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 네이버 블로그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 네이버 블로그

김용옥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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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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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 문명의 세 기둥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 도덕의 근거에 대한 세 문명의 답변

서양 : 초월적 세계관 → 신(초월자)으로부터 상벌

중국 : 역사적 세계관  조상의 결과, 자손에 영향

인도 : 윤회적 세계관  전생의 업(원인), 후생의 업(결과)

명적X, 혁명적 사상. 철저한 개인주의/개인책임





2강 - 싯달타와 세종대왕


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
붓다 : 깨달은 자 ; 고타마(성) 샤캬(석/가문?) 싯달타(이름)


불교의 개인주의 : 고려문화의 근간

cf) 유교의 집단/가족주의 : 조선문화의 근간


훈민정음 3저작 : 용비어천가/석보상전(붓다의 전기)/월인천강지곡(세종의 찬불가)

세종 때도 (불교)문화는 안바뀜
김수온의 저작? : 세종이 아낀 당대의 문장가/석학


한국 사상사 : 샤머니즘 +→ 불교 + 유교 + 기독교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친화성





3강 - 싯달타의 생애 (624?~544?)


카필라성의 왕자. 아주 작은 부족국가.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추정 됨 (→카스트제도 혁파)


이미지의 반전

예수의 일생 : 신화적. 고난의 삶  인간적 이미지

싯다르타의 일생 : 인간적. 평안한 삶  신적 이미지 


싯달타의 시대적 배경 : 부족국가  제국화 과정 중

cf) 춘추전국진秦 제국, 그리스 폴리스알렉산더 제국 ; 비슷한 시기, 비슷한 변화

혼란기, 상공업 발달 : 브라만의 권위 하락, 크샤트리아/부유한 바이샤(상인)의 힘이 강해짐

슈라마나(사문, 유세객들)들의 전성기 - 그 중 하나가 붓다 

회의주의, 비판의식, 상대주의, 유물론자, 다양한 사상가들
cf) 중국 제자백가, 그리스 소피스트


싯달타의 일생 : 35세에 깨달음.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함(남들이 이해 할 수 없음)

종교 만들 생각 없었음. 후계자 키우지 않음. 슈라마나-걸식집단 이었을 뿐.
유언 "오로지 진리에 귀의할 것이며,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며, 나(싯다르타)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
진리. 담마(법)만을 남기고 갔음.





4강 - 싯달타의 출가


어머니 늦게 임신. 출산 후 7일만에 돌아가심. 새엄마(이모)에게 자람

태어나서 본 점괘 : 32세에 전륜성왕(인도의 메시아-민간설화), 출가하면 붓다(깨달은자)가 된다


7세 선농제(축제)에서 지렁이의 죽음을 접함 →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 시작 ; 극한의 감수성

노인, 상여 - 청춘의 즐거움이 가심


노병사 3법의 충격  출가 ; 위대한 진리의 평범성





5강 - 싯달타와 라훌라(장애)





6강 - 팔리어 삼장 
: 불교의 역사와 재발견

인도 문명의 특징 : 구송/암송문화(첸팅). 저자/시간 기록 없음. 역사에 대한 관념 없음. 

ex) 브라만 : 베다를 외우는 걸로 권위가 유지됨


근본불교 : 붓다 살아생전 법(담마)과 율을 가르침


1차 결집(BC6C) : 사후 3개월 왕사성에 500 제자 모임(쌍기띠 : 함께 노래부른다)

다문제일 아난존자 구술 : "如是我聞(여시아문: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聞佛所說(문불소설: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皆大歡喜(개대환희:모두 크게 환희하고 즐거워하며) 信受奉行(신수봉행:이를 받들어 믿고 행하느니라)"

암송으로 최초의 텍스트 형성 : 경장과 율장


2차 결집(BC5C) : 100년 후 바이샬리. 경에 대해서는 이견 없음. 율에 대한 이견 발생.

십사논쟁 → 상좌부(보수,경직) / 대중부 (진보,유연)로 분열 : 근본분열 ; 여기까지 원시불교


부파불교 시대 : 근본분열 후 18~20개로 분열 but 서로 인정 소승불교 여기까지 초기불교

3차 결집(BC3C-아소카왕) : 팔리어 3장 정리 - 경(다르마)/율장(비나야)/논장(아비달마:주석)

이때까지 암송으로 전승. 아쇼카의 주변국 전도 → 스리랑카에서 기원전후에 문자화.


대승불교 운동 : 기원전후. 전도주의. 뛰어난 이론가의 글이 많이 생산

인도에선 7~8세기까지도 소승이 주류, 대승은 하나의 파 → 중국으로 건너가 주류가 됨


중국불교 : AD 3세기 전파. 초기불교의 3장이 아닌 대승불교의 경전이 전해짐. 3만 대장경/일체경


1881년 팔리어 3장(상좌부) 재발견 : 스리랑카에서 영국에 의해 발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짐

2천년동안 잠자고 있었던 오리지널 텍스트 : 대승경전과 다름

→ 1935~41 일본에서 처음 번역. 불교의 새로운 중흥기. 새로운 시작





7강 - 속세 속의 불교





8강 - 아함의 대발견


4차 결집(AD2C) : 쿠샨 왕조. 논장 관련 논의. 토속어 팔리어를 고상한 산스크리트어로 옮김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이 산스크리트어 대승경전. 대장경


중국어 번역의 어려움 : 산문을 운문으로, 표음문자를 표의문자로.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

1000여 년 간 끊임없이 번역 → 8만 대장경  번역자에 따라 또 달라짐. 같은 경전의 시대에 따른 해석을 알 수 있음. 

이역 ; 구마라집본, 현장본..


대승사상 : 보살사상  반야  공  유식 ; 초기 불교(팔리어 3장)에 없는 내용

금강경(AD150), 화엄경, 법화경..


8만 대장경 순서 : 천태지의 중국식 분류법

부처님 증득 후 화엄경  녹원시;소승경전(아함경)  방등시  반야시  법화경/열반경 


아함경 : 화엄을 쉽게 푼 것이라 알려져 천시됨. 짧아서도 무시됨

팔리어 '아가마(부처님 말씀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의 번역 ; 엄격히는 경아함(경의 아함)

3~5C에 중국어 번역 : 장아함(좀 긺)/중아함(덜 긺)/잡아함(짧음)/증인아함(숫자 인덱스) 4종

팔리어 3장 중 닛까야(경장) 5개 : 장/중/상응/증지부/소부
=> 두 종이 거의 동일 : 아함이 초기 경전이었음이 확인됨 ; 1930년대의 발견 → 불교는 아함부터


숫다니파타 : 소부 15개 중 하나. 가장 오리지널한 근본불교(부처님 직접 말씀) 텍스트
한국에는 법정스님이 최초 소개. 다음으로 담마빠다(법구경)이 중요

아함의 특징 : 쉽고 구체적이며 현실적 설법. 솔직함과 진실함





9강 - 수타니파타 1 : 소개


숫다니파타(Sutta Nipāta) : 최초로 성립된 불교 경전(bc150경?)숫다:경/니파타:모음=경집.


득도후 초기 설법(55세 이전) : 아난(돌아가시기 전 25년 모심)이 안나옴. 혼자 다님

호칭 : 선생님, 고타마씨, 행복한/온전한/눈뜬 사람. 부처님X

불교 용어 없음. 대부분의 불교 이론이 없음.


'화'의 문제 : 보물(다음 생에 도움되는 것)을 뺏어가는 가장 큰 도둑놈.

열반 : 마음의 불(화)을 꺼버림 (티벳은 화가 없는 문화)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연꽃의 줄기를 꺾어버리듯.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사람은,
이언덕과 저언덕을 모두 떠나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독각 : 홀로 깨닳음. 초기 불교의 이상 ; 가장 중요한 사상. 부처의 가르침. 





10강 - 수타니파타 2 : 싯달타의 행복론


독각적 사상 : 개인이 서야 함. 원시불교의 모습 → 무소유/무집착

만남/사귐/접촉/사랑/그리움/가족/친구/친함/주장/비난 멀리하기

논쟁하지 말라 - 서로를 인정하기. 진리는 하나이나 표현은 수만가지
배운 것이 풍성하며,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를 항상 가까이 하라.

자기 길 가기 - 사귀되 혼자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음 


계급타파 : 비천함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규정. 인간평등론.


행복 : 기술을 익히고/몸으로 삼가기(끊을 줄 알기)/말솜씨가 유려(해야할 말을 정확히)/부모섬김/

아내사랑/자식보호/하는 일에 질서있게/(평시에,항상)배풀기/이치에 맞게/비난 살 만한 행동 하지 않기/악을 끊고 멀리하기/술 삼가하기/덕행을 소홀하지 않기/존경/만족/감사/겸손/알맞는 때에 가르침(,이법) 듣기/인내하기/말을 온화하게/덕행이 높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기/수행/진리를 통찰/마음의 평화를 체득하기..





11강 - 수타니파타 3 : 싯달타의 고행


선정禪定으로 시작

선 : 디아냐(범어:dhyana)의 음역. 마음을 정함(=定)  cf) 선정 like족발,역전앞


→ 고행 → 악마의 유혹(나무치/마라) "살아있어야 (무엇이든) 한다"

소승의 목표 : 열반. 사라짐 "진정한 브라만이 되는 것"  cf) 대승 : 이 땅에서 살아감

인도문화권 모든 신들의 족보는 불의 숭배로 거슬러 올라감 : 문명, 생명(, 율법?)

