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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템플스테이 |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템플스테이 |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대원사(보성)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죽산길 506-8
전화 : 061-853-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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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님 템플스테이 차담과 역사공부 44

작성일 2016-01-07 오전 10:37:42 | 작성자 | 조회수 10053



티벳 화가들이 탕카방식으로 그린 한국의 다섯분 고승진영을 대원사 티벳박물관에 봉안하였다.

큰 스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예술을 진영이라 부른다.진영이란 이영심진.의 줄인 말이다.그림자를 통해서 진실을 본다는 뜻이다.육신이 법신의 그림자인데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서 불법을 깨우친 스승들의 얼꼴(얼굴)을 본다는 뜻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제자들에게 이승의 마지막 설법을 하였다.그리고 손수 그린 자신의 영탱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시 한수를 적어 사명과 처영에게 준다음 가부좌 하고 입적하였다.그리고 자신의 유물은 해남 대흥사로 옮겨 보관하게 하였다.대흥사는 삼재가 들지 않고
만세토록 파괴되지 않을 길지라고 하였다.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소중한 유물이 전래되는 이유이다.

대원사 티벳박물관에는 티벳 왕궁화가 믹말과 학쌈 .체링 부부화가가 2년동안 머물면서 박물관 외벽에 12점의 벽화엄단청.출입문 장엄단청.박물관 내부 장엄단청.그리고 수미광명탑 내부에 오방불 세계를 표현한 만다라 법당 장엄을 티벳의 전통불화기법에 따라 화려하고 장엄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스승들을 부처님으로 섬기는 티벳불교 전통을 따라 한국의 다섯분 큰스님들을 티벳 탕카방식으로 모셨다.한분 그리는데 한달 시간이 소요되었다.현재 티벳박물관 2층 법당에 모셔져 있다.

1.오른손에 염주를 들고 왼손에는 금강저를 쥐고 있는 초의 선사 진영이다.

법상좌우로는 모란꽃을 닮은 화려한 연꽃으로 장엄하였고 탁자 화병에는 차꽃을 올리고 차한잔을 올렸다.좌대에는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코끼리가 있다.

2.두번째는 조계총림 송광사의 방장이신 구산선사 진영다.

오른손에는 중생들의 번뇌를 정화해주는 하얀 불자를 쥐고 있다.법상 상단에는 세가지 보배인 불법승 삼보를 이마위에 받들고 있다.
석사자의 호를 따라 불법의 수호신인 설사자가 큰스님의 좌대를 받치고 있다.

3.가야산의 호랑이로 널리 알려진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선사 진영이다.

오른손에는 설법의 상징인 주장자를 들어 삼천세계를 울리고 있다.탁자 화병에는 연꽃과 모란이 있고 불법의 수레바퀴를 크게 돌리신 법륜을 모셨다. 좌대에는 새들의 왕 가루라가 받치고 있다.

4.26세에 출가하여 열반할 때까지 평생을 일종식과 장좌불와 그리고 하심행으로 수행자의 사표가 되신 청화선사의 진영이다.

오른손에는 염불선으로 마음의 본성을 깨닫게 하는 단주를 쥐고 있다.탁자조각에는 두마리 용이 우주의 보물을 공양올린다.좌대에는 독사를 잡아 먹는 공작이 있다.공작좌는 아미타불의 보좌이다.

5.백양사 고불총림의 방장이신 서옹선사진영이다.

일본 임제종에서 설립한 화원대학에서 선학을 연찬하셨으며 임제종 묘심사 선원에서 수행하셨다.선풍도골.천지난만한 법상을 진영으로 잘 표현했다.오른손에는 불자를 힘차게 들고 있다.탁자에는 전통법식대로 수습한 서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사리함이다.좌대에는 붉은 띠를 목에 두른 흰 말 한쌍이 받쳐주고 있다.

대원사 티벳박물관 2층에서 친견할수 있다.

한국의 작은 티벳 대원사 티벳박물관
www.tibetan-museum.org




2020/08/09

07 마성스님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불교평론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특집/ 동남아 불교의 재인식

[33호] 2007년 12월 12일 (수) 마성(摩聖) 

ripl@ripl.or.kr

 

