 이미지

를 통하여 할 수 있다. 퀘이커를 상징하는 Q자는 퀘이커의 믿음과 실천을 의미한다. Q글 자의 O부분은 믿음, 원칙을 의미한다면 ~는 생활실천을 의미한다. Q자 중 O에 해당하 는 것은 신, 퀘이커식 표현으로는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면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 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Tao)와 같다. 이것이 어떻게 생활에 작용하는가? 퀘이커들 은 기다리고 찾는다. 그 행위는 일상이나 예배시간이나 깊은 침묵으로 연결된다. 고요히 함으로 말씀을 기다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어떤 행동이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을 도가식으로 말하면 무위(Wuwei; 無爲)다. 하지않음의 함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로 하면 성령이 내려질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신, 내면의 빛, 또는 도에 다다르는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 활동이 일어난다. 이 활 동이 작동하는 방법은 단순성, 단순함이다. 그것을 도가에서는 박(樸; Po´)이라고 한다. 박은 전혀 작업을 하지 않은, 깎지 않은 그냥 통나무다. 그것을 의역한다면 단순함이다. 순수함이다.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이다. 그러니까 도가 일상생활에서 실현되고 실천되려면 무위, 즉 하지않음의 함으로서 도를 체득해야 한다. 그것을 체득한 다음에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어 떤 문화나 교양이나 기교를 섞지 않은, 받은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퀘이커의 삶의 증 언이란 바로 단순함,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퀘이커의 증언이 되는 Peace, Equality, Integrity, Community는 바로 Simplicity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곧 퀘이커와 도가의 만남의 핵심이면서, 두 체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상체계와 삶의 체 계는 만난다. 이렇게 볼 때 퀘이커가 동양사상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가 있다. 이렇게 하여 퀘이커가 확장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자란다. 완성된 교리가 없다. 그것이 살아있는 종교의 핵심이다. 이러 한 종합된 삶을 살고자 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함석헌이 주장하는 씨의 자세와 삶이 바 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도가적 사상체계를 어떻게 기독교적 체계와 합 하여 자기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5. 함석헌(Ham Sok Hon)의 삶과 사상; 종교적 신비와 일상생활 한국의 초기 퀘이커요 현대사상가인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삶에 대한 간단한 고찰이 필 요하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접촉하고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길 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처음 장로교인으로 시작하고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 우 찌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신앙’을 배우고 상당한 기간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원숙 기에 퀘이커가 되었다. 한국의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향이 크고, 나 자신도 그에게서 받 은 영향이 크다고 믿는다.

“나는 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처 음에는 『기탄잘리』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타고르의 책을 계속해 읽었다. 범신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신앙하여 가는 데 아무 지장이 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좋았다.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를 읽게 되었다. (…)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 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찌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우찌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쉬바이쩌를 알고 읽게 됐는데 쉬바 이쩌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 오산에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에 동경서 받은 영향으 로 무교회적인 독립 신앙의 입장에서 성경을 원문에 따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줄곧 웰즈(H. G. Wels)의 문화적인 자리에서 보아왔고 과학에 충실하면서 옛 신앙을 건질 수 있는 데까지 건져보자는 고등비평학자의 정신을 따랐다. 그렇게 성경 을 보았다. 역사에서는, 그 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는 없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그 결과 근본에서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 실적인 면에서 어느 부분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단정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울 감 옥에 있는 동안 불교 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 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 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 피난 중에 해를 두고 이름만 듣고 보지 못한 『바가밧 기타』를 우연히 헌책집에서 발견했을 때 기쁘던 생각,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 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점점 껍질 이 좀 떨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 이렇게 오는 동안 역사적 예수를 믿느냐 하는 것, 속죄는 어떻게 해서 되느냐 하는 것, 하나님은 정말 인격신이냐 하는 것,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는 무어냐 하는 의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 각이다. (…)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켸켸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어디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 될 것이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갈 뿐이지, 그 자체를 규정할 자격은 없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람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1] 이런 선언 뒤에 그는 자기의 독자적 신앙노선을 걷는다.

무교회와 헤어지는 데는 우선 자신보다는 인생 전체를 보자는 것, 앞에 올 것을 보자

는 것, 무엇에 들어붙지 말고 자유하자는 것,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되어 보자는 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니 나만이 아버지 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산에 오르는 길은 매우 많은 것이 눈에 보였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그 길만이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 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이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이다.(9, 예: 314) 상대의 세계에 있는 ‘종교’, 기독교는 이제 그에게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일 뿐이다. 그러니깐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것은 상대계의 좁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겸손해야 한다. 개별종교는 하느님을 담을 만큼 크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고, 사도를 뽑은 것은 최소 한의 껍질을 가지는 상징행위였다. 그래서 함석헌도 가능한 한 상징으로 시작된 ‘엉터리’ 를 붙잡지 말고 자유의 영으로 살자는 것이었다.(9, 예: 315)

그래서 그에게 참 길은 너도 나도 기독교도도 이교도도 다 같이 더듬어가는 길이다. 나만이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은 동물희생을 했지만, 이제 네 신조희생을 해야 할 것”(9, 예; 317)이라는 것이다. 정통이냐 미신이냐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만 알 뿐이다. 획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내자는 것이 참찾아 나가는 길이다.(9, 예;318) 나만을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믿고 세계가 구원되어야 한다.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해 믿는 믿음이 정말 구원하는 믿음이다. 나(진리)는 지나간 모든 인류 속에 있고, 장차 올 인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멸망할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9, 예; 318-9) 만인 구원론이다.

함석헌은 새시대에 맞는 종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지금의 종교들은 새 시대에 맞 지 않는 낡은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로: 1) 기독교 교리의 완성, 2) 점점 제도적으로 되 어 가는 점, 3) 공세적이 되지 못하고 수세적이라는 점, 4) 점점 더 피안적이 되어가는 점, 5) 내분이 심하다는 것이 바로 새 종교를 필요로 하는 징표라는 것이다.(3, 새종: 221-222) 낡은 것은 새 것을 예견하고 주문한다. 썩음이 지극하거나 충격이 강력할 때 새로운 흐름은 솟아오른다.

이 시대가 새로운 종교를 낳을 ‘그때’가 멀지 않다는 표시의 두서너 가지 징표가 있다.

1) 현대의 전쟁의 성질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 원자학의 발달이다. 3) 세계관 문제다. 4) 생명공학의 발달이요, 5) 전 세계가 하나의 연결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3, 새 종: 223-228)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게 될 새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그 새 종교의 모습을 그려보면 대강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모습을 그러보는 것

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맘에서 새 종교는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얼굴의 테두리를 말한다면 둥글 것이다. 하나란 말이다. (....)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 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 (....) 세계를 온통 한 집안으로 만드는 말씀을 주실 것이다. (....) 앞으로 세계는 하나 될 터이요, 그것을 위해서 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2) “그 담 그 얼굴의 빛깔을 말하면 무색일 것이다. 더 합리적이 되어간단 말이다. (....) 이 이성의 문제는 과학에 대한 문제다. (....) 과학도 종교도 다 생명의 자라가는 일면인데 이 날까지 반대방향에서 서로 욕을 하며 파 들어간 셈이다. (....) 이기고 지고의 감정에 붙잡 혀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 과학이 이긴 것도 종교가 진 것도 아니다. 영원무 한의 세계에 들어갈 때까지의 종교요 과학이지, 들어가면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3) “이것은 인간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자연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데 가서 맺힌다. (....) 미래의 종교는 이 지친 인생을 다시 일으키는 종교여야 할 터인데, 그렇기 위하여서는 그 분열된 인격을 재통일 하는 새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뚫려 비친다고 하였다. 육이 영의 거침이 되는 것도 아니요, 영이 육을 배척하는 것도 아닌 인간이다.”(3, 새종: 229-235) “미래의 종교는 인격의 종교, 논리의 종교기 때문에 맘의 종교요, 맘의 종교기 때문에 깨달음의 종교다.”(3, 새종: 239) 그것은 언제나 ‘시재(時在, now-here)’, 이 지금-여기에 산다.(3, 말 씀: 143) 지금-여기가 바로 현실이다. “종교는 현실을 잊어버림이 아니다. 현실을 건지는 것이다. 현실을 건지기 위해 가장 작은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5) 거대조직 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직과 형식이 필요할 뿐이다. 미래의 종교는 시재의 종교이기에 지금-여기를 놓고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없고, 회개가 될 수도 없다. 잠 꼬대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6) 물론 목적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오르잠이 종교의 길이다. 그러나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없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이다’ 한 것은 바로 시재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3, 말씀: 146)

그래서 현실의 종교라면 현실을 사는 민중, 밑을 중하게 여긴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악과 싸우 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 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 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3, 말씀:

146-7)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과 싸울 것인가?

싸울 목표는 둘이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

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민중이 하나님의 발이라 하는 말 은 민중은 보이는 전체란 말이다. (....) 발을 씻음은 민중을 씻음이다. 절대 거룩한 하나 님, 그에게는 문제가 있을 것 없고, 더러워진 발인 민중을 깨끗이 하면 된다. 그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민중이다. 작지만 크다. 작다는 것은 낮단 말이다. 하늘에 비하면 말할 수 없 이 낮지만 땅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교회요, 나라요, 문화요, 세계요, 그것은 다 이 밑바닥 위에 세운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7-8) 이 민중, 이 씨을 일으키는 하나되는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9) 그래서 그는 이미 퀘이커 를 만나기 이전에 퀘이커가 돼 있었고, 그래서 만나서 서로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 이다.



