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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4

함석헌 평전을 읽고

The Ch5 Studio


함석헌 평전을 읽고 작성일 2005-11-04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이 4권 있다.

첫번째 책은 솔로몬의 저서로 알려진 서양 성경책에 수록된 "전도서".
나의 10대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영향 탓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그 첫 구절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음악을 가까이 접하기 시작하면서 접하기 시작한
서양의 미학과 관련된 책들... 그 중에서 거의 필이 딱 꽂힌 책이
바로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유명한 저작은 아니지만
당시에 이 책이 주었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한마디로 예술한답시고 개폼 똥폼 잡는 게 오히려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고,
나아가 참된 예술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 안에 있다는 얘기.
논리 정연한 듯 보이기는 하되 정작 내용이 공허한 여타 미학책들과는
그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고, 논리를 넘어선 어떤 아우라(aura)를 느끼게 된다.

그 다음으로는 "도덕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도덕경은 서양 철학책처럼 말 자체가 어려운 책은 전혀 아니다.
도덕경은 간결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와 덕을 말하는 데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톨스토이란 분이 원래 도덕경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니
내가 도덕경을 전혀 몰랐던 상태에서도 톨스토이의 글을 읽고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 또한 이러 저러한 사정을 알게 되니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 정신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껴
몸 수련으로서 무술을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껸에 이어 태극권을 하게 된 이유 또한 도덕경의 영향을 배재할 수 없다.

도덕경을 몸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말할 수준은 결코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는 곳에
'길'이 있으리라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책은 "금강경"이다.
이 책의 내용은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어떤 어렴풋한 이미지로 상상만 해 볼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강을 건넜거든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사용했던 뗏목을 버려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늘 염두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연 내가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그 무언가를 뗏목을 버리듯 과감하고
미련없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지 나의 미래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김성수 지음의 "함석헌 평전"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냥 기독교 교회의 목사님 같은 분인줄로만 알았는데
기독교로부터의 지대한 영향, 톨스토이의 사상, 유교 경전 및 도덕경 그리고 불경...
우연하게도 내가 영향을 받는 사상의 궤적과 거의 일치된 삶을 살다 가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기가 통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최소한 잘못된 길은 아닌가 보다는
안도감도 생긴다.

그의 평전으로 인해 기독교 중 퀘이커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왜 한국의 교회가 그토록 지나친 친미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여러가지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얽혀 있으므로 짧은 글로는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어쨌든 일제 시대의 기독교는 전통적 유교 관습을 탈피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던 것 같고, 게다가 미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당히 드문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를 거쳐 한국의 여러 독재 정치를 거치는 동안
그가 보여준 행보 또한 깊이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런 인물을 여지껏 내가 이름만 간신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함석헌이야말로 내가 생각해 왔던 바로 그런 기독교인인 것 같다.
기복신앙적 요소와 재정적 부패, 유일신 사상을 기본으로 한 원리주의에 의해
독단으로 치달아 버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잣대로는 그를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현 평전에 두어번 반복해서 나온 듯 하여 기억에 남은 구절로
"평화는 할 수 없다고 안하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어도 해야 하고 할 수 없어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개인의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 될 수 있을텐데
나는 이 말을 자신이 가려는 길의 최종 목표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길을 가고 있는 그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늘 깨어 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이 정신을 자주 잃고 본질이 아닌 곳에 정신을 쉽게 빼앗기곤 하는
나에게 당장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1/05/29

알라딘: 씨알 생명 평화

알라딘: 씨알 생명 평화
씨알 생명 평화 -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이규성,이기상,유헌식 (지은이),씨알사상연구회 (엮은이)한길사2007-03-31
-------------------
- 품절 확인일 : 2011-02-24

656쪽
책소개

씨알사상연구회 월례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된 글 가운데 19편의 논문을 가려 실은 책. 민주화, 평화를 위한 운동가, 종교인, 문필가등으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의 철학자적 사상가적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천착하고, 그것을 정갈한 순우리말 표현, 사회적 운동으로 실천한 함석헌의 삶과 그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지은이들은 다양한 글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왜 함석헌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가 -박재순

제1부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함이다
심정과 자유의 철학 - 이규성
생명의 진리 - 이기상
씨알의 생명사상 - 박재순
문명비판과 초월적 자연주의 - 유헌식
자연과 자유 - 양명수
씨알사상과 진정성의 윤리 - 박소정
비폭력 평화정신 - 김영호
개혁적 반전 평화주의 사상 - 정지석

제2부 씨알, 오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나타난 '민족' 개념의 신학적 성찰 - 이정배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신의 섭리 - 김기승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역사' -김상봉
함석헌과 우치무라 간조의 '두 개의 J' - 양현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어떻게 쓰였을까 - 이치석

제3부 나는 빈들의 소리요 바람이라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 김경재
씨알사상에 대한 종교적 접근 - 김명수
함석헌의 성서적, 한국적 영성과 문화신학 - 최인식
함석헌과 샤르댕의 사상 - 이병창
무교회 정신이 이끈 삶 - 백소영
함석헌과 간디 - 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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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
책속에서
함석헌의 사상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나'와 '전체'가 소통하고, '생각하는 생각'과 '생각나는 생각'이 소통하고, '본능'과 '바탈'이 소통하고, '인위'와 '무위'가 소통하고, '스스로 함'과 '저절로 함'이 소통한다. 그래서 자연과 자유는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종합된다.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함석헌이 말하는 자연에 저항적 자유의 성격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자연과 자유' p207 중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인의 민족적 반성과 회개의 책이지만, 함석헌이라는 지성 개인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 부분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 일반에 대한 서술에서, 그 자신을 지식인에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 자신의 참회와 회개의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해방을 기존의 지식인, 엘리트의 것, 즉 자기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니라 민중의 것, 씨알의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신의 섭리' p346 중에서  접기
추천글
'고난의 역사'에 핀 '대자유'의 꽃 - 고명섭 (<한겨레> 문화부장《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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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규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9년부터 201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2016),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2012),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2011), 『생성의 철학: 왕선산』(2002), 『내재의 철학: 황종희』(1994)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 더보기
최근작 : <중국현대철학사론>,<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마음과 철학 : 유학편> … 총 1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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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상 (지은이)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뒤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로 1984~2012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초대회장이었으며, 현재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이다. 1992년 열암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철학노트』, 『콘텐츠와 문화철학』, 『... 더보기
최근작 : <소통과 공감의 문화콘텐츠학>,<동서양 철학 콘서트: 서양철학 편 (대활자본)>,<동서양 철학 콘서트: 서양철학 편> … 총 31종 (모두보기)
유헌식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 철학부에서 「헤겔의 역사적 사유에 나타난 새로움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헤겔철학 논문집 『역사이성과 자기혁신』, 입문자를 위한 철학 안내서 『철학 한 스푼』, 소설 작품을 철학의 시선으로 해석한 『행복한 뫼르소』를 출간했으며, 공동 작업으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시리즈 세 권(『호수에 비친 달은 외로울까: 고독』, 『흔들려야 날갯짓한다: 성장』, 『죽음아 날 살려라: 죽음』)을 펴냈다. 크로너의 『헤겔』과 앙게른의 『역사철학』을 번역했으며, 독일관념론, 문명론, 철학의 일상화, 문예비평이 관심 ... 더보기
최근작 : <나를 찾아가는 철학여행>,<행복한 뫼르소>,<동서의 문화와 창조> … 총 17종 (모두보기)
SNS : yoorius@dankook.ac.kr
씨알사상연구회 (엮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2001년 함석헌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2002년 5월에 '씨알사상을 연구,보급하여 자유로우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인류사회 형성과 생명 문화 창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박재순 박사가 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문영, 김경재, 문대골, 김영호, 곽분이, 김조년, 김성수, 최정윤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의 지원과 협력으로 매달 연구 발표회를 가졌고 매년 함석헌 탄신을 기리는 학술대화마당을 열어왔다.
최근작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씨알 생명 평화>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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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님의 사상 새창으로 보기
 
한동안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분이 함석헌 선생님입니다. 1980년대까지 특히 197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의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십니다. 이젠 세상도 많이 달라지고, 그분의 글에서 느껴지는 고어체도 약간 적응이 안되어, 잊혀져가는 옛 선각자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한번씩은 그분의 씨알의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요. 얼마전 서점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새로 출간된 것을 보고 무척 반가왔습니다. 그러다 함석헌 선생님에 관해 연구한 글들 중 중요한 글들을 모은 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분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두에 박재순님이 쓰신 왜 함석헌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근대한국이 가진 사상가로 부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이 말씀하신 생명사상은 동양의 정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담고 있는 커다란 그릇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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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라 2007-04-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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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6

학술논문, 석사논문, 에세이,잡지기고문 2002-2003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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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석사논문, 에세이,잡지기고문 2002-2003
작성자 바보새 15-09-13 02:13 조회4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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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논 문 제 목 연 도 수록지
2002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관 2002.12 씨알사상연구회
김경재 한국신학의 태동과 흐름 2002.2 기독교사상(대한기독교서회)
김성수 함석헌과 노장사상 2002. 봄·여름 한국문화연구 제2호(이화여자대학교)
김영일 함석헌선생과 배움터 2002.3,4 씨알의 소리
김영호 함석헌의 같이살기 운동 2002.1,2 씨알의 소리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2002.6.18-연재 대학신문 (2002.6.18부터 연재)
김윤석 함석헌의 기독교사상에 관한 고찰 2002 전주대 선교신학 대학원 석사논문
김진 함석헌 사상의 신학적 유산 1,2 2002.9-10 기독교사상(대한기독교서회)
김치홍 함석헌의 민족정신과 우찌무라 간조 2002.11월 씨알사상연구회
東西저널 사상가 함석헌 : "민중이 깨어나야 나라가 살고 하나님 사랑도 얻게 될 것이다" 2002.4 東西저널 (월간동서저널)
박세훈 함석헌의 기독교사상 연구 :한국토착교회사관을 중심으로 2002 감리교신학대 대학원 석사논문
박재순 유영모 사상의 사상사적 위치와 현대적 의미 2002.7월 씨알사상연구회
박재순 함석헌의 씨알정신과 평화운동 2002.8월 씨알사상연구회
방석종 예언자 함석헌 선생 (원문) 2002.8.28. 기독교신문
서굉일 함석은 연구 2002.10월 씨알사상연구회
이거룡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 인도사상까지 2002.4 민족의 큰사상가 함석헌선생 (한길사)
이황직 근대 한국의 윤리적 개인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한 연구;정인보,함석헌,백석,윤동주를 중심으로 2002 연세대 대학원 박사논문(국회도서관)
진영일 함석헌의 한민족의 세계사적 사명 2002.12 公州敎大論叢 39-2호(공주교육대학교)
최영묵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연구 2002 목원대 신학대학원 석사논문(국회도서관)
2003
김경재 함석헌의'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2003.1.11 교수신문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이해 2003.5,6 씨알의 소리
김경재 함석헌의 나선형 역사 이해 2003.여름 (하나님·사람·자연이 숨쉬는)샘 20호(한생명)
김삼웅 함석헌의 저항정신 2003.2월 씨알사상연구회
김삼웅 거짓예언자 함석헌' 위서 2003.8 책과 인생 116호
김용준 내가 만난 함석헌 선생님 2003.봄 사이2호(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김조년 함석헌과 한국의 사회운동 2003.9월 씨알사상연구회
김창규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 (2) 2003.9,10 희망세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영신 함석헌 씨알사상의 생태유아교육적 함의 2003 부산대학교 대학원 유아교육학과 석사논문
박재순 함석헌의 민주정신 2003.3,4 씨알의 소리
석경징 함석헌의 펜들힐 명상과 무정부주의 2003.6월 씨알사상연구회
양현혜 함석헌과 우찌무라의 '두 개의 J' 2003.7,8 씨알의 소리
유헌식 씨알의 민주성에 대한 몇가지 단상 2003.3,4 씨알의 소리
이기상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2003.7월 씨알사상연구회
이문영 씨알이 연 새시대 2003.4.25 4.3제주 민중항쟁 컨퍼런스(미 하버드대)
이문영 씨알이 연 새시대 (영문) 2003.4.26 4.4제주 민중항쟁 컨퍼런스(미 하버드대)
이윤구 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다면 2003.10월 씨알사상연구회
이치석 20세기 전쟁폭력과 씨알교육 2003.4월 씨알사상연구회
장동민 21세기를 위한 평화주의자 함석헌("Ham Sokhon, a Pacifist for the Twenty-First Century") 2003.봄 백석저널-백석기독학회
장성환 咸錫憲 翁을 생각한다 2003.1.21
장성환 다석과 씨알 2003.1,2 씨알의 소리
장회익 온생명과 함석헌 생명사상 2003.11,12 씨알의 소리
주낙황 함석헌의 종교사상에 관한 연구 2003 동아대 대학원 석사논문(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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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함석헌과 에머슨/서보명 바보새 07-08 356 0
122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잠재태로서의 씨알종교공동체/이호재 바보새 10-31 486 0
121 함석헌의 종교사상에서의 '새로움'과 한국적 종교영성의 가능성/dlghwo 바보새 10-31 386 0
1 2 3 4 5 6 7 맨끝

