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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기자명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입력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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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무한의 길을 걷는 우주를 한 불사조에 비 할진대, 우주 자체나 한 마리의 새나 한 사람의 영혼이 무엇이 다르리오. 한 생명이 굴러 나감에 거긔에는 반다시 선과 빗과 소리가 잇슬 것이다.

시인 조명희(1894~1938)의 시집 <봄 잔디밧 위에>(1924) 머리말이다. 3·1운동에도 동참했던 조명희는 1928년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일본 첩자라는 누명으로 총살된다. 그는 1920년대 비중 있는 작가였음에도 소련 망명 문학인, KAPF 문학인이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조명을 받지 못한 비운의 시인이다. ‘개벽학당’이 아니었다면 이 시인의 시집을 찾아볼 일도, 이 글에서 동학과 개벽의 내용을 발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개벽학당에 오기까지
이화학당, 배재학당은 들어봤어도. ‘개벽학당’이라니 낯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개벽학당 개강 파티에서 당장 이병한 교수는 ‘학교는 근대의 산물이며, 서원, 서당은 조선시대 유학을 배우는 곳이었다면 학당이 그나마 우리의 배움을 설명하는 적합한 명칭’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40대에 접어든 나는 어쩌다 개벽학당에 오게 됐고 대부분이 20대인 친구들과 ‘개벽’에 대해 공부하게 됐을까? 이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몇 번의 외국 여행경험으로 내가 갖게 된 고민에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는 동남아시아, 서유럽, 일본의 각각 두 곳을 여행했다. 여행 중에 각 나라의 다른 문화, 자연환경을 살펴보고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다른 경험, 다른 감정이었지만 정리해보면 피부색으로 드러나는 국가 간 경제 격차, 지구 안에서의 불평등, 그 불평등 때문에 내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다.

100여 년 전, 동남아 국가를 식민지 삼았던 유럽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나라보다 가난한 그곳에서 휴양을 즐기는 모습, 오래되고 낡아 보이지만 근대를 선도했고 그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도시의 모습. 그곳에서 기초 노동력을 제공하는 유색인종. 동남아시아보다는 경제적으로 앞섰고 서구의 문화를 선진화의 목표로 보고 달려왔던 한국인으로서, 지구적 불평등 사이에 낀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여행지에서 늘 느끼는 것이다. 정점은 일본이었다. 올해 초, 일본 여행 중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곳을 둘러보았다. 17세기 막부시대 일본인들이 네덜란드·포르투갈인들을 인공 섬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역을 했던 ‘진짜’ 데지마는 사라졌지만 복원해 박물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선도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이 초기에 서양의 문명을 거부했을 때,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이유가 궁금했다. 함께 한 여행자는 이 물음에, ‘당시 조선과 중국이 왕권 중심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었던 반면 막부시대의 일본은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경쟁했기에, 외부세력과 손을 잡는 것을 이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오~ 이건 『총·균·쇠』의 저자 제러드다이아몬드식 해석인데?”라며 웃었지만 이렇게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엉뚱하게도 근대의 개인주의를 일본이 전혀 체현하고 있지 못하며 그래서 과거를 반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뻗어 나갔다. 외압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 과정, 포스트모던 시대에 ‘통일’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 이런 것들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서구 중심의 문명과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국가, 인종 간 불평등이 싫지만, 우리가 후발주자인 것 같은 열등감도 싫은,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묻어두고 생활하던 중 개벽학당의 소식을, 정확하게는 개벽학당의 ‘한국 사상사 강의’ 소식을 접했다. 아마도 ‘개벽학당’이라는 말부터 처음에 들었다면 흔히들 가지고 있는 ‘개벽’이라는 단어의 종교적 이미지 때문에, 한국사상사 강의도 듣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국 사상사 강의에 살짝 일어난 호기심이 개벽학당 수강 신청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강의를 맡아준 선생님과 함께 소개된 책 『한국 근대의 탄생』(조성환) 때문이었다. 강사에 대한 정보가 내게 없으니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책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정리하지 못한 나의 고민에 일격을 가한 느낌이었다. ‘내가 여전히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구나.’ 개벽학당 소식을 알게 된 건 우연이지만, 이 강의를 듣는 것은 내게 필연인 것 같았다.

과거-현재-미래가 대화를 나누는 개벽학당
개벽학당은, 일주일에 한 번 오전에는 한국 사상사 강의를 오후에는 주제에 맞는 책을 한 권씩 정해서 읽고 집중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사정상 오전 강의에만 참여했다. 한국 사상사 강의를 함께 듣는 이는 ‘한국만의 사상이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에서 한국의 자생적 근대의 흐름을 찾고 그 가치를 개벽에 둔다는 것은 ‘개벽학당’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을 어떻게 잡아갈지 궁금할 뿐이었다.

오전 강의가 과거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상의 특징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면 오후는 현재로부터 미래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라이프 3.0』, 『휴먼 에이지』 등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며 인공지능, 환경 문제 등에 인간사회가 어떻게 대처하며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 갈지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벽학당에서의 하루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미래에 대한 모색의 시간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세미나는 참여할 수 없어서, 개벽학당 카페에 올라오는 ‘벽청(개벽하는 청년)’들의 크리틱을 읽으며 내용을 좇아가 보기도 했다.

‘개벽’으로 보는 한국사상사
다양한 시간들이 개벽학당을 이루고 있지만 ‘나’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시간이, 내게는 가장 기초작업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 사상사 강의는 서구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안의 우리 사상의 개성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시간이었다.

연구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사상사를 접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정규교육에서는 고등학교 윤리시간이 전부이다. 요즘에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 동양, 서양, 한국의 사상사를 다루고 있다. 윤리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중국의 영향 아래, 조선 건국을 전후로 불교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며, 원효, 퇴계와 같이 몇몇 특징 있는 인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름 이 시간을 재미있어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을 통해 나에게 남은 인상은, 우리는 강국으로부터 외침뿐만 아니라 사상적 영향도 늘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조선까지는 중국의 성리학을 따르고 현대에 와서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민중들의 끊임없는 역사 참여였다.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섰던 의병, 보국안민의 기치를 건 동학농민항쟁,3·1 만세운동, 4·19, 5·18, 87년 6월 항쟁 등 민초들이 만들어 온 역사였다. 2017년 촛불 항쟁까지. 여전히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함께하는 힘이 있다는 건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라 생각했다.

정규 교육을 벗어나, 사상사 전체를 다루는 것은 어렵지만 간혹 철학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공자, 노자, 니체, 스피노자, …. 누군가 해석해놓은 책을 보지만 우리나라 철학가, 사상가는 없다. 한동안 ‘핫’했던 강신주, 도올 등의 철학책도 결국은 서양 철학자, 중국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보는 것들이었다. 물론 고전이라는 것은 지역과 경계, 시대를 넘어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고전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 사회와 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가능하다면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 것으로 우리를 보는 성찰은 없지? 우리 것은 무엇이지? 이런 물음이 도돌이표처럼 맴돌 때가 있다. 이 물음을 자각하지 않을 때가 더 많기도 하다. 이 의문은 은폐되고 묻혀 있어, 그냥 우리는 늘 앞서 있는 누군가를 따라만 가는 존재라는 무의식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태로 있음에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상사 강의는 중국의 유·불·도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시작으로 했다. 중국의 것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우리만의 개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특성을 찾는 작업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중국 철학을 기준으로 우리 사상사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외부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의 관점으로 중국의 유·불·도가 한반도에 와서 어떻게 적용되고 영향을 미쳤는지 보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은 무엇일까? ‘개벽’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개벽’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가면 이 이야기는 흥미가 줄어들 수 있다. 한국 사상사 강의 또한 그러했다. 물 흐르는 듯 가보니, 개벽과 만났다.

치열한 자기 인식의 사상가들
지금도 명실상부 동양의 고전으로, 많은 이가 원문보다는 전문가의 해석으로 읽는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로 동아시아의 특징을 읽었다.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공자 ‘자신은 새로운 것을 창조[作]하지 않고 고대의 모범을 해설[述]했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논어』의 구절 중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이야기하며 때에 맞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많이 접했지만 ‘술이부작’은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강의를 맡은 조성환 선생님은 “창조하지 않는 학습”으로 동아시아의 특징을 명명했다. 중국 성인을 롤 모델로 삼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이 마치 규범처럼 돼버렸던, 중화사상으로 점철됐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이해하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作] 없는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으나 발전과 진보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作’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창조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자기에 대한 치열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에게 맞는 무엇을 찾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자기 인식을 했던 사람들이 우리 사상사에서 있었나?