6. 항상 자라는 종교와 인생; 절대구원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뜻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국가나 기독 교사회를 만드는 것이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민족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 수하는데 그 책임을 맡겨 준 것이라고 판단한다. 불교가 못한 것 유교에게, 그것이 못한 것 기독교에게 책임을 맡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기독교가 다하지 못할 때는 다 른 것에게 그 자리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목적이 아 니라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수단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단순히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선택한 것과는 다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앞 에 평등하다. 다만 그가 노는 역할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는 선생에게서 해방되고, 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고, 자기 종교를 가지고 싶었다. 즉 ‘내 생각, 내 믿음’을 가지기에 맘을 모았다. 이렇게 되어 그는 서대문감옥에 있는 동안 크게 달라졌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 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 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여기에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 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

야 한다는 것이다.”(1, 뜻: 17-18) “성한 혼에 모든 종교는 다 하나님 말씀”(죽, 열: 280)인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의 입’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다.

오직 제 종교만을 가지자는 한 사람의 노력에서 세상의 구원을 본다. ‘제 종교’란 하

느님과 맞대결하는 종교, 그래서 신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 즉 중간자 없이 하느님과 마주 서는 한 신자만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대신 시키지 않는 다. 누구를 대신 내세우지도 않고 누구의 대신 노릇을 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는 인격, 그것이 그리스도다.”(죽, 열: 285) 하느님 앞에 직접 서고자 하는 그는 기독교인 으로서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고(끝: 56),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면 그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는 간디를 좋아하였다.(끝: 62) 동 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궁극적 긍정인 영원한 긍정에 도달한다는 칼라일 을 통하여 절대긍정주의자가 된다.(끝: 58)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네가 이제 알아서 살다 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봐’ 하고 하느님이 준 자유를 사랑한다.(끝: 68) 이 렇게 그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 자유하는 개인은 독 불장군이 아니라, 전체를 나타내는 개인이다. 그래서 그러한 개인과 전체의 융합이 중요 하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바로 개인의 삶 속에서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나 타낸다.(끝: 역, 150)

하나라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 음 것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람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걸 받 아가지고 베드로와 바울이 ‘머리는 예수요, 우리는 다 몸이다’ 라고 말한다. 머리는 제일 높고 몸은 낮다는 것이 아니고, ‘우린 다 하나다’ 하는 걸 말하는 거다.”(끝: 고, 192-3) 개인과 전체는 함석헌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속에 다른 개인이 들어 있고, 다른 개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전체를 이룬다. 개인은 전체의 표현이면서 전체는 개개인 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동성이다. 개인이면서 전체, 전체를 중심에 두면서 개인을 자 유롭게 하는 영성공동체를 함석헌은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을 그는 퀘이커 에서 느낀다.

가능하다면 평화주의자 예수의 삶을 따르자는 것이다.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퀘이커의 성경읽기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투신한다.”(3, 퀘: 154) 그런 퀘이 커는 동양사상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특히 노장사상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수밖에 없다. 양심을 때리는

데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내 몸으로 폭탄이 되는 거다. 특히 평화주의자의 구령은 ‘자 기희생’이다. 죽자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역

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3, 퀘: 165-6)

타종교와 대화를 좋게 보고, 노장사상이나 불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기를 계시한다 고 본다. 함석헌은 타골과 간디를 읽으면서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꼭 기독교 에만 진리가 있다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 종교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 다.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라면 진리는 하나이고 같은 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즉 종

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다.(3, 퀘: 155)

그는 언제부터 노장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리스도교와 같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 두 사이에 충돌은 없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 워 오면서부터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간의 사회 살림이 근본 에서부터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계가 달라지 는 정도가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회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달 라지면 어떻게 달라질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 종교는 새로운 문명이 나오려고 할 때 앞장을 서서 지도하려고 할까? 문명에 앞장서서 인류를 건진다고 하는 성현들이 말한 것처럼, 과연 기존 종교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40세 때 그 대답을 부정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종교는 못할 거라고 보았다. 종교 들이 정치에 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대전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던 대국주의, 대 국가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정부주의, 지배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관 이 새로워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민중을 위해 있는 국가라야지 민중이 국가를 위해 서 존재해야 된다는 그따위 국가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뜻이라면 이를 위해서 동양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3, 퀘: 156-7)

그렇게 하여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의 해탈도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 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죄,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무지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으로서 하 는 자리는 한 자리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충돌될 요소가 아무 것도 없

다. 아마 기독교에서 찾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자리를 노자 장자가 말한다면 도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지 말고, 실제로 믿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느냐고 본다.(3, 퀘: 158)

함석헌은 내세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부정한다거나 긍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궁극 목적은 사람이 영원 무한에 도달하는 거라고 본다. 죽어가지고 부 활한다는 것보다 ‘예수는 부활해 가지고 죽었다’고 함석헌은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 명을 찾는 것이다. 즉 부활이란 나긴 물질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으로 났지만 생명이 인 간에게 와서는 소위 정신적이라고 하는 데까지 갔다. 아직도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죽은 후에 무슨 형식으로 되겠는지 그 때 가봐야 알 것이 니까 모르지만, 믿음으로 인해서 그 어느 세계에 올라갈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수 와 소크라테스 같은 이가 나왔다는 것은 정신계가 있다는 증거다.(3, 퀘: 159-160) 그러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세라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시간적으로 연장해서 죽은 후에도 영원히 호화로운 생활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높은 데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 라 가는 것이다.(3, 퀘: 160) 그래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는 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우는 것을 통하여 진리의 자리에 선다.(3, 퀘: 169) 이것에서 기독교와 선이 만 나게 된다.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갔더니 노장사상을 모르고서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 더군. (…) 하나님이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는 그것 얼마나 높은 사상이야요? (…)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의 세계입니다. 이 우주의 본의가 무엇인고 하니, 온 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이나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이지요. 왜 이처럼 다원적 이냐는 샤르뎅이 다 지적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가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 입니다. (....)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3, 퀘: 172) 다원, 전체, 하나, 동양과 서양, 기독교, 불교, 선, 노장 따위를 구별하는 것을 그 는 싫어한다. 관념으로는 나눔이 될는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포섭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종교는 완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종교는 완성된 것이 없다. 계속하여 변하고 흐르며 새롭게 달라진다. 그래서 과정의 종교, 길 위에 있는 믿음이요 자라나는 것만이 있다. 그것은 생 활종교라야 그 길을 따를 수 있다. 신도 미완성이요 자라는 것으로 보는 그에게 현실종 교와 믿음이 완성되어 나타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되어갈 뿐이다.



7. 함석헌의 기독교이해와 다른 사상체계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는 동양사상과 긴 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예수 이해 와 동양철학의 관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정 리하고 주장한 씨이란 것은 ‘맨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맨사람의 좋은 예가 예수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예수에게서 맨사람은 ‘어린아이’ 였다. 어린아이가 되는 그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태어남은 어머 니 탯집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다시남이 아니다. 꼭같이 육으로 낳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남은 영으 로 낳는 것이다. 다시남은 곧 그렇게 낳는 것을 통하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도 다시 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다시 나고, 모 든 것에서 다시 낳는 것이 곧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도 함께 말하였다. 특히 노장사상에서는 동심론(童心Q)에서 이것에 깊이 관여하였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그는 현덕(玄德)한 사람이다. 노자 28장을 보자.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知其雄 受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上德不離 復歸於嬰兒). 수컷(하늘, 양)을 알고 암컷(땅, 음)을 수호하면 천하의 생명수 인 골짜기의 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덕인 자연을 잃지 않고, 영아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함덕지후 비어적자(含德之厚 比於赤子). 덕을 돈후하게 품게 되면 마치 영아와 같이 된다. 벌이나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나 새들도 덤비거나 쪼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맨사람이다. 혹시 함석헌은 씨을 이 지경의 사람들로 본 것일까?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어린아이의 손아귀와 같이 단단하게 잡고, 부드럽기 한이 없어서 물컹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함유하는 영아. 부드럽고 약함으로 주변을 다 정리하는 어린아이.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요, 진심은 최초부터 있었던 맘, 곧 흠이 없는 동심 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그 진심을 잃으면 참 사람, 즉 맨사람으로서의 씨을 잃는 것이 다. 이것이 씨의 맘이지 않을까? 함석헌은 기독교에서나 노자가 추구하는 진실된 사람 을 그것으로 본 듯하다. 조금 더 노장사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살펴보자. 함석헌은 노장이해, 아니 노장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이해했다.

