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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

Namgok Lee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묻고 담정 답하다’를 일단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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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묻고 담정 답하다’를 일단 다 읽었다.

나는 불교에 대한 이론이나 논리에 대해서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중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두 분의 대화를 통해서 ‘중도(中道)’ ‘중(中)’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특히 나라가 악성 편가름으로 정치적 혼돈이 계속되고, 문명을 둘러싸고 대전환이 요청되는  시점에서 현실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 책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하며, 두 분의 대화  뒷 부분 가운데 내가 밑줄을 친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한다.
===

도법; 담정의 말에 따르자면 언어 자체를 희론(戱論)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언어에는 언어 자체의 한계와 위험성이 있다고 말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언어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할 점도 있다.
담정;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포함하여 일체 희론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법;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말씀은 희론이 아니다. 붓다의 말씀 자체를 몽땅 희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담정; 그렇지 않다. 부처님 말씀도 희론이다!  일체 희론을 벗겨 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만 방편교설의 진정한 의미를, 연기실상의 삶을 직시할 수 있다.


도법; 공도 왜곡되게 쓰면 희론이 된다고 하면 모를까 처음부터 희론인 공을 말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승의 언어에서는 도(道)를 말할 때 두 가지를 말한다.
첫 번째는 ‘도(道)는 말할 수 없다’이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한다’이다.

도법;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론>에서 언어로 된 모든 것이 희론이라면, <중론>도 이제론도 공론도 논파론도 다 희론이지 않는가?
담정; 그렇다. 당연하다.

도법; 적멸해야할 것이 희론이라면서 왜 소멸해야할 그 희론을 설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담정; 필요 때문에 그렇다. 14난(難)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담정; 경론을 손에서 놓을 만큼 강조하는 선(禪), 즉 ‘선의 과잉’은 오늘날 맞지 않다고 본다. 선의 위대한 조사들도 자기 시대에 맞는 불교를 했고, 그 선불교도 불교의 긴 역사와 전통의 일부일 뿐이다.
도법; 선의 과잉이나 왜곡에 대한 문제 의식은 공감한다.  하지만 조사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에는 동의가 안된다.
담정; 조사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불교를 하신 분들이다.
당시는 99%가 글을 모르던 문맹의 시대다.
오늘날은 99% 이상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
이 ‘문자 생활 시대’라는 변화는 기존의 불법을 담았던 ‘선’이라는 그릇을 다른 그릇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담정; 중요한 것은 (고려 지눌 스님등의 방법이) 부처님께서 쓰신 방법과 같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해석일지라도 기존의 것과 척지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동물희생제를 반대하시면서도 불에 대한 제사를 최고의 제사라고 하시며 제사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것을 피하셨다. 
민중과 괴리되는 불교나 중앙과 대치되는 극단적 선택은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현실은 중앙 다수파 옆에서 비슷하게 같이 가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꾸려나가는 기나긴 싸움이다.

담정; 우리나라에서 한문으로된 글을 제일 많이 쓴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고, 불교에 관한 문헌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원효 스님이다. 이런 원효 스님이 붓을 들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을까, 버리고 갔을까? 나는 붓을 꺾고 갔다고 본다.

도법; 붓을 들고 갔든 버리고 갔든 꺾고 갔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화쟁이 고통과 불행을 낳는 싸움을 해결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론을 국가가 필요로 해서라 하더라도 정치권력과 같이 가는 것보다 민중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옳기도 하고 바람직하다는 판단으로 선택한 것으로 본다.

담정;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천과 이론화 작업의 사이에서 이론화 작업을 포기하고 민중 속으로 갔다는 것이다.
도법; 학술불교를 접고 갔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원효 스님이 현장으로 가는 것이 이론을 버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담정; 그렇다면 다음은 ‘그럼 원효 스님은 민중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이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학술불교의 대표자이자 대내적으로는 민중불교의 대표자였다.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그 역동성은 지금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담정; 교학불교는 교학 불교대로, 실천불교는 실천불교대로 자기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도법; 교학과 실천은 일치되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중론>이 답을 내놓으면 바로 받아들이겠다.

담정; 이건 ‘탁!’해서 될 일이 아니다.
도법; 내 방식으로 하면 ‘탁!’해서 된다.
도법; 담정이 역경사로서 이론에 충실할 뿐 아니라 동시에 현실문제와 연결해 해답을 만들어내는 이론으로 진화하면 역경도 훨씬 좋은 결과를 내올 것이다.
담정; 나는 생각하는 것이 곧 실천하는 것이라며 불법의 정확한 의미를 옮기는 역경사의 삶에 만족한다. 땅을 파든, 경을 파든, 그렇게 파며 사는 삶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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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몇 대화를 옮겼다.
아마 읽으시면서 자신도 하고 싶은 말이 생기신 분에게는 이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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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론(戱論)... 그만 내려놓으세요
달과 손가락 2020. 7. 26. 

산스크리트어 prapañca의 한자어(漢字語)로 허구적인 관념(觀念)을 실재(實在)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 작용, 마음속으로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지어냄, 혹은 허망한 언어(言語) 무의미한 말, 헛소리, 관념을 가리켜 희론(戱論)이라 합니다.

그 말은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입니다. 무언가 진상(眞相)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 희론입니다.
중심(中心)에 적중(適中)치 못하거나,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말들을 희론(戱論)으로 간주하며, 싯다르타는 가끔 그 말을 사용해 제자들을 경책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읽고 있는 글들이 얼마나 중심에 적중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사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화살을 맞았다면 화살촉을 빼어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화살촉의 재질(材質)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계(五戒)의 하나에 불망언(不妄言)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가르치고는 있습니다만, 원래의 의미는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않는 말, 깨달음, 즉 “지금 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검증(檢證) 역시도 불가능한 것으로 쓸데없이 타인의 시간을 뺏는 말들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슴에는 독화살이 꽂혀있으며, 머리 위는 불타고 있다고 선지식(善知識)들은 말합니다. 그런 상황에 깨달음 말고 신경 쓸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신의 관심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살피세요. 과연 당신의 말과 행동은 생명 에너지 자리, 깨달음을 향해가고 있는가 말입니다.
먹고 입는 것, 그리고 소유하는 것과 전생(前生)이나 다음 생(生)에 대한 말들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희론(戱論)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 깨달음을 향해 필요한 에너지(氣)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파악하는 일(見性)이 가장 시급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누구고 어떤 옷을 입고 있든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이 귓등으로 들린다면 역시 당신은 수행자(修行者)가 아닙니다.
희론(戱論)에서 벗어나세요. 그것이 가슴에서 화살을 뽑고 불타는 머리 위를 식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최선(最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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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을 잡는 그릇

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2018. 4. 12. 11:53
https://arukda.tistory.com/entry/%EC%95%84%EB%A1%AC%EC%9D%84-%EC%9E%A1%EB%8A%94-%EA%B7%B8%EB%A6%87

전(筌), 고기잡는 그릇

오늘날 세존이 우리를 제법(諸法) 농담의 의론(議論)의 똥을 사랑하여 덜게 하실새
농담의 의론을 거꾸로 가려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똥이라고 했다.
『월인석보』의 구절이다. 세종의 말투이다. ‘농담의 의론(議論)’은 희론(戱論)을 번역한 것이다.
‘똥을 사랑하다’라고 한다. ‘사랑’은 물론 사유(思惟)이다. 똥을 사랑하고 똥을 덜라고 한다.
무릇 말씀이 있으면 다 노릇의 말씀이 되며
희론(戱論), 불교에서 참 자주 쓰는 말이다. 언해불전에서는 이 말을 ‘노릇의 말씀’이라고 새긴
다. 여기서 노릇은 놀이이다. 농담이라는 말, 말을 놀린다. 가지고 논다. 희론(戱論)은 목적과 의도
를 벗어난 논란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독화살의 비유’라는 게 있다. 독화살을 맞았다면 화살을 뽑
고 약을 쓰고, 어떤 조치라도 얼른 해야 한다. 당장 해야할 일은 제쳐 두고, 독이 어떠니 화살이 어
떠니 시시비비를 따진다면 그런 것이 희론이다. 이런 논란은 감정에 휘둘리고 지식과 이론에 집착
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언해불전의 ‘노릇의 말씀’은 웃자고 하는 농담, 그냥 말장난이 아니다. 그렇
다고 목적과 의도를 벗어난 논란 만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노릇의 말씀’은 말씀의 본질이다. 말의
얼굴이다. 말은 개념이나 논리, 나름의 규칙을 따라 노는 놀이이다. ‘노릇의 말씀’은 말하자면 불교
의 언어관이다. 소통의 철학이다. 개념이나 논리를 따라 가는 말씀, 이런 말씀을 따라 가다 보면 생
각이 뒤집히고 마음을 더럽힌다. 그래서 ‘노릇의 말씀’은 모두가 똥이라고 한다.
부혈기지속(夫血氣之屬)이 필유지(必有知)하고, 범유지자(凡有知者)가 필동체(必同體)하니
피와 기분(氣分)의 류(類)는 반드시 아롬이 있고, 무릇 아롬이 있는 것은 반드시 체(體)가
한가지이니
언해불전의 구절이지만, 이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서 빌어온 말이다. 혈기(血氣), 기
(氣)를 ‘기분’이라고 읽는다. 피와 기분을 가진 무리들, 언해불전은 이 구절을 불교의 중생(衆生)으
로 읽는다. 몸과 생명을 가졌다. 지(知)를 ‘아롬’이라고 새긴다. 피가 흐르고 기가 흐르는 중생들은
반드시 아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롬을 가졌다면 모두가 동체(同體), 한 몸이다. 이렇게 읽으면
유교도 불교도 다툴 것도 없다. 언해불전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 언해불전에서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몸이 한가지로 가졌다는 ‘아롬’이다. 아롬
은 ‘알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요즘에야 ‘앎’이라고 한다. ‘알다’라는 동사는 ‘모르다’와 짝을
이룬다. 언해불전은 이 말의 명사형을 ‘모롬’이라고 쓴다. ‘모롬과 아롬’의 짝이다.
구태여 아롬을 앞세우는 까닭은 ‘모롬’이 있기 때문이다. 언해불전은 뒤집힌 ‘아롬’을 다룬다.
뒤집힌 ‘아롬’이 ‘모롬’이다. 모롬과 아롬 사이에 말이 있다. 모롬을 다시 뒤집어 아롬으로 바꾸고
자 한다. 말은 모롬을 아롬으로 바꿔 주는 수단이다. 길이다. 언해불전은 ‘니라다’라는 동사를 쓴
다. ‘(말을) 이르다’의 옛말이다. 그리고 이 말의 명사형은 ‘니롬’이라고 한다. ‘니라다’의 짝은 ‘듣
다’이다. 이 말의 명사형은 ‘드롬’이다 .‘니롬과 드롬’의 짝이다. 니롬과 드롬의 길을 통하여 모롬이
아롬으로 바뀐다. 모롬을 아롬으로 바꾸는 말의 길이다. 이 두 개의 짝을 순서대로 맞춰보자면 ‘모
롬-니롬-드롬-아롬’이 된다. 언해불전의 말투가 이렇다.
이 두 개의 짝 , 요즘에는 쓰지 않는 옛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 짝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운이
맞는다. 입에 착착 붙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말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15세기 언해불전
에 담긴 우리말투이다. 이 말투에는 말을 하는 기술과 말을 듣는 기술이 담겨 있다. ‘니롬과 드
롬’의 짝이다. 그리고 이 짝은 ‘모롬과 아롬’의 짝을 향한다. 모르는 상태를 아는 상태로 바꾸어 가
는 방향이다. 이 두개의 짝, 내 입에 착착 붙는 말, 그래서 나는 이 짝 만큼은 그냥 쓰려고 한다. 오
래된 옛말이다. 요즘 문법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말로 바꾸어 보려고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말
도 길어지고 짝도 맞지를 않았다. 낯설고, 이상하더라도 그러려니 들어주길 바란다.
전(筌)은 고기 잡는 그릇이오, 제(蹄)는 토끼 그물이니 고기를 잡으면 전(筌)을 잊고, 토끼
를 잡으면 제(蹄)를 잊는다.
이건 『장자(莊子)』에서 따온 말이다. 고기 잡는 그릇, 전(筌)을 전(詮)으로 비겨 읽는다. 그리
고 ‘니라다’, 또는 ‘니롬’으로 새긴다. 니롬과 드롬, 말을 그릇과 그물에 비긴다. 모롬을 아롬으로
바꿔 주는 그릇이다. 니롬과 드롬의 그릇으로 아롬을 잡는다. 이게 말의 쓰임새이다. 아롬을 잡는
그릇, 아롬을 잡으면 잊으라고 한다. 고기 잡는 그릇, 쓰고 나면 창고든 어디든 던져 두면 된다. 그
런데 니롬과 드롬의 그릇, 던져 두기가 쉽지 않다. 고기를 잡은 뒤에도 오락 가락 놀린다. 그러다
보면 노릇의 말씀이 되고, 똥이 된다. 고기를 잡기는커녕, 나와 남을 함께 더럽힌다.

