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 최성무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⑪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 아주경제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입력 : 2021-03-31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⑪ 최성무<上>

최성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2년마다 하나씩 개척한 교회 7개를 영주권이 없는 목사들에게 넘겨줬다. 호주에서는 암암리에 교회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넘겨주면서 다석 사상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 목회하라고 하면 솔직히 말하건대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는 것이죠. 그 외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나는 호주에서 풀타임 직업으로 청소를 하면서 1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헌금도 제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교회 식구들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 맨 처음 부목사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호주인인 제프 목사는 용접공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용접 일을 하고 주말에 목회하는 거예요. 변호사 의사를 하며 목회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례비를 받게 되면 장로와 신도 눈치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목회를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죠. 예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사비(私費)를 쓰며 목회했잖아요. 바울이 텐트 메이커 아닙니까. 텐트 치는 업자였어요.”



평창에 있는 다석 묘를 참배하는 최성무 목사

-목사를 하다 정말 굶어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걸고 다석의 가르침을 좇아 식색(食色)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목회자야말로 돈, 여자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결국 두 가지 때문에 타락해요. 여자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지요. 그게 쉽게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신도가 목사한테 가정 방문해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럴 때 혼자 가면 절대 안 돼요. 안수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잖아요. 유방암에 걸렸으면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유혹의 현장이 많아요. 그래서 식색을 벗어날 각오 없이는 타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왜 사례비를 안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그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회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이 저에게 구원을 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이 책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보다 잠들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한국에서 읽다가 책이 너무 좋아 호주로 들고 갔고 호주에서 나올 때도 갖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325회 연재한 글을 다석사상 전집 5권으로 묶어냈다. 1995년 초판이 나왔다. 그가 선물로 받은 것은 1권이다. 최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꿔놓은 책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책입니다. 일반 지식 서적은 일단 내용을 알게 되면, 계속 보기가 지겨워지지요. 그에 반해 진리 서적은 보면 볼수록 새롭습니다. 성경도 100독을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자다가 깨서 읽고 춤을 춘 적도 많아요. 나도 모르게 아주 흥겨워서 그랬던 것이죠.”
최 목사는 춘천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지방신문에 대문짝만 한 기사로 난 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야간)에 진학했다.
그는 교사 지망생들이 필수로 치르는 순위고사 1회 출신이다. 용산고교로 발령이 나서 국사 세계사 강의를 했다.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10년 정도 교사를 해보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출판업에 손을 댔으나 잘 안돼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5년간 청소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육체노동이 힘겨워져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교보문고에 근무하던 수강생이 그에게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학원강사를 5년 만에 접고 다시 호주 행을 했다. 별 기술 없이도 가능한 클리너로 생활전선에 있다가 신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목회자로서의 지표는 언제나 다석 사상이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까?

“오리지널 예수의 사상이죠. 지금 제도권 기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잖아요. 성경은 오류의 집합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 어떤 신학자와도 토론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란 책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가지고 제도권 기독교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 책 속에는 예수의 오리지널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야말로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가서 기독교를 보급한 분이지만 나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난 선각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실제 예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참모습과 신약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그것을 증명한 것이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아닙니까. 도마복음과 성경은 180도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잘 알잖아요. 나도 목회를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고, 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밥 걱정하는 직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랑 같지만 나도 신학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전하려고 <바보 천치>라고 하는 월간지를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한달에 150만 원씩 들어가는데 청소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선각자들을 이 월간지에서 소개했죠. 다석 류영모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나는 <바보 천치>를 내다 이단 목사라는 낙인이 찍히고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죠.”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대담하는 최성무 목사(왼쪽)와 황 고문(오른쪽)[사진=윤영은 인턴기자]

-평신도 때부터 시작해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습니까?

”나도 기독교를 50년 가까이 믿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제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석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벗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한 발짝 더 진화했다고 볼 수있는 것이죠.”

-<다석 전기>와 최 목사가 100독한 그 책을 저술한 박영호 선생을 자주 만났을 텐데요. 최 목사는 “미천한 농사꾼이 남긴 기록을 통해 다석의 사상이 나에게로 왔다”고 말했더군요.

“박영호 선생은 함석헌의 천안 농장에서 똥 수레를 끌던 분이죠. 함 선생의 제자였다가 다석을 만나게 됐죠. 다석이 YMCA에서 35년간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그중에는 함석헌 김흥호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일하게 박영호 선생님이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 증서(졸업장)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몰라요. 진리의 세계에서는 학력이 상관없습니다. 함 선생님을 통해 강연을 듣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오르고, YMCA에서 다석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거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강의를 듣고 전부 메모하고…. 박영호 선생이 천재셔요. 

다석 전기를 쓸 때 제가 가봤어요. 골방에 앉아서 책을 쓰는데 침대가 책상이더라고요. 책을 쓰려면 참고서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권도 없어요. 머릿속에 생각으로 쭉 쓰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박영호 선생이 기억하고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제자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석 선생에 대해 여러 제자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리지널하게 다석 사상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박영호 선생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 낱말 사전을 금년 말에 펴낼 예정인데 그 책이 나오면 다석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석이 지은 한글 시조가 이천수가 넘는데 한 수를 공부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떤 것은 한 달 동안 풀이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돼요.”

-다석이 살아계실 때 박영호 선생이 물어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를 해석하는 겁니까?

“그분이 배우고 메모한 것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다석도 박영호라는 제자를 만남으로써 자기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것이 상생(相生)이에요. 서로 낳는 것이죠. 다석에 의해 박영호가 났다면, 박영호에 의해 다석도 난 것이에요. 박영호를 통해 다석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박영호에 의해서 제자들이 나는 것이고요. 사과 하나에서 큰 과수원을 볼 수 있듯이 박영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의 무한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박영호 선생도 1934년 생으로 올해 87세입니다. 그 분이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살아 계실 동안 사상을 전수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의도 다석연구회 책임자로 있지만, 정말 부족하기 한이 없어요. 과연 박영호 선생이 나한테, 다석 선생이 맡겼던 그런 것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 스스로 자신도 없고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과연 진정한 제자 하나를 두고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나도 분발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다석 전기>에 ‘함석헌이 전기를 썼어야 하는데 함이 못 쓰게 되어 내가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지식의 함량으로는 함석헌 선생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다석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에요. 삶에서 식색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함석헌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일일일식 하셨지요, 식(食)에서는 극기를 했지만 여자 문제에서 상당히 안 좋은 게 드러났어요. 다석 선생한테 공개적인 장소에서 꾸중도 들었죠. 함석헌 선생은 색(色) 문제, 여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통을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한국 목회자들이 많습니까?

