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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2

알라딘: 불교의 업설

알라딘: 불교의 업설

불교의 업설 - 대승성업론 

바수반두 (지은이),윤영호 (옮긴이)CIR(씨아이알)2016-09-13







불교의 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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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116쪽148*210mm (A5)151gISBN : 979115610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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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대승성업론은 비교적 짧은 분량의 논서임에도 불구하고 제부파들의 업설과 교학들이 압축적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업의 인과상속(상속.전변.차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즉, 대승성업론은 무아이면서 어떻게 업의 인과상속이 가능한 것인지를 면밀히 논증하여 불교 최고의 논사, 세친의 체계적인 업설을 읽을 수 있는 논서이다.

목차

해제

1. 내용

2. 저자

3. 구성

4. 문헌자료



약어표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저자 및 역자소개

바수반두 (世親)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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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불교의 업설> … 총 2종 (모두보기)

윤영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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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Ph.D)과 성균관대학교 유교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영상학과 박사과정에서 수학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표업(表業)의 본질에 대한 고찰, 有部의 極微說 연구,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인성론(人性論) 연구, 웰다잉(well dying) 문화형성을 위한 불교의 죽음관 연구, ?불교 視知覺說에 대한 인지과학적 해석? 등과 저서로는 불교의 원자설(불교와 현대물리학의 만남) 등이 있다.

최근작 : <불교의 원자설>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2,500년 불교 업설(業說)의 정수를 압축한 논서



대승성업론은 바수반두(Vasubandhu)의 Karmasiddhiprakaraṇa를 한역하면서 현장(玄奘)이 붙인 제명(題名)이다. 제명만을 풀이한다면 ‘대승의 업을 성립시키는 논서’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사실 대승성업론은 경부(經部)의 관점에서 유부(有部), 정량부(正量部), 일출론자(日出論者), 유심론자(唯心論者) 등 제부파들의 업설을 소개하고 비판하면서 아비달마불교의 업설을 집대성한 논서로 규정할 수 있다.

대승성업론은 비교적 짧은 분량의 논서임에도 불구하고 제부파들의 업설과 교학들이 압축적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업의 인과상속(상속.전변.차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즉, 대승성업론은 무아이면서 어떻게 업의 인과상속이 가능한 것인지를 면밀히 논증하여 불교 최고의 논사, 세친의 체계적인 업설을 읽을 수 있는 논서이다.

대승성업론은 불교에서의 행위(action, 業)와 행위체(agency, 業體)이론의 정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불교전공자, 불교신자가 불교의 업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연구되어야 하는 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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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알라딘: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권오민 (지은이)CIR(씨아이알)2019-10-23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488쪽

책소개

불교에서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매우 익숙한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낯선 곳이기도 하다. 오늘의 그곳은 이슬람세계일 뿐더러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있는 카슈미르는 시시때때로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분쟁지역이며, 간다라 또한 아프카니스탄과 접경의 파슈툰의 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비록 천여 년 전에 불교가 사라졌을지라도 그 이전 천년에 걸친 불교학의 산실이자 동아시아불교의 고향인 그곳을 찾아, 과거 그곳의 불교와 오늘의 현실을 기록한 인문지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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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1 프롤로그

선인들이 노닐던 불교학의 산실 ◦ 동아시아 불교의 고향 ◦ 불교가 사라진 비운의 땅


카슈미르

02 카슈미르① 불교의 새로운 무대
사마타와 비파샤나 수행의 최적지 ◦ 불교의 새로운 무대 ◦ 스리나가르에서의 불교와의 만남

03 카슈미르② 하르완, 불전의 결집과 『대비바사론』 편찬
하르완, 여섯 아라한의 원림(園林) ◦ 결집, 성전편찬회의 ◦ 카슈미르 결집

04 카슈미르③ 파리하스포라의 묵타피다 비하르
파리하스포라의 승가람 ◦ 오공(悟空)과 몽제사 ◦ 카슈미르와 근본설일체유부

05 카슈미르④ 현장의 카슈미르 순례
바라물라의 후쉬카라 불교승원터 ◦ 현장의 카슈미르 입경
◦ 현장의 『구사론』 『순정리론』 학습

06 카슈미르⑤ 아반티포라, 『순정리론』의 작론처
현장법사와 『순정리론』 ◦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과 무착, 그리고 세친
◦『순정리론』의 작론처 아반티포라

07 카슈미르에서의 불법의 멸진
불법의 멸진 ◦ 카슈미르에서의 파불 ◦ 불교사원의 힌두사원 화(化)

펀잡

08 아크누르의 암바란 불교승원터
중앙아시아의 관문, 잠무 ◦ 암바란 불교승원터 ◦ 체납강가에서

09 치나야리, 가다연니자의 『발지론』 작론처
감로의 도시, 암리차르 ◦ 치나북티의 타마사바나(闇林寺) ◦ 치니야리, 치미야리
◦『발지론』의 작론처

10 시알코트, 『밀린다팡하』의 무대
『밀린다팡하』의 무대, 샤카라 ◦ 이둘 피트리의 라호르 ◦ 시알코트의 헤드 말라라

탁실라

11 탁실라① 세계인의 도시 탁샤쉬라
탁샤쉬라의 왕 푹카샤티 ◦ 세계사의 무대, 탁실라 ◦ 라왈핀디의 탁실라

12 탁실라② 비원(悲願)과 비화(悲話)의 도시
월광 왕의 머리 보시 ◦ 월광보살의 비원 ◦ 아쇼카 왕의 태자 쿠날라의 비화
◦ 간다라의 ‘이야기 불교’



13 탁실라③ 쿠마라라타의 비유문학

마명의 『대장엄론경』 ◦ 쿠마라라타의 『비유집성』 ◦ 불교의 새로운 동향, 비유문학

◦ 일출론자 쿠마라라타



14 탁실라④ 탁실라의 승가람

모라 모라두의 승원 ◦ 자울리안의 승원 ◦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 ‘물과 젖처럼 화합하라’



간다라



15 페샤와르① 아! 페샤와르
향기로운 땅, 간다라 ◦ 청풍(淸風)과 지덕(至德)의 푸루샤푸르 ◦ 아! 페샤와르

16 페샤와르② 샤지키 데리의 카니시카 스투파
카니시카 스투파 ◦ 작리부도 ◦ 샤지키 데리 ◦ 아쿠나바드

17 페샤와르③ 『구사론』의 작론처, 카니시카 승가람
카니시카 승가람 ◦ 푸루샤푸르와 아요디야 ◦ 불교학의 정초 『구사론』

18 페샤와르④ 부처의 발우와 고르 카트리
푸루샤푸르의 불발(佛鉢) ◦ 불발의 유전, 불법의 유전 ◦ 불교와 음식 ◦ 고르 카트리

19 페샤와르⑤ 올드 페샤와르의 바자르, 핍팔 만디
인간(푸루샤)의 도시, 페샤와르 ◦ 세티 스트리트 ◦ 핍팔 만디의 보리수

20 간다라의 옛 수도 차르사다에서 만난 세우와 법구
푸른 연꽃의 도시, 푸쉬칼라바티 ◦ 세우와 법구 ◦ 불교사상의 다원성

21 간다라 최대 불교승원터 탁티 바히
탁티 바히의 불교승원 ◦ 탁티 바히 승원과 음광부 ◦ 자말 가리의 불교승원

22 샤바즈 가리① 아쇼카 왕의 대마애법칙(法勅)
아쇼카 왕의 법(法)의 칙령 ◦ 샤바즈 가리의 마애법칙
◦ 법칙 제12조 종교 간의 관용과 화합

23 샤바즈 가리② 세간의 상식과 대도(大道)
이슈바라 논사의 『아비달마명등론』 ◦ 수다나 태자의 비원(悲願)
◦ 차나카 데리와 메카 산다

스와트

24 스와트① 불연(佛緣)의 땅 스와트
불연국토(佛緣國土) ◦ 밍고라 ◦ NOC

25 스와트② 밍고라 시내 불적
스와트 박물관의 부조상 ◦ 사이두 샤리프 스투파와 붓카라 승가람
◦ 웃디야나의 타라사(陀羅寺) ◦ 대승과 소승

26 스와트③ 밍고라 주변지역 불적
눈을 잃은 자하나바드 불상 ◦ 신게르다르의 상군왕 스투파
◦ 지거천(地居天)의 니모그람 불교승원

27 다시 카슈미르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의 주도 무자파라바드 ◦ 나티아 갈리
◦ 만세라의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

28 에필로그
경이의 카슈미르 ◦ 회고 ◦ 인도에서 불법은 왜 사라졌는가?

