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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7

Namgok Lee 논어 첫 장에 대한 단상 하나 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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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논어 첫 장에 대한 단상 하나 더하기.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해석은 생략한다.

세 문장의 마음들이 비교된다.

열(說;기쁨), 낙(樂;즐거움), 불온(不慍;노여워하지 않음).
 세 번째 문장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노여움(화)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번역되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바꿔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로 읽을 수 있다.
인(人)은 특정한 개인일 수도 있지만, 공자의 경우는 다수의 사람들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앞의 두 문장은 기쁨說과 즐거움樂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여기서는 불온(不慍)으로 표현한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다를 때 그것을 즐기는 정도로 바라보는 달관(達觀)은 아니지만, 마음에 평정을 잃지 않는 상태를 군자(君子)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공자의 군자(君子)에 대해서 가장 오해가 깊다.
첫째는 군자와 소인을 대립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인데, 공자 스스로는 인간의 진화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고, 스스로도 군자라는 인간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고 있다.
둘째는 군자(君子)는 한자의 뜻이 의미하는 것처럼 신분계급제 사회에서 군주(君主)의 아들 즉, 귀족이나 관료 등 지배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공자는 이 말의 내용을 혁명적으로 그러나 조용하게 바꿨다.
즉 신분의 귀천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성숙이 군자의 조건이라고 바꿈으로서 신분계급을 넘어서는 사상적(제도까지는 바꾸는 것은 엄두를 못냈지만) 지평을 열었다.
군자를 현대에 불러내 ‘끊임없이 진리(眞理)와 의(義)를 추구하는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읽는다면 이 세 번째 문장이 새삼 다가오는 바가 있다.
세상에 대한 지극한 관심, 스스로는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자기의 관념일 뿐이라는 자각이 있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무지(無知)의 자각’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의 생각, 때로는 다수의 생각이 자기와 달라도, 초연하게 즐기는 달관은 아니지만(오히려 이런 달관은 공자의 태도가 아니다. 논어 여기 저기 은자(隱者)들의 공자에 대한 비아냥에 대한 공자의 언급이 나온다), 평정을 잃지 않는 내면 깊숙한 여유로움이 이 불온(不慍)이라는 말 속에 느껴진다.
요즘 여러모로 다가오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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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구정회
화, 나게 해도
화, 내기 없기.
 · Reply · 4 d
崔明淑
인간의 일생은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며 무지를 알기에 겸허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일종의 수행자와 같은 삶이 인간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것을 또 사람은 원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선생님이 말씀하신 본능으로요.
 · Reply · 4 d
최영훈
 · Reply · 3 d
이병철
사실 논어 첫 문장에 즐거움과 기쁨을 이야기 하다가 왜 뜬듬없다 싶게 군자의 불온을 이야기를 했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는데, 나는 거기서 공자의 아픔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화이부동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싶습니다.
 · Reply · 3 d

2021/12/05

Namgok Lee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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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박 석 교수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를 읽어 왔다.
이제 9장 건축, 10장 발산의 서양문화, 수렴의 동양문화를 남겨두고, 다른 책을 보려고 한다.
한 책만 오래 보다보니 약간은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하나를 끝내야 다른 것을 시작하게 되는 독서 습관도 좀 바꿔볼까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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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볼 책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백낙청의 원불교 공부’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는 책이다.
나는 백낙청 교수의 현실인식과 정치적 판단에 대해 견해가 다른 면이 많다.
총론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각론에 가면 많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래서 솔직히 책에 선 듯 손이 안가는 면이 있다.

이것도 내가 극복해야할 독서 습관 같아서 당분간 이 책을 보려고 한다.
독후감은 지금처럼 쓰지는 않을 생각이다.
전체를 다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내 입장을 내려놓고 읽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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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의 책을 일단 좀 쉬면서, 여러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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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도덕경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코드로 동서양의 고금 문명사를 회통해서 읽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가 갖는 위험성은 있다.(저자도 후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하나의 코드로 문명사를 일관해서 읽을 수는 없다.
그것은 또 다른 교조(敎條)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위험을 자각하면서 읽는다면 전체를 대관(大觀)하는 감각을 익힐 수가 있고, 각박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을 좀 더 여유있게 바라보게 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실과 인식에 대해서 나선형 순환으로 보이는 여러 관점의 코드들이 있다.

대교약졸의 코드로 보면
졸(拙)Ⅰ→ 교(巧) → 졸(拙) Ⅱ로 순환한다.
자연과 인간, 인간 상호 간의 관계의 변천으로 보면
무분절(無分節)Ⅰ(원시적 무분절)→ 분절(分節 문명)→ 무분절 Ⅱ(새로운 문명, 또는 超文明)로 순환한다.
인간의 인식의 깊이에서 보면
분절Ⅰ(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무분절(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
분절Ⅱ(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순환한다.
분절Ⅱ의 인식은 무분절을 통과한 것이다.

===
우리는 지금 문명전환이라는 절박한 인류사적 요구 앞에 서 있다.
그 핵심은 생활양식의 변혁이다.
축약하면 ‘단순소박한 삶’이다.

이것 역시 원시적 단순소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통과하며 그것을 소화한 단순소박Ⅱ가 될 것이다.

그 이행의 동력이 자발적 자유욕구이어야 하는데,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생태 전체주의의 어두움이나 최악의 경우 여섯 번 째 대멸종의 주인공이 인류가 될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의 자각이 보편화되고, 자발적 자유욕구에 의해 삶의 양식이 단순소박Ⅱ로 바뀌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
5

2021/12/04

Namgok Lee 인간 특유의 2차 본능 이 더 커지는 시대

 Namgok Lee

1t2S D0eca8em9be6r atns 07far3eh:5f2  · 
박석 교수의 책을 꾸준히 읽고 잇다.

 전에 별로 관심도 없고 잘 몰라서 빼놓고 읽었던 장(章)들을 이번에는 빠짐없이 읽어본다.

‘제7장 회화(繪畵)’을 읽다가 연상되는 생각들이 있어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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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에서 사실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한 때는 사진기가 발명되고 난 뒤부터이다. 사진기는 1839년 루이 다게르가 최초로 발견하였는데 과학기술을 이용해 실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사진기가 점차 퍼져 나가자 회화는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양 회화사에서 18세기 후기부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사실성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추상성을 더 강조하는 사조가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사진의 발견과 무관하지 않다.’
‘원근법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15세기 초의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인 브루넬레스키다. 그는 물체는 뒤로 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작아지고, 나중에는 결국 한 점이 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이전의 그림에서 가로수가 늘어져 있는 길이 지평선 위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의 역사를 거슬러가면 최초의 발견자 또는 창안자나 발명자를 만난다.
누워서 원격 리모콘으로 심지어는 말로 해도(아마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마 생각하는 것만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불이 켜지는 전기도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잊혀진다. 누가 발명했는지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발견 또는 발명했다고 하지만, 그의 단독 작품이 아니다.
이미 무수한 역사와 노력의 축적들이 그 배경에 있다.
철학이나 문학이나 예술뿐만 아니라 습속이나 제도의 변화도 여러 변수의 종합적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토록 강고하게 보이던 가부장제의 유산인 남아(男兒)로 대(代)를 잇고, 조상에 대한 봉제사(奉祭祀) 문화가 조용히(큰 저항이나 강제나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허물어져 가는 과정을 보았다.
아마 족보를 챙기는 문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옛날 같으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을 대(大) 사변(事變)들이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많다.
지금은 물질도 풍부해지고, 민주주의라는 제도도 발전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부(富)나 권력(權力)에 대한 탐욕이 몇 천년 동안의 강한 관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 언젠가는 그런 것조차 기이한 옛 이야기로 들릴 날이 있을까?

