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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9

조성환 - 주체적 근대의 모색 – 다시개벽

주체적 근대의 모색 – 다시개벽

주체적 근대의 모색

-한국학으로서의 동학

글: 조성환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한국 근대의 출발점은?
일본에서 공부할 때, 또는 일본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전공을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이, ‘메이지유신’이나 ‘전전(戰前)’과 같은 일본 역사의 특정한 지점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즉 동양학을 하든 서양학을 하든, 그 학자가 일본인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일본 근현대사의 특정한 사건을 화두로 삼아서 자신의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는 근대화의 성취라는 성공적인 기억과 함께 그것이 가져온 비극에 대한 반성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이 문제를 분석해 보면, 나는 그것이 학문의 출발을 ‘지금 여기’라고 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현실적인 학문관의 반영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몇 년 전에 참여한 교토포럼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지점이 지금은 ‘메이지유신’에서 ‘3·11대지진’으로 이동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라는 지점에 더해서 현대라는 지점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지점은, 단지 전쟁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라는 성격을 넘어서, 근대문명 자체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정리해 보면, 메이지유신이 일본학자들의 근대에 대한 논의의 출발이라고 한다면, 3·11 대지진은 현대에 대한 논의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를 하나 더 들면,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유행했던 서양의 모스트모더니즘을 들 수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사상가나 학자로 분류되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68년’을 논의의 출발로 삼고 있었다. 1968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특정한 사회적 사건이 그들의 문제의식의 출발이 되고, 그 공통된 관심사가 일정한 사조나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한국의 학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자신의 전공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주자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주자나 공자 얘기부터,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붓다나 원효로부터, 칸트를 전공하는 사람은 플라톤이나 칸트의 선배 철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금의 한국이라는 현실은 빠져 있다. 설령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실 문제를 거론한다고 해도, 그것의 기준이 중국의 주자나 조선의 퇴계나 서양의 칸트라고 하는 저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메이지유신’과 같은 근대를 알리는 논의의 지점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동학이라고 생각한다.

동학의 정의에 대한 의문
흔히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동아시아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학에 대한 학설은, 그것이 중국의 유불도(儒彿道)나 서양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과서에 실린 동학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중국의 유불도 삼교의 절충 내지는 종합’이라는 것이고, 최근에 나온 돈 베이커의 『한국인의 영성』에서도 동학 성립에서의 서학(=천주교)의 영향이 강조되고 있다.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님’은 일신교에서 말하는 ‘신’과 유사하고, 이러한 신관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명들이 한국사상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피상적인 견해라고 생각한다. 즉 ‘한국학’의 부재에서 오는 성급한 결론인 것이다. 그것은 동학을 한국학이라고 하는 거시적인 지평 위에 올려놓고 분석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단편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동학의 피상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동학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확실히 동학 경전에 보이는 유교적 덕목들, 주술적인 부적, 천주라는 용어나 하늘님의 성격 등은 중국의 유교나 도교 또는 서양의 서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학’에서의 ‘동’이, 일찍이 최치원이 한반도를 가리켜 ‘동방’이라고 할 때의 그 ‘동’의 함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점에서 ‘동학’이라는 개념을 오늘날로 말하면 ‘한국학’으로 치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최제우가 추구하고자 했던 한국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토착적 요소는 방법론상에서 중국적인 것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적 패러다임의 종언
구한말의 대유학자 최한기는 ‘성학(聖學)에서 기학(氣學)으로’라는 명제로 중국철학의 성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학문은 ‘성학(聖學)’, 즉 ‘성인의 말씀에 의한 대중들의 교화’라고 하는 성인 중심의 형태를 띠었다. 이에 반해 최한기의 ‘기학’은 진리의 기준을 성인의 말씀에 두는 것이 아니라 ‘기’라고 하는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두겠다는 학문관이다. 이처럼 성학이 성인 중심의 중국적 패러다임이고, 기학이 기를 중심으로 한 최한기적 학문관을 말한다면, 동학을 규정하는 학문적 개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천학(天學)’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최제우는 자신의 학문을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중국의 그 어떤 주류 사상도 자신의 학문을 ‘천도’라고 명명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기본적으로 성인 중심의 학문이고, 따라서 학문의 명칭도 성인의 이름을 따라서 붙이기 때문이다. 가령 ‘불도(佛道)’는 ‘붓다가 제시한 길’이라는 뜻이고, 유교의 다른 말은 ‘문무주공의 도’나 ‘공교(孔敎)’, 즉 ‘공자의 가르침’이며, 도교의 다른 말은 ‘노교(老敎)’, 즉 ‘노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총칭하는 개념이 ‘성교(聖敎)=성인의 가르침’ 또는 ‘성학(聖學)=성인의 학문’이다.
이에 반해 동학은 학문의 근원을 ‘하늘’로 삼았다. 그리고 그 하늘은 중국적인 ‘천’이 아니라 ‘하늘님’이라는 ‘천주(天主)’이다. 즉 자연의 운행을 의미하는 무언(無言)의 ‘천’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가 부여된 계시의 하늘인 것이다. 그래서 동학의 하늘님은, 그것과 합일되어야 할 질서나 원리가 아니라, 모시고 섬겨야 할 공경의 대상이다. 최제우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사상을 ‘천도’, 즉 ‘하늘님을 섬기는 삶의 실천’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중국적 사상 형태가 힘을 잃자 한국인들의 궁극적 관심이 드러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즉 성인 패러다임에서 하늘 패러다임으로 사상의 축이 전환된 것이다.

“인간은 성인이다”에서 “인간은 하늘이다”로
중국적 성인 패러다임의 특징은, 일찍이 도널드 먼로가 ‘natural equality’(자연적 평등)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듯이, “누구나 성인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명제로 압축된다. 그런데 먼로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성이 “누구나 똑같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평가적 평등(Evaluative Equality)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즉 누구나 성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누구나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예적(禮的) 질서나 한국의 사농공상의 차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누구나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주장하는 동학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평가적 평등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동학에서 설령 인의예지와 같은 유교적 윤리를 긍정하는 대목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본래의 유교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유교에서는 어디까지나 ‘예’라고 하는 사회적 차등(分) 위에서 상호윤리를 주장하는 반면에(가령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한다고 하는 식의), 동학은 시천주(侍天主)라고 하는 평가적 평등 위에서 유교윤리를 실천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교도들끼리 행하는 맞절의례는 바로 이러한 점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동학에서는 윤리적 덕목의 중심이 ‘경(敬)’으로 이동하게 된다. 즉 이미 모든 존재가 하늘이 된 이상, 그들을 하늘로 공경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윤리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경’이라고 해도 성리학에서의 ‘경’과 동학에서의 ‘경’이 그 내용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성리학에서의 ‘경’이 자신이 성인이 되기 위한 ‘경’이라고 한다면, 동학에서의 ‘경’은 상대를 하늘로 모시기 위한 ‘경’이다. 즉 전자가 ‘극기(克己)’로서의 마음공부라고 한다면 후자는 ‘시인(侍人)’으로서의 타자 윤리인 것이다.

하늘과 인간의 상호협력
동학이 기존의 중국적 패러다임, 또는 유학적 세계관에서 탈피했다고 하는 증거는 시천주의 인간관뿐만 아니라 천인관(天人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적 천인관의 기본은 “인간은 하늘을 본받는다(人法天)”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일찍이 동중서의 ‘천인상여(天人相與)’나 노자의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 등으로 표현되었다. 동중서의 ‘천인상여’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함께 한다”는 뜻인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군주가 부도덕한 정치를 하면 하늘이 자연재해를 내린다”고 하는 천인감응설 또는 천인상관설을 말한다. 한편 노자의 ‘도법자연’은 ‘천’을 저절로 그러하게 운행하는 무목적적인 자연으로 해석하여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운행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반해 최시형이 말한 ‘천인상여(天人相與)’는 “인의천(人依天), 천의인(天依人)” 즉 “인간은 하늘에 의존하고 하늘은 인간에 의존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천인상여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과 하늘의 상호의존성을 말하는 천인상의(天人相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늘이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동중서의 천인상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최시형의 천인상여는 하늘도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불완전한 하늘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에, 동중서의 천인상여에서는 하늘은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일찍이 최제우에게서 ‘노이무공’이라는 말로 표현된 적이 있다. 최제우의 천어(天語) 체험에 나타난 하늘님은 “개벽 후 5만년 동안 노력은 했는데 공이 없다가 너를 만나 공을 이루었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제아무리 하늘님일지라도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제우는 하늘님의 계시와 하늘님으로부터 받은 무극대도를 통해서, 하늘님은 다시 최제우라는 인간의 포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천인관은 이후에 증산교나 통일교에서 ‘신인합발(神人合發)’이라는 형태로 이어진다(홍범초, 노길명, 윤승용 참조). 신인합발이란 인간계와 신령계가 힘을 합쳐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상으로, 동학의 천인상여사상과 그 발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개벽과 민중사상
최제우나 전봉준과 같은 동학사상가를 비롯하여 증산교와 같은 일제시대의 자생종교, 그리고 구한말의 독립지사들, 심지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까지 공통적으로 보이는 한국정치사상의 슬로건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보국안민은 때로는 보국안민(保國安民)으로도 쓰는데 한국의 민중사상 내지는 정치철학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보국’은, 『대학』의 ‘치국’과 대비될 수 있는 말인데, 나라가 위태로우면 민중들이 나서서 나라를 구제한다고 하는 민중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사상을 나타낸 말이다. 반면에 『대학』의 치국은 정치의 주체를 위정자로 보고 위정자가 중심이 되어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상의 표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국이 민중 중심의 개벽사상과 통한다고 한다면 치국은 위정자 중심의 개화사상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보국이 정치의 주체를 ‘민’으로 보고 있다면 치국은 정치의 주체를 ‘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안민’은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인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일찍이 신라 향가의 「안민가」에서 그 용례가 보이고, 사상적으로는 『논어』의 ‘안인’과 상통한다(“修己以安人”). 세종이 한글창제의 목적을 ‘편민’, 즉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거나, 일제시대의 민세 안재홍이 한국정치철학의 핵심을 ‘다사리’, 즉 “정치란 백성들을 모두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 것 등은 모두 안민사상의 표출이다.
반면에 『대학』에서의 ‘친민(親民)’(왕양명)이나 ‘신민(新民)’(주자)은 위정자가 백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논한 것이지, 그 자체가 정치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즉 『대학』에서의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치국·평천하’라고 하는 질서유지에 있고, 그것의 일환으로 친민이나 신민이 요청되는 것이다.
보국안민은 논리적으로 안민이 실현되지 못할 때 ‘민’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보국을 해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나라의 존재 의의,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안민’에 있고, 정치의 주체는 민이라고 하는 사상의 표현이다. 동학의 개벽은 이와 같은 한국의 민중사상과 안민사상이 응집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혁명사상의 표출이다. 다만 동학이 추구한 혁명이 오늘날 정치학에서 말하는 혁명과 다른 점은, 그것이 영성과 수양을 동반한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수양과 구원
중국 종교의 특징은 철저하게 수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데에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성인이 되고, 그렇게 해서 된 성인이 타인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초월적인 신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반면에 서양의 기독교의 핵심은 수양론이 아니라 구원론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창조주로서의 신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국의 수양 중심의 학문관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 도학(道學) 또는 심학(心學)이다. 도학은, ‘수도(修道)’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닦는다’고 하는 수양 중심의 학문관을 대변하는 말이다. 동학에서 “닦아야 도덕이다”(『용담유사』「교훈가」)라고 할 때의 ‘도덕’ 역시, 오늘날 말하는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의 도덕이 아니라, 자기도야라는 의미에서의 수양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는 수양의 중심에 ‘마음’이 자리 잡게 된다. ‘심학’이라는 말은 학문의 핵심은 마음공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퇴계나 동학에서는 자신의 학문을 ‘심학’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동학이 천도라고 하는 하늘님 중심의 사상 체계를 지향했다고 하는 것은, 수양 중심의 중국 종교에 부족한 구원의 문제를 보완하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최제우는 하늘님의 계시를 통해서 천도를 창시하였고, 천도는 마음속에 하늘님이라는 영적인 존재를 믿고 모시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에서는 하늘님이라는 인격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 인간의 자기구원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것은 천인상여의 구원론적 측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은 심학이라는 수양의 요소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공부 없이 하늘님의 강령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至氣今至願爲大降). 그래서 ‘수심정기(修心正氣)’와 ‘시천주(侍天主)’는 수양과 구원이라는 동학의 두 축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동학에 이어서 나온 증산교와 원불교는, 증산교가 상대적으로 상제 중심의 구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면, 원불교는 마음공부 중심의 수양의 문제를 강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학이 추구한 근대
전봉준과 동시대의 일본의 생명사상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다나카 쇼조는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극찬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문명화’라는 구호하에 일본이 추구하던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간접적 비판으로, “살생하지 마라”는 기치를 맨 앞에 내건 동학의 살림사상과 평화사상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다. 다나카 쇼조는 부국강병이 아니라 생명과 살림을 참다운 문명의 기준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와 동학이 비판한 서구적 근대의 근본적인 한계가 일본의 대지진과 한국의 세월호사건으로 표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현대의 논의의 출발점을 3·11 대지진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의 그것은 아마도 4·16 세월호사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는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에 추구해 왔던 일본적 근대화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으로, 생명과 인권을 대가로 추구해온 경제성장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무언인지를 철학적으로 반성하게 한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동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학은 성장보다는 살림에 가치를 두면서, 영성과 수양이 동반된 인문혁명을, 민중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모색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여러 곤경들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줄 수 있는 한국사상사의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용옥, 『독기학설 – 최한기의 삶과 생각』(통나무, 2004)
노길명, 『한국신흥종교연구』(경세원, 1986)
박맹수,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모시는사람들, 2014)
윤승용, 「한국 신종교의 생사관과 상장례」(『신종교연구』23, 2010)
조성환, 「천도의 탄생 – 동학의 사상사적 위치를 중심으로」(『한국사상사학』44, 2013)
조성환, 「‘생명’의 관점에서 본 동학사상사」(『역사연구』28, 2015)
Donald Munro, The Concept of Man in Early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9.

