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댓글 27

담마의 거울

2012. 1. 9.
근본주의, 테라와다불교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



댓글논쟁을 보았다.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이다. 그 중에 스님이 작성한 글을 읽어 보니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비록 댓글에 지나지 않지만 논문이나 기고문 등 공식적인 글에서 볼 수 없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댓글은 서광스님의 글이다. 불교닷컴에 등재 되어 있는 서광스님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댓글은 다음과 같다.





초기불교에 대한 냉소적 시각





우문우답....



한국제일의,
재벌회장인 이병철과 한국가톨릭 제일의 이론가인 차동엽신부의 질문과 답변은..글자그대로 우문에 우답이다.
평소에 논어를 즐겨 읽었다고 하여 그에 어울리는 질문을 하였으리라고 먼저 생각한 나의 선입견이 한참을 잘못되었다.
이리도...맹한지는 미처 몰랐다.

또한 그에 답하는 차신부의 답변은..역시나 맹탕이다.
당체...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리고..
이에 나름대로 답하신 허정스님은...이들에 맞추어 일부러 격을 낮추신것 같다.
그들에 맞추어..초기불교급의 차원에서..마치 초등생에게 답하듯 하신 것 같다.
그들에게는 초기불교급으로도 충분하다고 본것 같다.
그들에게..중관이나 유식..나아가.천태와 화엄으로 답한다는 것은 애초 어불성설이라고 보신 것 같다.
이런터에..언감생심..선불교이겠는가...

그러나..
행여..이것이 허정스님..종단의 불학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의 전부라면 곤란하다....

(서광스님)





이글은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의 새로 취임한 허정스님(필명 후박나무)이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에 대한 것이다. 이병철회장의 영적질문 24가지에 대한 불교측의 답변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이 글에 대한 댓글에서 서광스님은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초기불교적 답변에 대한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니까야만 맹신하는 자들은 외눈쟁이라고





니까야와 아가마에 대한 이해....



아래에서 보면,
경전형성과정의 초보적 지식마저 결여된 글이 보인다.
그결과 니까야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이 드러난다.

십사문제로 인한 근본분열이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
이때에 상좌부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 2차결집이다.
그후 다시 2차분열이 연이어 일어나고...마침내는 상좌부12부파,대중부 8개부파가 나타났다.
도합 20개부파에서 다시 무수한 분파가 일어났다.
이중...상좌부에서는 설일체유부가 갈라지고.그 설일체유부에서 다른 부파가 생겨났다.

이러한 20여개부파는 각자 자기부파 나름대로의 경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중..상좌부가 만든 것이 니까야이고,설일체유부가 만든것이 아가마이다.
그런즉..상좌부계통이 아닌 대중부에도 그들 나름의 경전이 있엇다.

이렇게 각 부파의 수많은 경전이 있었음에도...
유독..상좌부의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아가마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중의 분별설파가 니까야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북인도에서 번성한 설일체유부는 아가마를 사용하였는데..이것이 나가세나왕을 거치면서 지위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초기 잔존경전인....상좌부계통의 상좌부 분별설파의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아가마만이 300년 넘게 구전되어온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고는 볼수가 없다.
이들은 부처님 말씀의 일면을 전한 것일 뿐이다.
그것도 대중부에 의하여 배척된 상좌부계통의 것이다.

그러므로...
고단한 불교사의 전체를 보고...균형적인 눈을 가지도록 하자.
외눈에 짝눈을 가지고..부처님을 모두 본것처럼 하지 말자.



(서광스님)





이글은 니까야의 맹신에 대하여 비판한 글이다. 그런 니까야는 20여개 부파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이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까야만 맹신하는 자들은 외눈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친설과 불설



친설과 불설, 불설과 비불설에 대한 논쟁은 매우 뜨겁다. 이런 논쟁에 대한 글이나 기사, 논문은 수도 없이 발표 되었다. 또 부파불교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전 즉 니까야가 부처님의 ‘친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초기경전이 친설이라면, 대승경전은 ‘불설’이 될 것이다. 대승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부처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 많은 경전이 찬술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친설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런 가르침의 전승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들도 있을 수 있으나 여러자료에 따르면 제1차결집과 2차결집을 거쳐 3차결집으로 공인된 것이 니까야라 한다. 또 니까야의 경우 원형의 훼손없이 전승가능하다는 것이고 더구나 무상, 고, 무아,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친설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광스님은 현재의 니까야가 잔존 부파의 경전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란



대승불교에서는 동남아 불교 즉,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한다. 이는 대승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고, 실제로 선사들의 법문에 소승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기도 한다.



또 하나의 사실을 든 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원시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원시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덜 성숙된 불교, 미완성의 불교라는 뉘앙스가 매우 강하다. 이는 모두 대승의 교리가 더 수승하다는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에만 바라보는 시각일 뿐 전세계적으로 테라와다불교는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라고 말하고, 원시불교는 초기불교(Early Buddhism)라고 칭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 대하여 주류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Mainstream Buddhism"

a term used by some scholars for the early Buddhist schools.

(Schools of Buddhism, 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불교학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메인스트림부디즘에 대한 것이다. 일부 학자는 초기불교학파(the early Buddhist schools)에 대하여 주류불교(Mainstream Buddhism)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학파가 주류불교라면 그 맥을 잇고 있는 테라와다불교 역시 주류불교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동국대학술원장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불교tv강의에서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주류불교라는 명칭을 붙여 준 것 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학파는 어떤 것일까.



북전에서 본 부파불교 계보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초기불교학파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학파(Early schools)

·         Sthaviravāda(상좌부)

o    Pudgalavāda ('Personalist') (c. 280 BCE)

o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Vibhajjavāda (prior to 240 BCE; during Aśoka)- 독자부(犢子部)

§  Theravāda (c. 240 BCE) 테라와다

§  Theravāda subschools (see below)

§  Mahīśāsaka (after 232 BCE)

§  Dharmaguptaka (after 232 BCE)

§  Kāśyapīya (after 232 BCE)

§  Vatsīputrīya (under Aśoka) later name: Samitīya

§  Dharmottarīya

§  Bhadrayānīya

§  Sannāgarika

§  Mūlasarvāstivāda (third and fourth centuries)

§  Sautrāntika (between 50 BCE and c. 100 CE)

·         Mahāsaghika ('Majority', c. 380 BCE–(대중부)

o    Ekavyahārikas (under Aśoka)

§  Lokottaravāda

o    Golulika (during Aśoka)

§  Bahuśrutīya (late third century BCE)

§  Prajñaptivāda (late third century BCE)

§  Cetiyavāda

o    Caitika (mid-first century BCE)

§  Apara Śaila

§  Uttara Śaila

 

(Schools of Buddhism북전에서 본 계보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표시된 초기학파(Early schools 근본부파)를 보면 상좌부와 대중부로 크게 두 파로 나누어져 있다이후 19개로  지말 부파가 성립되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현재의 테라와다불교라 불리우는 테라와다부파가 설일체유부에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더구나 대중부의 경우 BC380 년에 성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남전 디빠왕사에서는 

 

이에 대하여 인도불교사(권오민교수역경서원)를 보니 두 가지 전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하나는 분별설부전승(남전)이고또 하나는 설일체부전승(북전)이다위 영문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계보는 설일체부전승에 대한 것이다그렇다면 분별설부 전승(남전)에서 어떻게 표기 되어 있을까.

 

인도불교사책에 따르면 위 계보와는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다테라와다에서 설일체유부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테라와다-타지부-설일체유부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부파불교를 보는 시각이 북전과 남전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특히 테라와다불교를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묘사한 북전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이에 대하여 한국어판 위키피디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편근본 분열의 발생 계기와 관련하여서는 북방불교의 자료와 남방불교의 자료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현대의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자료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부파 불교한국어판 위키피디아)

 

 

근본분열과 관련하여 북전과 남전의 차이가 있는데남전의 자료를 더 신뢰한다는 말이다이는 스리랑카의 디빠왕사(도사(島史 · Dipavamsa)에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디빠왕사에 따르면 근본분열이 일어난 원인이 2차 결집때문이라 한다. 2차 결집의 결정에서 불복한 비구들이 독자적인 결집을 열어 계율을 수정한 것이다그래서 상좌부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2차 결집후에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나뉘게 되어 근본 분열이 일어났는데이는 순전히 계율에 관한 문제로 갈린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3차 결집이 일어난 후 부파 분열은 이와 양상이 다르다계율에 대한 해석 뿐만 아니라 교리상의 견해지도자간의 대립지리적 조건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쇼카대왕의 3차 결집이후에 더욱 더 분열이 심화 되었는데이는 3차 결집으로 인하여 쫒겨난 비구들이 새로운 부파를 만든 것도 한 요인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처님 당시부터 근본가르침을 고수해온 교단은 테라와다이었다고 한다그래서 3차 결집이 끝난 후 아쇼카대왕은 테라와다(상좌부)불교를 공인하고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하였다그 중의 하나가 스리랑카이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 원본의 훼손없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었는데이는 스리랑카라는 지리적 이점과 법을 지키려는 비구들의 노력에 대한 결과라 한다.

 

하지만 인도대륙에서는 3차 결집이후 쫒겨난 비구들이 모여서 다시 만든 것이 자신들의 만의 교리를 갖는 부파를 만들었는데 주로 대중부라 한다.

 

한편 상좌부에서도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부파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설일체유부라 한다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1차결집에서부터 3차 결집에 이르기 까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테라와다불교가 주류임을 알 수 있다.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자

 

부파분열후 인도대륙에서는 대승으로 변형되고  밀교로 바뀌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그러나 고립된 섬나라인 스리랑카에서는 원형을 그대로 보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런 점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제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출가자들의 제일의 관심은 오직 법이었지 결코 중생이 아니었다그들에게 중생이니 인간이니 하는 것은 법이 아닌 개념(pannatti)일뿐이었다그들은 법을 배우고 연구하고(pariyatti, 교학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켜 도를 닦고(pariyatti, 도닦음그래서 무상무아의 법의 실상(보편적 성질)을 꿰뚫고 통찰하여(pativedha)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생을 다 바쳤다.

 

이처럼 법을 참구하며 평생을 바친 스님들이 부처님의 법을 참구하여 출가사문이 된 성스러운 과실(samannaphala, 沙門果)을 증득하고 불법이 오래 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전승해온 가르침이 상좌부불교이고 아비담마이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때빳띠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대림스님청정도론해제)

 

 

 

스리랑카비구

 

 

 

3차 결집후 일어난 부파불교와 대승운동이 대륙에서 일어나 불교가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에서는 3차 결집후 공인된 불교를 잘 보전함으로서 오늘날 니까야로 전승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대륙에서 불교는 어떻게 변질되었을까.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은

 

아쇼카대왕의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은 일종의 이단들이다일아스님의 책 아소까에 따르면 이단들에 대하여 흰옷을 입혀 쫒아냈다고 한다그런데 쫒겨간 비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수 많은 종단이 존재한다그런데 대부분의 신생종단들이 주류측으로부터 외면당해 생겨난 것이라 한다또 재산상 문제 때문에 새로운 종단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이는 기성 주류종단으로부터 밀려 난다고 하여 속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던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관련 종파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3차 결집후 이단으로 판정받아 흰옷을 입고 쫒겨나간 비구들이 할일이 무엇이었을까불교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그래서 자신들을 받아 주지 않는 주류불교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든 것이 부파불교로 본다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대승불교가 일어난 요인에 대하여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이 주도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보이고 있다.

