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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Taechang Kim 소설 동학 1~6 세트 - 전6권 김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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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소설 동학 1~6 세트 - 전6권 
김동련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2-05-31



























Sales Point : 55

2104쪽

소설 동학 1 -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1
소설 동학 2 -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2
소설 동학 3 - 세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1
소설 동학 4 - 세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2
소설 동학 5 -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1


책소개
“소설 동학”은 3부 6권으로 구성한 대하 동학소설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과 구도 그리고 득도와 포덕, 순도에 이르는 일생을 다루는 1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입도와 동학 수련, 도통 승계와 고비원주하는 간난신고의 30여 년 역사를 다루며 교조신원운동으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2부, 그리고 교조신원운동 이후 동학혁명이 전개되는 3부로 구성되고 각 부를 2권으로 나누어, 모두 6권으로 구성되었다.

역사(팩트) 흐름에 충실하면서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소설적 상상력의 힘으로 살아 있는 동학, 지지 않는 동학, 더불어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학 민중 형상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어, 한국 대하소설의 한 흐름 속에 자리매김할 대작으로 완성하였다.


목차


소설 동학 1
소설 동학 2
소설 동학 3
소설 동학 4
소설 동학 5
소설 동학 6


책속에서


P. 144제선은 장사를 접고 용담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틀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전에 김 진사댁 마당에 뒹굴면서
몸의 가장 말단에 있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선명하게 경험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 몸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몸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몸은 물질의 작은 조각들이 쌓여 이루어졌다.
몸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물질을 먹어야 하고,
못쓰게 되고 원치 않는 물질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몸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작은 물질 조각들은 생명이 없는데 이 몸에는 어떻게 생명이 깃들게 되었을까?
어느 정도의 복잡한 조직이 되면 생명이 들어오는 것일까?
생명이 들어오는 문지방은 과연 어디인가?
이것은 기적 같은 사건이다.(1권) 접기
P. 74며칠이 지난 후 제선은 다시 뜻을 다잡았다.
상제님을 만나 길을 찾기 전에는
이 골짜기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선은 스스로 이름을 제우, 자는 성묵, 호를 수운으로 고쳤다.
제우란 어리석은 세상을 건진다는 뜻이고,
성묵은 도가 극치에 이른 상태인 ‘혼혼묵묵’의 뜻이다.
수운이란 물과 구름으로 천지 생명을 상징했다.
다시 피를 말리는 기도를 계속했다. 목숨을 걸고 정진했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다. (2권) 접기
P. 121시월 중순.
조금 여유를 찾은 경상은 흥해 매곡동 처가로 내려갔다.
이전에 경상은 매곡동에서 근 십 년을 살았었다.
여러 친구와 도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이 경상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경상은 이들 앞에서 양천주에 대해서 강론했다.
“양천주란 내 몸에 모셔 있는 한울님의 뜻을 부모님의 뜻처럼 잘 받들어 모신다는 뜻입니다.
동학의 수행은 세상일에서 벗어난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려는 것이 아니요,
또한 신이한 기적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일치시키도록 힘쓰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닦는 이는 얻음이 없는 것 같지만 알참이 있고,
들어서 아는 이는 알찬 것 같지만 얻음이 없는 빈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동학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학을 하는 도인들입니다.
우리 모두 천주를 잘 받들어 한울님이 직접 말씀하신
‘오심즉여심’을 천착하도록 힘씁시다.” (3권) 접기
P. 329원평에서는 남쪽 지도자들이 주도했는데 그 중심에는 봉준이 있었다.
봉준은 보은의 동정을 예의 주시했다.
원평에 모인 사람들은 도인보다 농민이 더 많았다.
도주의 지시를 받는 호남 도인들은 거의 보은집회에 참석했다.
원평에는 김덕명을 비롯해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 등이 이끄는 포를 중심으로 집회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보은집회보다 분위기가 좀 더 강경했다.
그들은 재단을 높게 만들어 풍물을 울리고 소리판을 벌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말깨나 하는 사람들이 단에 올라 조정과 수령의 부정을 늘어 놓았고
양반과 지주들의 횡포를 고발했다. 때로는 구호를 연창하기도 했다.
원평에서는 주문이나 경전 읽는 소리보다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아치를 질타하는 외침이 더 높았다.
그 외침에 무게를 실어줄 이론이 필요했다. (4권) 접기
P. 255김학진이 봉준을 감영으로 초청했다.
관민 상화책을 같이 상의하자는 의도였다.
봉준은 기다리던 일이라 기꺼이 응했다.
봉준은 삼베옷을 입고 큰 갓을 썼다.
감영군은 총과 칼로 무장하고 성 밖에서부터 좌우에 정렬해 봉준을 맞았다.
봉준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들어갔다.
봉준은 선화당에서 김학진과 마주앉아 여러 현안을 두고 의견을 나누었다.
마침내 군현 단위로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제 동학군은 면, 리를 넘어 읍 단위 고을의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군이 휩쓴 지역은 관의 권위가 실추되어 동학군의 협조 없이는 치안조차 유지할 수 없었다.
봉준은 고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집강소 내에 서기·성찰·집사·동몽의 직책을 두어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서정을 펼 수 있게 했다.
집강이란 본래 동학 조직체인 육임의 하나로 시비에 밝은 도인이 도내 기강을 바로잡던 직책이다. 전주의 대도소에서 각 집강소를 지휘해 집강들은 비교적 공정하고 과감하게 구폐를 혁신해 나갔다. 집강소에서는 십사 개조 폐정개혁안에 근거해 착실하게 개혁을 실천했다.
남도에서 이 땅의 백성이 주인이 되는 가슴 뛰는 새 역사가 쓰이고 있었다. (5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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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동련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문학석사.
경상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수료. 하곡인문도서관 관장.
경상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출강. 도서출판 후아유북스 대표.
후아유 문예창작아카데미 대표.
저서: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할 때』(밥북), 『천자문으로, 세상보기』(인간사랑) 등.

최근작 : <소설 동학 6>,<소설 동학 5>,<소설 동학 4>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역사에 패배란 없다, 다시 시작, 다시 개벽이다!