후기
미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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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권오민 (지은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 수료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주요 저서 및 역서]
  • 『有部 阿毘達磨와 經量部 哲學의 硏究』 (경서원: 1994)
  •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2003)
  • 『인도철학과 불교』 (민족사: 2004)
  • 『불교학과 불교』 (민족사: 2009)
  • 『上座 슈리라타와 經量部』 (씨아이알: 2012)
  • 『上座 슈리라타의 經量部 사상』 (씨아이알: 2019)
  • 『원효, 불교사상의 벼리』 (운주사: 2017, 공저)
  • 『阿毘達磨發智論』, 『入阿毘達磨論』, 『阿毘曇八犍度論』 (동국역경원: 1995)
  • 『阿毘達磨藏顯宗論』, 『金七十論』, 『勝宗十句義論』 (동국역경원: 1998)
  • 『阿毘達磨俱舍論』 (동국역경원: 2002) 등 접기

최근작 : <티베트에서의 불교철학 입문>,<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上座 슈리라타의 經量部 사상> … 총 1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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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에서 오늘 우리의 불교학을 돌아보다

카슈미르는 북쪽과 동쪽으로 히말라야와 잔스카르 산맥이, 서쪽으로 피르 판잘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해발 2천의 고원의 계곡으로, 불타는 사마타를 배우고 비파샤나를 따르는 자들의 제일가는 처소가 될 것이라 예언하였고, 파르슈바 협(脇) 존자는 현성이 모여들고 선인이 노니는 곳이라 예찬하였다. 피르판잘 너머의 간다라 또한 우리는 불교미술의 고향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현장법사는 논을 지은 논사들과 성과(聖果)를 증득한 성자들로 인해 언제나 맑은 바람이 일었고 지극한 공덕도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고 찬탄하였다.

실제 그곳은 불교 전등서에 세 번째 법장으로 기록된 마드얀티카(末田地)에 의해 개교한 이래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본거지로 수많은 아비달마 논서가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편찬회의(結集)가 개최되는 등 천여 년 동안 불교학의 산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정리(正理)의 비바사론과 비유(譬喩)의 불교문학은 거의 다 그곳에서 제작되었다. 이는 이후 불교철학과 불교미술의 바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의 전초기지였다. 초기 중국불교사를 장식한 이들은 모두 그곳과 관련 있다. 역경의 대 종장인 구마라집도 현장도 카슈미르에서 불교를 익혔다. 카슈미르의 학적 성향과 전통이 아유타로, 날란다로 전해졌고, 동아시아 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서북변방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유사 이래 페르시아, 그리스, 샤카 파흐라바, 월지(쿠샨), 흉노(에프탈리트), 그리고 가즈니와 무갈(몽골)에 이르기까지 외래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았고, 이미 천년 그 이전부터 힌두왕의 파불(破佛)과 이슬람의 도래로 불교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오늘의 그곳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대표적인 분쟁지역 중의 한 곳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불교학은 고향을 잃었고, 또한 잊었다.

이 책은 권오민 교수가 현장 등 구법승들의 여행기를 길잡이 삼아 자신이 40여 년 읽어온 불교철학과 문학의 제 문헌이 제작된 카슈미르와 간다라, 펀잡의 불교현장을 찾아가는 여행기이자 오래전 그곳에서 꽃피웠던 불교의 역사와 철학과 전설, 그리고 오늘 우리 불교(학)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본 인문지리서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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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9.6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지난 해라고 말해야 할 2019년 한 여름. 무거운 몸을 이끌면서까지 찾아가 들었던 강의가 바로 불교미술에 관한 것이었다. 불자도 아닌 내가 그렇게까지 가고 싶었던 것은 신앙을 갖기 전 이따금 산에 올라가거나 종로에 있는 절에 방문할 적이면 마음이 이내 편안해졌던 기억이 있는 반면, 불교미술은 여전히 내게 무섭고 어렵기만 했기에 좀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타종교를 타인을 이해하듯 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저자는 해당 책을 통해 불교학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불교는 우선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 법에 의지해야 한다는 불타의 말 자체는 유일신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다만 수도이기도 했던 간다라에서 카슈미르로 집결지를 옮겼던 까닭은 습한 기후에서 벗어나 주변이 전부 산지인데다 물산이 풍부하여 선인들이 모여들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무굴제국의 아크바르 황제가 제나두, 즉 이상향이라 여겼으며 불타 또한 사마타와 비파샤나 수행의 최적지라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절이 산속으로 몰려있는데에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다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간다라든 카슈미르든 불교의 진원지이자 중심이지이만 그 위치가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했을 때 변방에 위치한 까닭으로 위협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불교가 인도에 정착한 이후로 더더욱 홀로 남아 불교의 명맥을 이어올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연도 들을 수 있었다. 

즉 카슈미르 결집에서 5백명의 아라한이 모여 편찬하였다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200권은 바로 이에 대한 비바사사의 해석으로 그들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일체법은 그자체로서 진실이며 따라서 실유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중관에서는 이는 개별적 실체 /실체성을 갖지 않은 토끼 뿔과 같은 개념적 존재로 이해하였고 유식에서는 다만 마음 상에 나타난 표상일 뿐 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유심론적 해석의 경우 마음은 이른바 6식으로 분별되는 표층의 그것이 다가 아니며, 심층에 심층의 마음이 고려되어 불교는 마침내 절대 일월론적 경향을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145-6쪽

위의 발췌문처럼 책에서는 간다라 및 카슈미르에 대한 지역적 특색에 더해 불교서적 편찬에 관한 내용도 이에 못지 않게 방대한 양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이 책을 읽고자 했던 불교미술과 관련된 토기등에 관한 발굴 및 보존에 관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단순히 글로서만 등장하는게 아니라 토굴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주변 지형을 담은 사진도 함께 담겨져 있어 저자의 발이 닿은 곳이 영 멀게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저자는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답사여행, 그리고 파미르 너머 중국의 카슈가르와 텐산의 토르갓 패스를 통해 이어진 실크로드 여행을 아들과 다녀왔다.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부분에서 또 한 번 아, 하고 부러움과 경의에 찬 모습으로 저자를 바라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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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2020-01-02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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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불교학』이라는 단어는 등한시한 체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간다는 문장만 보았다. 그리고는 불교의 고향 카슈미르에 있는 유적지 여행을 담은 책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접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적지 사진들도 있고 불상들 사진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가벼운 여행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불교의 시작을 찾아 나섰던 현장의 길을 따라나선 듯한 느낌이다. 구도의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의 뒤를 따라가려니 당연히 벅차고 힘들었다. 하지만 불교학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카슈미르는 히말라야, 잔스카르 그리고 피르 판잘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해발 2천여 미터의 고원에 위치한 분지 계곡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기에 적합할리 만무한데 불타는 사마타를 배우고, 비파샤나를 따르는 이들의 제일 가는 처소가 될 것이라 하였고, 파르슈바 협(脇) 존자는 이곳을 ‘현성이 모여들고 선인이 노니는 곳’이라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이지 싶다. 하지만 저자는 그곳의 모습을 아름다운 알프스 같다고 말한다. 정말 알프스 같은 아름다운 곳일까? 분쟁의 중심지만 아니라면 정말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카슈미르에 들어가려면 사방 어느 쪽에서든 3~4천 미터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하니 그곳에 가는 것은 굳은 결심이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지리적인 어려움보다 더 큰 정치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을 여행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그래서 이 책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저자 권오민 교수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들려주며 보여준 불교학의 시작은 정말 흥미로웠다.

카슈미르와 간다라에 이제는 불교보다는 이슬람교의 사원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불교의 시작을 연 카슈미르와 간다라 그리고 펀잡 등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역을 통해서 불교의 역사, 철학, 전설 등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유적이나 유물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 분쟁지역이니 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질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자료 사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직접 그곳에 가볼 용기는 없지만 이 책의 사진을 통해서 카슈미르와 스와트를 걸어보았고, 이 책의 자세한 설명을 통해서 불교학의 역사와 오늘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쫑이파 2020-01-0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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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의 무대, 서북부 인도 기행 

이 책은 부파불교의 주요 산실이자 무대인 인도 서북쪽 카슈미르 지방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기행하며 고대 불교 유적의 탐사를 통해 불교 발전의 역사와 주요 사상과 논점, 불교 이론들을 발전시켰던 대승(大僧)들을 소개하는 불교기행 서적이다.

책의 저자는 국내 인도 불교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권오민 교수이다.

책의 내용과 구성은, 북서부 인도 카슈미르 지역을 5개 구역(카슈미르, 펀잡, 탁실라, 간다라, 스와트)으로 나누어 각 구역마다 주요 도시들을 답사하며 관련된 불교 문헌과 유적, 활동 인물과 주요 불교 이론들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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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손오공이 나오는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대당서역기’를 읽었던 적이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당서역기’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되살아 났다. 실제로 이 책에서 ‘대당서역기’의 여행 루트를 차용하기도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은 어렵고 복잡하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용 구성이 정리되지 않고 혼잡하다: 북서부 인도 지방의 기행문과 지리, 부파 불교 이론의 해설, 인도 역사까지 뒤섞여 있어서 처음부터 쉽게 다가가기 힘든 면이 있다. 두 번째, 부파 불교의 이론적 내용과 해설이 비교적 쉽게 서술되어 있지만, 관련 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무엇보다, 불교 문헌 상의 내용 불일치로 인해 지리적 위치의 비정과 불교 이론의 정의에 대한 고민을 제기하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단점이 장점으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난해한 불교 이론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우선, 아직까지 우리에게 생소한 인도 서북부 지역에 대한 매력이 넘치는 여행기가 소개된다: 심지어 여행전문서인 론리 플래닛에도 나오지 않는 지리와 지역 정보를 저자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알게 된 사례도 있다. 현재 이슬람 세력들의 분쟁 지역으로 위험 지역인 파키스탄 령의 간다라 지방에서의 위험천만한 에피소드는 오싹함이 그대로 전달된다.