 

설일체유부를 제압하기 위하여

 

오늘날 대승불교에서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른다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소승이라는 개념은 부파불교를 지칭한다근본 분열이후 20개에 달하는 지말부파를 말한다.

 

이런 부파 불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대승불교라고 볼 수 있다이때가 대략 기원전후로 본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대승이라고 칭하고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칭하였는데 김종욱교수의 불교TV강의에 따르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날 당시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가 상좌부계통의 설일체유부이었다고 한다이에 반하여 대승불교는 세가 매우 미미하였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어떤 조직이든지 소수가 다수의 가장 큰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헛점을 노린다고 한다김종욱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대승에서 설일체유부를 따라 잡기 위하여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 공사상이라 한다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논리를 전개한 것이 공사상이라는 것이다.

 

공사상이 출현하게된 배경

 

그런 공사상은 어떤 것일까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소수가 다수를 제압하려면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상이다공사상을 가장 잘 표현 하고 있는 경전이 반야경인데 6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반야경을 축약하여 핵심만 모아 놓은 것이 ‘반야심경’이다이 반야심경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공()’이 될 것이다공은 빈것이다그래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공을 설명하려면 먼저 역사적내지 교리사적 접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아와 연기라고 볼 수 있다무아가 없는 불교는 있을 수 없고 연기없는 불교 또한 상상할 수 없다이처럼 무아와 연기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그런데 무아와 연기의 해석방법을 놓고서 대승이 출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파불교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는 설일체유부이었다이제 막 대승불교운동이 일어 날 시점에 대승불교의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소수가 다수의 세력을 제압하려면 논리적 모순점을 찾아 내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대승불교의 공사상도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개발된 논리라 볼 수 있다바로 그것은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 된다.

 

설일체유부의 주장

 

대승불교에 ‘아공법공’이라는 말이 있다()는 당연히 공한 것이고법 또한 공한 것이라고 해서 공사상의 핵심적인 논리를 말한다그런데 대승에서 소승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리중의 하나가 ‘아공법유’라는 것이다.

아공법공이나 아공법유나 공통점은 아는 공하다는 것이다이는 무아를 기본적 베이스로 깔고 가는 것이다만일 무아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모두 아공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법에 있어서 유부는 실유를 주장하고대승에서는 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는 법을 이루고 있는 요소즉 자성(自性)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모든 현상은 생성되고 소멸된다상호의존하고 조건지워져 생성소멸하는데 있어서 어떤 ‘요소(element)’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사상이다그 요소를 75법으로 본 것이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사기에 들어 있는 필름통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예를 들어 75개의 필름이 있어야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내용은 무상하고 영화 또한 이 극장 저 극장 옮겨 다니며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나오게 하는 필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상이 무상하고 무아라고 하더라도 오온이 존재 하듯이 기본적으로 75법이 실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따라서 75법이 존재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그래서 ‘일체유부’라 한다.

 

또한 실유한다는 것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바로 75법만이 독립적으로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이 것이 부파불교시대에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주장이다.

 

공사상이 출현한 배경

 

후발주자인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유부의 주장을 깨뜨려야만 살아 남을 것이다그래서 유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잡은 것이 ‘자성’에 관한 것이다특히 문제를 삼은 것은 75법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체가 있다는 것은 연기법과 모순된다는 것이 대승의 견해이다연기라는 것이 수 많은 조건들과 상호의존성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인데 자기만 떨어져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그래서 자성과 연기가 양립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관학파의 주장이다.

 

 

자성=실체성=연기-à인정(설일체유부)

자성=실체성=연기-à부정(대승불교)

 

 

자성에 실체가 있다면 연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나온 사상이 ‘공사상’이다연기라고 하는 것이 관계성을 말하는데 고립된 실체성이 있다면 자성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무자성이라 주장한다즉 다음과 같은 논리이다.

 

연기=관계성=무자성=

 

무자성은 비운다는 의미이다그래서 공()이라 한다비운다는 것은 공의 의미인데그렇다면 무엇을 비운다는 것일까그것은 바로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것이고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고립된 실체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따라서 공은 ‘연기적 관계성’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라고 볼 수 있다그러므로 중관학파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도식이 성립된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결국 중관학파가 비판 하고자 하였던 것은 연기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이글은 불교 tv사이트에서 김종욱 교수의 공사상 강의에 대하여 녹취하여 정리 한 것이다블로그에 여려차례 올렸는데또 올렸으니 자기 표절한 셈이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이처럼 연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부와 중관학파는 정 반대로 보고 있다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파

학설

  

설일체유부

아공법유

(我空法油)

비록연기하지만 요소들은 실재하고 자성은 있다

중관학파

아공법공

(我空法空)

바로 연기하므로 요소들은 실재하지 않고 자성은 없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아공법유’라는 말이다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설일체유부와의 논쟁이었으나 지금도 남방 상좌불교를 폄하 할 때 사용하는 논법이 아공법유이다그러나 이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달리 법을 ‘찰나적’ 존재로 본다항상 실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로 보는 것이다그래서 법은 고유의 성질을 갖는 ‘자상’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공상’이렇게 두가지 큰 특징으로 본다따라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경우 아공법유가 아니라 ‘아공법공’이 된다.

  

재가자들이 삶의 바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상을 접하기 힘들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면 어렴풋이나마 공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공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재가자들이 삶의 바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상을 접하기 힘들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면 어렴풋이나마 공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공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성진아상락아정의 바탕은

 

이렇게 인도대륙에서 소수의 대승운동주의자들이 다수의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공격하여 마침내 인도대륙에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이후 공사상의 논리는 더욱 더 개발되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진아론적’ 법문을 선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이런 대승불교의 사상에 대하여 서광스님은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기본적인 소양부터 쌓아야...

 

아래,
불자님의 글을 보고...한마디합니다
.

오는 3월부터 새로 조계종의 종정이 되실 진제스님이 법문에서 항상하시는 말씀이...불성.진아.상락아정입니다
.
이 말은...진제스님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종정이신 법전스님과 몇일전에 입적하신 지관스님도 항상하시던 말씀입니다
.

이 분들은...앞의 두분은 모두 종정이시고..지관스님은 선..율 삼장에 두루 통하여 당대최고의 학승이자,율사로 모든 종도들의 존경을르 받던 분들입니다
.
그러한 분들이 그와같이 말씀하실 때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불성이니,진아니,상락아정이니 하는 말의 바탕에는 중관의 공관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반야사상의 최고봉인 금강경인 까닭입니다
.
그러므로..이말들의 참뜻은..외도나 소승의 논사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견해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아래의 불자님은
...
이것을 망각하고...무지한 일반론에서 설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
이것은...불교이해의 기본적인 소양이 의심스러운 것으로서..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지않습니다
.

그럼에도
..
굳이 이와같이 글을 올리는 것은..보기에 딱하여서입니다
.
바라건데..공부를 처음부터 다시하시라..

 

(서광스님)

 

 

 

불성이나 진여의 밑바탕에는 중관의 공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그런 공관은 어떤 것일까.

 

공관이란 무엇인가

 

다시 김종욱 교수의 강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시설(假施說)된 것쁘라즈냡띠(prajñapti)

 

중관학파의 주장대로 아()나 법이나 모두 공한 것이라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이 된다이 때 일체는 아나 법을 말하고개공은 유부의 75법 즉요소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그래서 중관학파는 75법을 요소(element)로 보지 않고 단지 기능(function)으로 본다이처럼 요소가 아닌 기능을 보는 것은 오온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제법을 요소가 아닌 기능으로 보는 것은 수학의 함수(function)로 설명할 수 있다제법이 x축과 y축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된 점이 아니라 x축과 y축 사이의 관계에서만 한 점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따라서 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래프가 그려지는 방식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 설명 될 수 밖에 없다그래서 고정된 요소(element)가 아니라 기능(function)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이나 75법 역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중관학파의 입장이다이처럼 서양식의 기능에 걸맞는 개념이 중관학파의 ‘프라즈냡띠(prajñapti)’이다.

이 프라즈냡띠를 한자어로 표시하면 ‘가()’라 번역된다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시설(假施說)’이다이때 가()는 가짜가 아니다잠정적이라는 것이다임시로 설치해 놓은 가건물 같은 것이다그 가건물은 가짜 건물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임시로 세워 놓은 건물을 말한다. 50층짜리 빌딩을 지을 때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식당 같은 것이다그렇다면 일체가 다 공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자신도 공한 것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이야기는 아든 법이든 모두 공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함수적 기능으로서 쁘라즈냡띠 즉가시설로서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있는 것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문제는 일체가 모두 공한 것이라면 문자적으로 보아서도 그 모든 것안에는 공()도 포함되어야 한다‘공자신도 공한 것’이 되고 만다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我法空 空亦復空(아법공 공역부공)

모든 것이 공이고또 공이어서 모든 것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공 역시 공한 것이다.

 

아도 공하고법도 공하고공도 공한 것이다이렇게 계속 공으로 나가면 ‘허전’하게 된다이렇게 모든 것을 비워 나간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의 작용은 이렇게 진행 되고 있지 않은가이렇게 마음의 작용에 촛점을 맞추면 ‘유식사상’으로 가게 된다.

 

공가중(空假中삼제(三諦)

 

공도 공한 것이라면 그 공이란 무엇인가그 때의 공은 쁘라즈냡띠(가시설)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 맞다실상은 연기 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묘사 할 수 있다따라서 실상은 가시설(쁘라즈냡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상이 공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그런 이들을 ‘무기공’ 내지 ‘공병’에 걸린 것으로 본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인데 가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라는 긍정이다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여기에서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공과 가의 ‘중간 정도의 입장’이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가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고이 두가지 진리를 포괄하여 유무 양변을 떠나 중(중도)이라 한다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이 공가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가지 진리’라 하여 3제라 하는데 다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진리

  

진제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의 입장

(施說)

속제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

중도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

 

 

(김종욱굣수제25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 - 공()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불교tv 2008-04-07)

 

 

 

불교TV의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서 중관의 공관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준다그런 공관은 나가르주나(용수)에 의하여 정리 공가중 3제로 정리 되었는데이사상의 핵심은 중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이 중도사상은 유무양변을 떠난 것이라 한다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되는 것이 중도라 한다이런 중도사상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의 중도 사상과 다른 것이다공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불교에 부처님의 중도가 있다면 대승에서는 용수의 중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다른 것인데인도불교사(경서원)에서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이 용수의 중도사상이라 한다마치 부처님이 브라만교의 아뜨만을 비판하여 불교가 성립되었듯이대승불교는 용수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여 성립된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할 리가 없을 것이다그래서 대승논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니까야를 내버려 두고 별도의 경전제작에 들어간다그것이 공사상과 보살사상 등의 대승이념이 담겨 있는 반야경법화경화엄경 등과 같은 대승경전일 것이다.