1부(1, 2권)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는 주로 수운을 이야기한다. 그간의 동학-수운을 다룬 소설에서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허구적 인물이나 에피소드가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그 서술이 역사 기록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표영삼의 "표영삼의 동학이야기"(모시는사람들) 이상으로 동학 창도기를 소설화한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표영삼은 끊임없이 객관적 동학역사 서술에 매진하였지만, 그것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나가는 데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고 본다.)

김동련의 <소설 동학>이 성취한 부분은 바로 동학 창도기의 수운의 고뇌, 그리고 그가 깨달은, 혹은 창도한 동학의 철학적, 사상적, 종교적(영성적) 깊이에 도달하였거나, 도달하는 경로를 열어 보여 주었다는 데 있다. 김동련은 수십 개의 징검돌처럼 놓인 수운의 역사(팩트) 사이를 동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삽화(揷話)들로 가득 흐르고 흐르고 흐르게 하여 동학 창도기의 깊고 풍부한 개벽의 강물을 펼쳐 보인다.

예컨대 수운 청년기의 장궁행상(藏弓行商)은 수운이 무과 시험에 응시하여 실기나 대책(對策) 모두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지만, 탐관오리의 농간으로 등제에 실패하고 마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고 서사시적으로 그려낸다. 이 장면은 마치 KBS 대하 사극 내지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또, 수운이 '행상(行商)'으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어가는 모습'도 역사적 상상력의 범위를 이탈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흥미진진하게 그려 보인다. 이는 <장길산>이나 <임꺽정>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수운이 한울님과 문답을 나누는 체험을 하고, 신유년(1861)에 포덕을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용담으로 밀려들어왔을 때의 온갖 행태들이 짧지만 강렬한 에피소드들로 모두 소화되고 있다. 이 장면 하나하나는 동학의 역사 기록(관변기록)의 내용들을 관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 자신의 관점 혹은 수운-동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그려 보인다.

2부(3, 4권) "세계라는 것은 무엇인가"는 수운 최제우가 대구장대에서 좌도난정률의 죄목으로 참형당한 이후부터 이필제의 영해교조신원운동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는 1893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동학의 역사에서도 파란만장하였으나, 조선사회 전체가 거대한 세계사에 편입되면서 끊임없이 망국으로의 길을 걸어가던 시기이다. 그 속에서 동학 민중은 민중대로, 그리고 임금과 신하들은 또 그들대로 모색과 협잡, 궁리와 좌절을 거듭해 간다.

동학 창도기에는 수운 자신이든 그 주변에 몰려들었던 '동학 민중'들이든 누구나 개벽 세상에 대한 희망, 사람이 한울되는 세상에 대한 전망을 안고 달려갔다면, 이 시기에는 좌절과 고난 속에서 희망을 씨 뿌리고 그것을 맨손, 맨몸으로 일궈 나가며, 희망의 이유를 조직하는 해월과 그 주변 동학 민중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작가는 이들 장면들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해월을 둘러싼 인물들과 끊임없이 동학을 침탈하는 조정 주변 인물들의 치열한 자기 존재 증명의 노력들을 대립해서 보여주는 것을 그려나간다. 단순한 선악 대결이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같은 어설픈 역사 그리기는 없다. 오직 소설적 언어로서 30년의 역사를 끈질기게 묘파해 나간다.

이러한 소설적(동학적) 전개 방식은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문장에 실려서 전달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빛을 발한다. 즉 간결하고 청신하고, 품격이 넘치면서도 강건한 문체는 독자들을 시종일관 동학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그 호흡을 함께하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문집, 또는 상소문 등을 그대로 인용한 것 같은 수많은 문장들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발화함으로써 관계 맺고 그리하여 사회와 역사를 이루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당대 인물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독자들을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3부(5, 6권)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는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세계사적 지평'에서의 조선 사회와, 그 사이를 헤쳐 나가는 동학의 모습을 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통해 그려나간다. 이 속에서 전봉준-손화중-김개남 같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역사 인물만이 아니라, 동학을 적대시하며 대립하거나, 동학 속으로 침투하거나 간에 다양한 인물군상들을 다양한 어조로 조명해 나간다. 그간의 동학 소설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동학의 정당성을 과장하고 지배세력과 외세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데 치우쳐서, 무선무악한 역사의 잣대(균형)를 상실하였다면, 이 소설은 끝내 그 관조와 냉철을 빼앗기지 않는 강인함을 유지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환상적인 대목 중의 하나는 '여동학' 장흥 '이소사'에 관한 부분이다. 이소사는 관변기록에도 등장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여성 지도자'이면서 신이한 행적을 통해 장흥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그 기록이 너무도 소략하여,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작가는 동학적 상상력을 통해 이소사에게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1970년 영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이필제의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에서부터 그 역사를 써 나왔다. 그것을 통해 역사 기록으로 남겨진 이소사의 신이한 행적에 그럴 듯한 개연성과 판타지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이런 방식으로 “소설 동학”은 동학의 드러난 역사 이면에 비장된 비결과 비기, 그리고 현기들에 대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6권"이나 되는 대하소설임에도, 동학에 대하여,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다 말해 버리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동학 속으로, 동학이 펼쳐지는 역사 속으로,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그리고 그 역사가 흐르는 우리의 국토 속으로 계속해서 파고들기를 요청하고 유인한다.

