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6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 - 심리 요법 · 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 -심리 요법·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요코야마 유키


1. 소개


"근대 호스피스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의사 C. 송더스에 의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에 직면하면 "많은 환자가 자책이나 죄의 감정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가치가 없어졌다고 느낀다 , 때로는 깊은 고통 속에 빠진다고 한다(1). 송더스는 그러한 환자의 고뇌를 영적 창고라고 명명하고, 현대 의료의 틀 안에서 선구적으로 영적 케어를 실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이후, 송더스의 활동을 모델로 영적 케어가 시도되게 되어, 호스피스나 완화 케어 병동을 중심으로 영적 위상에 대한 눈빛이 침투해 간다(2). 현재는 영적 케어의 사상적 기반의 정비나 영적 케어 전문직의 양성, 또한 평가 툴의 개발 등도 진행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정신 케어의 케어 모델에 대해서, 그 임상적인 타당성을 심리 요법·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검토한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요법·정신요법이란 임상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 등의 틀에 준거한 대인원조활동 전반을 말한다. 관견에서는 일본의 영적 케어 케어 모델은 주로 미국의 임상 목회 교육과 개별 논자의 철학적 견해에 따라 구축되어 있으며, 심리 요법 · 정신 요법의 원조 스타일과 이론은 반드시 참조됩니다. 그렇지 않다(3). 그러나 심리치료·정신요법에는 수많은 케어모델이 축적되어 있는데다, 스피리츄얼케어와 마찬가지로 종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사례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심리치료·정신요법의 지견을 참조하는 것이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 구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신 케어의 케어 모델에 대한 종래의 비판은 의료화의 문제를 향한 것이 주였다. 의료화란 「다른 사회 영역(종교, 가족, 법 등)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던 사건이 의학의 관할하에 놓여져 가는 것」을 의미하지만(4), 영적 문제조차도 의학의 관할하에 놓여 의학적 치료의 대상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 많이 우려되어 왔다(5). 특히 의료화의 경향의 현저한 예로서 종종 지적되는 것이 통증이 없는 편이 좋다고 하는 발상, 즉, 「스피리츄얼 페인은 해소해야 한다」라는 발상이다. 예를 들어, 안도 타이지는 원래 영적 창은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통증처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되는 통증"이 아니라 "원래 인간 존재 자체에 본질적입니다. 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고(6), 그것을 다른 통증과 마찬가지로 해소하려고 하는 것은 영적 차원의 “왜소화”라고 비판한다(7). 안도에 의하면, 영적 차원에는 「『생의 건너편』으로부터의 시선」이라고 하는 초월적 요소나(8), 「보다 깊게 병, 아픈 사람이야말로 구제나 해탈에 가깝다」라고 한다 역설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9), 영적 페인은 없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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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학년보 XXXIV


확실히 우리나라의 임상 현장에서 중심적으로 참조되고 있는 케어 모델은 영적 페이인의 해소를 주장하는 것이며, 그 한계에서는 의료화의 흐름이 영적 케어를 둘러싸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창고를 제거하는 치료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율성의 회복"과 "살아있는 의미의 회복"과 같은 상위 목적에 따라, 또는 그들과의 밀접한 상호 연관 우리가 조치를 취하고 결코 단독으로 영적 치료를 향한 것은 아닙니다.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러한 모든 목적을 시야에 포함시켜 영적 케어를 포착해야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 창의 해소라는 목적만을 추출하고 반박했다고 해도, 반드시 정신 관리의 기본적인 방향성에 재고를 촉구하기에는 이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점을 감안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영적 케어 이론 중에서, 영적 케어의 목적으로 내거지고 있는 내용을 망라적으로 정리하고, 그 임상적인 타당성을 마음 이치료·정신요법의 지견으로부터 검토한다. 케어의 목적이 케어 모델 전체의 방향성이나 틀을 규정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최초로 검토해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유, 본 논문에서는 임상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지만, 원래 무엇을 보다 임상적으로 타당하다고 본 것인가, 하는 판단 기준을 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하는 것도, 그러한 판단 기준은 구체적인 임상 장면에 따라서 변하지 않을 수 없고, 게다가 그러한 개별의 장면에 대해서도, 결국 무엇이 맞았는지, 라고 하는 최종적인 판단은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에서이다. 그 의미에서 임상적 타당성이라는 개념의 내실은 정확히 무엇이 임상적으로 타당한지를 반성적으로 계속 음미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할 수밖에 없다. 본 논문의 과제인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도 심리치료·정신요법의 지견을 끌어내는 것으로 “무엇이 임상적으로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보다 다각적으로 파종하려는 시도 그리고 결코 영적 케어와 심리요법·정신요법 중 어느 것을 보다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부언해 두고 싶다.


2. 영적 케어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본 절에서는 우리나라에서의 영적 케어론 중 대표적인 것을 다루고, 그들이 영적 케어의 목적으로 내걸고 있는 내용을 정리한다. 유, 여기서 다루는 것은, 스피리츄얼 페인이나 스피리츄얼 케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해서 독자적인 정의를 실시하고 있어, 의약·간호의 임상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론에 한정한다. 구체적으로는, 쿠보지 토시유키, 타니야마 요조, 무라타 히사유키, 오시타 다이고, 오카모토 타쿠야, 타니다 겐토시, 코니시 타츠야, 이토 타카아키, 후지이 미와의 9명의 스피리츄얼론으로부터 케어의 목적에 관한 서술을 추출해 , 순차적으로 간결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쿠보지 슌지> 쿠보지에 의하면, 스피리츄얼 케어는 “특히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 인생의 의미, 고난의 의미,


사후의 문제등이 묻기 시작했을 때, 그 해결을 인간을 넘은 초월자나, 내면의 궁극적 자기를 만나는 중에 찾아낼 수 있도록 하는 케어」이며, 또 「보이지 않는 세계나 정서 적·신앙적 영역 안에서 인간을 넘어선 새로운 의미를 찾아 새로운 '존재의 틀', '자기 동일성'을 깨닫는다'(12). 게다가 쿠보지는 “스피리츄얼 케어에서는 신불과의 관계를 각성하고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며(13) 초월적 존재와의 연결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연결의 구축이 “위기에 직면하여 흔들리는 자신”을 받아들이고(14),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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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15). <다니야마 요조>


타니야마는 스피리츄얼 케어를 “인간을 통해 느낄 수 있고 표현되는, 불가시·불가지한 기능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호 내면의 역동성에 의해 자신다움의 안정·회복이나 성장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16) 그 다음에 현실적 차원, 내적 차원, 초월적 차원의 3개의 영역에 걸쳐 케어 대상자의 자기를 둘러싼 요소를 세고 있다(17). 타니야마에 의하면, 그 여러 요소야말로 「자신의 안정·회복이나 성장」을 위한 원천이며, 그 원천으로부터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스피리츄어리티의 번개」를 감득하면서 「대상 자의 생각을 지지·명확화·대치하는 것이 스피리츄얼 케어라고 한다(18).


<무라타 히사유키>


무라타는 종말기 환자의 영적 창을 시간성, 관계성, 자율성의 3 차원으로 설명


하고있다. 즉, 종말기 환자는 「죽음의 접근에 의해 장래를 잃는다. 또한 “죽음의 접근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잃는다”는 이유로 “아이덴티티의 상실, 외로움, 삶의 무의미함이라는 영적 창을 체험한다”(20). 그리고 “죽음의 접근에 의해… 21). 무라타는 이러한 영적 창작이 창출되는 구절에 근거하여 “그 고통을 완화시키는 케어의 지침”을 제시한다(22). 즉, 첫째로 「환자 자신이 원조자와의 대화로부터 『죽음을 넘은 장래를 발견한다』가 가능하다면, 그 장래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현재의 의미가 회복될 것임에 틀림없다. ". 둘째, “환자 자신이 원조자와의 대화에서 “죽음을 넘은 타인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새롭게 자기 존재의 의미가 주어질 것이다 ". 셋째, 환자가 원조자와의 대화에서… 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23). 따라서 무라타에게 있어서의 영적 케어란, 관계성·자율성·장래성의 상실을 동정하고, 그 상실된 것을 재획득시킴으로써 “자기의 존재와 사는 의미의 회복”을 시도하는 것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24).


<오시타 다이코> 오시타는 스피리츄얼 페인을 “살아가는 의미를 잃고, 절망, 비관, 고독감 등에 괴롭혀


분의 생명의 행방에 시달리거나, 가족이나 친한 사람과의 관계성에 과제를 안거나 하는 고뇌」라고 해, 스피리츄얼 케어를 「스피리츄얼 페인을 내재하거나 혹은 호소하려고 하는 클라이언트(케어의 대상 자)에 대해, 케어를 제공하는 측(원조자, 영적 케어 워커, 테라피스트 등)이 함께 그 실태를, 자연, 타연, 법연의 통합적인 영역으로부터 밝히고, 고뇌로부터의 해방 , 해탈에 이르는 영업”이라고 한다(25). 게다가, 아래는 "정신 창 (통증 · 고뇌)을 가진 클라이언트의 영적 케어는 자연 (자기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자신을 지원 해주는 타연 (인연이있는 타인의 힘)과 “자신을 큰 삶에서 포섭하고 있는 법연의 힘에 의해 희망과 사는 힘을 증대시켜 나가는 것”이라고도 말한다(26).


〈오카모토 타쿠야〉 오카모토는, 스피리츄얼 페인을 “개인에 있어서, 그/그녀가 놓여 있는 상태와


가 안고 있는 신념체계와의 조화가 무너져서 생기는 괴로움”이라고 정의하고(27), 영적 - 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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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어는 "그 부조화가 해소·예방되는 방향으로 일하는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다(28). 또한 그 일은 “그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 신념체계로 그 사람의 신념체계의 변용을 촉구하거나 신념체계를 강인화하거나 하는 방향에서의 관계”라고 한다(29).


〈다니타 헌슌〉 타니다는, 스피리츄얼 페인에는 「『인생의 의미 짓기』의 붕괴 혹은 재구축을 강요받을 것


'에 대한 고통'과 ''주위와의 연결'이 단절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고통'을 들 수 있다고 하는데(30), 이들에 대한 영적 케어의 방법으로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야기 요법은 “주위와의 연결”에 대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고 말한다(31). <코니시 타츠야>


코니시는 영적 케어를 “영적 클라이시스시의 주체적 삶의 지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32). '스피리츄얼 크라이시스'란 '인생의 시련에 직면하여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나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없게 된 상태'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세계관과 가치관, 살아있는 보람 을 지원하는 기초적인 '빌리프'(=신념이나 가정)가 어떤 이유로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33). 그러므로 영적 케어에서는 이 기능부전에 빠진 빌리프를 「재구축」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한다. 즉, 케어 대상자의 기분이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서포트해, 「라이프・히스토리」등의 인생의 되돌아 가는 것으로, 빌리프를 「의식화」해 나간다. 이에 따라 기존 빌리프가 재검토되고 새로운 빌리프가 재구축된다고 한다(34).


<이토 타카 쵸> 이토는 영적 치료를 "초월성"과의 관계 패턴이 불안정해질 때


어떤 방식으로 그 불안정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고(35), 그리고 그 대처하는 방법의 내실은 “환자 자신이 그 창을 받아들여 고민 고통, 극복하거나 받아들이는 혹은 거부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36).


또한 이토는 케어 실천자가 케어 대상자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일방적으로 개입하는 자연 과학적 방법에 근거한 「진단형 케어」와 케어 실천자와 케어 대상자의 상호 관계에 기초하여, “그 순간 그 자리에서의 관계의 질”을 추구하는 “대화형 케어”를 구별한 후(37), 영적 케어의 본령은 “다른 인식론적 지평에 사는 두 사람이 관계 속에서 자기 의 지평과 상대의 지평과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그 차이를 풍부하게 경험하는 것을 통해, 어느 쪽의 지평도 아닌 새로운 장소를 창출한다” 대화형 케어에 있다고 한다(38). 스피리츄얼 케어의 목적은 2인칭적 관계의 창출·실현이며,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케어 실천자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39). 또한 이토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상대의 이야기가 “기억과 마음에 새겨져, 청취자의 마음의 혈육이 된다”라고 바꿔 말하고(40), 그것을 케어 제공자가 케어 대상자의 「증인」이 되는 것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41).