“노자ㆍ장자는 한마디로 이 현상세계를 초월해 살자는 것이다. 초월한다는 말은 결코 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현상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꿈도 아니요, 허망한 것도 아니요, 내버려야 하는 악한 것도 아니다. 노자ㆍ장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다. 이 현상의 세계는, 그 안에 태어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피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것,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이므로 필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 태도가 문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생각하므로 알게 되고(知), 좋고 나쁘고가 판가름되며(情), 그에 따라서 선택하고 버리고가 나타난다(意). “그럴 때 이 생각하는 나와 나를 둘러싸는 세계 또는 그 안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 각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아 절대에서 상대가 나왔음을 안다. 그렇게 함이 현실을 초월함이 다. 절대도 영원 무한, 상대도 영원 무한, 상대에 살면서 절대에 하나 되기 때문에 ‘현지 우현’(玄之又玄)이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속에서 그대로 절대와 하나 되기 때문 에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노자ㆍ장자의 삶은 도에서 시작되고 도에서 끝난다.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이다.”[3]

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은 원인 없는 원인이다. 스스로 그런 것, 곧 자 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음, 곧 무라고 하기도 한다.”[4] 그 도를 깨달으려면 어 떻게 하면 될까? 노자는 지적으로는 허무(虛無), 적막(寂寞), 염담(염淡)을 강조했고, 실 행으로는 무위(無爲), 유약(柔弱), 부쟁(不爭), 복귀(復歸)를 말했다.[5]

이렇게 주장한 노자를 평화주의자로 이해한다. “노자처럼 시종일관 순수한 평화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6] 노자는 무위 로 하자는 것, 정치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현한 이가 장자다. 무치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삶의 원리에 적용된다. 즉 모든 생 명존중과 생명의 자기통치능력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장자는 가난했지만, 벼슬을 싫어했고, 제삿집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구

는 돼지가 좋다고 했다. 높은 관직을 주어 모시려는 왕이 보낸 사자에게 그것을 강조해 말한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포악한 지배자의 착취 아래 사는 씨을 건져주기 위하여 불같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임금, 학자, 호걸, 영웅이라는 존재들이 그의 붓끝에서는 한갓 지푸라기도 되지 못해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의 삶과도 통한다. 함 석헌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그의 유명한 논설 ‘들사람 얼’(야인정신)에서 잘 표현한다. 이러한 정신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아와 아모스 같은 선지자의 삶에서 그 모 범을 본다. 함석헌의 국가주의비판은 이러한 노ㆍ장의 무치의 정치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에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현실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서 새로운 참의 세계와 나라를 꿈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들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8 퀘이커로서의 나의 삶 나는 퀘이커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믿음과 실천을 꼭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아니 하나로 보는 퀘이커로서 그러한 전통을 내 자신이 지킬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가 온다. 특히 옛날에 비하여 사치스럽게 살 수밖 에 없는 오늘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과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무엇 일까? 태어남 자체가 환경파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과연 자연 생태계를 파괴 하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로지 경쟁과 다툼을 부추기는 삶의 패턴에서 함께 살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사회에서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과 같은 영의 인도를 받아서 살 수 있을까? 점점 국가주 의가 굳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는 하나의 생명체계 속에 있다는 믿음과 철학을 어 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맹세를 하지 않고, 서약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아왔던 퀘이 커의 삶을 모든 것이 서류와 사인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화한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양 심을 주장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내 숨이 막히는 듯하다. 그 러나 그러한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현실에서 작은 활로를 찾아 나가는 것이 또 퀘이커 가 찾아나갈 길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느낌으로 잡는 실천 가능한 좁 은 길을 찾는 것이 계시를 기다리는 삶이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이 되지 않 을까? 그러니까 신비함이 없는 듯한 삶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자세로 내 삶을 이끌고 싶다.

한반도는 한 민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두 나라로 갈 라져서 다투는 현실 속에 있다. 나는 전 인류는 민족과 개별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철 학과 믿음 속에서 현상태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에 깊 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내 개인이 먼저 평화가 되고, 화평한 맘으로 살아갈 것을 노력할 일이다. 그것과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한 삶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하여 일단 나는 내 얼굴과 맘 속에서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함을 실천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용하는 훈련을 쌓아야 함과 동시에 획일화하려는 전통과 사회흐름과 대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을 벌이려 한다. 그것은 좌우의 이 념이나 노선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전쟁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진 늙은이들과 함께 전 국토를 순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던 지역을 찾아서 평화의 기운 을 불어 넣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동시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들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자 한다.

평화의 기운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창의적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상태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자신이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활동 가로 참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결과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돌보고, 모든 문제를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과 빠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기 전에 깊게 생각하여야 하고, 최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 생활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훈련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것은 내 자 신이 AVP훈련가로 여러 번에 걸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확신하게 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워크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중요한 생의 과제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일반 시민과 비폭력 평화사상에 대한 연구와 강좌와 포럼을 통한 평화분위기 의 확산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적대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신뢰가 없는 자도 그것이 있 는 자처럼 신뢰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삶을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드러움 이 강력함을 포섭하고, 유연함이 경직된 것을 녹인다는 도가철학의 일상화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특수한 사람만이 그러한 훈련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 사람이 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이 있다는 것, 내면의 스승이 있다는 것, 불성을 가지며 도와 접촉 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신비체 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곧 지극한 정상생활이다.

그러나 현대생활, 특히 문명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쉼이 부족하고 깊은 숨쉼이 부족하다. 그래서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분위기에 끌려가면서 힘 들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철학자가 분석했듯이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다. 나 에게는 피로를 느끼는 그들을 이끌고 평안한 곳으로 안내할 능력과 비전이 없지만, 그분 들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나는 특별 상담사도 아니고, 갈등해결사도 아니며, 그와 같은 훈련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방황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은 맘이 참으로 많다. 그것이 내 나름으로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느낀다. 그런 접촉, 만 남은 일대일의 개별만남도 가능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으로 만날 수도 있 다고 확신한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 즉 모든 것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옷도 다르며, 생활하는 모습도 다르다. 그 다름은 하나의 큰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서 종국 에는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 있 는 지역의 시냇물은 가까운 산골짝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그것은 곧 내 농토와 내 집의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제공한다. 나는 그 물 때문에 산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서 거대한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한없이 넓지만 하나의 바다다. 거기에서 하나가 된다. 결국 모든 실개천과 강을 거쳐서 바다로 흘러든 물은 한 물로 친하게 지낸다. 모든 물은 곧 친구들이다. 이런 비유를 우리의 논의인 종교와 생활, 신앙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들은 각각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출발하고 다르게 실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궁극은 하나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결 국 친구다.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민속종교가 곧 한 물에서 친한 친구로 살되 자기의 고유한 전통과 삶의 길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것이 내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리의 종류는 각종 분야별로 다양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 가지의 참여를 통하여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Quaker 그리고 Amnesty International의 적극활동가로서 국경 없는 삶으로 다리를 놓은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다른 문화 종교, 사람(인종), 문명, 관습 따위를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 고, 그 속에서 알짬을 찾아서 새롭게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린 자세에서 항 상 찾아가는 자의 삶을 이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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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in: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1983, 한길사. 195-7

[2] 함석헌: 함석헌 저작집 24, 『씨의 옛글 풀이』, 한길사 2009, 34쪽)

[3] 위의 책, 36쪽

[4] 위의 책, 37쪽

[5] 위의 책, 37쪽

[6] 위의 책, 39쪽

퀘이커 서울 모임 자유계시판 13 장동만 종교인의 현실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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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만 [ E-mail ]
종교인의 현실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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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의 현실 참여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해) ‘No!’ 라고 말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Evangell Gaudium)‘에서

카톨릭 전주 교구 박 창신 신부의 ‘시국 미사’가 일파만파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 사회적으론 종교인의 정치적 발언 내지 행위의 타당성 정당성을 에워싼 논란이 뜨겁고, 학계에선 새삼 정교 분리 (statecraft vs. soulcraft)의 역사를 고찰하는가 하면, 카톨릭 내부에선 교리(서) 해석이 분분하다.

이 모두가 근본적인 시각이 다르고, 그 문제 접근 방식이 달라 마치 백가쟁명 양상인데, 나로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종교인, 특히 목회자 (신부/목사)의 현실 참여 문제에 대해 평소 생각하던 바를 좀 적어 보고저 한다.

종교 (신앙) 인으로선 인간 만사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인간 생명의 존립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적인 정치 경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하나님의 뜻대로 정의롭고 공평하고 선(善)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번 박 신부의 ‘시국 미사’ 파동에 대해 서울 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이 임무를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평신도의 소명 으로 (카톨릭 교리서는) 강조하고 있다.”
“사제들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신자들의 고통과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참여 내지 정치 행동이 평신도들에게 소명이라면 사제에게는? 그리고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통과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비교인 (非敎人)에겐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어딘가 앞뒤가 안 맞는 논리적인 모순을 느낀다.

브라질 돔 헬더 까마라 대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사람들이 왜 빵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When I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me a saint.
When I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me a communist.)”
자비를 베푸는 것은 종교 행위이고, ‘가난의 이유’를 묻는 것은 곧 정치 행위가 된다? 참 아이로닉한 이야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강론한다.
“지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Listen to the voice of the earth)”
“지상의 목소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아닌가.
“귀를 기울여라.” 곧 거기에 관심을 갖고 행동라는 말 아닌가.

보수 전통 종교, 많은 보수 주의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설교한다. 인간의 하루 하루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경제 문제는 그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란다. 그것들은 정치 경제하는 사람들의 몫, 정교는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가 잘못 돌아갈 때, 그로 인해 숱한 생명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 듯’을 이 땅에 펼친다는 그들로서 이를 외면, 오불관언 해도 좋을 것인가.
그래서는 안될 줄로 안다.

