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2

연찬문화연구소 - 에즈원커뮤니티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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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찬문화연구소 | 2014년 '파커파머' 독서연찬회에 초대합니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2014년 '파커파머' 독서연찬회에 초대합니다. - Daum 카페



2014년 '파커파머' 독서연찬회에 초대합니다. |독서연찬

차차(임경환)|조회 250|추천 1|2014.01.15. 15:20

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24



안녕하세요. 연찬문화연구소 임경환입니다.



지난 해에 진행되었던 독서모임을 올해에 다시 이어가면 어떨까 합니다.

올해에는 같이 파커 파머의 책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파커 파머는 미국에서 존경받는 교육지도자이자 사회운동자로 손꼽히는 사람으로

교육, 공동체, 리더십, 영성과 관련해서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워크숍, 강의, 수련 활동을 벌여온 분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교사의 교사’로 부른다고 합니다.



파커 파커의 목소리와 얼굴이 궁금하신 분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됩니다^^



파커 파머와의 대담1. 초대를 통한 진정한 욕구의 발견

http://blog.naver.com/innerteacher/150162634340



파커 파머와의 대담2. 청년의 욕구와 피정의 만남

http://blog.naver.com/innerteacher/150162635659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제목의 책을 시작으로 만남을 열면 어떨까 합니다.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문구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을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나갔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절에 대한 파커 파머의 통찰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나에게 겨울은 최고의 선물을 간직한 계절이다. 그건 바로 하늘은 맑고 햇빛은 찬란하며 나무들은 벌거벗었고 첫눈은 아직 오기 전 그때이다. 바로 완전한 투명함이다. 겨울에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여름의 푸르름이 시야를 가로막던 것과 달리, 한 그루씩 또는 한꺼번에 나무들의 또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그들이 뿌리내린 땅을 볼 수 있다.”



첫 모임 안내



일시 : 2월 6일 오후 6시 ~ 오후 8시

장소 : 미정(남원 생협 or 신명숙 선생님 하우스 카페

문의 : 임경환 (010-6421-4697), 유기만 (010-9887-7659)

함께 읽을 책 :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



* 모여서 함께 1부를 강독한 뒤 각자의 느낌을 적은 뒤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미리 읽어 오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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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1, 2회 0501|독서연찬

맑은공기|조회 54|추천 0|2014.05.02. 12:00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37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며....



4월 24일 파커파머 독서연찬회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모두 7명이 함께했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임쌤과 민주쌤이 순천에서 맛있는 빵을 사오셨습니다. 진숙쌤이 제주도산 잡채와 쿠키도 가지고 오셨습니다. 맛있게 먹고 한 줄 한 줄 책일 일어 첫날을 들어가는 글과 제 1장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함께 읽었습니다.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불완전함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갖게 된다.



-뱅크스소나무는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을 자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구절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일주일이 지나서 쓰려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리된 삶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분리된 삶으로 이끌린다.’라는 구절을 두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맡은 일에 온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



-꼭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기본적인 가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영위할 때



-영혼을 파괴하는 상황, 관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



-진실을 감추고서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득을 얻으려 할 때



-갈등, 도전,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신념을 숨길 때



-비판받고, 따돌림 당하고, 공격받을까 두려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려 할 때



위의 구절을 두고 분리된 삶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다시 읽고 세월호 사고를 생각하니 뭔가 숙연해 지는 부분이 있네요~ 위의 구절을 읽고 ‘아~ 내가 분리된 삶을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세월호와 같이 생각하니 내가 바로 맡은 일에 온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은 선장이고 선원이고 해경이고 관료이고....



요즘 안전이라는 말이 꽤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법을 강화하고 제도를 보안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아무리 법과 제도를 강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안전사회를 보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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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연찬회 두 번째

분리의 벽을 넘어서(28페이지~37페이지)



5월 1일 노동절에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두 번째 독서연찬회를 했습니다. 신마담이 준비한 비빔밥과 아욱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본래 함께 읽기를 했던 분들은 저를 포함하여 신쌤과 양쌤 이렇게 세명이었고 신쌤이 하시는 고전음악감상회(?)분들이 밥 먹으러 오셨다가 읽기 모임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두 6명이 두 번째 모임을 했네요~



어제는 여러 가지 구절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영혼을 선하다고 보느냐 악하다고 보느냐고 묻는 분이 있었고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던 것 같네요~



인간을 선하다고 보는 이유나 악하다고 보는 이유는 천 가지 만 가지라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자신을 살펴보기는 더 어려운 일 같습니다. 파커가 자신의 내면을 보라는 것도 결국 천 가지 만 가지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기 보다는 그 이유를 찾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보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00을 보고 00라 생각한다.’

보고 생각하는 그 사이에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을 포함한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사가 지난 언젠가는 우리가 100년 전 선조들의 사고 방식을 보듯 후대가 지금 사는 우리를 볼 날도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이 거대한 구조에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는 힘들겠지요? 그래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속에 포함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종교도 국가도 조직도...

다음 읽어갈 제목이 그런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네요~

거짓된 커뮤니티와 진정한 커뮤니티...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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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세 번째 독서모임(2014.5.8)|독서연찬

차차(임경환)|조회 32|추천 0|2014.05.12. 00:52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38



2014년 5월 8일에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세 번째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기만 선생님이 순천에 연찬을 가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고, 경환, 민주, 윤화, 소연 4명이 양윤화 선생님댁에 모여서 독서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오늘은 거짓된 커뮤니티와 진실된 커뮤니티 부분(38쪽~47쪽)을 함께 읽었습니다. 함께 소리 내어 읽은 뒤 살아오면서 각자가 맺어온 커뮤니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소연 선생님은 지금 모여 있는 이 독서모임이 파커파머가 얘기한 진실된 커뮤니티와 가깝다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모임에 나오면 피곤함이 사라지고 충만해져서 집에 돌아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예전에 한번 갔었던 이오덕글쓰기모임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 거짓된 커뮤니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많은 이들이 위계질서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평등주의적인’ 서클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구절이 지금 현재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구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경환과 이민주는 영국 버밍험에 위치한 퀘이커 스터디 센터를 방문했던 얘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동시에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던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한국에 퀘이커 모임이 있으면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양윤화 선생님은 달라이라마의 고양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재미나게 설명을 잘 해 주셔서 그 책을 사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장을 읽으면서 “영혼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보호하는 법을 안다면” 두세 명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신뢰의 서클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와 닿았습니다. 그때 말하는 ‘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는 ‘가르쳐주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것’ 정도를 이야기 하는데, 앞으로 이와 관련해서 어떤 내용들이 소개될지 궁금해집니다. 단지 모여 있다고 해서 신뢰의 서클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 모여 있느냐에 따라서 서클의 성격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또 신뢰서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두 가지 원칙(①영혼 또는 참자아가 실재하며 강력한 힘이 있다 ②영혼은 특별한 관계에서만 안전함을 느낀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앞으로 우리 독서모임이 이 두 가지 원칙이 지켜져서 신뢰의 서클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파커파머가 말하는 ‘특별한 관계’가 무엇일까가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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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독서연찬회 감상문|독서연찬

맑은공기|조회 26|추천 0|2014.05.21. 08:28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39

0515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감상문



15일은 3장 ‘영혼의 DNA(50P~53P)’를 함께 읽었습니다. 파커는 아이들이 ‘참자아’,‘타고난 자질’을 알아가는 본보기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파커는 손녀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저는 어린 아들(31개월)을 보면서 많은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느 것이 타고난 자질이고 어느 것이 학습된 것인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나 교육학에서는 아이를 미성숙한 것으로 보고 성숙한 아이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자아를 억압하는 방향인지 자아를 실현하는 방향인지에 대한 것이 먼저 점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아이는 개념으로 사물을 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 하나의 생김새와 그 자체의 맛을 보면서 성장하지만 하나 씩 개념이 생기면서 사물 하나 하나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자신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훈련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책도 온통 개념의 훈련이지요~

‘00은 00이다.’

물론 그런 훈련도 필요하겠지만 구체적인 사물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너무 이른 나이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의 끝없는 질문에 ‘00은 00이야!’라고 답하고 그것을 따라하는 아이를 보고 똑똑하다고 좋아하기도 하지요~

인간은 관념의 동물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너무 극단화되면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자신이 형성한 관념을 사실로 여기면서 더 왜곡된 관념을 만들고... 이것을 반복해서 훈련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도 아들처럼 어린 시절 관념이 형성되기 전에 사물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때가 있었겠지요~ 어느새 제 아들도 제가 가지고 있는 관념으로 보고 있는 저를 봅니다.

‘도덕관념, 성관념, 권위주의 등’ 아이를 보는 제 인식의 틀도 고정되어 있네요~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인간이 성장하는 것이 방향이라면 그 성숙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살펴보면 어떨까요? ‘타고난 자질’을 성숙시키는 사회는 어떨까요?



15일 독서연찬회는 임쌤과 민주쌤과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모여서 신마담이 준비해준 부추전, 임쌤이 준비한 김밥, 삶은 달걀과 차와 과자와 배불러서 꺼내지 못한 민주쌤은 쑥개떡과 포도 등 등 풍성한 먹거리와 함께 했습니다.



일주일 아들을 바라보는 재미로 살았는데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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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독서연찬회 감상문 '참자아에 대한 의문'...|독서연찬

맑은공기|조회 35|추천 0|2014.05.23. 11:40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40

0522 독서모임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감상문



‘참자아에 대한 의문’, ‘분리된 삶의 이야기들’(53p~67p)



말을 하고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처럼 내안에 어떤 것을 정리되지 않더라도 살피고 더듬으며 주섬 주섬 꺼내는 말들은 꼽씹어 보게 됩니다. 물론 독서모임에서도 가끔 말하고서 후회하는 적도 있지만... 파커의 책을 통해서 아이를 보게 되고 또 내 삶의 잊혀졌던 순간 순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파커는 책에서 세속주의와 도덕주의가 참자아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저를 돌아보면 삶이 온통 세속주의와 도덕주의였지 않았을까 싶네요~^^



‘우리 문화의 두 흐름이 이러한 영혼의 무관심에 기여한다. 하나는 인간 자아를 어떤 창조적 핵심도 없는 사회적 구조로 여기는 세속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모든 관심을 이기적이라고 여기는 도덕주의다.’



오늘 아침 이 문장이 저에게는 이렇게 읽힙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의 아빠이고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남편이고 무슨 일을 하고 등 등 사회적 관계로 혹은 사회 속의 역할로 살아가는 것을 전부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된 것들로 묶이지 않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사람을 볼 때도 세속적으로 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요 몇 칠 아이에게 유튜브에서 우크렐라로 노래를 부르는 여자아이의 노래를 들려줬습니다.

오늘 아침에 아이가 저에게 말합니다.



‘연두색 옷 입은 누나 노래 틀어줘~’



저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고 잠깐 생각한 뒤 아마 우크렐라로 노래를 부르는 그 소녀겠지라고 짐작하여 그 노래를 들려줬습니다. 아이와 같이 봤지만 저는 그 소녀가 연두색 옷을 입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래 제목, 그 아이 이름 등에 대한 정보는 있었지만 대상의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추상화와 개념화는 인간의 특징이겠지만 엄청난 훈련의 결과 추상이나 개념만 남아 버렸나봅니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도 그런 사회적 분류표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도덕주의는 이렇게 읽힙니다. 어느새 저도 사람을 볼 때 도덕주의로 보고 있는 것 같네요~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니까 법도 필요하고 사회 도덕에 대한 훈육도 필요하다. 이성적으로는 이런 논리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 깊숙이 그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설령 어떤 행위가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파커의 말처럼 ‘공허한 자아’에서 생겨난 것이지 사람이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이타적 존재로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런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이 언제 였나 더듬어보고 그 때에 구체적인 제 마음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네요~

세속주의와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혹은 그런 사고로부터 벗어난 순간 나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그것이 순간이지만 100배 정도 느린 속도로 살펴볼 수 있다면 굉장할 것 같습니다.

몇 배속으로 빠르게 보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느리게 살펴보는 것이 힘들겠지만 노래 가사처럼 순간을 영원으로 생각한다면~ ^^



어제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서 저에게도 ‘참자아의 증거’들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진숙쌤, 주쌤, 임쌤, 민주쌤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이 모여 두런 두런 이야기 나누고 음식 나누고 차 나누고.... 방구석 구석 활짝핀 장미와 함께 봄밤을 즐겼습니다.

