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9
Kang-nam Oh 성경과 동성애
2022/05/14
알라딘: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김진호,이찬수,이충범 2012
- 현재 개신교 예배당의 출입구에는 저마다 큼지막한 포스터가 하나씩은 붙어 있다. 이른바 '○○○ 이단의 출입을 금한다'는 게 그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걸 붙여 놓은 걸까? 교우들을 엉뚱한 교리로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빼내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 정말로 그들이 기존의 교우들을 이리처럼 도둑질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개신교 내부에서도 스스로 점검해야 할 몫이 있지 않을까? 그 동안 가르친 교회 교리가 교우들을 붙잡아두지 못한 이유 말이다. 그에 대한 진정성을 성찰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 물론 이단은 정통 교리와 어긋난 경향성을 드러내며 활약한다. 다만 이단 규정은 교리적인 차원보다는 주도권 다툼에서 빚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통이든 이단이든 교회 역사는 권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구미정·김진호·이찬수 외 여럿이서 쓴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에는 그와 같은 '이단'이라든지, '성직'이라든지, '창조'라든지, '성전(聖戰)'이라든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속살들을 드러내 준다. 물론 그것은 바른 치유책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경계선은 대체 어떻게 그어진 것인가? 초기 기독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애초부터 교리적 차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바우어는 주장한다. 교회의 공동체 의식은 공식 교리의 진술(이른바 정통은 교회에 의해 규정된다)이 아니라 동일한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바우어에 따르면, 정통과 이단이라고 하는 분류체계는 각각의 사상이나 내적인 교리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권력 집단의 정치적 판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46쪽)
- 이는 제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인 정용택이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유세비우스(Eusbius)의 〈교회사〉와는 달리 독일의 발터 바우어(Walter Bauer)의 〈최초의 기독교에서의 정통과 이단〉이란 책에 초점을 맞춰 정통과 이단 간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것이 곧 예수와 사도 시대의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관용되었던 다양한 교리들이 로마교회의 정치권력 아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배척되었다는 주장이다.
- 아울러 정용택은 지금의 한국교회와는 달리 초기 한국교회가 보여준 관용성에 눈뜨도록 종용한다. 이른바 초기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때는 '단일한 개신교 교리'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비교적 원만하게 공존하던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 기성교회가 제시한 메마른 교리와 답답한 의례에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이단종파로 규정한 집회에서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와 열광적인 종말론 등으로 무장한 채 기존 교우들의 억압된 욕망을 분출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기성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딱딱한 교리로 교우들을 옥죄려고 했지 그들처럼 교우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데는 등한시했다는 견해다.
- 그것은 구미정이 바라 본 '성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시대의 목회자가 정녕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를 계승하고 싶은 욕망이 하늘을 찌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루터의 '만인사제'로 인해 '영적 평등주의'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적 권위'를 수호하려는 목회자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 "결국 목사가 자기 자신을 평신도와 구분지어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고질병에서 헤어나는 게 관건이렸다. 이렇게 보면, 목사의 직분을 '성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뻣뻣한' 평신도를 곁에 둔 목사야말로 복 받은 사람인 셈이다. 그 평신도는 목사로 하여금 만인사제의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각성케 하는 고마운 스승이 될 테니 말이다."(133쪽)
- 이는 스물아홉에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목회가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를 확장하는 걸 성공으로 생각하는 판에, 그 시인의 글에 등장하는 목사는 둘째 아이를 폐렴으로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복'을 기대했던 교인들조차도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마당이었고, 그 책임을 목사에게 묻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그 목사가 전능한 신이 아닌데도 말이다.