다행히 인류가 지금의 위기를 잘 넘기고,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길을 갈 수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 실제로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의식의 확장이 위기를 넘어서는 길이기도 하다.

 단지 그것이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것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과제이긴하지만.
그런데 아직은 너무 견고해보이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토록 강고하던 남아(男兒)로 대(代)를 잇는 습속과 문화가 사라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부(富)나 권력(權力)보다는 명예욕(名譽慾)은 좀 더 오래갈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의 연관’ 속에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부, 권력, 명예는 자기중심적인 1차본능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들이다.

이 1차적 본능보다 인간 특유의 2차 본능(숭고지향성, 어떤 사람들은 佛性이라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靈性이라 부르는)이 더 커지는 시대‘모든 것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새벽의 독서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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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이계표
모든 것과의 연관❗
연기론적인 사고입니다.👏
 · Reply · 2 d · Edited
이계표
전래의 토착적 영성과 서구의 근대적 이성과의 관계를 개벽세상이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 Reply · 2 d
崔明淑
나이 든 사람들에게 2차 본능은 비교적 추구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정말로? 글쎄요. 2차 본능을 추구하려면 상당히 구도자적으로 살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 Reply · 2 d
Namgok Lee
崔明淑 오히려 신세대에게서 자연스럽게 이행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결혼이나 가족제도의 변화처럼.
 · Reply · 2 d
崔明淑
Namgok Lee 가치전환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겠군요.
 · Reply · 2 d

Namgok Lee 박석 책 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효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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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h  · 
새벽의 독서 산책
박석 지음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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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음악에 지대한 관심과 소질이 있었다. 그는 고대의 순임금이 만들었다는 소(韶) 음악을 듣고 아름다운 음률에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공자가 음악을 좋아했던 것은 물론 개인적인 취향도 있었겠지만 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효용성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 음악 이론을 집대성한 ⌈예기⌉의 ⌊악기⌋편에서는 예(禮)와 악(樂)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악(樂)이란 동화하는 것이요, 
  • 예(禮)란 차별하는 것이다. 
동화되는 즉 서로 친하게 되고, 차별하는 즉 서로 공경하게 된다. 
악(樂)이 앞지르게 되면 넘쳐흐르게 되고, 예(禮)가 앞지르게 되면 소원하게 된다.
성정에 화합하고 용모를 가꾸는 것은 예악(禮樂)의 일이다. 

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이고 
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질서다. 
조화로우므로 만물이 모두 화육되고 질서가 있으므로 만물이 모두 구별된다.‘

고대 중국에서 예의 본질은 사회계층과 신분에 놓인 질서의 확립이다. 
그리고 그 질서란 차별적인 것이다. 
이렇게 차별적인 질서가 확립될 때 사회는 안정된다. 

그러나 차별성을 강조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는 소원해지고 사회는 삭막해진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樂)이 필요한 것이다. 악(樂)의 본질은 서로 동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가까워진다.
예란 천지의 질서이고 악이란 천지의 조화로움이라고 강조한다.

공자는 일찍이 순임금의 음악을 들으면서 아름다움과 선함이 극진하다고 했다. 
그러나 무왕이 만든 음악을 듣고는 아름다움은 극진하지만 선함은 극진하지 않다고 평했다. 
미(美)와 선(善)이 하나가 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는 예가 우선이고 악은 예를 보조하는 수단이지만, 
개인 수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조금 다르다. 

공자는 ‘논어’에서 “시에서 일으키고, 예에서 세우고, 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는 말을 했다. 
  • 시를 통하여 도의적 감흥을 일으키고 
  • 예를 통하여 인류의 규범을 세우고 
  • 마지막으로 악을 통하여 인격도야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악은 예보다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유가적 수양의 마지막 단계에 필요한 도구이다>
===
독후 느낌

봉건군주제의 신분계급사회에서 발전한 고대 중국의 예와 악에 대한 사고의 한계에서 공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신분계급에 바탕을 둔 차별적인 질서(禮)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공자를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그런 생각을 오랫 동안 해왔었다. 그리고 60이 훌쩍 지나서 비로소 논어를 접했다.
그리고 논어 속에서 그 시대의 한계와 그 속에서도 보편적 이상을 추구하며 고뇌한 한 사람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었다.

예禮를 차별적 질서로 보지 않고, 신분계급제를 넘어서  
인간이 추구해야할 본연(本然)의 아름다운 질서로 보려고 한 흔적이 논어에는 많이 나온다.

나에게는 그런 면이 보여오다 보니까 아마도 유가(儒家) 일반의 해석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마 내 주관적 해석도 많을 것이다. 단지 인류의 선각자로서 그 원석(原石)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예(禮)보다 악(樂)을 상위로 본 것 또한 단지 수양의 최고 단계로서가 아니라, 차별적 질서 속에서 보편적 이상을 추구한 공자의 고뇌의 일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 공자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제 공자의 팬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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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공자의 군자론 - 인격의 성숙이 군자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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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87Yiesterdaypo n808sao5t 0a6:it5a4ed  ·
 
새벽 독서하려 앉는데,

문득 논어 첫 장의 글귀가  다가온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남이 몰라주어도 노여움이 일어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닌가!)“

