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생명, 인간 -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물질, 생명, 인간 -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l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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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인문강좌시리즈 제6권. 저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 논의를 시작한 후,'양립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나'와 물질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 물질, 생명, 인간에 관한 현대 과학의 논의를 거친 후, 다시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오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는 전체 체계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를 저자는 '온생명'이라 부르며,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점은 전체 생명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실체로 인정하는 데 있다. 이는 생명 보전과 생태계 보호에도 활용될 수 있는 이론이다. 이 책은 이러한 온생명 개념을 중점으로 인간의 의식과 생명현상, 앎에 대해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요약하고, 이것을 현대 물리학의 메타적 구조를 이해할 이론적 토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2장에서는 물리학을 통해 밝혀진 물질의 존재 양상을 바탕으로, 생명이 현상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핀다. 3장은 생명체가 중추신경계를 비롯한 물질을 마련할 때, 이에 해당하는 정신이 형성되는 과정과 지적 기능을 고찰한다. 4장에서는 나와 너, 우리의 성격을 온생명인 '큰 나'와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후, 출발점이었던 칸트의 철학으로 돌아와 논의를 펼친다.
책머리에
1장 | 칸트 철학과 현대 물리학
1. 인간의 앎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2. 앎의 한 모형으로의 물리학
3. 칸트 철학과 감성·지성의 구분
4. 칸트의 공간·시간론
5. 칸트 철학과 자연법칙
2장 | 물질현상과 생명현상
1. 생명이란 무엇인가?
2. 생명에 관한 여러 관점
3. 온생명의 성격과 구현
4. 온생명, 생태계, 생물권, 가이아
5. 맺는 말: 생명의 존재론적 구조
부록 1: 엔트로피와 자유에너지
부록 2: 자체촉매적 국소 질서
3장 |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
1. 우주가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
2. 크릭의 ‘놀라운 가설’
3. 슈뢰딩거의 의식론
4. 의식 주체로서의 온생명
5. 요나스의 생명철학
4장 | 나와 너 그리고 우리 - 삶과 앎
1. 우리 삶이 놓인 자리
2. 앎의 출현과 성장
3. 서술과 서술 주체의 문제
4. 앎의 내재적 구조
5. 다시 칸트를 생각하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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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 인문학은 이 사회의 정신적 자산을 생산·공급하고 관리하는 학문이다.
그러한 자산이 고갈될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되고, 사회는 결국 그 책임을 인문학에게 물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한국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이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그 연구성과를 사회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나누며 문제의식을공유하기 위해 이 시리즈는 기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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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11월 7일 지성 새책
저자 : 장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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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융합 인문학>,<양자.정보.생명 (반양장)>,<양자.정보.생명 (양장)> … 총 48종 (모두보기)
소개 :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0여 년 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물리학 이외에도 과학 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등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공부도둑』,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물질, 생명, 인간』, 『공부의 즐거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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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인문강좌’ 시리즈 제6권. 한국 물리학계를 대표하는 중진 학자로서 오랫동안 학문의 통합과 소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과학자의 시선으로 폭넓은 인문학적 주제들을 연구해 온 장회익 교수의 40년에 걸친 학문적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처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꼭 40년 전의 일로, 그때는 물리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자는 의도에서 칸트의 철학을 학습했는데, 지금 같은 이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논의로 이 책을 출발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양립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나’와 물질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런 다음 그 답을 얻기 위해 물질, 생명, 인간에 관한 현대 과학의 논의를 거친 후, 다시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오는 선순환적 논의를 전개한다.
1장 “칸트 철학과 현대 물리학”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여기에 몇몇 본질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메타적 구조를 이해할 이론적 토대로 활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특히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재해석해 칸트 철학이 지닌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고, 현대 물리학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2장 “물질현상과 생명현상”에서는 물리학을 통해 밝혀진 물질의 존재 양상을 바탕으로 생명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핀다. 또한 우리의 일상적 생명 개념이 매우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하고, 의미 있는 개념으로서의 생명은 낱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밝힌다.
3장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서는 생명체가 중추신경계를 비롯한 일정한 하드웨어를 마련할 때, 이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형성되고 이것이 지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드웨어의 내면성이라 이를 수 있는 ‘주체의식’이 출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한다.