-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목사도 그리고 교우들도 병이 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사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예배당을 크게 짓는데 혈안이 돼 있고, 교우들은 교회부흥의 실패원인을 목사에게 돌리는 병폐에 빠져 있다. 교회가 부흥되면 목사를 신격화하지만, 부흥이 저조하거나 교인수가 감소하면 무능한 목사로 낙인찍는 게 보편화된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오늘날 교회의 암 덩어리는 교회 바깥의 이단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회 내부의 폐부와도 같은 권력욕과 딱딱한 교리들은 교우들을 더 병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것들을 찢고 수술하지 않는 한 그 암덩어리는 더욱더 급속하게 확산될 것이다
-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그 속살의 암덩어리들을 이야기하겠는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교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암덩어리들이 무엇인지 바르게 진단하고, 그것들을 수술하여, 보다 더 내실을 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명의 신학자들은 그런 바람으로 각각의 꼭지를 맡아 이 책을 썼을 것이다.
- 김규항씨의 말대로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볼지는 모른다. 하지만
- 단 몇 사람이라도 이 책을 보기만 한다면 그는 가만히 예전의 신앙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 제목 그대로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이야기가 교회와 나의 모습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 신앙이란 것을 거의 교리 안에서 듣고 읽고 이해하고 살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
- 모든 교리가 성경과 하나님께서 직접 일러주시고 명령하신 것으로 믿고 따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 이 책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자의적으로 해석해낸 교리의 맹목성을 역사적 교회사를 들려줌으로써 증명해준다.
- 읽고 나면 혹시 불편해질까, 선입견이 있었다. 왜냐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나 혹평을 받는 존재들이기에
- 이 책 역시 혹평에 강도 높은 비웃음과 야유까지 얹지 않았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 오히려 읽고 나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나아갈 바가 어디인지
-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동안 아무도 보여주지 않던 기독교의 밀실을 시원하게 열어 보여주었고 비로소 복음의 핵심이
- 지금 이 순간 교회에서 사회에서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었기에 오히려 마음에 기쁨이 깃들었다.
- 깊은 사유와 기도와 말씀이,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하신 것처럼
- 예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것을 보고 행하기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길이라고 믿는 성도들의
- 영성에 이 책이 더 거룩한 고민의 시계를 확보해주리라 생각 한다.
-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를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 물론 그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 미미하여 자괴감이 들지라도
- 현재의 이 혼탁한 교회의 어느 한 부분에 일정의 빚이 있는 우리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지 않을까.
- 그것이 세상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기독교를 일으켜 나가는 날마다의 첫 걸음일 것이다.
-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의 보다 성숙하고 바람직한 성도와 한국교회의 깨어남을 염원하는 저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2/03/11
알라딘: 영원의 철학 - 목차
2022/01/23
알라딘: 귀향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 Going Home: Jesus and Buddha as Brothers
알라딘: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 2013 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년)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틱낫한 (지은이),오강남 (옮긴이)솔바람2013-04-30
- 품절 확인일 :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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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신령한 영의 목소리
소개의 말
체험을 통한 공감대의 발견
제1장 가만히 있어 내가 하느님 됨을 알지어다
제2장 '마음 다함' 그리고 성령
제3장 최초의 만찬
제4장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예수
제5장 수련 공동체
제6장 평화스런 마음
제7장 미래가 가능하려면
제8장 귀의하다
제9장 피안
제10장 믿음과 실천
부록 | 논문
깨침과 메타노이아-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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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2
제대로 번역된 노장철학을 찾아서.. : 네이버 블로그
알라딘에 각 분야의 고수분들이 많은 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분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일 전 제 서재를 오랜 만에 찾아오신 알라디너분의 서재에 인사차 갔다가 엄청난 서재를 운영하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포스팅이 많이 없어 처음글부터 마지막글까지 금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고 나서는 그분(이하 J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사실이라면(미천한 제 눈에는 주장하는 바가 모두 타당한 것 같습니다) J님은 도올이거나 아니면 도올에 필적할, 아니 우리나라 노장철학계의 독보적인 전문가 이실 것입니다.
글의 문체가 도올과 너무 흡사하여, 혹시 도올밑에서 수학하신 분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J님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독선적입니다.
그가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모든 노장 철학 번역서들이 노장 철학을 잘 르고 번역해서, 진정한 노장철학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J님이 비판하는 바를 따라가 보면 노장에 관련된 책들의 중요한 오역이 무엇인지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오역이 사실이라면 노장에 관계된 책들은 모두 다시 출간되어야 될 듯싶습니다.