시습(時習); 깨달아도 체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너무 조바심하거나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말라. 그저 때때로 익혀라. 그래야 즐겁다.
자원(自遠); 사람에게는 적당한 거리, 따뜻한 거리가 필요하다. 물리적(공간)인 거리도 필요하지만, 심리적인 거리도 중요하다
집착(執着)은 원한이나 미움으로 변할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군자(君子); 자유롭고 자주적인 인간.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아야 평화(不慍)를 즐길 수 있다.
이 첫 장을 꿰뚫는 테마는 ‘기쁨(說,樂)과 평화(不慍)’
1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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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mments
윤차차로
즐거움, 평화.
지금 삶의 목적입니다.
 · Reply · 1 d
구정회
즐거움 說 樂=말씀說 × 즐길樂
(說 =기뻐할 열 說)○
즐겁게, 좋게 ,말하고, ×
(기쁘고 즐거움 은 )
평화 (平和)=(아닐不 , 성낼 온)
성내지 아니함.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
 · Reply · 1 d · Edited
Namgok Lee
說은 기쁠 悅과 같은 의미로 쓰인답니다. 여기서는 말씀 열이 아니라 기쁠 열로 읽습니다.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의 慍은 ‘성내다 노여워하다’라는 뜻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이 없으니 군자가 아닌가!’하는 뜻으로 읽습니다.
 · Reply · 1 d
구정회
열 說(기뻐할) 낙 樂(즐기다 )=기쁘고 즐거운
기쁘고 즐거움.
평화 =불不 온 성낼 온
성, 화, 내지 아니함
예~.
 · Reply · 1 d · Edited
주병애
병원에서 결과 기다리며 읽고 있는데 울림이 오네요 고맙습니다
 · Reply · 1 d
Namgok Lee
주병애 좋은 결과 바랍니다.
 · Reply · 23 h
박정미
논어를 기쁨과 평화의 복음으로 보니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 Reply · 23 h
Namgok Lee
복음까지는 아니구요. ㅎㅎ
요즘 ‘공자의 변명’이라는 제호로 익산의 소통신문이라는 주간지에 월 1회 칼럼을 싣고 있습니다.
다음호에 게재할 원고 서두입니다.
“공자의 군자(君子)론을 앞으로 몇차례 연재하려 한다.
내가 보기에는 공자의 군자론에 대한 깊은 오해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첫째는 군자와 소인을 대립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인데, 공자 스스로는 인간의 진화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스스로도 군자라는 인간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는 군자(君子)는 한자의 뜻이 의미하는 것처럼 신분계급제 사회에서 군주(君主)의 아들 즉, 귀족이나 관료 등 지배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공자는 이 말의 내용을 혁명적으로 그러나 조용하게 바꿨다.
즉 신분의 귀천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성숙이 군자의 조건이라고 바꿈으로서 신분계급을 넘어서는 사상적(제도까지는 엄두를 못냈지만) 지평을 열었다.“
 · Reply · 23 h
박정미
이남곡 제가 미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유교경전은 당위의 명령체계로만 다가왔는데 새로운 감흥을 던져주시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아! 군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나도 해볼 수 있겠다. 이렇게 하면 바르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전에 좀 더 기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의 단초를 잡았습니다.
선생님. 훌륭한 사람 말고 행복한 사람 쪽으로 군자를 더 밝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Reply · 23 h
Namgok Lee
박정미 맞습니다.
내가 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보여왔는지 모르겠지만, 공자가 당위의 윤리나 도덕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당위로 보는 것은 오히려 공자의 진면목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읽혀서, 그런 생각의 단편들을 마침 주간지의 요청이 있어서 써보고 있습니다.
특히 군자론에서 박선생의 요구(ㅎㅎ)를 최대한 반영해 보겠습니다. ㅎㅎ
 · Reply · 22 h
박정미
이남곡 기대합니다!^^


Namgok Lee 피타고라스 - 우주의 조화

 Namgok Lee 피타고라스 - 우주의 조화


오늘 읽은 내용 가운데 피타고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나는 그저 ‘피타고라스 정리’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놀랍다.

<서양 음악의 뿌리는 피타고라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악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음정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수학자로 널리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사실 종교와 과학의 경계선에 서있던 사람이엇다. 그는 오르페우스를 숭배하는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종교의 교주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정화를 통해 우주의 순수한 정신과 하나가 될 때까지 하나의 육신에서 다른 육신으로 윤회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윤회의 과정에서 꼭 사람의 몸만 받아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몸을 입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윤회설은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설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
(중략)
오늘날 서양과학의 뿌리로 여겨지는 수학도 피타고라스에게는 종교적 수도의 한 방편이었다.
그는 과학자의 마음으로 수를 탐구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신비를 참구하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수를 탐구했다. 그에게 수는 숨겨진 우주의 마음이자 비밀이었다. 그는 바로 수의 비밀을 통해 우주의 조화를 발견했다.
그래서 우주의 조화는 수의 비례에 따라 유지된다고 여겼다. 오르페우스교의 신봉자인 동시에 수학자였던 그가 수와 음악 사이의 비밀을 탐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천체의 음악, 즉 별이 돌아가면서 내는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수의 비례를 연구하여 서양 음정학을 확립했다.
(후략)>

2021/11/28

Namgok Lee 저는 나름의 만년(晩年)의 삶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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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11128 · 
실상사는 아침 8시 30분 야단법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스님을 비롯해서 4부대중이 모여 큰 뜻을 함께 새기고 현실의 소소한 실천과 감상을 나누는 대관세찰(大觀細察)하는 자리다.
나도 지리산 연찬이나 지리산정치학교와의 인연으로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지만, 보통의 예불(禮佛)의식과 다른 방식으로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어제 진행하시는 스님께서 오랜만에 참석한 저에게 말씀 나눌 기회를 주셔서 그 동안 평소 생각하고 발원(發願)해 왔던 것을 스스로와 세상에 다짐하고 약속하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다.
===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이 요즘은 80세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가 5년 이상 살 확률은 50% 이하이고, 10년 이상 살 확률은 훨씬 낮아집니다. 
저는 이 기간을 제 인생의 절정기로 살고 싶습니다.
스스로 다짐하고 발원하고 있는데, 여러 스님들과 도반들 앞에서 공개함으로서 더욱 튼튼하게 하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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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기간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대자유’를 마음껏 즐기며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임종의 시간이 맑은 의식과 감사로 끝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나름의 만년(晩年)의 삶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습니다.

  • 첫째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 둘째는 누가 물어도 성심껏 대답하는 것입니다.
  • 셋째는 다른 사람의 아집(我執)이나 틀이 보이면, 그에 부딪치는 자신의 아집(我執)과 틀을 먼저 보려고 합니다.
  • 넷째는 제 생각이나 이상을 알고도 저에게 세상이 시켜주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하려고 합니다.
  • 그 과정에서 원망(怨望)이나 애씀(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제 발원(發願)을 존경하는 스님들과 도반들 앞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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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2

Namgok Lee 2111 지리산 정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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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370 hc7NotvmemgSbher atl 0f6:031ed9  · 
어제 저녁 지리산 정치학교에서  연찬에 대한 소개를 했다.