특히, 고대 문헌 상의 위치 묘사만을 가지고 현대 지식을 동원하여 과거 시대의 유적을 찾아가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샤카라 성’에 관한 불교 문헌 상의 불일치로 인해, 지리적 위치 지정에 모순을 발견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서 시행착오 끝에 취재 탐사하여 마침내 문헌 상의 묘사와 흡사한 지점을 찾아내는 모습은 마치 인디아나 존스 영화에나 나올법한 고고학자의 이야기처럼 흥미롭다.

부파불교의 이론적 내용 자체를 이해하기도 버거운 게 사실이지만, 불교 발달 과정과 불교 미술, 인도 역사를 답사 여행기와 함께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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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우스 2020-01-02 공감(0) 댓글(0)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중국, 파키스탄의 경계에 있는 산악 지대이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할 때 인도 반도는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분리 독립되었다. 이때 파키스키스탄과 인도사이에 끼인 카슈미르는 주민대부분이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의 나라인 파키스탄에 편입되길 바랐다. 하지만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힌두교도 였던 카슈미르지도자는 인도로 편입할 것을 결정하였고, 이것이 파키스탄과 인도간의 전쟁으로 연결된다.

 결국 카슈미르는 두 지역으로 분할되어 북부는 아자드카슈미르로 파키스탄령, 남부는 잠무카슈미르로 인도령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카슈미르 전체를 인도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고, 이러한 복잡한 상황속에 중국이 카슈미르의 동쪽을 침공하여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카슈미르는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갈라져 현재에 이른다.

이처럼 카슈미르는 국제적으로 파키스탄, 인도, 중국간의 분쟁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이곳이 불교학의 산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씨아이알 출판사에서 출간된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는 분쟁지역으로만 알고 있는 카슈미르의 불교유적들을 답사하면서 오래전 카슈미르에서 융성했던 불교의 자취를 되 돌아 본다.

우리가 불교도들의 나라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스리랑카이다. 우리나라의 불교신자들이 떠나는 성지순례도 보통 스리랑카이다. 그런데 스리랑카에 전파된 불교가 카슈미르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카슈미르에서 법장이었던 마드얀티카와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한 대표적인 불교전도사 였다고 한다. 이들로 인해 이후 스리랑카가 남아시아로 불교가 전파되는 기점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예전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서방과 동방을 이어온 실크로드의 길목 에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의 구법승들은 카슈미르를 통해 천축으로 들어갔고 혹은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우리는 대개 카슈미르 서쪽 피르 판잘산맥 너머의 간다라를 불교미술의 고향 정도로만 이해하지만, 현장법사는 이곳을 불교 논사들의 고향이라 하였다고 한다.



불교 철학의 문제에 대해 제기된 수 많은 이설과 이에 대한 비평으로 볼 때 당시 카슈미르를중심으로 한 불교학의 탐구가 얼마나 치열하였고 방대하였을 지는 가늠조차하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카슈미르는 예전 찬란하게 번성하였던 불교는 사라진 비운의 땅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한때 이곳에서 발달 했던 불교의 흔적을 찾아, 카슈미르와 그 인접지역인 펀잡, 탁실라, 간다라, 스와트를 여행하면서 잊혀진 불교의 흔적을 되새긴다.

이 책에 수록된 유적들의 사진을 보면, 한때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법한 유적들의 대부분 폐허상태이고, 깨어지고, 부서지고, 방치되고 있다는 것을 볼수 있다. 이러한 유적들의 상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곳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생각나게 한다. 불교에 관한 유적들이 많다는 점에서 예전 이곳에서 번성하였을 불교를 떠올릴 수 있지만, 아울러 그 많은 유적들의 황폐화 되었고, 남아있는 유적들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은 사진을 보면서 현재 분쟁지역으로서 이곳의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다.

이책을 통해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이곳이 예전에는 불교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책을 보면서 조속히 분쟁 상태가 해결되어 예전 유적을 복원하여 카슈미르가 불교신자들의 성지순례지로 유명하게 되길 기대해 본다.

ymf715 2019-12-2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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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이 서적은 권오민 박사가 불교학의 발원지인 과거 인도의 영토를 중국의 현장, 신라의 혜초가 순례했던 여정을 여행하며 불교역사에 관한 방대한 서적을 인용하며 발원지의 흔적과 과거 유명 승려들의 숨결을 느끼는 내용으로 학술적 용어와 생소한 지명이 많이 등장해 불교역사와 불교학을 학습하는 느낌으로 읽어야 할 서적으로 평하고 싶다.

저자는 동아시아 불교의 산실이었던 카슈미르와 간다라에 대한 흔적이 있는 세친의 <구사론>, 중현의 <순정리론>,<경부비바사>,<대비비사론>등을 자주 인용한다. 특히 현장과 세친의 순례경로에 최대한 다가가 불교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저자가 순례할 당시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이슬람 세계 분쟁지역이었고, 간다라의 경우 아프카니스탄 접경 파슈툰 땅으로 탈레반영향이 있는 지역이었다. 저자는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의 스니가르, 아크누르, 압리차르 지역을 여행했고, 파키스탄의 라호르, 시알코트지역을 계획했다. 간다라는 탁실라, 페샤와르, 망고라의 스와트지역과 파키스탄의 주도, 만세라로 답사를 계획하였다.

저자의 답사 목적은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고대시절 불교의 유적의 흔적, 승려들의 행적과 저술, 불교의 역사와 전설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었다.

서적은 총 5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카슈미르, 편잡, 탁실라, 간다라, 스와트 순으로 정리된다. 현장의 입축로와 저자의 답사 로를 지도로 표기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부록 부분에는 저자가 인용한 경전과 참고자료를 게시한다.

서적에서는 현장과 세친의 기록이 자주 인용된다. 현장은 80권의 대론인 <순정리론>을 카슈미르에서 2년, 날란다에서 5년, 이리나팔바타에서 1년간 학습하고 14개월에 걸쳐 <순정리론>의 축약본인 <현종론>을 학습한다. 중현의 제자였던 <구사론>도 학습하고 그의 이설을 비판하기도 한 기록이 있다. 현장이 방문하기 전 카슈미르는 4번에 걸쳐 멸진(종교 박해)을 거듭하여 미히라쿨라 시기 불전이 파괴되고 비구니들이 살해되고 불교신도 90만 명이 학살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현장 방문 시에는 초라하지만 불교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저자는 사명감으로 위험한 접경지역을 방문하여 평야, 분지, 이슬람 사원에서 고대 승려들의 경전과 기록을 인용하며 과거 이 길을 순례한 승려들의 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한다. 수록된 사진 중 불교의 흔적은 오로지 박물관자료로 대신한다.

독자들에게 익숙한 오공과 삼장법사의 이야기나 답사 경로에 대한 이야기가 반가울 정도로 불교학의 전문용어, 경전, 낯선 지명, 한자어가 인도 불교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에겐 힘들게 하였다. 유럽의 경우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일부지역이 기독교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지만 다시 회복하여 유적을 정비, 보존하고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어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이라면 저자가 답사한 곳들 대부분은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이고 불교 관련 유적은 이슬람사원의 재료로 사용되어 흔적조차 없어 이해가 쉽지 않아 결국 저자가 예상한 내용에 만족해야 했다. 단지 박물관에 있는 불상의 일부분과 조각들에 불교의 역사를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안타까웠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들어서면 이단으로 몰아 모든 흔적을 파괴한 내용은 가슴 아픈 일이라 하겠다.

이 서적은 최근 몇 년간 읽은 서적 중 독서가 가장 힘들었던 서적이었다. 인도 불교의 역사, 경전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이 도전해 결국 완독은 했지만 인용 경전까지 참고를 해야 충분한 이해가 가능한 서적이었다. 하루에 몇 페이지를 읽던 불교학에 대해 기초부터 학습하는 자세로 다가가야 성취감을 느낄 도서였다. 2020년에 인용한 경전을 참조하면서 천천히 학습하며 분석해 보기로 계획을 세워 본다. 이 서적은 불교신자들이나 종교학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동아시아 불교학의 역사와 경전을 학습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서적으로 추천하고 싶고 저자의 사명감에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의생의사 2020-01-01 공감(0) 댓글(0)


2020/09/19

Bhikkhu Analayo - Wikipedia



Bhikkhu Analayo - Wikipedia


Anālayo

Personal
Born 1962 (age 57–58)
Religion Buddhism
Nationality German
School Theravada
Sect Amarapura Nikaya
Senior posting
Teacher Pemasiri Thera
Based in Sri Lanka
Ordination 1995


Bhikkhu Anālayo is a bhikkhu (Buddhist monk), scholar and meditation teacher. He was born in Germany in 1962, and went forth in 1995 in Sri Lanka. He is best known for his comparative studies of Early Buddhist Texts as preserved by the various early Buddhist traditions.[1]


Contents
1Monastic life
2Scholarly career and activity
3Selected published work
4References
5External links


Monastic life[edit]