제가 J님의 서재에 들어가 이 글을 옮겨 놓는 이유는 J님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많은 공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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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아는 체는 사람들 또한 전혀 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글에 댓글 달면서 감사하다느니 하고 잠꼬대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가 별로 없다고 비전문가의 왜곡된 번역서를 두고 이런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제대로 아는 전문가 누가 한번 나와서 방송강의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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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님이 지적한 노장에 관계된 책의 오역 비판에 대한 핵심을 옮겨 놓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제대로 된 노장 철학서를 선택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분이 지적하시는 부분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1인 이기에....
대표적인 장자해설서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를 비판한 부분입니다.
동양철학, 도가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통일성없이 막 번역어를 갖다 붙여놓았다. '천지'를 '천지자연'으로 해놓으면 오역이다. 천지는 천지이지 자연을 왜 가져다 붙이는가? 뜻이 맞다고? 천만에. 천지는 우주라는 뜻이지 자연이라는 뜻이 아니다. "道德" 은 '도와 덕'이지 '도덕'이 아니다. 도덕은 우리가 모랄을 번역한 개념이다. 장자의 도덕은 도와 덕을 붙인 두 단어이다. 모랄이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 노장에는 도덕, 모랄을 초월하라고 하지 모랄에 대한 철학이 없다.
이런 두 예들 외에 무수히 많은 장자의 중요한 철학개념들에 대한 번역어가 철학적 고찰이 없이 그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막 한글로 옮겨 놓았다.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오역,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오역이 발견된다.
꼭 이 책만이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의 기초적이면서 핵심적인 오역을 하나 짚어보자. 본책 덕충부에 '인기지리무진' 얘기에서 '天죽'이 나온다. 여기서 '天'을 역자가 '자연'이라 번역했는데 오역이다. 장자에 나오는, 노자도 마찬가지, '天' 자는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 네이쳐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를 '하늘'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장자를 강의하는 거의 모든 교수들과 장자 번역서 모두, 장자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천'을 '자연'으로 알고 장자를 '자연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다 틀렸다.
"자연이 먹여살리는데 어찌 또 '人爲'가 필요하랴" 자연이니 인위하는 말들이 모두 장자의 용어가 아니고 장자사상에는 이런 개념을 쓰지 않는다. 이런 법주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정 자체를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범주개념으로 설명을 천 페이지를 해도 다 꽝이다. 자꾸 서양철학개념을 노자, 장자를 설명하려고, 아니 동양철학 다 마찬가지다, 하니까 노자,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자연'이라는 개념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이 동일할까? 하이데거 기초만 알아도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독창성이 있는 것이다. 노자 장자에 나오는 '物'이란 개념은 어디에 가까울까? 우리가' 물질' 또는 '사물'이라고 쓰는 용어에 현혹되어 이 '물'자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서양의 '자연'은 물질이다. 그러나 노장의 물은 물질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다. 노장의 '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물의 본질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를 한자로 '自然'이라고 노자가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자연'을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의 용어인 '네이쳐'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을 뜻하는 '신'을 '신발'로 보면 안 되듯이. 노자가 '自然'이라고 한 표현을 장자는 '天'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곽상이 장자의'천'을 '자연' 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때의 '자연'은 '네이쳐'가 아니라 노자의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도의 본질성격이 스스로 그러함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본질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노장의 주장이다. 왜? 모든 존재자는 다 虛허하기 때문에. 즉 비워져 있기 때문에. 그러니 자연을 팔아먹는 모든 장자 번역책 잘못 것을 알 것이다. 장자를 왜곡하지 말라.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다 틀리다는 게 아니라 이런 중요한 부분은 분명히 알고 가려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이 책뿐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다음은, 역시 가장 많이 팔린 <도덕경, 오강남>에 대한 비판 부분입니다.
노자는 대자연에 대해 설교한 적이 없다. 자연을 말하지 않는다. 문명에 대해 말하지. 자연에서 살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어서 살라?