조만간 사는 곳을 먼 곳으로 옮기게 된 진숙쌤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가시기 전에 뵐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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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독서연찬회 감상문 ‘함께 홀로되기’

한 달 만에 독서연찬회 감상문을 씁니다. 한 달 동안 세 번을 만났고
또 온전한 삶의 여행 4장 ‘함께 홀로되기’를 같이 읽었네요~
첫 주는 정진숙 쌤이 준비해주셔서 구 남원역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고 두 번째 주는 강영희 쌤 초대로 시인의 집에서 맛있는 저녁과 함께 독서모임을 했습니다. 어제는 신마담의 하우스 까페에서 뵈었네요~

4장을 읽으면서 어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불교의 연기법이 생각났습니다. 함께 홀로된다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게 다가오네요~ 예전에 본 삼총사라는 만화에서는 “하나를 위한 셋, 셋을 위한하나!”를 외쳤지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아트만과 브라만 등 등 인간의 역사가 함께 홀로되기의 실험은 아니었을까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개인과 사회가 조화롭게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었겠지만 파커가 제시하는 방법에 귀가 솔깃합니다. 분별없이 존재를 만나고 상대를 고치려하지 않고 서로가 자신의 참자아를 찾도록 돕고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가족이 신뢰의 써클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을이 신뢰의 써클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상대가 있는 것이기에 뭔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혼자서 판단하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신뢰의 써클은 어디에 있을까? ^^

‘홀로됨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뢰의 써클은 각자가 자아에게 떨어져 있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돕는다. 내면에 귀를 기우릴수록 다른 사람에게 보이도록 하는 행동과 말이 줄어들겠지요? 2주 만에 하고 또 이런 저런 일이 밀려있어 나가기 귀찮다는 생각이 잠시 나기도 했습니다만 다녀오고서 나가서 얼마나 다행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

사진은 지난 주 강영희 쌤 집 모습과 어제의 모습입니다.
두 분 다 시인이시더군요~ 강영희 쌤 텃밭이라는 시 밑에 부부 시인의 사진이....
시인 집에서 들었던 생각~
‘어디에 사느냐 아니? 사는 곳을 어떻게 하느냐’ - 지금 여기 내가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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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독서연찬회 ‘여행을 위한 준비-신뢰서클 만들기’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 문제 자체로 인해 쓸모가 없어지는” -자기 영혼과 멀어지는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서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부서뜨리는 삶,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삶 때문에 서클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02p 캐치 22)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조종사들은 미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교체되지 않는데 어떤 조종사가 자신의 임무가 위험하다는 걸 안다고 하면 그것은 제정신이기에 절대로 교체될 수 없다”는 역설이네요~

세월호 선장을 생각해봅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출항하여 끔찍한 비극을 만들었네요~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해운업계에서 통용되고 있었겠지요? 이런 일들이 어디 세월호 뿐이겠습니까? 환경이나 먹거리를 생각해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전체 인류에게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혼자서 어쩌겠어 하는 생각에 그렇게 흘러가니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뢰의 써클 만큼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누구나 필요 하다고 하지만 그것 조차도 ‘현재의 삶 때문에 서클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니 신뢰 써클의 첫 단추가 어떤 것인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찰은 필요한 데 바빠서 성찰할 시간도 없다는 모순일까요? 파커는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유연한 것 같습니다. 써클은 폐쇄적이지도 않고 독립적인 필요도 없이 구성원의 조건에 맞게 열려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파커는 ‘우리는 그 낭만적인 환상을 털어버리고 동시대의 현실을 존중하면서 함께 하는 삶의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상대를 ‘고치려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구성하는 커뮤니티는 지금 있는 곳 누구와도 시작해 볼 수 있는 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지난 번 독서모임 때는 위 내용보다 의심과 믿음의 역설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의심, 절망, 고통 없이 살아 가고픈 바람에서 그것들을 거부하면 믿음, 희망, 사랑도 마찬가지로 간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거부하지 않는 다는 것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라면 의심, 절망,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통스럽게 살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앞서 캐치-22에서 파커는 ‘이 “여긴다”는 짧은 어구에 캐치-22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숨어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고통스럽게 여긴다.’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과 어떤 것을 고통스럽게 여긴다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네요^^

이번주은 6장 빗대어 말한 진실 ‘비유의 힘’을 같이 읽습니다.
혼자 읽으면 그냥 지나치는 것들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발판 삼아 더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참으로 오묘합니다. 혼자는 자기 생각에 갇히기 쉬운 관념의 특징 덕 이겠지요~ 지난 주는 사진이 없네요~ 지난 주는 양윤화쌤, 강영희쌤, 신명숙쌤이 함께 읽었습니다.

‘온갖 진리를 말하되, 빗대어 말하라
빙 둘러가야 만나리니
우리 허약한 기쁨에게 너무도 눈부신
진리의 빛나는 경이로움을
-에밀리 디킨슨




연찬문화연구소 | 4월 9일 독서회 "높은 밑바닥과 상대적 빈곤"에 대하여...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4월 9일 독서회 "높은 밑바닥과 상대적 빈곤"에 대하여... - Daum 카페

4월 9일 독서회 "높은 밑바닥과 상대적 빈곤"에 대하여...|독서연찬

맑은공기|조회 99|추천 0|2013.04.15. 11:44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17

상대적 빈곤과 높은 밑바닥



얼마 전 광주에 사는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 확장형 34평 아파트를 분양 받아 살고 있는 친구 집은 내 눈에는 굉장히 넓어 보였다. 방도 화장실도 거실도 4인 가족이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부부는 맞벌이로 돈을 번다. 와이프도 직장생활을 하고 친구는 정규직만큼 돈을 버는 작은 사업을 한다. 이런 정도면 이제 좀 인생을 즐기라는 말에 친구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근처에 50평 규모의 아파트가 있는데 아이들을 봐서도 그렇고 자꾸 비교되기에 돈을 더 벌어야 한단다. 도시에서 아이들 키우며 학원도 비교하고 집도 비교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내 친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상대적 빈곤이야 해결이 되어야겠지만 마음의 빈곤감을 어찌할 것인가?



연찬문화연구소에서 매주 화요일 독서 모임을 하는데 지난 주 내용 중 하나가 “높은 밑바닥”이었다.



“「이것만큼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일선을 가지고 있으면, 있는 것이 안보이게 된다. 하지 않았다, 조금 밖에 없다 등「없는 것이 보인다?」고 하는 이상한 증상을 초래한다.

그렇게 해서 물건이 늘어 편리하게 되는 것에 따라서, 「있는 것이 당연」의 일선이 자꾸자꾸 올라간다.「높은 밑바닥上げ底」증상, 즉, 물건이 늘어 편리하게 되어도, 불평이나 부족감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사람의 본성의 맞는 사회 중>



마음의 빈곤감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과 이것만큼은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으면 있는 것도 못 보게 되고 또 물건이 늘어 편리하게 되어도 불평이나 부족감이 항상 따라다닌 다는 것이다.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 빈곤은 해결되어야 할 사회적 과제이지만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마음의 빈곤감을 해소 하지 않고서야 한정된 지구에서 인간이 풍요로운 물질 문명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이것을 책에서는 높은 밑바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내 친구뿐 아니라 우리는 높은 밑바닥 사회를 살고 있으리라~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제도개혁뿐 아니라 높은 밑바닥 문화로부터 벗어나는 것 까지도 함께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것을 이남곡 선생은 ‘자발적 풍요’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가난해지자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풍요로워지자는 것이다. 우리 인생과 사회가 정말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벌고도 인생이 허하다는 친구에게 권했었다. “너는 창을 배워라 내가 장단을 칠테니... 다음에 만나면 권주가를 부르면 놀자~” 돈 벌기 바쁘다던 친구는 어느새 사철가를 외워서 나에게 빨리 장단을 치라고 난리다. 사철가를 배우는 내내 내게 전화로 언제 만나냐고 독촉이다.

130305 독서 모임 후기(차차) - Daum 카페

130305 독서 모임 후기(차차) - Daum 카페



3월 5일 독서 모임 후기(차차)|독서연찬

차차(임경환)|조회 64|추천 0|2013.03.06. 21:32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14



매주 화요일 7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남원 일대에서는 독서모임이 열린다.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라는 책을 읽는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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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일본에 있는 as one community에 대한 소개와 이 community의 기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엔즈라는 사고방식에 대한 얘기들이 적혀 있다.

이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자리이다. 특별한 사람이 이 책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이해시켜주는 자리가 아니라, 모여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든 나누는 자리이다. 반드시 모여야 하는 자리도 아니고 자신이 오고 싶을 때, 상황이 될 때 모이는 자리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진지함과 유쾌함이 넘나드는 자리이다.

진행방식도 따로 없다. 그냥 책을 읽고 나가다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나누는 것이 방식이라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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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3월 5일)는 11명이 모였다. 철도기사님, 초등학교 선생님, 보건소장님, 된장공장 사람들, 학교 행정실 선생님등등이 모였다. 이날은 이남곡 선생님은 몸이 안 좋으셔서 나오지 못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주로 우리는 왜 빨간 신호에 멈추는가에 대해서 얘기해 보았다. 누가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 된다.

우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읽었던 부분을 잠깐 인용해 보겠다.

'빨간 신호에 멈추는 것은 왜인가?'라고 물으면 그 이유를 답하겠지만, 일상적으로 빨간 신호를 보면 그 이유를 의식할 것도 없이 멈추려고 한다. '왜 멈추지?'라는 물음 등은 나오지 않는다. 빨간 신호에 멈추지 안는 사람을 보면 놀라거나 '왜 멈추지 않는가?'라고 의문스럽게 생각하거나 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감각이 있어, 그 사람의 의사에 의해 멈추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빨간 신호에 멈추려고 하는 자신은 왜 멈주려고 하는 것인가, 자신의 감각으로 파악해 자신의 의사로 멈추고 있다고 하는 자각이 있을까? 101쪽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빨간색 신호등을 보면 멈추지? 평소에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멈추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빨간색 신호에는 멈추라고 배웠으니까. 사회화가 된 것이겠지? 아니면 내가 살고 싶어서 멈추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멈추지는 않는다. 야밤에 차와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 빨간색 신호등이 켜져 있을 때 나는 거의 대부분 그냥 지나간다. 그럴 때 여러 가지 마음이 든다. 난 규칙을 지키지 않은 나쁜 사람이야, 혹시 다른 차가 갑자기 나타나서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면 안 되는데 등 그때 그때마다 다른 생각들이 올라온다. 그리고 약간은 법을 어겨서인지, 아니면 불확실한 것에 도전해서인지 짜릿함도 있다.

이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규칙, 규범, 약속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왜 규칙이 생겨났을까, 우리는 규칙에 얼마나 자유로운가, 혹시 우리는 규칙에 매여있지 않은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규칙은 안전을 위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나왔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계속 검토를 해 보았다. 많은 경우에는 그것 때문에 규칙이 생긴 것 같았다.특히 빨간 신호등에서 멈춘다는 규칙은.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초등 학교 수업 시간은 40분 공부하고 10분 쉰다, 그리고 10분 뒤에는 다시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도 일종의 규칙인데,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일까? 수업종이 울리고도 들어오지 않는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을 많은 아이들이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아이들은 피해를 봤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더 놀고 싶은 아이들은 더 놀고 나머지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얘기도 나왔다. 이 규칙은 원할하게 학교생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조직이 굴러가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 하는 얘기도 오갔다.

나는 운전중에 안전밸트를 매야한다는 규칙은 왜 생겨났을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것을 지키지 않았다고 벌금을 내야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 생각에 이 규칙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 규칙은 국가가 개인의 안전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데, 국가가 과도한 걱정을 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외에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이번 모임은 남원아이쿱 카페에서 찻값만 내고 진행되었다. 그것도 정진숙 선생님이 계산하여서 돈 한 푼 안 들고도 이렇게 재미난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공간은 참 중요하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적인 공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번 자리에서도 다시 한번 느꼈다. 남원 아이쿱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졌다. 다음 모임은 어디에서 모일지, 어떤 사람들이 또 올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도 재미있다.

모임을 마치고, 정진숙 선생님이 치킨을 세 마리나 쏘셔서 배터지게 먹었다. 정진숙 선생님 표현대로, "즐거운 출혈" 덕에 많은 중생들이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다. 그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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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끼 13.03.27. 18:09

독서연찬에서 오랫만에 만난 배이장님의 새해소망, 집짓기..

배이장님 만나는 화요일마다 속으로 생각해요. 올해 소망하는 작은 집이 멋지게 지어지길~!!

임경환샘은, 4월 8일 떠나신다니, 아쉬운 한편 부럽기도 하구요.

지구가 둥글다니, 둥근가보다 하는데.. 유럽 다녀오신 다음, 둥근 지구에 대해 말씀하시면, 믿을께요.^^

넉달동안, 새로운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하시고,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으로 돌아오시길요~

그리고, 호영샘이랑, 호근샘.. 두 분 콤비 빈자리가 컸어요!

호근샘이 진주로 떠나신다는 소식에.. 우리 봄소풍도 갈건데.. 허전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네요.

진주가 아예 먼 곳이 아니니, 가끔 볼수 있길 바래요..

121127 독서연찬회 -정다운 사회의 시도 - Daum 카페

121127 독서연찬회 -정다운 사회의 시도 - Daum 카페

<11월 27일> 독서연찬회 -정다운 사회의 시도|독서연찬

맑은공기|조회 70|추천 0|2012.11.29. 13:02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8

27일에는 10분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장 정다운 사회를 다 읽고 이제 2장 에즈원 커뮤니티의 다양한 활동들을 읽었습니다. 꼭지 하나 하나 읽으면서 그때 그때 이야기 되는 방식이어서 녹취가 쉽지가 않아 본문만 올립니다. ㅋㅋㅋ

찐고구마를 김장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으면서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모두 내놓고 인생을 하나의 실험으로 살아가는 에즈원 커뮤니티 분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좀더 가까이 살고 싶어 집을 옮기기도 하고 자유의 기풍을 바탕으로 일을 해나가는 모습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회를 성립시키는 바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성립의 바탕에는 어떤 사회관과 인간관이 있는가? 생각해 볼게 많은 테마들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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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정다운 사회의 시도

1. 에즈원 커뮤니티

O 시작

커뮤니티의 시작은 2000년 말부터 2001년 초에 걸친 일로서, 마침, 20세기로부터 21세기로 바뀌는 때 였습니다. 정말로 사이좋게 친하게, 누구나가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뜻있는 이들이 모여 이 활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장소는, 미에현(三重縣)의 스즈카시(鈴鹿市)입니다.

에즈원 커뮤니티라고 하는 명칭은 최근에 붙인 것으로, 그렇게 부르게 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명칭도 없이,「하나의 사회의 시도」라거나 뭔가라고 말하고 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격의(隔意)나 경계(境界)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반목(反目)이나 대립(對立)이 없는, 규모는 작아도, 가족과 같이 친근하고 다정한 사회를 실현(實現)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O 스즈카(鈴鹿)로

우선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은 계기로 몇 명의 뜻있는 사람들이「새로운 사회의 시도를 하나에서부터 해보자」하고, 우연히, 이제까지 관계도 인연도 없는 이 미에현(三重縣) 스즈카(鈴鹿)의 땅에 모였습니다.

