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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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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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주인공은 정종철.

1. 개요2. 상세3. 비판4. 타 교단의 간증
4.1. 가톨릭4.2. 정교회4.3. 이슬람4.4.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5나무위키에 등록된 유명인 목록

1. 개요[편집]

간증(, Testimony)은 기독교, 주로 개신교에서 어떤 사람이 공적으로 자신의 초자연적인 경험을 들려주면서 하느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일을 의미한다.

원래는 남의 범죄에 관련한 증인, 또는 증언을 뜻하는 조선시대의 법률 용어였으나[1] 사어가 되었다. 개신교 계열에서 개역개정판이나 개역한글판 성경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실상의 사어가 다른 의미로 변화되었다고 보면 된다.

간증으로 번역하는 영단어 testimony는 영어권에서 종교용어와 법률용어 양쪽으로 쓰인다. 법률용어로 사용할 때에는 (증인이 법정에 출석하여 구두로 하는) 진술[2]이나 증언, 또는 증거란 뜻이다.

2. 상세[편집]

일반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의 자기반성이나 종교생활에 대한 경험담 등을 통해 성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활동. 성경적 측면에서 이런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과거에 예수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증언을 했다는 언급이 있는 등 현대의 간증과 유사한 예가 발견되기는 한다. 사실 어떠한 종교에서던 자신의 회심, 입교한 경험담이나 자기 반성을 하는 예는 보편적 성향이다. 다만, 이런 것이 일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미사 도중에 벌이는 정식 절차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애초에 예수의 일대기에서 드러나는 여러 교회 공동체의 행적들을 공식화된 '절차'로 해석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해석'에 가깝지 사실 자체에 가깝지는 않다.

종교적 체험의 경우에 한해 말하자면, 초대교회에서도 서기 1세기까지는 신비주의 체험이 기록에 자주 나타나지만, 1세기를 넘어가면 기록에서 신비주의 체험을 경계하는 말이 더 많이 나온다. 이단으로 변질되거나 신자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은사를 받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소외감을 느끼는 사태까지 일어나는 등 나쁜 결과가 줄지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사도 바울로부터가[3] 코린토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도 "방언 문제 때문에 교회가 두 쪽으로 갈라져서 분열하는 것을 경계하라." 하고 경고했을 정도다.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는 방언ㆍ예언ㆍ환시ㆍ성흔ㆍ치유 등 이른바 신비주의 체험에 대해 오랜 경험에 따라 일단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이며 관찰한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도 그러한 체험에 휘둘리거나 선동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한다.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의 삶을 조금이라도 성화시키려 노력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톨릭/정교회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에 비해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경험이 있어도 개신교 신자들처럼 그것을 간증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이미 중요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다 전해졌고, 그 구체적인 해석 또한 사도들과 교부들을 통해서 해석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올바로 전해받고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불확정요소가 큰 사적 계시나 개인의 신비체험에 관심하면 이득보다는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심지어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나 루르드의 성모 발현처럼 가톨릭교회가 공인한 기적에 대해서도 "본인이 판단하기에 믿기 어렵다면 안 믿어도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물며 공인도 받지 못한 것임에야. 애초에 공교회가 아니면 공인이라는 개념이 없다.

또한 현대에 와서 유행하게 된 방언 같은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신비주의 체험에 대해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중 어느쪽이 더 깊이 연관되어있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근대 개신교는 가톨릭을 비판할 때 계몽사상와의 연대도 있었다는 면에서는 신비주의에 적대적이고, 보편교회 차원의 가르침과 규율보다는 개개인의 신앙체험을 중시한다는 면에서는 신비주의에 관용적이다. 그리고 교의적 차원이 아닌, 신앙인 개개인의 사례로 간다면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일부 똘끼있는 사제나 목사가 점성술이나 오컬트를 건드려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양쪽 모두가 신학적 스펙트럼이 장난 아니게 넓기도 하고.[4]