인간은 이미 자연의 순리에 따라 태어났다.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다. 뭘 또 자연에 맞추어서 사는가? 그렇게 안 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살기 싫어도 살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자연을 벗어나서 살고 있단 말인가? 1초라도 벗어나면 인간은 바로 사라진다. 아니, 벗어날 수가 없다. 죽는다는 현상도 자연 현상이므로.
노자가 자연을 찬양했는가? 찬양할 필요가 없다니까. 당신들은 공기를 찬양하는가? 하늘과 땅을 찬양하는가? 찬양할 필요없다. 찬양 안 해도 인간은 이것들과 더블어 살수밖에 없는 자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냥 살다가 가면 된다.
노자는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말 안 해주어도 자연은 그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알아서 자연의 순리대로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연의 하나이면서도 자연을 파괴하면서, 4대강 사업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인간이다. 노자는 자연이 아니라 문명에 대해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자에 있어서는 문명도 자연이다. 새가 집을 짓는 것도 문명이다. 이만하자, 당신들이 노자를 모른다면 당신들 책임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잘 알려주지 못한 것이 문제지. 이 한심한 현상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오강남의 번역과 해설은 다른 일반 번역서와 다름 없는 비전문가의 어설픈 왜곡이다.
이 외에도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표적으로 유명한(?) 번역본에 대한 오역의 지적 예입니다. (이외에도 부지기수로 많지만 아래 대표적인 책들만 소개) <도덕경> 노태준. 도의 본체? 이 표현을 보면 역자가 노자의 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도가 본체라는 말인가, 도에 대한 본체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다 틀렸다. '본체'라는 말이 서양의 실체론에 빠진 말이다. 도에는 본체가 있지도 않고 도가 본체도 아니다. 도가 본체일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도사상이다. 자연? 네이쳐 노자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지 네이쳐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살라? 이런 것은 노자사상이 아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장자의 도가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해 보인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런 서양스러운 용어로 표현하면 대단해 보일 것이다. (중략) 도가 과연 타자와의 소통인가? 타자와 우리가 소통을 하는 영역은 사회정치적인 공적 영역에서 일뿐이다. 타자와의 소통은 도가 가지고 있는 곁가지의 한 성격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곧 도는 아니다. 장자는 무아론을 말하는데 빈배 설화같은 것이다. (중략)나가 없는데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타자와? 타자도 무아상태라면 누구와? 그 누가 없는데 누구와 누가 소통을 하는가?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한 것은 정치영역에서 있다. 왜? 합의를 해야 하니까. 타자는 나와 다르기때문에 서로를 인정하든가, 결정을 하려면 합의를 해야 한다. 3, 4냐 4, 3이냐. 그럼 3.5로 합의하자라든가. 이게 조삼모사의 메세지인가? 조삼모사가 말하는 것은' 허' 불교용어로 '공' 이 바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어리석어서 그걸을 모른다. 알면 원숭이에서도 부처가 나왔을 것이다. 원숭이에겐 보통 인간 마음을 초월한 영혼수준은 높은 정신경지가 없다.
<노자 잠언록>, 보누스
노자에 관한 번역서가 많은 데 이런 책이 가장 짜증난다. 노자는 철학이다. 어떤 한철학, 관점을 가지고 81장을 번역하고 해설을 해야지 무슨 격언집처럼 아무 것이나 그때 그때 갖다 끼워넣는 식으로 해설을 하는가? 노자는 인생론을 위한 격언집이 아니다. 노자의 우주존재론과 정치철학을 알고 성인론을 이해하라. 이런 책은 종이낭비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노자의 정치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노자를 국가주의에 파묻친 사기꾼으로 만드는가? 노자는 원래 아나키즘에 가깝지 않았는가? 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노자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로 먼저 주어라라고 했다? 지금의 맑시즘을 자본주의가 있지도 않았던 노자에 갖다가 붙여 비판을 한다. 노자를 다시 읽어라.