<후지이 미와> 후지이는 스피리츄얼 페인을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고통이며, 또 자기, 타자,


자기를 넘어서는 어떤 관계와 속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정의하면서(42), 동시에 그러한 영적 창은 고통받는 사람 자신의 “주관적 의미”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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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개입”에 의해서 해결을 보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43). 후지이에 의하면, 타인의 영적 창에 대답을 낼 수 없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고대함」뿐이며(44),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 것, 즉 자신의 가치관을 다시 묻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한다(45). 또 후지이는, 「「할 수 있는」전문직자로서는 아니고」 「『할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 그 사람 앞에 서 있다」 이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에게 직면하고 있는 케어 대상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한다(46). 스피리츄얼 케어의 목적은, 상대방 앞에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 후지이의 소론이다(47). 영적 케어의 목적


이상, 쿠보지, 다니야마, 무라타, 오시타, 오카모토, 타니다, 코니시, 이토, 후지이의 9명의 영적 케어론을 개관해 왔다. 다시 각 논자가 영적 케어의 목적으로 내걸고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 타인과의 연결의 회복 (다니야마, 무라타, 오시타, 타니다) , 타니다, 코니시) ○ 초월적 존재 · 궁극적 차원과의 연결 회복 (쿠보지, 오시타) ○ 세계관 · 가치관 · 신념 체계의 조정 · 재구성 (오카모토, 코니시)


○자율성이나 장래성의 회복(무라타)


○희망이나 사는 힘의 증대(대하)


○고뇌로부터의 해방(대하)


○대화(이토)


○ 다가오는(후지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언뜻 보면, 영적 창고의 해소에 머무르지 않는 다양한 적극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중에서도 '대화'와 '접착'이라는 두 가지 목적은 다른 목적과 비교하여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른 목적이 모두 케어 대상자에 관한 서술이 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2개의 목적은 오히려 케어 제공자측의 태도·자세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이 2개의 목적을 다른 목적과 편의적으로 구별하고, 우선 다른 8개의 목적으로부터 검토해 나가기로 한다.


3. 영적 케어 목적의 임상적 타당성 1


본 절에서는 심리치료·정신요법의 지견에서 전절에서 본 정신케어의 목적의 임상적 타당성을 묻는 것을 시도한다.


자기 동일성의 안정화, 신념 체계의 조화


우선 「자신다움이나 자기 동일성의 회복・성장・안정화」와「세계관・가치관・신념체계의 조정・재구축」이라는 2개의 목적을 다루고 싶다. 이들이 케어에서 목표로 하는 경우, 거기에는 당연히 '나'는 '보다 안정적인 것', '더 성장하고 있는 것', '보다 현실적으로 적응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갈등이나 분열이 없는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상정이 인정된다. 이러한 상정에 대해 정신분석학이나 융파심리학에서는 다양한 이론이 주창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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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가인 DW 위니콧은 CG 융의 '자기'와 그 상징으로서의 '만다라'의 관념에 다음과 같은 의의를 제기하고 있다(48). “만다라는 나[위니콧]에게는 정말 무서운 것 같다. 그것은 파괴성이나 혼돈이나 무통합 disintegration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광기와 협조를 붙이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그것은 무통합으로부터의 강박적 도망이다”([] 안은 필자에 의한다. 이하 동일)(49). 즉, 융은 혼돈과 분열에 대해 지나치게 방어적이며 '자기'='만다라'에 대한 그 고집도 혼돈이나 분열에 대한 방위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니콧에 의하면,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은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창단성이다(50). 그리고 창의성은 "놀이",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영역"에서 "착각 illusion"을 확장함으로써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51 ),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성격을 가진다(52). 따라서 위니콧이 말하는 '살아가는 가치'는 통합성이나 질서와는 대조적으로 착각과 불확실성의 영역에 요구된다.


또, 원형적 심리학의 창시자 J. 힐만은, 인격의 통합성이라는 관념에 차이를 주장하고 있다. 힐맨에 의하면 융은 '자기'라는 통합된 전체성을 우선하기 위해 마음의 복수성·다원성을 멸시해 버리고 있다. 융에 한정되지 않고, 서양의 심리학은 통합성이나 전체성에의 직선적인 발달 단계를 조치하는 「일신교적 심리학」이며, 「단편화나 자기 분열」에 강한 편견을 안고 있기 때문에 있다 (53). 그러나 '혼'에는 '다중심성'이 갖추어져 있으며(54), '어떤 인격도 본질적으로 다수적이다'(55). 그러므로 힐만은 중심성과 통합성을 요구하는 일신교적 심리학에 대치하는 형태로 다신교적 심리학으로서의 원형적 심리학을 조치한다. 원형적 심리학에서는 영혼에 존재하는 모든 원형적 이미지가 자율적으로 전개되고 깊어지는 것에 가치가 놓여지는 것이며, 그 전개를 특정의 중심으로 수렴시켜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 영혼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되는 것이다(56).


혹은, 융파의 분석가 A. 구겐부르=크레이그도, 안정성이나 통합성이라고 하는 관념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 구겐부헬에 의하면, 현대의 많은 「신화」는 「모순의 없음」에 달라붙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의식화를 통해 스스로의 「살인적·자살적 측면」을 약화시킬 수 있고, 「보다 높은 것, 보다 선한 것」에 접근해 갈 수 있다고 하는 「진보 신화」가 있지만 (57) 실제로는 개성화라든지 의식화하든 직선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가까워졌을까 생각하면 다시 거기에서 멀어질까」하는 「중심을 둘러싼 무용」에 불과하다( 58). 마찬가지로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성숙한다는 '노현자' 신화도 허구하다. 실제 노인은 "결핍, 쇠퇴, 질병, 치매, 집합적 무의식과의 접촉의 상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라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인의 심리요법과 돌보는 일에... 우리는 항상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많은 것에 참여하고 싶어합니다.” 구겐뷰르는 이러한 '노현자' 신화에 의한 전제를 '노후자' 신화로 보상할 것을 제안한다. 즉, 노인에게 “이런 노인”이 되는 자유를 주는 것, “병, 노쇠, 마침내 죽음이 그들을 공포로 채울 수 있다”는 축복을 주는 것이 노인을 “생의 싸움” 부터 멀리서 내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노련자는 바로 기분에 따라 웃거나 울거나 해서 좋다. .


이러한 논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안정적인 것이 바람직하다는 규범적 인식의 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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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탈구시키려 하고 있다. 즉, "나"는 결코 안정적 일 필요는 없으며 일관된 신념 체계를 가질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나'나 세계관은 본래 다수적이고 분열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들여다 보면, 「자신다움이나 자기 동일성의 회복・성장・안정화」나 「세계관・가치관・신념 체계의 조화・재구축」이라고 하는 목적은, 케어 대상자의 본연의 자세를 안정 성이나 무결성 안에 둘러싸여 버리는 위험성을 망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까. 인생의 의미와 생명의 재건


「인생의 의미나 생명의 재구축」이 케어의 목적으로 되는 경우, 거기에서는 역시, 「인생의 의미·생명을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하는 규범적 인식이 전제로 되어 있을 것. 실제로 쿠보지는 "살아 있는 의미는 곤란이나 고난 중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환자가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기 때문에 사는 의미가 없다고 해도 그것을 정면에서 받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60). 관견에서는 심리요법·정신요법의 영야에서도 이러한 인식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상 사례를 살펴보면 환자는 반드시 생명을 찾는 데 이르지 못하고(61) 오히려 인생의 의미 등 모르고 끝난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여지도 없는가? . 특히 인생의 의미가 언어적·지적으로 탐구되는 것으로 상정된다고 하면, 트랜스퍼소널 심리학자의 S. 그로프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야말로 “원시 프로세스의 역동적인 흐름이 방해 되어 저지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징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로프에 의하면, (언어적·지적인 의미의 탐구에 의하지 않고) 정서적·생물학적 체험을 통해서만 사람은 “인생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62).


혹은 힐만은 “거기[정신병원]에서는 생명을 보호하고 자살을 예방할 목적으로 모든 종류의 심한 심리적 모욕이 병든 영혼을 '정상화'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적고 있다 (63). '사는 의미와 생명의 재구성'은 이 '심리적 모욕'으로서의 '정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덧붙여서 힐맨은 “문제는 자살에 찬성하거나 반대가 아니며, 그것은 마음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도 말한다(64). 이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생명의 재구성'이 목적화될 때, 케어 대상자가 느끼고 있는 살아 있는 의미가 없는 것이 케어 대상자의 마음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 가 등한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타인과의 연결 회복 영적 케어 론에서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이 실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하고 칭양되고 있다. 특히 타니야마나 오시타의 케어 이론에서는, 타인과의 연결은 「인연」으로서 이해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가 「나」와 일체」라고도 주장되고 있다(65).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도덕적 인식은 케어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후지이는 자기 존재의 의미가 2인칭 관계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것은 딸에게 '당신'이라는 관계성을 가진 어머니의 존재가 살기에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66). 그러나 확실히 그러한 2인칭 관계가 부정적 양상을 띤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된다. 정신분석가인 M. 르노는 “상애의 슬픔”에서의 무의식적 죄책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또한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고 우리의 나르시시즘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우리가 미워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러한 "인간의 영혼의 깊은 양가성"이 분명해지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질 때"뿐 아니라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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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이나 만족을 준 사람이 죽고 그 사람의 죽음을 견딜 수 없는 경우, 동시에 그 사람은 무의식에 있어서 자주 '그 사람 뭔가 없어지면 좋다'고 바라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다 (67). 따라서 배려와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헌신적 행위 뒤에 공격성 억압과 무의식적 죄책감에 대한 방어가 있다는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68). 또한 이러한 정신분석적 해석가설에 의하지 않고도 양가성이나 이율배반은 심리치료 일반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을 특징짓는 것으로 중시되고 있다(69). 구겐 뷰르(Gugenbuil)는 “가장 고귀한 행위도 사심 없는 맑은 동기와 이기적인 어두운 동기 모두에 근거한다”(70). 연결을 사랑이나 자비로만 해석하는 언설에는 그러한 모순이나 양가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모든 음성 감정을 양성 감정 뒤에 은폐해 버리는 위험성이 있다.


자율성이나 장래성의 회복, 희망이나 살아가는 힘의 증대 「자율성이나 장래성의 회복」이나 「희망이나 살아가는 힘의 증대」라고 하는 목적하에서는, 상실이나 절망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것·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예를 들면 무라타 이론에서는 '죽음의 접근'에 의해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 혹은 그 상실의 정도를 '최소화'하는 것이 케어의 목적으로 되어 있다(71). 대부분의 이론에서도, 영적 케어에 의해 환자는 「보다 크게 고차적인 의식 상태를 획득」하고, 「존엄성」이나 「희망」의 방향으로 성장해 가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72).


하지만 자율성, 미래성, 희망의 회복에 가치를 두는 것이 진료의 본질로서 정말로 적절한가? 심리학자의 야 아직 환영은 '능동성'과 '획득 과정'을 중시하는 심리학 이론(발달 이론)은 현대적인 산업화와 생산 우선에 강하게 연동한 가치로 규정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하지만 (73), 영적 케어도 비슷한 규정을 받지 않았을까? 정신분석가의 키타야마 슈는 “포기”라는 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 [서양인]은이 "포기"를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큐블러 - 로스의 "죽는 순간"에서도 사람이 죽을 때의 "포기"에 부정적이다. 그려지는 죽음의 임상 모델에서는 '포기'는 패배이며 '수용'이라는 지침으로 주체성의 발휘가 나타난다'(74). 기타야마는 '우울한'이나 '하카나사'에 대한 일본적 미의식과의 관계에서 '포기'에는 '패배' 이상의 긍정적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자율 성과 장래성의 회복이라는 목적은 이러한 "포기"라고 길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영적 케어론에서는 어디까지나 주체성이나 획득 과정에 일의적인 가치가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카미야 미에코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 대해, 영적 케어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원래 인간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살고 있는 의의가 없는 것일까. 『자립』이나 생명을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의의에 절대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조건일까? 심지어 몸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태어난 성격이나 나쁜 환경 때문에 살아 있는 의미를 자신도 느끼지 못하고, 타인도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적지 않은 것이다」(75). 자율성에 고유한 가치를 두고 회복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전제하는 케어 모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의의'를 찾아내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또한 힐맨은 “개인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자신의 깊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조적인 기분장해라는 자아비대한 상태로 언제나 머무를 수 없다”고 말했지만 (76), 희망의 증가에는이 "조잡한 기분 장애"가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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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 -심리 요법·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드물지 않은가? 힐맨에 의하면, 디프레션, 즉 범죄 희망과는 대성적인 「힘의 없음」이나 「무게」의 심적 상태야말로, 「깊이」에 이르고 영혼을 찾아내는 통로이다. 희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이 통로를 닫는 것과 같습니다.


