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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8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박규태

5. 박규태.pdf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박규태
박규태(朴奎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라프카디오 헌의 일본론』, 
『일본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애니메이션으로 읽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황금가지』, 『국화와 칼』,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 신도사』 등이 있다.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8-362-B00006).

1. 들어가는 말

<휴머니티플러스>(H+, 세계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의 전신)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이하 TH)을 “생명의 증진을 위한 원리와 가치에 입각하여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현재의 인간 형식과 한계를 넘어서서 지적 삶의 진화를 유지하고 촉진시키고자 하는 일군의 삶의 철학”1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인 간향상(human enhancement)을 위한 창발적인 테크놀로지를 옹호하는 문화 적· 지적 운동으로서의 TH는 테크놀로지를 적용하는 방법과 선택 과정에 서 윤리적 문제를 수반하는데, 그 적용의 맥락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한 만큼 여러 상이한 유형이 존재한다. 
가령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경제적 계층의 인간을 적용 대상으로 삼아 성공과 행복의 한층 더 큰 차원으로 인간이 고양될 것이라는 윤리적 비전에 입각한 ‘민주적(democratic) TH’, 발전과 향상을 시민적 권리이자 자유로 보 는 점에서는 민주적 TH와 유사하지만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좀 더 강조하
고 정부 차원의 규제에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자유주의적(libertarian) TH’, 인류와 테크놀로지 발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에서 인간 진화와 발 전의 총체적인 업그레이드에 대한 실용적 접근을 강조하는 ‘엑스트로피주 의(extropianism) TH’,2 테크놀로지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 즉 초지성 을 가진 기계가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질 것이며, 그것이 인류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는 확신에 입각한 ‘특이점주의(singularitarianism) TH’, 약물과 유전 자공학의 진화를 통해 인간 심리 상태가 향상될 것이라 주장하면서 고통, 걱정, 스트레스 등의 인간 경험은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으로 보는 ‘쾌락주 의적(hedonistic) TH’,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TH로 인간 조건을 업그레이드

1 < 휴머니티플러스> 홈페이지 http://humanityplus.org/.
2 여 기서 ‘엑스트로피’란 ‘엔트로피’의 반의어로 주조된 용어며, <엑스트로피 연구소>의 설립자 막스 모 어(Max More)에 의해 “유기체 시스템의 지성, 기능적 질서, 활력, 에너지, 생명, 경험, 발전과 성장의 능력 및 추동력 등의 상태와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규정한다. 요컨대 무질서를 강화시키는 엔트로피 에 반해 엑스트로피는 질서를 강화시키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듯싶다. 신상규,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머니즘』, 아카넷, 2014, 114~116쪽.
 
함으로써 죽음이 정복될 것이라고 보는 등 노화와 죽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 추는 ‘생존주의자(survivalist) TH’, 인간을 특정 도시나 국가가 아닌 세계시 민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리즘적· 지리적· 애국주의적 충성 대신 하나의 종으로서의 전체적인 통합성을 강조하고 그런 인간 종족의 진 화를 위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계주의적
(cosmopolitan) TH’, 인류가 다음 단계의 집합적 사유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 한 길은 세계에 대해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나아가 우리가 학습하고 창조해 낸 것들을 깊이 재성찰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는 ‘우주진화론(cosmism) TH’, 반자본주의적· 반국가적 입장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무정부주의 적 민주주의 체제를 촉진시킬 것이며 그 결과 정부나 국가가 불필요해질 것 이라고 믿는 ‘무정부주의적(anarcho) TH’, 그리고 현존하는 여러 종교와 TH 가 양립 가능하다고 보는 ‘종교적(religious) TH’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와 같은 TH의 다양한 유형 가운데 특히 ‘종교적 TH’ 와 관련하여 종교와 TH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흔히 애미니즘적이라고 일 컬어지는 일본 신도(神道)와 불교 및 각각의 가미(神)와 호토케(佛) 관념이 일본의 TH적 테크놀로지 문화의 중요한 밑그림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하에서는 먼저 TH와 종교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는 다 양한 담론을 간략히 계보화한 후, 네오-애니미즘에서 테크노-애니미즘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 일본의 사례에 적용시켜 그것을 ‘신불-애니미즘’이 라 명명할 것이다. 이어서 그런 신불-애니미즘과 관련하여 가미와 호토케 의 개념사를 살펴본 후 유희성,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trans-spirituality), 하 이브리드(hybrid), 모노노아와레(物哀)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종교와 TH적 일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
인간향상이라든가 ‘묵시론적 인공지능’(apocalyptic AI)이라는 TH의 이상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단체로, 전술한 <휴머니티플러스>를 비롯하여 <엑스토
피아 연구소>, <윤리와 창발적 테크놀로지 연구소>(Institute for Ethics and Emerging Technologies), <우주 엔지니어 단체>(Order of Cosmic Engineers)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막스 모어(Max More), 제임스 휴즈(James Hughes),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한스 모라벡(Hans Moravec), 레이 커즈와 일(Ray Kurzweil) 같은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이념이 21세기에 널 리 확장되어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철학 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TH에는 종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신념체계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 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물론 <몰몬교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라든가 <기독 교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처럼 종교인들이 구성한 TH 조직뿐만 아니라 
‘트랜스종교’(transreligion)를 표방하는 <테라셈(Terasem) 운동> 같은 TH적인 
종교시스템도 있지만, 대부분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도라든가 종교의 례를 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티로시-사무엘슨(H. Tirosh-Samuelson)은 다양한 유형의 TH를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종교와 초월의 문제에 접근하는 “세속적 신앙”(a secular faith) 이라고 규정한다. 전술한 <휴머니티플러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확실히 TH는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이다. 하지만 레이너(D. Rayner) 에 따르면 “무신론은 제4의 아브라함 종교”와 다름이 없다. 즉 무신론도 유 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서구 유일신 전통에서 비롯된 하나의 종교라 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자면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TH를 종교와 연관시켜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셈이다. 

이와 달리 종교를 전(前)트랜스휴머니즘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종교는 TH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TH를 낳고 키우는 토양 혹은 씨앗이라는 것 이다. 역으로 TH를 전(前)종교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양자를 파트너 관계로 보는 견해 또한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인 간향상에 있어 TH와 종교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TH도 종교도 인간 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며 인간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변형시킨다는 TH의 목표는 대부분의 종교가 내세우는 목표와 공통된다. 사실상 종교의 목표도 인간의 변형에 있기 때문 이다. 양자는 다만 그 목표에 이르는 통로가 다를 뿐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면, TH는 과학을 통 해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TH와 종교의 파트너 관계는 양자의 유사성에 입각할 때 한층 더 강고 해질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종말론, 신정론(theodicy), 구원론 등과 관련하여 종종 양자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첫째, 레이 커즈와일은 테크놀로지적 특이점9이 가까워졌다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을 비롯하여 버너 빈지(Vernor Vinge) 같은 특이점주의자(Singularitarian) 들은 초인공지능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초인공지능의 출현은 그 로 인해 인류가 대파국을 맞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급 격한 테크놀로지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특이점은 역사적 시간 개념을 벗어 난 전혀 새로운 단계로의 전이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종교적 종말론의 속성을 가진다.
cordiaabchao.wordpress.com/2014/08/14/paganroots/) 참조. 
 
둘째, 광의로서의 신정론을 ‘악과 고통의 문제’를 묻는 물음이라고 규정
할 수 있다면, 인간 한계에서 비롯되는 질병, 노화, 죽음 등의 악과 고통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한 인간향상을 추구하는 TH 의 문제의식 또한 신정론과 동일한 물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와 같은 TH적 신정론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정론 혹은 홀로코스트 이후 인간의  책임을 묻는 ‘인정론’(anthropodicy)을 훨씬 넘어서서 인간이 신이 될 것을 주 장하기도 한다. TH는 인간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단계다. TH적 신정론의 본질은 악과 고통의 존재를 신에 의해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악 을 없애느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서 신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무다. 그래야만 악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크 워커(Mark Walker)는 이런 관점을 ‘네오-이레니우스적 신정론’ (Neo-Irenaean Theodicy)이라고 부른다.  

셋째, 홉킨스(P. Hopkins)는 종교도 TH도 동물성을 초월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는 닮은꼴이라고 말한다.  양자 모두 ‘초월’이라는 구원론적 모티브 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우식은 트랜스휴먼이 호모 사피엔
스로부터 호모 트란센덴탈리스(homo transcendentalis), 즉 ‘초월적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 호모 트란센덴탈리스는 명백히 호모 사이엔티피쿠스
(homo scientificus, 과학적 인간)와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
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종교와 TH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부터 종교로서의 TH 를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이 논의되어왔다. 가령 과학적 종교, 대체종교, 신 종교, 테크노-종교, 데이터-종교, 최후의 종교, 신영지주의, ‘참된 가짜’ 종 교로서의 TH 담론들이 그것이다. 먼저 드 가리스(H. De Garis)는 과학자들 의 종교를 ‘우주진화론주의’(cosmism)라고 부르면서, 이런 과학적 종교의 일 차 목적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들에게는 인공지능이 일 종의 종교인 것이다. 또한 사이보그주의자들의 목적은 그들 자신이 인공지 능신이 되는 데에 있다.14 이들은 로봇공학이 인간에게 신적인 힘과 권능을 부여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불멸이라든가 사자의 부활 등과 같이 고래 로부터 오랫동안 종교가 목표로 삼아온 것들을 테크놀로지가 이룰 수 있으 리라고 믿는다.
한편 종교의 대안을 추구하는 대체종교로서의 뉴에이지 운동이나 스피
리추얼리티 운동도 TH와 그 목표가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낡은 종교 대신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우주적 내러티브를 요청” 하는 TH 또한 일종의 대체종교로 볼 수 있다. 아마라신감(A. Amarasingam)은 여기서 더 나 아가 TH로 대변되는 미래학을 전통종교에 도전하는 하나의 신종교운동으 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묵시론적 인공지능’이라는 TH의 어젠다가 이미 우리의 공공생활과 현대의 종교적 다원주의 안에 들어와 있으며 현대 윤리학의 한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도 신종교로서의 TH를 시 사한다. 그는 『호모 데우스』(Home Deus)에서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 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는 별 관계가 없고 기술과 관계있는 용감한” 이 신종교를 하라리는 ‘테크노-종교’(techno-religion, 기술종교)라 명명한다. 테 크노-종교는 사후에 천상의 존재들을 통한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행복, 평화, 번영, 심지어 영생까지도 주겠다고 약 속한다. 그는 이런 테크노-종교의 두 유형으로 테크노-휴머니즘(techno-
humanism, 기술 인본주의)과 데이터-종교(data-religion, 데이터교)를 제시한다. 이 중 21세기의 테크노-휴머니즘은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와 컴퓨터를 연결

14  Hugo de Garis, “The Artilect War,” Issues 98, March, 2012, pp.15~16.
하는 인터페이스의 도움으로 전혀 다른 초인간 모델인 ‘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훨씬 우수한 인간 모델로서의 신적 인간[神人]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7 이에 비해 데이터-종교에 있어 우주는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 루어져 있고, 그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이라 불리는 “신과 같은” 데이터 처리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 면 ‘스피리추얼한 인터넷’ 이 마치 편재하는 신처럼 모든 것을 통제할 것 이고 인간은 전적으로 그 만물인터넷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19 이와 같은 테크노-종교는 종교의 최종적인 진화단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하
여 브루얼(D. Bruere)은 하라리와 유사한 어조로, TH를 영지(靈知, Gnosis), 즉 ‘참된 지식’에 의한 구원을 추구했던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와 유사성을 보여주는 ‘최후의 종교’ 로 이해한다.  
한편 모라벡은 『마음의 아이들』 에서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나 로봇에 다운로드하거나 업로드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그는 지구의 모든 과거 거주자들의 부활과 마음 이식이 가능해지는 미래를 묘사하기도 한다. 종교학자 이창익에 따르면 “이런 모라벡의 상상력은 종교적 상상력과 무척 닮아 있다. 가령 마음 이식을 통해 하나의 영혼이 동시에 여러 개의 신체를 소유할 수 있고 연속해서 다른 신체를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환생이나 윤회의 기계적 실현을 가리킨다. 그는 영혼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는 기계라는 미래의 신체에 다운로드되는 과거의 영혼(마음)으로 이해된 다. 이것은 종교적 세계의 기계적 실현이자 종교가 사라진 세계다. 이리하 여 그는 신체에서 해방된 ‘우리의 마음이 낳은 아이들’이 거주하는 현세적 내세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22

17  유 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481~483쪽.

이와 같은 모라벡의 발상 또한 “육체에서 해방된 마음 혹은 영혼”이라는 
영지주의적 주제의 각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불완전하고 악 한 신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이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라고 보았
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 몸에 대한 TH의 관점이, 몸이란 영혼을 가두어놓은 사악한 함정이나 감옥일 뿐이라고 보는 ‘신영지주의’로 간주되기도 한다.  종교학자 데이비드 치데스터(D. Chidester)는 『참된 가짜』에서 종교를 “초 인간적인 것 및 하위인간적인 것과 관련시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절 충하고 극복하려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참된 가짜’란 종교가 일련의 사기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종교적 효과를 야기한다는 것, 가령 초월의 감각을 제공하거나 인간 행동에 대한 의미를 확장시킨다거나 혹은 공동체를 확립시켜주는 역할을 해왔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게라시(R.M. 
Geraci)에 따르면 TH의 묵시론적 인공지능의 특징적 요소들은 이와 같은 ‘참된 가짜’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TH는 미래에 초인간적인 상 태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음으로써, 치데스터가 정의하는 종교, 즉 인 간이라는 의미의 극복과 관련된 신념과 실천을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이런 ‘참된 가짜’의 개념을 하라리는 ‘공유된 허구’ 혹은 ‘상상의 질서’라 고 바꿔 말한다. 하라리에 따르면 “21세기에 역사학과 생물학의 경계가 흐 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념(ideology)이라는 허구(fiction)들이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 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
22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종교문화비평』 31, 2017, 223~224쪽.
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석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 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 야 한다.”26 여기서 ‘허구’란 사회적 조화를 위해 공유된 어떤 것을 가리키 고, ‘이념’이란 주로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하라리는 “근대 과학은 확실히 게임의 룰을 바꾸었지만, 그 렇다고 신화를 사실로 대체한 것은 아니다.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27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TH로 대 변되는 과학, 그리고 신화로 대변되는 종교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이며,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인 휴머니즘28은 이와 같은 자기기만의 능 력, 즉 우리의 공유된 허구들에 광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포스트 휴머니즘을(따라서 TH도) 이런 휴머니즘의 한 변형체로 보는 듯한 하라리는 “당대의 기술적 현실들을 알지 못하는 종교는 요청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필자의 윤문) 이라 하여 종교와 TH가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시사한다. “종교와 기술은 서로를 밀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서 멀리 벗어날 수 없”29 기 때문이다.
세속적 신앙 혹은 무신론적 종교로서의 TH, 종교의 파트너로서의 TH, 
종말론· 신정론· 구원론 등에 있어 종교와 TH의 유사성, 과학적 종교, 대체 종교, 신종교, 테크노-종교, 데이터-종교, 최후의 종교, 신영지주의, ‘참된 가짜’ 종교로서의 TH를 말하는 이상의 관점들은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가지 면서도 공통적으로 종교와 TH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리하 여 이창익은 인간의 영혼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트랜스휴머니스트적 기획이 란 일종의 종교 이야기라고 천명한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우고자 

26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03, 215~216쪽. 
27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49~250쪽. 
28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307쪽.
29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372쪽. 

하는 이야기, 심지어 욕망과 시간과 영혼까지도 지우고자 하는 이야기, 식 물이나 동물 심지어 광물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 간이기를 멈추고 인간 아닌 것, 인간 너머의 것이 된다는 것은 바로 종교적 사유의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0 

3. 애 니미즘의 일본지(日本誌):  
네오-애니미즘, 테크노-애니미즘, 신불-애니미즘 

1) 네오-애니미즘

이처럼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등의 경계가 삼투압적인 종교적 사유를 대표 하는 것으로 애니미즘을 들 수 있다. 20세기 초 타일러(E.B. Tylor)가 주장한 ‘만물에 내재하는 정령 혹은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이라든가 ‘최소한의 종교 정의’를 가리키는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는 학계에서는 오래 전에 폐기 되었으나 대중적으로는 매우 강력하게 살아남았고, 근래에 들어 생태학이나 인류학의 네오-애니미즘 논쟁 및 종교학 등에서 ‘새로운 사유를 열어줄 수 있는 개념’으로서 학문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런 ‘새로운 사유’와 관 련하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론적 인식론’(relational epistemology)에 특 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애니미즘은 몸-마음의 서구적 이분법을 넘어 상 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31  이에 따라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타일러의 어법이 아닌 오지브
와(Ojibwa) 담론에 따른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류학자 어빙 할로웰(I. Hallowell)은 아메리카 원주민 오지브와 족의 연구를 통해 ‘퍼슨’(person)이라 는 용어를 인간만이 아닌 모든 종에 포괄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퍼슨들’(other-than-human persons)이라는 말을 주조하여 인간

30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220쪽.
31 대 표적으로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E. Viveiros de Castro), 버드-데이 빗(Nurit Bird-David), 호른보르크(A. Hornborg) 등의 주장을 들 수 있다. 

도 그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는 활물(animate beings)임을 주장한다. 이때 퍼슨 이란 가령 ‘사람 퍼슨’과 ‘사람이 아닌 퍼슨’,32 ‘선더버드 퍼슨’과 ‘선더버드 가 아닌 퍼슨’, ‘바위 퍼슨’과 ‘바위가 아닌 퍼슨’ 등과 같이, 사람 외에도 새 라든가 바위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할로웰은 인간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어떤 것을 퍼슨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과의 유사 성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할로웰은 퍼슨을 인간적 속성이나 행위에만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범주, 즉 ‘인간’보다 훨씬 더 크고 포괄적인 범주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 Harvey)는 이런 퍼슨이라는 말을 모든 종 사
이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각 종들 간의 차이는 이런 유사성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 세계의 관계론적 속성에 주목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퍼슨들은 그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다른 퍼슨들과 관계할 때 비로소 퍼슨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
다. 따라서 오지브와 담론에서 애니미즘은 구성원 대부분이 ‘인간과는 다른 퍼슨들’의 공동체 안에서 잘 살고자 하는 시도를 지칭한다. 그것은 다양한 관계론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가리킨다.  하비는 애니미즘을 “세계가 퍼슨 들의 공동체이며 그 가운데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세계관에 주어 진 꼬리표” 라고 재정의한다. 이때 인간은 퍼슨들로 구성된 애니미즘적 세 계의 일부가 되며, 사람이 아닌 것들도 퍼슨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다시 말 해 퍼슨이라는 범주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의 내적 속성, 즉 신념, 합리성, 주체성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성의 관점에서 인격성(personhood)을 파악하는 서구적인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비는 이와 같은 네오-애니미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종교에 대해서도 

32   오지브와 족은 죽은 조상의 영을 ‘사람이 아닌 퍼슨’으로 지칭한다. Irving Hallowell,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 T.S. Smith, The Island of the Anishinaabeg, University of Idaho Press, 1995, p.4.

“상관적이고 물질적이며 참여적인 세계 안에서 함께 거주하는 퍼슨들 사이 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교섭(negotiation)” 나아가 “그렇게 상관적으로 실재하 는 세계 안에서의 에티켓 체계(etiquette system)”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종교 는 다양한 ‘퍼슨’들로 구성된 종들 사이의 에티켓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이다. 여기서 에티켓이란 사람들의 행위규범이나 의식(ritual), 혹은 인간보 다 더 큰 세계(‘퍼슨’들의 세계: 필자)에 있어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 치는 퍼슨들 간의 관계성과 관련된 하나의 공적(公的)인 교섭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말하는 ‘다도의 종교’37라 든가 ‘가타(型)의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는 일본이야말로 이런 ‘에티켓으로 서의 종교’가 잘 발달된 사례일지도 모른다. 17세기 말 일본을 여행한 독일 인 외과의사 캠퍼(Engelbert Kaempfer)는 그의 『일본지』에서 일본을 “세계 어 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의바르고 정중하며 호기심에 가득 찬 나 라” 로 묘사하고 있다. 그를 감탄케 한 것은 몸에 붙은 예의범절이 일본사 회 전체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캠퍼는 “비천한 시골촌 부에서 고귀한 계층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행위 작법은 제국 전체를 시민 적 교제(civility)와 에티켓(good manners)의 학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나 다” 고 격찬한 것이다. 

2) 테크노-애니미즘

카스퍼 젠슨(C. Jensen)과 앤더스 블록(A. Blok), 앤 앨리슨(A. Alison)은 이런 ‘에 티켓의 학교’로서의 일본에 네오-애니미즘을 적용시킨 것을 ‘테크노-애니미
즘’(techno-animism)이라고 부른다. 가령 젠슨과 블록은 인간이 아닌 것들, 즉 
앞서 언급한 퍼슨들의 세계와 맺는 관계의 운반체로서 신도(神道)를 지목한 다. 신도는 복잡하고 근대화된 고도의 테크노-과학적인 일본 안에 “살아 있 는 애니미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젠슨과 블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일본의 테크놀로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는 자주 신도적인 것이 일본 고래의 영적 신앙과 우주론적 상상력의 애니미즘적 층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언급되곤 한다. 그때 일본은 신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는 ‘테크노-애니미즘’의 나라로 묘사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 동물, 영적 존재, 기계적 존재 간의 경계를 
단호하게 해체하는 다형적 도착성(polymorphous perversity)을 엿볼 수 있다. 신도
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내재적· 감성적· 매혹적인 힘들을 해석하는 데에 흥 미로운 소재를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신도적 테크노-애니미즘은 과학, 정치, 생 태학, 우주가 서로 얽혀 있는 현대 상황에 관한 한층 더 폭넓은 사고를 불러일
으킨다.  

