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塚恭男先生を追慕する
茨城大学教授 真柳 誠
大塚恭男先生が二〇〇九年三月八日にご逝去され、もう二週間がすぎた。九日に訃報を受けたとき、いいようのない空しさにおおわれ、どうしても仕事に手が着かない。それで急ぎあちこちに連絡した後、帰宅して先生の思い出を妻と語りつつ夜を過ごした。十一日の通夜では懐かしい先生の温顔を仰ぎ、初めて悲しみがわき上がってきたが、今も空しさが心を占めている。時に思い出しては、大塚先生とつぶやいてしまう。一昨日の朝ようやく、これが心に穴の空いたような気持ちなのだと気づいた。
矢数道明・大塚恭男両恩師と共に(1986年7月23日矢数所長退任記念祝賀会)〔他は左より筆者・土屋伊磋雄・小曽戸洋・平馬直樹各氏〕
私は矢数道明先生と大塚恭男先生に仕えさせていただき、多くを学び、人生の恩師と尊崇している。道明先生と永別したときは沈痛の一方で、感謝の気持ちに満たされていた。どうして恭男先生では心に穴が空いてしまったのだろう。うまく整理できないが、師と仰ぐ以上に先生が大好きで、心のボスとしていたからかもしれない。私は北里東医研に在籍した十三年間、公私ともに先生にかわいがっていただき、主人に従う子犬のように慕い続けてきた。でも永別がこんなに早く来るとは。
先生に初めてお会いしたときのことは今も憶えている。一九八三年七月に中国留学から帰国した後、小曽戸洋氏らのお誘いをいただき、東医研で医史学を研究したいと決意した。道明所長からは留学中に幾度となくお手紙をいただいていたので、このことを相談申し上げると、医史学研究室長を兼任されていた大塚副所長が同意なさるなら宜しいでしょうとのこと。そこで恭男先生の面接を受けたのだった。
緊張して副所長室に入ると先生はにこやかに、何を研究したいのですかと質問される。そこで当時ずっと考えていた本草の薬性論ですと答えると、すかさず『呉普本草』で神農や黄帝などの流派ごとに異なる薬性を記すのをどう思いますかと尋ねられ、吃驚した。恥ずかしいことに、恭男先生の医史学・本草学のご研究をまったく存じ上げなかったのだから。ただ運のいいことに、私は当時中国で内部出版だったガリ版刷り『呉普本草』をコピーし、『神農本草経』と読み較べなどしていた。これが尚志鈞という本草学者の重輯で、解説に多紀元胤・森立之・岡西為人の業績が何度も引用されているなどと述べ、冷や汗だらけで面接をなんとか通過した。それから先生への師事が始まる。
本草がお好きだった先生は度々語られた。「見えない病気相手の医方より、見える薬物相手の本草は具体的に研究できる」「本草は記述年代が分かりやすいので、歴史研究に向いている」などなど。また大プリニウス『博物誌』にあるサソリ毒とトリカブト毒の相殺記事より、『呂氏春秋』にある「萬菫不殺」とは、萬(サソリの象形)と菫(トリカブトの古名)の毒が相殺する意味と喝破された。これは二千年の訓詁を正すご研究で、永遠に遺る業績である。私もサソリの咬傷にトリカブト末を使う治療が今本『肘後方』にあるのを見つけ、先生に報告して喜んでいただいたことがあった。大黄の薬用がローマ・中国ともに一世紀に始まることも、ギリシャの万能解毒薬テリアカがらみで先生にお教えいただいたひとつ。ドイツ・オーストリア留学で医史学に興味を持たれ、帰国後は順天堂の医史学研究室で小川鼎三教授の最初の門人となられた、大塚先生ならでは研究成果といえる。こうした東西医薬の比較研究は江戸の考証医学者ができなかった仕事、と先生は述べられていた。私も先生に倣い、漢字文化圏の医学史を比較研究するようになった。
先生は沢山の患者さんを待たせないため、いつも昼食が夕方になってしまう。そして夕方の用件がないときは、しばしば私たちを副所長室(のち所長室)に招き入れて下さる。これが無上の楽しみだった。先生の机の後の棚には、当時の私たちには縁遠かった美酒が沢山ある。それで勝手に大塚酒庫などと呼んでいたが、センベイをつまみにグラスを傾け、貴重なお話を拝聴した多くの楽しい時間を、いま夢のように思い出す。
温顔の大塚先生
学会や研究会の宿泊先でも、一同でお話をうかがったことは数え切れない。毎年の東洋医学会と医史学会の学術総会、富士市での東西比較医学史シンポジウム、道明先生の主唱で発足した東洋医学研究機関連絡協議会の会合などなど。先生は気どらない飲み屋がお好きで、ご自宅近くの店にはよく皆でお伴させていただいた。酔うと必ず漢詩を口ずさみ、時には揮毫される。運良くいただけた揮毫は日付・場所のメモと一緒に横浜の自宅に保存してあるが、いま茨城にいて見ることができない。
