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연구 제38호
한국종교학연구회, 2020, pp. 55-81.
한국 창가학회의 내·외부적 갈등의 역사적 이해- 절복(折伏) 개념을 중심으로
이 원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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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Ⅰ. 서론
Ⅱ. 재일한국인 포교와 왜색종교 낙인
Ⅲ. 일련정종과의 분리와 포교 방식의 변화
Ⅳ. 한국SGI의 대외 활동과 언론 속 이미지 전환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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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20세기에 등장한 일본계 신종교인 한국창가학회(한국SGI ))는 2018년 자체 추 산 약 159만 명의 한국인이 믿고 있는 종교이다. ) 이는 한국 내에서 개신교, 불 교, 천주교, 다음으로 규모 있는 숫자이며 한국SGI가 한국 종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0년 9월 27일, SGI가 “세계적인 감 염병과 기후변화의 위기 극복,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청년부총회를 온라인으 로 개최하면서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었다.3) 창가학회 회원들은 SGI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의 행보를 따라 전 세 계에 불법을 널리 퍼트리겠다는 광선유포(廣宣流布)를 목표로 하여 교세 확장을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창가학회의 성장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복(折伏)이라고 말하는 포교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반일 감정이 만연했던 1960년대 전후부터 창가학회의 포교가 이뤄졌는데, 일본 종교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창가학회가 어떻게 한국으로 들어와 성행하였는지는 더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이다.
창가학회는 니치렌(日蓮)의 불법을 따르는 일련정종 산하의 신도단체로 출발 했다. 신도들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부르는 ‘창제(唱題)’, 신앙의 대 상으로서 불단의 자리에 모신 만다라인 ‘본존(本尊)’, 그 본존 앞에서 행하는 아 침, 저녁의 ‘근행(勤行)’과 더불어 적극적인 포교 활동인 ‘절복(折伏)’을 강조한다. 그들이 대성인으로 받들고 있는 13세기 일본 승려 니치렌은 당시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사교(邪敎)를 설복시키는 공격적인 교화 방법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절복이다. 니치렌은 말법(末法)의 시대에 상대방의 주장 을 우선 용인하며 인도하는 ‘섭수(攝受)’의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그릇됨을 적 극적으로 타파하여 교화시키는 ‘절복’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4) 이러한 니치렌의 사상은 창가학회의 경전이 된 그의 저서 모음집인 일련대성인어서전 집에 녹아들어 있다. 창가학회는 1940년대 말부터 니치렌이 주장한 절복의 포교 방식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추진했고, ‘대절복운동’을 통해 급진적인 교세 확장 에 성공했다. 오늘날 창가학회에서 절복은 타인을 포교하여 입신(入信)시키는 의 미로서 좀 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내에서의 간략한 흐름만 보 더라도 절복의 개념이 한국 내 창가학회의 포교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포교는 타종교
3) 「<10·2 ‘세계평화의 날’ 60주년 기념-온라인 세계청년부총회> D-day 2020년 9월 27일 오 후 1시 30분 영원한 사제 여정 출발!」, 화광신문 2020.09.25. 1368호.
4) “절복(折伏)을 본(本)으로 하고 섭수(攝受)를 적(迹)이라 정함이니 법화절복(法華折伏)·파 권문리(破權門理)란 이것이니라.” 「백육개초」, 일련대성인어서전집, 867.
와 갈등을 겪을 수 있는 위험이 내재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창가학 회의 포교 활동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절복의 개념이 주요할 것 으로 본다.
한국 창가학회에서 어떻게 포교 활동이 이뤄지고 교세가 정비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이미 축적되어 있다. 김학유, 박승길은 전반적인 창가학회의 포교 역사를 서술했으며, 특히 박승길은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하여 한 국사회의 맥락 안에서 더욱 방대하게 서술했다.5) 또한 조성윤은 창가학회 한국 포교의 초창기인 1960년대에 집중하여 재인한국인을 통한 포교 양상을 그려내었 다.6) 이밖에도 창가학회의 교리에 주목하여 불교혁신적인 측면을 드러내거나, 한 국SGI의 여러 공익 활동들을 주목한 연구들이 있다.7) 이러한 연구들은 한국SGI 를 폭넓게 이해하는 주요한 측면들이지만, 창가학회가 내·외부적 갈등을 겪으면 서 변화해 온 역사를 명료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포교 양상에 주목하는 다른 관 점이 유용할 것으로 본다. 이 지점이 본 글에서 절복을 중심으로 한국 창가학회 의 역사적 상황을 선행연구에 힘입어 재구성보는 이유이다.
본 글에서 절복의 개념을 통해 한국 창가학회의 내·외부적 갈등의 역사를 살 펴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창가학회가 겪는 갈등 과정을 포교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복의 의미 변화에 주목 하여 갈등을 겪으면서 전개되는 포교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먼저 1960년대 전후로 재일한국인에 의해 한국 내 포교가 시작된 창가학 회가 정부와 언론에 의해 ‘왜색종교’로 낙인찍히는 포교 초기를 살펴본다. 그 이 후 일본의 일련정종 종문(宗門)과 창가학회가 내부적 갈등을 겪다가 1991년에 결
5) 김학유, 「창가학회(創價學會) 성장연구」, 신학정론 21(1) (2003): 227-247; 김학유, 「창가학 회(創價學會) 성장연구」, 신학정론 21(2) (2003): 547-573; 박승길, 현대 한국사회와 SGI: 한국SGI와 대승불교운동의 사회학, (대구: 태일사, 2008).
6) 조성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경기: 한울, 2013);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 (제주: 당산서원, 2019).
7) 박규태, 「창가학회에 대한 일고찰: 불교혁신운동의 측면을 중심으로」, 종교학연구 20
(2001): 68-86; 박상필, 「종교단체의 공익활동 내용과 교리적 근거: 기독교 단체와 불교 단체의 비교」, 현상과 인식 24(3) (2000): 111-135.
