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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1

명리학 책 추천 및 학습 가이드

명리학 책 추천 및 학습 가이드






명리학 책 추천 및 학습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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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2.


사주 명리학 책 추천 및 학습 가이드









처음 명리학을 접했던 시절 학습과 깨달음의 시행착오를 줄이고자 한권에 모든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는 책을 찾고자 무척이나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명리학이라는 학문을 한권의 책에 모두 담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시는 분은 고작 사주팔자 여덟 글자 해석하는데 책 한권의 내용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주팔자 여덟 글자를 해석하기 위해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이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권의 책에 한가지 이론만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양서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조심스럽게 추천해 봅니다. ^^

추가적으로 명리학 고전 및 현대 명리학 서적에 나오는 다양한 이론들을 무조건 추종해서도

안되지만 무조건적으로 배척해서도 안됩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명리학에 접근하고 있는

책들을 두루두루 섭렵하여 사주팔자 해석의 융통성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명리학의 다른 이론들은 무시하고 용신만이 전부인 것처럼

너무 용신에만 오랜 기간 집착하여 많은 폐해를 낳았습니다. 사주에서 필요로 하는

길신에 해당하는 기운을 파악하는 용신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명리학의 여러가지

이론들과 두루두루 융통성 있게 맞물려 돌아가야만 유연성 있는 사주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용신은 쓸모없다라는 의견도 문제가 있고 용신에만 집착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명리학 이론을 두루두루 섭렵하여 융통성을 키워야 하며

상론+물상론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사주 내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보고 운기론으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에너지 흐름을 파악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사주를 분석하는 것이 사주 공부의 왕도("운기론+상론+물상론 절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가적인 양념으로 "신살론"을 추가하여 통변하면 상세하고 구체적인 통변이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시중의 대부분의 서적들은 90% 이상 운기론에 초점을 두고 있으니 상론적인 공부에도 많은 한계가 있고 상론과 운기론을 절충하여 통변하는 것은 더욱 더 한계를 느끼게 되실 겁니다.

(운기론에만 백날 매달려 봐야 사주보는 눈이 트이지 않고, 슬럼프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또한 신살론, 포태법, 물상론, 상론, 형충파해회합 같은 전통적인 명리학 체계와 이론을 충분한 임상없이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를 함부로 무시하여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기법들은 사주를 한층 더 정확성 있게 보기 위해 반드시 터득해야 할 부분입니다.







☆주의사항: 공부를 하다보면 책의 내용에 갇히거나 본인만의 관법만이 최고라는 확신으로

사주팔자를 잘못 판단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임하도록 합시다. ^^



그리고 명리학은 약 1000년 전에 생겨났으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학문임을

잊지말고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해 나가며 (책 속의 내용도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잊지 말자!)

아무리 명리학의 절대 고수라도 사주팔자를 잘못 판단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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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리학 초급




1) 젊은 한의사가 쉽게 풀어 쓴 음양오행 세트 (저자: 전창선, 어윤형 와이겔리)
- 음양오행의 개념과 원리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는 필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추 도서이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는 책이니 3권 모두 읽어 보길 권합니다.


2) 사주명리학 초보 탈출 1권, 완전 정복 2권 (저자: 김동완, 동학사)
- 가독성이 좋고 그림도 많아 초학자들이 공부하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하지만 12운성, 공망, 원진살은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통변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팔자를 점수화 시키는 방법은 개념적으로는 좋은 접근이지만 무리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시리즈가 많은데 "사주명리학 초보탈출" 과 "사주명리학 완정 정복" 2권이면 충분함)


3) 천지인 상, 중, 하 총3권 (저자: 백이제, 도경서원)
- 초학자들은 오행의 생극제화 이론에만 매몰되어 이것이 명리학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명리학은 자연이나 인간 본성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사항들을 60갑자를 이용하여

설명한 것이기에 자연법적인 조후론과 상론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 또는 자연의 압축체이자 소우주이기에 이러한 자연법칙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법칙인 조후론과 물상론에 대해 알기쉽게 저자 본인의 사주감명 노하우를

바탕으로 서술해 놓았으니 초학지들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한 깊이있는 이해를 위해

많은 궁리를 해 가면서 읽어나가도록 합시다.


4) 시시콜콜 명리학 시리즈 1~6권 (저자: 낭월 박주현, 삼명)

음양(1권), 오행(2권), 천간(3권), 지지(4권), 간지(5권), 육갑(6권)
- 명리학에 대한 여러가지 응용서적들을 공부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벽에 많이

부딪치게 됩니다. 대부분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이러한 벽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시콜콜 명리학 시리즈를 보게 되면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

좀 더 궁리를 해보면서 이것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고수들은 기본적인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도에서 여러가지 비법이나

통찰력을 끌어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깊이 있는 사색에 도전해 봅시다!

그러나 신살이나 12운성을 무시하는 저자는 실전통변에 문제가 있을거라고 판단됩니다.






5) 사주정설 (저자: 백영관, 명문당)
- 검사 출신의 본명 최영철이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세로 쓰기가 되어 있으나 명리학에 대한 기초 설명과 전반적인 관법을

다루고 있어 명리학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답니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설명하다보니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격대비 우수한 책이므로 초학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2운성(포태법)을 무시한다는 내용이 있으나 포태법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6) 음양오행의 개론 (신천호, 명문당)




7) 알기쉬운 실증철학 상, 중, 하 총 3권 (저자: 이병렬, 동양서적)



2. 명리학 중급

1) 명리강론: 진여원 사주명리학 (저자: 신수훈, 서지원)
- 명리학의 중요 사항들을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놓고 있어 도움이 됩니다.

책은 두꺼운 편인데 800페이지가 넘습니다만, 여러가지 내용들을 다루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진여비결이라는 오주학 부분인데, 인연법을 사용

하여 미래 배우자 띠를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이라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두루뭉실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 춘하추동 신사주학 (저자:박청화)






3) 명리학 고전

- 명리학 고전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사항이긴 하지만, 고전만 열심히 공부

하면사주공부가 완성이 되겠지라는 허황된 생각은 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전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명리학 고전만 아무리 공부해

봐야 눈 앞에 사주 펼쳐놓으면 전혀 분석이 되지 않고 통변도 되지 않습니다.

명리학은 우리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실학이기에 공부만 열심히 하고 사주

통변이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는 학문입니다. 실제로 명리학 고전을 수십년

공부했다는 역학인 또는 역술인을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이론만 많이 알고 있을뿐

사주 펼쳐놓으면 엉뚱한 소리만 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답니다.



이 점 주의하시어 명리학 고전에만 매달려 허송세월 하지 마세요~~~

"명리학 고전"은 공부가 많이 진행되고 학문의 체계를 잡은 후 제일 마지막에

공부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1)) 자평진전 평주 (원저 심효첨, 평주 서락오, 번역 박영창, 청학출판사)
- 역학적인 지식을 겸비하고 번역에 경험이 많으신 박영창님이 번역한 서적답게

문체와 논리가 자연스럽습니다. 번역 점수는 최고점을 주고 싶습니다.



사주팔자 8글자에 대한 여러가지 분석 방법과 이론을 소개하고 있어서 필독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자평진전까지만 공부하면 사주를 바라보는 시야가 오히려

좁아질 수 있으므로 추후에도 꾸준한 학습을 통해 자평진전의 시야에서 자유로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평진전의 시야에만 너무 억매이면 곤란합니다.

이 책 보고 격국에만 너무 억매이면 사주를 보는 눈이 오히려 좁아지게 되니 주의하세요.







2-1) 적천수천미 상,하권 (예광해, 지남출판사)



2-2) 적천수천미 (번역 김동규, 명문당)


- 타고난 사주팔자 8글자와 대운과의 상호작용을 다룬 서적입니다.

즉 타고난 팔자도 중요하지만 대운도 팔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평진전에 비해 역동적인 시야를 키울 수 있습니다.

시중에 정말 많은 적천수에 관한 서적이 있지만 가장 많이 팔리고 검증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하기에 무난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3)) 궁통 보감 (저자: 예광해, 지남출판사)


- 상론적으로나 조후론적으로 사주에 접근하기 위해 기초가 되는 책입니다.

하지만 궁통 보감에서 다루는 내용은 이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한가지 오행이라도 부족하면 인생이 크게 잘못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의 사주가 궁통보감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기준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계속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여하튼 명리학 공부에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지만 장황한 원론적인 설명에

비해 예제가 많지 않아 처음 읽으면 지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4. 상론 명리학





1) 명리요결 1,2,3,4,5권 (저자: 김원희, 청관)


- 저자가 나름대로 역학의 기초이론부터 실전 물상이론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입니다. 하지만, 한자가 조금 있는 편이라 한자세대가 아닌 젊은 분들은

중간 중간에 옥편을 찾아보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총 5권으로 구성된 이책은

木, 火, 土, 金, 水 오행의 각각을 한권의 책으로 하여 구성하였습니다.

물상적으로 오행의 적용방법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후, 저자의 간명 실례를 바탕으로

사주 분석 방법을 서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상론적인 부분이나 실제 간명사례에서 잘못된

부분이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얻을 것이 많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상리철학 (저자: 조명언, 명문당)
- 상론 및 물상론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입니다. 시중에 있는 많은

명리책 중에서 나름대로 깊이있는 설명과 이론을 구경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상론 및 물상론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보고 사색해 보아야할 서적입니다.




3) 명리요강 (저자: 박재완, 역문관서우회)
- 조후론에 대한 설명이 궁통보감 이상으로 잘 되어 있습니다.







4) 명리진보 (저자: 단건업)










5. 실전통변



1) 사주 첩경 2,3,6권 (저자: 이석영, 한국역학교육학원)


2) 한밝신사주학 (저자: 김용길)


3) 명리직업상담론 (저자: 김기승, 창해)


4) 방향을 바꾸면 운이 열린다. 상,하 (저자: 박일우, 대광출판사)







6. 상기에 언급한 서적을 다 공부했더라도 체계가 잡히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학으로는 매울 수 없는 틈새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책에는 나와있지 않는 실전 통변 기술이나

다양한 임상경험에서 나오는 다양한 명리학 이론의 적용법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책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많이 해 보았다면 나름대로의

명리학에 대한 성취도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명리학 고수를 찾아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잘못된 지식은

바로 잡으면서 본인이 공부한 다양한 내용의 체계를 확실히 세워야 추후 다양한

사주를 접하더라도 갈팡질팡하지 않게 됩니다.



(독학하면서 얻은 깨달음이나 지식으로 제대로 된 명리학 고수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고 추후 강의를 수강하면서도 일취월장할 기반을 갖출 수 있습니다.

아무리 스승이 훌륭해도 철학 공부란 자기자신이 깨달아야 하는 법입니다.)







▶ 제대로 된 스승에게 꼭 배워야 할 이론

:책이나 독학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론과

다년 간의 임상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노하우 및 실전 통변 방법


3. 명리학 고급



실전 감명을 하면서 매일 꾸준히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깊은 사색과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법을 서서히 완성시켜 나가야 합니다.