4장 “나와 너 그리고 우리-삶과 앎”에서는 낱생명의 주체로서 우리에게 친근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성격을 온생명의 주체인 ‘큰 나’와의 관계를 통해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성이 출현하는가를 살핌으로써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와 선순환적 논의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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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많으나 유익한 정보를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의 정보 홍수 속에서, 부적절한 외래어나 수사를 남발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게 자신의 정신세계와 학문 세계를 그려 낸 이 글의 가치가 더더욱 빛난다. 저자의 학문적 무게는 깊이 있는 통찰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지구상에 있는 여러 물리적 대상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살아 있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성격,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을 특징짓는 성격을 ‘생명’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대상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전이되는 현상을 보고, 이를 일러 ‘죽는다’ 또는 ‘생명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별 탈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생명 개념이 실제로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 우리가 판단하는 ‘생명’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생명현상, 곧
‘살아 있음’을 가능하게 해 주는 요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또 무엇까지 구비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것이 구비되어 이것들이 일으킬 현상이 ‘살아 있음’이라 불릴 그 무엇에 해당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 낼 이 전체 체계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현상이 자족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기본 단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저자는 우리가 기왕에 지녔던 생명 개념과 구분해 ‘온생명’(global life)이라 불러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저자는 ‘온생명’은 “더 이상 분할하면 생명현상으로의 존립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생명이 갖추어야 할 필수 단위임과 동시에,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이 없이도 생존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명이 지니는 자족적 단위이기도 하다”고 역설한다.
이때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에 한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부적 단위이며, 이를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생명 연구가 실패를 거두고 있는 것은 온생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생명을 낱생명적인 관점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렇듯 ‘온생명’은 개별적 생명체(낱생명)가 다른 생명체와 갖는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로서의 생명이며, 온생명이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구상에 나타난 전체 생명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생명체들로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全一的) 실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가 제시한 온생명 사상의 강점은 기존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여기에 인문학적 사유를 겸해 생명에 대한 일관성 있는 구도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 기술 문명이 낳은 환경 위기에 직면해 생명 존중과 지구 생태계 보전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데도 매우 적절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바른 삶은 바른 앎을 전제로 한다
앎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삶의 세계를 정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현실 세계에서 부딪칠 여러 삶의 단편들을 예행 또는 반추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마련해야 할 가장 소중한 내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앎의 성격 또한 삶의 양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앎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보려 하고, 들으려 하고, 읽으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최근 알려진 학습 이론을 인용해 인간의 정신 활동 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앎’의 과정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머릿속에 설혹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본인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내용들, 즉 ‘앎의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형성된 이러한 틀은 실제로 인간이 생각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적 과정을 생각할 때 기존의 ‘앎의 틀’과 ‘앎의 체계’, 곧 오감을 통해 새로 공급되는 내용(정보)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앎의 틀’을 바탕으로 해서 물질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담아내는 ‘앎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와 함께 고전 물리학과 고전역학이 물질세계에 대해 일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것을 모두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앎의 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앎의 틀’ 즉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명확한 설명은 불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이 같은 오늘날의 과학 상황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철학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혜안들이 번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난 그의 인식론은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메타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실제로 칸트는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때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지성과 감성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인데,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면 지성은 ‘앎의 틀’, 감성은 ‘앎의 체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주제로 나아갈 때도 앎이라는 주제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저자는 칸트 이후 우리가 얻은 중요한 교훈은 ‘앎의 틀’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물론 체계적인 학습 과정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도 근본적으로 심화된 가설이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저자는 물리학에 관한 한 양자역학뿐 아니라 고전역학까지 아울러 적용하는 앎의 틀 설정이 가능함을 보였으며, 이를 더 넓은 학문 분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소신이라고 밝혔다.