최선의 합의란 결국 최선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분ㆍ계급ㆍ성별ㆍ나이 ㆍ소속집단(국가ㆍ민족ㆍ지역 등)에 의한 기울어짐을 바로잡는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관념 안에 있는 기울어짐을 바로잡는 것이 다른 하나다.
즉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생각과 사람을 떼어놓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생각, '너'의 생각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연습이다.
이 꼬리표가 붙어 있으면 내로남불이 된다.
이것은 누구나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판단(입력된 정보)이라는 필터를 통한 '상'이라는 것, 즉 사실과 별개의 관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도 확증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을 유지할 때,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동등한 지위를 부여할 수 있고, 최선의 합의(타협)를 도출할 수 있다.
집단적 확증편향은 개별적 확증편향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가져온다.
알고리즘은 이것을 더 강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편향적 정보입력이 손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팔로워를 가진 유튜버들의 해악이 단적인 현상이다.
악성(과거집착의 문화지체) 편가름은 사회적 합의, 즉  그 시점에서 최선의 사회적대타협을 불가능하게 한다.
결국 이 정치문화를 바꾸는 것이 뿌리깊은 집단적 확증편향의 굴레에서 정신을 해방하는 것이고, 실사구시와 구동존이의 태도로 사회적대타협을 가능케 한다.
대연합정치를  통해서 문명전환의 물꼬를 틀 수 있게 한다.
이 사회적대타협에 의해 비로소 가장 합리적인 제도의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끝없는 소모적이고 퇴영적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연습하는 장이 지리산 정치학교가 되기를 바란다.
물질위주의 행복관과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라는 강고한 관성은 물질의 결핍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노력과 개인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자유를 유발한다.
그것을 이해하고, 보다 자유로운 자신과 세상을 향해 정신을 해방하는 과정에서 문명과 정치가 진정으로 전환될 수 있다.
강제나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기쁨이 동력이 될 때 진정한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연찬방식이라는 것은 이 동력을 강화시킬 때 유효한 것이다.
어제 연찬에 대한 소개를 하고 나서의 단상들이다.
지리산 실상사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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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Yesteu9rday8 hti2at 1f49o0s:0r47e1a  · 
오늘 지리산 정치학교 2기를 마치면서 제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스스로 인문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나름의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노인세대의 한사람입니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내  말을 듣고도 나에게 시켜주면 가능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제 나름의 노후살이입니다.
어제 전체연찬에 참석하고, 그 주제가 저에 대해서도 물음이라고 생각하고 말해보겠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제가, 치국, 평천하가 다 정치입니다.
치국 다음이 평천하입니다.
마을 정치가 평천하입니다.
국경이 사라지는 최고의 정치입니다.
오히려 치국은 한 단계 낮은 정치입니다.
먼저 내년 선거를 둘러싼 정세에서 치국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거칠게 중도를 지향하는 것을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산업화ㆍ민주화의 성공은 한국을 선진국의 대열에 올려놓았지만, 87체제 속에서 산업화ㆍ민주화의  어두움, 즉 퇴출되어야할 요소들이 거칠게 퇴춣되는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년 선거가 막바지가 되리라 전망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내년 정초를 전후해서 여러분야의 벗들과 허심탄회하게 지지후보를 함께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향후 정국을 고질적이고 퇴영적인 편가름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다원성에 바탕을 둔 대연합정치를 모색하는데, 인문운동가로서의 가능한 역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면 자유민주주의(보수), 사회민주주의(진보), 문명전환의 녹색정치 삼자의 공동정권이 탄생하는 과도적 정권이 출범하도록 노력하는데 일조를 하고 싶습니다.
지방 선거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문화가 탄생하도록 돕겠습니다.
다음은 평천하 즉 마을 정치에 대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와 개인해방의 민주주의를 거치면서 해체된 과거의 공동체로 복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면서 '활사개공'의 바탕에서 물질위주의 행복관과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넘서서는 튼튼한 물적토대와 고도한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21세기의 따뜻한 공동체입니다.
'적당한 거리'는 우애와 협동의 조건입니다.
어제 '영성'이라는 말이 많이 나왔는데, 저는 영성의 사회화 혹은 사회적 영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세가지가 떠오릅니다,
사이좋음, 즐거움(기쁨), 단순소박한 삶의 풍요입니다.
개인적인 영성(깨달음)의 추구가 사회적 영성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성숙시킬것인가 하는 구체적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최고의 정치인 마을 정치의 성공을 좌우할 것입니다,
인문운동가로서 저도 가능한 이 분야에서 만년의 즐거움을 느낀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2기 참여자 여러분과 진행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 그리고 실상사와 지리산에 감사드립니다.
                  이남곡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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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17 h ·



-제2기 지리산정치학교를 마치다/
-먼저 가슴 열어/
푸른 새벽
하얀 사발에 담아 올린 정화수
퍼져가는 잔물결을 본다
모두가 탈 없이 잘 지내기를
참으로 행복하기를
내쉰 내 숨을 당신이 들이쉰다
우리는 서로에게로 이어진 한 물결
만물이 한 숨길 속에 출렁인다
선 자리가 중심
물결은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시 이 자리로 밀려온다
서로가 서로를 품어
어느 것 하나 외따로 일 수 없는 이 물결 속에서
가는 것이 오는 것이다
본시 한목숨
내가 먼저 가슴 열어
당신을 안는다.
문명전환을 위한 지리산 정치학교 2기 과정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지리산 실상사에서 가졌다. 나는 여는 시로 '먼저 가슴 열어'를 낭송했다.
이번 과정엔 추천을 받아 면접을 거친16명이 참여하여 전환정치에 대해 연찬하고 문명전환의 정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지, 그 길에서 서로의 역할과 연대 방안에 대해 함께 논의했다.
이 과정을 1기 수료생 몇 분이 준비팀으로 합류하여 진행을 함께한 것이 나에겐 무엇보다 큰 성과이자 기쁨으로 느껴졌다. 특히 1기 수료생 3분의 사례 발표는 지리산정치학교의 의미와 필요성을 새롭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연찬테마로 '22년 3월 대선과 6월 지자체장 선거국면에서 문명전환의 정치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루었다.
오늘 수료식이자 파견식에서 나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지리산정치학교는 23년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3년간 전환정치를 담당할 젊은 정치인들을 함께 묶어내는 것을 그 목표와 과제로 삼는다.'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지구촌 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명전환이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것을 외면하거나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임을. 그렇게 거센 쓰나미처럼 우리 앞에 닥쳐와 있는 이 비상한 사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남기 위한 비상한 행동, 구명정과 생명둥지를 마련하는 것뿐이라는 인식이 깊게 다가왔다.
호스피스와 산파의 역할, 지리산정치학교는 그렇게 구명정과 생명둥지를 마련하는 이들을 일깨우고 함께 연결하고 재연결하는 것임을 이야기 했다.
문득 의암선생이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1912년 4월부터 1914년 3월까지 '21일 기도' '49일 기도'를 통해 연인원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들을 길러내어 기미독립운동을 이끌내었던 역사가 정치학교의 염원과 겹쳐서 떠올랐다.
그런 간절한 소망을 지리산정치학교가 담아 이어갈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파견의 시로 '하늘 창'을 나누었다.
-하늘 창(窓)/
꽃을 피우는 것은
하늘의 창(窓)을 여는 것이다
한 송이 꽃이 필 때마다
하늘로 향한 창 하나씩 열린다
별들이 피어나
밤하늘에 꽃등을 매어다는 것처럼
꽃들이 피어나
하늘의 창을 활짝 여는 것이다
네가 피어나고
내가 피어나면
온 세상이
그래 환해지는 것이다.
지리산정치학교 2기 수료생들과 이번 과정을 함께 열어간 도반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14


95You, 崔明淑, 박정미 and 9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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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t2tlplm9884g9lul5301r1hafu1hd  · 
이번 금요일(26일) 오후 세시부터 토요일(27) 오전까지 지리산 실상사에서 '문명전환의 정치, 그 제도'라는 주제로 연찬을 합니다.
대면과 줌zoom을 겸합니다.
인연이 닿는 분들께 함께 하실 것을 권하는 소개 말씀을 올립니다.

"지금 우리는 펜데믹 현상과 기후 위기와 같은 생태적 재앙 앞에서 인류라는 종(種)의 사활(死活)이 걸린 결정적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함으로서 2차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이지만, 그 과정의 모순들이 표출하는 정치사상적, 심리적 혼돈의 시기가 겹치고 있습니다.
물질혁명은 자본주의가 이룩했지만, 의식(意識)이 물질위주의 행복관과 각자도생의 이기주의에 갇혀 있어서 그것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생태적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이 망(亡)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던 그 암울한 시기에 나타난 개벽사상은 너무 일찍 핀 꽃이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구호는 100년 후를 내다본 우리 공동체의 예지(叡智)였습니다.
이제 의식혁명은 인류의 생존이 걸린 과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물질혁명과 의식혁명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할 곳은 결국 새로운 문명이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을 향한 진로는 어떻게 열릴까요? 그리고 그 주체와 동력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런 질문들이 단지 이상주의자들의 오랜 염원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으로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마침 이번 연찬이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고, 오래 동안 심도 있게 이런 주제를 연구해오고 이번에 ‘붕새의 날개-문명의 진로’라는 대작으로 그의 사상을 세상에 소개한 김상준 교수를 모셔서 발제를  듣고 연찬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 금요일(26일) 오후 세시부터 다섯시까지 김 교수의 발제를 듣고, 27일 오전까지 토론과 연찬으로 이어집니다. 
직접 오셔서 참여해주시면 더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시면 줌(zoom)으로 참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Namgok Lee 우리 현실의 난맥상의 근원을 ‘남북 분단’에서 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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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요즘 어떤 책을 보면서 느끼는 소감인데, 전체적인 총론이나 세계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은데, 각론에 들어가거나 특히 정치적 판단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경우를 느낄 때가 많다. 이런 견해 차이를 넘어 어떤 합의(타협)에 도달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 요즘 많이 생각된다.