(참고로 실제 감명시 정확도가 70~80% 이하로 떨어지면 욕 먹으니 주의 요함. ^^;)



풍수서적(한국) : http://blog.daum.net/jhk6222/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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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I am lucy2018.08.05 21:06 신고

감사합니다. 스크랩해가겠습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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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호2019.08.16 22:20 신고

단원 이병렬 선생의 알기쉬운 실증철학 (상중하) 정품은 도서출판 동양서적에서만 정가로 판매합니다. 인터넷 중고서점이나 사설 역학학원에서 불법 복사본을 판매하는 경우가 있으니 유의하시가 바랍니다. 도서구입을 원힌시면 본사 홈페이지 www.orientbooks.co.kr 을 방문하시거나 031 957 4790으로 연락 바랍니다. 불법 판매를 하고 있는 곳이 있으면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법서적은 파는 사람 뿐 만 아니라 사는 사람도도 처벌받습니다
#알기쉬운실증철학 #실증철학 #동양서적 #단원 #단원 이병렬 #알기쉬운 실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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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곽정보2018.12.05 07:38

명리학 완전정복 통변 법
* 四柱(사주)풀이의 순서 십계명
1) 몇월에 일간이 무엇 인가을 보고, 신강/신약을 구분한다.
2) 일간이 강한지,약한지을 보고. 음으로 태어났나, 양으로 태어났나을 본다
3) 일간통변,원국통변,남자일지,여자월지 인연법 통변한다 (성격심리, 적성, 사회성, 재물운, 사업/직장, 배우자, 자식, 등등)
4) 오행이 붙어 있는지 통변한다, 공망과 신살을 파악한다.
5) 생극제화, 合(합),沖(충),변화,형충파해을 보고, 寒,暖,燥,濕(한.난,조,습)을 파 악 한다
6) 억부,조후,병약 용신의 상황을 고려 한다 用神(용신)을 찾는다. 희,용,기,구,한 을 구분한 다.
7) 원국에 用神(용신)이 일간과 가까이 있는지 년주,월주,일주,시주,무슨 자리(궁)에 있으며. 힘이 있나 없나을 파악한다.
8) 대운 시운인자 십성,신살통변
9) 래방자(문점자)의 일진통변
10) 대운 / 세운을 보고 운세 대입 해서 풀이 한다.
출처: 무료 역학자료 www.100school.kr 역학공부방 들어가시면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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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호2019.08.16 22:20 신고

단원 이병렬 선생의 알기쉬운 실증철학 (상중하) 정품은 도서출판 동양서적에서만 정가로 판매합니다. 인터넷 중고서점이나 사설 역학학원에서 불법 복사본을 판매하는 경우가 있으니 유의하시가 바랍니다. 도서구입을 원힌시면 본사 홈페이지 www.orientbooks.co.kr 을 방문하시거나 031 957 4790으로 연락 바랍니다. 불법 판매를 하고 있는 곳이 있으면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법서적은 파는 사람 뿐 만 아니라 사는 사람도도 처벌받습니다
#알기쉬운실증철학 #실증철학 #동양서적 #단원 #단원 이병렬 #알기쉬운 실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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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전자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

알라딘: [전자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 크로버 시리즈 epub

고미숙 (지은이)북드라망2015-10-08
===
책소개

작년에 출간된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가 고미숙이 동양의학을 현대의 삶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면, 이번에 나온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는 그와 짝꿍을 이루는 동양역학을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동양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직조해 내는 데 능숙한 고미숙답게, 이 책을 통해, 개화기 이후 도입된 서양 문물과 삶-인식의 방식 때문에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거나, 『주역』으로 대표되는 역학고전에 대한 ‘신비감’에 가두어져 왔던 사주명리학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길을 펼쳐갈 지도로 새롭게 탄생한다.
===
목차

책머리에

입구_농담 혹은 아이러니

하나 - 공동체와 주술 | 둘 - 불과 정치적 상상력 | 셋 - 마음의 행로



1부 몸과 우주, 그리고 운명의 비전을 찾아서·23

오리엔탈리즘_신비와 미신 ‘사이’·26 | 이분법의 종말 _ 개와 늑대의 시간·32 | 우주의 척도 리듬과 강밀도·36 | 음양오행 혹은 매트릭스·42 | 혁명과 ‘구도’는 어떻게 조우하는가?·52



2부 사주와 팔자 : 8개의 ‘카드’에 담긴 비밀·61

인생 혹은 팔자·64 | 존재의 축, 일간(日干)·71 | 팔자, 생극의 동그라미·83 | 태과와 불급, 그 원초적 평등성·95 | ‘숨은 조커’를 찾아라!·104 | 내재하는 ‘외부’, 대운 혹은 시절인연·110 | 용신, 운명의 우주적 거래·119



3부 육친법과 ‘오이디푸스’·129

십신(十神) 팔자와 ‘표상’의 마주침·132 | 두 개의 기본 리듬 ‘식상생재’와 ‘관인상생’·144 | 육친법 팔자의 ‘오이디푸스화’·152 | 오이디푸스의 ‘배후’ 국가와 자본·161 | 운명의 ‘덫’ 자의식 혹은 트라우마·168 | 오이디푸스의 ‘탈주’·182



4부 케이스 스터디 : 팔자의 정치경제학·189

케이스 스터디 1. 인성과다 : 엄마의 ‘늪’·192

케이스 스터디 2. 식상과다 : SNS의 빛과 그림자·200

케이스 스터디 3. 재다신약 : 욕망의 레이스·204

케이스 스터디 4. 관성고립 : 이상한 나라의 ‘에로스·’218

케이스 스터디 5. ‘인성’의 아름다운 순환 : 제빵왕 김탁구·230



출구_‘팔자타령’에서 ‘운명애’(Amor fati)로!·238

길흉은 없다!·240 | 개운법 - 지혜와 공동체·246 | 운명애 ? 고전에서 배우는

‘창조의 기예’·257



부록 사주명리 왕초보교실·265

1. 첫번째 시간 : 천간 탐구생활 _ 음양오행, 그리고 충과 합·266

2. 두번째 시간 : 지지 탐구생활 _ 현실세계에서 지지의 모습·271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아줌마는 공부를 해야겠네요. 자식이나 재물, 이런 거하고는 영 인연이 없어요." 처음 역술원에 갔을 때였다.

“중요한 건 더 좋은 힐링, 더 많은 치유가 아니다. 힐링과 상처의 공모관계를 해체하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을 일방향으로 이끄는 거울을 깨뜨리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는 것. 그리하여 감히 자신의 운명을 직면하는 것, 길은 다만 거기에 있을 뿐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선 뗏목이 필요하다. 사주명리학은 아주힘차고 역동적인 뗏목이 되어 줄 것이다. 강을 건넌 다음엔? 물론 뗏목은 버려야 한다!” (머리말 중에서)  접기

“인류가 고안해 낸 운명론 가운데 음양오행론은 단연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의학과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장점이다. …… 가장 원대하고도 고매한 비전탐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접기

좋은 팔자란 길한 것을 맞이하고 흉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흉에 대한 인식과 욕망의 배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245쪽 - 녹차

물론 용신을 선택하거나 활용하는 데도 기본기가 중요하다. 가장 먼저 중시해야 할 사항은 반복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반복은 순환의 죽음이다. 아니, 반복 자체가 죽음이다. 암과 자폐증, 그리고 치매. 현대인을 두렵게 하는 이 병들의 공통점은 이웃과의 단절이다. 세포 단위든 개체 단위든 일단 소통이 단절되면 모둔 존재는 자기 동일성만을 증식하게 된다. 자기 동일성의 증식이 곧 반복이다. 반복의 늪에만 빠지지 않아도 인생은 일단 살 만하다. 좋건 나쁘건 변화의 국면들을 헤쳐 가면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2)  접기 - 베리심플

사람마다 몸과 기질이 다르듯, 운이 막히는 대목이 다르다. 보통 운명이라고 하면 거창한 인생역정을 떠올리지만 그 어떤 인생역정도 일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운명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일상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 얼마나 단순하고 쉬운가. 이 일상을 건너뛰고 다른 방편을 쓰고자 한다면 그건 다 사술이다. (124) - 베리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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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고미숙 (지은이)

본 투 비 백수. 20대에는 청년 백수, 30대 중반엔 박사학위를 받고도 중년 백수가 되었다. 그래서 아예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만들어버렸다. 혼자는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서 공부공동체를 꾸렸다.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이 본거지다. 2080세대가 함께 꾸려가는 대중지성 네트워크라 생각하면 된다. 주요 활동은 ‘읽고, 쓰고, 말하기’. 그것으로 밥벌이도 하고 수많은 벗들을 만나고 계속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 행운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최근작 : <나는 왜 이 고전을>,<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총 17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수유+너머'를 듣기 위해 고미숙을 만나다! - 200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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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책 소개

이 책은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인문학과 사주명리학의 만남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회비평서이자, 힐링과 치유가 넘칠수록 상처가 늘어나는 기묘한 시대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한 공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을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며 말하는 인문서이고, 그 공부의 지도가 되어 줄 사주명리학의 초보 지식까지 친절히 담아 놓은 사주명리 입문서이다.

작년(2011년)에 출간된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가 고미숙이 동양의학을 현대의 삶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면, 이번에 나온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는 그와 짝꿍을 이루는 동양역학을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동양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직조해 내는 데 능숙한 고미숙답게, 이 책을 통해, 개화기 이후 도입된 서양 문물과 삶-인식의 방식 때문에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거나, 『주역』으로 대표되는 역학고전에 대한 ‘신비감’에 가두어져 왔던 사주명리학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길을 펼쳐갈 지도로 새롭게 탄생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는 니체의 말은 현대인의 삶에 대한 가장 신랄한 한마디일 것이다. 몸은 의사에게 맡기고, 마음은 심리치료사나 또 역시 (정신과)의사에게 맡길 뿐, 자기 마음과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그러니까 지금 왜 이토록 너의 말 한마디에 화가 치밀고, 너의 행동이 보기 싫은지, 왜 이렇게 나는 무기력하고 우울해지기만 하는 건지― 알려고,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들에게 고미숙은 말한다. 중요한 건 더 많은 힐링, 더 좋은 치유가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감히 자신의 운명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오직 나 자신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무수한 번뇌와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것, 그것은 앎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고미숙이, 엄마-아빠-자녀의 가족삼각형에 갇혀 버린, 오이디푸스적 삶에 옭매인 우리에게 그 사슬을 끊고, 새로운 나를 향해 떠날 지도 한 장을 펼쳐 놓고 있다.



인문학, 사주명리를 만나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운명 사용설명서!

―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라, 그리하여 자기 운명과 직면하라!



작년 가을, 허준의 『동의보감』을 인문학자의 눈으로 새롭게 풀어냈던 고전평론가 고미숙. 그녀가 의역학 공부로 나아간 지 10년 만에 출간한 『동의보감』 리라이팅과 더불어 동양의학과 짝을 이루는 동양역학에 대한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출간했다. 동양의학은 ‘한의학’으로 당당히(?) 제도권 속에 진입한 데 반해 동양역학은 아직까지도 ‘미신’ 정도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동양의 천문(天文)이며 인문(人文)인 ‘사주명리학’이야말로 가장 고매하면서도 가장 실용적인 인문학이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이 낯설고도 흥미로운 동양학의 영역을, 어떤 사회적 관계도 거세해 버리고 “엄마―아빠―자녀”의 가족삼각형 안에 얽매인 오늘의 세태를 분석하며 지금, 여기의 것으로 새롭게 조명해 낸다.



