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1

한국의 야마기시즘 정착의 역사

영성 종교 철학 의식 - 야마기시 미요조

한국의 야마기시즘 정착의 역사를 정리해주세요. 관련 문헌을 소개해주세요.
===

세진님, 요청하신 한국 내 야마기시즘(Yamagishism) 운동의 정착 역사와 주요 관련 문헌에 대한 정리입니다.

<한국 야마기시즘 정착의 역사와 전개>

<1. 도입기: 유기농업 및 기독교 농민운동과의 접목 (1970년대~1980년대 초)>

한국에 야마기시즘이 처음 소개된 배경에는 1970년대 산업화로 인한 농촌 황폐화와 화학농법의 확산에 문제의식을 느낀 농민운동가들의 고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선구자들의 도일과 특강 이수>: 1970년대 중후반, 정농회(正農會)를 비롯한 기독교계 유기농업 운동가들과 농촌 지도자들이 일본 야마기시즘 실현지(실험마을)를 견학하고 <특강>(특별강습연구회)을 이수했다. 이들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배제하고 닭의 자연 습성을 존중하는 야마기시식 자연 양계 및 순환농법에 주목했다.

  • <농업 기술 중심의 수용>: 초기에는 사상적·공동체적 측면보다는 기술적 대안으로서의 자연양계법 보급이 주를 이루었다.

<2. 확장기: 사상적 수용과 한국 특별강습연구회의 시작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

농법 도입에 이어 야마기시즘의 핵심 철학인 '무소유', '자타일체(自他一體)', '의심과 분노가 없는 사회'라는 사상적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이식되기 시작했다.

  • <한국 최초의 특강 개최 (1984년)>: 1984년 경기도 안성에서 일본 야마기시즘 안내자들을 초청하여 제1회 한국 특별강습연구회가 열렸다. 이후 교사, 농민, 종교인, 학생 등 다양한 지식인과 시민들이 특강에 참가하면서 지지층이 형성되었다.

  • <실현지 태동과 추진체 결성>: 특강 수료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에도 완전한 공동체 마을을 건설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야마기시즘 실현지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3. 정착 및 번영기: 화성 실현지 건립과 무소유 공동체 실험 (1990년대)>

1990년대는 한국 야마기시즘이 물리적 거점을 마련하고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전성기였다.

  • <산안(山岸)마을(화성 실현지) 건립 (1992년)>: 1992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화성시 남양읍)에 한국 최초이자 대표적인 실현지인 <산안마을>이 정식으로 개원했다. 참가자들은 사유재산을 공동체에 일체 귀속시키고, 공동 노동, 공동 식사, 공동 육아를 실천하며 화폐가 필요 없는 무소유 생활을 영위했다.

  • <유기농 유정란 생산과 자립>: 산안마을은 닭을 방사하여 키우는 유기농 유정란과 친환경 채소를 생산해 한살림, 생협 등 유기농 유통망과 연계하며 경제적 자립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 <대안교육 및 생태공동체 모델 부상>: 1990년대 후반 생태주의와 대안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안마을의 공동 육아와 자연주의적 삶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공동체 성공 모델로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4. 전환 및 쇠퇴기: 사회적 논쟁과 축소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 일본 본부의 인권 침해 소송과 사유재산 반환 분쟁이 알려지고, 한국 내부에서도 세대교체와 운영 방식을 둘러싼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 <일본 본부의 갈등과 여파>: 일본 실현지에서 일어난 탈퇴자들의 재산 반환 소송과 아동 교육 통제 논란이 한국에도 전해지면서, 초기와 같은 폭발적인 확장세는 멈추었다.

  • <내적 안정화와 규모 축소>: 대규모 확장보다는 기존 거점인 화성 산안마을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친환경 양계 사업과 자율적 공동체 생활을 지속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한국 야마기시즘 관련 주요 문헌>

한국어로 출간된 야마기시즘 관련 도서는 창시자의 저작 번역본, 참여자들의 수기, 학술적 연구서 등으로 나뉜다.

<1. 원전 및 사상 번역서>

  •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길> (야마기시 미요조 저, 한국야마기시즘출판부)

    • 야마기시 미요조의 기본 강연과 저술을 모아 엮은 책으로, 사유재산 부정, 무아집, 자연과 인간의 일체성을 다룬 야마기시즘의 원전 성격을 띤다.

  • <다툼 없는 행복한 사회: 야마기시즘이란 무엇인가> (야마기시즘사회실천학회 편)

    • 야마기시즘의 실천 철학, 특별강습연구회의 운영 원리, 실현지의 생활 규범을 입문자 수준에서 개괄한 책이다.