3. 비판[편집]

(중략) 두 번째는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고민이 많습니다마는 가해자가 최근에 종교에 귀의를 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서지현 검사, 2018년 1월 29일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5]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6]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크리스천, 특히 개신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저들의 간증 영상을 보면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니, 어떤 것은 보면서 본인이 지적되는 그 종교의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노 내지는 기막힘을 유발하기도 한다. 다소 과장을 좀 보탠다면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다른 종교를 매도하는 모욕주기 경연대회. 내지는 자아비판이나 다를것 없는 행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자신들이 교회 다니고 믿는 것이야 헌법상 종교의 자유이니 상관없다고 치더라도 저렇게 자기가 믿는 종교 외의 다른 종교를 철저히 부정하고 인격모독급으로 매도하면서 졸지에 무종교무신론자를 포함한 비크리스천 전부(심지어는 같은 크리스트교인 가톨릭이나 정교회에 대해서조차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고 오직 자기네한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를 ‘우리가 나서서 구원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줘야 하는 딱한 존재’로 몰아버리고 있으니. 본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헌법에서 명시한 종교의 자유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걸 사회생활에서 지나치게 강조하고 타인에게 막무가내로 강요해봐야 오히려 역효과밖에 나지 않는다.

간증 중의 발언이 과거에 대한 고백이라지만 간증의 내용은 천차만별. 먼저 청자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 예를 들면, 한 때 인터넷에 퍼졌던 강원래의 배우자로 유명한 김송의 간증이 있다. 물론, 김송은 어디까지나 피해자 입장이고 이 일을 다시 들먹이는 것이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으나, 해당 영상이 퍼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한다기보다 대체 왜 저러고 같이 사는 거냐저러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 상황을 신앙의 힘으로 버틴다고 말한 것이 되려 이상해 보이는 수준.

다음으로 반성은커녕 종교를 자신의 과거 범죄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나 맨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안태근 같은 자들이다.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같은 부류도 있다. 그리고 계시를 받았다, 환영을 보았다 등, 게다가 거짓말을 한다든가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왜곡된 사실까지 간증이란 이름하에 진실인 것처럼 포장해 버린다든가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주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겠다면서 다름아닌 십계명에 어긋나는 거짓말이나 하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야훼가 옆에서 듣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렇게 비상식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기에 이에 따른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바람직한 간증은 당연히 신앙생활의 모범이 됨과 동시에 신앙인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 하지만 몇몇 간증은 근본주의와 극단주의자들이 유명인사들의 간증과 같은 자극적인 주제를 통해 영업활동을 위한 홍보수단으로 사용하거나 기승전병식의 내용, 기상천외한 뻘짓을 통해 큰 웃음 혐오감을 주는 등 가십거리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간증의 모습을 보면 '모태신앙'처럼 처음부터 신자인 부류보다 이른바 '회개한', 즉 무종교였다가 새롭게 입교하거나 다른 종교에서 개종한 부류가 더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을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지나칠 정도로 비난, 부정하고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주장하는 자아비판 형태가 적지 않아서 무당 또는 승려였다가 개종한 사람들이 간증 자리에서 대놓고 해당 종교를 귀신마귀사탄이라고 매도하면서 '자신이 길을 잘못 들어서 사탄의 꾐에 넘어가 그런 걸 믿었는데 교회를 다니게 된 지금은 아니다' 식으로 해당 종교에 대한 모욕도 서슴치 않는가 하면이런 인간들을 보면서 다른 의미로 개심하는 사람도 있다 카더라. 그 사람들을 개종시킨 것을 무슨 무용담 이야기하듯[7] 자랑스럽게 늘어놓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간증 영상을 찾아보면 꽤 나오는데 타종교인 입장에서는 보다 보면 정말 "이것들을 죽여, 살려?" 하고 속에서 욕이 절로 올라오는 차원을 떠나서 해당 종교의 교리를 아전인수격으로 교묘하게 비틀어 왜곡하기도 하는 등[8] 어이가 날아갈 정도의 악질적인 것도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이슬람교는 한국에서 주요적인 종교가 아니고 교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거침없이 왜곡을 한다. 흔히 유튜브에 떠도는 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면서 간증하는 영상을 보면,# 이슬람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예수의 이름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알라신이라면서 왜곡하는데 정작 아랍에미리트에서도 바바예투 라는 노래를 분수쇼 하면서 재생 할 수 있게 했고, 아랍어 성경에도 하나님이 알라라고 언급된다. 또한 무슬림들은 예수를 24번째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예수에게as(그에게 신의 평화가 있기를)이라면서 언급하는 편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보면 그럴듯 해 보이게 불교나 이슬람 등 타종교를 지나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왜곡은 타종교 시리즈 뿐만이 아니라 가톨릭, 정교회등 다른 기독교 종파에도 거침이 없다. 심지어 칼뱅이나 성공회 조차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이뭐병..