고뇌에서 해방


“고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적에 관해서는 항상 그 정도가 문제가 될 것이다. VE 프랭클은 “만약 철저하게 불편이 줄어들거나 철저하게 고통이 제압되는 일이 있다면 고통까지도 제압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예를 들어, 융파 분석가 W. 기게리히는 “심리요법의 과제는 어려움의 제거를 요구하는 것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어떻게 해서 본래적으로 진정으로 어려운 상황에 들어가는가가 과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78). 또한 완화 케어를 전문으로 하는 심리치료가인 키시모토 히로시는 다양한 환자와의 만남을 회고하여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가득한 곳에 행복감이 찾아온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행복감』을 목표나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오로지 행해 가는 것이, 역설적이면서, 병과 「행복감」을 연결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라고 적고 있다(79). 두 가지 주장 모두 고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적을 상대화하는 시점이 될 수 있다. 초월적 존재 · 궁극적 차원과의 연결 회복


과연 “초월적 존재·궁극적 차원과의 연결의 회복”은 영적 케어의 목적으로 타당한가? 정신과 의사의 H. 코닉은 영성 (및 종교)이 환자와 그 가족의 웰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으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긴장과 부조화가 발생하거나 신앙에서 요구되는 미덕을 충분히 고치지 못하고 자기 책책이나 낙담이 생기는 등을 들고 있다(80). 후지이도 그리스도인인 딸이 아픈 어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가길 바란다” “믿으면 더 편해질 수 있다”라는 말을 걸어 신앙을 확립할 수 없는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쫓아버린다는 사례를 보고하고 있지만(81), 초월적 타자와의 관계성은 쿠보지나 오시타가 상정하도록 독점적으로 치유나 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초월적·궁극적 관심이 강화됨으로써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일에 대한 눈빛이 희미해지는 사태도 생각할 수 있다. 힐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호스피스 의사 M. 카니는 표층 surface 즉 신체적·심리적·사회적인 증상에 관련된 일과 심층 depth 즉 영혼의 차원에 관련된 일과의 관계에 대해 표층이야말로 심층에 이런 길이며, 영혼 차원의 경험이란 사실, 표층적인 케어에 의해 초래되는 매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생활과의 연결이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82). 궁극적 차원과의 연결의 강조는 그렇게 말하자면 표층적 차원과의 연결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적 치료의 목적에 포함 된 임상 적 문제


이상과 같이, 심리요법·정신요법의 지견을 참조하면, 거기에는 영적 케어에서 내거는 목적(규범적 인식)과는 대조적인 목적(규범적 인식)이 산견된다. 여기에 (전통적인 영적 케어 이론과 같이) 케어 대상자가 어떤 상태에있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유일하게 정하는 위험과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유용한 시점이 부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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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대화'와 '접착'이라는 두 가지 목적은 케어 대상자에 관해 어떤 상태가 바람직한가 하는 판단을 보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대화"와 "접착"에는 2자 심리학적 상호작용에 대한 시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방향적인 규범적 인식을 통해 케어 대상자의 상태를 문제화하는 것으로부터는 면제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케어 제공자의 존재 방식에 관해 명확한 바람이 말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희망의 임상적 타당성을 묻는다.


4. 영적 케어 목적의 임상적 타당성 2


우선 '대화'와 '모습'으로 어떠한 케어의 본연의 방법이 상정되고 있는지를 다시 그려내고 싶다. 첫째, 「대화」이지만, 이토에 의하면, 스피리츄얼 케어는 「대화형 케어」이다. 거기에서는 케어 제공자로부터 케어 대상자에게의 「진단」이나 「치료」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존재론적으로는 등가」인 둘이 대화를 통해 「새로운 장소」를 창출하는 것 가 시도된다(83). “기타자[케어 제공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이야기를 '지금'으로 끌어내는 것이 현대인의 영성의 표현'이며, '이야기를 살아가는 주인공으로서 이야기자와 그 이야기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흔들리는 청취자와의 관계에는 케어의 힘이 있다.”(84) 따라서, 케어 대상자뿐만 아니라 케어 제공자 자신도 대화 속에서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며, 바로 그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 「청취자가 마음을 흔들어 준다」라는 경험에, 영적 케어의 본령이 있다고 여겨진다(85).


한편, 후지이가 말하는 '대결'에 있어서는, 케어 제공자가 케어 대상자에게 「무언가를 한다」는 발상이 철저히 척척된다. 「무언가를 한다」, 혹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라고 하는 자세로 케어 대상자에게 임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여전히 존재 의미를 찾아내는 무거운 과제에 마주하고 있다」케어 대상자와 사이에 분리를 낳기만 하기 때문이다(86). 케어 제공자는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할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 케어 대상자 앞에 서야 한다. 「고대하는」이란 「자신의 가치관을 묻고, 눈앞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양해한 뒤에, 거기에 있는 것」이며, 「전문직자 는 아니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과제”이다(87). 후지이에 의하면, 그러한 사람이 함께 해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의미나 존재가치에 관한 「주관적 의미화」의 「큰 도움이 된다」라고 한다(88).


어떠한 목적에 있어서도, 케어 제공자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자신의 가치관을 재검토되는, 스스로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고 하는 경험에 열려 있는 것, 바꾸어 말하면, 전문직 사람으로서의 진단적·분석적인 태도를 괄호에 넣어 가능한 한 생신의 인간으로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중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케어 대상자의 자기 이야기의 창출이나 「주관적 의미」라고 하는 작업도, 생신의 인간으로서의 만남(관계성)을 조건으로, 또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촉진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케어 모델은 C. 로저스가 그려내는 대인원조 관계에 가깝게 보인다. 로저스는 그 논문 「테라피에 의한 퍼스널리티 변화를 필요로 하여 충분한 조건」에 있어서 건설적인 퍼스널리티 변화가 일어나는 6개의 심리학적 조건을 내걸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테라피스트의 태도에 관하여 는 「일치 congruence」 「무조건의 긍정적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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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89). 실제로 정신분석에서 핵심 치료의 계기로 간주되는 전이에 대해서도 로저스는 “클라이언트 중심 심리 임상가의 전이에 대한 반응은 그 클라이언트의 다른 모든 태도에 대한 반응과 동일하다. 심리 임상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분석적 해석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다(90). 로저스에 의하면, “세라피스트가 직업상의 건설이나 개인적인 가면을 모르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있을수록 그만큼 클라이언트가 건설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높아진다”이고, 심지어 그렇게 자기의 내면에 접근한 치료사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presence”라고 하는 것만으로, “클라이언트에 있어서 해방적이고, 원조적이 되고 있다”라고 하기 때문에 있다 (91). 이것은 "대화"와 "접착"이 지향하는 케어 모델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심리요법·정신요법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거기에는 로저스파의 현저한 퇴조가 보인다. 안무라 나오미에 따르면, 로저스파는 “정신 발달이나 증상 형성, 정신 병리의 메커니즘 등을 역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거의”하지 않고, 또 “테라피스트가 자신을 무시하고 클라이언트의 말을 단지 오로지 받아들이고, 앵무새 반환을 반복하고 있으면 된다는, 극단적으로 수동적이고, 아마추어라도 할 수 있는 테라피라고 하는 비판을 초대했기 때문에, 「자신은 로저스파라고 전문가의 모임의 그 안에서 공언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분위기까지 '생산한 것이다(92). 이 치료사 (케어 제공자)의 수동성 및 아마추어 성에 대한 비판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예를 들면, 미하라 히로시는 로저스 카운슬러가 클라이언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클라이언트에 영감을 준다. 그러므로 고객의 승인과 호의로 이어지는 답만을 할 수 없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93). 또, 카와이 하야오는 로저스파의 수용이라는 말에 대해, 서양에서는 「카운셀러의 자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하고 있다」에 대해, 일본에서는 「카운셀러의 자아를 무너뜨릴 때까지」클라이엔 극단화된 이상적 수용의 어려움을 앞두고, 결국은 앵무새 반환과 같은 형식적 수용에 빠지게 되는 치료사가 많다고 적고 있다. 94). 혹은 기무라 토시는 로저스파(인간학파)에 있어서의 진단의 경시는 「기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고, 「치료가 표면적인 대증 요법의 한계를 다소라도 넘어, 병든 인생 그 자체에 눈을 향하고자 한다면, 그 병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통찰과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진단 행위는 불가피한 의학적 영업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95). ). 이러한 비판을 요약하면 로저스 케어 모델은 케어 대상자와 케어 상황을 이해 (진단)하는 이론적 틀이 없으며 로저스 카운슬러


심리요법·정신요법의 영야에서는 이러한 로저스 비판을 거쳐 진단 및 그 틀 = 이론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설득된다. 그 중에서도 토이 켄로에 의한 「견해」론은, 그 후의 심리치료·정신요법의 진단관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의 하나이다. 토이에 의하면, 본래, 진단이란 치료 행위와 지속일 것인데, 실태로서는 단순한 병적 현상의 분류나 레텔 붙이기에 빠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단과 치료를 연결하는 개념적 틀 = '견해'가 상정되어야 한다. 토지의 정의에 따르면, 「평가」에는 다음의 4개의 특징이 인정된다. 첫째, '견해'는 진단인 동시에 치료적 작용을 가져야 한다. 둘째, 「평론」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환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어 무엇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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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별을 붙인다는 행위가 있다. 셋째, “평가”하는 것에는 전문가와 환자의 관계 평가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넷째, "평가"는 "시작하지 않고"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96).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견해'의 여러 특징 중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구별'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점이다. 토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모르는’ 감각뿐만 아니라 면접에 있어서는 더욱 판단을 적극적으로 정지함으로써 ‘모른다’ 감각을 풍양하는 것도 필요하다”(97), 혹은 “정신과적 면접 의 감옥은 어떻게 이 '모른다'라는 감각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98). 즉, 「평론」이란 「아는」영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케어 대상자를 어떻게 「모르는」가를 의식화하는 역설적인 영업인 것이다.


또한 카와이는 "평가"에서 전문가와 환자 간의 관계 평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즉, "평가"는 항상 "치료자와 클라이언트 간의 인간 관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치료자의 주관적 관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진단과 달리 치료자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큰 요인이 된다”(99). 또한, 카와이는 "심리 요법을 수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관여함으로써 어떤 의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평가"가 있었으며, 거기에 자신이 커밋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결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00). 이와 같이 씨하라도 「평가에는 이 사람을 클라이언트로서 맡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카운슬러의 주관적인 음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진단적으로는 절망적인 사람」 역시 “일할 가능성”을 보려고 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내일이 없어진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이 “평가”라고 말한다(101 ). 즉, 「평가」란 케어 제공자의 주관적인 의미나 주체적인 참여를 필수로 하는 것이다.


게다가, "평가"에 대해 종종 지적되는 것은 그 모습의 양방향성을 포함한다. 여기서 말하는 양방향성이란, 「평가」가 케어 제공자의 측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케어 대상자의 측으로부터도 행해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102). 예를 들어, 키시모토는 "단방향, 즉 치료자가 환자를 찾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견해'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103). 아오키 세이 역시 ("평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클라이언트는 항상 치료자를보고 치료자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려고합니다. 잊어서는 안 된다. …… 그 때의 클라이언트의 관찰력과 평가 능력은 종종 치료자를 올라갈 수 있다”고 적고 있다(104).