漢詩以外にもマッカーサーの「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老兵は死なず、ただ消え去るのみ)」や、井伏鱒二の名訳「花に嵐のたとえもあるぞ、さよならだけが人生だ」をしばしば口にされた。九六年の四月末、茨城大学に赴任する挨拶でご自宅へうかがったときには、「人生朝露 芸術千秋」と揮毫された写真の色紙をいただいた。これはヒポクラテスの箴言「Life is short, the Art long(人生は短く、術のみちは長い)」を先生がみごとに漢訳されたもので(郭沫若訳か)、以来ずっと研究室に掲げている。するとよく揮毫された「人生無別離 誰知恩愛重(人生別離なくんば、たれぞ恩愛の重きを知らん)」も、どうやらご自作の句らしい(小曽戸氏メモに蘇軾作と)。こうした別れの言葉をいつも口にされていたので、先生との永別にも無常感だけを強くおぼえるのだろうか。
先生の話題は私たち相手のせいかほとんど医史学がらみで、尊敬する学者の話が多かった。岡西為人先生では、京都のご自宅を訪問したときのこと、晩年にお見舞いに行くと酸素テントの中で著書のゲラ校正をされていたこと。三木栄先生では、医史学会が終ると「おい大塚君、一杯やろうか」とよく誘われたこと。九二年十二月に三木先生の訃報を朝刊で知り、外来を終えた先生と二人でなんとかお通夜に間に合うよう、堺までとんぼ返りしたのも思い出す。かつて先生は宮下三郎先生の研究に感銘を受け、杏雨書屋に初めて訪ねると本人自ら「そんな人知りまへんなー」と、とぼけられたことを楽しそうに何度も話された。私も親しく学ばせていただいた宗田一先生とは、本当に楽しく痛飲されていた。みな上方の医史学者で、今はもう宮下先生だけになってしまった。
私は大塚先生のご紹介により、三木先生・宗田先生・宮下先生・山田慶兒先生など多くの先生方と知遇を得てきた。また一九七一年にウィーンで開催されたアジア比較医学史の会議で、先生はもっとも若い発表者だったウンシュルト氏と出会い、以来ずっと氏の才を高く評価されていた。そのご縁で私もウンシュルト氏と親しくさせていただいている。みな先生のおかげである。ウンシュルト氏には三月九日に先生の訃報をメール連絡し、追悼文を翌日いただいたので大塚家に転送、また本誌にも載せてもらうことにした。
先生からいただいた揮毫
先生のご業績はとても多いが、東洋医学界と医史学界への貢献も大きく、その恩恵を私たちは受け続けている。医史学会の常任理事として東洋医学史の研究を牽引されてきたこと。小川鼎三先生のあとを承け、谷口財団による東西比較医学史国際シンポジウム(一九七六~九八)を酒井シヅ先生と開催され、アジアと欧米の若手研究者の交流と育成に努められたこと。このシンポジウムには私も二度参加させていただき強い刺激を得たが、先生たちと過ごした泊まり込みの楽しい日々は忘れられない。しかし私たちにとって最大の恩恵は、道明先生に協力されて北里東医研に医史学研究室(医史研)を開設されたことだった。矢数・大塚両所長のもと、存分に研究させていただいたおかげて今の私たちがある。
当初は研究室といっても小曽戸氏が非常勤で書庫の一角で研究する状態だったが、氏が常勤になってからは徐々に研究室の体制が備わってきた。私も八三年九月から九二年三月まで非常勤、のち常勤として九六年四月まで医史研に在籍させていただいた。恭男先生は八二年に副所長、八六年から九六年六月まで所長を勤められたので、このほぼ全期間に仕えることができた私は幸せというしかない。不得意だった英文サマリーを、先生に真っ赤に直していただいたことまである。そして道明先生を後ろ盾、恭男先生をボスとし、医局から花輪壽彦・安井広迪・平馬直樹ほかの各氏、外部からも客員研究員が続々と参加して医史研は多くの研究と仕事を達成してきた。
八〇年代は研究会を幾度も開催し、みな三十代で血気盛んゆえ、最後は取っ組み合いになるほど真剣な議論を重ねたこともある。医史学会総会では医史研の演題が十題ほどになり、そのパワーで学会の空気が一変したと思う。ついには大塚軍団と呼ばれたが、それを先生はとても満足げにされていた。先生をボスとした最大のイベントは、一九八七年の第八八回医史学会総会だろう。白金の北里大学を会場に、先生は会頭として「隋唐の医書にみる精神病とその治療」を講演された。私たちは嬉々として準備に奔走したが、とても助かったのは先生が派手な演出等を好まず、万事質素にするよう申されたこと。それで予算があまり、総会後に伊豆まで一泊の慰労会に出かけたのを、いま楽しく思い出す。