===
고작 다섯 손가락으로 세상을 헤아리려고 한다. 
희론(戱論)이다! 
박유하를 생각한다.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atiensky&logNo=220283816561


문학과 철학 또는 사회 과학은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을. 
시는 하늘의 언어, p로 쓰는 것, 
소설은 그야말로 잡(雜)이고.., 
철학은? 사상은? 
학문의 엄니가 철학인 것은 
그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 이외에 답이 없다. 
파천 단상
희론(戱論)과 박유하
담정
2015. 2. 26. 8:52
 이웃추가
3 1 담정의 샨띠 통신
가라타니 고진을 옮겼을 때, 
박유하는 어떤 시각으로 고진을 보았을까? 
민족nation이 민족국가nation인 것을!
~~~
『중론』의 귀경게다.
무언가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緣起](이기에)
소멸함이 없고[不滅] 생겨남이 없고[不生]
그침이 없고[不斷] 항상함이 없고[不常]
오는 게 없고[不來] 가는 게 없고[不去]
다른 의미가 아니고[不異] 같은 의미가 아닌 것[不一]이니
희론(戱論)*이 적멸하여 적정(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가르침
정등각자의 말씀들의
진리, 그것에 경배하옵니다.**
* 희론(戱論, Skt. prapaňca Tib. spros pa)은 중관사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참고할만한 산스끄리뜨어 어원 분석은 다음과 같다.
‘prapaňca(희론, 여러 갈래로 퍼진 사유와 언어, 진리에 어긋난 사유와 언어. … pra(앞으로)+√p
aňc(퍼지다, 다섯 손가락을 펴다. pra-√paňc(생각 등이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다. 망상하다. 생
각을 표현하다.’ - 『쁘라산나빠다』, p. 38.
‘*√paňc는 다섯 손가락(paňca)을 연상한다. 그러므로 언어, 사유 및 논리와 같은 세간 관습에 의
하여 절대적 진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허공을 움켜쥐려고 벌린 다섯 손가락의 부질없는 동작
에 비유된다.’ - 같은 책, p. 993(자세한 내용은 같은 책 [318(22-15)]번 게송 해제 참조,
어근 ‘빤쯔(√paňc)’는 ‘빠즈(√pac)’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기에는 ‘요리하다’는 뜻부터 ‘to ripen,
mature, bring to perfection or completion, to develop or change into’ 등의 긍정적인 뜻이 있
다.
** 산스끄리뜨어 원본이나 [청목소]의 용수보살의 귀경게가 아닌 티벳 게송을 직역으로 옮겼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왜 용수가 붓다에게 예경하는 지에 대한 이유인데, ‘열반적정’은 희론(戱論)
이 그친 상태[寂滅], 즉 적정(寂靜 = 평온)을 이끄는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라는 것이다. 그 내
용은 물론 8불중도이다. 연기 사상에 대한 강조는 명확하고 그 8불중도의 내용 또한 밝혀져 있
으나, 티벳 불교에서는 이 귀경게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 이후 월칭으로 대별되는 ‘쁘라상기까’
주석 방법에 따른 것이 한역 경전권과 갈리진, 커다란 두 가지 해석의 흐름을 나은 배경이 아닌
가 한다.
~~~
3 1 담정의 샨띠 통신
*사진은 나까무라 하지메(中村 哲) 선생... 모든 불학자들의 큰 스승이셨던 분. 70년대 강의를
들었던 분에 따르자면, 강의는 잼병이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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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호흡하는불교, 월간불광
100호 특집II-이것이 불교 중흥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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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말 같지 않은 말을 희론(戱論)이라 하셨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말은 희론이라는 뜻이다. 남의
말을 되풀이하고 불경의 말씀을 인용한다고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대중에 감동을 주지 않을
때 그 말은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불교인은 이 희론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심과 감동이 따르
지 않은 불교지식, 불교학은 체온이 없는 말이나 글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가 다시 흥하고 사는 길은 부처
님의 말씀을 쉽고 평범하게 전하는 것이고 체험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외형적 틀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빨리, 정확하게 봐야
한다. 불법은 해인사 장경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중(市中)에 있어야 한다. 책 속에서 불법을 구하는 자세
에서, 가슴 속에서 불법을 구하는 불교인이 되어야 불교가 다시 살 것이다
===
<희론戱論, 산스크리트어 prapanca쁘라빤짜>
아미산 2017. 4. 13. 11:07 http://blog.daum.net/511-33/12369931


여기서 희戱는 진실이 모자란다는 뜻이고 론論은 사물에 대한 생각이 진리에 맞지 않는
언론을 말한다 따라서 희론이란 허망한 언어 무의미한 말 부질없는 말 헛소리에 가까운 쓸데
없는 말장난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희론戱論은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생
각이며 진리에 어긋나고 그릇된 집착과 차별에서 비롯돼 사람들을 망상의 세계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탐ㆍ진ㆍ치 삼독심에 오염된 마음작용이 희론이다
주객전도된 전도몽상 번뇌 망상이 희론이다
사실본래성품 그대로 자각 인식하지 못하고 알음알이로 사유하고 고집하는 것이 희론이다 희론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아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상적 지각의 확산 즉 망상을
의미한다 세상사람 가운데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정론正論보다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결론이 나지 않는 끝없는 쟁론만을 생산해내는 희론戱論에 빠져 허송세월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익한 희론戱論을 일삼는다면 마음만 산란해진다 이러한 망상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나타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싸움 논쟁 언쟁 교만
중상 질투 인색을 수반한다


희론은 산스크리트어 쁘라빤짜prapanc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 상세히 설명하다 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원래는 현상 확장 다양화 상세한 설명
발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사유의 개념적 확장 등의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이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된다 한역에서는 희론을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
인다
이는 희론이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


경전經典에 어떤 구절을 기억해 가지고 어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느니 해서 자기를 과시하
는 것이 희론이다 그래서 희론은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 희론戱論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용수는 희론을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것이라 했다 허구적인 관념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희론에는 어디까지나 전도된 인식이 전제된다 예컨대 우리가 나라는 표현을
할 때 마치 그 말에 따라 어떤 영속적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과 같
〈중론송〉의 다음 게송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고 했다
이 말을 중국에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멋지게 한역했다 참된 궁극적 실재에서는 희론
이 절멸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용수는 공성空性은 연기와 같은 말인데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써는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연기는 바로 공성空性이라고 했다 그리고 희론은 생사윤
회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고 연기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았다
그리하여 중도中道나 중관中觀은 바로 이런 망상희론을 없애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
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망상의 소멸 번뇌의 소멸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라고 했다
부파불교 당시 무성했던 아비담마abhidhamma에는 희론이 너무 많았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등장한 대승불교였기에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심도 있게 희론을 다룬 듯하다
허긴 침체한 우리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남방불교의 아비담마 중에도 이해하지
못할 허황된 희론이 많이 보인다 사몰심死沒心), 그리고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니 존재지
속식存在持續識이니 결생심結生心이니 하는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 등은 언뜻 보기
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깊이 사유해보면 완전히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소리다
때문에 오늘날 남방 상좌부불교 이론에 열광하는 범부들을 위해 마구 퍼다 옮기는 식의 행태는
곤란하다
희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는 기제에 맞서려는 듯한 아비담마가 오히려
희론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냉정히 검토해봐야 한다 숭고한 부처님 법을 다룸에는 조심스러워
야 하는데 얼마간의 알음알이로 신중하지 못하고 종횡무진 하는 일부 남방 아비담마 전공자들
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2021/12/04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 들여다보고 내다보는 인문학 읽기 박석 2013

알라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 들여다보고 내다보는 인문학 읽기   



박석 (지은이)
들녘2013-11-15

616쪽

책소개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_ ‘대교약졸’로 꿰뚫는 동서 인문학 5

1장.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 16
대교약졸, 현묘한 직관 속에 감추어진 논리 41
대교약졸은 화광동진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 57

2장. 대교약졸에서 미학의 코드를 읽다
플라톤과는 달리 미에 관심이 없었던 노자 72
나선형적 발전을 보여주는 아름다움들 80
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101

3장.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유교는 과연 종교인가? 학문에 불과한가? 120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135
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164

4장. 복잡한 인도 불교와 단순한 중국 선종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 186
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201
인도 종교와 중국 선종의 깨달음의 미학 224

5장. 철학: 치밀한 지적 탐구와 중후한 실천궁행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240
추상적/논리적 사유와 형상적·직관적 사유 263
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288

6장. 문학: 통일된 플롯의 강렬함, 수렴된 감정의 절제미
서사와 카타르시스, 서정과 잔잔한 울림 322
발산적이고 명료한 표현, 수렴적이고 함축적인 표현 347

7장. 회화: 농염한 채색미와 담백한 여백미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 기운생동의 산수화 378
원근과 채색의 미학, 선과 여백의 미학 400

8장. 음악: 풍성하고 감미로운 소리, 성기고 그윽한 소리
숫자에서 과학으로, 바람에서 정치로 420
화성법에 금속성 악기, 미분음에 식물성 악기 440

9장. 건축: 돌로 만든 웅장함, 나무로 만든 조화로움
영원을 갈망하는 석조건축, 조화를 꿈꾸는 목조건축 464
정원, 동서양의 미적 안목과 자연관이 녹아 있는 공간 493

10장. 발산의 서양문화, 수렴의 동양문화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 512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중국문화 550
새로운 대교약졸을 기대하며 581

나가는 글_ ‘나’를 잘 들여다보고 ‘세상’을 잘 내다보자 599
참고문헌 603
찾아보기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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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03~104 중국예술은 바로 분산적 통일미를 강조한다. 먼저 회화를 보면 서양회화가 초점투시를 위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는 하나의 시각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중국회화는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개의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국회화도 초점투시 위주의 그림들도 있다. 그러나 중국회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하는 산수화에선 산점투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산을 밑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각과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산 뒤쪽의 감추어진 그윽함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다. 한 폭의 그림에서 여러 개의 시각이 분산되어 나타나면 시각적 통일미는 분명 찾기가 어렵고,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이 어우러져 초점투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운치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물에서도 중국은 분산적 통일미를 추구한다.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물, 예컨대 성당이나 궁전들이 대개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궁전이나 사원들은 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다.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하나로 집중된 건물에 비해 통일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원림건축에서는 각각 분리된 공간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흩어진 각각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나름대로의 통일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통일미인 것이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에는 반드시 지휘자가 있지만 중국 전통음악의 합주에는 한가운데 서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지휘자가 없다. 각각의 악기들이 지휘자 없이 제각기 놀면서도 전체적인 호흡을 맞추는 것을 중시한다. 한 명의 지휘자가 수십 명의 단원들을 이끌어가는 오케스트라에 비해 통일미가 부족한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 속에는 조화로움이 있다. 다만 집중적 통일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16~117 사실 과학기술은 선진과 낙후가 있지만, 문화는 절대 객관적인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은 제각각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이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동일한 집단 내에서는 아름다움에도 어느 정도의 보편적인 기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칸트는 미적 판단은 취미판단에 속하기 때문에 완전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상호 간의 타당성, 즉 공통의 타당성을 가질 수는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집단이 서로 다르다면 장자가 의문을 제기하였듯이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동양인들은 알게 모르게 문화의 영역에서도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근대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의 위력에 압도되어 주눅이 들어 문화 영역의 아름다움이란 영역에서도 그들이 만든 관점을 좇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주체성을 찾아야 할 때이다. 그냥 겉으로 보면 서양은 교, 동양을 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보면 그 졸은 단순한 졸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졸일 수 있다. 굳이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성을 외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름다움에는 절대객관적인 기준이나 서열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자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려미와 소박미, 다채미와 단순미, 농염미와 평담미, 집중된 통일미와 분산된 통일미, 전경을 부각시키는 아름다움과 배경과의 조화미, 그리고 이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서 발산미와 수렴미, 이들은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들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76~177 물론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다. 사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신의 개념은 원래 아주 소박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의 족장시대의 신은 주로 엘로 불렸는데 초월적 개념은 거의 없고 부족의 번영을 약속하는 부족의 수호신 정도의 개념이었다. 족장시대의 유대의 신은 비교적 친근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 모세를 거치면서 유대의 신은 크게 변모한다. 우선 엘에서 야훼로 그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부족의 신에서 민족의 신으로 바뀌었고, 거기에다 계약을 통해 유대민족이 약속을 잘 지키면 주변 민족들을 내리치면서 유대민족을 축복을 주다가도 유대민족이 계약을 어기는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엄격한 신으로 변모한다.
사실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착기의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유대민족은 전쟁을 치를 때는 전쟁의 신을 믿었지만,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뒤에는 농경의 신이었던 바알 신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숭배하던 자신의 민족을 질책하면서 야훼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요하곤 했다. 당시의 유대교에는 유일신이라는 개념 외에 특별한 고등 철학이나 윤리도 없었다. 사실 축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대의 야훼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했다.
기원전 8세기에 축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등 윤리와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야훼에 대한 개념이 점차 바뀌게 된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 이 시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야훼는 이전의 가혹하고 무자비하고 희생 제물을 즐기던 모습에서 희생 제물보다는 사회의 정의를 강조하고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는 신으로 점차 변모한다. _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접기

