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ō Shōe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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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ō Shōeki (安藤 昌益, 1703 – November 29, 1762) was a Japanese philosopher of the 18th century. He rejected much of the Buddhist and Confucian thinking prevailing in Edo period Japan.[1] He also opposed feudalism in the political system. Shoeki never became a prominent philosopher, and throughout his life he had few followers compared to other beliefs in Japan.[2]
Ideology[edit]
Ando Shoeki believed that recorded history was a deviation from the natural order of the world, and began with the advent of writing and the rise in power of specific groups, like government officials, priests, or scholars. These groups instituted laws, and began what Shoeki called the "World of Law". In Shoekian thought, the "World of Law" was flawed, unnatural, and unequal. He wanted all humans to have the same social status because Shokei believed that all humans were, in reality, the same person, and it was impossible for one to truly be above another. It was also important for Shoeki that humans only produce and consume what was necessary, a state which he called the "Right Cultivation." Once every human was equal and had abandoned the "World of Law", Shoeki believed that mankind would finally enter the "Self-Acting World", a kind of paradise on Earth, although Shoeki believed that this would only be possible if the "Right Man", a messiah-like figure, arrived and fixed the world. Shoeki did not consider himself to be the "Right Man"; he was content to wait for him to arrive.[3]
Metaphysics[edit]
Shoekian metaphysics involves the transfer of energy in all living things. Shoeki believed that each type of organism had a different vector of energy: human energy went up because humans walked upright; animal energy went side-to-side because they crawled and because they ate each other in what Shoeki described as a sideways line; plant energy went down because they always were on the ground. These energies could be transferred across organisms to create new life as well. Humans, for example, are made from the excess energy in wheat, and mice are born from the smoke of a human's fire.[4]
The Five Terrible Crimes and The Ten Offenses[edit]
To show some of the ways to achieve the Right Cultivation, Shoeki made a series of laws named Buddhist rules and principles in an effort to satirize Buddhist thoughts. Each of these laws demonstrate some aspect of his anti-establishment ideology.[5]
The Five Terrible Crimes[edit]
- Becoming a leader of men
- Consuming greedily
- Teaching about social relations
- Polygamy
- Being concerned with money or metals
The Ten Offenses[edit]
- Making music
- Playing Go (game)
- Sacrificing animals
- Establishing borders
- Being part of the warrior class
- Giving the warrior class authority
- Being an artisan
- Trading goods
- Crafting expensive things
- Writing and being an arrogant writer
References[edit]
- Andō, Shōeki (1992). Animal Court: A Political Fable from Old Japan. Diane Pub Co.
- Andō, Shōeki (1991). Ando Shoeki: Selected Writings. New Holland Publishers.
- Norman, E. Herbert (1949). Ando Shoeki and the Anatomy of Japanese Feudalism. Asiatic Society of Japan.
- Yasunaga, Toshinobu (1992). Ando Shoeki: Social and Ecological Philosopher in Eighteenth-Century Japan. New York: Weatherhill.
Notes[edit]
- ^ Karine Marandjian, Unseen paradise: the image of Holland in the writings of Ando Shoeki, in The Japanese and Europe: Images and Perceptions (2000), edited by Bert Edström.
- ^ Yasunaga, Toshinobu (1992). Ando Shoeki: Social and Ecological Philosopher in Eighteenth-Century Japan. New York: Weatherhill.
- ^ Yasunaga (1992).
- ^ Andō, Shōeki (1992). Animal Court: A Political Fable from Old Japan. Diane Pub Co.
- ^ Yasunaga (1992).
- ^ Yasunaga (1992).
- ^ Yasunaga (1992).
안도 마사아키
안도 창 익은 에도 시대 중기 의 의사 , 사상가 , 철학가 , 혁명가 . _ _ _ _ _ _ 아키타번 출신. 당호는 확룡당 료나카 [1] [2] ,호는 야나기 가지채, 통칭은 손좌위문. 사상적으로는 무신론 이나 아나키즘 의 요소를 가지고 농업 을 중심으로 한 무계급 사회 를 이상으로 했다.
사후 근대 일본에서 사회주의 · 공산주의 에도 통하는 사상을 가진 인물로서 평가를 받았다.
