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무당.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무당. Show all posts

2022/07/29

‘신내림’은 영적 세계와의 만남 - 시사저널

화장기 하나 없이도 아름답기만 한 것을... - 시사저널

‘신내림’은 영적 세계와의 만남
 조흥윤 (한양대․종교인류학) () 승인 1991.01.17 

한국문화는 신명․신들림의 문화…내림굿을 서양의 잣대로 재면 곤란


 어느 무당이 집안에 꾸며놓은 신당에서 손님을 맞아 무꾸리(점복)를 한다. 어떤 문제로 찾아왔는지, 사주가 어떤지 묻고 엽전을 占床에 던지더니 갑자기 진저리를 치며 얼굴 모습이 달라진다. 그리고는 그 문제의  성격이 어떤 것인데 어찌어찌 하라고 일러준다. 무당의 집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이렇듯 신들려 무꾸리하는 것을 神占이라 하고, 그런 무당을 용하다 하여 많이들 찾는다.

 무당이 단골네 가족과 함께 굿을 벌이는 굿당에서도 신내림을 두루 볼 수 있다. 매 거리마다 그 거리를 주관하는 신령이 모셔진다. 무당이 해당 신령의 신복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돌연 “쉬이-”하며 멈춘다. 신이 내린 것이다. 그러면 祭家집 사람들은 신내린 무당 앞에 서서 손으로 비는 모습을 지으며 무당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신령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이것을 ‘空唱내린다’ 또는 ‘공수준다’고 한다.

 降神은 ‘신내림’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위에서 무꾸리와 굿의 경우를 들어 강신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강신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은 내림굿이다. 내림굿이란 신들린 사람을 무당으로 태어나게 하는 굿이다. 무당 후보자는 내림굿에서 자신에게 내린 신령의 이름을 밝히고 말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 신령을 무당의 몸주라 하거니와, 애기무당은 몸주의 도움으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신점을 보아준다.

 그밖에 굿하는 도중에 단골집안의 식구나 이웃이 굿판에 나와 신복을 입고 춤추는 대목이 있는데, 그때 격렬하게 춤을 추다 신이 내리는 수도 많다. 이는 비전문가의 신내림이라 할 터이고, 그에 비해 무당은 강신의 전문가인 셈이다. 그런데 巫의 이러한 강신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일제시대 때 한국巫 연구의 대가로 평가받아온 일본인 학자 아키바(秋葉륙)는 평양에서 22세 처녀의 내림굿을 관찰한 바 있다. 그녀가 미친 듯 뛰며 춤추다가 무거운 神항아리를 입으로 물더니 입술이 거기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키바는 강렬한 그 모습을 내내 잊지 못했다. 요즈음 무연구가들도 내림굿에서 무당 후보자가 요란스럽고 격렬하며 처절한 모습을 보여야 그것을 대단한 줄 아는 형편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큰무당’이 될 후보자는 대부분 점잖고 품위있는 강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1930년말 이래 오랫동안 시베리아 샤머니즘 연구가로 명성을 떨친 올마르크스는 샤머니즘, 곧 巫를 “북극의 히스테리”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혹독한 추위․식량부족․고립된 생활 등 생존을 위협하는 북극의 열악한 환경조건으로 인하여 신경증과 정신병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무당이라는 것이다. 강신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이해한 것이다. 뒷날 그는 그의 오류를 인정하고 “무당이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존재”라고 밝혔다. 실제로 무당들은 신내림과 정신병을 엄연히 구분하고 있다.

무당은 가장 정상적인 인간”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양 문화의 눈으로 보면 무와 강신현상은 처음부터 마귀의 장난이자 원시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의 안목을 그대로 본받아 신내림을 ‘서양의 잣대’로 재서는 곤란하다.

 강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와 무당에 대한 오해․편견 따위를 버려야 한다. 무는 귀신을 섬기는 원시종교가 아니라 조상과 영적 세계를 믿고 신령과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종교이다. 무당은 그 종교의 사제에 다름 아니다. 강신은 영적 세계와의 어떤 교류가 되는 것이다. 종교학의 용어를 빌자면 바로 종교체험이다. 어느 종교나 그런 종교체험이 그 종교문화에 걸맞게 일어나고 있다.

 예로부터 무를 신봉해온 한국문화는 신내림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문화의 모든 면모에는 신들림이 역연하고 한국사람에게는 신명이 대단하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상황에서는 신내림과 신명이 온전히 살아나지 못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인간의 창조적․조화적 역량의 개발이 요구되는 시대에 맞는 강신의 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조흥윤 (한양대․종교인류학)
다른기사 보기

2022/07/23

명분론(名分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실론(名實論)

명분론(名分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분론(名分論)

유교개념용어

 올바른 기준[名]으로 분별[分]해야 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명목과 그 명목에 합당한 본분을 갖추어야 한다는 일반용어.   

===
이칭
정명론
분야
유교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올바른 기준[名]으로 분별[分]해야 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명목과 그 명목에 합당한 본분을 갖추어야 한다는 일반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초기의 사용
‘명분’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로 보인다. 『장자 莊子』 천하편에서는 유교 경전의 특징을 지적하는 가운데 “『춘추』는 명분을 밝힌다.”고 하여, 『춘추』의 기본 정신이 명분을 밝히는 데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명분은 유교에서만 쓰고 있는 용어는 아니다. 『관자 管子』에서는 “관직을 정하고 명분을 밝혀 신하들과 담당자에게서 책임을 살핀다.”고 하여, 명분이 관리의 직책에 따른 책임과 연관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시자 尸子』에서는 명·분이라는 두 글자를 분석해 설명하면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면 ‘분’이 이루어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으며 ‘명’이 정해진다.”고 하여, 다스리는 방법은 분별[分]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분별의 올바른 기준은 명목[名]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상자 商子』에서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 저자에 가득하지만 도적이 감히 빼앗지 못하는 것은 명분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고 하여, 명분이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며 행위를 규제하는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명분은 특히 사회적 질서와 연관되는 인간의 직분이나 행위의 규범으로서 유교뿐만 아니라, 선진시대 제자백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용어이다. 명분이 특히 유교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명분의 개념은 공자(孔子)의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상통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는 정치를 하는 데 반드시 ‘정명’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명’은 명분을 의미하며, 정명은 ‘명분을 바로잡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명의 마땅한 근거를 설명하면서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서가 없게 되고, 말이 순서가 없으면 일이 실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명분의 의미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안연편)는 공자의 말에 담긴 뜻과 일치한다.
명분을 바로잡음이 실지로 일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은 명분이 실지와 마주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분(또는 명목·명칭·말 등)과 실질을 일치시키는 것은 명실론(名實論)의 문제로서 논의된다.