이상과 같이, 심리요법·정신요법에 있어서는, 「모르는」의 의식화나 케어 제공자의 주체적 의미화, 혹은 눈부신 양방향성 등의 여러가지 요소를 「평가」 개념에 편입하는 것으로 그러나 진단적인 영업이 단순한 분류나 레텔 붙이에 빠지는 위험성을 회피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진단적 영업을 배제하고 독점적으로 실존적 만남을 지향하는 로저스파의 진단 불요론의 극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를 근거로 한다면, '대화'와 '고대감'은 로저스 비판이나 '견해'론의 전개를 고민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소박하게 로저스 회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토에 있어도 후지이에 있어, 어디까지나 스피리츄얼 케어의 일의적인 역할로서 로저스적인 대인원조 관계를 조치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진단 불요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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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지이가 "궁극적인 고통을 마주할 때 전문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문직자로서 자신을 놓아 혼자 인간으로서 그저 옆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했다(105). ), 이토가 「진단형 케어」와 「대화형 케어」를 「전혀 차원이 다른 케어」로 위치시킬 때(106), 거기에서는 진단적 눈빛과 실존적 만남이 분리되어, 보기 상반되는 양자 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견해'론적인 시좌가 버려지고 있다. 즉, 이토와 후지이의 논의에서는, 영적 케어에서의 실존적 만남의 우위성이 강조될 뿐, 진단적 눈빛과 실존적 만남과의 밀접 불가분한 「얽힘」(나리타 요시히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107). 그러면 여기에 다시 로저스 비판과 같은 비판 - 진단적 눈부심이 부족하면 케어 대상자를 이해하는데 부족이 생기고, 케어 제공자가 스스로의 주체성을 발휘하는 것이 곤란해진다 그가 아닌가, 라고의 비판――이 부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감, '대화', '고대'를 목적으로 하는 케어 모델은 진단적 눈빛과 실존적 만남의 상호 내재적인 관계, 혹은 진단적 눈부심의 ("견해"론적) 재검토에 의해 보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임상적 타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본절의 끝에 정신분석가인 마츠키 쿠니히로의 다음 지적을 그려두고 싶다. 마츠키에 의하면, 정신분석에 있어서의 여러가지의 전문적 기법은 “약간에 만능감이나 인간다움, 인간성이라고 하는 편리한 말로 처리하고 싶어지는 대인원조직에 있는 우리의 무의식의 소망충충적 발상, 예를 들어, 불행으로부터 구출하고 싶은 좋은 경험을 하고 싶은 좋은 임상가로 생각되고 싶고, 빨리 치료하고 싶은 등을 계명하는 것이기도 하다”(108). 영적 케어에서의 실존적 만남의 탐구에 얼마나 케어 제공자 측의 「무의식의 욕망 충족적 발상」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가능성을 계속 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계명'이 되는 여러가지 기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한층 더) 아닐까?


5. 끝에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는 심리요법·정신요법의 지견을 끌어내면서 영적 케어의 목적의 임상적 타당성을 검토해 왔다. 그 결과, 스피리츄얼 케어의 케어 모델의 많지만 일의적인 「바람직한 상태」의 실현을 목적으로 내걸고 있으며, 또한 그 소망을 자명화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 인정되었다. 또한 '대화'와 '접착'이라는 목적에 관해서는 실존적 만남과 진단적 눈빛의 연속성·상보성에 관한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없애고 규범적 인식의 상대성과 실존적 만남과 진단적 눈빛의 연속성·상보성을 통합한 케어의 목적을 내걸려고 하는 것은 영적 케어의 영업을 갈등 가득한 상황에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케어 대상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일의적으로 정할 수 없다면, 케어 제공자 자신, 자신의 관계방식을 방향 붙이고 평가하는 기준이나 지표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또한, 「대화」와 「진단」, 「한 사람」과 「전문직자」의 쌍방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맡으려고 하는 것은, 코고기 케이고가 말하는 「프로이트적 태도」와 「페렌치적 태도 '사이에 찢어져 있는 것과 같다(109). 그러면 케어의 존재 방식이 극단적으로 소극적인 것으로 되거나 한없이 미묘하고 언어화 불가능한 행위로서 신성화될 가능성도 부상한다. 그러므로 영적 케어의 임상적 역할을 가시화하는 케어 모델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상기 문제가 현재의 케어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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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인정된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둔다. 또는, 1 케어 대상자를 특정의 바람직한 상태에 둘러싸려고 하지 않고, 2 케어 제공자가 각종의 규범적 태도(실존적 만남과 진단적 모습) 사이에서 찢어지는 것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부정적인 요건을 충족하는 것이 보다 임상적으로 타당한 케어 모델(케어의 목적)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이 점은 사례 연구와 다른 다양한 케어 모델의 참조를 바탕으로 한보다 면밀한 고증이 요구될 것이다.



(1) C. 송더스, M. 베인즈(다케다 문화역) 『죽음을 향해 사는――말기암 환자의 케어 프로그램』의학서원, 1990년, 59쪽.


(2)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전국 각지에 시설 호스피스가 설립되어 1990년대에 완화 케어 병동이 의료보험제도에 통합되어 있다. 또한 2006 년 암 대책 기본법 제정 이후 완화 케어의 급격한 확충이 이루어지고있다. 또한 2012년에는 일본 스피리츄얼 케어 학회에 의해 「스피리츄얼 케어사」자격이 창설되어, 스피리츄얼 케어 자체의 제도화도 추진되고 있다.


(3) 실제로 임상 영양 케어 협회와 일본 영적 케어 학회는 모두 임상 목회 교육위원회 (Association for Clinical Pastoral Education)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준거하여 영적 케어 전문직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4) 이치노가와 요시타카 『신체/생명』 이와나미 서점, 2000년, 47쪽.


(5) 카미야 아야코 「스피리츄얼 케어라고 하는 것」(칼·베커 편저 “생과 죽음의 케어를 생각


루」법장관, 2000년), 243쪽. 츠지우치 아야야 “스피리츄어리티의 잔조”(유아사 야스오·하루키 토요·타나카 아스미 감수 “과학과 스피리츄어리티의 시대――신체·기·스피리츄어리티” 빙·넷·프레스, 2005년), 53페이지.


(6) 안도 태지 「『병의 지식』의 가능성――프로페셔널리즘을 넘어」(『의학철학의학윤리』 제23권, 2005년), 76-79쪽.


(7) 안도 태지 「현대의 의료와 영성――생의 전체성에의 지향과 생의 단편화에의 흐르는 것과의 낡음까지」(국제 종교 연구소편 「현대 종교 2003」도쿄도 출판 , 2003년), 75쪽.


(8) 동상, 78쪽.


(9) 안도 타이지 "현대 의료 문화에서의 영성의 위상 영성의 의료


화를 비판하면서」(카루오 나오키편 『문화와 영성』 게이오 기학 대학 출판회, 2012년), 71쪽.


(10) 동상, 75쪽.


(11) 이러한 상황은, 스피리츄얼 케어의 담당자의 대부분이 의료 종사자인 것 2008년), 112쪽) 및 무라타 히사유키의 케어 모델이 의료 종사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 755쪽)에 의해 온다. 이 논문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무라타의 이론은 영적 창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12) 쿠보지 슌유키 「스피리츄얼 케어학 개설」삼륜서점, 2008년, 58쪽. - 190 -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 -심리 요법·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13) 쿠보지 토시유키 「스피리츄얼 케어」(이시이 기부편 저 『스피리츄얼 페인과 그 케어』 키리스트 신문사, 2015년), 99쪽.


(14) 쿠보지 슌유키 「스피리츄얼 케어학 개설」삼륜서점, 2008년, 62쪽.


(15) 쿠보지에 의하면,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야말로 “나의 인생의 토대가 되어 나를 지지하고 만들기


하고 있다”라고 한다(동상, 23쪽).


(16) 다니야마 요조 "불교를 기조로 한 일본적 영적 케어 이론"(다니야마 요조 편 : "불교와 스피리


츄얼케어』 동방출판, 2008년), 23쪽.


(17) 구체적으로, 1명: 가족, 친척, 친구, 2거: 과거의 자신, 삶의 결과, 3 지금: 현재의 자신,


진정한 자신, 4: 미래의 자신, 삶의 과제, 5: 환경, 예술, 활동, 6: 우주의 진리, 자연의 섭리, 7 하나: 신, 불, 영, 내세, 8 조: 조상 , 죽은 가족·근친자·친구라는 8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동일, 25-26쪽).


(18) 동상, 24쪽.


(19) 무라타 히사유키 "종말기 환자의 영적 창구 구분 해명에 대한 현상 학적 접근"( "교토


노트르담 여자대학 연구기요' 35권, 2005년), 128-129쪽.


(20) 동상, 129쪽.


(21) 동상, 129쪽.


(22) 무라타 히사유키 「종말기 환자의 스피리츄얼 페인과 그 케어――현상학적 접근에 의한


해명」(『완화 케어』 제15권 제5호, 2005년), 389쪽.


(23) 같은 쪽, 389-390면.


(24) 동상, 390쪽.


(25) 오시타 다이묘 편 저 『실천적 스피리츄얼 케어―― 간호사의 삶을 바꾸는 “자리 이타” 톱


롤러 간호사의 잠재력을 높인다/간호 케어에 활용할 수 있다」(일본 간호 협회 출판회, 2014년),


14 페이지.


(26) 동상, 57쪽.


(27) 오카모토 타쿠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스피리츄얼 케어』의학서원, 2014년, 153쪽.


(28) 동상, 177쪽.


(29) 동상, 177쪽.


(30) 타니다 겐슌 · 오시타 다이고 · 이토 타카 쇼 편 : 대화 · 커뮤니케이션에서 배운 영적


아――말과 이야기로부터의 실천』진단과 치료사, 2011년, 5페이지.


(31) 동상, 9 페이지.


(32) 코니시 타츠야 「그리프 케어의 기반으로서의 스피리츄얼 케어」(타카기 케이코 편저 「그리프 케어 입문――비탄의 어딘가에 있는 사람을 지지한다」 교초 서방, 2012년), 94쪽.


(33) 같은 쪽, 94-98쪽.


(34) 동상, 101-110쪽.


(35) 이토 타카 쵸 「영적과 종교의 관계


심볼의 역할」(다니야마 요조, 이토 타카아키, 쿠보지 토시유키 「스피리츄얼 케어를 말한다――호스피스, 비하라의 임상으로부터」간사이 학원 대학 출판회, 2004년), 50-53쪽.


- 191 -




종교 학년보 XXXIV


(36) 이토 고장 「팀 의료에 있어서의 스피리츄얼 케어」(쿠보지 토시유키·히라바야시 타카히로 편저 “스피리츄얼 케어를 말한다 계속--의료·간호·개호·복지에의 새로운 시점”간사이 학원 대학 출판회, 2009년), 51 페이지.


(37) 이토 타카히데 「스피리츄얼 케어의 3차원적 구축」(가마타 히가시니 기획·편 「강좌 스피리츄얼 학 제1권 스피리츄얼 케어」비잉·넷·프레스, 2014년), 20-21페이지.


(38) 동상, 34쪽.


(39) 동상, 35쪽.


(40) 동상, 36쪽.


(41) 타니다 겐슌 · 오시타 다이고 · 이토 타카 쇼 편 "대화 · 커뮤니케이션에서 배운 영적


아――말과 이야기로부터의 실천』진단과 치료사, 2011년, 31쪽.


(42) 후지이 미와 『사생학과 QOL』 간사이학원대학 출판회, 2015년, 189쪽.


(43) 동상, 190쪽.


(44) 동상, 191쪽.


(45) 동상, 192쪽.


(46) 동상, 193쪽.


(47) 동상, 193쪽.


(48) 윤에게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의 양자를 포함한 마음의 전주, 즉 결코 십전에


의식화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인생의 목표'로서의 완전성·통합성을 가리킨다(CG 융저·A. 야페 편 추억·꿈·사상 2』 미스즈 서방, 1973년, 271-272쪽).


(49) DW 위니콧(우시마 정신감역·쿠라히로자역) 『위니콧저작집 8 정신분석적 탐구 3 (어린이와 청소년기의 치료상담)』 이와사키학술출판사, 1998년, 186-187쪽.


(50) DW 위니콧(하시모토 마사오 번역) 『놀이와 현실』 이와사키 학술 출판사, 1979년, 91쪽. 여기서 말하는 창성성은 유아가 안고 있는 만능감에 유래하는 보편적인 감각을 가리킨다. 특히 유아는 유방을 원하면 어머니가 욕구를 느끼고 유방을 내보냅니다. 유아는 바로 지금 갖고 싶다고 하는 상태로 유방을 주어지므로 스스로 그것을 창조했다고 착각한다. 즉, 「어머니의 공감적 반응이 유아에게 만능감을 체험하게 한다」, 「유아는 만족의 체험을 창조하는 마술적 능력을 느끼는 것」(SA 글로르닉 ) 『위니콧 저작집 별권 2 위니콧 입문』 이와사키 학술 출판사, 1998년, 90쪽). 이윽고 외적 현실과 내적 현실의 구별이 이루어지면서, 유아는 이 만능감이 착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위니콧이 말하는 창성성이란 “빨간 "짱의 체험에 귀속하는 생활을 통해 유지되는 것" 감수·이와라 나리오·가미벳푸 케이코·사이토 카즈에역) “위니콧 저작권 3 가정에서 사회로” 이와사키 학술 출판사, 1999년, 28쪽).


(51) DW 위니콧(하시모토 마사오 번역) '놀이와 현실' 이와사키 학술 출판사, 1979년, 4쪽.


(52) 동상, 66쪽.