국 결별하면서 변화를 겪는 한국 내 창가학회의 포교 양상에 주목한다. 마지막으 로 ‘한국SGI’가 설립된 이후, 사회 공헌과 문화 활동을 추구하며 언론 속 이미지 가 전환되는 한국SGI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Ⅱ. 재일한국인포교와왜색종교낙인
일본계 신종교인 창가학회는 반일감정이 극심했던 해방 이후의 상황 속에서도 한국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새로운 일본 종교가 민족적 감정을 뚫고 한국에 전파되어 포교에 성공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되기 힘들다. 하 지만 이 불가능해 보이는 포교는 일본에 거주하며 창가학회에 입신(入信)한 ‘재 일한국인’이 자신의 친지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전개하면서 가능했다. 물론 창가 학회와 접촉이 용이했던 재일한국인도 일본 땅에 거주할 뿐이지 민족적 감정과 상관없이 창가학회에 입신하는 일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처해있던 상 황과 창가학회에 입신하기로 결정한 동기를 좀 더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재일한국인은 대부분 일제시기에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정착하 게 된 한국인과 후손들을 말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에 거주했던 많은 한 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다. 입국 시 재산의 반입을 제한받는 등의 경제적 문제로 일본에 계속 거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 국으로 건너왔더라도 제주 4.3사건과 같은 정치적 혼란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러 사정으로 일 본에서 삶을 이어간 재일한국인은 1950년대 미군정과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외국인으로 등록되면서 민족적인 차별의 상황 속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난, 질병으로 인한 불 행은 그들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들이었다. 재인한국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돌파구를 다름 아닌 창가학회에서 찾
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재일한국인들은 창가학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 고 있었다. 민족적 감정으로 인해 일본의 종교를 막연히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 고, 창가학회 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戸田城聖)의 공격적인 절복 활동으로 인해 생긴 주류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9)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특정한 계기로 인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센징’이라는 이 유로 학교에서, 취업 상황에서 차별을 겪었지만, 재일한국인에게 차별 없는 시선 으로 다가온 것은 창가학회 회원들이었다. 차별 없이 대하는 창가학회 회원들에 게 신뢰감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따뜻한 말과 행동에 감명을 받기 도 했다. 민족적인 차별로 인해 일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소속감을 창가학회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 것이다. 또한 창제를 통해서 가난과 병으로 인한 불행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재일한국인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조성윤은 2006-2009년에 실시한 창가학회 관련 재일한국인 구술조사연구를 통해 이러한 입신 동기에 관한 생생한 목소리를 확보해 내었다.10)
창가학회에 입신한 재일한국인들에게는 가난, 불행한 삶을 해결하는 것이 민 족적 정체성의 문제보다 중요했다. 재일한국인들은 창가학회에서 신심(信心)을 다하면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입신했다.
동네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필요 없는 옷 없어요?”하고 버린 물건을 모아 서 팔면서 살았다고 해요. … 그 집 사람이 친절한 사람이어서 할머니에게 헌 옷 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대요. 그 사람이 할머니에게 “이 생활을 바꿀 수 있어요. 제목을 하세요!”라고 신심을 알려주었어요. 그래서 할머니도 그 인연으로 신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제목을 해보라고 가르쳐주어서 할머니가 시작했어요.11)
1956년. 제가 여덟 살, 소학교 2학년 때입니다. 어머니가 자궁암에 걸리셨어요. 의사가 일주일도 살지 못한다고 진단을 내렸기 때문에 어머니는 힘들어하셨습니 다. 같은 마을에 아라이 상이라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신심을 하고 있었습니
9) 조성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101.
10)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42-48.
11) 조성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99.
다. 부인은 일본인이었고요. 그분이 데려가서 저희 아버지가 먼저 입신하시고 어 머니도 따라서 입신하셨는데 그 후에 병이 나았어요. 대수술을 해서 자궁암이 나 았어요. 그래서 저도 함께 (창가학회에) 들어왔습니다.12)
입신한 재일한국인들은 신심을 통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변화시켜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이들의 포교는 공격적인 포교의 논리로서 절복의 개념과는 큰 상관이 없었다. 입신의 동기와 신심은 체험적 근거로 아픈 몸이 건 강해진 것이 주를 이뤘고, 공동체의 편안함과 가난의 극복 등 현세적 기복의 측 면이 강조되었다. 즉, 교리적 가치보다 주술적인 희망에 관심을 쏟는 점을 보여 준다. 이들은 실제로 삶의 변화를 체험하면서 창가학회에서 누린 것들을 친지들 과 공유하고 싶었다. 이에 따라 재일한국인의 친지들이 포교 대상이 되어서 강력 한 거부감 없이 반일 감정의 벽을 뚫고 한국 내에 포교가 이뤄질 수 있었다. 체 계적인 교리와는 상관없이 다만 주술적 효험을 토대로 능동적인 절복 양상이 이 어진 것이다.
1960년대에 아직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지 못했을 때, 일본의 창가학회 본부가 한국 내에 직접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기는 힘들었다. 대신에 다양한 방식으 로 창가학회에 입신한 사람들이 한국 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나갔다. 포교 초 기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역할을 한 이정순은 재일한국인인 동생 이순자에 게 창가학회를 소개를 받았다. 건강의 문제로 고생한 이정순은 동생이 전해준 서 적을 읽고 근행과 창제에 정진하였고, 건강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동생 이순 자는 언니를 위해 3차례 한국을 방문하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13) 교리적인 설 득은 주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며, 건강을 회복하고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체험 적 증거가 나타나면 되었다. 서울의 박소암은 친지에게 절복당한 것은 아니지만, 법화종에 익숙했던 그는 직접 서적을 읽고 창제하여 병의 치유를 받아 입신하였 고, 부산의 임성규도 일본 라디오를 청취하다 창가학회 소식을 접하고 창제하여
12) 조성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95.