명실론에는 개념적 언어와 실제의 대상을 연관시키는 인식론적 내지 논리적인 입장의 명실론과 이와 구별된 규범적인 명분과 구체적인 현실의 일치를 추구하는 명실론이 제기된다. 명분이 실질과 만나지 못하면 공허한 명분이 되고 말 것이며, 실질은 명분을 만나지 못하면 그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분론의 유교적 전개
유교는 인간 관계의 도덕적 질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에 따른 사회제도적 규정을 하고 있는 만큼 명분의 개념은 특히 유교에서 적극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제시되고 있다.
  1. 1. 강상론과 명분
    공자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라고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에 따른 본분의 명분 개념은 봉건적 신분 제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주나라의 봉건계층으로서 천자·제후·경(卿)·대부·사·서인의 오복제도(五服制度)에서는 각 신분계층이 의복·수레·의례 등 온갖 분야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분수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참람하다는 도덕적 비난과 함께 죄를 입기도 한다.
    『맹자』에서는 순임금이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아 가르치게 한 인륜의 조목으로서 이른 바 오륜인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제시하고 있다.
    『서경』 순전편(舜典篇)에서 보이는 5품(五品) 또는 5교(五敎)가 바로 오륜이다. 오륜에서 보이는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및 붕우는 인간 관계 속에서 한 인간이 가지는 명목이며, 이러한 명목은 각각 친·의·별·서·신의 실천해야 할 본분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오륜이 바로 중요한 명분론적 규범 체계로 나타난다. 오륜은 유교적 도덕 의식에서는 최고의 보편적 규범인 강상(綱常)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 강상은 명분의 기본 조건이며 중대한 조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륜의 강상을 지키는 것은 바로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지만, 강상의 규범을 위배하는 것은 명분을 어그러지게 하는 일이다. 명분은 봉건 계층적 질서나 인간관계의 도덕 규범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 반해 노장철학의 자연주의적 입장에서는 인위적인 규범 형식에 사로잡혀 자유로움을 상실한 상태로 비쳐진다.
    『노자』에서는 “이름이 없는 박(樸)은 하고자 함이 없을 것이며, 하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고요하면 천하는 저절로 안정할 것이다.”고 하여, 명목으로 분별될 수 없는 ‘박’의 무위(無爲)를 내세우고 있다.
    『장자』에서도 “성인은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 천균(天鈞)에서 쉬니, 이것을 양행(兩行)이라 한다.”고 하여, 시비선악의 분별을 떠난 자연의 조화 상태는 하나의 명분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이 병행하는 것을 말한다.
    명분 개념은 사회적 인간관계의 당위적 규범이라는 점에서 인위적인 가치 판단을 넘어서서 분별이 없는 자연에로 돌아가려는 노장사상과는 정면의 대립적 입장을 피할 수 없다.
  1. 2. ≪춘추≫와 ≪주역≫의 명분론
    명분론은 장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춘추』의 기본 정신을 이루고 있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도 있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도 있으니 공자가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하여, 신하나 자식이 본분을 어기는 심각한 혼란을 경계하기 위한 명분론적 관심에서 저술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맹자는 『춘추』와 같은 역사서술을 통한 포폄은 천자의 일임을 지적하면서, 공자 자신이 “나를 알아주는 자도 『춘추』요, 나를 죄 줄 자도 『춘추』이다.”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그것은 공자가 천자의 고유한 본분인 포폄의 일을 행함으로써 그 자신이 명분에 어긋나는 죄가 있음을 고백한 것이라 이해된다.
    미언대의(微言大義) 내지 춘추대의(春秋大義)라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공자가 『춘추』에서 보여준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서 명분론을 역사 평가에 관철한 것이다. 동중서(董仲舒)도 “『춘추』는 사물의 이치를 판별하여 그 명분을 바루는 것이다.”라 밝히고 있다.
    『춘추』가 명분론의 역사적 적용이라 한다면, 이에 비해 『주역』에서는 명분의 근본 원리가 제시되고 있다. 『주역』 계사전의 첫머리에서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乾)과 곤(坤)이 정해지고, 높고 낮음이 베풀어지니 고귀하고 비천함이 자리잡는다.”고 말한다.
    그 말은 우주론적 질서로서 하늘과 땅을 높고 낮은 것으로 인식하며, 이에 따라 인간 사회의 질서인 고귀하고 비천함이 상응해 있음을 의미한다. 봉건적 신분 질서의 고귀함과 비천함이나 남녀의 상호 관계를 존귀하고 비천한 것으로 파악하는 등 다양한 차등 현상은 명분론적 정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명분론적 정당성은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으로 파악하는 우주론적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와 함께 『주역』 이괘(履卦)에서는 “군자는 위와 아래를 분변해 백성의 뜻을 안정시킨다.”고 하였다.
    여기서 ‘아래와 위를 분변한다.’는 말은 바로 봉건적 신분 사회의 명분론이 지니는 핵심적 형식인 것으로 지적된다. 유교의 명분 개념이 봉건사회의 사회 질서와 규범 체계의 기본성격인 계층적이고 상하적인 차별성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분론이 봉건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명분론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적 분별을 하는 것은 분별을 통한 질서의 조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명분의 상실은 사회적 혼란인 동시에 우주적 혼돈을 의미하게 된다.
  1. 3. 순자(荀子)의 명분론
    공자의 정명사상을 거쳐 맹자에 의해 강상론적 규범으로 제시된 명분론은 순자에 이르면 더욱 구체적이고 명확한 인식으로 나타난다. 순자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근본적 차이는 두 발로 걸어다니거나 몸에 털이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별하는[辨] 능력’에 있는 것으로 지적한다.
    생물적인 부모와 자식이나 암컷과 수컷은 실제로 인간과 동물의 양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인간만이 부모와 자식이 친밀하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며 위와 아래를 구별할 수 있다고 본다. 순자는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서 구별 능력을 확인함으로써 명분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명분은 위와 아래를 분별하고 친밀함과 소원함을 분별하는 등 분별능력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분수[分]’ 곧 위와 아래나 친밀함과 소원함의 분수라 보고, 분수는 의리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순자』에서는 “사람의 도리는 구별보다 큰 것이 없고, 구별은 분수보다 큰 것이 없으며 분수는 예법보다 큰 것이 없고, 예법은 성왕(聖王)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다. 곧 인간질서를 형성하는 구별의 원리는 분수이며, 분수의 근거는 예법임을 지적한다.
    그는 또한 분수란 예법과 함께 의리에 근거해 구현되는 것이라 하여 분수와 예의를 연관시켜 파악하고 있다. 순자는 인간이 욕망에 따라 서로 다투는 데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현실 사회의 근본 문제로 밝힌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수를 확립할 것을 주장한다.
    “성왕은 예의를 제정하여 분수를 드러냄으로써 부귀하고 비천함의 등급, 어른과 아이의 차별,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및 유능함과 무능함의 분별을 확립한다.”고 한 그의 말에서 그의 명분론적 규범이 구체화된 형식을 볼 수 있다.
  1. 4. 도학의 명분론
    선진시대의 명분론은 송나라 때 도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인 쟁점이 부각되고 역사적인 이해에 철저히 적용되었다. 도학자들은 사서(四書)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특히 『맹자』를 정통으로 인정해 13경(經)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여기서 맹자의 혁명론을 명분론적 입장에서 찬성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마광(司馬光)은 임금과 신하의 분수(君臣之分)를 인륜의 최고규범으로 절대화해 맹자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혁명을 정당화하는 혁명론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강지(江贄)의 『통감절요 通鑑節要』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마광의 명분론은 “천자의 직책은 예법보다 큰 것이 없고, 예법은 분수보다 큰 것이 없으며, 분수는 명목보다 큰 것이 없다.”고 제시된다. 여기서 예법은 기강(紀綱)을 의미하며, 분수는 임금과 신하의 분수요, 명목은 공(公)·후(侯)·경·대부의 명목을 의미한다.
    사마광의 「의맹 疑孟」과 이구(李覯)의 「상어 常語」도 명분론적 입장에서 맹자를 비판한 대표적 저술이다. 이구는 공자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하도록 요구한 데 비해 맹자는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이와 달리 여윤문(余允文)은 「존맹변 尊孟辨」을 저술해 맹자를 옹호했고, 주희(朱熹)는 「독여은지존맹변 讀余隱之尊孟辨」에서 여윤문의 글을 수정 보완함으로써 맹자를 변호하였다.
    사마광과 이구가 임금 중심의 명분론을 내세운 데 비해, 주희는 백성과 천명이 명분의 상위에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서 민본사상과 천명사상을 명분론과 조화시키고 있다.
    명분론을 지배자 중심의 권위주의 논리로 전개한 사마광과 명분론을 천명론의 하위 개념으로 보는 주희 사이의 명분론에 관한 논란에서 주희의 도학이 맹자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분론의 양상
명분은 인간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 합당하게 지켜야 할 분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상응하는 다양한 명분을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명분은 인간의 당위적인 행동 절차로서의 예법과 연관되고 있다. 예법은 한 인간이 구체적 인간 관계 속의 처지, 곧 분수에 상응하는 행동 규범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예법을 확립함으로써 명분을 실현하고 동시에 사회적 질서를 확보하게 된다.
예법과 사회 질서의 다양한 차원에 따라 명분의 성격도 다르게 나타난다. 명분의 양상을 크게 구별해보면, 봉건적 사회 질서인 ‘신분적 명분’을 비롯하여, 도덕적 내지 법률적 정당성에 따르는 ‘명목적 명분’, 상황에 대처하는 개인적·선택적 행위로서 ‘처세적 명분’, 강상론적 신념을 생명을 바쳐 지키는 ‘절의적(節義的) 명분’, 국가 체제나 국제 질서의 정치적 정당성으로서의 ‘대의적(大義的) 명분’ 등 다섯 가지로 제시해볼 수 있다.
  1. 1. 신분적 명분
    세습적 신분 제도는 봉건적 질서로서 명분의 기본 조건으로 인식된다. 천자·제후·대부·사·서인 등 오복 제도의 분수를 더욱 세분하면, 대부와 사는 다시 각각 상·중·하의 3등급으로 나뉘며, 사대부(양반)도 다시 문반과 무반으로 나뉜다.
    조선사회에서는 양반·중인·양인·천인 등 네 가지로 신분을 구분하였다. 여기에 더해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엄격히 나눈다. 신분을 더욱 세분화시켜서, 백성을 사·농·공·상, 곧 사민(四民)으로 나누거나, 조선 후기에서는 사대부의 유학(幼學), 중인의 교생·허통·공생, 상인(常人)의 백성·공천·사천·재인·백정의 9등급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천인에서도 노비·기생·상여꾼·혜장·무당·백정 등 칠천(七賤)이 구별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신분적 조건에 따라 자신의 당위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되며 그것이 바로 명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명분을 어기는 것은 자신의 역할과 신분적 사회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중대한 비판을 받게 된다.
    하위의 신분에 있는 자로서 상위의 신분에 저항하는 행위는 반역[逆]으로 규정되어 비난과 징벌이 가해지고, 복종하는 행위는 순응[順]으로 규정되어 상을 받는 신분적 지배 질서가 확립된다. 이와 같이 신분 질서가 명분적 정당성을 부여받음으로써 명분은 엄격한 신분적 한계를 규정하는 원리로 적용된다.
    신분에 따라 착용하는 의복이 다르고 의례절차나 행동양식이 다르며, 심지어 언어도 신분에 따라 다른 신분적 한계의 온갖 제약을 명분으로 강화시킨다.
  1. 2. 명목적 명분
    일에는 그 일의 실제와 목적으로서의 명목이 구별될 수 있다. 또한 그 일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실리와 도덕적으로 마땅하거나 법률적으로 합법적인 명목이 구별될 수 있다. 여기서 명분은 실제를 인식하거나 실리를 획득하기 이전에 그 목적과 정당성의 명목을 확인시켜준다.
    실제는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명목은 항상 완전한 상태로 제시된다. 실제가 아무리 여러 가지 요인에 뒤얽혀 있더라도, 명목은 항상 가장 단순화되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요소에 얽혀 있는 실제를 명목에 맞도록 이끌어가고자 하는 요구가 바로 명분이다.
    학생은 그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아닌지의 실제적 상태와 상관없이, 공부하는 것이 학생이라는 명목에 비추어 공부해야 한다는 명분적인 요구를 받는다.
    선비는 배가 부르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명목이 있을 때 그가 아무리 배가 고프고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더라도 상 위의 음식을 조금이라도 남겨놓아야 한다는 의식은 실리적 판단이 아니라 명목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리적 효율성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그 도덕적 정당성과 법률적 적합성의 명목을 찾아서 이를 근거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명분론의 형식이다.
  1. 3. 처세적 명분
    한 개인이 정부의 관직에 임용되거나 사회에서 일정한 직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 정부와 사회 기관의 정당성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이 없다면, 자신이 활동하는 공공기관의 정당성 여부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그 기관이 부당함을 알고서도 참여한 것이 된다.
    부당함을 알고서도 참여했다면 부도덕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고, 정당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무시했다면 실리적일 수는 있겠지만 명분적인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한 인간이 자신의 정당성을 온전하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행위의 동기를 정당하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동하게 될 환경의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한 의사가 아무리 객관적인 의학 지식에 따라 의술을 시행했다고 해도 불법 단체에서 행한 의술이라면, 그 정당성을 온전하게 확보하기는 어렵다. 한 사회의 이념적 정당성에 비추어볼 때, 어떤 정부나 사회단체가 부당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 속에 참여해 권력과 이익을 향유했다면 이러한 태도는 처신의 명분적 정당성에 크게 위배된다.
    따라서 인간은 당면한 사회적 조직에 대해 처신하는 방법으로서 그 조직이 정당하면 나아가서 참여하고, 부당하면 그 조직을 정당하게 개조하기 위한 투쟁을 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조직을 떠나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명분론의 처세적 원리이다.
  1. 4. 절의적 명분
    명분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정당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정당성의 전통적 기본 규범은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강상론으로 인식되었다. 강상의 가장 큰 조목은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사이의 규범이다. 이러한 강상의 규범은 인륜(人倫)이요, 천륜(天倫)이다.