함께하는 삶의 가치, 다사리 정신과 철학 김종길

서울아트가이드 Seoul Art Guide

기고 | 함께하는 삶의 가치, 다사리 정신과 철학
김종길
함께하는 삶의 가치, 다사리 정신과 철학



김종길 | 前 다사리문화학교 마당샘





다사리 : 다 말하게 하여, 다 잘살게 하여

다사리문화학교는 ‘다사리’라는 말의 뜻과 철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21세기 새로운 문화예술기획을 위한 다사리 정신은 무엇일까?



어느 날 저는 정윤재 선생께서 갈무리하신 『다사리 공동체를 향하여-민세 안재홍 평전』(2002)을 보게 되었어요. 스물 셋의 나이에 독립혁명단체 동제사에 가입하고(1913), 스물아홉에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비밀조직에 가담한 뒤(1919), 신간회 활동을 하며 여러 차례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가이자 열린 민족주의자셨던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1891~1965) 선생을 아예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책의 내용이 그분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더군요.


저는 그분의 사상에 매혹되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다사리’는 제가 궁구했던 여러 삶의 의문들을 풀어주는 좋은 열쇳말이었어요. 선생께서는 “‘다사리’는 우주의 엄정한 질서와 운행법칙을 모델로 하는 인간사회의 정치이념이자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의 정치적 이상”이라고 말씀하셨죠. ‘다사리’는 ‘모두 다 말(씀)하게 하여’나 ‘다 사리운다’와 같은 우리말을 뿌리로 두는 데요, 이 말의 의미는 ‘진백’(盡白)과 ‘진생’(盡生)과 통하는 것이에요.


진백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뜻하고, 진생은 공동체 모두를 골고루 잘살게 해주는 사회복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자유주와 평등주의의 이념인 거예요. 정윤재 선생은 『다사리 공동체를 향하여-민세 안재홍 평전』(한울, 210쪽, 2002)에서 “‘다사리’는 ‘다 사리어’(다 말하게 하여)와 ‘다 살리어’(다 잘살게 하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 ‘다 사리어’는 모두 정치에 참여케 하는 정치방식으로 ‘진백(盡白)’의 가치이고, ‘다 살리어’는 복지를 증진시켜 모두 살리는 정치목표로서 ‘진생(盡生)’의 가치라고 분석했지요.


정윤재 선생은 ‘민세 안재홍 평전’을 내고 10년이 지나서 「민세 안재홍의 다사리이념 분석」(『동양정치사상사 제11권 제2호』, 2012.9)이라는 논문 하나를 발표해요. ‘다사리’를 사상의 개념으로 온전히 바로 세우려는 작업이었어요. 선생이 정리한 다사리 이념의 세 가지 고갱이는 다음과 같아요. 



첫째, 다사리 이념은 ‘나’의 자유론에서 출발하면서도 ‘나라’와 ‘누리’와 상통하는 사상적 유연성을 지니고 있어 개인과 국가 그리고 세계가 서로 소통하고 협력해야 하는 지구화시대에 합당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다사리 이념은 진백을 정치적 절차상의 핵심가치로 삼는 한편, 진생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관에 따른 정치리더십만 적절하게 발휘된다면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실천적 한계는 극복될 수 있다.


셋째, 이렇게 하여 다사리 이념에 의해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어 건강한 다사리공동체 형성에 성공한다면, 이는 장차 민족통일의 미래를 가꾸어 가는 과정에서 북한주민들을 감화(感化)시키고 통합(統合)하는 데에도 유리할 것이다.





하나둘셋넷다섯 :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다사리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철학은 ‘만민공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 삶’의 가치를 이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죠.
그러니 이 현실이 우리가 만들어 갈 이상향 아닐까요?



민세 선생은 지천명의 나이 쉰이 되자 조선상고사 집필에 들어가요. 또한 쉰둘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아홉 번째 옥고를 치루기도 하고요. 선생은 자신의 사상을 깊고 넓게 확장시키기 위해 우리 역사와 우리말에 집중했던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사상은 결코 외국사상의 모방이 아닌 “고대 이래의 조국고유의 민족주의·국민주의·민주주의의 제이념과 꼭 합치되고, 다만 그것을 현대적 의의에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것들의 구체적인 증거로 일즉다(一卽多)·대즉일(大卽一)․개즉전(個卽全)의 회통철학(會通哲學)과 화백(和白)·홍익인간·재세이화(在世理化)·접화군생(接化群生)·대동(大同) 등과 같은 우리의 오래된 만민공생(萬民共生)의 개념을 보여주셨죠.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이런 만민공생의 개념이 하나(一:한울)·둘(二:땅)·셋(三:씨)·넷(四:나·나라)·다섯(五:다사리)·여섯(六:연속)·일곱(七:성취)·여덟(八:열고닫음)·아홉(九:아우름·회통)·열(十:개전)·백(百:온통)·천(千:참)·만(萬:조화)·억(億:선)과 같은 우리 숫자 말에 나타나 있다고 풀이하기도 했어요. 일이삼사오가 아니라 하나둘셋넷다섯이 품고 있는 유불선의 철학이 보이나요?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비롯된 우리말의 말뿌리 철학이 선생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민세 선생은 “전 민족이 초계급적으로 굴욕과 착취의 대상이 됐고, 이제 전 민족이 초계급적으로 해방됐으니 초계급적인 통합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어요. 선생은 그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아홉 번이나 옥고를 치를 정도로 정신이 곧았어요. 그런 선생의 비타협적인 저항 정신은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요. 선생의 아호 ‘민세(民世)’는 ‘민족’과 ‘세계’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것이에요. 왜 그랬을까요? 선생은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이념은 “민족으로 세계에, 세계로 민족에, 교호(交互)되고 조합(調合)되는 민족적 국제주의-국제적 민족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민세 선생의 다사리 공동체와 사상사적 맥락에서 21세기 새로운 문화기획의 철학을 엿보았어요. 우리 경기문화재단의 다사리문화학교가 지향해야 할 비전으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죠.



공공하는 문화, 공공하는 학교
자, 그렇다면 다사리문화학교의 정신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과연 현실이 이상향이 될 수 있나요?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 우리가 한 번 더 새겨야 할 공공성에 대해 알아보죠.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 아세요? 사사로운 감정을 없애고 공공의 목적을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죠. 같은 말로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있어요. 공공은 사사로운 것에 우선한다는 뜻이에요. 언 듯 우리는 이 말이 애국이나 충정을 뜻하는 것처럼 매우 중요한 공공의 원칙이 아닐까 생각하지요.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말은 다소 충격적인 뜻으로 읽힐 수 있어요.


사사로운 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나의 ‘나들’로서 ‘우리’의 일입니다. 봉공(奉公)이라는 공공은 국가나 정부를 뜻하지요. 이를 풀어 말하면 국가나 정부의 공익이 나의 이익에 앞서 있다는 뜻이 되지요. 멸사봉공과 선공후사의 정신은 그러므로 자칫 전체주의나 파시즘으로 흐를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 공무를 수행하는 공직자의 경우는 문제가 다를 수 있겠지요.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국민을 위한 공공의 일을 수행해야 하지요.


멸사봉공을 멸공봉사로 바꿔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멸공봉사는 민주주의에 합당한 개념일까요? 아니에요. 그것은 공공을 없애고 오직 사사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니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는 자주 이 둘을 혼동하거나 부정하며, 잊고 삽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까요?


활사개공(活私開公)해야 해요. 활사는 나를 크게 살리는 것이에요. 이때 나는 너의 나이고 나의 너여서, 우리 모두를 말해요. 서로주체의 서로 삶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공을 활짝 열어야 하죠. 그러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지요. 이를 행복공창(幸福公創)이라고 하고요. 


‘공공하다’의 뜻은 공공행복의 세계를 공동(共働:人+動)으로 구축하는 것을 말해요. 이를 위한 지적전략이 바로 활사개공(活私開公)과 공사공매(公私共媒)를 통해서 행복공창(幸福共創)을 지향하는 공공철학이에요. 저는 그 공공철학으로부터 공공하는 문화, 공공하는 학교를 생각했어요. 우리 다사리문화학교가 그것이지요. 공공철학은 본래 ‘공공하는 철학’으로 불리는데요, 재일 철학자 김태창 선생이 주창한 개념이에요. 앞에서 말했듯이 활사개공은 사를 살리고 공을 활짝 여는 것이에요. 기본적으로 공공하는 철학의 말뜻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죠.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 활사라는 것은 자기와 타자가 함께 서로 마주보면서 상대방의 ‘나’를 살리기 위해서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나’가 진정으로 온전히, 충실히 사는 길을 말하는 것이에요. 다사리문화학교의 물들이 찾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지요?



중국의 전적 중에서 ‘공’과 ‘공공’이란 말이 제일 처음 출현한 것은 기원전 91년에 쓰여 진 『사기』이다. 『사기』속의 ‘장석지전’(張釋之傳)이라는 편이 있다. 이 장석지는 한 무제 때의 사법장관이었다. 어느 날 한 무제가 지방에 순찰을 하는 길에 다리를 지나가는데 다리아래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뛰어 나왔다. 무제가 깜짝 놀라서 말 위에서 떨어졌다. 장석지는 그 사람을 체포하였다. 심문 이후 가볍게 징벌하고 그를 석방하였다 이 때 무제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가 말위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큰 화를 당할 뻔하였다. 그런데도 그대는 가볍게 징벌하고 그를 석방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장석지는 무제를 향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법이란 천자가 천하와 공(公)적으로 함께 하는(共) 것입니다(法者, 天者所與天下公共也)” 다시 말해 “법이 법다운 것은 바로 설령 천자가 귀하다 하더라도 또한 천하(만민)과 공(公)적으로 함께(共)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자어류』속의 ‘공공’과 ‘천하’, ‘중인(衆人)’은 연계되어 함께 사용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한 나 개인의 독해에 의하면 주자는 관민의 문제를 처리할 때 ‘천하공공’을 주축으로 삼았다 그리고 민민(民民) 문제를 처리할 때는 ‘중인공공’을 주축으로 삼았다. 따로 대화하고 함께 움직이고 새로움을 열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참으로 성실하게 대응하였다. ‘천하공공’은 ‘수직방향 활동의 공공’이고 ‘중인공공’은 ‘수평방향 활동의 공공’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주자의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공공’과 관련 있는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17세기의 이토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19세기의 요코이쇼난(穔井小楠, 1809-1869) 그리고 다나카쇼우죠(田中正浩, 1841-1913) 이러한 지식인들의 학설 속에 모두 ‘공공’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사용할 때 그 의미는 ‘공’과 구별이 되는 바가 있다. 예를 들면 요코이쇼난(楻井小楠)이 자주 사용하는 것은 ‘천지공공의 실리(天地公共的實理)’였으며 다나카쇼우죠(田中正浩)가 사용한 것은 ‘공공, 협력, 상애(公共 協力 相愛)’였다. 이러한 낱말들이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적 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실천생활의 의미가 더욱 강렬하다. 아울러 이러한 ‘공공’에 관한 사상은 『사기』와 『주자어류』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기학가(氣學家) 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바로 ‘공공(公共)’ 또는 ‘공공(共公)’의 개념을 가지고 기학과 인정(仁政)을 주장하였다.
- 김태창 선생의 강연록에서




몸맘얼의 ‘참나’로 거듭나기



함석헌 선생은 『씨알의 설움』에서 “살․몸은 얼․혼의 참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내 살 내 몸이 닿지 않은 것,/ 내 피 내 맘이 배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생의 스승 다석 유영모 선생은 몸맘얼의 모습으로 제나(이기적인 나), 몸나(몸둥이로서의 나), 얼나(참나로서의 나)를 말씀하셨지요. 몸이 없이 맘이 없고 맘이 없이 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몸 따로 맘 따로 얼 따로는 없는 것이지요. 함석헌 선생의 말씀처럼 얼․혼을 증명하는 도장이 살․몸이니 우리 몸을 어떻게 다스려서 ‘얼나’로 거듭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얼나의 존재로서 예수을 보고 부처를 보고 간디를 봅니다. 그들의 얼나는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는 “나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는데요, 부처 또한 그런 빛의 존재, 진리의 존재, 생명의 존재였습니다. 간디를 상상하는 것은 어둠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는 밝게 빛을 발하는 발광체에 다름 아닙니다. 빛은 어둠을 밀어내고 세계를 드러냅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빛에 비추인 ‘나’가 아니라 ‘나’ 스스로 밝아져야 합니다. 밝은 존재로서의 ‘나’를 옛 사람들은 ‘신명 든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신명(神明)은 내 안의 얼․혼(神)이 밝게 빛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이는 ‘얼이 어리고 있는 존재(아이)’입니다. 얼이 들면서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얼이 든 존재)이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늘 얼이 어리고 있어서 ‘신이 난 존재’로 삽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보면서 “신났다!”, “신났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얼을 잃거나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도 합니다. ‘얼간이’가 되는 것이죠.