“호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학생 48명 중에 한국 목사와 전도사들이 거의 90%였어요. 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호주 신학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평신도로서 신학공부한 것은 저 혼자였을 거예요. 함께 공부하면서 ‘목회자들이 저래서야 목회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목사 안수도 안 받으려고 몇 번 사양했어요. 하지만 외국 대학이고 총장이 끌고 가는 바람에 한국인으로서는 1호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시험 때면 커닝도 하는데 그건 아니죠. 지금 한국 목회 현장은 이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거예요.”

-다석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교회 강론과 '바보 천지'라는 월간지에 쓴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더니 사과문을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나 사과문을 안 쓰고 나왔지요."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식에서. 최성무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와 부인 박옥자씨(바로 옆) [사진=최성무 목사 제공]


-호주 교민 교회에서는 평균 신도수가 100명에 못미친다지만 한국에는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대형교회의 신도를 관리하자면 알바 목사로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대형교회는 회사지, 교회가 아니예요. 목사가 수십 명씩 있어요. 교회를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신도를 공항에서부터 데려다가 집 구해줘야 하지요. 학교 보내주고 직장 잡아주고... 완전히 정착 준비를 하는데 몇 달 걸려요. 그래야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에는 애들이 큰 교회로 가길 원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도 많다 보니 떠나잖아요. 40~50명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호주 사람들 보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전도사들은 비자도 없어요.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 교회를 물려주고 목사 안수 받게 하면 비자가 나와요. 쉽게 말하면 영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죠. 완전하게 영주할 수 있는 비자를 사려면 10만 달러 정도 듭니다. 한화로 1억 원이 넘죠. 1년간 들어가는 학비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목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죠. 내가 일곱 목회자에게 영주권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달러 이상 벌었겠지만 오히려 내 돈 들여가면서 했습니다. 나는 다석의 가르침 대로 정말 예수적인 목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30만~40만 달러 했어요.

그런데 나는 목회를 통해 돈을 모으지 않았지만 우연찮게 하나님께서 내 큰아들을 축복해주셔서 지금 백만장자가 됐어요. 아들은 호주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회사를 합니다. 각종 기술자, 용접공, 기타 사무직까지 다양한 직종의 인력을 공급해요. 처음엔 조그맣게 했지만 지금은 개인 변호사까지 두고 규모가 크죠.”

-한국 대형교회는 회사라고 말했는데요.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국에도 작은 교회를 성실히 꾸려가는 목사들이 많다던데요?

“공감합니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란 건물이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성도가 적고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큰 교회죠. 외형적으로 성도가 몇 명이고, 교회가 몇 평이고, 건물이 얼마고, 이런 것으로 큰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두막 하나 짓지 않고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나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2년마다 하나씩 개척한 교회 7개를 영주권이 없는 목사들에게 넘겨줬다. 호주에서는 암암리에 교회를 사고파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넘겨주면서 다석 사상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자기 돈을 써가면서 목회하라고 하면 솔직히 말하건대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는 것이죠. 그 외 시간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나는 호주에서 풀타임 직업으로 청소를 하면서 17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헌금도 제가 제일 많이 했어요. 청소하고 남는 시간에 교회 식구들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을 나와 맨 처음 부목사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호주인인 제프 목사는 용접공이었습니다. 주중에는 용접 일을 하고 주말에 목회하는 거예요. 변호사 의사를 하며 목회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례비를 받게 되면 장로와 신도 눈치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목회를 못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죠. 예수께서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도 사비(私費)를 쓰며 목회했잖아요. 바울이 텐트 메이커 아닙니까. 텐트 치는 업자였어요.”


평창에 있는 다석 묘를 참배하는 최성무 목사



-목사를 하다 정말 굶어 죽을 생각이었다는 말입니까?

“목숨을 걸고 다석의 가르침을 좇아 식색(食色)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목회자야말로 돈, 여자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결국 두 가지 때문에 타락해요. 여자들이 기도해달라고 찾아오지요. 그게 쉽게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신도가 목사한테 가정 방문해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요. 그럴 때 혼자 가면 절대 안 돼요. 안수는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잖아요. 유방암에 걸렸으면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유혹의 현장이 많아요. 그래서 식색을 벗어날 각오 없이는 타락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왜 사례비를 안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그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회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이 저에게 구원을 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이 책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보다 잠들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장소에 이 책을 들고 나왔다. 한국에서 읽다가 책이 너무 좋아 호주로 들고 갔고 호주에서 나올 때도 갖고 나왔다. 지금까지 한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325회 연재한 글을 다석사상 전집 5권으로 묶어냈다. 1995년 초판이 나왔다. 그가 선물로 받은 것은 1권이다. 최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꿔놓은 책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책입니다. 일반 지식 서적은 일단 내용을 알게 되면, 계속 보기가 지겨워지지요. 그에 반해 진리 서적은 보면 볼수록 새롭습니다. 성경도 100독을 하는 것은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자다가 깨서 읽고 춤을 춘 적도 많아요. 나도 모르게 아주 흥겨워서 그랬던 것이죠.”
최 목사는 춘천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지방신문에 대문짝만 한 기사로 난 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그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졸업을 못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야간)에 진학했다.
그는 교사 지망생들이 필수로 치르는 순위고사 1회 출신이다. 용산고교로 발령이 나서 국사 세계사 강의를 했다.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짬짬이 시간을 내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10년 정도 교사를 해보니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출판업에 손을 댔으나 잘 안돼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5년간 청소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육체노동이 힘겨워져 한국에 돌아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교보문고에 근무하던 수강생이 그에게 박영호 선생이 쓴 <다석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학원강사를 5년 만에 접고 다시 호주 행을 했다. 별 기술 없이도 가능한 클리너로 생활전선에 있다가 신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목회자로서의 지표는 언제나 다석 사상이었다.
-그 책에서 어떤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까?
“오리지널 예수의 사상이죠. 지금 제도권 기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잖아요. 성경은 오류의 집합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 어떤 신학자와도 토론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란 책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가지고 제도권 기독교에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 책 속에는 예수의 오리지널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다석 류영모야말로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교사로 가서 기독교를 보급한 분이지만 나중에 제도권 교회에서 벗어난 선각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실제 예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참모습과 신약성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그것을 증명한 것이 1945년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아닙니까. 도마복음과 성경은 180도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신학자와 목회자가 잘 알잖아요. 나도 목회를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목회하는 목사들이 많고, 신학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밥 걱정하는 직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랑 같지만 나도 신학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전하려고 <바보 천치>라고 하는 월간지를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한달에 150만 원씩 들어가는데 청소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선각자들을 이 월간지에서 소개했죠. 다석 류영모의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나는 <바보 천치>를 내다 이단 목사라는 낙인이 찍히고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죠.”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대담하는 최성무 목사(왼쪽)와 황 고문(오른쪽)[사진=윤영은 인턴기자]


-평신도 때부터 시작해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습니까?