함석헌과 노장사상-김성수 > 연구논문2002

함석헌과 노장사상-김성수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By Sungsoo Kim
Ham Sok Hon and the Philosophical Taoism of Lao-tzu and Chaung-tzu
https://blog.daum.net/wadans/7786721
김성수 함석헌과 노장사상 2002. 한국문화연구 제2호(이화여자대학교)

2021/05/13

함석헌의 시와 사상 - 오마이뉴스

함석헌의 시와 사상 - 오마이뉴스

문화

함석헌의 시와 사상
09.06.20 11:26l최종 업데이트 09.06.20 11:26l
김성수(wadans)



함석헌의 시와 사상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함석헌은 누구인가?



20세기 한국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격동의 삶을 살다 간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 중에 함석헌(1901-1989)이라는 한 인물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89년의 생애 중 약10년 정도의 교사생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삶을 '탈북자', '비정규직노동자', 심지어 '백수'에 가까운 생애를 살고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을 사회 범주적으로 이렇게 규정짓고 나면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자기수준만큼만 타인, 사물 혹은 예술을 이해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함석헌에 대해 이 사회의 원로 혹은 명사 중엔 그를 좀 더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예는 종교사상가, 평화주의자, 민주화운동가, 인권운동가 등이다. 함석헌이 전 생애를 통해 국가폭력과 독재 권력에 저항할 때에도 그는 비폭력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함석헌은 '한국의 양심' 이나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함석헌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평화주의자로서 그는 순진 하리 만치 비폭력무저항운동에 앞장선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2세를 존경하였다. 1980년 대 20대 나이였던 내 방벽은 온통 함석헌의 사진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그런 내가 쌍문동 함석헌의 집을 방문하고 놀랐던 것은 80이 넘은 그의 방에는 언제나 간디와 킹목사의 사진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폭력무저항과 평화주의를 그의 삶에 한 원칙으로 너무도 중요시해서인지 군사정권시절의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로부터 '독설가'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1979년과 1984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서구 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일제강점 하 그리고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가폭력과 독재정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기에 함석헌은 수감, 가택연금 등의 생활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겪어야만 했다. 사회복지가 전무한 시절에 그래서 함석헌과 그의 가족들이 감내하고 걸었던 길은 그래서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도 함석헌은 시를 쓰고 출판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소위 시인으로 '데뷔'를 한 것은 아주 늦은 편인데 그것은 함석헌의 나이 마흔 다섯인 1946년이다.



마흔 다섯에 데뷔한 시인



그럼 어쩌다가 그렇게 늦깎이 나이에 함석헌은 시를 쓰게 된 것일까? 그 사연은 아주 슬프고 참혹하다. 1945년 11월 23일 일어난 신의주학생의거 당시 함석헌은 인민위원회 문교부장이었다. 비록 그자신이 학생의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민주진영의 기독교 측 이사였기에 그는 소련군정 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시각엔 기독교인이란 곧 미국선교사들과 가까운, 친미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함석헌은 신의주학생의거에 책임자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체포즉시 현장에서 옷이 찢어지고 정신을 잃도록 심한 몰매를 맞았다. 소련군의 총칼 앞에 죽음의 문 앞까지 간 함석헌은 곧 어두운 감방의 철장 안에 갇히게 된다. 동시에 소련군대는 함석헌의 집과 재산도 압수했다. 그러므로 서 함석헌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일곱 명의 자녀들은 곧 절대빈곤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할 상황에 처해졌던 것이다.



신의주학생의거를 배후조종하거나 교사(敎唆)하였다는 죄목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민족진영의 간부 및 종교인들이 체포·구금되어 시베리아탄광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은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일제강점기 36년을 참고 견딘 후 조국이 해방되었는데 해방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독립운동가, 애국자가 또 감옥에 들어가니 어찌 그의 슬픔과 기막힘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과 당장 눈앞의 생계가 막막한 노모와 처자들을 버려두고 비좁고 어두운 감옥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앞일을 생각하자니 그는 한숨과 분노,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책도 볼 수 없고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열악한 옥중생활에 그래서 함석헌은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그래서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 이 그가 늦은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하게 된 경유이다.



이제 대책 없는 가장으로서의 외부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그는 어떻게든 절망감을 극복하고자 분투했을 것이다. "조국은 해방되었는데 난 왜 아직도 감옥에 있나?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그는 수십 수백 번 자문했을 것이다. 이런 혼미한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는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교도관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직설적인 글보다는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시로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함석헌은 불가피하게 '시인'이 된 셈이다. 이런 혼돈과 절망감의 와중에서 시를 쓰기 시작해서 그런지 함석헌은 자신의 시를 놓고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체험을 겪으면서 '등단'한 시인으로서의 그의 '감회'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 못 낳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다....

그 내가 감히 씨를 쓰다니, 몰려서 된 일이지 자신 있어 한 것이 아니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시인으로서 그의 감회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비참하다시피 한 한국역사 속에서 그는 시인의 되고픈 꿈과 여유조차 가져 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어느 한 가지 일을 제대로 집중해서 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한 소용돌이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자신이 '시인' 인가 아닌가는 그래서 전혀 중요했던 것 같지 않다. 단지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보다 근본적인 존재인 절대자('님')와의 교감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시인으로서 '취임사'가 이렇게 '자포자기'식 한탄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 볼 몇몇 함석헌의 시들은 절대자 앞에선 한 연약한 인간의 차분한 느낌과, 보편적 진리 혹은 삶에 담긴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강렬하고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함석헌의 시는 일독할 가치가 있다. 감옥에서 이렇게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쓴 그의 시들은 1953년 󰡔수평선 너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당시 함석헌이 쓴 시를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 사상의 일면이나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소개한 함석헌의 시



1990년 나는 영국 퀘이커연구소인 우드브룩 칼리지 (Woodbrooke College)에서 3개월간 공부하며 머무른 적 이 있다. 그 당시 우드부룩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사람들 중에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본토, 중미,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온 50여명의 퀘이커들이 있었다. 한 번은 영문학시간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를 읽고 급우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세계 각국에서 온 퀘이커들에게 함석헌의「산」이라는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낭송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산 The Mountain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을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I blamed you When I asked you, you kept silent

Thus I blamed you But I realised your answer is `silence'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I sneered at you When I touched you, you did not move

Thus I sneered at you But I realised your movement is `stillness'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I doubted you When I sat on your lap, you did not embrace me

Thus I doubted you But I realised your embrace is `let me be'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Most Great! Most High! Most Strong! Most Gentle!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Let me be like you! Let me sit face to face with you! Let me find peace in you!



1980년대 함석헌이 생존할 당시 나는 그의 쌍문동집을 가끔 방문 한 적이 있다. 그때 거실 족자에 이「산」이라는 시가 걸려 있어서 자주 보던 터라 그런지 이 시구가 눈앞에 먼저 어른거린 것 같다. 영국 퀘이커연구소의 외국학생들에게 함석헌이 왜 옥중에서 이시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해방직후 정치․사회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했던 한반도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 한 영국인이 불현듯 이렇게 이야기 했다. "불안정한 소용돌이처럼 급변하는 당시 상황 속에서 아마 함석헌은 불변하고 흔들림이 없는 절대자를 거대하게 우뚝 솟은 산의 모습으로 표현 한 것 같군요!"



그 영국인의 담담한 '논평'에 뒤통수를 심하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 그동안 별생각 없이 보았던 함석헌의「산」이라는 시가 그런 의미가 있을 수가 있구나!" 정말 함석헌이 그런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확고부동하고 거대한 산의 모습을 통해 함석헌은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존재로 인식한 것 같다.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좁고 어두운 감옥에 갇힌 채 낙담하고 있던 함석헌에게 절대자 하느님은 소련군과 인민군을 시원하게 물리치는 복수와 분노와 모습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오히려 묵묵하고 초연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산과 그 위에 펼쳐진 무한한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함석헌은 복잡다단한 인간사의 문제로부터 초연해 있는 절대자를 느꼈을 것이다.



"당신은 왜 불의한 인민군, 소련군을 물리쳐 주시지 않으십니까?" 하고 그는 하느님을 나무라고, 비웃고, 원망하고 심지어 절대자의 존재여부를 한 때는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순간 함석헌은 "그분께선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절대자의 본성을 인간사에 대해 중립적이고 편파, 편견이 없는 존재로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의 시와 사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다음으로 살펴볼 시는 너무도 유명한 그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 이다. 이 시는 더욱이 이번 용산참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도 가장 애송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연 이대통령의 '그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만 일까? 여하간 대통령의 깊은 심중에 대한 궁금증은 일단 뒤로하고 이 시를 살펴보자. 어쩌면 이시는 함석헌의 대표시인 것 같다. 서울 대학로 혜화역 지하철역 근처에 함석헌의 시비가 있는데 그 시비에 바로 이 시가 새겨져 있다. 이시는 함석헌이 1947년 7월 20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47년 3월에 월남했으니 월남하고 막 남한사회에 정착을 시작하면서 북한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회고 하면서 쓰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이 시에 대한 감동이 비 한국인, 특히 서구인들에게도 그대 로 전달되는지를 한번 시험해 보기위해 이 시를 아래와 같이 영어로 번역해 보았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Do you have this person in your life?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Before you leave for a long journey Without any worry

Can you ask this person To look after your family?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ven when you are cast out from the whole world And are in deepest sorrow

Do you have someone Who will welcome you warmly and freely?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In the dire moment when your vessel has sunk Is there someone

Who will give you their life belt and say "You must live before me"?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At the execution ground Is there someone

Who will exclaim for you "Let him live, even if you kill the rest of us!"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In the last moment of your life When you think of this person

Can you leave this world smiling broadly And feeling at peace?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ven if the entire world is against you When you think of this person

Can you stand alone for what you believe? Do you have this person in your life?



어떤가? 정말 감동스럽지 아니한가? 나의 영국인 아내도 영역된 이 시를 읽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참 아름답고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시"라며 그 감동을 토로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의 이시는 그가 1947년 쓴 시지만, 그로부터 62년이 지난 2009년 오늘, 우리와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한 영국여성의 가슴도 뭉클하게 만드는, 시공을 넘어선 보편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시라는 확신이 든다.