 

한놈만 조지면 된다?

 

 

단현은 근본주의자입니다....

 

단현은 불교근본주의자입니다.
초기불교를 맹신하는 근본주의자입니다
.
이 근본주의자는...불교관련의 카페나 블로그등을 돌아다니며 ..심지어 무비스님등의 존경하는 스님들께도 온갖 비방과 폭언을 퍼붓고 있습니다
.

본래..근본주의자는..기독교근본주의자이던,이슬람근본주의자이던...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배타적 근성에 의하여 대화의 상대가 되지않는 것입니다
.
이런 근본주의자와 댓글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
그러므로...장황하게 글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

자신은
...
스스로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하나..그는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틀림없는 근본주의자입니다
.
근본주의자 특유의..맹신적 기질,배타적 성향.공격적 기질등이 그것입니다
.
그 예가..대승을 부정하고,대승의 경전과 논장을 불살라야 한다고 하며,대승의 보살을 마구니 취급하는 것등이 모두 그것입니다
.

때로
..
이 사람은...가끔 겸손을 가장한 글들을 올리기는 하나..이 모든 것은 위장입니다
.
세불리할경우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
이 일천제는...스스로 알아서..무시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서광스님)

 

 

 

스님의 댓글을 읽어보면 일관성이 있다오로지 한 사람의 네티즌을 지목하여 근본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있다마치 안티조선운동을 보는 것 같다조선중앙동아라는 여러 보수신문중에 대장격인 조선만을 타겟으로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수 많은 네티즌 중에 오로지 한명만 지목하여 집중으로 공략하는 것이다시쳇말로 한놈만 조지면 된다라는 것이다그런 한명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고 일천제라는 최악의 명칭을 붙여 주고 있다더구나 불교근본주의자들에 대하여 맹신적 기질,배타적 성향.공격적 기질등이 있다고 하여 상종도 못할 인간들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불교근본주의자들은 그렇게 나쁜 인간들일까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왜 문제시 하는 것일까이에 대하여 홍사성님은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홍사성 위원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불교평론 2003)

 

 

불교에는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원래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기 때문이다그런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요인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요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대표적으로 용수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공사상을 성립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대승불교의 말로는

 

이렇게 공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대승불교는 어떻게 되었을까다음의 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불교 전통 연표

연표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선종 · 토종 · 일련종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상좌부 불교 전통

 

대승 불교 전통

 

밀교·금강승 전통

출처(부파 불교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이 표는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각 불교전통을 보여 준 것이다.

 

인도대륙을 보면 초기불교(Early Buddhism,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거쳐 대승불교 시대가 시작 된다그리고 밀교화 되어 13세기가 되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로서 불교로서 정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성립된 대승불교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여 마침내 밀교로 바뀌었을 때 힌두교와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았을 때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다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한국에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해온 대승불교가 종교평화선언이라는 명목으로 유일신교의 교리도 인정하자는 열린진리관을 주장하고 있다이는 다름 아닌 대승불교 전통의 산물로 보여진다.

 

만일 불교가 유일신교의 열린진리관을 받아 들였을 때인도대륙에서 밀교화된 불교가 힌두이즘속으로 사라졌듯이불교가 유일신교 속으로 융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지만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전래된 테라와다 불교는 그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 테라와다 불교는 아쇼카대왕시절 3차결집으로 공인된 불교이다이는 20개의 지말 부파로 갈리기 전의 일이다따라서 초기불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원음은 어떻게 하여 훼손됨 없이 전승될 수 있었을까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랑카에서 상좌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 주석서들을 빠알리가 아닌 싱할리어로 전승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고실제 그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른 신흥사상과 섞지 않고 전승할 수 있다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파로 자연적으로 스리랑카의 상좌부는 스리랑카에만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다인도의 강한 문화적 정치적인 입김에서도 상좌부 전통을 잘 고수해오는 장점도 있지만 반면 자연 국제 불교의 흐름과는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인도전역특히 남인도에 상좌부 가르침은 상당히 퍼져있었을 것이지만 스리랑카 상좌부의 입장에서는 그것마저도 신흥사상과 섞인 것으로 의심하였을 것이며 실제로 인도의 상좌부가 마힌다가 전한 것과 같은 고주석서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스리랑카 대사(大寺)의 스님들은 더욱더 그들의 싱할리 주석서를 고수하였을 것이고 다른 부파에 노출시키기를 꺼려왔을 것이다.

 

(대림스님청정도론 해제)

 

 

대림스님은 원음이 훼손되지 않은 이유로서 지역적 원인과 이를 지켜 내기 위한 비구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징은 대륙에서의 공사상유식사상 같은 변화무쌍한 사상적 흐름에 물들지 않았고더구나 싱할리어로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하지만 더 큰 요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 내기 위한 비구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데이런 노력은 초기경전에서도 보인다빠알리 삼장의 율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들이여어느 때 나는 적어도 500명의 많은 무리의 비구들과 함께 빠와에서 꾸시나라로 가는 큰길을 따라 가고 있었소그때 나는 길을 비켜서 어떤 나무 아래 앉았소그때 꾸시나라에서 오는 어떤 나체 고행자가 만다라와꽃을 들고 빠와로 가고 있었소나는 보고 이렇게 물었소.

 

‘그대는 우리 스승님을 아십니까?

 

‘네 압니다고따마 시문은 일주일 전에 열반하셨습니다그래서 이 만다라와꽃을 그것에서 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존자들이여이 소리를 듣고 욕망을 초월하지 못한 어떤 비구들은 땅에 쓰러져 팔을 내저으며 이리 저리 뒹굴고 통곡하면서 ‘너무 빨리 세존께서 열반하셨다너무 빨리 선서께서는 열반하셨다너무 빨리 세상의 지혜의 눈이 사라졌구나!’라고 비통해 하였소그러나 욕망을 초월한 비구들은 시중하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슬픔을 안으로 새기면서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그런데 어떻게 무상한 것을 영원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말하였소.

 

나는 비구들에게 말하였소‘존자들이여이제 그만들 슬퍼하시오 그만들 한탄하시오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거기에는 변화가 있고 이별이 있다고모든 태어난 것들은모든 존재하는 것들은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그런데 무너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이 많아서 출가한 수밧다라는 비구가 앉아 있다가 하는 말이 ‘그만하면 됐습니다그만들 슬퍼하시오우리는 이 위대한 사문으로부터 벗어났소스승께서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고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하시며 우리를 억압했습니다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소.

 

존자들이여,

담마가 힘을 잃고 담마가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이 힘을 잃고 계율이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가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담마가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계율을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계율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

계율을 함께 외웁시다.

 

(율장 쭐라왁가 11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이 열반하였을 때 나이 많고 늦게 들어온 비구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자이 을 들은 깟사빠 존자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그래서 급히 500명의 아라한을 소집하였는데이것이 1차 결집의 원인이라고 한다이유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내자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주류불교

 

이상 불교닷컴에서의 서광스님의 댓글에 대한 반론형식으로 글을 꾸며 보았다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테라와다불교가 초기불교를 계승한 주류불교라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20개에 달하는 부파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의 불교로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 있는 불교를 말한다이런 초기불교는 2차 결집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 분열이 되긴 하였지만 계율에 관한 문제로서 교리의 훼손은 없었다하지만 3차 결집으로 인하여 쫒겨난 비구들이 별도의 교파를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를 부파불교시대라고 한다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부파불교를 말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했던 설일체유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선사들은 아직도 남방의 테라와다불교를 소승이라 지칭하는데이는 불교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불교역사를 보면 남방테랑와다불교는 소승이 아니라 주류불교라는 것이다이는 3차 결집으로 공인된 불교가 바로 테라와다불교이고이 공인불교를 아소까대왕이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전법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한나라가 스리랑카인데스리랑카에서 공인불교가 원본의 훼손없이 이제까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적 특성과 담마 아닌 것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피눈물나는 비구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2-01-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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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불사 단현2012.01.09 23:13 신고

    연꽃님 고맙습니다.
    글이 길어서 답글로 올리기 곤란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골라 올릴까 합니다_()_

    답글
  • 한생각2012.01.10 12:26 신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계종 신도들이 이 글을 읽을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답글
  • 파사현정2012.01.10 14:45

    부처님이 어떠한 분인지,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부처님의 능력은 어떠한 위신력을 갖고 계시는지, 붓다의 삼신은 무엇인지, 연화장세계는 어떠한 세계인지 등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지극히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 불교를 포교한다는 것이 결국은 비방하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정말로 언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고 있구나!!!
    법을 설하거나 포교를 할려면 위의 내용은 알고(최소한 아라한 이상이 되어야 법을 모독하지 않음, 사실상 아라한도 부족함) 해야한다는 것을 고언하는 바입니다.

    답글
    • 마성2012.01.12 02:01 신고

      '파사현정'은 아라한과 부처가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라한이 곧 부처님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열 가지 호칭(如來十號)은 응공(아라한)= 정변지= 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분 석가모니불을 일컫는 말입니다. 동일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후대 아라한의 경지는 낮고, 부처(佛陀, 깨달은 사람, 즉 覺者)의 경지는 높다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다른 불교의 교리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 파사현정2012.01.12 15:06

      마성님, 초기불교의 큰스님이신 마성스님이신지, 혹은 아닌지를 몰라 "님"으로 하였습니다.
      만약 마성스님이시면 마성스님으로 정정하겠습니다.

      저의 글이 여래십호도 모르고 글을 올렸다고 봅니까? 위의 글이 그정도의 수준의 글이라 여기시는지요?
      아라한과 붓다는 천지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성을 철견하고 두타행을 하여 이 몸에 대한 착이 떨어져 나가면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3대아승지겁을 수행(대중생고공양과 복덕, 지혜 증진)을 하여 삼신이 갖추어져야 붓다인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도 아라한과 붓다를 일부 구분하고 있지요, 특히, 법화경의 비유품에 사리불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지금까지 본인이 붓다로 착각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려면서 스스로 반성하기를 색신이 갖추어져야 붓다라는 것을 깨닫게되지요, 즉 색신은 보신을 말하며, 붓다는 삼신을 갖추어야지 붓다인 것입니다.
      본인의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법을 잘못 이해하거나 알면은 위대한 부처님을 모독, 폄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명심하여야 하며, 법을 말씀할때는 조심 조심하여야 합니다.
      좀더 깊이 부처님 법을 이해하여 법설해주시기를 간곡히 고언하는 바입니다.