바탕의 총론이나 세계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경우보다 더 안타까울 때가 많고, 총론이나 바탕이 다르면서도 이해관계로 정치적 판단이나 성향에서 일치하는 경우를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특히 관념을 다루고,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 사이에 관념계의 단정(斷定)이 심한 것이 더 그렇다. 이 단정은 특히 빠지기 쉬운 연역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든다.
예를 든다면, 지금 우리 현실의 난맥상의 근원을 ‘남북 분단’에서 찾는 것이다.

물론 일리가 있고, 대단히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분단은 세계정세와 우리공동체의 실상이 만들어낸 하나의 과정이고, 오히려 우리가 겪은 역사에서 찾자면 조선(朝鮮)을 망국으로 이끈 원인들에서 찾는 것이 더 맞다고 본다.
원인에는 원인이 있어서 끝없는 연기(緣起)를 이루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더욱 성찰할 것은 분단(分斷) 이전 조선의 망국(亡國)에 대한 공동체 내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체제가 지금의 열국의 패권경쟁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방향이다.  민족적 동질성보다 체제의 이질성이 이미 더 심화된 남북의 현실에서 통일을 문제해결의 근원으로 보는 인식은 스스로의 상상을 과거의 관념적 인습 속에 가두어 버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오히려 남북 두 국가체제로 평화공존하는 것을 분단체제에 대한 우리 역사공동체의 자주적 대응으로 하는 것이 더 맞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이런 바탕에서 남북이 각각의 처지와 입장에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내부 체제를 발전시키는 경쟁을 하는 것이 굳이 민족주의를 취한다해도 더 큰 민족주의가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통일이 필요하면 통일하게 될 것이고, 아시아 연방이나 세계 연방으로 나아가게 되면 남북의 상이한 경험들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생태적 재앙으로 인한 인류 공통의 위기는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게 하는 결정적 환경으로 될 수 있고, 그 길에서 제대로 된 전망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위기 앞에서 여전히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몽으로 될 것이다.

엊그제 지리산 정치학교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마을 정치(마을운동이나 공동체운동을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정치를 좁은 의미로 가두지 않고 확장하는 것이 정치에 대한 근본적 지평을 변혁하는 것이다)는 평천하(平天下)의 정치다. 
서로 다른 국가별 체제나 문화 속에서 인류가 열어가야할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운동이라는 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인 정치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예술’로 전환하는 것이 평천하(平天下)의 정치고, 우리 시대 개벽운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꼭 순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마을 정치가 진화해서 국가 정치가 진화하는 것보다는, 국가 정치의 진화를 거치며 마을 정치가 진화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산관계나 소유관계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국가와 시장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을 단위로 이런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보편적인 목표가 되기 힘들다.
나는 사실 50대의 대부분을 마을 단위로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편화하기 힘들다는 나름의 판단을 하게 되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이다.

2021/11/20

Namgok Lee 어제원불교대학원 대학교로 김경일 총장에게 이사 신고 겸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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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2 m  · 
어제원불교대학원 대학교로 김경일 총장에게 이사 신고 겸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뵈었다.
총장실이 작고 소박하여 원불교의 검소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침 그저께 인사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총장직에서 영산 성지로 새로운 보임을 맡아 떠나게 되셨다고 한다.
나는 원불교 교인은 아니지만, 원불교와는 사상적으로 깊은 만남이 있었고, 어머니를 임종시까지 10여년 모신 요양원도 원불교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깊이 통하는 바가 있어서, 익산으로 이사 와서 교분을 더 깊게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영광으로 떠나신다니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영산으로 와서 2~3일 쉬어가라는 말씀에 더 깊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영산까지 1시간 30분 거리라니까, 아직은 운전이 가능하기도 하다.
어제 점심을 겸해서 세 시간 정도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귀한 책과 원광제약에서 만든 경옥고를 선물 받았다.
마음과 몸의 보약을 함께 선물 받은 셈이다.
김 교무님과의 교분이 만년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새벽에 정산종사의 건국론을 읽다가, 해방 후 그 시기에 느꼈던 정산종사의 심경이 70년 후까지도 현실적인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어서 한편 안타까운 마음으로 ‘건국론’의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
“현하 문명국가의 민족을 본다면 
평소에는 혹 사상도 달리하고 세력 투쟁도 하다가 나라에 일이 있으면 혼연히 귀합하여 철석같은 일환이 되며, 
평소에는 혹 사사에 집착하고 이욕에 몰두하다가도 나라에 일이 있으면 번연개오하여 국가의 경제에 집중하며...(중략), 
지금 조선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이와 정반대로 되고 있으니 
이것이 다 우리의 각성이 적은 원인이요 훈련이 부족한 관계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요사이 인심의 상태를 대개 본다면 공연히 충동성을 장려하여 혹은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고 혹은 사랑하는 동포를 원수같이 대적함으로써 무슨 건국 사업이나 하는 듯이 아는 자 적지 아니한듯하니 이것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리요.
(중략)
소아를 놓고 대아를 주장하면 소와 대가 한가지 구제를 받을 것이나, 
대아를 놓고 소아를 주장한다면 소와 대가 한가지 멸망이 되는 법이니 여러분이여! 
애국하시는 여러분이여! 무엇을 취하고자 하는가.“
===
물론 그 때와는 많이 다르다.
2차대전 후 신생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할 정도로, 물적 정신적 제도적 밑천들을 그 동안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가면서 만들어 왔다. 요즘 만나고 있는 이중의 위기(나라의 정치 사상적 혼돈과 인류의 생태적 위기)는 우리가 한 단계 더 진화할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다.
정산종사의 안타까움이 시대를 뛰어넘어 전해지는 것 같아서 이 글을 소개한다.

2021/11/15

Namgok Lee 이 싸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이른바 움직이는 중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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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tSpt105gtf518n2hogia  · 
역사를 긴 안목으로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할 때가 있다.
혼돈이 심한 과도기일수록 그렇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런 시기로 보인다. 
어떤 혼돈과 후퇴도 인류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旅程)에서 부침(浮沈)하는 현상들이다.
일부가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죽기살기 식의 편가름에 휘말려 있고, 마치 그것이 정치의 중심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싸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이른바 움직이는 중도층이다.

내가 ‘중도’라고 하지 않고 ‘움직이는 중도층’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도는 그 시대를 관통하여 적중(的中)하는 목표지만, 그 목표는 뛰어난 철인(哲人)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대중의 움직이는 여론에 의해서 접근해가는 것이 민주주의고, 그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전시킨 현재로서는 최상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의 정신적 정치적 성숙이야말로 역사를 낙관하게 하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과 무엇이 부딪치는가?
기이하게 벌어지는 현상들의  바탕에는 꿈들이 있다.