평생 [ 편집 ]
데와쿠니 아키타군 후이이타무라 시모무라(현재의 아키타현 오다테시 니이다)의 호농의 집에서 태어나 동지에서 몰렸다.
장남이 아닌 리발이었기 때문에 전복 전후에 교토에 올라, 불문에 들어가 선을 배웠다(데라는 묘신지 ). 기타노 텐만구 에서도 수행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과 현상에 의문을 가지고, (전수는 불명이면서) 의사인 미오카 미츠키의 문을 두드렸다. 미오카 미츠키는 후세방별파 에 속하는 의사였다. 여기서 의사로서의 수행을 하고 하치노헤에서 개업하기 전에 결혼해 아이도 벌고 있다.
육안국 하치노헤 의 망치(야구라) 요코초에 거주해 개업의가 되었다. 연향 원년( 1744년 ) 8월의 하치노헤번의 일기 [3] 에는, 쿠시히토 하치만구의 유주마 의 사수 를 치료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연향 2년(1745년) 영주층을 대상으로 한 정치의 책 '역력대의'를 집필했다. 그러나 창익은 일개 마을 의사이자 마을 인 신분에 불과하지만. 그 가운데 「민고통 곡종이 끊어질 때는 칙칙하게 나라 죽는다. 국망하는 법칙은 국주 스스로 감각하라. 과 불인의 영주를 엄격히 비난하고 있다 [4] .
같은 해 하치노헤의 텐세이지 에서 강연을 한다. 호력 8년( 1757년 )에도 동사에서 토론회를 열고 있다. 그 후, 데와 쿠니 대관 에 귀향. 제자의 카미야마 센안은 하치노헤 번주의 측의.
창익의 대저 '자연진영도'는 보력 3년(1753년)에 간행되었다. 문인 선암의 서로부터 창익의 학파는 사회적 반향에 대해 세심한 경계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
호력 6년( 1756년 ) 9월, 향리의 본가를 이어오던 형이 죽어, 가독을 이어받는 것이 없어졌다. 이 때문에, 보력 8년경에 후타이다에 혼자 돌아왔다. 결국 가독은 친척 근육에서 입양을 맞이해 이어받았지만 창익 자신도 마을에 남아 촌인의 치료에 맞았다(하치노헤에서는 이미 아들이 주백을 자칭하고 의사로서 독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덧붙여 보력 10년 전후에는 하치노헤의 제자들(마에이도의 제자)이 일문의 전국 집회를 개최해 창익도 참가했다. 참가자는 마쓰마에에서 교토, 오사카까지 총 14명. 그 후 다시 향리로 돌아와 60세에 병사했다.
사상 [ 편집 ]
창익은 그의 살아있는 사회를 "법세" [6] 로 간주하고 법세 이전에 "자연의 세상" [7] 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법세를 자연의 세상으로 높이는 구체적인 방안 [8 ] 제창했다 [9] .
신분·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이 노동(괭이로 직접 지면을 경작하고, 쌓은 타바타에서 이마에 땀으로 일한다고 하는 「직경」)에 종사해야 한다는, 철저한 평등 사상 을 주창하고 있어 저서 '자연 진영도'(제25권 중 '자연노 여론')에 그 생각(이상사회)이 적혀 있다. 그의 사상체계는 봉건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목격하며 깊은 시대적 관심에 뒷받침되고 있다. 위정자를 불경식의 배와 단죄도 하고 있다.
그 당시의 오우우 지방에서는, 관연 2년(1749년) [10] , 보력 5년(1755년) [11] , 동 7년(1757년)과 기근이 빈발했다. 또, 관동보다 일대에 걸쳐 씨닝 [12] 이 널리 행해지게 된 것도 요즘이다 [13] . 창익은 이러한 현실을 응시하고 생각했다.