위 인용문은 네오-애니미즘이 그렇듯이 테크노-애니미즘 또한 새로운 
지적 영역을 열어주리라는 기대를 표출하고 있다. 실제로 신도를 논하는 많 은 일본인은 신도의 특징으로 무엇보다 자연과의 애니미즘적인 친화력을 꼽곤 한다. 이때 ‘자연’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일본 에서는 “자연을 아끼자”(自然にやさしい)라는 표어가 늘 회자되는데, 이때의 자연은 네이처(nature)의 번역어다. 원래 근대 일본인은 네이처를 두 가지 단 어로 번역했다. ‘덴넨’(天然)과 ‘시젠’(自然)이 그것이다. 이 중 덴넨이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시젠은 이념화된 자연을 가리킨다. 오늘날 일본인이 자 연(시젠)을 말할 때 그 실질적인 내용은 종종 덴넨을 인공적으로 바꾼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가령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며 덴넨에 인위를 가하여 바꾸는 것이 일본 정원술의 특징이다.42 그러니까 일본인이 생각하는 자연 혹은 애니미즘이란 애초부터 인공성과 쉽게 결합될 수 있는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일본을 “테크노-애니미즘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문화인류학

자 앤 앨리슨은 『세기의 괴물들』에서 각종 장난감과 캐릭터 상품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일본적 테크노-애니미즘의 특징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사회생 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애니미즘적 무의식’(animist unconscious)에 주목한 다. 그런 애니미즘적 무의식으로 인해 일본 문화에는 첨단 테크놀로지와 스 피리추얼한 것들이 쉽사리 뒤섞여 공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앨리슨은 이 와 같은 애니미즘적 감각을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 혹은 자연과 테크 놀로지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획 짓지 않는 일본의 민속전통, 신도, 불교적 관념과 연관시켜 이해한다. 가령 앨리슨은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에 지속적 으로 나타나는 테크노-애니미즘의 출발점으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만화 『철완 아톰』(1963)을 들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과 비슷한 마음이나 영 혼을 가지고 있는 로봇 소년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런 일본 대중문화는 “모 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바위에서 개미에 이르기까지 우주만물에 스피 리추얼리티가 스며들어 있다”는 일본의 애니미즘적 종교 전통에 의해 고취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테크노-애니미즘은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몸에 딱 맞는 옷 같
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의 테크노-애니미즘이란 “상품소비주의의 물질적 실천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스타일로서, 현대 테크놀로지와 상품 에 영혼과 생명을 부여하고 뉴에이지적 관행을 통해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 는 것” 을 가리킨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관련 캐릭 터 상품들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파워레인저’, ‘도라에몽’, ‘울트라맨’, ‘드래곤볼’, ‘세일러문’, ‘마징가Z’, ‘건담’, ‘다마고치’, ‘포켓몬스터’, ‘헬로우 키티’ 등을 비롯한 각종 캐릭터 상품, 특히 로봇이나 사이보그 캐릭터를 조 형화한 피규어 상품 등을 들 수 있다. 앨리슨은 이런 상품들에 대해 발터 벤 야민의 개념을 빌려 ‘마법의 상품’(enchanted commodities)이라고 명명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포켓몬스터’나 ‘세일러문’ 같은 장난감 캐릭터들은 마치 생명이 부여되어 살아 있는(animated) 것 같은 명확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장난감 피규어들에게 생명과 행위주체로서의 속성을 불 어넣는다든지, 로봇과 동물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해체된 그런 세계 안 에 함께 위치시키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한편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에 천착해온 스테프 어퍼스(S. Aupers)는 「기 계의 복수: 근대성, 디지털 테크놀로지, 애니미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테 크노-애니미즘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앨리슨이 ‘마법의 상품’ 을 테크노-애니미즘의 일본적 구현물로 이해한 것에 비해, 어퍼스는 막스 베버가 말한 탈마법화(disenchantment)를 뒤집은 재(再)마법화(re-enchantment) 의 관점에서 테크노-애니미즘과 TH의 관계 일반을 언급한다. 이때 어퍼스 는 특히 인터넷 전문 저널 『와이어드』(Wired)에 주목한다. 이 저널의 기고자 중에는 스스로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애니미즘주의자라고 여기면서 테크 노-샤먼이라든가 테크노-마녀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퍼스는 이런 컴퓨터 전문가들을 ‘테크노-애니미즘주의자’로 보면서, 그 사회학적 배경으로 재마법화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즉 근대 후기의 인간 들은 스스로가 일종의 시뮬레이트된 인공적인 ‘마법의 정원’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 신비로 경험된 것은 자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인간 이 만든 테크놀로지적 환경이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영역 안 에 테크노-애니미즘적인 관념과 정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고대적 형식의 종교인 테크노-애니미즘의 출현은 합리화의 가속화 과정이 낳은 직접적이고도 예상치 못한 결과, 혹은 ‘비합리적인’ 부대효과라 할 수 있다. 합리화의 과정이 종교의 소멸이 아닌 재마법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한편으로 테크놀로지 자체의 신비화 혹은 마법화 (주술화)를 수반했다는 말이다.46 그러니까 물질적 환경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점과 인공지능 및 인공생명 공학 분야의 테크놀로지 발전 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사 실 이런 테크노-애니미즘은 앞서 젠슨과 블록, 앨리슨이 밝혔듯이 일본에 서 매우 뚜렷한 형태로 확인된다. 가령 TH라는 주제에 천착한 대표적 작품 인 오시이 마모루(押井守)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와 그 속편 인 <이노센스>(2004)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로지 ‘고스트’(인간의 마음, 의식, 기억, 감정, 영혼)만 남겨놓고 인간의 몸 전체가 기계 와 인공두뇌로 대체된 사이보그를 비롯하여 안드로이드 로봇이나 인형들의 세계를 무대로 전개된다. 인간만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 속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지극히 애매해진 테크노-애니미즘적 특징 을 잘 구현하고 있다. 네오-애니미즘의 연장선상에 있는 테크노-애니미즘 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과 기계 간 불연속의 해체’47에 있는데, <공각기동 대>와 <이노센스>는 바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애매해진 세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48

<공각기동대>의 여전사 사이보그 구사나기는 테크놀로지의 확장 앞에 서 끊임없이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느끼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반문 하며 고뇌한다. 그 결과 구사나기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해커 인형사와의 융 합을 선택한다. 이는 테크놀로지를 통한 한층 더 진화된 상태로의 궁극적인 상승을 암시한다. 경계 해체의 표상인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라는 이와 같 은 TH적 상승은 단지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오래된 욕망에서 비롯된 

46 Stef Aupers, “The Revenge of the Machines,” p.200, pp.216~218.
47 매 즐리시(Bruce Mazlish)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은 인류에게 있어 ‘네 번째 불연속’에 해당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와 지상의 불연속을 제거했다면, 다윈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불연속적 구 분을 해체했다. 한편 프로이트는 유아적인 본성과 문명화된 성품 혹은 병든 정신과 건강한 정신의 연속성을 입증했다. 이에 비해 TH은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신상규, 『호모 사 피엔스의 미래』, 50쪽.
48 오 시이 감독의 작품에 나타난 경계전이적 상상력에 관해서는 Park Kyutae, “A Study on Mamoru 
Oshii: Identity and Border in Japanese Animation,” 『일본사상』 15, 2008, 121~129쪽 참조.
것이기도 하다. 서수정에 따르면, “사이보그는 전지전능함을 향한 인간 의 지의 집결점이며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실험장”49과 다름 없다.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는 인간의 자기 확장 가능성을 테크놀로지 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인간향상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TH의 목표와 정 확히 일치한다. 오시이는 <공각기동대>와 관련된 한 인터뷰에서 “이데올로 기도 종교도 인간을 변혁시킬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가능성은 테크놀 로지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녀(구사나기와 인 형사가 융합한 의체: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테크놀로지가 탄생시킨 새로운 인 간이며, 새로운 시대의 이브라 할 수 있다. 단, 그 소녀가 신의 모습일지 악 마의 모습일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50고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이란 바로 TH가 지향하는 ‘포스트휴먼’51을 연상케 한다. 이는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이란 인류가 자신의 진화를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포용해야 할 어 떤 것이며, 포스트휴먼이야말로 다음 단계의 참된 인간성이 될 수밖에 없다 는 오시이의 비전을 시사한다.  이와 더불어 오시이는 위에 인용된 인터뷰 의 말미에서 엿볼 수 있듯이 TH와 포스트휴먼 혹은 테크노-애니미즘의 위 험성에 대해서도 열린 물음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3) 신불(神佛)-애니미즘

이 대목에서 테크놀로지와 애니미즘을 결합시킨 신조어 테크노-애니미즘 의 구체적인 일본적 맥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오-애니미즘 담론

49 서 수정,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현대 사이보그’ 특성: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를 중심으로」, 『한 국콘텐츠학회논문지』 7(4), 2007, 152쪽.
50 오 시이 마모루 인터뷰, “지금도 답을 찾고 있다.” 안영순,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에 나타난 오시 이 마모루의 존재 인식」, 『순천향 인문학논총』 15, 2005, 169쪽 각주 21. 
51 트 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한층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다고 예언 하면서 이렇게 변형된 인간을 ‘포스트휴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등장하기 이전에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서구의 인류학 담론에서 거의 폐 기된 용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오직 일본에서만은 애니미즘이라는 개 념이 일본 문화의 독특성을 설명하거나 일본사회의 모델을 구축하는 수단 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53 이런 경향과 관련하여 2001년 창간된 본격적인 종교비평 저널 『현대종교』는 간행사에서 “일본인의 종교성의 근저에 있는 애니미즘은 종교인가? 일본에서는 ‘종교’의 미래에 큰 희망을 걸지 않는 사 람들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것’이라든가 ‘애니미즘’에는 많은 희망을 걸 기도 한다”54고 적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에서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애니미즘 복권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일본판 뉴에이지인 ‘정신세 계’와 그 흐름을 이어받은 ‘신영성운동’55 및 이른바 ‘영성적 지식인’이라 불 리는 일군의 지식인들, 또는 일본인론 및 일본교론 논자들에 의해 애니미즘 의 다양한 버전이 재생산되어왔다. 근래에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배경으 로 하는 ‘스피리추얼리티’라는 말과 애니미즘적 색채가 농후한 일본 문화를 연상시키는 ‘이노치’(命)라는 말이 때로는 교차하거나 때로는 중첩되면서 흥륭”56하고 있다.

먼저 대표적인 영성적 지식인들에 의한 애니미즘 담론에 대해 생각해보 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따르면, 일본 종교의 뿌리는 조몬인들의 수렵 채집문화에 기반을 둔 애니미즘적 고신도(古神道)에 있다. ‘애니미즘’이라든 가 그것에 토대를 둔 ‘일본적 영성’ 혹은 ‘애니미즘적 영성’에 입각한 우메 하라 일본학은 ‘나무와 숲의 종교’인 일본의 신도 및 불교 사상에 내장된 생 명사상과 일본적 영성이 인류에 침투할 때 비로소 인류가 살아남을 가능성 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한다.57 다시 말해 애니미즘적인 ‘숲의 사상’이 세계
53 J . Clammer, “Shinto dreams: Difference and the Alternative Politics of Nature,” Japan and Its Others: Globalization, Difference and the Critique of Modernity, Rosanna, Vic.: Pacific Press, 2001, p.217.
54 国際宗教硏究所 編, 『現代宗教 2001』, 東京堂出版, 2001, 6쪽. 
55 ‘정신세계’와 ‘신영성운동’에 대해서는 박규태,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 티’』, 특히 37~52쪽 참조.
56 島薗進 , 『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興隆』, 岩波書店, 2007, 40쪽. 
57 梅原猛, 『〈森の思想〉が人類を救う』, 小学館, 1991, 특히 232~237쪽.
를 구원할 수 있으며, 그런 애니미즘적 고신도야말로 미래 인류의 종교라는 것이다.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도 이와 유사한 어조로 자연을 대하는 일 본인의 독특한 애니미즘적 감각과 심정이 일본인의 종교관의 모태를 형성 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애니미즘이란 ‘인간과 신 사이의 열려진 경계’ 또는 ‘자연과의 조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일본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런 애니미즘적 감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일본이야말로 현 대사회의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 가 신도적 영성을 강조하는 가마타 도지(鎌田東二)는 『덴카와 만다라: 초종교 에의 수로』58에서 애니미즘, 샤머니즘, 다신교가 잘 보존되어 있는 나라 현 소재 덴카와(天河) 신사가 ‘신성한 자연의 정적’을 경험하게 해준다면서 그런 자연 경험이 바로 ‘영성’으로 지칭되는 ‘초종교’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
란(親鸞)을 조몬과 불교를 접합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 즉 정토진종에서 조몬적 애니미즘의 성격을 띤 ‘증여의 사고’를 보는 나카자와는, 신란의 절 대타력 사상은 순수증여자로서의 아미타불이 아낌없이 베푸는 무한한 자비 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리게(無私)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나카자와는 일본 불교를 “애니미즘적 사고와 불교의 철학적 이치가 융합하여 마침내 일본인이 납득할 만한 종교로 거듭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창조적인 애니미즘’이라든가 ‘불교의 조몬적 요소 에 대한 발굴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나카자와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 이라 할 수 있다.59 한편 민속학자 고마쓰 가즈히코(小松和彦)에 따르면 일본 의 요괴는 애니미즘적 색채를 잘 보여준다. 고마쓰는 일본 요괴현상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배경으로 고래의 애니미즘 신앙을 들고 있다. 산, 강, 나무, 물, 바위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데, 그 영이 인간에게 잘못된 생각이나 악의를 품고 재앙을 일으킬 때 그것은 모두 요괴가 된다는 
58 鎌田東二 · 津村喬 編, 『天河曼陀羅: 超宗教への水路』, 春秋社, 1994.
59 가 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불교가 좋다』,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 83쪽, 133~135쪽.
것이다. 나아가 이런 애니미즘적 관념은 일본에서 자연물을 가공하여 만들 어낸 기물이나 도구에까지 확장된다. 즉 기물이나 도구에도 영혼과 정령이 깃들어 있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 킬 수도 있다고 여겼고 그런 관념이 요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쓰쿠모가 미’라는 요괴가 바로 그것이다.60 고마쓰는 이와 같이 애니미즘이 투영된 요 괴 연구를 통해 일본 문화의 심층을 엿보고자 한다.

이들과 더불어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岩田慶治)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미와 신(神): 애니미 즘 우주의 여행』(1984)과 『애니미즘시대』(1993)에서 애니미즘적 가미(神) 체 험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종교이며 모든 종교의 뿌리가 되는 초종교로서, 그것은 곧 본래의 자신과 만나는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이와타에 따르면 애 니미즘은 미발달된 초기의 종교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적 감 각’이며, 따라서 애니미즘 연구는 인간과 우주(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그리하여 이와타는 종래 부정적으로 평가받아온 애니미 즘의 중요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함으로써 애니미즘의 복권을 기도하 는 이른바 ‘신애니미즘’을 주창한다.61
위에서 소개한 애니미즘의 복권을 주장하는 영성적 지식인들의 담론은 크게 보면 이른바 ‘일본인론’(=일본문화론)이라는 일본 특유의 지적 장르에 속 해 있다.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園進)는 일본인론을 ‘일본교론’의 관점 에서 파악한 바 있는데,62 1990년대 전반에 절정을 이룬 일본교론 및 일본인 론은 외국의 세계종교를 비판하고 ‘일본교’,63 신도, 애니미즘을 칭송함으로 써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 특징 중 하나인 일본 중심주의와 신국 내셔널리즘은 자연을 신성시하는 애니미즘적인 신도적 감 수성, 조상신을 비롯하여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오래된 풍습, 유한한 인륜적 
60 고 마쓰 가즈히코, 「일본의 요괴관에 대하여」, 『현대일본의 요괴문화론』, 제이앤씨, 2014, 4~6쪽. 
61 岩田慶治 , 『カミと神』, 講談社学術文庫, 1989, 46쪽.
62 島薗進 , 『ポストモダンの新宗教』, 東京堂出版, 2001, 138~170쪽 참조.
63 ‘ 일본교’에 관해서는 박규태,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일본비평』 5, 2011 참조.
조직을 절대시하는 일본인의 사유방식 등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주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영성적 지식인들과 일본인론자들의 애니미즘 담론에 이어 2011년 3 · 11동일본대지진 이후의 탈원전운동에서는 종교단체와 우익, 좌 익을 가릴 것 없이 “이노치를 지켜라”는 주장이 자주 등장했다. 일본어 ‘이 노치’(命)는 일반적인 ‘생명’ 개념에서 더 나아가 대자연의 작용 자체를 가 리키는 말로, 불교의 『법화경』 사상과 불성(佛性) 사상 및 전술한 애니미즘 재평가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이쇼 시대의 ‘생명주의’까지 거 슬러 올라가는 이노치 관념에서 인간은 이노치에 의해 ‘살려지고’ 자연과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양자가 서로 연대하면서 이노치를 구성한다. 또한 이노치 관념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그 근원적 생명이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하며 신인합일(神人合一)을 통해 생명력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본 신종교 교단들의 이른바 ‘생명주의적 구제관’64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 밖에 환경사상 분야에서도 1980년대 이래 심층생태학과 일본 애니미즘을 융합시킨 생명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 은 다양한 애니미즘적 생명주의가 3 · 11동일본대지진 이후 종교인들에 의 한 반원전운동의 근거로 기능하고 있다.65 
이와타의 사례를 제외하면 이와 같은 애니미즘 복권의 움직임이 네오애니미즘이나 테크노-애니미즘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이 애 니미즘의 풍부한 유산을 찾아볼 수 있는 나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유산 들은 특히 신도 및 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글에서는 이를 ‘신불(神佛)-애니미즘’이라 지칭하고자 한다.66 이와 관련

64 対馬路人他 , 「新宗教における生命主義的救済観」, 『思想』 665, 1979 참조.
65 堀江宗正 , 「脫/反原発運動のスピリチュアリティ」, 『現代宗教 2013』, 東京堂出版, 2013, 81~83쪽.
66 일 본에는 신불(神佛, 신부츠)이라는 일상용어가 있다. 그것은 신도의 가미(神)와 불교의 호토케(佛) 를 병렬시킨 단순한 합성어가 아니다. 일본인에게 신과 불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일본인에게 신불이란 가미이기도 하고 호토케이기도 한, 혹은 가미도 아니고 호토케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신관 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본인의 특이한 종교적 상상력이 주조해낸 새로운 신관념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박규태, 「신불분리의 종교사적 일고찰: 신불의 타자론」, 『아세아연구』 46(4), 
2003, 93~94쪽.