Bhikkhu Anālayo temporarily ordained in 1990 in Thailand, after a meditation retreat at Wat Suan Mokkh, the monastery established by the influential 20th-century Thai monk Ajahn Buddhadasa.[2] In 1994 he went to Sri Lanka, looking to meet Nyanaponika Thera after having read his book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2] Nyanaponika Thera died just days before Analayo's arrival but he stayed on and studied with Bhikkhu Bodhi.[2] In 1995 he took pabbajja again under Balangoda Ananda Maitreya Thero.[citation needed] He received his upasampada in 2007 in the Sri Lankan Shwegyin Nikaya (belonging to the main Amarapura Nikaya), with Pemasiri Thera of Sumathipala Aranya as his ordination acariya.[citation needed] Bhikkhu Bodhi has been Bhikkhu Anālayo's main teacher.[3] The late Bhikkhu Kaṭukurunde Ñāṇananda has also been an important influence in his understanding of the Dhamma.
Scholarly career and activity[edit]

Bhikkhu Anālayo completed a PhD thesis on the Satipaṭṭhāna Sutta at the University of Peradeniya in 2000, which was later published as Satipaṭṭhāna, the Direct Path to Realization.[4] During the course of that study, he had come to notice the interesting differences between the Pāli and Chinese Buddhist canon versions of this early Buddhist discourse. This led to his undertaking a habilitation research at the University of Marburg, completed in 2007, in which he compared the Majjhima Nikāya discourses with their Chinese, Buddhist Hybrid Sanskrit and Tibetan Buddhist canon counterparts.[5] In 2013 Anālayo then published Perspectives on Satipaṭṭhāna,[6] where he builds on his earlier work by comparing the parallel versions of the Satipaṭṭhāna-sutta and exploring the meditative perspective that emerges when emphasis is given to those instructions that are common ground among the extant canonical versions and thus can reasonably well be expected to be early.

Bhikkhu Anālayo has published extensively on early Buddhism.[7] The textual study of early Buddhist discourses in comparative perspective is the basis of his ongoing interests and academic research.[8] At present he is the chief editor and one of the translators of the first English translation of the Chinese Madhyama-āgama (Taishō 26),[9] and has undertaken an integral English translation of the Chinese Saṃyukta-āgama (Taishō 99), parallel to the Pali Saṃyutta Nikāya collection.[10]

Central to Anālayo's academic activity remain theoretical and practical aspects of meditation. He has published several articles on insight and absorption meditation and related contemporary meditation traditions to their textual sources.[11]

His comparative studies of early Buddhist texts have also led Anālayo to focus on historical developments of Buddhist thought, and to research the early roots and genesis of the bodhisattva ideal[12] and the beginning of Abhidharma thought.[13]

Bhikkhu Anālayo was a presenter at 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Buddhist Women's Role in the Sangha.[14] Exploring attitudes towards bhikkhunis (female monastics) in early Buddhist texts and the story of the foundation of the bhikkhuni order[15] has allowed him to be a supporter of bhikkhuni ordination, which is a matter of controversy in the Theravada and Tibetan traditions.[16]

Bhikkhu Anālayo has retired from being a professor of the Numata Centre for Buddhist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Hamburg. He is the co-founder of the Āgama Research Group, a resident scholar and core faculty member at the Barre Center for Buddhist Studies and a member of the Numata Centre for Buddhist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Hamburg.

Selected published work[edit]


References[edit]

  1. ^ Bhikkhu Anālayo’s profile: http://agamaresearch.dila.edu.tw/?page_id=48
  2. ^ Jump up to:a b c "A Conversation with Bhikkhu Anālayo". Insight Journal. 2012. Retrieved 3 August 2019.
  3. ^ Bhikkhu Yogananda (15 October 2010). "Anālayo, The Meditative Schola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November 2010. Retrieved 15 October 2010.
  4. ^ Anālayo (1 August 2004). Satipaṭṭhāna, the Direct Path to Realization (Repr. ed.). Birmingham: Windhorse. ISBN 978-1899579549.
  5. ^ Published as A Comparative Study of the Majjhima-nikāya, (Dharma Drum Buddhist College Special Series), Taiwan: Dharma Drum Academic Publisher, 2011.
  6. ^ Perspectives on Satipaṭṭhāna, Birmingham: Windhorse Publications, 2014.
  7. ^ Publications by Bhikkhu Anālayo
  8. ^ Bhikkhu Anālayo's research work: http://agamaresearch.dila.edu.tw/?page_id=28
  9. ^ "Madhyama-āgama".
  10. ^ "Saṃyukta-āgama".
  11. ^ "Bhikkhu Anālayo: meditation". Āgama Research Group.
  12. ^ "New Publications". Numata Zentrum für Buddhismuskunde. Retrieved 3 November2013.
  13. ^ The Dawn of Abhidharma, Hamburg, Hamburg University Press, 2014.
  14. ^ Abstract: The Four Assemblies and the Foundation of the Order of Nuns, Foundation for Buddhist Studies, University of Hamburg;"Women's Renunciation in Early Buddhism - The Four Assemblies and the Foundation of the Order of Nuns", Dignity & Discipline, The Evolving Role of Women in Buddhism, Wisdom Publications, 2010, pp. 65–97
  15. ^ "about: core faculty & members". Āgama research group.
  16. ^ Bhikkhu Anālayo's research on women, nuns and bhikkhunīs: http://agamaresearch.dila.edu.tw/?page_id=138 bhikkhunīs and women in Early Buddhism

External links[edit]

2020/09/13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열린논단]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2012년 2월 16일 열린논단
[0호] 2012년 02월 17일 (금)박경준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가 적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곡해는 업보윤회설을 신비주의적 혹은 숙명론적 사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업보윤회설은 3세윤회설로 이해된다. 예컨대, 영화 「리틀 붓다」의 내용 중에 나오는 ‘환생’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윤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불교의 기본적 윤회사상으로 이해되면서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확산시켜 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누구는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누구는 업장이 두터워 금생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화는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윤회관 역시 불교를 신비주의적 또는 숙명론적 종교로 곡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아마도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으로 철저한 동기론이라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불교 업설은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디지털화된 상황에서 동기론적 윤리사상만으로는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불교 업설에 결과론적 내용은 없는 것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불교 업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는 편견이다.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설해지지만,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共業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 공업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은 올바른 불교이해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회를 변증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無我와 輪廻의 모순을 ‘無我輪廻說’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다 보니 업설과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 작업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업과 윤회의 내용이나 사상사적 전개 과정보다는 업설과 윤회설의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춰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업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은 명상의 시대라 할 만큼 명상이 유행인 바, 이것은 결국 행복의 기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업보를 심리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업설과 윤회설의 기본 의의

1.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칙을 주장한다.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善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惡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그 사람이) 씨앗을 심어 그 사람이 (자신의)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기도나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휴거 등을 믿는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나 점괘가 좋지 않을 때에 자꾸 굿에 의지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원수를 제거하여 상을 받고, 왕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상벌제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인과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선업을 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함께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응보의 법칙은 사회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불교 업설의 외연은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가르침은 업설에 대한 통념을 극복하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준다. 사람들의 고통과 안락의 문제를 과거의 개인적인 근본 업[本業]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대, 시절, 토지, 인민과 관련시켜서 바라본다. 여기서 4대와 토지는 자연 환경을, 시절은 시대 상황을, 인민은 사회 환경을 의미한다. 과거의 본업이 因이라면 자연 환경, 시대상황, 사회 환경은 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이 결합하여 고통 또는 안락의 과[果報]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경』「교진여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환경, 시대 상황, 사회 환경은 모두 器世間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기세간은 자연 환경의 의미로 정의되지만, 사회 환경도 기세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이 인간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회[또는 문화] 역시 인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간은 인간의 업과 무관한 것일까. 불교는 놀랍게도 기세간은 共業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공업(Sādhāraṇa-Karma)’이라는 용어는 대체적으로 초기 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부파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은 아마도 2세기 무렵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공업은 일체 중생의 집단적 또는 공동의 업으로서 자연환경[기세간]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업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불교의 공업 사상은 원론적으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공동선의 추구가 이루어질 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우리 인간의 공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류의 팽창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은 어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하고 ‘절제 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개인적인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 지구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당위성은 초기 경전의 하나인 『구라단두경(Kūṭadanta-sutta)』의 내용 중에 제시된 바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범죄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더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한,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이 시행되어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국가는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 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The sūtrakṛtāṅga sūtra]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Akriyavāda)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연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명상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현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과업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적절하고 유용해 보인다.

Ⅵ. 윤회설의 의의

정세근은 최근 그의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한국불교에 고한다.

하나,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라. 우리 불교는 인도의 전통 힌두교와 지나치게 뒤섞여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다르다. 불교를 인도철학으로 죽이지 마라. 나아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별하라. 윤회가 있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다.…(중략)…
넷, 윤회를 부정하라. 윤회는 힌두교의, 자이나교의 것이다. 윤회가 설명하는 것이 계급질서이고 태생의 한계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런 관념은 일찍이 버릴수록 좋다. 나도 모르는 윤회의 법칙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앞서, 그의 책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윤호진, 정승석, 김진, 한자경, 최인숙, 조성택 등의 주장과 논평,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비교 분석 비판을 통해 이른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이 문제를 무아윤회와 유아윤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무아연기의 철칙 아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는 연기를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無 또는 무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我’는 크게 實我(실체아, ātman), 假我, 眞我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實我가 없다’는 의미지 假我와 眞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연기무아설은 나를 온통 부정하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假我 prajñaptyātman)’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 관계에서 벗어난다.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윤회는 가능하다. 가아(오온)는 존재하고, 하나의 가아가 지은 업이 남긴 업력이 다음 가아를 형성하면, 그 가아들 간의 연속성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는 오온(가아)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무아윤회론은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난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아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윤회설은 불교 사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수많은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生滅이 없지만 세속제의 범부중생에게는 死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특히 신체적으로나 삶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뭔가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얻고 싶어 하여 윤회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도 대개는 생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 윤회론은 이러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다. 윤회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윤회설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한 적극적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더러 우연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인 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세윤회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기 때문이다.

