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 종교평화학자 이찬수 교수의 새로운 신학 강의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 종교평화학자 이찬수 교수의 새로운 신학 강의
이찬수 (지은이)동연(와이미디어)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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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반양장본
304쪽
152*223mm (A5신)
470g
ISBN : 9788964472507
주제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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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인문학 > 신화/종교학 > 종교학 > 종교학 일반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목회/신학 > 신학일반
책소개
종교평화학자 이찬수 교수의 새로운 신학 강의. 이 책에서 저자는 성서를 근거로 배타적 유일신론을 견지하는 이들에게 다시 성서를 근거로 그런 신관의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제기하면서, 22세기에도 통할 대안적 신관을 찾는다. 기존의 ‘유일신론’적 신에 대한 이해에서 ‘범재신론’적 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성서적 기초를 놓아보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적 배타성의 근간처럼 여겨지는 성서의 쟁점들을 현대적 감수성을 반영하며 차분하게 해설하되, 가능한 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평이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궁극적 실재의 다른 이름인 신(神)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도모한다. 그렇게 신 이해의 보편성을 확보함으로써, 인류의 상생과 평화에 일말이나마 공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행간 곳곳에 담았다.
목차
머리글 : 차라리 유일신론을 폐기하라
제1부 | 유일신론의 재구성 - ‘신이 하나’라는 말
“나는 나다!” - 신적 자존성의 기원
신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다 - 택일신론
내면에서 신을 찾다 - 주체성의 발견
하나가 전체다 - ‘야훼 한 분뿐’이라는 말
신이 없는 성서도 있다 - 거룩의 상대성
타락한 도시도 사랑한다 - 진짜 기적
멸망은 신의 뜻이 아니다 - 노아 계약의 유효성
신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 신의 흔적
신은 없는 곳이 없다 - 의심의 힘
땅이 하늘이다 - 승천의 탈신화
신은 떠나지 않는다 - 360°로서의 신
제2부 | 우상의 재해석 - 문화적 혼용과 탈경계 신앙
절한다고 우상숭배가 아니다 - 형식과 마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 바울로의 우상관
유대교에서 분리되다 - 탈율법주의
스스로 종이 되다 - 종교적 자유
차별을 넘어서다 - 베드로의 종족주의 탈출기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 - 치유와 헌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 - 이름의 비밀
신은 언제나 알려지고 있다 - 성령의 보편성
신은 여러 이름으로 드러난다 - 순교 다시 보기
말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 - 로고스와 육화
제3부 | 자비의 정치학 - 예수의 아버지와 다른 종교들
자비의 정치학을 펼치다 - 거룩의 종교 넘어서기
글이 길이 되다 - 기독교적 깨달음
이것만 알면 된다 - 하느님?예수?제자
진리가 너희를 사망케 하리라 - 구원의 의외성
예수는 유대교인이었다 - 내면의 혁명
예수는 왜 죽었나 - 유월절의 정치학
제4부 | 그런 세계(其然)와 그렇지 않은 세계(不然) - 예수의 표층과 심층
성당(聖堂)은 거룩한가 - 여전한 거룩주의
기독교는 여전히 필요한가 - 다원주의 시대의 영성
에덴으로부터 도약하다 - 실낙원 재해석
언제나 신성한 시간 -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유다보다 나은 자 누구인가 - 기연불연(其然不然)
예수는 이단이었다 - 이단과 정통
제5부 | 내세의 생성 - 전부 받아들이는 세계
내세도 바뀐다 - 연옥의 논리
지옥으로 내려가다 - 예수와 지장보살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 죽음과 내세
영혼에도 몸이 있다 - 바울로의 부활관
같을까 다를까 - 부활과 열반
시간에서 영원을 살다 - 시간과 영원
정리하는 글 :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접기
책속에서
성서에도 갇히지 않는다
신은 그런 의미의 ‘절대자’이다. 신은 ‘있다’는 말에도 갇히지 않고 ‘없다’는 말에도 매이지 않는다. 몇 해 전 영국 런던에서 “신은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인생이나 즐겨라”(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며 ‘무신론’을 광고하는 이색 버스가 운행한 적이 있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주도해, ‘신이 있다’는 유치한 주장을 비판하는 광고 문구였다. 이것을 본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에 발끈하며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무신론 주장에 발끈하는 기독교 신자나, 무신론적 주장을 펼치는 이나 사실상 신을 상대성 영역에 떨어뜨리기는 매한가지이다. 신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싸우는 것은 오십보백보이다. 모두가 신을 인간의 범주 안에 가두어두는 일이다. 탁월한 과학자 도킨스가 적극적인 무신론주의자로 자처한 것은 따지고 보면 신을 좁디좁은 상대성의 영역에 가둬두었던 기독교인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앞으로 하나하나 살펴보겠지만, 성서에서 묘사하는 신은 사실상 성서 안에도 갇히지 않는 초월자다. 그리고 보편자다. 기독교의 신은 기독교 안에도 갇히지 않는다. 신이 성서라는 문자 안에만 들어 있는 것처럼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서라는 책과 문자만 살려두고 신은 죽이는 자다. 신이 기독교 안에 갇힌 것처럼 말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라는 제도, 예배당이라는 건물은 신이 거주하기에 좁아도 너무 좁은 공간이다. 그곳에 갇힌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러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신이 정말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 신이 어찌 알량한 문자나 제도 안에 갇히겠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이 존재한다면서 사실상 신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고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다짐에 머물 때가 많다. 논리적 차원에서 그것은 신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오류일 수도 있다. 신을 말로는 유일신이라면서도 실제로는 여러 신들 중 최고신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아무리 ‘높은’ 신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낮은’ 신에 대한 상대적 존재이고, 다신교적 개념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구름 너머 어딘가 존재하는 어떤 형상을 지닌 존재처럼 신을 생각한다면, 그 신은 그저 상상 속의 외계인일 뿐이다.
