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 선생님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이은선
업데이트 2026.09.19
<과거와 미래 사이> 본 설교는 지난 8월 3일(월) 서촌 문화공간 길담에서 있었던 변선환 선생님 31주기를 추모하는 작은 모임에서 나누었던 설교입니다. 이번 9월 17일 감신대에서 있었던 변선환 학술제 파행과 관련해서 다시 나누고자 합니다.
-변선환 선생님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세종대 명예교수)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을 사라집니다. 내가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린서전서 13장, 8-13)
1.
작년 30주기에는 독일 베를린에 가 있느라고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31주기를 맞아 갑작스럽게 말씀 나눔을 맡고 보니 어느덧 또 한해가 지나갔고, 내년에는 선생님 탄신 1백 주년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나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 8절부터 13절의 말씀을 잠깐 성찰해 보기 위해서 가져온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라는 제목은 사실 20세기의 고명한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저서 명이기도 합니다. 선생님보다 꼭 20년 연배인 1907년생의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서구 사회에서 그동안 삶을 지탱해 오던 ‘전통’과 ‘현대’, ‘권위’란 무엇이고 ‘자유’와 ‘교육’, ‘문화’, ‘정치’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이제 ‘우주 정복’까지 나선 인간 문화와 집의 여러 현실을 아주 독창적으로 성찰하면서 그러한 모든 정황의 인간을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여서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여기 지금의 실존으로 그려주었습니다.
저도 오늘 문득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고 탄신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30년이 지났다는 것은 이제 한 세대가 지나갔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세대의 시작에 들어섰으니, 그동안 우리가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것과 더불어 어떠한 과거를 만들어 왔고, 또한 앞으로 어떤 미래를 꾸려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선생님은 당시 한국적 정황에서 누구도 발설하기 어려운 동서 문명의 종교간 대화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셨고, 그 발설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고 떠나셨습니다. 그 주제와 물음을 받아서 우리가, 소위 그분의 ‘제자 그룹’이 지난 30년간 어떠한 과거를 만들어 왔는지, 지금 우리 상황은 어떠하며, 앞으로 선생님에 의해서 선취 되었던, 그럼에도 오늘 인간 종교적 삶과 문명에서 여전히 근본적인 전환과 도전을 요구받고 있는 신앙적 ‘가종(加宗, religious layering)’의 물음 앞에서 우리 각자는 어떠한 위치에 서 있고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는 생각들입니다.
2.
일찍이 아렌트는 그녀의 다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특히 ‘반(反)유대주의’ 분석과 더불어 어떻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거와 역사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자신들 전통과 역사의 영적 의미를 간과한 채 기이하게 절망적으로 오해하면서 그것을 하나의 인종주의적 근거가 되도록 했는지를 세차게 비판합니다. 아렌트는 유럽 18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의 동화(同化) 유대인에 관한 서술로서 “권력이 없이 부만 가진 사람들”, 또는 “눈에 띄는 역할을 수반하지 못하는 부”, “사회의 기생충처럼 증오를 받으며 역겨운 것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말은 오늘 어쩌면 초자본주의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한국 기독교, 교회, 대학에 대한 말이기도 한데, 이 모든 것이 자신들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저버리고 후세대로서 새롭게 맞이하는 사회와 삶의 상황에서 그 전통과 역사의 참뜻으로부터 나오는 공적 책임과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대신 각자가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숨어들어서 사적인 부만 탐하는 그룹이 된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만이 19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 점점 더 부각되는 ‘반유대주의’가 단순한 ‘유대인 혐오’가 아니라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해 앞에서 저도 다음과 같은 상상적 질문을 해봅니다.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종교 문명 간, 이웃 종교와의 대화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책임 있는 참여를 해왔는지, 선생님이 선취하셔서 한국인들, 한국 종교인들, 한국 기독인들의 의식을 뒤흔들어 놓으셨고, 그러나 그것이 워낙 근본적인 물음이어서 반향이 컸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우리 현존이 흔들릴 것이 두려워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매우 소극적으로만 드러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편 종교인’은 되었고, ‘좋은 기독인’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 한국 사회와 인류 문명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더 긴요하게 요청하는 문명 간 대화와 제 종교 간의 화합과 하나 됨의 일에서 소위 그 ‘제자 그룹’이 얼마나 충분히 구체적으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하는 물음입니다.