그 이전부터,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모임은 이루어져오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앞으로의 사회나 각자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의(討議)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임이 유지(有志)에 의해 스즈카(鈴鹿)에서 행해지게끔 되자, 그것을 듣고 각지로부터 참가자가 생겼고, 그 참가자 안에서 「새로운 사회의 시도」를 같이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잇달아 나타나서, 스즈카(鈴鹿)로 옮겨 와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기세는 상당한 것 이었는데, 각자 이제까지의 직업이나 사는 집을 그만두고 정리하여, 이 활동에 전부를 걸고 하는 것이어서,각자의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며 큰 결단을 내리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1년(2001년) 동안에 50세대 이상이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O 사는 집

이렇게 해서, 각자의 신천지(新天地)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는데, “이 활동을 해가는 데에 있어서 큰 요소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낀 것은, 서로 사는 곳의 거리입니다. 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별로 그런 관점도 없이 각자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집을 정했기 때문에,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도 있고 1~2km 떨어진 집도 있었습니다. 무슨 활동을 할 때에 모이는 것 만이라면, 1~2km정도가 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일상생활이라고 하면, 마음 편하게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은 아주 편리하고 쾌적한 것이기도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요소라고 느꼈습니다.

개중에는, 살기 시작해서 얼마 안 되었지만,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다고 수 백 미터의 거리를 위해서, 일부러 사는 집을 옮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같은 맨션이나 아파트에 10세대 정도가 입주하는 등, 재미있고 즐겁게 신생활을 시작했습니다.

O 일

그 다음으로 크다고 느꼈던 것은, 각자의 일이라는 요소입니다. 각자가 취직자리를 찾아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 일과 활동의 양립(兩立)이라고 하는 과제입니다.

「새로운 사회의 시도」라고 하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검토하거나 시도하고 싶은 일은 많이 있었습니다만, 각자가 시간적인 제약(制約)이 있어서, 서로 같이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었습니다. 여가(余暇)나 휴일의 짬을 내서 시간을 할애하는 소극적인 활동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좀 더 활동할 수 있도록 해가자고, 제각기의 지닌 맛이나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살려서, 자영업(自營業)을 시작한다거나 몇 명이서 회사를 차린다거나 하였습니다. 여러 업종에 손을 대었기에, 순조롭게 되어가는 일이나, 순조롭게 못가고 도중에 그만두는 일 등이 있었습니다만, 이처럼 자기들끼리 사업을 행하는 것에 의해, 일과 커뮤니티 활동이 별개로 영위하는 것이 아니고, 커뮤니티 활동의 일환으로서의 각자의 일이나 사업경영이다 라고 하는 방향성이 보여 왔습니다.

O 자기를 살펴보는 기회

다음으로 떠올려 진 과제는, 「일상을 떠나서, 차분히 생각하는 기회를 갖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차분하게 자기가 자기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머리도 몸도, 생활이나 일의 문제로 소비해 버리고, 또, 각자의 취미나 오락이나 문화적인 활동 등도 있습니다만,그런 일상의 자기 페이스로부터 떨어져 자기자신 그 자체를 새롭게 응시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는가」라고, 자기가 자신을 다시 새롭게 응시해 보는 기회입니다.

그리하여, 점차로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있게 되어, 단지 막연하게 생각하는 기회가 아니고, 자기자신을 살펴보는 요점이나 순서 등,검토를 더해가며 몇가지의 코스를 마련할 수 있게 되어,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자기자신을 살펴보는 기회가 정착되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 의한 기풍이 침투되어, 이 「새로운 사회의 시도」라고 하는 활동의 척추로서의 자리 잡힘이 명확하게 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에 언급할 「사이엔즈 스쿨」이라고 하는 기관에로 정비되어 갑니다.

O 연구와 시험

겨우 2,3년 사이에, 같이 활동하려고 하는 사람은 배(倍)로 늘어나고, 혹은, 당초에는 같이 하려고 했던 사람 중에서도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어, 많은 사람의 움직임 속에서 사업이나 생활 등 수많은 변천(變遷)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이전부터 사람이나 사회에 대해서의 연구회를 계속해 온 유지(有志)의 멤버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의 활동이나 여러 생긴 일 하나 하나를 시험(試驗), 실험(實驗)적인 활동으로서 이해(理解)하는 것에 의해, 갖가지 연구과제가 명확히 드러나게 되어 왔습니다.

이 커뮤니티 활동이 번창하게 되면 될수록, 점점 연구활동의 필요성도 높아져, 연구기관으로서 2004년에 「인간사회과학연구소」를 발족하였습니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사이엔즈 연구소」라고 하는 기관으로 진전하게 됩니다.

「새로운 사회의 시도」라고 표현한 것처럼, 여기에서의 커뮤니티 활동은, 전부가 시험, 실험 단계의 것으로, 체험한 것은 전부가 연구자료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두가 지향하는 사회나 이상(理想)적인 삶의 방식을, 각자,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서의 검토기회를 가지면서,「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그렇게 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인가」하고, 시도와 검토를 반복하여 쌓아가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몸에 붙어있는 생활양식(樣式)에 사로잡힌다거나, 보수적(保守的)이 된다거나 하지 말고, 생활형태를 하나하나 고쳐서, 사는 집이나 집안일이나 가계(家計)의 단위를, 복수(複數)의 가정(家庭)이 모여서 공동으로 하는 것 같은 형태를 취해 본다거나, 또, 분산해 보기도 하고, 일의 면에서는, 음식점이나 보육원 등에도 손을 대어, 개개의 수입(收入)을 위해서라기보다 서로의 삶을 떠받치고, 활동을 떠받치는 산업으로서 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세월이 더해가며 서서히 보여 온 것입니다만, 지향하는 사회를 그리며 실현해 가는 데에는, 그 구체적인 구조나 운영의 방법 면보다 그 전에, 좀 더 중대한 요소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져 왔습니다.

O 사회관(社會觀)과 인간관(人間觀)

「사회관(社會觀)」 「인간관(人間觀)」이라고 하는 말에 친숙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사회나 인간에 대한 관점」입니다.

현상(現狀)의 사회에는, 대단히 많은 법률이나 규칙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의무다 책임이다 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게다가, 지키지 않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벌칙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법의 눈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끝이 없고, 그것을 단속하는 사람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베이스에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법을 지키는 의무나 책임이 필요하다」라거나 「법률이나 벌칙을 만들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회관(社會觀)」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 「사회관」의 근본에는 「인간에게는 의무나 책임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거나, 「단속하지 않으면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한다」라고 하는 「인간관(人間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너무나도 당연하게 되어있는 「사회나 인간에 대한 관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붙어버린 것입니다만, 그것을 다시 살펴보면, 정말은 바라지 않았던 일이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데도 하고 있는 일이 많이 있겠지요.

정말로 살기 좋은 사회를 실현하려고 할 생각이었는데도, 「사회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하고(포기하고) 있는 사회관(社會觀)이나 인간관(人間觀)이라면, 새로운 사회는 태어나지 않겠지요.

이렇게 해서, 자기 속에 있는 사회관이나 인간관을 알아차리게 되면, 「사회란 어떤 것일까」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하고,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싶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O 자유의 기풍(氣風)

에즈원 커뮤니티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적고 좁은 것입니다만, 사람이 모이는 것에 의해, 넓은 범위의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보다 큰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혼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쉬게 되면 일이 정지해 버립니다만, 많은 사람과 같이 하고 있으면, 한 사람이 쉬어도 일이 정지되는 일은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세상에서는, 조직(組織)을 보아도 작은 단체를 보아도, 개인의 자유의지보다도 주위사람의 시선을 신경 쓴다거나, 전체의 형편이나 규칙, 룰이 우선적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모두 같이 행동할 때에는, 혼자 할 때처럼 자유롭게는 행동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지요.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것에 의해 자유로이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얘기네요.

왜,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것인가. 거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종래(從來)의「사회관(社會觀)」, 「인간관(人間觀)」이 커다란 요인으로 들어 올려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자유를 우선적으로 하고 있으면 사회나 조직은 성립될 수 없다」거나, 또는,「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데에는 규칙이나 인내가 필요하다」 등의 사고방식이 강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더욱 크게 실현하기 위해서의 사회나 조직」이 아닌, 「사회나 조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으로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겠지요.그래서,

그것에 위화감(違和感)을 느끼는 일도 없이,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희들은, 개인의 의지를 굽힌다거나 누르거나 할 필요가 없고, 누구나가 자유롭게 쭉쭉 신장하며 행동하는 것에 의해, 진보(進步),발전(發展)하는 사회나 조직을 그리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자기 멋 대로다」 「자기중심적이다」 「협조성(協調性)이 없다」는 등이라 말하며,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욕구를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규칙이나 룰, 모두가 결정한 것이나 일의 형편 등을 강요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없어져서, 자기의 사고방식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견책(譴責) 한다거나 비난하는 일 없이, 「하고싶다」거나 「하고싶지 않다」거나,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자유의 기풍(氣風)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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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꽃 12.12.02. 18:41

글을 읽으며 에즈원에 관련한 사람들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닌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내부에도 이런 생각들이 숨어있을텐데 밖으로 꺼내놓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동조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다수의 생각대로 내 생각을 꿰맞추며 살아온 습관적인 삶, 변화에 대한 두려움 ~등이지 않을까?라는 짧은 생각.저는 본문 중에서 일, 자기를 살펴보는 기회, 연구와 시험 ,자유의 기풍을 인상깊에 읽었습니다.자신이 하는 일과 추구하는 삶이 따로이지 않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자기 삶의 목적성이 일속에서 얻어지고 생활도 유지되고 내 의식이 좀더 발전적으로 나아가고행복하다면

맑은공기 12.12.03. 11:54

그러게요~ 자유의 기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함께 사는 사회에 보탬이 되어 더 풍요로워지는 그런 인생이라면...



121007 사람과 사람, 친한사이에 대하여...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2012년 10월 7일> 독서연찬회 풍경 - 사람과 사람, 친한사이에 대하여...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2012년 10월 7일> 독서연찬회 풍경 - 사람과 사람, 친한사이에 대하여... - Daum 카페



<2012년 10월 7일> 독서연찬회 풍경 - 사람과 사람, 친한사이에 대하여...|독서연찬
맑은공기|조회 97|추천 0|2012.10.10. 15:02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2
<2012년 10월 7일 저녁 7시 논실마을학교 독서연찬회> 풍경

어제 처음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라는 책으로 독서연찬회를 시작했습니다. 열 두 분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처음 뵙는 분들과 인사를 하고 어떤 분이 ‘인간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왔다고 참가 동기를 이야기 했습니다. 예습도 복습도 필요 없이 언제라도 참가하여 가볍게 읽고 나누는 즐거운 자리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제 나눈 이야기들을 요약해서 올려봅니다. 다시 생각하니 곱씹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강독>

정다운 사회

혼잣말

 오늘 밤도 가족이 모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며, 즐기고 있다.
우리 집은 이 지역 스즈카의 케이블 테레비, 지상파 디지털 방송. 근처의 가전 양판점에서 새벽녘부터 줄서서 산 파나소닉의 비에이라. 큰 화면에 아주 멋지다. 나는 PC 삼매. 블로그에 트위터에 스카이프. 유튜브로 블루스 뮤지션의 라이브 영상을 보는 것이 좋다.
「무엇 무엇을 갖고 싶다」 「어디 어디에 가고 싶다」 「무엇 무엇을 하고 싶다」라고 자기 안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같지만, 현대인의 욕구는, 거의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부터의 정보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돈을 갖고 싶다고 하는 사람 많지만, 진짜 진짜 본심은, 돈을 갖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싫다, 싫은 사람이다, 가끔 밉다든가. 그렇지만, 진짜 진짜 본심은, 싫은 사람이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울거나 화내거나 싸우거나 걱정하거나 참거나 노력하거나, 왠지, 진짜는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있다.
인간은 애처롭다.
자신을 묶어 두고, 가능한 한 자유롭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갸륵한 모습.
지구를 운동장으로 삼아 온 세상의 사람이, 빵 먹기 경쟁을 하고 있는 듯한 웃기는 모습.
험로  난관  장애물을 만들고, 악전고투 하는 인생 게임에, 보람을 느끼고 있을까.
사실은, 괴롭지 않은  어렵지 않은  무섭지 않은 길을 좋아하는데····
어릴 적의 쉬운 길을 잊어 버린 것 일까.
 
아들이 어렸을 때, 둘이서 이른 아침 드라이브를 했다.
 아침 해를 받으면서.
 아들은 「와 저것 봐- 햇님이 굉장히 빨라」
 나는 그 귀여움에 감동-.

 자신을 소중히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하고 싶어진다.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고 좋아해서···.
 어떤 동물보다 인간을 제일 좋아해.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 중에 있기 때문에 안심이 있다.
     ( 2011년 1월 )

<대화>

-‘돈을 갖고 싶다는 사람은 많지만 진짜 본심은, 돈을 갖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요? 돈을 갖고 싶은 것은 본심이 아닐까요?

-태어날 때에는 그런 게 없는데 살아가면서 돈 욕심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요? 본성이 아니었는데 살아가면서 돈이 필요하니까?

-저자가 돈에 맛을 못 본 것 아닐까? 돈의 맛을 보면 생각이 들려질 겁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그랬는데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되려면 약 30억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30억 정도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돈이라는게 없어도 편했는데 쓸 일이 있으니까 필요하게 되니까 돈이 쓸 일이 없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물물교환?

-‘그 사람은 싫다, 싫은 사람이다. 가끔 밉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본심은, 싫은 사람이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요?

-싫은 거와 미운 거는 다른가요?
-이유가 없는 것은(관심도 없고) 싫은 것이고 미워하는 것은(관심도 있고)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경상도에서 살 때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유도 없이 싫어하니까 소통이 안 됩니다.