    • 원불사 단현2012.01.12 23:20 신고

      마성스님 말씀은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를 바가 없는데
      파사현정님이 부처라는 대상에 대한 정의를 위신력, 삼신 연화장세계 등으로 전지전능한 신적으로 격화신키는 것은 옳지않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저 마상 무아를 체득하신 아라한으로 그리고 뭇 제자를 교육시키신 스승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지적으로 보입니다.
      즉 스승으로서 부처님을 아라한과 구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붓다를 인간이나 아라한의 경지를 넘어서는 특별한 경지로 분별하여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제 말씀 역시 스님 말씀을 왜곡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 파사현정2012.01.13 11:23

      단현님!
      아라한과 부처님이 같다니요?
      아라한은 본성을 철견하고 두타행을 통해 이 몸의 모든 착을 끊어버리는 수준의 공부를 완성할 때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삼신을 갖추어야 붓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천지현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상입니다
      붓다의 삼신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세계인 연화장세게를 알지 못하고 무슨 불교 교리를 논한다는 것입니까?
      님의 수준에서는 부처님을 신격화한다고 하겠으나, 님께서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라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사료합니다만....
      현재의 세계 불교가 이렇게 왜소화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저의 견해를 진정으로 깊이 사유해 주시기를 충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원불사 단현2012.01.17 23:52 신고

      파사현정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서 저는 아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혹시 대승적으로 변질된 부처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신지요?
      설명을 조금이라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대승불교에 대한 공부가 전무하다시피해서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설명해 주시거나 자료를 링크해 주시면 읽고 답을 적겠습니다_()_

    • 파사현정2012.01.18 07:12

      단현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처님의 세계, 즉 연화장세계를 모르고 무슨 불교를 이야기하십니까?
      화엄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는 법화경과 화엄경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위대한 불교를 얼마만큼 왜곡하고 왜소화해서 잘못알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파사현정 합장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0

    (으아~ 또 댓글이 길게 달아지네요. 연꽃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그냥 가겠습니다! 종이 값 많이 나오는 것 아니죠?)

    1# 美 한인교회 수, 한국의 3배..`현지화' 요원 [연합뉴스] 2012년 01월 11일(수) 오전 02:01

    교회 분열, 사이비 목사 시비도 잦아(애틀랜타=연합뉴스) 김재현 특파원
    = 미국에 진출한 한국 개신교회 수가 공식 통계로만 4천 개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미국 내 한인 350명당 1개꼴로, 교회 수 5만여 개, 국민 1천명당 1개 꼴인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최근 미국 `크리스찬 투데이'에 따르면 2011년 12월 현재 미국 내 한인교회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4천96개로 집계됐다. 캐나다를 포함하면 4천511개다. 미국 내에서 한인 인구에 비해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은 남부 아칸소 주로 무려 175명당 1개의 한인교회가 있다. 2010년과 비교해선 전체 한인 교회 수가 48개 줄었는데, 이 신문은 교회 성장세가 주춤한 것은 1999년과 2000년, 2007년에 이어 4번째라고 전했다. 그러나 목사가 예배당 없이 자택에서 목회를 하는 비등록 `가정 교회'를 포함하면 한인 교회 수는 5천 개가 넘을 것으로 분석됐다. 애틀랜타의 한 개신교계 인사는 "한인교회의 성장세가 주춤한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할 공간이 없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인동포 대상 개신교회 수가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한국인 목회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 내 개신교 신자들이 초대형 교회로 몰려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 새로운 미국 진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한인교회의 교단 별 분포를 보면 한국처럼 장로교가 43%로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고 이어 침례교 18%, 감리교 14% 순으로 신도 수가 많았다.

    10일 현재 미국 개신교계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선 침례교가 25%로 최대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어 성결교 9%, 루터교 5%, 장로교, 감리교 각각 약 4% 수준이다. 한인 교회가 미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미국 교단에 흡수되거나 융화되지 못한 채 고국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한인 목회자들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신자 확보에 나서는 과정에서 교단 및 교회 내 분열과 사이비 목사 출현 등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 등록 한인 개신교회만 200개에 이르는 애틀랜타에선 지난해 목사가 연수비자로 한국의 여대생 등을 유인해 돈을 뜯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한국의 유명 대학 졸업생들이 목사의 소개로 현지 기업에 취업한 뒤 집단 생활을 하면서 봉급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답글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1

      2# “신은 죽었다니까! 왜들 아직도 그러니!”

      제 댓글 중 어디선가 서양철학사를 보면서 Surprise, Surprise, Surprise 를 느꼈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그간 제가 하고 있는 공부가 불교 – 서양철학 – 불교의 순서가 되고 있습니다.
      2년 전 처음 대림/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 서문에서 개념과 궁극적 실재의 분류를 대했을 때만 해도 철학/종교 등의 인문 분야는 깜깜 맹인이라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의미를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냥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철학을 심심풀이로 가끔 보던 중, 갑자기 어라! 하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Surprise! 다름이 아닌 바로 불교적 사유와 서양철학의 사유가 만나는 순간들이었던 거죠.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중세신학에서의 보편논쟁입니다. 보편논쟁의 사안은 바로 개념의 실재성 여부였고요.
      결국 윌리암 오컴의 유명론이 승리한 이후 신앙과 철학, 의지와 이성이 완전히 결별합니다. 아마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명론의 승리 그 자체는 이후 이어지는 후속적 사유들에 의해 “신”은 개념이자,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수도사인 윌리엄 오컴이야 허구인 신을 선택했지만요.

      나중에 보니 요새 초딩용 철학 관련 서적에도 보편 개념은 허구이다, 명사나 이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등을 설명하는 예화를 소개하고 있더라구요. (초등5-6 ~ 생각의 높이를 키우는 “철학 교과서” p.52 – 포유동물은 없다, 저자 임병갑) 저도 그랬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유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신학을 하는 사람들,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인문학을 하고 있다지만 사실 이러한 사유를 모르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절대 그 동네에 못 붙어 있습니다. 어느 분 말씀대로 그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면 별수 없이 그냥 거기서 살아야겠죠. 여기 늘 오시는 어느 분이 가끔씩 입버릇처럼 ‘말이나 언어는 관념일 뿐이다’ 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분도 도가 꽤 높으신 분(?)이구나 라고 항상 느낍니다. 그러한 사유 자체가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수행의 기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아니 죽었다가 부활해도 유일신 종교 쪽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못합니다. 우리는 붓다의 위대한 선취를 누리고 있는 거죠.

      이제는 저도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의미적 분류가 우리 불교적 사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지금 봐도 개념은 허구이다, 명사는 허구이다 라는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1년 이상 그 주제를 지니고 지내오면서, 철학 책들 여기 저기를 뒤지고 다닌 셈이죠. 그러나 아직도 마누라에게 이 개념을 잘 설명 못 하겠어요.
      보편논쟁의 종결자인 윌리엄 오컴 조차도 정작 본인은 신앙을 선택 했는데, 제 이해가 늦었다고 해서 그리 흠은 아니겠죠?
      그렇지만 누가 저더러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가 뭐니 물으면, 보편논쟁이라고 얘기할 겁니다. 두 번째는? 보편논쟁, 세 번째는? 보편논쟁. 그래도 그 다음은? 칸트와 쇼펜하우어. 또? 응, 철학자들 전부. 모두가 서로 징검다리야.

      보편 개념은 목소리의 울림이며, 허구이다. 명사는 보편 개념이다. 개는 짖지 않는다. 신도 죽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주장은, 오온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거짓입니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칸트철학의 반절이 그것이고요. 그러니 신의 존재를 초이성/비이성적으로, 의지적으로, 주관적으로 우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의 실천이성이 나온 것이고요. 하이네는 칸트가 앞문으로 신을 내쫓고 뒷문으로 다시 신을 끌어들였다고 표현합니다. 신의 존재가 허구이니, 오온이 경험할 수 없는 거고, 경험할 수 없으니, 오취온의 의지적 욕심으로 더욱 더 원하게 되고, 그래도 증명이 안되니 신비주의의 동굴이 결국 피난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보충 필요 ~ 신비주의 경험들을 저는 완전 사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비주의 경험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 과정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 도비도지견청정 직전에 겪는 십관수염 중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선지식의 지혜에 의한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 조금 자신이 있으신 분이 답을 주시면 무척 고마울 텐데요.)

      신의 부재는 이미 오래 전에 철학적 사유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 13-14세기 윌리엄 오컴에 의해서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니까, 니체가 나중 나중에야 “신은 죽었다”라고 시적 언어의 은유로써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100년이 지나야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거라고 니체 스스로 예언했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요.

      개념과 실재의 의미적 분류 자체가 신을 배제하고 들어가는 사유입니다.
      보편논쟁의 유명론적 결말은 개념의 비실재성 증명이자, 신의 죽음의 선구적 선언이며
      특히 파르메니데스-소크라테스-플라톤 이후 잘못 됐던 서양철학 사유의 방향을 교정하는 출발점입니다.
      (http://blog.daum.net/bolee591/16154821 ~ 하나님/진공/기독교_삼위일체/불교_삼신사상에 관한 글을 읽고 썼던 글입니다.)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3

      3# 이제 연꽃님이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의 반절은 알겠습니다. 최근처럼 나의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열심히 글을 쓴 적은 이 번이 난생 처음입니다. (사실 누구보다도 오히려 제가 더 놀라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사유의 과정을 명료하게 하고자 노력은 해 왔지만, 글을 쓰면서 정리하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연꽃님이 진화하고 계시듯이, 저도 이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자신도 들고요.

      사실 이 댓글은 써 놓고도 올리지 않겠다 하고 일부러 결심을 했었습니다. 최근 제가 조금 너무 나서다 보니,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으로 계속 오버할까 겁이 나서요. 연꽃님의 조용한 사유 공간에 계속 묻어가는 느낌도 들어 이제는 사실 좀 신경이 쓰입니다. (연꽃님, 요새 제가 좀 너무 나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관련의 위에 옮긴 뉴스를 보니 또 생각이 달라지네요. 완전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라도, 비록 구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냥 여기까지만 가자 하고 말입니다. 기사에 나오는 “유신론적 혼돈”의 상황을 제 아이가, 제 조카가, 제 친구의 자식들이 겪을까 두려워서요. 정말이요! 우리 국내에서도 그러한 데, 이역만리까지 가서도 삶의 고통을 삶의 고통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삼사라 해야 하는 현실이 무서워서요. 정말이요!

      우리는 유일신앙 과잉시대의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는 미국에까지 넘치는 모양입니다.
      그 유일신앙인들은 우리의 친지이자 우리의 친구들입니다. 한국불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불교를 같이 이해 하는 것, 철학적 사유를 공유하는 것.
      어느 것이 더 현실적으로 작동을 잘 할까요? 각자의 선택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물론 여기 오시는 많은 분들처럼 저도 일단 먼저 불교를 선택했었으며, 그래서 불교적 사유들을 어느 정도 “읽고 난 후” 철학을 대했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이해가 수월했습니다. 철학적 탐구의 궁극적 대상이 불교의 대상과 동일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죠. 반면 유일신 종교는 신학을 할 수 있을 뿐, 이제 태생적으로 철학은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일 터이고요. 사실 불자이신 분들은 따로 철학이 절실하지는 않습니다. 철학 자체를 하고 계시니까요. 그러나 막 붓다의 가르침에 입문하는 경우라면, 수행 이전의 사유 단계에서는 정말 요긴합니다. 지금의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현실적 이유는 주변과의 관계적 방법론 때문에 유용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철학과 종교, 불교와 유일신 종교와 관련한, 그 동안 애매모호하게 여기는 차이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타종교인들을 종교적으로, 비종교적으로 진정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러한 이해를 위한 자극으로써 서양철학사적 핵심의 추적에서 중요하고도, 제일 중요한 주제인 보편논쟁을 신문 기사와 관련하여 소개해 봤습니다.