하여 종교인류학자 사사키 고칸(佐々木宏幹)은 『가미(神)와 호토케(佛)와 일본 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등을 보면 일본인은 인간을 비롯하여 산, 강, 풀, 나무, 새, 짐승, 벌레, 물고기와 심지어 인공물까지도 가미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가미를 ‘무엇이든 심상치 않고 뛰어난 힘(德)을 가진 외경스러운 존재’로 규정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팔백만신으로 표상되는 다신교적 신도의 기초에는 모든 존재에서 생명과 신성을 인정하는 애 니미즘이 깔려 있다. 일본 TV 등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인령, 동물령, 생령에 의 한 뒤탈(祟り)과 빙의 등의 사례는 실로 현대 애니미즘 문화 그 자체라 할 수 있
다. 또한 대도시에서 행해지는 바늘공양이나 시계공양이라든가 대형 여객기에 대한 신도적 정화의례 등에서 우리는 도구와 기계 등에 대해서도 인격과 유사 한 성격을 인정하는 애니미즘적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67
모든 존재에서 생명과 신성을 인정하는 일본인들의 이런 애니미즘적 감
각을 카슬리스(T.P. Kasulis)는 “내재적 연결(immanent connectedness)의 경험을 초래하는 신도의 능력”이라고 불렀다.68 여기서 ‘내재적 연결’이란 네오-애 니미즘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관계론적 인식론’과 상통하는 개념 으로 보인다.69 그리하여 클램머(J. Clammer)는 신도를 “애니미즘의 세련화된 형태”70로 이해하기도 한다. 일찍이 미나카타 구마구스(南方熊楠)라든가 야 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의 민속학은 신도적인 심층생태학적 감각, 즉 숲이 나 신사 같은 특정 장소에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공존한다는 신성한 공간
67 佐 々木宏幹, 『神と仏と日本人』, 吉川弘文館, 1996, 2~3쪽.
68 トーマス · カス─リス, 衣笠正晃 訳, 『神道』, ちくま学芸文庫, 2014, 272쪽.
69 신 도는 가미라는 영적 존재들이 과도하게 차고 넘치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 세계는 인간과 인간 이 아닌 세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자의 경계는 애매하고 상호 가변적이다. 젠슨과 블록은 자연과 문화를 대립시키는 서구 모더니즘의 이원론과는 달리, 신도적 세계관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연속
성 혹은 그 경계의 해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Casper B. Jensen & Anders Blok, 
“Techno-animism in Japan,” pp.97, 104. 70 J . Clammer, “Shinto dreams,” p.238.
감각에 주목한 바 있다. 사실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은 대부분 신도와 결부 되어 있다. 이때 신도는 일본 민속종교의 광범위하고 다면적인 토대로 간주 되곤 한다.  이에 비해 한때 승려였던 제임스 휴즈 교수가 주도하는 도덕 적 향상을 위한 <사이보그붓다 프로젝트> 는 TH와 불교의 유사성을 주장 한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일본 불교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 등 모든 존재 안에 궁극자로서의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TH에 근접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사사키의 지적대로 우리는 일본 문화에서 이와 같은 신불-애니 미즘의 풍부한 유산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미야자키 하야오 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라든가 <이웃집 토토로>는 각각 원시신도적 숲과 ‘수호신사의 숲’을 무대로 애니미즘적 기호를 재창출하고 있으며,73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아마테라스 신화를 묘사한 신도 기도문(노리토)의 주제곡이라든가 스사노오 신화에 나오는 구사나기의 각색 등 전체적으로 신도적 모티브와 분위기를 배경에 깔고 있다. 한편 창(F.T. Chang)과 하르트 (L.A. Hart)는 죽은 실험용 동물들을 공양하는 일본 과학자들의 관습에 주목 하면서 그것이 일본 불교와 신도의 관행이라는 점을 지적한다.74 젠슨과 블 록 또한 신도적 관계주의의 표출은 나무든 동물이든 로봇이든 초첨단 장난
감이든 오직 사물적 현현(thingly manifestation)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동물공양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이밖에 신사나 사원에서 배포하는 다양한 유형의 주술적 부적(오마모리 
혹은 오후다)에 대한 일본인들의 뿌리 깊은 집착도 신불-애미니즘의 문화현 상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자동차나 버스에 ‘교통안전’이라고 적힌 부적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대학 실험실의 전 자현미경에 부적을 붙여 놓았다거나 로켓에 부적을 붙여 쏘아 올렸다는 이 야기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 애니미즘과 마찬가지로 주술 또한 관계론적 세 계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도 및 불교의 부적문화가 첨단 기술문명 과 공존하는 일본은 신불-애니미즘의 풍부한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4. 가미와 호토케의 유희

종교가 과학이론 형성에 강력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기는 게라시에 따르 면,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의 목표 및 그 관행의 차이는 각 나라의 종교적 환 경과 관계가 있다. 가령 미국은 영적 신체 안에서 구원을 희구하는 우주적 목적과 종말론적 천년왕국을 소망하는 기독교적 환경에 의해 연구자들은 인간형 로봇(humonoid)보다는 인공지능을 더 선호한다. 인공지능의 발달 안 에서 우주적 의미를 찾고, 가상적인 비생물학적 신체 안에서 인간 정신의 구 원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게라시는 ‘묵시론적 인공지능’을 언급하면서 그 지도적 선구자로 한스 모라벡과 레이 커즈와일을 들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인공지능보다 인간형 로봇을 더 선호한다. 게라시는 
이런 일본적 경향의 배경으로 인간에 대한 불교와 신도의 긍정적이고 낙관 적인 관점을 들고 있다. 신도와 불교가 일본 로봇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 다는 것이다. 가령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로봇이 언젠가 붓다 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한편으로는 세계가 가미라는 신성한 실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신도적 세계관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성화(聖化)된 로봇의 현존을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즐긴다. 로봇이 제의적 성화와 종교적 초 월의 주체로서 자연세계의 근원적인 성성(聖性)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때 불 교와 신도는 자연세계 및 그 안에 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로봇까지도 축복하 여 우주적 구원사에 참여시키고자 한다. 가령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 지만 해도 새로 출시된 로봇에 제의를 수행하기 위해 많은 공장에서 신도 사제들이 채용되었다. 지금은 이런 애니미즘적 관행이 거의 사라졌지만, 로 봇공학 자체는 여전히 성성(聖性)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76 미국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공지능을, 그리고 일본은 신도와 불교의 
영향으로 인간형 로봇을 더 선호한다는 게라시의 주장은 시사적이다. 하지 만 일본인이 인간형 로봇을 선호하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 을 들고 있는 그의 주장은 다소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신불-애니미즘의 관 점에서 볼 때, 인간보다는 호토케와 가미 혹은 인신(人神)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 인간형 로봇에 대한 선호도를 촉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적 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을 면 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
‘치’(靈), ‘미’(神), ‘다마’(靈) 등의 고대 일본어는 애니미즘에 입각한 조몬인들 의 소박한 신 관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들이 과연 가미라는 관념으로 승 화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신화가 체계화되고 신명(神名)이 정비되어 문헌 에 기록된 단계에서 이미 외래사상의 영향이 보이므로, 그 이전 시대 신 관 념의 원형을 찾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가미’라는 말은 한국 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한데, 아이누어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 다.77 요컨대 가미는 원래 수입품이었다.78 이런 가미의 특징 중 이 글과 관
76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Religion and Our Scientific View of the Natural World,” Theology and Science 4(3), 2006, pp.229~230, 235~237. 한편 일본 정부는 2015년 9월 <인공지능· 사 물인터넷(IoT)· 빅데이터에 의한 신산업 사회혁명> 프로젝트를 출범하는 등 근래 인공지능 연구에 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77 고 대 일본어 치, 미, 다마의 용례로 미즈치(水靈), 오로치(山靈), 이카즈치(雷, 嚴靈), 구노치(木靈), 누 즈치(野靈), 시오쓰치(潮靈), 가구쓰치(火靈), 쓰키요미(月神), 야마쓰미(山神), 와다쓰미(海神), 고다 마(木靈), 이키스다마(生靈) 등이 있다. 源了圓, 「日本における「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考察」, 関晃 · 源了圓 編, 『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研究』, 講談社, 1981, 7~11쪽.
78 가 미의 어원에 대한 기존의 관점으로, 가가미(鏡)에서 온 말, 가시코미(畏)의 약어, 가미의 ‘미’는 ‘히’
(태양)에서 온 말, 가미(上)의 뜻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마지막 설이 에도시대부터 널리 지지되어왔
련하여 특히 주목할 것은 애니미즘적 측면, 신인동형론적 속성, 변신의 유 연성 등 세 가지다. 
첫째, 가미의 정의와 관련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국학자 모
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지지한다. 
대저 가미란 고전 등에 보이는 천지의 여러 신들을 비롯하여, 그 신들을 모신 신사의 미타마(御靈)를 말한다. 또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수초목이나 바다 와 산 및 그 밖에 무엇이든 심상치 않고 뛰어난 기운(德)이 있으며 두렵고 외경 스러운 것들을 가미라고 한다. [뛰어나다는 것은 존귀하고 선하거나 공훈이 뛰어나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나 기이한 것이라 해도 매우 뛰어나며 두렵고 외경스러우면 가미라 하 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신이라 할 때 먼저 입에 올리기조차 황공하옵신 천황은 대대로 모두 가미임은 말할 나위 없다. 천황은 원신(遠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인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존귀하고 황공하옵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신인(神人) 이 줄곧 있어왔다. 또한 천하에 거리낌이 없는 존재라기보다는 일국(一國) 일리(一里) 일가(一
家)에 매여 있다 해도 각자의 신분에 상응하는 신인도 있다. 그런데 신대(神代)의 신들도 대개는 그 신대의 사람들이었다. … 나아가 바위, 뿌리, 나무 그루터기, 풀과 이파리 등도 모두 가미가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 등도 가미라고 부른 경우가 많다. 이는 그 미타마가 가미라는 뜻이 아니라, 직접 바다나 산 그 자체를 가리켜 가미라 한 것이다. 이것들도 모두 두렵고 외경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저 가미란 이처럼 다종다양하여 귀한 가미와 천한 가미 가 있는가 하면 강한 가미와 약한 가미, 선한 가미와 악한 가미도 있다. 이 가미 들은 마음도 행위도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가미란 대개 한 가지로 정해서 말하
기 어려운 존재다.(『古事記傳』 3)79
다. 하지만 오노에 따르면 이런 어원설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나라시대의 일본어는 지금은 없어졌 지만 발음상의 구별이 있었다. 이 점은 언어학자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등에 의한 만엽가나 연 구에서 밝혀진 것으로 학계에서 이미 승인된 설이다. 나라시대에는 ‘미’의 음이 두 개 있었다. mi의 음과 mï가 그것인데, 가미(神)의 ‘미’는 이 중 후자(mï)에 해당한다. 그런데 기존 어원설에서의 ‘미’ 는 모두 전자(mi)에 속하므로, 가미의 어원을 일본어 내부에서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大野晋, 『一語の辞典 神』, 三省堂, 1997, 6~7쪽.
79 『本居宣長全集』 9, 筑摩書房, 1968, 125~126쪽.
일본적 본질과 독특성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노리나가의 가미 정의는 신 도적 애니미즘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서 가미란 신사에 모신 천신이나 조상 신만이 아니라, 인간· 동물· 새· 식물· 산· 바위· 바다· 호수 특히 폭포 같은 자연의 장엄한 현현 등을 포함한다. 나아가 천황은 ‘먼 가미’(遠神)로서 인간 이거나 인간이었던 가미다. 이에 비해 모든 지역과 마을 혹은 가정에서 모 시는 조상신은 ‘가까운 가미’라 할 수 있다. 한편 천둥은 ‘울리는 가미’(雷, 가 미나리)이고 고다마(木靈)는 나무의 가미다. 이처럼 가미는 신격화된 인간뿐 만 아니라 인간 아닌 것들도 다수 포괄한다. 이처럼 노리나가의 가미 정의 는 크게 애니미즘이라는 범주 안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가미는 처음부터 신인동형론적인 개념이었다. 가미의 이름 밑에 
남녀의 구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접미어를 붙여 인간임을 시사하 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어법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가령 이자나기의 ‘기’, 스사노오의 ‘오’, 오호토노지의 ‘지’, 오호다라시히코의 ‘히코’ 등은 남 자를, 이자나미의 ‘미’, 오호히루메의 ‘메’, 오호토노베의 ‘베’, 오키나가다라 시히메의 ‘히메’ 등은 여자를 나타내는 접미어다. 또한 아메노미나카누시의 ‘누시’(主)라든가 오호나무치의 ‘무치’(貴) 등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 는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어의 사례다.80 여기서 특히 ‘신인’(神人)이라는 표 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천지가 혼성(混成)할 때 처음에 가미(神人)가 있었다. 우
 
마시아시카비히코지노미코토라 한다”든가 “갈대싹이 처음으로 진흙 속에 생겨나는가 싶더니 곧 가미(人)로 변했다. 구니도코타치노미코토라 한다”(밑 줄은 필자)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가미(神人, 人)란 “사람 같은 인간적인 신” 을 가리킨다.81 한편 신도신화에 나오는 가미들이 실제로는 인간이었다고 보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따르면,82 가미를 나타내는 ‘미코토’(尊)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존칭이다. 즉 미코토는 인
80 大野晋 , 『一語の辞典 神』, 20~21쪽.
81 『日本書紀』 上, 日本古典文学大系, 岩波書店, 1967, 78쪽 각주 1.
82 津田左右吉 , 『日本古典の硏究』 上, 『津田左右吉全集』 1, 岩波書店, 1963, 666쪽.
간으로서의 신인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에 앞서 『일본서기』는 하늘과 땅이 생성된 후 “가미(神聖)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83고 적고 있다. 이는 신인동형 론적 가미 관념의 성립과 더불어 ‘신성’이라는 성격이 가미 관념에 부착되 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에게 정1위라든가 종3위 등과 같이 신위를 수여한 신도의 신계(神階)제도는 오늘날의 신 관념에서 보자면 놀랄 만한 것이지만, 위와 같은 신인동형론적 가미 관념에 의거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83
셋째, 신도는 마치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인형’처럼 시대가 변하면 재 빨리 전 시대의 의상을 벗어던지고 다음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가령 상대(上代)의 고신도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라(奈良)시대 초엽 신도는 고대통일국가를 형성하 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헤이안(平安)시대가 되면 불교 가 깊이 침투하면서 신도는 이제 불교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가마쿠라(鎌倉) 시대에는 천태계의 본지수적(本地垂迹)신도와 진언계의 양부(兩部)신도가 되 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삼교(유교, 불교, 노장)일치의 옷으로 갈아입고 반(反)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주창하는 요시다(吉田)신도가 되었다. 도쿠가 와(徳川)시대에는 불교의 옷을 벗고 유교의 옷으로 갈아입어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리당심지(理當心地)신도라든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의 스이카 (垂加)신도 등과 같은 유가(儒家)신도가 되었다. 그 후 국학이 발흥하자 이번 에는 유교의 옷을 벗고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학(古學)신도가 되었 다. 나아가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고도(古道)신도는 기독교의 옷을 껴 입었다. 심지어 막부 말기에는 신도가 기독교와 습합하여 와타나베 이카리 마로(渡辺重石丸)의 신기(神基)습합신도가 되었다. 이어서 메이지(明治)시대에 는 가족국가 이데올로기가 대두하면서 국가신도(신사신도)가 출현했으며, 패 전 후에는 이 국가신도의 의상을 벗어버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의상을 걸치 게 된다. 이런 신도의 특질은 그대로 가미의 변신성과 겹쳐진다. 즉 『고사기』에 
83 『日本書紀』 上, 76쪽.
있어 황실과 일부 유력씨족의 우지가미(씨신: 氏神)은 조상신이 되었다. 신불 습합신도에서는 가미가 불보살의 수적이 되었고, 신유습합신도에서는 리 (理)나 태극 그 자체 혹은 리가 순수한 기를 타고 나타난 것을 가미라고 했 다. 신도와 국학이 습합하면서 가미는 황실과 국민의 조상신이 되었고, 신 기습합신도에서는 데우스 같은 창조신이자 주재신 혹은 사후 심판을 관장 하는 신이 되었으며, 국가신도에서는 황실 및 국민의 조상신이 됨과 아울러 충신, 의사, 전몰자가 신격화되기도 했다. 한 신사에서 모시는 신이라 해도 제신이 종종 바뀌며, 기도자나 제사자조차 그 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는 제신이 누구든 상관없을 정도다.84 
한편 일본에서는 붓다(Buddha)를 호토케라고 한다. 인도의 붓다는 중국 후한시대에 ‘부도’(浮圖=浮屠)85로 음역되었는데, 이 ‘부도’를 일본에서는 현재 
‘후토’ 혹은 ‘호도’라 읽는다. 여기서 ‘도’(圖, 屠)는 중국 한대의 고음에서는 닥 (dag)이라 하여 모음 a의 음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도는 붓다를 직 역한 음역으로 불타(佛陀)와 동음이었다. 그러다가 부도를 간략하게 적어 ‘불’(佛)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일본어 호토케의 ‘호토’는 본래 의미상 붓다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이라는 글자의 음(but)을 빌린 것이었다. 한편 ‘케’는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던 접미어 ‘카’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호토케는 처음에는 ‘깨달음 을 얻은 각자’(붓다)를 나타내기보다는 ‘호토의 상(像)’이라든가 ‘호토의 도 (圖)’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와 같은 호토케의 중요한 개념적 특성으로 무엇보다 가미와의 불가분한 관계성과 애니미즘적 속성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일본서기』에는 552년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들어왔을 때 긴메 이(欽明) 천황이 “서번(西蕃)이 모시는 불상의 면모가 찬란한 게 이제껏 본 적 이 없다. 숭경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호토케는 ‘번 신’(蕃神), 즉 외국의 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비다쓰(敏達) 천황기 14년조
84 石田一良 , 「日本上代の神観念」, 関晃 · 源了圓 編, 『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研究』, 講談社, 1981, 87~89쪽.
85 부 처나 고승 사후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둥근 돌 또는 그 부처나 승려를 가리키는 말.
에는 “불신(佛神)의 마음에 뒤탈이 있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에서 호토케 를 ‘불신’이라고 한 것은 이 기사가 유일하지만, 『원흥사연기병류기자재장』 (元興寺緣起竝流記資材帳)에는 ‘타국신’(他國神)이라는 표현 외에 “불신은 두려 운 존재다”라든가 “불신을 모신다”와 같이 ‘불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는 전래 당시에 호토케가 가미의 일종으로 관념되었으며, 나라시대 중엽 까지도 그런 인식이 확실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헤이안시대 중엽부터 이른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확립되 면서 가미와 호토케의 관계에 역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본지수적’이란 특 정한 가미와 특정한 불보살이 결부되어 가미는 호토케의 수적(垂迹=변형, 화
신)이고 호토케는 가미의 본지(本地=원형, 본체)라 하여 신불관계를 이론화한 관념체계를 가리킨다. 피안의 절대적 존재인 부처가 일본의 중생을 구제하 기 위해 임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 바로 가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까 호토케가 오리지널이고 가미는 카피(아바타)인 셈이므로, 거기에는 가미 가 호토케의 일종이라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본지수적설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호토케 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토케에게 꽃을 바친 다”, “호토케를 예배한다”, “호토케를 그린다”, “호토케를 받는다”, “호토케에 게 말한다” 등에서처럼 호토케를 ‘불상’이나 ‘불도’(佛圖)의 뜻으로 사용한 용 례다. 다른 하나는 “호토케를 마음에 담는다”, “호토케에게 기도한다”, “호토 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한다” 등에서처럼 호토케를 부처(佛)의 의미로 사용한 용례인데, 이는 가미의 용법과 거의 구별이 어렵다. 실제로 ‘가미호토케’라든 가 ‘호토케가미’라는 표현도 많이 나온다.86 호토케가 가미의 일종이든 역으 로 가미가 호토케의 일종이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관념되었던 것이다. 
둘째, 그런 만큼 가미와 마찬가지로 호토케 또한 애니미즘적 속성을 지 녔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호토케의 애니미즘적 속성은 헤이안 시대 진언밀교의 ‘즉신성불론’(卽身成佛論) 및 천태밀교의 ‘천태본각론’(天台
86 大野晉 , 『一語の辞典: 神』, 24~28, 42쪽.
本覺論)과 ‘초목국토성불론’(草木國土成佛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교는 궁극 적 실재를 감각적 존재로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 언어, 사유에 의한 행위의 순수화를 통해 궁극적 실재와 일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통상 불 교에서는 삼겁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행을 거듭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이에 반해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空海)는 신(身), 구(口), 의(意) 라는 삼밀의 종교적 실천에 의해 “몸 그대로 성불한다”는 뜻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구카이와 함께 즉신성불을 주장한 천태종의 창시자 사이초(最澄)는 “호
토케와 범부가 하나”(佛凡一體)라는 사상에 입각한 천태본각론을 내세웠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으면 십만 법계의 제불과 일체의 보살도 모두 내 몸 안 에 있다. 내 몸을 떠나 그 바깥에서 별개의 부처를 추구하는 것은 내 몸이 곧 진여(眞如)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나아가 “초목, 기와, 조약돌, 산하, 대지, 대해, 허공 등 모두가 진여이므로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하여 이른 바 “초목과 국토가 모두 성불한다”(草木國土悉皆成佛)는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런 초목국토성불 사상은 중국 천태종의 성불관에는 보이지 않으며, 오히 려 초목도 말을 한다는 신도의 애니미즘적 자연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
작된다.87 
이상에서 살펴본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사는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TH적 친화성을 신도 및 불교의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이 글의 의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 가미와 호토케 개념은 애니 미즘적 속성을 공유한다. 둘째, 가미와 호토케는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1859년 일본에 온 헵번(J. Hepburn, 1815~1911)이 『화영· 영 화어림집성』(和英 · 英和語林集成. 1886년 제3판)에서 “God: 신도에서는 가미(神), 불교에서는 호토케”라고 적었던 것도 바로 동전의 양면 같은 양자의 관계에 
87  源了圓 , 「日本における「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考察」, 30~31쪽. 우메하라 다케시도 사이초의 천태본각 론과 산천초목성불론에 대해 조몬시대 이래 애니미즘적 신도신앙이 일본 불교를 애니미즘화했다고 해석한다. 梅原猛, 『〈森の思想〉が人類を救う』, 82~84쪽.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88 
끝으로, 무엇보다 가미와 호토케 개념은 인간과 신의 경계가 상호가역
적이며 삼투압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신도에서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설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모두 호토케가 된다고 여긴 다. 그래서 흔히 사자를 호토케라고 부른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사람이 가 미나 호토케가 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민속학의 관점에 의하면, 사자(死者)의 영은 유족들의 공양을 받음으로써 서서히 날뛰는 성격 을 상실하고 이윽고 조령(祖靈)이 되거나 마침내 가미가 되어 사람들을 수호 한다고 믿는다. 가미나 호토케가 되는 것은 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 행을 쌓은 사람이나 신령이 빙의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생신’(生神, 이키가미) 이라든가 ‘생불’(生佛, 이키보토케)이라고 부르면서 숭경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본에서는 천리교(天理敎) 교조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나 금광교 (金光敎) 교조 아카자와 분지(赤沢文治)처럼 신이 빙의한 샤먼이 생신으로 존 숭되어 신도계 및 불교계 신종교 교단의 교조가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생신이나 생불은 사자(死者)가 호토케로 변신하듯이 생자(生者)가 가미나 호 토케가 된 경우다. 이는 신불과 사람이 본래 연쇄되어 있고 특정 조건이 충 족되면 사람이 쉽게 신불로 이행하며, 역으로 신불도 사람으로 화신(빙의)할 수 있다는 관념을 잘 보여준다.89
2) 유희하는 가미와 호토케 혹은 가미와 호토케를 유희하기 재클렌(A. Jackelén)에 따르면 서구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호모 리투르기쿠스’
(Homo liturgicus, 제의적 인간)가 아니라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다. 그런데 이 호모 파베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에 의해 완성 되지 않는 한, 아직 비극적 존재다.  이에 비해 마쓰리(祭)의 제국 일본의 이 상적 인간상은 아마도 ‘호모 리투르기쿠스’와 ‘호모 루덴스’가 만나는 접점 
88 大野晉 , 『一語の辞典: 神』, 84~85쪽.
89 佐 々木宏幹, 『神と仏と日本人』, 5~7쪽.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서구인들이 윤리적 유일신관에 입각하여 절대적 으로 선한 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신정론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악과 고통 의 문제에 대처해왔다고 한다면, 에도(江戸)시대에 대지진으로 무너진 폐허 의 도시에서 유희적인 나마즈에(鯰繪)91를 만들어 판매하고 소비했던 일본 인들은 애니미즘적 신불과 함께 즐기는 놀이에 참여하는 쪽을 더 선호하는 듯싶다. 
일본의 로봇문화가 이런 ‘호모 루덴스’로서의 일본인을 보여주는 장면 은 자못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로봇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미국인들의 일 반적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대체로 인간과 로봇 이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인간형 로봇의 인기 가 매우 높은데, 이는 직접적으로 데즈카 오사무92의 만화 『철완 아톰』으로 부터 받은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문화적 배경으로 역시 신불-애니 미즘의 세계관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게라시는 신도식 복장을 한 로봇 사제가 의식을 거행하는 요코하마의 사례를 들면서, 로봇에게 성성을 부여하는 일본인의 경향이 신도와 불교적 관념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영적 로봇’(spiritual robot)이라고 부른다.93 일본인들은 로봇들이 인간의 일거리를 빼앗는다거나 창조자 인간을 전복시킬지 모른다는 테크놀 로지적 종말론주의(technological armageddonism)에 대한 두려움 없이 로봇공학 의 미래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하다.94 심지어 로봇들이 “지성적이고 비이기 적인 성자가 될 수 있다” 거나 혹은 “당연히 로봇도 영혼을 가진다”96고 여기기까지 한다.