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1. 머리말



불교에는 크게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두 흐름이 있다. 남전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곳을 근거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다. 북전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전자를 남방불교 혹은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da)라 하고, 후자를 북방불교 혹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y?na)라고 부른다. 상좌불교는 팔리어로 전승되어 온 팔리문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따라서 ‘남방불교’, ‘상좌불교’, ‘상좌부 불교’, ‘남방 상좌부 불교’라는 명칭들은 모두 남전의 불교를 일컫는 동일한 용어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을 짧게 줄여 ‘상좌불교’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용어로 통일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일부이고, 대승불교 국가는 중국·한국·일본·몽골·티베트·네팔 등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도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를 소승(小乘, H?nay?na)이라고 업신여겨 왔다. 엄격히 말해서 현재의 테라와다(Therav?da, 上座部)는 히나야나(H?nay?na, 小乘)가 아니다. 테라와다(상좌부)는 히나야나(소승)와 마하야나(대승)라는 두 술어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승불교도들이 소승이라고 폄하한 것은 부파불교를 가리킨 것인데, 이러한 소승부파는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 동안 멸시해 온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와 아울러 교통과 통신 및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불교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상좌불교도 역시 대승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는 동남아 상좌불교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불교평론>에서는 ‘상좌부 불교의 이해’라는 특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자도 두 전통의 불교를 비교한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는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상좌불교의 역사와 전통



1) 상좌부의 기원과 의미



상좌부(上座部)라는 단어는 팔리어 테라와다(Therav?da)를 번역한 말이다. 테라와다는 테라(thera, 장로들)와 와다(v?da, 말씀 혹은 교리)의 합성어이다. 그 의미는 ‘장로들의 교의(敎義)’라는 뜻이다. 이 부파는 팔리삼장(三藏, Tipi?aka)에 토대를 두고 있다. 수세기 동안 상좌부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늘날 상좌불교도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1억이 넘는다.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 등 서양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재의 상좌부의 뿌리는 불멸 직후에 개최되었던 제1결집 시기에까지 소급된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테라와다’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리랑카의 고대 년대기인 ??D?pava?sa(島史, 4세기)??와 ??Mah?va?sa(大史, 5세기)?? 및 Samantap?s?dik?(一切善見律註, 율장의 주석서)??에 의하면, ‘Therav?da’, ‘Theriya’, ‘Therika’라는 용어는 붓다 입멸 3개월 후 라자가하(R?jagaha, 王舍城)에서 개최된 제1결집 이후 처음으로 불교사에 소개되었다. 붓다의 직제자였던 500명의 아라한들이 참석했고, 마하깟싸빠(Mah?- kassapa, 大迦葉) 장로가 의장을 맡았던 이 결집에서 붓다의 전체 가르침인 법(法)과 율(律)이 7개월 동안 암송되었고, 스승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만장일치로 수용되었다. 이 결집에서 승인되고 동의되었던 것이 ‘Therav?da(장로들의 교의)’, ‘Theriya’, ‘Therika(장로들의 전통)’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는 제1결집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이때 이미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상좌불교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종가(宗家)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오늘날 현존하는 동남아 상좌불교는 부파로서의 상좌부가 아니라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원래의 불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좌부는 역사적으로는 근본분열 이후에 성립된 부파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2)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



상가(Sa?gha, 僧伽)는 출가 수행자 집단을 말하며, 화합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서나 갈등과 다툼은 있기 마련이다. 붓다 재세시에도 꼬삼비(Kosamb?) 비구들의 분쟁이 있었다. 이 분쟁은 지율자(持律者, vinayadhara)와 지법자(持法者, dhammadhara) 사이의 다툼이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툼을 즉각 중지하라고 훈계했으나 그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붓다는 그곳을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재가신자들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겨우 수습하였다. 한편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는 엄격한 계율주의로 승단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승인 붓다를 등지고 승단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이와 같이 붓다시대에도 승단 내부의 갈등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상 승단이 분열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붓다의 높은 인격과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 입멸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단이 확대되고 출가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리와 계율의 해석에 있어서 의견의 대립이 생겨 결국 분열하게 되었다.



붓다 입멸 후 100년경 원래의 불교승단은 두 파로 분열되었다. 이 두 파는 각각 다시 분열을 되풀이 하여 마침내 20부파로 세분되었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분열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하고, 그 이후의 분열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최초의 분열은 제2결집으로 알려진 웨살리(Ves?l?, Sk. Vai??l?) 결집과 연관되어 있다. 그 원인은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십사(十事)를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결집에서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주장한 열 가지 사항은 비법(非法)이라고 판정되었다.



하지만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별도로 모임을 갖고 대승가(大僧伽, Mah?sa?gha) 혹은 대중부(大衆部, Mah?sa?ghika)로 알려진 새로운 승단을 조직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많은 무리의 승려들(大會衆)’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승단은 크게 정통파와 비정통파 혹은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졌으며, 그 후 다시 분열을 거듭하여 18부파 혹은 20부파가 되었다.