인간 의식은 온생명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물질이 가장 먼저 존재하고, 거기서 생명이 출현하고, 그 가운데 다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보면 인식의 주체인 ‘나’가 먼저 있고, 나의 의식을 통해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나’와 물질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물질과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대단히 문제가 많은 주장이라고 지적한 다음, 인간이 물질세계를 의지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묘한 존재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 나갈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데, 어떻게 물질이 이렇게 구성되어 자유의지대로 살 수 있게 뒷받침까지 해 주는지, 인간은 ‘굉장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연관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은 각각 세포나 조직 같은 낱생명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전체가 서로 엮어지고 유통이 되면서 마치 온생명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이 담긴 내용물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온생명 전체로 보면 하나의 큰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겠지만, 각각의 낱생명 입장에서 보면 하나로 연결된 전체 의식의 한 복사본에 다시 자체 특성을 가미한 변이본을 지니게 되는 셈”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전체로서는 온생명 의식을 이루는 가운데, 그 안에 다시 서로 간에 많은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또 독자적인 양상을 유지해 가는 낱생명 의식이 나타나며, 이러한 여러 층위의 의식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반복해서 말하면,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온생명 이론은 물질현상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생명현상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래 은하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태양을 비롯한 항성들이 형성되었다. 항성들은 우주 안에 가장 흔한 물질인 수소 원자핵들이 모여 에너지 면에서 조금 더 안정적인 헬륨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분의 에너지를 내뿜는 거대 핵융합반응체다. 이는 천체물리학적으로 가능한 현상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우주 안의 수많은 별들이 모두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지구, 성간 물질 등 별이 아닌 많은 다른 물질들이 또 있다. 이런 보편적 현상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할 때, 생명이라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의 관심사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얻은 것이 온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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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구름 ㅣ 2012-02-04 ㅣ 공감(0) ㅣ 댓글 (0)
저자의 저서로는 작년 4월 <공부의 즐거움>(2011, 생각의나무), <이분법을 넘어서>(2007, 한길사)를 읽은 후 세 번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나는 '온생명'에 대한 개념을 앍고 있었다. 오래 전에 '온생명'에 대한 내용을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제목은 기억할 수가 없다. (오래전에 읽었기 때문에 남겨 놓은 서평도 없고...ㅠ)
아무튼 그 때 '온생명'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으면서 서구 중심의 현대물리학 이론이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생명, 생명현상, 생명체계에대해 크게 공감했었다. 내 생각으로도 대기 중의 산소, 지구 상의 물 등 비생명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명체'가 독자적으로 '생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박테리아 같은 무수한 원시생명체가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자리잡고서 인간의 소화작용을 돕는 등 생명활동에 영향을 끼치는데 어찌 인간이 '스스로' 또는 '혼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한국의 물리학계를 대표하는 중진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학문의 통합과 소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과학철학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폭 넓은 인문학적 주제들을 연구했다. 그 결과 탄생한 '온생명' 이론은 생명과 자연의 본질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사회와 문명 문제에 대한 혜안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양립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나'와 물질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칸트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물질, 생명, 인간에 관한 현대 과학의 논의를 거친 후 다시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 오는 선순환적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가 처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약 40년 전의 일로, 그때는 물리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자는 의도에서 칸트의 철학을 학습했는데, 지금은 같은 이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논의로 이 책을 출발하는 것이다.
1장 [칸트 철학과 현대 물리학]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여기에 몇몇 본질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메타적 구조를 이해할 이론적 토대로 활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특히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재해석해 칸트 철학이 지닌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고, 현대 물리학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저자는 우리는 머릿속에 설혹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본인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내용들, 즉 ‘앎의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형성된 이러한 틀은 실제로 인간이 생각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적 과정을 생각할 때 기존의 ‘앎의 틀’과 ‘앎의 체계’, 곧 오감을 통해 새로 공급되는 내용(정보)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앎의 틀’을 바탕으로 해서 물질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담아내는 ‘앎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와 함께 고전 물리학과 고전역학이 물질세계에 대해 일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것을 모두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앎의 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앎의 틀’ 즉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명확한 설명은 불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이 같은 오늘날의 과학 상황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철학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혜안들이 번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난 그의 인식론은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메타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실제로 칸트는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때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지성과 감성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인데,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면 지성은 ‘앎의 틀’, 감성은 ‘앎의 체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주제로 나아갈 때도 앎이라는 주제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저자는 칸트 이후 우리가 얻은 중요한 교훈은 ‘앎의 틀’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물론 체계적인 학습 과정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도 근본적으로 심화된 가설이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저자는 물리학에 관한 한 양자역학뿐 아니라 고전역학까지 아울러 적용하는 앎의 틀 설정이 가능함을 보였으며, 이를 더 넓은 학문 분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소신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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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물질현상과 생명현상]에서는 물리학을 통해 밝혀진 물질의 존재 양상을 바탕으로 생명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핀다. 