엄한 내용으로 더 나아가면 사이비 종교로서의 한발을 내딛게 되는 활동. 땅밟기 등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서 종교적 체험에 대한 간증이라고 하기도 하고 2011년 5월 18일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덕정사랑교회의 샤머니즘적인 간증행위가 방영된 이후로 비난 여론이 들끓기도 했다.[9]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이후에 그걸 자랑이랍시고 간증 겸 출판까지 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쯤 되면 간증이라기보단 막장 인증이다. 그래놓고 간증 내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하면 "우리끼리 보고 듣고 하려고 꺼낸 말일 뿐인데 왜 간섭이냐?"라며 비판 자체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며 심지어는 성령훼방죄로 치부한다.

바른미래당 소속 국회의원 이혜훈 의원은 2013년 '이슬람 바로 알기'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서울대 공대 교수한테 서울대 조찬기도회에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간증한 적이 있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슬람 학생들이 서울대 공대 수업시간에 시끄럽게 기도를 했는데, 그걸 교수가 저지하자 수업을 방해하고 강의 후에도 전화를 하고 인터넷이 다운되고 협박을 하고 대사관에서 총장실로 항의서를 보내는 등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사건은 사실 무근으로 드러났다. 현재까지도 이혜훈 의원은 관련 사실에 대한 언론의 확인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10]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이 겪은 일이라면서 정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도 거절하는 것은 정치인으로써의 입장보다 종교인으로써의 입장만을 더 내세운 편파적인 처사라는 비판이 따를 수밖에 없다.[11]

4. 타 교단의 간증[편집]

4.1. 가톨릭[편집]

가톨릭은 신자가 간증하는 일이 거의 없다. 개신교는 예배가 말씀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보니 평신도가 나와 참여하는 부분이 많지만, 가톨릭은 사제를 중심으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예배(미사)의 주된 부분이기 때문에 평신도가 참여할 수 있는 건 영성체 배분이나 독서, 어린 신자들이 복사를 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없다. 또한 가톨릭의 제대는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거룩한 부분이기에 평신도는 함부로 제대에 올라갈 수 없다. 또 성령기도회[12]나 세미나, 통성기도 등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간증 시간을 가질만한 종교 행사가 없다는 부분도 있다.

또한 가톨릭의 경우 거짓 간증들을 엄격하게 잡아내기 위해 누군가가 기적을 체험하거나 행했을 경우 교황청에서 집중 심사할 만큼 이러한 것에 엄격하기 때문에, 개신교처럼 허위 간증이 거의 불가능하다. 당장 가톨릭계 사이비 종교인 마리아의 구원방주가 기적 체험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었다.

4.2. 정교회[편집]

정교회 역시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사제가 집전하는 성체성사가 예배의 주 부분이기 때문에 평신도가 간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평신도 모임 등에서 서로의 신앙생활에 관한 정보를 나누기는 하지만, 교회 공식 종교 행사에서 평신도가 나와 자신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는 건 거의 없다는 것이다.