-말 그대로 혼잣말이니까 독백입니다. 이 사람의 관점이지요? 본심으로는 싫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들었을 때 납득이 갑니까?

-싫은 사람 있거든요, 그런데 미워하거나 싫어하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합리화하는 핑계거리를 생각합니다. 그런 걸로 보면 싫어하는 감정은 겉에 들어나는 표면이고 진짜 본심은 다른 것이 아닐까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면성을 가지고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비폭력 대화법에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표현이다라는 말을 생각해봅니다. 어떤 사람이 싫어질 때 그 사람이 싫은 게 내 어떤 충족되지 않는 욕구의 표현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와이프와 관계에서 보면 와이프가 나에게 냉소적일 때 내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물어봤는데 왜 자꾸 짜증을 내냐고 하면 힘들어서 그런다고 합니다. 내가 싫어서가 아닌거지요~ 그래서 머리로는 싫다는 것이 아닌지 알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면 싫어집니다.

-싫은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 사람이 처음부터 싫은 것은 아니고 만나기 전에 선입견 때문에 싫다가 관계에서는 입장차이가 커지니까 싫어지는 것 같아요~ 사회적 관계를 빼고 보면 이해가 가는데 사회적 관계 안에서 보면 싫어집니다.

-싫고 이런 게 상대방과 단절되니까 그런가요?

-단절되면 그래도 괜찮은데 계속 같이 해야 하니까요~

-여기서 본심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본심이 뭘까요? 누군가 싫거나 미워하면 자기가 힘들다. 불가에서 팔고 중에 하나가 미운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그렇습니다. 본심은 결국 자유롭고 즐거운 상태가 아닐까요? 진짜 본심은 그런데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면 자기가 힘들어지니까 그런 뜻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까 합니다. 본심이라는 게 뭘까요?

-누구를 미워하면 부자유스럽고 불편하니까 본심이 아닙니다. 본심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왜 사람을 싫어하게 될까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봅니다. 싫어하는 사람은 왜 생길까요? 자기 만의 틀에 다른 사람을 끼워놓으려고 하니까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틀에 맞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싫고...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재밌네요~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나는 싫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데 그러면 나는 싫은 사람일까요?

-싫고 좋고가 자기 틀에 맞춰서 그런다고 하는데 아침, 점심, 저녁이 좋다가 인 좋아 졌다가 하는데 그러면 틀이 막 변하는 것인가요?

-사람 마음이 변하니까 틀도 변하는 건 아닐까요? 틀이 변해야 마음이 변해지니까요~

-어머니가 아파서 도와드렸는데 처음에는 고생하는 어머니하고 좋은 기분이 드는데 아침에 일어나라고 하고 너는 왜 그러냐 하면 싫어지고 또 자식 자랑을 하면 좋다가 또 미워지고 그러는데 근데 내가 어머니에 대한 틀이 변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힘드니까 관념 조작을 많이 합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이런 게 틀리다거나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표층의식에서 관념을 조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짜는 뭐냐면 관념 조작을 안해도 싫은 사람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싫은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 좋은데 보통은 싫은 사람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이 책 속에 더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지막 문장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 중에 있기 때문에 안심이 있다.”

-사람과 있으니까 안심되잖아요?

-글쓴이의 의도는 혼자가 아니어서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속에 있어서 염려가 덜해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하고 함께 살아야지 누구와 살겠는가? 사람들 속에 있어야 안심이 있다. 근데 싫은 사람이 있으니까 힘들어진다. 진짜 안심이 되려면 미운사람이나 싫은 사람이 없으면 됩니다. 따뜻한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식들이 안심이 됩니다. 학교라는 곳도 아이들이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왕따도 당하지 폭력도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학교에가면 안심이 되나요?

-머리가 아파요~

-여기에 나와 있네요 ‘울거나 화내거나 싸우거나 걱정하거나 참거나 노력하거나’...학교에 가면 이래요~

-염쟁이 유씨라는 연극을 봤는데 주인공이 죽은 사람이 뭐가 무서워 산사람이 무섭지 그러는데 관객들이 모두 공감을 합니다. 지금 사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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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독>

제1장 정다운 사회의 기본

1. 사람과 사람

사회라고 하는 것은, 복수(複數)의 사람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한사람으로는 사회로는 되지 않습니다. 또,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 인간을 사회적동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사회에는 복수(複數)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만, 복수(複數)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고, 복수(複數)의 사람이 서로 관계해가면서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회에 대해서」말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란, 어떤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관점으로부터 얘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주위에 사람이 있는 까닭에, 태어나서 곧,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는, 깊다 얕다, 진하다 엷다, 친하다 친하지 않다 등 있습니다만, 이것은 물리적(物理的)인 것이 아닌, 심정(心情)이나 기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물리적으로 가깝다고 해서 반드시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년이나 이웃에 살고 있다고 해서 꼭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통근통학(通勤通學)의 만원전철에서, 매일 딱 붙어있다고 해서 친한 것은 아니겠지요.
혈연(血緣)은 물리적인 관계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혈연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깊음이나 가까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예를 들면, 낳아준 어머니라고 해도 그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친숙함도 정(情)도 솟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혈연의 가까움=관계의 짙음, 애정의 깊음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태어난 직후에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라도 동등(同等)하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져서 자란다면, 그 사람이 가장 가깝고 친한 사람이 되겠지요. 즉 바꿔 말하면, 사람은, 어떤 사람하고도 가깝고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 런지요.
부모형제와 쭉 같이 살고 있어도 친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친하게 될지 안 될지는 환경적인 요소(要素)나 여러 가지 체험, 가치관의 차이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환경이나 기회(機會), 사고(思考)의 변화 등에 의해서, 어떤 사람하고도 가깝고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연애(戀愛)나 결혼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사람이, 가장 친한 관계가 된다고 하는 현저(顯著)한 예입니다. 또, 활동이나 생활을 같이 하는 것에 의해서, 부모자식 형제이상의 매우 친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대화>

-결혼하는 것을 보면 기적같아요~ 나는 전라도고 처는 경상도입니다. 참 만난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입니다. 여기에서는 누구하고도 친해질 수 있는 증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만났으면 잘 살아야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추석 후에 이혼이 3배가 는다고 합니다.

-고부 갈등이나 남편과의 갈등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부부간의 갈등이 되기도 합니다.

-요 단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닐까요?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환경이나 기회, 사고의 변화 등에 의해 어떤 사람하고도 가깝고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고 쓰여 있는데 환경도 중요합니다. 특히 교육 환경도 중요한 요소 같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이좋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바탕이 뭐가 있을까 환경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고의 변화, 우리가 인문운동이 표방하는 것도 사고의 변화인데 환경만 변한다고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고의 변화에 따라서 사람하고 가깝고 친한 관계가 되는 거는 사고가 다른 사람하고는 멀어지는 것 아닐까요? 사고가 변했는데 사고가 변했다고 멀어지면 생각이 다르거나 사고가 다르다는 것으로 인간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많이 보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 말하는 사고의 변화는 우주 자연의 이치에 맞는 사고를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한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닐까요. 공자도 받아들이는 것을 제일 강조합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실제로는 잘 안 받아 들여집니다. 이치에 맞는 사고가 뭐냐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부부가 하는 게 받아들이는 연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만나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선 만해도 어떨까요? 받아들이는 것은 성인군자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내가 못 받아들이는 것에서는 인식이 됩니다. 과학적으로만 보더라도 알게 됩니다. 내가 옳다는 사고법이 이치에 맞는 사고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습을 마음 바탕으로부터 하는 것이 부부가 아닐까요?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을 때 연습의 기회로 해서 하면 어떨까요? 부부는 스파링 파트너가 부부사이에 연습을 하다보면 나가서도 되는 것이 아닐까?

-연습하다가 실전이 됩니다.

-내 생각이 옳다라는 것을 깨야 되는데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포기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제 생각이 옳지 않은 것일까요?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생각이 아닐까요? 자기 머릿속의 생각이 어떻게 만둘어졌는지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부모, 학교, 혹은 인터넷 등의 정보를 툴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것을 봐도 서로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가요?

-고정함 없이, 단정함 없이 되돌아 봄.

-시대적으로 그런 시대가 된 것이 아닐까요? 사고법의 전환이랄까요?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로부터...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치에 맞는 사고법으로...

-현대인들의 욕구가 정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책에 쓰여있는데 여러 영향으로 만들어진 생각들이 마치 옳다라고 여겨지는 것. 그것에 의해서 관계라든지가 어려워지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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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친한 사이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 아버지, 형(오빠), 누나(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등, 사람과의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가족이라든지 가정(家庭)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입니다만, 이것도 하나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매우 친한 관계의 사람들입니다.친한 사람들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동시에, 대단히 안심상태(安心狀態)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경우에도,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반드시 혈연관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혈연관계의 부모형제가 아니라도, 가족이라든지 가정이라고 하는 가장 친한 관계, 안심상태(安心狀態)는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족이라고 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예를 들면, 근처의 사람들이 매우 친한 사이로, 가족처럼 대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근처의 아는 집에서 식사를 한다든지, 목욕한다든지, 묵기도 한다.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자란다면, 가족이외의 사람하고도 가족같이 친숙한 기분이나 안심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것과는 반대로, 가족이외의 사람하고는 서먹서먹하고, 마음써야하고, 염려나 사양이 필요한 관계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친해진다든지 친해지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개인차도 있습니다만, 주위사람의 존재가, 「자기에게 있어 어떠한 사이의 사람인가」에 따른 것이겠지요. 바꿔 말하면, 주위사람들의 기풍(氣風)등으로부터 「친숙함이나 안심을 체험, 실감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자」하고 의식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요.
앞에서도 얘기했습니다만, 사람은 환경이나 체험에 의해서, 누구하고도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친숙한 인간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 안심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사회의 중대요소(重大要素)이기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안심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네요. 마음이 편안한 상태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불안사회에서 안심사회로...

-농담을 했을 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 안심이 되는데 흘겨보거나 하면 안심이 안됩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사회, 저희 부부가 처음에 야마기시를 나와서 해보려 했던 것이 서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웃들입니다. 귀농했다가 역귀농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이웃과의 갈등이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 피해 살려면 대도시 아파트가 났습니다. 귀농하면 된통 걸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한사이가 안심이 되는 사회인가요?

-사람들과 친하게 되면 안심이 되는 것 아닌가요?

-친한게 뭔가요?

-너무 친해도 안됩니다. 거리가 중요 합니다.. 거리를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한 공식이 하나 있는데 ‘사람사이에 적당한 거리는 아집에 반비례한다’입니다. 아집이 강한 사람끼리는 거리가 떨어져야 합니다. 부부도 아집이 강한 사람들은 주말 부부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집 들이 엷어 져서 가까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부부가 힘든 요소 중에 하나가 너무 가깝다는 것입니다.

-관계에 거리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관계의 거리가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거리를 유지할 때 가장 편안해질 때 마음이 편해지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환경의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의 생활공간이 달랐습니다. 남자는 사랑채, 여자는 안채로 다릅니다.

-아는 지인이 빵집을 하는데 부부가 사이좋게 잘 지냅니다. 그런데 그 사장의 소원이 아내하고 떨어졌다 만난다는 것입니다. 저도 실감이 나는데 직장에 헤어졌다 만나는 싸이클인데 몇 칠 늘 붙어 있다 보면 몇 건씩 터지는 것 같습니다.

-같이 있는 시간에 비례해서...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만나 살다보면 부딪히는데 그것이 조율이 되는 것 같습니다. 관계의 거리가 바로 조율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요? 조율이 되면 편안해 집니다.

-자연스러운 상태가 뭔가요? 저는 거리를 두는 편인데 그것을 상대방이 뚫고 올 때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교사는 노후가 걱정이 없잖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노후 대책이 없습니다. 복지라는 것도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그것만 가지고 안심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 속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산사음악회에 다녀왔는데 70~80먹은 사람들이 연주도 하고 시낭송도 합니다. 곱게 늙고 아집이 없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지와 함께

-안심이 친한 사이가 있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힘든 사회에서 친한 사이가 있다는 것. 아이들 끼리의 어려움들을 한명이라도 친한 아이가 있으면 어려움이 가벼워지는 것 아닐까요? 사회도 그런게 아닐까요? 저희 어렸을 때 이웃집에서 밥먹고 자는게 자연스러웠는데 에즈원 커뮤니트에서 충격 받은 게 가족관계에서도 어려운 친한 관계들이 이웃과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학교도 안심할 수 있는 학교, 마을도 안심할 수 있는 마을~ 그런 사회를 마음 깊은 곳에서는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안심이라는 것이 불안 요소를 없애는 것인데...

-이야기 할 것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전에 연찬을 진행 할 때 불안 요소가 있습니다. 다 말하고 혼자 말 안했을 때 불안합니다. 이야기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환경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분위기 자체가 강요하는 분위기면 안심이 안 됩니다.

-안심과 긴장. 거리를 다른 표현으로 긴장은 어떨까? 긴장이 불안요소가 아니고 다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친한사이는 긴장이 없는 것일까요? 안심만 있는가요?

-친하면 긴장이 없지 않을까 부부가 긴장하고 살지 않잖아요

-너무 편하면 막하게 되는데 약간의 긴장은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정없는 사고도 긴장적인 사고가 아닐까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것이 조바심이 아닌 긴장이 아닐까? 안심에는 긴강의 요소는 없을까 생각되어졌습니다. 가족들하고도 친한 사이에서 좋은면 더 해주고 싶은데 뭘 해줘야 기쁠까 하는 생각은 긴장의 긍정적인 요소이고 긴장이 잘못 풀리면 대립으로 가지 않을까요?

-긴장이 몰입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어떨까요?

-관계의 긴장감을 주고 받으면 서로 편한 것 아닐까?