얼을 들깨워서 다시 신명이 되어야 합니다. 좌뇌와 우뇌 사이에는 뇌들보가 있습니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다리인데요, 이 다리는 좌뇌와 우뇌를 장고를 치듯 휘몰이로 치고 돌아야 빛을 냅니다. 생각해 보세요. 뇌들보의 뇌신경이 환하게 밝아지는 모습을요.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어두운 뇌를 가지고 삽니다. 왜일까요? 신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의 신명, 맘의 신명이 터져야 하는데 몸도 맘도 지쳐있습니다.


다사리문화학교의 기획은 단순히 청년문화기획자를 길러내는 곳으로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화를 기획한다는 것은 기획하는 사람과 참여하는 사람 모두가 한 바탕 빛무리로서의 은하를 이루는, 신명의 순간을 기획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선적인 강의식 프로그램을 지양하고, 물들 스스로 샘을 기획하고 그 샘을 모시고, 또한 모신 샘을 통해서 각자가 배움의 노트를 기록해 가는 과정 지향형 수업모델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사전에 문화학교에서 모셔야 할 샘들의 이름과 강연제목을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무모한 수업계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사리문화학교는 루돌프 슈타이터의 교육철학을 수행하는 영국의 슈타이너학교나 러시아의 톨스토이학교, 덴마크의 그룬투비처럼 교재가 없는 열린 수업을 지향함으로써 물들이 창의적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적 개인의 교재’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는 2학기에 시작된 현장 프로젝트형 실기수업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학교가 하는 일은, 아니 교육이 하는 일은 ‘기획’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의 ‘예술화’를 물들이 체험토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문화적이지 못한 기획은 딱딱하고 엄숙하며 소통이 되질 못합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만남’의 문화적 소통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판을 짰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눈부처’가 되는 상호 주체성의 ‘만남’이야 말로 다사리문화학교의 철학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학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시천주(侍天主)’하라고 말합니다. “한 얼을 내 안에 모시니”라는 뜻인데요, ‘한 얼’이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이 되었죠. 그런 다음 ‘조화정(造化定)’이라고 말해요. 한 얼을 내 안에 모시니 내 몸에 드디어 조화가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우리 모두의 ‘너’는 얼님입니다. 얼님을 모시는 것이 곧 내 몸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바로 그것이 ‘얼나’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심’을 잊지 마세요.



※ 다사리문화기획학교 자료집 원고(2018). 이 글은 새로 쓴 것과 예전에 쓴 것, 그리고 다른 글에 있던 것들을 꺼내서 하나의 원고로 만든 것이에요. 다소 어려울 수 있겠으나 짧은 원고이니 늘 마음에 새기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김태창 선생의 글은 물론이요, 이선민 선생이 쓴 『민족주의, 이제는 버려야 하나』(삼성경제연구소, 2008)와 한영우 선생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사학」(『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8)을 참조했어요.



2016 “청주는 인문·사상철학·범종교적 교류의 접점 ” |

“청주는 인문·사상철학·범종교적 교류의 접점 ” |

“청주는 인문·사상철학·범종교적 교류의 접점 ”
야마모토 교시, 변영호씨의 기고
2016-07-13 동양일보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특강, 대담, 좌담, 토론 등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양포럼은 이번 회에서 일본 지식인들의 글을 소개한다. 야마모토 교시 일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과 재일교포 2세인 변영호 츠루문과대학 문학부 비교문화학과 교수가 청주를 방문하고 느낀 소감을 보내왔다. <편집자>


▲ 야마모토 교시미래공창신문사 발행인

청주 원로들의 이야기 속엔 일제강점기 한이…
- 동서양과 동아시아의 접점 도시 청주 -
청주 시내에 있는 김태창 선생의 자택은 대로변에 가깝다. 자택을 나와서 인도에 서 있자 곧장 택시가 잡혔다. 택시 문을 열자마자 CD로부터 힘찬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김태창 선생이 “야~ 활기있네요!”라고 말문을 열자, 카마다 토지(鎌田東二) 교토대 교수가 “쿠와타 케이스케(桑田佳祐) 아닌가요? 그립네요!”라고 맞장구쳤다. 이에 택시기사가 고조된 한국말로 “제가 열렬한 팬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 차안에서 일본인 록가수를 화제로 활기찬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이승우 선생과 유성종 전 총장이 기다리고 있는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때는 2015년 12월 6일 저녁. 당시에 한·일정부 사이에는 종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막판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베신조’는 그 무렵 한국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일본인이었다. 역사인식을 후퇴시킨 수상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이렇게 한·일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시기에 일본인 가수의 노래를 불특정 손님에게 들려주는 한없는 밝음과 교정(交情). 이 인상은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인 청주의 현재와 밝은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고 나에게는 생각되었다. 수도 서울이 한국의 정치적 중심지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약간 남쪽으로 내려온 청주는 동서양의 인문적·사상철학적·범종교적 교류의 접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청주에는 5개의 대학이 있다. 청주대학의 유학생은 중국에서 온 학생이 40%,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한다. 청주공항은 오카야마(岡山)공항과 연결되어 있고, 올해 안으로 칸사이(關西)국제공항으로 가는 직행편이 생길 계획이라고 들었다. 충청북도는 한국에서 유일한 내륙 도시로, 경기도를 비롯한 5개도와 인접하고 있다. 미네랄이 풍부한 천연수가 나오며 눈부시게 융성한 도시로 인기가 높다.
전날까지 경상북도 안동에서 열린 ‘이퇴계 한중일국제학술대회’를 마치고, 카마다 교수와 나는 청주의 김태창 선생 자택에 초대받았다. 청주에서는 김태창 선생의 선배이자 친우(親友)인 두 분의 원로로부터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 유창한 일본어로 귀중한 역사적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미래공창신문’에서는 그 내용을 27호(2016년 2월 29일자)에서 일부 보도했고 다음호에서 상세한 내용을 소개했다.
두 원로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초등학교와 청주시내의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한국바둑문화연구회 회장과 전 꽃동네대 총장이다. 두 분 다 80대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정하다. 이승우 선생은 고급관료 출신으로 군수, 시장 등을 역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불편부당을 신조로 삼는 청렴결백의 선비이다. 지일파로 뉴스는 NHK를 듣고 일본 문화에도 아주 밝은 분이다. 일본과 중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바둑 기보를 비교하여 역사를 분석하고, 장계석이 왜 모택동에게 졌는지를 해설한 저서는 널리 읽혀지고 있다.
이승우 선생의 1년 후배인 유성종 전 총장은 한국교육평가원장 출신으로 문교행정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여러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는데 무엇보다도 우정과 신의가 두터운 철인(哲人)이다. 동양평화를 향한 염원은 남다르고, 타협 없는 언론과 행동에는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다. 2000년에는 세계인쇄출판박람회의 조직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기억력이 발군인 이승우 선생이 전쟁말기의 소년시대를 회상했다. 부친은 금융조합(현재 농업협동조합)의 간부였는데, 생활이 어려워서 가족들의 식사는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은 거른 뒤, 저녁에도 죽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명문 청주중학교에 다니는 이승우 소년에게만큼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청주 제2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같은 또래의 일본인이 이씨 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알 까닭도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에서는 모든 한국인을 송죽매(松竹梅)로 등급을 정하고 배급 등 여러 면에서 차등을 두었다. 송에 해당하는 이씨 가정보다도 등급이 더 낮았던 유성종 소년의 가족에게 배급된 것은 만주로부터 비료로 우송되어 온 시커멓게 썩은 두부찌꺼기였다. 쌀겨를 먹으면서 겨울을 지냈다. 보리가 익는 봄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이 시기의 비참함을 ‘보릿고개’라고 한다. 조상의 제사를 중시하는 유씨 집안에서는 과혹한 공출로부터 제사용 쌀을 보호하기 위해서 변소 옆에 작은 단지를 파묻고 그 속에 숨겼다. 언어말살교육은 가혹함을 더했다. 한국말을 쓴 것이 알려지면 교사는 아이들의 손등을 매로 때렸다. “지금 생각해도 한기가 서립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유성종 소년이 시골집에 돌아오자, 처음보는 남자가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누구죠?”라고 묻자, “너의 매형이다.” “어떻게 된 거죠?”라고 묻자, “누나가 나이가 차서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정신대에 끌려간다. 그래서 이웃 마을의 청년과 물 한 그릇 떠놓고 결혼시켰다.” 당시에 한국인 중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승우 선생은 말한다. 남자는 ‘노동동원’으로, 독신여성은 ‘정신대’로 징용되었다. 정신대는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이었는데, 가는 곳은 알 수 없었다.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에 ‘라파울전기’라는 체험담을 그린 문고본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위안부에 대해서 두 군데 나오는데, 가건물에 매춘부가 있는데 조선여성은 ‘센핑’, 오키나와 여성은 ‘나와핑’이라는 멸칭으로 각각 불렸다고 합니다.”
유성종 전 총장이 6학년이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임종시에 “일본은 패한다. 사람들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고서 오래갈 까닭이 없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김태창 선생이 두 사람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두 분과 동년배인 일본인은 한국인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던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요?
이승우 선생은 “진짜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생활세계가 완전히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은 ‘사쿠라’라는 특권계급으로, 먹는 것은 풍부하였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해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든가 ‘(천황 앞에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들과 한국인을 기만하고 있었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은 한국인의 궁핍함을 몰랐고, 그 자손인 우리도 지금까지 알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전후(戰後)에 후지와라 테이는 전쟁 말기에 만주에서 어린애 3명을 데리고 1년이나 걸려서 일본에 돌아온다는 내용의 소설 ‘떨어지는 별은 살아 있다’를 썼다. 북한을 경유한 장대한 귀국기록으로, 식민지의 고충을 체험한 민중이 일본인에 대한 보복을 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볶은 콩을 씹으면서 연명하는 일본인을 동정하고, 스쳐 지나가면서 먹을 것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는 법이다.
나는 만주국의 국무원(國務院) 총무장관을 지낸 키시 노부스케(岸伸介)가 귀향의 고통을 겪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한국과 일본의 서민이 맛본 전쟁의 비참함을 아베 수상은 할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배웠을까? 만주에서 민중을 통치하는 입장에 있었던 키시씨에게 애당초 전쟁의 비참함에 허덕이는 서민과 동고(同苦)·공고(共苦)하는 체험이 있었을까?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일본인은 일본군국주의가 한반도나 중국인들에게 끼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진실을 아직 잘 모른다. 전후 70년을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망언정치가가 잘난 체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의 한중일 삼국이 진정한 우호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민중 차원에서 서로 진실을 얘기하고, 먼저 민(民)과 민(民) 사이에서 해원상화(解寃和解)를 추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한다.