그들은 누구보다 앞서 하나님 정의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의 불의, 죄악, 불공평, 불선 (不善)을 증언하고 규탄해야 한다. 이는 한갓 정치(적) 발언 / 행위가 아닌, 곧 ‘하나님 말씀’의 대변이자 실천이며 그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이는 한 생명을 구원하는 소선 (小善)을 뛰어넘어 다수를 함께 구원하는 공동선 (共同善)의 길이기 때문이다.

<장동만> <12/01/13>

P.S. 첨부한 글, ‘잉여 청춘이여,
Think Global!”

관심 있으신 분, 한 번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퀘이커 추천받은 책들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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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천받은 책들 중에는 아래와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1. 함석헌전집 15:말씀/퀘이커300년
함석헌 역 | 한길사 | 1986

2.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성수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삼민신서 26)
함석헌 | 삼민사 | 1985.11.01

4. 조지 폭스의 일기
조지 폭스 | 문효미 역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2001

5.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
김영태 | 인간사랑 | 200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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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김성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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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입니다.

와단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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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 성 수*


1. 머리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
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1. 머리말

함석헌은 한국기독교가 제사적인 면에서 벗어나 한국사회의 윤리와 정의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종교의 세계는 윤리나 사회정의 이상의 세계이지만, 윤리의식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종교는 미신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러한 도덕과 사회정의 그리고 건전한 상식을 지닌 종교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퀘이커주의는 현실적이고 동시에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함께 했다. 우리는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를 바람직한 종교로 생각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1624~1691)는 인간 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 약자를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할 때,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국내 학계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1994년 영국 에섹스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함석헌의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이해〉(“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가 최초의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이다. 이어서 1998년 영국 쉐필드 대학교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유산에 관한 연구 : 20세기 한국 씨알의 소리와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An Examination of Life and Legacy of a Korean Quaker Ham Sok Hon: Voice of the People and Pioneer of Religious Pluralism in Korea”)라는 논문에서 역시 부분적으로 퀘이커 함석헌에 관한 연구를 다뤘다. 이 주제와 관련된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2004년 영국 버밍엄-선더랜드 대학교 정지석의 박사학위 논문〈퀘이커 평화증언,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국통일신학〉(Quaker Peace Testimony, Ham Sok Hon's Ideas of Peace and Korean Reunification Theology)이 있다. 국내에서는 퀘이커주의에 대한 1차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에 관한 연구가 그동안 부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지석의 논문은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은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를 비교 분석 했고, 박사학위 논문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총괄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선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사상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평가함으로써, 위에 언급한 논문들과의 차별성을 두고자 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미 역사에 미친 주요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이 연구는 현재 퀘이커주의에 관한 연구가 국내학계에 극도로 빈약한 형편임을 고려할 때 그 학문적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에 ‘조직기피증’ 성향의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할 것이다.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사회적 행동으로 표현하여야 한다.……삶의 일부만이 아닌 전체가 거룩하고, 온통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절대자의 사랑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분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퀘이커주의는 개신교 신앙에 속한다. 서구의 경우에 각 퀘이커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믿는 편이다. 현재 영국 퀘이커회는 세계교회연합회와 영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다. 1997년 영국교회연합회는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유니테리언회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삼위일체론에 대한 입장 밝히기를 꺼려하는 퀘이커회는 기꺼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994년을 기준으로 세계에는 약 303,858명의 퀘이커들이 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미국 103,379명)에 약 155,000명, 아프리카 대륙(케냐 104,500명)에 약 122,000명, 유럽(영국 17,934명)에 약 20,500명, 아시아 대륙(한국 10여 명)에 약 4,592명, 오세아니아에 약 1,766명 정도가 있다. 숫자 면에서는 퀘이커교가 단연 소수 종파임을 알 수 있다.
평등사상의 강조로 인해 목회자의 지도 없이 혼자서 성경공부나 기타 연구를 해야 하는 현대 퀘이커는 다수를 위한 종교보다는 소수 엘리트 종파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양적 성장과 질적 향상의 문제는 앞으로도 퀘이커들이 계속 고민해야 할 주제 중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한국 퀘이커는 1958년 처음 예배모임을 가진 이래 약 반세기가 다가오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약 1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한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 아니다. 아울러 아직 한국사회와 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함석헌에 대해서도 몇몇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의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기독교계와 사학계로부터 함석헌은 아직 냉대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퀘이커교는 영국이 청교도혁명(1640~1660)에 휩싸여 있었을 때 서서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지 폭스의 사상은 영국에서 종교친우회(즉 퀘이커회)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폭스는 영국에서 직공(weav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적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그의《일지》는 1694년 처음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책이 퀘이커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의《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내면의 빛(inner light, inspiration 혹은 holy spirit),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다.
퀘이커들은《성경》을 존재하게 한 절대자의 성령이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절대자가 몇 세기 전에 보여준《성경》의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서’ 절대자가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 내면의 빛(성령)이《성경》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집권세력으로부터 퀘이커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외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개신교가 성서의 권위를 중요시한 반면, 퀘이커는 성령의 권위를 역설했다. 이 내면의 빛의 신앙은《신약성경》〈요한복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참 빛은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인간에게 빛을 준다.” “나(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자는 누구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내면의 빛과 자라나는 종교

퀘이커주의에서 생명과 진리의 원천은 각 사람의 내면의 빛, 즉 마음속 그리스도다. 17세기 영국 퀘이커들은 종교가 설교나 교리, 의식에 의한 제도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므로, 폭스는 각 개인이 침묵예배를 통해서 절대자와 교감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내면의 빛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어떠한 형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이 내면의 빛은 각 개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단체모임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종교에는 영구불변한 종교와 늘 새롭게 변하는 종교가 있고 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것이 퀘이커주의다. 퀘이커들은 성경과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존중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고 책임적일 수 있는 능력이 각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은 성경에 씌어진 문자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그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초창기 퀘이커들이 정규 교육과 성직자 계급을 경시한 결과, 종종 신학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퀘이커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초창기 퀘이커들에게 대학 진학의 길이 제약된 것도 퀘이커들이 대학교에서 ‘퀘이커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보다는 ‘삶 속에서 퀘이커주의를 체현화’시키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퀘이커신학의 부재 탓이건 혹은 퀘이커주의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꺼려하는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누구도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퀘이커교의 공식대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각 퀘이커는 단지 자신이 이해하는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를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2) 성속이 하나

퀘이커들은 인간사의 모든 일에는 성속에 관계없이 절대자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퀘이커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전체성이다. 모든 것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어떤 것도 전체라는 영역에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퀘이커들에겐 성속의 구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그래서 사회문제는 종교문제와 동등하게 중요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시각 때문에 퀘이커들이 기도, 묵상, 혹은 절대자에게 예배할 때, 장황한 말이나 예식보다는 좀더 침묵에 중점을 둔다. 이 점이 퀘이커가, 비록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해 ‘성악설’이나 ‘원죄’론보다는 ‘성선설’이나 ‘낙관론’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기독교의 시각과 다른 면이다.
초창기 조지 폭스를 비롯한 영국 퀘이커들은 한 개인의 영적 통찰도 깊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퀘이커들의 증언(testimonies)은 타인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한다. 그래서 수감자들을 위한 교도소 시설의 개선, 정신병원시설 개선, 여성참정권, 노예제도반대, 노동자들을 위한 공정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정직한 상거래 확립(정찰제 소개), 교육 및 구호사업, 세계평화운동 등을 위해 퀘이커들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힘써 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퀘이커들은 남녀평등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예배뿐 아니라 공개연설, 교육, 그리고 사무관계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퀘이커 모임에서 양성 평등의 훈련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도력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사회의 소외된 계급인 여성과 중․하층계급의 주목을 받았다는 면에서 17세기 중반 영국 퀘이커교와 19세기 후반 한국 개신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함석헌이 유교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멸시받던 ‘평안도 상놈’ 출신이고 19세기 후반 상공업자가 많은 평안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가 훗날 퀘이커주의로부터 더욱 사상적 친근감을 갖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짐작된다.