-긴장이 아니라 관심아니 집중이 아닐까요?

-친한사이가 어떤걸까? 안심상태가 어떤 걸까? 고민되어서 이야기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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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웃음소리와 같은 것은 담지 못했네요~
말씀하신 분들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정리되었더라도 그저 한사람의 참가자의 의견으로 생각해주세요~ 수요일 오후 신정식님과 콩밭에 들렀다가 어제 나눈 이야기를 다시 이것 저것 꺼내봅니다.

차를 만들 때 불안합니다. 지금은 구절초가 필 때 니까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꼭 안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불안이 없어졌습니다. 토론도 꼭 말을 해야 하거나 그런 불안감에서 벗어나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토론회니까 안심하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 신정식님의 후기

130205 독서연찬회 대화 :사이엔즈에 대하여 - Daum 카페

130205 독서연찬회 대화 :사이엔즈에 대하여 - Daum 카페

맑은공기|조회 72|추천 0|2013.02.07. 09:08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12

스마트폰 맹의 슬픔

녹음된 걸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녹음이 안 된 줄 알았는데 제 스마트폰 스승이신 임경환 선생님이 몇 번 터치 하니 녹음된 기록이 나옵니다.^^ 두 장의 사진과 대충 정리한 녹취록 올립니다. 녹취를 하면서 다시 들으니 재밌네요~



처음에

1 고정이 없는 과학· 철학, 즉 「사이엔즈」

「사이엔즈·S C I E N Z 」라고 하는 말은, Scientific Investigation of Essential Nature (과학적 본질의 탐구)의 머리글자 SCIEN 와Zero(제로)의 Z에 의한 것이다.

「사이엔즈」는, 특정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것이고, 「과학적 본질의 탐구」를 평이하게 말하자면, 쉽게 「알았다」 「됐다」 하고 결론짓지 않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상의 본다 · 듣는다고 하는 행위에서도,보았기 때문에 · 들었기 때문에 이해했다 · 알았다고 결론짓지 않고,「사실·실제·진상真相은 어떨까」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사이엔즈」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살펴보면, 현상에서는「이런 것을 말한 사람」「저런 행위를 한사람」이라고, 발언이나 행동을 파악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범죄라고 말해지는 행위를 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여겨지고, 모두가 기뻐할 것 같은 행위를 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다.

사이엔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는 현상면의 언동보다, 그 언동에 이르게 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나 생각 등에 중점을 두게 된다. 사람의 언동이나, 모든 사상事象에 대해서,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으로 파악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 배경이나 바탕에 있는 내면·진상·원리를 알려고 하는 지능의 작용이, 과학이며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2 「사이엔즈」의 실현 ― 본질적인 것에 중점을 둔다

사회조직에 대하여 보면, 현재까지의 사회 통념에서는, 규범이나 질서를 중히 여기고 규율을 지킨다든가, 성실하게 일한다든가,그러한 현상現象면의 것(행위)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인간교육·예의범절·도덕 등은, 마음을 소중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시 그 결과로서 좋은 행위를 하는 지 어떤 지를 중요시해서, 행위가 나쁘면 교육이나 예의범절의 효과가 없다고 본다.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 좋은 인간으로서, 마음이나 생각이 좋다고 보고 있다.

반대로,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은 나쁜 인간으로, 마음이나 생각이 나쁘다고 보여 진다.

올바른 마음이나 생각을 교육하며, 벌칙에 의해 나쁜 행위를 없애고, 누구나가 의무와 책임  규칙과 계약을 지키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고, 물건이 풍부해서 편리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의 행복이나 사회의 평화가 실현되는 것 같이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얕고, 행복이나 평화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현상면을 정리정돈하는 것에 시종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나 사회 통념에 의해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인간이나 사회를 본질적으로 보려고 하는 관점이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현상現状의 인간이나 사회조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는 발상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가 없다.

모든 동식물은, 자연체로서 그것답게 맥맥이 살아오고 있다. 왜, 인간에게는 노력이나 애씀, 인내와 참음, 규율이나 통제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분인 지성을 발휘하는 삶과는, 역방향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체로 그것답게 사는 인간본래의 모습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이엔즈는「인간이란, 사회란」하고, 그 본질을 과학 · 철학하는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이엔즈에 이르게 된 과정
  • 제1장 사이엔즈 라고 하는 사고방법
  • 제2장 사실ㆍ실제는 어떤가
  • 제3장 본래ㆍ본질ㆍ정말은 어떤가
  • 제4장 이상을 실현한다

본저는 위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실천과 연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경과를 요약하자면,

「이상을 실현하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여러 활동을 해오는 가운데, 멈춰 서서 재검토해 보니…, 무엇을 실현하려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의 목적은 무엇인가. 보편성이 있는 것을 바란다면, 먼저, 인간이나 사회에 대해 「본래·본질·정말은 어떤가」를 해명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現状의 인간 사회는 어떤가, 사회 속에서 살며,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의 「사실·실제는 어떨까」라고 검토해가자.

그렇게 하려면 , 사회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실제는 이렇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등, 서로 생각을 버텨서는 진행되지 않는다.

먼저, 인간의 생각이다 라는 것을 각자가 자각하고, 서로가 자신을 아는 것에 의해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이엔즈라고 하는 사고방법」에 다다랐다.

이러한 활동이나 연구의 프로세스를 거슬러 올라가,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해설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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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단원들 보다 어려운 것 같다.

-사이엔즈 이거가 사실은 원래 연찬이라고 쓰던 말인데, 이게 야마기시 쓰던 단어가 되어서 거기를 나온 사람들이 나와서 처음에는 연찬과학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연찬이라는 말을 안 쓰고 사인엔즈 + 제로라고 쓴 것 같다. 제로라는 것이 영위에서 철저구명한다는 뜻입니다.

-책에 사이엔즈를 이렇게 요약했는데 “사람의 언동이나, 모든 사상에 대해서,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으로 파악한 것을 기초로 하여,그 배경이나 바탕에 있는 내면·진상·원리를 알려고 하는 지능의 작용이, 과학이며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감각이 아닌 걸 통해서 안 거는 사이엔즈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요즘 에크하르트 툴레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현시되지 않는 세계, 감각기관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점은 같이 이야기 해볼만한 것이 많다고 본다. 사이엔즈나 연찬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은 그동안 별로 다루지 않았다. 이런 부분이 이제 앞으로 많이 이야기 될 부분이 있다. 공자도 비슷하다.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고 직관이나 톨레 처럼 현시되지 않는 세계라든지 순수의식이라든지는 별로 이야기 하지 않고 예수나 석가는 이야기를 한다. 예수나 석가는 그 세계를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사이엔즈에서 하는 내관코스가 이런 것을 다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네이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엔센셜 네이처는 본질을 말하는 것 인가봐요~

-본질이 감각기관 너머에 있는 순수한 그런 것이 아닌가봐요~

-전에는 그런 것이 과학적 탐구 부분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런 부분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그런 이야기를 안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누가 죽음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하기도 한다. 또 하도 평범한 말만 하니가 일부 사람들이 공자 제자 중 일부에게 비법을 따로 가르쳐주는 것 아닌가 하고 물으니 공자가 내가 말한 것이 전부다고 했다. 다만 제자들이 공자가 4가지를 끊었다고 했는데 무고, 무의, 무필, 무아가 그것이다. 에고를 넘어선 세계를 제자를 통해서는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도 보통사람들이 기이하게 들리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 이야기는 거의 안한다. 이번에 톨레 책을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라도 이야기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이라는 게 인간이 현실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극미와 극대의 세계를 기계나 장지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기초로 해서 현실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이 근대과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감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감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기계를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 툴레로 말하자면 현시되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연찬적인 사고방식이 있으면서 그 영역을 현시되지 않는 세계까지 확대하는 것 같다.

-동물적 감각에 대해서 중요시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동물적인 감각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지 않을까? 원초적인 것에 대해서 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사회화되지 이전의 것?

-인간은 모르는데 동물은 아는 것이 있다. 감각의 능력이 다르다. 여기서의 감각은 인간이 지닌 감각으로 한다고 하는데 과학에서는 다양한 감각들이 밝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 많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 같다. 여기서 말하는 네이처는 인간의 의식 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에서 파악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골짜기에 다른 곳에 사는 땅 주인이 있다. 몇 년 전에 한번 봤는데 그때 그 사람의 이미지는 굉장히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무를 조금 베었다고 우리 마을 사람을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어제 보니 정말 화가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람과 다르게 느껴졌다. 아하~ 이것도 전후사정 없이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요소가 결국 여러 가지 감각에서 얻은 본질에 대해서 단정하지 않고 생각해 보자는 것 아닌가 한다.

-감각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난 것이 있다. 감각도 서열이 있다고 한다. 중세 시대에는 청각이 중심이었다면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는 시각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촉각이 더 본질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감각기관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길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는 건지?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감각기관으로 파악한 것을 기초로 한다는 것을 사이엔즈의 원리로 보자면 내 감각기관 조차도 제대로 감각하고 있나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동물적인 감각을 이야기했는데 사회를 살다보면 틀에다가 생각을 맞추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이란 틀이 아니라 근본적인 감각 자체를 논해보자는 것인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감각의 문제는 종교적인 곳에서도 첨예한 논쟁이다. 감각을 억제하는 문파가 있고 감각을 극대화하는 문파가 있다. 핵심은 감각적인 것 너머의 인식에 가기 위한 것이다. 오감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닐까합니다.

-“모든 동식물은, 자연체로서 그것답게 맥맥이 살아오고 있다. 왜, 인간에게는 노력이나 애씀, 인내와 참음, 규율이나 통제가 필요한 것인가?”로 되어 있는데 동물들도 인간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요? 사람만 이렇게 하고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역방향이라는 건가요?

-이 책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바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좋은 행위를 하면 좋은 인간이고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인간 이라고...

-좋은 행위를 한다는 것이 선택적이지 않은가요? 좋은 행위를 한 사람도 나쁜 행위를 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나누는 것은 좀...

-일본에 갔을 때 연수소 참고 사항 중에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를 우리는 휴지통에 버리는 데 거기는 변기에 버린다고 한다. 이 두루마리 휴지를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아닌 곳에 돌아다니는 것을 매우 놀라기도 한다고 한다. 명품에 대한 기준도 그렇고 문명을 돌아보는 관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저도 아이들에게 제가 당연하게 여겼던 기준들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임시방편적인 것일 있는데 그런 기준들이 고정되어서 통용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나쁜 행위는 나쁜 해위를 한것이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주에 일가족을 죽인 사람도?

-그 행위가 있을 뿐인 것 같아요~ 그 행위를 나쁘다 좋다는 할 수 있지만 사람은...

-“사이엔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는 현상면의 언동보다, 그 언동에 이르게 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나 생각 등에 중점을 두게 된다.”고 되어있으니까? 이렇게 보다 달라질까요?

-그 사람의 서사를 알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감각에 기초한다고 했잖아요~ 감각자체는 좋고 나쁜게 없는 것 같다. 휴지를 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저니까 휴지를 버리는 것은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넘어가면 좋고 나쁨이 생기는 것 같다. 감각이후에 좋고 나쁨을 파악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을 역방향으로 보는데 그것도 가치 판단이 내려져 있는 것이다. 노력 애씀도 감각하고 실재하는 것인데 실재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는 것을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가 있느냐? 입장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인데 옳고 그름에 문제가 아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아까 유럽 사람들이 두루마리 화장지가 밥상에 올라가 있는 것을 의아해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휴지가 이렇게 쓰일수 있구나~ 많은 곳에서 쓰일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창의력이 더 생길 것 같다. 되돌려서 보면 어떨까?

-마트에서 봤는데 휴지에 화장실에서만 쓰세요~라고 쓰여있더라고요! 제품 설명에 그렇게 쓰여있더라구요~

-실제로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선생님들도 좋다 나쁘다의 집단적 틀이 있는 것 같다. 행복하다는 것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알게 모르게 무의식속에서 고정되어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 같다.

-요즘 식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부모가 말리지 않는다고 한다. 말리면 오히려 부모가 화를 낸다고 한다. 선생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

-같이 쓰는 공간이니까 소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러면 부모도 안 좋게 보게된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얼마 안 되서도 바뀐다. 선진국 어디서는 아이들 겨드랑이에 종이를 끼우고 다는 것을 연습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의 폭을 최대로 좁혀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연습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들리는가?

-답답할 것 같다.
-유럽에 학교 연수로 갔을 때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있다. 어린 아이들(저학년 이하) 식당같은 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했을 때 한 두 번 해서 안 되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매우 심한 체벌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당연한 문화로 여긴다고 해서 매우 놀랐다. 아이들에게 체벌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이 오히려 유럽은 반대이더라~

-그 행동이 나쁘다라고 하는 거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을 아는 거하고 다른 것 같다. 혼나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하고 다른 것 같다.

-어떤 나이까지는 인식보다는 감각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닐까?

-유럽의 경우도 아이들에 대한 변천의 과정을 알아보면 좋을 것 같다. 원래 처음부터 그랬는지 우리나라에서 그러면 군사문화라고 할 것이다. 유럽이 원래 처음부터 그랬는지 하는 과정에서 변했는지 궁금하다.

-공동체나 배려의 문화가 성숙해있는 것 같다.

-우리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억압된 사회에 살다보니 부모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군사문화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가하고 아이들 멋대로 산다는 것이 부자유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가없다. 엄청 부자유를 느낀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은 아이가 자유롭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겪는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자기 집 잔디를 관리를 안했다가 마을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성인 남녀의 시각인 것 같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청소년의 시각, 어린이의 시각이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장애우의 시각이 안착화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어려서부터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 더 부자유를 느끼다고 했는데 사회자체가 부자유인 곳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배려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인가? 아이들이 그 시대에 뛰어노는 것이 자유로운 것인가? 라는 부분이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노력과 애씀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우리 사회자체는 이것에 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은 뛰어노는 아이들을 어떻게 볼까? 아이니까 뛰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까? 저도 잘 못한다.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가치를 두고 사는 것 같다. 이번에 아이들이랑 원주 어느 가게에 갔는데 아이들이 가게 물건을 막 먹더라 그걸 보고 불편했지만 그냥 한번 보고 있어봤다. 그런데 지나가고 나니까 별걱정이 없었다.