"... 중평토의 인륜은 십곡 모듬에 경작하고, 야마사토의 인륜은 장작재를 잡고 之을 평토에 내고, 해변의 인륜은 여러 생선을 잡고 之를 평토에 내고, 장재재십 곡제 어류를 용이하게 산리에도 장작재 십곡제 어유를 먹고 지를 가작하고, 해변의 인륜도 집 만들기 곡식해 어채하고, 평토의 사람도 상동해서 평토에 과잉 도 없고, 해변에 과부족 없고, 그(카시코)에 부도 없고 여기에 가난도 없고, 여기에 위도 없고 그에게 아래도 없고… 에 질투하는 일도 없고, 그러므로 원한쟁쟁도 없고, 그러므로 난군의 나오는 것도 없는 야. 의 형을 받으면(자) 고통도 없고,…오상오륜 시민등의 이기의 가르침이라면, 성현우 불초의 격도 없고, 하민의 의외를 형(하고)해 그 머리를 두드리는 사 (사무라이) 없고, 고부효의 가르침이라면 부모에게 콧부모를 나쁘고 부모를 죽이는 사람도 없음 아이를 나쁘게 하는 부모도 없다. … 부탁해 자연 오행의 자위로 해 천하 이치로 해 전혀 인별 없고, 각각 경작하고 아이를 기르고 웅장하게 능숙하게 경작해 부모를 양자를 키워 혼자서 을 하면 만만인지를 위하여, 탐욕하는 사람 없으면 탐취하는 사람도 없고, 천지도 인륜도 따로 따로 없고, 천지생 어긋나면 인륜 경작하고, 쭉 외일천의 사위해. 자연의 세상의 유대해
— 「자연 진영도」 제25권 중 「자연의 여론」의 요점을 뽑아낸 것,
'자연진영도'의 내용은 공산주의와 농본주의 , 생태 에 통하는 생각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의 사상에도 관련성이 있어, 간구의 넓이가 보여진다. 또 이 책에서 창익은 에도막부 가 봉건체제 를 유지하고 민중을 착취하기 위해 유교 를 이용해왔다고 주장하며 공자 와 유교, 특히 주자학 을 철저히 비판했다.
임기 는 "이데올로기 위에서도 보력 연간은 중대한 획기를 이룬다. 최대 지표는 안도 창익의 '자연 진영도'의 성립이다" "그 기초인 막번봉건제적대 토지 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현존의 일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비판한 '자연 진영도'의 성립이야말로 완전히 획기적인 변화의 지표로 해야 한다. 역년간 계급투쟁의 질적전화 과정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논하고 있다 [14] .
나중에 주일 캐나다 대사인 H(하버트)·노먼 의 손에 의해, 「잊혀진 사상가-안도 창익의 것」 원서명:Ando Shoeki and the Anatomy of Japanese Feudalism 년)이 기록됨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나라모토 타츠야 는 1935년경 '통도 진전' 사본 5권을 교토대학 국사연구실의 서고 한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나라모토는 이것이 찍히기 시작 했을 때에는 세상에도 귀중한 사료로서 맞이했을 것이다 .
1976년 미야케 마사히코는 창익의 사회변혁론이 존왕론 의 계보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16] . 그것을 받아 하야카와 마사코는, 「사법신서권」(고본 「자연 진영도」권구)의 분석에 의해 창익의 존왕 추 이론 을 입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7] [9] .
저서 [ 편집 ]
- 논문 『자연 진영도』(전 101권. 1899년, 카노 료요시 가 재발견, 92권) )
- 「통도 진전」(1752년경 저술한다.전 5권, 현존)
- 간본『자연 진영도』(1753년, 간행. 3권 3권, 현존, 일본 철학 전서 제 9권에 담겨 있다.)
주저라고 할 수 있는 논책 '자연 진영도'(자필본)는 발견자인 카노 료요시에 의해 도쿄 제국 대학 도서관 에 소장되었지만, 그 대부분이 관동 대지진 으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15권뿐이며, 그 중 12권이 도쿄 대학 종합 도서관의 장서이다. 그 후, 「통도 진전」이나 간본 「자연 진영도」등이 발견되어, 그 문헌을 바탕으로, 1983년 - 1987년에 「안도 창익 전집」(안도 창익 연구회편, 농산 어촌 문화 협회) , 총 21권별권 1)이 간행되었다.