P. 226~227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단하선사丹霞禪師가 겨울철에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없자 단하선사는 본당으로 달려가서 목불을 들고 와 쪼개어 장작불을 지폈다. 그 절의 승려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발대발하면서 불제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따지자 단하선사는 태연하게 부지깽이를 들고는 장작 잿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승려는 의아해하면서 도대체 뭘 하느냐고 물었다. 단하선사는 부처님의 사리를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 승려는 어이가 없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단하선사는 사리도 없는 목불로 불을 땠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그 승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공안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컨대 우상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것이다. _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P. 314~315 서양은 대체로 이원성을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심한 경우에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있어서는 안 되고, 또한 서로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데카르트는 정신의 작용이 자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의 영향을 받아 극심한 가뭄 때에 스스로 근신을 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던 조선시대의 임금의 행위는 정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연과 정신을 더욱 확연히 분리시킴으로써 정신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자연의 특징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즉 신이 인간의 정신에 부여한 이성적인 사유의 능력은 더욱 강조되고 아울러 어떠한 정신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자연의 물질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철학자는 인간 이성의 힘을 더욱더 신뢰하고, 과학자는 신학의 간섭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자연에 대한 탐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_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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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3년 12월 13일자 '북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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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석 (지은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상명대학교 글로벌인문학부대학 중국어권지역학전공 교수

저서: 
<두보 초기시 역해>(솔출판사, 공저), 
<동양사상과 명상>(제이앤씨), 
<대교약졸,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들녘),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문학을 어떻게 보았는가>(역락), 
<불가능한 누드>(들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들녁),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한산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최근작 : <참선 잘하그래이>,<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하루 5분의 멈춤> … 총 2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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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문화사 전체를 하나의 코드로 꿰뚫다。그리스로마- 춘추전국시대부터 21세기까지 문화와 인문의 시공간을 탐사하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는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그것은 저자가 학자인 동시에 명상가로서 오랫동안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하며 겪었던 다양한 종교적 체험들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사유체계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것도 이 책만의 개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의 차이가 문학에서, 그리고 회화, 음악, 건축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수천 년에 걸친 서양과 동양의 문화사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그 전체적인 흐름을 압축해서 소개하고 서세동점 이후의 동양문화가 나아갈 바를 모색한다.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지만 ‘대교약졸’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현미경으로 분석하다 보니 동서양 문화의 특징이 손에 잡힐 듯 일목요연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무겁고 딱딱한 인문학적 용어를 지양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안내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동서양 문화의 깊고 풍부한 세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놀라운 인문학 코드, 수렴과 발산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인문학적·문화적 호기심과 궁금증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성스러움을 강하게 발산하는 예수가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였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는 범속한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았을까? 왜 서양철학은 논리와 분석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철학은 직관과 통찰을 좋아할까? 왜 서양사람들은 확실한 이분법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사람들은 두루뭉술하게 하나로 보기를 좋아할까? 서양문학에서는 서사성을 중시하는 소설과 희곡이 크게 발달한 반면 동양문학은 서정성을 중시하는 운문이 주를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회화에는 누드가 넘쳐나는데, 왜 동양회화에서는 누드가 없을까? 서양화는 화려한 채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왜 동양회에서는 수묵과 여백의 미를 더욱 중시할까? 서양음악은 화성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왜 동양음악은 화성법이나 대위법이 없는 것일까? 서양음악에는 지휘자가 필요한데 왜 동양음악에는 지휘자가 없을까? 서양 고전건축물은 왜 하나같이 주재료가 돌이고, 동양의 건축물은 나무일까?

굳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위와 같은 의문을 지녀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의문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 관계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별다른 뾰쪽한 답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위의 모든 질문들이 사실은 하나의 미학적 코드에서 나온 것에 놀라게 된다.> 그 코드는 바로 발산과 수렴의 미학이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대교약졸에 들어 있는 논리와 미학을 탐색하면서 여러 가지 아름다움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발산과 수렴으로 나눈다. 그리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이 발산과 수렴의 코드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의 영역을 탐색하면서 그 차이점들을 하나씩 풀어간다. 한 절씩,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어 보이던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이 점차 하나로 꿰뚫어져 일목요연하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인문학적·문화적 궁금증과 호기심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10장에서는 거대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동서양 문명의 흐름을 탐사한다. 각 문화 영역에서 입체적인 비교와 분석을 통해 정리된 동서양 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은 문명사의 이야기를 통해 한 차원 더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를 비교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동아시아 문화의 현황은 어떠하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 통찰들을 차분히 체화시켜 자신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데에도 적용해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내다보는 데 활용해보라고 권유한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 책은 잘 일깨워준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숙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그림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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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인문학책이 범람하는 요즘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제목을 보고 흥미로와 주저없이 구입해 읽었다. 인문학 전반에 대한 개론이 아닌 저자의 30년넘는 치열한 수행후에 깨친 깨달음을 바탕으로 `대교약졸` 한마디로 동서양의 모든 분야에 대한 명쾌한 통찰이 놀랍다.  
산야 2013-11-24 공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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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

두꺼운 페이지에 망설이고 있다면 기우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물 흐르듯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동서양의 철학, 역사, 건축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엄청난 학식에 감탄하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에 두 번 감탄한다. 
특히 1장의 노자의 도덕경 부분에선 무릎을 칠만큼 놀라운 '새로운 도덕경'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접해본 인문학도서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icepray 2013-12-22 공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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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뚫린 것 같아요

인문학,동서양을 꿰뚫다’ 반쯤 읽었는데 졸리지 않고 재미있고 자꾸만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었을 때 나는 인문학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를 점점 알아가면서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역사 철학 종교 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저런 책을 읽어도 어렴풋하고 머릿속이 정리가 안됐는데 이 책은 그 동안의 갈증을 쏴~악 풀어주고 있다. 

특히 동서양의 미학에 대하여 대교약졸의 관점으로 비교한 깊이 있는 내용들은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 더보기
솔새 2013-12-05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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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 들여다보고 내다보는 인문학 읽기   



박석 (지은이)
들녘2013-11-15

616쪽

책소개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_ ‘대교약졸’로 꿰뚫는 동서 인문학 5

1장.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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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288

6장. 문학: 통일된 플롯의 강렬함, 수렴된 감정의 절제미
서사와 카타르시스, 서정과 잔잔한 울림 322
발산적이고 명료한 표현, 수렴적이고 함축적인 표현 347

7장. 회화: 농염한 채색미와 담백한 여백미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 기운생동의 산수화 378
원근과 채색의 미학, 선과 여백의 미학 400

8장. 음악: 풍성하고 감미로운 소리, 성기고 그윽한 소리
숫자에서 과학으로, 바람에서 정치로 420
화성법에 금속성 악기, 미분음에 식물성 악기 440

9장. 건축: 돌로 만든 웅장함, 나무로 만든 조화로움
영원을 갈망하는 석조건축, 조화를 꿈꾸는 목조건축 464
정원, 동서양의 미적 안목과 자연관이 녹아 있는 공간 493

10장. 발산의 서양문화, 수렴의 동양문화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 512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중국문화 550
새로운 대교약졸을 기대하며 581

2021/11/30

알라딘: 삶의 지문 - 생명의 근원에 이르는 구도자의 인생산책 최민자 2008

알라딘: 삶의 지문



삶의 지문 - 생명의 근원에 이르는 구도자의 인생산책   
최민자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08-10-20
==
양장본456쪽


책소개

동서고금의 사상과 제 학문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왔던 저자 최민자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자신이 찾아낸 참본성의 소리를 저자의 학문적·구도적 삶의 궤적을 통해 보인다.

우주를 화판(畵板)으로 더할 수 없이 큰 그림을 그려 가는 두타행(頭陀行)과 그 실천 과정이 자전적 에세이 형식 속에 흥미롭게 녹아들었다. 그 삶의 흔적을 좇아가다 보면, 내 삶의 지문을 참되게 만들어가는 지혜를 얻게 된다. 10년 전에 ‘길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대폭 수정 보완하고, 최근 10년의 저자의 행적을 보강하여 펴냈다.


목차
서 문
프롤로그 삶이라는 꿈, 꿈이라는 삶

제1부 연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1장 마음의 밭을 일구며 : 애리조나 열사의 땅에서 / 켄터베리 초원에서 / 뉴욕 빌딩숲에서
2장 동굴수업 :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 동굴이라는 우주 / 우주라는 동굴
3장 왕진인을 찾아서 : 양쯔강 북으로 북으로 / 상선약수 / 무형상의 형상
4장 환국의 빛 : 정신과 역사의 만남 / ‘변화산’이야기 / 열 십(十)자의 비밀

제2부 대륙으로 대륙으로
5장 천여 년 만의 해후 : 장보고 기념탑을 세운 뜻은 / 황해를 건너며 / 장군바위의 미소
6장 세계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 두만강이 기지개를 켜는 뜻은 / 황금의 삼각주 / 발해의 옛 성터, ‘팔련성’
7장 백두산에서 북계룡까지 : 팔괘묘 터에서 / 조중 국경에 서서 / 북계룡에 가다
8장 지어간 시어간 : 연꽃 속의 나날들 / 슬라비얀카에서 요트를 타고 / 간방의 북소리

제3부 지혜의 길 행위의 길
9장 연화산의 비밀 : 도라지꽃이 핀 뜻은 / 흔들 궁전에 누워 / 연화목 아래에서의 명상
10장 봉황산마루에서의 용놀이 : 선묘의 미소 / 알렉산더의 매듭 / 저녁노을 속에서의 용놀이
11장 매경한고발청향 :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인드라망’의 마법 /구화산 육신보전에서의 명상
12장 생명과 평화의 문명을 여는 신곡 : 생명학 3부작이 완결되다 / 잃어버린 낙원의 진실 / 소통 하는 삶, 소통하는 세상

에필로그 새로운 문명의 도래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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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좌를 하고 앉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몸은 점점 더워지고, 입 안 가득 단침이 고여 왔다. 이윽고 나는 반무의식 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퍼런 광채 덩어리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 머리를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번쩍’ 하는 섬광에 놀라 눈을 떴다. (본문 97쪽)
곰곰이 생각할수록 왕진인의 깊으신 뜻이 느껴져 왔다. 진인께서는 내가 보현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에 단하산자락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당신께서 여전히 건재하심을 보여주시고, 아울러 도에 이르는 삶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나로 하여금 현장에 가서 그곳 마을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셨다.(본문 168쪽)  접기
며칠 후 무호 스승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환하게 광명한 정치를 하는 나라, 환국을 보았네. 자네 얼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얼굴이 크게 변했네. 어둑한 방 안이 환해질 정도였지. 그러한 광경은 한참이나 지속되었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군. 순간 성경 속 ‘변화산(變化山)’에 관한 구절이 떠올랐네. 예수께서 크게 변하셨다는 산…….(본문 199쪽)  접기
서구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세적 봉건질서의 해체를 촉발함으로써 유럽 근대사의 기점을 이루었다면, 제2의 르네상스, 제2의 종교개혁은 물질에서 의식으로의 방향 전환을 통해 실체를 지향하는 삶을 촉구할 것이다. 또한 모든 종교의 본체가 하나임을 밝히는 동시에 종교적 진리가 개개인의 삶 속에 구현되는 성속합일, 영육쌍전의 시대의 도래를 촉발함으로써 지구촌 차원의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그것은 전 인류적이요 전 지구적이며 전 우주적인 존재혁명이 될 것이다.(본문 206쪽)  접기
…연화정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잔디밭을 따라 들어가자 황해를 내려다보는 장보고 기념탑의 장엄한 자태가 눈앞에 펼쳐졌다. 신라시대 5층석탑을 연상하게 하는 화강암으로 만든 다섯 계단을 따라 걸어 오르니 1,000년의 장막이 스르르 열리며 장보고 대사의 원통한 최후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로 말없이 미소를 짓는 모습이 교차되는 듯했다.…드디어 1994년 7월 24일. 장보고기념탑 준공식 날이 되었다.(본문 240-241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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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민자 (지은이) 

● 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 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 더보기
최근작 : <동학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호모커넥투스>,<전라도 전주 동학농민혁명>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동서고금의 사상과 제 학문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왔던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저자는 자신이 찾아낸 참본성의 소리를 저자의 학문적·구도적 삶의 궤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우주를 화판(畵板)으로 더할 수 없이 큰 그림을 그려 가는 저자의 두타행(頭陀行)과 그 실천 과정이 자전적 에세이 형식 속에 흥미롭게 녹아들었다. 그 삶의 흔적을 좇아가다 보면, 내 삶의 지문을 참되게 만들어가는 지혜를 얻게 된다.

저자는…

저자는 국내 대학 졸업 이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학문의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귀국 후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으로 여해(如海) 스승을 만나면서 내단(內丹)의 극에 달한 동굴수업[수련]을 거쳤다. 곧 이어 무호(無號) 스승을 만나면서 우리 상고사 및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내밀한 사명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은 두타행과도 같은 세계 편력이 이어졌다. 1994년 장보고의 역사적 재조명을 위한 장보고기념탑 건립(중국 산둥성, 건립위원장, 중국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1999년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을 위한 4자 조인식 및 기념비 제막(건립위원장, 중국·북한·러시아 3국접경지역), 2000년대 들어서 동학 및 천부경과의 만남, 그리고 생명학 3부작 완성[천부경·생태정치학·생명에 관한 81개조 테제]으로 이어지는 학문적·실천적 역정을 통해 학문의 현실 환원을 성공적으로 추구해 왔다.
저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 지문이 같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듯이, 이들이 만드는 삶의 지문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지문에서 묻어나오는 사상의 궤적을 따라가노라면, 우리는 그러한 사상들이 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임을 금새 알아차리게 된다.”