13) 1961년 9월, 1963년 6월, 1964년 1월에 방문했다.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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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낫는 경험을 하였다. 대구의 최규원은 일본 잡지를 통해 창가학회를 접하고 일본 본부에 직접 연락해 관련 서적을 받고, 자신의 숙명을 바꾸고 싶은 동기로 입신했다.14) 이와 같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인적인 동기로 인해서 공격 적인 절복과는 상관없이 한국 내에 포교가 이뤄졌다.
한국 내에 들어온 창가학회는 병을 낫고자 하는 사람, 자신의 숙명을 바꾸고 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욕구를 채워주며 퍼져가기 시작했다. 입신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덕을 함께 쌓는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절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치병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창가학회가 일본 종교로서 주는 거부감은 부차적인 문 제였다.
그러나 1964년 1월 이후로 창가학회는 국가와 언론의 의도에 따라 왜색종교의 틀에 가두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1월 11일자 6면에서 “독경도 일본 말로”, “전국신도 2만, 거의 하류 서민층”, “정계 진출, 제3당으로”와 같은 제목으 로 기사를 다뤘다.15) 각각 일본 종교, 무식한 사람이 믿는 종교, 정치 단체로 창 가학회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가학회는 왜색불교이며 종교가 아닌 정치 단체라는 시각은 다른 언론들을 통해서도 쏟아지기 시작했다.16) 문교부는 상황 을 수습하면서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의 의견을 수렴하여 1월 17일 종교심의 위 원회를 열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개신교, 불교 지도자들은 창가학회 단속을 동의했지만, 학계 위원들은 좀 더 신중하게 창가학회의 정체를 파악하자거나 국 시에 위배되니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방지하자고도 했다.17) 다양한 의견이 나온 회의였지만, 창가학회는 국시에 위배되는 단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결국 1월 18 일, 문교부는 담화문을 통해 창가학회를 ‘반국가적 반민족적 단체’로 규정하고 포교 금지를 발표하였다.18) 1월 21일 국무회의의 안건보고로 상정되면서 창가학
14) 박승길, 현대 한국사회와 SGI: 한국SGI와 대승불교운동의 사회학, 48-51.
15) 최순복, 「창가학회 밀입국: 불길처럼 번지는 일련종」, 조선일보 1964.01.11.
16) 비슷한 논조로 2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에 50여 개의 기사가 실렸다.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116-117.
17)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98-103.
18)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108.
회는 포교 금지 조치와 함께 민족적 토양을 해치는 종교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되었다.19)
이는 1964년 1월 10일에 창가학회 기사가 급작스럽게 등장한 이후로 약 2주 만에 진행된 일이다. 창가학회가 사교인지, 종교단체인지, 정치단체인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문교부는 ‘반민족적인 단체’라는 점을 강조하여 창가학회를 낙인찍고 언론을 통해 애국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조치를 내린 것 이다.20) 그러나 반국가적이라는 명목으로 창가학회를 부정적으로 규정했던 것은 일본 내 창가학회 상황과 다른 한국의 포교 양상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처사 였다. 언론에서 공개된 것처럼 창가학회의 공격적인 포교와 정치단체와의 긴밀한 연결성은 한국이 아닌 일본 내에서 확인되는 내용이었다. 1951년에 도다 조세이 가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75만 세대 절복’을 공약하며 투쟁적인 포교를 추진 했다.21) 절복교전이라는 책자를 발행하였으며, 조상의 위패를 불사르고 신사의 행사를 거부하는 등 창가학회만 믿으라는 포교 방식을 고집했다.22) 또한 창가학 회 신도들은 만다라 형태의 본존을 모시면서 기존에 집에서 모시던 불단을 다 치워버리는 ‘방법(謗法) 버리기’를 행했는데 이는 지역 사회에서 과격한 집단으 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23) 도다는 종교적 가치를 정치적 차원에서 구현한다는 ‘왕명불합(王冥佛合)’의 교리를 내세우며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1960년에 취임한 3대 회장 이케다도 ‘300만 세대 절복’을 공약하며 적극적인 포 교 활동을 이어나갔고, 급속한 교세 성장을 바탕으로 의회 진출에 성공하며 창가 학회와 연결된 공명당이라는 정당이 정치계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내 상황은 달랐다. 치병과 기복의 주술적인 신앙은 한국 내에서 도 사람들의 주된 입신 동기였지만, 근행과 창제를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19) 총무처 의정국 의사과, 「창가학회조치상황보고(제55호)」, 각의상정안건철(제20회), 국 가기록원 소장 문서 관리번호 BA0084398, 78-84.
20) 「精神的間接侵略(정신적간접침략)」, 동아일보 1964.01.18.
21) 박승길, 현대 한국사회와 SGI: 한국SGI와 대승불교운동의 사회학, 135-136.
22) 조성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35-36. 23) 조성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121-122.
과정이 일본에서와는 다르게 지역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또한 정당 을 통한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창가학회 본부에 조직적인 영향력을 받 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만한 교세도 없었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한 국 교정상화도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서 창가학회 본부는 한국의 포교보다 일본 내 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 내 창가학회 신도들은 니치 렌 불법의 효험을 신뢰할 뿐이지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왜색종교 혹은 정치 단체라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오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러한 현실과 정부의 판 단 사이의 괴리는 일련의 과정 속에 숨어 있는 정부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정 부는 한일협정 과정이 논란이 될 때마다 ‘왜색종교’로 창가학회를 낙인찍어 반일 감정을 받아내는 대상으로 다룰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반일에 앞장서는 정부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창가학회를 부정적인 단체로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한국 내 창가학회의 구 성원들도 국가와 언론의 탄압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울 포교의 중심 역 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인 이정순은 1월 17일 종교심의 위원회를 진행할 때 해명 서를 작성하여 문교부를 찾아갔다. 그녀는 총 4가지의 요지를 통해 언론사들의 왜곡을 주장했다. 천황에 대한 동방요배는 사실 무근이라는 점, 신도의 가미다나 (神棚)가 아닌 불교의 불단을 모시고 일본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는 점, 일본 창 가학회의 자금 투입의 사실과 창가학회가 정치 단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라는 점을 든다. ) 마지막으로 절복에 대해 설명했다.