ただ東医研第三代所長となられた八六年からは、診療を終えた後も会議などが多くなり、先生の蘊蓄を拝聴できる機会は徐々に少なくなっていった。この時期、先生は『中国本草図録』全一一冊の日本語版企画を中央公論社から引き受けられ、先生の監修と私の翻訳編集により九三年に完結したのも思い出ぶかい。これで科名・種名や植物学用語・化学成分・病名ばかりか、色彩表現まで日中の相違と翻訳関係を私は習得することができた。すでに翻訳出版されていた日本語版『中薬大辞典』に先生はご不満だったので、私たちの訳に満足していただけたのがとりわけ嬉しかった。
先生のお宅にも年始のご挨拶や大塚敬節先生ご蔵書の目録作成などで、よく伺わせていただいた。そうした時いつも先生の書斎で食事やお酒をいただいたが、目を引くのは普通には見ることができない貴重なご蔵書の数々。ヨーロッパや中国関係が多いが、それらを手に取り、ひとつひとつ入手の経緯や内容を説明される先生のご様子が今も目に浮かぶ。みな先生あってのことと深謝せずにはいられない。しかし、もう二度とお目にかか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しまった。
私は先生よりちょうど二十歳下だが、初めて拝眉させていただいたとき、柔和だがリーダーとしての風格に私は惹きつけられた。このとき先生は五十三歳だった。三木栄先生のお通夜の帰途、車中で三木先生の思い出をしみじみ語られた先生は六十二歳だった。そうした先生に馬齢だけ近づいた今、先生に仕えた楽しい日々を思い出している。先生からいただいたご数々のご恩に、どう感謝申し上げたらいいのだろう。竹林の七賢、とくに稽康に共感されていた先生ゆえ、こう申し上げればちょっと微笑んでいただけるかもしれない。
私は虚にして往き、先生の恭しく泰然とした仁愛につつまれた。いま幽居された先生を追慕し、いただいた大きな教えと充実した日々、そして学恩の重さをかみしめている。
先生のご冥福を衷心より祈り申し上げ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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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카 쿄오 선생님을 추모
마나야 마코토 「오츠카 쿄오 선생님을 추모한다」 「한방의 임상」56권 4호 615-620페이지, 2009년 4월
오츠카 쿄오 선생님을 추모
이바라키 대학 교수 마야나기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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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츠카 쿄오오 선생님이 2009년 3월 8일에 체거되어 이미 2주가 지났다. 9일에 사보를 받았을 때, 좋은 듯한 빈함에 덮여, 아무래도 일에 손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서둘러 여기저기 연락한 뒤 귀가해 선생님의 추억을 아내와 말하면서 밤을 보냈다. 십일일 통야에서는 그리운 선생님의 따뜻한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슬픔이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지금도 공함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 때때로 기억하고 오오츠카 선생님과 중얼거린다. 어제 아침에 드디어 이것이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라고 깨달았다.