(3) 종교, 과학, 탈민족, 탈국가

절대계뿐만 아니라 상대계 진리를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은, 역사를 통해 과학 발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접목에 주요 공헌을 해왔다. 특별히 영국의 경우 뛰어난 퀘이커 과학․기술자들이 영국사회에 준 영향과 공헌을 살펴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무쇠 교량을 설계 건축한 건축설계가 아브라함 다비(1678~1717)와 아브라함 다비 3세(1750 ~1789),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톤(1882~1944), 유전공학자 프란시스 겔톤(1822~1911), 화학자 존 달톤 (1766~1844), 소독약과 방부제를 발명한 조셉 리스터(1827~1912) 등이다.
이렇게 퀘이커 과학자들이 가진 종교적 신앙심은 그들에게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가치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851년으로부터 1900년 사이에 영국 퀘이커는 왕립과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는 확률이 퀘이커가 아닌 다른 학자들보다 50배나 더 많았다. 종교적 신비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결합한 퀘이커들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대체로 자유롭게 되었고, 그 대신 그 점에서 상생의 길을 발견한 것이 퀘이커들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은 타인들의 고난에 외부적 행동으로 참여함으로써 드러났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 퀘이커들은 피난민과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1847년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퀘이커들은 세계 최초로 무료식당운동을 전개했다. 더불어 미국의 청년, 흑인, 인디언, 새 이민자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퀘이커들의 범세계적 활동들이 세계주의자 함석헌에게 공감을 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퀘이커들을 절대평화주의자들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 각 퀘이커는 각자의 내면의 빛이나 통찰력에 따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총을 거부한 퀘이커들이 있는 반면, 애국심의 가치를 평화주의보다 앞세워 전쟁에 참여한 퀘이커들도 많았다. 또한 남북전쟁 중 많은 퀘이커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무력을 통해서라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론을 택하기도 했다.
사회정의 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퀘이커들은 사회정의, 빈곤 및 문맹퇴치, 반전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미 퀘이커회는 제 1․2차 세계대전에서 난민 및 그 유가족들을 도와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국제적 평화주의의 중요성을 행동으로서 고취시켰던 공헌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제 2차 대전 후에도 퀘이커들은 국제적 원조, 구제, 재건활동을 지원했다. 특별히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영․미 퀘이커 의료봉사단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 약 2만여 명의 한국전쟁 난민은 영․미 퀘이커의료봉사단의 도움 아래 군산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 1970년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1990년대는 영국 대학원에서 ‘함석헌 연구’를 위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필자에게 해 주었다.
퀘이커들은 실천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 상대적 사회현실과 절대적 가치인 하나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속한 구체적 한 시대와 영원의 세계, 일치와 다양성,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과 무제한적인 생명 등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영국 퀘이커교도 잉글 라이트는 그러한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퀘이커들의 침묵 예배는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구한말 대다수 그와 동시대인과는 다르게 여섯 살 때인 1907년 함석헌은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초등학교도 전통적인 서당보다는 장로교 계통의 소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대한제국이 쓰러져가는 20세기 여명에 함석헌이 누린 보기 드문 특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유․불․도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적 전통 속에서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이 동서사상과 종교를 접할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그런 함석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퀘이커교도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접하게 된 과정과 그 퀘이커주의가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퀘이커 함석헌이 한국기독교사에 어떤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함석헌은 대외적으로는 약육강식이 판치던 제국주의 시대에 국내적으로는 자국민을 상대로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20세기 한반도에 살았다. 찰스 틸리는 국가의 성립 자체를 조직범죄로 평가하고 국가행동양식을 조직범죄에 비교하기도 했다. 함석헌이 국가주의를 탈피하고자 노력하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취했던 것이 이러한 틸리의 역사사회학적 분석과 동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자국민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줄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상대로 착취와 폭력만을 일삼는다면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함석헌은 서구기독교가 로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 이념화되고 정치제도권과 결탁함으로써 일반 씨알과 생활을 함께 했던 예수정신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다고 믿었다. 그때부터 영과 운동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 세속권력을 위한 편의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고,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한낱 도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국법에 의하여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를 늙고 침체된 종교로 보았다. 1940년대 이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함석헌이 아마도 그래서 국가주의에 물들지 않고 국가종교가 아닌 비국교, 퀘이커교에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평가된다.
함석헌은 박정권하에서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민이라는 단어나, 주체보다는 객체로서의 의미가 강한 백성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했다. 민중이라는 단어 역시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는 한자라 역시 사용을 꺼려했고, 인민이라는 용어는 레드 콤플렉스가 극대화된 남한정권 아래서 ‘빨갱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서 역시 사용을 자제했다. 그래서 이런 이념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그는 기꺼이 ‘민’에 해당하는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생각한, ‘씨알’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함석헌이 생각한 씨알은 ‘순수․순박한 사람’, 노자가 이야기한 ‘다듬지 않은 사람’ 혹은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최초 퀘이커 조지 폭스가 17세기 영국 장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근엄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처럼, 함석헌도 20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평안도 지역에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는 3․1운동이라는 정치․사회변혁을 체험하고 경직된 장로교로부터 영적 만족을 못 느끼게 되는 것도 폭스의 영적 행로와 유사성이 있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조지 폭스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들 함석헌도 아무런 세속의 매개 없이 절대자와 직접 대면하려던 사람이었다.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17세기 영국교회의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서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 개념이 20세기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함석헌은 퀘이커주의 내면의 빛을 통해 내적 힘을 기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한국 민족이 그 의지를 기르고 일으켜 세우는 한 방법으로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도 폭스처럼 기성교회의 무조건적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탈권위적 성향의 퀘이커주의로부터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1) 퀘이커주의와의 첫 만남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후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이었다. 그때 그는 토마스 카알라일(1795 ~1881)의《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주의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때 그는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스의《일지》를 읽게 되었다. 이 때 함석헌은 퀘이커주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으나 깊은 흥미는 못 느꼈다. 그 후 함석헌이 유학차 일본에 있을 때(1923~1928) 그는 처음으로 우치무라 간조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1862~1933)와 함께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일본 퀘이커들로부터 별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함석헌이 니토베로부터 별 감동을 못 받은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니토베는 젊은 시절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 갔을 때 일본의 첫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니토베는 훗날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을 방문해 만주침략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강변했다. 아마 니토베의 이런 행동양식이 함석헌에게 별 감동을 못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에 대한 관심은 해방 후인 1947년까지 약 20년 동안 중단되었다. 1947년 함석헌은 북한에서 막 월남한 상태에서 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서구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듣게 되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듣고 놀랐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국가 폭력으로부터 세계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중요성을 실감했다. 더구나 북한에서 맞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소련군정하에서 겪은 야만적 폭력과 수감생활은 그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우쳐 주었다. 더구나 그 후 함석헌은 국가폭력의 절정인 6․25전쟁을 체험했다. 전쟁기간 중 여기저기 피난생활을 하며 그는 온 세계와 민족이 이념을 넘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6․25를 겪은 그는 “이제 일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요, 민족도 아니요, 계급도 아니다. 세계다”라고 탈민족주의, 세계주의를 선언한다.
이런 와중에 함석헌이 그 생애에 처음으로 서양 퀘이커교도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전북 군산에서였다. 1953년 6․25 직후 함석헌은 전북 군산병원(현재 원광대병원)에 한국의 피난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단으로 온 영․미 퀘이커교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20~30대의 젊은이들로 전후에 과부와 고아가 되어버린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1953년부터 5년 동안 자원봉사를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함석헌은 서구의 젊은 퀘이커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6․25 직후……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 나는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문헌이나 사상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의 ‘직접적 행동’ 때문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지 폭스가 주장한 ‘네 삶으로 말하라’는 퀘이커주의의 핵심이 그대로 함석헌에게 전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1958년 2월 15일은 한국 퀘이커 역사에서 기록될 날짜이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의 집에서 처음 한국인들을 위한 퀘이커 예배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윤구(1929~ )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으며 이어 1958년 7월 이윤구는 한국의 첫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1959년 8월부터는 세계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가 자신의 집을 퀘이커 예배모임 장소로 제공해 주고 참여했다.

(2) ‘죄인’ 함석헌

함석헌은 군산병원에서 서구 퀘이커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를 중시하는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아 나중에 퀘이커 회원이 된다. 물론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적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결국 그 자신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고백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로부터 ‘여성문제’로 여전히 비난받고 있는 상태였고, 보수적 한국교회의 교단으로부터는 격렬하게 배척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함석헌이 고독감에 친구를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대 후반, 그런 그에게 친구가 되고자 서구 퀘이커들이 나타났다. 훗날 함석헌은 무엇이 그를 서구 퀘이커들과 극도로 가깝게 만들었는지 술회했다.

내가 퀘이커주의를 공부한 후 퀘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갈 데가 없게 된 나는 퀘이커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다.
그 당시 함석헌은 외로운 ‘죄인’으로서의 어려운 심정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내가 죄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죄인 한 사람이 사회 전체로부터 어떻게 전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체험했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용서에 대한 함석헌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외로움은 커져 갔고, 그때 그가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죄인으로서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나를 볼 수 있다.

친구들도 나 용서 아니 하나 봐요. 그래서 맘을 걷어 잡을 수 없어요. 죽겠어요!……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 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줄, 붙들어줄 한 사람! 1960년 10월 9일.

함석헌의 이러한 고뇌에 찬 체험은 훗날 그에게 개인과 전체와의 관계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 그 중요성을 깨우치게 한다.




(3) 왜 퀘이커가 되었나?

서구 퀘이커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함석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퀘이커 주의와 극도로 가깝게 된 동기는 퀘이커 사상에 어떤 큰 동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퀘이커들이 다정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퀘이커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또한 사상적으로도 퀘이커주의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이 기존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에 집중된 것에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의 서구 퀘이커에 대한 관심은 그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 서구 퀘이커들도 흰 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을 신은 ‘신비한 동양의 현인’ 같은 함석헌의 모습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들은 아마도 6․25전쟁 후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나라에서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며 무더운 사막 한 가운데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주의가 얼마나 동양적인 종교인가를 재삼 강조한 바도 있다.