1.
이 세계에는 지금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미국 발 금융위기의 급류에 휩쓸려가면서, 이 시대의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이 나서서 제 입으로 그 사실을 실토하고 있다. 본인은 “우리는 위대합니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살기 위해서는 새 길을 찾아야 합니다”라는 내면의 호소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사회적인 측면의 위기가 ‘금융위기’로 그 서막을 열고 있다면, 자연적인 측면에서의 위기는 ‘지구온난화’라는 환경재앙으로 그 서막을 열어가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사회적·환경적 쓰나미의 양적·질적 규모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우연적 위기가 아니라, 문명전환[개벽]의 징후로서, 앞으로 상당 기간에 걸쳐 집요하게 진행될 변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그 안의 생명계, 그리고 그 정점에 선 인류에게는 지금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다행하게도 그 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비되어 있었다. 인류의 선각자들이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형식으로 예고하고, 예언해 온 경전과 사상서와 명상 서적 가운데 그러한 길의 단초들은 이미 충분히 박혀 있다. 그러나 원석에 함유된 금가루처럼, 그 새로운 길의 진면목이 인류에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제련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수년 동안, 그러한 제련을 거친 결과물들이 학문적으로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실천적으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결과물의 일단이자, 그것을 알아보는 감식력을 길러주는 참고서다.

2.

去去去中知 行行行裡覺
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속에 깨닫게 된다.

이는 저자의 스승 가운데 한분인 여해(如海) 스승의 말씀이다.
이는 만유의 본원으로서의 도(道)를 알고 깨닫는다는 말이지만, 이 책의 내용과 존재 의의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데도 최상의 시(詩)가 된다.

학을 타고 구름 세계를 노니는 도인(道人)의 모습을 이 시대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도사(道師)는 여전히 지혜와 덕행의 주체로서 이 세계 곳곳에 퍼져 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에게서는 평상시에도 그러한 도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그것이 어째서 그런지, 이 책을 읽어가면 무릎을 치며 이해하게 된다. 저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이 시대의 도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듯이, 이 시대의 도인도 지문이 또렷한 손가락으로 진리의 달을 가리켜 보인다. 이 책도 그러한 지문 가운데 하나이다.

3.
이 책은 정치학자로서, 실천적 사상가로서, 구도자로서 살아온 저자의 인생을 그린 에세이이다. 그런가 하면, 흥미진진한 소설 아닌 소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픽션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보고기념탑이나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의 과정을 담아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문명 기획자의 생애를 그린 다큐멘터리로 읽어도 좋다.
또한 저자는 생명학 3부작 시리즈를 통해서 위서 논란에 빠져 있는 천부경을 본격적인 학문의 세계에 자리 잡게 했고, 한편으로는 유엔세계평화센터라는 대기획의 총설계자로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사상적 초석을 놓았다. 단군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적 터전이었던 간도, 지금은 러시아, 중국, 한반도의 국경이 삼태극을 그리는 지역 일대 2억평의 부지에 해당 3국과 유엔 당국 등 4자가 협정을 맺고 진행하는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 사업은 새로운 문명 시대의 마고성이요, 동서문명/고금세계가 교차하는 차원 소통/선후천 소통의 한마당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어째서 그러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독자서평 중에서

이 책은 저자의 구도적 삶과 학문적 삶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한 삶이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다. 섬세하면서도 유장한 한 삶의 세계가 열려지고 있었다. 아주 정밀한 세필로 혹은 과감한 생략으로, 절제의 변용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나는 보았는가. 무리지지리 불연지대연(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의 경계를. 자유의지와 필연, 존재와 당위 - 그 양극단에서 어떻게 조화와 통일의 접점을 이뤄내는가. 섣부른 무정부주의자, 어설픈 도인, 짐짓 체하는 숙명론자… 그는 일체 언설을 넘어선 경지에서 필경 그 일체감을 이뤄내 보여주고 있다.
이원적 일원론인가, 일원적 이원론인가. 이(理)와 기(氣)의 세계를 그는 필경 몸으로 넘어섰으리라. 서구철학과 신학의 이원적 불구의 처참한 현상을 그토록 날카롭게 묘파하여 그 변증법적 지양을 보여주고 있으니.
……학문과 종교의 완성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동굴의 우주가 어떻게 실체화, 현실화되는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자유의지와 필연을 이제 자유롭게 구사하며 ‘때’를 기다리면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이뤄내고 계시는군요…아! 선생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장보고의 한(恨)을 풀어주고, 이 민족의 한(恨)을 씻어줄 당신은 누구십니까. 일찍이 세상 학문의 정도(正道)를, 그 진수(眞髓)를 천재적으로 마스터하고 마침내 일체의 종지(宗旨)를 두타행으로 섭렵한 당신은."

* 이 책(『삶의 지문』)은 10년 전에 ‘길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대폭 수정 보완하고, 최근 10년의 저자의 행적을 보강하여 펴낸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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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놀라운 정신력을 지니고 꾸준히 구도의 길을 걸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룬 작가의 모습이 눈부시다. 소설처럼 펼쳐지는 구도행에 빨려들듯 재미나게 읽었다. 세상에 펼쳐드러내 주셔서 감사하다.  구매
넘수이 2013-02-0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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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문

-생명의 근원에 이르는 구도자의 인생 산책

-길을 찾는 당신에게 드리는 지혜

지은이 : 최민자

  지문처럼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고유하다는 진리에 의해 붙여진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책이다. 그러나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제목에 감춰진 깊이를 깨닫지 못했고, 그저 정치학 교수가 치열하게 살면서 쓴 수필이려니 하며 쉽게 접근했었다. 하지만 서문에서부터 진지한 태도로의 전환을 요구받았고, 책을 읽는 내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학을 전공한 교수의 삶의 모습이 참으로 방대하고 깊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삶을 치열하게 산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을 위한 치열함에서 세상을 위한 치열함으로 삶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다르다. 내적인 삶을 추구하며 실천하는 저자의 모습에서는 도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고,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집중하고 역사를 오늘에 살려내려는 모습에서는 학자를 넘어 혁명가로 느끼게까지 되었다.

  저자의 내적인 삶과 혁명가적 삶의 모습은 나의 의식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깊고 넓은 그의 사상과 판타지 소설같은 그의 명상과 참선, 그리고 현몽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난해하였다.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새롭게 살아가려는 이에게는 새로운 길과 영감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1부 연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1장 마음의 밭을 일구며

  무지에서 움터난 의심을 잡초를 베어내듯이 지혜의 칼로 베어내고 일념으로 정진하여 잠들어 있는 우리 영혼을 깨우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이다.

  지은이는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은 시공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며 미국애리조나 열사의 땅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영국 켄터베리 초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뉴욕 유엔본부에서 근무하며 마음의 밭을 갈았다.

2장 동굴수업

  성심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해 스승을 만나 정신공부에 주력한다. 동굴에서 정신수양을 하면서 인간의 영성은 인내를 통하여 계발되는 것이고, 그 인내는 의식이 시공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 여해 스승은 정신문명의 시대를 열 사람은 스스로가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되기에 정신 수련이 필요하다고 지은이에게 힘주어 말씀하신다.

3장 왕진인을 찾아서

  여해 스승이 60여 년 전에 만나셨던 스승 왕진인을 뵈러 중국 땅을 밟는다. 중국과 수교를 맺기 이전이어서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단하산’이라는 지명만으로 왕진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의 형상을 못 보았다고 하여 어찌 진인과의 연(緣)이 없다고 속단할 수 있을까’하면서 정신 속에서의 영원한 만남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4장 환국의 빛

  무호 스승을 만나 역사의식을 깨우치게 되는 과정을 상세히 적고 있다.

  지은이는 개인적 의미의 환국(桓國-환하게 밝은 정치를 하는 나라), 즉 우리 영혼의 환국을 찾아야 하고, 또한 만인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환하게 밝은 정치를 하는 나라인 우리 민족의 환국, 나아가 인류의 환국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 내면의 질서를 회복한다면 우리 역사의 질서, 민족의 질서, 나아가 인류의 질서도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은이는 제2의 르네상스, 제2의 종교개혁의 도래를 믿으며 그것은 물질에서 의식으로의 방향 전환을 통해 실체를 지향하는 삶을 촉구할 것이라 말하고, 국경 없는 세계, 우주의식의 미덕을 노래하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한다.

제2부 대륙으로 대륙으로

5장 천여 년만의 해후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목전에 둔 현 시점에서 장보고 대사의 역사적 복권은 시대적 필연이라고 믿는 지은이는 민간외교의 승리를 수교도 안 된 중국 땅에 장보고기념탑을 세운다.

6장 세계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지은이는 자연-인간-문명이 조화를 이룬 인류 공영의 시범 유엔공원을 중국과 북한과 러시아가 접경하는 두만강 하구 일대에 세우고자 민간외교를 펼친다.

7장 백두산에서 북계룡까지

  두만강 하구 3국 접경지역 일대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의 중심이 될 만한 곳이라고 믿는 지은이는 21세기 동북아시대를 목전에 둔 현 시점에서 유엔공원의 건립이 21세기 빛나는 정신문명의 시대를 열어 주리라 믿는다.

8장 지어간 시어간

  ‘지어간 시어간’은 동북 간방에서 만물이 그 종결을 이루고 또한 새 시대가 열린다는 의미이다. 이 장에는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을 위해 펼치는 지은이의 외교적 노력이 자세히 적혀 있으며, 유엔세계평화센터에 충만한 생명의 빛이 지구촌으로 흘러넘치리라 예언한다. 3국 접경지역인 방천과 핫산 등지에서 개최될 예정인 세계평화를 위한 한울림 북 축제에서 국가 간, 민족 간, 인종 간, 계급 간, 종교 간, 지구촌의 모든 파열음이 북소리 속에서 하나가 되고 그대 맑은 눈과 불타는 심장 속에서 하나가 되리라 예언한다.

제3부 지혜의 길 행위의 길

9장 연화산의 비밀

  연화산 연화목 아래에서의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삶은 깨달음을 통하여, 의식의 깨어 있음을 통하여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마음, 오직 육체만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소멸시킴으로써 이 우주자연과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10장 봉황산마루에서의 용놀이

  부석사를 찾아 간 지은이는 경내를 둘러보고 봉황산을 찾는다. 봉황산마루에 걸터앉아 늦가을 오후를 즐기다 용의 현신을 목격한다.

11장 매경한고발청향

  정녕 매화가지는 찬서리를 맞고 난 후에야 비로소 맑은 향기를 발한다. 지은이는 무수한 생을 통해 얼마나 더 깊은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자문하며 깨달음이란 에고의 소멸, 집착의 끊어짐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학문적 삶에서 첫 번째 큰 전환점이 우리 상고사 및 사상과의 만남이었다면, 두 번째 큰 전환점은 동학과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학사상을 21세기의 역사와 연결하여 펼친다.

12장 생명과 평화의 문명을 여는 신곡

  지은이는 학문적 삶의 세 번째 전환점을 천부경의 만남이라고 소개한다. 천부경을 통해 ‘생명’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생명학 3부작의 완결과정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삶의 지문』은 우주 가을로의 초입에서 만유에 편재해 있는 참본성의 소리를 옮겨놓은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인류 의식이 깨어나기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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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kyivy95 2008-12-3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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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지문을 찾아서... 새창으로 보기

똑같은 지문을 갖은 사람이 없듯 우리는 비슷한 듯 제각각의 삶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반복되는 일상 중에 자신의 삶의 최종 도달점은 어디이고, 이 땅에 이 시대에 태어나서 해야 할 천명적인 사명은 혹시 무엇인가? 에 대한 미궁의 자문 속에 빠질 때가 있다. 분명 나에게도 어떠한 절대자가 의도하는 삶의 지문이 있을 텐데 과연 나는 그 삶의 지문을 따라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책<삶의 지문>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명확한 정답은 아닐 지라도 정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짧은 이정표와 더불어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시야를 갖게 만들어 준다. 결국 세상의 만물을 바라보는 생각과 시야의 넓이가 커질수록 정답에 근접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삶의 지문>은 저자 최민자 교수의 구도적인 삶의 길의 발자취를 시간의 흐름순서에 따라서 크게 3부로 작게 12장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다. 한 장 한 장 그 발자취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때로는 강의실에서 12가지의 다른 과목의 강의를 듣는 듯하다. 저자의 구도과정중의 깨달음과 더불어 책 중에 담긴 삶의 진리를 향한 정진의 열매와 같은 선지자들의 고매한 가르침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속된 마음이 치유되는 듯하다.
제1부 연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에서는 세상의 거울 속에 비추어진 삶에 급급하지 않고, 열린 마음을 담기 위한 삶의 진리, 세상의 진리를 찾아 때로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때로는 스스로 처연한 동굴수양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었던 깨달음의 긴 발자취를 담고 있다.

