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7

만다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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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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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 만다라(Vajradhatu Mandala)가 그려져 있는 티베트 불교의 탕카
힌두교의 스리 얀트라(Sri Yantra)

만다라(산스크리트어मण्डल 만달라, 曼茶羅, 曼陀羅, 영어Mandala)는 다양한 개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만다라"라는 낱말 자체는 "(圓 · circle)"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만달라(मण्डल Maṇḍala)를 음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만다라는 원래는 힌두교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에서도 사용된다. 주로, 힌두교의 밀교(탄트리즘 · Tantrism)와 불교의 밀교(금강승 · Vajrayana)의 종교적 수행 시에 수행을 보조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정해진 양식 또는 규범에 따라 그려진 도형을 가리킨다. 힌두교의 얀트라(यन्त्र · Yantra)도 이러한 도형에 해당하는데 만다라의 일종이라 생각할 수 있다. 보통 "얀트라"라는 낱말은 만다라와는 구분하여 힌두교의 문맥에서만 사용되는데, 반면 "만다라"라는 낱말은 힌두교와 불교 모두에서 사용된다. 힌두교와 불교의 전통에서, 만다라의 기본 형태는 사각형의 중심에 이 있으며 사각형의 각 변의 중앙에 한 개의 이 있는 형태로, 이 때 각 은 주로 영어의 (T)자 모양을 한다.[1][2] (오른쪽에 있는 불교의 금강계 만다라와 힌두교의 스리 얀트라 그림을 참조하시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의 밀교 경전에서, 당나라의 현장(玄奘: 602~664) 이전의 번역인 구역(舊譯)에서는 만다라(曼茶羅)를 (壇)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3] 반면 당나라 현장 이후의 번역인 신역(新譯)에서는 취집(聚集)이라고 한역하였다.[3] 한편, 만다라를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 번역하기도 한다.[4]

한편, 불교에서, 만다라 꽃은 연화(蓮花: 연꽃)를 가리키며 불상(佛像) 앞에 놓인 제단을 만다라라고도 한다. 금강승(바즈라야나) 계열의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래그림(sandpainting)을 사용하여 만다라를 제작하는 방법도 개발하였다. 이들을 모래 만다라(Sand-mandala)라고 한다.

불교의 만다라[편집]

불교의 밀교에서는 

사각형 또는 원형의 흙으로 만든 단(壇)을 만들어 여기에 불상과 보살상을 둔 후 수행 의식을 행하고 공양을 올렸다.[3] 이 (壇)을 만다라라고 하였는데, 또한 여러 부처와 보살이 충만되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취집(聚集)이라고도 하였다.[3]

산스크리트어 "만달라(मण्डल Maṇḍala)"는 

원래는 본질을 뜻하는 만달(Maṇḍal)과 소유를 뜻하는 라(la)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낱말로, "본질의 것", "본질을 소유한 것", 또는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3][4] 

이런 의미에서는, 불교의 본질은 보리(菩提), 즉 깨달음이기 때문에 만다라는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境地)를 상징화하여 신성(神聖)한 단(壇)이라는 물리적 · 입체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3] 

중국 · 티베트 등의 불교 중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을 가리켜 만다라고도 한다.[3] 이러한 그림으로서의 만다라도, 다만 도형화하여 평면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화하여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입체적인 단(壇)과 본질적인 의미가 동일하다. 이런 면에서, 만다라는 수행자가 명상을 통하여 우주의 에센스("불성")와 합일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깨달음의 안내도라는 의미가 있다.

불교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만다라를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4] 윤원구족은 낱낱의 살(輻)이 바퀴축(轂)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圓輪)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4]

태장계 만다라[편집]

태장계 만다라: 가운데에 여덟 개의 연꽃 잎이 있는 원이 있는데 이 원의 중심부에 대일여래가 있으며 각 연꽃 잎에도 한 명의 부처 또는 보살이 있다

대일경(大日經)》은 7세기 후반에 인도 중부에서 성립되었는데, 여러 부처와 보살을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집대성하여 만다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만다라를 태장계 만다라(胎藏界曼茶羅 · Garbhadhatu mandala)라고 하였다.[3] 태장계 만다라를 사용하는 태장계 밀교는 이론적으로 《화엄경(華嚴經)》에 나타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교의를 받아들여 현실의 사상(事象)에서 곧바로 우주의 진실상(眞實相)을 직관(直觀)할 것을 주장한다.[3]

금강계 만다라[편집]

대일경(大日經)》이 성립된 때로부터 얼마 후에 인도 남부에서 성립되었다고 하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은 유가행파의 교의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금강계 만다라(金剛界曼茶羅 · Vajradhatu Mandala)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3] 금강계 만다라를 사용하는 밀교를 금강계 밀교라고도 한다.