“소설 동학”의 또 하나의 미덕은 잊히고 묻힌 우리말을 풍부히 살려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임꺽정> <장길산> 등을 지나 <토지>나 <혼불> 등에서도 추구되었던 바이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독해력을 저감시킨다는 위험을 더 크게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어들을 되살려 씀으로써, 우리는 말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민중의 세계관과 삶을 더 폭넓게 교접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며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이 소설의 무기는 '동학적 상상력'을 극한도로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운의 동학 창도 과정에서의 천사문답과 같은 '종교적 신비체험'을 그 신비성과 합리성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고 '역사소설'적 감각 속에서 그려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동학의 교리나 교사(敎史)적 관점의 우수성(?)을 종교적 도그마에 굴복하지 않는 형태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냄으로써, 살아 있는 동학, 열린 동학, 우리 안의 동학을 살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을 채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학은 해월의 수제자인 손병희로 승계되면서 1905년 이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운동과 같은 역사의 전면에 다시금 나서게 된다. 이 소설은 거기까지를 다루고 있지 않으나, 그곳으로의 지평을 바라보고 있다. '바라볼 뿐' 어설픈 허구적 낙관이나, 드러난 역사에 매몰된 허접한 비관 어느 쪽에도 이 소설은 가담하지 않는다. 소설 내내 그래 왔듯이, 드러난 역사와 드러나지 않은 흐름 모두를 껴안고, 역사의 지평 너머로 달려갈 뿐이다. 그 지평 너머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시 돌이켜 동학의 실재를 다시 개벽함으로써, 오늘 우리 존재의 실상을 다시 개벽하는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역사의 질곡에 대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새 날을 열어갈 힘이 된다. 접기





Taechang Kim 김동련 소설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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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キムドンリョン大河小説 I
《小説東学 : 我というのは
何か? I》(図書出版モシヌンサラムドウル、一刷発行
2022年5月31日)

속독 불가 맛 읽기 필수 철학 - 종교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신이 느껴집니다. 무위당의 서화집과 함께 육리 정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김동령 씨의 소설과 무위당의 서화가 함께 되어 나 자신의 생명의 심층에 울림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왜 우리 세상에서 태어났는가? 하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의해 봉쇄된 처지 어떤 삶을 찾아야 하는가?

소년기-청년기의 채재우는 관학 출세에 대한 정도를 포기하고, 부득이하게, 행상인생을 통해 자신을 알고, 나라와 백성과 세계와 우주를 배우면서 학에서 깨어나 삶에 이르는 길을 계속 걸었다 입니다. 소설 동학 I의 I는 최재우의 인간형성 초기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速読不可 味読必須の哲学-
宗教小説という新たなジャンルの開新が感じられます。無為堂の書画集と一緒にユックリ精読し始めました。何故かキムドンリョン
氏の小説と無為堂の書画が
一緒になってわたくし自身の生命の深層に響振するものがあります。我とは何か?
生命とは何か? 宇宙とは何か? 何故我この世に生まれたのか? 何を為すべきか? 何処で誰と会って何を学べばよいのか? 官学出世への正道が
理不尽な状況によって封じ込められた境遇どういう生き方を探ればよいのか?等々
少年チェジェウは迷い苦しみながら考え続けるのです。

少年期-青年期のチェジェウ
は官学出世への正道を放棄し、やむを得ず、行商人生
を通して自分を知り、国と
民と世界と宇宙を学びながら学から覚を経て生に至る
道を歩み続けたのです。小説東学 IのI は チェジェウの
人間形成の初期化の過程を
生々しく描いています。

Taechang Kim 先ず遠藤周作著《私のイエス》(祥伝社黄金文庫、1988年)からの引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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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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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先ず遠藤周作著《私のイエス》(祥伝社黄金文庫、1988年)からの引用
が印象的
であります。
"少年時代に洗礼を受けさせられたことは受けさせられましたが、私の気持ちのの中ではいつも、これは私には肌の合わぬ宗教だ、という感情が含まれていました。これを、たとえば洋服を例にとって話しますと、私は母親から出来合いの洋服を無理やりに着させられたようなものです。(中略)
ごく普通の平均的日本人である私の肉体には、母親がくれたキリスト教という洋服は、あるところは丈が長く、あるところはズボンが短く、自分の体には、ぴったりと合いませんでした。西洋の洋服と日本人の私との間には、いつも隙間があったり、ダブダブだったりして、たえずその違和感に苦しみました"。(p. 10)
他にも優れたキリスト教関連の傑作ー例えば《沈黙》のようなわたくし自身が大好きな名作ーがありますが、遠藤周作にとってキリスト教とは<洋服>であり、自分に母親から与えられた精神あるいは霊魂の衣だったのです。しかし自分には
似合わない馴染み難いものであったというのです。そしてある人びとは "キリスト教の日本化" を声高く唱える
けれど著者若松英輔はむしろ "キリスト教の血肉化" こそが大事であると強調しています。(p. 21)

そしてもう一点。改めて共感したこと。

1893年アメリカのシカゴで
開催された '世界宗教者会議'
で当時アメリカでは全く無名だったヴィヴェーカーナンダが、たったの三分半の
講演で宗教世界に甚大な影響を及ぼしたと言うのです。ヴィヴェーカーナンダの言ったこと。
"世にあるさまざまな宗教という '河' は一つの '海' に流れ込むように存在している。宗教は互いを否定し合うために存在しているのではなく、分かり合い、深め合うために存在している"。
(P. 12) 参加者やその後その話を聞いた人びとは、互
いに相異なるものが向き合う時、そこに生まれるのは対立ではなく、創造的融和であることに目覚めたとも言っています。





Philo Kalia

예수의 생애, 침묵 이후에 읽은 세번째 책입니다.




Reply
43 w


Taechang Kim

Philo Kalia 심광섭선생님, 저
자신은 오래전에 동경대학과
쿄토대학에서 한국기독교와 일본기독교의 비교를 말한적이
있었는데 김은국씨의 《순교자》와 엔도 슈사크의
《침묵》을 기본텍스트로 사전에 읽어 오도록하고 대화적 수업을 했던 경험이 있
습니다. 그 때의 저의 의견제시
의 하나는 일본기독교는 톨스토이적이고 한국기독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는 특색비교였습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해서. 그 당시 대
학가에서는 톨스토이와 도스토
예프스키붐이 한껏 높아졌을때
였던 것도 감안한 문제제기였
습니다.





Philo Kalia

Taechang Kim 일본은 도덕적이고 한국은 좀더 미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Taechang Kim

Philo Kalia 일본인한국전문가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현역한국문제전문가중에서는
단연 최고로 알려져 있는 쿄토대학 오구라교수는 한국인
은 도덕적 성향이 강하고 일본
인은 준법적 성향이 강해서
한국인의 미감각은 도덕적 윤리적 미감각(善美)이고 그 것은 한중공히 유교적 전통미
와 연결되어 있는데 비해서
일본인의 미감각은 실정법에 위배되지않는 범위내에서 실
용적이고 생활감각적인 미의식
이 현저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정해진 법테두리에서 벗어나면
공동체가 성립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기본규범을 준수하는데
서 아름다움이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겁니다.