      남경태씨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TV평생대학, 남경태/생각의 역사 3편 중, 2편_이성의 발견, 47~49분)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의 단절도 물론 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근대철학의 붕괴로 시작되는 현대철학은 “2500년 만에” 처음으로 나오는 철학 혁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굉장히 특수한 시대이다.
      (눈먼쥐 추천도서 = 더 많지만 ~ 플라톤_국가 + 남경태_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 + 이진경_철학과 굴뚝청소부)

      저의 결론적 의도는 이렇습니다.
      이상의 논리와 함께, 열심히 “행간”을 감안하시면 저희 불자들에게 있어 개인적 공간에서의 타 종교와의 마찰은 정말 불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또 타 종교와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우리의 생활 주변의 변화를 원한다면 정말 종교적이고 (연꽃님처럼), 그리고 비종교적인 사유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황차, 우리 불자들끼리의 대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유일신 종교의 신앙인들도 같이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일곱.눈먼쥐.하나의 나 홀로 종교선언
      나와 여러분 사이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의 진리가 있으며 (아, 아직 저는 못 봤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진리가 있습니다.
      나의 진리와 당신의 진리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섭섭하지만요.
      그러나 분명 당신은 내 앞에 있으며, 분명 당신 앞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느낌을 제가 압니다. 저도 아직은 당신과 같이 윤회를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서로 진정한 품위의 아쇼카 선언적 사유를 각자의 마음과 몸에 지니고 살기를 감히 간청합니다.

      아침이 오고 있네요.
      Everybody, Happy Birthday to You! (니체식 아침 인사? ~ 매일, 매일이 우리의 생일입니다!)
      그리고 또 진정 생일을 맞고 싶지 않은 분들께는, 내일은 생일을 맞지 않는 길을 찾으시기 기원합니다. __()__

    • 진흙속의연꽃2012.01.12 07:43 신고

      장문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이 심오하여 별도로 카피하여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글을 쓸 때 참고 하기 위해서 입니다.
      글에서 말씀하신대로 글을 쓰다 보니 공부가 되고 진화 되고 있는 듯한 느낌 입니다. 그것은 2006년도의 글쓰기와 지금의 글쓰기를 비교해 보니 확인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A4한장 채우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썼다하면 A4로 열장은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글쓰기 중독이 되지 않았나도 생각해 봅니다.

      __()__

    • 원불사 단현2012.01.12 23:02 신고

      기독교의 좋은 자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랫글 마성스님 지적처럼 저 역시 눈먼쥐님의 글을 읽기가 너무 피곤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대충 훌터보기도 하였지만 주제가 무엇인지 결론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취미삼아 쓰신다고 하지만 연꽃님의 진지한 연구와 성찰의 글에 사족처럼 불필요한 님의 글로 주제를 흐리게 한다 싶어 여간 안타깝지 않았습니다.

      도반님께 감히 부탁드리지만, 앞으로는 핵심만 아주 간단히 몇 자로 요약해서 주제에 합당한 답글을 쓰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긴 글을 쓰실 수 있는 능력이 부러울 뿐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부디 짧지만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마성2012.01.12 02:11 신고

    '일곱.눈먼쥐.하나'님은 언어의 경제학을 모르십니까?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요, 종교이며, 인문학이요, 과학이고, 심리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입니다. 서양철학으로 우회하여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은 일회일기(一會日期)입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오면 늦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2 16:04

      감사합니다. 마성스님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언어 경제적으로)

      언어 비경제적으로.
      (일부러 글의 재미 삼아 쓰는 방식이오니 애교로 봐 주십시오. 통과하셔도 되고, 안 하셔도 되고)
      제가 이 댓글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추 2달쯤 되네요.
      이제는 스스로도 웬 지 오버할 것 같아 “누가 나 좀 말리도!”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던 상태였는데
      마성스님의 지적을 받으니 뜨끔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사실은 엄청 뜨끔합니다!!!)
      최근의 글은 저 스스로도 오히려 당황스러워 하는 편입니다. 저의 현재 모습과 제가 바라는 방향의 괴리 때문에요.

      제가 알고 있는 것들만을 써야 했다면 저도 이전 글들을 분명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스스로가 공부하는 학생인걸요. 일곱 눈먼 쥐 중의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을 나타내고자 했고요.

      댓글 공간에 대해서까지 언어 경제성의 기준은 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글의 표현 방식 자체에 대해서 하신 지적이라면 정말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표현의 경제성도 상황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경제성, "듣는 사람"의 경제성 따로따로 아닐까요?
      여기 댓글 공간에서는 듣는 사람들이 불특정 되어 있으므로 그 경제성을 따질 근거가 없고요.
      그보다는 댓글 공간은 대화 또는 담화의 성격, 오히려 편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 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네 골목 같아요. 우리 어릴 때 놀던 곳 기억나시죠? 요즘은 그런 곳이 드물지만.
      댓글 전에는 분명 못 느꼈는데, 이제는 글들이 서로 섞이다 보니 자주 오시는 분들이 조금씩 마음으로 알아지네요.
      또 여기에서 여러 번 글을 쓰다 보니 댓글 공간이 자기 계발의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언어적 표현은 경제성이 그 속성이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딱딱해요! 어쨋든 댓글 공간은 자유입니다!

      다시 언어 경제적으로. (마성스님, 여기부터 읽어주세요.)
      아마도 이제 긴 글은 더 안 쓸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커져가는 괴리 때문에요. 마성스님의 지적 때문이 아니고요.
      그러나 그 괴리가 줄어들면 그 때는 다시 여러 분들과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을 것 같고요.

      제가 여기에 글을 썼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제가 늦게나마 홀로 종교를 찾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은 곳이 이 사이트이기 때문에 연꽃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첫째 이유이었고요. (2년 전 불교 용어들을 검색하면 여기를 안 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꽃님의 이 사이트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설명의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고요. 어느 곳과 비교해서도요.)

      둘째, 당연하겠지만 제 생각으로도 연꽃님이 가시고 계시는 지금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댓글 공간의 중구난방을 살펴 보십시오. 제가 쓴 첫 글은 옳다고 생각되는 연꽃님 글의 논지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웃기죠? 또 연꽃님의 주장도 어느 때는 강렬하십니다. 그것을 거북스러워 하시는 우리 동네 분들도 계시고요. 그 중재적 의견을 제시하고자 했던 경우도 있었고요. 또 웃기죠? (속으로 얼마나 쑥스러웠는데요!)

      셋째, 두 번째의 이유와도 어느 정도 중복되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유일신 종교에 계신 분들의 출몰 때문에 자극을 받은 것도 그 이유가 됩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에 자극된 것이 아니라, 그 쪽 분들 중 여기에 들르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에 자극 받아서입니다. 불법의 전달은 너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8만4천 법문이겠습니까? 교회에 가서 법문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철학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이트에 들르시는 유일신 종교를 가지신 분들의 흥분과 혼돈을 가라 앉히시라고, 저의 경우에 분명한 효과를 보았던 서양철학을 먼저 유일신 종교 쪽에 계신 분들에게 권한 셈입니다. 어제 친구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카톨릭인데 요새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됐더군요. 정말 의외였습니다. 철학을 이야기 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요, 종교이며, 인문학이요,
      과학이고, 심리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입니다."

      저도 여러 번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마성스님의 말씀대로 불자는 굳이 철학을 따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과잉의 대한민국에서 불법을 펼치실 분들은 굳이 서양철학을 해 보셔도 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승가 교육 과정에도 서양철학 개론을 포함시켜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자식에게 먼저 철학을 가르치겠습니다.

      "서양철학으로 우회하여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은 일회일기(一會日期)입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오면 늦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이 일기일회라면 마성스님이 저를 약 올리시는 겁니다 (웃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인생 늦게에서야 불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인생은 다기다회입니다. 어차피 윤회까지 하는데요, 뭐. 너무 무겁습니다! 저도 상실을 경험하고서야 종교를 찾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생들은 상실을 경험해야만 진정으로 종교를 찾게 된다고 볼 때, 아직 상실을 경험하지 않으신 분들은, 그리고 아직 불자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분들은 서양철학도 분명 도움이 되는 하나의 경로가 된다고 봅니다. 세상에나! 마성스님께 개기고 있는 저를 보십시오. 제가 그 증거입니다. (죄송합니다!) 순서는 물론 초기불교의 교학체계에 대한 글들을 많이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입니다. 저는 불교 1년, 서양철학의 동반 1년 반, 이제는 불교 위주로만 갈 예정입니다. 출가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습니다만 아직은 제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제 방법을 찾아야죠.

      댓글 공간의 중구난방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긴 글은 분명 짜증나겠지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누가 제 대신 긴 글을 쓰면, 저는 그 글 다 읽을 겁니다.

      마성스님께 한 가지 부탁 말씀 올리옵니다.
      제가 들이대는 이유들을 배려해주신다면, 연꽃님의 이 사이트에 가끔씩 더 자주자주 들르셔서
      마성스님이 지적하시는 연꽃님의 글에 대한 지도와 함께, 그 아래 댓글 공간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위한 안내를 청합니다.

      분명 마성스님이 주신 글의 행간을 읽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마성스님, 이 글은 제가 스님께 드리는 개인적인 글이라 읽으셨든지, 안 읽으셨든지 하루 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답글은 주시지 말기 바랍니다. 제가 염치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은 참 대책이 없네요! 아울러 저의 무례함도 용서해주시기를 정말로 정말로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 마성2012.01.12 18:28 신고

      일곱.눈먼쥐.하나님께!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입니다.