(53) J. 힐만(이리에 료헤이역) 『혼의 심리학』 청도사, 1997년, 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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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 -심리 요법·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54) 동상, 318쪽.


(55) J. 힐만(가와이 슌오역) 『원형적 심리학』 청토사, 1993년, 92쪽.


(56) 영혼을 특정 중심으로 수렴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영혼에 대한 발달 단계를 생각한다.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와이 슌오에 의하면 “힐맨은 심리요법과 종교의 차이를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구별로 파악해 간다. 하지만 정신은 초월을 추구하여 높은 춤을 추고 목표를 목표로 한다. 하지만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궁극의 목표는 없기 때문에 발달의 단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형적 심리학은 발달적 견해에 반대한다.”


(57) A. 구겐부에르 크레이그(야마나카 야스히로 감역) 『노우자 고――현대의 신화에 대한 고찰』 신요샤, 2007년, 78-82쪽.


(58) 동상, 105쪽.


(59) 동상, 109-127면.


(60) 쿠보지 슌유키 「스피리츄얼 케어학 개설」삼륜서점, 2008년, 62쪽.


(61) 예를 들면 오카베 켄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T는 당시 결핵 수술 후 만성 호흡


부전 속에서 폐렴을 앓고 있었다. 나 [오카베]는 가래를 내기 위해 기관을 절개하고 인공호흡기관을 삽입한 상태로 집에서도 가래를 흡인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2년 남은 어느 날, T씨는 '이제 좋다'고 말했다. 젊고 열심히 하는 너를 보고 참으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더 이상 치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결핵은 시베리아 억류 시대 이후로, 친구는 모두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친구들과는 그 세상에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그걸 알아. 이 상태에서는 가족에게 폐를 끼치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살고 있는 의미는 없다. 그러나 자살은 저항이 있다. 그러니까 삽입한 관을 떼어내 자연스럽게 체재해 줘. T씨는 그렇게 나에게 호소했다”(오카베 켄·타케노우치 유후미편·시미즈 테츠로 감수 “어떻게 살아 어떻게 죽는가--현장에서 생각하는 사생학” 궁전 서원, 2009년, 18페이지). 사는 의미는 반드시 죽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질문조차도 환기되는 국면이다.


(62) S. 그로프(요시후쿠 신이치, 호시카와 아츠시, 스가야스히코역) 『뇌를 넘어』춘추사, 1988년, 242쪽.


(63) J. 힐만(히구치 카즈히코·다케다 헌도역) 『자살과 영혼』 창원사, 1982년, 16쪽.


(64) 동상, 34쪽.


(65) 타니야마 요조 「스피리츄얼 케어의 구절 쿠보지 이론에 일본 불교자의 시점을 더한다」(쿠보지 슌


유키 · 히라바야시 타카히로 편 저 「스피리츄얼 케어를 말한다. 또, 이노우에 위말라는, 스피리츄얼 케어를 받으면 「자신을 용서해, 타자를 용서한다」 「『고마워요』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노우에 위말라 「종말 의료에서의 「스피리츄얼 케어」의 가능성」) ), 92-93쪽). 어느 '사업'도 겉보기에 현저하게 도덕주의적이다.


(66) 후지이 미와 "생명 윤리와 영성 사생학의 관점에서"




종교 학년보 XXXIV


理의 종교와 영성』晃洋書房(2010년), 19쪽.


(67) M. 르노(카토 마코토) 「완화 케어――정신 분석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와나미 서점, 2004년, 26-


27 페이지.


(68) 똑같이, 27-28면.


(69)쿠와하라 토모코 「카운셀링으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동사로 끈적끈적 심리 임상」일본평


논사, 2010년, 5페이지.


(70) A. 구겐빌=크레이그(히구치 카즈히코·안계 신이치역)


집의 <힘> 창조사, 1981년, 17쪽.


(71) 타무라 케이코 · 카와 마사코 · 모리타 타츠야 편 "간호에 살리는 영적 케어 가이드"아오카이 사, 2012


년, 41-42면.


(72) 오시타 다이묘 편 저 『실천적 스피리츄얼 케어―― 간호사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자리 이타” 톱


롤러 간호사의 잠재력을 높인다/간호 케어에 활용할 수 있다』일본 간호 협회 출판회, 2014년, 57


페이지.


(73) 야마토 요코 「평생 발달을 파악할 수있는 모델」(무토 타카시 · 야마토 요코 편


학 1 평생 발달 심리학이란 무엇인가――이론과 방법』 가네코 서방, 1995년), 74-91쪽.


(74) 기타야마 슈 “환멸론” 미스즈 서방, 2012년, 142쪽.


(75) 가미야 미에코 「케어에의 눈빛」 미스즈 서방, 2013년, 76-77쪽.


(76) J. 힐만(가와이 슌오역) 『원형적 심리학』 청토사, 1993년, 77쪽.


(77) VE 프랑크르(야마다 쿠니오·마츠다 미카역) 『고뇌하는 인간』 춘추사, 2004년, 24쪽.


(78) W. 기게리히(가와이 슌오역)


"("사상" 제759호, 1987년), 32쪽.


(79) 기시모토 히로시 『완화 케어라는 이야기――올바른 설명이라는 폭력』 창원사, 2015년, 139쪽.


(80) Harold G. Koenig, Spirituality in Patient Care: Why, How, When, and What (West


Conshohocken, Templeton Press, 2002), pp. 136-137.


(81) 후지이 리에·후지이 미와 『잘생긴 케어――병을 앓는 사람의 모습에』 생명의 말사, 2000


년, 58-59면.


(82) Michael Kearney, Mortally Wounded: Stories of Soul Pain, Death and Healing (New


Orleans, Spring Journal, 2007), p. 48.


(83) 타니다 겐슌 · 오시타 다이고 · 이토 타카 쇼 편 : 대화 · 커뮤니케이션에서 배운 영적


아――말과 이야기로부터의 실천』진단과 치료사, 2011년, 31쪽.


(84) 이토 타카히데 「스피리츄얼 케어의 3차원적 구축」


학 제1권 스피리츄얼 케어』비잉·넷·프레스, 2014년), 35페이지.


(85) 동상, 37쪽.


(86) 후지이 미와 『사생학과 QOL』 간사이학원대학 출판회, 2015년, 190쪽.


(87) 동상, 193-194면.


(88) 동상, 194쪽.


(89) Rogers, H. Karschenbaum, VL Henderson Hen (이토 히로시, 무라야마 마사하루 감독)


저즈 선집――카운셀러라면 한 번은 읽어 두고 싶은 엄선 33 논문상』성신서방, -




영적 케어의 케어 모델의 검토 -심리 요법·정신 요법의 지견으로부터-


2001년, 267쪽. 일치란 "자유롭고 깊게 자기 자신이며, 현실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인식으로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무조건의 긍정적 관심이란 "테라피스트가 클라이언트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국면을 그 클라이언트의 일부로서 따뜻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감이란 “클라이언트의 사적 세계를 그것이 자신의 세계인 것처럼 느끼고, 게다가 '마치......같이'라는 성질('as if” quality)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동일, 270-274쪽).


(90) C. 로저스(호사카 료, 모토미 쇼히코, 스에타케 야스히로 공역) 『클라이언트 중심 요법』 이와사키 학술 출판사, 2005년, 200쪽.


(91) 로저스 저·H. 카셴바움, VL 헨더슨편(이토히로·무라야마 마사하루 감역) “로저스 선집――카운슬러라면 한번은 읽어 두고 싶은 엄선 33 논문상”성신서방, 2001년, 165쪽 .


(92) 안무라 나오미 「공감과 자기 사랑의 심리 임상――코푸트 이론으로부터 현대 자기 심리학까지」창원사, 2016년, 88쪽.


(93) 씨하라 히로시 「카운슬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그 능동성과 수동성」창원사, 2002년, 133-137쪽.


(94) 가와이 하야오 「일본에서의 심리 요법의 발전과 로저즈 이론의 의의」(『현대의 에스프리』374호, 1998년), 183-184쪽.


(95) 기무라 토시 『기무라 토시 저작집 5 정신의학 논문집』 히로후미도, 2001년, 342-343쪽.


(96) 도이 켄로 ''응석'이론과 정신분석요법' 금강출판, 1997년, 174-176쪽.


(97) 도이 켄로 「신정 방법으로서의 면접――임상가를 위해서」의학서원, 1992년, 35쪽.


(98) 동상, 29쪽.


(99) 가와이 하야오 「임상 심리학 노트」금강 출판, 2003년, 17-19쪽.


(100) 동상, 18쪽.


(101)씨하라 히로시 「심리 임상의 입장에서」(씨하라 히로시·나리타 요시히로 공편 “임상 심리학 2


심리 평가; 배풍관, 2000), 18-19 페이지.


(102) 리 토시코 「퍼스트 스텝 심리적 원조――아이의 플레이 테라피로부터 사춘기의 면접


에서』창원사, 2011년, 30쪽.


(103) 기시모토 히로시 『완화의 마음――암 환자에 대한 심리적 원조를 위해』성신서방, 2004년, 113쪽.


(104) 아오키성 3「첫회 면접에서 필요한 정신의학적 지식」(『임상 심리학』 제1권 제3호, 2001년),


309 페이지.


(105) 후지이 미와 『사생학과 QOL』 간사이학원대학 출판회, 2015년, 191쪽.


(106) 이토 타카 쵸 "팀 의료에서의 영적 케어"


듀얼케어를 말한다.


2009년), 55쪽.


(107) 정신 요법가의 나리타 요시히로는 ​​경계 성 인성 장애가있는 환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환자가 요구합니다.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관계'(실존적 만남)와 '의사와 환자의 관계'(진단적 눈빛)와의 '이중 관계'의 얽힘을 살아남는 것이 치료자의 역할인 것은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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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학년보 XXXIV


고찰을 전개하고 있다(나리타 요시히로 『정신 요법의 깊이――나리타 요시히로 셀렉션』 금강 출판,


2012년, 114-117면).


(108) 마츠키 쿠니히로 『정신분석 임상가의 유의』 금강출판, 2010년, 23-24쪽.


(109) 코고기에 의하면, 프로이트적 태도란 「금욕 규칙 abstinence rule」 「분석의 숨어 analytic


incognito''중립성''수신성''의사로서의 분별' 등에 의거하는 지성 우위·합리주의적인 태도이며 페렌치적 태도란 '유연성' '인간적인 정서 교류' '애정의 '작은 일' 등을 중시하는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태도이다(코이츠키 계고「프로이트 대 페렌치의 흐름」(『정신 분석 연구』 제44권 제1호, 2000년), 28-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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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横山 優樹

1.はじめに

「近代ホスピスの母」とも呼ばれる英国の医師 C. ソンダースによれば,生命を脅かす疾患に 直面すると「多くの患者が自責の念あるいは罪の感情を持ち,自分自身の存在に価値がなくなっ たと感じ,ときには深い苦悶の中に陥」るという(1)。ソンダースは,そうした患者の苦悩をスピ リチュアルペインと名付け,近代医療の枠組みの中で先駆的に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実践する。 我が国でも 1980 年代以降,ソンダースの活動をモデルにスピリチュアルケアが試みられるよう になり,ホスピスや緩和ケア病棟を中心としてスピリチュアルな位相へのまなざしが浸透してゆ く(2)。現在で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思想的基盤の整備やスピリチュアルケア専門職の養成,さ らにはアセスメントツールの開発等も行われつつある。

本論文では,こうした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について,その臨床的な妥当性を心理 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検討する。ここで言う心理療法・精神療法とは,臨床心理学や精神病 理学,精神分析学等の枠組みに準拠した対人援助活動全般を指す。管見では,我が国のスピリチ 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は主に米国の臨床牧会教育や個々の論者の哲学的見解に則って構築され ており,心理療法・精神療法の援助スタイルや理論は必ずしも参照されていない(3)。しかし,心 理療法・精神療法には数多くのケアモデルが蓄積されているうえ,スピリチュアルケアと同じく 終末期患者を対象とした事例も見受けられる。それゆえに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を参照する ことが,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構築に資する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