2015년 12월 7일. 우리는 청주시내에서 스포츠사회학자인 전 충북대학교 체육과 이종각 교수와 경제사회학자인 전 청주대학 장준호 부총장과 함께 점심을 했다. 당시 한국의 TV에서는 연일 불법노동운동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절 안으로 도망친 시민운동 리더의 체포강행 여부를 둘러싼 열띤 토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이라면 경찰이 불교사원으로 들어가서 즉각 체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교회나 절이나 대학은 일종의 아질(성역)이 되어 있다.
“나라는 법에 의해 다스려진다. 법은 스포츠의 룰과 마찬가지인데, 한국은 선진국으로서 법을 지키는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고 이종각 교수는 열정적으로 말한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이는 격차해소법안에 저항하는 정규노동자쪽 리더이다. 연수입이 7000만~1억원에 달하는 노동귀족이라는 사실도 시민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반면에 장준호 전 부총장은 “체포는 조금 더 기다려야한다”는 신중론 쪽이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민중의 힘과 단결에 의해 민주주의를 획득한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위로부터의 ‘통치’와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자치’의 상반성은 민주주의의 근간과 관련된다. 지금의 한국은 일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언론의 힘이 강하다. ‘노동조합’은 한국사회의 활력의 척도가 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체제에 불리한 뉴스진행자가 연이어 퇴직을 강요 당하고 있고, 국립대학의 인문계 교원에 대한 예산상의 압박이 논란이 되고 있으며, 언론은 두드러지게 빈약해지고 있다. 기자는 한국의 뜨거운 언론풍경에서 희망을 보았다.
이날 밤에는 한민족철학연구의 권위자인 충북대학교 김용환 교수와 재회하여 시내에 있는 백화점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백화점은 널찍하고 활기찼다. 주위에는 주차장과 도로를 끼고 고층아파트가 즐비했고, 생활과 쇼핑이 효율적으로 일체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김 교수는 예수가 불교를 배웠다고 전해지는 인도의 헤미스사원 등을 답사하고, 그 체험을 1980년대에 책으로 정리해서 출판한 적이 있다. 예수가 13세 때에 ‘동방박사’를 방문하여 페르시아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증거가 되는 문헌을 러시아 언론인 니콜라스 노토비치(Nicolas Notovitch)가 발견하여 바티칸궁전에 가지고 온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바티칸의 반응은 “기지(旣知)의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말한다. “예수는 더 나아가서 동쪽의 북인도로 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병을 고치는 성인이 나타나서, 그 이름을 ‘이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가 누구인지 문헌과 현지조사를 통해 조사해보면 예수를 가리킨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간에 예수가 30이 될 때까지 17년간의 공백기간의 행적은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세주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 지는 가톨릭의 교리와도 미묘하게 연결된다.
김 교수는 “예수는 처음부터 구세주로 하늘에서 내려왔다기 보다는, 김태창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성’이나 ‘우주생명’을 각성하고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요?”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십계와 불교의 십계의 공통점 등을 생각하면, 두 세계 종교 간의 대화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12월 8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김태창 선생이 “최한기의 활동운화(活動運化)를 실제로 관찰해 봐요”라며, 탁자 위에 유리로 된 커피포트를 준비했다. 포트에 물을 붓고 볶은 현미, 메밀가루, 말린 우엉, 볶은 콩가루, 아마란스를 넣고 스위치를 켜자, 처음에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재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점차 빨라지고 서로 격렬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정물(靜物)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양상이 돌변했다. 재료가 빙빙 돌면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운(運)’에 해당한다. 정반대로 회전하는 ‘전(轉)’이고, 정신(魂)의 기능으로 말하면 전개(全開)상태가 된 것이다. 한층 열을 가하자 용기 속은 혼돈스럽게 뒤섞이고, 모든 입자가 근원적 생명력을 한껏 들끓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열탕은 옅은 황색으로 변했다. 각 소재가 속에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던 영양소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탕질(湯質)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것은 각 재료의 개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활동운(活動運)’에 이어서 새로운 영양엑기스가 탄생한(化)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활명연대(活命連帶)에 의한 개신(開新), 미래의 공동창발(共 創發=未來共創)은 바로 이것이라고 실제 관찰을 통해서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기자가 지금까지 야규 마코토(柳生眞) 박사의 논문을 읽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최한기의 ‘활동운화’의 과정을 시각을 통해서 깨닫게 해준 것이다. 이날 밤에는 충북대학교 강형기 교수와 제자들의 회식자리에 동석하게 되었다. 충북대학으로 유학 와서 비영리민간단체가 지방정부 차원의 국제교류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는 네모토 마사츠구(根本眞嗣) 박사도 강 교수의 제자 자격으로 참석했다.
한국에는 226개의 마을에서 만드는 조합회가 있다. 그 고문단장인 강형기 교수는 지방자치의 일인자로, ‘향부론(鄕富論)’(1990년)의 저자이기도 하다. 김태창 선생이 충북대학교 행정대학원장을 겸임하고 있던 25년 전에,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회인을 대상으로 행정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강교수는 말한다. “당시에 김태창 선생님은 구름 위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1991년에 한국에서 최초로 정보공개조례를 도입한 도시는 청주다. 조례화를 추진한 것은 강형기 교수가 교실에서 가르친 제자이다. 그리고 2년 뒤에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의 3분의 2 이상이 정보공개조례를 만들었다. 이것에 기초하여 1996년에는 정부가 정보공개법을 만들었는데, 이 법률은 정보공개의 대상을 행정기관뿐만 아니라 재판소, 국회, 특수법인, 지방자치단체에까지도 확대시키고 있다.
한편 일본은 1996년에 행정정보공개부회가 정보공개법안 요강안의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내용은 한국의 공개법보다도 뒤져 있을뿐만 아니라 아직 법안의 제출조차 되어 있지 않다. 주민투표법이나 외국인투표법의 제정 등 강 교수의 활동은 역동적이고 실적을 동반하고 있다.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강 교수의 친구인 피아니스트가 2개월 전에 오키나와의 쟈마미마을과 토카시키마을에 갔는데, 94세의 할머니가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 “누구한테 배우셨어요?”라고 묻자, “한국에서 끌려온 7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대단히 아름다웠는데, 매일같이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위안부의 이름도 끌려온 경위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진실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12월 9일에는 이종각·장준호 두 분도 청주공항까지 배웅해 주셨고, 청주에 체재하는 김태창 선생과 잠시 이별을 하고, 카마다 교수와 나는 인천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 변영호츠루문과대학 비교문화학과 교수

변영호 邊英浩
츠루문과대학 문학부 비교문화학과 교수
나 자신에게 묻는 것, 한국 고유의 것은 무엇인가
- 한국철학 발신지 청주에 동양일보가 있음을 -
일본에서 교토포럼이 인연이 된 이래로 줄곧 알고 지내온 김태창 선생이 최근에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로 돌아오셔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래공창신문’의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사장으로부터 청주에서 열리는 1회 ‘동양포럼: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동양일보 주최. 2016년 5월 3일)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태창 선생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였기 때문에 나는 자세한 내용도 모른 채 무작정 청주를 방문하게 됐다.
나는 재일교포 2세로 한국유학사상을 연구하고 있고, 때때로 한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1년간 지낸 적이 있지만, 사실 충청북도도, 청주도 첫 방문이었다. 청주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는 서원(西原)이라는 지명으로 불렸으며, 율곡 이이가 지방수령으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실시한 장소라는 인식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인구가 90만명이나 되는 지방의 중핵문화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도착 후에 김태창 선생, 전 세이카(精華)대학의 츠치다 다카시 교수,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사장님, 조성환 박사와 함께 동양일보사를 방문했다. 그러자 먼저 와계신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이 마중 나와 주셨다. 유 총장과는 안동에서 뵌 적이 있는데, 이퇴계의 ‘경사상’을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었다. 그런데 청주 출신인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후에 청주에 체재중인 우리를 배려해 주신 점에 대해서도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방 안에는 조철호 회장이 기다리고 계셨다. 조 회장님의 말씀으로부터 지적이고 성실한 인품과 시인으로서의 정열을 곧바로 느낄 수 있어서, 존경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나에게 있어 이 방문이 주최측에 대한 형식적인 경의 표현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의외의 기쁨이었다. 조 회장의 말씀은 흥미로웠다. 기나긴 기자생활 속에서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신문을 창업하겠다는 뜻을 품게 된 이야기, ‘동양일보’를 창업했을 때 도와주기로 한 친구들의 회사에 정부가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바람에 자신의 자금만으로 창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꺼내셨다.
나아가서 청주가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하고, 삼국시대의 중심지이기도 한 점, 지역에 뿌리를 두면서 장차 동양시대가 오리라는 확신을 갖고 ‘동양일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IMF위기가 한창일 때에 부도난 이야기였다. 처음에 ‘동양일보’는 소규모의 자금으로 창업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모든 인쇄공정을 컴퓨터화하여 한국의 신문출판문화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노동조합도 없는 규모로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대형 신문사가 노조의 반대로 사원들을 해고시키지 못해서 할 수 없었던 일을 역으로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IMF때에는 이것이 역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컴퓨터 관련기계는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IMF때에 한국통화가 크게 하락했기 때문에 동양일보의 비용이 급상승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부터가 조철호 회장의 매력이다. 동양일보 1면에 “부도를 냈지만 신문은 앞으로도 계속 낸다”는 광고를 냈고, 그것을 읽은 뜻있는 시민들이 기부를 해줘 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조 회장의 인격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때 300명 이상의 사원이 있었는데 단 한 사람도 해고시키지 않고, 대신 사원들로부터 희망자를 받아서 자진 퇴사하게 하여 100명 남짓의 규모로 재편성했다는 것이다. 이 위기상황에서 해고자를 한 사람도 내지 않았다는 것은 보통의 신념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인품 때문에 ‘철학하는 사람이 산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김태창 선생과 곧바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인문학이 축소·소멸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조 회장과 같은 분이 철학과 인문학을 지탱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조 회장은 시인이기도 한데, 동양일보를 방문한 날 저녁에 트럼펫 연주자와 시인들을 초대하여 낭송회를 열고, 직접 지은 ‘청주의 여성들은’이라는 청주 여성의 높은 품격을 찬양하는 작품까지 들려 주셨다.
다음날에 있었던 1회 ‘동양포럼: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은 일원적인 일본적 생명관, 이원적인 중국적 생명관, 그리고 삼원적인 한국적 생명관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10월 1~3일에 대규모로 개최될 동양포럼의 준비모임과 같은 성격으로, 이후의 포럼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문화와 사상을 가르치고 있는데, 항상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한국철학이란 무엇인가? 한국 고유의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그런데 한국학자들을 만나면 대개는 서양이나 중국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을 알고 싶어서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까지 서양이나 중국, 또는 일본에 대해 배울 생각은 없다”고 항상 불만이 쌓여있었다. 그런 때에 김태창 선생을 만났는데, 선생 역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더 나아가서 이 문제에 대해 뛰어난 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조철호 회장도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김태창 선생과 의기투합해서 ‘동양일보’를 걸고 지원할 것을 약속해준 것이다.
나는 김태창 선생이 산수(傘壽)를 지나서 고향에서 커다란 지원자들과 지우(知遇)를 얻은 것이 대단히 기뻤고, 이것이 앞으로 형태를 갖추어 나갈 가능성을 느꼈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고, 나아가서 청주가 장차 동양의 중심지로 문화교류와 한국철학의 발신지가 되기를 크게 기대하고 있다. 그 청주의 중심에 ‘동양일보’가 있음을 알게 해준 여행이었다.

2012 한국과 일본의 공공의식을 비교한다 |

한국과 일본의 공공의식을 비교한다 |
한국과 일본의 공공의식을 비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한국과 일본의 공공의식 비교연구' 국제 학술회의
2012-11-21     윤관동 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1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과 일본의 공공의식 비교연구’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김태창 일본 공공철학연구소장이 ‘한국적 공공의 개념화를 위한 시론’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다. 이어 7명의 학자가 이이, 장현광, 정제두, 정조, 최한기, 안재홍, 니노미야 손토쿠 등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의 ‘공공(公共)’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논문은 ‘선비와 사무라이를 통해 본 공공의식(김봉진, 일본 기타큐스대학)’, ‘민(民)의 참여를 둘러싼 공공의식의 비교적 특징(고희탁, 연세대)’, ‘민세 안재홍의 다사라이념과 공공함의 정치(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중지공(私中之公)으로 본 정조의 국가경영(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14세기 말∼16세기 전반기 ‘公共’의 용례 검토(가타오카 류, 일본 도오쿠대학)’, ‘조선 선비들을 통해서 본 공공성의 개념과 쟁점들(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최한기와 일본의 공공 사상가 비교연구(야규 마코토, 일본공공철학연구소)’ 등이다.

토론자는 이숙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김현철(동북아역사재단), 윤대식(충남대), 이동수(경희대 공공대학원), 박홍규(고려대), 김기봉(경기대), 안외순(한서대) 등이 나선다.

연구원 관계자는 “‘선비와 사무라이’라는 양국의 상징 존재가 언제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변천됐는지 왕과 사대부들이 독점하던 ‘공공 담론장’이 언제부터 민(民)이 주체가 되어 참여했는지 심층적으로 다룰 예정이다”고 밝혔다.