20부파 가운데 원래의 상좌부는 가장 보수적이었는데, 그들의 교설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티베트 전통에 의하면 웃자인(Ujjain, Ujjeni)에 속하는 마하깟짜야나(Mah?kacc?yana, 大迦?延)가 상좌부를 창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리 전통에 따르면 우빨리(Up?li, 優波離)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빠딸리뿟따(P??aliputta, 華氏城)를 그들의 첫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그들은 점차적으로 꼬삼비(Kosamb?), 아완띠(Avanti), 웃제니(Ujjeni)와 인도 서쪽의 다른 장소들에 정착했다. 사르나트(s?rn?th)의 비문에는 초기에 사르나트에 상좌부의 교도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꼰다(N?g?rjunako??a) 비문에도 상좌부의 교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서인도로부터 남인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남인도의 깐찌(K??ci)에서 매우 널리 성행되었다. 얼마 후 이곳은 상좌부 교도들의 중요한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3) 제3결집과 전도사 파견



부파분열 후 다시 100년이 경과한 뒤, 아쇼까(A?oka)왕 재위 기간에 제3결집이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법과 율의 양면으로 비정통파의 견해를 가진 많은 비불교도들이 불교 승려가 되어 승단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포살 의식이 약 7년간 빠딸리뿟따(P??aliputta)에서 실행되지 못했다.



아쇼까왕은 당시 가장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와 상의하여 많은 비정통파 승려들을 승단에서 추방시켰으며, 그들의 이단적인 견해들을 진압시켰다. 왕은 가능한 한 승단에서 계율을 유지하고 승단을 정화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 결집은 목갈리뿟따 띳사의 지도력 아래 빠딸리뿟따에서 오직 정통파 승려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아쇼까왕은 결집을 비호했고, 정통파 승려들을 지지했다. 제3결집은 9개월간 개최되었다. 목갈리뿟따 띳사는 결집에서 결론을 도출한 후 아쇼까왕의 후원 아래 불교의 전래와 발전, 그리고 전파를 위해 다른 9개국에 종교적 전도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전도사와 지역 혹은 나라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맛잔띠까(Majjhantika, 末單提)는 캐시미르(K??m?ra)와 간다라(Gandh?ra)에, ②마하데와(Mah?deva, 大天)는 마히삼만달라(Mahisama??ala)에, ③락키따(Rakkhita)는 와나와시(Vanav?s?)에, ④담마락키따(Dhammarakkhita)는 아빠란따까(Apar?ntaka)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리스인이었다고 한다. ⑤마하담마락키따(Mah?dhammarakkhita)는 마하랏타(Mah?ra??ha)에, ⑥맛지마(Majjhima)는 히마완따빠데사(Himavantapadesa)에, ⑦소나(So?a)와 웃따라(Uttara)는 수완나부미(Suva??abh?mi, 金地國)에, ⑧마힌다(Mahinda)는 땀바빤니(Tambapa??i, La?k?d?pa)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맛잔띠까는 캐시미르와 간다라 두 곳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도합 9개국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일론에는 아쇼까왕의 친아들 마힌다 장로가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일론의 전승에 따르면,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지시로 아쇼까왕은 불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까지는 단지 필요한 것을 보시하는 자(paccayad?yaka)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황제 자신이 불법의 상속자(s?sanad?y?da)가 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따(Sa?ghamitta)를 승단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승단에 들어온 마힌다와 상가밋따를 특별히 세일론으로 파견한 것은 당시 인도의 아쇼까왕과 세일론의 데와남삐야 띳사(Dev?nampiya Tissa, B.C. 247-207 재위)왕 사이의 각별한 친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3결집 기간과 이 결집 이후 목갈리뿟따 띳사에 의해 9개국의 다른 나라로 종교의 전도단을 파견한 것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불교의 승려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포교하기 위해 외국에 간 것은 역사상 최초이기 때문이었다. 제3결집은 세일론, 미얀마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상좌부라는 형태의 불교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아쇼까왕에 의해 파견된 불교 승려들에 의해서 세일론과 동남아시아에 전래되었다. 상좌부가 세일론에 전래된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상좌부 불교의 본부가 되었으며, 거기서부터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크게 번성했다. 인도에서 상좌부가 사라진 이후 중요한 본부로서 세일론은 상좌부 형태의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3. 동남아 상좌불교의 현황



현재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이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앞의 세 나라에 비하면 그 세력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동남아의 상좌불교는 근본적으로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각국의 전통과 역사에 따라 그 특징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다르다. 동남아 3국의 불교 현황을 살펴보자.



1) 스리랑카의 불교



세일론(현재 스리랑카)의 불교 개교(開敎)는 아쇼까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에 의해 비롯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왕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는 마힌다에게 귀의하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아누라다뿌라(Anur?dhapura)에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를 건립하였다.