신라의 최치원, 원효, 조선 초기 사대부, 조선의 세종, 퇴계, 다산 정약용, 동학을 만든 최제우, 최시형, 원불교의 박중빈, 한살림의 장일순까지 그들이 남긴 기록과 글들을 살피며 치열한 자기 인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우리 사상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읽어 내려갔다. 원불교의 박중빈과 한살림의 장일순을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모두 아는 인물이지만 개벽학당에서 살펴본 이들은 좀 낯설었다. 보지 못했던 면을 보았기 때문이고 보던 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9세기의 최치원을 7세기의 원효보다 먼저 살펴보았다. ‘한국 철학의 첫 페이지를 무엇, 어디에서부터 설정할 것인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최치원이라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섬으로서 격리돼 있던 일본과 달리 지리적으로 중국과 붙어 있던 우리가 중국의 앞선 문명과 철학을 수용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 같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가운데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는 강의 중 이야기는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듯 심각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당나라 유학을 하고 그곳에서 성장했음에도 최치원에게서 주체적 수용과 동인東人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태도를 그가 남길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은 중국을 ‘서국’, 신라를 ‘동국’으로, 공자, 노자, 석가를 단순한 직책으로 표현하며 중국을 대국으로 모시는 입장에서 벗어나 주체적 사고를 드러낸다. 그는 <난랑비 서문>에 “포함삼교包含三敎”라는 표현으로 신라가 중국의 유·불·도를 ‘포함’했다고 한다.유·불·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라의 정체성에 맞게 포용·수용했다는 의미로 ‘포함’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동인의식’ 때문이다. 최치원의 ‘동인의식’은 중국이라는 대국과 비교한 열등감의 결과가 아니라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의 결과임이 그의 글 곳곳에서 묻어난다.

다음으로 치열한 자기 인식의 사상가로, 세종을 들수 있다. 조선의 왕이었던 세종을 사상가로 보는 입장은 이제까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개벽학당에서 우리는 한글 창제를 비롯해서 백성들과 함께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실천이,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해석에 동의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음악과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업적, 창조성을 추동했던 힘은 중국을 기준으로 조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는 삶을 백성과 함께[與民] 살고자 했던 ‘주체성’이었다. 그렇기에, 중국 문자의 ‘술述’에 머물지 않고 한글이라는 ‘작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학의 최제우. 시대를 한참 뛰어넘었다. 강의 순서는 이와 달랐지만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중심으로 두고 이야기해본다. 우리 ‘사상’의 첫 ‘창조’였다. 우리의 토착적 풍토와 어울리는,사람을 하늘로 보는[人乃天] 사상. 비단 사람에 머물지 않고 우주 안의 생명에 모두 하늘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사상이었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을 확산시킨 최시형은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인간관을 정립하는데,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이것은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독립된 자아로 인간관을 정립하는 서구의 관점과 많이 다르다. 인간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 등 ‘조화’의 인간관을 지닌 ‘천인상여’ 사상은 평화와 생명의 사상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한살림의 장일순에게 계승된다.

동학까지 가기 전에, 강의에서는 우리의 ‘하늘’에 대한 관점과 지향도 살펴봤다. 조선 초기 사대부 권근의 <천인심성분석지도>, 퇴계의 <천명도설후서>, 다산의 상제上帝인仁에 대한 재해석이 그 자료들이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하늘이었다, 동학의 하늘님이 그냥 불쑥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대한 우리만의 철학적 사유가, 사상가들의 개성과 함께 진행돼 왔다.

중국보다 ‘天’을 사용하는 횟수가 많은 조선의 ‘하늘’은 왕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였다. 중국의 ‘天’과 달리 때로는 어느 순간에나 함께 하는 인격적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하늘과 가까워지고자 부단히 자신을 수양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그러다 동학에서는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하늘님이 되는 것이다. 대반전이다. 그래서 사람을, 생명을 모시는 태도로 존중하고 귀하게 대하는 것이 하늘님인 인간의 덕목이며 실천 과제이다.

15주의 강의마다 사상과 인물에 대한 정보, 지식을 알아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 마음이 열리고 나와 세상을 다시 보는 개벽이구나. 느지막이 생각해본다.

‘다시 개벽’ 안에 다 있네.
1894년 갑오농민항쟁으로, 동학도들은 거의 목숨을 잃거나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 그 사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갑오년에 태어난 조명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태어난 해의 항쟁을, 거기에 스며들었던 사상을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듣고 생활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진천에서도 농민의 저항과 투쟁이 있었기에 더더욱.

동학의 정신이 어떻게 3·1운동으로 이어지는지 이야기하기에 나의 지식은 짧지만, 1919년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조명희에게는 자신이 세상의 빛을 본 해에 있었던 역사에 대한 뜨거운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시집 머리말에 동학의 사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주도, 새도, 사람도 그 영혼이 다르지 않다는 글귀는 모두가 한울님이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구한말 즈음에 탄생한 ‘민족종교’로 규정되는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등은 모두 ‘개벽’을 말한다. 유학의 시대가 끝나가던 조선 말기, ‘천주’를 믿는다는 서양 세력의 횡포를 보면서 탄생한 신생 종교들이 모두 개벽을 말한다는 것은 ‘개벽’에 우리만의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개벽’은 무엇일까? ‘내가 변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개벽’이며 ‘내 안의 하늘을 자각해서 다른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는 것이 개벽’이라는 강의 내용에 밑줄을 긋는다. 혁명과 개벽이 다른 것은 외부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에서 시작해서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다시 개벽‘을 말한다. 그것은 또 다시 우주의 섭리로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의 개벽, 문명의 개벽이다. 그동안 불평등하고 부조리했던 인간 사회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주의 생명이 모두 한울이며 하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깥으로 향해 있던 관점을 나에게로 돌려놓고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강의록의 이 문장을 읽는데 마음에서 쿵 소리를 낸다. 우리가 최치원으로 시작해, 세종, 최제우, 그 밖의 개벽종교를 살펴본 이유이다.

나의 시점으로 나를 보는 것, 늘 타인을 비교 대상을 두고 달려왔던 이들에게(내 생각에 한국 문화는 이 문화가 무척 강하다. 나라와 나라의 비교, 사람과 사람의 비교) 다른 누구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모든 생명에 하늘이 있으니 귀하게 모시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자고. ‘다시 개벽’ 안에 평등,평화, 생명존중, 페미니즘이 다 ‘포함’돼 있다.

개벽학당에서 만난 사람
개벽학당을 여는 날, 놀라웠다. 나는 어쩌다가 이곳에 온 것 같은데 그곳에 온 20대 청년들은 스스로를 개벽하는 청년(벽청)이라 칭하며,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벽청들 중에는 자발적 고졸의 삶을 선택하며, 통과의례처럼 사회에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대학 입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아무런 방황과 갈등 없이, 신념에 넘쳐 그런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 한 명, 한 명이 빛났다. 단지 청춘이어서 빛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벽청이라 이름 짓기 전에, 이미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만들며 ‘다시 개벽’하는 중이었다.

벽청 중에는 ‘공공公共하는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청년들도 있다. 삼포 세대, 오포 세대라는, 기성세대의 규정에 머물지 않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청년들이었다. ‘렛츠 피스’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그들만의 색깔로 삶의 공공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벽청들, ‘공공公共하는 청년’들 심각하게 멋지다.

개벽학당 이후 …
‘분단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인 나를 바라본다. 우리가 서구 근대화를 정신없이 따라간 시간만큼 분단과 전쟁으로 대결과 위협의 시간을 보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얼마나 다른 길을 걸어왔나? 그 차이가 너무 크니 탈분단 상태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의견도 많다. 통일은 어떤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북이 더 개방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진보적 북한학, 통일학자들은 말한다. 북만 변하면 될까?우리는 이대로 이 모습대로 있으면 될까? 아이들에게 혐오가 놀이가 돼 버리고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이 모습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어느 일방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함께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그 변화의 가치에 개벽이 있어도 좋겠다. 남북이 함께 서구의 근대화 물결을,자본주의, 사회주의 방식으로 좇았던 역사를 평가해보고 치열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한 토착적 근대화에 대해 토론한다면 어떨까? 물론,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북과 토착적 근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기준으로 사상사를 다시 평가하고 우리의 근대성을 찾아보자고 한다면 그들의 ‘주체’와도 만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개벽’의 가치에서 통일 사회의 공통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끝내고 생명과 평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의 중심 가치가 ‘개벽’이면 아주 괜찮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분단을 끝내는 일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전쟁과 대결의 분위기로 더욱 공고해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개벽은 어떤 모습일까. ‘모심’의 철학, 모두가 모두를 하늘님과 같은 태도로 대할 수 있다면 여성을 비롯한 역사의 소수자들도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화제를 몰고 있는 ‘검블유’ 임수정, ‘녹두꽃’의 한예리, 역사에서 묻혀 있던 여성의 서사가 드러나는 과정을 환영하며 자기 언어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양반과 선비의 전유물이었던 ‘학學’을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들이 할 수 있었던 ‘동학’도 민중이 자기 언어를 갖는 과정이었구나. 퇴계, 다산과 같은 훌륭한 철학가가 있었음에도 처음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쓰인 『용담유사』(최제우의 말을 최시형이 옮긴 책)는 사상의 첫 창조물이자, 역사에서 소외됐던 민중이 자기 언어를 갖는 계기였다. 그 언어에도 시대적 결핍으로 여성과 소수자의 이야기가 적을 수 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 만들어나가면 될 것이다.