”나도 기독교를 50년 가까이 믿었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사상에 접하지 않았더라면 제도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석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벗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한 발짝 더 진화했다고 볼 수있는 것이죠.”

-<다석 전기>와 최 목사가 100독한 그 책을 저술한 박영호 선생을 자주 만났을 텐데요. 최 목사는 “미천한 농사꾼이 남긴 기록을 통해 다석의 사상이 나에게로 왔다”고 말했더군요.

“박영호 선생은 함석헌의 천안 농장에서 똥 수레를 끌던 분이죠. 함 선생의 제자였다가 다석을 만나게 됐죠. 다석이 YMCA에서 35년간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그중에는 함석헌 김흥호 선생 같은 훌륭한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 스쳐 지나갔습니다. 유일하게 박영호 선생님이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 증서(졸업장)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몰라요. 진리의 세계에서는 학력이 상관없습니다. 함 선생님을 통해 강연을 듣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오르고, YMCA에서 다석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거죠.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강의를 듣고 전부 메모하고…. 박영호 선생이 천재셔요. 다석 전기를 쓸 때 제가 가봤어요. 골방에 앉아서 책을 쓰는데 침대가 책상이더라고요. 책을 쓰려면 참고서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권도 없어요. 머릿속에 생각으로 쭉 쓰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놀랄 때가 많았어요. 박영호 선생이 기억하고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제자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석 선생에 대해 여러 제자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리지널하게 다석 사상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박영호 선생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 낱말 사전을 금년 말에 펴낼 예정인데 그 책이 나오면 다석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석이 지은 한글 시조가 이천수가 넘는데 한 수를 공부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떤 것은 한 달 동안 풀이하려고 해도 제대로 안 돼요.”

-다석이 살아계실 때 박영호 선생이 물어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를 해석하는 겁니까?

“그분이 배우고 메모한 것으로 쓰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다석도 박영호라는 제자를 만남으로써 자기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것이 상생(相生)이에요. 서로 낳는 것이죠. 다석에 의해 박영호가 났다면, 박영호에 의해 다석도 난 것이에요. 박영호를 통해 다석이 세상에 알려졌으니까. 박영호에 의해서 제자들이 나는 것이고요. 사과 하나에서 큰 과수원을 볼 수 있듯이 박영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의 무한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박영호 선생도 1934년 생으로 올해 87세입니다. 그 분이 언제 가실지 모르지만, 살아 계실 동안 사상을 전수받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의도 다석연구회 책임자로 있지만, 정말 부족하기 한이 없어요. 과연 박영호 선생이 나한테, 다석 선생이 맡겼던 그런 것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 스스로 자신도 없고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과연 진정한 제자 하나를 두고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나도 분발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다석 전기>에 ‘함석헌이 전기를 썼어야 하는데 함이 못 쓰게 되어 내가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지식의 함량으로는 함석헌 선생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다석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에요. 삶에서 식색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함석헌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일일일식 하셨지요, 식(食)에서는 극기를 했지만 여자 문제에서 상당히 안 좋은 게 드러났어요. 다석 선생한테 공개적인 장소에서 꾸중도 들었죠. 함석헌 선생은 색(色) 문제, 여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통을 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주에 정착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한국 목회자들이 많습니까?

“호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학생 48명 중에 한국 목사와 전도사들이 거의 90%였어요. 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호주 신학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죠. 평신도로서 신학공부한 것은 저 혼자였을 거예요. 함께 공부하면서 ‘목회자들이 저래서야 목회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목사 안수도 안 받으려고 몇 번 사양했어요. 하지만 외국 대학이고 총장이 끌고 가는 바람에 한국인으로서는 1호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시험 때면 커닝도 하는데 그건 아니죠. 지금 한국 목회 현장은 이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거예요.”

-다석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쫓겨났다면서요?

"교회 강론과 '바보 천지'라는 월간지에 쓴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더니 사과문을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나 사과문을 안 쓰고 나왔지요."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식에서. 최성무 목사(왼쪽에서 두번째)와 부인 박옥자씨(바로 옆) [사진=최성무 목사 제공]


-호주 교민 교회에서는 평균 신도수가 100명에 못미친다지만 한국에는 대형교회가 많습니다. 대형교회의 신도를 관리하자면 알바 목사로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대형교회는 회사지, 교회가 아니예요. 목사가 수십 명씩 있어요. 교회를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예요. 신도를 공항에서부터 데려다가 집 구해줘야 하지요. 학교 보내주고 직장 잡아주고... 완전히 정착 준비를 하는데 몇 달 걸려요. 그래야 한 가정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에는 애들이 큰 교회로 가길 원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도 많다 보니 떠나잖아요. 40~50명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호주 사람들 보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전도사들은 비자도 없어요.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 교회를 물려주고 목사 안수 받게 하면 비자가 나와요. 쉽게 말하면 영주권을 넘겨주는 것이죠. 완전하게 영주할 수 있는 비자를 사려면 10만 달러 정도 듭니다. 한화로 1억 원이 넘죠. 1년간 들어가는 학비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목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죠. 내가 일곱 목회자에게 영주권을 받아주었으니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달러 이상 벌었겠지만 오히려 내 돈 들여가면서 했습니다. 나는 다석의 가르침 대로 정말 예수적인 목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해서 번 돈으로 헌금을 30만~40만 달러 했어요.
그런데 나는 목회를 통해 돈을 모으지 않았지만 우연찮게 하나님께서 내 큰아들을 축복해주셔서 지금 백만장자가 됐어요. 아들은 호주에서 부족한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회사를 합니다. 각종 기술자, 용접공, 기타 사무직까지 다양한 직종의 인력을 공급해요. 처음엔 조그맣게 했지만 지금은 개인 변호사까지 두고 규모가 크죠.”