성서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해준 생명의 원천이다. 머리말에서 말한 대로 신은 자연법칙과 같다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신은 사물 하나하나와 연결되지만 그에 매이거나 갇히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 인간이 만들어낸 일체의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넘어선 분, 즉 초월자이다. 물론 초월자라 해서 그저 인간이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전 우주의 모든 것, 그 한복판에 있되,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은 나의 일거수일투족 안에 있되, 내 안에 있는 신이 신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슬람의 알 할라즈(858?-922)라는 급진적 신비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진리이다.” 그러나 그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서 사형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높이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나는 죽고, 내 안에 신으로 가득 찼다는 뜻으로 해석될만한 일이었다. 결국 신이 진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해를 받아 처형당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였지만, 그는 예수야말로 인간과 신이 합일된 최고의 신비주의자라고 간주했다.
바울로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디아서 2,20)고 고백했다. 이것 역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 자기는 죽고 우주적 진리를 자기 안에서 보게 된 자의 고백이다. 신을 숨 쉬고 잠자는 모든 곳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나는 나다”라는 촌철살인과 같은 한 마디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마당에 어찌 신이 교리 안에, 교회 안에, 문자 안에, 내 안에 다 갇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이 어찌 특정 언어적 규정, 종교적 개념 안에 다 갇히는 상대적 존재이겠는가. “나는 나”라고 말한 이 신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근원자다. 여러 종교적 표현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 <“나는 나다” - 신적 자존성의 기원>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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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칼 라너(Karl Rahner)와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를 비교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종교철학에 기반한 평화인문학의 심화와 확장을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 저서로 『평화와 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 사형폐지론과 회복적 정의』(공역), 『아시아평화공... 더보기
최근작 : <한국인의 평화사상 2>,<한국인의 평화사상 1>,<인간은 신의 암호> … 총 4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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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종교평화학자 이찬수 교수의 새로운 신학 강의
새로운 종교개혁을 위해, 성서의 쟁점들로 풀어낸 범재신론
우리 시대 종교화해와 종교평화를 위해 앞장서서 연구하며 활동하는 이찬수 교수가 한국 기독교의 병폐로 불리는 여러 이론적 쟁점들에 대해 새로운 담론을 전개한다. 종교평화에 걸림돌로 작용해 온 ‘유일신론’, ‘구원관’, ‘우상 숭배’, ‘종교다원주의’, ‘내세관’ 등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범재신론’ 또는 ‘만유(내)재신론’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신학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종교개혁을 꿈꾸며, 배타주의와 독선주의, 근본주의에 물들고 교조화와 세속화 굴레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에 신학적 대안을 제시한다.