또한 아쇼까왕의 딸 상가밋따(Sa?ghamitt?) 비구니는 마가다의 붓다 성도지로부터 보리수를 이식하였다. 어쨌든 아쇼까왕 당시 세일론에 불교가 초전(初傳)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 있다. 세일론에서 발견된 오래된 각문(刻文)에는 아쇼까왕 시대의 문자와 매우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이 섬에서 전개된 불교는 수많은 성쇠의 변천을 겪어왔다. 띳사 왕 후 200년 정도 지나 둣타가마니(Du??hag?ma??)왕이 출현하여 도시 근교에 마리짜왓띠(Maricava??i) 사찰을 지어 승단에 바쳤으며 여러 가지 탑(塔)도 세웠다.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왓따가마니 아바야(Va??ag?ma?? Abhaya)왕 때 그의 귀의를 받은 마하띳사(Mah?tissa) 장로는 왕이 바친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 vih?ra, 無畏山寺)에 머무르면서 또 다른 부파를 세웠다. 이로써 세일론의 불교는 대사파(大寺派)와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또 그때까지 구송(口誦)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三藏)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존하는 팔리문헌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3세기 중엽 고타바야(Go?h?bhaya)왕 때 ‘닥키나 위하라(Dakkhi?a vih?ra, 南寺)’가 독립하였다. 이 파는 후에 제따와나 위하라(Jetavana vih?ra, 祇陀林寺)라고도 불리어졌으며, 4세기에서부터 5세기 초기에 걸쳐 크게 번성한 반면 대사파는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5세기에 들어와 대사파에는 유명한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를 비롯한 주석가들이 나타나 많은 주석서들을 남겼다. 이 무렵 대사파의 세력은 옛날 같지는 않았지만 상좌부의 정통을 고수하려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다.



요컨대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 장로가 세일론에 상좌불교를 전래시켰으며, 거기에서 상좌불교를 굳건하게 설립했다. 세일론의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는 상좌불교의 최고 중심지가 되었다. 상좌불교도들은 세일론에서 테라와딘(Therav?din, 上座部敎徒), 위밧자와딘(Vibhajjav?din, 分別說部敎徒)로 알려졌다. 그러나 ??까타왓투(Kath?vatthu, 論事)??는 스타위라와다(Sthavirav?da) 혹은 위밧자와다(Vibhajjav?da) 대신 사까와다(Sakav?da)라는 용어가 적합하다고 했다. 상좌부 혹은 분별설부는 나중에 제따와니야(Jetavaniya, 祇陀林寺派), 아바야기리와신(Abhayagiriv?sin, 無畏山寺派), 마하위하라와신(Mah?vih?rav?sin, 大寺派)이라는 세 부파로 분열되었다.



그 후 스리랑카는 450여 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네덜란드(1658-1796)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리고 영국(1796-1948)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불교사원은 피폐해졌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른바 씨암파(Siam-nik?ya)·아마라뿌라파(Amarapura-nik?ya)·라만냐파(R?ma??a-nik?ya)가 그것이다. 이 세 종파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암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빨리(Up?li) 장로가 비구 25명과 함께 스리랑카로 와서 구족계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씨암파는 다시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로 양분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을 두고 있다.



 아라마뿌라파는 씨암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만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 일단의 스리랑카 스님들이 버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10,035개이고, 승려의 총 숫자는 32,715명이며, 이 중에서 비구는 15,397명이고 사미는 17,318명이다.



2) 태국의 불교



태국의 불교 역사는 곧 태국(Thailand)의 국가 역사이다. 국가·불교·왕은 하나 속의 셋(Trinity or Three in one)으로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불교는 국가의 종교, 즉 국교는 아니지만 불교 전래 이후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태국의 불교 전래 시기는 둘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아쇼까왕이 소나(So?a)와 웃따라(Uttrara)를 수완나부미(Suva??abh?mi, 지금의 Nakon Pathom)에 파견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스리랑카의 불교가 씨암의 첫 번째 통일국가의 수도였던 수코타이(Sukhothai)에 전해졌을 때였다. 태국의 상가는 세 가지 원칙, 즉 계율과 승가법, 그리고 타이의 관습을 준수한다.



현재 태국에는 2개의 상좌부 종파가 있다. 이른바 ‘마하니까야(Mah? Nik?ya)’와 ‘담마유트니까야(Dhammayut Nik?ya)’가 그것이다. 마하니까야는 수코타이 왕조시대에 스리랑카의 승려들에 의해 성립된 승가와 연계되어 있는 다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후에 왕이 된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자가 1833년 설립한 소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작은 규모의 승단이다. 몽쿠트 왕은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가법(Sa?gha Act)’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의 승가법은 1902년에 제정되었으며, 1941년에 제2차 개정되었고, 1962년에 제3차 개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99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태국불교의 두 중요한 전통, 즉 중국과 베트남계의 대승불교와 마하니까야와 담마유트니까야의 상좌불교는 승가법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다만 승왕(僧王, Supreme Patriarch, Sa?ghar?ja)은 왕이 상좌부 중에서 한 명을 임명하는데, 종신제이다. 태국 승가의 중요한 정책은 ‘최고승가회의(Supreme Sa?gha Council)’ 혹은 ‘대장로회의(Mah?thera Sam?khom)’라고 하는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된다. 이 회의는 8명의 종신회원과 승왕이 임명한 순환회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태국의 승려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상가법’에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 점은 태국과 다르다. 태국 불교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국의 불교교육은 크게 교리학습과 팔리학습으로 구분된다. 교리학습은 3단계로 되어 있고, 팔리학습은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태국어로 가르치는 3단계의 교리학습은 비구와 사미를 위한 기본 교육으로 기획되었다. 팔리학습은 태국어를 팔리어로 팔리어를 태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배운다. 9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왕의 지원과 함께 학사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많은 승려들은 이 시험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팔리시험에 응시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승가에서는 팔리학습의 최고 단계를 박사학위와 동등하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태국의 현대 불교교육은 두 파에서 운영하고 있는 두 개의 불교대학에서 담당하고 있다. 마하니까야의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Mahachulalonkornrajavidyalaya University, MCU)와 담마유트니까야의 마하마쿠트 대학교(Mahamakut University)이다. 두 대학은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국립이다. 두 대학 모두 승려와 재가불자 모두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학사에서 박사과정까지 개설되어 있다.