악마 : 세간의 공덕을 구하는 자

모든 새로운 종교 : 과거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악마의 군대 : 끊임없는 공포/기갈/의혹  위선/고집 

도올 "위선만 없는 종교는 다 받아들인다"

악마를 이기는 힘 : 지혜

신앙자 : 생각이 맑아지는 것


※ 도올의 투표 방법

1. 되고자만 하는 사람을 피할 것

2. 공약의 내용보다 공약에 담긴 사고능력/판단능력(심미안)/생각을 볼 것
3. 무소유하는 자 





12강 - 법구경 특강

경전『화살』 : 인간의 죽음을 다룸. "인간은 죽는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다"

;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기 "마음을 다스려라."


법구경(담마빠다Dhammapada) : 수타니파타보다 조금 늦게 성립된 경전

근본불교 : 암송으로 전해짐. 쉬운 일상언어.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

불교 : 내부로부터 해방. 자각/독각의 사상. 마음을 다스려. 자기를 이김 → 인본주의/인도주의

cf) 기독교 : 외부로부터 해방. 믿음. 신 중심. 절대주의


"행동이 바른 사람을 존경하라"


"악한 일을 하지 말라. 착한 일을 하라. 그대 마음을 늘 순수하게 가져라.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다."

"건강은 가장 큰 재산이요, 만족은 가장 값비싼 보석이요, 

신뢰는 가장 위대한 친구요, 니르바나(열반)는 가장 큰 기쁨이다."

 



13강 - 싯달타의 깨달음

신神 개념의 진화 : 느낌의 응축+언어의 주술적 능력 → 신격화  다신론

 신들 사이의 불평등  신들의 싸움 → 만신(제우스, 신들의 대장) 

 일신론 (하나님/브라흐마.. 제국의 통일기에 출현 ) "나만을 믿어라" 

 zero. 공空 : 싯달타의 혁명. 유일신까지 부정

현대과학과 같은 세계관: "우주를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는 없다"

空 : 색이란 감관에 의지하므로 그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계 속에 존재는 있다. 즉 존재는 관계되어 있다. =>

緣起연기/프라티트야 삼무파다(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 "의존하여 같이 일어난다 "

신을 부정하고 우주의 법칙을 탐구한 결과 => 12연기(역관부터 순관으로)

노(병)사→생→유→취→애→수→촉→6입→명색→식→행→무명 ; '지독한 과학적 사고'

역관 : 이법이 없어지면 이법이 없어진다 = 환멸연기 ; 제법무아

순관 :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겨난다 = 유전연기


"우주를 보는 나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14강 -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우리는 연관되어 있음
→ 환멸연기 : 문제의 원인을 찾아 없애는 것
 4성제(고집멸도) : 연기법에 대해 쉽게 설한 것

"일체의 고는 집착에서 나오며 이것을 멸하는 도가 있다."

 8정도 : 멸하는 도 "정견/정사유(인과)/정어/정업(생활)/정명/정정진/정념(기억)/정정(마음)"

바르게 하기

 3학 "계戒/정/혜" : 세 가지가 함께여야 가능. 인생의 원칙

계戒 | 계율戒律 자연에 따름, 건강한 삶, 규칙적 삶, 몸의 단련/공부, 정어/정업/정명

정定 | 선정禪定 : 삼매(쌈마디:정신통일), 집중(Attention. 좌선은 방편 중 하나), 정념/정정

 | 지혜智慧 : 앎, 정견/정사유 [정진은 계정혜 공통]

원시불교의 핵심적 사상 : 부처의 가르침에 반복적으로 나타남

→ 고려말 지눌 "돈오점수頓悟漸修" : 깨달음이 와야 계속 닦을 수 있다. 끝없는 고양

 성철 "돈오돈수頓悟頓修" : 진정한 깨달음은 한번의 닦음으로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앎)은 더이상의 노력(修)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확실히 알기 때문에. 더 잘못하지 않는다. ex) 뜨거움/차가움,,

"돈수까지 되는 깨달음이라야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올 "싯다르타 가르침의 핵심은 오보다 수에 있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사막의 수련이다."

"끊임 없는 수의 과정 속에 오의 순간들이 온다. 인간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은 무아無我, 깨달은 자의 삶은 무아행(자비행慈悲行)이다."





15강 - 무아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원시불교 간단정리

1. 일체계고 : 노병사. 인생은 즐거울 수 없다.

두카(고) ↔ 샨땀 (고요,평화)

2. 고행 : 영육 이원론 (육체의 학대를 통해 정신의 자유를 추구)

3. 연기(쌈 무빠다) : 기나긴 사색의 결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함께 일어난다."

생과 사, 장과 단.. ; 고립된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법/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한다" ; 연기에서 도출되는 것


사고의 오류는 언어에서 나옴 : 언어는 세상을 반영하지(비추지) 못함.

주어 속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음

"꽃이 핀다" "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나는 산다/말한다" ; 나와 삶/말은 분리될 수 없음

주어가 없는 우리 말이 더욱 진실됨. '술어 속에/술어 로서' 주어가 존재.

무아 = 아트만(我, 동일성의 체계)은 없음. 강압적/임시적 작동체계가 무너지면 바로 무너짐

ex) 잔디밭 : 끊임 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상태(동일성의 체계,아트만)가 유지됨

"너를 죽이겠다" = '너'가 죽으면 그것을 증오하는 '나'도 죽음 → 대자대비


연기론 =>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가 사라짐. 철저한 반형이상학적 철학. "언어에 속고 있다."

cf) 형이상학 : 언어를 통해 실체화시켜 놓은 것을 탐구.

    안티노미 (이율배반) : 상반되는 명제가 모두 참인 것. "신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

=> 무기無記 :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모든 존재의 존립근거가 깨짐


언어를 통해 언어를 부정하기. 언어의 미망 속에 빠지면 안됨. 

언어로 쌓여 있는 나我를 해체시켜야 함.





16강 - 싯달타의 죽음


"자신을 귀의처로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며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진리를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대반열반경 - 소박함/인간적/비신화적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외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다르마)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게 경외하는 것이 되느니라."


"아난다여, 나의 죽음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아난다여,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지는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레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스투파 = 탑 = '부처님의 무덤'의 뜻 ; 대승과 소승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





17강 - 무아無我에서 유식唯識으로


윤회의 주체로서의 아我를 찾기 : 윤회론과 무아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고찰 ; 무엇이 윤회하는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6식

눈(가장 명백하고 저급하며 미망의 가능성이 높은 것)에서 밑바닥(識의 심층)으로

6식 의식 - 5식을 묶은 것. 통각적 요소 ; 일상생활은 6식 까지


7식 말나식 : 의식 아래의 자의식 ; 살아야 한다는 집착 등
8식 아뢰야식(저장식) : 위의 7식이 저장되는 근원적 밑바닥의 의식 ; 훈습. 무의식. 윤회하는 것 

무명식/망식. 부정적인 것. 식을 버려야 지혜를 이룸=해탈


모든 사태는 나의 감관에 비친 것(내가 만들어 낸 것)을 인식하는 것


유식론 : 유식무경唯識無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극단적 유심론/주관론 (대상세계가 없다)

"사태가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내 의식의 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모든 앎/현상은 내 의식의 투영이다." 

"깃발도 바람도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다" - 혜능선사
요가행파가 만들어냄
전식득지轉識得智 :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이룬다 ; 유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함





김용옥

도올 김용옥 | 2002' 불교 강의 1~17강 (초기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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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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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 문명의 세 기둥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 도덕의 근거에 대한 세 문명의 답변

서양 : 초월적 세계관 → 신(초월자)으로부터 상벌

중국 : 역사적 세계관  조상의 결과, 자손에 영향

인도 : 윤회적 세계관  전생의 업(원인), 후생의 업(결과)

명적X, 혁명적 사상. 철저한 개인주의/개인책임





2강 - 싯달타와 세종대왕


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
붓다 : 깨달은 자 ; 고타마(성) 샤캬(석/가문?) 싯달타(이름)


불교의 개인주의 : 고려문화의 근간

cf) 유교의 집단/가족주의 : 조선문화의 근간


훈민정음 3저작 : 용비어천가/석보상전(붓다의 전기)/월인천강지곡(세종의 찬불가)

세종 때도 (불교)문화는 안바뀜
김수온의 저작? : 세종이 아낀 당대의 문장가/석학


한국 사상사 : 샤머니즘 +→ 불교 + 유교 + 기독교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친화성





3강 - 싯달타의 생애 (624?~544?)


카필라성의 왕자. 아주 작은 부족국가.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추정 됨 (→카스트제도 혁파)


이미지의 반전

예수의 일생 : 신화적. 고난의 삶  인간적 이미지

싯다르타의 일생 : 인간적. 평안한 삶  신적 이미지 


싯달타의 시대적 배경 : 부족국가  제국화 과정 중

cf) 춘추전국진秦 제국, 그리스 폴리스알렉산더 제국 ; 비슷한 시기, 비슷한 변화

혼란기, 상공업 발달 : 브라만의 권위 하락, 크샤트리아/부유한 바이샤(상인)의 힘이 강해짐

슈라마나(사문, 유세객들)들의 전성기 - 그 중 하나가 붓다 

회의주의, 비판의식, 상대주의, 유물론자, 다양한 사상가들
cf) 중국 제자백가, 그리스 소피스트


싯달타의 일생 : 35세에 깨달음.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함(남들이 이해 할 수 없음)

종교 만들 생각 없었음. 후계자 키우지 않음. 슈라마나-걸식집단 이었을 뿐.
유언 "오로지 진리에 귀의할 것이며,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며, 나(싯다르타)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지 말라."
진리. 담마(법)만을 남기고 갔음.