갤러리[편집]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구카이의 종예종지원에 관한 연구 박균섭 - 종지원대학(種智院大学)

구카이의 종예종지원에 관한 연구
구카이의 종예종지원에 관한 연구
한국일본교육학연구
2008, vol.13, no.1, pp. 151-164 (14 pages)
발행기관 : 한국일본교육학회

연구분야 : 사회과학 > 교육학
박균섭 1
1성균관대학교

초록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개조 구카이(空海, 774~835)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개조 사이쵸(最澄, 767~822)와 함께, 헤이안불교의 좌표를 뚜렷하게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구카이가 804년에 견당사를 따라 당의 장안에 들어가 공부한 후, 806년에 귀국하면서 들여온 것은 진언밀교(眞言密敎)를 포함한 종합적인 문화체계였다. 

구카이는 「삼교지귀(三教指帰)」와 「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荼羅十住心論)」을 저술하여 유교, 도교, 불교에 대한 비교사상론을 보여주는 한편, 열 가지 마음의 존재 양상(十住心)을 단계적으로 풀이하면서 진언밀교의 교의가 최고의 단계이자 구극의 진실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구카이는 학교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토에 사립학교 종예종지원(綜芸種智院)을 설립하였다(828. 12. 15). 당시의 교육은,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하는 등 일부에게만 문호를 개방했으나, 종예종지원은 서민의 자제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획기적인 학교였다. 종예종지원은 학교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유교, 불교, 도교 등 모든 사상과 학예를 망라하는 종합적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예종지원은 구카이가 입적한 후 10년 정도 지속되다가 폐교되었다(845). 

현재는 교토의 종지원대학(種智院大学)이 종예종지원의 교육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진언종의 개조 구카이의 학교교육에 관한 구상과 실천에도 드러난 바와 같이, 진언밀교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큰 지혜와 구극의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그 세속적 가치가 침략과 전쟁의 프로젝트로 구축되었을 때, 진언밀교 역시 큰 지혜나 구극의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일본의 영광과 번영을 기원하는 주술체계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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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海(弘法大師:774~835)は、平安時代初期の僧侶として、日本真言宗の開祖である。日本天台宗の開祖である最澄(伝教大師:767~822)とともに、奈良仏教から平安仏教へと日本仏教が転換していく流れに位置している。空海は、儒教、道教、仏教の比較思想論でもある「三教指帰」を通して、あらゆる思想を網羅した理解の地平を力說した。そして「秘密曼荼羅十住心論」を通して、真言密教の基盤を磐石化するとともに、その存続のために尽力した。空海は、遣唐使の留学僧として唐の長安に入って(804年)、惠果の下で佛敎を勉强した後、日本に真言密教をもたらした(806年)。その時、空海が請来したのは眞言密教を含めた總合的な文化体系であった。828年12月15日には、京都の東寺の東鄰に私立の學校である綜芸種智院を開設した。その時の教育は、貴族の子弟を対象にするなど、一部の人々にしか門戸を開いていなかったが、綜芸種智院は庶民にも教育の門戸を開いた画期的な学校であった。綜芸種智院の名前に表されるように、この學校は儒教、仏教、道教などあらゆる思想と学芸を網羅する総合的な教育機関でもある。現在は、京都の種智院大学が綜芸種智院の敎育精神を受け継いでいる。空海は、江戶時代にも明治時代にも、外来の不純な思想(眞言密敎)を日本に持ち込んだとして、そして廃仏毀釈という反佛敎運動によって、批判されたこともある。しかし、空海は、1930年代の後半に入ってから、外来の思想(眞言密敎)を日本流に紹介し、日本文化の形成に寄與した人物として評価されるようになった。中國と日本の戦争が開始しており、国民が団結して戦争に臨む必要があったのであり、そのために空海が日本の偉大な人物として再評価されたのである。


키워드
구카이, 사이쵸, 진언밀교, 비교사상론, 종예종지원
空海, 最澄, 真言密教, 比較思想論, 綜芸種智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