<2. 한국 실현지(산안마을) 실천 기록 및 수기>

  • <우리는 산안마을에 산다> (산안마을 사람들 저, 이후)

    • 화성 산안마을 주민들이 직접 쓴 공동체 생활 수기집이다. 전 재산을 내놓고 모인 이들이 공동 취사, 공동 육아, 양계 작업을 함께하며 겪는 일상의 기쁨과 갈등 조율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 <달걀 하나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 (관련 생태·공동체 출판물 다수)

    • 산안마을의 자연 양계법과 유기농 유정란 생산 방식, 생협과의 연대 과정을 다룬 논픽션 및 르포르타주 성격의 자료들이다.

<3. 학술 논문 및 비판적 연구>

  • <공동체적 삶의 가능성과 한계: 야마기시즘 실현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회 및 종교학회 등 학술지 수록 논문 다수)

    • 사회학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화성 산안마을의 의사결정 방식(만장일치제인 '겐토'), 무소유 제도의 지속 가능성, 가족 제도의 해체와 재구성을 분석한 논문들이다.

  • <한국 유기농업 운동사> (정농회 엮음)

    • 1970~80년대 한국 친환경·유기농업 형성 과정에서 야마기시즘 양계 기술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농업사적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

한국의 야마기시즘 역사를 조사해보면, 

  • <1965년 일본에서 수입되어 1984년 산안마을이 생겼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 오히려 한국의 농촌협업운동, 박정희 시대 농촌근대화, 자연농업, 1990년대 생태운동, 2000년대 대안공동체운동이 차례로 야마기시즘과 만나면서 <한국화>된 역사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한국 야마기시즘의 초기사가 앞에서 이야기한 <키부츠>와도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1. 전체 흐름부터 보면

시기한국 야마기시즘의 성격
1961~65한국 자체의 협업농장운동과 일본 야마기시즘의 만남
1965~70양계·농업기술과 <특강·연찬>의 도입
1969~70년대증평협업농장을 통한 농촌공동체 실험
1984화성 <산안마을> 실현지 창설
1987~90년대낙원촌·공동생활·무소유제도의 정착
1990~2000년대<생태공동체·대안공동체>로 재해석
2000년대 이후규모 축소와 한국 시민사회와의 결합
2020년대동물복지·생태·지역사회 운동으로 다시 변형

이 역사를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야마기시즘 이전에 이미 <한국적 협업농장>이 있었다

한국 야마기시즘의 역사를 1965년부터 시작하면 중요한 전사가 빠집니다.

1961년 경기도 화성에서 이건우·조한규·김병규 등이 <화남협업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농촌의 영세성과 개인농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토지와 노동을 협업하는 농촌공동체를 실험했습니다. 심지어 세 사람은 결혼으로 협업관계가 깨지는 것을 막으려고 서로 가족을 연결하는 방식까지 택했다고 후대 구술자료가 전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야마기시즘이 한국 사람들에게 갑자기 공동체라는 생각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미 한국 농촌운동가들이 <협업농장 → 공동경영 → 농촌공동체>를 고민하고 있었고, 그들이 일본에서 야마기시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3. 1965년: 일본 야마기시회와 만나다

여기서 자료가 약간 갈립니다.

김소남의 2021년 연구는 정치인·농촌개발운동가 <안동준(安東濬)>이 1965년 일본 야마기시회 실현지를 방문하여 산안회식 공동체를 한국 농촌에 적용할 수 있는 모델로 보았다고 밝힙니다. 그는 이후 조한규 등을 증평협업촌 구상에 참여시키게 됩니다.

한편 산안마을 관계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자료에서는 <윤세식·조한규 등>이 1965년 일본 야마기시 농장에 장기간 머물면서 양계법과 공동체 원리를 배워 12월 귀국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를 <1965년을 전후하여 안동준·윤세식·조한규를 포함한 한국 농촌운동가 네트워크가 여러 경로로 일본 야마기시즘을 접했다>고 정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처음 들어온 것은 <철학>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야마기시식 양계법 + 협업농업 + 공동생활>이라는 패키지였습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 야마기시즘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4. 1966년: <닭>과 <특강>이 함께 들어온다

1966년은 사실상 한국 야마기시즘의 원년입니다.

산안마을이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966년 한국 최초로 야마기시식 계사 두 칸을 짓고 닭을 입식했습니다.

동시에 1966년 1월부터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 즉 흔히 <특강>이라고 부르는 집중연찬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신종교사전은 윤세식 등이 자연농법연구회를 조직하여 제1회 특강을 개최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닭을 건강하게 잘 키울까?>

라는 농업기술이었지만,

<어떻게 인간이 행복하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즉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양계 → 농법 → 인간관 → 연찬 → 공동체>

라는 확대가 일어났습니다.


5. 1968~70년: <증평협업농장>이라는 잊힌 실험

한국 야마기시즘을 이해하려면 산안마을보다 먼저 <증평협업농장>을 알아야 합니다.