전집의 간행 후, 1969년에 교토대학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되고 있던 「마사이 법필」이라고 하는 고의서가, 그 내용으로부터 고본 「자연 진영도」의 후반 부분을 찍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 또, 2001년에는 나이토 기념 쿠스리 박물관 의 다이도 약실 문고에서 『료나카코 신의 텐진』과 『료나카코 선생님 자연 진영 도방』이라는 창익의 의학서를 요약한 문헌이 발견되어 이들은 2005년에 「안도 창익 전집」의 증보편(전 3권)에 수록되었다.
사사하라 히로유키 는 안도의 저서에 「강의」라고 써야 할 부분에 「강의」라고 하는 오기가 있는 것, 이것은 부수에 붙어진 것일 것, 현대의 학생에게도 자주 보이는 오기인 것 을 자저로 소개하고 있다 [18] .
각주 [ 편집 ]
- ↑ 『에도 시대 인물 대기 1000』야마모토 히로부미 감수, 쇼가쿠칸 , 2007년, 20-21페이지. ISBN 978-4-09-626607-6 .
- ^ 우에다 마사아키, 츠다 히데오, 나가하라 케이지, 후지이 마츠이치, 후지와라 아키라, 「콘사이스 일본인명사전 제5판」, 주식회사 산세이도, 2009년 70페이지.
- ↑ 번의 공용 일기 「하치노헤 번 일기」
- ↑ 와카오 마사키, 2004년, 247면
- ^ 마루야마 마사오「부장 2 안도 마사유」(1945년도 강의·제12장) “마루야마 마오 강의록 제1권 일본 정치 사상사 1948” 도쿄 대학 출판회 , 1998년, 252페이지
- ↑ 전란・재해・기근이 끊임없이 지배자가 민중의 노동생산물을 착취하는 세상
- ↑ 전란이나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
- ^ 잃어버린 상하인별을 따라 상하에 따로 숨길 수 없는 법(고본『자연진영도』권25)
- ↑ a b 와카오 마사키, 2004년, 1페이지
- ↑ 11월 사도의 농민, 증미 면제 등을 에도에 초소한다. 12월 리쿠오신부·다테 양군 막령의 농민, 감조·연납을 요구해 강소한다. 아이즈번 전령의 농민, 연공반면 등을 호소하고 봉기한다. 니혼마츠번·미하루번 등에서도 일연 잇따른다. 陸奥塙代官所 지배의 농민, 감면을 요구하고 봉기한다. 아이즈번, 빈민에게 반면을 결정해, 정율의 정면제를 시행한다.
- ↑ 올해 안쪽을 중심으로 대기근. 또한 요네자와, 야마가타, 덴도 등으로 파괴되어 일어난다.
- ^ 센다이 번소 히가시야마 의 책에 “560년 이전 마데, 오백성 아이 생육 루니하, 일부 일부 니테 남녀 56인모 78인모 생육 처처, 최근 상속 풀고 세상 녀석 후고 니야, 한 양인 노외 하타쿠하 생육사 라즈, 모도스반스 건토 신후테, 출생이나야 부모님 직니 잔해 마무리”라고 있는 것은, 보력 4년의 일로 있다(일본 경제대전, 제11권, 477페이지.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도쿄대학 출판회, 1952년 265페이지)
- ↑ 9대 가중(1745-1760)의 무렵이 되어도 사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최근 초기보다 점차 상승을 계속해 온 전국 인구수는 증가가 멈출 뿐만 아니라 감소하기 시작했다. 향보 11년(1726년)을 인구지수 100으로 하면 연향원년(1744년) 98.51, 보력 6년(1756년) 98.18, 동 12년(1762년) 97.25이다. 전 인구의 80%를 차지했을 농민의 생활 상황에 실태이다(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도쿄대학 출판회, 1952년, 253-254페이지).