종강 자리에서 한 학기의 소회를 나누며 벽청들은 개벽을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자신들을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이에 비유했다. 개벽은 절대적 이상으로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삶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기 언어로 말하는 과정에서 ‘개벽’이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리라. 나는 그저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나를 보고 싶어서, 서구 근대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개벽학당에 왔는데 나름의 미래까지 개벽과 함께 그리고 있다.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2021/09/27

서양의 세계 종교 입문서는 어떻게 동양을 배제했는가 휴스턴 스미스

01 최명훈.pdf
서양의 세계 종교 입문서는 어떻게 동양을 배제했는가: 휴스턴 스미스의 세계의 종교와 이능화의 백교회통 간의 비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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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연구 제38호 한국종교학연구회, 2020, pp. 1-21. 서양의세계종교입문서는어떻게동양을배제했는가:
휴스턴스미스의 세계의종교와이능화의 백교회통 간의비교를중심으로
최 명 훈*

目 次

Ⅰ. 서론
Ⅱ. 타 종교들을 바라보는 관점
1 세계의 종교의 제국주의적 시각과 영원주의적 기획: 러셀 맥커 천의 비판을 중심으로
2 백교회통의 ‘회통’과의 비교
Ⅲ. 종교들을 비교하는 틀
1 세계의 종교의 ‘신(God)’
2 백교회통의 ‘천(天)’과 세계의 종교의 ‘신(God)’ 비교
3 백교회통의 ‘도(道)’와 세계의 종교의 ‘신(God)’ 비교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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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미국 학자가 쓴 세계 종교 입문서를 읽으면서 한국의 독자는 어떤 느낌을 받 을까. 특정 배경의 영향을 받은 한 명의 학자가 여러 문화권의 종교들을 성공적 으로 서술할 수 있을까. 종교 서술이 특정 입장에 치우친다면 이것은 결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어떤 효과를 줄까. 이러한 질문들을 안고 시작하는 이 글은 오랜 기 간 세계 종교 입문서로 (특히 북미 지역에서) 활용됐고, 여전히 강의 현장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휴스턴 스미스의 세계의 종교(The World’s Religions)1)를 다 룬다. 
휴스턴 스미스의 세계의 종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북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세계 종교 입문서다. 이 책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최 근까지도 북미 지역의 대학 수업들에서 여전히 권위 있는 입문서로 사용되고 있 다.2) 하지만 1958년 초판 인간의 종교(The Religions of Man)로 시작한 이 책은 현대의 시점에서 여러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주로 러셀 맥커천(Russell 
McCutcheon)의 주장을 검토한다. 
맥커천은 1997년 출판된 그의 책3)에서 세계의 종교가 ‘전통(tradi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와 과거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러한 이분법 은 제국주의적인 기획과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2018년의 논문4)을 통 해 스미스의 책이 최근에까지도 널리 읽히는 이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2018 년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의한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스미스가 역사 적 상세함(detail)보다 의미(meaning)를 강조하면서 영원주의적(perennialist) 관점을 드러내는 점을 추가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러셀 맥커천의 비판을 바탕으로 스미스의 서술이 특히 ‘동양’의 독자 들을 어떻게 배제하는지 논의를 이어가려고 한다. 스미스의 서술은 그가 전제하 고 있는 (혹은 갖고 있는) 서구적 종교관과 서술 대상이 되는 종교 사이에서 생 겨나는 특정한 비교종교학적 작업을 수반한다.5) 이 글에서는 ‘동양’ 혹은 한국적 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 서술과 스미스의 서술을 비교하여 스미스의 서술이 보이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석사과정
1) Huston Smith, The World’s Religions (New 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1991).
2) Russell McCutcheon, “A Question (Still) Worth Asking about The Religions of Man,” Religion & Theology 25(2018): 300-2. 
3) Russell McCutcheon, Manufacturing Relig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4) McCutcheon, “A Question (Still) Worth Asking about The Religions of Man.” 
5) 맥커천은 스미스가 비교의 방법을 공언한 것은 아니지만, 내포되고 수반되는 비교가 전 체적인 텍스트에 있다고 주장한다. McCutcheon, Manufacturing Religion, 108.
는 한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능화의 백교회통(百敎會通)6)을 함께 살펴본다. 
백교회통은 1912년 쓰인 이능화의 첫 저서로, 한국에서 최초로 세계 종교들 을 비교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7) 근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민속학 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능화는 유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바라문교, 천도 교, 대종교 등 11개의 종교 전통과 불교를 비교하며 서술하고 있다. 그는 불교를 중심으로 모든 가르침이 통할 수 있다는 것(회통)을 보여주려는 데에 목표를 두 지만, 동시에 불교가 다른 종교 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다른 종교들에 대한 판단과 평가도 자제하고 있다.8) 그래서 김종서는 이능화가 자료의 측면에 서나 방법론의 측면에서 모두 두드러진 ‘근대 한국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특히 이 글은 이능화의 서술이 서구의 영향이 적었던 시기에 ‘동아시아적 방 법론’의 성격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스미스의 서술과 비교될 수 있 는 측면을 드러낸다. 그래서 두 서술이 공통으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비교하고자 한다. 이 과정 을 통해 스미스가 놓치고 있는 ‘동아시아적 관점’을 이능화의 서술에서 찾고자 한다. 
먼저 이능화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회통’과 스미스의 제국주의적 시각 및 영 원주의적 접근을 비교한다. 이를 통해 타 종교들을 바라볼 때 드러나는 스미스의 배타적 입장과 이능화의 관용적 입장을 대조한다. 또한 스미스가 여러 종교들을 비교하는 틀로서 주로 ‘신(God)’ 개념을 활용하는 반면, 이능화는 ‘천(天)’ 개념과 ‘도(道)’ 개념을 중심으로 종교 간의 비교를 시도하는 것에서 보이는 차이점에

6) 이능화, 백교회통, 강효종 옮김 (서울: 운주사, 1989).
7)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구의 전개」, 한국사상사대계 6, 철학종교연구소 엮음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290.
8) Yi Neunghwa, Harmonizing the Hundred of Teachings: Baekgyo hoetong, trans. Dan B. Jung (Seoul: Korea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2017), xvii-xviii.
9)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구의 전개」, 289.

주목한다. 이는 스미스의 배타성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비교종교학적 작업으로 드 러나는지 보여준다.
들어가기에 앞서 두 저자를 비교하는 과정의 한계와 의의를 짚고자 한다. 두 서술의 시기나 접근 가능한 자료가 다르다는 점에서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는 어 렵다. 스미스의 한계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 서술상의 장점은 논의되지 못했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이능화의 서술이 현대의 시각에서 봤을 때 비학문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10)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미스가 놓치는 ‘동 양적’ 관점들을 이능화가 제시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두 서술의 비교가 가진 의의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Ⅱ. 타종교들을바라보는관점

한 개인이 여러 종교들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해당 저자의 관점은 서술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저자가 살아오면서 친숙하게 경험한 종교들과 그 밖의 종교 들(‘타 종교들’)에 대한 서술은 다를 수 있다. 또한 개별 종교에 대한 관점 이외 에 여러 종교들을 동시에 바라볼 때, 각 종교들 간의 관계에 대한 관점에도 저자 의 입장이 개입한다. 휴스턴 스미스와 이능화는 여러 종교들을 대할 때 저마다 전제로 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 스미스를 비판적으로 봤을 때, 러셀 맥커천은 그 의 저술에서 제국주의적 시각과 영원주의적 기획이 드러나는 점을 지적한다. 반 면 이능화는 책의 제목과 서문에서부터 자신이 여러 종교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10) 여러 종교와 불교의 비교 부분이 일관되거나 독특한 종교학적 관점 없이 개념적, 교리 적 무차별 대응만을 시도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 구의 전개」, 290; 하지만 신광철은 이능화가 단순히 자료를 모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료들의 의미를 밝히는 것까지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능화의 의의를 제대로 평가하 려면 ‘그 어떤 무엇을 지향하는 모음’을 분석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 광철, 「이능화의 종교사학과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 4 (1995): 185; 또한 고전의 인용을 나열하는 것은 당시 아시아에서 중요한 전통이었다는 설명도 있다. 

Yi, Harmonizing the Hundred of Teachings, xxiv.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회통’이 전제돼 있음을 밝히고 있다.

1. 세계의종교의제국주의적시각과영원주의적기획: 러셀맥커 천의비판을중심으로
휴스턴 스미스의 세계의 종교는 오랜 기간 판매되어 온 책이다. 1958년에 처음 출판된 이래 많은 개정판들이 나왔고, 2009년에는 50주년 개정판이 출판됐 다. 이 책은 또한 오랜 기간 살아남은 것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의 대학생들을 위 한 권위 있는 입문서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맥커천이 출판사를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3백만 부 이상이 팔렸고, 그 중 2분의 1에서 3분의 2 정도가 수업용 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초판이 출판된 지 60년이 지난 책을 두고 맥커 천은 왜 여전히 인기가 유지되는지 질문을 던지고,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맥커천이 스미스를 비판하며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스미스가 ‘전통
(tradition)’이라는 용어를 수차례 사용하며 ‘현대, ‘이성’, ‘서양’을 ‘전통’과 이분법 적으로 구별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스미스 책 유교 챕터의 다 음 구절들을 인용한다.
현대적 삶이 부족 사회의 전통 중심적(tradition-dominated) 삶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져서 관습(mores)이 통제되는 것이 얼마나 완전히 가능할지 깨닫기 어려워졌 다... 중국은 수많은 개인들이 등장하게 되는 사회적 발전의 새로운 지점에 도달 했었다. 집단의식보다 자의식에 따라 이러한 개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1인칭 복수 형으로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1인칭 단수형으로 생각했다. 이성은 사회적 관습
(convention)을 대신했고, 개인의 이익이 그룹의 기대를 넘어섰다. 개인주의와 자 의식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고, 반성 없는 연대(unreflective solidarity)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12)
 
