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Alain Badiou, Translated by Ray Brassier
May 2003 --- 1,000 단어 요약 평론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프랑스어 원저 <Saint Paul: La fondation de l’universalisme>(1997)의 영어판으로, Ray Brassier가 번역하여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2003년에 출간한 111쪽의 짧지만 밀도가 높은 책입니다. 목차 자체가 <Paul: Our Contemporary>에서 시작해 <Paul Against the Law>, <Love as Universal Power>, <Universality and the Traversal of Differences>로 진행되며, 바울을 신학자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주체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주는 사상가로 읽습니다.
알랭 바디우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성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
2003
번역 Ray Brassier
바디우는 왜 무신론자인데 바울을 읽는가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저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철저한 무신론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초월적 진리로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울을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불러낸다. 그 이유는 바울이 ‘무엇을 믿었는가’보다 ‘하나의 사건을 믿게 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보편적 주체가 되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바울은 성인도, 교회 신학자도 아니다. 또한 니체가 비난했던 원한과 금욕주의의 창시자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건(event)의 시인-사상가’이며, 특정한 집단의 전통에서 발생한 사건을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진리로 변환한 천재적인 정치적 조직가이다. 실제로 이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 설명도 바울이 유대 율법과 그리스 로고스라는 두 질서를 동시에 돌파하여 새로운 보편적 주체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핵심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책인 동시에 바디우 자신의 철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사건–선언–충실성–주체–진리–보편성’이라는 바디우의 핵심 개념들이 바울이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바디우가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출발점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바울에게 모든 것은 이 선언에서 시작한다. 바디우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어떤 사건을 선언하고 그 사건에 자신의 삶을 걸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은 기존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는 새로운 발생이다. 현재의 지식체계나 제도, 권력구조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갑자기 출현한다. 사건은 기존 질서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그것에 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그 사건의 의미가 드러난다.
바울에게 부활이 바로 그러한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은 유대 율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으며, 그리스 철학으로 증명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언된다.
여기서 바디우의 급진성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바울이 부활을 중심으로 만든 ‘사건의 구조’는 정치·과학·예술·사랑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정치운동이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 새로운 예술형식, 사랑의 만남 역시 기존 질서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아닌 제3의 담론
바디우는 당시의 사유를 크게 ‘그리스적 담론’과 ‘유대적 담론’으로 나눈다.
그리스적 담론은 세계를 하나의 질서 있는 우주(cosmos)로 이해하려 한다. 철학은 이 우주의 보편적 법칙을 파악하는 ‘지혜’이다.
반대로 유대적 담론은 신이 선택한 백성과 신의 표징(sign)에 기초한다. 예언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일반 법칙이 아니라 신이 특정 백성에게 보낸 특별한 징표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두 담론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둘 다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자연적·우주적 질서를, 다른 하나는 율법과 선택된 민족의 질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둘 다 아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는다”라는 바울의 구절에서 바디우는 새로운 제3의 길을 발견한다. 바울은 지혜도 표징도 아니라 ‘사건’을 선언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주체는 그리스 철학의 현자도 아니고 유대 예언자도 아니다. ‘사도(apostle)’이다.
사도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선언하고 그 결과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
이 책의 중심은 갈라디아서의 유명한 문장이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다.”
바디우에게 이것은 보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다.
바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민족, 법, 사회적 지위, 성별 같은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충실성 앞에서 그러한 차이는 진리를 결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계속 유대인이고 그리스인은 계속 그리스인이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의 사회적 차이도 현실에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진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에는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바디우 특유의 보편주의가 나온다.
보편적 진리는 모든 차이를 제거하여 모두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가로질러’ 간다.
따라서 보편주의란 “모두가 똑같아져야 한다”는 동질화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특수한 정체성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디우가 현대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공동체주의를 비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율법과 죄
바디우가 특히 중요하게 읽는 것이 로마서의 율법 논의이다.
바울에게 율법은 단순히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율법이 “하지 말라”고 명령할 때 금지된 욕망이 발생한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탐욕이 죄로 의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디우는 이를 정신분석과 매우 가까운 방식으로 읽는다. 법은 욕망을 억압할 뿐 아니라 욕망을 생산한다. 따라서 법과 죄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 상태를 바디우는 ‘죽음’의 질서라고 해석한다.
여기에서 ‘육(flesh)’과 ‘영(spirit)’도 흔히 생각하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이 아니다. 육은 법과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의 주체적 상태이며, 영은 사건 이후 새롭게 형성된 삶의 주체이다.
따라서 바울의 핵심 문제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법에 종속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삶의 주체가 되는가?”이다.
죽음보다 부활
바디우는 기독교 전통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경계한다.