<노자강의-김충렬 교수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나라 동양철학계에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장철학을 할려는 사람은 거의 다 이 저자 밑으로 가서 논문을 썻다. 이 사람의 동양철학에 대한 박학함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저자가 노자의 도를 알까? 글쎄....... 노자의 도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몇 구절 번역을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그 구절을 살펴 본 바로는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역시 방동미류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는냐 그것도 아닌것 같다. 이 저자 밑에서 쓴 박사논문을 다 읽어 봤는데 이를 지도한 이 책의 저자가 노장을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우리나라 노장계는 정말 정글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쪽의 큰 인물이 나온다면 이 책은 제외하고라도 노자, 장자의 허섭한 번역서가 이렇게 날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 노자-꼭 읽어야 할 인문고전 동양편4> 타임기획 호승희 역 청소년을 위해 노자를 읽히는가? 노자 도덕경은 청소년은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절대 읽히지 말라.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얘들이 읽어서 도움 받을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역자가, 출판사가 이 책 작업을 했단 말인가? 한마디로 노자를 모르는 자들이다. 노자를 알면 이런 기획 안 한다. 이 책뿐 아니라 청소년 시리즈에 노자, 장자를 넣는데 절대 넣지 말라. 있어도 얘들에게 읽히지 말라. 읽히면 오히려 독이 된다. 물론 읽혀도 전혀 모르겟지만. 만약 애들이 읽고 이해했다면 그건 잘못 안 것이다. 그건 절대 노자의 도가 아니다. 노자는 철학교수도 어려워 못 읽는 책이다.
<철학콘서트>
"도는 철학, 덕은 정치학" 노자 도덕경에 어디 이런 사상이 있는가? 도와 덕은 이런 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의 초보 같은데 뭐 이리 여러가지로 아는 체를 하는가? 다른 부분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나 똑 바로 알고 책을 써라. 개론이나 입문서는 오히려 철학의 해박한 대가들이 써야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번역된 노장에 관계된 책은 한권도 없느냐? 그렇지 안답니다. 장자에 대한 좋은 번역서는 없지만 제대로 된 도덕경의 번역서는 있다는 군요!
J님께서 추천하신 제대로 번역된 4권의 도덕경 (우리나라에서 도덕경을 제대로 풀이한 도덕경 전문 주석서)
- 심재원, 노자도덕경, 그 선의 향기, 정우서적. 감산덕청의 주석을 함께 완역하고 철학 설명을 해 놓았음.
- 임채우,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왕필의 주석을 완역.
- 최진석 정지욱, 노자의소, 소나무. 성현영의 주석을 완역.
-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 소명. 하상공의 주석을 완역. 각주 충실
어떤 분이 J님의 추천대로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읽었는데, 오강남 역본의 미진한 부분이 해결되었답니다. 저도 한 번 이들 책으로 유명한 도덕경을 제대로 읽어볼 요량입니다!
2021/12/15
Kang-nam Oh | 불교와 성경 1, 2
2021/09/15
Kang-nam Oh 탈종교화 시대의 종교 [종교 없는 삶] 필 주커먼
Kang-nam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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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종교화 시대의 종교
오강남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 명예교수)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탈종교화 현상이다. 이른바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전체적으로 전통 종교와 상관없이 사는 탈종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탈종교가 현재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현상인 셈이다.
종교 인구가 미미한 유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종교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미국에서 제일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church alumni association)’라고 했겠는가?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특히 10대에서 40대의 젊은 층,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탈종교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보고다.