Yasuhiro Takeda

宗教は、内的なものとして静かにしていてほしい。公共世界に出てくるのは違反です。と思います。宗教ではなく、思想を鍛えよう!
Kimさん、そう思いませんか。

2023/04/10

** [Spirituality 영성] 달라이 라마의 독특한 <영성>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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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ty 영성] 달라이 라마의 독특한 <영성> 개념
- 종교와도 신과도 관계없고, 자기를 바꾸는 것.
- 어떤 방향으로?

—-
달라이 라마 글

실제로 나는 종교와 영성 사이에 중요한 구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하나의 신앙 전통 또는 다른 신앙 전통의 구원에 대한 주장에 대한 신앙과 관련이 있으며, 그 측면은 어떤 형태의 형이상학적 또는 천국이나 열반에 대한 생각을 포함하는 초자연적 현실 이것과 관련된 종교적 가르침이나 교리, 의식, 기도 등이 있습니다.
사랑과 연민, 인내, 관용, 용서, 만족, 책임감, 조화감-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의식과 기도는 열반과 구원에 대한 질문과 함께 종교적 믿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러한 내적 특성은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신념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고도로 발달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때때로 종교는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기본적인 영적 특성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합시다. 종교적 믿음은 영적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종교적 신자나 비신자 사이에 종종 많은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영적"이라고 묘사한 자질의 통일된 특성은 <타인의 안녕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어로 shen pen kyi sem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언급된 각각의 자질이 타인의 안녕에 대한 암묵적인 관심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동정심, 사랑, 인내, 관용, 용서 등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칠 잠재적인 영향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지시합니다. 
따라서 이 설명에 따른 영적 수행은 
  • 한편으로는 타인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포함하고, 
  •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더 쉽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수반합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용어로 영적 수행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혁명에 대한 나의 요구는 종교 혁명에 대한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세상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언급도 아니며, 
여전히 마법적이거나 신비한 어떤 것에 대한 언급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습관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요청>입니다.













Taechang Kim
예. 요즘 일본에서도 영성담론이 왕성한데 종교와 연계된 영성과는 별도로 문화적 사회적
영성론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Sejin Pak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그 예로 책이름을 두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aechang Kim
외국책 번역한 것 아니고 또 저 자신이 잘 아는 저자 혹은 편자의 책 두권만
가려서 올려 드리겠습니다.
1. 樫尾直樹著
スピチユアリテイ革命: 現代霊性文化と開かれた 宗教の可能性
2。鎌田東二編
スピリチュアリテイと医療-健康
저 자신이 직접 참여한 경우의 하나만 예시


2023/04/06

이찬수 한국 기독교회는 반공주의가 곧 신앙이던 시절이 있었다.

(2) Facebook

이찬수

#평화와_신학_포럼 단행본에 들어갈 원고 한편 마무리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회는 반공주의가 곧 신앙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흐름이 있으니 갑갑하다....)

반공주의를 내세워 베트남전 참전을 찬양하고, 한국군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했으며, 한국인의 죽음이 아닌 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공감은커녕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적'은 그냥 사물이었다. 그냥 죽여도 되는...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정작 전쟁에서는 졌다.
그래놓고는 진지하게 반성해본 적도 없다.
 
반공의 '반'이 뭔지, 신앙이 뭔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해본 적이 없으니 여전히 그 타령이다.
 
예나 이제나 자기집단중심적이고, 타자는 도외시하거나 적처럼 간주하곤 한다.
언제 그 수준을 벗어나려나...ㅠ

'반'의 논리를 '용'의 논리로 전환시켜가는 일이 평화운동이다.
예수의 말대로 "평화를 만드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 반대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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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comments


吴东日

귀한 자료 받아 볼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찬수

吴东日 별로 귀하지 않은 자료라 드리기도 민망합니다만, 메신저로 보냈습니다~

吴东日

이찬수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


김새빛

교수님 책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니시타니 케이치의 사상을 정말 알기 쉽게 설명해 놓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토학파의 철학을 더 깊게 공부하려고 불교의 공사상도 다시 공부하고 있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날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찬수

김새빛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를 읽으셨나요? 
알기 쉽다니,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역량이 책의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일듯요...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의 니시다와 타나베 부분도 읽어봐주세요. 
기독교와의 연게성을 좀 더 정리한 글이라서요.. 
<메이지의 그늘>의 6장을 보면 교토학파의 정치철학적 한계도 일부나마 느끼실 수 있을 것 같구요. 교토학파를 공부하신다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김새빛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좋은 책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덕분에 기독교의 복음이 한층 더 잘 설명되는 듯해서 너무 좋습니다. 다른책도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Taechang Kim

반공 반일 반미 반중 숱한
<반(反)>으로엮어진 우리의
사상-철학-종교를 <포월包越>
쪽으로 역동변혁하는 일에서
알찬 평화실현사상-철학-종교
의 산출을 기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폭공감합니다.


이찬수

Taechang Kim 평화 이론까지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교정볼 때 라도 포월론으로 보완해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Taechang Kim

이찬수 좋은 책 만드셔서 한중일평화포럼같은 대화모임을 가동시켜 보자구요. 이찬수교수님의 저작 속에 파묻혀 있는 지적 보화를 대화를 통해서 공공지로 전환해 공감 공유의 폭을 넓히고 공통이해의 심도를 더 깊이할 수 있게 했으면 하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Myung-kwon Lee


훌륭한 또 하나의 일을 마무리 하셨군요.
걸음이 눈부시네요 ㅎㅎ



이찬수

이명권 '평화와 신학 포럼'이라는, 아주 좋은 연구자들모임에서 만드는 책입니다. 저는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졸고 한편 낸 거구요
^^

===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이찬수 (지은이)
다산글방2003-12-10

263쪽

제1부 서양을 동양으로 포섭하다 : 쿄토학파
제2부 허무의 극단까지 가다 : 니시타니 케이지의 주요 사유를
제3부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일본)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다르지만 조화한다』,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아시아평화공동체』(편저),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저),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공저), 『北東アジア·市民社会·キリスト教から観た平和』(공저), 「비전(非戰), 반군국주의, 비핵화로서의 평화: 일본 평화개념사의 핵심」, 「平和はどのように成り立つのか」, 「北朝鮮の民間信仰」 등 80여 권의 단행본(공저서, 번역서 포함)과 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현재 인권평화연구원 공동원장으로 일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메이지의 그늘>,<보훈과 교육>,<보훈, 평화로의 길> … 총 60종 (모두보기)



2022/12/25

Philo Kalia ‘仁義’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고, 본성이란 하늘이 내린 명이라면(天命之謂性)

 Taechang Kim | Facebook

Philo Kalia is with Taechang Kim.