조성환 한국철학의 특징을 찾아서 – 다시개벽

한국철학의 특징을 찾아서 – 다시개벽

다시개벽
1920년 창간한 잡지 『개벽』의 창조적 복간



한국철학의 특징을 찾아서
글: 조성환



이 글은 개벽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폐강 직전의 한국철학

이 글은 이번 학기에 서울에 있는 모대학에서 <한국철학특강>을 강의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의 모교이기도 한 이 대학은 1년에 30여 개에 달하는 철학과목이 개설되지만 ‘한국철학’ 과목은 단 한 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이번 학기에는 학생 10명을 채우지 못해 폐강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서양철학과목은 적게는 50명, 많게는 100명까지도 학생들이 몰려오고, 중국철학도 기본적으로 수십 명은 채워지는데 왜 유독 한국철학만은 이렇게 외면당하는 것일까? 한국철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참담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한국철학특강>이 폐강직전까지 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전문적인 ‘특강’ 과목이라는 점, ‘동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시간대가 금요일 늦은 오후라는 점, 가톨릭 계열의 학교라서 상대적으로 한국철학에 소홀하다는 점, 강사인 나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 등등. 그러나 이런 점들을 다 감안해도 한국철학에 대한 철학과 학생들의 무관심은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무관심은 무엇보다도 철학과 교수들의 한국철학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철학과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철학과 교수들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는 이번에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일본에 유학하고 있을 때부터 이 물음은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본’의 모습을 접하고서 오히려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교토포럼을 기획하고 진행하시는 한국인 철학자 김태창 선생을 만난 뒤로 처음으로 ‘한국철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질문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동양철학 전문서적으로서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저서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화두로 던지면서 동양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과 아울러 동양철학의 언어도 서양철학처럼 정교한 ‘학’의 논리를 갖출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고전번역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동양학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세대가 이 물음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어서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민주화운동으로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다른 데로 이동했다는 점, 90년대의 포스트모던 열풍 이후로 서양철학이 학계의 지배적인 담론이 되었다는 점, IMF와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논의의 초점이 경제 문제로 집중되었다는 점 등등. 그러나 좀 더 결정적인 이유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 안에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때 ‘동양학’은 주로 ‘중국학’으로, 그것의 핵심 내용 역시 ‘고전번역’이지 ‘한국철학’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면서 그 안에서 ‘한국철학’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중국철학으로서의 한국철학 연구

혹자는 나의 문제제기에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대학에는 한국철학 과목도 많이 개설되고 있고 한국철학 교수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한국철학 연구자들은 중국철학과 한국철학을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한국철학 연구는 ‘중국철학의 일부’로서의 한국철학을 연구하는 것이지 한국철학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조선유학을 연구하는 한국철학 연구자의 태도는 ‘동아시아 유학사’의 일부로서의 한국철학 연구이지 한국철학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아니다. 얼핏 보면 별반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이 차이는 실은 어머어마한 결과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연구자들로 하여금 ‘한국철학사’를 기술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수식어에 해당하는 내용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한국 땅에서 전개된 철학적 활동들을 나열하는 것을 ‘한국철학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史)’라기보다는 일개 ‘보고서’에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사’라고 하려면 일관된 관점과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철학사’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사유방식’이 담겨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사유방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존의 한국철학 연구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성리학 연구자들은 이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기존의 조선유학 연구는 암암리에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있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고, 퇴계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유학자들은 중국의 주자(朱子)를 하늘처럼 받들었다. 따라서 조선의 유학은 주자학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주자학만 알면 조선유학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대단히 비(非)역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선의 성리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전개는 한국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한국 땅에서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한국’이라는 변수가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사상을 수용하는 쪽의 성향도 같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는 이 부분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다. 그 결과 한국을 단지 일방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수용자로서만 규정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조선유학 연구자들이 유교경전으로 한국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어』나 『맹자』 또는 『시경』이나 『서경』 등을 읽으면서 문법과 어휘를 익히기 마련인데,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중국적 세계관이 그들의 머릿속에 소프트웨어처럼 깔려 버리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적 사유방식을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유교적 세계관이 프로그래밍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사상의 모든 것을 중국사유와 중국문헌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려는 습성이 배게 된다.
이것은 가령 일본 학자들의 장기인 주석 작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령 조선유학의 텍스트를 읽다가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나 어려운 용어가 나오면 이른바 출전을 조사해서 중국고전의 전거를 찾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시경』에 나오는 말이랄지 『사기』의 무슨 편에 나오는 말이랄지 하는 식으로 방대한 사전들을 동원해가며 열심히 조사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번도 그 개념 속에 한국적 문화나 사유가 들어 있을 수 있다고는 의심해 보지 않는다. 한국철학을 연구하는 일본 학자는 물론이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내가 주목한 것은 ‘한중비교철학’이다. 즉 중국철학과 한국철학을 비교하는 것이다. 흔히 ‘비교철학’ 하면 동서비교철학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비교하는 것이 비교철학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중국철학과 한국철학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래와 같이 중국철학의 연장선상에서의, 중국철학의 우산 속에서의 한국철학 연구가 아니라, 그 막대한 영향력을 인정한 상태에서, 중국철학과 한국철학을 대등하게 비교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동서비교철학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시적 차원에서는 동아시아철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서양철학에 의해 왜곡되어 있고, 그 안에서 다시 한국철학이 중국철학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수양으로서의 학문

먼저 동아시아철학 또는 동양철학을 서양철학과 비교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면, 무엇보다도 ‘철학’ 그 자체의 이해, 더 나아가서는 ‘학문’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나는 이 차이를 ‘동도서학(東道西學)’이라는 말로 나타내고자 한다. ‘동도서학’이란 ‘동양의 도학과 서양의 과학’을 줄인 말이다. 다시 말하면 동양은 도학을 추구했고 서양은 과학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비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가령 몇 년 전에 교토포럼에 참석한 연세대학교 철학과 이광호 교수는 도학과 과학으로 동서양의 학문을 대비시킨 적이 있다. 이때 양자의 차이는 도학이 대상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반면, 과학은 대상과 분리되어 객관적 사실을 탐구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시대에 탄생한 원불교 역시 도학과 과학으로 동서양을 암묵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원불교는 ‘과학과 도학을 겸비한 전인적인 인재 양성’(원광대학교 교학대학 홈페이지)을 지향하는데, 이때 과학은 기술에 바탕을 둔 물질문명을, 도학은 도덕에 바탕을 둔 정신문명을 상징한다. 따라서 원불교에서의 도학과 과학의 대비는 정신과 물질, 또는 도덕과 기술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도학’의 핵심은 ‘수양’이다. 즉 ‘동도(東道)’라고 할 때의 ‘도’는 곧 ‘수양’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동양학은 학문 자체가 수양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논의가 수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은, 설령 그것이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객관적 진리 추구라는 ‘과학’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똑같이 ‘마음(Mind)’을 논해도, 서양의 경우에는 우리의 ‘앎’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그 ‘앎’이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니는지와 같은 ‘인식론’(Theory of Knowledge)에 치중해 있다면, 동양의 경우에는 ‘마음(心)’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본래 마음[本心]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와 같은 ‘마음공부[心學]’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의 학문을, 거칠게 구분하자면, ‘수양으로서의 학문’과 ‘과학으로서의 학문’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교에서 말하는 ‘수기치인’은 일종의 ‘수양정치론’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같은 맥락에서 도교는 ‘수양양생론’, 불교는 ‘수양해탈론’이라고 각각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수양’은 각각 정치와 양생 그리고 해탈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우리는 흔히 신유학하면 불교의 ‘리’의 존재론과 도교의 ‘기’의 우주론을 대폭 수용하여 리기론 체계를 수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수양’의 관점에서 신유학을 다시 생각해보면, 형이상학이나 우주론보다는 오히려 수양론이 대폭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유학은 불교 수양론의 도전을 받아서 마음공부를 전폭적으로 강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유학 역시 여전히 ‘심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신유학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성(誠)-경(敬), 미발-이발, 함양-찰식, 거경-궁리, 정좌, 정성(定性), 허심, 명경(明鏡) 등이라는 사실로부터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불교나 유학이 마음공부에 치중하고, 그런 점에서 ‘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중국도교나 인도요가의 경우에는 몸의 동작을 통한 ‘기’의 순환을 중시한다. 그런 점에서 ‘기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기학’이라는 표현은 조선말의 대유학자인 최한기가 자신의 철학체계를 지칭해서 쓴 말로, ‘기’ 중심의 학문체계를 가리킨다. 그래서 거기에는 우주론, 인식론, 윤리학 등이 포괄적으로 망라되어 있다. 반면에 여기에서 말하는 ‘기학’은 그것보다는 훨씬 좁은 의미이다. 즉 수양론에 국한해서 쓰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최한기의 ‘기학’ 체계에는 수양론으로서의 ‘기학’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원광대학교 불교학과대학원에는 ‘기학’ 전공과정이 있는데, 커리큘럼은 기공학, 내단수행, 도인법 등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때의 ‘기학’이 바로 이 글에서 말하는 수양론으로서의 ‘기학’에 가깝다. 한편 순수하게 수양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기독교 역시 ‘심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 수련보다는 믿음이나 기도와 같은 심적인 요소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퇴계가 도교의 양생서인 『활인심방』을 받아들였던 것은, 수양학적 측면에서 보면 유교에는 취약한 기학적 요소를 보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국철학의 특징을 찾아서

이상이 서양철학과 대비되는 동양철학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다음으로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철학과 대비되는 한국철학의 특징이다. 나는 그것을 ‘하늘’, ‘회통’, ‘개벽’, ‘살림’이라는 네 개념으로 잡아보았다. 그리고 이 네 사상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 바로 조선후기에 탄생한 ‘동학’이라고 본다.
먼저 ‘하늘’은 한자어 ‘天(천)’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중국의 ‘天’과 서양의 ‘God’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개념이다. 이 ‘하늘’은 ‘한국종교의 원형’이라고도 말해질 정도로(박재순), 한국인들의 심성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개념이다. 단군신화의 천신강림설화를 비롯하여 윤동주의 「서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행사에서 시작하여 식민지시대 민족종교의 천제(天祭)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한국인들의 이야기와 생활방식 속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성리학자들이 사용했던 한자어 ‘天’ 개념에도, 중국 유교에서 말하는 ‘天’뿐만이 아니라, 한국적인 ‘하늘사상’이 가미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 ‘회통’은 한국종교의 경향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일찍이 9세기의 최치원이 풍류도를 ‘포함삼교’, 즉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고 규정한 이후로, 흔히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통불교’ 담론,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의 유교와 천주교의 융합,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능화의 『백교회통』(1912) 논의를 거쳐, 실제로 유불도 삼교를 종합했다고 하는 원불교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는 외래 사상을 수용하여 새로운 ‘도’를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문화를 전파하는 입장에 있었던 중국이나 서양과는 달리, 그것들을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발달된 것이리라.



또한 19세기 말 동학에서 시작된 ‘개벽’ 사상은 ‘개화’와 대비되는 말이다. 개화가 지식인들 중심의 전반서구화를 의미한다면, 개벽은 민중들이 중심이 된 자주적인 근대화운동이었다. 흔히 민족종교로 분류되는 동학(천도교)-증산교-원불교는 모두 이 ‘개벽’이라는 용어를 공유하고 있다(1909년에 탄생한 대종교 역시 ‘개벽’과 사상적으로 상통하는 ‘중광重光’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당시의 중국이나 일본사상에서는 보기 드문 요소이다. 즉 근대 한국의 개벽사상은 종교를 초월하여 100년 넘게 전개되었고, 지금도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림’ 역시 외국어로는 좀처럼 번역하기 힘든 한국적인 개념이다. ‘살림’은 ‘살리다’는 동사에서 왔다는 점에서 ‘생명’과는 구분된다. 따라서 생명철학이나 생명학이 생명현상의 탐구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살림철학이나 살림학은 살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신유학에서 말하는 ‘생물(生物)’ 역시 “대자연이 만물을 ‘낳는’ 생성작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살림’과는 다르다. ‘살림’은 단지 생명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기’를 살리고, 개인의 능력을 살리고, 조직을 살리는 것까지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림’은 ‘경영’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나라살림’, ‘가정살림’이라고 할 때의 ‘살림’이 그런 예이다. 이 ‘살림’ 개념은 특히 현대 한국철학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장일순의 한살림운동, 박재순 등의 살림신학, 김태창의 활사개공(活私開公)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개념이 응축되어 있는 사상이 동학이다. 그래서 한국철학사는 동학으로 수렴되어 동학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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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1.24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7월 9일 오전 9시 32분

공자가 말했던 불혹(不惑)은 나 자신의 체감, 체험, 체인한 바에 따라서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시기라고 뜻풀이 한데 대해서 30세(나에게는 50세)에 확립한 자기관점과 입장에서 흔들리거나 방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맞는 말이다.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혹’(惑)이라는 한자를 ‘땅에 금을 긋고 줄을 쳐서 구획하고 그것을 무기로 지키는 마음가짐’이라는 원래의 뜻에다가 아니 ‘불’(不)이라는 글자를 첨가해서 이루어진 뜻글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특정이념, 사상, 학설의 테두리 안에 굳게 갇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활짝 열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 성숙, 진화되는 과정의 시발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중장년에서 노숙년으로 바뀌는 시기(공자40세, 나의 60세)에 일어나는 각성체험의 특징으로 뜻풀이한다. 바로 이 시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다음에 이어지는 노숙년기(70, 80, 90세)의 각성과 자각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만약에 이 전환기의 특징을 ‘흔들림이 없는 관점과 입장의 확정’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게 되면 노숙년은 그렇게 확정된 관점과 입장에 따른 자기통합, 자기실현, 자기완결을 매듭짓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과정으로 여기고 거기에 진력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느낌과 생각은 다르다. 내게는 이 전환기(공자의 40세, 나의 60세)가 자기중심에서 자타상생으로 삶의 기축이 전환되는 시기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이듦의 과정이 자기개방, 자기탈출, 자기초월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닫고 얼을 통해서 내 목숨이 하늘 목숨에 이어져서 마침내 거기에 돌아가게 되는 단계다.

삶의 차원이 훨씬 더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혀지는 것이다. 불꽃을 마지막에 또 한 번 피우는 (최종의 자기실현의)시기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의 불꽃을 온전히 사르어서 생명자체의 향상, 진화, 개벽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기다.