이 시의 다음구절을 다시 보자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은 1947년 2월 26일 노모와 처자를 소련군 치하의 북한에 남겨두고 홀로 남한을 향해 출발했다. 그 겨울이 다 끝나지도 않은 평안도의 추운새벽에 문간에 기대서 "내 생각 말고 어서 가거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처자식을 뒤에 두고 떠나서 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인 줄도 모르고 월남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함석헌이 그 가족 일부와 남한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은 그 다음해인 1948년이니 이 시를 쓰고 있을 당시의 그는 북한에 남아있는 처자와 노모의 생사를 알 수 없고, 그 생생한 모습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자신이 떠나면서 그나마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그) 사람"을 가졌기에 또, '그 사람'의 후원과 도움으로 다음에 무사히 남한에서 가족들의 일부와 재회할 수 있었기에 함석헌은 북한에 남한 있는 자기 가족을 친 가족처럼 돌보아준 지금은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함석헌은 우리에게도 이야기 한다. 당신도 '그 사람'을 갖고 또 남을 위해 '그 사람'이 되라고.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해방 전까지 함석헌은 북한에서 4번이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렇게 감옥 문을 들락날락 하는 사이 "집과 나라 형편이 다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에게 어려웠던 일은 감옥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석방되어서였다. 생계가 막막한 상태에서 그는 그저 농사꾼으로 자처하고 동네 농사꾼들과 가까운 벗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동네 농사꾼들을 그를 벗으로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지식의 죄가 그렇게 큰 줄은 그때까지 몰랐다." 고 탄식하기까지 한다.



늘 마을손님이 끊이지 않았던 한의사였던 돌아가신 부친의 사랑방을 이웃에게 개방했지만 요주의 인물에다가 '전과자'인 그의 집을 "누구하나 오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는 석방이 되었지만 찾아오는 벗 하나 없는 동네에서 마음이 한없이 외로웠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이 받아지지 않은 사람의 외로움"을 그는 절절히 느꼈다. 그래서 그런 함석헌에게는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이 꼭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이미 돌아가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던 남강선생이 될 수도 있었고 그를 한 없이 아껴주던 최초의 스승 숙부 함일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이 받아지지 않은 사람의 외로움"을 지닌 그였기에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이 그토록 그리웠을 것이다.



스승은 제자에 의해 역사의 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없이는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이 서양사에 남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사도바울이 없이는 예수의 훌륭한 인격이 기독교문명에 자리매김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 남강 이승훈도 그래서 일제강점하의 어두운 시절이지만 제자 함석헌을 두고 가서 그래도 편안히 눈을 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래 시 구절을 보면 든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남강이 함석헌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남강을 통해 함석헌은 젊은 시절부터 "공(公)을 위하는 마음"과 "조선독립의 중요성"을 배웠다. 1930년 5월 9일 남강이 임종한 후 함석헌은 그를 회상하며 자신의 심정을 "하나 남은 촛불이 꺼진 뒤의 적막함"에 비유하며 『성서조선』에 이렇게 썼다. "이때껏 저만큼 광휘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했다."



남강의 죽음은 함석헌에게 마치 "외로운 촛불의 꺼져 버림"과 같았다. 젊은 시절 남강에게서 받은 절대적 영향 때문인지 그의 노후인 1984년 11월 함석헌은 남강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말년에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원효로 집을 남강문화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아마도 남강은 1930년 5월 9일 아침 음울한 조국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젊은 제자 함석헌을 생각하며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래서 그런 무조건적인 애정과 신뢰를 보여준 스승 남강을 생각하며 함석헌은 위 시구를 쓰지 않았을까?



아래 시구는 함석헌이 북한 소련군정 하에서 고당 조만식의 삶을 생각하고 썼다는 확신이 든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북한이 일제의 손아귀 에서 해방되었을 때, 북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과 인물들은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이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 지도자는 고당 조만식이었다. 그런 연유로 해방 직후 고당은 북한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는데, 함석헌은 "해방 후 이북엔 정치적 인물은 조만식 단 하나였다."고 말할 정도다. 당시 북한에서 고당은 이렇게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돌변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소련의 후원과 지지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기독교 세력을 제치고 무력으로 북한사회의 전반적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 그럼에도 소련군정은 "원활한 국정의 운영을 위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협조가 절실하였다. 고당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소련 군정은 고당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직을 제안하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당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신탁통치 문제로 당시 북쪽에서 김일성 다음 가는 세력가이자 고당의 제자 최용건이 19번이나 그를 설득하러 왔다. 고당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소련군정은 때로는 그를 공격하고 달래고 설명하고 공갈을 해도 고당은 가만 앉아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대답은 언제나 가만히 '아니!'였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은 줄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당시 하늘을 찌르는 막강한 권력인 소련군정의 총칼 앞에 '아니'라고 하면 칼이 목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그런데도 고당은 그저 조용히 '아니'라고 했다. 소련군정에 순순히 협조하면 그의 나머지 생애는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권력이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길"을 고당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아니'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함석헌은 그래서 "이보다 더 무서운 영웅이 어디 있나......그 '아니' 한 마디를 생각할 때 그것은 벼락보다 무서운 한 마디다.....그 조그만 몸속에 그렇게 큰 것이 있었던가!" 라며 고당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런 고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함석헌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라고 이시를 온 몸으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소련군정에 대해 비협조적인 인사들은 혹독한 '죄 값'을 치루 게 된다. 결국 고당뿐 아니라, 함석헌자신을 포함한, 북한의 기독교지도자들은 1940년 말에 이르러 소련의 지지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철저히 숙청, 제거되었던 것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伯牙)라는 이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켤 때 그 연주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고 이해해주는 친구로 종자기(鐘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율이고 있던 종자기의 입에서는 탄성이 연발했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같다!"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황하(黃河)같다!"



백아와 종자기는 바늘과 실처럼 그토록 마음이 잘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며 창작자였고 비평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 나머지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함석헌과 김교신의 사이도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 같았다. 둘은 1901년 같은 해에 태어났고 한 결 같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과 씨알(민초)들을 위해서 생애를 바친 신앙의 동지였지만 정통 교회로부터는 마치 이단처럼 냉랭한 취급을 받았다.



둘은 또한 동경(東京)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으로 1920년대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귀국 후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둘은 일제강점하의 실의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애국심과 독립정신 그리고 기독교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동기성서연구회에서 있던 일이다.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는데 김교신은 그 강의를 들으면서 "빛이 이 반도를 비춘 지 반세기에 비로소 반도의 진상을 드러냈도다!"하며, 마치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탄성을 뿜어대듯 감탄해 마지않았다.



1940년 계우회사건으로 함석헌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된 후 석 달 만인 1940년 11월 그의 부친 함형택은 운명했다. 자기가 옥중에 있어서 아버님의 임종을 지킬 수 없을 때, 상주노릇을 대신 해준 이가 친구 김교신이었다. 1942년 『성서조선』 3월호의 김교신의 글 「조와(弔蛙)」가 개구리의 소생을 통해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관계자가 전원 검속되고, 관련 간행물이 일체 압수․소각 처분을 받았을 때 함석헌과 김교신을 비롯한 관련자 18명 모두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김교신의 장녀 결혼은 함석헌이, 함석헌의 장남 결혼은 김교신이 서로 주례를 맡았다. 둘은 문자 그대로 '동고동락'을 한 사이다.



둘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웠는데도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큰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연유는 그가 김교신의 '죽음'에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 일 것이다. '성서조선' 사건 후 1년간의 옥살이 끝에 1943년 4월 함석헌은 출옥되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아예 똥통을 지면서 농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 1944년 7월, 석방된 지 1년이 조금 넘어서 친구 김교신이 함석헌을 찾아왔다. 김교신은 그에게 흥남질소비료공장에 함께 취직해서 노동자들을 계몽시키고 그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일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때 함석헌은 자신의 약함과 어떤 한계를 느꼈던 것 같았다. 감옥생활 때문에 그는 부친의 임종을 못 보았고, 늙은 모친과 처 그리고 2남 5녀의 자식들은 여전히 거친 생활고와 빛 더미에 허덕이고 있었다. 함석헌은 무능한 가장으로서, 또 노모의 장남이자 쓰러져가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에 대해 큰 책임감을 새삼스레 느꼈던 것 같다. 아니면 끝이 안 보이는 계속되는 생활고에 용기를 잃었기 때문일까?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흥남에 갈 맘이 없다." 라고 대답하며 친구의 "우정 어린 권유"를 거절했다.



김교신은 그래서 친구 함석헌을 뒤로하고 홀로 흥남비료공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교신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복지시설개선을 위해서 힘쓰는 한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의 교육에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945년 4월, 해방을 겨우 4개월 앞두고, 겹친 과로와 장티푸스에 걸려서 김교신은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은 이제 가장 친한 친구마저 잃은 것이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보낸 친구였던 탓인지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이 들려 왔을 때, 함석헌이 가장 "먼저 염두에 떠오른 것이 '김교신이 있었으면'하는 생각"이었다. 고인 김교신에 대한 함석헌의 인물평을 보자. "김교신의 김교신 된 소이는 허위, 불의라고 생각하는 데 대하여는 용서를 않는 데 있다. 그는 인생을 참 살자 했고 나라를 참 사랑하자 했으며,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 가장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요, 신앙에 사는 인생이 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말이요, 글이요 그렇게 살자 노력한 것이 그의 생애다."



모든 이상적인 친구사이에서 그렇듯 김교신은 함석헌에게 신앙동지이자 스승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해방의 감격을 차마 못보고 죽은 김교신의 집을 터벅터벅 찾아가며 함석헌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를 썼다. 아래 살펴 볼 시는 위의 함석헌의 시에 감동을 받은 아내가 영역했다.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 A Visit to the Home of the Late Kim Kyo-Shin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依舊)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書窓)을 비쳐 님의 얼굴 보는 듯

The stream in front of the house flows by unchanged

And a gentle breeze still passes through the pine trees

The spring sunshine falls on the library windows and I fancy that I can see his face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으랴 북한산만 높았네.

He loved walking beside this stream, feeling the wind on his cheeks

He put his soul into trying to make this muddy world clean

Bukhan Mountain still towers above, but where can I again find such a heart?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山寺)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The stream flows on, the wind in the pine trees continues to blow

It is evening and in the mountains a temple bell tolls

I miss my friend so much. Where shall I go from here?



김교신에 대한 함석헌의 간절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사람은 가고 역사는 흘러도 위대한 인간의 정신은 남는다. 비록 주류 한국교회로부터는 마치 이단자 취급을 받았지만 김교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남다른 애국심은 순수함과 양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依舊)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書窓)을 비쳐 님의 얼굴 보는 듯"



함석헌에게 김교신은 변하지 않는 상록수 같은 존재이자 더러운 세상을 깨끗이 씻는 맑은 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함석헌의 이 시 구절은 신약성경의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구절을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김교신은 1937년 봄 혼자 힘으로 서재를 지었다. 서재를 지으면서 김교신은 "신기한 것과 감사한 것과 찬송하고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고 고백했던 만큼, 봄날에 김교신이 직접 지은 서재의 창문으로 비추는 따스한 햇볕은 함석헌에게 김교신의 얼굴을 강하게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 시내 마시면소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으랴 북한산만 높았네."



함석헌과 김교신이 살았던 시절은 조국이 앞날이 막막한 시절이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교신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언제 올지 모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잊고 전심전력을 다 했다. 그 결과로 그는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운명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를 잃은 비애감, 그리고 그런 맑디맑은 김교신의 마음을 그리워하며 북한산을 쳐다보는 함석헌은 그날따라 유난히 북한산이 무한히도 높아보였을 것이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보다는 몇 번을 넘어져도 비애를 딛고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는 함석헌의 오뚝이 같은 모습이 연약한 내게도 끊임없는 위로가 된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山寺)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신앙동지 김교신이 죽었어도 시냇물은 어제와 다름없이 흐르고 솔바람도 지난날과 다름없이 불어온다. 이런 무심한 자연 때문인지 한 순간 함석헌은 '방황'과 '방랑'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 펼쳐진 함석헌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그런 잠깐의 '일탈'과 '방황'의 순간들을 극복하고 어떻게 자신의 고난을 승화시켜 나갔는지 안다.