  · 
[대화]
원로 철학자이신 김태창(Taechang Kim) 선생님과 페북에서 뵙고 포스팅과 미학적인 글에 큰 사랑과 지지도 받고 더 넓은 생각의 지평을 얻을 수 있는 코멘트를 달아주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최근 포스팅에도 코멘트를 해주셨고 서너 번 대화가 오간 것을 기록해두고 싶어 차례로 모았다.


‘仁義’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고, 본성이란 하늘이 내린 명이라면(天命之謂性),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는 야훼 하나님의 의나 맹자를 통해 告한 하늘이 명한 인간의 본성(인의)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이리라.


Taechang Kim
相通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호이해는
중요하지만 서로의 고유가치를 동일의 사유로 묶어버리면 서로 다른 것의 아우러짐을 통한 새엶의 지평을 닫아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심광섭
Taechang Kim 相通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숙고해보니 통하는 점들이 있어 공감, 공명, 교류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상이한 것들이 상보함으로써 풍부해진다는 것이고, 고유 가치는 다른 개념(표현)으로 언표되는 한 훼손되거나 일방적으로 통일될 수 없음이지만, 여기서 내용이란 사람이라면 상황과 방도는 달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이치(天理)에서 나온 情의 用이란 점에서 같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合理合情이고 順理順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Taechang Kim
Philo Kalia 그래도 기독교의 義와 유교의 義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기독교와 유교의 共存相尊을 의미있게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르다고 생각해 왔는데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은 동시에 거의 같다고 느껴진 것이 다 깊은 곳에서 다르고 그러면서도 함께 있음으로써 이제까지 몰랐던 새 지평열기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심광섭
Taechang Kim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중용의 '중용'은 정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義와 유교의 義사이에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는 깊은 곳에서 다른 존재론적 차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차이"라는 지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적인 혹은 생활세계적인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대의명분이 있는 어떤 절박한 문제의식이나 역사적 과제 앞에서 근본을 생각하면 동학의 가르침인 吾心卽汝心의 계기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계기(실존적 순간)는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다윗에게서(삼상 13:14)도 나타난 것이 아닐런지요. 그렇지만 인심은 늘 인욕이 되기 쉽고 위태하니 誠敬의 태도가 필수이듯이, 역사적, 제도적, 교리적, 전례적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존중심은 모든 종교에 상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근원 체험(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개신의 역사)에 근거하여 상고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aechang Kim
Philo Kalia 예. 대화가 되어서 기쁩니다. 선생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지나 저의 미흡한 생각입니다만, 역사적 상황적 접근은 가능하지만 다름아닌 존재론적 차이가 기독교와 유교사이에 엄존한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인간존재의 근원(본성)은 죄지은 존재(=근본악)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인정받아야 할('義認')존재론적 실상을 전제로 해서 구제론적 복음의 실존관련적 뜻매김 자리매김이 뚜렷해지지만, 정통유교의 인간본성론의 핵심은 본질적 선성(善性)에 전제로하기 때문에 초월적 타자에 의한 의롭다함을 필요로 하지 않고 거기서 義의 대의명분을 빙자한 独善-独断-独裁에 의한 전체주의적 지배구조의 정당화 근거가 되기도 했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내면에 깊이 잠재한 근본악에의 편향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없는 仁義만으로는 뿌리깊은 偽仁偽義의 창궐에 대 개신적 대응이 곤난하다는 것이 저 자신의 체감 체험 체듣한 바 입니다. 유교에서 배울만한 점이 많지만 인간 본성론만으로는 근본악의 문제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없었고 황제의 선의지와 사대부의 선인식이 부합되면 선한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낙관론이 황제의 흑심과 사대부들의 욕심때문에 왜곡되고 변질되는 역사와 상황을 뿌리 바탕으로부터 바꿀 수 있는 초월적 타력의 개입을 처음부터 차단해 놓은 데서 오는 한계요 모순이라 생각됩니다. 구태어 제도적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초월적 타자의 눈과 귀와 입이 있어서 인간의 오만과 자기의인(=스스로 의롭다함)이 근원적 악에로의 편향을 제어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행태를 목격해온 저로서는 유교적 인간본성론과 기독교적 인간본성론과 부분적으로 겹치고 상통하는 점이 적지 않게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선생님 생각으로 존중하고 배우려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대화은 계속하고 십습니다.

심광섭
Taechang Kim 선생님의 고견을 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의문이 생겨 대화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1)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유학(유교)의 차이가 존재론적 다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역사적 과정과 지리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되어 2~3천 년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것인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저는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물론 신학자 존 캅은 <존재구조의 비교연구>라는 책에서 세계 종교의 차이를 존재구조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
(2)기독교의 인간 본성론이 원죄라는 근본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성악설과 가깝다는 것이 전통적 이론이고 중론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해에 기초한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완전폐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또한 유학의 인간본성론도 성리학에서 人心道心說로 세미하게 전개된 것도 있고, 논어의 처음 장들에서 외적인 巧言令色을 금하고 내적인 성찰(一日三省吾身)을 다각도로 강조하고 있으며, 敬과 誠, 愼獨 등의 사상은 偽仁偽義가 생길 위험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학의 인간본성론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사상이 감언행(感言行)의 일치를 통해 체감, 체득되어야 한다면 초월적 타자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타율적 인간 도덕을 벗어나 궁극적으로 자발적, 자율적, 주체적 인간의 도덕 형성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목적에 잘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평소 강조하시던 “脫在”신학과 어떤 연관성 있을까, 順연관성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정의’, 유학의 기초 사상인 ‘仁義’는 존재론적 차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생성과정에서 형성된 차이라고 생각하며, 역사적 차이라는 관점에 설 때 오늘날 지구적 소통과 사유가 일어나는 시공간에서 동서양 사상이 잘 만나 공명하고 지구적 난제들을 극복하고 인간성을 심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면서 동양사상을 이웃으로 벗삼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제 인격과 우리 문화 안에 동서양의 사상과 문명이 혼합되어 새로운 실재를 형성해가는 도중(途中)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
+Giovanni di Paolo ,Dante and Beatrice before the Light, 1450.
33 comments