11) McCutcheon, “A Question (Still) Worth Asking about The Religions of Man,” 302.
12) Smith, The World’s Religions, 161-63.
맥커천에 따르면, 스미스의 서술은 많은 대립항(polarities)을 전제한다. 특히 맥 커천은 ‘전통적(traditional)’이라는 용어가 오랫동안 ‘비문명화된’, ‘원시적인’, ‘부 족적인’ 혹은 ‘비서구적인’라는 말의 완곡 어법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분석이 스 미스의 용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3) 무엇보다 스미스의 서술은 ‘그들 (즉, 중국인)’을 ‘우리(즉, 서구의 독자)’와 대립되도록 묘사한다.
맥커천은 종교에 대한 연구가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을 비판한다. 이것은 스미스가 독자들에게 타 종교를 이해하 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내용의 서문에서 잘 드러난다. 
최근에 나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외곽의 맥스웰 공군 기지에 있는 천 명의 장교들에게 타 민족 종교들에 대한 강연을 하러 공군 전투기로 이동한 적이 있 다. 나는 그들만큼 배움에 열정을 가진 학생들을 본 적이 없다. 무엇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했을까? 여러 사례들 중에서 이것은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들이 공부하는 민족들을 군대로서 동맹, 적, 군사 점령의 대상으로 언젠가 대하 게 될 것을 염려했다. 그런 상황에서 타 민족의 행동을 예상하고, 최악의 경우 그 들을 정복하게 되면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해진다.14)
맥커천은 이 구절에서 세계가 ‘동맹과 적’,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뉜 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교종교학을 통해 전달되는 지식이 특정 집단 만을 소유자로 만드는 효과적인 제국주의적 도구가 된다고 비판한다.15) 이와 같 은 맥커천의 비판은 스미스의 이분법적 서술이 특정 대상을 배제한다는 것을 지 적한다. 그의 비판을 따르면, 스미스의 서술에서 배제되는 대상에는 비서구
(non-Western)의 독자들과 ‘비서구적 종교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13) McCutcheon, Manufacturing Religion, 178-79. 
14) Huston Smith, The Religions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58): 7-8. McCutcheon, 
Manufacturing Religion, 179-80에서 재인용. 이 글에서는 1958년 초판의 내용을 인용했다. 
1991년 판에도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지만, 기지의 이름이나 위치 같은 구체적인 사실들 이 생략되고 점령이나 정복 등의 표현이 빠졌다.
15) McCutcheon, Manufacturing Religion, 180.
이에 더해 2018년의 논문에서 맥커천은 추가적인 비판점으로 스미스가 ‘영원 주의적 접근(perennialist approach)’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영원 주의적 접근은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본질이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논의를 가리킨다. ) 이 글에서 영원주의적 기획 자체의 문제점을 검토하려는 것은 아니 다. 여기서는 스미스의 영원주의적 접근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그의 제국주의적 시각이 동반될 때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스미스의 서술은 동양 종교를 효과적으로 배제할 위험성을 지닌다. 공통으로 상 정되는 본질에 ‘비서구적 종교들’이 배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책의 서문에서 종교는 ‘사실의 문제(a matter of facts)’가 아니라 ‘의 미의 문제(a matter of meaning)’라고 말한다. ) 스미스가 서술하는 의미로서의 종 교는 ‘넓은 일반화(broad generalizations)’를 거치면서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건들 을 배제하고, ‘모든 사람’과 관계되는 초역사적인 지혜와 의미의 사례가 된다. ) 또한 스미스는 ‘인간 본성 속 본질적인 유사성(the essential similarity in human nature)’을 통해 독자들에게 세계 종교 전통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데, ) 이는 그의 영원주의적인 기획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스미스는 종교 전통들을 설명할 때 해당 종교만의 용어가 아닌 보편적인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힌두교를 서술할 때 두드러진다. 그는 힌두교에 대한 서술을 시작하면서 ‘힌두교적인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힌두 교 챕터 66쪽 중 약 15쪽 가량을 전개하고 있다. 대신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원 하는 것은 무엇인지, 힌두교는 그러한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일반적 인 용어를 통해 이야기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목샤(moksha)나 아트만(atman), 브 라만(brahman)이라는 용어가 각각 한 번씩만 설명 없이 언급되는데 이는 열 번째 페이지에서였다. 이러한 서술은 각 종교 전통들이 가진 고유의 세부적인 특징들 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과 함께 보편적으로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2. 백교회통의 ‘회통’과의비교

서론에서 언급했듯 백교회통에는 여러 종교들을 대등하게 비교하려는 관점 과 불교를 강조하려는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20) 이능화는 자신이 불교를 강조하 는 이유가 자신이 불자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밝히면서 다른 종교인들을 배척하 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렇듯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지만, 불교를 중 심으로 하는 그의 입장은 ‘회통(會通)’으로 드러난다. 그는 서문에서 이러한 그의 입장과 여러 종교들을 비교하고 회통하려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이 한 가지 씩의 교(敎)를 만나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어떤 것이 올바른 종교이며 또 어떤 것이 삿된 종교라 할 수 있겠는 가? (중략)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따지고 보면 원래 한 가지 둥근 원이 나누어 져 백 가지의 길이 이뤄졌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자기 것은 옳고 남의 것은 그르다고 분별을 짓는다. 그러다보면 원래 하나이던 것이 공연히 분파를 많이 만들어 결국은 물과 우유의 섞이는 면을 보기가 어렵고 모순 만이 팽배해 질 것이 염려가 되는 것이다. 이에 본인은 모든 종교의 강령을 열람 하고 대조해 서로 견주어 보아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가리고, 필요에 따라 원문을 인용하여 증거를 하면서 회통케 하였다....또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모든 문장을 판별해 가는 부문은 나 자신이 불교인인 까닭으로 불교를 비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올바로 밝힌 것이므로 혹 다른 종교인이 이를 볼 때는 이점에 오해가
없기를 당부한다.21)
이능화는 불교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들 간의
20) 이병욱, 「이능화 종교관의 변화」, 정신문화연구 28 (2005): 167.
21) 이능화, 백교회통, 6-7.

갈등을 해결하고자 회통을 시도했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백교회통의 서문 은 제국주의적 시각이 묻어나는 세계의 종교의 서문과 대조적이다. 
이능화의 회통은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전된 회통을 기반으로 한다고 볼 수 있 다. 본래 회통은 “불교라는 이름 밑에 광범위하게 포함된 제 교설과 기타의 화의 (化儀)들을 적절히 위치지우며, 그 상대적 가치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관용적 입장”을 의미한다.22) 김종명의 설명에 따르면,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회통론’은 8 세기 이후 중국에서 발전돼 왔다.23) 초기 회통은 불교 내의 선 명상과 교학을 일치시키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이후 이는 유교와 불교 사이의 회통으 로, 나아가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 회통으로 변화했다. 특히 회통은 그 선구자 인 원효 이래 한국 불교의 중요한 측면으로 고려돼 왔다.24)   
백교회통 속 이능화의 회통은 동아시아 전통의 연장선에서 다종교 상황이라 는 근대적 현실에 회통 개념을 확대해서 적용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서문에서 이능화는 특정 종교에 대한 우월함을 배제한 채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종교 다원주의적 인식을 드러낸다.25) 이능화의 회통은 당시 한국의 모든 종교들에 적 용되었다. 회통의 중심인 불교는 우월한 하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여러 종교들의 공존을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다. 따라서 백교회통의 회통은 자기 종교가 다른 종교의 진리를 포함한다고 보는 ‘내포주의(inclusivism)’의 입장이라기보다는,26) 
22) 이기영, 「한국불교의 근본사상과 새로운 과제」, 한국불교연구,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2006), 329.
23) Kim Jongmyung, “Yi Nǔnghwa, Buddhism, and the Modernization of Korea: A Critical Review,” in Makers of Modern Korean Buddhism, ed. Jin Y. Park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10), 99. 
24) 회통을 한국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보는 시각은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원효 이 래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주제이자 특징으로 다뤄진 것은 맞지만, 이는 조화를 추구하 는 불교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심재룡,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불교 평론 3 (2000)을 참고하라.
25)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구의 전개」, 290.
26) 김영호는 이능화의 회통이 자기 종교 안에 다른 종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원리 이기 때문에 내포주의라고 보았다. 김영호, 「이능화의 종교회통론」, 한국학 연구 8 (1997): 215-16. 불교는 여러 종교들을 통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 선택되었고, 이는 이 능화가 불자이기 때문일 뿐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달리 말한다면, 불
 