    인륜이기에 인간이 인간노릇을 할 수 있는 근본 조건이요, 천륜이기에 인간이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에게 부여된 절대적 명령이다. 충(忠)·효(孝)·열(烈)의 덕목은 일상적인 행동 규범으로서 실천되는 것이지만, 이 규범들의 실천이 중대한 위기를 만나게 되면 생명을 바쳐 이 규범들을 지키도록 요구된다.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하거나 왕위 찬탈의 위기를 당했을 때 생명을 바쳐 이를 막는 것은 명분에 합당한 순절(殉節)의 의리이다. 만약 이 위기를 막지 못하면 마땅히 침략자나 찬탈자에게 저항하며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 절의를 지키는 길이다.
    부모에 효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게 되는 극단적 상황은 너무 특수해 크게 문제삼지 않으나, 특히 부인이 남편을 위해 생명을 바쳐 정절을 지키는 경우는 전통 사회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절의적 명분 의식이다. 나라를 지키다 생명을 잃는 순국(殉國)이나 진리를 옹호하다 생명을 잃는 순도(殉道)는 역사 속에서 가장 추존되어온 절의적 명분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1. 5. 대의적 명분
    ‘춘추대의’의 개념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국가의 기본 체제나 국가 간의 질서는 가장 범위가 크고 중대한 문제이므로 대의(大義)로서 명분적 규범이 되고 있다.
    춘추시대에서는 봉건적 체제를 그 나라와 세계가 지켜야 할 최고의 정당성으로 받아들였으며, 오늘날 사회 체제의 기본 원리를 이루는 민주주의는 우리 시대의 대의적 명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의적 명분은 한 사회에서 가장 광범하고 근본적인 중대한 규범을 이루는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대의적 명분이 구체적인 작은 명분들과 상충을 일으키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만약 어떤 대의적 명분이 구체적인 명분들과 상충될 때는 마땅히 이 대의적 명분을 우선시켜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한 국가나 사회 체제의 정치적 정당성은 다른 모든 구체적 문제들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에서 대의적 명분으로서의 비중을 지닌다. 일상 생활에서 ‘대의명분’을 일컫는 것은 다양한 명분의 형식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대의명분은 꼭 국가나 국제 사회의 체제와 연관된 정당성이 아니더라도, 구체적 사건에서 성립하는 다양한 작은 명분들을 넘어서 성립하는 정당성으로서 가장 일반성을 지니고 비중이 큰 명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분론적 인식의 전통
우리 나라의 전통 사회는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많은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명분론적 가치기준을 적용했던 풍부한 사례를 많이 지니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유학의 이론적 인식수준이 높아지면서 명분론에 관한 체계적 주장을 하거나 논설을 저술한 경우가 상당수 보인다. 명분론적 이해의 전통을 삼국 및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크게 나누고 명분론의 이론적 인식을 별도로 소개하였다.
  1. 1. 삼국·고려시대의 명분론
    중국의 사료인 『위략 魏略』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전국시대에 연(燕)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조선을 침공하자 조선도 왕이라 칭하며 연나라에 반격하면서 ‘주(周) 왕실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반격 이유를 제시하였다 한다.
    이것은 삼국시대 이전 우리의 고대 국가가 침략자를 방어하는 명분을 춘추대의로 인식되는 존주론(尊周論)으로 제시한 것이다. 삼국시대는 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이 빈번한 시기였던 만큼 충성과 용기의 규범에 근거한 절의적 명분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동시에 신분적·권위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 정당성을 지닌 명분이 사회질서의 건전한 기초로 작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유리왕이 이웃 황룡왕에게 힘을 과시한 일을 책망하고 자결하라는 명령을 전하는 사신을 태자 해명(解明)에게 보내자, 태자는 “부왕이 나를 불효자라 하여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시니 어찌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 있으랴.” 하면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결하였다.
    여기서 아버지의 명령을 절대적인 대의명분으로 지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는 재상에 임명되었을 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둔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고 밝힘으로써 선비가 한 시대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처세적 명분을 제시하였다.
    고구려의 평강공주(平岡公主)는 어릴 때 부왕이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희롱했던 일에 대해서,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임금님이겠습니까. 그래서 ‘임금은 희롱하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고 말하며, 부왕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절하였다.
    대의명분에 따라서 임금의 명령이며 아버지의 명령도 거절하는 확고한 명분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도가사상의 격언이 매우 유용한 명분적 규범으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시에서 “넉넉한 줄 알진대 그만둠이 어떠리(知足願云止).”고 하였다.
    또한 백제의 근구수왕이 태자 때 고구려의 군사를 추격하는데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노자』의 말을 인용해, “넉넉한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知止不殆).”고 한 간언에서도 전쟁터에서 진군을 정지시키기 위한 명분을 발견할 수 있다.
    백제의 성충(成忠)이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해, “충신은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고 하면서 방어 대책을 진언한 것은 국가의 위기에서 신하의 절의적 명분을 밝힌 것이다.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은 “임금이 근심스러우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는다.”는 말을 신하의 대의명분으로 삼아 위난에 뛰어들었으며, 일본 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신라의 짐승이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주장하다가 죽음을 당해 절의적 명분을 실천하였다.
    『논어』에서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겠다.”는 공자의 말은 신라의 죽죽(竹竹) 등 청년 장수들이 전쟁터에서 후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전사하는 절의적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신라의 장수 김흠춘(金欽春)이 전쟁터에서 아들 반굴(盤屈)에게 “국가의 위기를 당해 생명을 바쳐야 충성과 효도 양쪽 모두를 온전하게 이루게 된다.”라고 한 훈계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규범과 가정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의 규범이 전쟁터라는 구체적 상황에서 상충할 때 지켜야 할 절의적 명분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고려 성종 때 거란이 침략해왔을 때 거란장수 소손녕(蕭遜寧)과 고려의 서희(徐熙)의 담판에서도 명분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할 권리의 정당성을 명분으로 삼았을 때, 서희는 고려라는 국가의 명칭에서 고구려 계승의 명목적 명분을 삼고 있음을 밝혔다.
    역사적으로 국가 간의 외교적 교섭이나 군사적 갈등에서 가장 우선하는 쟁점은 명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14세기 말엽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하는 시기에 고려 말기의 정부 안에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한 것은 국제 질서에 대한 명분론적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유학자들에 의해 친명파의 대의적 명분론이 뒷받침되었다.
  1. 2. 조선시대의 명분론
    조선시대에는 도학이 융성하게 발전하면서 강한 의리론과 정통성을 내세웠다. 그만큼 명분론에서도 절의론의 정당성과 함께 국제 질서 속에서 ‘존화양이’의 춘추대의를 내세우는 대의적 명분론이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서 강력하게 제시되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왕조의 창업은 명분론적으로 중대한 쟁점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의 창업을 명분론적 입장에서 혁명으로 규정해 정당화시켰지만, 고려 말기 상당수의 관료들은 강상론을 내세워 절의적 명분을 실천하였다.
    혁명론자는 조선왕조에 적극 참여해 활동하지만 강상론자는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켜 자결하거나 은둔함으로써 조선왕조를 거부하는 상반된 행동 양상을 보여주었다. 조선 초 태조부터 태종 때에는 혁명론적 명분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에 비해 세종 때에는 한편으로 「용비어천가」를 짓는 등 혁명론적 명분을 강화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면서 충신의 항목에 조선왕조의 창업 공신들을 제외시키고, 조선왕조에 항거하거나 협력을 거부한 절의파 인물인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를 수록하고 있는 사실에서 강상론적 명분을 제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른바 창업기(創業期)를 지나서 수성기(守成期)에 접어들면서 조선 사회 안에서 명분론의 중요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세종 이후에는 강상론 내지 절의론이 명분론의 기준으로 확립되었다.
    혁명론과 강상론의 명분론적 대립은 조선 사회 전반기에서 중요한 정치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훈을 존중하고 대대로 정부에 중요한 관직을 맡아서 정치 세력을 형성한 훈구파와 절의를 숭상하며 도학적 수양에 힘쓰는 사림파로 양극화되어 첨예한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어린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주 01)이 선양(禪讓)을 표면의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에 대해, 왕위 찬탈에 협조하고 세조의 조정에 나가서 관직을 지낸 인물들의 현실론적 명분과 왕위찬탈에 항거해 복위를 꾀하다가 희생당한 사육신이나 세조의 조정에 나가기를 거부한 생육신 등의 결의론적 명분은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정몽주에서 길재를 거쳐 사림파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해 비난하는 「조의제문 弔義帝文」이라는 시를 지었다.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그 시를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마침내 수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무오사화를 초래하였다.
    사림파의 선비들이 지속적으로 절의론적 명분을 명백하게 제시하는 데 비해, 훈구파의 관료들은 현실론적 명분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명분론의 도덕성이 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훈구파가 권력의 힘을 빌려 선비들을 제거하는 참혹한 사화를 잇따라 일으킨 것도 사실상 명분의 허약성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데서 발생한 현상이다.
    조광조(趙光祖)는 중종반정의 공신들 가운데 공신의 명목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을 심사해 거짓 공훈을 삭탈하는 작업을 일으켜 명분을 바로잡음으로써 사회 기강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임금이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 변경을 노략질하는 여진족 추장을 잡기 위한 군사의 출동을 반대한 사실도 조광조가 군사적 전술보다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광조가 군자와 소인을 엄격히 분별하고, 의리와 이욕을 예리하게 나누고 있는 것도 명분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림파의 선비들은 선조 이후 실제로 정치를 담당하면서 스스로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며 붕당을 형성하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서로를 소인이라 비난하는 당파적 분열은 명분의 엄격성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적용시키는 데서 오는 폐단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던 사건은 명분론적으로 중요한 쟁점을 일으켰다. 병자호란에 임금과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에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홍익한(洪翼漢) 등은 화친을 거부하고 임금과 신하가 성을 지키다 함께 죽을 것을 요구하며,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불의한 침략자에게 항복할 수 없다는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최명길(崔鳴吉) 등은 침략자들에게 항복해 신하로서 섬기더라도, 화친을 맺어서 백성의 희생을 줄이고 나라의 명맥을 보존하자는 주화론(主和論)을 내세웠다. 그 당시 몇 차례 번복을 하다가 마침내 항복함으로써 주화론이 채택되었다.
    이때 척화론을 주장하던 김상헌과 척화 삼학사(三學士) 등은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면서 끝까지 대의적 명분을 내세우고 절의를 지켰다. 주화론이 실리론적 입장에 선다면, 척화파는 의리론적 입장에 선다. 척화의리는 중화(中華)와 야만[夷狄]을 엄격히 분별하는 대의적 명분론에 근거하고 있다.
    중화의 문화를 자부하는 조선 사회는 청나라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해 존화양이론 내지 존왕천패론의 춘추대의를 응용한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을 제기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로 배청 의식은 춘추대의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대의적 명분론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효종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당시의 도학자들은 배청론을 북벌론(北伐論)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도학자들의 배청론에 나타난 대의적 명분론은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등 북학파 실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비판을 받았지만, 이 시대의 이념으로 확립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서양과 일본의 무력침략이 가중되자 조선왕조의 문화적 자각과 더불어, 서양을 야만적 오랑캐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척양론(斥洋論)·척왜론(斥倭論)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도 존화양이의 춘추대의를 시대에 적용시킨 명분론적 인식이다.
    일본의 무력 위협 아래 개항한 이후, 정계는 서양문물을 수용하려는 개화파와 전통문화를 수호하려는 수구파로 나뉘었다. 이에 따라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보수와 진보의 명분론적 입장이 양극적으로 대립을 보였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가 붕괴되고 중국 중심의 천하관이 해체되며, 평등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추구하고, 실용성과 능률성이 존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구파의 대의적 명분론이 지닌 형식은 비현실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사대주의적 예속으로 비판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의병운동으로 항거하거나 일본의 통치 정책을 거부해 일본의 국권찬탈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수구파의 명분론적 전통에 근거한 신념에서 발생했음을 본다. 명분론의 양상은 시대와 가치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느 시대에서나 그 시대의 명분이 없을 수 없으니 명분 의식은 한 사회의 체제와 도덕 의식의 기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분론의 이론적 이해