Reply22 w
유용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대학 때 동양종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추구하고, 경전들을 열독한 사람으로 과연 '차이' 혹은 '특징'을 심도깊게 연구했었습니다. 완전한 결론에는 못 이르렀지만, 제 생각으로는 장로교를 위시한 개혁교회의 신앙원리에 '완전타락'과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 파괴'가 있어서 인간이 자의적으로 신을 알 수도 없고, 신의 계시를 수용할 수도 없으며, 거룩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리와 신조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감리교의 해석이나 수용이 다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감리교는 완전한 타락, 파괴에 동의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든지 동양사상과의 접촉점이 가능해 질 수 있지요.
Reply22 w
Philo Kalia
유용현 네, 논점을 콕 집어 주셨습니다. 원죄와 악에 기초한 전통적 기독교의 인간이해가 종교와 철학을 포함한 제학문에서 탐구 되는 인간이해와 잘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ply22 w
윤세형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논쟁을 보는 듯 합니다.
Reply22 w
Philo Kalia
윤세형 격조 높게 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Reply22 w

Taechang Kim
정말 함께 서로 절차탁마하는
대화과정이 열리는 것같아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제 90을
바로 앞에 든 삶자리에서 남들
이 어떻게 말했다가 아니라 저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익
히고 깨닫고 삶속에 녹여 뼈와
창자에 새겨온 생각을 말씀드
리는 것이며, 저는 가르치는데
는 더디고 배우는데는 서두르
는 常学人(学者나教師가아님)
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배우려
는 의도에서 현재까지의 체감
체험 체득의 일단을 말씀올림
을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
랍니다. 저는 할아버지에게서
중국고전을 배웠고 그기초위에
서 중국사상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미국과 유럽에서 서양
사상을 공부하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몇몇 다른 나라에서 서
양과 동양의 사상 철학 문화 종
교들사이의 대화가능성에 촛
점을 둔 철학대화를 30년 넘게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중국대륙을 10년동안 동서남북에 있는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아다니면서 자유롭고 활발한 대화를 전개
해서 많은 현장검증도 쌓았습니다. 서양에서의 체험
학습과 중국에서의 체험학습,
그리고 일본과 한국사이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에 있는
분들과 나누고 있는 대화를 통
해서 몸으로 느끼고 맘으로 가다듬고 얼로 삶에 살린다는
자세와 방법으로 쌓아 온 깨달
음의 현단계의 한쪼각에 불과
합니다. 서론이 길어 졌습니다.
1. 한마디로 유교라고 말할 때
공맹유교의 성선설과 순자-한비자등의 성악설이 대립해 있고 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
는 공맹유교를 유교의 대표성
을 유지해 왔고 심교수님이 거
론하신 유교관련 언급이 그 쪽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는 것
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기독교
쪽도 소위 정통기독교라 칭해져왔던 입장과 관점에다
촛점을 맞춘 논의를 전개하려
했습니다. 평소에 존재신학적
인 말씀이 많으셨기 때문에
그쪽에서 논의하자면 정통기독
교와 정통유교사이에는 인간존
재의 파악과 인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양쪽이 우리의 사
고발전에 좋은 시사를 던져주는 기본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로 피차
간의 역사적 상황적 변화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기독교와 유교의 양쪽에서 정통과 다른 새로운 생각이
생성 정리 정립됨에 따라 성선
과 성악의 두 기틀이 겹치고
포개져서 기독교도 유교도 비슷한 인수분해과정을 걲게
되어 상호간의 대화가능성의
폭이 넓어젔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역사적 상황적 변화에
따른 인식-실천의 파라다임이
상호접근했다는 것이지 본래
의 차이가 없어진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기독교는 그 뿌리
바탕이 인간개개인의 영혼구제
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계시
하는 복음인데 비해서 유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지향하
는 통치철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계구조가 다르고 인간존재
의 파악이 다르고 핵심주체가
다릅니다. 서양과 동야의 접근
만을 주안점으로 한다면 희랍
인문주의와 유교인본주의를
비교연구하는 쪽이 훨씬 공통
점을 많이,그리고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적 변화에 따른 상호접근성이라는 각도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살펴
본다는 것은 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
에 개활적인 언급으로 끝내거나 한두가지 사례로 해
결하기에는 신중한 심사숙고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입
니다. 서로 다르면서 함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일이 다 같다고 해서 끝내는 것보다
다이나믹한 사고력-상상력-
구상력을 기르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Reply22 w
Philo Kalia
Taechang Kim 선생님의 노숙한 사유와 너른 지평을 가늠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새기며 두고두고 제 공부의 과정에서 성찰하겠습니다.
Reply22 w
손미옥
Taechang Kim 선생님,멋지고부럽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학문의 경험과 체득을 쌓을 수있는 귀한 축복을 받으신 분^^
Reply22 w
Taechang Kim
손미옥 아닙니다. 너무 아둔해
서 남이 금방 깨닫는 것도 남
보다 몇배 힘들여야 깨닫게 되
기 때문에 노력하고 또 노력한
것뿐입니다. 공자께서 태어나
면서 아는 것이 으뜸이고 배워
서 아는 것이 중이며 힘들여 아
는 것은 하라고 하면서 힘들여
애를 써도 배우지도 알지도 못
하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한 듯
한 말씀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은 공자가 포기한 그 그
룹에 속한 스스로를 알아차려
서 남보다 더 힘들여 애썼습니
다. 그러니까 배울 수 있는 기
회를 찾아 다녔습니다. 아직도
남을 가르치기 보다는 제가 배
워야할 것이 많으니까. 심광섭
선생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
와 거기 계신 분들을 만나 배우
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지 노년의 값진 学-思-行을 함
께 갈고 닦을 수 있는 哲友들의
모임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Reply22 w
손미옥
Taechang Kim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 말이 실감나네요^^
저는 공부해나가는 것이 실력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배움을 즐기심은 벌써 학문의 樂 으뜸이지 않으신가요?
두분 선생님의 깊은 학문의 세계와 겸허함에 늘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Reply22 w
Taechang Kim
손미옥 예.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Reply22 w
송명호
Taechang Kim 장자에 묻지도 않았는데 끼어든다는 불사이응이란 말이 있어서 용기를 냅니다.
저는 공맹 유교라는 용어가 틀렸다고 봅니다. 공자의 유교는 동서양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르며, 공자와 맹자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맹자와 순자의 유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겅조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생각합나다.
인성 논쟁도 맹자와 공자는 다르며, 인의도 공자와 맹자는 다릅니다 공자는 인을 올바른 것을 찾아가는 과정과 이를 실천하려고 살산성인 목숨을 바침이 두었는데 맹자는 측은지심이라는 천리나 먼 것에서 찾았습니다. 안중근이 아등박문을 죽이는 것은 인의입니다. 그런데 측은지심하면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도 사양지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의 예를 새소한 매너 수준을 파악악한 것입니다. 공자의 예는 천하를 바꾸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사양지심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는 김일성 좋아하는 좌익에게 아무 말도 않습니다. 예는 사양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Reply59 m