4강 - 싯달타의 출가


어머니 늦게 임신. 출산 후 7일만에 돌아가심. 새엄마(이모)에게 자람

태어나서 본 점괘 : 32세에 전륜성왕(인도의 메시아-민간설화), 출가하면 붓다(깨달은자)가 된다


7세 선농제(축제)에서 지렁이의 죽음을 접함 →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 시작 ; 극한의 감수성

노인, 상여 - 청춘의 즐거움이 가심


노병사 3법의 충격  출가 ; 위대한 진리의 평범성





5강 - 싯달타와 라훌라(장애)





6강 - 팔리어 삼장 
: 불교의 역사와 재발견

인도 문명의 특징 : 구송/암송문화(첸팅). 저자/시간 기록 없음. 역사에 대한 관념 없음. 

ex) 브라만 : 베다를 외우는 걸로 권위가 유지됨


근본불교 : 붓다 살아생전 법(담마)과 율을 가르침


1차 결집(BC6C) : 사후 3개월 왕사성에 500 제자 모임(쌍기띠 : 함께 노래부른다)

다문제일 아난존자 구술 : "如是我聞(여시아문:나는 이와같이 들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聞佛所說(문불소설: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皆大歡喜(개대환희:모두 크게 환희하고 즐거워하며) 信受奉行(신수봉행:이를 받들어 믿고 행하느니라)"

암송으로 최초의 텍스트 형성 : 경장과 율장


2차 결집(BC5C) : 100년 후 바이샬리. 경에 대해서는 이견 없음. 율에 대한 이견 발생.

십사논쟁 → 상좌부(보수,경직) / 대중부 (진보,유연)로 분열 : 근본분열 ; 여기까지 원시불교


부파불교 시대 : 근본분열 후 18~20개로 분열 but 서로 인정 소승불교 여기까지 초기불교

3차 결집(BC3C-아소카왕) : 팔리어 3장 정리 - 경(다르마)/율장(비나야)/논장(아비달마:주석)

이때까지 암송으로 전승. 아쇼카의 주변국 전도 → 스리랑카에서 기원전후에 문자화.


대승불교 운동 : 기원전후. 전도주의. 뛰어난 이론가의 글이 많이 생산

인도에선 7~8세기까지도 소승이 주류, 대승은 하나의 파 → 중국으로 건너가 주류가 됨


중국불교 : AD 3세기 전파. 초기불교의 3장이 아닌 대승불교의 경전이 전해짐. 3만 대장경/일체경


1881년 팔리어 3장(상좌부) 재발견 : 스리랑카에서 영국에 의해 발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짐

2천년동안 잠자고 있었던 오리지널 텍스트 : 대승경전과 다름

→ 1935~41 일본에서 처음 번역. 불교의 새로운 중흥기. 새로운 시작





7강 - 속세 속의 불교





8강 - 아함의 대발견


4차 결집(AD2C) : 쿠샨 왕조. 논장 관련 논의. 토속어 팔리어를 고상한 산스크리트어로 옮김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이 산스크리트어 대승경전. 대장경


중국어 번역의 어려움 : 산문을 운문으로, 표음문자를 표의문자로.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

1000여 년 간 끊임없이 번역 → 8만 대장경  번역자에 따라 또 달라짐. 같은 경전의 시대에 따른 해석을 알 수 있음. 

이역 ; 구마라집본, 현장본..


대승사상 : 보살사상  반야  공  유식 ; 초기 불교(팔리어 3장)에 없는 내용

금강경(AD150), 화엄경, 법화경..


8만 대장경 순서 : 천태지의 중국식 분류법

부처님 증득 후 화엄경  녹원시;소승경전(아함경)  방등시  반야시  법화경/열반경 


아함경 : 화엄을 쉽게 푼 것이라 알려져 천시됨. 짧아서도 무시됨

팔리어 '아가마(부처님 말씀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의 번역 ; 엄격히는 경아함(경의 아함)

3~5C에 중국어 번역 : 장아함(좀 긺)/중아함(덜 긺)/잡아함(짧음)/증인아함(숫자 인덱스) 4종

팔리어 3장 중 닛까야(경장) 5개 : 장/중/상응/증지부/소부
=> 두 종이 거의 동일 : 아함이 초기 경전이었음이 확인됨 ; 1930년대의 발견 → 불교는 아함부터


숫다니파타 : 소부 15개 중 하나. 가장 오리지널한 근본불교(부처님 직접 말씀) 텍스트
한국에는 법정스님이 최초 소개. 다음으로 담마빠다(법구경)이 중요

아함의 특징 : 쉽고 구체적이며 현실적 설법. 솔직함과 진실함





9강 - 수타니파타 1 : 소개


숫다니파타(Sutta Nipāta) : 최초로 성립된 불교 경전(bc150경?)숫다:경/니파타:모음=경집.


득도후 초기 설법(55세 이전) : 아난(돌아가시기 전 25년 모심)이 안나옴. 혼자 다님

호칭 : 선생님, 고타마씨, 행복한/온전한/눈뜬 사람. 부처님X

불교 용어 없음. 대부분의 불교 이론이 없음.


'화'의 문제 : 보물(다음 생에 도움되는 것)을 뺏어가는 가장 큰 도둑놈.

열반 : 마음의 불(화)을 꺼버림 (티벳은 화가 없는 문화)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연꽃의 줄기를 꺾어버리듯.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사람은,
이언덕과 저언덕을 모두 떠나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독각 : 홀로 깨닳음. 초기 불교의 이상 ; 가장 중요한 사상. 부처의 가르침. 





10강 - 수타니파타 2 : 싯달타의 행복론


독각적 사상 : 개인이 서야 함. 원시불교의 모습 → 무소유/무집착

만남/사귐/접촉/사랑/그리움/가족/친구/친함/주장/비난 멀리하기

논쟁하지 말라 - 서로를 인정하기. 진리는 하나이나 표현은 수만가지
배운 것이 풍성하며,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를 항상 가까이 하라.

자기 길 가기 - 사귀되 혼자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음 


계급타파 : 비천함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규정. 인간평등론.


행복 : 기술을 익히고/몸으로 삼가기(끊을 줄 알기)/말솜씨가 유려(해야할 말을 정확히)/부모섬김/

아내사랑/자식보호/하는 일에 질서있게/(평시에,항상)배풀기/이치에 맞게/비난 살 만한 행동 하지 않기/악을 끊고 멀리하기/술 삼가하기/덕행을 소홀하지 않기/존경/만족/감사/겸손/알맞는 때에 가르침(,이법) 듣기/인내하기/말을 온화하게/덕행이 높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기/수행/진리를 통찰/마음의 평화를 체득하기..





11강 - 수타니파타 3 : 싯달타의 고행


선정禪定으로 시작

선 : 디아냐(범어:dhyana)의 음역. 마음을 정함(=定)  cf) 선정 like족발,역전앞


→ 고행 → 악마의 유혹(나무치/마라) "살아있어야 (무엇이든) 한다"

소승의 목표 : 열반. 사라짐 "진정한 브라만이 되는 것"  cf) 대승 : 이 땅에서 살아감

인도문화권 모든 신들의 족보는 불의 숭배로 거슬러 올라감 : 문명, 생명(, 율법?)

악마 : 세간의 공덕을 구하는 자

모든 새로운 종교 : 과거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악마의 군대 : 끊임없는 공포/기갈/의혹  위선/고집 

도올 "위선만 없는 종교는 다 받아들인다"

악마를 이기는 힘 : 지혜

신앙자 : 생각이 맑아지는 것


※ 도올의 투표 방법

1. 되고자만 하는 사람을 피할 것

2. 공약의 내용보다 공약에 담긴 사고능력/판단능력(심미안)/생각을 볼 것
3. 무소유하는 자 





12강 - 법구경 특강

경전『화살』 : 인간의 죽음을 다룸. "인간은 죽는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다"

;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기 "마음을 다스려라."


법구경(담마빠다Dhammapada) : 수타니파타보다 조금 늦게 성립된 경전

근본불교 : 암송으로 전해짐. 쉬운 일상언어.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

불교 : 내부로부터 해방. 자각/독각의 사상. 마음을 다스려. 자기를 이김 → 인본주의/인도주의

cf) 기독교 : 외부로부터 해방. 믿음. 신 중심. 절대주의


"행동이 바른 사람을 존경하라"


"악한 일을 하지 말라. 착한 일을 하라. 그대 마음을 늘 순수하게 가져라. 
이것이 모든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다."

"건강은 가장 큰 재산이요, 만족은 가장 값비싼 보석이요, 

신뢰는 가장 위대한 친구요, 니르바나(열반)는 가장 큰 기쁨이다."

 



13강 - 싯달타의 깨달음

신神 개념의 진화 : 느낌의 응축+언어의 주술적 능력 → 신격화  다신론

 신들 사이의 불평등  신들의 싸움 → 만신(제우스, 신들의 대장) 

 일신론 (하나님/브라흐마.. 제국의 통일기에 출현 ) "나만을 믿어라" 

 zero. 공空 : 싯달타의 혁명. 유일신까지 부정

현대과학과 같은 세계관: "우주를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는 없다"

空 : 색이란 감관에 의지하므로 그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계 속에 존재는 있다. 즉 존재는 관계되어 있다. =>

緣起연기/프라티트야 삼무파다(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 "의존하여 같이 일어난다 "

신을 부정하고 우주의 법칙을 탐구한 결과 => 12연기(역관부터 순관으로)

노(병)사→생→유→취→애→수→촉→6입→명색→식→행→무명 ; '지독한 과학적 사고'

역관 : 이법이 없어지면 이법이 없어진다 = 환멸연기 ; 제법무아

순관 :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겨난다 = 유전연기


"우주를 보는 나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

" '생하는 법은 어느 것이나 모두 멸하는 법이다.'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14강 -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우리는 연관되어 있음
→ 환멸연기 : 문제의 원인을 찾아 없애는 것
 4성제(고집멸도) : 연기법에 대해 쉽게 설한 것

"일체의 고는 집착에서 나오며 이것을 멸하는 도가 있다."