서양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동양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워드 브린톤이 [퀘이커주의를]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마도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동양 고전사상 사이에 많은 일치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함석헌과 서구의 퀘이커리들이 왜 그리도 급속한 ‘열애’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만하다.
1962년, ‘열애’에 불붙은 미국 퀘이커들은 필라델피아 펜들힐 퀘이커연구소로 10개월간 함석헌을 초대했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영국 퀘이커들도 그를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로 초대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90년 봄, 필자는 우드브룩에 3개월간 머물며 함석헌이 그곳에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았다. 1963년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함석헌은 영국 퀘이커들에게 한번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영어로 했는데 그는 그의 영어발음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때 한 영국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어강의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감동을 전했다’고 술회했다. 1990년에 우드부룩에서 필자가 만난 나이가 지긋한 한 영국퀘이커는 필자에게 “함석헌의 영어발음이 당신의 영어발음 보다 좋았었던 것 같던데요”라고 일침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펜들힐과 우드브룩에서 함석헌은 퀘이커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구미 퀘이커연구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그도 퀘이커들의 자율적 원칙에 깊이 매료되고 많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그는 특별하게 퀘이커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1953년「대선언」 이후 함석헌이 어떤 특정종교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직 기피증’은 퀘이커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계속 가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그는 태평양 퀘이커 연회 초청으로 미국 북캐롤라이나의 세계퀘이커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함석헌은 비로소 퀘이커회의의 공식회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 무엇이 '종파기피증'에 있었던 함석헌을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퀘이커들의 우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퀘이커주의는 신비파운동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이렇게 불확실하지만, 열린 태도로 함석헌은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었다. 퀘이커주의는 신비주의적 신앙체계를 지니고 있으나 신비주의가 간과하기 쉬운 사회․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므로 퀘이커주의를 ‘윤리적이고 상식적 신비주의’의 양상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퀘이커주의의 이러한 면에 함석헌은 매료되었던 것이다.

(4) 퀘이커와 씨알의 소리

그래서 1967년 함석헌은 정식으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65년 이래, 벌써 함석헌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 퀘이커들의 잡지〈프랜드 저널〉에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퀘이커들은 회원과 참석자들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1950년대 후반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을 처음 만났을 때 미첼이 함석헌을 놓고 한 증언이 그러한 퀘이커들의 태도를 반영해준다. 미첼은 함석헌을 처음 만난 후 그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당신은 퀘이커교도가 되기 전에 이미 퀘이커였습니다.” 미첼의 함석헌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비형식주의, 반교리주의, 검소함, 평등주의, 세계평화, 사회개혁적인 태도 등에 매료되었지만, 그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이전에 함석헌은 벌써 그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자격으로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둘러앉아, 그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 계시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 됐거나 못 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퀘이커에 대한 그의 위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가 퀘이커의 평등주의와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는 태도에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의 평등사상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과 다른 퀘이커들과의 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 모임의 평등사상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퀘이커주의는 1960년대 이후 함석헌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서구 퀘이커들은 그의 민주화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박정희의 잇단 긴급조치 발동과 장준하의 의문사와 맞물려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6년 함석헌이 다른 재야인사들과 함께 참여한 ‘3․1민주구국선언’은 긴급조치 아래서 하강기에 빠져 있던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권에 의해 구금당하고 있었을 때, 영국 퀘이커 주간지인〈프랜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함석헌 감금되다 ; -- 함석헌은 ‘3.1 구국선언’에 이어 다른 8명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함석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세계퀘이커협의회는 박대통령과 재영 한국대사에게 함석헌을 비롯한 다른 구금자들을 조속히 석방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이 호소문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비폭력주의와 그의 인도주의를 위한 전적인 헌신을 언급했다. 미국퀘이커협의회 또한 박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냄과 동시에, 포드대통령에게 서면을 보내 남한의 인권이 극악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박대통령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3․1민주구국선언’ 후 함석헌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빼앗기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계속해서〈프렌드〉지는 ‘3․1민주구국선언’ 이후 함석헌이 겪는 재판과정을 보도했다.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은 다른 17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서울에서 열린 공판에 회부되었다.……모든 피고인들은 징역을 선고받았고, 함석헌은 8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이 선언서를 통해서 서명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기하고, 국회를 복원시킬 것과, 사법부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이 선언서는 박정권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한국경제구조를 철저히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75살의 함석헌은 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죄로 8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계류상태에서,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서간을 보냈다. 다음 서간은 그의 외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내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1976년 8월 9일 새벽 4시……지난주 기도예배를 드리던 중 나는 오는 8월 11일 법정최후진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열려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를 기소한 검찰 측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입니다. 이번 일은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투쟁의 끝이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를 심판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오는 세상을 맞이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길고 긴 고난과 시험을 우리 씨알에게 허락하셨다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러 값진 고난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에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시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은 함석헌이 재판을 앞두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에게조차 얼마나 훈훈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아울러 내면의 빛을 강조하는 퀘이커주의를 통해서, 그가 외적 탄압을 넘어서 어떻게 내적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의 자유를 위한 서구 퀘이커들의 국제적 활동이 서구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여간 이 글을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함석헌은 집행유예로 형 집행정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민주화 운동을 위해 영․미 퀘이커들이 보여준 국제적 차원의 지지와 후원을 동아시아의 도가협회나 불교회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은 아마도 그래서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데 서구의 실질적 영향력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는 현대세계에 서 서구의 두드러진 영향력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지금 이 세계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해가는 게 뭘로 되는지 아십니까? …… 완전히 기독교적은 못되지만, 그래도 현실을 유지해가는 것은 서구적인 지성이에요.……서구적인 지성이란 것은 17세기 18세기 근대에 오면서 발달한 건데, 그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결국, 서구 퀘이커들의 지속적인 국제적 지지를 받아가며 함석헌은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과학적․이성적 종교

함석헌이 종교의 신비주의와 상식주의 요소를 모두다 중요시한 만큼 그는 퀘이커들의 ‘이성적 신앙’에 많은 공감을 가졌다. 함석헌은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함석헌에게서 합리적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광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학과 종교 가운데 하나만 택하는 상황이 오면 차라리 과학을 택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종교의 세계는 과학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상호보완적인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동서 문화의 차이와 역사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퀘이커들의 종교관과 그 자신의 신앙관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함석헌이 1955년 쓴, 기독교인에게서 기도의 의미와 하나님의 씨앗이 각 씨알 속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은 퀘이커들의 신앙관인 성속을 구별하지 않는 ‘온 삶 자체의 신성함’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기도하란 말은 말로 하란 말이 아니다. 말로 하는 기도는 기도의 가장 끄트머리, 가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기도는 몸으로 살림으로 하는 기도다.
나는 하나님은 아니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 자라 하나님에게까지 갈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다.

서구 퀘이커들이 고정된 교리보다는 다양하게 변해가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 것처럼, 함석헌 또한 그의 영적 행로를 통해서 경직된 교리나 형식주의보다는 유연하고 초월적 양상이 강한 내적 신앙을 중요시했다. 그가 퀘이커주의를 가까이 알기 전인 1953년,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리에 그저 복종하기보다는 다변적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바 있다.

동양의 맘이 본 생명의 근본 모양도 역(易) 아닙니까? 역이란 변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변합니다. 인생이 변하는 것이라면 불변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는 ‘영원의 미완성’이라 노래했고 그래서 고정된 교리를 갖지 않은 퀘이커주의와 근원적 공명을 느낀 것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함석헌은 현대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도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변화에 따르는 관념변화의 절박한 필요성을 태아와 그 어머니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 몸에서 오는 것으로 살지만, 생명이 자라서 어느 시기에 오면 거기가 도리어 죽는 곳이요 어서 거기를 탈출하여야 된다는 지혜가 솟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를 빠져나오면 일순간에 새 살림이 시작됩니다.

그의 이런 비유는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일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적용되지 않고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질식시키는 사슬과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준다.

(6) 보편적 역사의식과 평화주의

그의 말년인 1979년과 1985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퀘이커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추구해 온 비폭력 철학의 근원은 노장의 평화사상과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된다. 퀘이커주의는 두 가지 측면 즉,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봉사와 세계평화의 실현을 특별히 강조한다. 함석헌 또한 ‘역사적’인 것에 뜨거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사의식을 중요시했기에, 그는 퀘이커주의의 ‘내면의 빛’을 ‘속의 소리’ 즉 ‘양심의 소리’로 해석했고, 이 양심의 소리는 함석헌에게 곧 ‘하느님의 소리’이자 ‘역사의 소리’였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을 총체적이자 일체적 존재로 이해했는데 역사적 보편주의 입장에서〈신약성경〉을 예로 들어 자신의 역사관을 이야기 했다.

예수는 자기 말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이가 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보내신 이란 보통 말로 하면 역사요, 종교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 역사의 아들이라 하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예수를 가지고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고, 누가는 아담의 자손이라 하였고, 요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라 했다.

그는 또〈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맹, 노․장도 모두다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역설했다.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도 표현했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객관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는 종교적 열정에 맞먹는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데, 한 종교에 열렬히 외골수로 몰입하면서 그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절대적 표현과 상대적 표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함석헌의 종교적 신앙고백이 때로는 그가 속해 있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석헌에게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 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퀘이커들의 뚜렷하고 폭넓은 역사의식에 많은 공감대를 느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1959년에 쓴 함석헌의 글을 보면 그가 주장한 종교인의 역사의식과 사회참여론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그는 ‘속알 밝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퀘이커주의의 근본사상인 ‘내면의 빛’과 아주 흡사하다.