동등한 위치에 놓인 종교들 간의 대화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백교회통의 ‘회통론’은 앞서 논의한 스미스의 영원주의적인 관점과 마찬가 지로 여러 종교들 간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가 하나였으나 그것이 갈라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능화의 회통론은 영원주의적 관점과 유사한 점들을 보인다. 회통론 또한 결국 여러 종교들 사이의 ‘같음’을 위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영원주의적 기획은 보편적이고 공통된 하나의 본질을 상정하지만, 이능화의 회통은 ‘서로 통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는 점에서 분명 한 차이가 있다. 김영호가 “바다만 있고, 백 개의 냇물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표현했듯이 회통은 각 종교의 모습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다.27) 그리고 영원주의적 접근은 모든 종교들 간의 공통점을 찾지만 회통은 불교와 각 종교들 간의 연결점을 찾는 작업이다. 그래서 이능화는 불교가 아닌 종교의 경전 구절을 제시하고, 여기에 대응할 만한 내용의 불교 경전 구절을 함께 배치해 둘 사이의 차이점 혹은 유사점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비교 작업을 수행했다. 불교 가 아닌 종교들 간의 직접적인 비교는 없었다.
이렇듯 조화 혹은 통합을 추구하는 한국적·동아시아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이 능화의 회통론은 앞서 비판했던 스미스의 관점과 달리 관용과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불자라는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미리 밝히고 불교를 중심으로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작업을 수행한 것은 현대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연구자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실 속 저자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 든 종교들로부터 제3자의 입장을 유지하는 완전한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 운 이상이다. 그러나 이능화처럼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리 밝히는 것은 절대 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대적인 객관성’을 획득하는 것일 수 있다. 완전히 객관적 일 수 없다면,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 이처
 
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신자가 자신의 종교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들을 통하도록 하는 작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능화의 회통론은 각 종교가 자신의 입장을 중심에 놓고 다른 종교들과 통할 수 있다는 점을 불교의 사례로서 보여준 것이다. 
27) 김영호, 「이능화의 종교회통론」, 214.
럼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후 다른 종교에도 동등한 입장을 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비로소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다원주의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Ⅲ. 종교들을비교하는틀
스미스와 이능화는 독자의 보다 나은 이해 혹은 저자의 보다 나은 서술을 위 해 저자 자신이 전제하고 있는 관점을 비교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특히 두 저자 모두 종교들 간의 공통적인 구조를 발견했다고 여길 때, 그것을 자신들이 전제하 는 관점의 종교 현상과 비교하며 서술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각 저 자가 전제하고 있는 종교와 서술 대상으로 하는 종교 사이의 비교종교학적 관점 을 드러낸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비교의 관점이자 틀은 스미스의 경우 ‘신(God)’ 개념이고, 이능화의 경우 ‘천(天)’과 ‘도(道)’ 개념이다.

1. 세계의종교의 ‘신(God)’

스미스는 책의 곳곳에서 대문자 ‘G’로 시작하는 용어 ‘신(God)’을 사용했다. 이 용어는 대개 기독교의 유일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이것은 힌두교를 설명 할 때 잘 드러난다. 힌두교를 설명할 때 스미스는 ‘신’ 개념을 빈번하게 사용하 는데 특히 자주 발견되는 것은 박티 요가(bhakti yoga)를 설명할 때다. 신과 인간 의 직접적인 관계에 사랑을 통해 헌신하는 박티 요가가 스미스의 ‘신’과 관련한 논의와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스미스는 박티 요가의 기본적인 원칙들 은 기독교에서 그 예시가 잘 드러난다고 언급한다. ) 
스미스가 ‘신’을 다른 종교에 비교적으로 적용하는 작업이 잘 드러나는 사례 는 불교를 설명하는 챕터에 등장한다. 여기서 스미스는 ‘열반(nirvana)’ 개념이 곧 ‘신’이 될 수 있는지 검토한다. ) 그에게 이 문제는 우선 종교라는 정의가 신을 필요로 하는가의 여부와 관련된다. 만약 종교가 신을 필요로 한다면 불교는 신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지만, 종교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불교 를 종교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미스는 ‘신’의 정의를 재검토한다. 만약 신이 의도를 갖고 우주를 창조한 ‘인격적 존재(personal being)’를 의미한다 면, 열반은 신이 아니며 불교라는 종교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적(atheistic) 이라고 말한다. 한편 신(God)이 ‘Godhead’ )를 의미한다면, 인격성(personality)은 이 개념 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과 유사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신’은 스미 스(그리고 서구의 독자들)에게 어떤 종교적인 현상을 바라볼 때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또한 유교를 설명할 때 스미스는 유교가 윤리(ethics)인지 종교(religion)인지 질 문을 던진다. ) 스미스에 따르면 종교의 좁은 정의는 ‘인간 존재의 초월적 근거 와 인간성을 연결시키는 관심’이다. 그는 이 정의를 적용한다면 그 초월적인 근 거가 ‘하늘(Heaven)’이라는 ‘무언의 존재(muted one)’이긴 하지만 유교는 여전히 종교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스미스는 ‘하늘’의 존재를 ‘신’과 직접 비교하지는 않 지만 이 같은 정의로만 종교로서의 유교를 한정하는 것은 ‘초월적 존재’가 종교 의 필수 조건이라는 그의 시각을 보여준다. 
눈여겨 볼 점은 이능화가 현대에 ‘God’을 의미할 때 흔히 사용되는 ‘신(神)’을 스미스가 말하는 ‘신(God)’의 의미로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신을 가리킬 때는 ‘상제(上帝)’라는 표 현을 썼다.  ) 달리 말한다면, 서구의 신 개념에 적절히 들어맞는 개념이 동아시 아에는 본래 없었고, 이능화가 활동하던 시기까지도 스미스의 유일신 ‘God’과 같 은 개념이 한국에 널리 퍼져있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2. 백교회통의 ‘천(天)’과 세계의종교의 ‘신(God)’ 비교

‘천(天)’은 이능화가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틀로 제시하는 개념이다. 이능화는 11개의 종교들과 불교를 비교한 뒤 12장 ‘모든 종교를 총합하여 불교와 대조함’ 에서 천 개념을 제시한다. ) 그는 “도교가 주로 자연에 방임(放任)하는 것을 제 외하고는 모든 종교가 하늘(天)로써 위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자신이 수행한 비교 작업의 성과를 밝힌다. 

이능화는 천을 형체(形體), 주재(主宰), 명운(命運), 의리(義理) 등 네 가지로 구 분한다. 첫 번째는 물리적 형태의 천을 가리키고, 두 번째는 세계를 관리하는 존 재로서의 천을 가리킨다. 세 번째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운명을 가리키고, 네 번째는 도덕성 혹은 도덕적 원칙을 의미한다. 이능화에 따르면 유교에는 네 가지 의미의 하늘이 다 있고, 나머지 기독교, 이슬람교, 바라문교, 대종교 등에서 말하 는 하늘은 두 번째 의미의 천(주재)과 관련돼 있다. 이어 그는 불교는 이와는 다 른 네 가지 천(세간천, 생천, 정천, 의천 또는 성천)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 처는 이들을 초월한 하늘 중의 하늘, 즉 ‘천중천(天中天)’이라고 설명한다.

이능화의 ‘천’ 구분은 불완전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한국적인’ 성격의 비교종 교학적 틀을 제시하려 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옛부터 하늘이란 4종으로 구분되 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언급34) 이외에 네 가지로 하늘을 구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증이 부족하다. 또한 각 종교들이 해당되는지 여부 를 결정하는 기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하지만 신광철은 이러한 천 개념이 오랜 역사 속 한국 종교에 이어진 해답의 상징체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는 분 석을 제시한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인들이 ‘하늘을 경험하며 만들어 온 해답의 상 징체계를, 다른 하나는 사제를 통해 ‘힘’과 만나는 제의적 삶에의 참여를 통해 살아가는 무속적 종교를 가리킨다.35) 이는 하늘이라는 존재가 한국인들의 경험 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특히 무속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스미스 또한 ‘천’에 해당하는 ‘하늘(Heaven)’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유교 챕터에서 스미스는 하늘과 땅(Earth)의 영역이 끊임없이 접촉하고 서로 관련을 맺으며, 하늘은 땅의 번영을 통제한다고 설명한다.36) 하지만 스미스는 이능화처 럼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를 엮어 낼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는 않았다. 대신 스미스는 하늘의 개념을 유교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다. 특히 스미스는 하늘을 인간과 관계를 맺는 초월적인 대상으로만 한정 짓고 있다. 이는 앞서 논의했던 스미스의 좁은 의미의 종교 정의에 따르면서도, 이능 화가 제시한 (기독교, 이슬람 등이 속한다고 했던) 두 번째 의미의 천, 즉 ‘주재’ 의 의미로만 ‘하늘’을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능화가 제시하는 ‘천’은 스미스의 ‘신’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되기는 어렵다. 서구의 유일신은 창조주로서 이능화가 제시한 물리적 형태의 하늘마저도 만들어 낸 존재이며 운명이나 도덕을 (불교와는 다른 의미로)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 다. 그렇지만 유사한 측면도 갖는다. 인간을 초월하면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점, 인간이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관계를 맺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스미스의 신이 주로 인격적인 존재, 이능화의 천은 ‘비인격적인 원리’로 대조되는 데서 나타난다. 백교회통에서 인간과 비교적 인 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중국 고대 신앙의 초자연적인 존재들인 ‘귀신(鬼神)’ 이다. 이들은 강력한 초자연적 존재로, 하늘에 살며 바람이나 비, 천둥이 의인화 된 형태이고 이러한 존재 중 최고는 상제로 알려진다.37) 하지만 이러한 존재들 을 모두 초월하는 지고의 존재는 비인격적인 원리로 작동하는 ‘천’이다. 스미스

35) 나아가 신광철은 이러한 천(天) 개념은 이능화의 종교사학의 의도가 한국 종교의 원류 를 ‘신교(神敎)’라고 밝히는 데 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인다. 신광철, 「이능화의 종교학 적 관점」, 종교연구 9 (1993): 184.
36) Smith, The World’s Religions, 183-87.
37) Yi, Harmonizing the Hundred of Teachings, 32.