-한국 대형교회는 회사라고 말했는데요.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한국에도 작은 교회를 성실히 꾸려가는 목사들이 많다던데요?

“공감합니다. 내가 말하는 큰 교회란 건물이 크고 성도 수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성도가 적고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큰 교회죠. 외형적으로 성도가 몇 명이고, 교회가 몇 평이고, 건물이 얼마고, 이런 것으로 큰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두막 하나 짓지 않고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나는 목회할 적에 교회 통장 갖지 말라 했어요. 누군가에게 가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돈이 교회 통장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교회가 통장이 왜 필요합니까. 그날 필요한 것 그날 구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말씀을 믿든지 장사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요.
나는 교회 초창기부터 통장을 갖지 않았어요. 헌금을 놔두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했어요. 그 돈을 써서 돈을 벌면 다시 가져다 집어넣도록 했죠. 그럼 다음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지요. 그래서 저축할 겨를이 없었죠.”

-목사들은 하느님한테 십일조를 내는데요. 국가에 또 세금을 내야 하는 겁니까?

“호주에서도 세금을 냅니다. 목회자들은 돈으로부터 해방돼야 합니다. 어떻게 목회자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서 설교를 합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요. 통장에 돈이 있는데, 돈 없어 헤매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19세기 말에야 기독교가 전파된 한국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도수가 많고 특히 여성 신도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한국에는 예부터 내려온 전통신앙이 있지요. 샤머니즘의 근간은 ‘믿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할머니들이 정화수 떠놓고 한울님한테 빌잖아요. 한울님이 하느님으로 바뀌는 것은 쉽잖아요. 이런 전통적 신앙이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여성 해방운동과 직결되었습니다. 기독교만큼 여성 해방운동을 장려한 곳이 없었잖아요. 기독교에서는 아직도 여자 성도가 주류를 이루고,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여성도가 다 하죠. 한국의 기독교는 여전도회가 부흥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여성 신분 상승에도 기여한 바가 있지요. 기독교 덕분에 우리 사회에 생긴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기독교에 개혁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최성무 목사 약력>
-1947년생
-1966년 춘천고 중퇴
-1967~71년 단국대 사학과(야간)
-1973~75년 고려대 교육대학원(석사과정 2년 수료)
-1973~1983년 용산고교 등 서울시 고교교사 역임
-1998~2000년 호주 Southern cross college 졸업
-2001~2002년 Epping Christian church 부목(연수)
-2003년 목사안수(Assembles of god in Australia)
-2003~2015년 한인에핑교회 체스터힐교회 한우리교회 한가정교회 크리스챤라이프센타 One familyworld church 등 교회 개척하고 2년 후 사임(개척목사)
-2012~2013년 시드니 한의대 수학
-현 여의도 다석연구회 대표회원

도올 싹둑복음 공격에 당황 < 교계 < 소식 < 기사본문 - 코람데오닷컴

도올 싹둑복음 공격에 당황 < 교계 < 소식 < 기사본문 - 코람데오닷컴

도올 싹둑복음 공격에 당황
기자명 코닷   입력 2007.05.12 

도올 토론회에서 김광식 교수의 공격에 발끈
 


▲ 토론회 모습 EBS 요한복음 강좌와 “기독교 성서의 이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기존과 다른 성경 해석을 제기해 기독교계 안팎에 파문을 빚어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한국 조직신학회(회장 이정배 교수) 주최로 한국 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공개 토론회를 가졌다. 

2007년 5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1,2층 홀은 신학토론회가 시작된 오후 3시 전 이미 방청객 900여명으로(좌석 수 820) 복도까지 가득 차 출입문을 봉쇄해야 할 정도였다. 이 날 사회는 
  • 한국조직신학회 회장인 이정배교수(감신대), 
  • 토론자엔 도올 김용옥 교수, 
  • 김광식 교수(전 연세대, 협성대 전 총장),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 
  • 김준우 교수(감신대), 
  • 김은규 교수(성공회대)가 참여하였다. 
  • ▲ 인사하는 신학계 원로 유동식(85) 전 연세대 교수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 인사를 한 신학계 원로 유동식(85) 전 연세대 교수는 “반평생 넘게 신학토론회를 다녀봤지만 이런 토론회도 처음이고 또한 대단한 열기도 처음 본다”고 놀라워했다. 

토론에선 그동안 교계에서 금기시된 쟁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 김광식 교수 /전 연세대, 협성대 전 총장 싹둑 복음 공방 

도올이 먼저 자신의 주장을 발제하자 원로 신학자 김광식 교수가 그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김 박사는 ‘믿음’보다는 ‘이해’를 강조하는 도올의 주장에 자신은 현재 기도원에서 설교자로 있다면서 “설교자의 목적은 신자들을 지혜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는 데 있다”며 “ 도올의 주장은 독일의 칸트와 18~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도 있었다”고 하면서 “도올이 말하는 것은 짝퉁이고, 다시 한 번 더 보니 싹둑 잘라내어 버리는 ‘싹둑 복음’이다”라고 공격했다. 
▲ 도올 김용옥 교수

이에 도올은 특유의 날을 세우면서 “김 교수와 같은 생각이 교회를 망쳤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에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신학 체계는 너무 나이브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또 주입식의 방법으로 억압할 수 없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서 건물만 지으니 교회가 공동화되어 간다고 공격했다.


그는 “이제는 여러 신학적 담론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올은 “‘역사적 예수’도 ‘이것’이라고 한마디로 얘기(규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제 말을 ‘싹둑 복음’이라면서 왜 저라는 사람을 (다른 면들은) 싹둑 잘라버리고 규정해버리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이 발언은 취소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 김경재교수 /한신대 명예교수 

인간과 신성 토론은 ‘인간과 신성(神性)’을 둘러싼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한국 기독교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신이 33년간 (인간의) 몸으로 살다가 본래로 돌아갔다고만 하는데, 그것은 고대엔 흔해 빠진 논리였다”며 “다른 인간과 달리 예수만이 신의 화육(몸을 빌려 옴)이라는 교리가 예수에 대한 이질감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러자 김광식 교수는 “그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김경재 교수의 주장에 이의를 달았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김준우 교수는 "'요한복음'이 예수가 가르친 '예수의' 복음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가르친 '예수에 관한' 복음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 김준우 교수 /감신대

이에 도올은 “저도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다 100%씩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예수뿐 아니라 인간도 100%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인격체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하나님이이서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100%로 본다. 그런 진보적인 측면까지 해석하지 않는다면 신학자가 아니며, 솔직히 말해 그런 것을 수용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다”며 김경재 교수 편에 섰다. 
 