      제 덧글로 말미암아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님의 글도 읽었습니다. 지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서양철학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의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묘약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쿠르트 프리틀라인 지음 <서양철학사>를 탐독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분석철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에 심취하여 <시공불교사전>을 펴낸 곽철환 선생님과 밤을 새우며 토론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수행을 통한 자기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불교로 회귀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방학을 맞이하여 민족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왕초보 씨리즈의 <왕초보 아함경박사 되다> 원고를 집필 중입니다. 가능하면 집중을 위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페이스북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간혹 글을 쓰다가 피곤하면 머리도 시킬 겸 이곳에 들어와 몇 편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인터넷상에 댓글을 단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자 끄적였습니다.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파사현정'과 같은 분들을 위해 제가 이미 발표한 논문을 올리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길게 댓글를 쓰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분들이 불교의 바른 법을 만나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성 합장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2 20:13

      답 글을 주시오니 제가 오히려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마성스님의 책이 나오게 되면 사 두었다가 언제 스님 사인 받으러 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스님처럼 이생에서 어떻게든 반드시 수행의 길을 찾아 들겠습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__()__

    • 파사현정2012.01.13 14:51

      존경하는 마성스님!
      스님의 좋은 말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집필하시는 <왕초보 아함경박사 되다> 이 책이 진정으로 불교와 부처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함경은 소중한 부처님의 친설이지만 부처님의 위대한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즉, 부처님께서 인류 문명의 초창기에 인연(선근)이 있는 분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 비교철학을 집필중에 있습니다. 몇년이 소요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내용으로 불교의 철학사상은 초기불교의 사상으로 부터 부파불교, 중관 및 유식사상, 선불교와 티벳밀교, 대승경전의 주요사상까지 다루면서 그리스 철학과 중세철학, 그리고 근현대의 과정철학까지 포함한 서양철학, 그리고 6파철학과 자이나철학을 포함한 인도철학, 그리고 대학·중용과 주자학, 양명학, 조선의 성리학 등 유가사상과 도가사상 등을 포함한 동양사상을 아우르면서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으로 집필중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화엄경과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세계와 부처님을 잘 표현하였지만 사실은 이것도 부족한데, 지금의 불교는 이것마저 픽션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아무쪼록 존경하는 마성스님의 이 책이 나와서 많은 분들을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파사현정 합장

  • 마성2012.01.12 02:32 신고

    '진흙속의 연꽃'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말할 수 없는 주제들을 다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불필요한 사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글이 너무 산만하고 길다는 말입니다. 200자 원고지 15매를 넘으면 이미 앞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비판을 하려면 확실히 명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작은 장대한데 결론은 미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위의 글도 결론이 명료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서광의 견해가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네티즌들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무거운 주제는 다루지 않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감정을 자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다 논리적인 근거로 논파하기를 바랍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글
    • 진흙속의연꽃2012.01.12 07:39 신고


      지켜 보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보고 있는 수 많은 눈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잘 써야 된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이 번 글의 경우 약간 감정이 실려 쓰다 보니 12폰트로 하여 A4로 19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일요일날 썼는데 아침 일찍 시작 하여 도중에 일 좀 보고 계속 쓰다 보니 저녂때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글과 함께 보냈는데 지적하신대로 산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출가자를 상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세간에서 유명한 분이라서 여러가지 자료를 곁들이다 보니 길어지게 된 것 입니다.

      매일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하되 성역 없는 글을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__()__

    • 원불사 단현2012.01.12 23:08 신고

      스님께서는 그 어떤 카페에도 답글을 쓰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더구나 초기불교의 대학자로서 존경해 마다않은 스님께서 직접 주시는 가르침이라 연꽃님에 대한 기대가 지대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더구나 일체의 활동을 접으시고 집필 중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재가자을 격려하시니 감사하기 이럴 데가 없습니다.
      단현 합장_()_

  • 이쁜하마2012.01.12 22:58

    연꽃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일곱~님의 글도 잘 읽었구요. 마성스님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Dhamma님께서는 여전히(?) - 아! 실례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대승불교를 옹호하고 계시구요.
    뭔가를 잡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하겠지만,
    상황상황에 따라선 자신도 변해야함을 요사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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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홍사성 지음 / 불교 (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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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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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전 부처님 가르침 새겨보라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홍사성 지음 / 불교시대사)


불교신문 주필을 역임한 언론인 홍사성〈사진〉씨가 새롭게 엮은 <아함경>을 선보였다. 지난 1997년부터 10여년간 불교신문에 연재한 아함부 경전에 담긴 부처님이야기를 가다듬은 알곡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마음으로 듣는 부처님 말씀> <날마다 읽는 부처님 말씀> 등 ‘홍사성의 아함경 시리즈’는 그동안 단행본으로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다.

이번에 발간된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은 주옥같은 아함부 경전이야기를 주제별로 모아서 해설을 빼고 부처님 말씀만 ‘한 권으로’ 정리했다. 지금까지 저자의 저서들은 스님들에겐 최고의 설법자료집으로 각광 받았고 불자들에겐 쉽고 유익한 교리서로 인정받았다. 불자들의 책꽂이에는 어김없이 꽂혀있는 홍사성 씨의 지난 저서들에 이어 이번 책도 대중불서로 주목받을 것은 자명하다.


맑은 눈 열리는 300가지 설법 빼곡히
“삶의 길잡이 되는 주옥의 말씀 간추려”


책은 아함부 경전에서 부처님 말씀 300가지를 가려 뽑았다. “아함부 경전은 특별히 난해한 말씀이 없습니다. 옆에서 얘기하듯 자상하게 들려주는 부처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맑은 눈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이 경전을 읽은 매력입니다.”

저자는 또 “부처님이 실천적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진솔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책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삶에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주옥같은 알맹이들을 간추렸다. ‘부처님의 생애’를 시작으로 ‘인과응보’ ‘행복과 평화’ ‘자비와 공덕’ ‘올바른 생활’ ‘노력과 정진’ ‘나눔과 선행’ ‘포교와 설법’ ‘반성과 참회’ ‘겸손과 양보, 그리고 인욕’ ‘수행의 길’ ‘마음 닦기’ ‘청정한 삶’ ‘사색과 성찰’ ‘부처님의 가르침’ 등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ㆍ논증적인 교리보다는 읽어서 이해가 되고 남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경전 위주로 선별했다. 이 가운데 기복주의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이다.

 

“다른 종교의 사제들은 만일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그를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며 부러워하는 가미니라는 사람에게 부처님은 이같이 말한다.

 

“연못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넣고 많은 사람들이 합창하고 축원하며 돌이 떠오르게 해달라 하면 그 돌이 떠오르는가? 병속에 들어있는 기름을 연못에 붓고 기름이 가라앉길 많은 사람들이 축원하고 기도하면 기름이 가라앉겠는가?” 이어서 부처님은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바르고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열 가지 나쁜 업을 지었다면 그는 제아무리 축원을 해도 천상에 태어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착한 일을 하고 열가지 선한 업을 지었다면 제아무리 저주를 했다고 해도 그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두말이 필요없는 명설법이다.

<사진>아함부 경전은 부처님 입멸 후 100일만에 정법의 인멸을 우려한 제자들이 왕사성 칠엽굴에 모여 최초로 결집했다고 전한다. 사진은 부처님이 성도한 후 녹야원서 5명의 비구를 제도하는 모습을 조성한 것. 불교신문자료사진 

아함부 경전은 부처님이 입멸한 후 100일만에 정법의 인멸을 우려한 제자들이 왕사성 칠엽굴에 모여서 최초로 결집했다고 전한다.

 

카사파가 우두머리가 된 이 모임에서는 아난다가 부처님의 교법을, 우파리가 계율을 기억해내고 회중은 부처님의 말씀 여부를 가려 승인하면 다시 합송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이렇게 결집된 아함부 경전은 오늘날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 30경,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 222경,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 1362경,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1권 472경으로 남아있다. 이를 통칭해서 아함부 경전이라고 한다. 이 경전군은 일찍이 중국에 번역됐지만 대승경전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함부 경전은 소승경전이라며 읽지 않는 풍토가 있었다. 홍사성 씨는 “1964년 동국역경원이 설립돼 아함부 경전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점차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최근에는 4부 아함의 팔리어 원전인 니까야(Nikaya)가 번역되면서 더욱 관심이 높아지면서 바야흐로 초기경전이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시공을 뛰어넘어 가장 원형적이고 생생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아함부 경전을 통해 2600년 전 부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면 어떨까.

 

[불교신문 2536호/ 6월27일자]


 


한 권으로 읽는 아함경

 

 

 

저자 : 홍사성
출판사 : 불교시대사
발행일 : 2009. 5. 25
페이지수/크기 : 560page/152*225(A5신)

 

 

 

부처님의 참 생명과 진리의 가르침
아함부 경전에서 가려 뽑은 소중한 부처님 말씀 300가지
시공을 뛰어넘어 가장 원형적이고 생생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아함부 경전을 통해서 우리는 2,600년 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 경전 중에서 가장 원형적이며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아함부 경전이다. 이 가운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삶에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주옥같은 알맹이들을 간추려 ‘부처님의 생애’에서부터 ‘인과응보’, ‘행복과 평화’, ‘자비와 공덕’, ‘올바른 생활’, ‘노력과 정진’, ‘나눔과 선행’, ‘포교와 설법’, ‘반성과 참회’, ‘겸손과 양보, 그리고 인욕’, ‘수행의 길’, ‘마음 닦기’, ‘청정한 삶’, ‘사색과 성찰’,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한 권으로 묶었다.
이 책은 부처님 생애에서부터 기본적인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뽑아서 정리하였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이며 논증적인 교리보다는 읽어서 이해가 되고 남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경전 위주로 선별하였다.
부처님이 실천적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진솔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우리 마음속에 와 닿는 부처님의 육성이 담겨 있는 아함부 경전은 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 4부로 구성돼 있다. 한역 장아함은 비교적 긴 경전들로 22권에 30개의 경전이 들어 있고, 중아함은 중간 길이의 경전으로 60권에 222경이 들어 있다. 또 증일아함은 51권에 472경, 그리고 짧은 경전들을 모아 놓은 잡아함은 50권에 무려 1,362개의 작은 경전들이 수록돼 있다.
이 경전들 가운데 잡아함경에서 100개, 장아함경에서 23개, 중아함경에서 78개, 증일아함경에서 99개의 말씀을 간추려 뽑은 것이다.