-우리시대가 사회적 통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한쪽에서 옳다고 한들 한쪽에서는 부자유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통념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통제가 없을 때 자유는 누릴 수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무방비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절대자유라는 경지에서 볼 때 단일한 자유는 없다고 본다. 파시즘이나 전체주의가 자유를 하나로 만들려고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다양화되는 것이 아닐까한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다양한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 너머의 자유가 펼쳐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분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사실일까?하고 검토해가자는 것이 사이엔즈다. 이게 정말의 인간이나 사회의 본질일까?어떤것이 행복이고 어떤것이 불행인지 자기부터 검토해가자는 것이다. 처음은 결국 자기 자신부터이다. 자기의 고정된 틀을 검토해가면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검토해가자는 것이 아닐까?

-내가 자유롭고 타인이 부자유인 것이 자유인가? 아니면 그 역이 자유인가?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부자유가 들어가 있는데 자유일까요?

-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자유인 것 같은데요

-그건 굉장히 좋은데 어려운 것 같다. 굉장히 어렵고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한번 보자는 것이다. 굉장히 어렵다라고 보는 것도 상당히 단정하고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을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하다 보면 하나 하나 나오지 않을까 한다.

-행위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 상태에 중점을 두게 된다면 아이가 뛰어 다니면 그 마음의 상태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뭐죠?

-식당에 아이는 가기 싫었어요~ 부모는 두 시간씩 이야기 하는데 아이는 밥을 먹고 한일이 없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부당하다. 심심하고 놀고 싶은 것이다. 행위는 뛰는 것이지만 마음상태는 아이가 지루하고 심심하고 놀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식당에 놀이방이나 오락실을 만들어 논 것 이다.

-저희 어머니와 통화할 때 아이들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면 어머니는 아이들이 건강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1학년아이들이 아무리 넘어지니까 뛰지 말아라 해도 뛴다. 5학년은 뛰지 않는다. 6학년은 어른 보다 늦게 걷는다.

-아이들 기르는데 식당을 데리고 자주가지는 않는다. 사실 피해 때문에 그렇다기 보다는 안전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부모가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안전의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못 알아 듣고 인식을 못한다. 안전에 대한 의식은 어른아이도 있다.

-곡성 기차 마을을 갔는데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데 한국 사람은 절대 못 가게 하는데 외국 사람은 결정적인데 재제한다. 그냥 놔두면 안 될까 생각해 봤다. 내 욕구가 있으니까 아이를 잡는 것이 아닐까? 그 아이를 보는 것도 보는 거지만 내가 왜 아이를 잡고 있을까를 보는 것이 어떨까?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 할 부분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 한 것 같다.

-이상을 실현하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잠시 멈춰서 재검토 한다는 것은 정말 필요한 것 같다. 평가 토론을 하는데 너무 형식적이고 그렇다. 진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걸 중간에 이야기 하면 굉장히 김 빼는 이야기로 듣는데...

-배가 산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보자는 것 같다. 뭔가를 하다보면 많은 문제에 직면할 것 같다. 그럴 때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각자 일을 하고 있는데 진짜 목적이 뭔가? 이야기 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진짜 목적이 무엇일까요? 한번 생각나는 사람은 이야기 해보지요?

-목표를 이야기 한 것인가요?

-목표를 넘어서 그 목표를 넘어서 달성하고 싶은 진짜 목적~

-그것을 스스로 잘 물어보기 드물다.

-일관되게 사는 선배가 있다. 이주민노동권을 위해 일한다. 그 선배에게 물었다. 형은 이게 왜하냐고 그랬더니 그 선배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평등한 세상이 되면 형은 뭐가 좋으냐고~ 선배가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김창완이라는 가수가 이비에스에 나왔다. 김창완이 아주 어렸을 때 왜 사냐고 물어보고 다녔다고 안다. 어른들이 커보면 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어른이 되었는데 아이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고민이 된다고 했다. 김창완은 사는 동안이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답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답을 못 얻었던 것 같다. 목적이 뭐냐고 물었는데 공자나 예수님도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만인의 구원을 위해 사시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살았다. 근데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가졌냐고 물으니 하나님은 아무 뜻이 없다고 하더라~

-아까 평등 사회 이야기 했는데 진짜 그렇게 한다고 하고 있는데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다. 한참을 물어보면 보이는 게 있다. 내년에 나이가 70인데 내가 이야기 할 때 성숙한 인격이라는게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의 동요가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돌아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는 부끄럽다. 이거는 자기 스스로 검토했을 때 이야기 할 수 있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 아닐까?

-사람이 죽어가는 것은 현상인데 사는 동안에 뭔가를 하는데 진짜로 하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목적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이남곡 선생님의 진짜 목적을 듣고 싶습니다.

-그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말로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한참 묻다보면 뭔가 보이면 진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행복해질 것 같다고 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 못 찾았어요~ 죽을 때 까지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역 선생님이 그랬는데 자의식이 들어가면 다 허위라고 이야기 한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하더라도 자의식이 들어가 있으면 가짜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다가왔다. 내가 뭐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자의식이나 허위의식이 없는 것 아닐까? 자칫 하면 이상을 내걸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 자의식이 많은 경우가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 행복 등의 여러 가지 관념을 내려놓고 가보자고 서론에서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니까 행복 지수가 떨어지는 것 같다. 지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대 지속적이지 못하니까 문제다.

-그렇게 하니까 문제가 아닐까 행복했으면 그것으로 끝나면 된다. 그것을 지속하려면 이것 저것 어려울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행복하다기 보다는 꿈이 있어야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 꿈이 허망할 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지 않을까요?로또를 하나 샀을 때 일주일간에 충만감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꿈을 깨라고 하면 잔인하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연애 할 때는 좋은데 막상 결혼하면 환상이 깨진다.
-오늘 여기에온 각자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단서가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지금 뭐가 좋으니까 왔을 것인데 그게 뭘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에즈원커뮤니티에 다녀온 분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차이가 있어요~ 다녀 온 후하고 그 전하고...
-정다운 사회 같은 경우 어떤 바탕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이해가 더 되는 것 같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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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세실 앤드류스 (지은이) | 강정임 (옮긴이) | 한빛비즈 | 2013-10-21 |

원제 Living Room Revolution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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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현



진정한 행복이란 바로 공동체에서 시작된다고 역설하는 책이다. 저자는 경쟁 사회에서 묻힐 수밖에 없었던 본능적인 공동체 능력이 극한의 상황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사례를 통해 행복의 본래 의미를 되묻는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공동체성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민주주의와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가장 필요한 ‘스터디 서클’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조목조목 예를 들어 설명한다.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배려의 대화법에서부터 8주간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화두를 던지고 풀어나가야 할지 섬세하게 짚어준다.



특히 저자가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행복 서클’의 사례는 행복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문제들, 가령 개인의 행복을 위한 관계, 유희, 소명, 통제에 관한 담론에서부터 공동체 활성화와 환경문제 그리고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사회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화두에 대한 진솔한 대화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이를 실천하도록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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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 강도현

감사의 말

서문



01 타인으로부터 기쁨이 온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한 적이 없다 | 유대감, 고요하게 차오르는 기쁨 | 협동심에 불을 붙이는 시스템 | 이기심과 탐욕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02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행복이 줄어들고 있다 | 행복을 부르는 4대 요소 | 관계: 나는 외롭지 않다는 착각 | 소명: 온 우주가 외친다 “이 일을 하라!” | 유희: 천국 입장이 노동 강도순이라고? | 통제: 내 삶을 내가 결정할 권리 | 불평등 그리고 존엄성에 대한 열망 | 좋은 정부는 행복을 실현한다



03 유쾌한 공동체를 소개합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것 | 지루한 연설은 이제 그만! | 화려한 점거 | 웃기는 비상사태 대비 모임 | 타인과의 대화를 피할 수 없는 장소 | 바느질을 다시 배우는 사람들 | 활기 넘치는 개인들의 공동체 | 평등하지 않다면 공동체가 아니다 | 거실로부터의 혁명 | 유쾌함을 전파하는 삶의 방식



04 나와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화법 1

왜 대화가 줄어들었을까 | 대화는 신성한 경험이다 | 죽은 대화에서 생명의 대화로 | 진정한 나를 찾아주는 대화법 | 행복을 위한 11가지 대화의 원칙



05 나와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화법 2

변화를 위한 3가지 대화의 원칙 | 곤란한 상황을 돌파하는 대화법 | 이만하면 됐다!



06 정중하고 절제된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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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41 :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나는 행복이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4대 요소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4대 요소란 관계Connection, 소명Calling, 유희Celebration, 통제Control를 ...

P.64 : 사회적 저항에도 유쾌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회변화를 시도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분노로 가득 찬 비난과 공격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을 더 화나게 만들고 도중에 중단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대신 우리...

P.113 : 1929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 두 명이 대화를 시작했다. C. S. 루이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월요일은 새벽 2시 30분까지 깨어 있었네. 앵글로 색슨어 교수 톨킨과 대화하느라고 말이지. 그는 나와 함께 모임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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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현 (카페바인 협동조합 운영위원장, 《골목 사장 분투기》저자)

: 이 책에는 ‘공’ 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공동체, 공생성, 공유, 공공, 공익, 공감……. 이 책은 ‘공’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통 그런 내용의 책이라면 90년대 대학에서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선배들이 새파란 후배들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책을 읽는 내내 옆집 누나가, 혹은 언니가 맥주 한 잔에 쥐포를 뜯으면서 수다 떠는 기분이 든다. 저자가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를 처음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행복’이라는 주제를 꼭 붙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 정의를 위해,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 공생성, 공유 등 ‘공’을 잘 다루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설파한다. 그런 삶이 진정 재미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소개하면서 말이다.



공은 둥글다. ‘공’으로 시작하는 단어들도 대개 그렇다. 대개 둥글둥글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친 경우가 많다. ‘공’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뾰족하다. 그것은 아마도 암울했던 우리의 근대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비참했던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30년이 넘도록 지속된 독재와 부패한 정치세력의 집권, 반세기 넘는 남북 대치, 그로 인해 사회 곳곳에 만연한 군사문화 등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성을 주장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각오해야 했던 시대가 불과 얼마 전이다. 지금도 공공성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사적 이익에 대해서는 끝없이 관대하면서 공공성을 이야기하면 껄끄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저자는 그런 사회에서는 공동체는 물론이고 개인도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국 사회가 돈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 경쟁 때문에 공동체성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진 슬픈 현실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다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차근차근 풀어간다.

미국 사회를 향한 저자의 눈물 어린 비판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 우리 한국이야말로 ‘돈’과 ‘계급상승’에 대한 끝없는 욕구로 인해 ‘공’이 제대로 굴러다니지 못하는 사회 아닌가? 공공성 회복이 곧 힘겨운 투쟁을 의미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치유를 위한 처방전과 같다. 물론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한 번에 병을 치유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읽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기초 체력은 다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면서도 시종일관 따뜻한 언어를 구사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함에도 주장보다는 대화를 시도한다. 저자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불편함보다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리고 저자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저자의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한국 사회의 가장 이상하면서도 어두운 단면 중 하나는 바로 정치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이율배반적이다.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중앙 정치의 온갖 미사여구에는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삶과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지역 정치나 마을 정치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정치 프로세스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다른 정치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은연중에 배척한다.

정치가 대화와 합의가 아닌 분리와 배척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되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오히려 개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궤변이 난무한다. 그게 바로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빨갱이’니, ‘꼴통보수’니 하는 언어들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대화할 줄 모른다. 저자는 정치가 배척의 메커니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행동은 알지 못하는 타인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깊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분리와 배척이 아닌 대화와 이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검증된 방법이다. 그것은 비단 정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 전반에 필요한 처방전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얽히고설켜 있는 우리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 S. 루이스와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J. R. R. 톨킨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두 거장의 친분이 깊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두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톨킨은 원래 판타지 소설가가 아니었다. C. S. 루이스의 격려와 그들이 함께했던 대화 모임을 통해 얻은 영감이 두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화는 엄청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뜻을 세우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당장 대화 모임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실천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서문에서 밝히듯 저자는 언제든 자신을 대화에 초청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 요청에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직접 연락해보시기를 적극 추천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고 더 나은 사회, 더 행복한 개인을 위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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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세실 앤드류스 (Cecile Andrews)