김은규 교수는 "기독교가 초기에 정경(4대 복음)을 정하지 않았다면 더욱 탄력적인 기독교로 발전해 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도울 선생은 성서주의.정통주의를 강조한다. 그 자체도 사고의 틀에 갇힌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용옥 교수는 "불교는 정경과 외경 없이 대장경이란 틀 속에 모두를 수용했다. 기독교도 만약 그런 폭 넓은 수용틀을 마련했다면 더욱 풍부한 기독교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 김은규교수 /성공회대 

구약 폐기론에서 구약주의 폐기론으로 후퇴 구약 폐기론이 불거지자 도올은 자신은 구약 폐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구약주의를 비판한 것이라고 후퇴하였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자신은 그것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사회자 이정배 교수 /감신대
 

정리(이정배 교수)

이정배 교수는 이 토론회를 마치면서 도올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1. 구약폐기가 아니라 화석화된 율법주의에 대한 폐기를 주장한 것이다.

2. 신약성서의 정경화 문제에서 도올은 “성서 안에 해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성서에서 해방 시켜라”고 주장한 것이다.

3. 요한복음 강좌에서 로고스 기독론을 언급하는 가운데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던 기독교가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새롭게 부각 시켜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이 신이 되는 가능성이다.

4.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에 관하여 실체론적 틀 속에서 이해되는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도올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바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리고 토론회의 입장과 도올의 발제문은 아래에 따로 올려 드립니다. 또한 한겨레에서 낸 동영상을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참고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일명 한국적 신학에 대한 단상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05.19 17:44


며칠 전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 생각을 나누었다. 모두들 학위를 마친 학자들이었지만 옛적 내가 그랬듯이 신학교 틀에 갇혀있거나 목회현장에서 적응하느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하 내용을 나누고 돌아설 때 이구동성으로 신학함에 있어 ‘얼’이 모처럼 다시 깨어났다고 토로 했으니 이후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삶이 어려운 탓이겠지만 신학하는 사람들, 신학자들 영혼의 크기가 작아지는 현실을 우리는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신학의 언어가 쓸모없어 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용지용, 쓸모없는 쓸모로서의 신학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게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신이 인간이 된 성육신이 토착화 신학의 근거라 할 때 이 신학 전통 속에 몸담은 우리의 삶 역시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 1 >

필자는 본래 영락교회 출신이며 그 재단 소속 학교인 대광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을 끝내고 친구따라 작은 감리교회로 이적했으며 그곳서 만난 큰 목사(장기천)님 덕에 감신에 입학했고 치구지간인 일아 변선환 선생을 사사했다. 자연스럽게 토착화 신학 전통을 배웠고 기독교와 유학의 대화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마친후 30년을 모교에서 가르쳤으며 4년 반 전 명예퇴직을 했다.

2020년 8월이 되면 만 65세가 되어 정년은퇴 시점이 될 것 인바 이제 서야 비로소 은퇴를 실감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나의 신학적 과제를 짧게 서술할 것이다. 이후 긴 글로 다시 쓰여 질 것을 기대하며 스승의 날 찾은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 속내를 짧게나마 내비쳐 보겠다.

< 2 >

사실 명퇴를 작정하기 몇 년 전부터 나의 신학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고 ‘생명평화 마당’을 통해 ‘작은교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자타가 이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직 중 필자는 탁사 최병헌에게서 시작되었고 윤성범을 거쳐 변선환에게서 꽃피운 토착화 신학 전통을 잇고자 애썼다.

▲ 한국적 혹은 토착화 신학을 추구했던 유영모·윤성범·변선환(사진 왼쪽부터)


토착화 2세대란 평을 들었으며 제자들을 그 3세대로 키우기 위해 때론 민중신학과 토론하고 민족개념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나름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동학을 비롯하여 유·불·선 동양 종교와 문화들을 연구했고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극복하고자 일아 선생처럼 그렇게 서구 종교다원주의 사조를 방편 삼았다. 기독교의 배타적 ‘오직(only)’ 사유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출현한 다원주의 신학사조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거기에 머물지 않았으며 근간에 있어 이들과 같을 수 없었다. 토착(뿌리내림)을 넘어 항시 토발(솟구침)을 꿈꾼 까닭이다. 토착이란 말 탓에 종종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할지라도 토착화를 수동적 개념으로 서구 다원주의 신학의 아류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서구신학은 어떤 것이든지 각주일 뿐 본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필자는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변별된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했고 그 실상을 여러 곳에서 밝혀 놓았다. 다석 연구자들 간 견해차가 생긴 것은 실존적 차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교회와 대학 그리고 사회, 어느 곳에 발 딛고 서있는 가에 따라 담론의 무게중심이 달라졌을 듯싶다.

< 3 >

어느 순간 필자 역시도 기존 토착화 전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과거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민족 주체성을 일깨워 주었으나 정작 정치적 보수성에 고개를 좌우로 내 저어야 했다. 선배 신학자들의 무색무취한 정칙성향, 이에 더해 태극기 부대에 편승하며 가짜뉴스를 진실처럼 매개하는 이들의 적극적(?) 역할마저 목도했던 까닭이다.

▲ 박순경 교수


기존 토착화 스승들, 소위 문화신학자들이 종교해방신학자 변선환 이전으로의 퇴행한 결과였다. 이로써 예전부터 언급된 것이지만 감리교 내 토착화, 문화신학 전통의 한계가 분명해 졌다. 이는 자신들 속에 자유(문화)주의 전통 뿐 아니라 진보성, 곧 사회주의 유산이 있었음을 잊은 자업자득이었다.

손정도를 비롯하여 김창준 그리고 전덕기를 중심한 독립 세력들을 망각한 결과였다. 이후 장기천 감독이 NCCK를 통해 그 뜻을 펼쳤고 박순경 교수가 주체사상을 연구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필자가 세월호를 비롯하여 4.27 판문점 선언에 생각을 보탠 것도 그리고 5.18, 40주년 행사를 눈물로 지켜보며 힘을 합했던 것은 과거 전통을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가 본래 사회주의였기에 소중하다는 이들 목회자들의 주장을 폄하, 조롱한다면 자본주의에 먹힌 기독교, 감리교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감신 내 한 건물 벽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모교 출신 목회자 7분 얼굴상이 걸려있다. 자진 월북한 김창준의 얼굴상을 없애자는 의견이 한 때 팽배한 적이 있었다. 그 타협안이겠으나 김창준의 얼굴이 다른 분의 그것보다 동판에 아주 희미하게 표현된 상태로 걸려있다. 마지못해 주조되어 걸려 있는 듯이 말이다.