ところで,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に対する従来の批判は,医療化の問題に向けられ たものが主であった。医療化とは「他の社会領域(宗教,家族,法など)に属するとされていた 事象が,医学の管轄下に置かれてゆくこと」を意味するが(4),スピリチュアルな問題さえも医学 の管轄下に置かれ,医学的な処置の対象とされてしまうことが多々懸念されてきたのである(5)。 とりわけ医療化の傾向の顕著な例としてしばしば指摘されるのが,痛みはない方がよいとする発 想,すなわち,「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は解消すべきである」という発想である。例えば安藤泰至 は,そもそも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は身体的・社会的・心理的な痛みのように「その原因を取り 除くことによって解消されるような痛み」ではなく,「元来人間存在そのものに本質的に含まれて いるもの」であるとし(6),それを他の痛みと同様に解消しようとすることはスピリチュアルな次 元の「矮小化」であると批判する(7)。安藤によれば,スピリチュアルな次元には「『生の向こう側』 からの視線」といった超越的要素や(8),「より深く病み,痛む者こそが救済や解脱により近いとこ ろにいる」といった逆説も孕まれているため(9),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はない方がよい・解消す べきであるという見方は皮相に過ぎるのである(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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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学年報 XXXIV

確かに,我が国の臨床現場において中心的に参照されているケアモデル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 ンの解消を唱えるものであり,その限りでは医療化の流れが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囲い込みつつ あるとも言える(11)。とはいえ,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の解消というケアの目的は,あくまでも「自 律性の回復」や「生きる意味の回復」といったより上位の諸目的のもとに,或いは,それらとの 密接な相互連関のうちに措かれており,決して単独で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方向付けているわけ ではない。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について検討するためには,当然ながら,そうした 諸目的の全体を視野に含めて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捉え返す必要がある。逆に言えば,スピリチ ュアルペインの解消という目的のみを抽出して反駁したとしても,必ずしもスピリチュアルケア の基本的な方向性に再考を促すには至らない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

以上の点を踏まえて,本論文では我が国で展開されてい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の中から,ス 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として掲げられている内容を網羅的に整理し,その臨床的な妥当性を心 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検討する。ケアの目的こそケアモデル全体の方向性や枠組みを規定 するものであり,それゆえに最初に検討すべき事項であると言える。

猶,本論文では臨床的妥当性を検討するわけであるが,そもそも何を以てより臨床的に妥当で あると見なすのか,という判断基準を定めてはいない。というのも,そうした判断基準は具体的 な臨床場面に応じて変わらざるを得ず,しかもそうした個々の場面についても,結局のところ何 が正しかったのか,という最終的な判断はつき難いと考えられるからである。その意味で,臨床 的妥当性という概念の内実は,まさに何が臨床的に妥当なのかを反省的に吟味し続けること,と でも言うほかないものである。本論文の課題であ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もま た,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を引き合いに出すことで「何が臨床的に妥当なのか」という問い をより多角的に播種する試みであり,決してスピリチュアルケアと心理療法・精神療法のいずれ かをより妥当であると判断す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付言しておきたい。

2.スピリチュアルケアは何を目的としているのか

本節では,我が国におけ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のうち代表的なものを取り上げ,それらがス 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として掲げている内容を整理する。猶,ここで取り上げるものは,スピ リチュアルペインやスピリチュアルケアといった用語に対して独自の定義づけを行っており,か つ医療・看護の臨床現場で用いられている理論に限定する。具体的には,窪寺俊之,谷山洋三, 村田久行,大下大圓,岡本拓也,谷田憲俊,小西達也,伊藤高章,藤井美和の 9 名のスピリチュ アル論からケアの目的に関する叙述を抽出し,順次簡潔に見ていくこととする。

〈窪寺俊之〉 窪寺によれば,スピリチュアルケアとは「特に死の危機に直面して人生の意味,苦難の意味,

死後の問題などが問われ始めたとき,その解決を人間を超えた超越者や,内面の究極的自己に出 会う中に見つけ出せるようにするケア」であり,また「目に見えない世界や情緒的・信仰的領域 の中に,人間を超えた新たな意味を見つけて,新しい『存在の枠組み』『自己同一性』に気づくこ と」であるという(12)。さらに窪寺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では,神仏との関係を覚醒し,強化す ることが重要」であるとし(13),超越的存在とのつながりを繰り返し強調している。そうしたつな がりの構築が,「危機に直面して揺れ動く自分」を受け止め(14),自己同一性を回復するのに資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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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と考えられているのである(15)。 〈谷山洋三〉

谷山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人間を通して感じられる・表現される,不可視・不可知な機 能に焦点を当てながら,相互の内面の力動性によって自分らしさの安定・回復や成長を支援する こと」と定義し(16),そのうえで,現実的次元・内的次元・超越的次元の 3 つの領域に渡ってケア 対象者の自己を取り巻く要素を数え上げている(17)。谷山によれば,それらの諸要素こそ「自分ら しさの安定・回復や成長」のための源泉であり,その源泉から支えを得ようとする「スピリチュ アリティの蠢き」を感得しながら「対象者の思いを支持・明確化・対峙する」ことが,スピリチ ュアルケアであるという(18)。

〈村田久行〉

村田は,終末期患者の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時間性・関係性・自律性の 3 つの次元から説明

している。すなわち,終末期患者は「死の接近によって将来を失う」がゆえに,「今,何をしても 無意味という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感じる」(19)。また,「死の接近によって他者との関係を失 う」がゆえに,「アイデンティティの喪失,孤独,生の無意味という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体験 する」(20)。そして「死の接近によって......自分自身のコントロールを失い,自立と生産性(自律) を失う」がゆえに,「自己の存在と世界が無意味で無価値なものとして現れる」(21)。村田は,こう した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が生み出される構􏰀に基づき,「その苦痛を和らげるケアの指針」を提 示する(22)。すなわち,第一に「患者自身が援助者との対話から『死をも超えた将来を見出す』こ とができたならば,その将来を目的として生きる新たな現在の意味が回復するに違いない」。第二 に「患者自身が援助者との対話から『死をも超えた他者を見出す』ことができたならば,その他 者との関係から新たに自己の存在の意味が与えられるであろう」。第三に「患者が援助者との対話 から......知覚,思考,表現,行為の各次元でなおも自己決定できる自由(自律)があることを知 るならば,自律による価値感を回復できるに違いない」(23)。かくして村田にとってのスピリチュ アルケアとは,関係性・自律性・将来性の喪失を同定し,その喪失されたものを再獲得させるこ とで,「自己の存在と生きる意味の回復」を試みるものであると言える(24)。

〈大下大圓〉 大下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生きる意味を失い,絶望,悲観,孤独感などに苛まれて自

分の命の行方に苦しんだり,家族や親しい人との関係性に課題を抱えたりする苦悩」とし,スピ リチュアルケアを「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内在し,あるいは訴えようとするクライエント(ケ アの対象者)に対して,ケアを提供する側(援助者,スピリチュアルケアワーカー,セラピスト など)がともにその実態を,自縁,他縁,法縁の統合的な領域から明らかにして,苦悩からの解 放,解脱に至る営み」であるとしている(25)。さらに大下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痛み・苦悩) をもつクライアントのスピリチュアルケアは,自縁(自己の尊厳性)に気づき,自分をサポート してくれる他縁(縁のある他者の力)と,自分自身を大いなるいのちで包摂している法縁の力に よって,希望や生きる力を増大させていくこと」であるとも述べている(26)。

〈岡本拓也〉 岡本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個人において,彼/彼女が置かれている状態と,彼/彼女

が抱いている信念体系との間の調和が崩れたことから生じる辛さ」と定義し(27),スピリチュアル - 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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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アとは「その不調和が解消・予防される方向へと働きかける営み」であると述べている(28)。ま た,その働きかけは「その人が自らの置かれている現実を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るほどの力をも つ信念体系へと,その人の信念体系の変容を促したり,信念体系を強靭化したりする方向でのか かわり」であるという(29)。

〈谷田憲俊〉 谷田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には「『人生の意味づけ』の崩壊あるいは再構築を迫られること

への苦痛」と「『周囲とのつながり』が断ち切られることから生じる苦痛」が挙げられるとしたう えで(30),これらに対す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仕方として,「人生の意味づけ」に対しては物語療 法を,「周囲とのつながり」に対しては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重視すると述べている(31)。 〈小西達也〉

小西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スピリチュアル・クライシス時の主体的生のサポート」と定 義している(32)。「スピリチュアル・クライシス」とは「人生の試練に直面して,自らの生きる意味 や存在価値が見出せなくなっているような状態」であり,より具体的には,世界観や価値観,生 き甲斐を支えるような基盤的な「ビリーフ」(=信念や仮定)が何らかの理由で機能不全に陥って いる状態を指す(33)。それゆえにスピリチュアルケアにおいては,この機能不全に陥ったビリーフ を「再構築」することが求められるという。すなわち,ケア対象者の気持ちや考えを整理するこ とをサポートし,「ライフ・ヒストリー」等の人生の振り返りを行うことで,ビリーフを「意識化」 していく。それによって,既存のビリーフが見直され,新たなビリーフが再構築されていくとい うのである(34)。

〈伊藤高章〉 伊藤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超越性』との関わりのパターンが不安定になったときに,な

んらかの方法でその不安定に対処する仕方」と定義し(35),かつ,その対処する仕方の内実は「患 者さんご自身が,そのペインを受けとめ,悩み苦しみ,乗り越えたり,受け入れたり,拒否した りするプロセスを支える」ことであると述べている(36)。

さらに伊藤は,ケア実践者がケア対象者を客観的に観察し,一方的に介入するという自然科学 的方法に基づく「診断型ケア」と,ケア実践者とケア対象者の相互関係に基づき,「その瞬間その 場での関係の質」を追求する「対話型ケア」とを区別したうえで(37),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本領 は「異なる認識論的地平に生きる二者が,関係の中で自己の地平と相手の地平との差異を意識し つつ,その差異を豊かに経験し合うことを通して,どちらの地平でもない新たな場を創出する」 対話型ケアにあるとしている(38)。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は二人称的関係の創出・実現であり, 相手の物語を聴くことで「ケア実践者の心が揺らされること」自体にあるというのである(39)。ま た伊藤は,「心が揺らされること」を相手の物語が「記憶と心に刻まれ,聴き手の心の血肉となる」 こととも言い換えており(40),それをケア提供者がケア対象者の「証人」となることとして位置付 けている(41)。

〈藤井美和〉 藤井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生きる意味が見いだせない苦しみであり,また自己,他者,

自己を超える何らかとの関係性の中に自己存在を見いだすことができない苦しみ」と定義しつつ (42),同時に,そうした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は苦しむ人自身の「主観的意味付け」の問題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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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ため,「他者の介入」によって解決を見ることはないと主張する(43)。藤井によれば,他者のスピリ チュアルペインに答えを出すことができない以上,できることは「寄り添い」だけであり(44),か つその「寄り添い」は「目の前の人を丸ごと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問いかけを受ける こと,つまり自らの価値観を問い直すことによって可能となる」という(45)。また藤井は,(「でき る」専門職者としてではなく)「『できない』一人の人間として,その人の前に立つ」,つまり「『何 もできなくても』なおそこに在ろうとする」ことが,何もできない自己に直面しているケア対象 者に寄り添うことであると述べている(46)。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は,相手の前で自らが「何 もできないことを受け入れること」そのものにある,というのが藤井の所論である(47)。 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

以上,窪寺,谷山,村田,大下,岡本,谷田,小西,伊藤,藤井の 9 名のスピリチュアルケア 論を概観してきた。改めて各論者が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に掲げている内容を整理してみる と,

○他者とのつながりの回復(谷山,村田,大下,谷田) ○自分らしさや自己同一性の回復・成長・安定化(窪寺,谷山,村田) ○人生の意味や生きがいの再構築(窪寺,谷田,小西) ○超越的存在・究極的次元とのつながりの回復(窪寺,大下) ○世界観・価値観・信念体系の調整・再構築(岡本,小西)

○自律性や将来性の回復(村田)

○希望や生きる力の増大(大下)

○苦悩からの解放(大下)

○対話(伊藤)

○寄り添い(藤井) といった点が挙げられる。一見して,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の解消に留まらない様々な積極的要 素が含まれていることが見て取れよう。また,これらの中でも「対話」と「寄り添い」という 2 つの目的は,他の目的と比べて異質であると言える。というのも,他の目的がすべてケア対象者 に関する叙述となっているのに対し,この 2 つの目的はむしろケア提供者側の態度・姿勢に重き を置いたものとなっているからである。ゆえに以下では,この 2 つの目的を他の目的と便宜的に 区別し,まず他の 8 つの目的から検討していくことにする。

3.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の臨床的妥当性1

本節では,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前節で見た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の臨床的妥 当性を問いに付すことを試みる。