 8정도 : 멸하는 도 "정견/정사유(인과)/정어/정업(생활)/정명/정정진/정념(기억)/정정(마음)"

바르게 하기

 3학 "계戒/정/혜" : 세 가지가 함께여야 가능. 인생의 원칙

계戒 | 계율戒律 자연에 따름, 건강한 삶, 규칙적 삶, 몸의 단련/공부, 정어/정업/정명

정定 | 선정禪定 : 삼매(쌈마디:정신통일), 집중(Attention. 좌선은 방편 중 하나), 정념/정정

 | 지혜智慧 : 앎, 정견/정사유 [정진은 계정혜 공통]

원시불교의 핵심적 사상 : 부처의 가르침에 반복적으로 나타남

→ 고려말 지눌 "돈오점수頓悟漸修" : 깨달음이 와야 계속 닦을 수 있다. 끝없는 고양

 성철 "돈오돈수頓悟頓修" : 진정한 깨달음은 한번의 닦음으로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앎)은 더이상의 노력(修)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확실히 알기 때문에. 더 잘못하지 않는다. ex) 뜨거움/차가움,,

"돈수까지 되는 깨달음이라야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올 "싯다르타 가르침의 핵심은 오보다 수에 있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사막의 수련이다."

"끊임 없는 수의 과정 속에 오의 순간들이 온다. 인간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은 무아無我, 깨달은 자의 삶은 무아행(자비행慈悲行)이다."





15강 - 무아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원시불교 간단정리

1. 일체계고 : 노병사. 인생은 즐거울 수 없다.

두카(고) ↔ 샨땀 (고요,평화)

2. 고행 : 영육 이원론 (육체의 학대를 통해 정신의 자유를 추구)

3. 연기(쌈 무빠다) : 기나긴 사색의 결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함께 일어난다."

생과 사, 장과 단.. ; 고립된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법/존재는 연기되어 존재한다" ; 연기에서 도출되는 것


사고의 오류는 언어에서 나옴 : 언어는 세상을 반영하지(비추지) 못함.

주어 속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음

"꽃이 핀다" "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나는 산다/말한다" ; 나와 삶/말은 분리될 수 없음

주어가 없는 우리 말이 더욱 진실됨. '술어 속에/술어 로서' 주어가 존재.

무아 = 아트만(我, 동일성의 체계)은 없음. 강압적/임시적 작동체계가 무너지면 바로 무너짐

ex) 잔디밭 : 끊임 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상태(동일성의 체계,아트만)가 유지됨

"너를 죽이겠다" = '너'가 죽으면 그것을 증오하는 '나'도 죽음 → 대자대비


연기론 =>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가 사라짐. 철저한 반형이상학적 철학. "언어에 속고 있다."

cf) 형이상학 : 언어를 통해 실체화시켜 놓은 것을 탐구.

    안티노미 (이율배반) : 상반되는 명제가 모두 참인 것. "신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

=> 무기無記 :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모든 존재의 존립근거가 깨짐


언어를 통해 언어를 부정하기. 언어의 미망 속에 빠지면 안됨. 

언어로 쌓여 있는 나我를 해체시켜야 함.





16강 - 싯달타의 죽음


"자신을 귀의처로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며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진리를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대반열반경 - 소박함/인간적/비신화적


"아난다여, 절대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이런 일만이 여래를 경외하는 일은 아니다. 

아난다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색과 우바이 이들은 반드시 진리(다르마)를 몸에 지니고 진리에 따라 진리에 바르게 이르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여래를 깊게 경외하는 것이 되느니라."


"아난다여, 나의 죽음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아난다여,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지는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 비구들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고하노라.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법이니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나는 오직 게으르지 않음으로써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레께서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었다.


스투파 = 탑 = '부처님의 무덤'의 뜻 ; 대승과 소승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





17강 - 무아無我에서 유식唯識으로


윤회의 주체로서의 아我를 찾기 : 윤회론과 무아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고찰 ; 무엇이 윤회하는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6식

눈(가장 명백하고 저급하며 미망의 가능성이 높은 것)에서 밑바닥(識의 심층)으로

6식 의식 - 5식을 묶은 것. 통각적 요소 ; 일상생활은 6식 까지


7식 말나식 : 의식 아래의 자의식 ; 살아야 한다는 집착 등
8식 아뢰야식(저장식) : 위의 7식이 저장되는 근원적 밑바닥의 의식 ; 훈습. 무의식. 윤회하는 것 

무명식/망식. 부정적인 것. 식을 버려야 지혜를 이룸=해탈


모든 사태는 나의 감관에 비친 것(내가 만들어 낸 것)을 인식하는 것


유식론 : 유식무경唯識無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극단적 유심론/주관론 (대상세계가 없다)

"사태가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내 의식의 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모든 앎/현상은 내 의식의 투영이다." 

"깃발도 바람도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다" - 혜능선사
요가행파가 만들어냄
전식득지轉識得智 :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이룬다 ; 유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함



황순식
황순식

사랑, 평화, 자유 Love, Peace, Freedom - 정의당 경기도당위원장 | 한반도평화특별위원장

[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 중앙일보

[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 중앙일보
[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 중앙일보



[기의 세계] 45. 기수련과 귀
[중앙일보] 입력 2000.01.12 00:00 | 종합 1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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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金容沃)의 TV '노자(老子)' 강의가 자못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난해(難解)한 '노자' 를 대중적 인기로 몰고 간 도올의 탈렌트도 탈렌트려니와 그 인기 속에 어떤 시대적 변화의 용틀임이 보인다.

한데 '노자' 를 제대로 알려면 이른바 기(氣)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상가 가운데 기사상을 아우르면서 '노자' 를 완벽하게 풀이한 이는 다석(多夕)류영모(柳永模)였다. 다석은 '노자' 를 '늙은이' 라고 이름붙이고 도덕경 전문을 순우리말로 엮어냈다.

도올이 TV에서 '노자' 를 공개강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석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걸쳐 YMCA에서 공개 강의했다.

물론 그때는 TV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에서 청강한 이들은 함석헌(咸錫憲)을 필두로 재재다사(才才多士)였다.

다석은' '노자' 를 강의하면서 조금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기는 수련을 통해서 몸으로 터득하는 것이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를 터득하면 기운을 쓸수록 더욱 기운이 왕성해진다. 강의나 설법을 하면 할수록 입안에서 침이 샘솟는다. 그 침을 일컬어 금진옥액(金津玉液)이라고 한다. 다석의 입속은 금진옥액으로 충만했다.

'노자' 의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 자(字)는 담(聃)이다. 흔히 노자는 '노담' 이라고도 불린다. 한데 노자의 이름이 귀를 뜻하는 한자인 '이(耳)' 로 지어졌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자(字)까지 귀를 뜻하는 '담(聃)' 이 붙여졌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담' 이라는 한자는 귀가 두툼하여 귓바퀴가 없을 정도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노자 귀의 생김새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선도의 세계에선 특히 귀를 중시한다. 성인(聖人)이란 말에서 '성' 이란 글자도 귀(耳)가 전제로 된다. 노자의 귀는 이름 그대로 성인을 상징하는 셈이다.

선도에서 귀를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귀가 선천성(先天性)을 상징할 뿐더러 생명기능(生命機能)의 근원과 직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귀는 개나 고양이의 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런 부동성(不動性)은 유전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귀가 생명기능의 근원과 직결되는 것은 그것이 신장(腎藏)과 심장(心臟)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호흡에 맞추어 귀를 매만지면 신장이 튼튼해지고 나아가 심장의 기능이 강화된다.

이규행 <언론인.현묘학회장

도올 김용옥 1 박정진 | 불교춘추사 | 2001

도올 김용옥 1 - YES24

도올 김용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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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1
박정진 | 불교춘추사 | 2001년 05월 31일


도올 김용옥 2

일시품절

 

도올 김용옥 1

일시품절

출간일 2001년 05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93쪽 |

책소개

10년 전에 『무당시대의 문화무당』(1990)이란 책을 통해 이미 김용옥에 대한 글을 썼던 경험이 있는 저자가 최근 TV 강의로 크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김용옥에 대한 지식인들과 언론의 비판을 다루면서 그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여러 신문에 실린 김용옥에 대한 글들을 싣고 있으며 인류학자적인 입장에서 김용옥이란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해 소개한다.
목차
1. 김용옥신드롬의 정체
김용옥의 1차, 2차 신드롬
김용옥과 나의 인연
요한인가, 광자인가?
김용옥의 이해를 위한 짧은 개괄
불교강해 : 도올서원 제12림에서
그가 존경하는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

2. 김용옥 비판에 대한 비판
사이비 지식인 '향원'들의 왜가리 소리가 아니길!
서지문 교수의 비판
이기동·성태용 등 제 교수의 비판
문화일보와의 논쟁
일반인의 논쟁가세
종합적인 김용옥의 해명
김용옥신드롬의 문화적 의미와 승화
김용옥신드롬의 사회적 생산성

3. 김용옥의 불교에 대한 비판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 대하여
김용옥의 번역론과 나의 문화체계론의 만남과 소통
나의 역동적 장의 개폐이론과 신화조작
나의 인류학적 지식의 실존적 재구성
김용옥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비판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판의 비판
세계 4대 생불, 숭산스님