4.3. 이슬람[편집]

이슬람의 경우는 금요일 합동예배(터키어로 주마 예배)를 제외하고는 보통 예배는 혼자 하루에 5번 드리는 경우가 많아 간증이 없다. 금요일 합동예배 때 성원에서 이맘이 설교를 하기는 하지만, 이맘의 설교 역시 가톨릭의 강론처럼 이맘 홀로 주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마저도 20분 정도 만에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사실 간증이라고 보긴 애매하지만 굳이 꼽자면 신앙고백인 샤하다 정도 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주마 예배는 다음과 같다.

https://youtu.be/cdljf-20NBY

터키의 2022년 11월 4일 금요일 앙카라의 이슬람 성원(터키어로 cami)에서 이루어진 이슬람 금요 예배 이맘 설교 영상을 첨부한다.
이맘이 홀로 주도하고 있으며 무슬림들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듣는다. 터키는 참고로 이맘이 종교성 소속이며, 금요예배 지침은 종교성에서 짜여져서 나오기 때문에 이맘의 개인적인 의견이 들어가지 않는다.

4.4.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편집]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역시 간증이 예배의 주된 행사이다. 직업적인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고 평신도가 운영하는 교회라 다른 교회의 예배에 해당하는 성찬식에서는 성찬 후, 평신도들이 나와 자신의 신앙 경험을 이야기한다. 보통 2~3명이 나와 5~20분 가량 이야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정치적이나 타 종교 비하 등은 금지되어 있다.