현대인들은 문명의 폭주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감정, 자의식, 스펙, 대체 무엇이 ‘나’인가? 그 어떤 것도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괴롭고 아프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 본 적이 없었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고 혼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니체, 『도덕의 계보』) 결국 자신과의 소외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맞물려 있는 셈이다.(본문 49쪽)



이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왜 치유와 힐링이 이렇게 범람하는데, 상처는 줄어들지 않는가?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전문가’(의사, 심리치유사 등)에게서 찾으려 하는가? 니체의 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을, 나에게로 가는 길을, ‘사주명리학’이라는 지도를 가지고 찾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융의 분석심리도,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존재와 운명의 비의를 탐색해 온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있다. 게다가 이 앎은 의학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몸과 우주와 운명을 하나로 관통하는 앎의 체계인 것이다. 심리만이 아니라 ‘삶의 비전’까지 탐구할 수 있는 이 앎을, 고미숙은 우리 각자가 적극적으로 전유하길 바란다. 우리 자신에게 가는 그 길은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면서.

어찌 보면 동양의역학은, 자본주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비판에서 출발, 근대의 이분법적 앎의 배치부터 위생담론까지 전방위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앎, 새로운 삶을 그 자신이 직접 실천해 온 고미숙이 만날 수밖에 없는 학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명석판명함을 지향하는 서양의 입론들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영역, 자연에 사계절이 있듯 삶에도 생로병사가 있고, 고로 나를 아는 것이 곧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과 연결되는, 이 미시와 거시, 인생과 우주가 중첩되고 교차되는 앎의 체계를 풀어낸 이 책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통해, 우리도, 지금,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한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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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수학능력은 어디까지일까.아는 것을 풀어놓는 솜씨는 지식소매상 중 으뜸이다.저자의 책을 볼때마다 놀라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는데 치우지지 않는 사유를 통한 중심을 지켜 내는 힘이 대단하기 때문이다.자칫 잡술로 치부되기 쉬운 명리학을 제대로 꿰뚫어 시원한 통찰을 보여준다.  구매

Ajna 2015-08-11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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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관심이 많은 분야인데 고미숙샘이 글을 쓰셨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해서 그런가 초반에는 정말 재밌었는데 뒤로 갈수록 아쉬웠다. 다음엔 `중급`편을 써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구매

라로 2013-02-22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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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모르게 글의 논리에 빠져들어 수긍하게된다. 사주명리학에 인문학과 의지를 녹여내는 선생님의 글솜씨란 진정한 브리콜라주가 아닐까. 오이디푸스적 운명론에 빠져서 자작자수 하지말라는 선생님의 일침에 가슴이 얼큰했다.  구매

김민준 2016-01-19 공감 (7)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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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여러 책을 읽어 보았지만, 이 책은 무척 실망이다. 왜냐하면 깊이 있는 연구와 성찰이 부족하다. 이미 유효기일이 끝나 폐기처분해야될, 용신, 격국, 형충파해, 신살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매

melvin 2012-09-06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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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의 전문가로서의 깊은 이해와 공부를 갖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이해한 범위 내에서 대중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쓴 책으로 일반인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뿐임.  구매

windwave21 2017-01-29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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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약은 약사에게, 점은 점쟁이에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겐 흥미롭고 즐거운 독서였다. 그리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은, 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책.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평소 사주명리학을 접해 본 경험이 있다거나 자주 점집을 들락거리면서 '주워들은 풍월'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닐까 한다. 사주명리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읽으라면 , 끝까지 쉽게 읽어 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아줌마는 공부를 해야겠네요. 자식이나 재물, 이런 거하고는 영 인연이 없어요. 평생 공부하고 , 글 쓰겠어요.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도 글을 쓰겠구먼요. "

책 초반에 나오는 얘기인데, 저자인 고미숙이 점집에 갔을 때 들은 사주명리학에 대한 첫경험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을까 짐작이 간다.

많은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여전히 믿을 게 못되고 비과학적이며 터무니 없는 미신이라고 주장하는데, 겪어 보면 알게된다. 그 신기하고도 절묘한, 그리고 경험하고도 여전히 믿기 힘든 음양오행의 오묘한 조화를. 그리고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영원히 이해할 수도 없다. 나의 경우도 모태 점집 마니아이신 우리 어무이를 통해 서서히 사주명리학의 신통함에 대해 접하게 되었고 주변사람들의 점집 방문 경험을 많이 듣거나 내가 직접 경험함으로써 사주명리학을 믿게 된 케이스다. 몇가지만 예를 들자면....

case 1 : " 아마도 의약계통 또는 건강 관련 업종에 종사하겠으나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학운이 조금 미약하여 의사나 약사는 아닙니다. 역마의 기운이 강하니 가만히 앉아 일하는 내근직은 전혀 맞지않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돌아다녀야 하는 팔자군요"

=>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잔뼈가 굵어 지금은 건강식품회사 직접 차린 내친구가 20대 후반에 나랑 같이 가서 들은 사주풀이

case 2 : " 전형적인 선비사주군요. 30대 쯤 외국 나가 살 운이 있으니 유학가서 박사하면 되겠습니다. 문과 보다는 이과 적성이며 직장운이 늦게까지, 그리고 큰 굴곡없이 지속되는 걸로 보아 대학에 몸 담을듯... "

=> 유학 다녀와서 모 대학에서 교수(바이러스 전공)하는 우리형이 초딩때 들었다는 사주풀이

글쎄, 이런 걸 생년월일시만 알고 대충 눈치봐서 찍을 수 있을까?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일단 내 주변의 가벼운(?) 사례 두 개만 말했지만 명리학 고수들의 엄청난 무용담은 수없이 많다. 나의 경우를 말해 볼까?

내가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공부하다가 해마다 시험 떨어지고 취업을 할 것인지, 한 번 더 Go를 할 것인지 고민하던 때, 나와는 달리 벌써 시험에 합격한 후 배부르게도 또 다른 진로를 고심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한 명은 내친 김에 사법시험까지 볼 것인지를 고민하던 친구였고 또 한 명은 유학을 갔다와서 교수를 해볼까 고민하던 친구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점집에 거의 가 본적이 없었고 주로 우리 어무이께서만 해마다 유명하다는 점집을 순례하시고 내게는 듣고 온 사주풀이를 전해 주시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두 친구에게 어무이로부터 전해 들은 유명하다는 점집 얘기를 하며 선택이 고민될 때는 점집이 최고라는 조언 겸 격려를 해줬다. 무려 백수 처지에. -_-

하여간 몇 달 후 이 친구들과 다시 모일 일이 있었는데 친구 중 한 명이 벌써 그 점집에 갔다 왔는데 거의 도사 수준이라며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얘기인 즉슨, 자리에 앉아 생년월일만 말했더니 그 사주보는 아저씨가 잠시 후 " 자네 혹시....... 직업이 ..... 회계사인가?" 라고 했고 내 친구는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외 다른 것들도 대체로 잘 맞았고.

그 얘기를 들은 나머지 친구 한 명이 그럼 자기도 다녀오겠다는 얘길 했고 몇 달 후 만난 자리에서 그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친구도 그 집에 가서 생년 월일을 말했더니 역시나 잠시 후 " 자네 혹시....... 직업이 .... 회계사인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외의 다른 개인적인 인생이력에 대한 적중도는 먼저 간 친구와 대동소이. 우리는 술 마시면서 아마도 그 아저씨 아무나 젊은 남자 오면 회계사냐고 일단 찍는가보다 라며 농담한 기억도 난다.

이쯤에서 나도 궁금해졌다. 점집소개만 해 주고 정작 나는 못가봤는데....나도 한 번 가볼까....하는.

아마도 공부가 무척이나 하기 싫었거나 시험준비에 대한 회의가 들던 어느 날이었을텐데,  드디어 난생 처음 점집이란 곳을 혼자서 가봤다. 나도 생년월일시를 말하고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사주풀이를 기다리는데..... 그 아저씨 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나이도 같은데 누군 회계사냐고 물어 보고, 누군 회계사 시험 준비하냐고 물어보고. 내가 따지듯 물어 보자 그 아저씨 가라사대, "자네 사주를 보아 하니 분명 적성이나 할 일은 이분야인데 아직 나쁜 대운이 안 끝나 합격운에 이르지 못했으니 준비하냐고 물을 수밖에. "라며 당연한 얘길 묻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 이후로 그 아저씨가 '때려 죽여도' 붙는다는 해에 난 시험에 합격했고 아무리 늦어도 이 시기 넘기기 전에 장가간다는 해에 결혼했다. 물론 그 이후로 난 사주명리학의 신봉자가 되었고 자칭타칭 점집 마니아도 되었다.

사주팔자는 미신이라고 하기엔 나와 내 주변의 경험상 너무 잘 맞는다. 저녁 7시의 운명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턱도 없이 당신은 아침 10시라든가 오후 2시의 운명이시군요라는 헛소리는 절대 안한다. 물론 분, 초까지 정확히 맞추지는 못해도 대략 저녁 6시에서 8시사이의 삶을 산다는 것 정도는 맞춘다. 물론 초일류고수에게 본다는 전제하에. 그래서 평소 사주점이 잘 안맞는다는 사람들은 대충 공부한 어설픈 사람들에게 봤거나 자기 태어난 시간이 정확치 않은 사람이 대부분일거라는게 내 생각이다. 참, 여기엔 신들린 무속인의 점은 제외한다. 신점은 맞을 땐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잘 맞지만 일반적으로 편차가 크다. 양궁으로 치면 10점 아니면 6점만 쏘는 궁사라고나 할까?

다시 책으로 넘어와서... 보통 사주명리학 하는 사람들은 글솜씨가 없다. 쉽게 쓸 수 있는 글도 일부러 현학적인 자세로 어렵게 쓰는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사주개론서나 해설서들이 대부분 난해하다. 그런 측면에서 일단 이책은 매끄러운 서술과 쉬운 설명에서 점수를 주고싶다.


이책은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기 위한 친절한 입문서는 아니다. 조용헌의 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설의 고향'류의 명리학고수들 무용담이나 점집 탐방기는 더더욱 아니고. 아마도, " 사주명리학, 너무 무시하지 마라. 다들 뜬구름 잡는 식의 거창한 얘기만 하면서 헛고생 하지만 음양오행의 조화를 알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마음도 편해진다. 내가 공부해보고 겪어 보니까 그렇더라. 그러니까 너희들도 관심가지고 명리학 공부 좀 해보지 않으련? " 뭐 대충 이런 얘기가 아닐까 한다.

사회를 바꾸는 활동과 소수자를 위한 운동은 아주 종종 헌신과 희생으로 귀결되곤 한다. 혁명을 위해 자신을 내팽개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혁명인가?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공적으로 표방하는 명분과 내밀한 욕망 사이의 이중 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리 혁명을 외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욕망은 곧 사회적인 인과의 결과물이다. 나의 질병은 곧 시대적 징후의 산물이다. 나의 욕망, 나의 질병을 탐구하고 해명할 수 있을 때 비로서 타자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순환시킬 수 있다. - p 55

너무 직설적으로 쓰면 좀 없어 보이니까(?) 인문학적인 고상한 용어도 섞어 쓰면서 얘기는 진행된다.

흔히들 자기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굳세고 사주팔자를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도 이런 식이다.