신도의 입신은 다 아시다시피 절복이다. 일인일가(一人一傢)로 자기가 입신하 여 신앙하여 보고 공덕을 받아 본존님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면 또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이것을 절복이라 함이요, 이 방법 이외의 어떠한 방 식도 우리는 취하지 않는다.26)
이정순이 치병을 통해 입신했음을 염두에 둘 때, 공덕을 느낀다는 것은 신심 을 통해 삶의 변화를 겪는 경험을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그 놀라운 경험을 적극 적으로 포교 활동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절복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절복 활동이 자신의 신앙 간증과 다름이 없다는 점을 통해 정치단체가 아닌 종교단체로서 창 가학회를 강조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2대 회장 도다의 지도 아래 공격적이 고 강제성을 띈 포교 방식으로 사회적인 갈등을 일으켰던 것과는 다르게 1960년 대 한국에서의 절복은 자신이 믿는 불법, 그 신앙을 전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전 도’와 동의어로서 기능했다.
대구 지역에서 활동했던 최규원도 내무부 장관에게 해명서를 제출하며 정부와 언론의 탄압에 대응했다. 언론에서 말하는 창가학회에 대한 표현들은 모두 오해 라는 것이 해명서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반민족적인 창가학회의 포교를 금지하기로 정한 정부의 정책에 협력하라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최규원은 이에 낙심하지 않고 창가학회의 임시 대표로서 행정심판을 청구하고, 그 이후에 고등법원에 행정 소송을 제기하며 법률적인 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1965년 3월 3 일, 고등법원에서는 포교 활동을 금지한 행정 처분이 합법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 지만, 1966년 10월 25일 대법원에 가서는 “행정 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원심 판결이 파기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 최규원은 법률적으로 투쟁하 면서 포교 활동을 단속당하는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을 때에도 창가학회가 ‘왜색종교’, ‘동방요배’하는 종교, ‘정치단체’라는 시 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언론에서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 포교가 자유롭 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거나 법으로는 제재하지 못해도 국민감정으로는 받아들 이기 힘들 것이라고 규정했다. ) 이후 창가학회의 포교 활동은 음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일협정 문제가 맞물리는 시기에는 창가학회에 대한 비판적 기사들 이 재차 실리면서 반일감정의 과녁이 되었고, 서울에 있는 창가학회 본부가 대학 생들에게 습격당하기도 했다.29) 대법원 판결 이후에는 언론에 주목받는 큰 사건 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반민족적 종교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변하지 않았다.
Ⅲ. 일련정종과의분리와포교방식의변화
한국 내 창가학회는 1973년 11월 23일, 내무부장관이 국회 내무위에서 “포교
를 금지할 수 없다고 보나, 금품갈취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관계법을 적용, 단속하겠다.”는 답변을 하여 왜색종교 낙인으로 인한 직접적인 위협에서 법적으 로 자유로워지는 흐름이 생겼다.30) 이때까지 포교 금지 조치가 있었지만 한국 내 창가학회는 개인과 개인으로 이어지는 적극적인 포교 활동으로 교세를 확장 시키고는 있었다. 좌담회와 같은 모임을 통해 신심 실천을 독려하고, 절복은 여 전히 근행과 창제를 통해 경험한 삶의 변화를 간증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본부의 공식적 개입이 없이 재일한국인을 통해,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산발적으로 한국 포교가 이뤄졌기에 단일한 조직체의 모습으로는 성장하지 못했고, 나눠진 여러 파들은 하나로 통합하기가 쉽지 않았다.31) 이렇게 고도의 조직화가 이뤄지지 않 은 것이 한국 내 창가학회의 포교가 일본처럼 조직적인 공격적 포교 양상을 보 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1972년에 일본 본부의 개입으로 한국 내 창 가학회 회원들은 ‘한국일련정종불교회’(이하 불교회)로 통일되었지만 10월 유신 의 혼란 속에 또 분열되었으며, 1975년이 되어서야 한국SGI로 이어지는 단일 조
조선일보 1965.03.11.
29) 「昌信洞本部(창신동본부)를 습격」, 경향신문 1965.08.20.
30) 박승길, 현대 한국사회와 SGI: 한국SGI와 대승불교운동의 사회학, 160.
31) 당시 ‘일련정종불교회’로 통합되기 전에는 박소암, 이정순, 최규원, 임성규를 각각 중심 으로 하는 창신동파, 정릉파, 대구파, 부산파 등이 존재했다. 이원범·남춘모, 한국 속 일본계 종교의 현황, (서울: 대왕사, 2008), 131.