- ↑ 와카오 마사키, 2004년, 285면
- ↑ 나라모토 타츠야「일본의 역사 17 마을 사람의 실력」중공문고 신판 [S-2-17] ISBN 978-4122046283 , 376p
- ^ 미야케 마사히코 「에도 시대의 사상」 「체계 일본총서·사상사Ⅱ」야마가와 출판사 , 1976년 [ 요점 페이지 번호 ]
- ^ 하야카와 마사코 「안도 창익의 사회 개량론의 일고찰」(아이치 교육 대학 철학 교실내 일본 사상사 연구회편 「일본 사상사에의 사론」미시마 서방, 1981년)
- ↑ 사사와라 히로유키『일본의 한자』이와나미 신서 신적 판 991 ISBN 4004309913、74p
참고 문헌 [ 편집 ]
- 이시도 히로아키 「안도 창익 의 세계-독창적 사상은 어떻게 태어났는가」쿠사 사사 , 2007년
- 이나바 카츠오 『하치노헤의 안도 마사익』 하치노헤시・하치노헤 역사 편찬실, 2002년
- 이나바 모리 「지금으로 안도 창익」 후지사, 2004년
- 『카노 료 요시 유문집』아베 노세이 편, 이와나미 서점 , 1958년. 복간 1986년 외
- 사쿠라다 히사히사『안도 창익』 토호 출판사, 1969년. 소설
- 라두리 자투로브스키의 무라카미 쿄이치역 18세기 일본의 유물론자 안도 창익의 세계 유산각 출판, 1982년
- 테라오 고로 “안도 창익의 싸움” 농산 어촌 문화 협회, 1978년
- 테라오고로 “논고 안도 창익” 농산 어촌 문화 협회, 1992년
- 테라오 고로 “안도 창익의 자연 철학과 의학 계속·논고 안도 창익(상)” 농산 어촌 문화 협회, 1996년
- 테라오 고로 “안도 창익의 사회 사상 계속·논고 안도 창익(아래)” 농산 어촌 문화 협회, 1996년
- 도조 에이키 '안도 창익의 '자연 정세'론'농산 어촌 문화 협회, 1996년
- 나라본 타츠야 교정 『통도 진전』이와나미 문고 (상·하), 1970년. 이후 복간
- E·하 버트·노먼 , 오쿠보 겐지역 “잊혀진 사상가~ 안도 창익의 일~ ”
- 노구치 타케히코『일본의 명저〈19〉 안도 창익』중앙 공론사 , 1971년, 나카나카 공 벅스
- 하치노헤시 시립 도서관편 「안도 마사마키」이요시 서원, 1974년
- 오토 마사히데 교정 『일본 사상대계〈45〉 안도 마사유・사토 노부후치』이와나미 서점 , 1977년
- 오토 마사히데, 이시도 히로아키, 마츠모토 켄이치 '안도 마사유(일본 앤솔로지)' 미쓰쇼사, 2002년
- 미야케 마사히코 『안도 마사유의 사상적 풍토 오다테 니이다 민속지』와 함께 출판, 1983년
- 야스히로 야스히로 " 안도 마사카시" 보통 회 , 1976
- 와타나베 오타루 『안도 마사히쿠와 자연 진영도(와타나베 오오 마사노리 논집) 』
- 와카오 마사키「안도 마사유에서 보이는 일본 근세」도쿄대학 출판회 2004년 ISBN 4-13-026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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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 편집 ]
안도 쇼에키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あんどう しょうえき, 1703~1762)는 에도 시대 중기의 의사, 사상가, 철학자이다. 아키타 번 출신. 호는 확룡당양중(確龍堂良中)[1]이다. 사상적으로는 무신론과 아나키즘의 요소를 포함했으며 농업 중심의 계급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근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도 연결되는 사상의 소유자로 평가되었다.
생애[편집]
데와국 (아키타현 오다테시)의 부농에서 태어났고 생을 마감했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과거에 선종(禪宗)의 노승으로부터 대오(大悟)를 인정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어, 이를 받아들인다면 청년 쇼에키는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한 선승(禪僧)이었을 것이다. 묘심사(妙心寺)에서 선종을 공부했고 기타노 덴만구에서 공부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후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아지오카 산파쿠(味岡三伯, 後世方別派)에게 배워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당시 의학의 중심지였던 교토에서 의학을 배우는 한편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마해 백과사전적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1744년부터는 지금의 아오모리(靑森) 현 하치노헤(八戶) 시에 살면서 지방의 문화 서클에서 사상 강연을 하는가 하면 관청으로부터 어려운 치료를 의뢰받을 정도로 유능한 의사로서의 명성도 얻었다.[2] 1745년에는 영주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서 『暦大意』를 썼다. 일개 동네 의사이면서도 인자하지 못한 영주를 극도로 비난했다.[3] 1757년에는 천성사(天聖寺)에서 강연과 토론회를 열었다. 이후 고향인 오다테로 돌아가 제자를 키웠다. 제자인 神山仙庵는 하치노헤 번주의 의사가 되었다.