김소남의 연구에 따르면 1968~69년 조한규 등을 중심으로 야마기시즘 특강이 열렸고, 1969년에는 안동준이 추진한 <괴산지구 농공협업단지>가 정부의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지원대상이 되면서 증평협업촌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일본 야마기시즘은 상당히 <국가 바깥의 유토피아적 공동체>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야마기시즘 + 박정희 정부의 농촌근대화 정책>

이 잠시 결합했습니다.

즉 야마기시즘이 반체제적 공동체로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정부 역시

<협업농장·규모화·근대적 농촌>

이라는 관점에서 이 실험을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1970년대 증평협업농장의 주요 구성원 상당수가 야마기시 특강을 수료했고, 증평농장은 한국 산안회의 핵심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 지원이 줄어든 뒤에는 오히려 민간 주도의 협업농장으로 전환하려 했습니다.

이 시기를 저는 <한국 야마기시즘의 제1기>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6. 여기에서 뜻밖에 <키부츠>가 등장한다

앞에서 키부츠와 야마기시즘을 비교한 것이 한국사와 직접 연결됩니다.

증평협업촌 창설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안동준은 1966년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

이라는 책까지 냈습니다. 김소남의 연구에서도 이 책이 주요 참고자료로 등장합니다.

당시 한국 농촌개발 엘리트들의 머릿속에는

  • <이스라엘 키부츠>
  • <일본 야마기시회>
  • <한국 협업농장>

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모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두 <영세한 개인농을 넘어 공동경영을 하면 농촌을 근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 안에서 관찰되었습니다.

다만 야마기시즘은 거기에 <無所有·無我執·研鑽·一体>라는 훨씬 더 급진적인 인간개조의 철학을 덧붙였습니다.

이 부분은 별도로 연구할 만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7. 1984년: 드디어 <산안마을>이 생기다

1960~70년대의 여러 실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일본처럼 안정된 <실현지>가 아직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4년입니다.

1984년 1월 19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구문천리에 <6가족>이 모여 한국 최초의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산안마을>입니다. 공식자료도 이 날짜를 창설일로 기록합니다.

중심 인물은 <윤성열>이었습니다.

그는 1965년 일본에서 야마기시즘을 배웠던 윤세식의 아들이었습니다. 윤세식이 병으로 일찍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자 아들이 그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므로 계보는 대략

윤세식·조한규 등의 1965년 도입

특강·농업실험

여러 차례 공동체 실험과 실패

윤성열 등의 1984년 산안마을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8. 산안마을의 핵심: <농장>에서 <생활세계>로

산안마을에서는 야마기시즘이 더 이상 농업기술이 아닙니다.

<무소유·공용·일체생활>을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 개인의 급여가 없고,
  • 생산수단과 주요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 생활비도 공동체가 담당하고,
  • 중요한 일은 <연찬>을 통해 결정합니다.

1996년에는 <야마기시즘 실현지 영농조합법인>이 만들어졌고 재산을 법인에 귀속시키는 구조를 마련했습니다.

또 1987년부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낙원촌>을 시작했습니다.

한때 인구도 크게 늘었습니다.

1984년 시작 당시 약 11명에서 2000년경에는 약 50명까지 증가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9. 1990년대의 중요한 변신: <일본 공동체>에서 <한국 생태공동체>로

제가 한국 정착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보는 부분입니다.

1990년대가 되면 야마기시즘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언어가 변합니다.

더 이상 <일본에서 들어온 이상사회운동>만이 아니라

  • <생태공동체>
  • <대안공동체>
  • <자연농업>
  • <생명운동>

이라는 한국 시민사회의 언어로 번역됩니다.

상징적인 것이 1993년 <녹색평론> 제12호에 실린 유정길의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야마기시가이」>

입니다. 당시 <녹색평론>은 김지하의 생명사상, 농민문화, 탈성장, 생태위기 등을 함께 다루고 있었습니다. 즉 야마기시즘이 한국의 <생명·생태 담론>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2000년 송명규·김영모·김병량 등은 산안마을을 <생명지역주의 bioregionalism>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에서는 산안마을의 <무소유·무아집·천지인의 조화·자타일체·순환농업>을 현대 생태철학과 연결하여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때부터 산안마을은 국내 생태공동체 연구에서 대표 사례가 됩니다.


10. 그런데 바로 이 시점부터 비판적 질문도 필요해진다

초기의 한국 생태운동 문헌은 산안마을을 상당히 낙관적으로 평가합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

  • <재산반환>
  • <어린이 집단양육>
  • <공동체 규율>
  • <개인의 자유>
  • <연찬과 집단압력>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한국 종교학에서도 야마기시회를 단순한 생태공동체가 아니라 <일본계 신종교 또는 수양도덕계 운동>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한국신종교사전>도 야마기시회를 일본계 수양도덕계 운동으로 다루면서 일본 실현지에서 제기되었던 재산·노동·교육·규율 문제들을 함께 소개합니다.