또한 신의 정의를 비인격적인 존재(Godhead)로 보는 경우에, 열반이 신 개념에 해당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 이능화의 기독교 서술에는 신과 인간이 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 할 만하다. 애초에 이능화의 서술에는 수행자이자 스승으로서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 이외에 기독교의 신이 활동하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3. 백교회통의 ‘도(道)’와 세계의종교의 ‘신(God)’ 비교

이능화가 ‘천’ 개념을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틀로 제시했다면, ‘도(道)’는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동아시아적’ 종교를 서술할 때 활용되는 틀로 강조된다. 
유교와 불교의 비교, 도교와 불교의 비교에서 ‘도’와 관련된 주제가 많이 등장 한다. 도의 정의와 도가 갖는 특징들 혹은 도를 위해 수행하는 방법 등에 대해 유교 및 도교와의 비교에 수차례 다루고 있다. 이때 이능화는 의도적으로 ‘도 (道)’라는 한자를 중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공통된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스미스 또한 ‘도’의 개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룬다. ) 다만 이는 도교를 설명할 때만 등장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도(Tao)’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형언할 수 없고(ineffable)’, ‘초월적인(transcendent)’인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자연의 모든 생명을 이끌어가는 내재적인 (immanent) 힘을 가리킨다. 세 번째는 앞서 묘사된 우주적 도와 꼭 들어맞을 때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은 도덕경에 등장하는 ‘도’에 대해서는 적 절한 설명일 수 있다. 하지만 스미스의 ‘도’는 동아시아 종교들을 함께 읽어내는 틀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백교회통 속 유교, 불교의 도는 도교의 도와 마찬가지로 모두 수행을 통해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서로 비슷한 점도 많지만 각 종교 전통마다 강조하는 바 가 다르다. 유교에서 도는 주로 ‘덕’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40) 하 늘 의 명을 따르는 데서 비롯된다. )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루어 야 할 상태 혹은 진리를 의미한다. ) 

이러한 ‘도’를 스미스의 ‘신’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것은 동아시아 종교의 ‘수행 전통’이다. 백교회통에서 도는 ‘닦는 것(도를 닦는다)’으로 등장하기도 하 고, ) ‘드는 것(도에 든다)’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 이처럼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보다는 인간 스스로가 도를 향해 나아가는 수행이 중요하게 다 뤄진다. 그런 점에서 이능화는 기독교를 다룰 때 예수가 보이는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하고,  ) 개인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수행에 빗대기도 한다.46)

Ⅳ. 결론

이 글에서는 스미스의 세계의 종교가 ‘동양’을 배제하는 방식에 대해서 다 루었다. 맥커천의 비판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관점과 영원주의적 관점이 결합해 ‘비서구의 독자들’과 ‘비서구적 종교’를 배제하게 되는 스미스의 시각을 논의했 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종교를 서술할 때 스미스의 비교종교학적 접근이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 ‘신(God)’ 개념이 활용된 사례들을 통해 살펴봤다. 

세계의 종교가 동양을 배제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동 아시아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이능화의 백교회통과의 비교를 시도했다. 이 능화의 ‘회통’이 스미스의 제국주의적/영원주의적 관점과 비교했을 때, 종교다원 주의를 전제로 한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관용적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제안했다. 또한 백교회통에서 비교종교학적 틀로 활용된 ‘천(天)’과 ‘도(道)’의 개념이 가 진 특징을 살펴보며 서구의 ‘신’이 놓치는 부분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글은 세계의 종교가 가진 한계를 드러내는 비교라는 목적 아래 백교회 통을 다루면서 그 전반적인 가치를 다루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백교회 통에 대한 연구가 이능화의 방법론을 주로 다룬 것에 더해 이 글은 ‘동아시아 적’ 혹은 ‘한국적’ 비교종교학적 작업으로서의 성과를 집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 다. 

이렇게 백교회통이라는 자료를 활용해 그 가치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과 마 찬가지로 스미스의 책이 지금의 시점에서 활용되는 방안도 논의돼야 한다. 휴스 턴 스미스의 세계의 종교는 북미에서 종교학이라는 분야가 제대로 자리 잡기 이전부터 영향력 있는 세계 종교 입문서로 활용돼 왔다. 서구의 독자들에게 효과 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큰 인기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 책이 현재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활용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내용이 전부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비판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 맥커천의 표현처럼 이 책은 과거 종교학의 방법론이나 문제 점을 드러내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이 글에서 논의된 문제점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과 서구의 학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구화돼 온 학문적 지형에서 활동하는 비서구의 학자들도 역시 ‘동양적인 것’을 배제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 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다룬 ‘동양-서양’의 이분법을 포함해서, 현실 속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 내는 권력과 지식의 결합은 계속해서 비판되고 수정돼야 한다.
  
주제어: 휴스턴 스미스, 세계의 종교, 이능화, 백교회통, 회통, 비교종교학, 천(天), 도(道)

일: 2020. 11. 10. 심사종료일: 2020. 11. 18. 게재확정일: 2020. 11. 27.
참고문헌
김영호. 「이능화의 종교회통론」, 한국학 연구 8 (1997): 187-216.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구의 전개」. 한국사상사대계 6: 근대편, 철학 종교연구소 엮음, 243-314.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신광철. 「이능화의 종교사학과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 4 
(1995): 177-206.  
______. 「이능화의 종교학적 관점」, 종교연구 9 (1993): 173-98. 
이기영. 「한국불교의 근본사상과 새로운 과제」. 한국불교연구, 327-51. 서울: 한 국불교연구 원, 2006[1982].
이능화. 백교회통. 강효종 옮김. 서울: 운주사, 1989. 
이병욱. 「이능화 종교관의 변화」, 정신문화연구 28 (2005): 165-84. 
Kim, Jongmyung. “Yi Nǔnghwa, Buddhism, and the Modernization of Kore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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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utcheon, Russell. Manufacturing Relig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______. “A Question (Still) Worth Asking about The Religions of Man,” Religion & Theology 25 (2018): 298-311. 
Smith, Huston. The World’s Religions. New 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1991[1958].
Yi, Neunghwa. Harmonizing the Hundred of Teachings: Baekgyo hoetong, trans. Dan B. Jung. Seoul: Korea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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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ow a Western Introductory Book on World Religions Excludes the East:
Focusing on the Comparison of Huston Smith’s The World’s Religions and Yi  Neunghwa’s Harmonizing the Hundred Teachings
Choi, Myung Hoon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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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article critically reviews Huston Smith’s The World’s Religions by focusing on how the book excludes Eastern readers and Eastern religions. I compare Smith’s work with Yi Neunghwa’s Harmonizing the Hundred Teachings (Baekgyo hoetong, 백 교회통) to illustrate Smith’s exclusive view and Yi’s alternative perspective based on an East Asian view. First, I discuss how Smith’s viewpoint toward “other” (non-Western) religions can be considered imperialist. I review Russell McCutcheon’s critique that Smith supposes a dichotomy between tradition and reason or between the West and the East to separate “us” from “them.” In addition, Smith generalizes religions broadly to show the similarity of all religions. This “perennialist approach” can exclude non-Western religions as it is accompanied by an imperialist view. Instead I suggest Yi’s “harmonizing” (hoetong, 회통), a concept based on the East 
Asian Buddhist tradition, as an alternative. Yi’s harmonizing relates all religions with Buddhism. However, his attempt is not intended to emphasize that Buddhism is superior to other religions. Yi considers Buddhism as a tool to understand other religions; therefore, his viewpoint can be understood as religious pluralism aimed at the coexistence of religions.  Second, I show Smith’s and Yi’s comparative religious frames for describing unfamiliar religions. Smith noticeably juxtaposes the notion of “God” with similar notions of non-Western religions. On the other hand, Yi suggests four different meanings of “Heaven” (Cheon, 천) as a framework to comprehend all religions. Furthermore, I show that Yi utilizes “Dao” (Do, 도) when he describes East Asian religions such as Confucianism, Buddhism and Daoism with an emphasis on the tradition of self-discipline.
Key words: Huston Smith, The World’s Religions, Yi Neunghwa, Harmonizing the 
Hundred Teachings, hoetong (harmonizing), comparative religion, cheon 
(heaven), do (dao)

2021/09/16

Autodidacticism - Wikipedia

Autodidacticism - Wikipedia

Autodidac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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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didacticism (also autodidactism) or self-education (also self-learning and self-teaching) is education without the guidance of masters (such as teachers and professors) or institutions (such as schools). Generally, autodidacts are individuals who choose the subject they will study, their studying material, and the studying rhythm and time. Autodidacts may or may not have formal education, and their study may be either a complement or an alternative to formal education. Many notable contributions have been made by autodidacts.

Etymology[edit source]

The term has its roots in the Ancient Greek words αὐτός (autóslit.''self'') and διδακτικός (didaktikoslit.''teaching''). The related term didacticism defines an artistic philosophy of education.