범재신론은 범신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영어로는 Panentheism이며, 어원인 그리스어로 Pan은 ‘모든 것’이라는 뜻이고, en은 ‘안’이라는 뜻이고, theos는 ‘신’이라는 뜻이다. 즉 ‘모든 것은 신의 안에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범신론과는 달리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 개념이다. 서구 사상가로는 화이트헤드와 샤르뎅, 맥페이그를 대표로 꼽으며,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이 한국신학계에서 최근 가장 회자되는 범재신론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미 낡은 유물이 되어 곳곳에서 부식하고 있는 유일신론 개념을 폐기하고, 이제는 범재신론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저자는 “개신교는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다. 종교 간 조화와 관용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겠다”며,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불상에 절을 했던 신학자다. 그 이유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교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으나 결국 “학교 측의 재임용 거부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고 복직하는 등 종교화해를 위해 강단에 머물지 않고 전방위로 애써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일신론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그로 인한 갈등과 분열을 안타까워하며 유일신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도모한다. 새로운 종교개혁이 요청되는 시대, 신에 대한 범재신론적 인식과 이해에 기초할 때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종교개혁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행간 곳곳에 담았다. 유려한 글쓰기와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그의 글은, 신학자이면서도 화엄철학과 선(禪)불교를 공부하면서 ‘종교적 전환’을 경험했다는 자신의 ‘전환’ 경험으로 독자들을 이끌 것이다. 또한 범재신론에 대한 안내서가 없는 한국신학계의 상황에서 귀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22세기에도 통할 대안적 신관
현대인들의 상당수는 신(神)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는다는 말이나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낯설어한다. 그렇게 된 원인을 설명하기는 간단치 않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종교인들 탓이 제일 크다. 특히 유일신론 종교 전통에 속한 이들 상당수가 급변하는 사회에서 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 없이, 수백 년 전 수직적 신분사회에서 형성된 언어만 고집해온 데서 기인한다. 신에 대한 자기중심적 이해가 신의 모든 것인 양 여기고 ‘그들만의 세상’에 머물면서 현대 지성인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탓이다. 현대인들은 현대인들대로 종교적 배타주의나 근본주의의 몰지각함에게서 크든 작든 정신적 상처를 받은 탓이기도 한다. 상황이 그러니 오늘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신을 믿지 않는 것도, 그런 신이 어디 있느냐며 반문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현상의 기초에는 종교인들의 왜곡된 신 이해가 놓여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서를 근거로 배타적 유일신론을 견지하는 이들에게 다시 성서를 근거로 그런 신관의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제기하면서, 22세기에도 통할 대안적 신관을 찾는다. 기존의 ‘유일신론’적 신에 대한 이해에서 ‘범재신론’적 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성서적 기초를 놓아보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적 배타성의 근간처럼 여겨지는 성서의 쟁점들을 현대적 감수성을 반영하며 차분하게 해설하되, 가능한 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평이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궁극적 실재의 다른 이름인 신(神)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도모한다. 그렇게 신 이해의 보편성을 확보함으로써, 인류의 상생과 평화에 일말이나마 공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행간 곳곳에 담았다. 나아가 신이라는 것은 생명을 살리고 평화가 구체화되는 곳에 생명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성서를 근거로 밝혀보고자 한다.
차라리 유일신론을 폐기하라!
이 책에서 말하는 유일신론의 재해석의 핵심은 ‘하나’의 개념이다. ‘신이 하나’라고 할 때의 ‘하나’는 사실상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이 하나라는 말은 신이 모든 곳에 있다는 말과 같다. 바꾸어 말해 모든 것은 신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신은 자연법칙과 유사하다. 우주에, 적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살 수밖에 없고, 그 자연법칙 안에서 움직인다. 자연법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는 있지만, 신은 기본적으로 자연법칙과 거의 같다. 자연법칙을 관찰하는 눈도 자연법칙에 따르듯이, 신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모든 것이 신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이가 범재신론자다. 범재신론적으로 보건대 신이 없는 곳이 없다. 이른바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전체이다.
신이 전체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 및 만물의 기원과 목적 등에 대해 성찰할 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기도 하다. 인간과 사물에 대해 두루 상상하다보면 신은 만물을 만물되게 해주는 근원적 원리나 힘으로 해석될 만한 것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특별히 유일신론적 종교전통 안에 있는 이들에게 좀 더 친숙할 표현이겠으나, 알라, 불성(佛性), 브라흐만이라 해도 상관없는 광활한 세계이다. 천(天), 리(理), 도(道) 등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보편의 세계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이 없는 곳이 없다. 신이 없다는 주장마저 가능하게 해주는 세계가 범재신론적 신이다.
이런 세계관을 지닌다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이 얼마나 지독한 모순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신을 믿는 이들은 무신론자마저 신의 이름으로 긍정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포용 속에서 신의 본질이 드러나고, 인류의 이상인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하나하나 밝히려는 내용의 요지다.
신이 하나라는 주장, 이른바 유일신론은 제대로만 해석한다면 범재신론과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유일신론과 범재신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는 사실상 ‘전체’이자 ‘근원’을 나타내주기 위한 수학적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범재신론은 유일신론의 폐기이자 재해석이고, 그런 의미의 유일신론의 완성이다.
범재신론적 신은 기독교적 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물을 만물되게 해주는 근원적 원리나 힘으로 해석될 만한 것에 붙여진 기독교적 이름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범재신론은 기독교적 틀을 넘어 다양한 종교적 세계관에 두루 통하는 신론적 기초를 제공해줄 것이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