5. 나무위키에 등록된 유명인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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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한국의 법조계는 이런 의미로는 증인/증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2] 과거에는 공술(供述)이라고 하였지만, 일본어식 법률용어라 하여 현재는 법조계에서도 진술(陳述)이란 단어로 바꾸는 추세이다.[3] 사도 바울로는 그 자신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겪은 신비체험을 계기로 개종해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다. 항목 참조.[4] 개신교의 경우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여러 종파들의 집합에 가까운 개념이라, 신비주의적이라느니 이성을 중시한다느니 하면서 일반화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가톨릭의 경우 개신교보다는 스펙트럼이 좁지만, 그래도 수도회별로 국가별로 신학적 경향의 차이가 꽤 큰편이다. 이를테면 도미니코회는 이성을 중시하고, 프란치스코회는 중용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반면 예수회의 경우 이성을 중시하지만, 설립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신비주의 성향이 강하다.[5] 여담으로 서지현 검사는 이 간증 영상을 보고 자신이 겪었던 검찰내 성추행 사실을 세상에 고발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서지현 검사 본인도 크리스천이다.#[6] 여기서 '(상을) 받았다'라는 대목은 그리스어 원본에는 아페코(ἀπέχω)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대 상거래에서 오가던 파피루스에 쓴 영수증, 또는 '(금액을 전부 받고) 영수증을 발급해 주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루카의 복음서 6장 24절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에서 이 '영수증'이라는 뜻의 '아페코'를 다시 한 번 사용하는데, 영국 성공회 사제 존 스토트는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고 예수가 언급한 '상'은 말 그대로 광대들이 묘기 공연 보여주고 나면 관객들이 공연 잘 봤다면서 던져주고 가는 돈처럼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상이지 주가 크리스천들에게 주는 진정한 상이 아니며,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말은 "걔들은 자기들이 받고 싶어 하던 상 다 받았으니까 앞으로 걔네들한테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출처: 존 스토트 <그리스도처럼>).[7] 과장 안 보태고 19세기 유럽 선교사들이 아프리카나 미주 또는 아시아 각지 원주민들 현지 토착종교와 그 문화를 거의 말살에 가깝게 무시, 부정하면서 반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고유 언어까지 금지시킨 선교사들이 우리가 주님의 힘으로 이 미개화되고 낙후된 땅을 문명화된 땅으로 바꾸었다라고 하는 수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8] 과거에 특히 유명했던 것이 성철 스님이 죽기 전에 불교가 틀렸고 사실은 기독교가 참종교라고 인정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철은 "내 말에 속지 말라"고 했다. 성철 항목 참조.[9] 최진실 사후 지옥에서 목소리가 들린다며 방언이라는 고인드립을 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10] 이걸 2018년에 와서 자유한국당 중앙여성회 여성분과 부위원장 최은혜가 페이스북에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올려서 논란이 되었다. 해당 페이스북에 서울대 공대 교수와 관련 근무자들까지 와서 사실과는 다르다고 댓글을 달았지만 최은혜는 "이혜훈 의원실에 물어보시고 좀 뭐가 사실인지 알아라" 식으로 비아냥거리듯 답변하는가 하면, 이를 보도한 한겨레 기자와의 인터뷰를 거절하기도 했다.#[11] 이혜훈 의원은 할랄 단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근 세 번 동안 차별금지법을 입법한 것이 정부이며 점점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다면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입법 금지에 나서야 한다고 하거나 이슬람 할랄 단지에 관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차별금지법을 굳이 법제화할 필요가 있느냐 등 반론들도 존재하며 이슬람 할랄 단지 조성은 어느 지역구 주민들이나 자기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한 편이기도 하기에.돈만 밝히며 다문화정책을 묻지마 지지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자국민을 위해 할랄 단지 대규모 조성을 반대한다는 좋은 시선을 보낸 사람도 많았지만, 무슬림 남성들이 모두 아내를 학대하며 한국에 온 뒤에는 나이가 많거나 이혼한 여성들을 임신부터 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는 발언의 경우 오히려 그런 문제를 걱정한다면 무조건적인 추방을 주장하기보다 국회의원의 권한으로 선제적으로 가정폭력을 막는 법을 강화하고, 외국인의 강제임신 및 위장결혼 등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남존여비적 이슬람 문화에 젖은 무슬림들을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한국 사정에 맞게끔 재사회화하도록 하는 정책을 입법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에 더 적절한 방법이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12] 가끔씩 가톨릭도 성령기도회를 여는 경우도 있다.[13] 2023년 1월 17일에 갑자기 윤은혜의 간증 영상(정확히 말하면 간증이 아니라 예배 인도시의 통성기도 영상)이 화제가 되었는데 대중의 반응은 무섭다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참조

간증 - 위키백과, testimony 일어한역 독어 영역

간증 - 위키백과, 일어한역

간증

 다른 뜻에 대해서는 간증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간증은 주로 기독교에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증언하여 신이나 종교적 절대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이다.[1]

干證(간증)이란 단어에서의 干은 '방패'가 아니라 '죄를 범하다' 또는 '죄/범죄'의 뜻을 나타낸다.[2] 한자 단어의 뜻과 같이 옛적에는 범죄에 관련한 증인 또는 증언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기독교에서 자신의 죄를 증언하는 것, 즉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고백하는 개념으로 쓰이다가 
재는 자신의 종교적 체험 등을 증언하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
간증 (기독교) 일어한역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증거 (아카시, testimony, witness). 기독교 에서는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를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증(說)을 한다”고 말한다 [1] . 비슷한 표현에 '분담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소수로 깊게 토론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경우는 「분담」이 아니라 「증」[2] 또는 「입증」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 구세군 에서는 「증언」(읽는 방법은 「아카시」)라고 표기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칭찬하고 칭찬하는 점이 포인트이다. 드물게 목사 나 사제 에 의한 설교 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신학 이론을 이용한 것이 되기도 한다. 개신교 에서는 종종 예배 속에서 시간을 할애하여 신도의 입증이 이루어지지만, 목사의 설교가 성경의 밝혀진 반면, 입증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참석자와 공유한다 일이라는 차이가 있다. 또 그리스도를 믿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 간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복음 전도의 주요 수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삶의 다양한 장면에서 믿음에 기초한 선택과 행동을 취하는 것도 간증이라고합니다 [3] .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맞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설교를 통해서 전하신 것을 지상에서 어떻게 살려가는가에 주된 관심을 안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 자체가 간증이다.