91 에 도시대 일본인들은 땅 밑의 거대한 메기(나마즈)가 지진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나마즈에와 일본인 의 유희성에 관해서는 박규태, 「가시마신앙과 신사: 무신에서 지진의 수호신으로」, 『종교문화비평』 
5, 2004, 270~277쪽 참조.
92 데 즈카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TH적 문제의식의 선구적 모티브들을 많이 보여준다.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소년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철완 아톰> 외에도, <불새>(1954~1988, 총 17
편)는 슈퍼컴퓨터 인공지능에 의한 인간 지배 및 인류 멸망이라는 종말론적인 특이점 모티브라든가 복제동물과 복제인간의 모티브 또는 불사(不死)의 모티브 등 현저한 TH적 모티브들을 보여주는 장 면들로 가득 차 있다.
93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p.237.
94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pp.239~240. 
와카야마현 히다카가와정(日高川町) 소재 니우(丹生)신사에서는 매년 10
월 10일경에 ‘웃음의 마쓰리’(笑い祭)를 거행한다. 이때 어릿광대로 분장한 ‘스즈후리’(鈴振り)가 방울을 울리면서 “웃어라, 웃어라” 하고 외치면서 가마 행렬을 선도한다. 그런데 2008년부터 이 스즈후리 역에 웃음로봇이 등장하 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니우신사 근방은 전통적인 인형극인 분라쿠(文楽)로 유명한 지역인 만큼 분라쿠 인형의 몸짓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이 로봇은 일본인의 유희정신과 신도의 결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한편 도요타의 트럼펫 로봇이라든가 바이올린 로봇, 세계 최초의 2족 보행 로봇인 혼다의 아시모(Asimo), 소니의 엔터테인먼트 로봇 크리오(Qrio) 및 세계 최초의 애완견 로봇 아이보(AIBO), 미쓰비시의 가정용 로봇 와카마 루(Wakamaru), 산업종합기술연구소(AIST)의 여성형 로봇 미임(Miim), 소프트 뱅크의 가정용 로봇 페퍼(Pepper) 등 유희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로봇들이 특히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 일본 가요에 맞춰 춤추는 크리오라든가 노래 도 부르고 패션쇼도 하는 미임, 그리고 2015년 하우스텐보스에 개장된 세 계 최초의 로봇호텔인 ‘헨나 호텔’에서 모든 서비스를 담당하는 로봇들은 일본인에게 참된 ‘로봇 퍼슨’(robot person)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인간형 로봇에 대한 이와 같은 일본인의 열광적인 관심과 더불어 일본사회 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는 특히 1990년대 후반의 제2차 로봇 붐 이래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지 원을 받는 다양한 로봇 프로젝트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왔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메카물 <신세기 에반 게리온>을 필두로 하여 제2차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났다. 일본의 로봇 붐과 애니메이션 붐의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봇에 대한 일본인의 상상력은 주로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아 배양 되어왔기 때문이다. 제2차 애니메이션 붐을 전후한 흐름과 관련하여 소머
(E. Somer)는 <철완 아톰>(1963), <건담>(1979), <아키라>(1988), <패트레이버> 
(1989),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공각기동대>(1995), <이노센스>(2004) 등 의 로봇 메카물을 중심으로 ‘인간의 로봇화’, ‘로봇의 인간화’, ‘로봇을 통한 인간의 인간화’라는 세 범주를 제시하면서 그것들의 공통점으로 인간과 로 봇의 애매한 경계 감각을 들고 있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경계가 고정되어버린 곳에서 막을 내리며, 불투명
하게 열려 있는 ‘버려진’ 경계의 틈새에서 꽃피기 마련인 것이 유희일지도 모른다. 일본인의 유희정신은 버려진 인형이라든가 바늘, 가위, 인쇄 판목 등의 용도 폐기된 물건들을 공양하여 성화하는 불교 승려들의 관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쓸모없는 사물들도 인간과 생명을 공유하며, 따라서 그 사물들에 대한 공양이 우주적 붓다와의 평화로운 합일을 촉진시킬 것이라 고 여기기 때문이다.98
불교와 테크놀로지의 통합을 지향하는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 상적인 방식으로 현대 로봇공학에 대한 불교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1970 년에 <자재(自在)연구소>를 설립하여 로봇산업에 있어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 불교적 원리를 활용하고자 했다. 가령 이 연구소의 멤버들은 불교 경 전을 암송하거나 명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로봇을 디자인하거나 창안해
냈다. 마사히로는 『로봇 안의 불성』(영문판)에서 “(인간뿐만 아니라) 바위, 나무, 강, 산, 개와 곰, 곤충과 박테리아 안에도 불성이 있다. 또한 나와 내 동료들 이 만드는 기계와 로봇 안에도 불성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성, 즉 ‘호토케의 본성’(buddha-nature)은 애니미즘적 가미와 동일한 이미지 로 묘사되고 있다. 기계와 로봇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한 것은 “지각이 있는 것과 지각이 없는 것” 안에 현존하는 것이 불성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 이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사히로에게 불성은 실로 “모든 것을 작동케 하는 원리 혹은 법칙”과 다름 없다.  이처럼 로봇의 불 성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하는 마사히로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은 붓다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붓다에 의해 의지를 수여받았다. 그리하 여 인간은 그 의지를 붓다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진실로 우 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붓다의 마음과 일치한다. 제어하는 것과 제어 받는 것은 모두 불성의 현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를 조작한다고 생각해서
는 안 된다. 사실은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것이다.   
마사히로는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상호호혜 성’(reciprocality)이라고 부른다. 연기설이나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사무애설(事事無碍說)을 떠올리게 하는 이 상호호혜성은 비단 불 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간과 기계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전체적인 인과 적 상호연관성과 관련된 이런 감각은 신불-애니미즘의 중핵적인 스피리추 얼리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희하는 가미와 호토케 혹은 가미와 호토케를 유희하는 일본인의 스피리추얼리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내장 까지 서로 얽혀 있는 그 스피리추얼리티는 유희가 또 다른 유희를 낳는 풍 경 속에서 태어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스 스로를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면서도 TH가 스피리추 얼리티를 배제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가령 제임스 휴즈는 TH의 기 획이 여러 종교의 종말론· 신정론· 구원론과 양립 가능하며, 거기서 새로운 
TH적 스피리추얼리티, 즉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trans-spirituality)가 탄생 할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의 경우 그런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는 신불애니미즘과 테크놀로지의 양립을 통해 배태되어온 것이다. 

5. 나오는 말: 하이브리드와 모노노아와레

TH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라는 양날의 칼을 내포하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엘론 머스크(Elon Musk) 등은 TH의 위험성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 다. 그렇다면 유희적이고 관계론적인 신불의 애니미즘은 이런 위험성으로 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물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하이브리드’와 ‘모노노아와레’다.  
TH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포스트휴먼을 창조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있다. 이 포스트 휴먼을 일본의 맥락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신인(神人, god-man) 혹은 가미나 호토케와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앞에서 이런 가미와 호토케가 일본의 TH적 테크놀로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지를 네오-애니미즘으로부터 테크노-애니미즘을 거쳐 신불-애니미즘에 이르는 회로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때의 애니미즘은 모두 관계론적 인식론 뿐만 아니라 혼성성, 즉 하이브리드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타일러류의 애니미즘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가령 일본종교사의 가미와 호토케의 특이한 융합은 신불이라는 하이브 리드를 낳았는데, 실은 가미와 호토케 자체가 원래 일종의 하이브리드였다 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가미와 호토케는 인간도 아니고 비인간도 아니며, 혹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비인간이기도 한 것, 인간 비슷한 어떤 존 재이기 때문이다. 신불-애니미즘은 인간과 자연이 가미나 호토케 혹은 신 불이라는 하이브리드와 접합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거기서는 인간도 하나 의 하이브리드가 된다. 나아가 멘젤(P. Menzel)과 달뤼시오(F. D’Aluisio)는 초 지성을 가진 로봇과 인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를 ‘로보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였다.102 마찬가지로 전술한 테크노-애니미즘이라든가 테크노-종교 혹은 
102  Peter Menzel & Faith D’Aluisio, Robo Sapiens 참조.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는 인간의 마음이 기계와 접목된 곳에서 생겨난 하 이브리드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호른보르크(A. Hornborg)에 따르면 네오-애니미즘은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주체들로 지각, 소통, 그리고 행위주체(agency)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대안적 인식을 제시한다.  또한 젠슨과 블록은 일본의 테크노-애 니미즘적 혼성성에서 엿볼 수 있는 미학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 주목할 것 을 제안한다.104 그뿐만 아니라 앨리슨은 현대일본의 유희상품의 중심에 로 봇 등의 메카물이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미학적 테크노-애니미즘’
(aesthetic techno-animism)이라고 부른다.105 이런 관점들은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런 가능성은 노리나가가 “사물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고 해석한 모노 노아와레의 미학을 연상시킨다. 흔히 가장 일본적인 미의식이라고 일컬어 지는 모노노아와레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내재된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삼투압적으로 교섭하는 ‘관계론적 공감의 능력’과 ‘감성적 인식론’에 기초 하고 있다.106 이와 관련하여 이케가미 에이코(池上英子)는 『미와 예절의 유 대』107에서 모노노아와레적 미야비(雅)의 미의식으로 충만했던 고대 궁정의 영향으로 중세에 이르러 미적 의례가 정치생활로 고양되었고, 렌가(連歌), 다도, 꽃꽂이, 조루리, 정원, 하이쿠 등의 다양한 ‘에티켓’ 영역에서 일상생 활 속에 미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결사 네트워크가 널리 확산되면서 ‘미학적 일본’(aesthetic Japan)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음을, 그리 고 그것이 근대 이래 ‘일본적 미’(Japanese the beautiful)라는 이데올로기로 고 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규명해냈다. 
마음은 우주를 채우기 위해 성장한다. 그런 마음이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설 때 마음은 바로 신이 된다. 신은 하나의 세계 영혼 또는 세계 영혼들의 집합체 이고 인간은 이런 신의 현재적 발전 상태가 드러나는 현장이다. 신이 성장하면 인간도 성장한다. 한편 인공지능은 모든 사물에 마음을 장착하는 과정, 또는 마 음이 모든 사물에 스며드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공 마음’ 이라는 연결끈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 남김없이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지향할 것이 다. 거기서 마음은 더 이상 인간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신
적 마음일 것이다.108   
다소 시적인 위 인용문에서의 ‘신’을 가미와 호토케로 대체한다면, 그것 은 기계에까지 확장된 하이브리드, 즉 미학적 일본에 있어 신불의 모노노아 와레를 대변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적 미’라 는 이데올로기가 심화되면서 내셔널리스트들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말하는 이케가미의 지적은 모노노아와레의 미학을 체계화한 노리나가 국학이 오늘 날까지도 일본 내셔널리즘의 핵심부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 을 일깨워준다. 거기에는 신불-애니미즘의 정치성, 애니미즘과 국가신도의 관계, 신도 내셔널리즘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TH와 일본 종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글이 미처 다루지 못한 이런 문제들 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 여기서는 다만 내셔널리즘이 하이브리드라는 이 름하에 희석되거나 모노노아와레가 일본이라는 경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한, TH적 일본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부연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08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241~242쪽.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 박규태 박규태,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옴사건· 일본교· 네오-내셔널리즘』, 한양대학교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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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과 인간향상의 생명정치학 | 신상규

투고일자: 2017. 6. 12 | 심사완료일자: 2017. 6. 26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인간향상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현재 인간향상 논쟁의 중심 전선은 트랜스휴머니스 트와 생명보수주의자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논쟁의 초점은 인간향상을 금지할 어떤 원칙적 이유 가 있느냐의 문제다. 이 은 논쟁의 초점을 바꾸고 생명정치적 요소들을 더욱 진지하게 고려할 필 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향상 논쟁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향상기술의 추구나 금지보다 사회 적 정의와 인간적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향상기술의 발전과 적용을 어떻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이 은 인간향상 논쟁이 자유주의적 트랜스휴 머니스트와 기술진보주의자 사이의 논쟁으로 재설정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 정의나 불 평등의 문제가 좀 더 적절히 고려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술진보주의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율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고 이에 입각하여 자율성과 사회적 공정성의 관계를 재평가한다. 주제어: 트랜스휴머니즘, 생명정치학, 자율성, 사회적 정의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 박규태
투고일자: 2017. 6. 15 | 심사완료일자: 2017. 6. 28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이 의 목적은 트랜스휴머니즘의 다양한 유형 가운데 특히 ‘종교적 트랜스휴머니즘’과 관련하여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흔히 애미니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신도와 불 교 및 각각의 가미(神)와 호토케(佛) 관념이 트랜스휴머니즘적인 일본 테크놀로지 문화의 중요한 밑그림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이 은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의 양립 가능성 을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을 간략히 계보화한 후, 네오-애니미즘에서 테크노-애니미즘에 이르는 사 유의 흐름을 일본의 사례에 적용시켜 그것을 ‘신불-애니미즘’이라 명명한다. 이어서 그러한 신불애니미즘과 관련하여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사를 살펴본 후 유희성,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 하이 브리드, 모노노아와레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종교와 테크놀로지적 일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자 한다. 주제어: 트랜스휴머니즘, 종교, 네오-애니미즘, 테크노-애니미즘, 신불-애니미즘, 가미, 호토케 일본 SF소설 속 ‘포스트휴먼’적 상상력의 현재 | 신하경
투고일자: 2017. 6. 26 | 심사완료일자: 2017. 7. 4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현재 일본의 SF소설은 정보통신기술, 신경과학, 인지과학, 컴퓨터-신경 네트워킹, 유전공학 등 제 반 과학의 발달을 소설 세계의 설정으로 도입하면서, 그러한 과학기술들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 을 예측하고 재현한다. 그 결과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인 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감정’이란 무엇인가 등의 문제가 제기되며, 이러한 문제제기들이 ‘포스트 휴먼’적 상상력을 구성하고 있다. ‘포스트휴먼’의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며, 그에 대한 탐구의 과정은 과학기술의 개별적 속성에 따라 ‘기술적’인 특성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이토 케이카쿠는 『학살기관』과 『하모니』를 통해 주로 정보통신기술과 뇌과학의 
발달이 야기하는 포스트휴먼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정보통신기술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라는 인간 관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인간 개개인의 독자적 개성은 부정되고, 예측 가능한 사고와 행동
324   일본비평 17호 
mediator
Transhumanism and the Biopolitics of Human Enhancement | SHIN Sangkyu Several criticisms have been raised against human enhancement. A central dividing line in current human enhancement debate has been drawn between transhumanists and bioconservatives. The main focus of the debate has been whether there is any principled reason to ban human enhancement. In this paper, I claim that we need to change the focus of debate by considering biopolitical factors more seriously. The more important question in human enhancement debate should be how can we regulate and control developments and applications of human enhancement technologies in a democratic way for the purpose of promoting social equality and human values, rather than the current focus on whether we should pursue or ban enhancement technologies. Thus, I propose that human enhancement debate needs to be reconfigured between libertarian transhumanists and techno-progressives, so that the problems of social justice and inequality get their more deserving considerations. And by taking the side of techno-progressives, I will discern two senses within the concept of autonomy and reevaluate the relation between autonomy and social justice. t,FZXPSETtranshumanism, biopolitics, autonomy, social justice
“Shinbutsu-animism” and Transhumanism: The Game of Kami and Hotoke  
| PARK Kyu Tae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closely examine how had the Japanese concepts of Kami(神) and Hotoke(佛), which have originated from Shinto and Buddhism respectively and are often said to be animistic, influenced greatly on the culture of Japanese technology. Thus, I pay special attenti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ranshumanism and religion, which are deeply associated with “religious transhumanism” among the various types of transhumanism. In so doing, I will present the notion of “shinbutsu(神佛)-animism” by applying the stream of thinking from neo-animism to techno-animism to the case of technological Japan after taking into careful considerations for diverse discourses related to the compatibility of transhumanism and religion. Furthermore, those concepts of Kami and Hotoke will be analyzed from the perspective of “shinbutsu-animism.” Finally, I will reconsider how technological Japan is related to religion by focusing on several keywords such as game-mind, trans-spirituality, hybrid, and mono-no-aware. 
t,FZXPSETtranshumanism, religion, neo-animism, techno-animism, shinbutsu-animism, kami, hotoke
Posthuman Imagination in Japanese Science Fiction | SHIN Ha-kyoung 
Science fictions in Japan introduce the development of various sciences, such as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neuroscience, cognitive science, computer-neural networking, 
328   일본비평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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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옴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 옴 사건 일본교 네오-네셔널리즘 
 | 한양학술총서 1  
박규태한양대학교출판부2015-08-25


기본정보
520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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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제1장 현대 일본 사회의 종교 지형 : 종교붐·‘정신세계·’ 신영성운동·신신종교
제2장 [옴 진리교]사건과 ‘내 안의 옴 진리교’
제3장 ‘옴 문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IQ84』
제4장 프레·스피리추얼리티 : 일본적 영성
제5장 스피리추얼리티란 무엇인가
제6장 영성적 지식인과 스피리추얼리티
제7장 스피리추얼리티 담론과 종교 담론
제8장 대중문화와 스피리추얼리티
제9장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 모든 일본인은 일본교도이다?!
제10장 네오·내셔널리즘과 신신종교 : 보수 우경화 현상의 종교적 밑그림
제11장 [행복의 과학]과 네오?내셔널리즘
제12장 희망의 스피리추얼리티 : 종교·탈원전·공공성

맺음말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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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규태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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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일본 재발견?: 일본인의 성지를 걷다』, 『일본정신분석』(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및 2019 종교문화비평학회 학술상 수상작),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2018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포스트?-?옴 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옴 사건·일본교·네오?-?내셔널리즘』(2016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일본 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노케히메까지』, 『일본의 신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황금가지』, 『세계종교사상사 3』, 『일본 신도사』,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 시스템』,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현대 일본의 순례 문화>,<일본 재발견>,<일본정신분석> … 총 43종 (모두보기)

2021/01/07

알라딘: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Practical Meditation

 알라딘: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일러스트와 함께 따라하기 쉬운 단계별 명상 안내서   

지오반니 딘스트만 (지은이),서종민 (옮긴이)불광출판사2020-09-02원제 : Practical Meditation (2018년)



책소개


지난 20여 년간 전 세계 명상의 대가들을 만나고, 여러 전통의 명상을 80개 이상 직접 수행해 온 명상 연구가 지오반니 딘스트만의 명상 가이드북! 영미권에서 손꼽히는 유명 명상 블로그 “Live & Dare”를 운영하고 있는 저자는 이 한 권의 책에 명상의 역사와 원리, 효과와 방법 등 그간의 경험과 연구로부터 얻은 모든 것을 담았다. 명상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게 명상하는 삶을 꿈꾸어 온 이들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고, 누구든 쉽고 편안하게 명상의 여정에 입문할 수 있도록 그림과 도표로 안내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명상법은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역사적 ? 과학적으로 오랫동안 효과를 인정받은 전통 명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인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용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간결한 문장과 풍부하면서도 잘 정리된 그림은 최대한의 정보를 보다 더 많이 전달하기 위한 저자의 고심이 담겨 있다. 오로지 독자의 ‘마음의 평화’를 응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명상에 대한 아주 친절한 안내서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명상 이해하기

명상이란?