숙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운명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외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몸이 아플 때 의사나 묘방만을 찾으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왜 아플까? 그 인과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가게 되면 그건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비전탐구가 된다. 그런데 그 비전탐구를 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와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사주팔자란 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 p 127

좋은 팔자란 길한 것을 맞이하고 흉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흉에 대한 인식과 욕망의 배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생명의 바다, 음양오행의 매트릭스에 길흉은 없기 때문이다. - p 245

모르긴 몰라도 사주명리학에 대한 공부는 저자가 나 보다 훨씬 많이 했겠지만 장담컨데 전국의 유명하다는 점집(주로 명리학) 은 내가 더 다녀봤을 것이다.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다가 올 운명을 100% 맞추는 사람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30년 이상 이 공부만 해 온 고수들도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결론 삼아 저자는 이렇게 재미있고도 살아가는데 요긴한 명리학 공부를 직접 해 보는게 어떠냐는 식으로 권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상식수준에서 조금 공부하면 도움이 된다. 정말 인생의 기로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시기에 사주명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공부가 되어 있으면 상담을 받으러 가더라도 더 예리하게 질문을 잘 할 수 있고 , 그들의 설명과 논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설프게 책 몇 권 공부해서 자기 운명이나 남의 운명을 본인이 직접 감정하려 들면 큰 실수를 할 수 있다. 남의 귀한 자식의 인생진로를 엉뚱한 방향으로 망칠 수 있고, 사랑하는 청춘남녀의 결혼을 궁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갈라 놓을 수 있으며, 손대지 말았어야 할 사업을 남에게 부추길 수도 있다. 책 좀 읽고 공부 약간 했다고 하면 주변에서 (재미삼아겠지만) 질문공세를 퍼부으며 가만 놔두지를 않는다. 내가 아는 모 고수는 10년 이상 공부하고 1 만명 이상의 사람을 만나 감정해보니까 그제서야 어렴풋이 조금 감이 좀 오더라는 말을 했다. 그만큼 어려운 공부다. 사주풀이를 평생직업으로 할(물론 재능도 갖춰야겠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깊숙히 공부는 하지말자. 하더라도 조금만 하자. 이게 내가 어줍잖게 사주명리학 서적 몇 권 읽고 수많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역술인 고수들 만나 본 결과 내린 결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약은 약사에게, 점은 점쟁이에게.  단, 반드시 초절정 고수에게!

P.S. 1. 뜬금없이 책 몇 페이지 걸러 한 번 씩 등장하는 (^^;) 같은 이모티콘은 누구의 아이디어 일런지? 인터넷 상의 가벼운 블로그 글도 아니고, 너무 자주 등장하니 이 책에 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을 넘어 눈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2. 지난 몇 번의 점집 관련 페이퍼로 점집을 소개해 달라는 숨은 댓글과 메일을  100 건이 넘게 받았다. 물론 일일이 친절하게 장문의 답변을 드렸고. 그런데.... 한 번이라도 서재상에서 인사를 나눈 경우라면 모를까 처음 방문해서 대뜸 문의 댓글 한 번 달고 그 이후로는 깜깜무소식인 1회성 댓글 문의는 이제는 정.중.히. 사양하련다.   잘 안 믿어지겠지만 나도 제법 바쁜 사람이다.  게다가 점집 영업사원은 더더욱 아니고.   -_-;;



















서재에서 처음 뵙는 분들의 점집 문의에 대한  비밀 댓글에 대해서는 9/28일 오전 11시 이후로 절대 답글 안 달아 드립니다.  문의하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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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09-12 공감(88) 댓글(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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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친구에게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이 또한 사주명리학의 마법이다. 앞에서 보았듯, 누구든 치우치거나 기울어져야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아니 최선이다! 출발의 조건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그러하다. 여덟 개의 카드는 구성이 어떻든 간에 다른 오행으로 변주될 수 있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곧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인생역전 혹은 깨달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내가 아닌 아주 낯선 존재가 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닌가. 사주팔자에는 그런 식의 변곡점을 만들어 낼 '숨은 조커'들로 그득하다. 니체가 말한바,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는 예언이 혹 이런 뜻이었을지도. (p.108-109)











며칠전에 친구와 인간관계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관계를 맺게 되는 '운'에 관한 것이었는데, 친구가 보기에 나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고 다정하여 복받은 것 같다는 거다. 나 역시 그걸 알고 있는 바, '관계운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는 것 같아, 나는 가족운 좋은 대신에 애인운은 별로인가봐' 했더니, 친구는 '나는 애인운은 있는데 가족운은 별로인 것 같아'라고 말했더랬다. 그러면서 친구가 덧붙이길, '내 운 어디가 어긋났는지 너가 나타났네' 라고도 했다. 이뻐라..



어쨌든, 인간은 모든면에서 모든 걸 다 완벽하게 가질 순 없는 것 같다. 친구와의 대화에서처럼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란 것도 마찬가지. 나는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사이가 좋고 다정하게 지내서, 나의 동료들도 자신들의 친구로부터 '어떻게 그런 동료가 다있냐'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는데, 상사로 가면 얘기가 확 달라진다. 나는 수시로 '이런 상사를 내게 줘서 미안한 마음에 이런 동료들을 줬나' 싶어지는 거다. 그리고 다른 관계로 크게 축복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 이토록 복된 가족을 내게 주었나... 싶고. 어쨌든 상사 폭탄은 너무 크다. 관계에서 이렇게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다른 부분도 다 마찬가지로 작용할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전체 운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여덟 개의 카드'는 우리가 말하는 그 '팔자'를 의미한다. 태어난 년월과 시. 우리는 보통 '팔자가 사납다' 따위의 말을 하긴 하지만, 누구 하나의 팔자가 더 사납거나 더 좋을 순 없다고,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얘기한다. 이게 넘치면 저게 부족하고, 저게 넘치면 이게 부족하고. 그렇지만 그것이 일상의 사소한 (나쁜)습관을 고치는 걸로 달라질 수도 있음을 얘기하고,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기로도 달라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데, 이는 '너 자신을 알라'와 같은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내가 아주 잘 살아오고 있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끊임없이, '내가 이럴 때 어떡해야 하는가' 부터 시작해서, 나를 관찰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 내가 이럴 때는 이렇구나, 이럴 땐 이렇게 해야 겠구나, 하고, 꾸준히, 아직도 내가 모르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한다.











사주를 보러 간 적도 몇 번 있는데, 사주를 보러 가는 것은 내가 내 운명을 따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들여다보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내 운명에 대한 얘길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점에서 사주는 내게 카운슬러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는데, 가서 가만히 내 생년월일을 넣고 나의 운명에 대한 얘기를 듣노라면, 그게 그렇게나 위안이 되는 것이다. 아, 내 사주에 이런 글자가 있어서 나에게 역마살이 있구나, 부터 시작해서, 아 나는 계속 공부하면서 살아야겠구나, 까지. 어떤 사주 쌤은 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하셨다.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냐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칭찬해주고 싶다고 했더랬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주쌤은, 내 친구의 사주를 봐주면서 '너의 팔자가 이렇다고 해서 이렇게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더랬다. 아주 작은 결정에서부터 운명은 바뀔 수 있으니, 끊임없이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보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라고. 누군가 써준대로만 사는 인생이면 얼마나 재미없냐,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면서 사소한 게 하나라도 바뀌면, 그 다음 행보도 바뀔 수 있으니, 운명을 스스로 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거였다. 그때 그 쌤이 해준 얘기가 이 책에도 똑같이 실려있다.











어떤 유형의 팔자건 순환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내가 가진 기운을 내야 한다. 몸, 재물과 능력, 마음, 이 세가지는 누구나 지니고 있다. 많든 적든 높든 낮든. 뭐가 됐건 일단 이것들을 쓸 준비를 해야 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 좋은 운이 오긴 어렵다. 재물과 능력을 적극 활용하지 않고서 복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또 마음을 꽉 채워 버리면 운은 막혀 버린다. 요컨대, 탁하고 무거운 기운이 가득찬 곳엔 복이 머무르지 않는다. 복을 받고 운을 맞이하려면 주변의 공기를 맑고 청정하게 해야 한다. (p.124)











사람마다 몸과 기질이 다르듯, 운이 막히는 대목이 다르다. 보통 운명이라고 하면 거창한 인생역정을 떠올리지만 그 어떤 인생역정도 일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운명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일상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 얼마나 단순하고 쉬운가. 이 일상을 건너뛰고 다른 방편을 쓰고자 한다면 그건 다 사술이다. (p.124)















책의 부제에 써있는 '사주 명리학'이란 단어 때문에 이 책을 읽으려고 했었다. 혹시라도 책을 읽다가, 나의 사주를 봐주진 않을까 해서. 그러니까 왜 별자리 책처럼 '사자자리' 찾으면 '당신은 어떻고 어떤 사람이고 어디가 행운의 장소이다' 같은 걸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대로 책장을 펼치긴 했지만, 아니 그런데 태어난 년월과 시로 말하자면 어마어마한데, 그걸 다 책에다 쓸 순 없었겠지, 설마 나한테 찾아보라는 건가, 하며 기대를 좀 접긴 했는데, 역시나 '너의 사주는 어떻다'고 풀이해주진 않았다. 나는 내가 되게 특별한 줄 아는데, 전혀 아니라는 걸 자꾸 깨닫는다. 그럼 그렇지, 이 책이 뭐 나의 사주에 대해서만 말해줄줄 알았냐... 각설하고,







이 책에서 말하는 운명과 팔자에 대한 부분,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팔자 그 자체가 굉장히 공평하고 최선이라는 것, 우리가 가진 재료로 이렇게 만든 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건, 아마 그동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굉장히 신선하게 틀릴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주명리학을 공부해볼까 하는 충동에 잠깐 흔들렸는데,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사주명리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진 사람이 많아지지 않았을까. 또한, 저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가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던 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게는 이 책에 쓰여진 것들이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바를 일깨워주진 않았던 거다. 너와 내가 만나서,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느냐로 나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나를 잘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 일상의 작은 것들이 우리의 운명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시간 약속을 잘지키고 청소를 잘하는 것으로 아주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고 한다!!)은, 나로서는 이미 다 아는 얘기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얘기들이기도 하고.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이 되새기는 것도 아니잖은가. 잊고 있었다. 내가 나 자체로서, 그러니까 이렇게 어딘가 기울어지고 모자란 상태로서도, 이미 완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어딘가 모자라고 이지러진 존재라는 사실도 마찬가지고.











일전에 사주를 보러 갔을 때 그 쌤은 본인이 잘 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는 자기에게 사주를 보러 온다고 하기도 했다. 이 분이 말씀하시길, 그렇게 잘 보는 자기이지만 처음엔 결혼을 잘 못봤다는 거다. 젊은 사람들이 '나 언제 결혼하느냐' 부터 시작해서 결혼에 대해 물을 때 자기가 보이는대로 대답을 해주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왜그럴까 왜그럴까 고민하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 있었으니, 결혼은 '상대'가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 하나의 사주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나중에 깨달았다고 하시는데, 이 얘기에서도 나는 이미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 결혼만 그렇겠나. 우리가 다 정해진 팔자가 있다고 해도, 그 안에서 그럴 내가 어떻게 운영하느냐로 달라질 것이고, 일상을 바꾸면서 달라질 것이고, 일상을 바꾸면, 이 책에서 얘기한 것처럼, 만나는 사람 자체도 달라질텐데, 그러면 모든 것들이 조금씩 바뀌어 다 달라질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세상이니, 쓰여진 사주대로 진행되지는 않을 터. 이런 것들을 알면서 잊고 지냈던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읽는게 큰 도움이 됐다. 내가 원하는 바-내 사주를 봐주는걸까?-와는 일치하지 않았지만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다른 책과 동시에 집어 들었는데, 이 책에 열중하게 됐다.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나 뿐이고, 나라는 인간 자체는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그러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모든것들을 충만하게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의 팔자가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고, 그 균형은 어딘가의 누군가가 채워주고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내 삶에 충실하고, 일상을 단단하게 채워나가야겠다고, 그리고 다시 겸손해지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꼭 사주팔자 그대로를 믿어서가 아니라, 태어난 것으로 정해지는 운명을 받을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것에 대한 작은 위로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하다. 끝에 좀 '어라?'하는 부분이 있어서 별은 넷밖에 못주겠지만, 이 책으로 고미숙을 접했는데, 그것을 고미숙을 아는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고미숙의 다른 책들도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거다.







