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나라’ 일본과 ‘무종교’의 일본 - 서정민(徐正敏)|論座 - 朝日新聞社の言論サイト
‘신의 나라’ 일본과 ‘무종교’의 일본
-‘8백만’의 신과 99.9% ‘무종교인’ 클래스-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2019年04月28日
徐正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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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재직 중인 메이지가쿠인대학, 일본의 사립대학 중 다수가 기독교계 대학인데, 기독교 대학의 교수, 직원, 재학생 대부분은 ‘무종교인’이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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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종교를 가졌는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가
필자는 대학에서 주로 종교사 과목을 가르친다. 매년 개강 후 첫 시간이면, 100명 전후의 클래스에서 질문을 한다.
"종교를 가진 이가 있는가, 아니면 종교에 관심이 있는 이가 있는가?"
돌아 오는 대답은 대개 지난 수년간 다름이 없다. 100명 중, 클래스에 따라 한 사람 정도가 종교가 있다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전무하다. 그리고 100명이면 7-8명 정도가 종교에 관심이 있다고 답하는데, 그 정도도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 필자의 클래스는 더구나 종교의 역사, 혹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학습해야 하는 클래스인데도 그렇다. 그런 면으로 보면 필자는 대단히 불우한 교수이다.
종교도 거의 가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는 학생들에게 일단 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다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셈이다. 벽을 바라보고 강의를 하는 형국이라고 할까, 공허한 독백을 늘어놓는 강의라 할까, 아무튼 극한 직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필자의 클래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다수 젊은 세대, 특히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집단일수록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종교가 없는 ‘무종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종교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거나,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정녕 이러한 일본의 ‘무종교’ 대세 현상은 역사적으로 그런 것이며, 일본은 본래부터 ‘무종교’의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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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종교를 가졌는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가
필자는 대학에서 주로 종교사 과목을 가르친다. 매년 개강 후 첫 시간이면, 100명 전후의 클래스에서 질문을 한다.
"종교를 가진 이가 있는가, 아니면 종교에 관심이 있는 이가 있는가?"
돌아 오는 대답은 대개 지난 수년간 다름이 없다. 100명 중, 클래스에 따라 한 사람 정도가 종교가 있다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전무하다. 그리고 100명이면 7-8명 정도가 종교에 관심이 있다고 답하는데, 그 정도도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 필자의 클래스는 더구나 종교의 역사, 혹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학습해야 하는 클래스인데도 그렇다. 그런 면으로 보면 필자는 대단히 불우한 교수이다.
종교도 거의 가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는 학생들에게 일단 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다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셈이다. 벽을 바라보고 강의를 하는 형국이라고 할까, 공허한 독백을 늘어놓는 강의라 할까, 아무튼 극한 직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필자의 클래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다수 젊은 세대, 특히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집단일수록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종교가 없는 ‘무종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종교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거나,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정녕 이러한 일본의 ‘무종교’ 대세 현상은 역사적으로 그런 것이며, 일본은 본래부터 ‘무종교’의 나라일까?
‘신의 나라’[神國] 일본
그렇지가 않다.
일본은 종교학자들이 이르기를 전통적으로, 종교문화사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신이 있고, 그 신을 섬기는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보통 일본의 신을 8백만으로 헤아린다. 신이 8백만이 있다는 것은 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형상도 다 신이 될 수 있다는, 다신교 최고 단계의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종교의 기저가 되는 신도(神道)는 세계적으로도 대표적 다신교 종교인 것이다.
아무튼 근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종교와 더불어 각 지역 군락의 삶이 형성되었다. 곳곳에 남아있는 종교적 제의와 축제가 다 그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외래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도 일본을 기반으로 다시 꽃피어 났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특색과 규모를 뽐내는 일본의 불교문화 역시 세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이 종교와 신의 나라요, 그런 문화를 지닌 것을 역사적 측면으로만 볼 수는 없다.
지속적인 신종교의 생산, 현재까지 횡행되는 일부 종교의 사회적 범람 현상도 일본의 종교문화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일본은 지극히 종교적으로 민감한 사회이다. '신도'는 헤아릴 수도 없는 여러 신들을 섬긴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하여 신이 생산되는 문화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앞으로 만화의 ‘캐릭터’나 ‘로봇’이 신이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리고 더 하나, 뼈아프게도 1995년 3월 20일 도쿄 한 복판에서 ‘옴 진리교’의 테러, 그런 종교사회적 충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이다.