관련 항목 
복음 전도
기독교인
각주 
[ 각주 사용법 ]
^ 야마오카 창 (2003년 10월 27일). “ “주 를 피할 곳” 2003년 10월 19일 예배 설교 ” . 사카도 이즈미 교회. 2012년 4월 21일 열람 .
↑ 「증거」라고 보내 가명을 붙일 수 있다.
^ 타카노 토시오. “ 은혜 풍부한 니가타 지구 1 일 신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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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religion)

The term witness is not clearly defined and varies depending on the social/denominational context. In general, one can say that “giving witness” is given a higher priority in pietistic communities than in other Christian groups. The religious witness can also be found in other denominations and religions .


Table of contents
1 Roman Catholic Church
2 Evangelical and pietistic view of witness
3 Conversion certificate
4 Quaker testimonies
5 See also
6 literature
7 Web links

Roman Catholic Church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witness is called martyria and involves the proclamation and spread of the Gospel . It is therefore one of the basic functions of the church.

Evangelical and pietistic view of witness 
Evangelical and related Christian movements refer to testimony as a report about a personal experience of God or about a radical life change that leads to conversion .

Evangelical , pietistic and free church groups see themselves in the tradition of the apostles , who, according to biblical tradition , were called by the risen Jesus Christ in the Acts of the Apostles to be his witnesses in Jerusalem , Judea , Samaria and all the way to the ends of the earth by their pass on their own experiences, share what they have heard and seen and stand up for their testimony with their lives. These first witnesses were also referred to with the Greek word martys , originally a legal term. The term martyr later developed from this .

Testimonials in this sense can be short inserts in everyday conversations as well as lecture-like reports of experiences. A Christian today can attest to personal experiences of God, but can never use his testimony to replace the original testimony of Jesus' first disciples, as reflected in the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 . 

Testimonies often appear in free church services and evangelistic events. Its goal is to prove that the old gospel is current by sharing personal experiences with God . In this context, they are particularly important in so-called guest services . People who are distanced from the church and their faith should be made aware that the Christian faith is not limited to dogmatics and orthodoxy, but rather has a living connection to the basic questions and needs of the contemporary. Such testimonies are usually tailored to the theme of the service or event. In free church and pietist circles , the quality of sermons is judged, among other things, by whether they have testimonial elements. Whether a sermon has passed through the preacher becomes a crucial criterion for evaluating the sermon. The herald is seen primarily as a witness to the risen Christ . In connection with the Bible text, he is expected to also report on what this text has done to him and changed him.

Conversion certificate 
A special form of testimony is the conversion testimony, which is about a person turning away from their previous worldview and turning to Jesus Christ . The starting point of such conversions are both special transcendent experiences and life crises that result in a change of perspective. There are also testimonies of conversion in the New Testament . The most famous of them comes from the Apostle Paul in Acts 22:1-22.

Quaker testimonies 
In Quakerism there are also so-called (Quaker) testimonies , namely:

Peace certificate
Testimony of truthfulness
Testimony of simplicity
Testimony of equality
The first is what they are known for today. But witness here is understood as “You shall know them by their fruits.” (Matthew 7:16). The Quakers therefore see their way of life as a testimony to their faith and - at least in the beginning - also as a testimony to their orthodoxy. This earned them the accusation of “ works righteousness ” from the Lutherans .