천지는 가장 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 없다.
사계는 명백한 법을 가지고 있지만 따지지 않는다.
만물은 완전한 질서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p.69 장자-<지북유>편)

이렇듯 말이 없는 천지와 사계를 완전한 질서 원리를 담고 있는 만물을 향한 정진의 과정들을 보면 마치 유별난 사람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정진의 열매들을 드러내 보였을 때는 지금의 세상과 자신에 대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여해스승과의 선문답과 도가의 큰 성인 왕진인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남긴 깨달음 천천히 마음에 새기듯 읽어 내려가면 어느새 가슴속에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한 느낌이다.

“지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 낮은 데로 흐르는 물과 같이 스스로의 처신을 낮추는 겸허함이 있고, 스스로의 형상을 고집하지 않는 물과 같이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으며, 약함으로 나가기 때문에 도리어 강한 힘을 내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생활태도는 물과 같은 것.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도 결코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p.139)

왕진인을 찾아 나선 발걸음 중에 만난 ‘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 느낀 이러한 감흥들을 접하면서 결국 자연의 만물 속에 진정한 삶의 진리가 살아 숨 쉬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피가 흐르는 생명체’ 라고 피력한 역사에 대한 고찰, 지난 나라의 수난으로 왜곡되고 버려지 유구한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관한 부분을 접하면서 왜곡된 역사를 진실이라 믿으며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가는 것은 ‘지금의 우리는 선조들의 거룩하고 의로운 목숨과 희생이 담긴 불멸의 정신을 무시하며 살아 왔구나’ 라는 회한을 느끼게 한다.
제2부 대륙에서 대륙으로 에서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의 현 상황 속에서 자칫 우리의 상고사가 묻혀버린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어가는 역사의 사실들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중의 하나인 장보고 기념탑의 건립에 담긴 과정과 역사적 의미를 전한다. 이는 분명 시작일 뿐이다. 고조선과 발해, 고구려에 걸친 대륙안에서 펼쳐놓은 우리 선조들의 불멸의 유산들은 분명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자 최민자 교수는 1995년부터 현재까지 민간인신분으로 세계의 중심축의 이동과 다가올 정신문명시대의 도래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는 ‘황금의 삼각주’ 라 불리는 중국, 북한, 러시아 3국의 접경인 두만강 하구 일대에 가칭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이를 추진하게 된 배경과 과정, 이러한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상징을 통해서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종교 간의 모든 파열음을 하나로 묶어 태어날 생명장(生命場) 부활의 의미를 전한다.
제3부 지혜의 길 행위의 길 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비록 선지자들과 같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이치에 좀 더 다가가고, 마음수양을 통해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안식의 길을 보여 준다. 인간으로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개인의 자아발견과 성찰에서 제대로 된 국가관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물질계와 의식계의 상호소통을 인식하는 방법 등 진정한 삶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준다. 보이는 물형계(物形界)의 성과도 영적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의 동기와 의도의 순수성과 일관성, 성실성에 기인한다는 것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 더불어 영적확장의 결혼에 대한 의미등도 우주의 섭리를 통해 해석해 놓고 있다.

<삶의 지문>에서 어찌 생각하면 쉽게 보고 느낄 수 없는 사상계의 원리들을 접하다보니 왠지 내 삶을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고착시켜주지는 않을까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하지만 저자 역시 오랜 구도와 수행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일진데, 책 한권으로 그 만고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깨달음을 전함으로 받는 마음이 미동이 후에 나비효과처럼 커다란 삶의 진리에 대한 파도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자아발견의 시간도 중요했지만, <삶의 지문>을 통해서 전해들은 우리 선조들의 묻혀진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갖게 되는 자손된 자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앞으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층 더 넓혀주는 듯 했다.
늘 부족하다 생각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삶의 진리를 향한 작은 미동을 더해 준 글이 있어 나누고 싶다.

“가섭아, 마음은 바람과 같아서 획 지나가 붙잡을 수가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서 많은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
마음은 번갯불가 같아서 났다가는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 여섯 가지 욕망에 한없이 얽매인다.
마음은 그림 그리는 사람과 같아서 곧잘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낸다.
마음은 원수의 집과 같아서 온갖 괴로움과 번뇌를 준다.
마음은 미친 코끼리와 같아서 흙과 모래를 짓밟듯이 일체의 좋은 갚음을 받을 행동을 파괴해 버린다.
마음은 파리와 같아서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 생각하고 집착한다.
마음은 악한 도둑과 같아서 온갖 착한 행동을 약탈한다.
마음이 항상 빛을 탐내는 것은 마치 여름밤에 부나비가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
마음이 항상 소리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군인이 승리의 북소리를 즐기는 것과 같다.
마음이 항상 냄새를 탐내 집착하는 것은 마치 돼지가 더러운 데 누워 있기를 즐겨함과 같다.
마음이 항상 맛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와 여인이 맛있는 음식 먹기를 탐내는 것과 같다.
마음이 항상 접촉하기를 탐내는 것은 마치 파리가 기름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
가섭아, 마음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움이 위에 말한 바와 같으니라.”
(p. 360~361) 

‘참나’를 찾아 나서는 발걸음은 먼저 이런 속된 마음의 헤아림부터 시작하여, “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속에 깨닫게 된다.” 라는 여해 스승님의 말씀처럼 부단한 헌신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이치를 공부해 나아갈 때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지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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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빅 히스토리 -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 최민자

알라딘: 빅 히스토리
빅 히스토리 -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   
최민자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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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35,000원
808쪽

책소개

우주의 탄생에서 지금 여기까지의 역사 전체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종교와 철학사상, 정치사회와 문화예술 등의 모든 학문 분야를 아울러 일관되게 이해하는 빅 히스토리의 문법에 따를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생명의 거대사”라는 관점에서 재구조화함으로써, 그동안의 빅 히스토리 논의 수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킨다.

자연과학에서의 통일장이론을 포함하는 “모든 것의 통일장 이론”으로 접근하는 21세기 문명의 대 변곡점에 서 있는 우리 인간과 세계의 개념, 구체적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개념을 재정립하는 명실상부한 “빅 히스토리”이다.

목차

제1부 |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
01 생명의 거대사란?
생명의 거대사
생명이란 무엇인가
거대사 vs 시간의 역사
02 빅뱅과 우주의 탄생
무위(無爲)의 천지창조 또는 생명의 자기조직화
우주관의 진화와 빅뱅이론
은하와 별들의 탄생과 죽음
03 지구, 생명체의 보고
현대 판구조론과 지구 생태계의 맥박
생명체의 탄생: ‘생명은 반드시 생명으로부터’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인류의 출현

제2부 | 생명과 진화
04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
과학과 영성의 접합
영성 계발과 진화
지구 문명의 새로운 지평 탐색
05 인류의 진화 계통수와 생명체 진화의 역사: ‘나’의 세계
초기 인류의 진화와 그 계보
생명체의 진화와 세렝게티 법칙
뇌의 진화와 지능의 탄생
06 홀로세: ‘우리’와 ‘그들’의 세계
‘메타 경계(meta-boundary)’ 출현
농경과 ‘문명’의 발생 그리고 전개
서구 문명의 동양적 기원과 리오리엔트(ReOrient)

제3부 | 포스트모던 세계와 트랜스휴머니즘
07 포스트모던 세계와 포스트휴먼 그리고 트랜스휴머니즘 : ‘우리 모두’의 세계
포스트모던 세계와 트랜스휴머니즘
포스트휴먼의 조건과 사이보그 시티즌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08 4차 산업혁명과 ‘GNR’ 혁명 그리고 플랫폼 혁명
‘딥 시프트(Deep Shift)’의 시작, 4차 산업혁명
‘GNR’ 혁명, 휴머니즘의 확장인가
사물인터넷과 플랫폼 혁명
09 ‘특이점’의 도래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
‘특이점’ 논의의 중요성과 미래적 함의
기술의 진화와 사회적 파급효과 및 인공지능 윤리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 인류의 선택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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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35~36 <생명의 거대사를 집필하게 되는 이유>
거대사가 생명의 거대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주의 본질 자체가 생명이고 생명의 전일적 흐름(holomovement)과 연결되지 못한 것은 결국 허구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천·지·인을 포괄하며 전 우주가 생명의 전일적 흐름인 까닭에 생명 아닌 것이 없으므로 생명의 거대사인 것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우주와 생명을 근원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우주의 본질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거대사를 ‘다양한 학문 분야를 함께 묶어 빅뱅으로부터 현재까지의 과거를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새로운 지식 분야’라고 했지만, 그것이 생명의 전일적 흐름과 연결되지 못하면 그가 주창한 ‘빅 히스토리’는 단지 분리된 무수한 사건들의 단순한 집합에 지나지 않게 된다. ‘빅 히스토리’라는 간판을 내걸고 우주론, 지구물리학, 생물학, 역사학 등의 다양한 학문 분야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통섭적 사유체계에 입각한 패러다임 전환이 없이는 명실상부한 ‘빅 히스토리’가 되기 어렵다. 생명의 거대사는 정신·물질 이원론에 입각한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지식의 대통섭을 통해 ‘보이는 우주[현상계]’와 ‘보이지 않는 우주[본체계]’의 상관관계를 조망하는 역사이다. 말하자면 존재계와 의식계가 상호 조응·상호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이다. 이 세상이 우리의 의식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부귀영화만을 향해 질주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속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비상(飛翔)하는 것을 잊은 채 해변에서 썩은 고기 대가리나 빵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것에만 묶여있는 갈매기의 삶을 더 이상은 추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통섭적 사유체계로부터 새로운 계몽시대가 열리게 된다. 필자가 생명의 거대사를 집필하게 되는 이유다.  접기
P. 99 <우주의 실체는 의식이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탐구함에 있어 종종 빠지기 쉬운 오류는 우리와 우주의 관계를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분리 설정하는 데 있다. 인간과 우주의 분리는 의식[파동]과 물질[입자]의 분리에 기인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우주는 에너지로 접혀진 보이지 않는 우주가 드러난 것이므로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상호 조응한다. 따라서 본체계[의식계]와 현상계[물질계]의 유기적 통합성에 대한 자각이 없이 우주와 생명 현상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원론에 빠진 과학이 외면해온 보이지 않는 반쪽의 우주[본체계, 의식계]는 보이는 우주[현상계, 물질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반쪽의 우주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우주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분절된 물질적 세계는 개체화 의식의 자기투사에 불과한 것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의 육체가 견고한 물질이 아니라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우주의 실체가 의식이며, 우리가 딱딱한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접기
P. 250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자정 0.7초 전쯤이다>
윌슨 주기는 대륙이 갈라지면서 형성되는 열곡대(裂谷帶)에서 시작해 열곡대가 확장되어 바닷물이 들어오면 홍해와 같이 새로운 해양이 생겨나고, 계속 확장되면 대서양과 같이 커다란 대양으로 발전하며, 더욱 확장되면 태평양과 같이 판의 가장자리에 해구가 생성되어 오래된 해양판이 섭입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해양판이 모두 섭입하면 히말라야산맥과 같이 대륙판과 대륙판이 충돌하는 형태가 되며, 언젠가 충돌운동이 멈추면 새로운 초대륙이 형성되고 또 언젠가 갈라져 새로운 윌슨 주기에 접어들게 된다.<193쪽>…시아노박테리아가 이끈 ‘산소혁명’은 진화의 방향을 재조정해 마침내 인간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생물 계통으로 안내했다. 고세균, 세균과 같은 원핵생물의 다양한 물질대사는 지구상의 생물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유지시키는 화학순환을 쉼 없이 가동하는 방식으로 지구 생태계의 맥박을 조절한다. 동식물이 이루는 생태계 작동의 열쇠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큰 척추동물이 아니라 박테리아처럼 작고 단순한 미생물들이다.<213쪽>…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다양한 계통의 인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멸종하고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 계통만 살아남아 오늘날의 인류로 진화했다. 지구의 나이 45억 5,000만 년을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각은 자정 5.7초 전쯤이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자정 0.7초 전쯤이다.  접기
P. 324 <생물학적 진화 역시 우주의 영적 진화와 조응관계에 있다>
오늘날 과학의 진보는 과학과 영성,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허물고 영성을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단계에 진입해 있다. 중력이론과 양자역학의 통합을 통하여 거시적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를 결합하려면 물리적 우주를 넘어선 의식 차원과의 연결이 필수적이다.<304쪽>…19세기 후반 이후 파워엘리트에 의해 권력을 강화하고 특권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물질문명의 근간을 이루었던 다윈의 적자생존의 이론은 생물학적 진화 역시 우주의 진행 방향인 영적 진화[의식의 진화]와 조응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324쪽>…지금까지 진화론은 주로 물리세계에 초점이 맞춰진 관계로 인간 사회의 진화가 우주의 실체인 의식의 진화와 조응해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지 못했다. 천·지·인 삼신일체이므로 물리세계의 진화는 영적 진화와 표리의 조응관계에 있으며 영적 진화를 위한 학습여건 창출과 관계된다. 진화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거시적인 분석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314쪽>…오늘날 세계자본주의체제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자유와 평등의 대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숱한 대립과 폭력을 유발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 인류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과학적 성찰을 통해 지구의 재조직화를 단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접기
P. 406 <지능은 유전자가 발명한 가장 유용하고도 경이로운 도구>
현생 인류의 진화에 대한 ‘다지역 기원설’이나 ‘아프리카 기원설’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관점 자체가 물리적인 지구 차원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이 우주는 무수한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체 진화의 역사는 물리적인 지구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에서 연동되어 진행되고 있다.<350쪽>…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호모 사피엔스 역시 언젠가는 멸종되고 그 자리는 진화된 다른 새로운 종들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가 정작 슬퍼해야 할 것은 멸종이 아니라 왜 사는지도 모르고 죽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370쪽>…세렝게티 법칙은 생명체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해 주고, 동식물과 나무, 깨끗한 공기와 물을 생산하는 자연의 능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놀랍고도 심오한 법칙이다.…생물학적인 관점에서 개체의 주인은 뇌가 아니라 유전자이며, 뇌는 유전자의 안전과 복제기능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대리인이다.<386쪽>… 생명체는 자기복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진화의 산물인 ‘지능’을 사용한다. 뇌와 더불어 지능은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위해 발명한 가장 유용하고도 경이로운 도구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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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민자 (지은이) 


● 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 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 더보기
최근작 : <동학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호모커넥투스>,<전라도 전주 동학농민혁명>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우주의 탄생에서 지금 여기까지의 역사 전체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종교와 철학사상, 정치사회와 문화예술 등의 모든 학문 분야를 아울러 일관되게 이해하는 빅 히스토리의 문법에 따를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생명의 거대사”라는 관점에서 재구조화함으로써, 그동안의 빅 히스토리 논의 수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킨다. 자연과학에서의 통일장이론을 포함하는 “모든 것의 통일장 이론”으로 접근하는 21세기 문명의 대 변곡점에 서 있는 우리 인간과 세계의 개념, 구체적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개념을 재정립하는 명실상부한 “빅 히스토리”이다.