Terminology[edit source]

Various terms are used to describe self-education. One such is heutagogy, coined in 2000 by Stewart Hase and Chris Kenyon of Southern Cross University in Australia; others are self-directed learning and self-determined learning. In the heutagogy paradigm, a learner should be at the centre of their own learning.[1]

Modern education[edit source]

Autodidacticism is sometimes a complement of modern education.[2] As a complement to education, students would be encouraged to do more independent work.[3] The Industrial Revolution created a new situation for self-directed learners.

Before the twentieth century, only a small minority of people received an advanced academic education. As stated by Joseph Whitworth in his influential report on industry dated from 1853, literacy rates were higher in the United States. However, even in the U.S., most children were not completing high school. High school education was necessary to become a teacher. In modern times, a larger percentage of those completing high school also attended college, usually to pursue a professional degree, such as law or medicine, or a divinity degree.[4]

Collegiate teaching was based on the classics (Latin, philosophy, ancient history, theology) until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re were few if any institutions of higher learning offering studies in engineering or science before 1800. Institutions such as the Royal Society did much to promote scientific learning, including public lectures. In England, there were also itinerant lecturers offering their service, typically for a fee.[5]

Prior to the nineteenth century, there were many important inventors working as millwrights or mechanics who, typically, had received an elementary education and served an apprenticeship.[4] Mechanics, instrument makers and surveyors had various mathematics training. James Watt was a surveyor and instrument maker and is described as being "largely self-educated".[6] Watt, like some other autodidacts of the time, became a Fellow of the Royal Society and a member of the Lunar Society.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se societies often gave public lectures and were instrumental in teaching chemistry and other sciences with industrial applications which were neglected by traditional universities. Academies also arose to provide scientific and technical training.

Years of schooling in the United States began to increase sharpl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his phenomenon was seemingly related to increasing mechanization displacing child labor. The automated glass bottle-making machine is said to have done more for education than child labor laws because boys were no longer needed to assist.[7] However, the number of boys employed in this particular industry was not that large; it was mechanization in several sectors of industry that displaced child labor toward education. For males in the U.S. born 1886–90, years of school averaged 7.86, while for those born in 1926–30, years of school averaged 11.46.[8]

One of the most recent trends in education is that the classroom environment should cater towards students' individual needs, goals, and interests. This model adopts the idea of inquiry-based learning where students are presented with scenarios to identify their own research, questions and knowledge regarding the area. As a form of discovery learning, students in today's classrooms are being provided with more opportunity to "experience and interact" with knowledge, which has its roots in autodidacticism.

Successful self-teaching can require self-discipline and reflective capability. Some research suggests that the ability to regulate one's own learning may need to be modeled to some students so that they become active learners, while others learn dynamically via a process outside of conscious control.[9] To interact with the environment, a framework has been identified to determine the components of any learning system: a reward function, incremental action value functions and action selection methods.[10] Rewards work best in motivating learning when they are specifically chosen on an individual student basis. New knowledge must be incorporated into previously existing information as its value is to be assessed. Ultimately, these scaffolding techniques, as described by Vygotsky (1978) and problem solving methods are a result of dynamic decision making.

The secular and modern societies gave foundations for a new system of education and a new kind of autodidacts. While the number of schools and students rose from one century to the other, so did the number of autodidacts. The industrial revolution produced new educational tools used in schools, universities and outside academic circles to create a post-modern era that gave birth to the World Wide Web and encyclopaedic data banks such as Wikipedia. As this concept becomes more widespread and popular, web locations such as Udacity and Khan Academy are developed as learning centers for many people to actively and freely learn together. The Alliance for Self-Directed Education (ASDE) is also formed to publicize and provide guidance or support for self-directed education.[11]

In history, philosophy, literature, film and television[edit source]

The first philosophical claim supporting an autodidactic program to the study of nature and God was in the philosophical novel Hayy ibn Yaqdhan (Alive Son of the Vigilant), whose titular hero is considered the archetypal autodidact.[12] The story is a medieval autodidactic utopia, a philosophical treatise in a literary form, which was written by the Andalusian philosopher Ibn Tufail in the 1160s in Marrakesh. It is a story about a feral boy, an autodidact prodigy who masters nature through instruments and reason, discovers laws of nature by practical exploration and experiments, and gains summum bonum through a mystical mediation and communion with God. The hero rises from his initial state of tabula rasa to a mystical or direct experience of God after passing through the necessary natural experiences. The focal point of the story is that human reason, unaided by society and its conventions or by religion, can achieve scientific knowledge, preparing the way to the mystical or highest form of human knowledge.

Commonly translated as "The Self-Taught Philosopher" or "The Improvement of Human Reason", Ibn-Tufayl's story Hayy Ibn-Yaqzan inspired debates about autodidacticism in a range of historical fields from classical Islamic philosophy through Renaissance humanism and the European Enlightenment. In his book Reading Hayy Ibn-Yaqzan: a Cross-Cultural History of Autodidacticism, Avner Ben-Zaken showed how the text traveled from late medieval Andalusia to early modern Europe and demonstrated the intricate ways in which autodidacticism was contested in and adapted to diverse cultural settings.[12]

Autodidacticism apparently intertwined with struggles over Sufism in twelfth-century Marrakesh; controversies about the role of philosophy in pedagogy in fourteenth-century Barcelona; quarrels concerning astrology in Renaissance Florence in which Pico della Mirandola pleads for autodidacticism against the strong authority of intellectual establishment notions of predestination; and debates pertaining to experimentalism in seventeenth-century Oxford. Pleas for autodidacticism echoed not only within close philosophical discussions; they surfaced in struggles for control between individuals and establishments.[12]

In the story of Black American self-education, Heather Andrea Williams presents a historical account to examine Black American's relationship to literacy during slavery, the Civil War and the first decades of freedom.[13] Many of the personal accounts tell of individuals who have had to teach themselves due to racial discrimination in education.

The working-class protagonist of Jack London's Martin Eden (1909) embarks on a path of self-learning to win the affections of Ruth, a member of cultured society. By the end of the novel, Eden has surpassed the intellect of the bourgeois class, leading him to a state of indifference and ultimately suicide.

Jean-Paul Sartre's Nausea (1938) depicts, as a secondary character, an autodidact.

Comic-book superhero Batman is frequently depicted as an autodidactic polymath who has acquired a vast range of skills over the years either by various trainers or having trained himself, and his expertise in various disciplines is virtually unmatched in the DC comics universe.

In The Ignorant Schoolmaster (1987), Jacques Rancière describes the emancipatory education of Joseph Jacotot, a post-Revolutionary philosopher of education who discovered that he could teach things he did not know. The book is both a history and a contemporary intervention in the philosophy and politics of education, through the concept of autodidacticism; Rancière chronicles Jacotot's "adventures", but he articulates Jacotot's theory of "emancipation" and "stultification" in the present tense.

The 1997 drama film Good Will Hunting follows the story of autodidact Will Hunting, played by Matt Damon. Hunting demonstrates his breadth and depth of knowledge throughout the film but especially to his therapist and in a heated discussion in a Harvard bar.

One of the main characters in The Elegance of the Hedgehog (2006), by Muriel Barbery, is an autodidact. The story is told from the viewpoint of Renee, a middle-aged autodidact concierge in a Paris upscale apartment house and Paloma, a 12-year-old daughter of one of the tenants who is unhappy with her life. These two people find they have much in common when they both befriend a new tenant, Mr. Ozu, and their lives change forever.

In the Hindu epic, the MahabharataEkalavya is depicted as a tribal boy who was denied education in the science of arms from royal teachers from the house of Kuru. Ekalavya went to the forest, where he taught himself archery in front of an image of the Kuru teacher, Drona, that he had built for himself. Later, when the royal family found that Ekalavya had practiced with the image of Drona as his teacher, Drona asked for Ekalavya's thumb as part of his tuition. Ekalavya complied with Drona's request, thus ending his martial career.

In Suits, the protagonist (Mike Ross) possesses a highly competent knowledge of the law despite not receiving any formal education in any law school. His knowledge is attributable to both his affinity for reading (autodidacticism), in addition to his eidetic memory.

Dr. Spencer Reid in Criminal Minds, played by Matthew Gray Gubler, is an autodidact with an eidetic memory.

In architecture[edit source]

Tadao Ando is a famous autodidact architect of the twenty-first century

Many successful and influential architects, such as Mies Van Der RoheFrank Lloyd WrightViolet-Le-Duc, and Tadao Ando were self-taught.

There are very few countries allowing autodidacticism in architecture today. The practice of architecture or the use of the title "architect", are now protected in most countries.

Self-taught architects have generally studied and qualified in other fields such as engineering or arts and craftsJean Prouvé was first a structural engineer. Le Corbusier had an academic qualification in decorative arts. Tadao Ando started his career as a draftsman, and Eileen Gray studied fine arts.