쇼에키가 하치노헤에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농산물의 지나친 상품작물화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로 인해 이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기갈로 인해 환자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비극적인 사태에 직면한 그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병이 발생한 원인에 눈을 돌렸다. 곧 자연 파괴는 눈앞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비판적 지성인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근세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남기고 농민 운동가로서 농민들로부터 ‘수농대신(守農大神)’이라 숭앙을 받으며 17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연진영도[편집]
안도 쇼에키는 변증법 사상과 반봉건적 사회관 때문에 잊힌 사상가되었다. 교토대학의 가노 고키치 박사가 헌책방에서 ≪자연진영도≫라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발견하게 되면서 안도 쇼에키와 그의 사상은 약 100년 만에 부활하게 된다. 가노 교수는 ≪자연진영도≫의 독창적이며 비판적인 사상에 “쇼에키는 일본이 낳은 최대의 사상가로 세계 사상사에 빛날 인물”이라고 감탄했다.
쇼에키는 자신의 시대를 법세로 간주하고[4] 법세 이전에 자연세가 있다고 생각했다.[5] 그리고 법세를 자연세로 되돌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했다.[6][7]
신분과 계급을 부정하고 모두가 노동해야 한다는 철저한 평등사상을 제창했으며 자연진영도(『自然真営道』「自然ノ世論」)에 그 이상사회를 묘사했다. 쇼에키의 노동은 모두가 땀흘리며 괭이로 지면을 경작한다는 실천적인 것이다. 그의 사상체계는 봉건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직접 목격한 끝에 나온, 시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구축된 것으로 위정자를 놀고먹는 자들로 지목한다.
당시 오우(奥羽) 지방에서는 1749년[8] 1755년[9] 1757년에 기근이 들었다. 또한 관동지방 일대에 영아 살해[10]가 널리 벌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11] 쇼에키는 이 현실을 목도했다.
자연진영도의 내용은 공산주의나 농본주의, 환경 운동에까지 이어지며 무정부주의와도 맥이 닿는다. 또 쇼에키는 에도 막부가 봉건제를 유지하고 민중을 착취하기 위해 유교를 이용했다 주장하고 공자와 유교, 특히 주자학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는 도쿠가와막부의 봉건제도에 대해 비판하며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농업 평등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제자인 神山를 시작으로 쇼에키학파가 형성되어 실천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12] . 그는 19세기에 일어난 왕정복고 운동의 선구자이며, 동서양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럽 사상을 연구한 최초의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중심 사상으로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회변혁론(社會變革論), 존왕론(尊王論) 등을 들 수 있다.
쇼에키는 인류의 역사가 태고의 자연세로부터 성인이 출현한 이래의 법세를 거쳐 이상사회인 자연세로 되돌아간다고 봤다. ‘자연세-법세-자연세’라는 쇼에키의 역사관은 근대적인 진보 사관이나 변증법적인 발전 사관이 아니라 동양 고대의 순환 사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도원향(桃園鄕)으로서의 이상사회를 꿈꾸기만 한 유토피언은 아니었다. 최고 강령으로서의 ‘자연세’에 도달하기 위한 과도적 사회를 모색하고 있는데, 이런 과도적 사회는 ‘읍정(邑政)’ 자치를 기초로 하는, ‘직경자’가 결정권을 가진 사회다. ‘법세’의 계급과 신분 등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모든 인간이 직경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이별(二別)’의 문제를 해소해 가게 되는 것이다. 쇼에키에 따르면 과도적 사회에 ‘직경’과 ‘호성’을 체현한 참으로 바른 사람, 곧 ‘정인(正人)’이 나타날 때 ‘자연세’로 이행한다.