1. 빅 히스토리란 무엇인가요?

<<생명의 거대사에서 인간은 우주와 동격이 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은 나이지리아 속담이라고 한다.
이 속담은 무한한 진리를 유한한 공간 속에서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을 본디 규모에 맞춰서 표현하면 이러할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때 ‘우주’는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지칭한다. 불교 용어로 하면 시방세계다. 우리가 아는 한 시간은 138억여 년 전 빅뱅의 그 시각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하며, 공간(우주)은 그 끝이 없다고도 하고, 최소한 없는 것과 매한가지라고도 말해진다.
지금까지의 빅 히스토리가 인간은 물론 이 지구조차 ‘우주의 먼지’이며 ‘생명’은 우주 진화의 말단에서 빚어진 우연의 산물로 보아온 것을 전면적으로 전복한다.
진정한 ‘빅 히스토리(거대사)’는, 인간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전반을 바로 이러한 지극한 궁극의 맥락에서 궁극적인 혹은 무궁한 범위까지 확장하여 써내려 가는 역사라고 할 때, 여기서 ‘인간’은 ‘생명’의 대명사이다.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친 한 국가, 한 민족의 역사도 그러하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의 사건’의 ‘관계’와 ‘인연’을 따라 궁극적인 원인과 궁극적인 의미를 캐어가다 보면, 그 범위는 ‘우’와 ‘주’라고 하는 시공간 전역에 걸치게 된다.
빅뱅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한 줄로 세워,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재음미하자는 것이 빅 히스토리의 기본 정의라면, 이 책 “빅 히스토리-생명의 거대사”는 그 역사 이전과 역사, 그리고 역사 이후까지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생명’임/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지동설과 진화론의 등장으로, 우주의 먼지와 동격으로 전락하였던 인간은 이제 '인식'의 담당자로서 우주 그 자체와 정면으로, 전면적으로 통섭할 수 있는 존재로 등극하는 극적인 반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2. "빅 히스토리 -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나요?

<<인간 의식의 확장의 결실로서, 우주의 진리를 파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가 정설로 수용하는 ‘빅뱅이론’에 따르면, 현재의 우주는 ‘확장하는 우주’이다. 그것은 예측과 관측을 종합하여 내린 과학적인 결론이다.
근세기에 들어 오랫동안 우리는 이 세계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최신의 과학이론(양자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속한 이 우주는 우리의 의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 우리의 의식 향방에 따라 우주의 존재 양상이 달라진다. 이것은 괜한 공론이나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라, 최신의 과학적 검증을 거친 실증적 이론이다.
그렇게 보면 사실, 확장되는 것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 혹은 인간의 예측과 관측 그 자체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태양계 속에 모든 별들이 속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은하계까지 확장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은하계조차 수많은 은하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하계들이 존재하는 곳이 이 우주이며, 그 우주조차도 무수한 우주(다중우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확장의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예측과 관측이며, 그것이 태어나는 곳은 의식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날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변화가 지식의 대통합을 통해 총체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 내면서 자연스레 의식 확장이 뒤따르게 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반영하여 "세계사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조망하는 빅 히스토리(거대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빅 히스토리'라는 말(개념)을 처음으로 쓴 것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공로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제 '빅 히스토리'는 특정한 개인의 관념으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인간의 의식이 도달한, 우주의 궁극적 진리 파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며, 이 책은 그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이 책의 서두(1부, 제1장)에서 “생명의 거대사”로서의 빅 히스토리의 핵심인 생명의 본성을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접합을 통해 밝히는 것은 이 책의 성격과 가치를 규정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빅 히스토리는 당연히 국가나 민족, 나아가 생물종의 차이는 물론,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마저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것을 전제로, 이 책은 서양의 지적 전통의 맥락에서 발아한 '빅 히스토리'에 동양적 자양분을 토대로 개화시킴으로써, 통섭과 통찰의 완성을 성취한다.

3. 빅 히스토리는 무슨 소용이 되나요?

<<나의 존재론적인 도약, 우리 세계의 차원 변화적인 초월>>
“우리는 왜 태어났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이 질문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우주는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생겨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앞의 질문은 종교와 인문학의 출발점이 되고, 뒤의 질문은 자연과학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최신의 과학이론(양자론)에 이르러 이 둘(혹은 셋)은 마침내 통일을 지향하게 된다. 그 통일 지향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역사가 바로 “빅 히스토리”이다.
그러나 ‘빅 히스토리’가 스스로 표방하는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을 진정으로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분과학문의 성과를 모아서 요약하고 이어붙인 데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지적 유희나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 책은 “다중심적이며 통섭적인 시각에서 빅뱅에서부터 ‘포스트휴먼(posthuman)’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통합적으로 조망한다.” 따라서 “통섭적 사유체계에 의한 패러다임 전환”은 빅 히스토리가 논의되는 전제조건이자 빅 히스토리의 결실로 얻게 되는 인류 의식의 새로운 차원/단계이다. 빅 히스토리가 상식적인 인식의 지평이 되는 세계/우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우주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갈등과 폭력(전쟁)이 횡행하고, 또 한편에서는 굶주림과 질병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상이변과 생물의 대멸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빅 히스토리-인식의 확산은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점들의 종국적인 출구를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출구를 통과하기 위해 / 통과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인간 자체의 질적 차원 변화도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합 내지 융합이 머지않은 장래에 보편화되리라는 것은 그 일단을 현재 수준에서 이해하고 예견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신인간’의 도래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차원으로 진행될 것이다. 빅 히스토리는 그 모든 것을 아울러 기술하는 ‘통일장 이론’으로 발전해 나갈 것 / 나가야 한다.
“인간은 왜 사느냐?”라는 질문은 인류 역사 이래 오랫동안 ‘하나마나 한’ 질문일 뿐이었다. 그 답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사적인 질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빅 히스토리를 이해하면, 우리는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하여 ‘인류와 생명의 차원에서’ 의미 있는 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빅 히스토리는 어느덧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생명의 거대사, 빅뱅(元 특이점)에서 새로운(新) 특이점의 도래까지>>
“천지만물이 생겨나기 전에 생명이 있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빅 히스토리가 지금까지의 빅 히스토리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첫 번째 지점은 ‘생명’의 기점을 어느 때로 보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동안의 ‘빅 히스토리’ 역사관에서는 138억년의 우주 역사, 45억년의 지구 역사에 이어, 대략 38억 년 전쯤에 최초의 원핵세포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본 반면, 이 책의 역사관은 빅뱅 이전에 생명이 있었고, 빅 히스토리란 바로 ‘생명의 진화와 확장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 책이 기술하는 빅 히스토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빅 히스토리의 시작점과 종점을 어디로 두느냐 하는 것이다. 빅 히스토리의 시창자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빅 히스토리를 ‘다양한 학문 분야를 함께 묶어 빅뱅으로부터 현재까지의 과거를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새로운 지식 분야’라고 정의한다. 이 정도라면, ‘빅뱅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의 역사를 양적으로 확장시켜 놓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빅 히스토리’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우주의 기원(빅뱅)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간”이라는 ‘시간 내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는 수준에서 한 차원 도약하고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필자가 말하는 빅 히스토리는 정신·물질 이원론에 입각한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지식의 대통섭을 통해 현상계와 본체계의 상관관계를 조망하는 생명의 거대사다. 존재계와 의식계가 상호 조응·상호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다. 거대사가 생명의 거대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주의 본질 자체가 생명이고 생명의 전일적 흐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은 결국 허구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천·지·인을 포괄하며 전 우주가 생명의 전일적 흐름인 까닭에 생명 아닌 것이 없으므로 생명의 거대사인 것이다.”

5. 이 책의 특징을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첫째, 빅 히스토리가 과거사의 단순한 집적이 아닌 생명의 거대사임을 새롭게 체계화시키고 있다.
둘째, 빅 히스토리 역사철학은 생명이 완전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영적 진화의 여정임을 밝힌다.
셋째, 생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통해, 생명을 ‘물 자체’로 귀속시킨 근대 서구 문명의 대안을 제시한다.
넷째, 서구 중심주의에 함몰된 시간의 역사(세계사)를 넘어 인류의 뿌리 문명에 대한 탐색을 보여준다.
다섯째, 단선적인 사회발전 단계이론을 벗어나 영원의 견지에서 세계 역사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여섯째, 우주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을 통찰할 수 있게 한다.

6. 책의 구조 - 제1부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

제1장 “생명의 거대사란?” :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접합을 통해 생명이 비분리성·비이원성을 본질로 하는 영원한 ‘에너지 무도’라는 것과, 생명’의 자기조직화에 의해 우주만물이 생겨났다는 점을 밝힌다. 생명의 거대사는 단순한 물질문명의 역사가 아니라, 물질문명과 그 배후에 있는 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이 거울처럼 상호 대칭적으로 작용하며 짝을 이루는 관계성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존재로서의 체험을 통해 ‘참나’와 대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제2장 “빅뱅과 우주의 탄생” : 빅뱅이론을 우주의 탄생의 출발점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은 의문은 ‘애초에 무엇이 빅뱅을 일으켰는가?’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다중우주" 개념으로 기울어가는 동안 필자는 "우주 삼라만상은 작위함이 없이 자연히 생겨나는 것"으로서 "무위의 천지창조 또는 생명의 자기조직화"가 출발점이라고 한다. 생명의 자기조직화는 ‘창조냐 진화냐’라는 이분법적 도식보다는 ‘창조적 진화’라는 통섭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제3장 “지구, 생명체의 보고(寶庫)” : 우주가 ‘탄생’한 이후의 대부분의 ‘존재’는 ‘별’로부터 유래한다. 그런 점에서 삼라만상은 ‘별’의 자손이다. 그로부터, 우리가 아는 경로를 따라 지구가 탄생하고, 약 38억 전에 “지구 생명체”(생명이 아니다)가 탄생한 이래로 4만 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경로를 밝힌다.

7. 책의 구조 - 제2부 「생명과 진화」

제4장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 : 오늘날 과학의 진보는 양자물리학과 영성의 접합에서 보듯이 과학과 영성,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관찰하는 대로 세계가 존재하고 물질들이 변화한다고 보는 양자물리학의 ‘관찰자 효과’와, 일체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고 보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상통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맞고 있는 지금, 과학과 영성과 진화에 대한 통섭적 이해와 존재론적 통찰이 절실히 요구된다.

제5장 “인류의 진화 계통수와 생명체 진화의 역사- ‘나’의 세계” :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자기복제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개체의 주인은 뇌가 아니라 유전자이며, 뇌는 유전자의 안전과 복제 기능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대리인이다. 생명체는 자기복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진화의 산물인 ‘지능’을 사용한다. 뇌와 더불어 지능은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위해 발명한 가장 유용하고도 경이로운 도구다.

제6장 “홀로세(Holocene Epoch 沖積世(현세)): ‘우리’와 ‘그들’의 세계” : 기원전 11000년경 이후 현세의 전개과정은 ‘메타 경계’의 출현과 맥을 같이한다. 모든 경계는 기술적, 정치적인 힘을 수반하는 동시에 소외, 파편화, 갈등도 수반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와 ‘그들’로 이분화된 세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양자물리학자들은 경계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경계란 실재를 느끼고 만지고 측정한 산물이 아니라, 영토를 지도로 그려내는 것처럼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실재는 무경계(reality is no-boundary)’이며 순수 현존이다.