그래서

<1990년대 생태공동체 연구>만 읽으면 너무 긍정적이고,

<컬트 비판>만 읽으면 또 지나치게 부정적입니다.

최근 연구가 이 두 극단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11. 2000년대 이후: <야마기시즘>보다 <산안마을>이 강해진다

산안마을은 일본 본부를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점차 한국 지역사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특히

  • 지역 환경운동,
  • 생협,
  • 친환경농업,
  • 어린이 프로그램,
  • 초록축제,
  • 동물복지

등과 결합합니다.

산안마을에서 1986년 시작한 <거저의 축제>는 2001년 이후 화성지역 시민사회가 이어받아 <초록축제>로 발전했습니다. 돈 거래를 최소화하고 자원봉사·환경·어린이 중심 축제를 지향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폐쇄적 실현지 안에서 완전사회를 만든다>에서

<주변 사회와 관계하면서 야마기시적 가치 일부를 확산한다>로 중심이 조금 이동한 것입니다.


12. 2021년 조류독감 사건은 또 하나의 전환점

2020년 말 인근 농장에서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산안마을의 약 3만7천 마리 닭도 예방적 살처분 대상이 되었습니다.

산안마을은 자기 농장의 닭들이 감염되지 않았으며 획일적인 반경 기준이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약 두 달 동안 행정명령에 저항했습니다. 결국 2021년 2월 닭을 살처분했지만, 이 사건은 방역정책 개선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장별 방역 수준을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국 야마기시즘의 새로운 면이 나타납니다.

과거: <국가와 대립하지 않고 내부에서 이상사회를 실현>이었다면,

2021년에는 <과학·동물복지·생명윤리를 근거로 국가정책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산안마을 사람들은 이것마저 <대립투쟁> 방식이 아니라 연찬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했다고 회고합니다.

야마기시의 <研鑽>이 한국 시민운동 방식과 결합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13. 2024년 40주년: 야마기시즘의 <한국화>

2024년 산안마을은 창설 40주년을 맞았습니다.

당시 구성원과 체험자는 약 16명 정도로, 전성기의 50명에 비하면 크게 줄었습니다. 그러나 2·3세대가 남아 있고 양계사업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젊은 세대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가족별 사생활이 거의 없는 집단주거가 가능했지만 새 세대는 가족별 주거환경을 개선했습니다. 공동체 바깥에서 취업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한 구성원은 2024년 인터뷰에서 요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름이 야마기시즘이든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함께 생각을 나누는 연찬을 계속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서도 법인 정관에는 <무소유>가 가능하도록 하는 원리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봅니다.

한국 야마기시즘은

  • <교조 야마기시 미요조>에서
  • <야마기시즘이라는 이념>으로,
  • 다시 <산안마을이라는 실제 공동체>로,

그리고 이제

  • <연찬·생태·공유·동물복지라는 생활원리>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한국 야마기시즘은 일본 야마기시즘의 복사판이 아니다

한국 정착사를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야마기시즘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농촌협업운동·농촌근대화·자연농업·생태운동·대안공동체운동·지역 시민운동을 차례로 통과하면서 상당히 한국적인 산안마을 운동으로 변형되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처음과 현재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 1960년대에는 <어떻게 농촌을 잘살게 할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 1980년대에는 <무소유 일체사회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가?>였습니다.
  • 1990년대에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가 가능한가?>가 되었고,
  • 2020년대에는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면서 개인·가족·지역사회·동물·자연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 것인가?>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자체가 야마기시즘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문헌 — 읽는 순서를 추천한다면