무슨 이유인지 아사하라 쇼고(麻原彰晃)라는 저급한 종교적 카리스마가 일본의 일부 엘리트 지성과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뇌쇄시킬 수 있는 사회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사실 변방이던 통일교가 일본의 보통 사람들을 다수 현혹시켰고, 그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지금 현재도 일본사회는 새로운 종교적 창안과 활력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수많은 신흥종교가 활동하고 앞으로도 생산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 중 하나이다.
'종교'의 나라에서 ‘무종교’의 나라로
일본의 근대국가는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 강력한 일본의 중앙집권적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로는 최고의 유효성을 지녔다. 그리고 그것은 ‘초종교’의 수준으로 모든 종교적 권위를 초월했다.
'신도'에서 분리된 ‘국가신도’는 ‘비종교’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 단계는 ‘종교 위의 종교’로 온 국민의 숭앙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근대일본은 급속히 세속 문명을 받아 들였다. 빠른 속도로 모든 전근대적 사고를 뛰어 넘어 과학과 합리적 이성의 인간문명에 집중하였다.
종교는 ‘비합리’이거나 ‘초점 밖의 요소’가 되었다. 이는 지성적 훈련의 수준에 정비례하였다. 지식인 엘리트일수록 종교는 열외이고, 이성과 과학이 중시되었다. 종교는 점점 전통으로서 문화의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머물렀다.
아직도 국가신도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 필자 제공
‘무종교’라고 부르는 하나의 종교
그러나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며, 종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영역이다.
자신을 ‘무종교’요, 종교에 관심이 없는 존재로 여길 때 종교의 개념은 대단히 좁은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신도, 토속종교, 신종교 등등, 그런 구체적 현상종교 집단에 소속되었느냐 아니냐, 그런 종교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종교를 조금 넓은 범주로 본다면, 자신에게 종교가 없다는 무종교인에게는 바로 그 ‘무종교’가 그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종교’라고 하더라도 ‘유신론적 무종교’와 ‘무신론적 무종교’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인간은 종교적 존재인데, 그것을 단순히 좁은 의미의 신앙이나, 종교적 생활에만 기준이 있지 않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적 가치의 바탕과 더하여 궁극적 가치관, 그리고 최종적 삶의 선택, 죽음에 대한 견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 이해와 행동 준거,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등등을 모두 종교라는 관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더욱 현실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은 현재 세계적으로 ‘무종교' 정체성을 지닌 인구가 많은, 더구나 젊은 세대 대부분이 그런 자기인식을 지닌 국가이다.
그러나 일본의 국경을 나서는 순간, 이웃 한국은 반수 이상의 인구가 종교를 가졌다고 답하는 상황이다. 그 또한 열의 깊은 신앙심으로, 종교적 가치가 스스로의 삶을 좌우하는, 궁극성의 지수가 높은 종교 신앙인이 다수 편재한 나라이다. 중국의 경우는 많은 인구가 여러 요인에 의해 종교 인구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깊이 연관된 아시아 일대에서는 ‘무종교’라고 하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구의 거의 전체가 종교 내의 영역에 편재되어 있다. 불교와 이슬람교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힌두교가 전체를 주도하는 큰 인구의 인도, 이슬람교의 종주인 서아시아 중동이 잇닿아 있다.
혹시 일본의 젊은 세대와 유사한 종교적 인식이 많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미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해 볼 수는 있으나, 역시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정체성에 다수가 철저히 근거하고 있어서 경우가 다르다.
즉 일본의 대세인 ‘무종교’를 하나의 종교라고 전제하지 않는다면, 일본문화의 세계적 소통, 세계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심각한 장벽이 가로놓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도 일본의 ‘무종교 현상’을 하나의 독특한 ‘종교 현상’으로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는 '종교' 없이는 설명이 안 된다
세상과 역사를 ‘정치’로 볼 수도, ‘경제’로 볼 수도, ‘문화’로 볼 수도, 그리고 ‘종교’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 밖에도 볼 수 있는 영역이 많다.
그래서 그들 각 분야의 ‘눈’은, 역사에서 각각 ‘사관’을 만든다. 사관이란, 단순한 물리적 시점(視點)에만 머물지 않고, 때로는 신봉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간혹 세상과 정치를 종교의 관점으로 본다. 혹자는 말한다. 종교로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특히 종교적 가치가 거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대문명의 시대에서 누가, 아니 다수가 종교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을까? 이런 논조는 일본에서 더욱 팽배하다. 아예 종교에는 관심이 없다. ‘무종교’, 아니 더 나아가 ‘무신론’ 사회이다.
그런데 그 ‘무종교’와 ‘무신론’을 하나의 ‘종교적 신념’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해 본다.