왜 이런 탈종교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주된 이유는 현대인들이 기복이나 상벌을 기본 전제로 하는 종교에 더 이상 매료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최근에 낸 <종교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극락이나 천국, 지옥으로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종교는 이제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탈종교적 윤리(secular ethics)”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종교가 완전히 무용지물인가? 종교사회학자 뒤르켐(Durkheim)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사회심리학자 아라 노렌자얀(Ara Norenzayan)은 그의 책 <거대한 신들(Big Gods)>에서 한때 종교를 필요로 하는 시대,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수렵시대 이후 점점 인지가 발달되면서 사회관계를 넓혀 가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인간들의 행동거지를 감시하는 거대한 감시자(Watcher)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신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도 이런 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나 사람들이 있다. 그런 믿음이 인간 사회가 오늘의 수준에 올라오기까지 일종의 사다리 역할을 했지만 이제 상당 수 앞서 가는 나라에서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 없는 사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미국의 기독교 설교자들에 의하면 종교 없는 사회, 신을 믿지 않는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혼돈과 무질서, 범죄가 창궐하는 흑암의 사회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을 낸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안식년을 맞아 덴마크에 가서 1년여를 지나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범죄율이나 부패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신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들일 수록 번영과 평등, 자유, 민주주의, 여권, 인권, 교육 정도, 범죄 율, 기대수명 등에서 그만큼 덜 건강하다는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신을 가장 많이 믿는 이른바 바이블 벨트에 위치한 중남부 주들이 교육 수준이나 범죄율 등 여러 면에서 신을 가장 덜 믿는 서부와 동북부 주들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고 한다.
영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그의 책 <신의 역사>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미국이 유럽 국가들보다 도덕적으로 낙후한 것은 미국에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다.
주커먼은 전통적으로 받들어 오던 신을 믿고 종교적으로 열렬하게 살 때의 부작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의 주장을 보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그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칭 열렬하다는 근본주의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 한번 받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자연히 보수적이 된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모든 것을 흑백·선악 등 이분법적으로 보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지금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는 몇몇 종교인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일부 종교인들을 보라.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현 사회에서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이런 배타주의적 정신으로서는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다.
종교 없이 산다고 허무하게 살아야 하는가? 주커먼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실증적 자료를 통해 명확히 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종교가 없어도, 신이 없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어야, 신이 없어야’ 잘 산다는 것이다.
숨 막힐 정도의 전통적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면 삶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지금껏 당연히 여기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봄에 솟아나는 들풀 한포기, 바람에 나부끼는 잎 새 하나를 보고도 경이로움과 놀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의 일에서부터 광대한 우주의 ‘경이로운 신비(awesome mysteries)’를 하나하나 발견하며 외경과 환희와 황홀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아하!(aha!)’의 연속이다. 이렇게 종교를 넘어서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사는 삶의 태도를 저자는 ‘외경주의(aweism)’라고, 그리고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을 ‘경외주의자(aweist)’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에 절실한 ‘종교 아닌 종교’라는 것이다.
![](https://scontent.fadl6-1.fna.fbcdn.net/v/t1.6435-9/78727121_10156337656776581_5411105790150836224_n.jpg?_nc_cat=107&ccb=1-5&_nc_sid=730e14&_nc_ohc=1axxq68QqDEAX8NAnKQ&_nc_ht=scontent.fadl6-1.fna&oh=a326100b3ad7556a21e5569a1d3573de&oe=61689016)
283Namgok Lee, 박길수 and 2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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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범
개인적인 이해로는 탈종교화라는 표현 자체에 공감하는데, 그 의미로는 그 종교의 본질을 알고 완전히 겪어 드디어 벗어나는 것과 그것을 모르는채 감정적으로나 사회적 현상으로, 일종에 종교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은 개념으로는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탈종교화는 사실 그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 종교를 알만큼 알아 그야말로 졸업하는 것같은 의미여야 한다는 이해구요. 그러기에 부정적이긴 하지만 오늘의 그런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들도 그런면에서는 일종에 반면교사가 된다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곧 종교의 폐해같은 경우로 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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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욱
탈종교 사회는 괜찮은데 반종교 사회가 되면 위험할지도 ...