사라지는 지식인 -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사라지는 지식인 -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헨리 지루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우리는 많은 나라에서 '경제적 다원주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광범위하게 채택되는 것을 보아왔다. 경제적 다원주의는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적 비용이라는 담론에서 경제와 시장을 제외시킨다. 그 결과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적 파괴와 광범한 경제적 빈곤화에서부터, 인종과 계급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체포·투옥되는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금 경제는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동정심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광적인 개인주의와 가혹한 경쟁의 언어가 시장가치와 결부돼 있지 않은 모든 공공성과 연대의 관념을 해체하고 있다. 공공성에 대한 고려가 도덕적으로 공허한 사적 비전과 편협한 이기심의 늪으로 추락하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이 붕괴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적 고통이 보다 넓은 공적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제 장기적인 투자는 단기적인 이윤으로 대체도고, 동정심과 타자에 대한 관심은 약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공적 관점이 망가짐에 따라 공공선이라는 개념은 뿌리가 뽑혔다. 민주적 공공가치는 그것이 시장 노리를 공공선에 종속시킨다는 이유로 경멸당하고 있다. 여기서 도덕은 간단히 해체돼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이 서로서로에 대한 여하한 의무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영화, 규제완화, 상품화 따위의 언어가 공공선이라는 담론을 대체함에 따라 공립학교, 도서관, 교통체계, 핵심적 인프라, 공공서비스 등 모든 공적인 것은 시장을 왜곡시키는 요소 혹은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부패를 조장하는 금력과 집중화된 권력은 방위산업이라는 광정 폭력을 떠받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권 개념을 변질시키고 있다. 이제 주권은 부유층과 대기업 그리고 방위산업을 보호하는 정책과 동일한 것이 되었다. 토마스 프랭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소수에게 집중된 금권은 전문직과 소규모 투자자들을 파괴하고, 국가의 규제기능을 무력화시키며, 입법자들의 집단적 부패를 초래하고, 반복적인 경제위기를 가져왔다. 이제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자체를 노리고 있다."
  개인적 성공은 최고의 사회적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혁신을 추동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득이나 부의 격차는 적자생존 윤리를 정당화해주는 현상으로 오히려 칭송되고 있다. 사회국가에 의해 한때 보호를 받았던 취약계층은 이제는 골칫거리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비자로서 결격자(缺格者)이거나, 백인 프로테스탄트 중심 미국을 고집하는 우익 기독교도의 시각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노인, 젊은이, 실업자, 이민자, 가난한 백인과 유색인종들은 일종의 인간쓰레기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권리, 혜택, 보호를 나누어 가질 자격이 없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이 새로운 차별정치와 문화적 잔인성은 경제 위기 이상의 것을 표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육, 행동주체, 사회적 책임감에 관련된 뿌리 깊은 위기를 나타낸다.
  C. 라이트 밀스를 인용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붕괴, 비판적 지식인의 소멸 그리고 "비판적 주체와 사회적 상상력을 공급하는 공적 영역의 붕괴"이다. 1970년대 이래 시장근본주의 세력은 교육으로부터 공적 가치, 비판적 내용, 공민적 책임의식을 박탈해왔다. 이것은 소비주의, 리스크가 없는 관계 그리고 사회국가의 파괴와 결합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큰 목표의 일환이었다. 지금 많은 고등교육기관은 도구적인 목적과 계량적인 패러다임에 속박되어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목표에 매달려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단지 예비 노동력으로 취급받고 있을 뿐이다. 대학은 민주적 소명으로부터 일탈했을 뿐만 아니라 고실업이나 파멸적인 부채 등 닥쳐올 거친 새로운 미래에 직면해야 할 학생들의 곤경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지식을 갖춘 능동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고등교육이나 보다 넓은 문화적 장치들에 의한 일반적 교육공간 전체에 걸쳐 지금 우리는 교육, 자유, 주체, 책임에 관련하여 하나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시장주의 관념이 등장·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민주주의에 불가결한 '조직화된 책임감'을 배양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조직화된 무책임을 조장한다.
  자유시장 근본주의를 추동하고 있는 반민주적 가치는 지금 세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수준의 고등교육 정책 속에 구현되고 있다. 그러한 정책은 이제 낯익은 것이 되고, 갈수록 당연시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그러하지만 캐나다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공립교육과 고등교육을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재편하는 것은 기업 중심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커리큘럼의 표준화, 하향식 지배구조가 이루어지고,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강좌가 개설되며, 모든 교육이 직업훈련 장소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테크 회사를 설립하는 학생들에게 석사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전문직 경력자가 인문학 분야 고급 세미나를 지도하도록 허용하는 대학도 있다. 이런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브랜드가치를 드러내는 30초짜리 상업광고'를 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 고등교육관에서 핵심적인 것은 시장주의 패러다임이다. 그 결과 종신교수직이 없어지고, 인문학이 취직준비용 서비스로 전환되며, 대부분의 교수가 파트타임 임시 노동자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 노예적인 교수신분은 몇몇 대학들이 교수 채용업무를 '임시적 고용 대행기관'에 맡기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수직은 그저 또하나의 값싼 노동예비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대학은 학술노동자들의 욕구와 권리 그리고 학생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의 질은 도외시하면서 오로지 재정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무력한 교수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고등교육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 속에는 교수와 행정가들의 협치(協治)라는 개념도 없고, 잠재적인 월마트 피고용인이 아니라 비판적 시민으로서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교수들은 일정한 자율성과 힘을 보유한 학자나 공적 지식으로 보려는 노력도 없다. 그 대신 교수들은 점차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기술자나 보조금을 받는 작가로 규정된다. 이처럼 열화(劣化)된 교육 속에서 학생들의 처지도 나을 게 조금도 없다. 그들은 소비자로 취급되거나 혹은 자극적인 오락이 필요한 불안정한 아이들로 취급된다.
  고등교육의 정당성은 그것이 민주주의체제 유지에 필요한 주체를 길러내는 근원적인 공간이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그런 공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 대학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은 괴멸상태이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은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 교육적 투자라기보다는 지식과 교육의 물질적·인적 자본의 생산에 연결시키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등교육과 정당성의 위기

  미국에 있어서 고등교육의 문제는 대부분 재원 부족, 시장메커니즘의 지배, 영리 추구 대학의 부상, 안보국가의 침투, 교수 자치의 결여와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은 고등교육이라는 문화와 민주적 가치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대학의 의미와 소명을 비웃는다.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감소는 부유층을 위한 세제 혜택, 거대은행, 국방예산, 대기업에 대한 지원 증가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학생들의 도덕적 상상력과 비판적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예비 헤지펀드 매니저를 기르면서 정치의식이 없는 학생들을 만들어내는 대학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하여 대학들은 ‘기술적으로 훈련된 유순함’을 장려하는 고육방식을 고안해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총장은 지금 CEO(최고경영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월스트리트나 기업 펀드매니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과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기업과 학교 이사회 사이를 오가고 있다. 벤처기업가들은 특허계약, 지적재산권 관리, 대학 산하(傘下) 사업체에 대한 투자를 통해 큰돈을 벌기 위해서 부지런히 대학을 이용한다. 이 새로운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학문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 상황은 최근의 한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악화일로에 있다. 금융지주회사 BB&T코퍼레이션은 에인 랜드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자유방임경제와 이기적 이윤추구 논리를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유명한 소설 - 역주)를 정규과정에서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마셜대학 경영대학원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돈을 주는 기업이나 부유한 후원자의 뜻에 따라 무엇을 가르치고 교과과정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정할 때, 대학의 진실성은 어떻게 되는 걸일까? 어떤 기업과 대학들은 이제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는 학문적 결정 사항이 아니라 시장논리에 의거한 고려 사항이라고 믿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민교육과 공적 가치를 훼손시키고 교육과 훈련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쇼핑몰로, 학생을 소비자로 보는 논리를 강화하여 지식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한다. 상황은 악화일로이다. 스탠리 아러노위츠가 지적하듯이, 공원이나 해변에서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공재에 대해 사용자들이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극단적으로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치솟는 등록금으로 인해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이 지금 빚에 얽매여 있는데, 이것은 장래에 그들의 삶을 파산시킬 것이다.
  불행하게도,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 감퇴가 어느 정도인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많은 주(州)에서 고등교육보다 감옥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소득 소수집단들을 위한 교육은 징벌국가의 대두와 더불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세력, 민간 감옥회사 그리고 간수(看守)노조로 이루어진 비신성동맹(非神聖同盟)에 의해 훼손되어 왔다. 이들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소수집단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기보다는 감옥에 넣어두어야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정도는 덜하지만 캐나다도)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기관에 대해서는 투자를 줄이면서 감옥산업을 늘리고 국가의 징벌 및 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데 투자를 늘려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육보다는 처벌을 중시하는 데 따른 사회적 비용은 최근의 한 연구가 보여주는 충격적인 통계에 명확히 드러난다. “23세에 이를 무렵이면, 미국인 전체 중 거의 3분의 1, 즉 30.2%가 범죄 혐의로 체포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노출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뉴욕타임즈>, 2011년 12월 19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예민한 예언자적 정의감을 가지고, 비판적인 분석기술을 활용하고, 타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윤리적 감성을 계발하도록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장논리에 지배된 대학에서 갈수록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있다. 인문학과 자유교양 과목이 축소되고, 민영화·상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적·공민적·도덕적 발판을 제공하지 못하면서도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적 처지에 놓여있다.
  기업화된 대학의 타산적 논리는 생명력 있는 민주주의와 주체적 사회 참여의 지속에 필요한 도덕적·정치적 비전과 실천을 감퇴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의 제기나 비판적 대화, 사회적 책임감과 정의감은 학생들이 나라와 지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데 불가결한 자질들이지만, 오늘의 대학은 이러한 자질이 존중받는 공적 공간의 학대를 막고 있다. 민주적 공적 공간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기성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비판적 사상가들”을 육성하기 위한 공간이, 강력한 경제적·정치적 기득권층에 의해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 고등교육은 진리를 탐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서 권력이란 마땅히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에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대학이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과거에 그랬던 것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고등교육의 목적을 말할 때, 그리고 민주적 가치의 옹호자로서 대학이 공적 생활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할 때,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고등교육은 공적 가치와 비판적 희망,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양하는 교육적 가능성이 남아있는 매우 드문 공적 영역의 하나라는 점이다. 일상생활이 갈수록 시장원리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시장 주도 사회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고등교육의 전통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고등교육의 가장 깊은 뿌리는 도덕적인 것이지 상업적인 게 아니다. 이 성찰은 오늘의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이 점차로 주류 미디어에 의해 밀려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아이디어들은, 설령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지 않는다 해도, 대개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망가 중심 문화 및 문화의 상업화는 심각한 대중적 문맹화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제도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 문맹화는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EH한 반대의견을 억누르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살리고자 하는” 지식인들은 흔히 불필요한 존재, 극단주의자 혹은 비(非)미국적 인물로 취급·무시당한다. 더욱이 지금은 반(反)공적 지식인들이 문화적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반대자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거기에 대한 보답을 획득하는 데 기꺼이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강력한 경제력을 보유한 기득권층의 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살아있는 비판적 민주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기르는 고등교육의 역할을 옹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서는 대학인들은 너무나 적다.
  이 문제는 고등교육의 목적과 의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간과해서는 안될 정치적·교육적 현안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공민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의미 있는 공민적 가치, 자치활동에의 참여, 민주적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넓은 토대의 비판적 교육의 필요성이 포함된다. 오직 그러한 교육문화를 통해서만 학생들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개인적·사회적 주체가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기