4. 김용옥이 넘어야 할 과제
김용옥도 향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진정한 바람
무당적 한풀이 그룹에 끼어선 안돼
김용옥은 학자무당인가! 설익은 원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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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박정진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생각한 바 있어 국문과로 옮겨 공부했다.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며 주로 문화 관련 글을 쓰는 한편 영남대학에서 문화인류학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대시」를 통해 등단하여 시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이 땅의 문화현상에 대한 독특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계일보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난 뒤 한양대와 서울교대에서 인류학을 강의하면서 국선도 수련과 자유로운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부 3학년에 재학중이다. 저서로 「한국문화 예술인류학 (1992)」,「아직도 사대주의에 (1994)」,「어릿광대의 나라, 한국 (1998)」,「인류학자 박정진의 밀레니엄 문화읽기 (1999)」, 시집「해원상생, 해원상생 (1989)」,「시를 파는 가게 」(199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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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비판자들의 대부분이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왜곡하고 내용보다는 태도를 문제삼고 해석이 다른 정도의 것을 마치 김용옥이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수준 이하의 강의를 하고 있는 것처럼 풍기고 있다. 내가 볼 때는 문제삼을 것이 오히려 없다. 김용옥의 담론이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면 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판자의 일부 중에는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사회 전체적인 변동으로 볼 때는 별 생각없이 한마디하는 그들의 조그마한 비판이 보수권력을 편드는 것이 될 수 있다.
--- 2001년 5월 월화산 박정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자같지는 않단 말이야. 차라리 광대같더구먼."
"광대, 맞아. 광대야. 지식인 광대."
"아니야, 무당이 더 맞아. 무당말이야. 말을 할 때 보면 어디선가 누가, 하늘에서 가르쳐주는 것 같더란 말이야.
일사천리로 나오는데 그게 무당이 아니고 뭐가 무당이야. 무당도 그런 무당이 없제. 신들린 것 같단 말이야.
"맞어, 맞어. 전기가 통하는 것 같더구먼. 전기말이야!"
--- p.12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자같지는 않단 말이야. 차라리 광대같더구먼."
"광대, 맞아. 광대야. 지식인 광대."
"아니야, 무당이 더 맞아. 무당말이야. 말을 할 때 보면 어디선가 누가, 하늘에서 가르쳐주는 것 같더란 말이야.
일사천리로 나오는데 그게 무당이 아니고 뭐가 무당이야. 무당도 그런 무당이 없제. 신들린 것 같단 말이야.
"맞어, 맞어. 전기가 통하는 것 같더구먼. 전기말이야!"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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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한편 김용옥에 대한 저자의 신랄한 비판은 다른 비판자들과는 달리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다. 김용옥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한 편견적이고 평면적인 비판은 간접적으로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현 정부를 두둔하는 꼴이 될 뿐만 아니라 그 학문적 내용에 있어서도 새롭지 못한 구태의연한 수준이며 미제국주의나 서구의 근대화와 민주주의 이론을 아직도 모방적으로, 교조적으로 바라보는 모순과 자가당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는 부모를 욕하면서도 부모를 닮아가는 그런 자기내부적 모순을 드러낸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로 문화의 주체적 토착화와 창조적 토착화에 남다른 시각을 가져온 저자는 김용옥의 이론이 겉으로는 매우 현학적이고 서구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자신도 서구이론에 의식화된 나머지 실질적으로 비판과 토론의 잣대를 서구에서 빌려오고 있어 큰소리를 치는 만큼 우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푸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하지 못하는 과거에 치중하는 풀이문학적 성격에 그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래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김용옥의 비판이 그의 말의 큰 소리와는 달리 아직도 우리의 ‘몸과 땅’을 기초로 한 이론 전개에는 실패하였다고 보고 있다. 예컨대 새마을운동을 문화박멸운동(culturcide movement)이라고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것은 “남의 과거의 신화(서양의 민주주의 신화)를 가지고 자신의 현재의 신화를(한강의 기적) 지우는 사대적 지식인의 행태의 잔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최근세사에서 경험한 민족중흥의 바람(風)의 진정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사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과소평가하려는 지식인은 아직도 사태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일제와 광복이라는 식민지적 상황의 연장선에서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도입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으로, 여전히 우리의 ‘몸과 땅’을 배반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서구의 민주주의 경전을 너무 교조적으로 신봉한 나머지 모자이크식(짜집기식) 헌법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이것은 항상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는 악순환에 빠지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과거로부터는 단절되고 현재는 주체적이지 못함으로써 종국에는 독립국가적인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창조적 이성(理性)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문화운영’의 도입이 절대절명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성의 문화운영에 있어서도 서구이론에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면, 역사에서 현재적 창조와 성취를 하지 못하고 언제나 지나간 것에 대한 낭비적 소급(遡及)과 다가올 것에 대한 예축(豫祝)을 일삼는다면 ‘축제적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축제적 역사관’이라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역사를 연출함으로써 굴곡과 파란이 많은 드라마틱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매우 극적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난과 절망을 벗어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진보적 역사관’은 이성에 의해 역사를 이끌어감으로써 안정과 축적을 통해 발전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과거청산과 세계화라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이름으로 여전히 ‘소급과 예축’을 계속한다면 아무런 국가적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만 무성케 한다면 푸닥거리식의 역사운영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하겠다. ‘역사 바로세우기’나 ‘제2건국’과 같은 깃발을 치켜들지라도 이들 양 정부가 실패를 거듭하는 것은 결국 창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창조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는 비극이라는 것이 저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용옥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문화박멸운동이라는 심한 폄하도 실은 바로 지식인의 사이비성에 먼 뿌리를 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우려이다. 사대와 위선으로 얼룩진 우리의 문사집단들의 자기방어,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김용옥조차도 실질적으로 그의 고백대로, 미제국주의·기독교의 유착관계의 혜택을 입은 기득권 집안 출신으로 단지 군사정권과의 유착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밖으로 사대적이고 안으로 착취한’ 우리나라 선비계급(문사집단)의 과오를 무사집단을 매도함으로서 은폐하거나 두둔한다면 그 역시 문사집단의 내부적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국민의 정부’의 소위 ‘말의 성찬’ 그룹은 ‘몸과 땅’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의 민주화운동의 찬란한 깃발과 선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점차 이반당하고 있는 국면이다. 이같은 사실을 직시하고 김용옥은 앞으로도 철저하게 편당(偏黨)하지 않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자세로 강의에 임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말의 성찬’ 그룹은 IMF를 몰고 온 ‘문민정부’의 ‘무지와 오만’의 그룹과 비슷한 노정을 보이고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군사정권 이후에 들어선 두 민주정부가 똑같이 내부 모순에 빠진 것은 우리 문사집단(文士集團)의 문화운영이 외래 이데올로기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불행한 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현실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든, 실패를 하였던 간에 모두 신화조작의 산물이다. 신화조작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 찬란한 내용보다는 자신의 ‘몸과 땅’에서 일어나는 성실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김용옥의 강의와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신화조작에서 성공하려면 우리의 ‘몸과 땅’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만약 김용옥의 담론과 문화권력이 이를 배반하고 사대적-종속적 신화의 되풀이에 그친다면 또다시 우리 민족은 문화식민지적 상황과 굴레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도올 김용옥』(1, 2권)은 김용옥의 인물됨과 시대적 역할에 대해 요한, 광자(狂者), 무당, 원효라는 인물을 저자는 상정한다. 그에게는 물론 이 네 인물의 성격과 유형이 다 들어 있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예수의 도래를 알리는 세례 요한과 같이 새 시대를 알리는 ‘목소리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으며 유교적으로 보면 군자(君子) 다음의 ‘이상은 높지만 실천이 모자라는’ 광자(狂者)에 속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또한 한국의 문화특징으로 보면 무당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당의 이미지는 ‘과거와 귀신’에 대한 빙신(憑神)으로 인해 ‘미래와 신’에 도달하는 데에 한계와 역부족을 드러내는 퇴행적 인물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만약 김용옥이 에듀테인먼터로서, 그의 퍼포먼스가 하나의 푸닥거리로 그칠 경우라면 이에 해당된다. 원효야말로 바로 무당을 극복하여 자유자재한 가장 바람직한 인물상이다. 김용옥이 우리 시대의 원효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모자라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지식인과 김용옥 개인은 함께 반성하여야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시대 원효의 탄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목표이며 또 우리 모두가 함께 달성하여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같은 인물의 배출이야말로 문화의 주체성을 강화하고 문화의 총량을 늘리면서 통일에 성큼 다가서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요한인가, 광자(狂者)인가, 무당인가, 원효인가』(1, 2권)라는 책은 동양철학자 김용옥이 KBS TV에서 노자·공자 강의를 하는 것과 더불어 불어닥친 그에 대한 일련의 비판과 신드롬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문화총체적인) 평가를 한 책이다. 이 책은 비판서이긴 하지만 우선 도올 김용옥 신드롬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높이 사는 쪽이다. 동시에 도올 김용옥 개인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김용옥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문제점과 그 해답을 함께 풀고자 하는 우리 시대의 신화적 글쓰기­신화조작에 대해 광범위한 토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언론인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박정진씨가 쓴 이 책은 15년 동안 줄기차게 김용옥의 일련의 대(對) 사회적(社會的) 행위에 대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중층적으로 파헤쳐 온 저자의 역작이다. 저자는 지난 1990년에도 『무당시대의 문화무당』(지식산업사)이라는 책을 펴내 1980년대 중반에 불어닥친 김용옥의 1차 신드롬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의미 분석을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저자의 이번 책은 특히 김용옥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인류학적 지식의 바탕에서 나온 인류학자의 첫 반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저자는 이번에 1, 2차 신드롬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김용옥의 의미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우선 의미의 네 가지 층인 기독교의 세례 요한, 유교의 광자(狂者), 종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무당, 그리고 종교적 완성을 이룬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간 인물인 원효스님까지 들먹이면서 그에 대한 비교적 폭넓은 해석과 미래적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탄탄한 학문적 바탕과 오랫동안 김용옥에 대한 관찰, 그리고 동시대에 공통의 문제를 두고 고민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 박정진씨는 종래 김용옥의 비판에 나선 다른 비판자들이 단순히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을 두고 시비와 표절 등의 논란을 벌이거나 안하무인의 오만한 태도를 두고 문제제기를 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김용옥 개인의 문제를 우리 시대 모두의 문제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가지고 김용옥의 행위를 세계문화와 한국문화의 지평에서 폭넓게 문제제기를 하면서 토론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장기지속(長期持續)의 이론과 신화학(神話學)의 신화분석 방법을 저자의 인류학적 연구모델인 ‘역동적(力動的) 장(場)의 개폐(開閉)이론’(DSCO: Dynamic Space Close and Open 혹은 Dynamic Space Context and Out of Context)과 결합시킴으로써 신화의 이중성과 다양성을 분석하였다. 저자는 “TV강의를 통해 김용옥이 펼치는 일련의 작업들도 크게는 신화적 글쓰기­신화조작(神話造作)에 들어가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명하고 있다. 결국 김용옥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김용옥의 번역론과 자신의 문화체계 및 변동론을 비교 분석하면서 상응성과 유사점을 발견하고 있는 저자는 우선 김용옥의 강의와 해석학에 대해 우리 문화 총량의 확대와 새로운 가치체계 및 의식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크게 순기능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저자는 김용옥의 강의와 강의를 위해 쓰여진 『노자와 21세기』·『도올 논어』가 엄정한 학자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대중적 계몽의 맥락을 가지는 것으로 대중적 토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십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지문 교수를 비롯, 학자들의 비판은 소위 김용옥이 형성해가고 있는 문화권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사이비 학자인 ‘향원(鄕原)들의 왜가리 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해석의 다양성을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학계의 주류와 해석이 다르다고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또 주부 이경숙씨가 문제제기와 함께 쓴 책『노자를 웃긴 남자』는 토론을 하기에는 심하게 함량미달의 것으로 대중강의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반론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표절과 관련하여서는 물론 김용옥 자신이 영향받은 학설과 인용구절에 대해 엄정하게 밝히는 것이 학자로서의 자세로 볼 때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겠지만 대중강의의 성격으로 보아서 처음부터 엄정한 학문적 성과물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또한 김용옥의 문체의 기술상 그것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 표절이나 계산된 은폐라고 하는 것은 김용옥의 장점이나 순기능적인 역할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는 소인배적 태도라고 나무라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런 점에서 김용옥의 강의는 새로운 문화적 공감대를 필요로 하는 우리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2권)에서는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담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종교문명과 과학문명의 특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이 두 문명체계는 서로 침해할 수도 없고 서로 대신할 수 없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예컨대 죽음이나 악이나 귀신의 문제라는 한계상황이라고 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삶(영생)이나 선이나 신을 거론하는 것은 신화적(종교적)인 처방으로서는 훌륭한 것이지만 이는 자기순환적인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이를 마치 과학적인 처방으로서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수레를 굴리면서 역사를 움직여왔다. 이 둘은 쉽게 하나로 합쳐버린다면 이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세계의 잘못된 유착(癒着)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과학으로 해결하고 종교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종교로 해결하는, 상호보완적인 운영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두 세계는 평행선을 유지함으로써 상생적인 통합(合生)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유교의 천(天)과 상제(上帝)의 개념을 기독교의 ‘하느님’의 개념과 동일시함으로써 유교와 기독교의 화해를 추구했는데 여기서 기독교의 토착화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 김용옥은 대담에서 천주교 초창기의 해묵은 문제, 토착화의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반추하는 계기를 가졌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특히 천주교는 외부에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고민하는 지식인 가운데서 사람을 보내서 유학의 새로운 다른 형태로 수용하였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이러한 우리의 천주교의 역사는 일방적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자기들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수용한’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역사이다. 따라서 천주교 사상사는 유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한국의 유학사와 깊은 구조적인 관련을 맺고 공통적인 문제의식과 표현양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데에 공감하였다. 그러나 김추기경은 ‘유교에서의 하늘’은 기독교에서와 같이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원리로서의 하느님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애써 무시하자 이에 김용옥은 실학자들 가운데에도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부정하고 ‘원리로서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기함으로써 역시 종교인과 학자 사이의 서로 상충되는 부분을 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추기경은 누가 보아도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자리였으며 김추기경 앞에서 김용옥은 도전하는 젊은 지성의 면모보다는 시종 옆에서 겸손과 예(禮)로 배움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다른 자리에서의 김용옥의 예의 자화자찬과 불손으로 잃은 점수를 만회했다. 김용옥은 여기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고해성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2권)에서는 이 밖에 도올 김용옥의 1차 신드롬 때의 정황을 전달하는 6장 ‘도올 김용옥과 산공 강신표의 비교연구’, 7장 ‘한국 지성인의 고민에 관한 사례연구’를 실어 도올 신드롬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도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8장 ‘김용옥에 보내는 에세이 서신’에서 저자가 최근에 쓴 네 편의 에세이를 함께 게재함으로써 앞에서 맹렬하게 펼친 토론이 탄탄한 이론의 바탕 위에 건축된 것임을 보여주었으며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공통의 문제와 그 해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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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기(氣)’가 뭐길래? > 게시판 > 공지사항 | 청목서원