명상에 관한 속설 파헤치기

명상 전통

조금 더 들여다보기

힘 갈고닦기

정서 건강의 열쇠

몸이 원하는 수행

실용적 영성

고요한 마음

선택은 당신의 몫

주인 없는 집은 난장판

현재를 산다는 것은 시작점일 뿐


명상하는 마음과의 만남

여정 시작하기

잠시 쉬어가기

산처럼 땅 딛기

가만히 응시하기

들이마시고 내쉬기

하늘의 구름

지금의 소리

어떤 느낌이었나요?


명상 시작하기

매일 명상하는 방법

네버 제로

과정 즐기기

명상에 힘을 실어주는 자세

상쾌한 공기 마시기

손동작

집중의 기술

불안과 명상


다양한 명상 방법

당신만의 길

마음챙김 명상

좌선

위빠사나

허밍 비 프라나야마

경행

요가 니드라

요가 아사나

태극권

내관

쿤달리니

트라타카

시각화

만다라 명상

제3의 눈 명상

만트라

이름 붙이기

내면의 침묵

네티 네티

의식 확장하기

머리 없는 나

추상 명상

자기 탐구

좌망

탄트라 명상

자애 명상

수피교 심장 박동 명상


통합하고 심화하기

명상의 순간

디지털 방해 요소

멈춤, 호흡, 지속

정복을 위한 시각화

문제 해결을 위한 마음가짐

성장과 번영

직장인을 위한 명상

운동선수를 위한 명상

연설가를 위한 명상

창의력을 위한 명상

다음 단계

예 갖추기

명상을 방해하는 장애물 극복하기

수행에 에너지 더하기

긴 시간의 명상 준비하기

심화를 위한 피정

풍성한 삶

신과의 연결

삼매


참고자료

참고문헌

색인

감사의 말


접기

책속에서

Q. 명상이 실제로 효과가 있나요?

명상은 고대부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보다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명상이 마음과 신체에 미치는 다수의 유익한 영향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습니다. _ ‘명상에 관한 속설 파헤치기’ 중에서

Q. 명상은 종교적 행위인가요?

종교에서 비롯된 기법도 있지만, 명상 자체는 여러분의 마음을 위한 활동입니다. 비종교적 기법을 따라간다면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도 명상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어떤 종교나 무신론과 부딪힐 일도 없습니다. _ ‘명상에 관한 속설 파헤치기’ 중에서

Q. 명상은 어렵지 않나요?

명상의 과정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합니다. 물론 전통적 의미의 명상 상태에 이르기는 보다 어려우며, 한 가지에 완벽하게 집중했을 때에만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그러한 명상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매우 적으며, 꼭 그 상태가 아니더라도 명상을 통해 여러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_ ‘명상에 관한 속설 파헤치기’ 중에서  접기

Q. 명상할 때 생각을 멈추거나 비워야 하나요?

의지로 생각을 멈출 순 없습니다. 대신 명상을 할 때 마음속의 다른 모든 것들이 지워질 만큼 한 가지에만 집중합니다. 마음을 한 가지에만 온전히 집중하면 생각도 그리로 흐르고, 정신도 고요하고 차분해집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 이르기까지는 다년간의 연습이 필요하므로 명상을 시작하는 단계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_ ‘명상에 관한 속설 파헤치기’ 중에서  접기

Q. 올바른 명상법과 잘못된 명상법이 있나요?

운동과 식이습관에도 올바른 방법이 있고 틀린 방법이 있듯, 명상할 때에도 각 경험과 단계에 알맞은 특정 기법들을 따라야 합니다. 적절한 지도 없이도 명상을 통한 어느 정도의 휴식을 경험할 순 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할 것입니다. _ ‘명상에 관한 속설 파헤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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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저자는 명상의 다양한 방법과 이점을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 적용하는 법을 탐구한다. 그가 쓴 이 책을 보고 나 역시 반해 버렸다. 우리 시대의 명상 지도자가 전하는 경이로운 책이다.” - 릭 핸슨 (신경심리학자, 『행복 뇌 접속』 <붓다 브레인> 저자) 

저자 및 역자소개

지오반니 딘스트만 (Giovanni Dienstman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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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명상 지도자이자 작가, 코치로서 전 세계 여러 전통의 도구와 가르침을 21세기의 사람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용적인 방식으로 전해 온 수행가이다. 자신의 개인적 성장과 영적 각성의 여정에서 그를 도와준 강력한 도구들은 물론 통찰과 영감을 나눠 오고 있는 저자는 80개 이상의 명상 기법을 시도하고, 200권 넘는 서적을 연구하였으며, 8,000시간 이상 명상하며 전 세계 명상의 대가들을 만나왔다. 현재 그는 유명 명상 블로그인 “Live & Dare”(liveanddare.com)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작 :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총 4종 (모두보기)

서종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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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주립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했다.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모기》,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피렌체》, 《알렉산더 해밀턴》, 《어떤 질문은 당신의 벽을 깬다》, 《불안해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아기 강아지의 비밀 생활》 등이 있다.

최근작 : … 총 27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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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나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다 모든 것이다>,<정신과 의사가 들려주는 초기불교 32강>,<달마어록>등 총 441종

대표분야 : 불교 1위 (브랜드 지수 323,98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 권으로 정리했다,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명상하려는 모든 이들을 위한 특별한 비주얼 가이드북!


“이 책을 펼친 여러분은 이미 보다 차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향한 여정에 중요한 첫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_ ‘저자의 말’ 중에서


- ‘모두가 앞서 나가려는 시대,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떨치기 어렵다.’

- ‘한 우물만 파기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도 힘들다.’

- ‘눈 깜짝할 사이 인생이 흘러가 버린 것 같고, 그동안 꿈꾸어 온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한 번쯤은 ‘명상’에 대해 관심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시대 ‘성공’의 키워드가 된 유명인사들의 생활 습관으로 명상이 꼽힌다는 점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명상은 뇌 기능의 향상과 정서적 건강, 스트레스 해소에 따른 신체 건강 유지 등의 효과와 더불어 그 이상의 결과를 낳는 오래된 지혜이다. 하지만 우리는 명상하기를 망설인다. 고리타분하고 다분히 종교적인 행위일 것이란 오해 때문에, 그리고 명상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헛소문 같아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더욱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명상법 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게 알 길이 없고, 명상할 시간조차 내기 어렵다.


한 권으로 배우는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그렇다면 명상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며, 어떤 효과가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여 년간 전 세계 명상의 대가들을 직접 만나고,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스스로 수많은 명상법을 체험, 18년간 꾸준히 명상을 수행해 온 전문가이다. 지금은 영미권에서 손꼽히는 유명 명상 블로그(liveanddare.com)를 운영하며 전 세계 여러 전통의 명상 기법과 가르침을 현대인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용적인 방향으로 번역하고 교육하는 명상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이렇다.


- 명상이란 무엇이며, 명상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무엇인가

- 명상이 신체와 정신, 감정에 미치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효과

- 명상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것과 마음가짐

- 일상에서 진정으로 즐겁고 보람 있는 명상 습관 들이기

-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간단히 실천할 수 있는 명상법(준비 명상)

- 불교, 도교, 요가, 베단타 등 전 세계의 오랜 전통에서 길어 올린 39가지 명상 기법

- 일상의 함정에 대처하거나 예방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명상 활용법

- 위급할 때 즉각적으로 평온을 안겨주는 호흡법

- 학생, 직장인, 운동선수, 연설자 등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명상 응용법

- 명상을 마친 후 점검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

- 좀 더 높은 단계의 명상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

- 명상의 방해 요소를 피하고, 명상 중의 장애를 극복하는 법


책의 전반부는 명상의 역사와 원리는 물론 과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명상의 효과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이어 명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둔 명상법을 차례로 소개한다. 단계별로 차근차근 실천할 수 있도록 설명되어 있는 명상법은 독자의 필요에 따라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든 바로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론과 실천이 집약된 이 책은 그야말로 ‘명상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세상의 거의 모든 명상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전통적 명상법은 최근 많이 시도되고 있는 마음챙김 명상부터 좌선, 위빠사나, 내관, 만다라 명상 등 차분히 앉아 할 수 있는 수행과 경행, 요가(아사나) 등 대체로 활동적인 이들을 위한 명상법 등 다양하다. 이 각각의 명상법은 수행 시 주로 사용되는 감각 경로(시각, 청각, 촉각 등)가 다를뿐더러 얻을 수 있는 효과도 달라 독자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시도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명상법은 이 책에 모두 담길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더욱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단 하나의 명상법은 있을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개인마다 사용하는 감각 경로가 다르고, 각자의 성향도,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여러 명상법을 가능한 한 오래, 꾸준히 시도해 보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명상법을 선택해 수행하길 권한다.

그러나 전통적 맥락의 명상이 다분히 종교적일 거란 편견은 금물이다. 명상은 종교에서 비롯된 기법도 있지만 결국 ‘우리의 마음을 위한 활동’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명상은 모두 ‘비종교적인 기법’으로,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되고 다른 어떤 종교와 부딪힐 일도 거의 없다. 더욱이 역사가 오래된 전통적인 명상법은 오늘날 과학적인 효능이 입증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명상의 신뢰도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아도 된다.


당신의 일상에 더욱 가까운 비주얼 가이드북

이 책에 실린 명상법은 오랜 역사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지만 현대인들의 바쁜 생활 습관과 눈높이를 고려하여 선택, 혹은 응용된 명상법이다. 한편 책의 서두에는 명상에 처음 입문하는 이들을 위한 간단한 명상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 명상법은 본격적인 명상에 앞선 준비 명상이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즉각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명상법이기도 하다.


- 잠시 쉬어가기 처음 맛보는 5분 명상

- 산처럼 땅 딛기 산처럼 고요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몸 알아차림

- 가만히 응시하기 시선을 고정시켜 마음을 가라앉히는 준비 명상

- 들이마시고 내쉬기 명상에서 가장 자주 이용하는 대상인 호흡을 셈하는 간단한 기법

- 하늘의 구름 생각으로부터 한 발짝 거리를 두어 맑은 정신과 마음의 자유 얻기

- 지금의 소리 지금 들리는 소리에 온 의식을 집중하여 마음을 비우는 명상법


또한 책의 말미에는 의욕이나 자신감이 부족할 때, 집중력을 높이거나 머릿속 소란을 잠재우고 싶을 때 등 일상의 여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응용 명상법이 소개된다. 이는 직장인이나 운동선수, 크리에이터 등 여러 상황 가운데 오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는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실용적인 도구들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아름답다. 이 책을 ‘비주얼 가이드북’이라 소개한 이유는 페이지마다 따뜻한 감각의 파스텔톤 일러스트가 명상을 이끌어 준다는 데 있다. 그동안 수많은 명상 관련 도서를 접할 때 텍스트 중심의 ‘읽기’에 몰입해야 했다면, 이 책은 핵심을 관통하는 저자의 설명과 직관적인 이해를 돕는 도해가 일러스트와 함께 자유롭지만 질서 있는 형태로 편집되어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구성

1장에서는 그동안 막연하게 알았던 명상의 기능과 효과에 대한 선명한 시각을 다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명상이란 무엇인지 그 역사와 원리는 물론, 과학적 연구 결과로 증명된 명상의 효과에 대해 살펴본다. 이 장에서 독자들은 명상 여정의 바탕이 되는 기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2장은 명상의 여정에 처음 발을 내디딘 이들을 위한 첫 실전의 장으로서 명상을 맛보며 즉각적인 평화를 느껴보는 기회가 제공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간단한 명상법인 ‘미니 명상’을 통해 어떤 기법이 나에게 잘 맞는지 알아본다. 또 명상 여정 속에 무엇을 기대해도 되는지, 어떻게 하면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도 소개한다.


3장은 ‘매일’의 지속 가능한 명상을 위해 습관을 기르는 법은 물론, 초보 명상가가 흔히 마주하게 되는 장애물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장이다. 본격적인 명상에 앞서 명상에 필요한 기본 자세나 손동작은 무엇이 있는지도 소개된다.


4장에서는 저자가 그동안 경험하고 연구한 80가지 이상의 명상법 중 가장 유명하고 쉬운 기법 39가지를 엄선해 소개한다. 저자가 추구하는 바와 같이 이 장에서 소개되는 여러 전통의 명상 기법은 종교적 성향을 떠나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므로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5장은 오랫동안 명상에 대해 연구하며 실천해 온 저자가 알아낸 명상과 일상을 한 데 합치는 방법, 부정적 감정이나 문제 해결 등 일상적 도전 과제를 해결하는 데 명상을 이용하는 방법을 정리한 장이다. 이 장에는 여러 직업과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명상을 적용하는 방법은 물론 명상 여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명확하고 간결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지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물론 특정 종교를 강조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문장은 없다. 오직 독자들의 ‘마음의 평화’를 응원하는 저자의 친절한 안내만이 차분한 일러스트와 잘 정리된 도해의 올바른 조합으로 담겨 있을 뿐이다.


“이제 잠시 멈춰봅시다. 여러분의 몸을 느껴보세요. 크게 심호흡한 뒤, 이제 페이지를 넘겨보세요. 명상을 향한 여러분의 여정에 변화가 가득하기를!” _ ‘들어가는 말’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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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마음을 위한 활동, 즉 사색 행해위입니다.명상방법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게 다음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10-)



마음 속 소란을 잠재우는 첫걸음은 생각을 살펴보는 습관입니다.이는 명사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살펴봄으로써 기를 수 있습니다.알아차림을 통해서라면 부정적이고 쓸모없는 생각들을 긍정적인 생각과 구별하고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31-)



역동적 명상 기법인 경행은 특히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방법입니다.또한 명상과정에서도 앉아서 하는 명상 사이사이에 다리를 쉬기 위하여 이 방법을 흔히 사용합니다.몇몇 선불교 종파에서는 걸음을 매우 느리게 하고 (호홉단 반걸음),몇몇은 보다 빠르게 합니다.(호홉단 반걸음),몇몇은 보다 쁘르게 합니다.(호홉당 수 걸음),여기에서는 느린 방법을 살펴보지만, 속도와 리듬을 달리하면서 마음에 어떤 영향이 가는지 실험해 보아도 좋습니다. (-90-)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어느때보다 어수선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에 걸린 확진자들이 전국에서 확산되고, 증가하고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현실이 되고 있다.나의 잘잘못을 떠나서,서로간에 생겨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은 그동안 우리가 느껴보지 못한 현실이다.사람들과 자주 보고,얼굴을 익히고,안부를 묻는 것이 당연했던 시간들이 2020년에는 사라진지 오래되었다.그 과정에서 분주하고,산만하고,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으로 명상은 나의 일상을 파괴하지 않고,주어진 시간을 잘 흘려 보낼 수 있다.내 몸을 이해하고, 호홉을 조절하고, 평온함과 고요함을 유지 하는 것이 일상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여기에 잇었다.



명상은 여거가지 종류가 있었다.앉아서 하는 명상, 누워서 하는 명상,걷기 명상이 있으며,이 섹다지 명상은 호홉조절과 엮여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명상의 여러가지 종류중에서 좌선과 위빠사나는 명상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나 자신믜 몸과 마음의 행동과 감정의 변화를 멈추고, 나의 내면 속 감정과 여러가지 문제들을 알아채리는 과정 속에 명상이 있다.즉 휴식과 멈춤,내면 들여다보기, 알아차림, 초점의 단계를 거쳐가는 명상은 항상 지속성을 가지고 있었으며,일상 생활 속에서 명상은 틈틈히 반복되어야 한다.명상은 머리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연속된 과정 속에서 명상의 효과는 커저간다.



종교 이전에 명상이 잇는 이유,명상의 뿌리에 베다 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명사은 기원전 5000년 경 베다 문화와 힌두교 전통과 연관되었다.현대인들에게 디지털 문명과 신기술로 인해 그 어느때보다 복잡하고, 꼬여있는 삶에서 명상이 그 어느때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 삶의 위로와 치유,회복력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어기 위해서다.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가면서 ,만족감을 느끼고,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찾는 것, 검소함과 심플함 삶,고요함을 내 삶의 주춧돌로 바꿔 나가는 것, 주어진 삶에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명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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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20-12-22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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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새창으로 보기




 


평소 관심도 많고 미디어등을 통해 기본자세 정도는 알고 있는 명상





하지만 깊이는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우연한 기회로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는 서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명상에 관련하여 상세한 정보를 알수 있어 마음만 있지 실제로는 거의 하고 있지 못한 명상에 관련된 많은것을 익히고 배울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일러스트와 함께 따라하기 쉬운 단계별 명상 안내서라는 문구를 보니 여태껏 어렵게 생각했던 명상을 따라하면서 쉽게 배워 그동안 꿈꾸었던 명상인으로서의 삶으로 인도해줄 것이라 생각되네요.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처럼 책을 보고 배우면서 명상을 시작하다보면 심신(心身)을 피로감 해결과 정신적 안정감등 과학적으로 입증된 명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여겨지는데





차례에 이은 들어가는 말과 본격적인 명상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기 전 명상에 관련된 정의부터 알려주고 있습니다.





명상은 본래 고통을 극복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며, 고차원적 존재와 연결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인적 성장과 수행 능력 신장을 도모하고, 최선의 건강과 행복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됩니다. p10





명상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니 6가지나 소개되어 있어 바쁜 현대인들일지라도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으며





한단계 한단계 명상에 관해 정보를 접하고 따라하다보니 미약하지만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는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것조차 명상이 된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명상을 하기 위한 자세를 나열해주고 있는데 앉아있거나 의자를 이용하거나 심지어 누워서도 명상을 할수 있다고 하니 장소불문하고 가능하지 않나 생각되는건 저만의 생각이 아닌듯 싶네요





또한 다양한 명상방법을 통해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좌선이나 허밍 비 프라나야마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되는데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니 각자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면 될듯 싶습니다.


 


 





 


 


집중력이 부족해 늘 원하는 바를 이루기가 힘들었는데 트라타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력을 기를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라고 하니 시도해볼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늘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가짐이 적지 않는 나이가 된 지금도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하는데 방해물이 되고 있는 바 이제부터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가질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제3의 눈이라는 차크라와 추상명상등도 살펴보며 방법을 익힐 수 있었으며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나 생활환경은 개선되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발생되는 디지털 방해 요소에 대해 기본 원칙을 정하라고도 알려주고 있는데 여태껏 무분별하게 사용했던 디지털 기기들로부터 어는정도 해방과 함께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시간으로 삼으로 어떨까 싶네요





직장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연설가를 위한 명상을 따로 알려주고 있어 다른 직업을 가진 개개인마다 원하는 효과를 성취할수 있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것이 어디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적지 않는 판형에 일러스트와 함께 2백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라 명상에 관련된 그동안 궁금하였지만 알지 못했던 상식과 정보를 접하고 나니 언제 어디서나 명상을 할수 있다는 어느 책에서인가 읽은 기억이 떠오르네요.





명상을 일상생활화하여 제2의 인생으로 도약할수 있도록 적지 않는 도움을 받은 소중한 책이 아니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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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무야 2020-09-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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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만 알찬 명상 COOK BOOK 새창으로 보기

다소 도전적인 제목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책이 도착하였습니다. 평소 명상을 하고 있으며 명상에 대해 너무도 알고 싶은 게 많았던 저에게는 단비 같은 책이었습니다.


책은 두꺼운 하드 덮개로 덮여 있었고 속지에는 다양한 그림과 설명이 다채롭게 녹아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기 쉬운 책은 처음이야!"라고 마음속으로 환호를 외치며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상이란 무엇인지, 명상의 역사, 39가지의 명상 방법이 술술 머릿속에 정리되었습니다. 특히 '마음 챙김'은 하나의 명상 이론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명상을 전혀 모르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 읽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지루하지 않다는 점! 지은이께서는 요즘 독자들이 글자가 많은 책에 점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차림'하신 거 같았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저 역시도 요즘은 글자 많은 책보다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책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사실 글자 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직관적인 일러스트와 실제 명상을 해볼 수 있게 돼 있어서 편하게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을 보면서 아는 명상들도 있었지만, 전혀 처음 보는 명상도 있었습니다. 책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차분히 명상해보고 내면의 느낌을 살펴보는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책을 보면서 명상을 해본 것도 처음인 거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명상법은 우리나라 전통으로 여겨지는 태극권을 비롯하여 만다라 명상, 제3의 눈 명상, 수피교 심장 박동 명상 등이었는데요. 이런 명상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됐고, 명상이 불교, 기독교뿐만 아니라 도교, 유교, 요가, 그리스 철학 등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명상은 종교와도 관련이 있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이 해도 전혀 무관한 것이며, 집중력과 주의력 향상에 매우 뛰어난 효과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첨단 의료장비의 발달로 명상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의 많은 CEO도 명상을 통해 기업의 업무 성과를 향상하고 있다고 하고요.