  민주적 공적 공간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재생시키자면 무엇보다 시장근본주의자, 종교적 극단주의자, 완고한 이데올로그들에게 맞서야 한다. 이들은 비판적 사유와 건강한 회의주의에 대해 깊은 경멸감을 품고 있으며, 학생들이 글과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비판적 상상력은 권력자들에게는 위험스러운 위협이다. 노골적인 예는 최근에 전 상원의원 릭 센토럼에 의해서 표명되었다. 그는 공화당에는 지식인이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교육이란 노동과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정의, 사회적 자유, 민주적 주체와 실천 및 변화의 역량 그리고 권력, 포용, 시민권에 관계된 문제들을 포괄한다. 이들은 교육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들 문제는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 지구적 투쟁에 힘을 불어넣는 광범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뤄져야 한다.
  고등교육이 비판적 사유, 집단적 작업, 공적 서비스를 함양하는 장소가 되려면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현재의 대학에서 중시되는 지식, 기술, 연구, 지적 관습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검토작업에서 핵심적인 것은, 지적 실천을 “도덕성, 엄격함, 책임감으로 구성된 정교한 그물망의 일부분”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발언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고등교육과 보다 넓은 사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대안적 모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연결’ 혹은 ‘관계’를 맺어주는 실천이다.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 토대를 둔 지적 실천을 발전시키고, 대학의 도구화와 특권적 고립화를 거부하고, 비판적인 사유와 현상(現狀) 거부를 연결시키며, 인간의 주체성을 사회적 책임과 가능성의 정치라는 개념과 결부시켜야 한다.
  대학은 갈수록 공포의 문화에 지배되고 있다. 이의 제기는 배신 혹은 반역 행위와 동일시되고 있고, 객관성·중립성을 지킨다는 것은 흔히 조지 오웰이 말한 공식적 진실 혹은 기성체제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민주적 정치라는 초점을 결여한 교원들은 대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 기술자나 기능인으로 지낼 뿐이다. 이들은 보다 넓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이나 자신들의 교육적 실천과 연구행위가 낳는 결과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기만적인 개념에 충실한 이런 모델과는 정반대로, 나는 대학은 비판적인 교육자와 능동적인 시민을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교실에서의 수업이 보다 큰 사회에서의 권력행사와 무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학은 학생들이 비판적 주체가 되어 권력자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 학생들은 그저 일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만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보다 넓은 세상과의 수많은 관계들을 규정하는 제도, 정책,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묻도록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유토피아적 기획으로서의 교육은 단순히 비판적 의식을 조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혹은 세계적인 것이든, 책임질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학생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키는 이데올로기적·구조적 힘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단지 문제를 인식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지적 실천 - 타자의 고통과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이다.
  교육은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다가올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언제나 “비판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 있는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기획 속에서 교육은 밝은 지식 기반 위에서 행해지는 정치적·도덕적인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교육은 교조적이거나 도구화된 교육이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교육논리가 모든 수준의 학교교육에서 작동해야 한다. 이 비판적 교육학은 또한 대학을 마치고 학교와 교회, 시너고그, 혹은 일터로 돌아갈 학생들 때문에 활력을 얻는다. 그들은 장차 대학을 떠나서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을 생산하고, 남녀노소가 함께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방식을 발전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 실천과 책임은 지나치게 실용적이며 섬처럼 고립되어 특권을 누리는 대학상(大學像)을 거부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학습에 대한 보다 폭넓은 비전이다. 그리하여 지식은 자신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민주적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고, 교육·정치·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학생들의 능력에 연결돼야 한다.
  비판적 교육, 대화, 사유가 실질적 효과를 가지려면, 모든 시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등한 자격 - 동등한 능력은 아닐지라도 - 이 있다는 메시지가 제창돼야 한다. 캐나다의 퀘백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서 등록금 인상과 시민적 자유 및 복지서비스의 후퇴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감한 학생들에게서 우리가 듣는 게 바로 이 메시지이다. 만일 교육자들이 공적 지식인이 되고자 한다면, 세계 전역에서 투쟁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지금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해방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역사와 경험이 중요하며, 특권을 해체하고 인간관계를 생산적으로 재구축하고,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투쟁에서 그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자들은 대학과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교육이론을 천명해야 한다. 커리큘럼은 지역사회와 문화 및 전통에 대한 지식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학생들에게 역사, 아이덴티티, 장소,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 안팎에서의 사회운동 형성에 직접 연관되는 새롭고 급진적인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과 함께 자유의 실천에 참여하는 일이다.
  아직 노엄 촘스키, 안젤라 데이비스, 스탠리 아러노위츠, 슬라보예 지젝, 러셀 자비코, 코넬 웨스트 등 공적 지식인이 상당히 있지만, 이들은 흔히 주류 미디어에서 배제되어 있다. 혹은 주변적 인물, 심지어는 체제 파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동시에 많은 대학인들은 끔찍한 노동조건 밑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한 글쓰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거의 노예처럼 취급당하는 시간강사들뿐만 아니라 점차로 전임교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상황에서 이들은 학문적 능력을 평가하는 공식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극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적 언어의 세계로 갇혀버린다.
  이러한 지식인은 흔히 일반 대중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부터 절연된 은둔처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이 기업과 군사권력의 부속물로 변형되는 데에 적잖게 공모해왔다. 이런 학자들은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옹호할 능력을 상실해왔고, 비판적 사유와 복잡한 아이디어 그리고 대중을 위한 진지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대중적 문맹화를 초래하는 방화벽 - 전문용어 과잉- 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있다.
  때이른 나이에 죽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모범적인 공적 지식인이었다. 죽음에 앞서서 그는 대학의 동료들에게 현대사회를 더럽히고,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하는 사회적 어려움들을 직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들이 공적 지식인이 되어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자율적이고 자기성찰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교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낼 것을 원했다. 사이드는 시장논리에 지배되는 교육개념을 거부했다. 그것은 유쾌한 로봇을 만들어내고, 조직화된 무사려(無思慮)와 불법적인 합법성을 옹호하는 논리일 뿐이다. 그러한 교육에 반대하여, 사이드는 ‘깨어 있음의 교육학’과 비판적 참여정치를 제창했다.
  나는 사이드의 ‘깨어있음의 교육학’과 그것이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인에 대한 그의 견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논함에 있어서 그가 쓴 글 한 대목을 먼저 인용하고 싶다. 이 대목은 내 생각에 사이드의 글 전체의 윤리적·정치적 힘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그의 회고록 ≪제자리를 벗어나서≫에 나오는 대목인데, 여기서 그의 어머니가 뉴욕의 한 병원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몇 달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진 채 몹시 힘든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잊을 수 없는 아픈 경험을 회상하는 사이드의 마음은 현실과 반역, 개인적 고통과 현실참여, ‘견고한 자아’와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아이덴티티 감각 사이를 오간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잠을 잘 수 있게 도와다오, 에드워드.” 한번은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처로운 음성은 이것을 쓰고 있는 지금도 들린다. 그러나 그 때 암은 이미 어머니의 뇌까지 퍼져 있었다. 지난 6주간 그녀는 내내 잠만 잤다. 내 불면증은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유산인지도 모른다. 잠들기 위한 어머니의 몸부림의 대가로서 말이다. 내게 잠이란 가급적 빨리 해치워야 할 어떤 것이다. 나는 매우 늦은 시간이 돼서야 잠들 수 있지만, 그러고서도 실제로 새벽에 일어난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오래 잘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나는 잠을 원치 않는 지점까지 와버렸다. 내게 잠은, 여하한 축소된 의식상태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상태이다. … 불면은 내가 어떤 비용을 치르든 작고 싶은 바람직한 상태이다. 이른 아침에 전날 밤 동안의 몽롱한 반(半)의식상태를 즉각 떨쳐버리고, 몇 시간 전에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탈환하는 것만큼 내게 기분 좋은 일은 없다.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이 여러 흐름들의 묶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견고한 자아라는 것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정체성 - 보다는 이게 좋다. 이 흐름들은 내 삶의 주제곡처럼 깨어있는 동안 계속 흐르지만, 그것들은 최고의 순간에도 어떠한 화해도, 조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탈’하고, 제자리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언제나 움직임, 시간, 장소 속에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묘한 조합을 형성한 채, 반드시 전진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상호 충돌하면서, 대위법적으로 그러나 중심주제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이게 자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확신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회의(懷疑) 또한 내가 각별히 아끼고 싶은 주제의 하나이다. 내 삶의 수많은 불협화음과 더불어, 나는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닌 상태,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선호하는 것을 배웠다.

  이처럼 깨어있고, 이탈된 채, 다양한 상황들 속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감각은 코스모폴리턴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한다. 윤리적·정치적 실천으로서의 깨어있는 공적 교육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관심사, 역사와 인간고통, 사회적 정의와 유리된 교육형태를 거부한다. 사이드의 깨어있는 교육이라는 생각 속에는 “복합적인 아이디어들을 공적 공간으로 들어올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즉, 대학 안팎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현실을 인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론을 비평의 형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육이고, 개인적 이슈보다 넓은 사회적 이슈 사이의 연관을 명확히 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 교육이다.
  사이드에게 깨어있음이란 공적 지식으로서의 대학인의 역할을 드러내는 중심적 비유가 되었다. 이 비유로써 그는 핵심적인 공공영역으로서의 대학을 옹호하고, 문화가 어떻게 권력을 전개하는가를 지켜보며, 인간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늘 경계선상에서, 즉 한 발은 안쪽에 다른 발은 바깥쪽에 둔 채 망명객이자 동시에 내부자로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집이란 언제나 집 없음의 형태를 취했다.
  망설임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으로서 사이드는 참여적 지식인을 가리키는 중요한 비유로 ‘여행자’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스티븐 하우가 사이드를 언급하며 말하듯이, “그것(여행자)은 권력이 아니라 움직임에 의존하는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는 여러 다른 세계들로 용감하게 들어가며,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다양한 위장(僞裝), 가면, 레토릭을 이해하는’ 움직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행자는 새로운 리듬과 의식(儀式) 가운데 살기 위해서 판에 박은 관습을 유보해야 한다. … 여행자는 경계를 넘어가서 영토를 횡단하고, 항상 고정된 자리를 포기한다.” 사이드는 경계선에 선 지식인이자 여행자로서 언제나 ‘반드시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체현했다. 그것은 모든 고정관념과 도그마를 비판하고, 세계 곳곳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현실에 직면하여 침묵을 거부한 그의 원칙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깨어있음’이란 엄격한 지적·이론적 작업 없이 조잡한 선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매도하는 - 오늘날 인기 스포츠가 돼 있는 -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성과 명료함의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시민적 용기와 정치적 참여를 뜻한다. 그리하여 비판적 독해력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세계에의 개입 가능성을 열어주는 하나의 해석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인의 입장에서 세계의 복수성(複數性)을 해독하는 행위, 즉 저마다 다른 주체의 다양한 입장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교육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은 한나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드러나 있는 인식에 빚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으로 보장된 공적 영역 없이는 자유가 모습을 드러낼 현실적 공간은 없다.”
  사이드, 촘스키, 부르디외, 안젤라 데이비스 그리고 그 밖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공적 지식이란 권력을 불편하게 하고, 합의사항을 문제 삼고, 상식에 도전할 책임이 있는 인간을 뜻한다. 참여하는 공적 지식인이라는 개념 자체는 학자로서의 존재를 침해하는 개념도 아니고, 학자라는 존재에 낯선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학자란 무엇인가를 정의(定義)할 때 중심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이다. 사이드에 의하면, 대학인은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 두려움 없이 입장을 취하고 논쟁을 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덕적 증인이 되고, 정치적 의식을 제고시키며, 흔히 대중이 보지 못하는 권력이나 정치적 이슈들 간의 연관성을 밝혀 “공적 토의의 소음 속에 가려진 도덕적 질문들을 대중에게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이드는 ‘공평무사한 전문가’ 라는 새로운 교조주의(敎條主義) 속으로 물러난 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그들이 “공공영역뿐만 아니라 동일한 전문용어를 구사하지 않는 다른 전문가들로부터도 절연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현상을 그가 특히 우려한 것은, 복합적 언어와 비판적 사유에 대한 반민주적 세력들로부터의 공격이 온갖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때문이다.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이라는 개념은 지난 30년간 빈사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가르칠 책임을 이행하고자 할 때는, 그들은 흔히 직업적 성실의무를 저버리고 교실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거나 혹은 심지어 비애국자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심한 경우에는 일자리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특히 그들이 권력의 작동방식이나 사회적 부정의, 인간적 비참을 명확히 드러내고, 사회질서란 변경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 그러하다. 교양교육이나 인문학이 자유의 실천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 대해서 묻기를 꺼리거나 물음을 던질 능력이 없는 사회, 시민보다 소비자를 더 중시하는 사회, 그리하여 기업의 이해관계라는 좁은 가치에 전적으로 매달린 사회일수록 비판적 사유와 대화의 공간으로서의 대학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시장근본주의가 국가, 자본, 다국적기업의 동맹관계를 조장해왔다는 점증하는 대중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동맹이 고등교육기관과 주류 미디어 문화를 통해서 구축되고 강화돼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난 30년간의 경제적 다원주의의 결과는 금융과 신용의 위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주체와 이성 그리고 의미 있는 반론을 지지하는 모든 사회적 기관들을 공격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온 세계가 겪고 있는 금융붕괴를 교육의 위기현상으로 보는 눈의 거의 없다. 실제로 그동안 공교육 및 고등교육은 민주적 가치를 파괴하는 전쟁에 동원돼왔다. 그러한 교육기관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시장 중심적 신념, 사회관계, 정체성, 이해방식을 재생산하는 데에 지대한 - 뻔뻔스럽다고는 할 없을지라도 - 공헌을 해왔다. 윌리엄 블랙은 그러한 기관들을 ‘범죄 유발 환경’ 공급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것들은 속임수, 규제철폐, 그 밖의 시장 주도형 제도와 관습을 장려하고 정당화해온 기관이라는 것이다. 블랙에 의하면,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경영대학원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경영대학원을 ‘협잡꾼 양성 공장’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금융붕괴 현상과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장 주도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온 세대가 지금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가. 분명한 것은, 이 세대가 지금의 위기를 기업 및 전쟁국가의 하인으로 전락한 교육시스템과 관련해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등교육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 현장의 하나이다. 그 곳은 보다 넓은 해방담론의 일환으로서 희망, 주체, 정치, 도덕적 책임을 결합시키는 비전과 교육적 실천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에의 약속이 생겨나는 장소이다. 물론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엄격한 학술적 방법이나 전 문화의 규율에 맞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지속시키는 데 핵심적인 주체들을 위하여 지식과 정열, 가치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생활양식이며, 인간을 성장·교육시키는 문화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들은 젊은이들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력을 행사하며, 활기 있는 논쟁에 참가하여, ‘정치적 삶의 정수(精髓)’를 이루는 공적 공간을 창조하도록 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민주적 미래를 상상하는 게 더 어려워지긴 했지만, 지금 세계 전역에서 젊은이들이 신자유주의와 그 ‘쓰고 버리기 식’ 교육 및 정치에 항거하는 시대로 우리가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무력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가 전쟁 수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시장이 민주주의의 척도가 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집단적인 조직화를 행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노예폐지론자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더글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공허한 개념일 뿐이라고, 그리하여 “투쟁이 없으면 진보가 없다”고 용기 있게 말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상위 1%만이 아니라 99%까지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들이 파편적인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교육하며, 민주주의 재생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나아가도록 힘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스탠리 아러노위츠의 말은 옳다. “이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급진적 상상력의 쇠퇴, 일반대중 속에 뿌리를 둔 활기찬 정치적 반대세력의 부재 그리고 상아탑의 안락한 공간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의 순응주의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퇴각, 패배, 침묵이 하룻밤 새에 역전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중심을 구성하는 기관, 작업장, 거리를 통한 ‘대장정(大長征)’이다.”
  지금 미국, 캐나다, 그리스, 스페인에서의 항의운동은, 이것이 오로지 단기적 개혁을 위한 기획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운동이며, 이 운동을 위해서는 공적 공간의 재생과 더불어 디지털기술의 진보적 활용, 공공영역의 확대, 새로운 교육의 창조, 민주적 표현과 정체성과 집단적 희망이 조성될 수 있는 장소의 확보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교회와 공교육 및 고등교육에서부터 지식과 욕망과 가치의 유통에 관여하는 모든 문화적 제도와 장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민주적 인간 형성을 위한 문화가 교육적으로, 제도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노력은 점진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이 아니라 민주적 혁명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최저 임금과 일자리(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권력의 민주화, 경제적 평등 그리고 군사조직과 거대은행에 대한 자금투입의 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판만이 아니라 실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화를 통해서 희망을 진정한 가능성으로 만드는 사회운동이어야 한다. 지금은 실패할 여유가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우리는 다시 권위주의의 손아귀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계급, 인종, 연령, 성적(性的) 지향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절박한 현실을 고려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데리다의 도발적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행하고 사유해야 한다. 만약 가능한 것만 일어난다면, 그 이상의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암흑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열려 있고, 가능성의 공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넓다. (이승렬 옮김, 녹색평론(2013년 5-6월), pp.120~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