‘종교적 신념’이란, 제한된 개인의 영역에서 복을 빌고, 윤리를 세우고,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을 담보하는 분야, 즉 ‘생명보험’ 같은 개념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치’의 ‘내면’이 되고, ‘경제’의 ‘동력’이 되며, 보이지 않게 ‘문화’의 ‘우상’도 된다. 그리고 극한 ‘전쟁’의 ‘배경’도 되고, 비극적 ‘인류 파국’의 원인도 된다. 부정적 ‘예언’의 근거도 되며, 빛나는 ‘미래’의 비전(vision)도 된다.
찬찬히 돌아보자. ‘정치’를 ‘정치’로 설명하기가 더 쉬운지, ‘종교적 신념’의 현상으로 설명하기가 더 쉬운지. 아랍 도처에서 진행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전쟁’, 꽃잎 같은 청년들의 ‘자살폭탄’, 천황 폐하의 은덕을 구가하며, 대양에 흩어져 날리던 눈발처럼 가녀린 몸을 날린 ‘가미가제(神風)특공대’, 오히려 종교적 신념 보다 더한 ‘분노’로 형제와 부모를 겨누어야 했던 한국 ‘동족상잔’의 전쟁, 정치적 카리스마라고는 도저히 해석되지 못할 수많은 역사의 ‘독재자’들과 그들을 향한 ‘군중의 함성’, 그리고 ‘반역’, 도대체 그것을 정치만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결국은 그것이 ‘종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유사종교’에 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렇게 점철되었다.
대개 현대 정치를 ‘밥상’을 잘 차려줄 수 있는 지도자에게 대중이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제적 함수’와 ‘정치적 리더십’의 관계를 가장 적절한 상관관계로 해석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원래 ‘민중’에게 ‘밥’은 ‘종교’이다. 그리고 때로는 ‘굶어도, 배부른 환각’이 ‘종교’이다. ‘정치’는 ‘종교적 패러다임(paradigm)’에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만 지금 필자가 말하는 ‘종교’는 크고, 넓은 개념의 ‘종교’이다. 우리 개인들에게 '종교'가 있던, 없던, ‘종교’로 세상과 역사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생각보다 아주 잘 보인다. 그만큼 중요한 ‘동력’이다.
‘무종교’라고 부르는 하나의 종교
그러나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며, 종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영역이다.
자신을 ‘무종교’요, 종교에 관심이 없는 존재로 여길 때 종교의 개념은 대단히 좁은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신도, 토속종교, 신종교 등등, 그런 구체적 현상종교 집단에 소속되었느냐 아니냐, 그런 종교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종교를 조금 넓은 범주로 본다면, 자신에게 종교가 없다는 무종교인에게는 바로 그 ‘무종교’가 그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종교’라고 하더라도 ‘유신론적 무종교’와 ‘무신론적 무종교’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인간은 종교적 존재인데, 그것을 단순히 좁은 의미의 신앙이나, 종교적 생활에만 기준이 있지 않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적 가치의 바탕과 더하여 궁극적 가치관, 그리고 최종적 삶의 선택, 죽음에 대한 견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 이해와 행동 준거,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등등을 모두 종교라는 관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더욱 현실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은 현재 세계적으로 ‘무종교' 정체성을 지닌 인구가 많은, 더구나 젊은 세대 대부분이 그런 자기인식을 지닌 국가이다.
그러나 일본의 국경을 나서는 순간, 이웃 한국은 반수 이상의 인구가 종교를 가졌다고 답하는 상황이다. 그 또한 열의 깊은 신앙심으로, 종교적 가치가 스스로의 삶을 좌우하는, 궁극성의 지수가 높은 종교 신앙인이 다수 편재한 나라이다. 중국의 경우는 많은 인구가 여러 요인에 의해 종교 인구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깊이 연관된 아시아 일대에서는 ‘무종교’라고 하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구의 거의 전체가 종교 내의 영역에 편재되어 있다. 불교와 이슬람교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힌두교가 전체를 주도하는 큰 인구의 인도, 이슬람교의 종주인 서아시아 중동이 잇닿아 있다.
혹시 일본의 젊은 세대와 유사한 종교적 인식이 많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미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해 볼 수는 있으나, 역시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정체성에 다수가 철저히 근거하고 있어서 경우가 다르다.
즉 일본의 대세인 ‘무종교’를 하나의 종교라고 전제하지 않는다면, 일본문화의 세계적 소통, 세계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심각한 장벽이 가로놓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도 일본의 ‘무종교 현상’을 하나의 독특한 ‘종교 현상’으로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는 '종교' 없이는 설명이 안 된다
세상과 역사를 ‘정치’로 볼 수도, ‘경제’로 볼 수도, ‘문화’로 볼 수도, 그리고 ‘종교’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 밖에도 볼 수 있는 영역이 많다.