7월 10일 오전 9시 26분

공자는 50세가 되어 하늘의 명하심을 알았다고 했다. 대다수의 유학자 또는 논어 주석가들이 하늘의 명하심(天命)을 도덕적 최고선 또는 도덕적 지상명령으로 해석, 해설,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70대에 들어서 몇 번 극심한 병고를 겪은 바 있는데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괴로움 속에서 나 자신의 목숨=개체생명을 넘어선 아주 커다란 생명과 그 놀라운 힘=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가 나의 살고 죽는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치, 진실,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그때 어려서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던 하늘의 명하심이라는 것이 내 목숨이 하늘 목숨과 서로 통하게 되어있는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의 진실을 몸으로 깨닫는 것이 '하늘의 명하심을 알다'(知天命)의 참뜻이 라는 각성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의 명하심을 도덕적 최고선=지상명령이 아니라 생명철학적 공동선=지상명령이라고 뜻풀이하고 ‘안다’를 ‘서로 통함을 깨닫는다’는 말로 바꾸어서-지천명을 통천 명으로 바꾸어서-노년기에 들어서는 처음단계=초로(初老)의 각성특징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공자의 짧지만 고농도의 자기이야기(self-storytelling)에서 특히 50세에 이르러 알게 되었다는 천명을 도덕철학적 해석과 관점과 입장이 아닌 생명철학적 의료철학적 해석과 관점과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의 의철학적 사고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중장년기에서는 주로 도덕철학적 자기정체성의 탐구와 확립과 완성을 추구했으나 노숙년기에 들어서면서 나이듦의 의미와 가치를 생명철학적 의철학적 자기재점검을 통해서 자기라는 틀을 풀고 열어서 남들과 서로 잘 통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자타상화, 자타상생, 자타공복을 함께 이루어가는데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자가 50세에 알게된 도덕적 각성체험이요 내가 70대에 들어서 깨닫게 된 생철학적, 의철학적 각성체험의 실상이다.



7월 11일 오전 6시 49분

나는 지나간 85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 그리고 영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내가 겪은 모든 아픔의 근본원인은 거의 예외 없이 ‘불통(不通)’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국의학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허준(許浚: 이조중기의 한의학자 1546-1615) 저 ‘동의보감’에 나오는 “통하면 안 아프고 통하지 못하면 아프다 (通卽不痛 不通卽痛통즉불통 불통즉통)”라는 구절에 접했을 때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통하면 안 아프고 안 통하면 아픈 것은 적어도 나 자신이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달은 바로는 ‘기(氣)’다. 기가 통하면 심신이 온전하고 기가 안 통하면 심신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 나이듦의 과정에서 빈번하게 반복된 체감이요 체험이다. 그것은 ‘기통(氣通)’이며 ‘기식(氣息)’이다. 즉 호흡이다. 숨쉬기다. 바로 목숨이다.

나 자신이 여러 가지 아픔을 통해서 스스로 알게된 바에 의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본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살아 있게 하는 ‘기’가 나라는 존재 속에도 들어와서 함께 살아있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기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에너지(生氣)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물질에너지(元氣)이며 또 모든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는 존재자들이 올바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지켜주는 위상에너지(正氣)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아있고 움직이고 역전되기도 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나하나의 생명체의 안에서 죽은 기를 밖으로 배출하고 밖-하늘과 땅-에 충만한, 살아있는 기를 흡입하는 것이 숨쉬기이며 호흡이며 기통(氣通)이다.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이 몸과 마음과 얼의 기본적인 건전, 건강, 건녕(健寧)이며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통, 병고, 병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통=기의 유통순환=숨쉬기=호흡이 완전히 멈추어서 기가 하늘과 땅으로 널리 퍼져서 사라지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 목숨이 내 목숨이 되어 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이 일생, 생애, 인생이고 그것이 끝이 나서 내 목숨이 하늘 목숨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이것이 최한기(崔漢綺: 구한말의 과학철학자 1803-1879)의 ‘기통론(氣通論)’과 연결되는 데서 나 자신의 기통의 철학적 생사관과 노년철학적 인간이해가 어우러져서 기통의 철학적 노년인문학의 단초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월 12일 오후 2시 18분

나는 여간 해서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게 될 때마다 의사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나 일본의 병원에서 만났던 의사들은 환자인 나와 얼굴을 맞대고 나의 표정을 자상하게 살피면서 나의 말=증상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우선 환자의 기를 살리는 말을 했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1970년대 초기에 내가 독일에서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고 어느 날인가 갑자기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었는데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입안과 목과 혓바닥을 본 다음에 배 언저리를 눌렀다 놓았다 하고 나서 청진기로 몸 안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 의사의 태도로 보아 환자의 기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좋아질 거라면서 별 탈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서 당분간 음식 조심하라는 조언으로 끝났다. 약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 의사가 말하기를 최상의 치료는 ‘Mundtherapie(Mund=입+Therapie=치료)’이고 영어로는 ‘Dialogical Therapy’라고 자기 나름으로 번역해서 독일어를 잘 모른 사람들에게도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려서나 젊은 시절 그리고 중장년 시절에 만났던 의사들은 대체로 그런 치료를 했었다. 한마디로 대화치료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자신이 본격적으로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어쩌다 병원신세를 지게 될 때 거기서 만나게 되는 의사들은 대체로 환자의 얼굴은 보지 않고 컴퓨터화면만 보고 사전에 받게 한 검사결과의 숫자를 살펴보고 진단결과를 통보하고 약국에 가서 약을 타가라는 말이 거의 전부다.

사전에 예약을 하고 가도 한 시간 이상 기다리고 나서 진작 의사의 진단과 상담을 받는 시간은 10분 내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Numeral Therapy=수치치료 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수치치료에서 검사결과에 나타난 수치에 의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환자의 기분이나 설명이 거의 필요 없다는 태도다. 그 곳에서 환자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기가 완전히 죽게 되고 특히 노년환자의 경우에 기가 살아서 힘을 발휘하는 자연치유력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가기 싫은 것이다. 서양의학의 훈련만 받은 요즘의 의사들은 환자, 특히, 연로한 환자의 경우, 기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기통의철학적교양(氣通醫哲學的敎養)’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7월 14일 오전 1시 2분

기통의 철학적 교양의 필요성을 강조했더니 조금만 더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어느 생명부지의 의사로부터 받았다. 반가웠다. 철저한 무관심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여러 가지 일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의사들에게 기통의 철학을 새삼스럽게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환자를 접하는데 있어서 정상치에서 벗어난 장기기능과 그 정상회복을 위한 치료와 약물처방이나 조치 이전에 기본적인 인간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는 의료현장에서 느꼈던 나 자신의 체감을 말한 것뿐이다.

특히 나이든 환자의 경우에는 인간적인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말하자면 치료, 치유적 효과를 더 올리기 위해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노파심을 말해본 것이다. 기통의 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과학적으로 확증된 데이타-수치데이타-를 중시하는 현대의 과학에 환자의 인간적 생명현상의 실상에 대한 기본 이해를 보완하는 현장의 지혜가 치료, 치유효과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환자로서의 기대다.

그렇다면 기통의 철학적 인간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세가지를 유념해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 인간은-어린이나 젊은이나 나이든 이를 막론하고-기가 모여서 태어나고 기로 살다가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2. 기란 기운이며 그것은 인간이 살아 움직이도록 삶을 받쳐주는 힘=근원적 생명에너지이다. 느낄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는 흐름이다. 생기(生氣), 기력(氣力), 정기(精氣)라는 말들로 거의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3. 특히 나이든 환자의 경우에는 복잡한 원인, 이유, 사정으로 생기(生氣=살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의기(意氣=적극적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기개)가 꺾여 있으며 그것이 기력(氣力=삶을 이어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 감퇴 있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기운을 돋우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 한마디가 기운을 돋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기통의 철학적 인간이해의 최소치(Minimum Essential)이다. 나는 나 자신이 실제로 겪은 여러 가지 아픔과 그 치유과정을 통해서 절감한 진실의 한 가지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약발보다 말발이 더 잘 듣는다”고.



7월 25일 목요일

작가 켄트 너번이 전한 한 아메리카 인디언 원로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을 길게 뻗은 선으로만 보고,양쪽 끝에 있는 어린이와 노인은 약하고 가운데 있는 사람만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중요하다고 하면, 어린이와 노인 속에 감춰진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만다.어린이와 노인이 공동체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해서 그들을 선물이 아니라 짐으로만 여기고 마는 꼴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노인은 서로 차원이 다른 선물이다. 노인에게는 경험에서 얻은 지혜가 있다.인생의 먼 길을 여행해 왔기에 우리 앞에 놓인 길에 관한 지혜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가 막 배우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이미 삶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나이든 이에게 선물이고,나이든 이도 어린이에게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가? 아침과 저녁이 하루를 완성하듯이 어린이와 노인이 인생의 여정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재고하게 된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기 12:12)

오늘날의 노년에게서 지혜를 기대하고 장수자에게서 명철을 감득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과 만나서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어보면 나이 듦이 고루한 생각을 굳히고 장수가 시대착오적인 집착을 강화할 뿐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아서 불통을 개탄한다.



7월 26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동양일보사 3층 회의실에서 충북대학교 지역교육연구소 연구원 김혜련 박사의 하곡정제두의 노년기 사상을 주제로 유성종 운영위원장 · 김용환 교수와 네 사람이 오붓하게 철학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사람치고는 놀라운 장수(88세)를 누렸고 오늘의 화두가 되었던 <심경집의」(心經集義)>는 그가 63세 때 저술하고 79세 때 최종적으로 수정한 것이어서 가히 하곡 노년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김혜련 박사의 발제로부터 나 자신이 듣고 생각해본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진리와 물리와 생리 중에서 특히 생리를 양명학적 양지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인(仁)’과 결부시키고 다시 남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에 감통하는축은지심의 근거로 삼았다.노숙년에 이르면 감통하는 생리와 물리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② 한국사람과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이학적 사유보다 심학적 대응이 더 강하다.어떻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느냐보다 어떻게 피부로 느끼느냐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두드러지다.특히 작금의 현실상황을 신중하게 볼 때,이학적 사유의 냉철함으로 사회적 광기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정제두의 이학이 오늘의 현실이 갖는 의미를 재삼 상고해볼 필요가 있다.

③ 무엇보다도 나이 들어갈수록 공자의 ‘사절(四絶)’이 필요함을 하곡과 함께 오늘날의 우리들도 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무의(毋意)-사사로운 뜻을 고집함에서 벗어남.

둘째 무필(毋必)-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뜻에 너무 집착하지 않음.

셋째 무고(毋固)-고집불통인 상태에서 벗어남.

넷째 무아(毋我)-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음.



오후 6시부터 7시 10분까지 우민아트센터에서 중원포럼 주최의 중국철학과 인생이라는 주제로 한국외국어대학 박정근 명예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주역(周易)>에 담긴 역철학(易哲學)의 핵심이 되는 ‘역(易)’을 만물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살아 있는 것-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으로 풀이하고 생명적 우주관을 제시하는 그것을 기본을 하는 인생론을 폈다는 점이다.

그래서 토론과정에서 삶이 나이 듦이며 나이듦이 낡아짐(老古)이나 쇠약해짐(老衰)이나 추해짐(老醜)이 아니라 새로워짐(老新)이며 무르익어감(老熟)이며 멋있어짐(老美)이라고 노년관 혁신의 또 하나의 동양철학적 전거(典據)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역시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한 가지 논의된 것은 박 교수가 죽음을 ‘입사’(入死=죽음에 들어감)라는 말을 써서 노자의 죽음관을 설명한 데 대해서 오히려 노자의 ‘귀원’(歸元 =본디로 돌아감)이 나의 죽음이해 -즉 죽음=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감)-과 서로 통하는 바라 있어서 더 선호하다고 말했더니 자기 생각도 다르지 않다고 해서 대화가 기분 좋게 끝났다.

다만 노자에게 있어서의 본디(元=始元=根元)는 어디까지나 ‘도’(道)인데 비해서 나의 경우에는 ‘기’(氣 =元氣 =生氣 =宇宙生命)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구태어 부언하자면 생사관에 있어서는 노자보다는 장자 쪽이 나 자신은 더 친근감을 느낀다.

알라딘: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 인仁의 3천년 역사에 깃든 상생의 힘

알라딘: [전자책]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 인仁의 3천년 역사에 깃든 상생의 힘


[eBook]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 인仁의 3천년 역사에 깃든 상생의 힘 - 인의 3천년 역사에 깃든 상생의 힘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 1
신정근,한국국학진흥원 (지은이)글항아리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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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 주간 1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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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 시리즈 첫 번째 책. 인간을 인간답게 가꾸어주는 사람다움 인仁의 역사를 다룬다. 인仁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공자에 의해 유학의 핵심 사상으로 등극한 이후부터 인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원전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현대의 사례와 겹쳐 읽는 저자의 세심한 글쓰기가 특히 돋보이는 책이다.