自己同一性の安定化,信念体系の調和

まず,「自分らしさや自己同一性の回復・成長・安定化」と「世界観・価値観・信念体系の調整・ 再構築」という 2 つの目的を取り上げたい。これらがケアにおいて目指される場合,そこには当 然ながら,「私」は「より安定していること」「より成長していること」「より現実に適応的な世界 観を有していること」「葛藤や分裂のない信念体系を有していること」が望ましい,という想定が 認められる。こうした想定に対して,精神分析学やユング派心理学では様々な異論が唱えられ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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きた。例えば精神分析家の D. W. ウィニコットは,C. G. ユングの「自己」,及びその象徴として の「曼荼羅」の観念に次のような疑義を呈している(48)。「曼荼羅は私〔ウィニコット〕にとっては 本当に恐ろしいものに思える。それは破壊性や混沌や無統合 disintegration や,その他諸々の狂 気と折り合いをつけることにことごとく失敗している。それは無統合からの強迫的な逃走である」 (〔〕内は筆者による。以下同)(49)。つまり,ユングは混沌や分裂に対して過度に防衛的であり, 「自己」=「曼荼羅」へのその固執も混沌や分裂に対する防衛に他ならないというのである。し かし,ウィニコットによれば,「人生は生きる価値があると感じさせる」ものは統合された自己で はなく,創􏰀性である(50)。そして,創􏰀性は「遊ぶこと」,すなわち「主観的なものと客観的に知 覚されるものとの間の中間領域」において「錯覚 illusion」を展開することを通して活性化され るため(51),本質的に「不確かな」性格を持つ(52)。かくしてウィニコットの言う「生きる価値」は, 統合性や秩序とはおよそ対照的な錯覚や不確かさの領域に求められるのである。

また,元型的心理学の創始者 J. ヒルマンは,人格の統合性という観念に異を唱えている。ヒル マンによれば,ユングは「自己」という統合された全体性を優先するために,心の複数性・多元 性を蔑ろにしてしまっている。ユングに限らず,西洋の心理学は統合性や全体性への直線的な発 達段階を措定する「一神教的心理学」であり,「断片化や自己分裂」に強い偏見を抱いているので ある(53)。しかし,「魂」には生来「多中心性」が備わっており(54),「どのような人格も本質的に多 数的である」(55)。それゆえにヒルマンは,中心性や統合性を求める一神教的心理学に対置する形 で,多神教的心理学としての元型的心理学を措定する。元型的心理学では,魂に存在するあらゆ る元型的イメージが自律的に展開し,深まることに価値が置かれるのであり,その展開を特定の 中心へと収斂させてしまわないことこそが魂への配慮である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56)。

或いは,ユング派の分析家 A. グッゲンビュール=クレイグも,安定性や統合性といった観念 の虚構性を指摘している。グッゲンビュールによれば,現代の多くの「神話」は「矛盾のなさ」 にしがみついている。例えば,人間は意識化することを通して自らの「殺人的・自殺的側面」を 弱めることができ,「より高いもの,より善いもの」へと近づいてゆくことができるという「進歩 神話」があるが(57),実際には個性化にせよ意識化にせよ,直線的に進歩するものではなく「中心 に近づいたかと思うと再びそこから遠ざか」るような「中心を巡る舞踊」に過ぎない(58)。同様に, 人は老いるにつれ成熟するという「老賢者」神話も虚構である。実際の老人は「欠損,衰退,病 気,痴呆,集合的無意識との接触の喪失,そして最後には死によって特徴づけられ」る極めて不 安定な存在なの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私たちは老人の心理療法や世話において......誤った方 法で彼らを正常にしたり統合したりしようとします。彼らが建設的で理性的なしかたで,常にあ らゆることに興味をもち,多くのことに参加していることを,私たちは望みます」。グッゲンビュ ールは,こうした「老賢者」神話による専制を,「老愚者」神話によって補償することを提案する。 すなわち,老人に「こっけいな老人」となる自由を与えること,「病気,老衰,ついには死が,彼 らを恐怖で満たしてもよい」という祝福を与えることが,老人を「生の戦い」から遠ざからせ, 内的に自由に生きることを可能にするというのである。「老愚者は,まさに気分次第で,笑ったり 泣いたりしてよいのです。......感情の抑制がきかないことは,老いた自由な愚者の喜ばしい特徴 でもあるのです」(59)。

これらの論者は或る意味で,「私」は安定していることが望ましい,といった規範的認識の自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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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性を脱臼させようとしている。すなわち,「私」は決して安定的である必要はなく,首尾一貫した 信念体系を持つ必要もない。むしろ「私」や世界観は本来的に複数的で分裂したものである,と いうのである。こうした主張から翻って見れば,「自分らしさや自己同一性の回復・成長・安定化」 や「世界観・価値観・信念体系の調和・再構築」という目的は,ケア対象者の在り方を安定性や 整合性の内に囲い込んでしまう危険性を孕んでいるとは言えないであろうか。 人生の意味や生きがいの再構築

「人生の意味や生きがいの再構築」がケアの目的とされる場合,そこではやはり,「人生の意味・ 生きがいを見出すことが望ましい」とする規範的認識が前提とされていよう。実際,窪寺は「生 きる意味は困難や苦難の中でも見つけ出せるものである。患者が困難や苦難があるから生きる意 味がないと言っても,それを真正面から受ける必要はない」とさえ述べている(60)。管見では,心 理療法・精神療法の領野でも,こうした認識に対する直接的な批判が為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 しかしながら,臨床事例を顧みると,患者は必ずしも生きがいを見出すに至るとは限らず(61),む しろ人生の意味など分からず終いであることの方が自然であると考える余地もあるではないか。 とりわけ人生の意味が言語的・知的に探究されるものとして想定されるとすれば,トランスパー ソナル心理学者の S. グロフが言うように,それこそ「生のプロセスのダイナミックな流れが妨 害され,阻止されていることを指し示す徴候」であるとも言える。グロフによれば,(言語的・知 的な意味の探究によってではなく)情緒的・生物学的な体験を通してしか,人は「人生を正当化」 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ある(62)。

或いはヒルマンは,「そこ〔精神病院〕では,生命を保護し,自殺を予防する目的で,あらゆる 種類の激しい心理的侮辱が,病める魂を『正常化』するために用いられる」と記している(63)。「生 きる意味や生きがいの再構築」は,この「心理的侮辱」としての「正常化」であるとも言えるの である。ちなみにヒルマンは,「問題は自殺に賛成か,反対かではなくて,それは心にとって何を 意味するか」であるとも述べている(64)。これに倣って言えば,「人生の意味や生きがいの再構築」 が目的化するとき,ケア対象者が感じている生きる意味のなさが,ケア対象者の心にとって何を 意味するか,という問いが等閑にされてしまうのである。

他者とのつながりの回復 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では,しばしば他者とのつながりが実質的に道徳的価値を帯びたものと

して称揚されている。とりわけ谷山や大下のケア理論では,他者とのつながりは「縁」として理 解され,「究極的にはあらゆる存在が『わたし』と一体」とも主張されている(65)。他者とのつなが りに対するこうした肯定的・道徳的認識は,ケアの在り方にどのような影響を及ぼすであろうか。

藤井は,自己の存在の意味は二人称的関係性の中で見出されるとして,「ある特別養護老人ホー ムに毎日来る娘が,『私は母の世話をしに来ているのではない,私にとって母が必要なのだ』とい うのは,娘にとって『あなた』という関係性をもつ母親の存在が生きる上で必要だということを 意味している」と述べている(66)。しかし,まさにそうした二人称的関係が否定的様相を帯びてい る可能性は十分に考えられる。精神分析家の M. ルノーは,「喪の悲しみ」における無意識的罪責 感について次のように説明している。すなわち,「私たちが最も愛した人はまた,私たちの自由を 侵害し,私たちのナルシシズムに制限を加えたことでもって私たちが憎んだ人」である。しかも, そうした「人間の魂の深い両価性」が明らかになるのは「死に近づくとき」に他ならず,「多く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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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情や満足を与えてくれた人が死んで,その人の死が耐えられないような場合,同時にその人は, 無意識においてしばしば『あの人なんかいなくなればいい』と願ってきた人でもある」のである (67)。したがって,思いやりや優しさに満ちた献身的行為の背後に,攻撃性の抑圧や無意識的罪責 感への防衛があることは十分に予想される(68)。また,こうした精神分析的解釈仮説に依らずとも, 両価性や二律背反は心理療法一般において人間の経験を特徴づけるものとして重視されている (69)。グッゲンビュール曰く,「最も高貴な行為も私心のない澄みきった動機と,利己的な暗い動機 の両方に基づいている」(70)。つながりを愛や慈しみとのみ解釈する言説には,そうした矛盾や両 価性に対する認識が欠けており,あらゆる陰性感情を陽性感情の背後に隠蔽してしまう危険性が あるのである。

自律性や将来性の回復,希望や生きる力の増大 「自律性や将来性の回復」や「希望や生きる力の増大」といった目的の下では,喪失や絶望は

基本的に否定的なもの・克服すべきものと見なされている。例えば村田理論では,「死の接近」に よって失われたものを取り戻すこと,或いはその喪失の程度を「最少化」することがケアの目的 とされている(71)。大下の理論でも,スピリチュアルケアによって患者は「より大きく高次な意識 状態を獲得」し,「尊厳性」や「希望」の方向へ成長していくと考えられている(72)。

しかし,自律性や将来性,希望の回復に価値を置くことは,ケアの在り方として本当に適切な のであろうか。心理学者のやまだようこは,「能動性」や「獲得の過程」を重視する心理学理論(発 達理論)は,近代的な工業化と生産優先に強く連動した価値に規定されていると指摘しているが (73),スピリチュアルケアも同様の規定を被ってはいないであろうか。精神分析家の北山修は,「あ きらめ」という心性に関し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彼ら〔西洋人〕はこの『あきらめ』を否定 的にとらえており,キューブラー=ロスの『死ぬ瞬間』でも,人が死ぬときの『あきらめ』に否 定的である。その直線的図式に描かれる死の臨床モデルにおいては,『あきらめ』は敗北であり, 『受容』という指針で主体性の発揮が示される」(74)。北山は,「うつろい」や「はかなさ」に対す る日本的美意識との関連から,「あきらめ」には「敗北」以上の肯定的ニュアンスが含まれている ことを示唆しているが,自律性や将来性の回復という目的は,こうした「あきらめ」と拮抗する ようにも思われる。つまり,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においては,あくまで主体性や獲得の過程に 一義的な価値が置かれているかのようなのである。すると,神谷美恵子の次のような述懐に対し て,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はどのように答えるのであろうか――「そもそも人間は社会に役立た なければ生きている意義がないのであろうか。『自立』や生きがいを感じること,他人から人間と して認められること,が人間の生きる意義に絶対に欠かせない条件なのであろうか。もしそうな らば,この基準からおちこぼれる人は老人に限らず,いくらもありそうだ。心身を病む人びと, 持って生まれた性格や悪い環境のために生きている意味を自分も感じられず,他人も認めにくい 人びとというものは少なからずあるものなのだ」(75)。自律性に一義的な価値を置き,回復可能性 を原理的に前提するケアモデルでは,このような人々の「生きる意義」を見出すことは困難であ ろう。

また,ヒルマンは「個人が『下に降りる』ことを許さない社会は,自分の深みを見出すことが 出来ないので,『成長』という見せかけでごまかしている躁的な気分障害という自我肥大した状態 に常にとどまらざるを得ない」と述べているが(76),希望の増大にはこの「躁的な気分障害」が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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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まれてはいないであろうか。ヒルマンによれば,デプレッション,すなわち凡そ希望とは対蹠的 な「力のなさ」や「重さ」の心的状態こそ,「深み」に至り魂を見出す通路である。希望にばかり 焦点化することは,この通路を閉ざすことにも等しいのである。

苦悩からの解放

「苦悩からの解放」という目的に関しては,常にその程度が問題とされるであろう。V. E. フラ ンクルは,「もしも徹底的に不快が削減されたり,徹底的に苦痛が制圧されるようなことがあれば, つまり,実存的に有意味な苦悩がその背後に秘められている不快や苦痛までもが制圧されるとす れば,それは自己自身を放棄してしまうに等しい」と述べているが(77),苦しみを生に必要なもの・ 除去不可能なものと見なす論者は少なくない。例えば,ユング派の分析家 W. ギーゲリッヒは「心 理療法の課題は困難の除去を求めることに存するのではない。心理療法においては,いかにして 苦しめられている状況を脱するかが問題なのではなく,逆にいかにして本来的に,真に,困難な 状況に入っていくかが課題となる」と述べている(78)。また,緩和ケアを専門とする心理療法家の 岸本寛史は,様々な患者との出会いを回顧して「苦しみを取り除くことではなく,苦しみの窮ま るところに幸福感は訪れる,と教えられたように思う」と述べ,「『幸福感』を目標や目的に設定 するのではなく,苦しみを共にするということをひたすらおこなっていくことが,逆説的ながら, 病うことと『幸福感』をつなぐ道にな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と記している(79)。いずれの主張も, 苦悩からの解放という目的を相対化する視座となり得るであろう。 超越的存在・究極的次元とのつながりの回復