직체로서의 모습이 중앙사무국을 두며 이뤄졌고, 1976년에 공동의장제로 체계화 되었다.32)
한국 내 창가학회에서 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진행된 것은 일본의 창가학회에 서 세계를 향해 새로운 광포를 여는 해로서 전면적인 조직 정비가 이뤄진 것과 맞물려 있다. 일본의 창가학회 본부는 정치 세력화, 국교화 같은 언론의 비판과 의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불법의 사회화에 힘을 쓰는 포교 방식으로 전환했 다. 1974년을 ‘사회의 해’로 정하고, 개인별 절복의 목표를 ‘한사람이 1년에 1세 대 절복 달성’으로 낮췄다. 또한 일본에서는 공격적인 절복의 방식에서 이제는 순리를 따라 눈에 띄지 않도록 지도되었다. 포교의 양적 수가 적어진 만큼 포교 할 대상을 ‘적절히’ 선택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절복하도록 했다. 또한 학회와 공명당 사이의 독자성을 지키도록 하는 운영 정책을 확립하였다.33) 이러한 포교 방식과 함께 세계를 향한 광선유포의 계획은 1975년 국제창가학회(SGI)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공격적인 포교 방식의 절복은 일본 내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흐름에 맞춰 기존의 주술적 동기만으로 번성했던 시기를 지 나 종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단체로 변모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청년부 중 심의 활동을 강조하는 SGI 본부의 지침에 따라서 세대교체의 움직임과 청년부 중심의 포교가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한편, 한국 내 창가학회의 갈등과 통합의 지난한 과정에는 일본의 일련정종 종문과 창가학회 사이의 갈등 양상이 그 영향을 미쳤다. 갈등의 원인은 재가신도 단체인 창가학회가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출가자 승려 중심인 종문이 창가학 회에 밀려 그 영향력을 잃는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종문의 젊은 승려들의 집단 인 ‘정신회’는 창가학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강경했는데, 당시 한국으로 건너 가 불교회의 몇 조직과 접촉해 자신들의 지도를 받는 ‘단신도회’로 그들을 탈바 꿈시켜 새로운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혼란은 1984년에 일본 승려를 따르는 조 직과 불교회의 조직으로 정리되면서 안정화되었다. 이후 불교회는 제1회 서울청
32) 박승길, 현대 한국사회와 SGI: 한국SGI와 대승불교운동의 사회학, 204-2
년평화문화제 등의 공개적 문화 행사를 개최하면서 일련정종과 다른 인간주의적 가치 창조의 SGI의 이념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이에 더하여 1988년 화광출판사 등록, 일련대성인어서전집 한국어 초판 발행, 1989년 월간 지 법련 간행 등 출판 미디어를 이용하는 절복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 일본 에서 일어난 창가학회와 종문과의 갈등에 영향을 받고서 어느새 한국 내 창가학 회의 절복 활동은 사회적 가치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련정종 종문과 창가학회의 갈등은 해결되지 못하고 심화되었다. 1990년 승 려 중심의 권위성을 지적하고 재가신도를 강조한 이케다의 스피치로 불거진 논 란은 종문과 창가학회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야기했다. 그동안 승속화합 의 기치 아래 붙잡았던 것이 끊어졌고, 서로 비난하는 질의서를 보내며 해명을 요구했다. 창가학회가 계속 충돌을 빚었던 문제의 핵심은 ‘승려가 스승이며 재가 신도는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승속사제의(僧俗師弟義)의 교리였다. ) 이 교의를 비판했던 평신도 중심의 창가학회가 승려 중심의 교권을 계속 강조했 던 종문과 결국 함께 갈 수 없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창가학회의 반발은 1991 년 10월 SGI를 중심으로 종문의 법주였던 닛켄(日顯)의 퇴좌를 요구하는 서명 운 동으로 확대되었고, 1991년 11월 7일 일련정종 종문이 창가학회에 해산 권고문을 발송하면서 결국 11월 28일 창가학회 본부와 SGI가 파문되며 일련정종과 최종 분리되었다. ) 그 이후 창가학회는 종문을 닛켄종이라 부르면서, 종문은 일련정 종이 아니라 닛켄 법주 중심의 정법을 벗어난 사교이며 창가학회만이 니치렌 대 성인을 계승하여 정법을 따르는 교단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절복 투쟁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양상이 지속되게 된다.
이는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한국SGI의 이름을 가지지 않았던 불교회는 일본의 창가학회 측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승려중심주의 의 신행에서 멀어지기 위한 노력들을 이어갔다. 불교회는 종문과의 결별한다는 뜻에 따라 1993년 11월 18일자로 일련정종을 뺀 ‘SGI한국불교회’로 명칭을 변경 하였고, 이로 인해 흔들리는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는 방식으로 이케다 회장과 의 사제불이(師弟不二) 이념을 강조하였다. 종문의 닛켄은 권위주의에 빠져 니치 렌 대성인과의 사제불의의 태도를 벗어났지만, 학회의 삼대 회장은 자신 생명의 경애를 드러내고 세계를 교화했던 니치렌 대성인의 길을 따라 사제불이의 이념 을 온전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강조되지 않았던 교리라는 점에서 일 련정종에서 분리된 창가학회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
일련정종과의 뚜렷한 분리의식은 창가학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 했다. 한국 내 창가학회의 연간계획에서 ‘닛켄종 파절(破節) 운동’은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다. 화광신문의 전신인 聖敎타임즈는 1991년에 창간된 이후로 매번 돌아오는 연말연시마다 ‘활동대강’, ‘활동지침’, 혹은 ‘활동방향’을 발표하여 SGI 한국불교회의 한 해의 목표를 공유했는데 닛켄종과 싸워나가자는 투쟁을 매번 강조했다. 1993년 「창가르네상스‧승리의 해」라는 주제로 발표한 활동대강을 살펴 보면, 지향해야 할 목표를 3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학회정의의 승 리, 둘째는 광포홍교의 승리, 셋째는 생활 ·가정· 사회에서 승리이다. 여기서 첫 째로 강조한 학회정의의 승리는 닛켄종에 대한 완전 승리를 의미한다. “불법은 승부이며, 정의는 이겨야만 증명된다.”는 표현은 창가학회에서 닛켄종을 향한 투 쟁적인 절복의 태도를 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매년 발표된 항목을 살펴보 았을 때, 2000년대 전까지는 교세 확장을 위한 포교 활동보다 닛켄종에 대한 투 쟁을 통해 학회의 정의를 내부적으로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음이 확인된
다.39) 닛켄종 타도를 강조하면서 일련정종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한 창가학회는 삼대 회장들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사제의 도’의 실천을 통해 견고한 구심점 을 만들어 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제불이의 교리는 이러한 측면에서 창가학 회 신도들이 신심 실천을 바로 행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교리가 되었다. 창가 학회에서 니치렌의 어서 공부 못지않게 이케다의 스피치와 그의 소설 인간혁 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사제의 연대로서 강조되는 이유이다.