그래서 그들 각 분야의 ‘눈’은, 역사에서 각각 ‘사관’을 만든다. 사관이란, 단순한 물리적 시점(視點)에만 머물지 않고, 때로는 신봉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간혹 세상과 정치를 종교의 관점으로 본다. 혹자는 말한다. 종교로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특히 종교적 가치가 거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대문명의 시대에서 누가, 아니 다수가 종교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을까? 이런 논조는 일본에서 더욱 팽배하다. 아예 종교에는 관심이 없다. ‘무종교’, 아니 더 나아가 ‘무신론’ 사회이다.
그런데 그 ‘무종교’와 ‘무신론’을 하나의 ‘종교적 신념’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해 본다.
‘종교적 신념’이란, 제한된 개인의 영역에서 복을 빌고, 윤리를 세우고,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을 담보하는 분야, 즉 ‘생명보험’ 같은 개념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치’의 ‘내면’이 되고, ‘경제’의 ‘동력’이 되며, 보이지 않게 ‘문화’의 ‘우상’도 된다. 그리고 극한 ‘전쟁’의 ‘배경’도 되고, 비극적 ‘인류 파국’의 원인도 된다. 부정적 ‘예언’의 근거도 되며, 빛나는 ‘미래’의 비전(vision)도 된다.
찬찬히 돌아보자. ‘정치’를 ‘정치’로 설명하기가 더 쉬운지, ‘종교적 신념’의 현상으로 설명하기가 더 쉬운지. 아랍 도처에서 진행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전쟁’, 꽃잎 같은 청년들의 ‘자살폭탄’, 천황 폐하의 은덕을 구가하며, 대양에 흩어져 날리던 눈발처럼 가녀린 몸을 날린 ‘가미가제(神風)특공대’, 오히려 종교적 신념 보다 더한 ‘분노’로 형제와 부모를 겨누어야 했던 한국 ‘동족상잔’의 전쟁, 정치적 카리스마라고는 도저히 해석되지 못할 수많은 역사의 ‘독재자’들과 그들을 향한 ‘군중의 함성’, 그리고 ‘반역’, 도대체 그것을 정치만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결국은 그것이 ‘종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유사종교’에 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렇게 점철되었다.
대개 현대 정치를 ‘밥상’을 잘 차려줄 수 있는 지도자에게 대중이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제적 함수’와 ‘정치적 리더십’의 관계를 가장 적절한 상관관계로 해석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원래 ‘민중’에게 ‘밥’은 ‘종교’이다. 그리고 때로는 ‘굶어도, 배부른 환각’이 ‘종교’이다. ‘정치’는 ‘종교적 패러다임(paradigm)’에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만 지금 필자가 말하는 ‘종교’는 크고, 넓은 개념의 ‘종교’이다. 우리 개인들에게 '종교'가 있던, 없던, ‘종교’로 세상과 역사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생각보다 아주 잘 보인다. 그만큼 중요한 ‘동력’이다.
대단한 종교의 나라로서 일본
일본의 신종교 ‘행복의 과학’= ‘행복의 과학’ 홈페이지로부터
그런데 개인, 공동체, 문화권의 종교적 감수성이나 성향을 형태적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현재의 상황을 최고의 순간으로 인식하고, 가장 좋은 이상으로 현재를 유지, 지속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제하자. 그것을 ‘M 타입’으로 부르자.
그와는 달리 지금 현재는 극심한 고통의 때이고 말도 안 되는 순간이며, 사실은 지나간 어느 때 그 때가 최고였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고 치자. 지난 날의 영광을 부르짖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그런 부류를 ‘P 타입’이라고 부르자.
또 하나 지금의 고통은 말 할 것도 없으며, 지나가버린 때조차 극한의 시간이었고, 오직 언젠가 새 세상이 와서, 천지가 개벽(開闢)할 혁명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부류가 있다고 치자, 그들은 ‘F 타입’이라고 부르자.
과연 이들 중 우리들 자신, 우리 공동체는 어디에 속하는가?
종교적 감수성으로는 그 중 ‘F 타입’이 가장 강력한 타입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메시아’를 기다리고,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카리스마를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천지개벽’을 꿈꾸는 이들이다.
비교하자면 한국 종교문화의 한 특징은 역사로부터 ‘F 타입’이 다수인 특성이 강하다. 그러나 일본도 뒤지지 않는다. 신종교가 득세하는 일본도 ‘F 타입’이 강한 특징이 엿보인다.
일본도 결국 종교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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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