모든 종교 도덕은 어쩔 수 없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다시 말할 것 없다. 모든 것의 터는 낱 사람에 있다. 그러나 내 속알 밝힘이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 되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속알 밝힘은 반드시 그 어두워진 역사적 사회적 사회 살림 속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아무도 제 인격을 온전히 이루고 혼을 기르는데 역사적 사회를 떠나 외톨이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도로서 필자는 다른 여러 종교 또한 내 종교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의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나의 생각의 폭이 조금이라도 넓어져 간다고 느낀다. 인간정신은 획일적인 데서보다는 다양성 속에서 최고 가치를 발휘한다. 절대자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나 존재한다. 퀘이커들은 이것을 ‘신적인 어떤 요소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고 표현한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며 퀘이커교도인 폴 오스트리쳐는 “선한 것이건 사악한 것이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들과 여러 근본정신에 이미 큰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의 세계평화주의에 대한 갈망은 결국 민족주의를 배타적인 감정으로 평가하기에 이른다. 1930년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쓸 때의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그 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체험한 함석헌은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자로서 성숙된 세계평화의 길을 왜 인류가 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역설한다.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인간이 아직 어린 시절 한때 우리를 이끄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정도를 지나쳐 자랐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것이 죄악이다. 청산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제 민족주의 시대가 지나갔음으로 인류가 유아기 시절의 민족관을 버리고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를 포용하는 세계와 우주 전체관을 가져야 할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전체는 곧 함석헌에게 운명공동체인 인류사회 전체이자 절대자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7) 미래의 종교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새로운 종교는 아니지만 새 종교의 탄생을 위해 태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특별히 퀘이커들의 단체적인 명상을 그는 인류의 새 종교를 위한 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 퀘이커들의 명상과 동양의 명상인 참선이 어떻게 다른가를 지적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이 브린톤의《퀘이커 300년》을 읽었을 때 그는 퀘이커들의 단체 및 공동체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퀘이커 300년》에서 브린톤이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이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단체적인 것임을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며,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다.

내가《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 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퀘이커들이 제기한 공동체 정신은 계급․인종․종교․국가의 기원에 무관하게 사람들이 팀워크로 상호 협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퀘이커 신비주의는 개인에 머물지 않는 단체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것이다.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퀘이커주의는 함석헌 생애 후반기인 1960년대 이후 그의 종교․사상관 그리고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의 무소속 구도자와 종교적 ‘이단자’로서 함석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서구의 퀘이커들은 그에게 심적․물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국 그는 퀘이커로서 삶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항시 추구하는 ‘영원한 미완성’의 구도자였다고 느껴진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죽는 날까지 민족․국가 그리고 종교의 벽을 극복하고자 했던 함석헌. 그러면서도 결국 자신은 한국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인’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의 사람.
그렇다. 그는 철저한 모순의 사람이었다. 성속, 민족과 세계, 과학과 종교, 한 종교와 여러 종교,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갈망하고 추구한 그는 모순의 사람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불완전한 위선자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완전과 지고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철저히 모순된 존재다. 그리고 이 모순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희망이 있다. 완전한 절대자와 합일을 끝없이 갈망하고 추구하는 불완전한 상대자가 인간이고,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철저한 자기모순의 인간이었다. 어느 종교적 종파나 정당에도 가입하기를 꺼려했음에도 퀘이커교의 회원이 되고, 더러운 정치판에 말로 할 수 없는 환멸과 비애를 느끼면서도 장준하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함석헌! 그런 속 다르고 겉 다른 모순의 삶을 살면서도 그는 진리의 본질은 외양적 종교교리나 정치강령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양심 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가 살던 20세기 한반도는 국가주의라는 가치가 전지전능한 가치였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한 존재의 생사를 너끈히 위협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 속에서 작은 한 개인과 거대한 국가의 대립이라는 개념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절대적 국가권력에 대해 한 개인이 스스로 세워놓은 이상적 원칙에 따라 저항한다는 것은, 곧 그 개인과 가족의 필연적 희생을 의미했다.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한 함석헌은 그래서 ‘바보새’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 편협성과 정치․사회적 압제가 팽배했던 지극히 제한된 한국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이 최소한의 조직을 갖춘 퀘이커교의 교도가 된 것은 그런 열악한 외부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최소한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의 위치와 의미를 필자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퀘이커 함석헌은 ‘내면의 빛’을 추구하며 혼란의 시대 ‘한국의 양심’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난세에 종교인으로서 사회참여를 통해 그는 한국기독교의 영성을 더욱 심화시켰고,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펼쳐보였던 것이다. 둘째, 이제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양적인 규모에 걸맞는 질적인 성숙함을 한국기독교계가 갖추어야만 한다는 본을,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보여주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셋째,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목회자에 대한 의존도를 지양하면서, 평신도가 스스로 이끄는 신앙생활을 지향하는 데,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하나님이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한 것처럼, 그는 퀘이커로서 역사의 ‘지금 여기에서’ 일할 것을 강조했고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늘나라였던 것이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비판은 곧 그의 종교인으로서 신앙고백․양심선언이자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공의의 추구였다. 전체적인 것만이 거룩한 것으로 믿었던 그는 씨알과 더불어 기꺼이 고난의 길을 택했다.
퀘이커주의는 함석헌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타종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을 더욱 일깨워 주었다. 아마도 진리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정립뿐만 아니라 인종, 성, 문화, 국가, 이념, 생각, 얼굴, 모든 것이 다른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에 있지 않을까.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발과 별,’ 즉 현실과 이상의 조화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이상도 현실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하고, 원대한 이상이 없는 근시안적인 현실은 인간 정신을 메마르게 할 뿐이다.
한국기독교인의 종교관도 외골수적이거나 편집광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폭넓은 보편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의 영향 등으로 경제적 단위는 물론이고 문화․정신적으로 더욱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 문화간의 긴밀한 접촉은 불가피하다. 세계 공동체의 사회구조 또한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 점점 더 보편적으로 변화 되어간다. 자기민족 중심주의는 이제 인류가 청산해야 할 과제다. 이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한 민족의 미래는 인종․문화․종교적 다양성과 여러 집단 간의 상호존중에 있다. 내가 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의 다름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곧 독선이고 아집일 뿐이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는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다른 종교나 이념에 대해 관용을 갖고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편식이 몸의 건강에 안 좋듯이 균형을 잃은 편향된 사상이나 종파심은 인류의 건강한 정신발달에 안 좋다. 함석헌이 그랬듯이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내가 가진 이념이나 신앙이 최고 불변의 가치이고 생명보다 소중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그런 관점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고서는 인류가 영원히 흑백논리와 독선, 그리고 끝없는 죽음의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타인, 타민족, 타국가의 신앙과 이념을 서로가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하나님 나라는 인류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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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전집10 : 달라지는 世界의 한길 위에서》,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11 : 두려워 말고 외치라》, 한길사, 1983.
함석헌,《전집12 : 6천만 民族 앞에 부르짖는 말씀》, 한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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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ght Mary Ingle, “What is a Quaker Meeting?,” Friends Quarterly, London, 1967 July.


(투고․접수일 : 2005년 7월 25일 / 심사완료일 : 2005년 8월 1일)


국문초록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대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월간지〈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스캔들’ 등으로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인간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의 약자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하면서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했다.
이 글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역사에 미친 주요 공헌과 영향을 분석했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의 ‘조직기피증’ 성향에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했다.

주제어 : 내면의 빛, 기독교, 종교, 성속, 평등, 과학, 민족과 국가, 퀘이커, 역사, 세계평화.


Abstract

The Position of Quakerism and Ham Sok-H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Kim Sung-Soo

Ham Sok Hon had a close connection with the Western Quakers from 1960 until he died in 1989. During this period he was actively engag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vigorously protesting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At the height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1970, Ham also established a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People. What turned Ham, the downhearted man of the end of 1950s who was involved in a scandal, into a relentless freedom fighter?
From at least the 1960s onward, Quakerism was always behind Ham whenever he was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George Fox, early leader of the Quaker movement, also emphasized the equality of men and women, and respect for each individual, not only under the law but also before God. Fox said that religion means looking after the social underdog and standing by him. Ham, always a man of doing rather than a man of being, ended his life as a Quaker. I will therefore examine and evaluate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Ham and Quakerism.
In this paper, firstly I will look into the philosophical aspect of Quakerism as seen through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In particular, I will closely examine the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Quakerism to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Secondly, I will analyze how and why Ham became interested in Quakerism, and how his thinking was influenced by Quakerism. By doing so, I will look into what it meant to be a Quaker to Ham as a Korean. In addition, I will also examine what kind of role Ham fulfilled as a Quaker in relation to Korean Christianity.

Key-words : Inner Light, Christianity, Religion, Secred and Secular, Equality, Science, Nation and State, Quaker, History, and the Worl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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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Korean Qua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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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istory of Korean Quakers

By Bo-Kyom Jin

After the Korean War, some British and American Quakers came to
Korea for rehabilitation programs. After the overseas workers had left Korea, some of the Korean assistants of the programs held the first
Quaker Meeting in 1958 and some American Friends who worked at the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n Seoul supported
them. Meeting began with silent worship for thirty minutes, and
about an hour was given for study and fellowship.

FWCC encouraged Seoul Friends to build relationship with Japan
Yearly Meeting or with Honolulu MM and two of the Koreans
became Quakers whose membership belonged to Honolulu Meeting
in 1958. Historically, Japan and Korea have had a difficult
relationship since Korea was colonized and devastated by Japan. So it
was difficult for us to intervisit for some time. The same year, AFSC
energetically tried to bring some Koreans to the seminars and work
camps in Japan and Korean Friends began to participate in the
program. As the result of their visits, correspondence with Japanese
Friends began taking place. In 1961, FWCC began sponsoring some
visitors and Friends in residence in Korea and Seoul Friends
requested a direct and official relationship with FWCC. The Meeting
then had about thirty regular attenders and study programs were actively carried out and FWCC helped strengthen its links with
overseas Friends.