결과적으로 이케다 회장을 향한 철저한 신뢰가 개개인의 신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자기 확신을 심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강조된 닛켄종을 향한 파절 운동은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계광포를 위한 포교 활동에서는 파절의 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이미지를 이용한 ‘승리’라는 목표는 닛켓 종을 타도하고 정의로서 승리하자는 목표와 대동소이하지만, 기본적인 태도는 파 절이 아닌 관용의 정신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케다는 일련정종과 분리된 창 가학회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1995년에 「SGI 헌장」을 제정하였는데, 세계광포 를 목표로, 공익 활동, 사회 활동을 통해 불법의 정신을 퍼트리는 방식을 더욱 공식화하게 된다.40) 다음은 헌장의 ‘목적 및 원칙’의 7, 8, 9 조항이다.
7) SGI는 불법의 관용의 정신을 근본으로 타종교를 존중하고, 인류의 기본적 문 제에 대해 대화하여 그 해결을 위해 협력해 간다.
8) SGI는 각각의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문화교류를 추진하여 상호이해, 협조 하는 국제 사회의 구축을 지향해 간다.
9) SGI는 불법의 共生 사상에 입각하여 자연보호, 환경보호를 추진한다.41)
창가학회에서 초기 타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강한 확신의 절복이었지
39) 화광신문에 공개된 2000년대의 활동방향을 살펴보면, 차별화 투쟁이 “닛켄종 탈강운 동”으로 명명되고 있으며, 1990년대와는 다르게 둘째, 셋째의 목표로 강조되었고, 첫째 에는 교세 확장을 위한 인재 양성과 홍교를 위한 노력이 강조되었다.
40) 박승길, 「창가학회 재가주의 불교운동의 확립과정과 그 의미」, 종교연구 77(3) (2017):
139.
41) “SGI 헌장,” 한국SGI, 2020.11.24. 검색, https://www.ksgi.or.kr/about/sgi/sgi02.ksgi.
만, 세계광포의 목표에 맞추어 관용의 정신을 강조했다. 생명 존엄의 불법의 정 신에 합당하고 세계를 향한 평화에 이바지한다면, 종교가 다르더라도 관용하는 태도를 취하겠다는 선언이다. 앞에서 살펴본 공격적인 파절의 태도는 창가학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배타적인 전략으로 닛켄종을 향해서만 여전히 강조되었 다고 볼 수 있다.
Ⅳ. 한국SGI의대외활동과언론속이미지전환
‘SGI한국불교회’는 2000년 4월 15일자로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으면서 법인 으로서 보호를 받는 단체 ‘한국SGI’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이후 전개한 공익 활 동들은 너무 광범위하여 그 수를 셀 수 없지만, 세계광포의 목적에 맞춰서 평화, 문화, 교육 분야에서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42) 한국SGI가 이러한 활동 양상에 따라 실제로 입신 동기가 변모했다는 점이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2004년 한 국SGI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전체의 약 60%가 청년층으로 확인되었고, 복 과 치유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 생명의 경애를 여는 가치 창조에 더욱 관심을 쏟는 경향이 확인된다. 입신 후 생활태도의 변화에 있어서는 모든 일을 행하는 데에 자신감을 얻었다는 응답이 94%로 가장 높았고, 화목과 친근감, 봉사활동에의 적극적 참여 등도 건강과 경제적 문제 해결만큼의 높은 비율을 나 타냈다.43) 청년부 중심의 활동을 강조한 이케다의 기조에 한국SGI가 사제불이의 이념에 따라 깊이 호응하며 따라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기복적인 동기만큼 사회 이상의 가치를 실현하는 내면적인 동기
42) 청년부의 반핵, 반전 전시회, 문화나눔운동, 음악회, 문예제, 학부모 세미나 등을 실시하 였다. 박상필, 「종교단체 공익활동의 교리적 배경과 조직 미션의 영향 – 한국SGI를 중 심으로」, 종교연구 78(1) (2018): 23-24. 또한 한국SGI는 자신 생명의 경애를 더 나은 방 향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현실사회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한국SGI의 조직 적 측면에서 밝힌 것으로 이토타카오, 「한국SGI 조직의 과거, 현재, 미래 - 인간혁명의 종교, 광선유포(廣宣流布)를 위한 조직」, 신종교연구 41(0) (2019): 41-68 참고.
43) 박승길, 현대 한국사회와 SGI: 한국SGI와 대승불교운동의 사회학, 302, 305.
또한 주된 신심의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상황과는 달리 법적으로 인정을 받은 한국SGI는 우호적인 인적 네트 워크를 형성하고 대중적인 절복 활동을 벌이기 위해서 지속되어 왔던 ‘왜색종교’ 의 낙인을 지워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은 사회 공헌 활동뿐만 아니라 반민족적 인 이미지를 탈피하는 활동들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2001년에 일본의 역 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규탄 집회가 열렸을 때 ‘한국불교회’도 이에 동참했음이 소개되었고, 2005년에는 SGI 서울 지부 소속 회원들이 ‘평화행진’을 벌이며 ‘일 본의 신 군국주의 부활 저지’를 선언했던 활동이 알려졌다.44) 기사에서는 SGI를 다른 수식어 없이 “일본에서 시작된 대승불교단체”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한국 SGI는 2005년 석가탄신일에 ‘2005 나라사랑 대축제’라는 이름으로 서울 잠실종합 운동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벌였으며, 독도, 북한 식량난 지원 기금 등을 선전하 는 애국의 이미지를 드러내었다.45)
한국SGI는 위와 같은 활동으로 ‘왜색종교’, ‘반민족적 단체’라는 이미지가 전 환되는 효과를 거뒀고, 또한 꾸준히 추진해온 일련정종을 향한 적극적인 파절의 태도가 이와 함께 맞물려서 자신들의 새로운 위상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14년에 주목된 ‘일련정종 구법신도회’의 법인 허가 논 란이다.46) “제국주의 찬양”, “신사참배”, “왜색불교”와 같은 단어가 기사 제목에 일련정종의 수식어로 사용되어 2014년 11월 5일에 10여 개의 기사가 쏟아졌다.47)
44) 송수경, 「주말 곳곳서 일 교과서왜곡 규탄대회」, 매일경제 2001.04.14. https://www.mk.c o.kr/news/society/view/2001/04/87003; 김병조, 「일본종교 단체 한국지부 반일집회 개최」, 매일경제 2005.04.17.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05/04/140301.