그간 봐온 골치 아프고 고리타분한 동양철학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인은 바다의 고요한 심연처럼 조용하게 흘러온 것이 아니라 바다의 표면처럼 시대와 격랑을 이루며 우당탕 쏟아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통 우리가 인仁하면 중국 사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깨고자 했다. 18~19세기 정약용과 최한기는 중국과의 사상의 동시성 또는 선도성을 보여줬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목차


1장 풀이하는 글
01 인仁 개념의 기본 의미: 매력, 실효, 원리
02 역사 속에서 인은 어떻게 변해왔나
03 한국에서 인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04 인의 비판자들
05 현대적 재조명의 가능성

2장 원전과 함께 읽는 인仁
01단계 공자 이전: 『시경』 『서경』 『좌전』 그리고 『삼국사기』
― 치인의 매력과 지도력으로서의 인 ― 남자다움
02단계 공자
― 수기와 치인의 결합으로서의 인 ― 사람다움
03단계 인의 반대자들: 묵자·노자·장자
― 차별과 폭력의 원인으로서의 인 ― 반쪽 사랑, 가짜 사랑
04단계 맹자
― 내재적인 도덕 감정으로서의 인 ― 측은지심
05단계 동중서
― 인과 의의 결합, 천인감응으로서의 인 ― 타자 사랑, 하느님 마음
06단계 한유
― 중국 문화와 도통의 결합으로서의 인 ― 박애
07단계 장재·이정·서경덕
― 우주 가족, 단계론의 꼬리를 단 만물일체로서의 인 ― 단계적인 보편사랑
08단계 주희·진순·권근·이황·이이
― 보편과 개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변주로서의 인 ― 무한 재생의 마음, 마음의 총체적 역량이자 사랑의 이치
09단계 왕양명과 박은식
― 예술적 만물일체로서의 인 ― 한없는 교감 능력
10단계 정약용·완원
― 인간관계의 완전한 수행으로서의 인 ― 사이좋음
11단계 최한기·캉유웨이·탄쓰통
― 실제의 자연과 장애의 철폐로서의 인, 동서융합의 실례 ― 운화의 지속, 위대한 같음, 상호 소통

3장 원문과 함께 읽어볼 자료
1. 원문
2. 주석
3. 더 참고하면 좋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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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신정근 (지은이)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교수이자 유학대학장·유학대학 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양고전을 누구나 쉽게 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도록 힘써온 저자는 2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으로 대한민국에 동양고전 강독 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 뜨다』, 『불혹과 유혹 사이』, 『인생교과서 공자』,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노자의 인생 강의』, 『1일 1수, 대학에서 인생의 한 수를 배우다』 등을 집필했고, 각종 미디어와 기업·공공기관 등의 강연을 통해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며 동양고전의 매력을 전파하고 있다.

『맹자의 꿈』에는 “빼어난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현명한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가?”라는 인류의 역사 이래 풀리지 않는 과제 속에서 제왕학의 대가 맹자(孟子)가 길어 올린 명징한 해답들이 담겨 있다. 좋은 지도자란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항상 탐구하면서 죽음보다 생명을, 독선보다 포용을, 진영보다 보편을, 경쟁보다 공존을 끌어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가 전하는 리더 수업을 통해 경쟁의 장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활기·쾌활·여유·호의가 넘치는 ‘대장부(大丈夫)’의 기상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접기

최근작 : <생생미학과 생태미학>,<주제 속 주희, 현대적 주희>,<맹자의 꿈> … 총 87종 (모두보기)

한국국학진흥원 (지은이)

한국국학진흥원은 ‘전통을 이어 미래를 여는 국학의 진흥’이라는 목표 아래 전통 기록유산을 중심으로 민간 소장 국학자료의 체계적인 수집·보존과 연구·활용 사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시대 유교 목판을 보존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으며, 그런 기록유산들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한국적 스토리텔링 소재를 발굴하여 콘텐츠 제작 현장에 제공하는 일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을 통해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선현들의 지혜를 전승하고, 한문교육원과 유교문화박물관을 운영함으로써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급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www.koreastudy.or.kr
이야기할머니사업단 www.storymama.or.kr
유교문화박물관 www.confuseum.org
유교넷 www.ugy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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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한국의 종가, 그 현재와 가치>,<한국의 종가, 그 역사와 정신>,<만날수록 정은 깊어지고> … 총 7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아시아 사상의 슈퍼스타 인仁에 대한 최초의 통사通史!
공자 이전부터 탄쓰통까지, 삼국시대부터 최한기까지
중국 및 한국 인仁사상 11단계로 정리
사람다운 삶을 이끌어가는 핵심 윤리로 인仁의 상생의 힘 발굴
한 번뿐인 인생, 사람다움을 선택한 이들의 치열한 삶도 조명

팬과 안티팬에 둘러싸인 인仁, 드디어 베일을 벗다

이 책은 3천 년 인仁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책이다. 인仁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공자에 의해 유학의 핵심 사상으로 등극한 이후부터 인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노자와 장자 같은 ‘안티팬’도 거느리게 되었다. 저자는 이 인을 공자 이전에서 시작해서 근대의 최한기, 캉유웨이康有爲와 탄쓰통譚嗣同에 이르기까지 11단계로 나누어서 다루었다. 그중 한 단계는 묵자·노자·장자 등 인의 강력한 비판자이므로 인의 옹호자는 사실 10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3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인을 하나의 유사한 의미로 보는 입장이 아니며 그것과 정확히 반대에 서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엔트리가 11명인 축구처럼 11단계의 인이 3000여 년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는 것을 펼쳐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그간 봐온 골치 아프고 고리타분한 동양철학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인은 바다의 고요한 심연처럼 조용하게 흘러온 것이 아니라 바다의 표면처럼 시대와 격랑을 이루며 우당탕 쏟아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원전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현대의 사례와 겹쳐 읽는 저자의 세심한 글쓰기는 이 책의 가장 독특한 미덕이다. 그 외에 이 책의 장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별로 인의 맥락과 그 의미를 분석하면서 사상사의 흐름과 결부시켰다. 예컨대 한나라의 동중서가 천인감응과 인을 결합시킨 측면을 언급했다.
둘째, 한국적 전개 양상을 최초로 다루어서 보통 인 하면 중국 사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깨고자 했다. 18~19세기 정약용과 최한기는 중국과의 사상의 동시성 또는 선도성을 보여줬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는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특기할 만한 현상이기도 하다.
셋째, 인 사상의 자료를 망라하여 이를 토대로 앞으로 심화 연구가 가능하게 했다. 개별 사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있지만 개괄적이나마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인을 두루 다룬 통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넷째, 인을 다루면서 늘 연구 대상, 맥락, 정의를 나누어서 설명했다. 이 부분만을 점검하더라도 인 사상의 흐름을 일별할 수 있다.

인仁의 사상사적 전개
『시경』『서경』->공자->맹자->동중서->한유->주희->왕양명->캉유웨이와 탄쓰통

저자는 인仁의 의미를 찾는 여행을 떠나면서 인을 ‘어질 인’으로 풀이하는 관행을 당장 그만두고 그냥 ‘사람다울 인’으로 바꾸어 읽기를 제안한다. 인을 ‘어질다’로 풀면 너무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있어서 명확한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질 현賢’으로 풀이하는 관행과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仁을 ‘사람답다’로 옮긴다면 인의 영어 번역어 humanity와 잘 어울린다. 따지고 보면 사람다움이 ‘사람’에다가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접미사 ‘-답다’의 명사형 ‘-다움’이 결합한 것이듯, humanity도 사람을 가리키는 human에다 추상적 성질을 나타내는 접미사 -ty가 합쳐진 꼴이다. 사전에 보면 humanity를 인간성, 인류애, 자비 등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사람으로서 요구되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사람다움의 풀이가 가장 적합하다.
사람다움은 역사의 단계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원시시대의 사람다움이 현대사회의 사람다움과 같을 수가 없다. 원시시대에는 사람이 자연에 종속되어 지배를 받았지만 반면 현대는 사람들이 자연을 이용하고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 이처럼 삶의 지평이 크게 다르므로 사람다움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仁 자는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가장 이른 증거는 기원전 743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경』과 『서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로부터 200여 년 뒤 공자에 이르러 인은 사상계에서 주목할 만한 개념으로 등장하게 됐다.
저자는 공자가 인을 핵심 가치로 간주한 뒤에 그 중요성이 유학을 넘어서 중국철학의 전역으로 넓혀졌다고 본다. 이 책은 공자 이래로 청나라 말과 중화민국 초까지 인이 그 의미에서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시경』은 전설적 성왕으로 알려진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에서부터 주나라의 사적을 제왕의 언행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 『좌전』은 서주의 시대가 끝나고 동주의 시대가 된 이후 역사에 춘추라고 알려진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공자 이전의 인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화려한 치장을 하고 고결한 신분에 있는 사람과 관련된다. 『시경』에는 인이 「숙우전」과 「노령」에서 각각 한 차례 쓰이는데,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두 번 모두 시적 대상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 정도로 요란하고 화려한 행차로 사냥을 나가는 귀족이다.
공자에 이르면 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공자 이전에 치자는 고귀한 혈통을 가진 가문에서 세습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어떤 필수적인 자격을 힘 들여서 가질 필요가 없었다. 반면 춘추시대라는 약육강식의 경쟁체제에서 치자는 주어진 권력의 남용, 재화의 낭비, 무지의 오류 등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절제, 절약, 지혜를 발휘해서 권력의 공적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공자는 치인이 단순히 세습으로 될 경우 그가 공동체의 운명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며 그 위험성을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치인이기에 앞서 도덕적 자기 수양을 해야 한다는 맥락으로 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인仁하냐 인하지 않느냐는 것은 사람다운가 그렇지 않는가를 판가름하게 되었다.
『논어』의 인仁도 철저하게 이러한 맥락에서 쓰인다. 예를 들면 운동선수가 경기에 참여해서 규칙을 지키듯이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말고 더 큰 공공의 세계에 참여해야 한다.” 또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떼를 쓰는 것보다는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부과하지 않아야 했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치자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세계를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돌보아야 했다.”(「안연」) 이렇게 되면 사형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치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라면 구성원들은 두 손 들고 환영하며 함께한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 우리가 고위 공직자에게 비교적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고위 공직자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탈세니 투기니 거짓말을 해놓고서 일반 시민더러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코미디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자기 스스로 떳떳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찍부터 이 문제를 알아차렸던 까닭에 사회 지도층(고위공직자, 기업의 최고경영자 등)에게 자신의 허물을 짓지 않도록 스스로 성찰하는 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맹자』의 인은 『논어』의 인과 달리 철저하게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 아무리 위대하고 고귀한 말씀이더라도, 효과적이고 강력한 규범이더라도, 나의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결국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살벌한 최후통첩과 다를 바가 없다. 맹자는 도덕적 행위라도 진심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사람과 사람이 사이를 트고 같은 사람으로서 만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을 맹자는 유명한 비유, 즉 앞으로 가면 우물이 있는데도 어린아이가 계속 나아가는 유자입정孺子入井 이야기를 통해서 논증하려고 했다. 맹자가 생각하기에 어떠한 사람도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 구해주고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을 칭찬이나 아이의 부모로부터 받을 대가 때문에 아이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어떠한 이익과 손해를 뛰어넘어서 오로지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야겠다는 순수한 생각에서 아이를 구할 것이다. 이처럼 맹자는 인을 공자 이전의 매력이나 공자의 자기 수양과 달리 도덕 감정moral sense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漢나라에 이르면 기氣와 음양 사상이 모든 분야와 연결된다. 기와 음양 사상에 따르면 사회와 자연은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인 두 힘, 즉 음양의 교체로 변화가 일어나고 두 힘의 균형으로 질서가 잡힌다. 동중서는 유학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던 자연학 분야를 당시 음양·오행의 기 철학으로 보완했다. 그는 인과 의를 대칭시키면서, 인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의는 자아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라며 영역을 구분하고 인의 근원을 하늘과 연결시켰다. 이로써 인은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서 하늘과 사람의 관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당나라에 이르면 사상계는 유교·불교·도교의 삼교가 합일되는 특색을 띠기 시작했다. 불교는 인도로부터 한나라로 전래되어 점차 세력을 확장하다가 당나라에서 선불교라는 독특한 종파가 생겨날 정도로 대중과 왕족,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도교는 노장의 철학과 신선, 불로장생, 무병장수 등의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나타난 형태로 당나라에서 국가의 공적 지원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울러 당나라는 한나라의 팽창 정책의 결실을 이어받아서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했다. 당송 8대가이면서 사상가인 한유는 인을 박애로 정의하여 내적 세계에 대해 포용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기독교 등 세계종교가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면서 신과 정의의 이름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과 비슷하다. 한유의 새로운 정의로 인해 유학 또는 인은 가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송나라와 명나라의 유학은 성리학이라고도 하지만 신유학이라고 하여 이전의 유학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간 유학이 이상적 사회를 위한 정치철학 또는 사회철학의 특성을 지녔다면, 신유학은 그 바탕 위에서 한나라의 자연철학(음양사상)과 도교·불교의 존재론을 결합해서 형이상학의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심리 현상을 낳은 근원으로 여겨지던 기氣를 대체하여 리理가 철학사의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기가 현상의 다양성과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훼손될 수 있는 가치의 절대성을 굳게 지킬 수 없다고 비판했다. 주희는 도덕의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 누구보다도 고민을 많이 했다. 사람이 어떤 도덕적 행위를 할 때 개별 행위는 늘 보편 가치와 연속되어야 하지만, 개인적 욕망을 가진 인간은 실수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떠한 개별 사랑은 늘 보편사랑에 의해서 규제를 받아야 하고, 또 사람은 이론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보편사랑이 안내하는 삶을 끊임없이 이루어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은 개별 사랑을 진실하게 만드는 사랑의 이치이고 개별 사랑을 쉼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마음의 총체적 역량으로 파악됐다.
양명학에서 왕양명은 주희가 인의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인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주희는 내가 어떻게 해야 올바른지 알기 위해서 진리의 결집체로서 경전을 참조하느라 행위가 유보되고 있다. 왕양명은 주희의 사유 방식에 따르는 한 앎과 행위의 간격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대신에 그는 양지야말로 이미 무엇이 올바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행위를 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이로써 그는 말과 조련사가 교감하듯이 인을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만물의 사이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교감 능력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명·청 교체 이후에 청나라의 유학자, 특히 실학자들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모두 유학을 오염될 수 없는 청정한 도덕의 근원을 찾는 것으로 제한시켰다고 싸잡아서 비판했다. 이로써 도덕은 현실에서 악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혼(심성)을 정화하는 내무內務에서 반복과 좋은 습관을 통해 선행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외무外務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도 선불교의 참선 등을 받아들여서 마음 수련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역할 상대를 걸맞게 대우하여 인륜의 화합을 키우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인은 잘 습관화된 행위와 그로 인해서 늘어나는 공동체의 통합을 가리키게 된다.
근대가 다가오자 지구설과 지동설 등을 알게 되면서 동아시아의 전통 과학 중 천원지방天圓地方, 음양오행의 지위가 점점 약해지다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청말 민국초의 지성인들은 세계가 관계가 끊어진 개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적 개체주의나 기계론과 물질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세계를 음양과 오행의 틀로 분류하고 인식하는 틀을 버렸을지언정 세계의 존재들이 근원적으로 하나의 연속체로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공동체주의를 내버리지 않았다. 탄쓰통과 캉유웨이는 서세동점의 세기에 살면서 세계가 원래 같은 근원에서 상호 교류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나라별로 지역별로 이해관계에 의해서 서로 막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은 막힌 차별의 벽을 뚫고 소통을 증대시키는 에테르이자 전기이자 심력心力으로 간주되었다. 정리하자면 마지막 단계에서 인은 전통적인 만물일체와 서학의 근대 과학(에테르, 전기 등)의 결합을 통해서 사람 사이, 나라 사이의 갈등을 없애 소통을 넓히는 매질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들은 전통적으로 인이 인성의 평등과 연결되면서도 결국 사회 제도의 불평등을 정당화시켜주는 계기를 비판했다. 그들은 사람이 사회 제도의 불평등이라는 장애를 뛰어넘어서 평등의 지평에서 다시 서는 것을 인으로 본다. 이로써 인은 사랑의 단계론에 차별을 용인하는 것을 부정하고 천부인권으로서 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인의 한국적 전개