요즘 삶이 힘겨워 밤에 잠을 못이룬다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그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터라, 이 책을 또 주문했다. 내가 가진 책은 이미 밑줄을 많이 그어서, 새 책을 친구에게 주기 위해서.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친구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자신의 상태 그대로 최선이라는 것, 그리고 일상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되새기며 위로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정서적 균열과 관련되어 있다. 감정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다. 많은 경우, 명분과 논리는 감정의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어울림과 맞섬이 사람들의 동선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곧 인생이고 운명이다. (p.12-13)



시작이 있으면 중간이 있고, 그 다음엔 끝이 있다. 시작과 중간과 끝. 시간적 순서(次)는 반드시 공간적 질서(序)와 함께한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시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공간의 ‘휘어짐‘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이다. 시공간의 리듬, 그것이 곧 ‘차서‘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는 차서가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차서가. 해마다 이 리듬을 밟기 때문에 우주는 만뭉릉 쉬지 않고 창조해 낸다. 이 생생불식하는 활동을 일러 순환이라 한다. 순환이야말로 생명의 원동력이다. 다양성과 자율성도 이 차서 안에서만 가능하다. (p.38)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 차서를 어그러뜨리는 체제이다. 순환과 비움이 아니라, 소유와 증식만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할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감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가 된 다음에, 먹고살 만해진 다음에도 계속 부를 증식하고자 한다면 그건 바보거나 광인이다.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를 일구고 나면 선비를 기르기 위해 삼대가 적선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지혜다. 뒤에서 배울 터이지만 재성(재물운)이 관성(관운)과 인성(명예와 공부운)으로 순환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정신의 가치와 함께가야 한다는 걸, 그래야 쉬임 없이 만물을 낳을 수 잇다는 걸 터득했던 셈이다. (p.47)



몸의 구조와 생리, 성격과 인생관등 다양한 항목들이 계열화된다. 그것이 관계를 만들고 사건을 일으키고 인연을 불러온다. 관계와 사건과 인연, 그 접속과 변이-이것이 바로 인생, 아니 팔자다. (p.70)



자신 안에 있는 불기운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지 다른 사람들이 비난해야 할 사항은 아니다. 타인의 행동을 시비선악을 떠나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에게로 온다. 나의 행동, 나의 인생을 보는 시선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 (p.86)



누구든 여덟 개의 카드뿐이라는 사실. 왕후장상이건 농민이건 브라만이건 수드라건 혹은 그 누구건 여덟 개 이상의 카드를 가질 수는 없다. 현실을 보면 슈퍼맨이나 영웅 혹은 대자본가가 있지만 운명의 차원에선 그들 역시 ‘팔자‘그 이상을 누릴 수 없다. 만약 그들의 부와 권력이 타고난 것이라면 대신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p.96)



팔자 또한 그러하다. 여덟 개의 카드로 음양오행이라는 기운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골고루 다 갖춘다는 건 불가능하다(아니, 무의미하다는 게 더 맞을지도). 결국은 어느 쪽으로든 치우칠 수밖에 없다.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래야만 태어난다는 점이다. 미리 밝혔듯이 천간과 지지 사이엔 두 개의 잉여가 있다. 천지는 태초부터 서북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자전의 축 또한 23.5도 기울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주는 완전한 원형이 아니다. 타원형이거나 아니면 약간 일그러진 형태의 원형이다. 이런 상태로 또 계속해서 돌아간다. 돌고 돌아 멈추지 않는다. 그럴수록 간극들이 쌓이고 쌓여 주름투성이가 된다. 결국 이 우주 속의 모든 존재는 이 주름의 산물이다. 당연히 넘치거나 부족할 수밖에 없다. (p.97)



사주팔자를 뽑아 보면 오행상 어느 쪾으로든 다 기울어져 있다. 심한 경우 한 오행이 고립이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도 하다. 한두 개의 오행만으로 된 경우도 있다(윽!) 고스톱으로 치면 한두 종류의 패만 들어온 셈이다. 그럼 판을 포기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좀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또 패가 골고루 들어온 경우에는 누릴 수 없는 스릴이 있다. 그 스릴이 오히려 인생역전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불급의 극단인 고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고립은 다른 오행에 가로막혀서 순환이 불가능한 경우다. 하지만 그 카드는 존재의 무게중심이 된다. 엉? 어떻게?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손가락이건 발톱이건9자식이 깊은 병이 들면 그 자식을 인생의 축으로 삼는 부모가 그런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 카드들이 야기하는 파장은 크다. 즉, 가장 문제적인 곳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구원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문제와 사건의 중신이 된 건 다른 일곱 개의 카드 때문이다. 즉, 그것 자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카드와의 관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p.99)



다른 카드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이것만 쏙 뽑아버리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무지의 산물이다. 만약 어떤 비책을 동원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 순간, 나머지 일곱 개의 카드도 다 위치를 바꾸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카드가 고립이나 태과에 처하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9카드 돌려막기의 비애?^^)

팔자가 원초적으로 평등하다는 두번째 근거는 바로 이것이다. (p.99)



사주명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건 보는 힘이다. 내 운명의 지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잇는 끈기와 열정이 필요하다. 보는 힘이 커질수록 자신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접점이 넓어진다. 보통은 비참하게 주어진 운명을 억척스럽게 개척하는 것이 인생역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건 어디까지나 진부한 성공담의 서사일 뿐이고, 진짜로 인생을 바꾸려면 가장 먼저 자신의 운명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부질없는 팔자타령 아니면 한방에 역전하는 도박심리만을 키우게 된다. 물론 그럴수록 팔자의 늪에 더더욱 빠지고 만다. 그래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한다. 지(知)와 사랑은 하나다! (p.120)



어떤 유형의 팔자건 순환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내가 가진 기운을 내야 한다. 몸, 재물과 능력, 마음, 이 세가지는 누구나 지니고 있다. 많든 적든 높든 낮든. 뭐가 됐건 일단 이것들을 쓸 준비를 해야 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 좋은 운이 오긴 어렵다. 재물과 능력을 적극 활용하지 않고서 복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또 마음을 꽉 채워 버리면 운은 막혀 버린다. 요컨대, 탁하고 무거운 기운이 가득찬 곳엔 복이 머무르지 않는다. 복을 받고 운을 맞이하려면 주변의 공기를 맑고 청정하게 해야 한다. (p.124)



운명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일상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 (p.124)



일상이 습속을 바꾸고 습속이 다시 몸의 생리로, 몸이 또 인연의 장을 바꾸고 운명을 바꾼다. 출발은 어디까지나 일상이다. (p.125)



자기를 구하는 건 결국 자기밖에 없다! (p.128)



관성이란 ‘타자들과의 네트워킹‘이다. 익숙한 존재들과의 관계는 관성이 아니라, 식상에 가깝다. 계모임이나 동호회, 친목단체 등등. 이 관계에선 나의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태의 확장과 변주만 있을 뿐. 반대로, 관성은 낯설고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책임을 져야 하고 갈등과 충돌도 불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기운이 형성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재물을 모을 수도 있다. 그 재물이 다시 관성을 낳기도 하고. 따라서 관성을 적극 활용하면 재성과 인성이 서로 맞서는 형국에서 재-관-인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p.147-148)



공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충전이고, 문서는 만물을 낳아 주는 대지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육친으로 따지면 엄마란다. 하여, 엄마복이 있다는 건 공부운이 좋다는 뜻이 된다. 하기야 맹모삼천은 있어도 맹부삼천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픽션이건 현실에서건 홀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지만 홀아버지일 경우는 일찌감치 자식을 노동현장에 내놓은 경우가 많다. (p.154)



처음,「입구」에서 말했듯이 운명의 지도에는 역설과 아이러니 투성이다. 어떤 인위적 척도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으면 저것이 어긋나고, 저것을 얻으면 이것이 사라지고. 겉이 아름다우면 속이 문드러지고, 바깥이 거칠면 속이 부드럽고. 혹은 돈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고, 권력을 가지면 사람을 잃게 되고, 사랑을 얻는 대신 친구를 버려야 하고……한마디로 팔자에는 온갖 가치들이 범람한다. 가치들의 범람 속에서 종국에는 가치들이 얼음 녹듯 녹아 버리는 것, 그것이 팔자의 우주적 연기법이다. 고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이 서로 ‘오버랩‘되는 이 매트릭스에선 더 좋은 팔자도, 더 나쁜 팔자도 있을 수 없다. (p.160)



그렇다! 문제는 에너지고, 문제는 순환이다. 몸과 마음의 순환, 나와 타자의 순환, 나와 세계 사이의 순환……아무리 좋은 것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 사이에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p.180)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이 곧 나다! (p.225)



스승과 벗이 없는 인생이란 그 어떤 금액의 돈으로도 결코 보상받을 수 없음을 꼭 되새길 필요가 있다. (p.225)



인복이야말로 배움의 진정한 배경이자 토대인 까닭이다. (p.232)



인복은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자기 하기 나름이다. 자업자득이라는 뜻이다. 구마준에게 있어 타인은 다 성공을 위한 도구다. 부모건 연인이건 또 스승이건. 그런 사람은 돕고 싶어도 도울 방법이 없다. 하지만 탁구에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다 자신의 스승이다. 김탁구가 즐겨 하는 대사, ˝가르쳐 주면 되지 않습니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큼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없다. 돕지 않으려야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큰 내공이란 없는 법이다. (p.233)



그런 점에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사제지간이다. 특히,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사우! (p.233)



자승자박!자업자득! 즉, 길이든 흉이든 결국은 자신이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자신의 내부에 단서나 원인이 없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운명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이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동일한 욕망과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p.241)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 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 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거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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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11 공감(23)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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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새창으로 보기

세 번째로 읽은 고미숙 선생님의 책이다.

공부를 하자는 책에서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에로스란 책을 읽었고..

사랑에 운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보면서 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운명에 있어서 몸과 많은 연관이 있다는 글에 동의보감 책도 읽을 기세.



난 정말 사람을 어지간히도 안 만나는 편이다.

맨날 보는 가족 제외하고 약속 잡고 만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

진정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친구가 제일 제일 제일 친한 친구다.

그 와중에 꼭 인생의 전환기마다 감사하게 시간을 내어주는 선배 언니가 있다.

언젠가 언니가 나의 태어난 날과 시를 잡고 사주를 푸는 거다.

나랑 언니는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얘기하던 사이라 적잖이 놀랐다.

언니가 너무 답답할 때 회사에서 사주 강의를 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인구를 갖고 통계를 낸 통계학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미리 이런 성향을 예측하고 생각해서 내 삶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쁠 것이 없지 않느냐는 언니 말에..

끄덕끄덕 인정을 했다.