명분론적 신념과 실천은 일찍부터 강하게 나타났지만 이론적 이해를 보여준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들 사이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항의로 관직에 나가기를 버렸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은 「명분설 名分說」이라는 논설로써 명분론적 인식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명분의 명(名)은 천자·제후·공경·대부 등 신분적 명목이요, 분(分)은 상하와 존비 및 귀천의 분별을 말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그는 명분을 예절과 연결시켜서 파악해, 명분이 있어도 예절이 없으면 기강과 법도를 지킬 수 없어서 명분도 공허한 도구에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명분의 상하분별에서 위와 아래의 관계를 머리·눈에 대한 손·발의 관계나 가지·잎에 대한 줄기·뿌리의 관계에 비유해 유기적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명분론적 이해는 전반적으로 『주역』을 통해, 천지가 명분을 결정하는(定名分) 우주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춘추』를 통해 성인이 명분을 닦고(修名分), 역사서에서 명분을 바로잡는(正名分) 역사적 행적을 검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명분과 기강의 연관성에 대한 인식은 특히 근세에 활동하던 여러 유학자들의 논설에서 자주 보인다. 한 예로 한말의 유학자 이병규(李秉珪)의 「시무요의론 時務要宜論」에서는 그 첫머리에 “명분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운다(正名分而立綱紀).”는 요목을 들고 있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정명사상을 명분의 기본 문제로 확인하며, 나아가 “명분이 문란하면 기강이 무너지고, 따라서 나라도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밝히고, 당시 국가존망의 위기를 해결하는 최우선의 과제도 “명분을 범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비해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에 따른 대의명분을 주목해 두 영역이 각각의 질서에 따라 영역을 지키는 것을 명분의 정신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이황(李滉)은 「걸물절왜사소 乞勿絶倭使疏」에서 군신·상하를 분별하는 명분이 없는 것을 오랑캐라 규정하고, 중화와 오랑캐 사이의 대의명분을 혼동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그는 오랑캐인 왜(倭)를 예의와 명분의 도리로써 나무라는 것은, 짐승을 독려해 예법과 음악을 행하게 하는 일이라 하고, 짐승의 경우처럼 그 본성을 거슬러서 물어뜯기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그는 분별을 지키지 못하는 오랑캐에게 명분을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오랑캐에 대응하는 외교적 원칙을 제시하였다.
17세기 후반의 이보(李簠)는 명분이 안정하지 않은 데 따라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넘보며,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상하의 분별이 없어서 예법이 행해지지 않는 국가적 혼란의 현실 상황을 지적한다.
그는 상하를 분별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이에 따라 명분의 존중을 국법으로써 엄중히 지켰던 사회적 성격을 확인한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이(李珥)에 의해 서얼(庶孽)이 관직에 나가도록 허용된 이후로 신분의 분별이 무너지기 시작한 현실을 제시하면서, 명분의 은폐가 민심의 불안정과 정치의 침체에 연관된다는 체제적 성격을 강조한다.
실학자들 사이에도 도학의 정통주의적 명분론을 비교적 긍정하는 인물이 있다. 안정복(安鼎福)은 『주역』 이괘의 상하를 분별해 민심을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명분의 기본 원리로서 재확인한다. 그는 명분의 분별은 인간의 판단에 따르는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이치이며 불변적인 분수가 있다고 본다.
그는 명분과 실질을 연결시켜서,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실지에 힘쓰는 것이라는 말을 확인한다. 나아가 그는 『춘추』에서 이른바 명칭[名]과 도구[器]는 명분의 두 가지 장치로서 임금이 맡아서 정치를 하는 기본 방법임을 지적한다.
여기서 명칭은 작위로서 신분의 상하를 분별하는 명분이며, 도구는 신분에 상응하는 거마와 의복 등을 갖추는 예법을 의미한다. 이규경(李圭景)도 「기강명분변증설 紀綱名分辨證說」에서 기강과 명분이 없으면 삼강오륜의 도덕이 무너질 것이라 하여, 기강과 명분이 서로 연관되며 동시에 도덕규범의 근거가 됨을 밝히고 있다.
그는 국가의 존립이나 인간의 존재의미도 이 명분에 있는 것이라 지적하고, 또한 말의 고삐나 배의 키에 비유해 기강과 명분을 잃으면 사회제도가 혼란에 빠지거나 뒤집힐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비해 정통주의적 명분론을 새롭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논의하는 실학자들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신분적 명분론을 비판해 「서얼론」에서는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는 서얼차별의 명분론을 비판하고, 서얼의 벼슬길을 막을 것이 아니라 정승도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통색의 通塞議」에서는 신분과 지방과 적서의 차별을 철폐해 인재 선발을 하도록 요구한다.
「탁발위론 拓跋魏論」에서는 화이론적 명분론을 비판해 오랑캐란 ‘임금이 임금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노릇 못하는 상태(臣不臣 君不君)’라 정의해, 오랑캐나 중화가 불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요, 명분을 실천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중화도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될 수 있고 오랑캐도 중화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신분론과 화이론의 변화는 명분론의 변화를 초래하며, 동시에 명분론의 변화로 신분 의식과 화이론이 바뀐 것도 사실이다. 북학파 실학자인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이 하늘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라면, 화이론은 인간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라 비판하면서 화이론을 부정하였다.
박지원은 「양반전」·「호질」·「예덕선생전」 등 소설에서 신분적 권위 의식과 명분론을 풍자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명분론은 도학의 정통주의적 입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강조되었고, 근세의 실학파에서는 과감하게 비판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명분관의 성격과 한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지녔던 전통적 명분관은 기본적으로 신분 질서나 상하 의식에 따라 각각의 분수를 지키도록 규정해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는 계층적 명분론의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개인이나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응하는 판단이나 행위에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덕적 명분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계층적 명분관은 엄격한 계층적 사회 구조를 형성해 안정된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가족공동체 안에서도 부모와 자녀나 부부·형제·고부 등의 사이에 나타나는 상하의 계층적 성격은 각각의 역할에 따르는 명분을 부여함으로써 가족적인 질서를 지탱해주었다.
부모의 도리나 자식의 도리, 또는 임금의 도리나 신하의 도리 등 각각이 지켜야 할 도리가 명분으로 주어지면, 이 명분은 위와 아래의 어느 쪽에도 지켜야 할 규범으로 작용한다. 명분이 계층적이라 하여 결코 윗사람에게 가볍고 아랫사람에게 무겁게 주어지는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억압적인 현상은 힘에 의해 강자가 명분을 소홀히 한 것일 뿐이다. 부분적인 폐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명분을 통해 힘에 의한 억압적인 사회가 아니라, 위와 아래 각각의 구성원이 그 역할의 명분적 계약을 통해 공동체의 질서와 결속을 확보해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통 사회에서는 신분적 구속을 벗어나 자율성을 향유하려는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명분적 규범으로 억제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명분관은 기존 질서의 정적인 안정을 깨고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 요구를 억제하는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근대로 내려오면서 신분 제도가 동요하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계층적 명분관도 점차적으로 타당성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도전과 모험의 진취적 태도를 부정하는 의식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을 수 없다.”라거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말하는 우리 속담은 자신의 한정된 분수를 강조함으로써 명분론의 소극적이고 역할 제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도덕적 명분관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인간 본성에 근거하는 도덕적 정당성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강한 정의감과 신념적 용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불의에 대한 엄격한 비판 의식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선비적인 꼿꼿한 강직성은 우리사회를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이끌어왔다.
또한 사회적인 행위의 도덕적 명분은 공동체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함으로써 사회 통합의 기능을 하여왔다. 그러나 정당성의 신념이 지나치게 엄격한 비판 의식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긴장과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당쟁도 명분론적 정당성의 대립에서 심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도덕적 명분론의 관심이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명분의 형식화와 체면치레가 성행하게 되고, 현실의 실용적인 관심이 쇠퇴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에 따라 실학파의 실용적 관심에서는 의리론적 명분론의 허구성이 비판되기도 하였다. 평등을 기본 원리로 하는 현대의 민주적 사회에서는 계층적 명분관이 적합성을 잃고 있다.
그러나 평등 사회에서도 자신의 역할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명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시민 사회에서는 이에 합당한 행위의 새로운 명분이 찾아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민주화나 경제성장, 소득재분배, 민족통일 등과 같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어진 구체적인 시대적 과제는 그 상황에서 특수한 명분을 제시해 우리의 다양한 행위를 제약할 수 있다. 명분의식의 건전한 작용은 한 사회를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실용적으로 생산적이게 하며, 사회를 강건하게 하고 통합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삼국사기