 특히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는 4개의 단과대학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태국 내에 10개의 캠퍼스와 10개의 교육센터(학습장)가 있다. 그리고 한국·대만·싱가포르 등 3국에 자매학교를 두고 있다. 태국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2년 현재 6300만 인구 중 94%가 불교도이고, 32,000개의 사원이 있고, 265,965명의 비구, 87,695명의 사미가 있다.



3) 미얀마의 불교



미얀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이다. 미얀마는 1989년 5월 27일 국명을 ‘버마(Burma)’에서 ‘미얀마(Myanmar)’로 바꾸었다. 미얀마라는 명칭은 17세기경부터 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미얀마 국명은 범어 Brahma-de?a(‘범천의 국토’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11세기 중엽 상부 미얀마의 파간(P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에 의한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버마족의 영웅 아나와라따(Anawrata 또는 Anuruddha, 1044~1077년 재위, ‘아노야타’라고도 함)왕은 하부 미얀마의 몬족의 나라 타톤(Thaton)을 공격하여, 그곳으로부터 500명의 상좌부 승려를 팔리어 삼장(三藏)과 함께 파간으로 데려와서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 후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 Mah?vih?ra)로 승려를 보내어 대사파 전승의 상좌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파간 왕국은 13세기말(1287년) 몽고(元)의 쿠빌라이 칸(Kublai Khan)에 의해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5천여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면서 상좌부 불교를 발전시켰다.



파간 왕국 멸망 후 200여 년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15세기 후반에 몬족 출신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남부 미얀마의 페구(Pegu)를 중심으로 페구 왕조를 일으킨다. 담마쩨디왕은 1475년 스리랑카로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다시 스리랑카 대사파의 상좌불교의 올바른 계율의 맥을 도입하여, 당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의 승단을 통일한다.



 이로써 미얀마는 파간 왕조의 아노야타왕에 이어 두 번째로 상좌불교의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얀마 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미얀마 불교는 16세기의 법난을 거쳐 17세기에는 가사의 착의법을 둘러싸고 승단의 정통성 문제가 생겼다. 즉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 때 가사로 어깨를 가려야 하는가 한쪽만 가려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승단은 편단파(偏袒派)와 통견파(通肩派)로 분열하여 18세기에 그 정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왕은 보도파야(Bodawpaya, 1782-1819)왕이다. 그의 종교 정책은 ⑴ 미얀마의 상좌부를 통견파로 통일하고 ⑵ 종교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승단을 정비하려고 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의 낮은 카스트의 사미의 수계를 위해서 스리랑카의 사미 몇 명을 당시의 수도 아마라뿌라에 불러 비구계를 받게 하였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돌아가서 아마라뿌라파를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보도파야왕에 의해 시도된 승단의 조직 체제 정비는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Mindon, 1852-1877)왕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다. 민돈 왕은 8명의 학식 있는 장로로 형성된 종교회의소를 수도 만달레이(Mandalai)에 두고 상좌부 승려와 사원을 지도하고 감독하도록 하였다. 1871년 민돈왕은 상좌부 제5차 결집을 개최해서 2,400명의 승려가 만달레이에 모여 팔리삼장과 주석서를 정비, 편찬하여 대리석 729매에 새겨서 만달레이의 쿠토도(Kuthodo)탑에 보관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식민지 등의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승단 내에서 자체 정화를 위해서 몇몇 종파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종파가 쉐진(shwegyin)파, 드와라(Dwara)파, 켓트윈(Hugettwin)파이다. 민돈왕의 종교회의(Thudhamma)에 기인하는 투담마파는 위의 세 파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승단 내부의 문제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민돈왕이 중재에 나서서 위의 세 파를 인정하게 되었다. 위의 세 파는 하부 미얀마에서 활동하였는데, 계율을 엄수하고 스승과 제자간의 복종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세 파의 활동에 자극받아 상부 미얀마의 승단도 정화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고승들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 시험 제도는 왕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영국 식민지 시대에도 1895년부터 46년간 계속되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하였다. 독립 후 초대 수상인 우 누(U Nu)는 승단 및 불교 진흥을 위해서 많은 개혁을 하였다. 1954년~56년까지 거행했던 제6차 결집은 불멸 2,500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된 불교진흥 사업의 하나였다. 1962년 네 윈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정교(政敎) 분리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팔리 국가시험의 실시, 불탑의 보수 등의 불교진흥을 위한 사업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얀마 전 종파 합동 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와 정치적 문제, 종교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전 9종파를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 등록제와 신분의 규정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 팔리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시험과 사설시험이다. 팔리 사설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s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상좌부 불교도이고, 이슬람이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미얀마 고유의 정영(精靈, nat) 신앙이 1.2% 기타가 0.1%이다. 미얀마는 종교 인구 분포에서 알 수 있듯이 스리랑카·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과 더불어 상좌부 불교 국가임을 알 수 있다.