사실 어떤 삶에 대해 몇백 년 이상을 믿고 도움받아온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진정 이 학문이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오감을 넘어선 육감(식스센스)를 얻은 느낌이랄까..

인생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은 느낌이었다.

이제껏 사주카페 같은데 가면 그저 나의 단순한 길흉화복을 묻는 기계적 답변을 원했다면..

알고 보면 사주는 그 이상의 복잡하고 미묘하면서도 재밌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주 용어들이 나오는데 그냥 뛰어넘었다. 인성이 어쩌고 관성이 어쩌고..

그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아빠가 강의마다 설파했던 `만득 이론`(공같이 생긴 모래로 만든 인형)이다.

사람은 완벽하게 행복할 수 없는 존재란 것이다.

한쪽이 채워지면 다른 한 쪽이 모자라고 다른 한 쪽을 열심히 채워 넣으면 다른 한쪽이 없어져 버리는..

신기한 것은 돈을 쓸어모으는 연예인 근처에 돈을 축내는 가족들이 있는 것은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지 모르겠지만..부에 대한 기운을 그 연예인이 다 쓸어가서 다른 사람은 그 기운을 뺏어내는데 그렇게 당당하다는 거다.

또 자식을 잃고 오래 사는 사람은 어쩌면 자식의 기운을 얻어 간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이런 나쁜 기운과 좋은 기운을 지혜로운 공부를 통해 해결해 나갈 수도 있단다.

돈이 많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술과 여자가 따라온다.

그러면 돈을 기부하는 형식으로 흐르면 술과 여자에 대한 흐름을 막을 수 있다.

돈은 많이 버나 돈 버느라 거지꼴로 먹을 수밖에 없는(먹을 복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밥을 사주고 같이 먹으면서 먹을 복을 보충할 수 있다. 등등-



어쩌면 일거수일투족을 다 엄마의 도움을 얻었던 나는 인성이 과다한 성격.

이런 성격은 학벌도 높고 자격증도 많이 얻으나 정작 쓰지 못한다는데 진심 찔렸음.-_-

동생은 독립적이고 잘 있는데 나는 왜 그런가..라는 생각이 어쩌면 운명론적 사주와 관계있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기고 싶은 사실은..

사람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살만해지면 그 때부터 고인 물처럼 썩기 시작한다는 사실.

나는 매일매일 읽지도 않는 책을 애 둘을 끌고 빌려오고 반납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 오고 있었다.

정말 비슷한 원숭이띠 남편과 친정엄마는 왜 그 고생을 하냐면서 엄청나게 나를 괴롭혔다.(최소한 나한테는 괴롭힘으로 들렸다.)

내가 빌려온 책 한 권이 보이면 분노 분노 분노.

나는 그게 그렇게 서운했다.

애만 보고 있는 나 자신은 정말 이 책에서 나오는 썩은 물과 같았다.

어쩌면 우린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형제들끼리 스트레스 될까 봐.. 미리 걱정 없이 해 주려는 부모의 배려가

아이들에게는 흐르는 물을 고이게 만드는 끔찍한 실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인생은 어쩌면 고행이다.



좋은 사주도 없고 그렇다고 아주 박복한 사주도 없다.

내가 열혈 구독해서 읽고 있는 ˝예설˝이라는 블로거는 이슈가 되는 연예인들 사주를 알려준다.

그중 너무 재밌었던 사주는 바로 지금 교황님의 사주였다.

부모복도 없어 자식복도 없어 적들은 엄청 많고..

아주 나쁜 사주란 사주는다 갖고 계셨던 것.

그런데 참으로 맞는 사주다.

어렸을 때 어렵게 살아 성당에서 도움을 받았고 그래서 신부가 됐고 당연히 자식은 없을 테니 자식복도 없는 거고

적이야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으니 선을 지향하는 직업상 적이 많아야 어둠을 비추는 등불로 더욱 빛나는 교황님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평화롭고 걱정없는 밝은 이 세상에서 영롱하고 밝고 고매한 교황님인들..그분이 멋진 분이라는 걸 알기야 하겠어?



아무튼-이제 사주는 미신 따위가 아닌 당당한 인문학의 연구분야가 되었다.

지금 여기 도서관에서도 사주 강의가 있네.흐흐

참 재밌다.



이 고미숙 선생님은 나를 재밌는 공부의 세계로 빠지게 하시는군요.

근데 저 5개의 과제 중 3개의 과제가 남았다는 사실.ㅜㅠ



이제 사주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내가 해야 하는 공부를 해야겠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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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책한엄마_mumbooker 2016-03-12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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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사주명리학을 풀어 주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사람은 태어나면서 '사주 - 생년,월,일,시'가 정해진다.



그 결정론적 운명론에 경도되면, 삶은 너무도 뻔한 것 아닐까?







제 애비를 죽이고, 에미와 결혼해서 자식도 낳을 넘...이란 오이디푸스처럼,



제 눈을 칼로 찌르고 광야로 나아갈, 비극적 운명에 순응하기 싫다면,



이 책을 읽고 '안티 오이디푸스'의 길을 걷자는 달콤한 꾐이다.







애니팡 2라는 게임을 하다 보면,



처음엔 재미도 있다가,



레벨이 좀 올라가면, 해도해도 안 되는 경지를 만난다.



그럴 때 열받으면, 돈을 써서 이런저런 아이템을 사게 만든다.



그건 편법이고 꼼수다.



진득하게 안 되는 판은 '덕을 쌓는다'고 생각하고,



될 때를 기다리면 된다. 언젠가 한 판은 기회가 온다.







이 책에서 예를 든 고스톱처럼,



광을 많이 들었다고 승률이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가 많다고 좋지도 않다.



자기가 든 패와 깔린 패와 순서가 척척 맞아 줘야 좋은 것이다.







고미숙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가 알아먹을 수준으로 말을 풀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학문적 깊이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유사한 책들의 다른 저자들은 도대체 독자의 수준을 어떻게 잡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을,



고미숙은 알기 쉽게 설명한다.







물론 이 책을 본다고 사주명리학이 훤~히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렇지만, 기초로는 이만한 책이 없을 듯하다.







개념들과 용어들을 쌈빡하게 설명하는 그의 능력이 부럽다.



나의 일간은 '계수'이다.







계수는 계곡물이나 옹달샘처럼 스케일이 작지만 투명한 물이다.



주변환경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유연성이 강하고, 아이디어와 독창성이 번뜩인다.(77)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게 된다.



서양의 '인간 탐구' 내지 '심리 해석'은 미리 많은 설문에 답한 다음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어서



대부분의 경우,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분석하게 되는데,



동양의 철학은 음양보다는 오행의 상호작용이 크다.







나의 사주에서 나머지 일곱 글자는 불이 다섯, 나무가 둘이다.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사주다. ㅋ



그래서 가르치는 일로 먹고 산다.



식상이 '목'이다 보니, 표현하는 힘, 뻗는 것에 만족해 한다.



악기를 배우기 좋아하는 속성이 그런 것인가 한다.







재성이 '화'로 그득하다. 넘친다.



일복? 차고 넘친다. 알고나니, 억울하진 않다. 원래 팔자구나.







이렇게 치우쳐 있어서, 조커를 써볼까 하고 뒤적거려 보니... 헐~



점입가경이다.







네 글자의 '지지'에 딸린 '지장간'을 다 동원해 봐도...



열 하나 중에서, 다섯이 불이요, 둘이 나무다.







없는 것을 한스러워 하며 살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얽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나를 생하게 할 '금'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나를 극하지만 금을 생하게 할 기운을 가진 것들,



물론 내가 어떤 사업을 한다거나 하는 일, 사람을 믿고 투자를 하는 일 같은 것은 금물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지만,



없는 것이지만, 서로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삶임을 깨닫노라면,



없으면 없는대로, 과하고 넘치면 또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삶이다.







고미숙 덕에 <운명의 브리콜라주>의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브리콜라주는 좋은 재료들로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 그 작업장에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여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라고 한다.



재료 자체의 속성이나 본질이 아니라,



재료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과 개성이 결정된다는 원리.(122)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109)







행운으로 여길지, 불운으로 여길지는 해석하는 사람에게 달렸다.



내 삶의 해석,



굳이 남에게 맡길 것 없다.







내 삶은 내가 읽고 풀어가면,



풍부하게 차고 넘치지는 않더라도,



고만고만한 밥그릇에 겨우겨우 채워가며 살 수는 있잖을까 싶다.







이런 게송을 참 좋아한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受器得利益)



구슬보배 더욱 생겨 허공에 가득해도,



뭇 삶은 그릇따라 이로움을 얻을 따름...







저녁밥이나 맛있게 먹을 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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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4-07-14 공감(6)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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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는 길 새창으로 보기

초등학교 친구 중에 괴짜로 소문난 친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덩치가 좋았던 친구는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유도 선수가 되었다.  그것도 무제한급 선수로.  친구는 고1인가 고2의 여름방학에 친구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체력 훈련을 하겠다며 산으로 들어갔었다.  친구들은 다들 그러려니 했다.  운동선수이니 체력훈련이 필요할 테고, 체력훈련 하면 뭐니뭐니 해도 산악훈련이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되어서 만난 친구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분위기가 친구를 감싸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던 나는 한동안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고향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에 내려가 풍수지리를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선수로서 유도를 계속하거나 적어도 은퇴한 후 유도 코치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풍수지리 강사라니...  그 친구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한의원을 운영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한자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셨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탓인지 친구는 다른 과목에 비해 한문 실력은 늘 좋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도를 하던 친구가 풍수지리 강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쓴『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사주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업으로 그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그저 관심으로만 그칠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시도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공부를 해볼 요량으로 <주역>을 집어 들었다가 채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미련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이라는 가정 속에서 지루하게 시간만 보냈을 뿐 실행에 옮길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부터의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그 기회마저 밀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는 사주니, 운명이니 하는 처음의 호기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했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    (p.31)







이 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사주명리학이 왜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는지, 또는 왜 '신비주의'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탐구하며 기초적인 사주명리학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힐링'과 '치유'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는 요즘,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사람들은 넘쳐나고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까닭을 우리의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과 행 사이의 간극이 질병과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    (p257)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말했다.  "나 이외에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료해줄 사람이 없다.  행복을 나 자신이 만드는 것과 같이 불행도 나 자신이 만들 뿐이요, 또 치료도 나 자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나 자신의 구원자인 나는 그럼에도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고 철학자 니체가 지적했듯이.







근대성 비판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결국 사주명리학만 버린 것이 아니라 이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아픈 것이라고.  나 자신으로 향하는 길은 사주명리학이며, 그 지도를 들고 내 자신에게로 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향 친구를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는 마음 속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던 '언젠가'를 '지금 바로'로 바꾸어 놓았다.  저자 고미숙으로 인해 나는 사주명리학 관련 서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음에 읽을 책도 준비해 두었다.  이러다 혹시 철학관을 내는 건 아닐까?  선무당이 사람 잡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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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3-08-04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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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30

希修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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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6 hrs ·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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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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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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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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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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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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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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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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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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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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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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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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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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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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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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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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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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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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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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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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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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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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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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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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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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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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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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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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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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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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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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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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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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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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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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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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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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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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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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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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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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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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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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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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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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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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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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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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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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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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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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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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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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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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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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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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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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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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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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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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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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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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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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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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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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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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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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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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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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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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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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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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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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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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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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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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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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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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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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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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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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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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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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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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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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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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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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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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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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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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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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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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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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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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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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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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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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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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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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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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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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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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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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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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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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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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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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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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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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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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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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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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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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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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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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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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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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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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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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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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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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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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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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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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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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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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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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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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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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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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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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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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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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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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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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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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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한국 분교 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산 가야사 주지.
http://www.rip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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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댓글들도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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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L.OR.KR

팔리문헌연구소




希修

Sejin Pak 참고하실 만한 글 몇개 올려 드리겠습니다.