우선순위문헌읽을 이유
1이태영, 「야마기시즘 운동의 구상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농촌사회> 34(2), 2024, 81–120<가장 먼저 읽을 논문>. 일본과 한국의 전체 역사를 최신 연구로 정리
2김소남, 「1960~1970년대 증평협업농장의 설립과 운영과정 연구」, <동방학지> 197, 2021, 249–294한국 도입 초기의 안동준·조한규·산안회·증평협업촌을 밝힌 핵심 연구
3이태영·신승철, <낭만하는 공동체 넘어서기―공동체성이란 무엇인가>, 알렙, 2022산안마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태영의 <내부경험+비판적 성찰>. 강력 추천
4유정길,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야마기시가이」, <녹색평론> 12, 1993한국 생태운동이 야마기시즘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자료
5송명규 외, 「생명지역주의의 이론과 실천―산안마을을 사례로」, 2000산안마을을 생태공동체로 본 대표 연구. 긍정적 평가가 강하므로 비판적으로 읽을 것
6야마기시즘 실현지 문화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야마기시즘 농법―돈이 필요 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 이야기>, 1999내부자의 농법·생활관을 알 수 있는 1차 자료
7이원범 편, <한국 내 일본계 종교운동의 이해>, 제이앤씨, 2007야마기시즘을 <일본계 종교·수양운동>의 맥락에서 볼 수 있어 생태공동체 연구를 교정해 줌
8이원범·남춘모, <한국 속 일본계 종교의 현황>, 대왕사, 2008위 연구의 자료편 성격. 교단조직·한국 유입과정을 확인하기 좋음
9김태경, 「연찬-학육방식을 통한 대안적 환경가치교육 방안―일본 도요사토 실현지 사례분석」, 서울대 박사논문, 1999<研鑽과 교육>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중요
10한겨레21, 「40년동안 무소유? 전쟁같고 천국같은 기적의 공동체」, 20241·2·3세대의 현재 목소리와 40년 변화가 매우 잘 나타나는 르포

이 가운데 <① 이태영 2024 + ② 김소남 2021 + ③ 이태영·신승철 2022> 세 자료만 읽어도 한국 야마기시즘의 뼈대는 거의 잡힙니다. 이태영의 2024년 논문은 한국에서는 처음 농민운동가들이 받아들였다가 이후 <대안 공동체 운동의 방법론>으로 재해석되었다고 평가하며, 단순히 “훌륭한 생태공동체” 또는 “전체주의적 컬트”라는 이분법을 피하자고 제안합니다. 저는 이 접근이 현재로서는 가장 균형 잡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세진님이 지금까지 살펴본 주제들과 연결하면, 한 가지 연구축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 키부츠 → 안동준의 농촌협업 구상 → 일본 야마기시즘 → 조한규의 자연농업 → 증평협업농장 → 산안마을 → 1990년대 한국 생명·생태운동>

이 계보를 추적하면 야마기시즘은 더 이상 일본의 특이한 공동체 하나가 아니라, <1960년대 산업화에서 1990년대 생명운동으로 넘어가는 한국 농촌사상의 숨은 연결고리>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조한규가 나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자연농업 Korean Natural Farming>으로 독자적인 길을 간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조한규는 1965~67년 일본 농업연수를 거친 뒤 자연농업을 보급했고 이후 야마기시즘 공동체 자체와는 다른 농법운동을 발전시켰습니다.

다음에는 바로 이 <안동준–키부츠–야마기시–조한규–산안마을–한국 생명운동>의 계보를 1,500단어 정도로 자세히 추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

조사해보면 이 계보는 한 줄의 직선이라기보다 <두 개의 외국 모델과 한국 농촌운동이 만나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1990년대 생명·생태운동에서 다시 만나는 역사>로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합니다.

먼저 전체 구조를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화남협업농장·한국 농촌협업운동>

<안동준> ← <이스라엘 키부츠> + <일본 야마기시즘>

<증평협업농장>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짐

<조한규 → 한국자연농업(KNF)>
<윤세식·윤성열 → 야마기시즘 → 산안마을>

그리고 1980~90년대에 별도로 성장한
<장일순·박재일·한살림 → 한국 생명운동>과 만나면서

<생태농업·생협·생태공동체·생명평화운동>이라는 더 넓은 장을 형성한다.

따라서 <야마기시즘이 한살림 생명운동을 낳았다>고 말하면 틀립니다. 두 운동은 독립적인 계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상당히 가까운 생태적·생활운동적 공간에서 만나고 상호 침투합니다.

1. 출발점은 야마기시 이전의 <한국 농촌협업운동>이었다

한국 야마기시즘의 역사를 일본에서 시작하면 절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1961년 화성에서 이건우·조한규·김병규 등이 <화남협업농장>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젊은 농촌운동가들은 영세 자작농이 각자 작은 농지를 경작해서는 농촌 빈곤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토지·노동·농기계·경영을 협동화하는 방법을 실험했습니다. 이들은 협업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가족관계까지 서로 결합할 만큼 공동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이미 다음 문제가 있었습니다.

<개인농을 넘어선 협동농업은 가능한가?>

일본 야마기시즘과 이스라엘 키부츠는 이 질문에 대한 <외국의 성공 사례>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야마기시즘은 한국에 완전히 낯선 유토피아를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한국 농촌협업운동에 <훨씬 더 급진적인 공동체 철학>을 제공했습니다.


2. 안동준에게 <키부츠와 야마기시>는 모순되는 모델이 아니었다

여기서 안동준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안동준은 1960년대 한국 농촌개발의 가능성을 해외에서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 초청 시찰 등을 통해 키부츠와 모샤브를 관찰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1966년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을 출판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이스라엘은 단순한 중동국가가 아니라 <가난하고 자원도 부족하지만 조직과 협동으로 농업근대화를 성공시킨 국가>로 읽혔습니다.