야수도 아키라·오오츠카 쿄오남 양은사와 함께(1986년 7월 23일 야수소장 퇴임 기념 축하회)[그 외는 왼쪽보다 필자·츠치야 이기오·오소도토·히라마 나오키 각씨]
나는 야수도 아키라 선생님과 오츠카 쿄오오 선생님을 섬기고, 미치아키 선생님과 영별했을 때는 침통의 한편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왜 쿄오오 선생님은 마음에 구멍이 버렸을 것이다. 잘 정리할 수 없지만, 스승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선생님을 사랑해, 마음의 보스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키타사토 동의연에 재적한 13년간, 공사 모두 선생님을 귀여워 주었고,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계속 모호해 왔다. 하지만 영별이 이렇게 빨리 온다고는.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983년 7월에 중국유학에서 귀국한 후, 오소토양씨들의 초청을 받아 동의연에서 의사학을 연구하고 싶다고 결의했다. 도명소장으로부터는 유학중에 몇번이나 편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상담 말씀드리면, 의사학 연구실장을 겸임되고 있던 오츠카 부소장이 동의하면 좋을 것입니다. 거기서 쿄오오 선생님의 면접을 받은 것이었다.
긴장해 부소장실에 들어가면 선생님은 은근하게,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가라고 질문된다. 그래서 당시 쭉 생각했던 혼초의 약성론이라고 대답하면, 굉장히 '오보본초'에서 신농이나 황제 등의 유파마다 다른 약성을 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끄럽게도, 쿄오오 선생님의 의사학·혼초학의 연구를 전혀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운이 좋은 것에, 나는 당시 중국에서 내부 출판이었던 갈리판 인쇄 「오보본초」를 카피해, 「신농본 초경」이라고 읽어 비교 등하고 있었다. 이것이 쇼시즈라는 본초학자의 중배로, 해설에 다키 모토모리·모리타치유키·오카니시 겐토의 업적이 몇번이나 인용되고 있다고 말하고, 차가운 땀 투성이로 면접을 어떻게든 통과했다. 그러면 선생님에게 사사가 시작된다.
혼초를 좋아했던 선생님은 자주 말해졌다. 「보이지 않는 병 상대의 의사보다, 보이는 약물 상대의 본초는 구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본초는 기술 연대를 알기 쉽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 적합하다」등 등. 또 대프리니우스 '박물지'에 있는 전갈독과 트리카부트독의 상쇄기사보다 '루씨춘추'에 있는 '만마불살'이란 만(전갈의 상형)과 스미레(토리카부트의 고명)의 독이 상쇄하는 의미로 갈라졌다. 이것은 2천년의 훈사를 바로잡는 연구로, 영원히 남는 업적이다. 나도 전갈의 물기에 트리카부트 말을 사용하는 치료가 지금 책 '팔꿈치 후방'에 있는 것을 찾아 선생님에게 보고해 기뻐해 주신 적이 있었다. 대황의 약용이 로마·중국 모두 1세기에 시작되는 것도, 그리스의 만능 해독약 테리어 카가미로 선생님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 독일·오스트리아 유학에서 의사학에 흥미를 가져, 귀국 후에는 순천당의 의사학 연구실에서 오가와 코조 교수의 최초의 문인이 된, 오츠카 선생만이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서약의 비교연구는 에도의 고증의학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저도 선생님을 모시고 한자 문화권의 의학사를 비교 연구하게 됐다.
선생님은 많은 환자를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점심이 저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저녁 용건이 없을 때는 종종 우리를 부소장실(나중에 소장실)에 초대해 준다. 이것이 무상한 재미였다. 선생님의 책상 뒤의 선반에는 당시 우리에게는 멀리 떨어진 미술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마음대로 오오츠카주고등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센베이를 안주로 글래스를 기울여 귀중한 이야기를 배청한 많은 즐거운 시간을, 지금 꿈처럼 생각나게 한다.