3.
과거에 대한 무지와 망각은 그 과거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만듭니다. 의식적인 떠나감도 있고, 현재 삶의 곤고함과 뿌리 없음이 모두를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서게 하거나, 현재의 불안한 자리와 위치를 다지기 위해서 과거를 내던지고, 동료들을 떠나고, 그 과거의 뜻과는 같이하기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안정을 위해서 ‘배반’의 길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19세기 말 파나마 운하 스캔들이나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와 유럽 사회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 등을 낱낱이 분석하면서 유대인들이 유럽 사회에서 한 독자적인 정치 그룹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뿔뿔이 각자도생과 좁은 가족주의에 함몰되어서, 개인적인 재능과 교육에 모든 것을 걸며 매달리고, 다시 가난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며 “거리에서는 일반인, 집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자기분열과 위선과 절망감 속에서 살아갔는지를 밝힙니다.
그러한 가운데 유대적 전통의 ‘선민사상’과 ‘메시아희망’은 점점 더 인종적으로 왜곡되고 미신화되어서, 이어지는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대륙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것뿐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의 정복과 식민화를 위해서 비열한 인종주의로 쓰였습니다. 그 반유대주의가 ‘팽창을 위한 팽창’의 한계를 모르는 부르주아 제국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결국 세계 제1차, 2차 대전을 불러온 전체주의의 테러와 이념으로 오용되었다는 분석입니다.
4.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말씀은 매우 잘 알려진 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보통 ‘미래’와 잘 연결되곤 하지만, 저는 우선 우리 ‘과거’와 관련한 일로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무근저의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탄생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이루어진 터에 근거해서 가능해진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조건 지어진 존재(conditioned being)’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나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기억한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결국 우리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서 말해지고 전해지는 것을 듣고 알게 되면서 그것을 믿으면서 우리 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아무런 기반이나 근거 없이 그저 되는 일이 아니라, 우리보다 이 세상에 먼저 온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실’과 ‘현실’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곧 실제의 ‘구체’가 없이는, 또는 누군가에 의한 ‘경험’이라는 사실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이렇듯 믿음이란 우리 존재와 세상을 드디어 있게 하는 첫 시작이므로 그렇게 긴요하고, 우리의 존재는 바로 그러한 시작과 ‘탄생성’의 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그 믿음이 그토록 중요하지만, 그 믿음조차도 누군가의 실제 행위, 경험적 사실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믿음의 대상인 과거도 ‘현재’가 있어야 가능해진다는, 곧 여기 성서 말씀의 ‘사랑’이 그 믿음의 세계를 시작하고 창조하는 일이므로 무엇보다도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합니다.
다시 미래에 대해서도, 우리는 ‘소망’으로 ‘미래’와 관계합니다.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 세계의 지속을 원하지 않는 세계 혐오이고 허무이며, ‘세계 사랑(amor mundi)과는 정반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소망을 긴요하게 여기며 미래를 향한 기대와 소망, 용서와 약속이 없는 삶을 경계합니다. 아렌트가 밝힌 히틀러나 스탈린의 전체주의는 미래의 존속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던 개인이나 세대가 그 불안과 뿌리뽑힘과 집 없음을 보상하려는 불신과 불안의 의식으로 모든 것을 미래의 확보를 위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들이 기획하고 바라던 대로 있게 하려고 온갖 폭력과 테러와 거짓을 쓰는 미래에 대한 왜곡된 소망입니다.
왜 그러한 악한 전체주의의 테러와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될까요? 바로 다시 건강한 실제를 이루는 현재를 살지 못했고, 그로부터 오로지 논리와 계산과 부패한 상상에서 나오는 헛된 희망으로, 거기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논리밖에 없는 외로움과 고독에서 그런 선택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또다시 현재 사랑의 구체적 행위와 경험과 세상 속에서 도반들과 함께하는 삶이 없으므로, 그 소망도 왜곡되기 쉽고, 그의 신념은 일종의 불신과 미신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지속을 위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왜곡된 소망을 어떻게든 이념과 논리와 폭력으로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현재의 모든 다원성을 제거하고, 죽이고, 고사시켜서 오직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원리만 남도록 하는 것입니다.