민족, 가족 그리고 나



어떤 이들은 함석헌이 가족사에 무관심했다고 비난한다. 불의를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올바른 꿈을 실현하며 돈도 많이 벌고 그래서 가족의 삶도 정신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그러나 현실은 그러기가 너무 어렵다. 불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에 올바름만을 추구하는 의인들이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살기는 아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조선의 독립, 조국의 민주화, 언론의 자유 등을 실현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동안 그는 그와 가족들에게 좀 더 다급하게 필요한 요구들, 이를 테면, 재테크,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등을 통한 가계소득 올리기 등을 게을리 했다. 그리고 그 '게으름' 탓으로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대책 없는 가장"이라는 질타와 비난을 많이 받아왔다. 이러한 수없는 함석헌에 대한 질타와 비난을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럼 의인과 그의 가족이 불의가 하늘을 찌르는 난세에도 호의호식해야 된다는 것인가?



함석헌을 포함 한국 현대사에서 올바름을 추구한 인물들의 공통점을 보면 김구, 고당, 남강, 김교신, 장준하, 계훈제 같은 분들이 나라와 씨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만큼, 그분들의 가족들은 관심대상에서 철저히 외면되어 너무나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나라의 긴박한 현실이 그분들이 두 가지 토끼. 즉 자아실현과 가족의 물질적 평안함, 을 함께 실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난세를 살았던 함석헌의 경우도 그의 가족사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 함석창(咸錫昌)은 일본 구주대학(九州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에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으나, 형과는 달리 오하라(大原)라고 창씨를 하고 일본에 협력하며 후에 일본 점령하의 만주안동성의 부성장까지 역임하였다.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자녀의 앞날을 위해, 일제강점기 80%의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협조하였다. 반면에 함석헌이 선택한 길은 누구에게나 강요하기엔 너무 고되고, 전적인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기꺼이 그 길을 택했고, 그래서 그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일제로부터 톡톡한 '죄 값'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아래 시는 아마 그런 그의 마음의 갈등, 고민을 표현 한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역은 아내와 공동으로 했다.



나라 My Country and Me



나라일 걱정인데 나란 생각 겹쳐놓으니

I feel crushed by my own cares and by concern for my country



나란히 선 두 나라 나갈 길 나눴구나!

Two parts standing side by side yet their course divided



두 나래 탁탁 쳐 날아 하늘나라 솟을까!

May we row with two oars beating in time may we soar up to Heaven together!



불의에 시대를 살면서도 자아실현도 하고 물질적 풍부함도 함께 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약 27년간 백인들에 의해 감옥생활을 하면서 남아프리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의 희망이 되어왔던 넬슨 만델라(1918- )는 모든 인간은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한의무가 그것이다.



안정된 사회나 정의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각개인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러한 두 가지 의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이 묵살당하고 독재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나 사회에서는,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의무를 제대로 정직하게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정부패와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소외되어가거나 처벌받기 일쑤다.



독재자나 사기꾼이 언론조작이나 술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사회에서, 조국이나 인류공동체 대해 올바른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은 불가피하게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소중한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고 자기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받게 된다. 함석헌 뿐 아니라, 독일의 나치정권 아래서 디트리히 본훼퍼 (1906-1945) 신학자나,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넬슨 만델라 등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 함석헌은 가족의 안녕을 등지고 민족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당시 명문 평양고보를 다니면서 함석헌은 공(公)을 위한 정신, 조국애 등 그의 "어릴 적 경건함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기 까지 않았나! 그러나 결국 삼일운동을 몸소 겪고 남강, 고당선생 등으로부터의 영향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나 가족의 안녕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전념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한반도 즉, 불의와 독재가 판치는 상황에서, 씨알의 존엄성, 자유, 올바른 길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곧 그에게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한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차 없이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 본 시는 그런 함석헌의 갈등과 고민을 표현 한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함석헌의 시 몇 편을 살펴보았다. 함석헌의 시는 동과 서, 한국인과 비한국인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잔잔한 감동은 세계인들과 공유 할 수 있는 인간이 추구할 궁극적 가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의 명저 중의 하나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함석헌은 과학적인 분석가의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시인의 열정과 가슴으로 썼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자신도 그의 역사책을 역사 연구서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의 기도와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표현한다. 결국 어느 하늘아래서나 인간이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열정과 감동의 힘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 열정과 감동을 주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시인이 곧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시인이 곧 함석헌이다!




덧붙이는 글 | "신생" 시전문계간지 2009년 여름호 게재

2021/04/15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함석헌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고, 22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서울에서 그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을 마쳤다. 그래서 오는 3월 13일은 그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110주년이 된다.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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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 연세대학교 장기원기념관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강연회였다. 전두환이 총칼로 광주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권을 쥐고 있던 터라 사회분위기도 험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군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사복을 입고 강의장으로 향했다. 벌써 강의실 앞엔 많은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사복전투경찰인 백골단이나 '짭새'들이 캠퍼스에 많이 잠복했던 터라 주최 측 학생들은 강의실 입구에서 종이에 적힌 명단과 강의 수강자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머리가 짧아서 학생들이 나를 '짭새'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내 앞 학생신원을 확인하는데 어깨 너머로 보니 종이에 이름을 확인하고 X표를 긋고 있었다. 흘끗 보니 '철학과 황OO'이라는 이름에 아직 X표가 없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철학과 황OO"라고 뻔뻔스럽게 소리쳤다. 학생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강의실에 입장 시켜 주었다. 진짜 철학과 황OO 학생에게는 지금도 미안함을 느낀다.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되다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학생들 열기로 가득 찼다. 2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나는 그날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흰수염, 흰두루마기 차림을 해 신선같이 보이는 함석헌 옹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강렬한 전기처럼 내 몸과 마음을 통째로 감전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그날 그 순간은 내 생애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미칠 대상'을 찾았다. 그는 곧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고, 나를 '지상에서 영원으로' 매순간 이끄는 영감과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된 것이다.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지만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노벨평화상 후보자였다. 1979년과 1985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허나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중엔 그의 이름 석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바닷가 조약돌만큼이나 많다. 아마 그의 이름을 알고 모르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늘 한반도에 남긴 영향이 무엇인가가 아닐까.

함석헌은 무엇을 남겼나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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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네 가지 이념이나 사상은 ▲ 유교 ▲ 일본제국주의 ▲ 공산주의 ▲ 기독교다. 이 네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와 매일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함석헌은 이런 문제에 대해 동시대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쳐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그 희망의 빛을 우리는 '자유'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포용성'이나 '다양성 존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이 추상명사들이 오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혼신을 다한 고통과 열망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혹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과 열망을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주인공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들이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온 가치들을 손상과 상실의 위험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다. 함석헌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그의 삶을 영광으로 채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근거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감별해 내기 위해서다. 나는 함석헌이 크게 세 가지 그 삶의 흔적을 한반도에 남겼다고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체성 발견

첫째, 20세기 전반부 한반도를 지배한 암울하고 어두운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비전이라는 진액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1930년대 아시아의 슈퍼파워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의 숨통을 조르며 역사를 왜곡하고 정신을 말살하고자 했을 때, 그는 조선인의 자아 찾기, 즉 정체성 발견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를 강의하고 저술한다. 당시 함석헌의 친구이자 <성서조선> 주간 김교신은 그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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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시간의 연속 강연이었으나 강사와 청중이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 역사 반만년에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날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 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자 200인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贅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첨서 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心碑)에 명기할 뿐이었다…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치 않았다면 그는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본 호(성서조선)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당시 드문 지식인 김교신의 충격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이 받은 충격도 상상 할 수 있다. 후에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필화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데 그들을 취재하던 일본형사의 안목도 상당하다. "그냥 무력항쟁을 하는 놈들보다 500년 후를 내다보고 조선정신과 얼을 교육하는 너희 놈들은 훨씬 악질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 점령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희망'이라는 무기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나 민족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고난을 극복 할 힘을 얻을 수 있고 내일을 개척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조선역사>는 1965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되었고 2009년 아시아명저 100선에 선정된다. 함석헌 사후 22년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그가 이렇게 혼혈을 기울여 쓴 책에 대한 인세는 매년 2천만 원이 넘는다.

권위주의 정권기, 민주화 운동가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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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황국신민의 잔재라고 여겨지는 '국민'이나 친북좌경으로 몰릴 수 있는 '인민'이라는 단어보다 오염되지 않았다는 '씨알'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썼다. 그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장준하가 만든 <사상계> 잡지에 글을 써서 불의한 정권을 비판하고 대항하여 옥고를 치르고 매를 맞았다.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 하에서 <사상계>가 폐간되자 그는 70세에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관주도 하의 거대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간다. '한계레신문사' 초대 대표 고 송건호는 박정희 독재정권 기간 중 함석헌의 두려움 없는 활동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아무도 독재적인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감히 말하거나 글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언론인, 대학교수, 지식층도 감히 박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만이 박정권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비판했다. 지금도 나는 함 선생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민주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고 할 때, 함석헌은 분명히 그의 직설적이고 통쾌한 말과 글을 통해서 한국에 언론의 자유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고, 양심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창했다.

그런 함석헌이 1970~80년대를 통해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씨알에게 민주주의가 현실이 아닌 하나의 미약한 꿈에 불과했을 때, 함석헌은 자유 하는 씨알의 상징이었고, 민주정신의 화신이었다. 그랬었다. 그래서 박정희정권 하에서 나온 거의 모든 시국성명서 앞부분엔 항상 함석헌의 이름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장준하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함석헌은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동대문운동장 선거유세 연설 중 함석헌은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외쳤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이렇게 열렬하고 헌신적인 그의 분투 덕분에 장준하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옥중 당선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던 것이다.

종교적, 이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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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4일 함석헌은 '대선언'이란 시를 발표한다. 이 시에서 그는 장로 대통령 이승만을 향하여 이렇게 직격탄을 날린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함석헌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편애주의 정책에 대항해(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다른 종교도 내 종교와 똑같이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종교적 보편성을 강조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 것이다.

그의 책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하며 쓴 아래 글에도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보편적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1961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셋째 판을 내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함석헌,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다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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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함석헌은 소외된 자, 약자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보았다. 그는 기득권자나 가진 자의 통치논리가 아닌, 서민과 소수자, 패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을 갖고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함석헌의 추종자들 또한 최소한 기득권자나 '부자의 대변자'가 아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서민, 힘없는 사람들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유럽인들도 우리보다 더 많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의 문제는 다르다. 강자독식과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사자가 토끼를 마음대로 죽이고 유린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자유민주주주의인가? 오늘 한국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함석헌이 살았던 길은 결코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고 수탈할 때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강자의 횡포를 바라만 보는 것은 결코 함석헌이 주장한 '같이살기운동'의 길이 아니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현실에서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강자와 재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이 경제의 틀에서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단연코 함석헌을 따른다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강자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앞장서는 가짜 씨알 쭉정이의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길과 궁극적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도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씨알의 소리', '약자의 대변자' 함석헌을 생각한다.


2021/04/13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 오마이뉴스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 오마이뉴스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 42화

박정희도 못 건드린 함석헌인데... '무식한' 전두환[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YWCA 위장 결혼 사건
20.08.26 08:52l최종 업데이트 20.09.17 09:01l
김성수(wad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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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CA 위장결혼식에 참석한 함석헌 (우측)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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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901-1989)은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YWCA 강당에 도착해서야 그 날의 행사는 사실 위장 결혼식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한 달 전인 10.26 사건 이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발표에 반발해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석헌은 현장에서 들었다. 그래도 함석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이용당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YWCA 강당에 모인 함석헌을 비롯한 전 대통령 윤보선과 해직교수 김병걸, 그리고 백기완, 임채정, 양순직 등은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의 청산과 군의 정치적 중립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낭독했다. 하지만 성명 낭독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강당에 난입했다. 강당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곳에 모인 140여 명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함석헌 등 주동자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로 끌려갔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15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에서 "함석헌이 젊은 군인들에게 매를 맞았다. 수염이 다 뽑혔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함석헌의 자녀들은 면회도 안 되던 터라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애가 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

보름 후에 나온 아버지를 보고 함석헌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몸에 온통 푸른 멍이 든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함석헌의 3녀 함은자(1929-2017)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며 필자에게 한탄하기도 했다.