조만간 그의 상이 다시 또렷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사회적 실천력을 잊고 정치성을 망각한 기독교는 토착화를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토착화그 역시 반쪽 기독교의 민낯일 뿐이다. 민족의 현실과 맞닥트린 기독교, 바로 그것이 토착화의 다른 이름이어야 옳다.

< 4 >

▲ 이신 목사(1927.12.25-1981.12.17). 감리교 전통에서 기독교 환원운동에 전념하며 고독한 길을 갔다.


30년 재직하면서 아주 늦게 자각한 또 한 사조가 있다. 이는 시대를 앞선 목회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헌신의 발로였다. 기독교 주류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을 뿐 이들의 공헌은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감리교 내에 ‘기독교 환원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석기, 강명석 목사 등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이들이 온갖 교파를 넘어 그리스도에게로의 환원을 주창했다.

이들 사상은 의당 누혈의 목회자 이용도와 잇대어 있을 것이다. 당시는 교파적 기독교가 대세인 상황이었다. 교파에 의지하여 선교를 해야 살길이 열리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교파적 기독교가 민족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일찍 자각했다. 유학파, 감리교 목회자란 후광을 걷어차고 이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것이다.

신학자 이신 역시 감리교 전도사로 시작했으나 이들 선배를 만나 ‘훤원 운동’에 몸 담으며 고독한 길을 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 환원 운동은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겠으나 당시 이들은 이 길에 생명을 바쳤고 가족마저 희생시켰다. 우리가 토착화를 말함에 있어 이런 그리스도, 이런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론과 사변에 불과할 것이다. 현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못난 짓을 해도 교회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 정신- 그것이 하느님 나라 사상이든, 묵시적 인자 사상이든 혹은 역사적 예수의 지혜이든지 간에-에 입각하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에 정성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 5 >

이렇듯 세 사조가 공존하며 지난 백년 남짓한 한국 신학계에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저마다 어느 한 사조에 속하여 상대에 대한 존중보다는 비판을 앞세우며 자기 영역에 갇혀 세월을 보냈다. 한 노학자는 이들 세 사조를 자유주의, 진보주의, 복음주의라 개념화 했지만 일리는 있되 전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ism)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뜻인 까닭이다. 지금껏 이 세 흐름과 옳게 만나지 못한 채 이들을 일개 ‘-주의’로 이해했으니 비극이다. ‘-주의’로서의 세 사조는 모두 서로를 냉대했고 함께 여성에 무지한 한계를 자체속에 노정한 까닭이다.

하지만 현실 문제를 날 것으로 관심할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현실과 조우하되 그를 신학 언어로 재구성하는 일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향후 토착화는 세 흐름의 본질을 꿰뚫어 하나로 녹여내는 치열한 논리와 열정 그리고 함께하는 마음을 요구할 것이다.

각자도생의 신학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바꿀 수 없다. 신학보다 큰 담론을 말하는 학문이 없으나 누구도 신학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는 현실에 가슴을 칠 일이다. 향후 교파의식 역시 필자에게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감리교 신학 속에 담겼던 세 요소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교회성장을 위해 자신 속의 보고를 내다 버린 탓이다.

이웃종교들, 온갖 이념들이 기독교 근원과 마주할 때 모두가 하나 되는 교파 초월적 신학, 큰 기독교를 기대할 수 있겠다. 이를 필자는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그리고 이후 교회라 불렀고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에서 이런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수년전 필자가 문화신학자들과 『한류로 신학하기: K-Christianity』란 큰 책을 펴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 6 >

이보다 앞서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루터가 말한 3개의 ‘오직’ 교리를 달리 구성할 것을 제안했었다. 중세를 극복하여 근대를 열어젖힌 동력이었으나 근대(자본주의)와 짝하면서 이 셋이 중세의 면죄부만큼 타락했으며 시대를 타락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여 필자는 근대성(자본주의)과의 투쟁을 위해 이 세 가지 ‘오직’ 교리- 믿음, 은총, 성서- 를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이라 달리 풀었다. 믿음을 고독으로, 은총을 저항으로 그리고 성서를 상상력의 보고로 달리 개념화한 것이다.

▲ 이정배·이은선 교수는 명예퇴직을 하고 강원도 횡성에서 각각 현장아카데미와 신연구소를 마련하고 토착화신학에 매진하고 있다. ⓒ한겨레 조헌 기자


떼거리 군중 속에서 신독의 삶을 구했으며 늦게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하늘 은총을 세상저항의 동력이라 여겼고 성서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상상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웃종교들과의 공존하는 세상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을 은총이라 하겠고 그리고 깊이로 침잠하는 환원의식을 고독이라 명명해도 좋겠다 여긴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담은 글을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베를린에서 열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발표한 바 있다.

< 7 >

한편 여성신학자 이은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동양(유교) 고전에서 배운 3개의 개념인 聖(성)·性(성)·誠(성)을 갖고서 나름 치열한 토착화 작업을 수행해 왔다.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재구성, 곧 여성신학적 차원에서 토착화 논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넓게는 기독교와 인문학간의 대화의 장을 펼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학적으로 위 세 개념들은 저마다 신론, 기독론 그리고 성령에 해당된다. 이를 인문학적 언어로 풀면 통합성, 타자성 그리고 지속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세 개념들은 모두 여성적 가치들로서 역사 속 남성들에게 많이 낯설 수도 있겠다. 체화된 한국적 여성의식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종교 보편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모든 것과 관계하는 존재로서, 예수는 여성이 남성의 타자이듯 신의 타자성으로, 그리고 성령은 모성을 통해 경험하듯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지속성)으로 재언표 된다.