항상 꿈꿔왔던 것이 제가 사람을 모아 명상 모임을 해보는 것이었는데요. 이 책만 있으면 1년 내내 명상 모임을 해도 모자람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번 모일 때 명상 2개씩만 해도 1년은 휘리릭 지나갈 것만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에는 직장인, 운동선수, 창의력 향상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명상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명상은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면 특정 방법을 꺼내어 활용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COOK BOOK처럼 활용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평소 컨디션이 떨어지거나 우울, 불안 등의 감정에 휩싸였을 때 상황마다 그에 알맞은 방법을 찾아서 시도해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물론 가장 간단한 방법은 책의 아무 페이지를 펼쳐서 나온 명상 방법을 그대로 해보는 것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책의 대부분은 명상 방법이 열거돼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 불광출판사에서 출판되는 책들을 흥미롭게 읽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나온 책도 마음에 쏙 듭니다. 명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단비 같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상에 대해 손쉽게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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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인 2020-09-2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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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

웰빙, 웰다잉, 물질적인 가치서 정신적인 가치로 현대인의 인식은 변화하고 있다. 어떻게 하루가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마저 나의 정신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하루 속 같은 고민, 같은 불만, 같은 의식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쳇바퀴같은 인생이 어느 순간 당연한 것으로 옷을 갈아 입는다. 뭔가 답답하고 무기력한 시간 속에서 명상을 접하게 됐다. 유명한 명상가들의 영상을 보고 잠시 눈감고 명상이란 것을 해봐도 마음의 평화는 어째서인지 나에겐 찾아오지 않았다. 머리 속은 생각에 생각을 꼬리물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부를 향한 관심은 잠으로 의식을 잠재울 때까지 요동친다.

명상이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명상초보자에게 적절한 대답이 될 만한 책을 만났다. 명상이란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다가가기 힘들고 베일에 쌓인 신비스런 것이 아닌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친숙한 것.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바라본다. 영화를 보듯. 그 감정에 휩싸임을 인식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마음챙김, 좌선, 위빠사나, 시각화, 만트라 등 다양한 명상기법에 대해 텍스트로만 구성된 다른 책들과 달리 핵심만 요약 정리된 깔끔한 구성과 간결한 일러스트까지 겸비되어 한층 더 부담없이 다가온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닐까. 돈, 건강, 인간관계, 자기계발 등 수단은 많지만 결국 근본 목적은 행복. 목적지를 향한 여정길을 명상이라는 탈 것으로 가보는 이들에게 이 책은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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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주인 2020-09-2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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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을 통해 눈만 뜨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각종 뉴스와 속보들로 인해 아침부터 우리들의 뇌는 워밍업도 없이 그것들을 분석하고 저장하느라 혹사 아닌 혹사를 당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바깥 풍경을 보는 어르신들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스마트폰 삼매에 빠져 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지내다 보니 머릿속은 뒤죽박죽 되기 십상이고 가짜뉴스와 진짜 뉴스를 구별해 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정작 자신은 사라지고 온통 정치인이나 연예인 그리고 사건 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가족들과의 저녁 밥상에서는 만나본 적도 없는 그들을 화제로 귀중한 시간을 흘려 버리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일은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우려를 표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직장이나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다 보면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파김치가 된 몸으로 귀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정신없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만물이 잠든 고요한 때에 자신과 오롯이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본인도 짧더라도 잠들기 전에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마침 “일러스트와 함께 따라하기 쉬운 단계별 명상 안내서”라는 부제가 붙은 『명상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불광출판사에서 출간되었기에 얼른 흥미롭게 읽어보고 난 후 명상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책의 제목대로 명상(冥想)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명상 이해하기’, ‘명상하는 마음과의 만남’, ‘명상 시작하기’, ‘다양한 명상 방법’, ‘통합하고 심화하기’의 다섯 챕터(Chapter) 속에 다양한 소제목으로 상세한 설명이 시각적인 일러스트(Illustration)와 함께 설명되어 있어서 마치 애니메이션(Animation) 영상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지오반니 딘스트만(Giovanni Dienstmann)이라는 외국인이다. 그는 명상 지도자이자 작가, 코치로서 전 세계 여러 전통의 도구와 가르침을 21세기의 사람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용적인 방식으로 전해 온 수행가로서 자신의 개인적 성장과 영적 각성의 여정에서 그를 도와준 강력한 도구들은 물론 통찰과 영감을 나눠 오고 있다고 하는데 80개 이상의 명상 기법을 시도하고, 200권 넘는 서적을 연구하였으며, 8,000시간 이상 명상하며 전 세계 명상의 대가들을 만나 왔다고 한다. 현재 유명 명상 블로그인 “Live & Dare”(liveanddare.com)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이 분야에선 명성이 있는 분이긴 한가보다. 명상을 통해 집중력이 강화되고 창의력이 향상되며 학습능력 및 기억력 향상과 같이 뇌에 미치는 영향도 크고,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우울증 예방에 도움이 됨은 물론 불안감 및 기분장애 조절과 정서 지능과 회복력 향상, 공감능력 향상, 자기 통제 능력 증진, 그리고 긍정적 감정과 관계성 조성 등 정서 건강에 미치는 효과도 크다고 하니 이 책에서 소개되는 명상법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꾸준히 실천해 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39가지의 엄선된 명상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좌선(坐禪)’이나 ‘요가(Yoga)’, 걷기 명상인 ‘경행(徑行)’, ‘태극권(太極拳)’, 무상에 관한 통찰인 ‘위빠사나(Vipassana)’와 같은 익숙한 이름을 가진 명상법이 있는가 하면 ‘허밍 비 프라나야마(Humming Bee Pranayama)’, ‘쿤달리니(Kundalini)’, ‘트라타카(Trataka)’와 같은 생소한 이름의 명상법도 소개되고 있어 하나하나 집중해서 경험해 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테지만 새로운 명상법을 통해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모든 명상은 알아차림, 주의집중, 그리고 자기 조절 연습으로서 자신에게 잘 맞는 명상법을 매일 같은 시간에 가능하면 같은 장소에서 습관적으로 실천할 것을 권장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직장인을 위한 명상이나 운동선수를 위한 명상, 그리고 연설가를 위한 명상 등 특정 계층을 위한 명상법도 별도로 수록하였고, 명상에 도움이 되는 도서들을 ‘참고자료’ 항목에 담아 두어 전문적으로 활용하기에도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부디 이 책이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많은 분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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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댓글 27

담마의 거울

2012. 1. 9.
근본주의, 테라와다불교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을 보며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



댓글논쟁을 보았다. 스님과 재가불자의 댓글 논쟁이다. 그 중에 스님이 작성한 글을 읽어 보니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비록 댓글에 지나지 않지만 논문이나 기고문 등 공식적인 글에서 볼 수 없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댓글은 서광스님의 글이다. 불교닷컴에 등재 되어 있는 서광스님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댓글은 다음과 같다.





초기불교에 대한 냉소적 시각





우문우답....



한국제일의,
재벌회장인 이병철과 한국가톨릭 제일의 이론가인 차동엽신부의 질문과 답변은..글자그대로 우문에 우답이다.
평소에 논어를 즐겨 읽었다고 하여 그에 어울리는 질문을 하였으리라고 먼저 생각한 나의 선입견이 한참을 잘못되었다.
이리도...맹한지는 미처 몰랐다.

또한 그에 답하는 차신부의 답변은..역시나 맹탕이다.
당체...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리고..
이에 나름대로 답하신 허정스님은...이들에 맞추어 일부러 격을 낮추신것 같다.
그들에 맞추어..초기불교급의 차원에서..마치 초등생에게 답하듯 하신 것 같다.
그들에게는 초기불교급으로도 충분하다고 본것 같다.
그들에게..중관이나 유식..나아가.천태와 화엄으로 답한다는 것은 애초 어불성설이라고 보신 것 같다.
이런터에..언감생심..선불교이겠는가...

그러나..
행여..이것이 허정스님..종단의 불학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의 전부라면 곤란하다....

(서광스님)





이글은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의 새로 취임한 허정스님(필명 후박나무)이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에 대한 것이다. 이병철회장의 영적질문 24가지에 대한 불교측의 답변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이 글에 대한 댓글에서 서광스님은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초기불교적 답변에 대한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니까야만 맹신하는 자들은 외눈쟁이라고





니까야와 아가마에 대한 이해....



아래에서 보면,
경전형성과정의 초보적 지식마저 결여된 글이 보인다.
그결과 니까야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이 드러난다.

십사문제로 인한 근본분열이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었다.
이때에 상좌부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 2차결집이다.
그후 다시 2차분열이 연이어 일어나고...마침내는 상좌부12부파,대중부 8개부파가 나타났다.
도합 20개부파에서 다시 무수한 분파가 일어났다.
이중...상좌부에서는 설일체유부가 갈라지고.그 설일체유부에서 다른 부파가 생겨났다.

이러한 20여개부파는 각자 자기부파 나름대로의 경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중..상좌부가 만든 것이 니까야이고,설일체유부가 만든것이 아가마이다.
그런즉..상좌부계통이 아닌 대중부에도 그들 나름의 경전이 있엇다.

이렇게 각 부파의 수많은 경전이 있었음에도...
유독..상좌부의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아가마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중의 분별설파가 니까야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북인도에서 번성한 설일체유부는 아가마를 사용하였는데..이것이 나가세나왕을 거치면서 지위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초기 잔존경전인....상좌부계통의 상좌부 분별설파의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아가마만이 300년 넘게 구전되어온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고는 볼수가 없다.
이들은 부처님 말씀의 일면을 전한 것일 뿐이다.
그것도 대중부에 의하여 배척된 상좌부계통의 것이다.

그러므로...
고단한 불교사의 전체를 보고...균형적인 눈을 가지도록 하자.
외눈에 짝눈을 가지고..부처님을 모두 본것처럼 하지 말자.



(서광스님)





이글은 니까야의 맹신에 대하여 비판한 글이다. 그런 니까야는 20여개 부파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이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까야만 맹신하는 자들은 외눈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친설과 불설



친설과 불설, 불설과 비불설에 대한 논쟁은 매우 뜨겁다. 이런 논쟁에 대한 글이나 기사, 논문은 수도 없이 발표 되었다. 또 부파불교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전 즉 니까야가 부처님의 ‘친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초기경전이 친설이라면, 대승경전은 ‘불설’이 될 것이다. 대승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부처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 많은 경전이 찬술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친설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런 가르침의 전승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들도 있을 수 있으나 여러자료에 따르면 제1차결집과 2차결집을 거쳐 3차결집으로 공인된 것이 니까야라 한다. 또 니까야의 경우 원형의 훼손없이 전승가능하다는 것이고 더구나 무상, 고, 무아,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친설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광스님은 현재의 니까야가 잔존 부파의 경전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란



대승불교에서는 동남아 불교 즉,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한다. 이는 대승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고, 실제로 선사들의 법문에 소승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기도 한다.



또 하나의 사실을 든 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원시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원시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덜 성숙된 불교, 미완성의 불교라는 뉘앙스가 매우 강하다. 이는 모두 대승의 교리가 더 수승하다는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에만 바라보는 시각일 뿐 전세계적으로 테라와다불교는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라고 말하고, 원시불교는 초기불교(Early Buddhism)라고 칭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 대하여 주류불교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Mainstream Buddhism"

a term used by some scholars for the early Buddhist schools.

(Schools of Buddhism, 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불교학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메인스트림부디즘에 대한 것이다. 일부 학자는 초기불교학파(the early Buddhist schools)에 대하여 주류불교(Mainstream Buddhism)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학파가 주류불교라면 그 맥을 잇고 있는 테라와다불교 역시 주류불교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동국대학술원장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불교tv강의에서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주류불교라는 명칭을 붙여 준 것 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학파는 어떤 것일까.



북전에서 본 부파불교 계보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초기불교학파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학파(Early schools)

·         Sthaviravāda(상좌부)

o    Pudgalavāda ('Personalist') (c. 280 BCE)

o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Vibhajjavāda (prior to 240 BCE; during Aśoka)- 독자부(犢子部)

§  Theravāda (c. 240 BCE) 테라와다

§  Theravāda subschools (see below)

§  Mahīśāsaka (after 232 BCE)

§  Dharmaguptaka (after 232 BCE)

§  Kāśyapīya (after 232 BCE)

§  Vatsīputrīya (under Aśoka) later name: Samitīya

§  Dharmottarīya

§  Bhadrayānīya

§  Sannāgarika

§  Mūlasarvāstivāda (third and fourth centuries)

§  Sautrāntika (between 50 BCE and c. 100 CE)

·         Mahāsaghika ('Majority', c. 380 BCE–(대중부)

o    Ekavyahārikas (under Aśoka)

§  Lokottaravāda

o    Golulika (during Aśoka)

§  Bahuśrutīya (late third century BCE)

§  Prajñaptivāda (late third century BCE)

§  Cetiyavāda

o    Caitika (mid-first century BCE)

§  Apara Śaila

§  Uttara Śaila

 

(Schools of Buddhism북전에서 본 계보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표시된 초기학파(Early schools 근본부파)를 보면 상좌부와 대중부로 크게 두 파로 나누어져 있다이후 19개로  지말 부파가 성립되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현재의 테라와다불교라 불리우는 테라와다부파가 설일체유부에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더구나 대중부의 경우 BC380 년에 성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남전 디빠왕사에서는 

 

이에 대하여 인도불교사(권오민교수역경서원)를 보니 두 가지 전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하나는 분별설부전승(남전)이고또 하나는 설일체부전승(북전)이다위 영문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계보는 설일체부전승에 대한 것이다그렇다면 분별설부 전승(남전)에서 어떻게 표기 되어 있을까.

 

인도불교사책에 따르면 위 계보와는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다테라와다에서 설일체유부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테라와다-타지부-설일체유부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부파불교를 보는 시각이 북전과 남전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특히 테라와다불교를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묘사한 북전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이에 대하여 한국어판 위키피디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편근본 분열의 발생 계기와 관련하여서는 북방불교의 자료와 남방불교의 자료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현대의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자료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부파 불교한국어판 위키피디아)

 

 

근본분열과 관련하여 북전과 남전의 차이가 있는데남전의 자료를 더 신뢰한다는 말이다이는 스리랑카의 디빠왕사(도사(島史 · Dipavamsa)에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디빠왕사에 따르면 근본분열이 일어난 원인이 2차 결집때문이라 한다. 2차 결집의 결정에서 불복한 비구들이 독자적인 결집을 열어 계율을 수정한 것이다그래서 상좌부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2차 결집후에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나뉘게 되어 근본 분열이 일어났는데이는 순전히 계율에 관한 문제로 갈린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3차 결집이 일어난 후 부파 분열은 이와 양상이 다르다계율에 대한 해석 뿐만 아니라 교리상의 견해지도자간의 대립지리적 조건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쇼카대왕의 3차 결집이후에 더욱 더 분열이 심화 되었는데이는 3차 결집으로 인하여 쫒겨난 비구들이 새로운 부파를 만든 것도 한 요인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처님 당시부터 근본가르침을 고수해온 교단은 테라와다이었다고 한다그래서 3차 결집이 끝난 후 아쇼카대왕은 테라와다(상좌부)불교를 공인하고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하였다그 중의 하나가 스리랑카이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이 원본의 훼손없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었는데이는 스리랑카라는 지리적 이점과 법을 지키려는 비구들의 노력에 대한 결과라 한다.

 

하지만 인도대륙에서는 3차 결집이후 쫒겨난 비구들이 모여서 다시 만든 것이 자신들의 만의 교리를 갖는 부파를 만들었는데 주로 대중부라 한다.

 

한편 상좌부에서도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부파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설일체유부라 한다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1차결집에서부터 3차 결집에 이르기 까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믿고 따르는 테라와다불교가 주류임을 알 수 있다.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자

 

부파분열후 인도대륙에서는 대승으로 변형되고  밀교로 바뀌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그러나 고립된 섬나라인 스리랑카에서는 원형을 그대로 보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런 점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제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출가자들의 제일의 관심은 오직 법이었지 결코 중생이 아니었다그들에게 중생이니 인간이니 하는 것은 법이 아닌 개념(pannatti)일뿐이었다그들은 법을 배우고 연구하고(pariyatti, 교학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켜 도를 닦고(pariyatti, 도닦음그래서 무상무아의 법의 실상(보편적 성질)을 꿰뚫고 통찰하여(pativedha)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생을 다 바쳤다.

 

이처럼 법을 참구하며 평생을 바친 스님들이 부처님의 법을 참구하여 출가사문이 된 성스러운 과실(samannaphala, 沙門果)을 증득하고 불법이 오래 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전승해온 가르침이 상좌부불교이고 아비담마이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때빳띠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대림스님청정도론해제)

 

 

 

스리랑카비구

 

 

 

3차 결집후 일어난 부파불교와 대승운동이 대륙에서 일어나 불교가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에서는 3차 결집후 공인된 불교를 잘 보전함으로서 오늘날 니까야로 전승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대륙에서 불교는 어떻게 변질되었을까.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은

 

아쇼카대왕의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은 일종의 이단들이다일아스님의 책 아소까에 따르면 이단들에 대하여 흰옷을 입혀 쫒아냈다고 한다그런데 쫒겨간 비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수 많은 종단이 존재한다그런데 대부분의 신생종단들이 주류측으로부터 외면당해 생겨난 것이라 한다또 재산상 문제 때문에 새로운 종단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이는 기성 주류종단으로부터 밀려 난다고 하여 속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던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관련 종파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3차 결집후 이단으로 판정받아 흰옷을 입고 쫒겨나간 비구들이 할일이 무엇이었을까불교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그래서 자신들을 받아 주지 않는 주류불교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든 것이 부파불교로 본다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대승불교가 일어난 요인에 대하여 3차 결집후 쫒겨난 비구들이 주도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보이고 있다.

 

설일체유부를 제압하기 위하여

 

오늘날 대승불교에서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른다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소승이라는 개념은 부파불교를 지칭한다근본 분열이후 20개에 달하는 지말부파를 말한다.

 

이런 부파 불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대승불교라고 볼 수 있다이때가 대략 기원전후로 본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대승이라고 칭하고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칭하였는데 김종욱교수의 불교TV강의에 따르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날 당시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가 상좌부계통의 설일체유부이었다고 한다이에 반하여 대승불교는 세가 매우 미미하였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어떤 조직이든지 소수가 다수의 가장 큰 세력을 잡기 위해서는 헛점을 노린다고 한다김종욱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대승에서 설일체유부를 따라 잡기 위하여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 공사상이라 한다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논리를 전개한 것이 공사상이라는 것이다.

 

공사상이 출현하게된 배경

 

그런 공사상은 어떤 것일까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소수가 다수를 제압하려면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상이다공사상을 가장 잘 표현 하고 있는 경전이 반야경인데 6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반야경을 축약하여 핵심만 모아 놓은 것이 ‘반야심경’이다이 반야심경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공()’이 될 것이다공은 빈것이다그래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공을 설명하려면 먼저 역사적내지 교리사적 접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아와 연기라고 볼 수 있다무아가 없는 불교는 있을 수 없고 연기없는 불교 또한 상상할 수 없다이처럼 무아와 연기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그런데 무아와 연기의 해석방법을 놓고서 대승이 출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파불교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부파는 설일체유부이었다이제 막 대승불교운동이 일어 날 시점에 대승불교의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소수가 다수의 세력을 제압하려면 논리적 모순점을 찾아 내어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대승불교의 공사상도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개발된 논리라 볼 수 있다바로 그것은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 된다.

 

설일체유부의 주장

 

대승불교에 ‘아공법공’이라는 말이 있다()는 당연히 공한 것이고법 또한 공한 것이라고 해서 공사상의 핵심적인 논리를 말한다그런데 대승에서 소승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리중의 하나가 ‘아공법유’라는 것이다.

아공법공이나 아공법유나 공통점은 아는 공하다는 것이다이는 무아를 기본적 베이스로 깔고 가는 것이다만일 무아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모두 아공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법에 있어서 유부는 실유를 주장하고대승에서는 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는 법을 이루고 있는 요소즉 자성(自性)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모든 현상은 생성되고 소멸된다상호의존하고 조건지워져 생성소멸하는데 있어서 어떤 ‘요소(element)’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사상이다그 요소를 75법으로 본 것이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사기에 들어 있는 필름통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예를 들어 75개의 필름이 있어야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내용은 무상하고 영화 또한 이 극장 저 극장 옮겨 다니며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나오게 하는 필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상이 무상하고 무아라고 하더라도 오온이 존재 하듯이 기본적으로 75법이 실유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따라서 75법이 존재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그래서 ‘일체유부’라 한다.

 

또한 실유한다는 것은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바로 75법만이 독립적으로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이 것이 부파불교시대에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주장이다.

 

공사상이 출현한 배경

 

후발주자인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유부의 주장을 깨뜨려야만 살아 남을 것이다그래서 유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잡은 것이 ‘자성’에 관한 것이다특히 문제를 삼은 것은 75법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체가 있다는 것은 연기법과 모순된다는 것이 대승의 견해이다연기라는 것이 수 많은 조건들과 상호의존성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인데 자기만 떨어져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그래서 자성과 연기가 양립 할 수 없다는 것이 중관학파의 주장이다.

 

 

자성=실체성=연기-à인정(설일체유부)

자성=실체성=연기-à부정(대승불교)

 

 

자성에 실체가 있다면 연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나온 사상이 ‘공사상’이다연기라고 하는 것이 관계성을 말하는데 고립된 실체성이 있다면 자성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무자성이라 주장한다즉 다음과 같은 논리이다.