In 1964, with the help of overseas Friends, a meeting place for the
Seoul Friends was purchased after having had to change places of
worship ten times in 6 years.“Seoul Friends Meeting Monthly
Newsletter” was published in 1966. The Meeting decided to take up
the leper village in Tandong as its main service project. The visiting
Friends from Japan, USA, Australia and England, have strengthened
us very much.
Every Sunday, Bible study was led by Sok Hon Ham, who was a
widely recognized spiritual leader in Korea. In 1967, Seoul Meeting
became a Monthly Meeting under the care of the FWCC. The visit of
the Chairperson of FWCC, Douglas Steere and his wife Dorothy in
1967 and his public lecture at the YMCA with about one hundred
people in the audience meant a great deal in Quaker outreach. At the
same year, Sok Hon Ham left Korea for the USA to attend the
Greensboro Gathering and the tenth triennial meeting of FWCC.
After the meeting, he attended the Pacific Yearly Meeting, studied at
Pendle Hill and visited many Friends Meetings and Friends i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International Quaker contacts such as work
camps, travel and study abroad(at Pendle Hill or at Woodbrooke in
England), participation in Quaker conferences, an inter-visitation
program with Japanese Quakers, and numerous visiting friends
contributed greatly to nurturing Korean Friends during the 1970s and
1980s and are still an enriching experience to us.

In 1980, SMM was active having a study group, outreach activities
and raised a voice of conscience under the dictatorship of military
government. Under the leadership of Sok Hon Ham, Seoul MM
flourished with members and attenders at its height numbering close
to fifty. In 1988, a second floor was added to the meetinghouse to
meet the demand of the growing memberships. In 1990s, Seoul MM
went through a dark period after the demise of Sok Hon Ham.
Fortunately, since 2000, Seoul MM has revived some of its vitality.

2. State of the Meeting

Over the past year our number of members has decreased from 20 to
10. Some of the attenders are Americans who are married to Koreans In the past few years, a worshipping group began to meet regularly
and more than 10 F/friends continues to gather every week in Daejon
(a city 2 hours far from Seoul) They have established a vibrant,
worshipping and studying community. We used to have a retreat
annually but there were no retreats in 2007/8 because of the absence
of initiatives or the decrease of members. Vocal ministries are rare in
Seoul MM and sometimes I feel eager for vocal ministries in my
Meeting. In addition, the financial situation of SMM has gotten worse
mainly as monthly donations decreased.

Since 2007, AVP programs have been introduced by a Korean Friend
(Jonghee Lee) and co-facilitated by her and German Friends
(including Ute Caspers). Most of the participants were NGO activists.
A Direct Education workshop facilitated by George Leakey from the
USA was also held in Seoul last year.
We are planning a Korea version of Faith and Practice. I know you
have made your own Faith and Practice and hope that Australian
Friends will give some useful advice to us.

Last year we had quarterly gatherings named Family gatherings. The
intention is for us to invite our family members who are not Quakers
and sing together and share food and fellowship.

We have an annual gathering (business meeting and fellowship)

3. Committee activities

We have Peace Service committee, Learning committee, Outreach
committee, library and website committee, Facilities care committee,
Finance committee. Our committees are not fully functioning partly
due to shortage of manpower but we are thankful that we could
maintain this Meeting and carried out some service activities.
From the beginning of the Korean Quaker history, service work was
emphasized. As a first step, medicines were supplied to two
Tuberculosis patients beginning in 1961 for two years. Work camps
for orphans and the blind, In 1964, a house for leper patients was
built. Emergency food was supplied in 1960s. In 2003, the Meeting
participated in an anti Iraq War demonstration and actively raised
funds to help anti Iraq War activists’ organizations. The meeting now
supports Foreign Migrant Workers Center , Ssi-Al Women’s Center,
and the Anti-Mine Association. Since the Korean War, landmines that were buried during the war have become a threat to civilians but
those victims haven’t been cared enough by Korean government.
Our program consists of Business Meeting every 1st Sunday; George
Fox Journal reading 2nd Sunday; Pendle Hill pamphlet discussion
group every 3rd Sunday; Bible reading group every 4th Sunday.

4. Children in the Meeting

Child care issues emerged again during the 2008 annual meeting. At
present, a few children attend the Meeting irregularly and SMM is
going to assign F/fs to take care of them during the worship in case
children come.

5. International Contacts

Sister Meetings : 
Canberra/Australia, Kapiti/ New Zealand, JYM

Hosted 2005 AWPS Section Gathering. 

Korean Friends have
attended international Friends gatherings including Bhopal, India
gathering and Auckland and Dublin Triennials.

Epilogue :In December 2008, Seoul Friends had their annual meeting
to review the past year and to think about and plan 2009. 
We are thankful that we could maintain this tiny meeting and that our
worshiping group is getting more active.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1111 서울모임 수양회 우리의 결의 선언문


 서울퀘이커모임에서 11월5~6일에 수양회(retreat)를 가졌는데요, 그 수련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이 있었음을 호주친우들에게 전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고요. 서울모임의 친우들이 모두 이 입장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고요, 적어도 수양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이런 입장을 공유하셨다고 하네요.

-------------------
우리의 결의 선언문


어제와 오늘 우리는, 한국전쟁 직후 혼란과 갈등과 절망의 시기에 평화와 봉사의 씨앗으로 들어온 미국·영국 친우봉사단을 비롯하여 세계친우들이 실천한 평화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세계친우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평화 활동을 다시 공부하면서 우리자신을 성찰해 보았습니다.


또한,주민들의 대다수가 원치않는 부끄럽고도 강제적인 해군기지 건설로 평화의 섬 제주도 강정마을이 공권력의 힘으로 파괴되고 있는 현장의 안타까운 분노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분단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유감스런 현실입니다.

우리의 평화 증언을 오늘에 다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마태복음 5장 9절)이 되어야 할 것임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의지를 밝힙니다.


1. 우리는 모든 폭력을 거부하고 펑화를 사랑합니다.
1. 나 자신의 평화가 이웃과의 평화의 기초임을 믿습니다.
1. 해군기지 건설은 지금 당장 중단돼야 합니다.
1. 휴전 협정은 종전 및 평화 협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1.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세계평화임을 확신합니다.

2011년 11월 6일


서울모임 수련회에 참가자 일동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 1303 나장수 제안,철학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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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장수   제안,철학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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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지난주(2월24일) 모임이후 마음이 무척 불편하였습니다.
사안표명에 무례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때문 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심정은 안 좋은 방향으로의 속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으로는 안 되게끔 빠르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사안에 차근히 의견개진을 하였어야 하였고, 000 선생님의 열정적인 참여와, 이끌어 주시는 점에 경의와 감사함은, 그 이전에 이미 제 마음속에 간직되어있음을 밝혀드리며, 이 자리를 빌어서 사죄드립니다.

저는 모임 집에 당도하여 예배하기 전에는 본 모임 집을 퀘이커 성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소통의 시간공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담소/대화/인사를 생략하는 면을, 무례나 무관심으로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여 제가 염려스러워서 드리는 말씀인데 내면에 외국 특히 유럽 문화 등이 가슴속 은연중에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면 재고해 주시기 희망합니다.

그들 앞이거나 그들을 향함에는 성의나 존중에 의미를 가짐은 좋으나 주변인을 무시하고 있으면서 아무런 깨달음을 가져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점은 없는지 성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준이 안 서신다면 혹 함 선생님을 생각함과 그 이외인 에게는 현격한 차이를 가지는 점이, 주변인에게는 기본적인 예의범절 이하로 함부로 대함의 자연스러움은 없는지 생각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함 선생님은 본인을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셔서 본인 가슴에 자리하고 계신지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생각하시는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으시어, 어떠한 고난에도 진리를 탐하시고 투쟁하신 귀착점이, 님이 함부로 여기는 보잘것없고 무시하고 간과함의 무지를 깨치고자 하시는 점은 없는지 고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이 현실을 보는 느낌은 박정희 대통령당시보다 지금의 소위 나라의 머슴선봉에서 머슴역할을 맡기고, 맡으려 하는 인물을 보면, 도대체가 이렇게 타락의 속도가 빠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나라가 제 나라인데 나라에다 저축 할 생각은 안하고 개인 사리사욕을 저렇게 챙길 수 있을까? 저렇게 에덴동산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해야하나? 저 스스로 오물로 만들어져서 에덴동산에 투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모임 등 이라도 저 오물로 타락하는 이들이 존재함 속에서 얼마나 값이 있는 보석인지 자각을 넘어, 진 죽탕인 것처럼 인 우리역사 안에 아름다운 순항의 선봉인 우리가 “인류구원방안 철학토론회”를 하자는 제안을 다시 합니다.

수,당에도 밀리지 않던 웅혼한 기상이 있었습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알고 궁극의 순수한 가치관을 믿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대륙을 누비며 온정을 베푼 인류가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아끼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가족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아침을 깨우는 민족 동방이라 불렀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희망의 활짝 핀 꽃을 보면서....”

2013. 03. 03. 나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