  • 『한국정치사상사』(박충석,삼영사,1982)

  • 『유교의 민본사상』(안병주,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1987)

  • 『유교사상과 한국사회』(금장태,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1987)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뒤의 세조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금장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명분론(名分論))]

2022/07/19

Kang-nam Oh 성경과 동성애

(4) Facebook

Kang-nam Oh
성경과 동성애

16일 토요일 어제 서울광장에서 3년만에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이어서 시가 행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맞불 집회 및 행진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페북에 올린 적이 있고, 또 최근에 나온 <오강남의 생각>(현암사, 70~73쪽)에도 나오는데,  여기 옮겨옵니다.
----
보수 기독교인들 중에는 동성애를 죄악시하는데, 그 이유가 성경에 동성애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주장이 어떤가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성경 레위기 20:13에 보면 분명히 "남자와 남자가 관계하면 반드시 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했으니 그것은 안 된다"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이런 입장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성경의 말씀을 정말 그대로 따른다고 한다면 동성애자를 교인이나 교회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죽여야"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태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댄다는 것은 이미 우리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 가지, 더욱 중요한 문제점은 동성애를 금지한 레위기에 보면 동성애만 금한 것이 아니라 월경 중에 잠자리를 같이 하면 공동체에서 쫓아내라, 심지어 두 가지 재로로 직조한 옷을 입으면 안 된다, 장애자의 몸으로 제단에 나가면 안 된다 하는 등의 금지조항이 있습니다. 그 외에 돼지고기나 바닷가재 같은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것, 절기를 지키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등 수많은 준수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금지조항을 불변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 금지조항과 함께 등장하는 월경중 동침하는 것, 혼방으로 된 옷을 입는 것, 장애자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것 등도 똑 같이 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곳에 있는 명령을 어느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것은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선별적 법시행"(selective enforcement)으로서 법률적으로 불법적인 일로 취급됩니다. 동성애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다른 금지조항도 다 같이 지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런 조항들을 다 지키는 기독교인들이 있을까요?
둘째, 그래도 바울이 금했지 않느냐 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9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라고 하고 또 로마인서 1:26 이하에도 남색하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생기는 온갖 죄악과 같은 선상에 두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바울이 말하는 ‘남색’이라는 것은 로마시대에 성행하던 일종의 성행위로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돈으로 사서 성적 쾌감의 대상으로 삼던 pedophilia(미성년에 대한 이상적 성욕, 소아성애)를 지칭하는 것었습니다. 오늘날 동성의 두 성인이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어느 젊은이의 경우처럼, 자기의 동성애적 경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호소하고 제발 자기에게도 이성을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애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동성애자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자 중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애자 중에도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성애자라고 모두 신앙을 버리거나 하나님과 등지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셋째, 결혼은 "생육하고 번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녀를 낳기 위한 수단인데, 동성끼리의 결혼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기에 안 된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이른바 ‘창조 질서’에 위배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성간에 결혼한 부부가 아기가 없다고 그 결혼을 포기하고 아기가 있을 때까지 계속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비록 결혼해서 자녀가 없어도 그 결혼은 신성한 것일 수 있습니다. 꼭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자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경에 동성애를 금했기 때문에 금해야 한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지금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는데 그 이유 중하나가,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에 의하면, 사회에서 받아들이는 성평등, 동성애, 낙태 등의 문제를 우파 정치가들과 합동으로 교회가 이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의 <종교 없는 삶> 123쪽) 이런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 아닐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선 이 정도로 그칩니다.
====
66 comments
이인석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Reply1 d
Daebin Moses Im
정리 감사합니다.공유합니다.
Reply1 dEdited
양성호
돈 있으면 사는 세상
이라더만..
Reply1 d
MyungJa Choi
고맙습니다. 공유합니다
Reply1 d
장서인
제가 20대에 이 글에서 지적해주신 오해 전부를 갖고 있었답니다. 그 이중잣대, 인지편향이 지금 다시 봐도 부끄럽네요.
Reply1 dEdited
박성현
정돈된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글도 기다립니다.
Reply1 d
Byung Hee Hong
반론 드립니다~
동성애를 금하는 것은 그것이 죄이기 때문인데 그럼 기독교인들인 이제 더이상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인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단지 LGBT라는 이유로 그들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것은 원하지 않으며 누구와도 동등하게 인권이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수 천년 전 쓰여진 전설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성취되고 있다고 믿고 체험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부정하고 “더이상 LGBT는 죄가 아니다”라고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사실 성경이 죄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들을 보면 피해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일례로 마태복음 5장 28절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는데, 과연 이 율법에 자유로울 남자가 얼마나 될까요? LGBT보다 이성애를 가진 사람들이 죄인이 될 기회가 훨씬 많겠죠.
중요한 것은 성경이 율법으로 죄를 규정한 것은 그것을 범하지 않고 모두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으라 함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거울이 있어야 우리의 티를 알 수 있듯이 율법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되며,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2~24)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율법 아래에서는 모두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체질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지만 점점 죄에서 멀어지고 율법이 지켜지는 체질로 바뀌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며 LGBT문제도 다르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Reply1 d
권기덕
.- 나름의 숙제 고민해 보겠습니다.
Reply1 d
Sung Hag Kim
공감합니다
Reply1 d
홍정옥
아무리 비교종교라해도 이건아닙니다. 비교종교를 하는것은좋으나 하나님의 의도는 떠나지 않아야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룰수도없고 신앙의규범이 없이 합리화 시켜서 사탄의 올무로 성도들을 유인하는 글은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로 복음이흔들리는시대에 정신을바짝 차리고 영혼구원에 매진하고하나님께로 엎드려서 이시대의 문제를 기도해야합니다
Reply1 d
Kevin Lee
여러 설명중에 제일 논리적이네요
Reply1 d
Hoon Park
종교적 편견없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글의 모든 부분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Reply1 d
문영석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태 18,9),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태 5,39). 나는 아직까지 성경말씀을 지키느라 애꾸눈을 가진 신실한(?) 신자나, 왼편 뺨마저 돌려대는 그런 너그러운 기독교 신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희극은 한때 한국 기독교는 미국이 하나님을 믿어 잘 산다고 강변해왔고,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얼빠진 인간들에게 그 처럼 숭배하는 주한 미대사가 2022 퀴어 축제에 와서 축사를 하였는데 그 대사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합니다. 이러니 '개콘'이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Reply1 d
호우선사
동성애 문제는 단순한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 . 첫째, 대자연의 순리(자연과학적 이치)에 않 맞고, 둘째, 동성애를 즐기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는 이가 많아서 사회과학적으로도 문제요.
거의 건강학적으로도 적잖은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리고, 항문성교를 즐기는 남색은 항문 근육이 망가져서 나중에 대변이 밖으로 나오기도 하는 참 참혹한 광경도 있어요.
그들이 즐기는 동성애(남자끼리, 여자끼리)는 상상을 초월한 모든 섹스를 즐깁니다. 몸이 결국 다 망가져요.
문제는 많은 동성애자가 원래 태어날때부터 동서애자인 경우는 거의 없어요. 주장일뿐이예요. 대다수가 충동, 혹은 동성애자들로부터 유혹 혹은 성폭력으로 동성애자가 된 경우도 참 많아요. 또한, 아주 어린 남녀는 호기심에 동성애의 길로 접어든 자들이 많다는 거예요. . .
동성애자들이 자기들의 사익을 위해서 여러 요설로 쓴 책들이 범람해서 현재 왠만한 지식인들도 의학적, 사회과학적, 사회비용적인 면을 간과하고 있고 동성애자들에게 세되당하고 있어요.
사회비용적으로, 에이즈 혹은 동성애자 환자 1명 발생하면, 보험사가 평생 건강관리비로 지급하는 비용과 정부가 우리들의 혈세로 지급하는 보조비는 얼마나 많을 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적극적으로 그들을 폭행하고, 죽이고 하는 중세적인 행동은 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해야되겠지만 . . 동성애가 단순한 자기의 문제가 아니라 . . 사회비용적 측면, 개인 건강적 측면, 사회도덕적, 자연과학적 순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굉장히 간과하고 단순 논리만으로 이런 것을 주장하는 점은 튼 실수요, 착오입니다만 . . .
아직도 동성애자들이 자기 성적 취향을 만족하기 위해서 . . 아직 소신이나, 과학적, 사회비용적 측면에 어두운 수많은 남녀를 여기저기에서 유혹하는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수작을 걸거나 혹은 강간에 의해서 된 동성애자가 적잖히 많아요. 이 세상에 오직 기독교만 오직 한 종교만 인류에게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착오요. 난 기독교인은 아니고 과학자며, 수도자지만, 사회문제를 한 안경을 통해서만 보면 항상 실수를 하지요. 인류역사상, 유럽역사를 보면 정치, 사회, 역사상 문제가 많지요? 미국을 포함해서 . . .
인간이 고등동물로 잘난 줄 알지만 . . 단지, '만용'으로써, 2019년부터 거의 3년간 . . . 미물인 코로나19에게도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싶군요 . . 현재까지 공식통계론, 약 650만명(통계상)이 세계적으로 사망했지만 . . 그런데 실제는 약 3배가 넘는 1500만명이라고 WHO통계는 말하고, 개인적 추산으로는 실제는 약 6배인 '3천만명이상'이라고 개인적으론 추정하고 있어요. 이유는, 공식 통계에 않잡힌 수많은 (1)노숙자 코로나 사망자, (2)다른 병으로 아프다가 코로나19에 걸려서 합병증으로 악화되어서 죽는 사망자는 코로나 사망자 공식 집계에 정부가 고의적으로 집계하고 있지 않아요(미국, 한국 등). 또한, (3)태어나다 코로나로 죽은 아기들과 영아들. . 꼭 이전에 아무 병이 없다가 코로나로만 진단받은 환자중 사망한 환자만 사망통계로 집계하고 있어요 -> 정치적으로 코로나 사망자 숫자를 줄려서 정부의 태만과 코로나시국관리를 잘못한 정부들이 욕을 덜 먹을려고 . . 나쁜 놈들이지만. . .
모든 사회문제는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 건강학적/의학적, 사회뵹적, 정치적, 문화적 여러 요소를 고려하며 심사숙고하면서 길잡이를 제대로 해야 후세가 똑 바른 인도(인간의 길)을 간는 겁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거의 다 근대기이후부터 모두 유럽/일본.미국발 지식/학문만 공부하고 배워서 조상들의 자기 것을 거의 다 잊고 또한 전혀 몰라요.제발 한민족의 고유한 시원 사상과 자연과학적 공부를 좀 해보시는게 좋을듯 . .
*외국 지식으로만 사물을 보지마시고, 한국의 '(신)선도'(중국의 도교가 아님)를 좀 공부를 해보시는 걸 추천해요. 즉, '심신수련'과 '천부경', '삼일신고' 및 '참전계경' 등 경학(이치를 깨닫게 하는 학문)은 참 나와 대자연의 관계를 제대로 깨닫게하는 현대과학의 시초이며, 끝이요. 죽을때까지 공부하는게 학자요, 도를 닦는 도리일듯 . . .
Reply1 d
Joon Chung
성경에 땅은 다 내것이니 팔지말라고 하셨는데...집팔고 땅팔고 돈벌고 난리치는 기독교인들이 허구한 날 동성애만 가지고 왕왕거립니다....ㅋㅋㅋ
Reply1 d
이주연
Reply1 d
Kum Ho Shin
그럼 당신은 동성애가 정상적이라고 보십니까? 이는 명백한 창조질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을 해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을 하시는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구약에서의 장모와 사위간의 상간, 짐승과 수간하는 자들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고 잘 살면 되겠네요. 그들을 구약에서 죽이라고 했지 신약에 그들을 죽이라는 말이 어디있느냐? 이러면서 말입니다. 아주 훌륭하신 발상이십니다. 당신의 자녀중에 그런 사람이 나와도 사랑하면 돼 하면서 박수를 쳐주실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무릇 시대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참고로 다음의 말씀을 깊이 새겨두시길.... 롬1:20-27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Reply1 d
백형근
사회가 진실을 추구하는 정의로 뭉치지 못하도록 친일매국과 토착왜구로 독립군을 학살한 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반역 행위로 보입니다.
Reply1 d
Joseph S. Shin
생각이 깊어집니다.
Reply1 d
지관
Reply1 d
Kim James Youngsuk
공감 합니다. 많은 분들이 달을 보라고 하는데 손가락을 보고 계신 것 같아 아쉽습니다. 조금 넓게 생각 하면 이해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달과 별이 어떤 것인지 다 알지만 주님께선 말씀 하지 않으셨듯 성경에 있는 글자 그대로가 아닌 주님의 간절한 뜻을 보는 은혜가 있길 소망 해 봅니다.
Reply1 d
Kyoungho Lim
깊이 공감합니다. ^^
자기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이의 삶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며,
반대로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을 거부하는 사람은 타인 삶의 어떤 부분도 거부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둘 다 심리적 거울 반응입니다.
이 '어떤 부분'을 거부하는 원인을 물으면 대게 "선입견"을 말합니다.
가정에서는 '가풍'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는 '관습'이나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에서는 '경전'이나 '교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각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에서 "먼저 입력된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걸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절대 가치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가치를 받아들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깝고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 지인 들이 같은 선입견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출처가 "신"일 경우에 심판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절대적 명령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우주는 곧 창조주이고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주 전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중 하나만 알고 절대적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자기 마음을 구속하는 새장이 됩니다.
우주는 930억 광년의 지름에서 지금도 팽창하는 중이며 대중의 의식 또한 마찬가지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고로 고귀한 신의 사랑"을 외치는 종교인들은 과거의 절대적 의식상태에 묶인 태도를 보입니다.
"최고로 고귀한 사랑"이 영원 불멸의 절대적 명령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적"가치만 추구할 때 그 반대편과 다툼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교의 모순을 지적하며 "절대가치"를 넘어설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말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대목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절대화'합니다. 그 결과로 '기독교' vs '비 기독교'라는 대립 구조를 만들고 그 새장 안에서 살아가죠.
자기 마음이 선입견의 결과라는 걸 모르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뭘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천국간다는 사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사랑과 평화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와 화로 가득하다면 이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 간다'로 해석한 결과는 투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걸 사랑으로 바꾸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믿어야 천국 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품는 사람이 그 순간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 증오의 대상이었던 문둥병, 혈루병, 몸 파는 여자, 세리, 귀신들린 사람 등을 품었습니다. 지금 증오의 대상인 동성애자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을 말이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창조주는 "선"만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온 우주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며, 온 우주는 전체적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하나, "빛과 어둠"이라는 하나, "옳고 금"이라는 하나 등의 모든 상대적 개념의 전체가 창조주의 질서입니다.
대자연(창조주)의 이치(질서)는 탄생과 소멸의 연속된 순환으로 이뤄집니다.
사람은 흙에서 창조돼 자기 삶을 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며, 사는 동안 우리 몸의 세포는 매 호흡마다 수많은 탄생과 소멸의 순환 과정으로 재생하며 유지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생각"과 감정 감각의 "느낌"이 무한하게 순환합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감정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고정된 생각"은 '고정된 사고방식'의 순환과정이 반복한 결과이고, '고정된 사고방식'은 '고정된 판단과 평가'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은 우선 발산적입니다. 그래서 남성성과 닮았습니다.
느낌은 수용적입니다. 그래서 여성성과 닮았습니다.
하늘과 땅,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 생각과 느낌의 균형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의 마음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생각과 느낌의 균형이 자기 선입견만 의존해서 기분이 나쁜 상황만 반복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수히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그 사랑을 믿고 느끼며 두려움이 거둬지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말이죠.
골방(깊은 마음)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요.
여기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선입견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무효한 곳'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며 몸과 정서와 정신의 긴장을 이완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이 무얼 바라는지 한 가지 주제를 떠올려 보세요. 온 몸과 마음이 듣는 느낌에 감각을 기울여 보세요. 그때 자신만의 기도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모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_()_
Reply1 dEdited
Hyuk Bom Kwon
참 공감할 내용입니다.
Reply1 d
Choi Young Bok
교수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목사님들이 귀와 눈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성서를 들여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Reply1 d
하중조
널리 퍼날라 혼탁하고 어리석은 예배당을 차별없는 공동체로 만듭시다, 임마누엘!
주위를 돌아보세요, 혹시라도 내가
아는 목회자의 자녀가 커밍아웃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리고 있지나 않은지 . . . . .
Reply1 dEdited
Charlie Choi
이정도로 끝치지 마시고 계속 이문제에 대해서 같은 의견을 발표해 주세요
Reply1 d
Hoon Kang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Reply1 d
박병수
종교학자로써 올린 글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인데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완전히 알 수 없지 않나요?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욥기'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할게 있고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저도 동성애를 옹호하지 않지만
십자가 이후 제사법이나 처벌의 방법은 없어지거나 달라졌을겁니다. 이 시대에 그들을 구약시대의 법대로 볼 수는 없어도
그들도 긍휼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으로 보라는 메시지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지지하든
그 외의 눈으로 보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가진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May be an illustration of one or more people
Reply1 d
박황희
종교인의 이율배반입니다.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율법의 도그마에 빠져 관견(管見)하는 자신의 편협과 편견을 깨닫지 못하고 맹신하는 행위입니다.
무당 목사들의 주술적이고 의존적 종교행위로 대한민국 기독교는 망하는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Reply1 d
박병수
박황희 저는 동성애 반대자 입니다.
다만 오강남씨는 크리스챤이 아니라 종교학자의 글이라 생각하고 그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상은 다양한 주장이 있다는 것을 들어줄 뿐입니다.
Reply1 dEdited