최치원->서경덕->이황과 이이->정약용->최한기

인仁의 한국적 전개는 중국의 경우와 유사한 특성을 드러낸다. 1단계로 고려시대까지 인 사상은 『좌전』과 『논어』의 인을 인용하거나 원용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 『계원필경』 『삼국유사』를 보면 인을 황제를 수식하는 말로서 쓰는 등 왕처럼 고귀한 신분의 특별한 사람의 특징으로 간주했다. 조선전기의 권근 또한 “인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은 이치로서 사람이 이를 타고 나서 마음이 되었다”는 주희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등 공자가 말한 인을 소개했다. 이황과 이이 또한 성리학을 훨씬 심화 또는 내재화시켰지만 적어도 인 사상에서는 주희와 차별화해야겠다는 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주희의 언어와 의미를 답습하며 주석을 통해 그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하고자 했다.
인의 한국적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전환점은 18~19세기에 이뤄진다. 이 시기 사상 문화는 더 이상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고 동아시아가 각각 이전의 전통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성하면서 각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 사상의 전개는 동시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사상 문화의 흐름에서 볼 때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신유학에서 강조하는 선험적 도덕의 근원과 구체적인 행위 사이의 연계가 명시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다고 비판한다. 만물일체로서 인이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효도나 자애를 어떻게 이끌어가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암시적이고 사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의 규범은 사람이 구체적인 인간관계에서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안내할 수 있어야 했다. 그에게는 사람이 구체적인 관계를 제대로 수행해서 서로 사이가 좋다면 그것이 바로 인인 것이다.
최한기는 정약용과 다른 방식으로 보편사랑으로서 인의 지위를 깎아내린다. 최한기는 자연과 사회의 변화, 세계의 가치와 질서를 인·의·예·지가 아니라 기화, 세분화면 활活·동動·운運·화化로 설명한다. 이렇게 되면 기화 또는 활동운화가 근원적이고 인의예지는 파생적인 지위로 내려앉게 된다. 지위의 변화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인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운화가 순수하게 일어나게 되는 덕목으로 자리하게 된다. 즉 기화 또는 운화에 의해서 인이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인의 비판자들

묵자->노자->장자

인仁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인에 모이는 만큼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묵자와 노자 그리고 장자는 인이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끊임없이 키우는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먼저 묵자가 인을 비판하는 측면을 살펴보자. 공자의 사랑은 철저하게 가족에서 출발한다. 물론 공자가 가족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은 현실적으로나 자연적으로 먼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난 다음에 다른 곳으로 사랑을 넓혀갈 수 있다. 그런데 묵자는 사랑이 출발부터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면 결코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보면 내 자식이 1점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는 바람과 사랑은 남이 학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자기 자식은 학원에 보내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묵자는 편을 나누는 사랑을 별애別愛라고 하고 편을 나누지 않는 사랑을 겸애兼愛라고 했다. 묵자의 겸애에는 눈여겨볼 것이 있다. 묵자는 사랑을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사회질서의 원리로 삼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보편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 학파로 보면 묵자가 유가의 일원은 아니지만 그의 겸애는 공자 이후의 유학자들에게 커다란 고민을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은 당나라 한유에 이르러 답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인을 박애博愛로 정의하여 유학의 인이 가진 가족주의 관점을 탈피하려고 했다.
두 번째 인의 안티 팬으로 노자를 살펴보자. 유학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모든 절차에 예禮라는 절차를 마련했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노자는 사랑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보는 것을 부정한다. 사랑은 꼭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의 비판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과연 특정한 방식으로만 표현된다면 그 사랑이 사람 사이의 참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자는 그것을 오히려 병든 사랑이라고 비판한다. 노자는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참과 거짓이 뒤섞여서 헷갈리는 인 자체를 떠나서 어떠한 틀에 매이지 않는 자연스런 상태, 즉 도道와 덕德이 지배하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제안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자의 인에 대한 공격을 살펴보자. 장자는 인 또는 인의仁義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말을 길들이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말은 원래 야생 상태에서는 고삐가 없고 발굽도 없이 배가 고프면 풀을 뜯고 달리고 싶으면 들판을 내달린다. 사람이 말을 길들이면서 말에 고삐를 채우고 발굽을 박고 낙인을 찍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말은 죽어나간다. 다음에 사람들은 말을 빨리 달리게도 하고 천천히 달리게도 하며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등 말을 훈련시키면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채찍을 마구 휘두른다.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명마’가 태어나겠지만 그 사이에 80퍼센트 이상의 말들이 죽어나간다.
인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작은 물건 하나를 훔치면 ‘도둑’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라를 훔치면 도둑이라 말하지 못하고 ‘영웅’이라 추어올리며, 나아가 인의의 수호자로 미화를 해댄다는 것이다. 나아가 도둑들도 남의 물건을 훔치고 생활하는데, 그중에 누군가가 훔친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한다면 도둑 집단이 유지될 수 없다. 장자는 훔친 물건을 골고루 나누는 것을 인이라고 말했다. 인은 보편적인 도덕이 아니라 한갓 지배자의 이익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도둑이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의 현대적 재조명,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인이 현대사회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인간다운 사람을 위한 인권의 보장과 복지의 증대, 탐욕스런 경쟁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 인을 통한 상생相生의 윤리 회복 등이다.
인의 여러 가지 정의 중에 맹자의 ‘차마 타자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은 시대를 넘어서 폭넓게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나에게 커다란 문제가 없다면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 사상과 현대사회가 날카롭게 충돌하는 지점으로 사욕私慾의 든다. 하지만 사욕에 가장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신유학도 그것의 완전 정복이 아니라 절제나 조절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사욕이 만물의 상호 소통을 막는 원인이라는 신유학의 관점은 시대적 한계로 수정해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전체 소득이 빤한데 누가 더 많이 가지겠다고 바라면 곧 다른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사욕은 탐욕과 약탈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 생산력이 높은 단계에서 는 잉여자원을 통한 재분배로 나아갈 수 있다.
인은 상생의 윤리다. 상인과 농부가 비닐하우스 안의 수박이 다 크기 전에 사고파는 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수박을 출하할 시점이 되어서 기후 변동으로 수박 값이 평소 가격보다 다섯 배 이상 뛰었다고 하자. 계약에 따르면 상인은 계약한 대로 구입비용을 지불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이는 평소 상황보다 최소 네 배 이상의 마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때 개인 윤리가 아니라 인의 관계 윤리에 따른다면 상인은 계약금보다 초과하는 일정 정도의 수익을 농부와 나누어 갖게 된다. 둘이 서로 한 번만 거래하고 말 것도 아니고 수박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인과 농부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도움이 되는 길을 갈 수 있다. 이처럼 인은 기본적으로 상생을 전제로 하는 윤리이다.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시리즈 소개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 시리즈는 3천년 넘게 이어온 동아시아 사상의 맥을 통시적으로 짚어봄으로써 우리의 삶을 전면 재검토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모래 한 알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시간의 고민과 사색을 통해 태어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삶이 아무리 급격히 서양화되었다고 해도, 3천 년 동안 이 땅을 규제해온 정신문화의 질서가 쉽게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을 전면적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뒤돌아 외면하거나 철학적 장식쯤으로 여긴다면 되돌아 올 것은 뿌리 없는 삶이요, 현실에 기초하지 못한 방향모색으로 인한 괴로움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동양의 자식들’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고 이 시리즈에는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게 증명하는 과제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가꾸어주는 ‘사람다움仁’의 역사가 그 첫걸음을 시작했다. 이어서 만물의 ‘근원理氣’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꾸밈없는 마음씨四端’와 ‘인간의 본성이 사물에 접하면서 드러나는 감정七情’은 역사적으로 어떤 논쟁을 불러일으켰는지, ‘나와 타인의 관계 질서를 규정짓는 도덕적 규범禮’에 대해 옛 성현들은 어떤 실천 방안을 제시했는지, 또 우리 조상들은 ‘부끄러움恥’의 미덕을 어떻게 삶 속에서 사유해왔는지 등을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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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과 한국의 통사적 관점에서 인에 관한 원문을 선별하고 간략하게 해설한다. 인은 유학의 수양론 혹은 공부론에서 전제가 되는 중요한 개념인데, 인에 관하여 보다 심도 있는 논의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같은 저자의 <사람다움의 발견>을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라파엘 2022-07-02 공감 (30) 댓글 (0)



정말 오래된 질문이네요.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정답이란 있는 걸까요
5만명회원 2011-01-27 공감 (1) 댓글 (0)



음... 멋진 책이 아닐까요... 사람 다움!!!! 엄청 어려운 질문이라는 사실이 뇌리를
소망하라 2011-02-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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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어 먹기 힘든 모래알 같은 책

전편에 해당하는 "사람다움의 발견"을 읽고 체로 걸러 미숫가루같이 정밀함이 있는 글에 감동을 받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편에서 다루지 못한 맹자 이후의 사람다움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큰 실망으로 바뀌었다. "주마간산" 달리는 말 위에서 산천을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인"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그 학자의, 사상가의 개념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그저 번역문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원문도 이해하기 힘들거늘 그에 대한 설명이 더 짧으니 사상가의 사상 뿐 아니라 의역한 문장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내용과 크게 관련없는 화보와 원문에 있는 불필요한 선과 면, 원문과 주를 책 뒤에 배치해 대조해 보기 불편한 점 등......

페이지를 늘리려는 얍삽한 편집, 성의없는 내용

선생님의 명성에 적잖이 실망한 책입니다.

오늘도걷는다 2015-02-02 공감(2) 댓글(0)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인문학적 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 진정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단순한 말이지만, 이 말 속에는 굉장히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가장 의문이 드는 질문은 과연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고대부터 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책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던 주제이기도 하다. 수천년동안 고민해온 문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명확한 답은 없다. 아마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다움이란 계속 바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고대부터 내려온 사람다움, 다시 말해서 인(仁)의 의미에 대해서 역사적 흐름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주제가 굉장히 무거운 주제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어서 이런 철학적인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나도 비교적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소설과 같은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들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자, 맹자 뿐만이 아니라 사람다움에 대해서 말했던 중국과 한국의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전체적인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 일단 각 시대별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학자들이 쓴 한글로 풀이된 원문이 제시된 후에 저자 나름대로의 생각이 담긴 풀이로서 한 장이 끝나는데 풀이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시간만 좀 들인다면 누구나 충분히 읽을 만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사람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탐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현실 세계는 어지러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물론 학문이 현실 세계의 부조리한 점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비교적 오랫동안 끌었던 문제라서 이정도의 논의를 거쳤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있을만한데 말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워낙 불가사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논의를 한다고 해도 명확한 결론을 낼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어느정도 이해는 된다. 사람다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 발단은 시대별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본연의 마음이 바로 사람다움이다. 그 용도가 단순히 철학적인 사유인지, 아니면 실용 학문으로서의 역할인지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두루 이롭게 하고자 하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너무 통속적인 이야기만 빠져들지 말고, 가끔은 이렇게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한 번 스스로 던져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을 함으로서 삶의 풍요로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 꼭 관련 학문을 배우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충분히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책이니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을 다 읽을 즈음에는 생각의 깊이가 한층 깊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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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2012-04-01 공감(1)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