‘기(氣)’가 뭐길래? > 게시판 > 공지사항 | 청목서원

‘기(氣)’가 뭐길래?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공학 공부를 한 사람이다.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의 사람들이 대개들 그러하듯이 나는 무당이나 점, 사주 등을 미신이라 생각해 왔으며, `기氣'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불교 신자 집안 출신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본인의 말에 의하면 `기'가 강해서 웬만한 무당이나 복술인(卜術人)들은 자기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단다. 사실 나는 온갖 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단학, 명상, 기공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책을 따라서 흉내도 내 보았지만, 시작한 동기가 믿음이 없이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던지라 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련기간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이들 엄마는 기공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잠시 정신을 집중시키고 두 손바닥을 마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분하고 억울하게'도 애들 엄마로부터 `기'도 느끼지 못하는 ‘하등동물’ 취급을 받아왔던 터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뭣한 일이고, 유행하는 `단丹'. `선 禪' 이런 것을 지도하는 학원엘 다니기에도 맘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 하면 수련 몇 달이면 '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과학적, 객관적 근거가 없는 '기`란 것에 대하여 미심쩍어 하는 불신감이 약간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UFO, 아틀란티스 등의 고대문명, 동서양 모두에 널리 퍼져있는 유령 이야기, 환생, 최면술에 의한 전생 기억 -- 이런 신비주의occult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란 기공수련회가 규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중국 당국의 견제를 받게 되어서 무더기로 체포되는 소동이 있었지만, 사실 중국에 가보면 아침마다 공원에서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유명한 기공사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호텔에서 기공사에게 척추안마를 받아 본 적도 있지만 결과는 `글세, 이 정도라면 안 하니만 못 하쟎아?' 였다. 그 기공사가 엉터리였는지 아니면 내가 기감을 느끼는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일억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집단최면에 걸려서 헛것을 믿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 주간지의 <기> 관련 특집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도 기공 수련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까지 나 같은 일반인들은 도대체 `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최소한 궁금증이라도 풀어야 숨이 터질 입장이 된 것이다.


`기'의 원산지는 동양, 특히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이지만, 서구에서도 `기'에 대한 연구는 오래되었다. 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초능력 연구소들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조시대의 퇴계, 율곡 선생의 `이기론' 논쟁이 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특히 요즘은 사회 곳곳마다 `기'가 유행이다. 곳곳에 수련도장 간판이 있고 서점에 가면 `기氣'자가 들어 있는 제목의 책들을 수십 종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학계를 보더라도 이공학(理工學) 계통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신과학학회>가 설립되어 있어서 기 현상을 연구의 한 분야로서 다루고 있으며, 기에 대한 책도 내가 알기로 두 권이나 공동 저술(논문 모음)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기란 무엇인가?', 즉 󰡐기󰡑의 정체에 대한 이론적 근거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기껏 `생체 에너지, 공간 에너지, 우주 에너지, 정보를 담은 에너지' 등의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짐작’뿐이다. `기氣', `단丹', `선禪', `명상瞑想' 이런 유(類)의 서적들을 뒤져보아도 `기'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체계적인 설명이나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책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설명과 주장이 다르다. 심지어 모 대학교수의 저서로서 `기과학'이라는 제명의 책도 그 내용을 보면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아래에 내가 인용한 일본 과학자인 마루야마 도시아끼 丸山 敏秋의 “기란 무엇인가? <氣-論語부터 신과학까지, 1986>”라는 책에도 동양 고전에 나오는 ‘기’에 대한 소개와 일반적인 기현상(氣現像)에 대한 소개뿐, 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이란 것은 일반 과학 이론들처럼 현상과 기존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합당한 논리와 알려진 물리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설을 말한다. 그 가설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 결과까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된 책들에 나와 있는 ‘기’에 대한 설명, 주장들은 그에 대한 근거가 너무나 막연하다. 그저 옛 글에 이러저러하게 나와 있으며, 기공하는 사람들의 느낌이 이러저러한 것 같다는 말뿐이다. 이래서는 ‘기’의 실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기’란 그저 집단 내지 자기최면에 의한 가상적 효과이거나, 두뇌의 작용에 의하여 우리 신체가 신경생리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반증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과학은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실험으로 확인(검증, 반증)하는 과정이다. 먼저 <기 현상>을 기존의 물리법칙으로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이나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과학적일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서 󰡒무슨 띠는 금(쇠 金)이요 무슨 띠는 목(木)이므로, 목이 금에게 장가가면 안 된다(金克木)󰡓라는 식의 사주팔자 풀이는 `무슨 띠가 어째서 금인가?󰡒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사실적 근거가 없으므로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수억 이상의 사람들이 믿고 또 느끼고 있다는 `기'가 어째서 이러저러한 것이리라 하는 설명조차 찾을 길이 없단 말인가? 서양 사람들이 `기'를 무시한다고 `기'분(氣分) 나빠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며 평소에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과학적 근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내가 요구하는 과학적인 근거란 관련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서,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란 것이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확실한 것이라면 `기'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타당한 가설 정도는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설'조차 없는 것을 실재(實在)라고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들을 동원해서 `기'의 과학적 근거를 유추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가설의 수준이다. 그러나 과학 이론들과 합치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의 존재와 작용'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반신반의로서 시작된 연구가 뜻밖에도 내가 가진 과학지식과 그리고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들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주장(종교의 교리를 감히 이렇게 표현함은 과학의 기본인 객관적 입장을 지키고자 해서이다)들'까지도 `기'에 의해서 상당부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기'에 대한 글을 쓰기까지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