8. 책의 구조 - 제3부 「포스트모던 세계와 트랜스휴머니즘」

제7장 “포스트모던 세계와 포스트휴먼 그리고 트랜스휴머니즘: ‘우리 모두’의 세계” :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능적, 육체적 한계가 극복되고 인체가 강화된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현재진행형으로 이해한다. 인간 사회의 모든 기술과학적 진보는 ‘인간 종의 변형’을 향해 맞추어져 있으며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달로 자연선택은 지적 설계로 대체되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포스트휴먼이 현재의 인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육체적, 지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제8장 “4차 산업혁명과 ‘GNR’ 혁명 그리고 플랫폼 혁명” : 4차 산업혁명에서 인간과 기계와 자원은 가상 물리 시스템(CPS)을 기반으로 전 과정논스톱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세계 각국에서 잇따라 도입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GNR’ 혁명, 사물인터넷과 플랫폼 혁명을 살펴보고,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지능을 정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 문명이 경험하게 될 가장 심원한 변화가 될 인공지능(AI) 혁명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본다.

제9장 “‘특이점’의 도래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 : 많은 과학자들이 우리 앞에 임박한 것으로 예고하는 "미래의 특이점"이 우리 삶에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변화를 예측해 본다. 생명공학에서 인공지능까지, "이미 와 있는 미래"로서의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기술혁신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의 생각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니, 물질세계의 진화는 의식의 진화와 표리의 조응관계에 있다.

9. 책의 구조 - 빅 히스토리 시대의 인류의 과제는?

<<영적 진화를 위한 공부를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가 이 세계(우주)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이유는 영적 진화를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이다. 138억 2,000만 년이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해 우리가 첫 대면을 하게 된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의 세계관과 사고방식, 가치체계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해결책도 실효를 거둘 수 있다. ‘특이점’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21세기 문명의 대변곡점에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개념도 재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 바로 새로운 문명을 여는 마스터키이기 때문이다. 접기

2021/11/16

알라딘: 화병의 인문학 : 전통편

알라딘: 화병의 인문학 : 전통편

화병의 인문학 : 전통편 - 의료문학으로 보는 화병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통합의료인문학문고 2  
김양진,염원희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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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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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의료인문학의 한 부문으로서의 ‘의료문학’의 관점에서 ‘화병’을 조명하는 ‘화병의 인문학 - 전통편’이다.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서의 화병은 전통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 기록에서 그 사례가 등장하며, 당대의 문학에 반영되어 있다. 화병을 의료적인 관점이 아닌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매개로서 문학작품은 훌륭한 통로가 된다.

화병의 양상은 시대를 따라 일관된 부분과 시대상을 반영하여 변형되고 변화된 양상을 띠기도 하는바, 이 책은 ‘화병의 인문학’의 전통편으로 우리 역사의 삼국시대 기록(문학작품)에서 화병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역대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 나타난 화병을 통해 한국인의 심성의 심층을 들여다보고, 또한 그 시대의 이면을 재조명해 보는 유의미한 시각과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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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총론: 화병을 ‘이야기’ 하다
2. 심화(心火)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화병
화병(火病),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 이야기
기원전 인도에서 유래한 설화, 구모두와 술파가
화병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 연민
3. 기록으로 남은 화병 ―화병에 걸린 왕들
화병이란
최초의 화병의 주인공 선조
여러 왕들에게 이어졌던 화병의 기질
정조의 화병과 등창
4. 유전인가 직업병인가 ―임금님들의 화병
선조, 우리 역사 최초의 화병(火病) 환자
화병의 유전,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조선조 왕가(王家)의 화병, 왕의 숙명인가 유전인가
5. 대가족 제도의 희생양 ―고전소설 주인공의 화병
국문장편소설의 세계
가부장제의 논리, 장자의 의무
악녀에게도 ‘억울함’은 있다
6. 자식이 웬수 ―부모들의 훈장, 화병
왕에게까지 보고되는 죄악, 불효
며느리의 등쌀에 시부모가 잇단 사망
국정의 현안으로 떠오른 불효죄 처리
7. 아내의 도리 ―뒤틀린 부부관계와 화병
들어가는 말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신화
며느리의 위치, 아내의 도리
부부관계의 뒤틀림과 화의 분출
부록: 화병 관련 어휘/표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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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3 화병(火病)은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문화결합 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우리 전통 문학작품에 형상화된 화병의 사례와 화병에 대한 역사 기록, 사회구조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화병의 사례 등을 다양하게 수집하여 화병의 병리적 증상과 그 원인을 들여다본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교양서이다. 화병은 의학 용어이기 이전에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친연성 있는 표현으로, 한국인의 한의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억울함과 분노라는 감정과 관련이 있고, 오래 참는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이어서 인내를 큰 덕목으로 여기는 한국 문화에서 더욱 보편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책을 출발점으로 하여 앞으로 문학은 물론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서 화병을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총론: 화병을 ‘이야기’하다 중에서>  접기
P. 38~39 ‘사랑의 화신(化身)’이 ‘저주의 화신(火神)’이 되어 버려 주변의 일상을 잿더미로 만드는 일은 오늘날 오랜 짝사랑 끝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속) 연인에 대한 화병(火病)으로 자신을 해치고 자신이 오롯이 아꼈던 그 사람과 가족을 해치고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옮기는 어리석은 스토커들에 대한 경고는 아니었을까. ...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오래 전부터 몸속에 깊이 드는 골병과 함께 마음속에 깊이 병드는 마음, 즉 화병(火病)을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가 있다. <심화(心火) 중에서>  접기
P. 59~60 정조의 화병은 수원 화성 축조 이후부터 그 증세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자신의 개혁을 완성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과로로 인해 몸의 피로감이 심하여졌고, 정치적 갈등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반역으로 치부하겠다고 하였던 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문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부담감, 정치적으로 자기 신념을 공격당하는 데서 오는 상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화병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 중기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선조와 조선 후기 부흥기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숙종으로부터 경종, 영조, 사도세자와 정조에 이르기까지 화병을 앓았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으로 남은 화병 중에서>  접기
P. 79 우리 역사에서도 선조(조선 14대 임금)에서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에까지 이어지는 선조 가계의 다양한 울화병(鬱火病)의 상황들은 저마다의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며 임진왜란 이후의 우리 근대사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도화선(導火線 triger)이 될 것이다. <유전인가 직업병인가 중에서>  접기
P. 102 『성현공숙렬기』의 유연, 『완월회맹연』의 소교완, 이 두 사람은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질병에 걸린다. 이들이 긍정적 인물이든 부정적 인물이든 간에, 그들의 몸에 병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억울함’의 누적과 이로 인한 분노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변에서 이러한 마음 상태를 알아주거나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위로와 공감을 해주는 인물을 찾을 수가 없다. 전통사회에서 개인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억울한 상황을 참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조차 표출하지 않아야 했다. 문제는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억울함이 내면에 쌓이게 되고 이것이 신체에 병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누적된 억울함이 끓어오르는 것이 ‘화’일 것이며, 오랜 시간 바깥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화는 신체를 망가뜨리거나 비정상적으로 폭발하고 만다. 앞에서 살펴본 국문 장편소설의 두 중심인물은 가부장제 하에서 좌절과 분노를 느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병에 걸린 두 인물을 통해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내재된 질병적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대가족 제도의 희생양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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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양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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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국문과 교수, 『인문학연구』 편집위원장,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부학장.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1996~2009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연구교수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편찬과 한국어 어휘 연구 진행. 2010~2011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책임연구원. 2012년~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뉴욕주립대(SUNY) 방문학자(2018.1~2019.1)를 거쳤다.
『고대 도서관의 역사』(공역), 『국어사전학개론』(공저), 『동요 노랫말 수수께끼』를 위시해서 최근의 『언어학으로 풀어 본 문자의 세계』(공역), 『만주족의 신화 이야기』(공역)까지 십여 권의 저서와 「한국어의 형태와 형태소」, 「‘象形’과 ‘訓民正音’」, 「한민족어와 만주어의 형태론적 동형성」, 「시어와 문법」 등 9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화병의 인문학 : 전통편>,<우리말 수첩>,<박통사 원나라 대도를 거닐다> … 총 12종 (모두보기)
염원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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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HK+ 통합의료인문학 HK연구교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2009년부터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하였으며, 2011년부터 원광대, 단국대 연구교수 및 중앙대 포닥으로 재직하였고, 고전문학과 민속문화를 연구하였다. 신화에서 현대 도시전설까지 한국인의 이야기 문화를 관통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있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경희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생의례로 보는 근대 한국인의 삶』(공저), 『세시풍속의 지속과 변용』(공저),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공저) 등의 저서와 「사회적 참사 소재 도시전설의 유형과 의미: <삼풍백화점 괴담>을 중심으로」, 「질병과신화: 질병문학으로서의 손님굿 무가」, 「동아시아 해양신앙의 여신과 제의의 치유적 성격」 등 2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화병의 인문학 : 전통편>,<세시풍속의 지속과 변용>,<우리의 근대 일생의례 이야기>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1.
‘화병’은 세계적으로도 ‘문화결합증후군’의 일종으로 ‘한국인 특유의 질병’으로서 보고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보고가 타당성이 있다면, 한국의 심층적인 문화전통에서도 ‘화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 이래의 한국의 문학작품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가설에서 출발하여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 전통 문학작품에 반영된 ‘화병의 사례와 기록’들을 찾아 소개하고, 그 문화적 의미를 논구하였다.

2.
한국 문학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화병은 심화(心火)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지귀(志鬼)설화’가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된다. 이 설화는 본래 인도에서부터 발생하여 신라에 전래된 것이지만, 신라문화 전통 속에서 재해석되고 전유되어 선덕여왕, 혜공선사 등의 역사적 인물과 영묘사라는 실제 공간적 배경을 갖춘 역사적 설화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 골격은 오늘날 ‘상사병(相思病)’이라고 불리는, 이루지 못하는 짝사랑이 원인이 되는 심병(心病)에 관한 기록으로, 그 심병이 어떻게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장되며, 또 신라 사회는 그 심병의 사회적 파장을 어떻게 다스려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선덕여왕은 화병의 당사자가 아니라 원인제공자이거나, 치유자로서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3.
한국사회, 화병의 전통적 맥락에서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주로 ‘왕실의 병’으로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왕실을 배경으로 하는 화병(火病)은 구체적인 사례로서, 또 개인적이거나 단절적인 사건으로 마감되지 않고 여러 대에 걸쳐, 계기적인 스토리를 이루며 전승되고 심화,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랜 치세 기간을 보유하는 왕 중의 한 사람이면서, ‘임진왜란’을 겪으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그 패배감과 열등감에 평생을 시달렸던 선조는 ‘화병’에 관한 기록을 남긴 최초의 임금이다. 화병은 왕에서 왕으로 계승되기도 하지만, 주변인물(왕비나 왕자 등)로까지 확장되는 ‘가족력(家族歷)’의 질병으로 계속되면서 역대 국왕들은 대체로 이러한 화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화병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민간으로까지 이전된다.

4.
‘화병’이 한국인 특유의 질병이 되는 까닭은 한국인의 삶 전체를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는 질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전통시대 ‘화병’의 보편화에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은 한국 특유의 대가족제도와 문화이다. 가족제도를 배경으로 하는 화병에 대해서는 고전소설에 적지 않은 사례들이 남아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고전소설에서 가족 내의 갈등으로 인한 ‘화병의 희생자’가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유효공선행록>과 <완월회맹연>이라는 두 작품을 통해 ‘가부장제’ ‘효’ ‘삼종지도’ 등을 핵심 키워드로 하는 한국의 전통적 가족제도 속에서 ‘화병’이 어떤 식으로 한국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게 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

5.
이렇게 ‘왕실의 병’에서 ‘민간의 병’으로 이전하고 ‘양반 가족의 병’에서 ‘한국인 보편의 질병’으로 자리매김해 온 ‘화병’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부모 - 자식’ 사이 ‘남성(남편) - 여성(아내)’ 사이의 갈등을 통해서 더욱 더 한국인 전체에 미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자식이 웬수”, “남편(男便)은 ‘남’ 편”이라는 두 종류의 ‘금언(金言)’은 그 이면에 깃들어 있는 ‘부모의 화병’, ‘아내(여성)의 화병’으로 구체화되고 유형화된 ‘한국인의 화병’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6.
이 책의 말미에는 ‘화병 관련 어휘/표현 모음’을 실었다. ‘화병’이 한국인에게 흔한 질병인 만큼 한국인의 언어 습관 속에 화병과 관련된 어휘와 표현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가슴 쓰림’에서부터 ‘홧김에 서방질한다’에 이르기까지 화병 관련 어휘와 표현들은 순수 의학용어에서부터 일상용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층적이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우리는 ‘화병을 매개로 한’ 우리 자신의 이해와 한국사회의 이해에 좀더 심층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7.
이 책은 <통합의료인문학문고> ‘근대편’에 이은 시리즈 제2권이다. <통합의료인문학문고>는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이 기획하고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 펴내는 문고로, 대중들이 의료인문학을 쉽게 이해하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획한 책들을 발간한다.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간 중심 가치를 정립할 수 있는 통합의료인문학의 구축과 사회적 확산을 목표로 연구와 실천을 진행하고 있다. 의료인문학 지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지역사회의 인문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지역인문학센터 <인의예지>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접기

2021/11/11

동학 교리 현존 최고본 〈동경대전〉 세상에 나왔다 : 충청 : 전국 : 뉴스 : 한겨레

동학 교리 현존 최고본 〈동경대전〉 세상에 나왔다 : 충청 : 전국 : 뉴스 : 한겨레

동학 교리 현존 최고본 〈동경대전〉 세상에 나왔다

등록 :2021-10-28 
송인걸 기자 사진
송인걸 기자

1880년 초본 수정한 1883년 계미중춘판 목판본
북접 접주 김은경 후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기탁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의 표지와 책머리.