InJun Chung
감사합니다 교수님.
개인적으로 ‘낙태’에 대한 성경적 해석에 대하여서도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Reply1 d
Sang Kyung Koh
이미 오래전에 신교 구교 할것없이. 전부 동성애 인정하구선 이제와서 뭔 소리하는것인지. ...왜 종교지도자 들은 솔직하지 못한 짓거리를 하는지...싫다
Reply1 d
Jung Ryul Moon
성조기와 꼬리를 그렇게 흔들었는데..... ㅠ.ㅠ
https://m.yna.co.kr/amp/view/AKR20220716035851004
퀴어축제 참석 美대사 "인권 위해 여러분과 함께 싸울 것"(종합) | 연합뉴스
YNA.CO.KR
퀴어축제 참석 美대사 "인권 위해 여러분과 함께 싸울 것"(종합) | 연합뉴스
퀴어축제 참석 美대사 "인권 위해 여러분과 함께 싸울 것"(종합) | 연합뉴스
Reply1 dEdited
JaeGoo Lee
좋아요
Reply1 d
Sang Kyung Koh
예수 샤후 300년이 지나 쓰여진 성경에대해 ? 뭣을 참으로 ...
Reply1 d
Sang Kyung Koh
외경 정경 성경. 히브리어 그리스어. 곱틱성경 그리고. 에수는 어느언어로 이야기 하고 살았을까 ?
Reply1 d
Sehoon Oh
아람어 일거 랍니다..

2022/07/12

알라딘: 주역의 발견 - 상수와 의리가 무너진 주역의 본질 문용직

알라딘: 주역의 발견
주역의 발견 - 상수와 의리가 무너진 주역의 본질 
문용직
(지은이)부키2007-03-30






















 미리보기

정가
16,000원
Sales Point : 348

7.5 100자평(2)리뷰(3)
이 책 어때요?
전자책
11,200원

기본정보
384쪽


책소개

오경 중 으뜸으로 꼽히며, 3천여 주(注)와 소(疏)가 있을 정도로 그 해석이 분분한 주역이 철학서가 아닌 점서에 불과하다고 논파한 책. 역경은 무당의 보고이고, 역전은 그 설명인데, 무리하게 역경까지 체계화하려 함으로써 지금까지 오류가 거듭되었다는 입장을 현대 고고학과 기호학, 인지언어학 및 형식 논리학의 성과를 빌어 설파한다.