하지만 이은선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들 각각을 종교, 정치 그리고 교육의 차원에서 설명했고 셋의 한몸 짜기를 통해 토착화 과업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으로는 성과 속의 합일이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유교의 일치(대화)일 것이며 문명사적으로는 기독교 서구(미국)와 중국문명(유교)를 함께 극복하는 길이라 하겠다. 이런 작업은 역시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소개되었고 그곳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결국 앞서 말한 환원운동과 저항운동 그리고 공존능력 간의 통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셋은 필자의 개념들,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과도 짝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믿음, 은총, 성서의 인문학적 재해석이라 해도 좋겠다. 이로부터 코로나 이후 시대 기독교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8 >

이상에서 토착화론에 대한 짧은 단상을 소개했다. 압축적인 글이라 질문이 적지 않을 것이며 의심도 생겨날 수도 있겠다 싶다. 수많은 내용을 덧붙인다 한들 질문이 사라질리도 없고 의심 자체가 소멸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가 주장한다고 사람들이 따르지도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토착화 논의는 쉽지 않고 미정고로서 존재할 뿐이다.

주지하듯 은퇴 후 필자는 이은선 교수와 함께 강원도 횡성에 <현장 아카데미>을 열었다. 지난 주 한겨레 ‘휴심정’에 소개되었듯이 중세 수도원 전통을 따라 학문과 영성 그리고 노동의 삶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학문이라 함은 토착화 연구를 뜻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방향에서 우리 부부는 신학적 동지로서 통합적인 토착화 신학에 전념할 생각이다. 홀로 할 수 없기에 소장학자들의 뜻 또한 모아지기를 소망한다. 이 작업을 위해 조만간 ‘한국 신(信)연구소’가 출범할 것이다.

7월 중으로 예상하는 바, 이 시점에 맞게 몇 권의 책이 출판될 예정이다.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가제)와 『동북아 평화와 聖(성)·性(성)·誠(성)의 여성신학』이 이은선의 이름으로 출판될 것이며, 필자 역시 『다석의 귀일신학』을 선보일 생각이다. 노동과 영성을 위한 연구와 실천도 별도로 계획 중에 있다.

실로 ‘다른 기독교’를 절실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작업을 위해 기꺼이 우리들 남은 시간과 여력을 바칠 작정이다. 이를 위해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이 그립다. 신학마저 각자도생의 작업이 될 경우, 우리들 미래는 더욱 볼품없어 질 것이기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7월 어느 날 우리들 책 한 권이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5.18 40주년 광주 아픔을 새기며 동시에 한겨레신문 1만호 출간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에큐지에 이 글을 보낸다.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영모의 귀일신학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알라딘: 유영모의 귀일신학


유영모의 귀일신학 -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지은이)밀알북스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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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500쪽


책소개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재정리한 책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목차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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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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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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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바치며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룬 부분은 다석에게 그만큼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이렇듯 종교는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생향 2020-12-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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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유영모의 귀일신학, 이정배지음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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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15일 (수) 08:05:41
최종편집 : 2020년 07월 16일 (목) 09:06:35 [조회수 :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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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유영모의 귀일신학
 

 

지은이 이정배

펴낸곳 신앙과지성사

값 30,000원

ISBN 978-89-6907-235-1 93230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펴내며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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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현암사, 1990)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강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歸一神學)으로 바꿔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서구와 변별된 차원에서‘ 귀일’이란 말에서 찾곤 했으나 아직까지 이 주제를 사용한 책이 출판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다석이 구술한『 다석강의』가『 귀일신학』이란 이차적 언어를 갖고서 재탄생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귀일’이란 말도 다석이 즐겨 쓰던 용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귀일신학』이란 제목은 필자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리라.『 귀일신학』 속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을 통해 필자는 다석 사상의 출처 및 세계사적 의미를 밝혔고 귀일신학의 핵심을 서술했다. 이는 오로지『 다석강의』를 엮어 펴냈던 다석학회 회원들, 특히 앞서 다석의 생각을 밝혀준 박영호 선생님, 정양모 신부님의 덕분이다.

 

그동안 필자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여 두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과『 빈팅한데 맞혀놀이』(동연, 2011)가 그것이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김흥호 선생님과 함께 펴낸 책도 있었다. 여러 학자들의 글 모음집이었던『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출판사, 2002)이 그것이다. 다석을 연구한 필자의 처음 글이 실렸고 선생님과 함께 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필자의 연구서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선 두 책이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책 제목들 또한 모두 다석 고유한 언어에서 비롯했다. 앞의 책에서 필자는 다석 사상을 서구의 종교다원주의 사조와 대면시켰고 다석을『 천부경』(天符經)을 매개로 동학과 연결했으며 함석헌, 김흥호로 이어지는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일본 교토학파의 그것과 견주고자 했다. 나중 책에서는 다석사상을 통해 서구의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과 대화하되 그 한계를 밝혔으며 유불선을 회통한 귀일신학의 골격과 본질을 연구했고 그리고 동서 생명사상의 틀에서 다석을 재조명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금번 『다석강의』를‘ 귀일’(歸一)개념에 근거하여 독해했고 이에 방점을 둔 채 논지를 펼쳤다. 이 과정을 통해『 귀일신학』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는 다석의 생각이자 그분 직계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일 뿐 그 이상일 수 없다. 신학교에서 30년 토착화 신학을 가르친 학자로서 다석 사상을 신학적 언어로 개념화시킨 작은 공헌만이 필자의 몫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다석강의』를 본격적으로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었다. 대학을 명예퇴직한 이후 다석 유영모란 인물이 학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붙들고 씨름해야 될 영성의 사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를 알수록 동서를 막론한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애시당초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저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기 위한 갈급한 상태에서 다시 손에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읽어 가면서 값진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았고 그를 종종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온 욕망으로서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였다. 간혹 페이스북에 글을 옮겼을 때 제법 많은 이들이 다석이 내리치는 죽비에 정신 차렸다는 답 글을 올려주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글이 모아졌고 오늘 이 시점에 이르렀다. 다석의 글은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결코 읽히지 않았다. 때론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리 쓰인 글들은 흡족지 않았고 폐기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다석강의』를 읽고 정리하는 동안 모처럼 직업적 종교인(신학자)이 아닌 신앙인, 구도자의 마음으로 살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다석을 가르쳐 주신 김흥호 선생님을 많이 생각했다. 살아계실 때 년 초에 세배를 가곤 했었다. 정월 초하루였음에도 선생님은『 다석일지』를 풀고 계셨다. 팔순을 넘긴 연세였지만 스승의 구술 언어를 글로 재탄생 시키는 모습이 지금도 경이롭게 기억된다.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시간을 바칠 만큼 스승의 말씀이 귀했던 까닭이다. 지난 2년의 삶에서 김흥호 선생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책『 귀일신학』을 두 해 전 탄생 백 주년을 맞았던 김흥호 선생님께 바치고자 한다.