Ⅶ.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첫째,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불교평론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불교평론









[열린논단]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2012년 2월 16일 열린논단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가 적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곡해는 업보윤회설을 신비주의적 혹은 숙명론적 사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업보윤회설은 3세윤회설로 이해된다. 예컨대, 영화 「리틀 붓다」의 내용 중에 나오는 ‘환생’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윤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불교의 기본적 윤회사상으로 이해되면서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확산시켜 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누구는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누구는 업장이 두터워 금생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화는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윤회관 역시 불교를 신비주의적 또는 숙명론적 종교로 곡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아마도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으로 철저한 동기론이라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불교 업설은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디지털화된 상황에서 동기론적 윤리사상만으로는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불교 업설에 결과론적 내용은 없는 것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불교 업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는 편견이다.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설해지지만,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共業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 공업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은 올바른 불교이해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회를 변증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無我와 輪廻의 모순을 ‘無我輪廻說’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다 보니 업설과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 작업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업과 윤회의 내용이나 사상사적 전개 과정보다는 업설과 윤회설의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춰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업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은 명상의 시대라 할 만큼 명상이 유행인 바, 이것은 결국 행복의 기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업보를 심리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업설과 윤회설의 기본 의의



1.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칙을 주장한다.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善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惡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그 사람이) 씨앗을 심어 그 사람이 (자신의)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기도나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휴거 등을 믿는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나 점괘가 좋지 않을 때에 자꾸 굿에 의지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원수를 제거하여 상을 받고, 왕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상벌제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인과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선업을 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함께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응보의 법칙은 사회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불교 업설의 외연은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가르침은 업설에 대한 통념을 극복하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준다. 사람들의 고통과 안락의 문제를 과거의 개인적인 근본 업[本業]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대, 시절, 토지, 인민과 관련시켜서 바라본다. 여기서 4대와 토지는 자연 환경을, 시절은 시대 상황을, 인민은 사회 환경을 의미한다. 과거의 본업이 因이라면 자연 환경, 시대상황, 사회 환경은 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이 결합하여 고통 또는 안락의 과[果報]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경』「교진여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환경, 시대 상황, 사회 환경은 모두 器世間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기세간은 자연 환경의 의미로 정의되지만, 사회 환경도 기세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이 인간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회[또는 문화] 역시 인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간은 인간의 업과 무관한 것일까. 불교는 놀랍게도 기세간은 共業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공업(Sādhāraṇa-Karma)’이라는 용어는 대체적으로 초기 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부파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은 아마도 2세기 무렵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공업은 일체 중생의 집단적 또는 공동의 업으로서 자연환경[기세간]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업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불교의 공업 사상은 원론적으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공동선의 추구가 이루어질 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우리 인간의 공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류의 팽창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은 어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하고 ‘절제 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개인적인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 지구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당위성은 초기 경전의 하나인 『구라단두경(Kūṭadanta-sutta)』의 내용 중에 제시된 바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범죄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더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한,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이 시행되어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국가는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 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The sūtrakṛtāṅga sūtra]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Akriyavāda)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연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명상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현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과업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적절하고 유용해 보인다.



Ⅵ. 윤회설의 의의



정세근은 최근 그의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한국불교에 고한다.



하나,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라. 우리 불교는 인도의 전통 힌두교와 지나치게 뒤섞여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다르다. 불교를 인도철학으로 죽이지 마라. 나아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별하라. 윤회가 있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다.…(중략)…

넷, 윤회를 부정하라. 윤회는 힌두교의, 자이나교의 것이다. 윤회가 설명하는 것이 계급질서이고 태생의 한계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런 관념은 일찍이 버릴수록 좋다. 나도 모르는 윤회의 법칙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앞서, 그의 책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윤호진, 정승석, 김진, 한자경, 최인숙, 조성택 등의 주장과 논평,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비교 분석 비판을 통해 이른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이 문제를 무아윤회와 유아윤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무아연기의 철칙 아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는 연기를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無 또는 무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我’는 크게 實我(실체아, ātman), 假我, 眞我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實我가 없다’는 의미지 假我와 眞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연기무아설은 나를 온통 부정하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假我 prajñaptyātman)’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 관계에서 벗어난다.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윤회는 가능하다. 가아(오온)는 존재하고, 하나의 가아가 지은 업이 남긴 업력이 다음 가아를 형성하면, 그 가아들 간의 연속성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는 오온(가아)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무아윤회론은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난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아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윤회설은 불교 사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수많은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生滅이 없지만 세속제의 범부중생에게는 死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특히 신체적으로나 삶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뭔가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얻고 싶어 하여 윤회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도 대개는 생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 윤회론은 이러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다. 윤회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윤회설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한 적극적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더러 우연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인 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세윤회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기 때문이다.



Ⅶ.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첫째,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2020/09/12

Vipassanā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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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ass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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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s of
Vipassanā
Englishinsight, clear-seeing, special-seeing
Sanskritविपश्यना
(vipaśyanā)
Paliविपस्सना
Vipassanā
Burmeseဝိပဿနာ (WiPakThaNar)
Chinese
(Pinyinguān)
Khmerវិបស្សនា
(vipassana)
Sinhalaවිපස්සනා
Tibetanལྷག་མཐོང་
(Wylie: lhag mthong; THL: lhak-thong)
Vietnamesequán
Glossary of Buddhism
Vipassanā (Pāli) or vipaśyanā (Sanskrit) literally, "special-seeing",[1] "special (Vi), seeing (Passanā)",[2] is a Buddhist term that is often translated as "insight". The Pali Canon describes it as one of two qualities of mind which is developed (bhāvanā) in Buddhist meditation, the other being samatha (mind calming). It is often defined as a form of meditation that seeks "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reality", defined as anicca "impermanence", dukkha "suffering, unsatisfactoriness", anattā "non-self", the three marks of existence in the Theravada tradition,[3][4] and as śūnyatā "emptiness" and Buddha-nature in the Mahayana traditions.
Vipassanā practice in the Theravada tradition ended in the 10th century, but was reintroduced in Toungoo and Konbaung Burma in the 18th century, based on contemporary readings of the Satipaṭṭhāna sutta, the Visuddhimagga, and other texts.[5] A new tradition developed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centering on bare insight in conjunction with samatha.[6] It became of central importance in the 20th century Vipassanā movement[7] as developed by Ledi Sayadaw and U Vimala and popularised by Mahasi Sayadaw, V. R. Dhiravamsa, and S. N. Goenka.[8][9][10]
In modern Theravada, the combination or disjunction of vipassanā and samatha is a matter of dispute. While the Pali sutras hardly mention vipassanā, describing it as a mental quality alongside samatha which develops in tandem and leads to liberation, the Abhidhamma Pitaka and the commentaries describe samatha and vipassanā as two separate meditation techniques. The Vipassanā movement favors vipassanā over samatha, but critics point out that both are necessary elements of the Buddhist training.

Etymology[edit source]

Vipassanā is a Pali word derived from the older prefix "vi-" meaning "special", and the verbal root "-passanā" meaning "seeing".[2] It is often translated as "insight" or "clear-seeing". The "vi" in vipassanā has many possible meanings, it could mean to '[see] into', '[see] through' or to '[see] in a special way.'[4]
A synonym for vipassanā is paccakkha "perceptible to the senses" (Pāli; Sanskrit: pratyakṣa), literally "before the eyes," which refers to direct experiential perception. Thus, the type of seeing denoted by vipassanā is that of direct perception, as opposed to knowledge derived from reasoning or argument.[citation needed]
In Tibetan, vipaśyanā is lhaktong (Wylielhag mthong). Lhak means "higher", "superior", "greater"; tong is "view, to see". So together, lhaktong may be rendered into English as "superior seeing", "great vision" or "supreme wisdom." This may be interpreted as a "superior manner of seeing", and also as "seeing that which is the essential nature." Its nature is a lucidity—a clarity of mind.[11]
Henepola Gunaratana defined vipassanā as "Looking into something with clarity and precision, seeing each component as distinct and separate, and piercing all the way through so as to perceive the most fundamental reality of that thing."[4]

Origins[edit source]