총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점이란 무엇인지, 점서로서 역경이 가진 구조와 의미를 밝히고, 역경이라는 텍스트를 근거로 이루어진 의리학과 상수학의 한계와 모호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등을 통해서 주역은 결국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읽으면서 해석하는 책이라는 것을 읽는 이들에게 알리고 있다.
=====

목차


머리말

1장 주역이란 무엇인가 1
占이란 무엇인가
공시성
주역의 구조
모든 占의 선택과 결과는 서로가 독립적이다

2장 서법과 역경의 성립
점서법
효에 높고 낮음이 없다
변괘와 괘변
숫자괘의 등장 - 象은 없었다
역경의 성립
8괘와 8상 - 그 기원에 대해
괘의 이름에 대해서 - 괘사와 효사의 관계

3장 괘변, 그 모순의 체계
매혹적인 판단 방식, 괘변
괘변의 정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괘변의 본질적 한계
계사전과 8괘: 괘변의 연원
해석학적 읽기의 자의성 - 무의미에의 의미 개입
선후천 8괘, 음양오행

4장 역경의 언어
역경의 언어와 은유
8상의 등장, 관계와 설명
논쟁적인 역경 언어의 기준
은유와 詩歌
古來의 의문들: 元亨, 利貞과 孚
나무 은유와 상하 은유, 상형문자와 표의문자

5장 주역이란 무엇인가 2
점과 언어, 부호
텍스트로서의 주역
역전은 권위 있는 해석인가
역경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역경, 어떻게 읽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用九와 用六이 만들어 내는 세계의 크기에 대해서
점을 쳐도 되는가

책 쓰면서: 술과 나, 너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접기
=========
책속에서


내가 거처하고 있는 집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 내부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만, 밖에서도 바라보아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다.주역을 알려면, 주역 속에서 헤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주역 밖에서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밖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주역을 아는(within) 것이 아니라 주역에 관해서(about)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타(meta)-주역의 관점을 지닐 필요가 있는 것이다.-p53 중에서 접기


추천글
주역의 '정통' 해석을 깨다
- 고명섭 (<한겨레> 문화부장《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저자)
=====
저자 및 역자소개
문용직 (지은이)

한국기원 전문기사이자, 정치학 박사이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3년 전문기사에 입단했다. 19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 배에서 준우승하였으며, 1994년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서강대, 서울대, 이화여대, 충남대 등에서 한국정치론, 정당론, 정치통계학 등을 강의했다. 2007년 현재「국민일보」와「영남일보」에 바둑 칼럼과 관전기를 집필하고 있고, 인터넷 바둑 사이트 사이버오로에서 ‘오로산책’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바둑의 발견>, <수담과 무언>, <수법의 발견> 시리즈(전10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주역의 발견>,<바둑의 발견 2>,<날 붙이기> … 총 16종 (모두보기)
문용직(지은이)의 말
주역을 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하나의 문화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맞을 것이다. 그래도 주역이란 무엇인가. 글쎄다. 사실, 그 질문이야말로 이 책에서 내가 답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한두 마디 말로 그 답을 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꾀를 부렸다. 주역, 그것은 대체 어떤 구조로 성립된 것일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나의 공부를 던지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했다.




평점 분포

7.5

마이리뷰
구매자 (1)
전체 (3)



'주역'이란 텍스트에 대한 해체적 이해



해체란 무엇인가.

기존의 권위있는 읽기와 멀어져서 체험과 이해로 텍스트를 읽는 것.

곧 이해의 인식론을 요구받는 것.

삶을 주제로 질문과 답을 찾아야 한다는 그런 해석학적 요청.(328)



알파고와 이세돌이 5판 두어 4판을 기계가 이겼다.

당연하다. 한 판 이긴 것도 굉장하다.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계속 빠른 계산을 해야하는 반복이 바둑인데,

처음에는 인간도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다.



바둑두는 사람이 왜 주역에 관심을 가졌을까?

미생이라는 만화에서 바둑이 하나의 '필터' 역할을 했듯,

주역 역시 삶에 대한 '필터'였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여느 사람들이라면, 주역에 대하여 현대식 해석을 한두마디 붙이고 말겠지만,

역시 '바둑의 발견'의 저자인 만큼, 주역에 대하여 권위를 차치하고,

갈가리 분석한다.

배우고 믿으며 시작하는 것과 전혀 다른 해석학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하기보다,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냐,

에 댛나 답을 주된 관심사로 삼음으로써 주역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고,

그 가치는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다.(342)



견강부회.

주역만큼 이 말이 부합한 책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데 주역을 읽는가.



세계는 인과론적 연결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여기서 '공시적'이라는 개념이 생기는데,

직선적, 인과론적 원리가 부정되는 '해체'의 시기에 재조명될 책이 주역이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이 20세기에 극찬을 받았다면,

새 시대에는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가 우위에 서기도 하는 셈이다.

연역적으로 따지고 캐내어 결론을 얻을 수 없는 인생이기에,

표의문자인 한자의 세계에서

주제가 모호한 역설의 <모습 象>과 <숫자 數>로 삶의 변화 이치를 따지려 든 것이 주역이다.



당신이 점을 치고자 할 때 과연 질문을 잘 만들 자신이 있는가?

답은 무엇보다 질문의 한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362)



좋은 말이다.

불교에서 화두를 안고 수련을 하듯,

올바른 질문 앞에서는 마른 똥 막대기도, 뜰앞의 잣나무도 모두 이치에 가까운 '형상'일 수 있는 법.



역경을 읽게 되면 세상을 변화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버릇이 몸에 배게 된다.

그것이 철학적 안목을 가져다 줄 것.(270)



여기서 철학이라 함은, 세상을 보는 안목의 필터 구실을 하는 무언가가 생긴다는 말이렷다.

그래서 공자가 위편삼절 하며 보던 책이고,

오십이 되어 이제야 천명을 알겠다 하던 것이다.



역경은 바로 이러한 환유와 은유의 배열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넓혀 준다.

점사는 독립적이기에 환유와 은유의 힘은 더욱 크다.(262)

은유는 이해에, 환유는 주의를 끄는 것오 좀더 활용의 초점이 있다.(261)



여러가지 '전'들은 '설명'을 하려 드는 것이다.

삶을 설명하지 못할 경지도 많다.

그래서 '경'은 힘이 세다.



음양 오행은 사물을 범주화하고, 그 사물간의 관계로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이지만,

역경은 세상을 범주화해서 재현할 뿐이다. 점서다.

이론도 가설도 주장도 아니다.(229)



해석학적 읽기는 자의적이다.

고정된 해석만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학에서 볼 때,

전제가 허위이면 그 다음부터 추론되는 모든 명제는 참이다.

본래 역경의 괘는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 무의미한 체계에서 의미있는 체계로 본다면,

참과 거짓을 검증할 수 없는 체계를 바탕으로 나오는 모든 명제는 '참'이 되는 것.(219)



점쟁이한테 인과관계를 묻지 않듯, 주역 역시 그러하다.



연역적인 방식으로 64괘의 변화를 탐색하려는 노력은 주역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자 믿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틀렸다고 보고 이 책을 쓰고 있다.(176)



괘와 괘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탐구한 역사가 있다.

착종, 교호... 등등

한 마디로 '견강부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면 도대체 주역을 왜 읽는가.



세상은 이분되어야만 이해된다.

차이를 인식한다는 것.

변화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는 것.

변화란 이것에서 저것으로 나아가는 것.(96)



결국 주역은 '과정'과 '변화'를 응시하는 책이라는 것.

굳어져버린 도그마로서의 '경'과 '전'이 아니라,

세상을 은유와 환유로 빗대보려는 '상'과 '설명'의 책.



작가가 주역의 의미를 분석하려한 틀 자체가 수학의 원리든,

논리학적 분석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보여주려 노력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주역을 줄줄 외우고 꿰뚫고 있지 않은 일반인인 나에게는,

읽기에 무리인 설명들도 많았다.






- 접기
글샘 2016-03-29 공감(6) 댓글(0)
Thanks to
공감



승부사의 숨결

주역의 실체를 냉정히 평가한 바둑고수의 승부사적 기질이 엿보이는 수작
qltanf 2015-12-15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두가지 과정

.. 나는 이리 생각한다. 어느 분야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두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첫번째 과정은 그 분야 속으로 들어가서 흠뻑 몸을 적셔보는 것이다. 두번째 과정은 그 학문 속에서 밖으로 나와서 돌아보는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이 두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문용직 <주역의 발견> 중에서
균윌 2009-11-29 공감(0) 댓글(0)

============

마이페이퍼
전체 (4)
페이퍼 쓰기
좋아요순



주역, 이런 책을 읽어라



주역이라는 서물이 워낙 동양 지혜의 정수 쯤으로 자리매김하다 보니,

고래로 유가, 도가, 심지어 불가에서까지 한다 하는 천재들은 한 번쯤 건드려 봤던 것이 주역의 해석사가 되겠다.

이런 전통은 요즘에도 이어져서 소위 재야의 동양학자, 점술가 등등까지 달라붙어서,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싶으면 관련서를 한 권씩 내다 보니

가짓수는 번잡하게 많되 정작 독자들이 읽을만한,

꼭 읽어야 할 서적들이 파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야말로 나쁜 책이 좋은 책을 쫓아내는 격.



여기 알라딘에도 보니 추천서랍시고 제일 위에 올려놓은 책들 꼬락서니가 ...







자, 이번에는 주역 필독서 한 번 챙겨보자.







먼저 ... 개론서라고나 할까? 두어 권 훑어주는 것도 좋겠다.



주역에 나오는 익숙치 않은 개념들을 잡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것이다.





































[역학원리강화]는 1950년대에 나왔으니, 거의 '고전'의 반열에 드는 책으로, 주역의 기초, 하도낙서의 원리 등에 대해 문답식으로 재미있게 풀이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위한 서론 격이라고 할까 ..
.



이에 비해 [역의 원리]는 요즘 시각으로 잘 풀이한 개론서.



이런 개론서 류에서 잘못 빠지면 하도 낙서, 선천 후천, 음양오행, 사주명리, 정역 등등으로 나가게 되니 ... 주의(?)를 요망한다. ^^





주백곤이나 남회근 선생의 저작들 같은 좀더 학술적인 주역 사상 입문서로 중심을 잡아주도록 하자.







개론서를 맛보았으면, 본격적인 탐구로 들어가자.
주역에 있어서,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 두 권 있다. 표준이지.

먼저, [주역왕한주(周易王韓注)].



위나라 때의 요절한 천재소년 왕필(王弼)의 작품이다.

천재다운 시건방짐으로 ... 주역의 역경 부분에 대한 해설이라 볼 수 있는 역전에는 따로 주석을 달지 않으셨다. 역전 지은 놈들이랑은 같은 급이라, 이거지.
해서, 역전 부분에는 한강백(韓康伯)이라는 분께서 주석을 달아서,
합하여 이름하니 [주역왕한주].