1995년의 미얀마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미얀마에는 전체 승려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Sudhamma? or Thudhamma)파와 8%를 차지하는 쉐진파(Shwegyin)를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상좌부 종파가 있으며, 미얀마의 승려 수는 비구가 162,195명, 사미가 234,595명으로 총 396,790명이다. 통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성 출가자(thira-shin)의 수는 3만 또는 9만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미얀마도 태국과 같이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의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사미계를 받고 절에서 생활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현재 상좌불교 국가 중에서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는 미얀마이다. 전국 각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명상센터(Meditation Center)가 있고, 이곳에서 다양한 수행법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상좌불교 국가보다 두드러진 현상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는 그곳에서 교의를 정비한 다음 벵갈만을 건너 동남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후일 스리랑카 불교가 유럽의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로 인해 쇠퇴하자, 이번에는 동남아시아가 스리랑카 불교의 재건을 도왔다. 이처럼 상좌불교의 역사는 서로 돕고 보완하는 종교교류의 역사였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11세기에 위자야바후(Vijayab?hu) 1세가 버마의 아노야타왕의 도움을 받아서 법통을 계승하였다. 반대로 13세기가 되어 버마의 파간 왕조가 멸망함으로써 버마의 상좌부도 함께 쇠퇴하고 만다. 그리하여 페구 왕조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1476년에 비구와 사미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콜롬보 교외의 깔야니(Kaly???)(지금의 Kala?iya)에서 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이 왕이 깔야니(Kaly???) 비문을 남겨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버마 상좌부의 주류는 이때 전해진 것이다.



또한 스리랑카는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에 의해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불교도 이때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후반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쇠퇴해 가던 상가에 새로운 정통성과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태국에서도 라마 캄헹(R?ma Khamheng, 1275-1317)왕이 13세기에 비구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당시 대사파로 통일되어 있던 스리랑카의 불교계로부터 다시 정통적 상좌부 불교를 수입하였다. 이것이 태국의 마하니까야(Mah? Nikaya)이다.



버마에서는 11세기 중엽에 아노야타왕이 출현하여 남부 버마의 몬족(族)을 정복하여 파간에 수도를 정하고 몬족을 통해 알게 된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제정했다. 타이에서는 13세기 중엽에 수코타이 왕조의 제2대인 라마 캄헨왕이 스리랑카계의 불교를 국교화(國敎化) 하였다.



 또 캄보디아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종교가 오랫동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9세기에 이루어진 앙코르왓트(Angkor Wat)의 장엄한 불교 유적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야와르만(Jayavarman, 1181-1218 재위) 7세 때인 1181년에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 앙코르 왕조가 태국인들의 세력에 의하여 붕괴되자, 캄보디아에는 상좌부 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상좌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남방 상좌부라는 한 계통으로만 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동남아시아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인도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인도문화가 들어왔다. 이를테면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들이 도입되었다. 일종의 혼돈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상좌부 불교로 정비되었다. 그 이면에는 각각 그 지방이나 나라에서 상좌부 불교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국교적인 위치를 공고히 해 준 뛰어난 국왕의 힘이 밑받침되었다. 현재의 동남아 상좌불교는 그 나라에서 국교(國敎)는 아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보호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성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초기불교 인간관 연구(Man in Buddhist Perspective)’로 부(副)철학박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과 강사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대학교 한국분교를 비롯한 각종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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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7