 

책머리에

제1장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의 전생 로맨스
부처님의 출가동기
존중하고 의지할 대상
초전법륜의 역사적 의미
‘전도선언’ 속에 담긴 뜻
부처님이 귀향했던 이유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불교의 길, 정치의 길
참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
부처님의 약점
부처님의 인격적 풍모
부처님의 32가지 신체적 특징
부처님의 행로
진리를 등불 삼아라
부처님께 올린 마지막 공양
훌륭한 교사였던 부처님
부처님의 몇 가지 유훈
여래의 화장법
진리를 의지처로 삼으라
사리를 나누어 공양하다


제2장 인과응보
나무는 기운 쪽으로 넘어진다
바람을 향해 흙을 던지지 말라
점을 치거나 보면 안 된다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 죄
왜 천사를 보지 못하는가
참회의 공덕
열 가지 나쁜 업을 짓는 과보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
지옥 가는 법, 극락 가는 법
지옥이 두렵지 않은가
인과응보의 네 가지 법칙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
인과응보의 굴레
동기론이 맞나, 결과론이 맞나
윤회전생과 인과응보
이 세상이 파멸하는 이유
기복주의를 보는 불교의 입장
낙태에 대한 불교의 입장
전쟁의 참상과 그 결말


제3장 행복과 평화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
가족부터 불자를 만들자
남편을 불법에 귀의시키라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라
편안하...게 잠자는 비결
청춘과 건강과 장수를 원한다면
삶의 무상성을 깨닫고 나면
삼독심을 버린 자의 행복
좋은 지도자, 나쁜 지도자
전쟁을 하지 말라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곱 가지 비결
사랑은 슬픔을 만드는 병
흉몽과 길몽은 해석하기 나름
형이상학적 논쟁의 무익함
불교는 만인의 행복을 위한 길
불자가 준비할 노후대책
대중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태도
누가 용 중의 용인가
인생을 마구잡이로 살 것인가


제4장 자비와 공덕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공덕
작은 선행의 큰 공덕
사회사업은 최고의 공덕
육근을 잘 다스린 공덕
여섯 가지 소중한 일
자식부터 먼저 교화하라
불교적 신사가 취할 태도
부처님의 재난구제 활동
병상에 염주를 걸어 주는 불교
부처님도 환자를 간호했다
병자 간호가 제일 큰 공덕이다
늙음과 죽음이 무너져 내릴 때
팔관재를 실천하는 공덕
동물학대를 반대하는 불교
데바닷타의 청부살인
배신자도 구원하는 불교
제자의 옷을 꿰매 주는 부처님
여덟 가지 미증유법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도
용서하지 않는 것도 허물


제5장 올바른 생활
꾸준히 절에 나가야 할 까닭
종교생활은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
다섯 가지의 바른 신행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려면
갚기 어려운 부모님의 은혜
신기한 것은 무익한 것이다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
밥 먹을 자격이 없는 사람
불교식 다이어트 법
재가불자가 해야 할 일
재가자는 언제 성불하나
인격과 교양의 향기
삼보에 귀의한 공덕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불자가 가져야 할 얼굴
명예와 덕망이 높아지는 비결
석종사문은 모두 평등하다
재가불자의 실천 윤리
늘 부처님과 함께 있는 사람
통치자의 열 가지 덕목

제6장 노력과 정진
소원성취의 비결은 불방일
불방일은 모든 수행의 근본
부지런해야 좋은 일이 생긴다
불교를 만난 것은 최고의 행운
불법을 만난 행운의 크기
부처님은 길을 일러주는 분
장로의 이름에 합당한 사람
아직도 기회는 있다
바람을 거스르는 향기
깨달음을 이루는 두 가지 힘
성자들이 걸어가는 길
여성의 기질적 특징
일곱 종류의 불자들
인생이 걷는 네 갈래 길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사람들
우리의 영원한 북극성 부처님
불자의 조건 열여섯 가지
불교만이 위대한 종교인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가
수행자가 세워야 할 서원


제7장 나눔과 선행
나누어 주는 공덕
도둑도 훔쳐가지 못하는 보물
존경받는 종교인이 되려면
현명한 충고에 귀 기울이라
누가 천박한 사람인가
복 짓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좋은 친구와 사귀는 이익
유녀의 아름다운 보시
깨끗한 보시의 공덕
드러낼수록 아름다운 세 가지
절약은 하되 인색해서는 안 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
기원정사 건립의 내력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보시의 다섯 가지 공덕
마음만 바꾸면 악인도 선인
두 가지 보시, 두 가지 은혜
대중공양의 공덕
나쁜 보시와 좋은 보시
돈 버는 법, 돈 쓰는 법


제8장 포교와 설법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천문지리에 능통한들 무슨 소용인가
불자의 제일 사명은 전법
중생이 중생일 수밖에 없는 까닭
좋은 친구, 나쁜 친구
어떤 사람과 친해야 하나
상식의 진리를 실천하라
타락한 수행자를 위한 훈계
부처님이 설법한 이유
시댁식구를 교화한 며느리
부처님의 세 가지 교화방법
누가 천국에 태어나는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위대한 수행자에게 예배하라
자주 설법을 청해 듣는 이익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비구들이 보여주는 신통술
불교의 종교적 특질


제9장 반성과 참회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사람
불효자에게 들려 주는 노래
나쁜 별명을 없애는 방법
친족을 엄격하게 다스리라
살인마도 제자로 교화하다
목욕을 한들 죄가 씻어지랴
가산을 탕진하고 망하는 길
밥보다는 법을 구하라
불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자식을 잘 키우는 법
수행자의 겉과 속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
아름다운 아내의 길
참다운 사람의 조건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말라
스승에 대한 예의
형식적 종교의례의 무용성
불교는 만민평등의 종교
점이나 주술을 행하지 말라
수행자가 얻는 과보


제10장 겸손과 양보, 그리고 인욕
교만한 사람에게 주는 교훈
잘난 척 하는 사람의 뒷모습
그릇을 비워야 감로수를 채울 수 있다
남의 허물을 들추기 위해서는
좋은 친구, 나쁜 친구의 차이
인생에서 실패하는 지름길
대립과 투쟁의 원인
이쯤은 돼야 수행자다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라
권력 측근들이 알아둘 일
어떻게 원한을 갚아야 할까
비불교적 태도에 대한 비판
사람 대접과 사람 노릇
노여움을 다스리는 지혜
애욕의 늪에 빠지지 않는 방법
처음 마음을 잃지 말라
욕망의 전차에서 하차하라
부끄러움은 수행의 첫걸음
욕심은 칼끝에 바른 꿀
음식을 대하는 태도

제11장 수행의 길
극단을 피하는 중도의 길
쓸데없는 말보다 침묵이 값지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
악마와 싸워서 이기는 법
반드시 출가해야 해탈하는가
수행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훈련
훌륭한 수행과 쓸모없는 수행
수행자가 삼을 만한 화제
왜 팔정도를 닦지 않는가
수행자의 거룩한 모습
소를 길들이듯 자기를 다스려라
떠돌이와 붙박이가 조심할 점
스승의 스승다운 모습
정말로 중요한 덕목 두 가지
유식함을 자랑하지 말라
훌륭한 사람의 조건
세상을 시끄럽게 하지 말라
인간의 더러운 속성 몇 가지
십대제자들이 걸어간 길
삿된 길을 가르치는 종교들


제12장 마음 닦기
자리를 나누어 앉은 부처님
한 가지라도 제대로 닦으라
수행이란 금을 제련하는 과정
바보 출라판타카의 깨달음
불교의 명상법
의식을 집중하는 훈련
부처님의 어른다운 모습
고행은 무익한 것이다
애욕의 강물을 건너간 성자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
아집을 버리고 정견을 따르라
깨달음에는 남녀가 없다
운명에 대한 세 가지 오해
불자의 이름에 합당한 사람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훈련
부처님은 왜 설법하는가
질투의 일곱 가지 죄악
자비와 사념처에 관한 명상
누구를 위해 수행하는가
편안하게 죽는 법


제13장 청정한 삶
도끼보다 무서운 입을 조심하라
남을 꾸짖을 때 유의할 점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돼지 같은 수행자, 소 같은 수행자
우바새에게 쫓겨난 사람
출가와 가출이 다른 점
쭉정이는 골라내서 버린다
청정한 승단의 거룩함
내가 싫으면 남도 싫어해
왜 계율이 중요한가
파계의 과보와 지계의 공덕
계율 적용의 원칙은 상식
이성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는 법
여성은 열등한 존재인가
쾌락이 곧 행복은 아니다
불사음계에 대한 몇 가지 문제
재출가를 허락한 부처님
무엇을 잘하는 사람이고 싶은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교단이 의지해야 할 곳


제14장 사색과 성찰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무상의 인식은 수행의 근본
정신과 육체?의식의 삼각관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부처님의 영가법문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
죽음은 언제쯤 찾아오는가
자살에 대한 불교의 입장
이모의 장례를 치르는 부처님
어리석은 현자가 되지 말라
‘대장부’의 불교적 조건
성자도 피할 수 없는 업보
늙음은 부서진 수레와 같나니
하루 동안 수행한 공덕
슬픈 우리 인생의 현실
청춘의 아름다움은 어디로 갔나
겹쳐서 오는 불행 이겨내기
아지랑이에 집착하는 인생
불교의 시간론
우주생성과 권력형성의 과정


제15장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산상수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면 버리라
사성제의 진리를 터득하라
전생의 일을 화제 삼지 말라
열반이란 무엇인가
불자의 몸가짐, 마음가짐
지옥의 길, 열반의 길
불교공부는 무상을 깨닫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육신과 자아를 관찰하는 법
12개의 고리로 맺어진 인생의 비밀
무엇이 윤회하는가
누가 진리를 만들었는가
사념처를 바르게 닦는 공덕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법
생명은 거짓 인연의 집합
부끄럽지 않은 패배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

 


부처님이 코살라 국에서 여행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우카타(有從迦帝) 마을과 시티비아(墮鳩羅) 마을 중간에 있는 어느 나무 아래서 쉬고 있을 때였다.
그때 바라문인 도나(豆磨)가 지나가다가 부처님의 거룩한 발자국인 천폭륜상(千輻輪相)을 보게 되었다. 그는 ‘나는 아직 인간의 발자국으로는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다. 누구이기에 이런 아름다운 발자국을 가진 것일까’하며 발자국을 따라 부처님 계신 곳까지 왔다.
부처님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얼굴은 엄숙하여 세상에서 뛰어나고 모든 기관이 맑고 깨끗하며, 마음은 극히 조용하게 잘 다스려졌으며, 빛나는 풍채는 의젓하여 마치 금(金)으로 된 산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놀라워하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당신은 신(天人)이십니까?”
“아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면 용(龍)입니까? 아니면 야차(夜叉)나 간다르바(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다(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호라가(摩喉羅伽) 또는 인비인(人非人)입니까?”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라면 도대체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에 부처님은 게송을 답했다.


나는 신이나 용이 아니다.
간다르바, 긴나라, 야차, 아수라도
마호라가나 인비인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 번뇌로 인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다함이 있는 번뇌를
이미 끊고 부수고 없애버렸다.
마치 물속에서 피어났으나
물이 묻지 않는 연꽃처럼
나 또한 비록 세상에 태어났으나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느니라.
지나간 수많은 세월을 살펴보니
이런 저런 인연에 얽혀서 방황했지만
이제 번뇌를 끊고 나쁜 버릇을 버려서
삼독번뇌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나고 죽는 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그러므로 ‘붓다(buddha)’라 이름 하느니라.
(/ 잡아함 4권 101경 인간경(人間經))


- 홍사성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불교신문 주필, 불교평론 주간, 불교 TV 제작국장, 불교방송 상무 등을 역임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마음으로 듣는 부처님 말씀]

[날마다 읽는 부처님 말씀]

[세계의 불교]

[불교입문]

[동남아불교사]

[근본불교의 이해]

[불교상식백과]등의 책을 냈다.