45) 이봉석, 「한국SGI, 석탄일 맞아 나라사랑대축제」, 매일경제 2005.05.12. https://www.mk. co.kr/news/sports/view/2005/05/174283; 이진욱, 「나라사랑 대축제」, 연합뉴스 2005.05.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00278
5.
46)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련정종계는 일본의 일련정종 대석사 종문과의 관계에 따라 ‘자주 파’, ‘해외파’, ‘독자노선파’로 구분할 수 있으며, 구법신도회는 해외파에 속한다. 이원 범·남춘모, 한국 속 일본계 종교의 현황, 102-108.
47) 「서울시, '신사 참배' 일련정종 연관 법인허가 논란」, 「서울시, 日 제국주의 찬양 일련정 종 관련 법인 "직권취소 어려워"」, 「서울시 ‘왜색불교’ 일련정종 법인 허가 후폭풍」와 같은 제목으로 기사가 쓰였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한국불교 일련정종 구법신도회’에게 법인 설립을 허가했지 만, 독립유공자유족회 등의 시민단체가 이에 반발하며 법인 허가 취소를 요구했 다. 독립유공자유족회 측에서는 일련정종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단체이며, 이들 처럼 과거 행적에 사과가 없는 단체는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특징은 독립유공자유족회가 창가학회를 “일련정종과 뿌리는 같지만” 결이 다른 단체로 여기며, 오히려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투옥됐던 1대, 2대 회장의 행적을 근거로 하여 창가학회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친다는 점이다. 더욱이 독립유공자 유족회 회장은 관련 인터뷰에서 1995년에 있었던 용산구 문화회관 건립 논란을 일련정종과의 오랜 악연으로 들고 있는데48), 그러나 당시 사건은 일련정종이라 는 명칭을 지웠던 ‘SGI한국불교회’와의 갈등이었다.49) 이렇게 역사적 기억이 재 구성된 이유는 SGI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1998년에 독립유공자유족회에게서 현창패(顯彰牌)를 받은 이후로 창가학회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50) SGI가 지도자들의 반제국주의적 행보를 강조하여 일련정 종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왜색종교’ 이미지가 SGI를 제외 한 일련정종 관련 단체들에게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구법신도회 사건 은 서울시가 여론에 영향을 받아 법인 허가를 다시 취소하여 소송 다툼으로 이 어졌고, 2016년 고등법원에서는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으나 2017년 12월 대법원은 파기환송을 결정하여 구법신도회의 법인 허가가 최종적으로 인정됐다.51) 하지만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이미지를 탈바꿈한 한국SGI와는 달리 일련정종 관련 단체 들은 여전히 반민족적 색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52)
48) 김인수, 「서울시 ‘왜색불교’ 일련정종 법인 허가 후폭풍」, 일요신문 2014.11.25. https://i 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01504.
49) 양상우, 「항일 순국선열 묘역부근 일본종교 대형회관 신축 효창공원 주변주민 반발」, 한겨레 1995.09.01.
50) 「세계의 눈은 SGI를 올바르게 평가」, 화광신문 1998.10.23. 317호.
51) 윤승일, 「일본 전범 종교에 예속된 단체에 대한민국 법인 허해야 하나」, 한겨레 2018.
06.25.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50536.html#csidx1ebe0bb21d48218b1d39b536 04e0820.
52) 2020년 9월에 일련정종 서울 포교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언론에 주목을 받았으며,
그러나 한국SGI가 모든 부정적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낸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부정적인 시선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며 광선유포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SGI가 어느 정도 ‘왜색’의 이미지를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 지만, ‘정치단체’, ‘사이비종교’라는 관념에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2005년 8월,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창가학회를 다룬 내용이 방영되면 서 한국SGI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로그램에서는 창가학회가 ‘왜색종교’라 는 특징보다는 공명당과 연관된 정치 문제와 SGI 회장의 연루 가능성이 부정적 으로 묘사되었다.53) 한국SGI는 즉각 정정 보도를 청구하여 언론중재위원회를 통 해 “한국SGI는 한국 국내 정치나 선거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 등의 창가 학회 입장이 담긴 ‘직권조정결정문’을 받아냈다.54) 또한 ‘정치단체’ 이미지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대중의 시선도 2019년 대구 서구에 SGI 문회 회관 건립을 결사반대한 언론 보도를 통해 여전히 확인된다.55) 개신교, 불교, 천 주교와 같이 ‘기성 종교’와 같은 선상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하기 힘든 신종교의 부정적인 위상은 여전히 한국SGI에게도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판단된 다.
한국SGI는 2020년 세계적인 전염병 확산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미디어 활동을
통해 평화, 문화, 교육 활동을 전개하며 광선유포의 실천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20년 8월에 개설된 스트리밍 동영상 사이트의 구독자 수는 2021년 1월에 2만 명을 넘어섰다.56) 이는 새롭게 추진되는 활동에도 규모 있는 움직임이 가능하다
언론 속에 ‘왜색불교’의 이미지가 여전히 투영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신혜연, 「집단감염 '일련정종'..."일제찬양" 이유로 법인 거부당한 단체」, 중앙일보 2020.09.08. https://news.j oins.com/article/23867052.
53) “남묘호렌게쿄 - 한국 창가학회(SGI)를 어떻게 볼 것인가”, SBS방송 ‘그것이 알고싶 다’(2005.08.27).
54) 「SBS, ‘직권조정결정문’ 방영: 8월27일 SBS의 한국SGI 편파보도에 대한 언론중재위 결 정」, 화광신문 2020.11.11. 660호.