1960년대의 키부츠가 한국 농촌개발론자들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명확합니다.

개인의 영세농업 대신 집단적 생산을 하고, 토지·기계·판매·소비를 공동화하며, 새로운 농촌을 계획적으로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동준은 1965년 일본의 야마기시회 실현지도 방문했습니다. 김소남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야마기시 공동체 역시 한국에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모델로 평가했고, 이후 조한규를 증평협업촌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뜻밖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키부츠 = 사회경제적 조직 모델>

<야마기시 = 인간과 공동체의 생활혁명 모델>

이었던 것입니다.

안동준에게 둘은 반드시 경쟁관계가 아니었습니다.


3. 2026년의 새로운 연구는 이 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김민지의 2026년 연구는 안동준과 증평협업농장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안동준의 1968년 증평 구상에는 <이스라엘과 일본이라는 두 모델>이 동시에 작용했습니다. 특히 초기 증평협업농장은 키부츠를 모델로 하는 <반공자유의 이상적 농공협업>을 지향했습니다. 즉 사회주의적 집단농업과 비슷하게 보이는 공동화를 오히려 <반공적 농촌근대화>를 위해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냉전기의 흥미로운 역설입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면서도
<공동생산·공동생활>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당시 한국 농촌개발론은 좌우 이념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키부츠>
<야마기시>
<협동조합>
<새마을식 농촌개발>
<자본주의 농업경영>

등을 필요한 만큼 선택적으로 결합했습니다.


4. 1969년 증평협업촌: 세 흐름이 실제로 만난 장소

1968~69년 조한규를 중심으로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가 이루어졌고, 1969년 정부의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지원을 받으면서 <괴산지구 농공협업단지>, 즉 증평협업촌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증평은 매우 특이한 장소입니다.

여기에는 동시에

<박정희 정부의 농촌근대화>

  • <안동준의 키부츠적 협업촌>
  • <야마기시즘의 연찬과 공동체의식>

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농업만 공동화한 것이 아니라 미싱자수공장 등을 세워 <농업+공업>이 결합된 농공협업촌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입주자가 대거 탈퇴하고 경영에도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1973년 이후 정부 지원이 줄어들면서 증평농장은 오히려 국가 의존에서 벗어나 민간 협업농장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1970년대 주요 구성원 대부분이 산안회 특강을 이수했고 증평은 한국 산안회의 핵심 거점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후 갈라집니다.


5. 첫 번째 갈래: <야마기시 → 조한규 → 한국자연농업>

조한규는 야마기시즘 전체를 그대로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1965~67년 일본에서 농업을 연구했고, 이후 자연농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훗날 한국자연농업중앙회, 자연농업생활학교 등을 만들었으며 일본과 해외에도 자신의 농법을 보급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한규가 일본에서 야마기시 미요조에게 직접 사사했다>고 쓰는 자료들이 있는데, 문자 그대로는 불가능합니다. 야마기시 미요조는 1961년에 이미 사망했고 조한규의 일본 연구는 1965년부터입니다. 따라서 조한규는 <야마기시 자신>보다는 야마기시가 남긴 농업사상·문헌·야마기시회 및 실현지의 경험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더구나 조한규의 자연농업은 야마기시 하나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일본의 오이노우에 야스시(大井上康)의 영양주기론, 시바타 긴시(柴田欣志)의 효소·미생물적 사고 등도 흡수하고, 여기에 한국의 발효문화와 자신의 농사경험을 결합했습니다. 훗날 이것이 <Korean Natural Farming, KNF>이라는 독립적인 농법체계가 됩니다.

그래서 변화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야마기시:
<좋은 농법 → 좋은 인간 → 좋은 사회>

조한규:
<좋은 농법 → 살아 있는 토양 → 농민의 자립>

야마기시에게 농업은 <무소유 일체사회>로 가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조한규에게서는 점차 <외부 투입재에 의존하지 않는 생태적 농업기술> 쪽이 독립합니다.

야마기시즘의 <사회혁명적 요소>보다 <생명농업적 요소>를 선택적으로 계승한 셈입니다.


6. 두 번째 갈래: <야마기시 → 윤세식·윤성열 → 산안마을>

다른 쪽에서는 야마기시의 <공동체 자체>를 계승했습니다.

산안마을 윤성열의 증언에 따르면 윤세식과 조한규 등은 1965년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연수를 받았고, 1966년 화성 고목천에서 최초의 야마기시식 공동체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윤세식의 아들 윤성열 세대가 이 실험을 다시 이어갑니다.