따뜻한 얼굴의 오츠카 선생
학회나 연구회의 숙박처에서도, 일동으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셀 수 없다. 매년 동양 의학회와 의사 학회의 학술 총회, 후지시에서의 동서 비교 의학사 심포지엄, 도명 선생님의 주창에서 발족한 동양 의학 연구 기관 연락 협의회의 회합 등등. 선생님은 기분이 들지 않는 술집을 좋아했고, 집 근처의 가게에는 자주 모두가 동반했습니다. 취하면 반드시 한시를 씹어 때로는 휘말린다. 운좋게 받은 휘호는 일자·장소의 메모와 함께 요코하마의 자택에 보존하고 있지만, 지금 이바라키에 있어 볼 수 없다.
한시 이외에도 맥아더의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노병은 죽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이나, 이후시보지의 명역 「꽃에 폭풍의 비유도 있어, 안녕 만이 인생이다」를 자주 입으로 했다. 96년 4월 말 이바라키대학에 부임하는 인사로 자택으로 향했을 때에는 '인생아사히로 예술 치아키'라고 휘말린 사진의 색지를 받았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의 잠언 「Life is short, the Art long(인생은 짧고, 수술은 길다)」을 선생님이 벌써 한역된 것으로(곽沫若訳인가), 이후 계속 연구실에 내걸고 있다. 그러자 잘 휘말린 「인생 무별리 누치 은애중(인생별 뗄 수 없으면, 어쩌면 은애의 무게를 모른다)」도, 아무래도 자작의 구인 것 같다(코소토씨 메모에 소소작이라고). 이런 이별의 말을 언제나 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과의 영별에도 무상감만을 강하게 느끼는 것일까.
선생님의 화제는 우리 상대의 탓인지 거의 의사학의 흔들림으로 존경하는 학자의 이야기가 많았다. 오카니시 겐토 선생님은 교토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의 일, 만년에 문안에 가면 산소 텐트 중에서 저서의 게라 교정을 하고 있었던 것. 미키 사카에 선생님은, 의사 학회가 끝나면 「어이 오츠카군, 한잔 할까」라고 잘 초대된 것. 92년 12월에 미키 선생님의 사례보를 조간으로 알고 외래를 마친 선생님과 둘이서 어떻게든 밤새 늦게 맞이하도록 사카이까지 뒤집어 놓은 것도 기억한다. 일찌기 선생님은 미야시타 사부로 선생님의 연구에 감명을 받고, 안우 서점에 처음 방문하자 본인 스스로 「그런 사람 알기 마헨나」라고, 흐려진 것을 즐거운 듯이 몇번이나 이야기되었다. 나도 친하게 배워 주신 소다 이치 선생님과는 정말 즐겁게 통음되고 있었다. 모두 위쪽의 의사학자로, 지금은 이제 미야시타 선생님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오츠카 선생님의 소개에 의해 미키 선생님, 소다 선생님, 미야시타 선생님, 야마다 케이코 선생님 등 많은 선생님과 지우를 얻어 왔다. 또 1971년에 비엔나에서 개최된 아시아 비교 의학사의 회의에서 선생님은 가장 젊은 발표자였던 운슈르트 씨와 만난 이래 계속 씨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나도 운슈르트 씨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 모두 선생님 덕분이다. 운슈르트 씨에게는 3월 9일에 선생님의 사례보를 메일 연락해, 추도문을 다음날 받았으므로 오오츠카가에게 전송, 또 본지에도 실어 주기로 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휘호
선생님의 업적은 매우 많지만, 동양의학계와 의사학계에의 공헌도 크고, 그 혜택을 우리는 계속 받고 있다. 의사 학회의 상임 이사로서 동양 의학사의 연구를 견인되어 온 것. 오가와 고조 선생님의 뒤를 받아, 타니구치 재단에 의한 동서 비교 의학사 국제 심포지엄(1976~98)을 사카이 시즈 선생님과 개최되어, 아시아와 구미의 젊은 연구자의 교류와 육성에 노력된 것. 이 심포지엄에는 나도 두 번 참가해 주셔서 강한 자극을 얻었지만, 선생님들과 보낸 묵은 즐거운 날들은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혜택은 도명선생님과 협력해 키타사토 동의연에 의사학연구실(의사연)을 개설한 것이었다. 야수·오츠카 양 소장 아래, 마음껏 연구시켜 주신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당초는 연구실이라고 해도 고소토씨가 비상근으로 서고의 일각으로 연구하는 상태였지만, 씨가 상근이 되고 나서는 서서히 연구실의 체제가 갖춰져 왔다. 저도 83년 9월부터 92년 3월까지 비상근, 이후 상근으로 96년 4월까지 의사연구에 재적하였습니다. 쿄오오 선생님은 82년에 부소장, 86년부터 96년 6월까지 소장을 근무했기 때문에, 이 거의 전 기간에 봉사할 수 있었던 나는 행복이라고 밖에 없다. 불특의였던 영문 요약을 선생님에게 새빨갛게 고쳐 주신 것까지 있다. 그리고 미치아키 선생님을 뒤로 방패, 쿄오오 선생님을 보스로 하고, 의국으로부터 화환 이코히코·야스이 히로바타·히라마 나오키 외 각 씨, 외부에서도 객원 연구원이 잇달아 참가해 의사연구는 많은 연구와 일을 달성해 왔다.