→ Main article : Quaker product
See also 
Evangelism
Literature 
Paul E. Little: Spread the word. Witnessing - how do you do it? , 1992, ISBN 3-7615-0116-1
Web links 
Mission respect -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on missio-hilft.de
Categories :Free ChurchismEvangelicalismPie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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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 Sermons to the 12 Jung Young Lee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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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to the 12
Jung Young Lee

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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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임찬순목사님께서 성탄절 선물로주신 이정영교수(목사)님의 《열두명의 신자들에게 드린 말씀》(아빙그돈 출판,1988년)은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난 감동이 너무 진하고 깊어서 한참 동안 생명감각의 심층에 공진공명되는 울림을 조정하고나서 폐북에 올려 폐친과 더불어 고인의 명복을 함께 빌고싶습니다. 

원저의 표제에 나오는 Sermons라는 말을 설교로 하면 이정영박사님의 깊은 뜻이 
설교라는 한국어가 갖는 피로감 때문에 깊고 진한 맘결이 홰손될까봐 
저 자신이 귀한 분들에게 쓰는" 말씀글" 이라 번역해서 소개드립니다. 

임창순목사님께서 이 귀한 이책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음을 더 새롭게 해주심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말쓰글 하나하나가 제도신학아닌 생명(개신)신학을 새삼 각성시켜 주시는
빛이요 열이요 에너지입니다. 

목차만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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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Preaching means the proclamation of God's good news to mankind. Jesus began his preaching with the good news that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The apostles preached the good news that Jesus Christ died for our sins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for our salvation. We too preach the good news that the early apostles preached. We preach the same message, in fact, but within a different context. If we notice closely the content of the preaching done by the early apostles, to be found in the Epistles and in the Acts of the Apostles, we will be truly convinced that they spoke out of their own deep conviction.
The conviction so expressed is neither that of doctrinal adherence nor that of intellectual persuasion regarding their central beliefs, but is a conviction based upon their personal experience. Their preaching was primarily their testimony of the living Christ and the loving God in their midst. It was their own personal experience with Christ that urged them to proclaim the good news. To them their experience with Christ was the most precious gift from God. Without that experience their claim to apostleship was vain. Paul became the Apostle of Christ by his experience with Christ; his confrontation with the risen Christ was thus the seal of his discipleship. Indeed, the real power of his preaching came
from his experience. However great his eloquence might have been, he would not really have been an apostle if he had not had the experience of meeting with Christ on the road to Damascus.

Preaching, therefore, is more than expounding the Scriptures, more than telling the story of Jesus, more than explaining the meanings of our beliefs, more than persuading people to accept Christianity intellectually and morally, more than sharing insights and knowledge of the Christian faith, and more than prophesying God's will to mankind. What, then, is preaching? Preaching, to me, is to give myself to the people whom I serve; it is the offering of myself.
What do I mean in saying that I give myself in my preaching? I give my real self to the people to whom I preach—a real self that includes more than my doctrinal confession, more than my understanding of the Christian faith, more even than my experience with Christ; it also includes my background, my actual life, and those real feelings that arise from the roots of my existence. I do not want just to speak the Christian language or to talk about the Christian experience; I want to tell everything about myself, my real self, as a testimony of God's love and care. What God has done to me through Christ is the good news. Through my preaching, the people who hear me should get right into my life. Through my preaching, I open myself to my people. I often talk about myself, so that people may come to know my true self. If my preaching does not open the door to the inner chamber of my real self, my preaching is not genuine. To me, genuine preaching is to reveal the secret of my own self to the people, so that they can come into my life. If I simply speak from my own mind or emotions without opening up my secret chamber, my preaching is like the hollow sound of a clanging gong. Preaching is uncovering my true self. It is not wrapping up the Christian faith in a package of beautiful ideas.