가설의 도입과 그 전개에 있어서는 `나의 생각과 추측'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름대로 과학적 이론과 사실만을 그 근거로 삼고자 노력하였으며, 인용과 참고에 있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한 자료와 해당 부분의 공신력이 충분히 인정된 학자들의 저술만 채택하였다.


나의 가설은 현상으로서의 ‘기’로부터 출발하지만 물질의 ‘식(識)’을 거쳐 의식과 영혼 그리고 사후세계에 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기’에 대한 생각이라면 언젠가 과학이 밝혀 줄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사후세계에 까지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마다에 직접적으로 가장 필요한 지식인데, 내가 죽기 전까지 과학이 이 모든 것을 밝혀 내어서 내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긴데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니 비록 ‘가설’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크고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조그만 소망은 <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기'의 근원과 작용기전이 확실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현대 과학의 진보 속도를 보면 그리 머지 않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 동양 사상(東洋 思想)에서의 기氣.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기'라는 말에 대한 검토와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서점의 수많은 `기'에 대한 책들과 또 일상용어로서의 `기'의 다양한 의미가 서로 헛갈려서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의 학문`이 정립되어 있지 아니하여 사람들마다 제각기 그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므로, 나의 독단으로 내린 정의는 잘 못된 것일 염려도 있다. 다만 내가 내린 바 '기`에 대한 결론과, 통상적으로 쓰여져 내려온 '기`의 정의가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기`의 정의를 감히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단계로서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라는 말과 그 의미를 살펴보자.






`기'란 말은 동양문화권에만 있는 개념으로서 오래 전부터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더 오래 된 갑골문자 시대에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주;‘三’자 비슷한 모양으로서 맨 아래의 가로 ‘一’의 끝이 아래로 처져 있는 글자로서, ‘바라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氣’자로 보는 견해도 있어나, 다수 학자들은 ‘걸 乞’자의 원형으로 본다), 논어(論語)에서는 식기(食氣;식욕), 사기(辭氣;말씨, 말투) 등의 예 이외에 혈기(血氣)라는 용례가 있을 뿐이다. 맹자(孟子)에는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기‘의 본산이요 종주라 일컬어지는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에는 ’기‘가 불과 3회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맹자, 노자 시대까지에는 ’기‘가 뚜렷한 실체나 개념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라는 말과 개념이 정립되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장자(莊子)부터이다. 도가(道家)의 노자(老子)를 이은 장자(노자의 약 2백년 후의 인물)는 기를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기본이며, 나아가서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초 원소라 생각했다. 생과 사를 기의 취산(聚散;모이고 흩어짐)으로 보는 생각이 여기서 나온다.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故曰 通天下一氣耳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의 모임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옛부터 이르기를 천하에 ‘기’ 하나뿐이로다 한다”


후한(後漢) 시대의 왕충(王充)은 모든 것이 `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도 인간도 `기'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기'를 `음(陰氣)'과 `양(陽氣)'으로 나누는 음양설과 `기'의 변화를 금, 수, 목, 화, 토의 다섯 가지로 분류 분석하는 오행설도 대략 이 무렵에 확립되었다(전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음).






宋代에 기의 개념이 사상적으로 전개되어.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가 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내재적 원리로서 <리(理)>를 내세워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주자는 理는 그 자체로서 형질도 없고 움직이지도 정지하지도 않지만 기의 내재적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모든 사물은 理와 氣의 상호작용에 의거하며, 理는 형이상(形以上)의 통일의 원리이고 氣는 형이하(形以下), 즉 존재하고 변화하는 실체로 보았다. 당시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음양이 서로 작용하는 원리를 <이(理)>라하고 <이(理)>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기(氣)>라 하였다. 주자(朱子)는 이선기후(理先氣後)라 하여 이가 기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생각은 <식이 기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나와 유사하지만, 그후의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대체로 리기일원(理氣一元)을 지지하는 편이었으며, 理보다는 氣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것은 理를 개념적인 것으로, 氣를 실재하는 우주만물의 존재와 변화의 기본적 원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氣의 배경으로서 理가 도입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理는 곧 자연의 법칙, 즉 현대 과학 용어로 하자면 물리(物理)법칙이다. 서양의 과학이 법칙을 추구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성과를 이룬데 비해서 동양에서는 법칙을 밝히는 일에 소홀하였고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법칙의 존재와 필요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理라는 개념은 ‘법칙’을 넘어서 氣가 실재할 수 있는 논리적 바탕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기의 배경에는 식(識)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상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유학(儒學)에서의 理는 識과는 차이가 있다. 실은 그 ‘차이’가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동양사상에 있어서 氣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 또는 기능의 근원”(마루야마 도시아끼)이며, 물질의 원소, 생기(生氣), 정신기능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물질, 생명, 마음의 三界가 모두 기의 소행이고, 자연의 모든 변화는 기의 움직임(動靜)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대 물리학에 비교하면 기는 물질(소립자), 에너지와 모든 상호작용(물리학에서는 ‘힘’을 포함한 상호작용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을 합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온 생기론(生氣論)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氣란 무엇인가? -- 氣의 정의(定義)






이처럼 동양의 고전(古典)에 나오는 기는 그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그러한 상태로서는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이미 현대과학에서 거의 구명되었으며 생명력으로서의 생기(生氣) 역시 생리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과학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에 등장하는 넓은 ‘기’의 개념에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아니한 부분은 무엇인가?


‘기’를 ‘氣’만이 아니라 ’理‘를 합친 개념으로서 파악하되, 거기에서 물리학적으로 규명된 물질과 에너지(힘)를 제외하면 <상호작용(변화)에 대한 의지>만 남게 된다. 근래 우리 나라의 <기철학>의 주창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은 저서 <기철학 산조>의 머릿글 “탄현술(彈弦述)”에서 <기는 물(物)의 의지(意志;꼴림, 하고자 함)>이라 정의하고 있다. 나는 김용옥의 기에 대한 정의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 용어로서 주로 사용하는 `기'는 `경향'이라는 의미와, 생체 작용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생기(生氣), `살기(殺氣)', `한기(寒氣)', `끼(氣)가 있다'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는 그냥 수동적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태'가 능동적으로 외부로 표출되거나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상태의 주체'는 `생기', `살기'에서처럼 인간이나 동물 등의 생물이기도 하고 `한기'에서처럼 무생물이기도 하다. `경향'은 좀 더 상세하게는 `의지의 표출,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올의 “기는 의지(꼴림, 하고자 함)”라는 말과 합치하고 있다.


이외에 `기'는 `기가 막힌다', `기운(氣運)' 등으로 생체나 우주 내의 어떤 `힘'의 흐름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과 그 때의 의미는 근본적인 것 즉 `정의'가 아니라, 2 차적인 것이라서 부(副)현상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어 일단 제외한다. 나중에 <생체 내의 기>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경향, 꼴림>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지, 의, 정>, 즉 이성, 의지, 감정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의하면 의지는 의식의 한 부분(작용)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말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니다. 과학 특히 요즘의 첨단분야인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기계(思考機械)>의 가능성까지 인정하는 추세이며,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볼 것이다.


일단 <의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단순한 기계(조건반사)적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게 하며,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외부의 원인과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요는 의지란 인과율에서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개입 작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목적성 - 한마디로 `주체성'을 가진 것이다.


주의할 것은 <기 = 의지>라는 것은 아니다. 도올 선생께서도 괄호를 붙여놓았듯이, `꼴림, 하고자 함'은 `의지에서 발휘되어 나오는 것'이지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는 주체적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경향; 꼴림󰡑이라는 형태로 '기`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계(조건반사)적'이 아니고, 외부에 대하여 `요구'를 작용시킬 수 있으려면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의지’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즉 방향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의 설정 내지 지향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맹목적인 ‘꼴림’이 되고 마는데, 맹목적이라면 ‘의도’나 ‘방향성’이 없는 것이다. 이 정보처리 능력을 인간에 비유한다면 분석,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적 능력이 될 것이다. 이 <분석, 판단, 선택>은 심리학 용어로는 `이성'에 가장 가깝다. 사실에 있어서 이성은 의지의 바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와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식'의 각기 다른 면일 뿐이며, 항상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의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의미의 의식도 너무 좁다. 부족하다. ‘기’--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육체적 본능과 무의식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보다 더 폭 넓은 무엇--우리 인간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관련되는 모든 <경향>이 의지와 기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가장 유사한 개념이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 설명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의식과 본능을 포함한 <식 識>이다. 나는 `식'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 식이란 ‘안다’는 뜻이며, ‘안다’는 곧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과 다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그 차이가 행동의 선택의 바탕이 되는 기초적인 판단능력을 말한다. 나는 앞으로 모든 물질--소립자들까지도 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식에 의해서 기를 발휘한다는 내 생각의 근거를 제시할 것인 바, 그러한 내 생각은 `범식론(凡識論)'이라 할 수 있겠다. 범식론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서 범심론(汎心論)이 있다. 모든 물질에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다.