According to Thanissaro Bhikkhu, in the sutta pitaka the term "vipassanā" is hardly mentioned, while they frequently mention jhana as the meditative practice to be undertaken.[12][note 1] When vipassanā is mentioned, it is always in tandem with samatha, as a pair of qualities of mind which are developed.[12] According to Thanissaro Bhikkhu, "samathajhana, and vipassana were all part of a single path."[12][note 2] Norman notes that "the Buddha's way to release [...] was by means of meditative practices."[14] According to Vetter and Bronkhorst, dhyāna constituted the original "liberating practice".[15][16][17] Vetter further argues that the eightfold path constitutes a body of practices which prepare one, and lead up to, the practice of dhyana.[18] Vetter and Bronkhorst further note that dhyana is not limited to single-pointed concentration, which seems to be described in the first jhana, but develops into equanimity and mindfulness,[19][20][note 3] "born from samadhi"[21] but no longer absorbed in concentration, being mindfully aware of objects while being indifferent to it,[22] "directing states of meditative absorption towards the mindful awareness of objects."[23]
Though both terms appear in the Sutta Pitaka[note 4], Gombrich and Brooks argue that the distinction as two separate paths originates in the earliest interpretations of the Sutta Pitaka,[28] not in the suttas themselves.[29][note 5] Henepola Gunaratana notes that "[t]he classical source for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wo vehicles of serenity and insight is the Visuddhimagga."[30] According to Richard Gombrich, a development took place in early Buddhism resulting in a change in doctrine, which considered prajna to be an alternative means to awakening, alongside the practice of dhyana.[31] The suttas contain traces of ancient debates between Mahayana and Theravada schools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teachings and the development of insight. Out of these debates developed the idea that bare insight suffices to reach liberation, by discerning the Three marks (qualities) of (human) existence (tilakkhana), namely dukkha (suffering), anatta (non-self) and anicca (impermanence).[28]
According to Buddhist and Asian studies scholar Robert Buswell Jr., by the 10th century vipassana was no longer practiced in the Theravada tradition, due to the belief that Buddhism had degenerated, and that liberation was no longer attainable until the coming of Maitreya.[3] It was re-introduced in Myanmar (Burma) in the 18th century by Medawi (1728–1816), leading to the rise of the Vipassana movement in the 20th century, re-inventing vipassana meditation and developing simplified meditation techniques, based on the Satipatthana sutta, the Visuddhimagga, and other texts, emphasizing satipatthana and bare insight.[6][32][note 6] Ultimately, these techniques aim at stream entry, with the idea that this first stage of the path to awakening safeguards future development of the person towards full awakening, despite the degenerated age we live in.[35][note 7]

Theravāda[edit source]

Relation with samatha[edit source]

While the Abhidhamma and the commentaries present samatha and vipassana as separate paths,[note 8] in the sutras vipassana and samatha, combined with sati (mindfulness), are used together to explore "the fundamental nature of mind and body.[13] In the later Theravada tradition, samatha is regarded as a preparation for vipassanā, pacifying the mind and strengthening concentration in order for insight to arise, which leads to liberation.
The Buddha is said to have identified two paramount mental qualities that arise from wholesome meditative practice:
  • Samatha, calm abiding, which steadies, composes, unifies and concentrates the mind;
  • Vipassanā, insight, which enables one to see, explore and discern "formations" (conditioned phenomena based on the five aggregates).[39]
The Buddha is said to have extolled serenity and insight as conduits for attaining the unconditioned state of nibbana (Pāli; Skt.: Nirvana). For example, in the Kimsuka Tree Sutta (SN 35.245), the Buddha provides an elaborate metaphor in which serenity and insight are "the swift pair of messengers" who deliver the message of nibbana via the noble eightfold path.[40]
In the Four Ways to Arahantship Sutta (AN 4.170), Ven. Ānanda reports that people attain arahantship using calm abiding and insight in one of three ways:
  1. They develop calm abiding and then insight (Pāli: samatha-pubbangamam vipassanam)
  2. They develop insight and then calm abiding (Pāli: vipassana-pubbangamam samatham)[note 9]
  3. They develop calm abiding and insight in tandem (Pāli: samatha-vipassanam yuganaddham), for instance, obtaining the first jhāna and then seeing in the associated aggregates the three marks of existence before proceeding to the second jhāna.[41]
In the Pāli canon, the Buddha never mentions independent samatha and vipassana meditation practices; instead, samatha and vipassana are two "qualities of mind" to be developed through meditation. As Thanissaro Bhikkhu writes,
When [the Pāli suttas] depict the Buddha telling his disciples to go meditate, they never quote him as saying 'go do vipassana,' but always 'go do jhana.' And they never equate the word "vipassana" with any mindfulness techniques. In the few instances where they do mention vipassana, they almost always pair it with samatha — not as two alternative methods, but as two qualities of mind that a person may 'gain' or 'be endowed with,' and that should be developed together.[42]
Buswell states that the most common meditation method described in the Pāli canon is one where samatha is first done to induce jhana and then jhana is used to go on to vipassana. Buddhist texts describe that all Buddhas and their chief disciples used this method. Texts also describe a method where vipassana is done alone, but this is less common.[5]

Vipassanā movement[edit source]

The term vipassana is often conflated with the Vipassana movement, a movement which popularised the new vipassana teachings and practice. It started in the 1950s in Burma, but has gained wide renown mainly through American Buddhist teachers such as Joseph GoldsteinTara BrachGil FronsdalSharon Salzberg, and Jack Kornfield. The movement has had a wide appeal due to being open and inclusive to different Buddhist and non-buddhist wisdom, poetry as well as science. It has together with the modern American Zen tradition served as one of the main inspirations for the 'mindfulness movement' as developed by Jon Kabat-Zinn and others. The Vipassanā Movement, also known as the Insight Meditation Movement, is rooted in Theravāda Buddhism and the revival of meditation techniques, especially the "New Burmese Method" and the Thai Forest Tradition, as well as the modern influences[7] on the traditions of Sri LankaBurmaLaos and Thailand.
In the Vipassanā Movement, the emphasis is on the Satipatthana Sutta and the use of mindfulness to gain insight into the impermanence of the self. It argues that the development of strong samatha can be disadvantageous,[43] a stance for which the Vipassana Movement has been criticised, especially in Sri Lanka.[44][45] The "New Burmese Method" was developed by U Nārada (1868–1955), and popularised by Mahasi Sayadaw (1904-1982) and Nyanaponika Thera (1901–1994). Other influential Burmese proponents are Ledi Sayadaw and Mogok Sayadaw (who was less known to the West due to lack of International Mogok Centres); S. N. Goenka was a student of Sayagyi U Ba Khin. Influential Thai teachers are Ajahn Chah and Buddhadasa. A well-known Asian female teacher is Dipa Ma.

Vipassana meditation[edit source]

Morality, mindfulness of breathing, and reflection[edit source]

Vipassanā meditation uses sati (mindfulness) and samatha (calm), developed through practices such as anapanasati (mindfulness of breathing), combined with the contemplation of impermanence as observed in the bodily and mental changes, to gain 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this reality.[46][47]
Practice begins with the preparatory stage, the practice of sila, morality, giving up worldly thoughts and desires.[48][49] Jeff Wilson notes that morality is a quintessential element of Buddhist practice, and is also emphasized by the first generation of post-war western teachers. Yet, in the contemporary mindfulness movement, morality as an element of practice has been mostly discarded, 'mystifying' the origins of mindfulness.[48]
The practitioner then engages in anapanasati, mindfulness of breathing, which is described in the Satipatthana Sutta as going into the forest and sitting beneath a tree and then to simply watch the breath. If the breath is long, to notice that the breath is long, if the breath is short, to notice that the breath is short.[50][51] In the "New Burmese Method," the practitioner pays attention to any arising mental or physical phenomenon, engaging in vitarka, noting or naming physical and mental phenomena ("breathing, breathing"), without engaging the phenomenon with further conceptual thinking.[52][53] By noticing the arising of physical and mental phenomena, the meditator becomes aware how sense impressions arise from the contact between the senses and physical and mental phenomena,[52] as described in the five skandhas and paṭiccasamuppāda. According to Sayadaw U Pandita, awareness and observation of these sensations is de-coupled from any kind of physical response, which is intended to recondition one's impulsive responses to stimuli, becoming less likely to physically or emotionally overreact to the happenings of the world.[54]
The practitioner also becomes aware of the perpetual changes involved in breathing, and the arising and passing away of mindfulness.[55] This noticing is accompanied by reflections on causation and other Buddhist teachings, leading to insight into dukkhaanatta, and anicca.[56][55] When the three characteristics have been comprehended, reflection subdues, and the process of noticing accelerates, noting phenomena in general, without necessarily naming them.[57][46][47]

Stages of Jhana in the Vipassana movement[edit source]

Vipassanā jhanas are stages that describe the development of samatha in vipassanā meditation practice as described in modern Burmese Vipassana meditation.[58] Mahasi Sayadaw's student Sayadaw U Pandita described the four vipassanā jhanas as follows:[59]
  1. The meditator first explores the body/mind connection as one, nonduality; discovering three characteristics. The first jhana consists in seeing these points and in the presence of vitarka and vicara. Phenomena reveal themselves as appearing and ceasing.
  2. In the second jhana, the practice seems effortless. Vitarka and vicara both disappear.
  3. In the third jhanapiti, the joy, disappears too: there is only happiness (sukha) and concentration.
  4. The fourth jhana arises, characterised by purity of mindfulness due to equanimity. The practice leads to direct knowledge. The comfort disappears because the dissolution of all phenomena is clearly visible. The practice will show every phenomenon as unstable, transient, disenchanting. The desire of freedom will take place.