또한 우리의 일상적 생명 개념이 매우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하고, 의미 있는 개념으로서의 생명은 낱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밝힌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지구상에 있는 여러 물리적 대상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살아 있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성격,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을 특징짓는 성격을 ‘생명’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대상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전이되는 현상을 보고, 이를 일러 ‘죽는다’ 또는 ‘생명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별 탈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생명 개념이 실제로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 우리가 판단하는 ‘생명’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생명현상, 곧 ‘살아 있음’을 가능하게 해 주는 요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또 무엇까지 구비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것이 구비되어 이것들이 일으킬 현상이 ‘살아 있음’이라 불릴 그 무엇에 해당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 낼 이 전체 체계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현상이 자족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기본 단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저자는 우리가 기왕에 지녔던 생명 개념과 구분해 ‘온생명’(global life)이라 불러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저자는 ‘온생명’은 “더 이상 분할하면 생명현상으로의 존립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생명이 갖추어야 할 필수 단위임과 동시에,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이 없이도 생존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명이 지니는 자족적 단위이기도 하다”고 역설한다. 이때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에 한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부적 단위이며, 이를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생명 연구가 실패를 거두고 있는 것은 온생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생명을 낱생명적인 관점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렇듯 ‘온생명’은 개별적 생명체(낱생명)가 다른 생명체와 갖는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로서의 생명이며, 온생명이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구상에 나타난 전체 생명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생명체들로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全一的) 실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가 제시한 온생명 사상의 강점은 기존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여기에 인문학적 사유를 겸해 생명에 대한 일관성 있는 구도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 기술 문명이 낳은 환경 위기에 직면해 생명 존중과 지구 생태계 보전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데도 매우 적절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3장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서는 생명체가 중추신경계를 비롯한 일정한 하드웨어를 마련할 때, 이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형성되고 이것이 지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드웨어의 내면성이라 이를 수 있는 ‘주체의식’이 출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한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물질이 가장 먼저 존재하고, 거기서 생명이 출현하고, 그 가운데 다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보면 인식의 주체인 ‘나’가 먼저 있고, 나의 의식을 통해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나’와 물질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물질과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대단히 문제가 많은 주장이라고 지적한 다음, 인간이 물질세계를 의지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묘한 존재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 나갈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데, 어떻게 물질이 이렇게 구성되어 자유의지대로 살 수 있게 뒷받침까지 해 주는지, 인간은 ‘굉장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연관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은 각각 세포나 조직 같은 낱생명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전체가 서로 엮어지고 유통이 되면서 마치 온생명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이 담긴 내용물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온생명 전체로 보면 하나의 큰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겠지만, 각각의 낱생명 입장에서 보면 하나로 연결된 전체 의식의 한 복사본에 다시 자체 특성을 가미한 변이본을 지니게 되는 셈”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전체로서는 온생명 의식을 이루는 가운데, 그 안에 다시 서로 간에 많은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또 독자적인 양상을 유지해 가는 낱생명 의식이 나타나며, 이러한 여러 층위의 의식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온생명 이론은 물질현상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생명현상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래 은하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태양을 비롯한 항성들이 형성되었다. 항성들은 우주 안에 가장 흔한 물질인 수소 원자핵들이 모여 에너지 면에서 조금 더 안정적인 헬륨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분의 에너지를 내뿜는 거대 핵융합반응체다. 이는 천체물리학적으로 가능한 현상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우주 안의 수많은 별들이 모두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지구, 성간 물질 등 별이 아닌 많은 다른 물질들이 또 있다. 이런 보편적 현상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할 때, 생명이라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의 관심사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얻은 것이 온생명이다.
4장 [나와 너 그리고 우리 - 삶과 앎]에서는 낱생명의 주체로서 우리에게 친근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성격을 온생명의 주체인 ‘큰 나’와의 관계를 통해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성이 출현하는가를 살핌으로써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와 선순환적 논의를 시도한다.
앎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삶의 세계를 정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현실 세계에서 부딪칠 여러 삶의 단편들을 예행 또는 반추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마련해야 할 가장 소중한 내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앎의 성격 또한 삶의 양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앎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보려 하고, 들으려 하고, 읽으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최근 알려진 학습 이론을 인용해 인간의 정신 활동 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앎’의 과정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고의 상대성 원리'를 통하여 주체-객체의 관계에 대한 앎, 통합적 지식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과정은 끊임없는 선순환적 과정을 거치겠지만...
저자는 서구 학문에 기초한 기존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과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체계와 생명체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언듯 저자의 이론을 접하면 소위 '허접'하고 단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대물지식, 대생지식, 대인지식의 개념이나 낱생명, 보생명, 온생명의 개념이야말로 인간이 자신과 외부의 존재에 대해 통합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서구의 학자들과 생태운동가, 서구의 인식방법론과 인식체계 내에서 공부한 국내 학자, 지식인들들은 나와 너와 우리,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학문방법론 자체가 서로간의 연관성 자체를 무시하고 쪼개고 나누고 해석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구의 사고체계, 프레임,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이 21세기에 새로운 방향을 찾고 창조하는 츨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정보는 많으나 유익한 정보를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의 정보 홍수 속에서, 부적절한 외래어나 수사를 남발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게 자신의 정신세계와 학문 세계를 그려 낸 이 글의 가치가 더더욱 빛난다. 저자의 학문적 무게는 깊이 있는 통찰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라는 출판사의 추천사에 깊이 공감했다.
[ 2012년 2월 0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