친일 콤플렉스가 있는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사상가 함석헌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는 2호를 내고 폐간됐다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해 승소하고는 유신정권 하에서도 계속 발간됐다.

하지만 전두환은 달랐다. 1980년 전두환은 무슨 이유로 폐간한다는 공문 한 장도 없이 <씨알의 소리>는 물론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서울대 교수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등 170여 개의 잡지를 하루아침에 강제 폐간했다. 언론대학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행한 것이다. 그래서 함은자의 말처럼 (무식한)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는 말이 나왔다.

YWCA 위장 결혼 사건 후 보안사로 끌려간 함석헌 등 재야 인사들은 불법 구금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함석헌은 자신이 보안사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생전에 이야기한 적이 없고 글로 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인사들은 당시 보안사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경험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보자. 아래는 지난 1987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간한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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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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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명의 군인들이 머리 수술한 부위 일부러 걷어차

이철용은 당시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실무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 현장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 11시경 서빙고동에 있는 보안사로 이송되었다. 계엄사에 도착한 후 지하실로 끌려가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방으로 데려 가더니 5-6명의 군인들이 군홧발로 온몸을 가리지 않고 걷어차는데, 그들의 표정을 기억해보면 죽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사랑으로 가득 찼던 그들이기에 우리를 원수 잡듯, 개 패듯 달려들어 짓이기는 것이 마치 나라를 위하는 행동인 양 도도하고 원한에 찬 얼굴들이었다.

그런 후 2층 취조실로 데려갔다. 거기서도 검은 테이프를 감은 야구 방망이 같은 것으로 온몸을 얻어맞고 발길질을 실컷 당한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받기 전에 당한 매질로 머리가 찢어져 조사실 옆에 있는 간이병원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다. 그때 그곳에는 김용복 선생(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신학박사)이 기절하여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으며 눈 밑이 찢어져 다섯 바늘가량 꿰매었다. 조사를 받은 후에는 지하 감방으로 다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했는데 2분 간격으로 군인들이 들어와서 구둣발로 걷어찼으며 특히 머리의 수술한 부분을 일부러 걷어찼다.

이런 고문을 하면서 도중에 "내가 각하를 모시고 있던 경호원인데 각하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지랄이냐" "너는 빨갱이보다 더한 놈이다" "각하가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애쓰신 줄 아느냐" "함석헌도 빨갱이다" "유신이 죽은 줄 아느냐" 등의 위압적이며 모욕적인 말로써 기를 죽였으며, 거기서 풀려날 때 "나가서 맞았다는 얘길 하면 다시 와서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을 받았다.

김병걸(1924-2000)은 문학평론가다. 그는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다가 서울산업대학교 (구 경기공전)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나는 1979년 11월 25일 오후 포승줄에 묶여 서빙고동 보안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지하 감방에서 "옷 다 벗어!"하면서 얄팍한 군작업복을 던져 주었다. 속옷을 다 벗고 군작업복으로 갈아입자 내 방으로 5명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나를 둘러싸고 군화 발길질, 몽둥이질, 고무신으로 얼굴후려치기 등 1시간 정도 사정 볼 것 없이 고문했는데, 엎어지고 나뒹굴고 쓰러져서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런 다음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빨간색 카펫이 깔린 조사실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조서를 받기 전에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뒤로 휙 젖히며 본 사건의 자금 출처부터 캐었다. 자금 출처가 '이북이냐, 조총련이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감아쥔 내 머리채를 벽에다 몇 번 박아치기하며 "'나는 혁명가입니다'라고 말해봐!" 해서 내가 "아닙니다" 하니 벽에 나를 기대어 세워놓고 군홧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얼굴, 가슴, 다리,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갈겨대었다. 쓰러지면 바로 서게 해서 갈기고 또 쓰러지면 다시 세워 깔아뭉갰다.

그들은 겁에 질린 나에게 "'나는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해봐, '나는 민주인사입니다'라고 말해봐, 이 새끼야!"하며 강요했다. 나는 도저히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아닙니다"해도 군홧발 짓이기기는 사정없이 가해졌다. 2시간 정도를 그렇게 당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후 다음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양 무릎을 꿇어 앉혀 놓고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워 넣고 그 상태에서 허벅지를 군홧발로 지근지근 살이 뭉개지도록 짓밟는 것이었는데, 내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나가자빠지거나 엎어지면 몽둥이로 등, 어깨, 허리 할 것 없이 마구 내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xxx 라고 말해봐!"하는 말에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 고무신짝으로 얼굴을 내리갈겼다. 이렇게 해서 두 번 기절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먼저 고문을 가한 후 비로소 조사를 시작했으며, 조사가 끝난 후에는 스스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두 명의 군인이 나를 끌어다 내 감방에 데려다주었다.

둘째 날도 첫날과 같은 고문을 한 후에야 조사를 하곤 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받은 몽둥이질, 군화 발길질, 고무신짝으로 얼굴 후려치기 등은 이루 다 기억할 수가 없다.

3일간을 이렇게 계속해서 고문조사를 받았다. 그 후 수사 윤곽이 잡히면서 좀 나아졌는데, 그러나 조사를 끝내고 내 지하 감방에 오면 우리를 감시하는 헌병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감방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침 심심한데 잘 되었다는 듯 시비를 걸거나 별 이유도 없이 군홧발로 공차 듯 걷어찼다. 하루 5, 6회 가량 그 짓을 당했다.

이런 치욕과 울분의 일주일 동안은 팔을 마음대로 들어 올릴 수도 없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서 화장실 갈 때도 부축 받아 간신히 기다시피 다녔으며, 용변 보기도 큰일을 치르듯이 해야 할 만큼 힘에 겨웠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석방된 후 자신들이 당한 고문을 들으니 대부분 내가 당한 이상의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밀폐된 방에서 각기 다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형편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열흘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고문을 따로 하지는 않았으나 아침 6시에 기상해서부터 오후 10시 취침할 때까지 식사 시간과 화장실을 가는 외에는 방 안에 바른 자세로 정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만 눈이 옆으로 돌아간다거나 허리가 약간만 굽어져도 참을 수 없는 욕을 당하면서 군홧발로, 몽둥이로 맞아야만 했다.

이때의 나는 손발은 군홧발에 밟혀 시꺼멓게 멍이 들었고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그 자리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온몸에 피멍이 들어 신음과 공포 속에서 지내었다.

나는 17일 만에 보안사에서 석방되었는데 그 후 시내 백병원 원장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지금의 이 상태로는 진찰조차 어려우니, 3-4일 집에서 목욕을 하면서 안정하면 가라앉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문제의 부분이 나타날 터이니 그때 가서 치료해 보도록 합시다"하였다.

1980년 1월 8일 현재에도 30분도 안 되는 시간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나면 주저앉고 싶을 만큼 괴롭다. X-레이에 나타난 바로는 명치뼈가 회복하기 어려운 절단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한다. 다른 동지들의 상태에 비하면 나는 고문 당했다는 소리를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들이 감옥에서나마 건강만이라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보안사에서 풀려나올 때 "이 안에서 지냈던 일이나 건물 위치, 얻어터진 사실 등은 국가 기밀에 속하느니만큼 밖에 알리면 이적행위가 되니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침묵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다

박철수는 당시 한신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오전 8시경 보안사로 넘겨졌다. 거기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고문당한 사실은 이렇다.

1.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고,
2. 나로선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무릎 끓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릎을 꿇되 앞정강이를 붙인 채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발목을 안쪽 복숭아 뼈가 밖으로 향하게 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었고,
3. 꼬라박기(일명 원산폭격)를 시켜 장시간 견디지 못하고 자세가 흐트러지면 몽둥이로 내리쳤고,
4. 무릎 사이에 알루미늄으로 된 침대 각목을 끼우고 한쪽을 스팀파이프에 고정시켜 꿇어앉은 자세에서 밑으로 누르는 것이었으며,
5. 엎드려 뻗친 자세를 시킨 다음 엉덩이를 몽둥이로 지칠 때까지 후려치고,
6. 고무신으로 얼굴을 후려치거나,
7. 철창에 매달리기를 수십 번 시키는데 만약 힘에 부쳐 땅으로 떨어지면 그 벌로 창살 밖으로 다리를 내밀게 한 후 여러 차례 군화로 발길질을 하였고,
8. '빈대 붙어있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벽에 다리와 팔을 최대한 확 벌려 밀착시키고 목은 바짝 뒤로 젖히는 동작을 시켜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9. 손바닥 그리고 손등을 몽둥이로 수 십 번씩 내려치거나,
10. 조사받는 이틀 동안 꿇어 앉혀 놓고 눈을 감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고문을 가해 잠을 전혀 못 자도록 했으며,
11. 벽에 등을 붙인 자세에서 양팔을 똑바로 위로 올려서 손바닥을 벽에 붙이게 한 후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는 동작을 시키고
12. 이외에도 '빨갱이 새끼', '간첩 새끼' 등의 욕설을 퍼부어 됐고, 내가 있는 지하실에서 한강 하수구로 곧바로 통한다는 등으로 겁을 주었으며 또한 지하 감방에서 계속 '으악!', '어머니!', '아버지 !' 등의 고문으로 인한 비명이 들려와 정말 죽어나가는 게 아닌가 하여 극도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틀 동안을 이렇게 지내고 유치장으로 넘겨질 때 위와 같은 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경우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에 날인하도록 강요했다.

YWCA 위장결혼 관련자들은 이런 가혹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에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가혹한 고문과 5.18 헬기 사격

지난 24일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의 16차 공판기일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성 전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특조위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씨 측 변호인은 이 증언에 의구심을 표했지만 김성 부위원장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군 기록, 목격자 조사 등을 통해 5월 27일 전일빌딩을 비롯해 이전에도 송암동, 광주천, 조선대 절개지(뒷산) 등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진술했다.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부터 약 6개월 지난 1980년 광주에서 5.18 광주학살이 일어났다. 함석헌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고, 광주 거리 곳곳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인 만큼 헬기로도 시민을 사격했을 것이다. 그의 만행은 언제쯤 단죄받을 것인가.


▲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당 관계자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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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은 지난 19일 5.18 국립묘지를 찾아 "권력자의 진심 어린 성찰을 마냥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여 제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사죄했다.

그가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김종인은 1980년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재정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금과 실무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 공로로 전두환에게서 보국훈장을 받았다.

김종인은 이 자리에서 "저는 신군부가 만든 국보위에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여러 기회를 통해 과정과 배경을 말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들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겐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라며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사죄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2021/01/30

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

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

함석헌과 퀘이커 사상 등에 관한 소식 나누기
1/30/2021 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
https://blog.daum.net/wadans/7788201?category=567258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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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
by Sung Soo Kim
1994 - University of Essex

I. Biography of Sok Hon Ham (1901-1989).


"I am a man who has been 'kicked' by God, just as a boy kicks a ball in the direction he wants it to go. I have been driven and led by Him." 3

"He is a symbol of Korea's conscience throughout the era of Japanese colonialism in the Korean peninsula, communist totalitarianism in North Korea, and military dictatorship in South Korea."4

Sok Hon Ham was born in 1901 in a tiny district near the Yellow Sea in the farthest northwest corner of North Korea. Korea at that time was in a dire political and economic state. Between 1895 and 1910 it succumbed to a series of dreadful events: Queen Min was raped then killed by Japanese soldiers; the Korean king's desperate attempts to obtain American governmental backing for his unstable country failed; famine and plague were a constant threat to the nation's populace. What is more, the Korean peninsula suffered from the hostility and conflicts between Russia, China and Japan, all of whom coveted Korea in order to further their strategic position and national prestige in North East Asia. These countries saw Korea as a stepping stone toward expansionism. Inevitably, these expansionist movements led to the Sino-Japanese War conducted on Korean soil in 1884. The defeat of China (ruled by the Qing Dynasty) was followed by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As a result of Russia's defeat, Japan declared its intention of exercising hegemony in Korean affairs, and proceeded to increase its control not only in the Korean peninsula but also in the whole of North-East Asia. Theodore Roosevelt believed that it was essential to approve Japanese ascendancy in Korea as a quid pro quo for Japan's recognition of the domination over the Philippines by the USA. This bargain between the USA and Japan was struck in the clandestine Taft-Katsura Agreement of July 1905.