80년대는 연구회를 몇번이나 개최해, 모두 30대에서 혈기 번성해, 마지막은 대결이 될 정도로 진지한 논의를 거듭한 적도 있다. 의사 학회 총회에서는 의사 연의 연제가 십제 정도가 되어, 그 파워로 학회의 공기가 일변했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오오츠카 군단이라고 불렸지만, 그것을 선생님은 매우 만족했습니다. 선생님을 보스로 한 가장 큰 이벤트는 1987년 제88회 의사학회 총회일 것이다. 시로가네의 키타사토 대학을 회장에, 선생은 회두로서 「수당의 의서에 보는 정신병과 그 치료」를 강연되었다. 우리는 기뻐서 준비에 분주했지만, 매우 살아난 것은 선생님이 화려한 연출 등을 좋아하지 않고, 만사질소로 하도록(듯이) 신청된 것. 그래서 예산이 많아 총회 후에 이즈까지 1박 위로회에 나간 것을 지금 즐겁게 기억한다.
다만 동의연 제3대 소장이 된 86년부터는 진료를 마친 뒤에도 회의 등이 많아져 선생님의 蘊蓄을 배청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 시기 선생님은 '중국 혼초 도록' 전일 1권의 일본어판 기획을 중앙 공론사로부터 맡아 선생님의 감수와 나의 번역 편집에 의해 93년에 완결된 것도 떠올랐다. 이것으로 과명·종명이나 식물학 용어·화학 성분·병명 뿐만 아니라, 색채 표현까지 일중의 차이와 번역 관계를 나는 습득할 수 있었다. 벌써 번역 출판되고 있던 일본어판 「중약대사전」에 선생님은 불만이었으므로, 우리의 번역에 만족해 주신 것이 특히 기뻤다.
선생님의 댁에도 연시 인사와 오츠카 경절 선생님 장서의 목록 작성 등으로 자주 들었다. 그런 때 언제나 선생님의 서재에서 식사와 술을 받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보통 볼 수 없는 귀중한 장서의 여러가지. 유럽이나 중국 관계가 많지만, 그들을 손에 들고, 하나 하나 입수의 경위나 내용을 설명되는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띈다. 모두 선생님이 있었던 것과 심사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눈에 띄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나는 선생님보다 다만 20살이지만 처음으로 배려했을 때, 유화하지만 리더로서의 풍격에 나는 매료되었다. 이때 선생님은 53세였다. 미키 사카에 선생님의 통야의 귀도, 차중에서 미키 선생님의 추억을 한껏 말한 선생님은 62세였다. 그런 선생님에게 마령만 가까워진 지금 선생님을 섬긴 즐거운 나날을 떠올리고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은혜에, 어떻게 감사 말씀해 주면 좋을 것이다. 다케바야시의 칠현, 특히 야스야스에 공감되어 있던 선생님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면 조금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허허하게 왕래해 선생님의 괴롭고 태연한 인애에 휩싸였다. 지금 유거된 선생님을 추모해 주신 큰 가르침과 충실한 나날, 그리고 학은의 무게를 물고 있다.
선생님의 명복을 충실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