크게 보면 평등에 대한 꿈, 자유에 대한 꿈, 정의와 공정에 대한 꿈, 행복에 대한 꿈들이 있다.
제도적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대를 지나, 이제 실질적 불평등과 양극화, 합법적 불공정과 위선, 포퓰리즘에 의한 유사 독재,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를 퇴출하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여온다.

그 꿈들 자체는 진지하고 참되다.

다만 그 꿈들을 투사하고 있는 대상과 정치 현실이 상당히 낙후한 것이 지금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고, 그 동안 여러 차례 증명된 87체제의 제도적 모순이다.(국가의 일반적 수준과 정치 수준의 괴리)
평등에 대한 이상정의와 공정이라는 이상이 크게 대립하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통합되어야 실현할 수 있는 꿈이다.
정의와 공정이 없이 평등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가?
평등이라는 지향이 없이 공정과 정의가 실질을 가질 수 있는가?
아마도 이번 대선은 87체제 속에서 우리가 나타낼 수 있는 가장 기묘한 모습으로 치루어질지 모르지만, 그 외형 속에서 진지하고 참된 꿈들이 미몽이나 환상에서 벗어나 성숙해지는 과정으로 되리라고 본다.
 우리의 치부(恥部)와 환부(患部)가 샅샅히 들어나 치유의 과정으로 이어진다면, 치열할수록 좋다.
이제 제 7공화국을 출범시킬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을 앞당기는 마지막 선거가 되기를 바란다.
치열하게 들어내서 정치를 교체하며, 민주주의와 다원성을 바탕으로 통합하며, 나아가 문명을 전환하는 21세기형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치를 보다 뚜렷하게 하고, 진보는 사회민주주의를 선명하게 하여 그 두 가치가 상호보완하는 대연합정치에 한번은 성공하기를 바란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둘 다 서양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둘을 동양에서 한 단계 더 융합 조화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으로 보인다면 그보다 가슴 뛰는 전망이 있을까?)
그것이 파란만장한 비운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는 나라로 도약하는 관문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그 밑천을 이미 장만했는데, 그것을 살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이 될 것인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인의 한 사람으로 이렇게라도 정치에 참여한다.
===
6 comments
김종근
조중동, 포털 등의 왜곡된 언론이 수구 기득권 세력, 토착 왜구들 편에 서있기 때문에 희망을 걸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기후변화의 심각성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 Reply · 14 h
김경일
움직이는 중도ᆢ최근 백락청교수 글을보니 변혁적 중도라는 표현이 있던데 느낌이 비슷 합니다.
 · Reply · 14 h
Kwon-kyun Suhk
중도의 가치는 존재 마땅함 진리를 추구하는 인식의 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 의식을 넘어 인식의 단계까지.
 · Reply · 14 h
천유근
크게 공감가는 글입니다.
무엇보다 언론의 치중이 큰 문제로 보입니다. 뭉틀거려 한줄 자막으로 생색내는 기래기들, 개탄스럽습니다.

2021/11/14

Namgok Lee 박석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이라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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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5 h  · 
박 석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독서량과 천재적 번뜩임, 유려한 문체에 빠져든다.
고금(古今)과 동서(東西) 그리고 종교, 철학, 정치, 예술, 건축을 넘나드는 방대함이 놀랍다.
노자(老子)가 말한 화광동진(和光同塵)과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두 코드로 관통하고 있다.

박 교수는 노자는 화광동진을 이야기했지만, 노자 스스로는 미완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양과 고금을 회통하면서 스스로 그 완성에 대한 집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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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그 코드가 대단히 우수하고,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가 많지만, 아무리 우수한 코드라고 해도 그 코드 자체가 진리나 진실에 접근하는데 일정한 한계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코드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인식체계다. 다만 자신이 어떤 코드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사물이나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인식능력이나 탐구력이 뛰어날수록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나는 틀릴 수 있다’라는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진리 탐구와 진정한 창조를 위해 필요하다.
 한 사람 안에서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결국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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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이라는 장(章)에서 
‘동서문화 교류 초기의 서양인에 비친 중국 철학’에서 마테오 리치, 니콜라스 트리고, 필립 쿠플레, 라 모트 르 바예 등을 소개하고, 
최초로 중국 철학을 비교 연구한 서양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논리학, 형이상학 등은 서양이 중국에 앞선 것이 사실이지만 윤리학 방면에서는 중국이 서양 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류의 보편 정신에 기초하여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추구하였으며 평화적이고 평등한 교류를 통하여 인류의 복지가 증대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후대 현실의 역사에서는 라이프니츠가 희망하였던 아름다운 쌍방 교류는 이어지지 못하고 서양의 침탈로 인한 일방적인 교류가 되고 말았다.’

중국문화와 유가사상을 극찬하였던 볼프와 볼테르를 소개하고, 볼테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유교에 깊게 심취했던 것은 유교에서 이신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며, 공자의 사상에서 발견한 관용 사상으로써 다시 기독교의 맹신주의와 신구교의 갈등으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사회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미신적이고 부패한 종교이며 특히 지나친 배타성으로 인해 관용력이 부족한 저급한 종교라고 악평하였다’

반면에 유가사상을 극도로 폄하하였던 헤르더와 헤겔을 소개하면서, 헤르더는 중국은 인종적 지리적 특징에 따라 인류사의 유년기에 영원히 고착된 나라에 불과하한 것으로 보고, 그의 역사철학과 중국관이 그대로 헤겔에게 계승된다고 보고 있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헤르더와 마찬가지로 인도 중국 페르시아 이집트 등 동양을 세계사의 유아기, 그리스를 청년기, 로마제국을 장년기로 보고 게르만 사회를 역사의 성숙기이자 완성기로 보고 있다. 동양 가운데서도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끼친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비교적 높게 평가하고 중국과 인도는 정체에 빠져 있는 유아기라고 폄하하였다.
중국인들에게는 미신이 만연하며 내면의 비자립성과 정신적 부자유 정신의 상실이 보인다‘

박석 교수의 표현이다.

 ‘헤르더와 헤겔의 중국관은 사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라는 유아적인 자기중심성과 중국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선입관에서 나온 황당한 견해여서 실소를 금할 길이 없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들의 중국관은 당시의 유럽 문명권과 중국 문명권의 실제적인 힘의 역전을 잘 반영한다.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철학 강의를 할 1830년 즈음에는 서양 문명의 우위가 더욱 가시화되었다. 결국 그로부터 약 10여년 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대패하고 그 뒤 서양 열강의 동네북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은 서세동점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많은 서양의 사상가들이 헤르더와 헤겔의 중국관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마르크스의 중국관도 헤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편향된 중국관은 1차 대전 이후에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의 과학문명과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참혹한 전쟁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적어본다.

박 교수의 창(窓)을 통해서 역사와 사상의 흐름을 보는 것이 즐겁다.
내 젊은 시절의 짧은 독서량이나 스스로가 빠졌던 코드를 되돌아보게도 되고, 비록 노년이라도 이렇게 접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면서...

2021/11/11

Namgok Lee 박석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라는 장(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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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h  · 
생활의 리듬으로 새벽에 독서를 하고 내용을 발췌해서 기록해 본다.
속독(速讀)의 부족함을 메꾸기도 하고, 내 의견을 첨부하기도 할 겸.
박석 지음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를 계속 읽고 있다.