 

『다석강의』를 꼼꼼히 읽으며 새삼 발견한 것은 첫 강과 마지막 강의인 43강이 모두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다석에게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리라. 각 강의의 제목이‘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귀일신학』에서 다석의 사생관과 성령의 삶이란 말로 바꿔 달았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가 있고 죽었으되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뜻을 보태면서 말이다. 종교란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죽음 이후의 몸 적 소생이라는 인습적 부활신앙을 다루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을 믿었을 뿐이다. 죽음을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얼로 사는 삶이다. 얼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삶 속의 부활은 너무도 자명하다. 우리들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믿었던 고린도서 저자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삶이겠다. 하지만 기독교, 불교를 막론하고 종교들이 죽음장사를 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장례식 이후 낯선 공간으로의 이주를 믿으라 권하며 정작 삶 속의 부활을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을 삶 속에서 초월(극복)하고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 믿는 것이 다석이 말하는 부활인 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다석의『 귀일신학』이 인습화된 기독교에 던지는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목도하며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뉴 노말’ (New Normal)을 요구받고 있는 중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타 성에 젖은 신앙양식으로는 코로나 이후의 교회를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의 오만과 성직자의 무능을 목도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역할에 회의를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위한 교회인지 안식일을 위한 교회인지 되묻기 시작한 까닭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사람을 도구로 여겼던 종교의 자기반성이 통렬히 이뤄져야만 한다. 축복신앙이 무너졌고 절대라 여겼던 가치가 실종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종교는 무너질 것이나 영성으로서의 종교는 영원할 것을 의심

치 않는다. 물론 제도 없는 영성도 위태로울 수 있겠다. 하지만 제도를 최소화시키고 영성을 깊게 하는 일이 더없이 필요하다. 안식일의 종교화가 아니라 일상의 영성화가 더 화급한 현실이 된 까닭이다. 일상이 없는 종교는 죄책감을 가중시켜 교회만을 살찌울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교회의 본래 이름인‘ 에클레시아’ 즉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과감하게 부활시켜야 옳다. 평신도,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독생자의 길을 걷도록 종교가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만인 사제직을 입이 아니라 삶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신독(愼獨), 즉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있다는 확신 하에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만 옳다는 배타성도 자연스레 옅어질 수 있겠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만 바라봤듯, 한국 개신교도 지금껏 미국 교회만을 쳐다봤고 서구 기독교에서 답을 구해왔다. 하지만 그들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고 알았다. 코로나 사태로 허둥대는 기독교 서구 문명의 허약성을 목도한 탓이다. 이 점에서 본 책『 귀일신학』은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 아니 종교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 생각하는 종교인들을 위해 본 책이 기여할 바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정년을 4년 6개월 앞두고 학교를 떠났다. 이제 그 시간이 다 지났고 마침내 은퇴시점에 이르렀다. 4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은퇴자로 살지 않았고 나름 더 열심히 글을 썼으며 땅을 일궜고 현장을 찾고자 했다. 김흥호 선생님께 헌정한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정식으로 은퇴의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말까지 해야 할 작업이 산적해 있다. 모든 일을 잘 마친 후 여유를 갖고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염려하며 주변을 더 열심히 살피면서 살아가고 싶다. 필자가 쓴 다석의 글을 읽고 그때마다 마음을 나누고 평해 주신 여러분들이 기억난다. 이은선 교수를 비롯하여 석준복 감독님, 하중조 장로님, 박정규 교수님, 이면주 목사님, 조용훈 장로님, 김선주 목사님 등이다. 이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필자의 글을 소개해준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의 이정훈 선생의 수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과지성사’에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일전의『 수도원 독서』에 이어 연거푸 두 번째이다. 본 책의 독자가 얼마나 될지 염려하면서도 출판을 결정해준 최병천 장로께 많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교정을 보아준 권오무 목사님과 직원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바라기는 이 책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다석 강독회 모임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모임이 만들어지면 만사제치고 달려가 함께 토론할 생각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석을 좀 더 체화시켜 멋진(?) 토착화 신학의 골격을 만들어 낼 뜻도 마음에 품고 있다. 다시 한번 말을 주신 다석 선생님과『 다석강의』를 펴낸 다석학회 회원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길을 가다 길이 되라 했으니 애써 이분들이 가신 길에 발을 올려놓은 채 달려가고 싶다. 말에 삶이 실려야 힘 있게 출발할 수 있으리라.

2020년 5월 7일

아내 이은선 교수의 63번째 생일 날

부암동 현장 아카데미에서

이정배 두손 모음

 

차례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황호택논설위원 다석 유영모 인터뷰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이정배 교수 학문적 업적과 삶 조명한 에세이와 논문 : 문화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정배 교수 학문적 업적과 삶 조명한 에세이와 논문 : 문화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한국적 생명신학을 논하다
전현식 외 22인 저 | 동연 | 447쪽 | 19,000원

이정배
▲한국적 생명신학을 논하다
「한국적 생명신학을 말하다」는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한 이정배 교수의 명예은퇴와 회갑을 기념해 동료교수 및 제자 신학자들이 이 교수의 학문적 업적과 삶을 조명한 에세이와 논문으로 구성된 책이다.

 
이 책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전현식 교수(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조직신학) 외 12명의 신학자들이 쓴 에세이와 '학문의 맥 그리고 신학', '동학과 유영모', '수행론과 구원론', '생태신학과 한국적 생명신학', '아시아적 관점과 대화의 신학', '의미와 비평 사이'의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한 논문들이 실려 있다. 

이정배 교수와 하나님나라를 위한 신학적 동반자로 오랫동안 교제를 나눠온 전현식 교수는 이 책의 서두에서 "신학의 토착화와 정치화, 종교, 과학 및 생태의 학제 간 연구에 관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들, 기독교와 이웃종교간 대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몸소 실행한 그의 실천적 수행들은 이정배 교수를 이론과 실천 분야에서 한국 신학계를 주도하는 대표적 신학자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감신대의 토착화신학의 학문적 상징이자, 살아있는 예언자적 양심이며, 신학의 공공성과 교회의 복음화를 수행하는 프락시스의 신학자"라고 이 교수를 높이 평가한다.

최근 이 교수는 신학적 설교집 「차라리, 한 마리 길 잃은 양이 되라」, 신앙 에세이집 「그래, 결국 한 사람이다」 등을 출간하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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