`식(識)'이란 말의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철학에서의 가장 큰 두 개의 주제인 인식론(認識論)과 실체론(實體論)의 근저에 있는 동양적 개념이 식이다.


불교(유식론)에서 말하는 식은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다섯 개의 식(전오식;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감각)과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 등의 팔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식’이란 글자의 의미는 ‘식별’, ‘인식’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안다’의 범주에는 ‘느낌(感覺)’도 포함되어 있다. ‘안다’와 ‘느낀다’를 합하면 ‘정보를 받아들인다’라는 말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이론과 섀넌의 정보(communication) 이론 등에 의해서 1940년 대 말경에 등장한 ‘정보’는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다.)


동사로서의 ‘식’은 ‘정보를 받아들임‘이지만, 명사로서의 ‘식은’ ‘지식’ 그리고 ‘아뢰야식’ 등의 용례에서와 같이 ‘정보 그 자체’이다. 이로서 ‘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를 교환(처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도구로서 사물을 인식할 때에 명사와 동사의 복합적 의미로 인식하는 경우는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영어 단어에서 대부분의 동사는 동시에 명사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철학, 물리학에 있어서도 ‘질료와 형상’, ‘체(體와 용(用)’, 즉 ‘존재와 현상󰡑을 과연 분리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의 `상상'의 출발점은 기였지만, 기의 성질과 이론적 근거에 대한 검토에서 기의 배경이 되는 무엇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얻은 결실이 <식識>이었다. 실제로 이 글은 <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식>에 대한 글이다. <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식>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의 정체에 대하여 납득할만한 가설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나는 <기>의 배후에 있는 <식>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식> 역시 <기>처럼 하나의 애매 모호한 개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식>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사실 <기>의 수준에 그치는 생각이었다면 나는 굳이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식>의 깨우침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자만심'이겠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오랜 공부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느낌으로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기’라는 작용이 있다(實在한다).


작용으로서의 ‘기’가 있으려면 그 근원인 ‘식識’이 있어야 한다.


`기'는 `식'이 외부에 대하여 발휘하는 ‘의지(꼴림, 경향)일 것이다.>






기는 식에 의해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식은 기의 전제조건이므로 기가 있으면 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식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존재의 의의가 없으므로(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식이 있으면 기도 있다. 즉, 기와 식은 상호보완적이며 함께 있는 것이다. 식 그 자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식이 물질을 포함한 외부에 작용하는 수단인 기는 물리적이라야 한다. `물리적'이라 함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법칙'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아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기’의 작용은 알려진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기는 물리적인 어떤 것일까?


기는 에너지가 아니다. 기는 힘도 아니다. 에너지나 힘이라면 물리적으로 측정이 가능할 것인 바, 아직 아무도 그 측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기’를 옛 선현들의 정의와 같이 물리적인 힘, 그리고 소립자의 여러 근본적 성질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학에서 밝혀 낸 소립자의 성질은 일단 제외하고서 ‘식’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형의 물질이 아닌 무형의 것으로서, 에너지와 힘을 제외한다면 어떤 가능성이 남는가? 물리학 책을 다 뒤져보면 딱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가장 폭 넓은 의미로서는 `정보'의 개념이다. 기는 식이 외부 대상에 전달하는 정보일 것이다. 즉 ‘경향, 꼴림’은 외부에 정보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정보>는 이 책의 주 연구대상의 하나이다.


미국 네바다 대학의 <의식 연구소> 소장인 딘 대린 Dean Darin은 "The Conscious Universe” (“의식의 세계”, 도서출판 양문, 1999. 주;이 책의 영문 제명은 “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의미이다)에서 염력(念力)을 “의식과 사물과의 상호작용”이라 정의하면서 아울러 “실험에 의하면 염력은 의식으로부터 물질로 정보가 이동하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식과 기는 어떤 형태의 실재일까? 소립자의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 형태가 파동적이라는 점과, 기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대개 기를 파동의 형태로 느낀다는 점에서 기도 일종의 파동과 유사하거나 같은 형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오차가 작을 것이다. 이 생각은 기, 즉 식의 작용이 홀로그래피와 같을 것이라는 가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물리학이 밝힌 바와 같이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파동이다. 존재의 정의는 ‘차이(差異)’이다. 주변 혹은 다른 존재와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에 의해서 주변과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정의한다. 물론 ‘차이’와 ‘영향력’은 동일한 것이다. 파동은 순수하게 ‘차이’만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파동의 그림인 사인sin 곡선은 어떤 무엇이 주기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단순한 존재의 형태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으로서 모든 존재와 힘을 한꺼번에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도 소립자와 힘 모두를 극히 미세한 끈의 진동으로 해석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식과 기를 수학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 `형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파동이든 입자든 장(場)이든.






소립자--물질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기론>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 왔던 생각이며, 유명한 철학자 베르그송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금세기 초에도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 등이 신봉하던 이론이었다. 그리고 <기>라는 개념 또는 그 존재는 동양에서는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를 의지 또는 식의 외부 작용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다.(이경숙 저 “마음의 여행”에는 “기는 바로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이며....‘서로를 알리려는 힘’이라 나와 있다. 정신세계사, 1999, P258). 물론 본질인 식과 현상인 기는 별 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통합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식과 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식과 사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라는 개념에 가까운 것 만으로서는 부족하며, 식이라는 기의 근원이 되는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일원“이냐 ”이기이원“이냐 하는 옛 논쟁에 비유한다면 나의 생각은 ”식(이)일원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라는 말과 개념이 이미 널리 익숙해져 있으며, 본질과 현상은 굳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앞으로 <식>과 <기>가 다소 혼용될 것임을 미리 사과 드린다


참고로, 오랫동안 생명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이었던 <생기론>과 나의 생각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다. <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생기론>은 물질에 생명(생기)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질에 생기가 작용하면 생물이 되고, 작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질--무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이 생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물활론, 범신론, 범심론 등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이 책과 관련하여 인용할만한 이론으로서 띠야르 샤르댕Teilhard de Chardin(1881-1955)의 물활론이다.


띠야르 샤르댕은 프랑스의 신부였으며 철학자, 고생물학자로서, 물질과 정신(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간격을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새롭게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스칼라 양, 즉 그 크기만 있고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양이다. 샤르댕은 에너지가 방향을 가진 벡터 양이라 가정한다. ‘방향성’은 앞에서의 <기 = 꼴림, 경향>이라는 정의와, 그리고 ‘기’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식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나의 가설과 동일한 논리 위에 있다. 에너지의 ‘방향’은 곧 에너지의 ‘의지, 생기’이다. 샤르댕은 에너지(모든 물질의 존재와 그 변화의 근본은 에너지이라는 물리 기초를 염두에 두시라)에 진화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서 의지, 즉 ‘기’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서 생물 그리고 인간은 이 에너지의‘정신적 벡터’의 작용 결과이며, ‘정신적 벡터’는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최후의 완전 진화한 상태를 지향하여 나아가는(진화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는 이 최종적인 상태(목표)를 <오메가 포인트>라 하였다. 이 생각은 불교에서 모든 존재가 그 불성을 찾아서 해탈(성불)하게 되는 것이라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이 것은 나의 <식--기> 가설과 상당히 일치한다. 다만 샤르댕은 ‘정신적 벡터’의 방향, 즉 그 본질이 ‘지고(至高)의 선(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것은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한다. 소립자가 가지고 있는 미소한 에너지, 그것도 그 일부분에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미 담겨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기에는 논리에 비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사후식의 세계> 편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가설은 나름대로 물활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안된 가설로서 현대에도 신과학 방면의 과학자들이 즐겨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물리법칙이나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생명현상(생명의 탄생과 진화)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가설이지만, 현대에 들어서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부정되고 있다.


샤르댕을 제외한 다른 <생기론>이 물질과 생기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데 비해서 나의 생각은 모든 물질--그 근원인 소립자는 <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분명히 물리적인 존재로서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소립자와 소립자의 집합체인 생명체 사이에는 그 <식>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범심론 panpsychism>과 비슷하다 하겠다.


생기론 또는 물활론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물의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는 가 아닌가에 달린 것이다. 모든 생물은 전체로서는 물론, 그 기본 단위인 하나의 세포까지도 어떤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성>이 어떻게 해서 생겨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곧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인 전제로 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의 생각은 ‘우연’과 ‘자연도태’에 의해서, 통합(전체)주의자들의 생각은 복잡계의 제2차 법칙적 특성(창발)에 의해서 생겼다는 쪽이다. 양측 공히 자신 있게 내 세울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 나의 가설은 <식>, 즉 능동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소립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은 곧 <정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란 말의 의미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바, <정보는 정보를 낳는다>라는 명제와 같이 능동적인 <정보>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상호 결합되는 접점에서는 물질의 존재, 즉 ‘객관적 실체’와 ‘정보의 초광속 전달’은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보성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소립자> 편에서 아인슈타인의 EPR 상상실험과 보아의 “하나의 통합체”이론,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여 밝힌 죤 벨 Jhon Bell의 정리 및 그 실험 결과를 통해서 말씀 드리겠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식과 기의 정의>이다.


이제 과학적 사실들이 위와 같은 기의 정의와 부합되고, 그리고 과학 이론들이 <기>에 대하여 알려진 여러 가지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