5.
오늘 우리가 변 선생님의 31주기 맞이하고, 내년 그분의 탄신 100주년을 앞에 두고서 다시 우리에게는 ‘사랑’이 무엇이고, ‘믿음’과 ‘소망’이 어떠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과거 선생님이 남기신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 의미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 일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뜻과 소망을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더욱 구체적으로 함께 모여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협력하고 도우면서 또 다른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각자 흩어져서 도생한 것인지 모르는 지난 30년을 마무리하고, 어쩌면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과거를 소홀히 하면서 각자의 미래에만 몰두해왔는지 모르는 시간을 넘어서, 이제 그와는 다른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편 서로 흩어져 살고, 많은 과거와 흔적이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특히 신옥희 선생님의 끊임없는 부름과 재촉, 상기와 사랑에 힘입어서 미약하나마 오늘의 이와 같은 모임을 지속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옆에 작은 제자 그룹의 지속하는 믿음과 헌신이 함께했습니다. 그 수고와 함께함으로 20주기 추모 학술문화제와 『선생님 그리운 변선환 선생님(신앙과지성사, 2015)』이 나왔고, 2022년 《종교재판 30주년 백서》를 우리 입장으로 다시 내면서 10월 31일 프레스센터에서 “종교재판 30년, 교회 권력에 묻다”를 주제로 학술제를 열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일아一雅 변선환 학장 종교재판 30년 역사를 회고하며(동연, 2023)』라는 책으로 엮어냈고, 오늘 2026년에는 지금 세 분의 저자가 내년 출간을 위해 『변선환 평전』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 글이 『변선환 전집 7권(한국신학연구소, 1998년)』으로 묶여 나왔으며, 몇 권의 의미 있는 연구서들이 출간되었습니다. 모두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의 현재 일이 없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도, 미래에 대한 소망도 설 수 없고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한 대로 과거 우리의 기원과 시작점이 없이는 오늘의 우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조건성 속에서 우리 신앙과 학문적 존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제 우리 사이의 다원성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를 북돋는 사랑 가운데서도, 이제 앞으로의 또 다른 날과 세대를 위해서 어쩌면 함께 선생님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는 어떤 공적 기관을 시작하는 일이 요청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현재 사랑을 더욱 잘 나누고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소망하면서 진정한 세계 사랑의 한 실천으로서 우리를 더욱더 하나로 묶어줄 어떤 공적 모임의 터를 마련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물려받은 우리 정체성의 토대를 잊고서, 너무 고립되어서 자신만의 성취와 힘에 대해 몰두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서로를 연결해서 새날을 위한 희망의 공적 토대를 만드는 일을 함께 숙의하고 논의하는 일이 긴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있을 때 미래에의 소망도 있고, 바로 그것이 성서가 말한 참믿음의 그루터기를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변선생님도 일찍이 위의 고린저전서 성서 말씀을 들어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진정한 미래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신 것을 저는 이번 말씀 나눔을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야 하지만 부재한 박일준 박사님의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나눔의 마무리를 그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가져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중 제일은 사랑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길벗 타자에 대한 존중과 경청이 제일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래적 자아가 되는 것,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믿는다(전집 1권,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304쪽).” 박일준, 「저항과 탈주의 몸짓으로서 종교해방신학-지구촌 시장 자본주의 시대에서 변선환 신학을 다시 읽기」, 박성용·신익상·최대광·박일준, 『올군이 선생님 변선환』, 신앙과지성사 2010, 303쪽 재인용.
“밝아오는 대화의 시대에서 진리는 더 이상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이거나 독백적이거나 배타적일 수 없다. 진리는 비절대적이며 역동적이며 대화적이며 관계적이다, ... 그러므로 대화의 시대에 살아갈 수 있는 개방적인 새 사람, 진리의 역사성과 함께 진리 체험과 그 표현의 상황화를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종교인은 타자를 적으로 보지 않고 진리의 길에 나선 길벗(道伴)으로 보며, 서로 배우고 이해하며 자기 생각을 비절대화하고, 인간관계를 가질 줄 아는 대화적 사고, 비판적 사고의 세계에서 살아갈 줄 아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전집 1권, 「종교간의 대화 백년과 전망」, 23쪽).” 같은 글, 3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