希修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기억력이 비교적 좋다고 소문난 이들 약 5백여명이 부처님 사후 모여 서로가 기억하는 부처님과의 일화를 대조, 기억이 일치되는 부분을 운문형식으로 확정하여 노래처럼 부르며 전파합니다. (글로 남기면 권력자의 정치적 목적 등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있어서요.) 이런 결집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3차 결집까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토씨 하나까지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면, 영역본으로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그 긴긴 텍스트를 수천 명이 동시에 순서대로도 외우고, 맨 뒷단어에서부터 거꾸로도 외우고, 한 단어씩 건너 뒤면서도 앞뒤로 외우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보존합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문자로 기억되는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된 다른 판본들의 내용이 거의 완벽히 일치하게 됩니다.
암튼, 경전의 성립과정이 이렇다 보니, 경전의 내용도 제자들이 결집하여 기억을 기술한 그대로입니다. "이러저러한 날 이러저러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누구누구가 와서 이런 질문을 했고,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이들,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무수한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재창작하여 기록하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구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죠. 읽는 이들은 당연히, 그 내용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구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불교발전의 역사를 모르면 엄청 헷갈리고 엉뚱한 삽질을 하게 됩니다.)
위의 2.2. 단락은 대승경전의 이 integrity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대승경전 중에도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많습니다만, 그 자체로 철학이라 볼 수는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C4%81li_Canon
Sejin Pak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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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불교를 공부하시다 보면 차차 느끼시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양 자체도 워낙 방대하고, 그 내용도 상당한 지적능력, 특히 메타인지가 있어야만 이해와 실천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며 공덕을 쌓으면 언젠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받고 태어나게 된다고 애초에는 생각했었습니다. 초기불교는 말하자면,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켰듯, 인간이 그렇게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코딩방법에 대한 매뉴얼이라고 저는 비유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엘리트 아니면 그럼 일반 대중은 들러리냐?"면서 일반 대중을 위한 대승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말씀에 대한 온갖 희석, 윤색, 창작들이 생겨나고, 그래도 여전히 일반 대중에겐 어려우니 "대중은 보시만 하면 그 보시받은 사람이 깨달아 해탈할 때 보시했던 사람도 그 등에 업혀 free ride로 함께 해탈할 수 있다"라는, 일종의 '구세주를 통한 구원의 종교'로 변질되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고서 "우리는 대중도 함께 데려가는 자비로운 大乘이고, 초기불교는 째째하게 혼자만 해탈하겠다는 小乘"이라고 폄하하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은, 나조차 너를 도와줄 수 없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네 자신의 수행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가르침을 남기는 것뿐이라고, 부처님 본인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특히, 대승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인도의 중산층 이상 상류층이었기에, 그들이 이미 젖어 있었던 proto 힌두교 사상이 자연스레 대승에 배어듭니다. 그리고 동북아로 와서는 도교, 유교, 토착신앙, 무속신앙 등이 모두 혼합되구요. 현재 한국의 99.9%의 사찰들에서는 제사상에 가격표를 붙여 가며 장사를 하고 있으니, 초기경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실은 상좌불교를 '소승'이라며 폄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와 의식/의례에 대한 집착을 나무라는 부처님의 모습이 초기경전에는 나오거든요.) 다행히 최근엔 한국에서도 초기불교를 지향하는 스님들이 한 두 분씩 늘어나고 있지만요..
Sejin Pak



希修

여러 주장들 중의 하나.. 불교는 애초에 '기복이나 대중 위로/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기보다 각 개개인을 위한 수양방법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HGc3JgvOg&list=PLpnKGM1FbJm6dnBBinOfd07k__h6fN2fb&index=2&t=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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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











탐진치 개념정리 : 네이버 블로그

탐진치 개념정리 : 네이버 블로그



『밀린다팡하』(해제)



삼독[三毒]



삼독이란 탐욕(貪慾, lobha)과 진에(瞋恚, dosa)와 우치(愚癡, moha)를 가리킨다.

​탐욕은 본능적 욕구를 포함해서 탐내어 구하는 것을 말하고,

​진에는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노여움이며, 마지막으로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우치는 모든 번뇌의 원천인 무명(avidya), 혹은 근본무명과는 구별된다.

​삼독과 근본무명은 상호작용하면서 강화되므로 순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탐진치로 통칭된다.



삼독은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전생의 괴로움을 받게 하는 가장 큰 적이지만, 이러한 번뇌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은 결국 자아에 대한 도착된 견해[我見 혹은 我相]와 그 사견에 대한 집착이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는 아상을 중심으로 생성, 발전하기 때문이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모든 번뇌의 서식처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수행의 근본이며,

​불교가 지혜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문>

"모든 유위법의 평정(平靜)이며, 모든 번뇌를 버리는 것이며, 갈애의 지멸(止滅)이 열반이다."(SN Ⅰ, 136)



"오, 비구들이여, 무위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의 소멸이며, 진에(瞋恚)의 소멸이며, 우치(愚癡)의 지멸이다. ···"(SN Ⅳ, 359)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인 욕망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존재하고자 하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어리석음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워졌을 때, '자유로워졌다'라는 앎이 있고, '윤회는 끝났다. 청정한 범행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해 마쳤고, 이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라고 그는 안다."(MN Ⅰ, 279)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三毒] (『밀린다팡하』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 삼독

말 그대로 세 가지 독을 말하는데, 삼독은 불교에서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것이다.

삼독은 삼불선근(三不善根)·삼구(三垢)·삼화(三火)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삼독은 세 가지 즉 - 탐욕·진에(瞋 : 분노·노여움)·우치(愚癡) - 로서 흔히 '탐·진·치'라 한다.

​탐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

​진은 탐의 이면에 있는 것으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 혐오· 불쾌 등의 감정을 말한다.

탐과 진이 감정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번뇌라면 치는 지적인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치는 사제(四諦)나 연기(緣起) 등 불교에 대한 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무명(無明)과 관련이 있다.

​세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참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으며, 그것은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는데, 이 삼독은 인간의 청정함을 해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삼독은 인간의 숱한 번뇌를 압축한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이 삼독에 갇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보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탐, 진, 치를 극복해야 한다. 우선 탐욕심을 버려서 청정심을 기르고, 성낸 마음을 없애 밝은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청정한 마음, 평화롭고 자비한 마음, 지혜롭고 밝은 마음이 우리의 본래의 마음임을 알고 삼독을 극복하여야 한다.



2) 삼학



삼학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3가지 수행 방법을 말한다. 삼학을 삼승학(三勝學)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가 그것이다. 이를 줄여서 계·정·혜라고도 한다. 계·정·혜는 수행의 순서를 정해놓은 것이기도 한데, 계는 의지, 정은 감정, 혜는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계, 정, 혜가 융합하여 이상적인 마음의 작용을 이루어서 완전한 인격이 형성된다.

계는 악을 행하지 않고 참선을 하는 계율(戒律)을 말하고, 정은 마음을 차분히 하여 정신을 맑게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 혜는 번뇌를 없애고 진리를 얻어가는 지혜를 가리킨다.

삼학은 불교 수행의 방법을 제시한다. 점진적으로 얕은 분야에서 시작을 해서 깊은 분야로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과 지식 또는 말로 행해지는 나쁜 행위를 방지하고 덕을 행하는 계학과, 선정을 수행하여 마음의 흔들림 없는 고요하고 평안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정학, 마음속 고통 없이 평온함에서 진리를 얻는 혜학이 그것이다. 계·정·혜로 불리는 삼학은 서로 보완적으로 불교의 수행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진리를 얻는 과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삼학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청서출판)



출처 시공 불교사전 | 삼독









번뇌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용어.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다고 보아 이를 3가지 독(三毒)이라 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인식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문을 통해 항상 흐르는 번뇌에 의해 마음은 산란되고 갈등을 느낀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 경전에서는 이 번뇌의 다른 표현으로 미혹함·잠듦·물듦·흐름·얽매임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근본번뇌와 이에 따라 일어나는 게으름·불신·경망스러움·교만 등 20가지 정도의 수번뇌가 있으며, 결국 불교의 이상은 이러한 번뇌를 극복함으로써 평온한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번뇌 종류가 수없이 많음을 팔만사천번뇌라 하며 6가지 감각을 중심으로 삼세에 걸친 3가지 선택지로서 계산한 108번뇌는 보다 철학적으로 정리된 번뇌로서 알려져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라 하여 번뇌의 성품이 비었음을 깨우치는 것이 번뇌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의 첩경임을 설명하며, 수많은 번뇌 가운데서 깨우치는 대승적 해결로서 초기 불교에서의 번뇌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와 이의 세세한 대치보다는 마음의 걸림 없음을 통해 보살행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뇌 [煩惱] (두산백과)





삼독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

개설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를 의미한다.

줄여서 탐·진·치라고도 하며, 이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 한다.



내용  탐욕은 탐애(貪愛)라고도 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것,자기의 뜻에 맞는 일에 집착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서 욕심을 부리는 것, 명성과 이익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5욕(五慾)이라고 하여 식욕(食慾)·색욕(色慾)·재욕(財慾)·명예욕·수면욕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구하는 것 자체가 탐욕이 아니라 그것이 정도를 지나칠 때 탐욕이라고 한다.

한편, 여자가 가지는 욕망으로는 색욕·형모욕(形貌慾: 얼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위의욕(威儀慾: 옷치장에 관한 욕망)·자태욕(姿態慾: 아름다운 몸매에 관한 욕망)·언어욕(言語慾: 아름다운 음성에 대한 욕망)·세활욕(細滑慾: 피부의 윤기에 대한 욕망) 등 6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진에는 분노하는 것으로서, 산목숨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에 속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진에는 수행을 하는 데 가장 큰 허물이 되는 것이며, 다스리기도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우치는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으로서,

이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치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삼독은 모두 ‘나[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나’ 스스로에 미혹한 것이 우치이고, 그 우치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독은 중생을 생사의 윤회 속으로 빠뜨리는 근원이 되고,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삼독을 제거하면 곧 고(苦)를 떠나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삼독을 없애기 위한 수행으로는

바른 견해(正見)·바른 생각(正思惟)·바른 말(正語)·바른 행동(正業)·바른 생활(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인식(正念)·바른 정신(正定)의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의 올바른 수행법)와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을 들고 있다.

즉, 계로써 탐욕을 다스리고, 정으로써 진에를 다스리며, 혜로써 어리석음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독 [三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06/29

希修 2006 "The Bureaucracy of the Defilements" 번뇌 - 내 자신에겐 안 보이는 나의 진짜 속마음



(1) 希修 | Facebook



Album Teachings of Venerable Thanissaro

希修 27 June  #193. [Source] "The Bureaucracy of the Defilements"

[Extract] "Years back there was a teacher in another Buddhist tradition who liked to talk a lot about the bureaucracy of the ego and how we had to throw off the shackles and tyranny of that bureaucracy. By that, he meant your ideas of right and wrong, of what you should and shouldn’t do. 