몇 차례의 실패 뒤 1984년 1월 19일 화성 구문천리에서 6가족이 모여 정식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산안마을입니다.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에 제출된 산안마을 자료도 이 연혁을 확인합니다.

여기에서는 조한규와 달리 야마기시즘의 핵심이 그대로 남습니다.

<무소유>

<일체경영>

<일체생활>

<연찬>

<야마기시식 양계>

입니다.

즉 같은 1960년대 농촌운동에서 출발했지만,

<조한규는 농법을 독립시켰고,
산안마을은 생활공동체를 독립시켰다>

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야마기시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개의 한국적 변형>입니다.


7. 세 번째 흐름: <장일순–한살림 생명운동>은 별도로 발생했다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야마기시 → 산안마을 → 한살림>

이라는 직선 계보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생명운동인 한살림은 원주지역의 장일순·박재일·김지하·최혜성 등의 사상과 협동조합운동에서 성장했습니다.

장일순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을 넘어 생명과 협동의 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생활협동조합을 중요한 실천방식으로 보았습니다.

1989년의 <한살림선언>은 산업문명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전일적 생명>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인간과 자연의 공생>

<도시와 농촌의 호혜성>

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에는

동학,
해월 최시형,
협동조합운동,
원주 가톨릭 사회운동,
장일순,
김지하의 생명사상,
서구 생태주의

등 여러 계보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살림의 생명사상이 야마기시즘에서 왔다>고 하면 지나친 주장입니다.


8. 그런데 1990년대에 두 강이 만난다

직접적인 사상 계보는 아니지만 1990년대로 들어오면 야마기시즘과 한국 생명운동은 같은 <생태적 공론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상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유정길의 1993년 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야마기시가이」>

입니다.

이 글이 생명·생태 담론의 중요한 매체에서 소개되면서 야마기시는 더 이상 <일본에서 온 특이한 농업운동>이 아니라

<생태공동체>

<대안적 생활>

<자연과 인간의 일체>

라는 관점에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헌은 최근 이태영의 야마기시즘 역사연구에서도 중요한 한국 수용사 자료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언어가 크게 바뀝니다.

1960년대에는

<협업 → 생산성 → 농촌근대화>

였는데,

1990년대에는

<공동체 → 생명 → 생태 → 문명전환>

이 됩니다.

같은 야마기시 공동체인데 한국인이 그것을 읽는 틀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9. <닭과 달걀>이 사상을 연결했다

사상사의 계보만 보면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한국 생명운동에서는 <먹거리>가 사상보다 중요했습니다.

생명사상을 책으로 전파하는 것보다

<어떻게 닭을 키우는가>

<어떤 달걀을 먹는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떻게 만나는가>

가 더 강력한 실천이었습니다.

야마기시식 양계법을 채택한 생산자들이 생협에 유정란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 공식 자료에는 야마기시식 양계법을 쓰는 눈비산마을이 1987년부터 한살림에 유정란을 공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안마을 역시 오늘날까지 생활협동조합을 중요한 유통망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야마기시식 사육철학·동물복지·무항생제 양계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야마기시와 한살림은 매우 구체적으로 만납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

는 한살림 논리와,

<나와 닭과 흙과 소비자가 하나의 순환 안에서 함께 번영한다>

는 야마기시 논리가 <먹거리 생산과 유통>에서 접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철학적 혈통은 다르지만 생활세계에서는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10. 그런데 중요한 철학적 차이도 남았다

바로 앞에서 살펴본 <無我執·研鑽> 문제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야마기시즘은 사회 자체를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만들려고 합니다.

<무소유 → 공동노동 → 공동생활 → 연찬 → 일체>

입니다.

반면 한살림은 모든 조합원에게 재산을 포기하거나 공동거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개인 가정과 사유재산을 유지하면서 생산·소비·협동을 바꾼다>

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두 운동의 문명비판에는 닮은 점이 있지만 사회모델은 상당히 다릅니다.

야마기시는 일종의 <코뮌 모델>입니다.

한살림은 <네트워크 모델>입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11. 그래서 <한국 생명운동>에 들어간 야마기시의 유산은 무엇인가

저는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고 네 가지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농업을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생명관계로 보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생산자와 소비자, 인간과 동물, 흙과 식물을 하나의 순환계로 보는 사고>입니다.

셋째는 <사상을 생활에서 검증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야마기시에서 철학은 토론으로 끝나지 않고 양계장·식당·주거·재산·교육에까지 내려갑니다.

넷째는 <연찬>입니다. 이태영은 최근 연구에서 야마기시즘이 한국에서 농민운동의 한 방식으로 들어왔다가 점차 <대안 사회운동의 방법론>으로 재발견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네 번째 유산이 오히려 가장 오래갈 수도 있습니다.