Britain too, in re-negotiating the terms of the Anglo- Japanese Alliance in August 1905, recognized Japan's right to take appropriate action for the "guidance control, and protection" of Korea.5 But Britain, France and Germany also took a part in the race to wrest economic concessions from a weak Korean government, turning Korea into a happy hunting ground for concessionaires. Sok Hon Ham grew up in this colonial situation. When he was four years old (1905) the sovereignty of the nation was removed by- Japan through the Unequal Treaty of 1905 (so-called "Protectorate Treaty"), and when he was nine (1910), Korea fell entirely under Japanese rule.

Sok Hon Ham grew up in a poor village. He first attended a Presbyterian school, and from his early years was influenced by Christianity. The onset of organized Protestant mission work in Korea dates from 1884, when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aries arrived in Korea.6 From that time, Christianity, and Protestantism in particular, exerted great influence on political and modern educational movements.7 By transmitting Western ideas of individualism and democracy, missionaries played a key role in awakening a national consciousness among the Korean population. Moreover, Korean nationalists were eager for a Western education8 and private schools, many of them founded by Protestant missionaries, made a key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modern education in Korea. Between 1883 and 1909,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 29 private schools were founded (including one private Lyceum at Kando, Chien-tao in Chinese, in Manchuria).9 These schools were founded either by Korean national leaders, who were mostly influenced by Western missionaries, or run by Western missionary themselves. Thus, Protestant private schools played a vital part in propagating nationalist thought.10

These schools not only spread Western knowledge but also acted as greenhouses for nationalist activity. Discussion, debates, oratorical contests, and campaigns of various kinds were held under educational institution sponsorship, fanning the nationalistic enthusiasm of the students. By spreading Western ideas, missionaries played a momentous part in awakening a national consciousness among the Korean people.11 That is why many Private schools were forced to close, and after the annexation, Japan's educational policy became even less favourable for Korean schools.

Protestantism was welcomed by the non-yangban (traditional aristocrats) intellectuals and by the business community, and this was particularly the case in areas of developing economic activity, such as P'yongan province (Sok Hon Ham's native region). Confucianism was less influential at P'yongan, and accounts of the distinctly favourable response to Christianity in that region link this to the existence of significant social groups who did not have a vested interest in the status quo.12 Protestantism thus secured its strongest initial support in North Korea, where it was able to capitalize upon the long-standing grievances of the people of that region opposing the yangban of Seoul. Sok Hon Ham recalled why and how Christianity was more popular in P'yongan, his hometown, than in South Korea:

"I had the good fortune to study the 'new education' --- This was because Christianity, which was just beginning to be propagated in Korea, entered my village. My province, of P'yongan was known 'as Korea's 'heathen Galilee', and for centuries its 'people of low birth' had been the object of scorn and contempt. People of my village, especially, like 'Zebulun13 and Naphtali14, were referred to as the 'scum of the sea'. Thus we lived amidst scorn and shame. However, this misfortune became our fortune. Being at the bottom level of society, there was peace even among the prevailing political chaos. Just as we accepted scorn and disdain so also we were quick to accept new things and new ideas. Indeed we stood at the frontier of a new age."15

Protestantism was closely embraced not only as a religious belief but also for its political, social, enlightening and cultural archetypes and movements. In 1907 the New People's Association (Sinminhoe) was created covertly by members of the press, military men, and businessmen, most of them Protestant Christians from northwest Korea. These included the Christian nationalists, Ch'ang-ho An, Tong-hwi Yi, originator of the first Korean Communist Party in the early 1920's, and Sung-hun Yi, founder of the Osan School and Sok Hon Ham's teacher.

In 1909, the "Million Souls for Christ Campaign" was successful in bringing about mass conversions to the Protestant religion.

Against this historical background, Sok Hon Ham, as a young Christian student, was active in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This Movement was a national protest aimed at focusing world attention on the oppressive colonial rule of Japan, an attempt to draw the attention of the world to the intolerance of the ruling Japanese toward the people and culture of Korea. Thus the Movement hoped to regain self-determination for Korea, just as the peoples of Europe were given self-determination by the Allied Powers. The doctrine of the Movement centered on the self-determination of nations, its motives generated by the Korean nationalist movement.

Hitherto the nationalist movement had concentrated on the activities of exiles and on hidden alliances. It had relied on education movements or religious activities. An extensive, nationwide struggle developed, aimed at recovering Korea's missing sovereignty.16 But the March

First Movement was brutally smashed by Japanese soldiers. It is estimated that two million people took part in 1,500 demonstrations, 7,509 people were slaughtered and 15,961 wounded. 715 private houses, 47 churches, and 2 school buildings were destroyed by fire. Somewhere in the region of 46,000 were arrested, of whom almost 10,000 (including 186 women), were tried and sentenced. The largest protests were in P'yongan, Kyonggi, and Kyongsang provinces, areas which also suffered the highest casualties. People of all ages, occupations, and creeds took part.17 Among the 33 national' leaders of the Movement, no fewer than 16 were Christians, 15 followers of the Chondokyo religion (Native Korean religion), only 2 being Buddhists.18

Through his first-hand experience of this Movement, Sok Hon Ham began to acquire a degree of self- consciousness, and, as a result of his part in the March First Movement, he was forced to leave his school and return to his native village, where for two years he wasted away in mental distress. As a consequence of his experience of this Movement, he began to feel some uncertainty about the Presbyterian Church, which he had regularly attended since his childhood, and this uncertainty exacerbated his inner turmoil.19 As I have pointed out, when Christianity first entered Korea,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Christian faith helped fuel Korean nationalism. But gradually the problems inherent in such a combination became more and more apparent. In spite of the March First Movement, as Japan consolidated its hold over Korea, the Japanese began a regime of "benevolent" and "cultural" propaganda. Correspondingly, former Korean

Christian nationalists began to accept these policies, accommodating the Japanese authorities, thereby compromising their own demands for national independence for Korea.

In 1921, having experienced doubt about Christianity for two years, Sok Hon Ham entered Osan High school. Here he met two teachers who were to have a remarkable effect on his future life. one was Sung-hun Yi, one of the leader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 Christian leader within Korea. He was the founder and principal of the Osan High school. He inspired Sok Hon Ham through his ideas of national spirit and patriotism. The other teacher was Young-mo Yu, a man of distinguished erudition in Oriental philosophy. It was he who introduced Sok Hon Ham to Lao-tzu and Chuang-tzu, as well as other Oriental classical philosophies.

Meanwhile, an interest in new social and political ideas had emerged among groups of intellectuals active in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wake of the Movement, the Japanese pursued a more "generous" policy toward Korean culture, and nationalists were relatively unfettered and able to discuss social, cultural and, within limits, political topics. Hence, the diffusion of left-wing philosophy introduced fresh concepts, to the argument of the issue of Korean sovereignty.20 This phenomenon was particularly prevalent between 1920 and 1925.21 By 1922 there were 5,728 organizations of all types registered with the colonial police. They included study groups, youth leagues, labour and academic societies, tenant alliances, social clubs and religious sects.22 The Japanese police provided the following breakdown: Registered Korean Organizations, 1922; Political and intellectual 48; Academic 203; Labour 204; Youth 1,185; Church youth 639; Religious 1,742; Tenant 26; Self-improvement 235; Women's 56; Recreation/social 348; Children's 40; Industrial 470; Savings and purchasing cooperatives 53; Health 6; Anti-drinking/smoking 193; Other 280.23

In some quarters, the interest in new ideas took a revolutionary form. After the Russian Revolution, the rise of the Soviet Union, with its opposition to capitalism and imperialism, appeared as a protector of oppressed nations. In colonial Asia nationalism began to be linked to socialism under the guise of self-determination of nations. Lenin declared his willingness to support anti-colonial movements among the oppressed nations of the world. To some Korean nationalists the only proper policy, as a colony of Japan, was full-scale war against Japan, a war they hoped and anticipated would be assisted by the Soviet government.24 Accordingly, the "triumph" of the Russian Revolution created an escalation of ideas and hope for revolutionary change. This interest in socialism was evident among Korean intelligentsia and students within the country and in exile. Since the time that Korea had become a Japanese colony, much nationalist activity had been conducted abroad. Most exiles crossed the Yalu River into West or North Kando or into the Russian Maritime Territory, with a smaller number of emigres going to the USA. Clearly those in exile in the areas of China and Russia, maintained close links with Chinese and Russian nationalists and moved in left-wing circles. Many of these exiles believed socialism presented a solution to the dilemmas of socioeconomic reform and of national liberation. The increased interest in socialism gave rise to the formation of the Koryo (Korean) Communist Party in Shanghai in 1920. Under the guidance of Tong-hwi Yi, it obtained financial assistance from Russia. Yi and his associates were among those nationalists in Shanghai who urged armed battle and social revolution.

Revolutionary ideas came also from Japan, which was the primary destination for Koreans studying abroad. By 1922 there were several thousand Korean students there.25

In 1923, Sok Hon Ham went to Tokyo Teachers' College to pursue his studies in history. In September of that year there occurred a great earthquake which destroyed two-thirds of the city. After the earthquake the Japanese government feared an insurrection an the part of the socialists, and it deliberately propagated a rumour that the Koreans in Japan were planning a revolt, thus instigating a massacre of more than five thousand Korean people. During this time of turbulence, Sok Hon Ham experienced his first period in prison. He was placed there by the Japanese police in order to protect "innocent Koreans" from the Japanese aggressors. Although he stayed in the prison only a single night, it left a deep impression on him.26

Social revolution was a burning issue in the tearooms and drinking houses of Tokyo, and Korean students were attracted by the inspirational speeches of the revolutionaries. The post-World War I economic slump had brought substantial economic and social difficulties and the working class and tenants of Japan grew into an organized force. Korean students in Japan had always maintained close links with one another, and at this time several revolutionary groups were formed. Among them was the Korean Self-Supporting Students' Association, the main socialist organization. Its journal, Comrade, stressed student and labourer relief and the importance of tackling the roots of class conflict. This and other groups propagated the notion of social revolution and were fascinated with anarchism as well as other revolutionary beliefs. They advocated liberty for the individual, rejected the legitimacy of any political power whatsoever, and recommended the use of terror. A particularly striking instance of this was the assassination attempt on the Japanese emperor by Yol Pak in 1923. There was also a group of Marxist theorists who pleaded that Korean sovereignty could be obtained only by removing Japanese capitalism, and to this aim they created the Choson Communist Party in 1925 and started an organized anti-Japanese battle most particularly through working class agitation.27

During this time of social unrest in Japan, Sok Han Ham's thoughts were torn between Christian ethics and the politics of socialism as the key to the salvation of Korea. But political radicalism included aspects which he could not wholly approve of. For example, he disliked the anarchists' advocacy of terror and Communism's advocacy of atheism. He thus experienced great internal conflict:

I entered a period of great agony. Could Christianity really save my people? Under the circumstances, it appeared that only a social revolution could provide the answer. But I could not bring myself to forsake my faith and join in the socialist movement which totally disregarded all sense of morality. For a long period I was in agony over the conflict between Christianity and socialism."28

In 1924, Sok Han Ham met Uchimura Kanzo (1861-1930), a Japanese religious thinker and critic, who had 'a significant formative influence on many writers and intellectual leaders of modern Japan. Sok Han Ham came under the sway of Uchimura's Non-Church Movement. This rejected the superficial formalism and hypocrisy of the church and emphasized a faith in atonement through the Cross.29 As Sok Han Ham participated in Uchimura's Bible studies, his inner conflicts, between socialism and Christianity, were gradually resolved, and he made a firm commitment to live as a true Christian. He recalled that experience: "I developed the confidence to be able to say 'This is real faith', 'This is the way the Bible must be read!'30 Consequently, he chose Christianity rather than socialism as his ideal.