 

연기=관계성=무자성=

 

무자성은 비운다는 의미이다그래서 공()이라 한다비운다는 것은 공의 의미인데그렇다면 무엇을 비운다는 것일까그것은 바로 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것이고자성이 비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고립된 실체성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따라서 공은 ‘연기적 관계성’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라고 볼 수 있다그러므로 중관학파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도식이 성립된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결국 중관학파가 비판 하고자 하였던 것은 연기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이글은 불교 tv사이트에서 김종욱 교수의 공사상 강의에 대하여 녹취하여 정리 한 것이다블로그에 여려차례 올렸는데또 올렸으니 자기 표절한 셈이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이처럼 연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유부와 중관학파는 정 반대로 보고 있다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파

학설

  

설일체유부

아공법유

(我空法油)

비록연기하지만 요소들은 실재하고 자성은 있다

중관학파

아공법공

(我空法空)

바로 연기하므로 요소들은 실재하지 않고 자성은 없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를 공격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아공법유’라는 말이다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설일체유부와의 논쟁이었으나 지금도 남방 상좌불교를 폄하 할 때 사용하는 논법이 아공법유이다그러나 이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달리 법을 ‘찰나적’ 존재로 본다항상 실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로 보는 것이다그래서 법은 고유의 성질을 갖는 ‘자상’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공상’이렇게 두가지 큰 특징으로 본다따라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경우 아공법유가 아니라 ‘아공법공’이 된다.

  

재가자들이 삶의 바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상을 접하기 힘들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면 어렴풋이나마 공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공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재가자들이 삶의 바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상을 접하기 힘들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하면 어렴풋이나마 공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공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성진아상락아정의 바탕은

 

이렇게 인도대륙에서 소수의 대승운동주의자들이 다수의 설일체유부의 법유사상을 공격하여 마침내 인도대륙에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이후 공사상의 논리는 더욱 더 개발되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진아론적’ 법문을 선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이런 대승불교의 사상에 대하여 서광스님은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기본적인 소양부터 쌓아야...

 

아래,
불자님의 글을 보고...한마디합니다
.

오는 3월부터 새로 조계종의 종정이 되실 진제스님이 법문에서 항상하시는 말씀이...불성.진아.상락아정입니다
.
이 말은...진제스님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종정이신 법전스님과 몇일전에 입적하신 지관스님도 항상하시던 말씀입니다
.

이 분들은...앞의 두분은 모두 종정이시고..지관스님은 선..율 삼장에 두루 통하여 당대최고의 학승이자,율사로 모든 종도들의 존경을르 받던 분들입니다
.
그러한 분들이 그와같이 말씀하실 때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불성이니,진아니,상락아정이니 하는 말의 바탕에는 중관의 공관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반야사상의 최고봉인 금강경인 까닭입니다
.
그러므로..이말들의 참뜻은..외도나 소승의 논사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견해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아래의 불자님은
...
이것을 망각하고...무지한 일반론에서 설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
이것은...불교이해의 기본적인 소양이 의심스러운 것으로서..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지않습니다
.

그럼에도
..
굳이 이와같이 글을 올리는 것은..보기에 딱하여서입니다
.
바라건데..공부를 처음부터 다시하시라..

 

(서광스님)

 

 

 

불성이나 진여의 밑바탕에는 중관의 공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그런 공관은 어떤 것일까.

 

공관이란 무엇인가

 

다시 김종욱 교수의 강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시설(假施說)된 것쁘라즈냡띠(prajñapti)

 

중관학파의 주장대로 아()나 법이나 모두 공한 것이라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이 된다이 때 일체는 아나 법을 말하고개공은 유부의 75법 즉요소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그래서 중관학파는 75법을 요소(element)로 보지 않고 단지 기능(function)으로 본다이처럼 요소가 아닌 기능을 보는 것은 오온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제법을 요소가 아닌 기능으로 보는 것은 수학의 함수(function)로 설명할 수 있다제법이 x축과 y축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된 점이 아니라 x축과 y축 사이의 관계에서만 한 점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따라서 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래프가 그려지는 방식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 설명 될 수 밖에 없다그래서 고정된 요소(element)가 아니라 기능(function)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이나 75법 역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중관학파의 입장이다이처럼 서양식의 기능에 걸맞는 개념이 중관학파의 ‘프라즈냡띠(prajñapti)’이다.

이 프라즈냡띠를 한자어로 표시하면 ‘가()’라 번역된다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시설(假施說)’이다이때 가()는 가짜가 아니다잠정적이라는 것이다임시로 설치해 놓은 가건물 같은 것이다그 가건물은 가짜 건물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임시로 세워 놓은 건물을 말한다. 50층짜리 빌딩을 지을 때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식당 같은 것이다그렇다면 일체가 다 공하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자신도 공한 것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이야기는 아든 법이든 모두 공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함수적 기능으로서 쁘라즈냡띠 즉가시설로서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있는 것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문제는 일체가 모두 공한 것이라면 문자적으로 보아서도 그 모든 것안에는 공()도 포함되어야 한다‘공자신도 공한 것’이 되고 만다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我法空 空亦復空(아법공 공역부공)

모든 것이 공이고또 공이어서 모든 것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공 역시 공한 것이다.

 

아도 공하고법도 공하고공도 공한 것이다이렇게 계속 공으로 나가면 ‘허전’하게 된다이렇게 모든 것을 비워 나간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의 작용은 이렇게 진행 되고 있지 않은가이렇게 마음의 작용에 촛점을 맞추면 ‘유식사상’으로 가게 된다.

 

공가중(空假中삼제(三諦)

 

공도 공한 것이라면 그 공이란 무엇인가그 때의 공은 쁘라즈냡띠(가시설)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 맞다실상은 연기 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묘사 할 수 있다따라서 실상은 가시설(쁘라즈냡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상이 공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그런 이들을 ‘무기공’ 내지 ‘공병’에 걸린 것으로 본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인데 가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라는 긍정이다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여기에서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공과 가의 ‘중간 정도의 입장’이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가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고이 두가지 진리를 포괄하여 유무 양변을 떠나 중(중도)이라 한다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이 공가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가지 진리’라 하여 3제라 하는데 다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진리

  

진제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의 입장

(施說)

속제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

중도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

 

 

(김종욱굣수제25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 - 공()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불교tv 2008-04-07)

 

 

 

불교TV의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서 중관의 공관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준다그런 공관은 나가르주나(용수)에 의하여 정리 공가중 3제로 정리 되었는데이사상의 핵심은 중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이 중도사상은 유무양변을 떠난 것이라 한다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되는 것이 중도라 한다이런 중도사상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의 중도 사상과 다른 것이다공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불교에 부처님의 중도가 있다면 대승에서는 용수의 중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다른 것인데인도불교사(경서원)에서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이 용수의 중도사상이라 한다마치 부처님이 브라만교의 아뜨만을 비판하여 불교가 성립되었듯이대승불교는 용수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여 성립된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할 리가 없을 것이다그래서 대승논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니까야를 내버려 두고 별도의 경전제작에 들어간다그것이 공사상과 보살사상 등의 대승이념이 담겨 있는 반야경법화경화엄경 등과 같은 대승경전일 것이다.

 

한놈만 조지면 된다?

 

 

단현은 근본주의자입니다....

 

단현은 불교근본주의자입니다.
초기불교를 맹신하는 근본주의자입니다
.
이 근본주의자는...불교관련의 카페나 블로그등을 돌아다니며 ..심지어 무비스님등의 존경하는 스님들께도 온갖 비방과 폭언을 퍼붓고 있습니다
.

본래..근본주의자는..기독교근본주의자이던,이슬람근본주의자이던...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배타적 근성에 의하여 대화의 상대가 되지않는 것입니다
.
이런 근본주의자와 댓글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
그러므로...장황하게 글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

자신은
...
스스로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하나..그는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틀림없는 근본주의자입니다
.
근본주의자 특유의..맹신적 기질,배타적 성향.공격적 기질등이 그것입니다
.
그 예가..대승을 부정하고,대승의 경전과 논장을 불살라야 한다고 하며,대승의 보살을 마구니 취급하는 것등이 모두 그것입니다
.

때로
..
이 사람은...가끔 겸손을 가장한 글들을 올리기는 하나..이 모든 것은 위장입니다
.
세불리할경우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
이 일천제는...스스로 알아서..무시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서광스님)

 

 

 

스님의 댓글을 읽어보면 일관성이 있다오로지 한 사람의 네티즌을 지목하여 근본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있다마치 안티조선운동을 보는 것 같다조선중앙동아라는 여러 보수신문중에 대장격인 조선만을 타겟으로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수 많은 네티즌 중에 오로지 한명만 지목하여 집중으로 공략하는 것이다시쳇말로 한놈만 조지면 된다라는 것이다그런 한명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고 일천제라는 최악의 명칭을 붙여 주고 있다더구나 불교근본주의자들에 대하여 맹신적 기질,배타적 성향.공격적 기질등이 있다고 하여 상종도 못할 인간들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불교근본주의자들은 그렇게 나쁜 인간들일까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왜 문제시 하는 것일까이에 대하여 홍사성님은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홍사성 위원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불교평론 2003)

 

 

불교에는 근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원래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기 때문이다그런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요인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요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대표적으로 용수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공사상을 성립시킨 것을 들 수 있다.

 

대승불교의 말로는

 

이렇게 공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대승불교는 어떻게 되었을까다음의 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불교 전통 연표

연표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v • d • e •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선종 · 토종 · 일련종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상좌부 불교 전통

 

대승 불교 전통

 

밀교·금강승 전통

출처(부파 불교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이 표는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각 불교전통을 보여 준 것이다.

 

인도대륙을 보면 초기불교(Early Buddhism,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거쳐 대승불교 시대가 시작 된다그리고 밀교화 되어 13세기가 되면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로서 불교로서 정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성립된 대승불교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여 마침내 밀교로 바뀌었을 때 힌두교와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았을 때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다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한국에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해온 대승불교가 종교평화선언이라는 명목으로 유일신교의 교리도 인정하자는 열린진리관을 주장하고 있다이는 다름 아닌 대승불교 전통의 산물로 보여진다.

 

만일 불교가 유일신교의 열린진리관을 받아 들였을 때인도대륙에서 밀교화된 불교가 힌두이즘속으로 사라졌듯이불교가 유일신교 속으로 융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지만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전래된 테라와다 불교는 그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 테라와다 불교는 아쇼카대왕시절 3차결집으로 공인된 불교이다이는 20개의 지말 부파로 갈리기 전의 일이다따라서 초기불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원음은 어떻게 하여 훼손됨 없이 전승될 수 있었을까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랑카에서 상좌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 주석서들을 빠알리가 아닌 싱할리어로 전승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고실제 그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른 신흥사상과 섞지 않고 전승할 수 있다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파로 자연적으로 스리랑카의 상좌부는 스리랑카에만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다인도의 강한 문화적 정치적인 입김에서도 상좌부 전통을 잘 고수해오는 장점도 있지만 반면 자연 국제 불교의 흐름과는 고립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인도전역특히 남인도에 상좌부 가르침은 상당히 퍼져있었을 것이지만 스리랑카 상좌부의 입장에서는 그것마저도 신흥사상과 섞인 것으로 의심하였을 것이며 실제로 인도의 상좌부가 마힌다가 전한 것과 같은 고주석서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스리랑카 대사(大寺)의 스님들은 더욱더 그들의 싱할리 주석서를 고수하였을 것이고 다른 부파에 노출시키기를 꺼려왔을 것이다.

 

(대림스님청정도론 해제)

 

 

대림스님은 원음이 훼손되지 않은 이유로서 지역적 원인과 이를 지켜 내기 위한 비구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징은 대륙에서의 공사상유식사상 같은 변화무쌍한 사상적 흐름에 물들지 않았고더구나 싱할리어로 가두어 버렸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하지만 더 큰 요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 내기 위한 비구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데이런 노력은 초기경전에서도 보인다빠알리 삼장의 율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들이여어느 때 나는 적어도 500명의 많은 무리의 비구들과 함께 빠와에서 꾸시나라로 가는 큰길을 따라 가고 있었소그때 나는 길을 비켜서 어떤 나무 아래 앉았소그때 꾸시나라에서 오는 어떤 나체 고행자가 만다라와꽃을 들고 빠와로 가고 있었소나는 보고 이렇게 물었소.

 

‘그대는 우리 스승님을 아십니까?

 

‘네 압니다고따마 시문은 일주일 전에 열반하셨습니다그래서 이 만다라와꽃을 그것에서 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존자들이여이 소리를 듣고 욕망을 초월하지 못한 어떤 비구들은 땅에 쓰러져 팔을 내저으며 이리 저리 뒹굴고 통곡하면서 ‘너무 빨리 세존께서 열반하셨다너무 빨리 선서께서는 열반하셨다너무 빨리 세상의 지혜의 눈이 사라졌구나!’라고 비통해 하였소그러나 욕망을 초월한 비구들은 시중하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슬픔을 안으로 새기면서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그런데 어떻게 무상한 것을 영원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말하였소.

 

나는 비구들에게 말하였소‘존자들이여이제 그만들 슬퍼하시오 그만들 한탄하시오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거기에는 변화가 있고 이별이 있다고모든 태어난 것들은모든 존재하는 것들은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그런데 무너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이 많아서 출가한 수밧다라는 비구가 앉아 있다가 하는 말이 ‘그만하면 됐습니다그만들 슬퍼하시오우리는 이 위대한 사문으로부터 벗어났소스승께서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고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하시며 우리를 억압했습니다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소.

 

존자들이여,

담마가 힘을 잃고 담마가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이 힘을 잃고 계율이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가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담마가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계율을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계율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

계율을 함께 외웁시다.

 

(율장 쭐라왁가 11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이 열반하였을 때 나이 많고 늦게 들어온 비구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자이 을 들은 깟사빠 존자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그래서 급히 500명의 아라한을 소집하였는데이것이 1차 결집의 원인이라고 한다이유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내자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주류불교

 

이상 불교닷컴에서의 서광스님의 댓글에 대한 반론형식으로 글을 꾸며 보았다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테라와다불교가 초기불교를 계승한 주류불교라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20개에 달하는 부파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의 불교로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 있는 불교를 말한다이런 초기불교는 2차 결집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 분열이 되긴 하였지만 계율에 관한 문제로서 교리의 훼손은 없었다하지만 3차 결집으로 인하여 쫒겨난 비구들이 별도의 교파를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분열이 시작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를 부파불교시대라고 한다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부파불교를 말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했던 설일체유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선사들은 아직도 남방의 테라와다불교를 소승이라 지칭하는데이는 불교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불교역사를 보면 남방테랑와다불교는 소승이 아니라 주류불교라는 것이다이는 3차 결집으로 공인된 불교가 바로 테라와다불교이고이 공인불교를 아소까대왕이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전법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한나라가 스리랑카인데스리랑카에서 공인불교가 원본의 훼손없이 이제까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적 특성과 담마 아닌 것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피눈물나는 비구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2-01-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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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불사 단현2012.01.09 23:13 신고

    연꽃님 고맙습니다.
    글이 길어서 답글로 올리기 곤란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골라 올릴까 합니다_()_

    답글
  • 한생각2012.01.10 12:26 신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계종 신도들이 이 글을 읽을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답글
  • 파사현정2012.01.10 14:45

    부처님이 어떠한 분인지,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부처님의 능력은 어떠한 위신력을 갖고 계시는지, 붓다의 삼신은 무엇인지, 연화장세계는 어떠한 세계인지 등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지극히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 불교를 포교한다는 것이 결국은 비방하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정말로 언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고 있구나!!!
    법을 설하거나 포교를 할려면 위의 내용은 알고(최소한 아라한 이상이 되어야 법을 모독하지 않음, 사실상 아라한도 부족함) 해야한다는 것을 고언하는 바입니다.

    답글
    • 마성2012.01.12 02:01 신고

      '파사현정'은 아라한과 부처가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라한이 곧 부처님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열 가지 호칭(如來十號)은 응공(아라한)= 정변지= 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분 석가모니불을 일컫는 말입니다. 동일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후대 아라한의 경지는 낮고, 부처(佛陀, 깨달은 사람, 즉 覺者)의 경지는 높다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다른 불교의 교리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 파사현정2012.01.12 15:06

      마성님, 초기불교의 큰스님이신 마성스님이신지, 혹은 아닌지를 몰라 "님"으로 하였습니다.
      만약 마성스님이시면 마성스님으로 정정하겠습니다.

      저의 글이 여래십호도 모르고 글을 올렸다고 봅니까? 위의 글이 그정도의 수준의 글이라 여기시는지요?
      아라한과 붓다는 천지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성을 철견하고 두타행을 하여 이 몸에 대한 착이 떨어져 나가면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3대아승지겁을 수행(대중생고공양과 복덕, 지혜 증진)을 하여 삼신이 갖추어져야 붓다인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도 아라한과 붓다를 일부 구분하고 있지요, 특히, 법화경의 비유품에 사리불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지금까지 본인이 붓다로 착각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려면서 스스로 반성하기를 색신이 갖추어져야 붓다라는 것을 깨닫게되지요, 즉 색신은 보신을 말하며, 붓다는 삼신을 갖추어야지 붓다인 것입니다.
      본인의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법을 잘못 이해하거나 알면은 위대한 부처님을 모독, 폄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명심하여야 하며, 법을 말씀할때는 조심 조심하여야 합니다.
      좀더 깊이 부처님 법을 이해하여 법설해주시기를 간곡히 고언하는 바입니다.

    • 원불사 단현2012.01.12 23:20 신고

      마성스님 말씀은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를 바가 없는데
      파사현정님이 부처라는 대상에 대한 정의를 위신력, 삼신 연화장세계 등으로 전지전능한 신적으로 격화신키는 것은 옳지않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저 마상 무아를 체득하신 아라한으로 그리고 뭇 제자를 교육시키신 스승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지적으로 보입니다.
      즉 스승으로서 부처님을 아라한과 구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붓다를 인간이나 아라한의 경지를 넘어서는 특별한 경지로 분별하여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제 말씀 역시 스님 말씀을 왜곡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 파사현정2012.01.13 11:23

      단현님!
      아라한과 부처님이 같다니요?
      아라한은 본성을 철견하고 두타행을 통해 이 몸의 모든 착을 끊어버리는 수준의 공부를 완성할 때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삼신을 갖추어야 붓다인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천지현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상입니다
      붓다의 삼신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세계인 연화장세게를 알지 못하고 무슨 불교 교리를 논한다는 것입니까?
      님의 수준에서는 부처님을 신격화한다고 하겠으나, 님께서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라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사료합니다만....
      현재의 세계 불교가 이렇게 왜소화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저의 견해를 진정으로 깊이 사유해 주시기를 충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원불사 단현2012.01.17 23:52 신고

      파사현정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서 저는 아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혹시 대승적으로 변질된 부처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신지요?
      설명을 조금이라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대승불교에 대한 공부가 전무하다시피해서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설명해 주시거나 자료를 링크해 주시면 읽고 답을 적겠습니다_()_

    • 파사현정2012.01.18 07:12

      단현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처님의 세계, 즉 연화장세계를 모르고 무슨 불교를 이야기하십니까?
      화엄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는 법화경과 화엄경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위대한 불교를 얼마만큼 왜곡하고 왜소화해서 잘못알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파사현정 합장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0

    (으아~ 또 댓글이 길게 달아지네요. 연꽃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그냥 가겠습니다! 종이 값 많이 나오는 것 아니죠?)

    1# 美 한인교회 수, 한국의 3배..`현지화' 요원 [연합뉴스] 2012년 01월 11일(수) 오전 02:01

    교회 분열, 사이비 목사 시비도 잦아(애틀랜타=연합뉴스) 김재현 특파원
    = 미국에 진출한 한국 개신교회 수가 공식 통계로만 4천 개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미국 내 한인 350명당 1개꼴로, 교회 수 5만여 개, 국민 1천명당 1개 꼴인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최근 미국 `크리스찬 투데이'에 따르면 2011년 12월 현재 미국 내 한인교회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4천96개로 집계됐다. 캐나다를 포함하면 4천511개다. 미국 내에서 한인 인구에 비해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은 남부 아칸소 주로 무려 175명당 1개의 한인교회가 있다. 2010년과 비교해선 전체 한인 교회 수가 48개 줄었는데, 이 신문은 교회 성장세가 주춤한 것은 1999년과 2000년, 2007년에 이어 4번째라고 전했다. 그러나 목사가 예배당 없이 자택에서 목회를 하는 비등록 `가정 교회'를 포함하면 한인 교회 수는 5천 개가 넘을 것으로 분석됐다. 애틀랜타의 한 개신교계 인사는 "한인교회의 성장세가 주춤한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할 공간이 없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인동포 대상 개신교회 수가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한국인 목회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 내 개신교 신자들이 초대형 교회로 몰려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 새로운 미국 진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한인교회의 교단 별 분포를 보면 한국처럼 장로교가 43%로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고 이어 침례교 18%, 감리교 14% 순으로 신도 수가 많았다.

    10일 현재 미국 개신교계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선 침례교가 25%로 최대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어 성결교 9%, 루터교 5%, 장로교, 감리교 각각 약 4% 수준이다. 한인 교회가 미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미국 교단에 흡수되거나 융화되지 못한 채 고국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한인 목회자들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신자 확보에 나서는 과정에서 교단 및 교회 내 분열과 사이비 목사 출현 등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 등록 한인 개신교회만 200개에 이르는 애틀랜타에선 지난해 목사가 연수비자로 한국의 여대생 등을 유인해 돈을 뜯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한국의 유명 대학 졸업생들이 목사의 소개로 현지 기업에 취업한 뒤 집단 생활을 하면서 봉급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답글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1

      2# “신은 죽었다니까! 왜들 아직도 그러니!”