오늘은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라는 장(章)에서 일부 발췌.
(* 인도와 석가모니를 빼고, ‘문화적 토양과 깨달음’이라고 하면 상당히 보편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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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가르침과 명상을 살펴 보았는데 이 장에서 석가를 이야기하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석가의 삶과 가르침과 명상은 예수와 공자의 중간이다. 
앞에서 예수와 공자를 비교할 때 이미 짐작했겠지만 개인의 삶과 깨달음은 그가 속한 사회분위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중국은 기원전 11세기를 전후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가면서 종교적 무속적 사회시스템에서 예(禮)와 악(樂)이 중심이 되는 사회시스템으로 전환했다. 모든 것을 저 초월적인 하늘과 신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던 신본주의에서 인간 중심, 땅 중심의 인문주의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문주의의 방점을 방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공자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기원전 5~6세기에 이르러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가 이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자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대부분 사상가들이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데 비해 인도의 사상가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고 해탈에 이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이는 사회문화적 코드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이미 예(禮) 시스템이 중요한 사회문화적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춘추전국 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禮) 범주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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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드에 반대한 사상가들도 이런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인도에서는 종교가 사회문화의 가장 중요한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운동에서도 어떻게 하면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를 개혁하여 새로운 사회에 어울리는 종교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석가가 왕의 길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종교가 정치보다 더욱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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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문적 토양인도의 종교적 토양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의 하나. 

사회문화적 코드 또한 시대의 변천과 인지의 발달 그리고 사회의 진화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우열(愚劣)로 단순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인도에서 불교는 토착적인 종교에게 밀렸지만, 인도의 사상 풍토에서 발전한 불교는 어떤 점에서 화광동진의 인문적 유교보다 존재에 대한 성찰의 깊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 즉 물질과 제도의 진화가 상당수준으로 진척된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제기되는 ‘관념계에 내재하는 근원적 부자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단히 귀중한 정신적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면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금 한국의 사회문화적 코드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 a] 중국의 유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들, 그리고
  • b]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와 중국을 통해 변화된 내용들, 
  • c] 근대 이후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시대를 거쳐가면서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분단 동족상쟁의 전쟁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급속하게 이루어 2차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하는 나라로 되었다.
지금 사회적으로는 극심한 양극화, 정신적으로는 극심한 문화지체 속에서
과도기적 혼돈을 겪고 있지만, 그것을 슬기롭게 넘어설 수 있다면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일구는 대단히 좋은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혼돈과 쇠퇴의 길일 갈 것인가? 새로운 문명을 향한 창조의 길을 갈 것인가?
요즘의 혼돈 속에서 그 바탕의 힘을 살리는 노력이 이 시대 우리 공동체에 부여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2021/11/09

Namgok Lee 박석 ‘유교는 종교인가?’ 2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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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유교는 종교인가?’

어제에 이어서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라는 장(章)을 읽었다.

전통적으로 볼 때 초월적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한 보류적인 태도는 유교의 큰 단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여러 신을 모시든 유일신을 모시든 신 중심의 세계관은 아직 고대의 신화적 사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유교는 그러한 신화적 사유체계를 극복하고 인본주의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대부분 종교들이 제시하는 사후 세계관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오히려 불가지론이나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공자의 입장이 훨씬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보아도 초월적 존재인 귀신보다는 인간을, 사후세계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을 중시했던 공자의 태도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和光同塵(화광동진) 노자 말씀 중에 '和光同塵'이 있다. 
和光 : 빛(빛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부드럽게 하는 능력과 
재능을 나타내지 않고 감추고 세속을 따른다는 뜻이고, 
同塵 :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수양(修養)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인간세계를 지향한다.
공자 수양론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도 현실을 초월한 궁극의 세계를 향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이다.

공자 명상의 하나의 특징은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을 중시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명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느낌이 없다. 내가 60이 넘어 논어를 처음 접하면서 공자에게 경탄했던 것은 그의 과학적인 탐구 태도였다.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진리를 밝히려는 정신과 태도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내가 연찬(硏鑽)이라고 부르는 소통과 탐구에 놀라울 정도로 근접한 성현(聖賢)을 공자에게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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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교는 봉건지배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이 찍혔고, 동아시아 낙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공자가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성약범(大聖若凡)을 추구했기 때문인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구화 이후 공자의 권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대성약범 때문이다.

서구화의 거센 파도가 전 세계 비서구 지역의 전통문화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사실 종교의 영역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고유의 전통종교(인도의 힌두교,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등)가 있는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기독교가 그다지 많이 전파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 종교 사상들은 모두 현실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부분은 서구화의 영역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 

그러나 유교는 달랐다. 대성약범을 지향한 유교는 다른 전통 종교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 현실적인 정치윤리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었다. 때문에 서구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유교 속에 현실적인 윤리 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신앙, 사후 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 세속을 초월하는 성스러움의 오라 등이 있었다면 그렇게 급속하게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이 대성약범(大聖若凡) 때문에 공자는 새롭게 평가받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한 부분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류의식의 발달단계로 보았을 때 앞으로는 대성약범의 종교가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정치사상이나 윤리는 낡은 면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깨달음과 수양론 등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점진적인 성스러움
하늘보다 땅신보다 인간을 더욱 중시한 태도, 
그리고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통합하려는 거시적 관점 등은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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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8

Namgok Lee 박석 교수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장(章)

(2) Facebook
박석 교수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장(章)을 발췌 소개한다.
( * )는 내 의견을 보태는 것이다.
====
인류의식의 획기적인 진보에 따라 종교적 성스러움에 대한 관념도 점차 바뀌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적 합리적 사유능력의 발달로 신화적 초월적 성스러움이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라질 수 없듯이 성스러움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성스러움의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거꾸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특성의 하나가 숭고지향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종교에서는 ‘성(聖)스러움’이라고 말해 왔고, 그것이 인간의 사라질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존 제도 종교는 크게 쇠퇴할 것으로 보는데, 그 종교성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 깊게 체현(體顯)될 것이다)

‘초월성과 일상성의 통합’이라는 방향에서 박 교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① 신화적 성스러움에서 인간적 성스러움으로
② 집단주관적 우주론에서 보편적인 우주론으로
③ 내면세계에 치우친 수도(修道)에서 현실과 소통하는 수도로
이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를 고전적 성스러움의 차원에서
세상을 향해 종교적 사랑이나 자비를 베푸는 차원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현대적 성스러움의 관점에서
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나 갈등을 해결하고
현실사회를 좀 더 사람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

(*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동안 제도 종교가 이런 면에서 부족하고 지배 세력의 옹호자로 작용해 온 면이 많았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타나는 사조로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석가나 예수가 고민했던 지점은
근대 이후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모순 갈등론이 나타낸 일면성과 독단성 그리고 투쟁이나 혁명 등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여러 문제들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들이 다시 부각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나선형 순환의 사상 및 실천의 진전이 아닌가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선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독특한 문화지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과거에 하지 못한 반성을 변화된 현실에서 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관념의 후진성인데,
이것이 현실정치의 혼돈을 부추기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진보를 지향하는 운동은 ‘관념과 현실의 괴리’를 넘어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바라보면 유교의 종교성 여부는 문제가 복잡하고 애매하다. 그러나 화광동진(和光同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차원의 성스러움으로 보자면 유교는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라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세련된 고등종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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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1, 崇高-

형용사
숭엄하고 고상하다. 순화어는 `높고 거룩하다'.
"숭고한 희생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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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ubl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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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의 의미 - 사전 - WORDROW
https://wordrow.kr › 사전


옛 문물을 높여 소중히 여기다., 뜻이 높고 고상하다., 산이 높고 우뚝하다.