In 1928, after his graduation from Tokyo Teacher's College, Sok Hon Ham returned to Korea to teach history at Osan school, a job he wanted wholeheartedly to retain for the rest of his life. In 1928 his friend, Kyo-Sin Kim, began to publish a monthly magazine, Songso Choson (Bible Korea). Between February 1934 and December 1935 work by Sok Hon Ham, Korean History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was serialized in the magazine. This was his first publication, which was later revised and re- published under the title Korean History from a Spiritual Perspective: Queen Of Suffering.

If we examine his writings at this time, it is evident that Sok Hon Ham's thesis centered on the significance of "losers" and the role they might play in world history. He began from the premise that world history appears to justify the claims of "victors", since it is usually written by those who govern, the 'winners'. It is hard to apprehend that "losers" and ordinary people also contribute to history. Korea's national identity had been profoundly shaped by a sense of itself as a "loser" in world history. Accordingly, Sok Hon Ham highlighted the contribution and significance of the "losers", in a paradoxical effort to generate national pride. He defined the role of Korea as the Queen of Suffering. Equating it with Christ as the Son of Suffering, he began to forge a new identity and mission for Korea:

"Herein is our mission; to bear our load of iniquity without grumbling, without evading and with determination and in seriousness. By bearing the load we can deliver ourselves and the world as well. The results of iniquity will never vanish without someone bearing their burden. For the sake of God and humanity we must bear it --- The consequences of the world's iniquities are laid on us, and if we fail in cleansing them, then there is no one else to do it. Hence, it is our mission, to which only we are equal. Neither Britain nor America can cope with it, for they are too well-off, too highly placed, to do it."31

Using his own Biblical interpretation of Korean history, Sok Hon Ham provided the mission and vision not only for Koreans, but also "losers" and ordinary people everywhere. Those "losers" were able to find their own identity and position in world history, having previously failed to come to terms with either its "Suffering" or its causes.

From the 1930's, emphasis in the study of Korean history was put largely on the processes through which society was formed. A tendency emerged that explained sequential levels of social development in terms of economic phases. Scholars of this penchant were influenced by Marxism to put a historical materialist structure o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Korea. In connection with this, in 1930 Sok Hon Ham, as a nationalist and a history teacher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suspected of Marxism-Leninism. At that time, the left-wing and communist movements in Korea often interrelated with anti-Japanese movements, and the Japanese had difficulty differentiating between social revolutionaries and nationalists. Later, like the Chinese nationalists, Korean nationalists began to split, as rivalry between the traditional or "right" nationalists and the Communist nationalists grew.32 Indeed most of the nationalist Korean intelligentsia did absorb left-wing theory and were seriously preoccupied with subverting Japanese capitalist rule. Eventually Sok lion Ham stayed in Chungchu police station for a week.33 His nationalist activities continued to be seen by the Japanese as interrelated with the communist movement. Even though Bible Korea had no more than two hundred subscribers, its contents, including Sok Hon Ham's writings of Korean history, ran foul of the Japanese censor and the magazine frequently had to cease publication. In particular, copies containing the writings on Korean history were seized and often destroyed even though he had moderated his language in order to pass the censor.

In 1938, in order to suppress all Korean national consciousness and culture, the authorities ordered the use of the Japanese language instead of the indigenous language in all Korean schools. When Sok Hon Ham refused to carry out the decree, it led to his forced resignation from the school he loved. It was to prove his first and last regular job. Nevertheless, through a Sunday meeting, he continued to teach his beloved former-students as well as act as administrator for the Songsari farming school. But the Japanese did not approve of the content of his teaching or the style of his leadership within the farming school. The Japanese authorities saw the characteristics of Sok Hon Ham's farming school as "communistic."

Meanwhile, from 1937 Japan started an extensive assault on China and in 1941 bombed Pearl Harbor. During the war Japan conducted a so-called nationwide mobilization policy, which was enforced with extraordinary harshness within Korea. Japan launched a campaign to destroy Korean national selfhood under the motto "Japan and Korea are one Entity". As an initial phase in executing its assimilation policy, Japan prohibited all kinds of cultural practices that might be regarded as nationalistic. Not only the study of the Korean language but also that of Korean history was considered dangerous. Eventually, on the basis of his previous writings of Korean history, as well as his "communistic" administration of the farming school, Sok Hon Ham was imprisoned again in 1940 at Taedong police station for one year. When he was released, he learnt of the death of his father and the destruction of his home. Furthermore, the Japanese forbade him to teach or run the farming school. Thereafter, he took up farming as a living and adopted the traditional Korean dress which he wore until the end of his life. But it was not the end of suffering for him nor was it the end of suffering for colonized Koreans.

In 1942, prominent figures in the Korean Language Society were arrested on accusations of fomenting nationalist activity. As a result of the brutal torture to which they were subjected by the Japanese police, Yun-jae Yi and others died in prison. Sok Hon Ham and a number of his friends who had been publishing Bible Korea were again arrested. once more, he was imprisoned for a year. He says of his imprisonment during this period:

"Those were the days when Imperialist Japan was resorting to the most oppressive measures to wipe the Korean race from the face of this earth. In 1943sic34, the Japanese authorities arrested all the readers of the magazine [Bible Korea], charging us with harbouring dangerous ideas, and abolished the magazine itself. The case was dropped after we had spent one year in prison"35



Consequently, in the years up to 1945, Sok Non Ham suffered imprisonment no fewer than five times. That is why, when commenting on his life in this period he stated: "My only crime was that of being a Korean."36 He had been a constant active Korean nationalist against Japanese colonial rule.

In 1940, on the eve of the Second World War, the Japanese deported most of the Christian missionaries.37 By this stage, Christians in Korea were also a target of Japanese persecution for political as much as cultural reasons. In discussing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Christianity, Bruce Cumings points out that Christianity took hold in Korea in a way that it did not in China or Japan.38 When Protestant missionaries entered China and Japan, they came at a time of, and in connection with, gunboat diplomacy and mercantile exploitation. But in Korea, through a mixture of fortune and astuteness, the circumstances of Protestant churches were entirely different. Unlike China and Japan, the first colonizers in Korea were not Westerners nor Western missionaries, but the more harsh colonial rulers of imperial Japan. Thus, Protestantism had the advantage of entering the old-fashioned "Hermit Kingdom", Korea, prior to other styles of modern civilization (apart from austere Japanese) taking possession within the minds of the population.39

Furthermore, the Western missionaries brought with them modern scientific and up-to-date knowledge in every field, filling a vacuum created by Korean isolation. Korea needed, and avidly desired, these new ideas if it were to move toward modernization and achieve its independence. Moreover the missionaries' were also sympathetic toward Korean nationalism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rule.40 Because of their involvement in schooling, they developed close ties with many young, intelligent Koreans who would later become leaders of the new Korea. Thus, the missionaries backed those nationalists who resisted Japan's intrusions on Korean sovereignty. In particular, several missionaries offered direct and indirect help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is respect, the coming of Christianity to Korea was different from China and Japan. This is still evident today if one compares the ratio of Christians among the populations of China, Korea and Japan. In 1990 the percentage of Christians in China and Japan were approximately one percent, whereas in South Korea it is over twenty percent an outstandingly high percentage by comparison.

Meanwhile, in 1945 Japan's defeat in World War II not only led to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ese control, but also to Korea becoming once again a battlefield. This time the battle involved capitalist and communist nations (represented by the USA and USSR) in a global contest. Having been an "oppressed nation" during World War II, Korea became an "artificial barrier" marking the battle line in the Cold War; this artificial division of the country came about solely because of the Cold War. The Korean nation was divided by the victors, supposedly on a temporary basis. Consequently, South Korea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USA and North Korea under the control of the USSR.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Christians once again became a target, but this time for the communists in North Korea. Although the number of Christians in the general population of the whole of Korea was not more than two percent in 1945, Christians were numerous and influential in certain areas, notably in P'yongyang, and had an extensive affinity with American missionaries. What is more, American sources viewed the Christian churches as the strongest force against the regimes of both the Japanese and the Communists. Various sources maintain that several Christian nationalists were jailed and Christian political activities were stamped out even in the late 1940's in North Korea.41

By the time Korea was liberated, Sok Hon Ham was recognized as a national leader. As he pointed out, it was an unexpected position to find him in:

"When Liberation suddenly came I found myself in a position of leadership. People had pointed at me with pride and said, 'Going to prison is his occupation', and now I was chosen to lead these very people."42

At the time the Japanese left Korea, Sok Hon Ham was still farming for his daily livelihood. When the USSR took control of North Korea, the authorities utilized the so-called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Using those who had been prominent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cluding democratic nationalists like Sok Hon Ham, they consigned to it governmental functions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Soviet armed forces. Sok Hon Ham was appointed Minister of Education in this provisional government of P'yongyang province. He believed that his religious neutrality among nationalists in North Korea, led him to be appointed Minister of Education, over and above other nationalist leaders.43

Korean society in 1945 was a maelstrom of old and new classes, political groups, and left and right ideologies. on 23rd November 1945, the Sinuiju Students Revolt took place in North Korea due to the polarization of Korean politics between nationalists and communists. 5,000 nationalists protested against the Korean and Soviet backed communist policies. In one particularly bloody incident communist forces fired on a crowd of nationalist protesters. As a result, 23 nationalists died and another 27 people were seriously injured, more than 80 were arrested at the hands of the Red Army and the communist forces. The Red Army proclaimed martial law44, and Kim I1-Sung personally visited Sinuiju, seeking to mend rifts between communists and Christian nationalists.45 Although Sok Hon Ham was not a direct leader of the student revolt, his position as Minister of Education, as well as his standing as a Christian nationalist, meant he was held responsible. He was, therefore imprisoned for two months, suffering physical violence from the communist forces.

During this period of disorder, the North Korean communists and the Soviet Red Army were afraid of further revolts from the North Korean nationalists, students and intelligentsia. In order to prevent revolt, they attempted to use national leaders as secret agents and informers. Hence, on his release Sok Hon Ham was forced by the Red Army into the role of spy against his fellow citizens; reporting in detail on the movements of the Korean national and religious leaders. When he refused to follow these orders he was imprisoned once again in December 1946 for a month.46 Consequently, due to the conflicts between the communists and nationalists, not only Sok Hon Ham but several other nationalist figures were expelled from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North Korea then proceeded to implement a policy of Communization. Inevitably, after he was released from prison in January 1947, Sok Hon Ham decided to flee to South Korea. He arrived there at dawn on March 17th 1947.47 The number of Koreans who could not endure life under Communist authoritarianism and crossed the 38th parallel into South Korea rose sharply, totaling more than 800,000 by the end of 1947 (including Donggill Kim, Byung-mu Ahn and the writer's father). The brief period, 1945-1947, saw both chaos and a political vacuum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making it possible for these people to escape.

But South Korea also was in the midst of a problematic situation. Since 1945, as noted, the USA occupied South Korea as a buffer in the Cold War. The political field of South Korea saw close attachments between the USA military officials and the former pro-Japanese Korean officials even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 This close affinity sprang from a shared anti-communism aimed at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Bruce Cumings showed how the irony of this unholy alliance struck even the Japanese-trained Korean officers themselves. on several occasions, Reamer Argo, an American military officer, asked Hyang-gun Yi, a pro-Japanese Korean, to help in building the Constabulary in the South. Yi often refused, mentioning, "How can those who served in the Japanese Army participate in building a Korean army?" Argo replied, "If experienced men like yourself do not participate, who will?"48 What is more, in 1946 when General Hodge, Commander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interviewed Sok-won Kim, another pro-Japanese Korean, Hodge said this:

"The Constabulary is going well now, --- it will become the national army --- You have had your experience in the Japanese military, but now you must have a new beginning in a democratic military."49

With such a political background, as soon as Sok Hon Ham escaped from North Korea to "democratic" and pro- Japanese South Korea, he established the Sunday Religious Lectures. Using these lectures he presented his thoughts, and embarked on a period of prolific writing. As a result of these activities, he gained many sympathizers and became widely revered as an inspired teacher. In particular, his influence among the intelligentsia and students strengthened. Donggill Kim and Byung-mu Ahn both met him at this time, and fell under his influence. They maintained a close relationship with him until the end of his life.