Preaching is not presenting an elegant appearance before people. It is exposing my flesh and blood. Preaching is not an art; it is my meditation in which I reflect my real self.
Therefore, preaching is meditation in speech and in gesture and in movement. In meditation I, my people, and the living Christ come together. In this moment my preaching becomes genuine.
It is easy to say what genuine preaching ought to be, but it is difficult to practice it. If the sermons collected in this volume contain even the slightest notion of what I am attempting to say about genuine preaching, I would be most gratified.
Almost all of these sermons were preached to a small congregation (Concrete United Methodist Church) in North Dakota. There were only twelve people who regularly came to the church, although the actual members numbered fewer than ten. After I stopped preaching, the church was closed. In honor of these twelve people, I chose the title of this book. All these sermons were preached without any written notes. I wrote them down each Sunday only after I came home from the service.
I am an Asian-American whose roots are in Korea, and my preaching reflects my own cultural and personal background.
Because I want to present myself in preaching, my preaching often becomes in effect my autobiography. I have tried to present myself as I have actually been—a person greatly blessed with a rich past. The greatest gifts that God has given me are the experiences of pain, loneliness, joy, sorrow, and struggle. In these experiences Christ has been my only reliable companion. That is why when I speak of my own experience in preaching, Christ is present. The presence of Christ is indeed the essence of my life, for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Galatians 2:20). Thus, when I share myself, I transmit Christ. And it is from this conviction that I have spoken here of my life and of my self in 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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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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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설교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인류에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으로 전파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 구원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역시 초기 사도들이 전파한 좋은 소식을 전파합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메시지를 전하지만, 상황은 다릅니다. 서신서와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초기 사도들의 전파 내용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깊은 확신에서 나온 말을 했다는 것을 참으로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된 확신은 교리를 고수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중심 신념에 관한 지적 설득도 아니며,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확신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주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그들 가운데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촉구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사도직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결은 그의 제자됨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설교의 진정한 힘은
그의 경험에서. 그의 웅변이 아무리 뛰어났을지라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실제로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 이상이며,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 이상이며, 우리 믿음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 이상이며, 사람들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통찰력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 이상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면 설교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설교란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제물이다.

내가 설교에 나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내가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참된 자아를 드립니다. 이 참된 자아는 나의 교리적 고백,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나의 이해,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경험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배경, 나의 실제 삶, 그리고 나의 존재의 뿌리에서 발생하는 실제 감정을 포함합니다. 나는 단지 기독교 언어를 말하거나 기독교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에 대한 간증으로 나 자신, 나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행하신 일은 좋은 소식입니다. 나의 설교를 통해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바로 내 삶에 들어와야 합니다. 나는 설교를 통해 내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공개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나 자신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나의 설교가 나의 참 자아의 내밀한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 못한다면 나의 설교는 참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설교는 내 자신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서 그들이 내 삶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 밀실을 열지 않고 내 마음과 감정만 말하면 나의 설교는 공허한 징소리와 같습니다. 설교는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아름다운 사상들로 포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사람들 앞에 고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살과 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설교는 예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진정한 자아를 반영하는 나의 명상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말과 몸짓과 움직임에 있어서 묵상입니다. 묵상 중에 나와 내 백성과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함께 모이게 됩니다. 이 순간 나의 설교는 진짜가 됩니다.

진정한 설교가 무엇인지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설교들에 내가 진정한 설교에 관해 말하려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다면 나는 가장 기쁠 것입니다.


이 설교의 대부분은 노스다코타에 있는 작은 교회(콘크리트 연합감리교회)에게 설교되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12명에 불과했지만 실제 교인은 1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설교를 중단한 후 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나는 이 열두 분을 기리기 위해 이 책의 제목을 정했다. 이 모든 설교는 어떤 서면 메모도 없이 설교되었습니다. 나는 매주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야 그 내용을 적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뿌리를 둔 아시아계 미국인이며, 나의 설교는 나의 문화적, 개인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나는 설교를 통해 나 자신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에 나의 설교는 사실상 나의 자서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즉 풍요로운 과거를 지닌 큰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고통, 외로움, 기쁨, 슬픔, 투쟁의 경험입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유일한 신뢰할 만한 동반자가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설교에 있어서 나 자신의 경험을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참으로 내 삶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라디아서 2:20)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 자신을 공유할 때 나는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내 삶과 설교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