저는 평소 종교모임과 종교조직을 구분하는데,
전자는 아직 필요성을 긍정하는 편이고 후자는 부정하는 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종교적 모임과 종교적 조직이 다른 영향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또 일상적 대화에서 종교의 가르침, 가르침에서 파생된 교리, 교리에서 파생된 문화, 그 종교문화에서 파생된 특정 사회문화가 구분없이 너무 혼합되어 사용되는게 아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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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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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eop Kim
탈종교적 윤리(secular ethics)는 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온 영역에서의 윤리성 회복을 의미한다면 A. 카이퍼의 영역주권과는 연계될 수 없을까요?♡
![](https://scontent.fadl6-1.fna.fbcdn.net/v/t1.6435-9/s851x315/76189338_1677904462339425_456666087124107264_n.jpg?_nc_cat=103&ccb=1-5&_nc_sid=dbeb18&_nc_ohc=5f2OklwBi64AX-QMhxK&_nc_ht=scontent.fadl6-1.fna&oh=9e44d0ec63de167d47cfcefd71506c74&oe=6168D1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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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홍금선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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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n Soo Park
종교를 등에업고 자행되는 악행들,,,, 우리나라는 유래없이 1년 365일을 종교로 시작해서 종교로 끝을 맺습니다. 신년기도회~~송구영신예배, 그리고 매일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토요예배, 주일예배, 각종 성서세미나, 계절마다 부흥회,,, 종교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 사회는 우리를 “개독교”라 부릅니다. 어떻습니까?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입니까? 탈종교화라는 말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죠. 교회에서 종교에 파묻혀 예배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며 “주여주여” 불러보지만 이 말씀이 대답을 합니다. 진작 우리나라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자면서 남북이 만난 2018년 4월27 눈물나는(개인적으로 눈물이 핑돌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그 주 4월 29일 예배때 담임목사 설교에서 일언반구가 없다. 통일기도회는 열자면서 이런일에는 성도들의 관심과 애정을 그리고 소원을 함께 해야하는데... 동감은 아니더라도 공감이라도 해야하는데...
종교는 공감을 뛰어넘어 동감으로 가야하는데 공감조차 없으니 누군들 종교를 갖고 싶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탈종교화 된 서구 몇 몇 나라들이 더 따뜻하고 서로서로 돕고 아름답게 보이는데 당연히 탈종교화가 가속화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해야...”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를 갖지않는다고 종교가 없는것인가?
믿는 자, 믿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잣대가 종교의 유무로 판단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참 이웃의 비유도 있지않은가?
탈종교화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보다 종교생활(행함)이 되어야하고 신앙이 좋아보이는 것보다 신앙생활(행함)을 함으로써 탈종교화로 진짜 예수님의 성품 본질로 돌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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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호
아쉽게도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되고말았습니다 이땅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을 하늘로 되돌려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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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Julie Jeong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로 Aweist, Aweism 이라는 새 단어 (나에겐) 를 만났습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숨을 쉬고, 신진대사를 포함한 모든 몸의일을 미묘하게 진행하고있는 나의 몸둥이를 내려다 보면 "신비" 하지 않을수 없지요. 선악의 구별보다는 우리 자체가 "Awesome!!! " 하다고 인지 (Awareness) 한다면....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는게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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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See Sung Lee
종교없는 삶이 제일 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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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See Sung Lee
박진수! 오랜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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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Inkol Yu
거의 문맹이신 나의 할머님은 정규 교육을 받으신 적도 없으시고 절에도 다니시지 않으셨다.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베프시고 가난한 친척에게 도움을 주셨다.부엌뒤에 나무밑에 정화수 떠놓고 비시는것이 그분의 유일한 종교 활동이었다..그분에게는 스님도 목사도 절도 교회당도 경전도 필요치 않았다.그리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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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Doohee Yoon
오늘 아침에 종교와 신,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주신 양심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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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Kyung-eun Park
‘경외주의자(aweist)’ 라는 말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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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김 종희
신존재의 유무문제보다. 신의 계시ㅡ복음에 대한 해석과 태도가 문제가되어야 할것 같습니다.샬롬
복음=Evangelism(예수 천당) 일변도에서
복음=Missio Dei(J.P.IC)로의 파라다임 전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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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
노은기
탈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14살 중이처럼 피해의식에서 반항과 교만이 싹트는것 아닌가 사람은 자연과 순리에 순복 해야한다고 생각 합니다 오로지 주의 은혜로 잘 살았다 함이 없다면 평안이 올까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살아기자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