“세상에 나오면 (너희가) 위험해지니 열지 마라. 좋은 세상이 오거든 공개하여라.”

충남 천안지역 동학의 우두머리 북접 접주 김은경은 충남 천원군 목천면 집에 항아리를 파묻고는 후손들에게 “항아리를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후손들은 이 당부를 오랫동안 지켰다.

집안의 판도라 상자였던 이 항아리는 1990년대 후손 김찬암이 열었다. 이중으로 된 항아리의 안에는 동학 경전이 들어 있었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계미년 봄 간행본), 〈용담유사〉 필사본 등 동학 관련 경전과 대한제국 학부에서 발간한 역사교과서인 <동국역사> 등 이었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은 2000년께 발견됐다는 소식이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 전해졌으나 소장자 쪽이 공개를 꺼려 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항아리에서 나온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등 동학 관련 유물이 발견된지 20여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다. 지난 4월 김찬암씨의 손자인 김진관씨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해 모습을 드러냈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간기, 왼쪽에 후손 김찬암이 쓴 주소, 오른쪽에 계미년 봄에 북접에서 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 조한필)은 11월3일 연구원 강당에서 〈동경대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계미중춘판 수탁식을 연다고 28일 밝혔다. 수탁식에는 소장자 김진관씨, 양승조 충남지사, 기탁을 주선한 김종식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 회장 등이 참석한다.



겉표지를 포함해 90쪽인 이 경전은 서문에서 ‘1880년 간행한 〈동경대전〉 초판을 수정하고 빠진 내용을 보완해 1883년 간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지난 5월부터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박맹수 원광대 총장,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등 학계의 대표적인 동학 연구자들과 서지학자 손계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등이 이 경전을 분석해 진본 임을 확인했다.

이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항아리를 묻은 김은경은 천안지역 동학의 우두머리인 북접 접주 출신으로, 이 목판본은 그의 집인 충남 천원군 목천면 한천(현재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 450번지)에서 간행됐다. 이 경전은 최제우의 동학사상과 그가 지은 시 등 문집이 한문으로 담겼다.



동학 연구자와 서지학자 등 전문가들이 지난 5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을 감정하고 있다.

연구원 쪽은 “이 책은 논학문(동학을 논한 경문)에서 서학과 동학의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한문으로 간행된 것은 최제우가 유학자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경대전〉 경진판(1880년)은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 이번에 공개된 계미중춘판을 현존하는 〈동경대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덧붙였다. 연구원은 다음 달 30일 연구원에서 이 경전의 문화재적 가치와 의의를 논하는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이상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동경대전〉계미중춘판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이 책을 간행하는데 사용한 나무활자가 상용되던 것인지, 별도로 제작한 것인지 등 다양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며 “충남의 동학혁명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는 평이 많다. 시·군에 산재한 동학 사료를 모아 학술대회를 열고 누구나 역사적 실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동학 관련 개설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1017069.html?fbclid=IwAR39o9wkAF7cxbIB4iQqt81gasPTpq_jr6PU3qYB9BpRf9Q4CiumtkXB4RM#csidx4fb58ab8d60d53c919900f962672743

2021/11/08

Namgok Lee 박석 교수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장(章)

(2) Facebook
박석 교수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장(章)을 발췌 소개한다.
( * )는 내 의견을 보태는 것이다.
====
인류의식의 획기적인 진보에 따라 종교적 성스러움에 대한 관념도 점차 바뀌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적 합리적 사유능력의 발달로 신화적 초월적 성스러움이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라질 수 없듯이 성스러움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성스러움의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거꾸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특성의 하나가 숭고지향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종교에서는 ‘성(聖)스러움’이라고 말해 왔고, 그것이 인간의 사라질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든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존 제도 종교는 크게 쇠퇴할 것으로 보는데, 그 종교성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 깊게 체현(體顯)될 것이다)

‘초월성과 일상성의 통합’이라는 방향에서 박 교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① 신화적 성스러움에서 인간적 성스러움으로
② 집단주관적 우주론에서 보편적인 우주론으로
③ 내면세계에 치우친 수도(修道)에서 현실과 소통하는 수도로
이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를 고전적 성스러움의 차원에서
세상을 향해 종교적 사랑이나 자비를 베푸는 차원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현대적 성스러움의 관점에서
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나 갈등을 해결하고
현실사회를 좀 더 사람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

(*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동안 제도 종교가 이런 면에서 부족하고 지배 세력의 옹호자로 작용해 온 면이 많았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타나는 사조로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석가나 예수가 고민했던 지점은
근대 이후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모순 갈등론이 나타낸 일면성과 독단성 그리고 투쟁이나 혁명 등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여러 문제들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들이 다시 부각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나선형 순환의 사상 및 실천의 진전이 아닌가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선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독특한 문화지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과거에 하지 못한 반성을 변화된 현실에서 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관념의 후진성인데,
이것이 현실정치의 혼돈을 부추기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진보를 지향하는 운동은 ‘관념과 현실의 괴리’를 넘어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바라보면 유교의 종교성 여부는 문제가 복잡하고 애매하다. 그러나 화광동진(和光同塵)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차원의 성스러움으로 보자면 유교는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라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세련된 고등종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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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1, 崇高-

형용사
숭엄하고 고상하다. 순화어는 `높고 거룩하다'.
"숭고한 희생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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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ubl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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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하다의 의미 - 사전 - WORDROW
https://wordrow.kr › 사전


옛 문물을 높여 소중히 여기다., 뜻이 높고 고상하다., 산이 높고 우뚝하다.



숭고하다 뜻: 뜻이 높고 고상하다. - WORDROW
https://wordrow.kr › 사전


숭고하다 崇高하다 : 뜻이 높고 고상하다. 어휘 형용사 혼종어 · 숭고한 희생. · 그의 죽음이 가져다준 숭고한 교훈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학교에서는 ...


숭고 - 나무위키:대문
https://namu.wiki › 숭고


16 Nov 2020 — 하지만 흔히 대중에 알려진 사람에게 빗대는 숭고함의 뜻은 
많은 것들을 빗댄 것이나 그것을 최소화되었거나 그나마의 나은 선택의 길을 한 사람이라면 ...


숭고하다
https://korean.dict.naver.com › koen


뜻이 높고 훌륭하다. One's ideal being high and great. 숭고한 가치. 속도조절. 숭고한 사랑. 속도조절. 숭고한 의식. 속도조절. 숭고한 이상. 속도조절.



숭고하다 뜻 - 뜻이 높고 고상하다.,산이 높고 우뚝하다.,옛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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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높고 고상하다.,산이 높고 우뚝하다.,옛 문물을 높여 소중히 여기다.



숭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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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에서, 숭고란 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 도덕적, 지적, 형이상학적, 미적, 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 ...


선생님 - 강남구청 인터넷수능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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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y 2021 — 숭고하다라는 뜻이 잘 이해가 안되기도 해서요 ㅜㅜ 안타까운건지 숭고한건지 알려 ... 
숭고하다는 본받을 만한 높은 정신적 경지나 사상을 의미해요.



자연의 숭고함을 느낀 적 있나요?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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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Sept 2019 —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느낌은 숭고하다 라고 부르게 ... 나약함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나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발전하도록 ...



영어 한국어 사전에 숭고함 의 의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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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stially. 거룩하게 , 숭고하게 , 신성하게. male. 남성의 ; 숫컷의. move up. 숭진시키다 , 숭급시키다 , 끌어올리다 , 숭진하다 , 숭급하다. outnumber.



숭고하다 - 제타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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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July 2017 — 존엄하고 거룩하다. 뜻이 높고 고상하다. 2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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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학에서, 숭고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도덕적지적형이상학적미적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의 가능성을 넘는 위대함을 나타낸다.

고대 철학[편집]

숭고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연구는 롱기누스에 기인한다. 이것은 기원과 저자가 확실하지 않지만 1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롱기누스의 경우 숭고함은 특히 수사학의 맥락에서 위대하거나 고상하거나 고상한 생각이나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숭고한 것은 더 큰 설득력으로 경외와 존경심을 일으킨다.

근대 철학[편집]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자연의 미적 특성으로서의 숭고한 개념의 발전은 18 세기 제3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쿠퍼 와 존 데니스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1]

에드먼드 버크숭고 개념을 발전시켰다.[2] 버크는 숭고와 미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숭고와 미의 관계는 상호 배타성 중 하나이지만 둘 다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으며, 숭고함은 공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지각이 허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

1764년 이마누엘 칸트는 관찰 대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록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숭고한 것이 고귀한 것, 훌륭함, 무서운 것의 세 가지 종류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숭고를 문화적 차이의 표식이자 동양 예술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에 대한 그의 목적론적 견해는 그가 "동양" 문화를 덜 발달되고 정치적 구조 측면에서 더 독재적이며 신의 법칙을 더 두려워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중국 예술의 특징 인 복잡한 세부 사항의 초과 또는 이슬람 예술의 패턴이 숭고의 전형적인 예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예술 형식의 탈 체화와 무형 함이 시청자에게 압도적인 미적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했다.[4]

현대 철학[편집]

20세기 신칸트 미학의 독일의 철학자와 이론가 맥스 데소어는 다섯 개 주 미적 형태(미적인 것, 숭고한 것, 비극적인 것, 추한 것, 우스운 것)를 공식화했다.[5]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따르면 미학의 주제로서 숭고한 것은 모더니즘 시대의 주요 특징이었다.[6] 리오타르는 모더니스트들이 인간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지각자의 해방으로 미적인 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숭고한 의미는 인간의 이성에서 아포리아를 가리키는 방식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적 힘의 가장자리를 표현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다양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참고 문헌[편집]

  1.  Nicolson, Marjorie Hope. Mountain Gloom and Mountain Glory. Ithaca, 1959
  2.  Nicolson, Marjorie Hope. "Sublime in External Nature".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Ideas. New York, 1974.
  3.  Monroe C. Beardsley, "History of Aesthetics",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ume 1, p. 27 (Macmillan, 1973). But Edmund Burke disagreed: "Nor is it, either in real or fictitious distresses, our immunity from them which produces our delight ... it is absolutely necessary that my life should be out of any imminent hazard, before I can take a delight in the sufferings of others, real or imaginary ... it is a sophism to argue from thence, that this immunity is the cause of my delight".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Part 1, Section 15)
  4.  Hegel, G.W.F. Aesthetics: Lectures on Fine Art. Translated by T.M. Know. Oxford: Clarendon, 1975.
  5.  Emery, Stephen A.. "Dessoir, Max". In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p. 355. Macmillan (1973).
  6.  Lyotard, Jean-François. Lessons on the Analytic of the Sublime. Trans. Elizabeth Rottenbe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Lyotard expresses his own elements of the sublime but recommends Kant's Critique of Judgment, §23–§29 as a preliminary reading requirement to understanding his analysis.


사자성어 읽기 - 和光同塵 (화광동진)
입력 : 2015.11.05


화광동진(和光同塵)에서 
和는 화할 화, 
光은 빛 광, 
同은 한 가지 동, 
塵은 티끌 진으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노자' 제56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앎을 말하지 않으며, 
앎을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앎이 있는 사람은 그 이목구비를 틀어막고 지혜의 문을 닫으며, 
지혜의 날카로움을 꺾으며, 지혜로 인해 일어나는 혼란을 풀고, 지혜의 빛을 감추어 나타내지 않고(和其光), 속세의 티끌과 하나가 된다(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현동(玄同)의 사람에 대해서는 
친해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득을 줄 수도 없고 해(害)를 줄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 할 수도 천(賤)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貴)한 것이 된다.

"도(道)는 언제나 무위(無爲)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노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화광동진'과 '현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현실 사회 속에서도 이러한 도(道)의 법칙에 순응(順應)하는 것만이 최상(最上)으로 여겼다. 따라서 현실적인 인간사회에서 위대한 일, 좋은 일, 남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 등일지라도 그것을 내세워서 자기의 공으로 여기며 자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자기 스스로가 주재자가 되고자 하는 것 따위는 부도덕(不道德)한 것으로 여겼다.


불교(佛敎)가 중국에 전파됨에 따라 중국의 고승(高僧)들은 
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어휘를 빌려서 중생을 제도하는 말로 삼았다. 
빛나는 불교의 진리를 가슴속에 가득 안고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으며 
행동(行動)으로 대중(大衆) 속에 파묻혀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고 제도(濟度)하는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당시의 승려(僧侶)들은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모르는 척 살아야 하고, 
높이 올라갈수록 아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세출의 뛰어난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자신의 빛을 줄여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지혜롭게 화목을 추구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고용철 중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