When a political state starts to implement restrictions on the profession, there are issues related to the rights of established self-taught architects. In most countries the legislation includes a grandfather clause, authorising established self-taught architects to continue practicing. In the UK, the legislation,[14] allowed self-trained architects with 2 years of experience to register. In France,[15] it allowed self-trained architects with 5 years of experience to register. In Belgium,[16] the law allowed experienced self-trained architects in practice to register. In Italy,[17] it allowed self-trained architects with 10 years of experience to register. In The Netherlands, the "wet op de architectentitel van 7 juli 1987" along with additional procedures, allowed architects with 10 years of experience and architects aged 40 years old or over, with 5 years of experience, to access the register.[18]

However, other sovereign states chose to omit such a clause, and many established and competent practitioners were stripped of their professional rights.[19] In the Republic of Ireland, a group named "Architects' Alliance of Ireland" is defending the interests of long-established self-trained architects[20] who were recently deprived of their rights to practice as per Part 3 of the Irish Building Control Act 2007.[21]

Theoretical research such as "Architecture of Change, Sustainability and Humanity in the Built Environment"[22] or older studies such as "Vers une Architecture" from Le Corbusier describe the practice of architecture as an environment changing with new technologies, sciences, and legislation. All architects must be autodidacts to keep up to date with new standardsregulations, or methods.

Self-taught architects such as Eileen GrayLuis Barragán, and many others, created a system where working is also learning, where self-education is associated with creativity and productivity within a working environment.

While he was primarily interested in naval architectureWilliam Francis Gibbs learned his profession through his own study of battleships and ocean liners. Through his life he could be seen examining and changing the designs of ships that were already built, that is, until he started his firm Gibbs and Cox.

Future role[edit source]

The role of self-directed learning continues to be investigated in learning approaches, along with other important goals of education, such as content knowledge, epistemic practices and collaboration.[23] As colleges and universities offer distance learning degree programs and secondary schools provide cyber school options for K-12 students, technology provides numerous resources that enable individuals to have a self-directed learning experience. Several studies show these programs function most effectively when the "teacher" or facilitator is a full owner of virtual space to encourage a broad range of experiences to come together in an online format.[24] This allows self-directed learning to encompass both a chosen path of information inquiry, self-regulation methods and reflective discussion among experts as well as novices in a given area. Furthermore, massive open online courses (MOOCs) make autodidacticism easier and thus more common.

A 2016 Stack Overflow poll[25] reported that due to the rise of autodidacticism, 69.1% of software developers appear to be self-taught.

Notable individuals[edit source]

Notable autodidacts can be broadly grouped in the following areas:

  • Artists and authors
  • Actors, musicians, and other artists
  • Architects
  • Engineers and inventors
  • Scientists, historians, and educators

See also[edit source]

References[edit source]

  1. ^ Samantha Chapnick & Jimm Meloy (2005). "From Andragogy to Heutagogy". Renaissance elearning: creating dramatic and unconventional learning experiences. Essential resources for training and HR professionals. John Wiley and Sons. pp. 36–37. ISBN 9780787971472.
  2. ^ "University lecturers do not guide their students' learning to the same extent; they do not organise their students' private study (no more set homework!); nor do they filter knowledge for you in the same way. There are two reasons for this. The first reason is that you are expected to be independent, capable of organising your life, your time, your studies and your learning, so that when you graduate you are able to function successfully in your chosen profession". Extract from: The student's guide to learning at university, by Geoffrey Cooper, published in 2003 Australia by TheHumanities.com, ISBN 1-86335-510-3
  3. ^ J. Scott Armstrong (2012). "Natural Learning in Higher Education"Encyclopedia of the Sciences of Learning.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8 October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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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Jr, Quentin R. Skrabec (4 May 2012). The 100 Most Significant Events in American Business: An Encyclopedia. ABC-CLIO. ISBN 978-0-313-39862-9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0 March 2017. Retrieved 4 Februar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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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legge 24 June 1923 No. 1395 Archived 4 March 2016 at the Wayback Machine (Architects Act in Italy)
  18. ^ Refer to document on the Dutch Registration System drafted after a meeting between the General Secretary and Dr. Hans Groenevald, Director of the Stichting Bureau Architectenreglster, (SBA) in the Hague on 1 October 1993. 1 October 1993 is a significant date because on that day the protection of the title "architect" came into force in the Netherlands.
  19. ^ Refer to the example of the Republic of Ireland, where hundreds of professionally trained architects oppose new legislation that would prevent them from practicing. See Parliamentary records for more information.
  20. ^ You can access more information from AAoI website Archived 21 May 2013 at the Wayback Machine
  21. ^ For more information, you can access the full text from the Irish Building Control Act 2007 Archived 15 June 2013 at the Wayback Machine
  22. ^ Architecture of Change, Sustainability and Humanity in the Built Environment, Editors: Kristin Feireiss, Lukas Feireiss, ISBN 978-3-89955-211-9.
  23. ^ Hmelo-Silver, C.E.; R.G. Duncan; C.A Chinn (2007). "Scaffolding and achievement in problem-based and inquiry learning: A response to Krischner, Sweller and Clark". Educational Psychologist42 (2): 99. doi:10.1080/00461520701263368S2CID 1360735.
  24. ^ Barab, S.A.; J.G. MaKinster; J.A. Moore; D.J. Cunningham (2001). "Designing and Building an online-community: The struggle to support sociability in the inquiry learning forum". Educational Technology Research and Development49 (4): 71. doi:10.1007/bf02504948S2CID 17614349.
  25. ^ "Stack Overflow Developer Survey 2016"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 February 2017. Retrieved 16 November 2016.

Further reading[edi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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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도적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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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도적 학습(自己主導的 學習)은 배움에 있어서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고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하는 학습 방법이자 능력 개발 방법이다. 비슷한 단어로 자학자습(自學自習), 독학(獨學), 자습(自習)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 4월 7일에 공표된 독학에 의한 학위 취득에 관한 법률에 의해 독학자가 학위를 취득하는 제도 (독학학위제)가 있다.

혼자 공부를 함에 따라 개개인의 실력이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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独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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独学(どくがく、英語autodidacticism)とは、学ぶにあたって、先達者の指導を仰ぐことなく独力[注釈 1]で目標をたてて習熟しようとする学習方法、能力開発の方法である。英語"self-taught" などとも言う。なお、ここで言う「学び」とは、学問が第一ではあるが、それに限らない。

一般的には自習も同義語だが、使用される場面が異なる[1]。広くは教授行為と切り離された学習のことを自学自習、自習と言い、送付された資料を元に学習者自身の責任で学習が進められる種類の遠隔教育通信教育にもその側面がある[2]

韓国では1990年4月7日に公布された「独学による学位取得に関する法律」により独学者が学位を得る制度ができ、試験等の業務は当初中央教育評価院で行われ後に韓国放送通信大学校に移管された[3][4]

日本における独学の歴史[編集]

近代的な学校制度が導入される明治時代までの日本では、農民商人が学問に目覚めた場合、書物を読み、独学のかたわら同好の士と文通し、師を求めるという学校によらない学習手段が一般的であった[5]国文学賀茂真淵本居宣長は生涯において直接対面したのは松坂の一夜限りであったが、以後、手紙のやりとりで師弟として学問の継承、発展に寄与した。

考古学者の鳥居龍蔵植物学者の牧野富太郎もそうした方法によって研究者になった。彼らは裕福な家庭に生まれたため、学校で立身出世する必要性を感じなかったことも大きい。ついには東京帝国大学を研究の場とした彼らであったが、大学ではすでに学歴が幅を利かせるようになっており、学歴のない者は差別的な扱いに苦しむこととなった[5]

明治時代、東京専門学校(現: 早稲田大学)が『早稲田講義録』を発行し、貧しくて高等教育を受けられない人々に大いに活用された。第二次世界大戦前は中学講義録や英語講義録、電気講義録、囲碁講義録などさまざまな講義録が発行され、中等・高等教育の大衆化に大いに寄与した[6]

著名な独学者[編集]

世に広く知られる独学者を列挙するが、より詳しくは「独学者の一覧英語版」を参照のこと。表記内容は左から順に、人名、独学による職業等、生誕年、各人が主たる就学時期に属していた国家や地域(出生地とは限らない)。

脚注[編集]

[脚注の使い方]

注釈[編集]

  1. ^ 独りか複数人かは問題ではない。

出典[編集]

  1. ^ 柏木恭典「『独学』の積極的意味について-ラーメン屋店主の独学と教師の学び-」『千葉経済大学短期大学部研究紀要』第3号、千葉経済大学短期大学部、2007年、 39-54頁、 ISSN 13498312、 NAID 110006225531
  2. ^ 苅谷剛彦、「学習の跳躍 遠隔教育における学習と文化資本の変換」 『教育学研究』 1993年 60巻 3号 p.219-227, doi:10.11555/kyoiku1932.60.219, 日本教育学会
  3. ^ 尹秀一「韓国における独学学位制度の展開」『創価大学別科紀要』第19号、創価大学別科日本語研修課程、2008年、 29-51頁、 ISSN 09164561、 NAID 110007144465
  4. ^ 森利枝「韓国における独学による学位取得制度について」『学位研究』第15号、大学評価・学位授与機構、2001年11月、 39-74頁、 ISSN 09196099、 NAID 120005566603
  5. a b 天野郁夫『学歴の社会史―教育と日本の近代』平凡社平凡社ライブラリー)、2005年1月6日 ISBN 4-582-76526-2ISBN 978-4-582-76526-7。 pp.84-88。
  6. ^ 串間努 (2005年6月2日). “第14回「懐かしき「講義録」の世界」の巻”. まぼろし通販百科. まぼろしチャンネル. 2009年1月23日閲覧。
  7. ^ 貝塚茂樹『孔子』青版 65、岩波書店岩波新書〉、1951年5月15日。ISBN 4-004-13044-1ISBN 978-4-004-13044-4

関連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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