밀교 (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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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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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密敎)는 비밀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문자 언어로 표현된 현교(顯敎)를 초월한 최고심원(最高深遠)한 가르침을 말한다.[1] 일본에서는 진언종의 구카이(空海)가 불교를 현밀이교(顯密二敎)로 판별하여 금강승, 즉 밀교의 우위를 주장했다.[1]
중국의 불교에서는 밀종(密宗)이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불교에서는 진언종이라고도 한다. 밀교는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하는데, "밀교"와 "금강승"이라는 두 낱말은 티베트 불교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금강승, 즉 밀교는 불법승 삼보 중에서 의 화신인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종파이다. 밀교는 법신불(法身佛)로서의 대비로사나불(大毘盧舍那佛), 즉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부처 자신 및 그 권속(眷屬)을 위하여 비오(秘奧)한 신구의(身口意)의 삼밀(三密)을 풀이한 것으로, 《대일경(大日經)》에서 말하는 태장계(胎藏界), 《금강정경(金剛頂經)》에서 말하는 법문(法門)이나 다라니(陀羅尼) · 인계(印契) · 염송(念誦) · 관정(灌頂) 등의 의궤(儀軌)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1]
금강승, 즉 밀교는 티베트에서 가장 흥하였고, 아직도 티베트의 지배적인 종교 또는 종파이다.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이 깊게 들어온 불교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 즉 관자재 보살, 혹은 천수천안보살의 화신으로 정교 일치의 지도자로 깊이 존경한다 (참고 판첸 라마). 밀교, 즉 티베트 불교는 중국을 두렵게 할 만큼 호전적이었던 토번, 즉 지금의 티베트인을 가장 평화를 추구하는 민족으로 바꿀 만큼 티베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밀교는 중국 원나라 때도 전파되어 오늘날 밀교를 가장 많이 신앙하는 지역은 티베트와 몽골이다.

성립 연대[편집]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v • d • e • h
 450 BCE250 BCE100 CE500 CE700 CE800 CE1200 CE




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금강승





 상좌부 불교

 
 





티베트 불교


 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450 BCE250 BCE100 CE500 CE700 CE800 CE1200 CE
 범례: 상좌부 불교 전통 대승불교 전통 밀교·금강승 전통

밀교의 대두[편집]

인도는 본래 다신교의 나라였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제신(諸神)을 숭배하였으며, 재앙을 막고 복을 받기 위한 요가수행과 성구(聖句)·만트라(眞言)의 구송(口誦), 불 속에 물건을 던져넣으면서 하는 여러 종류의 기원 따위가 행해지고 있었다. 노력에 의하여 정각(正覺)에 이를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타의 가르침은 이들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으나 꽤 오래전부터 불교 속에 바라문교의 여러 신들이 수호신으로서 받아들여졌고 또 수호주(守護呪) 따위가 독송되고 있었다. 7세기에 들어와서 화엄경(華嚴經) 등 대승불교의 경전을 기반으로 하여 바라문교와 기타 민간종교의 주법(呪法)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밀교가 성립되었다. 밀교라 함은 다라니나 만트라를 욈으로써 마음을 통일하여 정각에 이르고자 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이며 그 심오한 경지는 외부에서 들여다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는 비밀교라는 뜻의 약칭이다. 여기에는 범신론적인 불타관은 나타나지 않고 만다라(曼茶羅)와, 외우면 영험을 얻게 된다는 다라니(陀羅尼), 식재(息災)·조복(調伏)·증익(增益)을 위한 호마법(護摩法) 등 제법(諸法)의 채용이 그 특색이다.[2]

인도의 밀교[편집]

원시불교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세속적인 주술(呪術)이나 비의(秘儀)가 차차 인도 불교 속에 침투되었는데, 특히 재가신자(在家信者)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대승불교에는 그 경향이 강하여 대승경전 속에 다라니라고 부르는 주문(呪文)이 있으며 후일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경전이 되었다.[3]
한편, 부처의 법신(法身)의 가르침도 그 범신적(汎神的) 경향으로 신비주의와 연결되기 쉽고, 그 신비주의적 해석 중에는 불교의 궁극적(窮極的)인 입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
이리하여 대승불교의 새로운 전개로서 금강승(金剛乘)이라고 부르는 밀교의 교의가 성립되고, 7세기경 그 교의를 설(說)한 《대일경(大日經)》이나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출현하였다.[3]
밀교는 부처의 입장에서의 비밀행(秘密行: 삼밀 · 三密)이기 때문에 자기수행이라는 면이 적고, 현실긍정적이라는 면에서 일반인에게 침투하기 쉬워 급속하게 확대되었으나, 현세의 행복추구가 동시에 쾌락추구라고 하는 타락의 위험을 품고 있고, 후에는 남녀의 결합을 신성시하는 좌도밀교(左道密敎)를 낳아 인도 불교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3]

잡밀(雜密)·순밀(純密)[편집]

초기의 밀교사상에는 제존(諸尊)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나, 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성립하여 밀교의 이론적 근거가 정비되자 밀교교리의 실천에 의한 성도(成道)가 강조되었다. 이것을 순밀교라 칭하고 그밖의 것을 잡밀이라고 하여 구별한다. 순밀은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한다.[2]

좌도밀교(左道密敎)[편집]