그중 <법세 이야기>는 동물이 집회를 가지고 인간의 ‘법세’를 비판한다는 줄거리다. 이것은 이솝보다는 오히려 스위프트(swift)에 가까운 픽션으로 ≪자연진영도≫ 가운데서 극히 특이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새·짐승·벌레·물고기, 즉 네 종류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지만, 동물의 그와 같은 생존 방식은, 이른바 ‘통(通)·횡(橫)·역(逆)’이라는 ‘활진(活眞)’의 운행 논리에 근거하는 한 극히 자연적인 것이다. 한편, 통기의 존재인 인간의 자연은 횡기의 존재인 동물의 자연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세’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인간의 법 세계가, 동물의 세계와 얼마나 비슷한가를 극명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본래 동물과 달라야 할 인간이 동물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반자연화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역설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통기의 존재인 인간이 횡기의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법세’를 보여 주면서 자연에 즉해서 살아가는 동물이 자연에 반해서 살아가는 법세의 인간보다도 훨씬 행복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저서[편집]
- 1752 통도진전『統道真伝』
- 1753 자연진영도『自然真営道』
- 법세 이야기, 지만지
쇼에키의 저서로서는 원고본과 간행본으로 된 ≪자연진영도≫와 ≪통도진전(統道眞傳)≫ 등이 있다. 주일대사를 역임한 캐나다의 허버트 노먼이 Ando Shoeki and the Anatomy of Japanese Feudalism (1950)을 써서 널리 알려졌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 ↑ 인용 틀이 비었음 (도움말)
- ↑ 하치노헤번의 일기(藩の公用日記『八戸藩日記』)에는 야부사메의 사수를 치료했다고 기록되어있다.
- ↑ 「民苦しみ穀種絶つときは、則ち国亡ぶ。国亡ぶる則は、国主自ら減却ぞ。罰恥百世に殆す者也」(『暦大意』<歳変>), 若尾政希、2004年、247ページ
- ↑ 戦乱・災害・飢饉が絶えず、支配者が民衆の労働生産物を搾取する世
- ↑ 戦乱や身分差別のない世
- ↑ 失りの上下仁別を以て、上下に別に非らざる法(稿本『自然真営道』巻25)
- ↑ 若尾政希、2004年、1ページ
- ↑ 11月佐渡の農民、増米免除などを江戸に越訴する。12月陸奥信夫・伊達両郡幕領の農民、減租・延納を要求して強訴する。会津藩全領の農民、年貢半免などを訴えて蜂起する。二本松藩・三春藩などでも一揆相次ぐ。陸奥塙代官所支配の農民、減免を要求して蜂起する。会津藩、貧民へ半免を決定し、定率の定免制を施行する。
- ↑ この年奥羽を中心に大飢饉。また、米沢・山形・天童などで打ち壊し起こる。
- ↑ 仙台藩蘆東山の上書に「五六十年以前マデ、御百姓子供生育仕ルニハ、一夫一婦ニテ男女五六人モ七八人モ生育仕ル処、近年相続仕ル故カ、又世上奢リ候故ニヤ、一両人ノ外ハ多クハ生育仕ラズ、モドス返ス坏ト申候テ、出生イナヤ其父母直ニ残害仕候」とあるのは、宝暦4年のことである(日本経済大典、第11巻、477ページ。丸山眞男 『日本政治思想史研究』東京大学出版会、1952年 265ページ)
- ↑ 9代家重(1745-1760)の頃になっても事態は少しも改善されなかった。近世初期より徐々に上昇続けてきた全国人口数は、増加が止まっただけでなく減少し始めた。享保11年(1726年)を人口指数100とすると延享元年(1744年)98.51、宝暦6年(1756年)98.18、同12年(1762年)97.25である。全人口の8割を占めたであろう農民の生活状況に実態である(丸山眞男『日本政治思想史研究』東京大学出版会、1952年、253-254ページ)。
- ↑ 丸山眞男「付章2 安藤昌益」(1945年度講義・第12章)『丸山真男講義録 第1冊 日本政治思想史 1948』東京大学出版会、1998年、252ペー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