그에게 바울의 혁명성은 죽음에 있지 않고 부활에 있다.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죽음 자체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이라는 기존 질서 안에서는 불가능했던 가능성이 출현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죽음과 부활을 헤겔식 변증법으로 읽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부정이 부활이라는 긍정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죽음에서 논리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것’은 과거의 모순이 저절로 발전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출현한다.
이 점에서 바디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결정론과도 거리를 둔다.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사건이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충실성을 통해 진리의 과정이 만들어진다.
믿음, 사랑, 희망
바디우는 바울의 유명한 세 덕목인 ‘믿음·사랑·희망’을 자신의 철학 언어로 번역한다.
믿음(faith)은 사건의 선언이다.
사랑(love)은 그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적 힘이다.
희망(hope)은 사건에 대한 충실성이 끝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여기서 사랑이 특히 중요하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자선이 아니다. 사건의 진리가 특정 민족이나 계급의 소유물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따라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바디우에게 윤리적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리 앞에서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보편주의의 실천이다.
차이를 없애지 않는 보편주의
이 책에서 가장 현대적인 부분은 제10장 <Universality and the Traversal of Differences>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문화적 차이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가능한가?
음식, 할례, 관습 같은 문화적 차이가 더 이상 진리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관습을 가져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 관습이 “나만이 진리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이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바디우는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한쪽에는 “우리 문화만 옳다”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모든 사람을 문화적·성적·인종적 정체성 집단으로 나누어 각자의 진리를 따로 인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가 있다.
바디우의 보편주의는 이 둘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둘을 동시에 넘어가려 한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진리는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 책의 강점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바울을 교회의 소유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바디우의 바울은 기독교 교리를 세운 성직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모든 자격과 정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성을 창조한 급진적 사상가이다.
특히 “보편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이 인종, 민족, 성별, 종교, 문화, 국가 등의 정체성을 통해 설명되는 일이 많다. 정체성은 억압받은 집단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를 정체성으로만 설명하면 인간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공통의 진리나 공동선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
“나는 누구인가?”보다
“어떤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바울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가장 큰 약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바디우가 자신의 철학에 필요한 바울만을 추출한다는 데 있다.
역사적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바디우는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종말론, 교회, 성령 등 기독교의 구체적 내용을 거의 모두 제거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놀랄 만큼 바디우 자신과 닮은 바울이다.
후대의 바울 연구자들은 바로 이 점을 비판했다. 바디우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를 강조하면서도 그 문장의 결론인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구체적 기독교적 조건을 사실상 희석한다는 비판이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바울의 보편주의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순수한 보편주의가 아니라 유대적 메시아주의 안에서 발생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바디우의 책은 역사적 바울에 대한 충실한 주석이라기보다 ‘바울을 매개로 쓴 바디우 철학’이라고 읽는 편이 정확하다.
더 심각한 문제: 보편주의는 정말 순수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특정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를 원한다.
매우 매력적인 이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보편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위험할 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 공산주의, 서구 문명, 기독교 모두 자신을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특정한 사람들의 경험과 문화를 주변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디우에게도 이 위험이 있다.
특히 그의 바울 해석은 유대교를 ‘율법과 특수성’, 바울을 ‘사건과 보편성’에 배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율법적인 유대교 대 자유로운 기독교’라는 낡은 도식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바디우의 바울론은 현대 바울학과 유대교 연구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종합 평론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바울 연구서로 읽으면 문제가 많은 책이지만, 정치철학서로 읽으면 대단히 자극적인 책이다.
바디우가 발견한 바울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편적 진리는 보편적인 장소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모든 특수성을 가로질러 보편적인 것이 된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극도로 특수한 사건이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보편적 선언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퀘이커의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that of God in everyone)’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전통의 근거는 전혀 다르다. 바디우에게 보편성은 초월적 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사건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온다. 반면 퀘이커에게 인간의 평등은 모든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신적 현존과 연결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입장은 중요한 한 점에서 만난다.
사람의 민족, 신분, 성별, 교파, 제도적 자격이 그 사람의 진리에 대한 접근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퀘이커적 관점에서 보면 바디우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사건에 대한 충실성’만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진리 확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수정할 것인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바디우의 ‘militant’, 즉 투사적 주체는 강력하지만 때때로 너무 확신에 차 있다. 퀘이커의 discernment는 진리에 대한 충실성에 침묵·경청·공동체적 검증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남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울은 최초의 보편주의자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다.
“특정한 사건에서 태어난 확신이 어떻게 타인을 억압하는 교리가 되지 않으면서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그 문제를 탁월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점 때문에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책이라기보다, ‘보편주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아주 훌륭한 첫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세진님이 계속 읽어오신 <마르크스–스피노자–바디우>의 흐름에 놓으면 이 책은 더 흥미롭습니다. 바디우의 바울은 신학자라기보다 일종의 ‘혁명적 주체 형성론’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최근 요청하신 <Marx and Spinoza>와도 연결점이 상당히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