김영훈
아주 좋네요, 두 분의 생각의 차이가 충분히 논쟁거리가 되고 또한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네요.
두 분께 감사할 따름!
Reply22 w
Philo Kalia
김영훈 읽어 주시니 천망관중의 박수소리를 듣는듯 합니다. 🤣
Reply22 w
Troy Clapton Choi
교수님께 과외받고싶습니다 ㅎㅎ
Reply22 w
Philo Kalia
Troy Clapton Choi 영광입니다. ㅎㅎ
Reply22 w
손미옥
가장 본성은 죄없으신 순수? 하나님의 영을 받아 사람이 생령이 되었을 땐, 하나님께서 하나님만큼 존중하여 주신 자유의지가 존재했을 땐 아예 선악이 없는 에덴은 인간의 존재적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요?
인간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된 때부터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고 선악이 나뉘는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동인형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인간과의 참 대화와 소통하는 관계를 원하셨던 것이니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레벨만큼이나 우리를 존중해 주시고 높여주심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원죄 이전에는 성악설이 성립되지 않는단 생각을 해봅니다.
원죄 이후 인간은 전적인 타락으로 성악설에 해당하고 저는 태창선생님의 입장이 더 와닿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연이구요.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知)는 피조물인 인간의 인성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성선설의 仁은 인간이 잉태되었을 때는, 태고의 에덴동산의 원죄 이전 상태, 최초의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을 때의 선악 이전의 순수한 상태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인간에게 탯줄을 끊은 이후 배꼽이 남듯 그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말의 양심?으로 선의 흔적이 남아있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지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공자의 성선설보다 맹자의 성악설이 더 매력있게 다가오더이다.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라, 선을 추구하며 현실적으로 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세상에 악을 없애고 실질적인 선을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입니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일전에 중독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전문가들이 말하길, 중독자가 치료의 가망성이 보이는 때가 역설적이게도 본인의 힘으로 절대 고칠 수 없다는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본인은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고백할 때 구원의 가능성이 시작되듯이 말입니다.
깊고 높고 넓은 학문적 경지에서 나누시는 대화에 저는 학자로서가 아닌 구냥 상식을 가진 일반 성도로서 제 의견을 개진한 것이오니 그릇된 견해가 있으시면 바로잡아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Reply22 wEdited
Philo Kalia
손미옥 (1)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인간이 계속 악만 저지르고 산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절망하실까요? 성악설, 성선설을 논의하자는 게 아닙니다. 해답이 없는 난제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선한 본성을 믿을 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惡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믿음이지요 (2)유학은 인간의 원래의 성품에 인의예지의 본성이 있다고 봅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경악하면서 구출하려고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런 본성이 없는 것인가요? (3)맹자 성선설이고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맹자의 성선이든 순자의 성악이든 인간의 원래 선한 본성을 회복하자는 사상입니다. 성선을 강조하면 덕성을 강조하게 되고 성악을 강조하게 되면 외왕(外王)의 방향으로 나갑니다. 內聖外王 (4)중독은 심각한 질병입니다. 타자의 도움이 있어야 중독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벗어나서 주체로서 의존과 노예적 타율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치유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중독에서 벗어나서도 타자에 계속 의존해서 살아간다면 이것 또한 온전한 해결책이 아닐 것입니다. (5)기독교의 원죄나 전적 타락이 인간의 본성을 짓누르고 억압하며 어둠 속에 가둬두고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인간론이 아니길 바랍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의 현재와 미래는 구원받고 해방된 인간으로서 기쁨과 감사의 삶, 정의와 평화를 지어나가는 인간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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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Philo Kalia 일본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을 인정 존중하면
서,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가장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될 수 있
는 화두로 도겐(道元1200-12
53 일본 曹洞宗의 개조)의 자력도와 신란(親鸞1173-1262 일본 浄土真宗의
개조)의 타력도를 둘러 싸고
오래고 신중한 논재이 이어지
고 있으며 전문가에 따라서는
정통유교는 도겐의 자력도에
가깝고 기독교는 신란의 타력도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참고가 될거라는 이야기를 합
니다. 한편 유교를 연구해온 사
람과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
은 주자학과 카토릭, 양명학과
개신교를 각각 연결시키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조직체
계와 계율과 행사에의 참여를
중시하는 카토릭은 다분히 주
자학적인 경향으로 이해하고
인간개개인의 근원적 선성과
그것의 발현(치양지)를 기본으
로 삼는 양명학의 특징으로 보고 개신교(특히 무교회주의
의 개신교)의 개인주체성을
강조하고 조직이라는 타자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개개
인의 주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설정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어데까지나 불교
또는 유교의 입장과 관점에서
기독교를 앞에 놓고 대화가능
성을 모색하면서 함께 새로운
인식지평을 열어 보려는 노력
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저 자신
은 한국의 여러분과 함께 기독
교의 입장과 관점을 공유한다
는 전제에서 불교와 유교와의
대화가능성을 모색하고 함께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차원열
기를 시도하는데 중점을 둔다
는 것입니다. 어데까지나 각자
의 고유성과 가치성을 인정 존중하면서 함께 대화를 통해
서 새 차원 열기를 기도하려
면 우선 서로의 근원적인 차이
에 대한 철저한 인식 각성 자각
이 있고 거기서 함께 개신할 수
있는 차원 지평 경지를 열어 나
간다는 신중하고 인내있는 자
세와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
니다. 영합이나 흡수가 아닌
상호이해요 相反相成을 통한
共進化를 공통목표로 한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체험지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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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옥