숭고하다 뜻: 뜻이 높고 고상하다. - WORDROW
https://wordrow.kr › 사전


숭고하다 崇高하다 : 뜻이 높고 고상하다. 어휘 형용사 혼종어 · 숭고한 희생. · 그의 죽음이 가져다준 숭고한 교훈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학교에서는 ...


숭고 - 나무위키:대문
https://namu.wiki › 숭고


16 Nov 2020 — 하지만 흔히 대중에 알려진 사람에게 빗대는 숭고함의 뜻은 
많은 것들을 빗댄 것이나 그것을 최소화되었거나 그나마의 나은 선택의 길을 한 사람이라면 ...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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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높고 훌륭하다. One's ideal being high and great. 숭고한 가치. 속도조절. 숭고한 사랑. 속도조절. 숭고한 의식. 속도조절. 숭고한 이상. 속도조절.



숭고하다 뜻 - 뜻이 높고 고상하다.,산이 높고 우뚝하다.,옛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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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높고 고상하다.,산이 높고 우뚝하다.,옛 문물을 높여 소중히 여기다.



숭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 › wiki › 숭고


미학에서, 숭고란 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 도덕적, 지적, 형이상학적, 미적, 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 ...


선생님 - 강남구청 인터넷수능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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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y 2021 — 숭고하다라는 뜻이 잘 이해가 안되기도 해서요 ㅜㅜ 안타까운건지 숭고한건지 알려 ... 
숭고하다는 본받을 만한 높은 정신적 경지나 사상을 의미해요.



자연의 숭고함을 느낀 적 있나요?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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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Sept 2019 —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느낌은 숭고하다 라고 부르게 ... 나약함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발전하도록 ...



영어 한국어 사전에 숭고함 의 의미 1
https://www.almaany.com › en-kr


celestially. 거룩하게 , 숭고하게 , 신성하게. male. 남성의 ; 숫컷의. move up. 숭진시키다 , 숭급시키다 , 끌어올리다 , 숭진하다 , 숭급하다. outnumber.



숭고하다 - 제타위키
https://zetawiki.com › wiki › 숭고하다


26 July 2017 — 존엄하고 거룩하다. 뜻이 높고 고상하다. 2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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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학에서, 숭고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도덕적지적형이상학적미적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의 가능성을 넘는 위대함을 나타낸다.

고대 철학[편집]

숭고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연구는 롱기누스에 기인한다. 이것은 기원과 저자가 확실하지 않지만 1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롱기누스의 경우 숭고함은 특히 수사학의 맥락에서 위대하거나 고상하거나 고상한 생각이나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숭고한 것은 더 큰 설득력으로 경외와 존경심을 일으킨다.

근대 철학[편집]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자연의 미적 특성으로서의 숭고한 개념의 발전은 18 세기 제3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쿠퍼 와 존 데니스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1]

에드먼드 버크숭고 개념을 발전시켰다.[2] 버크는 숭고와 미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숭고와 미의 관계는 상호 배타성 중 하나이지만 둘 다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으며, 숭고함은 공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지각이 허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

1764년 이마누엘 칸트는 관찰 대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록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숭고한 것이 고귀한 것, 훌륭함, 무서운 것의 세 가지 종류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숭고를 문화적 차이의 표식이자 동양 예술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에 대한 그의 목적론적 견해는 그가 "동양" 문화를 덜 발달되고 정치적 구조 측면에서 더 독재적이며 신의 법칙을 더 두려워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중국 예술의 특징 인 복잡한 세부 사항의 초과 또는 이슬람 예술의 패턴이 숭고의 전형적인 예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예술 형식의 탈 체화와 무형 함이 시청자에게 압도적인 미적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했다.[4]

현대 철학[편집]

20세기 신칸트 미학의 독일의 철학자와 이론가 맥스 데소어는 다섯 개 주 미적 형태(미적인 것, 숭고한 것, 비극적인 것, 추한 것, 우스운 것)를 공식화했다.[5]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따르면 미학의 주제로서 숭고한 것은 모더니즘 시대의 주요 특징이었다.[6] 리오타르는 모더니스트들이 인간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지각자의 해방으로 미적인 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숭고한 의미는 인간의 이성에서 아포리아를 가리키는 방식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적 힘의 가장자리를 표현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다양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참고 문헌[편집]

  1.  Nicolson, Marjorie Hope. Mountain Gloom and Mountain Glory. Ithaca, 1959
  2.  Nicolson, Marjorie Hope. "Sublime in External Nature".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Ideas. New York, 1974.
  3.  Monroe C. Beardsley, "History of Aesthetics",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1, p. 27 (Macmillan, 1973). But Edmund Burke disagreed: "Nor is it, either in real or fictitious distresses, our immunity from them which produces our delight ... it is absolutely necessary that my life should be out of any imminent hazard, before I can take a delight in the sufferings of others, real or imaginary ... it is a sophism to argue from thence, that this immunity is the cause of my delight".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Part 1, Section 15)
  4.  Hegel, G.W.F.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 Translated by T.M. Know. Oxford: Clarendon, 1975.
  5.  Emery, Stephen A.. "Dessoir, Max". In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p. 355. Macmillan (1973).
  6.  Lyotard, Jean-François. Lessons on the Analytic of the Sublime. Trans. Elizabeth Rottenbe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Lyotard expresses his own elements of the sublime but recommends Kant's Critique of Judgment, §23–§29 as a preliminary reading requirement to understanding his analysis.


사자성어 읽기 - 和光同塵 (화광동진)
입력 : 2015.11.05


화광동진(和光同塵)에서 
和는 화할 화, 
光은 빛 광, 
同은 한 가지 동, 
塵은 티끌 진으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노자' 제56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앎을 말하지 않으며, 
앎을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목구비를 틀어막고 지혜의 문을 닫으며, 
지혜의 날카로움을 꺾으며, 지혜로 인해 일어나는 혼란을 풀고, 지혜의 빛을 감추어 나타내지 않고(和其光), 속세의 티끌과 하나가 된다(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현동(玄同)의 사람에 대해서는 
친해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득을 줄 수도 없고 해(害)를 줄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 할 수도 천(賤)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貴)한 것이 된다.

"도(道)는 언제나 무위(無爲)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노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화광동진'과 '현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현실 사회 속에서도 이러한 도(道)의 법칙에 순응(順應)하는 것만이 최상(最上)으로 여겼다. 따라서 현실적인 인간사회에서 위대한 일, 좋은 일, 남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 등일지라도 그것을 내세워서 자기의 공으로 여기며 자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자기 스스로가 주재자가 되고자 하는 것 따위는 부도덕(不道德)한 것으로 여겼다.


불교(佛敎)가 중국에 전파됨에 따라 중국의 고승(高僧)들은 
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어휘를 빌려서 중생을 제도하는 말로 삼았다. 
빛나는 불교의 진리를 가슴속에 가득 안고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으며 
행동(行動)으로 대중(大衆) 속에 파묻혀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고 제도(濟度)하는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당시의 승려(僧侶)들은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모르는 척 살아야 하고, 
높이 올라갈수록 아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세출의 뛰어난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자신의 빛을 줄여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지혜롭게 화목을 추구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고용철 중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