[출처 : 선재몰]

 

2016/9/13 환경사회학 필기 – Words and things

2016/9/13 환경사회학 필기 – Words and things

CLASSNOTES · 환경사회학
2016/9/13 환경사회학 필기
2016년 10월 13일godaye

인류학 참여관찰 동안에는 현지인들처럼 살면서 이들과 평생 라포(Rapport)를 쌓는다. 하지만 완전한 참여자나 관찰자가 될 수는 없다. 해당 조직에 있는 것처럼 이들과 그리고 이들 중 informants와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저자 에두라르 콘은 에콰도르인으로 아마존에서 참여관찰 연구를 거의 20년간 했다. 현지에 살았던 것은 5년이다. 인류학자는 informants의 삶을 담보로 연구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도 더 계속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람 말을 잘 듣는 연습도 인류학자에게도 중요한데, 이것이 가장 잘 트레이닝 된 것이 정신과의사다. (ㅋㅋ) 정말 진심으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의 리듬에 맞춰주고 그 사람이 먼저 궁금해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삶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에두아르 콘은 68년생 에콰도르 이민 3세로 92년도부터 아마존을 연구했다. 콘은 이탈리아 출신 유대계와 에콰도르인의 혼혈이다. 대부분의 종족 명은 그 나라 말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야노마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구인들이 와서 일종의 타자화가 된 것이다. 에두아르 콘이 참여관찰 했던 ‘루나’ 족도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두아르 콘은 20년 동안 논문 한 편을 썼다. 모리스 보들리에는 뉴기니에서 7년간 살고 나와서 『선물의 수수께끼』를 썼다. 이 책 한 권으로 사람들을 놀래 켰다. 그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beyond human), 포스트-휴머니즘 인류학을 논한다. 인류가 비인간, 동식물, 사이보그, 인공지능들을 인간의 도구가 아닌 인간과 공존해야 할 타자들로서 이들과의 공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 10년간의 흐름이다. 그 이전은 휴머니즘이었는데 어느 순간 포스트-휴머니즘이 확 다가온 것이다. AI만 해도 어쩌면 창발적(emergence)인, 인간보다 더 똑똑한 사고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알파고는 고도의 사고회로로 스스로 사고해서 바둑을 뒀다. 계속 진화하고 있는 알파고를 뭐라고 봐야 할까? think라는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

 

  • 퍼스의 기호학

 

에두아르 콘의 사고의 base는 찰스 퍼스(1800년대 pragmatism의 창시자)다. Pragmatism은 실용주의로 번역된다. 실용주의는 사실 pragmatism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Pragmatism은 실천과 원리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Pragmatism을 일본 사람이 실용주의로 번역했다. 일본인들은 서구의 이론을 바로 바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실용주의의 ‘용’은 한국에서는 도구적으로 해석하고 일본에서는 활용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요즘은 아예 pragmatism을 그냥 프래그머티즘이라고 한다. 구조주의도 구조주의 자체가 진화를 해간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니까 이론 자체도 변하는 것이다. affect를 원래 정동이라고 해석했는데, 이 또한 일본 사람들이 번역한 것이다. 들뢰즈가 의미화, 개념화한 affect의 경우에도 그냥 affect로 쓰기 시작했다. 부르디외의 distinction을 구별짓기라고 번역했었는데, 지금은 디스팅그시옹이라고도 쓴다. 일반적인 용어로서의 사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찰스 퍼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거부하고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 진보적 흐름이 동부 쪽에서 만들어지고 있었고, 퍼스는 미국만의 독립적인 학문을 만들고자 프래그머티즘을 창시하였다. 프래그머티즘에서 그는 기호학을 만들었다. 그는 평생 측량기사로 살았다. 퍼스는 책은 한 권도 안 썼지만 친구들이 만든 잡지에 기고한 것을 모아서 전집으로 만들었다. 퍼스는 노숙인으로 죽었고 평생 강연회도 안 하고 살아서 그의 이론은 묻혔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게 발굴되었다. 그래서 60~70년대에 퍼스의 기호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다. 리차드 로티가 기호학의 3세대다. 흥미롭게도 수학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철학을 고민한다. 이런 사람들이 새롭게 발굴하고 재평가한 사람이 퍼스다. 150년 전 사람인데 말이다. 학문은 뿌리가 깊으면 잘 안 흔들린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에서 소쉬르의 언어학(기표와 기의)까지 생각해보자.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연결이 자의적이라고 보았다. 기의 때문에 기표가 뜻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표는 언어의 체계 안에서 그 언어가 갖는 위치,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 혹은 언어체계는 어떻게 보면 세계와 무관하게 사고체계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퍼스의 기호학은 이와 전혀 다르다. 현재까지 우리가 배운 것들은 소쉬르의 언어학에 기반한 것이다. 마치 사물이 없어도 생각할 수 있다는 식이다. 데카르트도 내가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것이지 세계가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근대의 사고방식은 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식 내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서 인식론적이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가 아니라, 인식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연구하는 존재론적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ontological turn이다. 퍼스의 기호학은 그러한 흐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퍼스는 인간과 비인간의 언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기호가 말을 거는 것이라고 본다. 해석체(interpretent)가 기호매체를 통해 또 다른 interpretent에게 전달하면 또 이 interpretent가 기호매체를 통해 전달한다. 기호매체는 끊임없이 interpretent에 의해 해석된다. 퍼스에 의하면 interpretent도 기호다. 기호매체는 음향, 이미지, 소리, 행동일 수도 있다. 퍼스에서 이런 기호매체에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구분이 없다. 심지어는 박테리아도 interpretent가 된다. 이런 기호를 다 해석, 전달하면 다 사고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박테리아도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기호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아이콘(icon), 인덱스(index), 상징(symbol)이다. 퍼스를 가장 잘 써먹는 분야가 설치미술이다. 이러한 미술가들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언어가 아닌 무언가로 전달해준다. 아이콘은 유사성(similarity)의 원리에 의한 기호다. 인덱스는 지시(pointing)의 원리다. 상징은 표상(representation)의 원리다. 유사성의 원리는 이를 테면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의 이모티콘처럼 실제 웃는 사람, 우는 사람과의 유사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퍼스에 의하면 유사성의 원리는 사실 차이를 소멸시키는 원리이지, 비슷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무자각할 때 유사성의 원리가 발휘된다. 나중에 『기억의 천재 쿠네스』를 읽어보라. 이 책에서 주인공이 낙마한 후에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나무에 있는 결 하나 하나도 다 기억한다. 그랬더니 사고를 못한다. 기억을 한다는 것은 망각을 한다는 것이다. 다 기억하면 기억이 아니다. 사고가 아니다. 사고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망각하는 것이다. 차이를 망각하고 못 볼 때 유사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우리는 화장실 표시에서도 남자 아이콘을 보고 남자의 실루엣을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 그 둘 간의 차이를 다 없애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덱스, 지시원이 있다. 이는 두 가지 이상의 실재를 연결하는 것이다. 퍼스의 실재(reality)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실재는 visible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퍼스가 말하는 real은 invisible해도 실재하는 것이다. 기호로 나타낼 수 있다면 실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기호로 표시해도 그것 또한 실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은 자, 정령에 대해 말할 때 이를 기호화할 수 있다면 이는 사고할 수 있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해 말할 때도 우리는 생명이 죽으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테면 워킹 스틱이라는 벌레가 있다. 이 벌레는 자신의 보호색으로 변한다. 이 벌레의 조상 중에서는 보호색을 잘 못하는 애들이 죽고 보호색을 잘 발휘하는 애들만 살아남은 것일 것이다. 이 또한 일종의 기호다. 자신을 보이지 않게끔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기호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까지 잘 보여서 죽은 조상 워킹 스틱 또한 지금 현재 살아있는 워킹 스틱의 잘 보이지 않는 그 기호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조상 워킹 스틱도 실재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다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개미핥기도 주둥이가 개미집 모양에 맞춰 진화해왔다. 개미핥기가 되기까지도 전부 기호인 것이다. 개미핥기의 혀 등이 개미를 잘 속이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현재의 개미핥기의 기호 속에 조상에 덜 진화된 개미핥기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다. 이 개미핥기 속에 미래의 개미핥기도 존재하는 것이다. 인덱스는 일종의 지시이다. 개미핥기의 주둥이도 일종의 인덱스다. 어떤 기호를 통해 해석체에 의해 그 다음 실재에 대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기호가 인덱스다. 앞으로 일어날 실재에 대해 기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올 것 같고, 그러면 먹구름이 인덱스가 된다. 세상 모두가, 심지어 우리도 기호다. 퍼스는 잠시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할 뿐인 기호라고 본다.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기호에 의해서, 나의 기호를 해석하는 해석체에 의해서 내가 없더라도 내가 전달한 기호를 실재하게 되고 그래서 모든 생명들이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언어고, 대상과 분리된다. 기호매체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구성할 때 상징이 된다. 언어는 딱 상징적인 성격만 가진 것은 아니고 아이콘, 인덱스적인 특성도 갖고 있다. 의성어, 의태어는 아이콘이다. 상징표상은 언어 그 자체, 그 기표만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의성어, 의태어는 언어체계가 없어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쯔푸라는 표현이 있는데 물이 띄워두는 어떤 물체의 모양을 가리키는 루나 족의 말로, 이는 문법적인 변화를 하지 않는다. 이는 언어체게, 상징체계 내부에 뜻을 가진 게 아니라 아이콘적인 기능(물에 빠지는 것과 유사함- 풍덩과 물에 빠지는 소리가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기호로 인지하듯이)과 인덱스적인 기능(쭈푸, 풍덩하면 이는 물에 빠지는 어떤 실재를 가리키게 된다)을 모두 가진다. 우리는 상징적인 것에만 사고의 특권적인 것을 부여해왔는데, 아이콘과 인덱스 또한 think다. 박테리아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다 사고하는 것이다.

퍼스의 기호학에서는 모든 경계들이 다 무너진다.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다. 강아지에게 지시하는 것도 다 인덱스다. 그래서 요즘 동물행태학에서는 상징 언어도 시도해보고 있다. 어떤 동물에게 포도를 주면 어떤 키를 누르도록 하는 식으로 40가지 키를 준다. 강아지는 300가지 인덱스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키들 간의 관계를 가르쳐줄 수도 있다. 포도 – A, 귤 – B라고 했을 때 배우다 보면 A, B, C, D를 익힌다는 것이다. 어린이들도 처음엔 다 인덱스로 언어를 배우다가 어느 순간 도약을 해서 의미 체계를 구성하고 상징을 배운다. 이 도약은 학습을 하면 고릴라도 할 수 있다. 퍼스의 기호학은 상징과 사고가 인간의 독점적인 권한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냥 연속적으로 이를 활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콘, 인덱스, 상징으로 모든 숲이나 생명체가 사고를 한다는 것을 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꿈, 환상으로까지 확장된다. 꿈이 도대체 뭘까? 이를테면 근대적인 인간중심주의적인 꿈은 무의식적인 표상이라는 의미만 있었는데, 이제는 꿈이 skin-bound 개인을 넘어선다. 어떤 것은 해석체(기호를 받아들이는 대상)이기도 하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해석체가 기호매체가 되기도 하고 기호매체가 해석체도 되는 것이다.

*이 글은 서강대학교에서 진행된 차은정 교수님의 “환경사회학” 수업의 필기입니다. 여기서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