12. 산안마을 자체도 <생명운동화>되었다

흥미롭게도 산안마을도 옛날의 폐쇄적 실현지 모델에 그대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지역 환경운동과 관계를 확대했습니다. 최근까지 산안마을 출신 윤성열이 화성환경운동연합 고문으로 참여하는 등 지역 환경운동과 조직적 관계가 확인됩니다.

2020~21년 조류인플루엔자 사태 때에는 산안마을이 예방적 살처분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산안마을은 단순히 <우리 닭을 살려 달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농장별 방역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대량살처분의 문제와 동물복지를 제기했습니다. 실제 당시 산안마을은 동물복지농장·HACCP·방역선진화농장 인증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야마기시의 옛 표현인

<나, 모두와 함께 번영한다>

가 21세기 한국에서는

<동물복지·생명권·환경운동>

이라는 언어로 번역된 셈입니다.


13. 가장 중요한 결론: <근대화운동이 생명운동으로 변했다>

이 전체 역사를 저는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가장 흥미롭다고 봅니다.

1960년대에 안동준과 조한규 세대가 물었던 질문은

<어떻게 하면 가난한 한국 농촌을 근대화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키부츠,
일본 야마기시,
협업농장,
기계화,
농공병진

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험 안에 이미 산업화와는 다른 씨앗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소유의 문제>

<경쟁이 아닌 협동>

<농민의 자립>

<생명의 순환>

이라는 문제였습니다.

1970~80년대를 지나면서 이것이 두 방향으로 분화합니다.

조한규는

<농업의 생태적 자립>

으로 갑니다.

산안마을은

<생활의 공동체적 자립>

으로 갑니다.

그리고 장일순·한살림 계열은 별도의 길을 통해

<산업문명 자체를 생명문명으로 전환하자>

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1990년대가 되면 이 세 흐름이

<생태농업·생협·생태공동체·생명운동>

이라는 하나의 넓은 공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14. 한 장의 계보도로 다시 그리면

단계핵심 인물·운동중심 질문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
1961이건우·조한규·김병규, 화남협업농장개인농을 넘어설 수 있는가협업농업
1960년대안동준·키부츠협동으로 농촌을 근대화할 수 있는가공동경영
1965 이후안동준·야마기시회경제뿐 아니라 사람도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연찬·공동체
1969증평협업농장국가정책+협업+공동체가 가능한가실험적 농공공동체
1970~90년대조한규농민이 화학농업과 외부자재에서 자립할 수 있는가한국자연농업
1984~산안마을무소유·일체생활이 실제 가능한가생태공동체
1980~90년대장일순·박재일·한살림산업문명을 생명문명으로 바꿀 수 있는가생명운동
1990년대 이후생협·생태운동·산안마을 등생활 자체를 어떻게 생태화할 것인가생명·평화·생태 네트워크

읽어볼 핵심 문헌

  • 김소남, 「1960~1970년대 증평협업농장의 설립과 운영과정 연구」, <동방학지> 197, 2021 — 이 계보의 <1960~70년대>를 밝히는 가장 중요한 논문입니다.
  • 김민지, 「자격 있는 자들의 공동체: 박정희 정부 시기 증평협업농장을 통해 본 ‘협업’의 구성」, 2026 — 가장 최신 연구이며 <키부츠+야마기시+반공 농촌근대화>의 결합을 특히 잘 보여줍니다.
  • 이태영, 「야마기시즘 운동의 구상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 <농촌사회> 34(2), 2024 —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야마기시즘 전체를 가장 균형 있게 볼 수 있습니다.
  • 안동준,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 교학사, 1966 — 1960년대 한국인이 키부츠를 어떻게 읽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1차 자료입니다.
  • 조한규, <『조한규의 자연농업』> — 야마기시에서 갈라져 나온 <농법의 한국화>를 보는 핵심 자료입니다.
  • 이태영·신승철, <『낭만하는 공동체 넘어서기―공동체성이란 무엇인가』>, 2022 — 산안마을 내부 경험을 가진 이태영이 공동체를 무조건 찬양하지 않고 그 가능성과 권력 문제를 함께 성찰한다는 점에서 특히 좋습니다.

이 계보를 추적해보니 한 가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야마기시즘은 한국 생명운동의 뿌리>라기보다 <한국 생명운동을 이루게 된 여러 지류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하나>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지류의 독특한 점은 장일순이나 김지하처럼 먼저 철학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닭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농사를 어떻게 함께 지을 것인가>라는 극도로 구체적인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에서는 <야마기시–조한규 자연농업–장일순·한살림–무위당–동학>을 놓고 비교하면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 경우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一体>가 한국의 <한살림·모심·생명>과 만나면서 무엇은 닮고 무엇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지를 사상사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