밀교는 바라문교 혹은 힌두교의 지반을 이용하여 퍼지게 되었는데 뒤에는 힌두교의 일파인 시바의 여신 샤크티(性力)를 숭배하는 샤크티파 따위와 결부되어 윤좌예배(輪坐禮拜)와 성적 황홀경 속에서 해탈을 얻으려는 좌도밀교(탄트라 불교)라고 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애욕과 쾌락을 긍정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가르치려 한 것이었으나 인도의 민중 사이에 잠재해 있었던 성(性) 숭배의 신앙과 겹쳐서 비외(卑猥)스러운 성적비의(性的秘儀)에 떨어지는 수가 많았다.[2]

인도불교의 멸망[편집]

굽타 왕조(270∼470년경)를 중심으로 하여 최성기를 맞았던 대승불교는 뒤이어 고원(高遠)한 학문과 사상체계로 이론화되어 종교로서 민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밀교는 민중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나 힌두교적 색채가 강해짐에 따라서 불교 본래의 모습은 희박해지고 다시 좌도화(左道化)되어 타락의 길을 걸음으로써 당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고 있던 인도 제왕(諸王)의 민족의식과 결부되어 부흥기에 있었던 전통 바라문교-힌두교 앞에서 후퇴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었다. 특히 12세기말부터 13세기초에 걸쳐 배타적 일신주의를 내건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불교의 중심지였던 비하르지 방을 점령하고 밀교의 본거지였던 비크라마시라 사원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사원을 파괴하고 많은 승려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내외적으로 쇠퇴가 촉진되어 인도 땅에서 쇠망하게 되었다. 오늘날 아삼이나 벵골 지방에서 소수의 불교도가 잔존해 있으며 또한 일부에서는 부흥운동도 일어나고 있다.[2]

중국의 밀교[편집]

시대(隋唐時代)의 종파 불교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인도 밀교(密敎)의 중국 전래이다.[4]
다라니(陀羅尼)는 예로부터 조금씩 중국으로 전해졌으나 나란다사(寺)의 학승(學僧)이었던 선무외(善無畏)가 716년(당 현종의 開元4)에 입조(入朝)하여 밀교를 전하면서 《대일경(大日經)》과 그 밖의 것을 번역했다.[4] 선무외의 제자인 일행(一行: 683-727)은 삼론(三論)과 천태(天台)를 배워 이 입장에서 《대일경》을 주석하여 《대일경소(大日經疏)》를 저술했다.[4]
또한 720년(당 현종의 開元8)에는 역시 나란다사(寺)의 학승인 금강지(金剛智)가 와서 《금강정염송경(金剛頂念誦經)》을 번역했으며 또한 그의 제자 불공(不空)은 스승의 사망 후 인도에 돌아가 밀교 경전(密敎經典)》을 비롯한 80부의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4]
만다라(曼茶羅)의 염송(念誦), 다라니의 독송(讀誦),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인 수법(修法)을 행하는 밀교는 중국으로의 전래 당시부터 당나라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국가종교적 색채가 짙었으며 후에는 민간에도 유행했다.[4] 당나라 말기에는 무종(武宗)의 폐불(廢佛)로 큰 타격을 받아 민간신앙에 동화했으나 밀교가 지니는 의례나 기도는 중국의 다른 불교 종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4]

한국의 밀교[편집]

한국에 밀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의 명랑법사(明朗法師: fl. 668)가 선덕왕 4년(635)에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부터이다.[5] 명랑은 밀교를 신라에 처음 전래하여 진언종의 별파인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되었다.[5][6]
같은 시대의 밀본(密本: fl. 7세기)도 비밀법(秘密法)을 통해 선덕왕의 질병을 치유하여 밀교 전파에 공헌하였다.[5]
명랑과 밀본 이후 혜통(惠通: fl. 7세기)은 당에서 인도 밀교승 선무외(善無畏: 637-735)에게 밀교 교의를 배운 다음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하여 크게 교풍(敎風)을 일으켰으며, 후대에서는 혜통은 해동 진언종(眞言宗)의 조사로 삼았다.[5]

일본의 밀교[편집]

일본의 진언종은 구카이(空海 · くうかい · 홍법 대사: 774-835)가 중국 당나라의 장안으로 건너가 청룡사에서 혜과로부터 배운 밀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7]
일본의 진언종은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사상을 강조하였다.[7] 종교의 실천적인 면에서 일본의 진언종은 밀교의 방법을 더욱 중시한다.[7] 또 "국가의 안정을 수호"하며 "재앙을 없애고 복을 쌓는 것"을 경서를 읽고 불사에 종사하는 목적으로 간주하였다.[7]

티베트의 밀교[편집]

밀교는 티베트에서 가장 흥하였고, 지금도 티베트의 지배적인 종교 또는 종파이다. 때문에 "밀교" 또는 "금강승"이라는 두 낱말은 티베트 불교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