However, at the same time, Sok Hon Ham was criticised by doctrinaire church leaders. They recognized his views both as being too Oriental and as too universalistic. As a result, church leaders labeled him a "heretic" and shunned him. Sok Hon Ham's Universalist views were influenced by H.G.Wells' The Outline History of the World, and later consolidated by Teilhard de Chardin's book, The Phenomenon of Man. Teilhard constantly tried to create a synthesis between his Christian vision and the evolutionary perspectives of contemporary science. He saw the universe becoming increasingly "hominized", humanity increasingly converging or moving toward the "superior pole" of all evolution, which Teilhard calls the "Omega Point."50 Sok Hon Ham was particularly influenced by Teilhard's poly-dimensional view of the world and universe.51 It was an ironic coincidence that the originality of Teilhard's theories also brought reservations and objections from within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from the Jesuit order, of which he was a member.

Immediately following the Korean War (1953), Sok Hon Ham had an opportunity to meet British52 and American Quakers at Kunsan Friends' Service Unit working in the Provincial Hospital and for refugee's in South Korea. He was deeply interested by the humanitarian activities of these Western Quakers, and it was this attraction to their humanitarianism and pacifism that was to lead eventually to his becoming a member of the Society of Friends (Quakers) in 1967.



From 1956 Sok Hon Ham began to write his various thoughts on politics and religions in the monthly magazine, Sasang-gye (Thinking World). The venality and oppression produced by the ruling Liberal Party in South Korea under the rule of Christian president Syngman Rhee was intolerable. In particular, in 1958 South and North Korea became satellite states under the influence of the USA and the USSR, through which the Cold War was waged by proxy. At this time, Sok Hon Ham criticized Syngman Rhee's corrupt policies through the Sasang-gye magazine under the title of "People Should Think for a Living". We can examine what he actually wrote:

"It can be said that Koreans are freed from Japan, but there is no freeing in any actual feeling. A worse tragedy nowadays is that Koreans have two commanders [the USA and Russia) to serve instead of one [Japan]. Obedient to Japanese subjugation, at least families could remain together and people could come and go openly. Today parents and children are separated in the divided North and South. Where is liberation? Where is freedom? South Korea labels the North as Russia and China's puppet and to North Korea the South is the USA's puppet. There are only puppets and no country. Koreans do not have a country."53

Such criticisms were so "offensive" to the Syngman Rhee regime that they determined to imprison him. Consequently, in 1958, at the age of 57, he was imprisoned again for twenty days, ironically this time he had not been put in prison by the Japanese or the Soviets, but by his fellow countrymen. Therefore, he became a political "refugee" even in his own "liberated" and "democratic" country. But his only "crime" was his candid remarks in regard to the post-war disarray, corruption and escalating enmitie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In 1960, the April Revolution led to the collapse of the First Republic, and through Syngman Rhee's resignation Koreans enjoyed a renewal of freedom, liberty, and optimism which had not existed since the liberation from Japan. But the following year in May 1961, the military coup of General Park took place. Although at the start of this coup, General Park had announced his junta to be a temporary administration, by 1963, he imposed an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He became president and remained in that position for 18 years until his assassination. During his regime, General Park brought strict censorship of the press and suppressed civil rights. Correspondingly, from 1961 onward Korean politics can be summarised as a series of military dictatorships with constant protests from its civilians. Sok Hon Ham straightforwardly criticized the illegitimacy of the military coup through the monthly magazine Sasang-gye and later through his magazine, Voice of the Ssi-Al (People). Below is one example of the critical writings of Sok Hon Ham during the military junta period:

"Dear Chunghee Park, Forgive me for not addressing you as the Chairman of the Supreme National Reconstruction54 or the General of the Army. I would rather address you as Dear Chunghee Park, a man with conscience and reasoning. You and your military colleagues have made many mistakes. First of all, the military coup was wrong. Probably your motive and aim to correct the national destiny was right, but the means were wrong. When the means are wrong, aims lose their meaning. You have no revolutionary theory. You rose up believing only in swords. You cannot gain the confidence of the people by military power alone. The biggest mistake of all is that you have not kept your declared promises given at the time of the coup. People were astonished when they heard that the military would govern for two years. However, now that the two years are coming to an end, instead of stepping down, you are thinking of a new political party and you are running for the President's seat, thus utterly disappointing the people."55

To help promote democracy, Sok Hon Ham established the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Ssi-Al in 1970. This became the eye of the storm for democracy in Korea and for the enlightenment of the Korean people. Through the publication of this magazine, his followers were able to express widely their ideas on Korean society, becoming social leaders and leading figures of public thought in the nation. The Voice of the Ssi-Al sold out all over South Korea and provided optimism to a disappointed Korean people and their vision for democracy.

Furthermore, whenever possible, Sok Hon Ham spoke out fearlessly against General Park's dictatorial regime and its injustices through public speeches and writings. Side by side he established regular public study groups of the Bible, Quakerism, Lao-tzu and Chuang-tzu. Through these teaching groups he emphasized the awareness of social justice in Protestantism, and the free spirit of humanity in the philosophy of Lao-tzu and Chuang-tzu.

In order to understand the range of Sok Hon Ham's appeal, it is necessary only to look at the editors of Voice of the Ssi-Al. Among them were the eminent Donggill Kim, former popular academic in history who has published over 64 books on the criticism of politics, religion and social issues, and is currently a statesman and Leader of the Opposition Party (Shin-min-tang). Pob Chong, a Buddhist monk, who published several books on his meditations, and had an established reputation among the various Korean intelligentsia. Yong-Chun Kim, a scientist and former-professor of Koryo (Korea) University, who had participated in the Club of Rome Conference as a representative scholar of natural science in Korea. He was one of Korea's experts in the field of organic chemistry. Kon-ho Song, who worked at the Tong-A Newspaper Company as a leading journalist and as chief editor until he was dismissed by General Park. Although he did not have any religious background, he had worked under Sok Hon Ham's leadership for the Voice of the Ssi-Al. There was also a lawyer, Tae-Yong Yi, who was the first female doctor of law in Korea. She wrote most of Sok Hon Ham's human rights declaration draft and was an enthusiastic Christian. The very different religious and non-religious peoples that Sok Hon Ham chose were welded together by his broad vision and inspiration.

While conducting the interviews for this thesis I was amazed by the wide spectrum of his followers. For example, when I met Dr.Ki-ryo Chang in Pusan, I felt he was a very traditional Presbyterian. Although, he has a respected reputation because of his charitable works, and is a very intelligent man, his mind was uncomplicated and as pure as a child's. He believed in a liter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on the contrary, when I had interviews with Dr.Byung-mu Ahn, the founder of the Minjung theology56, I felt his views were remarkably progressive, in a certain way somewhat radical. Even today many Korean churches still do not accept Byung-Mu Ahn's innovative Minjung theology. Both these men are controversial figures; one most conservative, one most progressive. The above illustrates how widely polemic religious views were fused under the influence of Sok Hon Ham.

More remarkable is the impact of Sok Hon Ham on the very different political groups in Korea. When Sok Hon Ham died, the President of South Korea Tae-woo Roh, proposed a Public Funeral for him. Previously, this same president had asked Sok Hon Ham to be the Chief of the Seoul Peace Olympiad to represent the Korean people. Ideologically, the President Tae-woo Roh is right wing. on the other hand, as a striking radical-leftist, Rev.Ik-Hwan Mun, was also a well known admirer of Sok Hon Ham.

In 1989 under Tae-woo Roh's Presidency, Rev. Ik-Hwan Mun visited North Korea without the permission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here he met the leader of North Korea, Kim II-Sung. on his return to South Korea, Rev. Mun was arrested and placed in prison. I regard the relationship between Rev.Mun and President Roh as two extremes. They stood for opposed political lines, but their differences melted when confronted by Sok Hon Ham's broadness. This reflects Sok Hon Ham's religious Universalism, embracing various religions, dissimilar peoples and extremely different political groups.

One can maintain that humankind cannot live without vision, Sok Hon Ham showed his vision to the downhearted Korean people during the 'dark age' of Korea's history. Sok Hon Ham was only briefly a politician in an established government as Minister of Education in P'yongyang. In an undemocratic country, political democracy is a fundamental precondition for the evolution of society, the economy, culture and the arts. Equally, without the freedom of the press, one cannot imagine the freedom of expression, or the freedom of speech. In this respect, Sok Hon Ham acted as a political activist, and was clearly a force for democracy in Korea in establishing free, forward-looking papers with liberal and thought-inspiring articles. That is why, 'during the 1970's and throughout the 1980's, he rose as a symbolic figure for the democratic movements in Korea. The Chief of the Han Kyou Re Newspaper company, Kon-ho Song, remembered Sok Hon Ham's fearless activity during the period of General Park's "reign of terror":

"At that time, no one dared speak or write anything against the dictatorial Chunghee Park's regime. No journalist, or professor, or any member of the intelligentsia dared to comment on the arbitrary power of General Park. only Sok Hon Ham criticised Park's injustice and the illegitimacy of his regime. I still wonder, how Sok Hon Ham did that without any fear?"57

In 1976, the New York Times reported the following news:

"Leading Seoul Dissidents Ask Resignation of President Park. SEOUL, South Korea, March 2.sic58 A group of South Korea's most prominent political dissidents have issued a statement here asking the Government to rescind the emergency decree and restore all political freedoms that have been restricted under the 1972 Constitution. Signed and circulated by 12 political and religious figures, the statement asked that President Park Chung Hee resign and take responsibility for what they termed his dictatorial control. Among the signers were former President Yun Po Sun; Kim Dae Jung, the presidential candidate who ran against President park in 1971; and Ham Sok Hon, a civil rights leader."59

For this act, the seventy-five-year-old Sok Hon Ham received an eight-year prison sentence. However, due to pressure from the West on president Park's Government, he was placed instead under house arrest. Finally, in October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his secretary, thereby bringing an end to 18 years of military dictatorship. Sok Hon Ham was once again released. In spite of that, within seven months a second military coup took place, this time led by General Doo-Hwan Chun. Sok Hon Ham was placed under house arrest again, and his magazine Voice of the Ssi-Al was shut down.

During the period of the battle for democracy in Korea, Sok Hon Ham was nominated for the Nobel Peace Prize twice, in 1979 and 1985 by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In 1963 he received the First Wol-Nam Press Prize from Sasang-gye magazine, and in 1987 he also received the First In-Chon Press Prize from the Tong-A Newspaper Company. The latter was in recognition of the contribution from the Voice of the Ssi-Al to the freedom of the Press in Korea during the period of two military coups. A professor Po-Sok Chung argued that:

"Although Sok Hon Ham was not a professional journalist, during the era of the military dictatorships, he actively promoted the development of the freedom of the press in Korea as a freelance journalist."60

In 1988, due to massive demonstrations and protests, General Doo-Hwan Chun reluctantly resigned from the presidency. on the eve of the International Seoul Olympiad, Sok Hon Ham rose from his hospital bed to convene the Seoul Assembly for a peaceful Olympiad. As the Head of the Seoul Peace Olympiad he represented the Korean people. This organization drew up a declaration calling for world peace which was signed by more than six hundred prominent citizens, including Nobel Peace Prize winners and world leaders.61 Four months later, on February 4, 1989, he finished his journey of suffering at the Seoul University hospi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