55) 김민규, 「대구 서구 주민 한국SGI 종교시설 신축 반대」, 한국일보 2019.08.06. https://w ww.hankookilbo.com/News/Read/201908042011316049.
56) 한국SGI [Korea Soka Gakkai International], https://www.youtube.com/koreasgi.
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SGI는 체계적인 조직 운영을 통해 신도들 각자가 행복 의 가치 창조에 정진하면서도 포교 활동에 힘써서 교세 확장을 이어나가도록 독 려한다. 살아있는 조직력은 한국SGI의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급변하는 상황 에 따라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활동하는 데에 앞으로도 주요하게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57)
Ⅴ. 결론
한국 내 초기 포교는 재일한국인들에 의해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방식으 로 이뤄졌다. 일본 내에서 활발히 일어난 공격적인 절복과 다르게 ‘전도’와 동의 어로서 절복이 행해졌다. 주된 입신의 동기는 신심을 통해 병을 치유하고 자신의 처지를 바꿔보겠다는 현세적인 희망으로서 일본에서와 동일했지만, 교세 확장이 조직적이지 않아 지역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영향력은 없었다. 또한 한국 내 창 가학회는 제국주의 찬양과 정치 활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창가학회는 1960년대 국가와 언론을 통해 ‘왜색종교’, ‘정치단체’로 규정되며 탄압받았으며, 좀처럼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1975년에 한국 내 창가학회는 ‘일련정종한국불교회’라는 이름으로 단일한 조 직을 갖게 되었고, SGI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활동의 초점이 점차 변 화했다. 1980년대 ‘불교회’는 일본에서 일련정종의 종문과 창가학회의 갈등에 영 향을 받으면서 다시 조직적 정비의 움직임을 보였고, 청년부 중심의 문화 활동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광선유포를 꾀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 는 일본의 창가학회가 일련정종과의 긴 갈등의 종지부를 찍고 분리되어 새롭게 도약하게 된다. 한국 내 창가학회는 그 흐름을 같이하여 ‘SGI한국불교회’로 이름
57) 한국SGI의 조직 규모는 신도 수와 정확히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 화광신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따르면, 30개 방면 103개 권(2002.7), 35개 방면 111개 권(2005.1), 43개 방면 125개 권 (2010.6), 46개 방면 138개 권 (2015.12)이며, 가장 최근 에는 49개 방면 144개 권(2020.12)으로 확인된다.
을 바꾸고 일련정종 종문과의 결별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을 사제불이의 이념을 바탕으로 이케다 회장과의 긴밀한 신뢰관계의 추구로 극복했다. 1995년에 제정된 「SGI 헌장」은 타종교를 관용의 태도로 대하고 공익 활동, 사회 활동을 통한 포 교의 방향성을 더욱 공식화하였다.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을 닛켄종이라 부르며 절 복 투쟁의 대상으로서 규정했지만, 광선유포의 목적에 있어서는 공격적인 절복의 태도가 아닌 관용의 정신을 강조했다.
2000년 이후 한국 창가학회는 재단법인 설립을 허가받아 ‘한국SGI’라는 이름 으로 법적 보호 속에 대외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한국SGI은 닛켄종 파절 운동 과 애국적 대외 활동을 통해 언론 속 ‘왜색’ 이미지를 어느 정도 벗겨내는 데 성 공했다. 이와 같이 포교 활동에 긍정적인 토대를 점차 만들어가고 있지만, 한국 SGI는 다른 신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남아있는 ‘정치단체’, ‘사이비종교’라 는 부정적인 시선을 계속 경계하고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한국SGI의 체계 적인 조직 운영이 꾸준한 조직 규모의 확대의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조직의 모습이 광선유포의 실천 양 상에 주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주제어: 창가학회, 절복(折伏), 포교, 재일한국인, 왜색종교(倭色宗敎), 일련정종(日蓮正宗), 한국SGI, 사제불이(師弟不二)
투 고 일: 2020. 11. 14. 심사종료일: 2020. 11. 20. 게재확정일: 2020. 11. 2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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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istorical Understanding of the Internal and External Conflicts of Soka Gakkai in Korea
– Focusing on The Concept of Jeolbok (折伏)
Lee, Won-Sub (Seoul National Univ.)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history of the conflicts faced by Soka Gakkai in Korea by focusing on missionary activities. Also, through an analysis of the changing meaning of jeolbok (折伏), the paper aims to ascertain how methods of propagation are influenced by context and changed in history. The early flow of Soka Gakkai's propagation to Korea differs from that in Japan. Early missions to Korea were mainly conducted by Japanese Koreans. Believers who embraced the magical faith of healing and blessing attempted to solve problems in their lives through Soka Gakkai's religious practices. Different from the case of Japan, however, there were no attempts to destroy such local communal practices. In addition, adherents were not interested in imperial praise or political activities, but due to the image of an ‘anti-ethnic organization’ created by the state and the media, even relatively open propagation of Soka Gakkai in Korea was difficult. Later, Soka Gakkai became separated from the Nichiren Shoshu (日蓮正宗) due to conflict, and Soka Gakkai's identity was newly established with the doctrine of “no distinction between master and disciple” (師弟不二). Soka Gakkai in Korea also followed this position. Soka Gakkai defined the Nichiren Shoshu as an object of aggressive jeolbok, i.e. a deviant tradition to be overcome, but in practice displayed an attitude of tolerance toward the spreading of all Buddhist virtues. With this attitude, the Soka Gakkai in Korea has been operating under the name 'Korea SGI' since 2000, gradually escaping the image of the “Japanese tainted religion” (倭色宗敎) and continuing to expand its social influence. However, it is striving to mitigate the negative conceptions of “political organization” and “pseudo-religion” that remain, and it is continuing its practice of spreading its virtues through peace, culture, and educational activities.
Key words: Soka Gakkai, jeolbok (折伏), propagation, Koreans in Japan, Japanese
tainted religion (倭色宗敎), Nichiren Shoshu (日蓮正宗), Korea SGI, no
distinction between master and disciple (師弟不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