Northern tradition and Mahāyāna[edit source]

Texts[edit source]

The north Indian Buddhist traditions like the Sarvastivada and the Sautrāntika practiced vipaśyanā meditation as outlined in texts like the Abhidharmakośakārikā of Vasubandhu and the Yogācārabhūmi-śāstra. The Abhidharmakośakārikā states that vipaśyanā is practiced once one has reached samadhi "absorption" by cultivating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smṛtyupasthānas).[60] This is achieved, according to Vasubandhu,
[b]y considering the unique characteristics (svālakṣaṇa) and the general characteristics (sāmānyalakṣaṇā) of the body, sensation, the mind, and the dharmas.
"The unique characteristics" means its self nature (svabhāva).
"The general characteristics" signifies the fact that "All conditioned things are impermanent; all impure dharmas are suffering; and that all the dharmas are empty (śūnya) and not-self (anātmaka).[60]
Asanga's Abhidharma-samuccaya states that the practice of śamatha-vipaśyanā is a part of a Bodhisattva's path at the beginning, in the first "path of preparation" (sambhāramarga).[61]
The later Indian Mahayana scholastic tradition, as exemplified by Shantideva's Bodhisattvacaryāvatāra, saw śamatha as a necessary prerequisite to vipaśyanā and thus one needed to first begin with calm abiding meditation and then proceed to insight. In the Pañjikā commentary of Prajñākaramati (Wylieshes rab 'byung gnas blo gros) on the Bodhisattvacaryāvatāra, vipaśyanā is defined simply as "wisdom (prajñā) that has the nature of thorough knowledge of reality as it is.[62]

Sunyata[edit source]

Mahāyāna vipaśyanā differs from the Theravada tradition in its strong emphasis on the meditation on emptiness (shunyata) of all phenomena. The Mahayana Akṣayamati-nirdeśa refers to vipaśyanā as seeing phenomena as they really are, that is, empty, without self, nonarisen, and without grasping. The Prajnaparamita sutra in 8,000 lines states that the practice of insight is the non-appropriation of any dharmas, including the five aggregates:
So too, a Bodhisattva coursing in perfect wisdom and developing as such, neither does nor even can stand in form, feeling, perception, impulse and consciousness...This concentrated insight of a Bodhisattva is called 'the non-appropriation of all dharmas'.[63]
Likewise the Prajnaparamita in 25,000 lines states that a Bodhisattva should know the nature of the five aggregates as well as all dharmas thus:
That form, etc. [feeling, perception, impulse and consciousness], which is like a dream, like an echo, a mock show, a mirage, a reflection of the moon in water, an apparition, that is neither bound nor freed. Even so form, etc., which is past, future, or present, is neither bound nor freed. And why? Because of the nonbeing-ness of form, etc. Even so form, etc., whether it be wholesome or unwholesome, defiled or undefiled, tainted or untainted, with or without outflows, worldly or supramundane, defiled or purified, is neither bound nor freed, on account of its non-beingness, its isolatedness, its quiet calm, its emptiness, signless-ness, wishless-ness, because it has not been brought together or produced. And that is true of all dharmas.[64]

Sudden insight[edit source]

The Sthavira nikāya, one of the early Buddhist schools from which the Theravada-tradition originates, emphasized sudden insight: "In the Sthaviravada [...] progress in understanding comes all at once, 'insight' (abhisamaya) does not come 'gradually' (successively - anapurva).[65]"
The Mahāsāṃghika, another one of the early Buddhist schools, had the doctrine of ekakṣaṇacitta, "according to which a Buddha knows everything in a single thought-instant".[66][citation not found] This process however, meant to apply only to the Buddha and Peccaka buddhas. Lay people may have to experience various levels of insights to become fully enlightened.
The Mahayana tradition emphasizes prajñā, insight into śūnyatā, dharmatā, the two truths doctrine, clarity and emptiness, or bliss and emptiness:[67]
[T]he very title of a large corpus of early Mahayana literature, the Prajnaparamita, shows that to some extent the historian may extrapolate the trend to extol insight, prajna, at the expense of dispassion, viraga, the control of the emotions.[47]
Although Theravada and Mahayana are commonly understood as different streams of Buddhism, their practice however, may reflect emphasis on insight as a common denominator: "In practice and understanding Zen is actually very close to the Theravada Forest Tradition even though its language and teachings are heavily influenced by Taoism and Confucianism."[68][note 10]
The emphasis on insight is discernible in the emphasis in Chan Buddhism on sudden insight (subitism),[65] though in the Chan tradition, this insight is to be followed by gradual cultivation.[note 11]

East Asian Mahāyāna[edit source]

In Chinese Buddhism, the works of Tiantai master Zhiyi (such as the Mohe Zhiguan, "Great śamatha-vipaśyanā") are some of the most influential texts which discuss vipaśyanā meditation from a Mahayana perspective. In this text, Zhiyi teaches the contemplation of the skandhasayatanasdhātus, the Kleshas, false views and several other elements.[70] Likewise the influential text called 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 has a section on calm and insight meditation.[71] It states:
He who practices 'clear observation' should observe that all conditioned phenomena in the world are unstationary and are subject to instantaneous transformation and destruction; that all activities of the mind arise and are extinguished from moment or moment; and that, therefore, all of these induce suffering. He should observe that all that had been conceived in the past was as hazy as a dream, that all that is being conceived in the future will be like clouds that rise up suddenly. He should also observe that the physical existences of all living beings in the world are impure and that among these various filthy things there is not a single one that can be sought after with joy.[72]
The Zen tradition advocates the simultaneous practice of śamatha and vipaśyanā, and this is called the practice of silent illumination.[73] The classic Chan text known as the Platform Sutra states:
Calming is the essence of wisdom. And wisdom is the natural function of calming [i.e., prajñā and samādhi]. At the time of prajñā, samādhi exists in that. At the time of samādhi, prajñā exists in that. How is it that samādhi and prajñā are equivalent? It is like the light of the lamp. When the lamp exists, there is light. When there is no lamp, there is darkness. The lamp is the essence of light. The light is the natural function of the lamp. Although their names are different, in essence, they are fundamentally identical. The teaching of samādhi and prajñā is just like this.[73]

Tibetan Buddhism[edit source]

Samatha and vipassana are explicitly referred to in Tibetan Buddhism. According to Thrangu Rinpoche, when shamatha and vipashyana are combined, as in the mainstream tradition Madhyamaka approach of ancestors like Shantideva and Kamalashila, through samatha disturbing emotions are abandoned, which thus facilitates vipashyana, "clear seeing." Vipashyana is cultivated through reasoning, logic and analysis in conjunction with Shamatha. In contrast, in the siddha tradition of the direct approach of Mahamudra and Dzogchenvipashyana is ascertained directly through looking into one's own mind. After this initial recognition of vipashyana, the steadiness of shamatha is developed within that recognition. According to Thrangu Rinpoche, it is however also common in the direct approach to first develop enough shamatha to serve as a basis for vipashyana.[74]
In Tibetan Buddhism, the classical practice of śamatha and vipaśyanā is strongly influenced by the Mahāyāna text called the Bhavanakrama of Indian master Kamalaśīla. Kamalaśīla defines vipaśyanā as "the discernment of reality" (bhūta-pratyavekṣā) and "accurately realizing the true nature of dharmas".[75]
Indian Mahāyāna Buddhism employed both deductive investigation (applying ideas to experience) and inductive investigation (drawing conclusions from direct experience) in the practice of vipaśyanā.[note 12][note 13] According to Leah Zahler, only the tradition of deductive analysis in vipaśyanā was transmitted to Tibet in the sūtrayāna context.[note 14]
In Tibet direct examination of moment-to-moment experience as a means of generating insight became exclusively associated with vajrayāna.[78][note 15][note 16]
Mahāmudrā and Dzogchen use vipaśyanā extensively. This includes some methods of the other traditions, but also their own specific approaches. They place a greater emphasis on meditation on symbolic images. Additionally in the Vajrayāna (tantric) path, the true nature of mind is pointed out by the guru, and this serves as a direct form of insight.[note 17]

See also[edit source]

Notes[edit source]

  1. ^ Thanissaro Bhikkhu: "If you look directly at the Pali discourses — the earliest extant sources for our knowledge of the Buddha's teachings — you'll find that although they do use the word samatha to mean tranquillity, and vipassanā to mean clear-seeing, they otherwise confirm none of the received wisdom about these terms. Only rarely do they make use of the word vipassanā — a sharp contrast to their frequent use of the word jhana. When they depict the Buddha telling his disciples to go meditate, they never quote him as saying "go do vipassanā," but always "go do jhana." And they never equate the word vipassanā with any mindfulness techniques."[12]
  2. ^ Thanissaro Bhikkhu: "This description of the unified role of samatha and vipassana is based upon the Buddha's meditation teachings as presented in the suttas (see "One Tool Among Many" by Thanissaro Bhikkhu). The Abhidhamma and the Commentaries, by contrast, state that samatha and vipassana are two distinct meditation paths (see, for example, The Jhanas in Theravada Buddhist Meditation by H. Gunaratana, ch. 5)."[13]
  3. ^ Original publication: Gombrich, Richard (2007), Religious Experience in Early Buddhism, OCHS Library
  4. ^ See, for example:

    AN 4.170 (Pali):
    “Yo hi koci, āvuso, bhikkhu vā bhikkhunī vā mama santike arahattappattiṁ byākaroti, sabbo so catūhi maggehi, etesaṁ vā aññatarena.
    Katamehi catūhi? Idha, āvuso, bhikkhu samathapubbaṅgamaṁ vipassanaṁ bhāveti[...]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 vipassanāpubbaṅgamaṁ samathaṁ bhāveti[...]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 samathavipassanaṁ yuganaddhaṁ bhāveti[...]
    Puna caparaṁ, āvuso, bhikkhuno dhammuddhaccaviggahitaṁ mānasaṁ hoti[...]
    English translation:
    Friends, whoever — monk or nun — declares the attainment of arahantship in my presence, they all do it by means of one or another of four paths. Which four?
    There is the case where a monk has developed insight preceded by tranquility. [...]
    Then there is the case where a monk has developed tranquillity preceded by insight. [...]
    Then there is the case where a monk has developed tranquillity in tandem with insight. [...]
    "Then there is the case where a monk's mind has its restlessness concerning the Dhamma [Comm: the corruptions of insight] well under control.[24]

    AN 2.30 Vijja-bhagiya Sutta, A Share in Clear Knowing:
    "These two qualities have a share in clear knowing. Which two? Tranquility (samatha) & insight (vipassana).
    "When tranquility is developed, what purpose does it serve? The mind is developed. And when the mind is developed, what purpose does it serve? Passion is abandoned.
    "When insight is developed, what purpose does it serve? Discernment is developed. And when discernment is developed, what purpose does it serve? Ignorance is abandoned.
    "Defiled by passion, the mind is not released. Defiled by ignorance, discernment does not develop. Thus from the fading of passion is there awareness-release. From the fading of ignorance is there discernment-release."[25]

    SN 43.2 (Pali): "Katamo ca, bhikkhave, asaṅkhatagāmimaggo? Samatho ca vipassanā".[26] English translation: "And what, bhikkhus, is the path leading to the unconditioned? Serenity and insight."[27]
  5. ^ Brooks: "While many commentaries and translations of the Buddha's Discourses claim the Buddha taught two practice paths, one called "shamata" and the other called "vipassanā," there is in fact no place in the suttas where one can definitively claim that."[29]
  6. ^ According to Buddhadasa, the aim of mindfulness is to stop the arising of disturbing thoughts and emotions, which arise from sense-contact.[33]

    According to Grzegorz Polak, the four upassanā (foundations of mindfulness) have been misunderstood by the developing Buddhist tradition, including Theravada, to refer to four different foundations. According to Polak, the four upassanā do not refer to four different foundations, but to the awareness of four different aspects of raising mindfulness:[34]
    • the six sense-bases which one needs to be aware of (kāyānupassanā);
    • contemplation on vedanās, which arise with the contact between the senses and their objects (vedanānupassanā);
    • the altered states of mind to which this practice leads (cittānupassanā);
    • the development from the five hindrances to the seven factors of enlightenment (dhammānupassanā).
  7. ^ * Fronsdal: "The primary purpose for which Mahasi offered his form of vipassana practice is the attainment of the first of the four traditional Theravada levels of sainthood (that is, stream entry; sotapatti) through the realization of nibbana, or enlightenment."[35]
    * Robert Sharf: "In fact, contrary to the image propagated by twentieth-century apologists, the actual practice of what we would call meditation rarely played a major role in Buddhist monastic life. The ubiquitous notion of mappo or the "final degenerate age of the dharma" served to reinforce the notion that "enlightenment" was not in fact a viable goal for monks living in inauspicious times."[36]
    * Robert Sharf: "The initial "taste" of nibbana signals the attainment of sotapatti-the first of four levels of enlightenment-which renders the meditator a "noble person" (ariya-puggala) destined for release from the wheel of existence (samsara)in relatively short order."[37]
  8. ^ Various traditions disagree which techniques belong to which pole.[38]
  9. ^ While the Nikayas identify that the pursuit of vipassana can precede the pursuit of samatha, a fruitful vipassana-oriented practice must still be based upon the achievement of stabilizing "access concentration" (Pāli: upacara samādhi).
  10. ^ Khantipalo recommends the use of the kōan-like question "Who?" to penetrate "this not-self-nature of the five aggregates": "In Zen Buddhism this technique has been formulated in several koans, such as 'Who drags this corpse around?'"[69]
  11. ^ This "gradual training" is expressed in teachings as the Five Ranksof enlightenment, the Ten Bulls illustrations that detail the steps on the path, the "three mysterious gates" of Linji, and the "four ways of knowing" of Hakuin Ekaku.
  12. ^ Corresponding respectively to the "contemplative forms" and "experiential forms" in the Theravāda school described above
  13. ^ Leah Zahler: "The practice tradition suggested by the Treasury [Abhidharma-kośa] .. . — and also by Asaṅga's Grounds of Hearers — is one in which mindfulness of breathing becomes a basis for inductive reasoning on such topics as the five aggregates; as a result of such inductive reasoning, the meditator progresses through the Hearer paths of preparation, seeing, and meditation. It seems at least possible that both Vasubandhu and Asaṅga presented their respective versions of such a method, analogous to but different from modern Theravāda insight meditation, and that Gelukpa scholars were unable to reconstruct it in the absence of a practice tradition because of the great difference between this type of inductive meditative reasoning based on observation and the types of meditative reasoning using consequences (thal 'gyur, prasaanga) or syllogisms (sbyor ba, prayoga) with which Gelukpas were familiar. Thus, although Gelukpa scholars give detailed interpretations of the systems of breath meditation set forth in Vasubandu's and Asaṅga's texts, they may not fully account for the higher stages of breath meditation set forth in those texts [...] it appears that neither the Gelukpa textbook writers nor modern scholars such as Lati Rinpoche and Gendun Lodro were in a position to conclude that the first moment of the fifth stage of Vasubandhu's system of breath meditation coincides with the attainment of special insight and that, therefore, the first four stages must be a method for cultivating special insight [although this is clearly the case].[76]
  14. ^ This tradition is outlined by Kamalaśīla in his three Bhāvanākramatexts (particularly the second one), following in turn an approach described in the Laṅkāvatāra Sūtra.[77] One scholar describes his approach thus: "the overall picture painted by Kamalaśīla is that of a kind of serial alternation between observation and analysis that takes place entirely within the sphere of meditative concentration" in which the analysis portion consists of Madhyamaka reasonings.[77]
  15. ^ According to contemporary Tibetan scholar Thrangu Rinpoche the Vajrayana cultivates direct experience. Thrangu Rinpoche: "The approach in the sutras [...] is to develop a conceptual understanding of emptiness and gradually refine that understanding through meditation, which eventually produces a direct experience of emptiness [...] we are proceeding from a conceptual understanding produced by analysis and logical inference into a direct experience [...] this takes a great deal of time [...] we are essentially taking inferential reasoning as our method or as the path. There is an alternative [...] which the Buddha taught in the tantras [...] the primary difference between the sutra approach and the approach of Vajrayana (secret mantra or tantra) is that in the sutra approach, we take inferential reasoning as our path and in the Vajrayana approach, we take direct experience as our path. In the Vajrayana we are cultivating simple, direct experience or "looking." We do this primarily by simply looking directly at our own mind."[78]
  16. ^ Khenchen Thrangu Rinpoche also explains: "In general there are two kinds of meditation: the meditation of the paṇḍita who is a scholar and the nonanalytical meditation or direct meditation of the kusulu, or simple yogi. . . the analytical meditation of the paṇḍita occurs when somebody examines and analyzes something thoroughly until a very clear understanding of it is developed. . . The direct, nonanalytical meditation is called kusulu meditation in Sanskrit. This was translated as trömeh in Tibetan, which means "without complication" or being very simple without the analysis and learning of a great scholar. Instead, the mind is relaxed and without applying analysis so it just rests in its nature. In the sūtra tradition, there are some nonanalytic meditations, but mostly this tradition uses analytic meditation."[79]
  17. ^ Thrangu Rinpoche describes the approach using a guru: "In the Sūtra path one proceeds by examining and analyzing phenomena, using reasoning. One recognizes that all phenomena lack any true existence and that all appearances are merely interdependently related and are without any inherent nature. They are empty yet apparent, apparent yet empty. The path of Mahāmudrā is different in that one proceeds using the instructions concerning the nature of mind that are given by one's guru. This is called taking direct perception or direct experiences as the path. The fruition of śamatha is purity of mind, a mind undisturbed by false conception or emotional afflictions. The fruition of vipaśyanā is knowledge (prajnā) and pure wisdom (jñāna). Jñāna is called the wisdom of nature of phenomena and it comes about through the realization of the true nature of phenomena.[80]

References[edi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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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These definitions of samatha and vipassana are based on the Four Kinds of Persons Sutta (AN 4.94). This article's text is primarily based on Bodhi (2005), pp. 269-70, 440 n. 13. See also Thanissaro (1998d) Archived 2018-10-13 at the Wayback Machine.
  40. ^ Bodhi (2000), pp. 1251-53. See also Thanissaro (1998c)Archived 2019-09-01 at the Wayback Machine (where this sutta is identified as SN 35.204). See also, for instance, a discourse (Pāli: sutta) entitled "Serenity and Insight" (SN 43.2), where the Buddha states: "And what, bhikkhus, is the path leading to the unconditioned? Serenity and insight...." (Bodhi, 2000, pp. 1372-73).
  41. ^ Bodhi (2005), pp. 268, 439 nn. 7, 9, 10. See also Thanissaro (1998f) Archived 2013-04-04 at the Wayback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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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edi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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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nal links[edit source]

History[edit source]

Background[edit source]

Practice[edit sour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