      제 댓글 중 어디선가 서양철학사를 보면서 Surprise, Surprise, Surprise 를 느꼈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그간 제가 하고 있는 공부가 불교 – 서양철학 – 불교의 순서가 되고 있습니다.
      2년 전 처음 대림/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 서문에서 개념과 궁극적 실재의 분류를 대했을 때만 해도 철학/종교 등의 인문 분야는 깜깜 맹인이라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의미를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냥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철학을 심심풀이로 가끔 보던 중, 갑자기 어라! 하는 순간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Surprise! 다름이 아닌 바로 불교적 사유와 서양철학의 사유가 만나는 순간들이었던 거죠.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중세신학에서의 보편논쟁입니다. 보편논쟁의 사안은 바로 개념의 실재성 여부였고요.
      결국 윌리암 오컴의 유명론이 승리한 이후 신앙과 철학, 의지와 이성이 완전히 결별합니다. 아마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명론의 승리 그 자체는 이후 이어지는 후속적 사유들에 의해 “신”은 개념이자,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수도사인 윌리엄 오컴이야 허구인 신을 선택했지만요.

      나중에 보니 요새 초딩용 철학 관련 서적에도 보편 개념은 허구이다, 명사나 이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등을 설명하는 예화를 소개하고 있더라구요. (초등5-6 ~ 생각의 높이를 키우는 “철학 교과서” p.52 – 포유동물은 없다, 저자 임병갑) 저도 그랬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유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신학을 하는 사람들,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인문학을 하고 있다지만 사실 이러한 사유를 모르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절대 그 동네에 못 붙어 있습니다. 어느 분 말씀대로 그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면 별수 없이 그냥 거기서 살아야겠죠. 여기 늘 오시는 어느 분이 가끔씩 입버릇처럼 ‘말이나 언어는 관념일 뿐이다’ 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분도 도가 꽤 높으신 분(?)이구나 라고 항상 느낍니다. 그러한 사유 자체가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수행의 기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아니 죽었다가 부활해도 유일신 종교 쪽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못합니다. 우리는 붓다의 위대한 선취를 누리고 있는 거죠.

      이제는 저도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의미적 분류가 우리 불교적 사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지금 봐도 개념은 허구이다, 명사는 허구이다 라는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1년 이상 그 주제를 지니고 지내오면서, 철학 책들 여기 저기를 뒤지고 다닌 셈이죠. 그러나 아직도 마누라에게 이 개념을 잘 설명 못 하겠어요.
      보편논쟁의 종결자인 윌리엄 오컴 조차도 정작 본인은 신앙을 선택 했는데, 제 이해가 늦었다고 해서 그리 흠은 아니겠죠?
      그렇지만 누가 저더러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가 뭐니 물으면, 보편논쟁이라고 얘기할 겁니다. 두 번째는? 보편논쟁, 세 번째는? 보편논쟁. 그래도 그 다음은? 칸트와 쇼펜하우어. 또? 응, 철학자들 전부. 모두가 서로 징검다리야.

      보편 개념은 목소리의 울림이며, 허구이다. 명사는 보편 개념이다. 개는 짖지 않는다. 신도 죽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 주장은, 오온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거짓입니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칸트철학의 반절이 그것이고요. 그러니 신의 존재를 초이성/비이성적으로, 의지적으로, 주관적으로 우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의 실천이성이 나온 것이고요. 하이네는 칸트가 앞문으로 신을 내쫓고 뒷문으로 다시 신을 끌어들였다고 표현합니다. 신의 존재가 허구이니, 오온이 경험할 수 없는 거고, 경험할 수 없으니, 오취온의 의지적 욕심으로 더욱 더 원하게 되고, 그래도 증명이 안되니 신비주의의 동굴이 결국 피난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보충 필요 ~ 신비주의 경험들을 저는 완전 사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비주의 경험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 과정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 도비도지견청정 직전에 겪는 십관수염 중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선지식의 지혜에 의한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 조금 자신이 있으신 분이 답을 주시면 무척 고마울 텐데요.)

      신의 부재는 이미 오래 전에 철학적 사유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 13-14세기 윌리엄 오컴에 의해서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니까, 니체가 나중 나중에야 “신은 죽었다”라고 시적 언어의 은유로써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100년이 지나야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거라고 니체 스스로 예언했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요.

      개념과 실재의 의미적 분류 자체가 신을 배제하고 들어가는 사유입니다.
      보편논쟁의 유명론적 결말은 개념의 비실재성 증명이자, 신의 죽음의 선구적 선언이며
      특히 파르메니데스-소크라테스-플라톤 이후 잘못 됐던 서양철학 사유의 방향을 교정하는 출발점입니다.
      (http://blog.daum.net/bolee591/16154821 ~ 하나님/진공/기독교_삼위일체/불교_삼신사상에 관한 글을 읽고 썼던 글입니다.)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1 11:13

      3# 이제 연꽃님이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의 반절은 알겠습니다. 최근처럼 나의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열심히 글을 쓴 적은 이 번이 난생 처음입니다. (사실 누구보다도 오히려 제가 더 놀라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사유의 과정을 명료하게 하고자 노력은 해 왔지만, 글을 쓰면서 정리하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연꽃님이 진화하고 계시듯이, 저도 이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자신도 들고요.

      사실 이 댓글은 써 놓고도 올리지 않겠다 하고 일부러 결심을 했었습니다. 최근 제가 조금 너무 나서다 보니,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으로 계속 오버할까 겁이 나서요. 연꽃님의 조용한 사유 공간에 계속 묻어가는 느낌도 들어 이제는 사실 좀 신경이 쓰입니다. (연꽃님, 요새 제가 좀 너무 나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관련의 위에 옮긴 뉴스를 보니 또 생각이 달라지네요. 완전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라도, 비록 구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냥 여기까지만 가자 하고 말입니다. 기사에 나오는 “유신론적 혼돈”의 상황을 제 아이가, 제 조카가, 제 친구의 자식들이 겪을까 두려워서요. 정말이요! 우리 국내에서도 그러한 데, 이역만리까지 가서도 삶의 고통을 삶의 고통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삼사라 해야 하는 현실이 무서워서요. 정말이요!

      우리는 유일신앙 과잉시대의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는 미국에까지 넘치는 모양입니다.
      그 유일신앙인들은 우리의 친지이자 우리의 친구들입니다. 한국불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불교를 같이 이해 하는 것, 철학적 사유를 공유하는 것.
      어느 것이 더 현실적으로 작동을 잘 할까요? 각자의 선택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물론 여기 오시는 많은 분들처럼 저도 일단 먼저 불교를 선택했었으며, 그래서 불교적 사유들을 어느 정도 “읽고 난 후” 철학을 대했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이해가 수월했습니다. 철학적 탐구의 궁극적 대상이 불교의 대상과 동일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죠. 반면 유일신 종교는 신학을 할 수 있을 뿐, 이제 태생적으로 철학은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일 터이고요. 사실 불자이신 분들은 따로 철학이 절실하지는 않습니다. 철학 자체를 하고 계시니까요. 그러나 막 붓다의 가르침에 입문하는 경우라면, 수행 이전의 사유 단계에서는 정말 요긴합니다. 지금의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현실적 이유는 주변과의 관계적 방법론 때문에 유용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철학과 종교, 불교와 유일신 종교와 관련한, 그 동안 애매모호하게 여기는 차이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타종교인들을 종교적으로, 비종교적으로 진정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러한 이해를 위한 자극으로써 서양철학사적 핵심의 추적에서 중요하고도, 제일 중요한 주제인 보편논쟁을 신문 기사와 관련하여 소개해 봤습니다.

      남경태씨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TV평생대학, 남경태/생각의 역사 3편 중, 2편_이성의 발견, 47~49분)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의 단절도 물론 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근대철학의 붕괴로 시작되는 현대철학은 “2500년 만에” 처음으로 나오는 철학 혁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굉장히 특수한 시대이다.
      (눈먼쥐 추천도서 = 더 많지만 ~ 플라톤_국가 + 남경태_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 + 이진경_철학과 굴뚝청소부)

      저의 결론적 의도는 이렇습니다.
      이상의 논리와 함께, 열심히 “행간”을 감안하시면 저희 불자들에게 있어 개인적 공간에서의 타 종교와의 마찰은 정말 불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또 타 종교와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우리의 생활 주변의 변화를 원한다면 정말 종교적이고 (연꽃님처럼), 그리고 비종교적인 사유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황차, 우리 불자들끼리의 대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유일신 종교의 신앙인들도 같이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일곱.눈먼쥐.하나의 나 홀로 종교선언
      나와 여러분 사이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의 진리가 있으며 (아, 아직 저는 못 봤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진리가 있습니다.
      나의 진리와 당신의 진리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섭섭하지만요.
      그러나 분명 당신은 내 앞에 있으며, 분명 당신 앞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느낌을 제가 압니다. 저도 아직은 당신과 같이 윤회를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서로 진정한 품위의 아쇼카 선언적 사유를 각자의 마음과 몸에 지니고 살기를 감히 간청합니다.

      아침이 오고 있네요.
      Everybody, Happy Birthday to You! (니체식 아침 인사? ~ 매일, 매일이 우리의 생일입니다!)
      그리고 또 진정 생일을 맞고 싶지 않은 분들께는, 내일은 생일을 맞지 않는 길을 찾으시기 기원합니다. __()__

    • 진흙속의연꽃2012.01.12 07:43 신고

      장문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의 내용이 심오하여 별도로 카피하여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글을 쓸 때 참고 하기 위해서 입니다.
      글에서 말씀하신대로 글을 쓰다 보니 공부가 되고 진화 되고 있는 듯한 느낌 입니다. 그것은 2006년도의 글쓰기와 지금의 글쓰기를 비교해 보니 확인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A4한장 채우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썼다하면 A4로 열장은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글쓰기 중독이 되지 않았나도 생각해 봅니다.

      __()__

    • 원불사 단현2012.01.12 23:02 신고

      기독교의 좋은 자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랫글 마성스님 지적처럼 저 역시 눈먼쥐님의 글을 읽기가 너무 피곤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대충 훌터보기도 하였지만 주제가 무엇인지 결론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취미삼아 쓰신다고 하지만 연꽃님의 진지한 연구와 성찰의 글에 사족처럼 불필요한 님의 글로 주제를 흐리게 한다 싶어 여간 안타깝지 않았습니다.

      도반님께 감히 부탁드리지만, 앞으로는 핵심만 아주 간단히 몇 자로 요약해서 주제에 합당한 답글을 쓰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긴 글을 쓰실 수 있는 능력이 부러울 뿐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부디 짧지만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마성2012.01.12 02:11 신고

    '일곱.눈먼쥐.하나'님은 언어의 경제학을 모르십니까?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요, 종교이며, 인문학이요, 과학이고, 심리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입니다. 서양철학으로 우회하여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은 일회일기(一會日期)입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오면 늦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2 16:04

      감사합니다. 마성스님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언어 경제적으로)

      언어 비경제적으로.
      (일부러 글의 재미 삼아 쓰는 방식이오니 애교로 봐 주십시오. 통과하셔도 되고, 안 하셔도 되고)
      제가 이 댓글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추 2달쯤 되네요.
      이제는 스스로도 웬 지 오버할 것 같아 “누가 나 좀 말리도!”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던 상태였는데
      마성스님의 지적을 받으니 뜨끔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사실은 엄청 뜨끔합니다!!!)
      최근의 글은 저 스스로도 오히려 당황스러워 하는 편입니다. 저의 현재 모습과 제가 바라는 방향의 괴리 때문에요.

      제가 알고 있는 것들만을 써야 했다면 저도 이전 글들을 분명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스스로가 공부하는 학생인걸요. 일곱 눈먼 쥐 중의 하나라는 것으로 그것을 나타내고자 했고요.

      댓글 공간에 대해서까지 언어 경제성의 기준은 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글의 표현 방식 자체에 대해서 하신 지적이라면 정말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표현의 경제성도 상황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경제성, "듣는 사람"의 경제성 따로따로 아닐까요?
      여기 댓글 공간에서는 듣는 사람들이 불특정 되어 있으므로 그 경제성을 따질 근거가 없고요.
      그보다는 댓글 공간은 대화 또는 담화의 성격, 오히려 편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 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네 골목 같아요. 우리 어릴 때 놀던 곳 기억나시죠? 요즘은 그런 곳이 드물지만.
      댓글 전에는 분명 못 느꼈는데, 이제는 글들이 서로 섞이다 보니 자주 오시는 분들이 조금씩 마음으로 알아지네요.
      또 여기에서 여러 번 글을 쓰다 보니 댓글 공간이 자기 계발의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언어적 표현은 경제성이 그 속성이겠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딱딱해요! 어쨋든 댓글 공간은 자유입니다!

      다시 언어 경제적으로. (마성스님, 여기부터 읽어주세요.)
      아마도 이제 긴 글은 더 안 쓸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커져가는 괴리 때문에요. 마성스님의 지적 때문이 아니고요.
      그러나 그 괴리가 줄어들면 그 때는 다시 여러 분들과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을 것 같고요.

      제가 여기에 글을 썼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제가 늦게나마 홀로 종교를 찾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은 곳이 이 사이트이기 때문에 연꽃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첫째 이유이었고요. (2년 전 불교 용어들을 검색하면 여기를 안 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꽃님의 이 사이트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설명의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고요. 어느 곳과 비교해서도요.)

      둘째, 당연하겠지만 제 생각으로도 연꽃님이 가시고 계시는 지금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댓글 공간의 중구난방을 살펴 보십시오. 제가 쓴 첫 글은 옳다고 생각되는 연꽃님 글의 논지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웃기죠? 또 연꽃님의 주장도 어느 때는 강렬하십니다. 그것을 거북스러워 하시는 우리 동네 분들도 계시고요. 그 중재적 의견을 제시하고자 했던 경우도 있었고요. 또 웃기죠? (속으로 얼마나 쑥스러웠는데요!)

      셋째, 두 번째의 이유와도 어느 정도 중복되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유일신 종교에 계신 분들의 출몰 때문에 자극을 받은 것도 그 이유가 됩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에 자극된 것이 아니라, 그 쪽 분들 중 여기에 들르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에 자극 받아서입니다. 불법의 전달은 너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8만4천 법문이겠습니까? 교회에 가서 법문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철학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이트에 들르시는 유일신 종교를 가지신 분들의 흥분과 혼돈을 가라 앉히시라고, 저의 경우에 분명한 효과를 보았던 서양철학을 먼저 유일신 종교 쪽에 계신 분들에게 권한 셈입니다. 어제 친구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카톨릭인데 요새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됐더군요. 정말 의외였습니다. 철학을 이야기 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인도철학에서는 처음부터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철학이요, 종교이며, 인문학이요,
      과학이고, 심리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입니다."

      저도 여러 번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마성스님의 말씀대로 불자는 굳이 철학을 따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과잉의 대한민국에서 불법을 펼치실 분들은 굳이 서양철학을 해 보셔도 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승가 교육 과정에도 서양철학 개론을 포함시켜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자식에게 먼저 철학을 가르치겠습니다.

      "서양철학으로 우회하여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인생은 일회일기(一會日期)입니다.
      시행착오를 겪고 돌아오면 늦습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생방송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이 일기일회라면 마성스님이 저를 약 올리시는 겁니다 (웃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인생 늦게에서야 불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인생은 다기다회입니다. 어차피 윤회까지 하는데요, 뭐. 너무 무겁습니다! 저도 상실을 경험하고서야 종교를 찾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생들은 상실을 경험해야만 진정으로 종교를 찾게 된다고 볼 때, 아직 상실을 경험하지 않으신 분들은, 그리고 아직 불자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분들은 서양철학도 분명 도움이 되는 하나의 경로가 된다고 봅니다. 세상에나! 마성스님께 개기고 있는 저를 보십시오. 제가 그 증거입니다. (죄송합니다!) 순서는 물론 초기불교의 교학체계에 대한 글들을 많이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입니다. 저는 불교 1년, 서양철학의 동반 1년 반, 이제는 불교 위주로만 갈 예정입니다. 출가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습니다만 아직은 제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제 방법을 찾아야죠.

      댓글 공간의 중구난방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긴 글은 분명 짜증나겠지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누가 제 대신 긴 글을 쓰면, 저는 그 글 다 읽을 겁니다.

      마성스님께 한 가지 부탁 말씀 올리옵니다.
      제가 들이대는 이유들을 배려해주신다면, 연꽃님의 이 사이트에 가끔씩 더 자주자주 들르셔서
      마성스님이 지적하시는 연꽃님의 글에 대한 지도와 함께, 그 아래 댓글 공간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위한 안내를 청합니다.

      분명 마성스님이 주신 글의 행간을 읽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마성스님, 이 글은 제가 스님께 드리는 개인적인 글이라 읽으셨든지, 안 읽으셨든지 하루 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답글은 주시지 말기 바랍니다. 제가 염치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은 참 대책이 없네요! 아울러 저의 무례함도 용서해주시기를 정말로 정말로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 마성2012.01.12 18:28 신고

      일곱.눈먼쥐.하나님께!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입니다.

      제 덧글로 말미암아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님의 글도 읽었습니다. 지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서양철학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의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묘약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쿠르트 프리틀라인 지음 <서양철학사>를 탐독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분석철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에 심취하여 <시공불교사전>을 펴낸 곽철환 선생님과 밤을 새우며 토론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수행을 통한 자기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불교로 회귀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방학을 맞이하여 민족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왕초보 씨리즈의 <왕초보 아함경박사 되다> 원고를 집필 중입니다. 가능하면 집중을 위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페이스북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간혹 글을 쓰다가 피곤하면 머리도 시킬 겸 이곳에 들어와 몇 편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인터넷상에 댓글을 단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자 끄적였습니다.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파사현정'과 같은 분들을 위해 제가 이미 발표한 논문을 올리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길게 댓글를 쓰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분들이 불교의 바른 법을 만나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성 합장

    • 일곱.눈먼쥐.하나2012.01.12 20:13

      답 글을 주시오니 제가 오히려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마성스님의 책이 나오게 되면 사 두었다가 언제 스님 사인 받으러 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스님처럼 이생에서 어떻게든 반드시 수행의 길을 찾아 들겠습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__()__

    • 파사현정2012.01.13 14:51

      존경하는 마성스님!
      스님의 좋은 말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집필하시는 <왕초보 아함경박사 되다> 이 책이 진정으로 불교와 부처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함경은 소중한 부처님의 친설이지만 부처님의 위대한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즉, 부처님께서 인류 문명의 초창기에 인연(선근)이 있는 분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 비교철학을 집필중에 있습니다. 몇년이 소요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내용으로 불교의 철학사상은 초기불교의 사상으로 부터 부파불교, 중관 및 유식사상, 선불교와 티벳밀교, 대승경전의 주요사상까지 다루면서 그리스 철학과 중세철학, 그리고 근현대의 과정철학까지 포함한 서양철학, 그리고 6파철학과 자이나철학을 포함한 인도철학, 그리고 대학·중용과 주자학, 양명학, 조선의 성리학 등 유가사상과 도가사상 등을 포함한 동양사상을 아우르면서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으로 집필중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화엄경과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세계와 부처님을 잘 표현하였지만 사실은 이것도 부족한데, 지금의 불교는 이것마저 픽션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아무쪼록 존경하는 마성스님의 이 책이 나와서 많은 분들을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파사현정 합장

  • 마성2012.01.12 02:32 신고

    '진흙속의 연꽃'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말할 수 없는 주제들을 다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불필요한 사설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글이 너무 산만하고 길다는 말입니다. 200자 원고지 15매를 넘으면 이미 앞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비판을 하려면 확실히 명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작은 장대한데 결론은 미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위의 글도 결론이 명료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서광의 견해가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네티즌들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무거운 주제는 다루지 않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감정을 자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다 논리적인 근거로 논파하기를 바랍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글
    • 진흙속의연꽃2012.01.12 07:39 신고


      지켜 보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보고 있는 수 많은 눈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잘 써야 된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이 번 글의 경우 약간 감정이 실려 쓰다 보니 12폰트로 하여 A4로 19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일요일날 썼는데 아침 일찍 시작 하여 도중에 일 좀 보고 계속 쓰다 보니 저녂때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글과 함께 보냈는데 지적하신대로 산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출가자를 상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세간에서 유명한 분이라서 여러가지 자료를 곁들이다 보니 길어지게 된 것 입니다.

      매일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하되 성역 없는 글을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__()__

    • 원불사 단현2012.01.12 23:08 신고

      스님께서는 그 어떤 카페에도 답글을 쓰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더구나 초기불교의 대학자로서 존경해 마다않은 스님께서 직접 주시는 가르침이라 연꽃님에 대한 기대가 지대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더구나 일체의 활동을 접으시고 집필 중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재가자을 격려하시니 감사하기 이럴 데가 없습니다.
      단현 합장_()_

  • 이쁜하마2012.01.12 22:58

    연꽃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일곱~님의 글도 잘 읽었구요. 마성스님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Dhamma님께서는 여전히(?) - 아! 실례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대승불교를 옹호하고 계시구요.
    뭔가를 잡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하겠지만,
    상황상황에 따라선 자신도 변해야함을 요사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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