His way of overcoming the tyranny of that bureaucracy was to deliberately do a lot of the things your mind said you shouldn’t do. As you can imagine, he ended up doing a lot of harm to himself and to many other people, breaking the precepts and getting them to break the precepts as well.

The thing is that that’s not the bureaucracy that you have to be afraid of, and that’s not the tyranny you have to overthrow. You have another bureaucracy: the bureaucracy of your defilements—things like greed, aversion, and delusion, which cloud the mind and get in the way of genuine discernment.

Kleshas (Buddhism) - Wikipediaen.wikipedia.org › wiki › Kleshas_(Buddhism)
The emotional obscurations (in contrast to intellectual obscurations), usually translated as "poisons" or "defilements." The three main klesas are ignorance, hatred, and desire. The five klesas include these three along with pride and envy.
  Vietnamese‎: ‎phiền não
  Pali‎: ‎किलेस (kilesa)
  Korean‎: ‎번뇌; (‎RR‎: Beonnoi)


Our mind is very complex. It’s like a large organization, making all kinds of decisions all the time, and we have a tendency to delegate a lot of our decisions to our old habits. There are a lot of little bureaus in there that we haven’t looked into for a long time. We gave them a job and they protect their jobs.
If you’ve ever studied the theory of bureaucracy, you know that each bureaucrat’s main job is to protect his or her job. That is why bureaucrats don’t like reform and don’t like to have their work looked into. It’s the same with your defilement bureaucrats: Their main desire is to hold onto their positions. But if you give them their way, you’re the one who’s going to suffer. They’re not going to suffer. They’re creating your kamma and it’s all going to affect you. It’s because you, as the boss, delegated things and you tend to get distracted— you’re not even there in the head office all of the time—that you end up suffering from the decisions that these lower-level bureaucrats have made.
So, one of the main purposes of the meditation is to shine a light down into this bureaucracy, all of these lower-level functionaries inside your mind, the ones that allow greed, aversion, and delusion to have sway over the choices you’re making, that you’re barely aware that you’re making. ... ...

The first thing you’ve got to do is to learn how to simplify your life in as many ways as possible, because one of the excuses for having a large bureaucracy where there are lots of dark corridors and hidden offices is because there’s just so much work to be done that you’ve got to delegate things and need a lot of people to do it. ... ... 

But when you simplify your life, ... ... You start out, of course, with the in-and-out breath. But then you begin to realize that there are other subtle movements of energy in the different parts of the body and you begin to open up areas of awareness and areas of the body that used to get closed off because you were interested in something else. But now you’re here. You can settle in and spread out to fill the body. You begin to see the movements of the mind a lot more clearly and a lot more quickly. A thought forms and you can see it in the beginning stages. ... ... 

There’s a little bit of stirring here or there in the mind and it’s right at the boundary between the mind and the breath. Then a perception comes along and stamps a meaning on it, saying that “This is a thought about x.” You realize you can go with that perception or not. If you’re clear about what’s happening, if you’re watching the functionaries, then you can decide, “Do I really want to go with that?” And your decision is an informed one.

And it can be an effective one, too. Once you’ve become conscious of your choice and you’ve made up your mind that you don’t want to go, it’s a lot easier to say, “Nope, nope, nope, nope,” down the line. That clears out a lot because you see that, with some of the defilements creating suffering, all you have to do is be aware of them and they wither away. Once you shine the light of your investigative reporting on them and you can see clearly that what they’re doing is unnecessary and is causing a lot of suffering, they vanish.

Your other functionaries, though, know that no matter how much you shine a light on them, they have their ways of staying on ... ... 'Okay, what is it that’s keeping this particular defilement from going away? Why does it keep coming back again and again and again? What’s the appeal?'

... ... First, notice when things come. Second, notice when they go. Third, notice, when they’re coming, what’s their appeal? Why does the mind go for these things? What felt need does it satisfy? And do you really feel that need anymore? ... ... A lot of the times you assign a job to a certain functionary and then you forget about it entirely. These old habits: Some of them go back to your childhood, old ways of thinking, old ways of seeing the world, understanding how you can get pleasure out of something ... ... 'Okay, what’s the price of this pleasure?' ... ... This is where you begin to see the drawbacks of the pleasures advanced by the defilements, which is the fourth step ... ... And then the fifth step is seeing the escape. ... ... Part of the answer lies in seeing the drawbacks, and part lies in realizing that you have the choice—and that there is a better choice. You don’t have to go with greed, aversion, and delusion anymore. ... ...
As long as everything is transparent—you’ve got wisdom in charge, you’ve got discernment in charge—you find that this bureaucracy, instead of continually churning out problems and churning out suffering, can actually become harmless. Blameless. Useful.

So it’s the bureaucracy of your defilements, not the bureaucracy of the ego, that you have to watch out for. The problem lies, not in having a sense of right and wrong, but in having the wrong sense of right and wrong, one that’s been skewed by the defilements. That’s what you have to straighten out. Above all, as long as your life is very complex and your mind is taking on lots of tasks, it’s going to be hard to deal with these things, hard to see these things. You want to simplify as much as possible and get your awareness to settle down. Instead of focusing outside all the time, get it to fully inhabit your body. That way, all the little back corridors and basements in this bureaucracy you’ve got here become opened to your conscious awareness. All of the kamma that you’ve been creating in a semiconscious way becomes a lot more conscious—and your ability to bring consciousness and discernment to these things is what’s going to make all the difference."

[希修] "남들에겐 훤히 보이지만 정작 내 자신에겐 안 보이는 나의 진짜 속마음"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48109315561151
* right view, wrong view, ego, mind, defilements, bureaucracy, politics, dele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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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6 March  · Shared with Public
< 남들에겐 훤히 보이지만 정작 내 자신에겐 안 보이는 나의 진짜 속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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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에서 두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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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빨갱이' 소탕을 위해 제주로 내려온 한 군인이, 빨갱이에게 희생된 자신의 가족사와 그 恨을 얘기하는 장면. 저 사람으로서는 저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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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토굴에 피신해 있던 마을 사람들이 젊은이 둘을 보초로 세웠는데, 한 명이 군인에게 걸려 그 군인을 토굴로 인도하다가, 다른 보초가 이 장면을 보고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식으로 따지자, 이 아저씨는 착한 군인 아저씨라서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다, 라고 얘기하던 장면. 더없이 어수룩한 청년이었지만, 아마도 그 행동은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을 듯. 토굴로 안내하라는 이 군인의 요구를 거절하면 내가 살아 남을 확률은 0%이고 마을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을지 어떨지 미지수이지만(a), 이 군인의 요구대로 그를 토굴로 인도하면 마을 사람들이 살아 남을 확률은 0%여도 혹시 이 군인이 나는 살려 줄 가능성도 2%쯤 될지 모른다, 라는(b). 마을 사람들로부터 '살짝 모자란 아이' 취급을 받을 정도로 순박한 그 청년조차, 저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을지, 그 '합리적'인 계산을 순식간에 해 낸 것이었겠지 - 이런 해석이 감독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저 내가 좀 '삐딱'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청년이 (a)를 선택했다면 사후 다른 이들로부터 칭송 받았겠으나, (b)를 선택했다 해서 그 누구도 저 청년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 또 사실, 이 군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라서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던 그 청년의 말도 의식적인 거짓말은 아니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다만, '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인간'으로 자신을 인식하기가 너무 괴로우니,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스스로에게 저런 거짓말을 한 후, 의식의 수면에선 그 내용을 '정직하게' 믿었을 뿐. 어떤 면에서 그의 의식은, 자기 자신의 속마음에게 속은 '억울한 피해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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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마주치는 상황들이 저렇게 극적이지 않기에 인지조차 못 하고 넘겨서 그렇지, 저런 식의 '스스로도 속아 버린 거짓말'을 대부분의 인간들이 늘상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하면서 살아 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적 장애인의 노동력을 수십 년간 착취하고 발목에 족쇄까지 채워 글자 그대로 소처럼 취급했으면서도 자신은 그를 불쌍히 여겨 "거두고 돌봐 주었"을 뿐이라 말하는 '순박한 농부' (스님이었나?)같은 실화들을 우린 종종 접한다. 광주에서의 무력진압이 "빨갱이들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전두환의 주장이나, 4대강 사업이 환경과 경제 모두에서 국가에 큰 도움이 될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는 MB의 주장이나, 이 군인 아저씨는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우기던 저 청년의 주장이나, 어쩌면 모두 동일한 자기기만, 남들에게는 그 속이 뻔히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안 보이는 그런 자기기만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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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지하로 계속 뻗어 내려가는 건물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층에는 모든 인간이 타고 나는 온갖 욕구/욕망들이 있고, 어떤 층에는 내가 속한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주입 받은 가치관과 규범들이 있고, 다른 층에는 내가 살아 오면서 겪은 경험들로 인한 기억 및 교훈들이 있고, 또 다른 층에는 나라는 개인이 애초부터 타고 난 고유성같은 것들이 있고. 어떤 층에선 매우 이타적인데, 동시에 다른 층에선 매우 이기적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의식은 지하 10층에서 그치는 데에 비해, 어떤 사람의 의식은 지하 500층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식에 대해 지하 3층까지밖에 파악을 못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지하 100층까지 샅샅이 꿰뚫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언행은, 지층에 내거는 슬로건에 불과할 터.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내거는 온갖 공약들 같은. 그런 공약들이 그 정치인의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추후 그 정치인의 행동!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 하지만 어떤 사람에 대한 나의 해석/평가/추측 역시 복잡하고 왜곡된 내 자신의 의식을 거쳐서 나오는 주관인지라 정확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상대가 전두환이든 이명박이든 "지슬"의 저 청년이든, 그가 하는 얘기가 내게는 아무리 '말도 안 되게' 들린다 해도 "그렇군요, 최소한 당신 의식의 표면/지층에선 그렇게 생각했군요"라고 선선히 인정해 주는 것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고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겸허함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의 주장들과 무관하게 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별도로 행할 수밖에 없지만. (의도와 행동/결과를 분리할 수 있어야 成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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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중요한 건, 누군가가 나의 '진심'을 '오해'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사고/언행 방식이 서로 너무 달라서일 수도 있고(1), 내가 생각하는 나의 '진심'이 전두환이나 이명박이나 "지슬"의 저 청년의 주장같은 자기기만에 불과하기 때문(2)일 수도 있고. '틀림' 아닌 단순 '다름'이라 해도 그 '다름'을 감당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기에 (1)이라면 마음 비울 수 밖에 없을 테고 (나의 wish 때문에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 만약 (2)의 경우라면 자기성찰에 노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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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 온갖 해석과 심지어 사기가 난무하지만, 내 경우엔 칼 융의 이 얘기가 가장 와닿는다. "One does not become enlightened by imagining figures of light, but by making the darkness conscious." 겉으로 얼마나 '자비로운'지, 어떤 선행을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이 그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에 보석처럼 박혀 반짝거리는지 등을 모두 떠나, 자기 내면의 어둡고 안 예쁜 부분들을 스스로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얼마나 정직하게 인정하는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의 시작. 그러니, 인간이기에 갖는 온갖 탐진치가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 혹은 '道人'으로 칭하는 이들을 보면 그저 웃플 뿐이고, 거기에 혹해 넘어가는 '긍정적인' 사람들 역시 그 판단력을 신뢰는 도저히 못 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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