심광섭 에공 맞자요.
순자가 성악설이었지요.
1. 성선설, 성악설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떠오른는 저의 소견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을 뿐 저도 성선설 성악설을 논의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저희가 악한 행동을 할 때,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슬피 우시지요. 존재론적 죄성-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하심-을 말하는 것이지 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지적인 노력과 선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데서 출발하기에 교만이나 아상이 있을 틈이 없다는게 제가 특히 기독교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믿음도 선물인 것도 자랑치 못하게하려고 주신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로 이루심요
2.믿지않는 사람에게도 양심이란 존재하므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 존재는 점점 악해져 사이코패스의 인성,묻지마 살인 등도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3.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전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를 믿은 후 거듭남의 과정요.
4.중독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 구원이 시작됨같이스스로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고 문제가 있음을 부정하지않고 수용,인정할 때 어떤 치료든 출발이 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친절햐고 다감하신 답변 감사드려요~♡
Reply21 wEdited
Philo Kalia
Taechang Kim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에 공감, 동의합니다. 모든 만남과 대화의 시도와 결실은 차이를 전제로 한 것임은 당연한 전제이겠지요. 차이가 없다면 대화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차이가 존재론적인 것인지,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형성된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대화를 넘어 실천을 목표로 할 때 그 목표가 같지 않으면 공동 실천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사료됩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각각의 사상, 교리, 예전, 법, 관습 등을 무시하고 영합, 흡수하려는 식민주의적 발상의 시도는 대화가 아니라 폭력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교간 대화와는 별도로 자신의 정신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제종교사상의 이해와 통합은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유학과 도불을 공부하는 것은 그들 종교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 보다 한국인으서 저 자신의 정신적 역량과 지평을 확장학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儒佛道基가 활연관통되고 원융회통되어 일심에 이를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이 있음을 말씀드리면서, 선생님의 지혜를 구하고자합니다.
Reply21 w
Taechang Kim
Philo Kalia 예. 저는 저 자신
의 문제보다는 한일관계의 악
화가 심신혼을 아프게 하기 때
문에 그 아픔을 함께 하는 분들
과 힘을 합쳐서 생명개신의 새
경지를 열어가는데 전력투구하
는 입장이라 자기정체성확립과
자타관계정상화를 가능한 변행
개신하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서양사상만이 아니라 중국사상
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
의 사고와 판단과 행위를 틀지
어 왔는가를 냉정하게 살펴보
고 있습니다. 저 자신은 중국고
전에의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자
사용도 중국식 표현을 인용 차
용 원용하는 것으로는 중국화
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서요. 중국에 가서 10년동안
중국인들과 치열한 대화를 해
보고 우리가 쓰는 한자표현이
결국 자기네의 모방 응용 적용
에 불과하다는 폄하적언급에
대항하기 위해서 한겨레의 감
성과 역사적 체험이 녹아 들어
있는 한자활용을 창안함으로
써 비로서 걸맞는 인정과 대화
가 가능했던 경험을 여러번 했
습니다. 영어도 서양 사람들이
미쳐 생각지 못했던 우리 생각
을 담은 신조어를 통해서 고유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이해 납득시킬 수 있다는 경험
의 축적이 있습니다. 한자가
가진 동아시아사상-철학-문화-
예술-종교에서 갖는 소통창달
력을 중국모방적이 아닌 한민
주체적으로 선용-활용-창용하
는 효과는 큽니다.
Reply21 w
Philo Kalia
Taechang Kim 동북아 및 유럽의 맥락에서 한국 사상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찾아 궁리하시는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과 부단한 노력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대학생 시절부터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을 통해, 선생님과 같은 안목과 관점을 익혀왔으며, 때문에 지금 intra- + inter religious Dialogue에 손원영 교수와 함께 진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불도가 중국 및 인도에서 유입된 사상이지만 한국에 와서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중국과 일본과는 다르게 뿌리내리고 성장했는지에 대한 연구,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맥락과 함께 하는 기독교 신학 연구는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양 모방, 중국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사상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위한 연구들이 그간 다행스럽게 많이 나와 있고, 이 성과 위에서 고무되어 계속 공부할 수 있고, 미학적 관점을 더하기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입니다.
Reply21 wEdite


송명호
Taechang Kim 장자에 묻지도 않았는데 끼어든다는 불사이응이란 말이 있어서 용기를 냅니다.
저는 공맹 유교라는 용어가 틀렸다고 봅니다. 공자의 유교는 동서양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르며, 공자와 맹자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맹자와 순자의 유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성 논쟁도 맹자와 공자는 다르며, 인의도 공자와 맹자는 다릅니다 공자는 인을 올바른 것을 찾아가는 과정과 이를 실천하려고 살신성인 목숨을 바침에 두었는데 맹자는 측은지심이라는 엉뚱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안중근이 아등박문을 죽이는 것은 인의입니다. 그런데 측은지심하면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도 사양지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의 예를 사소한 매너 수준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공자의 예는 천하를 바꾸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사양지심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는 김일성 좋아하는 좌익에게 아무 말도 않습니다. 예는 사양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Reply53 m
송명호
저의 인터넷이 고장이라 모바일로 쓰다 보니 오타가 많아서 고쳐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위의 잘못된 글도 지우지 못해서입니다
Reply51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