이 판본은 당나라 때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라는 유교경전 정리작업에
공영달 아저씨의 주소가 덧붙여져서 [주역정의(周易正義)]라는 이름으로 들어가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요즘은 다행히도 전문 연구가에 의한 번역본이 있다.

1998년도에 처음 나왔는데, 두 번인가의 개정을 거쳤다.
번역본은 보지 않아서 번역에 대한 왈가왈부는 생략.
천 년 가까이 표준적인 판본으로 자리매김한 [주역왕한주]의 아성에 도전한 책이
바로 주자의 [주역본의]. 번역자는 [주자어류] 등에 나온 관련 내용까지 꼼꼼히 훑어서 실어주었다. 참고로, 주자의 주역 입문서인 [역학계몽]도 두 종이 번역되어 있다.




이 책 역시, 정이천의 [역전], 흔히 [이천역전(伊川易傳)]과 함께 편집되어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이라는 이름으로 역시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권위 있는 교과서 역할을 도맡은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에 포함되었던 판본. 따라서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가장 많이 본 판본이 되겠다.














가장 먼저 추억의 퍼런 표지로 나왔던 현토완역 주역전의는 좀더 산뜻하고 진중한 옷을 입고 나왔고, 가장 최근에 나온 경학연구원판까지 해서 삼파전이 형성되고 있다.

조선 경학사의 최고봉, 다산 선생의 [주역사전]도 번역되어 나왔다.

























19세기의 갑골문, 20세기의 마왕퇴한묘백서, 곽점초간 등의 고고학적 성과로, 경학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최근의 연구성과들은 기존 통행본들의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밝혀주고 있다.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며 구구절절, 중언부언했던 것이 역학사의 한 단면일진데, 잡설을 쏙 빼고 담백하게 읽어보자. [고형의 주역] 및 그 한국어판 번역자인 김상섭 선생의 저서들이 대표적이다.



























그 외 개성적인 시각으로 주역을 풀이한 책들.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는 책 한 권.





참고로, [최고의 고전 번역] 주역 부분 비평자 곽신환 교수의 코멘트 :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주역 번역서는 적지 않다. 1990년대 이후 출간된 것만 대충 추려봐도 서정기 역, 김석진 역, 박병대 역, 김상섭 역, 양학형 역, 김인환 역, 임채우 역, 이기동 역, 백은기 역, 서대원 역, 성백효 역, 김흥호 역 등이 있다. 이들은 주역을 번역했지만 제목이 반드시 ‘주역’이라 돼있진 않다. 관심을 끌려고 부제가 주제를 덮어버린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들 번역서 중엔 번역서라 보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주역이라는 경전이 갖는 특징때문이다. 우선 판본의 문제가 있고, 해석의 갈래 문제가 있다. 현재 통용되는 주역은 經 부분과 이른바 10翼이라 불리는 傳 부분이 붙어있다. 경 부분은 64개의 괘와 이 괘에 붙어있는 판단의 말로 구성돼있다. 10익은 그동안 공자의 저작, 또는 적어도 공자 문하생들이 스승의 철학을 바탕으로 저작한 것을 통설로 여긴다. 翼, 곧 날개라는 이름이 상징하듯 주역은 이 열개의 날개를 얻음으로 인해 그 공간적 확대와 시간의 시련을 견디어내는 보편성과 탄력성을 획득한 것도 사실이다. 한대 이래로 10익으로 經을 해석하는 것과 10익을 나눠 해당 경문아래 붙여둬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의 표준으로 삼아온 전통이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 대한 반발도 결코 약하지 않다. 우선 ‘周易本義’라는 저술을 통해 기존의 주역 이해에 강력하게 도전한 주희도 경과 전을 분리해 주역 해석에 傳에 의한 선입견을 배제하려했다. 조선조 유학자들의 주역 이해에는 주희의 관점이 상당히 반영돼있다.


위의 번역들은 경만을 번역한 것, 경과 전 모두 번역한 것, 그리고 특정인의 주석을 번역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주역전의대전’처럼 주석을 합쳐 놓은 것에 대한 번역도 있다. 그런데 경 또는 경과 전을 함께 번역한 경우엔 대부분 역자의 해석이 장황하게 붙어있다. 특정 역학자의 주석을 곁들여 번역한 경우는 번역 자체에만 충실하려 했다.


또 번역자들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주역 번역은 대학전공자보다는 江湖에 숨은 고수가 이름을 드러낸 경우가 많다. 長短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건 강호의 제현들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는 공자가 말한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는 폐단, 즉 주관적 사유와 개인적 체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객관성의 결여나 비뚤어진 통찰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주역번역엔 여러 고전연구가들과 한학자들도 상당수 합류하고 있다. 여기에다 역술가들까지 합치면 어지러울 정도다. 이율곡은 “무릇 역은 만사의 근본으로 善惡과 邪正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역을 배우다가 잘못돼 그 큰 뜻을 잃고 사특한 이론에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라고 해 주역 공부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주역번역에 있어서 얼마나 원전에 충실하며 쉽게 읽히느냐의 문제만을 다루긴 어렵다. 전혀 방향이 다른 주해서가 많다는 것과 해석의 갈래가 심하다는 것, 여전히 의미가 모호한 글자와 구절들이 많다는 것 등이 그 이유다. 예컨대 건괘의 괘사이며 주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구절인 元·亨·利·貞을 원, 형, 이, 정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원형, 이정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도 권위적인 학자들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데 어느 하나만 고집하긴 어려운 현실이다. 왜냐하면 양갈래 길이 너무나 길고 찬란하게 전개되고 있기에 한쪽만 취하고 나머지를 버리는 것이 모험에 가까우며, 또 이후 이뤄진 길이 아깝기 때문이다. 역자들 대부분이 여기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




- 접기
비로자나 2012-09-14 공감 (82) 댓글 (3)
========


[책오디세이] 주역의 맛



주역에 대해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도전 했는데, 영 신통치가 않다. 그러고 보니 도전이라고 할 만한 노력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관심만 오래도록...

라이프니츠가 주역에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는 아는 사람들은 안다. 정확히 말하면, 라이프니츠가 구상한 이진법 체계가 있었는데, 나중에 지인이 중국에서 보내 준 주역 64괘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보다 지나치게? 앞서서 고대에 이미 더 완전한 기호 시스템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라이프니츠의 이진법 체계는 사이버네틱스 연구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재의 컴퓨터와 주역은 이미 은밀한 내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역은 서양의 사상가들에게 우리가 아는 것보다 큰 영향을 준걸로 보인다. 헤겔도 주역에 문외한이 아니었는데, 직접 강의까지 했다는 얘기도 어디서 본 것 같다. 중국문명이 서양에 침투한 흔적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에서 엿볼 수 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완역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축약본(3권)으로 나온 책도 절판이라 이마저도 현재 읽기가 어려운 상태다. 일본에서는 아마 11 권짜리 완역이 있는 걸로 안다



주역은 이렇게 첨단과학이라 일컫는 컴퓨터로까지 닿기도 하고, 미신이라 여기는 운명학이니 사주팔자 같은 곳에서 미심쩍게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극단적인 주역의 운명이랄까?









우선 주역의 첫걸음에 적합한 책들이다. <주역의 과학과 도>는 정말 초보자가 볼 만한 책인데, 주역의 기본기를 익히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알기쉬운 역의 원리>는 주역의 맛과 기본을 다지는데 좋은 것 같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그림으로 풀어쓴 역경>도 초보자가 보기엔 부담이 적을 것 같다.

























주역읽기에 대한 방법들은 정말 다양하다. <송재국 교수의 주역 풀이>는 전에 본 책인데, 어느 정도 괜찮았던 거 같다. <인문으로 읽는 주역>은 남회근 선생의 여러 책들을 번역하기도 했던, 신원봉의 책인데, 나중에 찾아 볼 생각이다.





























본격적인 주역공부를 시작하려면 이런 책들을 봐야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대산 주역강의>가 유명한 걸로 안다. 그 외에도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은데, 주역의 맛을 어느 정도 품고 있는 책들이라서 그런지 두께도 만만치 않다. 정말 주역을 제대로 공부할 마음이 아니라면 완독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

















<원문 주역사전>

공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주희의 역학은 봐야할 듯 싶은데, <역학계몽>이 다행히 완역이 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도 주역에 꽤 조예가 깊었다. 전에 <다산의 역학>이라는 책이 있었지만, 현재는 절판이라 구하기 어렵고, 대신 <다산의 주역 해석체계>라는 책으로 그의 주역사상을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주역사전>도 8권이나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 사전과도 연관이 있는 정약용의 주역사상이 담겨 있는 <주역반정>이란 책도 눈에 띈다. 주역 해석에 유독 뛰어난 중국의 천재 왕부지가 있는데, 이를 다룬 <왕부지의 주역철학>이란 책도 역시 절판이라 구하기 어렵다. 뭐 이런 책이 한 두권이겠냐만은.. 특히 역학 책들 중에는 오히려 절판된 책들 중에 좋은 책들이 더러 있다.











주역이 우리나라에 와서 변형된 것이 있는데, 김일부의 정역이 그것이다. 정역은 이정호가 여러 책들을 썼는데, 최근 윤종빈의 <정역과 주역>이 눈에 띈다(전에 나온 <역학연구의 심법>의 개정판). 정역은 후천시대를 말하는데 조선말기에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준 동학이나 강증산 같은 인물과도 연관이 크다. 정역을 다룬 소설도 있는데, <하늘 북 소리>가 그것이다.









최근에 나온 책이다. 위에서 소개한 송재국 교수의 <주역 풀이>가 나온 지 10년 만에 정역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주역 풀이>라는 책에도 뒤에 보면, 선천 후천과 관련하여 정역을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책에서는 더욱 심화된 정역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주역에 관한 책들을 많이 보진 못했다. 입문서 비슷한 책들과 중급 정도의 책들인데,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은 남회근 선생의 <역경잡설>이었다. 남회근 선생은 역경 뿐만이 아니라 동양사상 전반에 대한 내공이 상당하다. 전에 번역된 책들이 절판되고, 새로운 출판사에서 다시 나오고 있는데, 주역에 관한 책도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











남회근 선생의 <주역계사 강의>는 전에 나온 <주역강의>의 개정판이다. 이 책을 먼저 본 후, <역경잡설>을 읽는다면 짝이 맞을 것 같다.











- 그 외 주역책들




- 접기
TexTan 2010-07-16 공감 (67) 댓글 (0)
Thanks to
공감
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