果たして「超越的存在・究極的次元とのつながりの回復」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とし て妥当なのであろうか。精神科医の H. コーニックは,スピリチュアリティ(及び宗教)が患者 とその家族のウェルビーイングに与える否定的影響として,信仰を共有しない他者との間に緊張 や不調和が生じることや,その信仰において要求される美徳を十分に修められずに自己譴責や落 胆が生じること等を挙げている(80)。藤井も,クリスチャンである娘が病気の母親に「イエス・キ リストを信じて天国に行ってほしい」「信じればもっと楽になれる」といった言葉がけをして,信 仰を確立できない母親を精神的に追い詰めてしまうという事例を報告しているが(81),超越的他者 との関係性は,窪寺や大下が想定するように専ら癒しや支えになるものとは限らないのではない か。また,超越的・究極的関心が強化されることで,日常的で現実的な事柄へのまなざしが疎か になるような事態も考えられる。ヒルマンの影響を強く受けているホスピス医 M. カーニィは, 表層 surface すなわち身体的・心理的・社会的な症状にまつわる事柄と,深層 depth すなわち魂 の次元にまつわる事柄との関係性について,表層こそ深層へ至る道であり,魂の次元の経験とは 実のところ,表層的なケア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極めてシンプルで日常的な生活とのつながりに 他ならないと述べている(82)。究極的次元とのつながりの強調は,そうしたいわば表層的次元との つながりの重要さを軽視することになる危険性を秘めているとも言える。 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に含まれる臨床的問題性

以上のように,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を参照すると,そこに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におい て掲げられる目的(規範的認識)とは対照的な目的(規範的認識)が散見される。ここに,(従来 の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のように)ケア対象者がどのような状態にあることが望ましいかを一意 的に定めることの危うさ,及びその危うさを回避するために有用な視座が浮上するのである。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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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学年報 XXXIV

ころで,「対話」と「寄り添い」という 2 つの目的は,ケア対象者に関してどのような状態が望ま しいかという判断を保留しているように思われる。少なくとも,「対話」と「寄り添い」には二者 心理学的な相互作用への視点が含まれており,一方向的な規範的認識を以てケア対象者の状態を 問題化することからは免れているのである。その代わりに,そこではケア提供者の在り方に関し て明確な望ましさが語られている。したがって,次にその望ましさの臨床的な妥当性を問うこと にする。

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目的の臨床的妥当性2

まず,「対話」と「寄り添い」ということで,どのようなケアの在り方が想定されているのかを 改めて描き出してみたい。第一に「対話」であるが,伊藤によれば,スピリチュアルケアとは「対 話型ケア」である。そこではケア提供者からケア対象者への「診断」や「治療」が為されるので はなく,あくまで「存在論的には等価」な二者が対話を通して「新たな場」を創出することが試 みられる(83)。「その他者〔ケア提供者〕との関係性の中で,対話を通して自らの物語を『いまこ こ』で紡ぎ出すことが現代人の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表現」であり,「物語を生きる主人公として の語り手と,その物語によって自らの人生が揺さぶられる聴き手との関係には,ケアの力がある」 のである(84)。したがって,ケア対象者のみならずケア提供者自身も対話の中で大いに影響を受け るのであり,まさにその「自分自身を物語ること」により「聴き手が心を揺らしてくれる」とい う経験に,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本領があるとされる(85)。

一方,藤井の言う「寄り添い」においては,ケア提供者がケア対象者に「何かをする」という 発想が徹底して斥けられる。「何かをする」,或いは「何かができる」という姿勢でケア対象者に 臨むことは,「何もできない自分自身に,なお存在意味を見いだすという重い課題に向き合ってい る」ケア対象者との間に隔たりを生むことにしかならないからである(86)。ケア提供者はむしろ, 自らの限界を受け入れ,「できない」一人の人間としてケア対象者の前に立たなければならない。 「寄り添い」とは「自らの価値観を問われながら,目の前の人をありのままに受け止め,そして 何もできないことを了解したうえで,なおそこに在ること」であり,「専門職者としてではなく, 一人の人間としての課題」なのである(87)。藤井によれば,そうした人が共にいてくれることで, 生きる意味や存在価値に関する「主観的意味づけ」の「大きな助けとなる」という(88)。

いずれの目的においても,ケア提供者自身が自らの心を揺さぶられる,自らの価値観を問い直 される,自らの限界に直面させられる,といった経験に開かれてあること,言い換えれば,専門 職者としての診断的・分析的な態度を括弧に入れ,可能な限り生身の人間として相手と出会うこ とが重視されていると言える。ケア対象者の自己物語の創出や「主観的意味づけ」といった作業 も,生身の人間としての出会い(関係性)を条件として,またそのような出会いを通して促進さ れると考えられているのである。

ところで,こうしたケアモデルは,C. ロジャースが描き出す対人援助関係に近いように思われ る。ロジャースはその論文「セラピーによるパーソナリティ変化の必要にして十分な条件」にお いて,建設的なパーソナリティ変化が起こる 6 つの心理学的条件を掲げているが,中でもセラピ ス ト の 態 度 に 関 し て は 「 一 致 c o n g r u e n c e 」「 無 条 件 の 肯 定 的 関 心 u n c o n d i t i o n a l p o s i t i v e r e g a r d 」 「共感 empathy」の 3 条件を挙げており,それ以外の専門的知識や技法が要求されるとは考え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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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れていない(89)。実際,精神分析で中核的な治療の契機と見なされる転移についても,ロジャース は「クライアント中心の心理臨床家の転移に対する反応は,そのクライアントの他のあらゆる態 度に対する反応と同じである。つまり,心理臨床家は理解して,受け入れようと努めるのである」 と述べ,分析的解釈の必要性を否定している(90)。ロジャースによれば,「セラピストが職業上の建 前や個人的な仮面をまとわず,その関係のなかで自分自身であればあるほど,それだけクライエ ントが建設的に変化し,成長する可能性が高くなる」のであり,さらにはそうして自己の内面に 接近したセラピストが「そこに存在している presence」というだけで,「クライエントにとって 解放的であり,援助的になっている」というのである(91)。これは,「対話」及び「寄り添い」が志 向するケアモデルと極めて類似したものであると言える。

しかし,我が国における心理療法・精神療法の歴史を振り返るとき,そこにはロジャース派の 著しい退潮が見受けられる。安村直己によれば,ロジャース派は「精神発達や症状形成,精神病 理のメカニズムなどを力動的に説明することをほとんど」せず,また,「セラピストが自分を無に してクライエントの言葉をただひたすら受け入れ,オウム返しを繰り返していればいいという, 極端に受動的で,素人でもできるようなセラピーだといった批判を招」いたため,「自分はロジャ ース派であると専門家の集まりの中で公言することがはばかられるような雰囲気まで」生じたの である(92)。このセラピスト(ケア提供者)の受動性・素人性に関する批判をより詳しく見るなら ば,例えば氏原寛は,ロジャース派のカウンセラーはクライエントを「ありのままに」理解しよ うとし過ぎ,クライエントに迎合的で,クライエントの承認と好意に繋がるような受け答えしか できなくなる傾向があると指摘している(93)。また,河合隼雄はロジャース派の受容という言葉に ついて,西洋では「カウンセラーの自我を崩すことがないことを自明のこととしている」のに対 し,日本では「カウンセラーの自我を崩してまで」クライエントを受容することが志向され,そ うした極端化された理想的受容の困難さを前に,結局はオウム返しのような形式的受け応えに堕 してしまうセラピストが多いと記している(94)。或いは木村敏は,ロジャース派(人間学派)にお ける診断の軽視は「基本的に誤り」であるとし,「治療が表面的な対症療法の限界をいくらかでも 超えて,病める人生そのものに眼を向けようとするならば,その病態の本質がどこにあるかにつ いての洞察と,そこから必然的に出てくる診断行為は,不可避の医学的な営みとなる」と主張し ている(95)。これらの批判をまとめると,ロジャース派のケアモデルはケア対象者やケア状況を理 解(診断)する理論的枠組みを欠いており,またそれを一因として,ロジャース派のカウンセラ ーは専ら受容する・共感するなどの受動的・追従的な態度に留まりがちになる,ということにな ろう。

心理療法・精神療法の領野では,こうしたロジャース批判を経て,診断及びその枠組み=理論 の重要性が改めて説かれるようになる。中でも土居健郎による「見立て」論は,その後の心理療 法・精神療法の診断観に最も影響を及ぼしたものの一つである。土居によれば,本来,診断とは 治療行為と地続きであるはずなのに,実態としては単なる病的現象の分類やレッテル貼りに陥っ ている。そうした状況を脱するために,診断と治療を繋ぐような概念的枠組み=「見立て」が想 定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土居の定義に従えば,「見立て」には次の 4 つの特徴が認められる。第 一に,「見立て」は診断であると同時に,治療的働きを持つ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第二に,「見 立て」の「もっとも本質的な部分」として,患者について「何が分かっていて何が分からな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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の区別をつけるという営みがある。第三に,「見立てる」ことの内には,専門家と患者の関係性の 評価が必然的に含まれてくる。そして第四に,「見立て」は「終始止むことなく」継続的に行われ る必要がある(96)。

ここで留意すべきは,こうした「見立て」の諸特徴のうち,「もっとも本質的な部分」は「分か っていることと分からないことの区別」である,とされている点である。土居は次のように述べ ている。「自然に起きる『わからない』感覚だけではなく,面接においては更に判断を積極的に停 止することにより,『わからない』感覚を涵養することも必要である」(97),或いは「精神科的面接 の勘所は,どうやってこの『わからない』という感覚を獲得できるかということにかかっている」 (98)。つまり,「見立て」とは「わかる」営みではなく,あくまでもケア対象者のことがいかに「わ からない」かを意識化する逆説的な営みなのである。

また,河合は「見立て」における専門家と患者の関係性の評価について,次のように論じてい る。すなわち,「見立て」とは常に「治療者とクライエントの間の人間関係」をその内に含み込み, 「治療者の主観的関与」を通して行われる。それゆえ,「見立てをするには,科学的診断と異なり, 治療者が自分自身のことをどれだけ知っているかが,大きい要因になってくる」(99)。さらに河合 は,「心理療法を行なうということは,自分が関与することによって,何らかの意味ある結果が得 られるだろうという『見立て』があってのことであるし,そこには,自分がコミットしてゆくと いう決意があるはずである」と述べている(100)。同様に氏原も,「見立てには,この人をクライエ ントとして引き受けることに意味があるのか,というカウンセラーのもっぱら主観的な吟味が含 まれ」るとし,「診断的には絶望的な人」にも「働きかけの可能性」を見ようとすること,究極的 には「明日のなくなった人たちと会うこと」に意味を見出そうとすることが,「見立て」であると 述べている(101)。つまり,「見立て」とはケア提供者の主観的な意味付けないし主体的な参与を不 可欠とするものなのである。

さらに,「見立て」についてしばしば指摘されることに,そのまなざしの双方向性が挙げられる。 ここで言う双方向性とは,「見立て」がケア提供者の側からだけではなく,ケア対象者の側からも 為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指す(102)。例えば岸本は,「一方向的な,つまり治療者が患者のことを 見立てるような関係ではなく,『相互見立て』の関係にあることを認識しておく必要がある」と主 張している(103)。青木省三もまた,(「見立て」という用語を用いてはいないものの)「クライエン トも常に治療者を見て,治療者という人間がどのような人間であるかをアセスメントしようとし ているのを忘れてはならない。......その際のクライエントの観察力とアセスメント能力は,しば しば治療者を上まわることがある」と記している(104)。

以上のように,心理療法・精神療法においては,「わからなさ」の意識化やケア提供者の主体的 意味付け,或いはまなざしの双方向性等といった様々な要素を「見立て」概念に組み込むことで, 診断的な営みが単なる分類やレッテル貼りに陥る危険性を回避しようとする努力が為されている。 それは他方で,診断的営みを排除し,専ら実存的出会いを志向するロジャース派の診断不要論の 乗り越えとも言えるのである。こうした一連の議論を踏まえるならば,「対話」と「寄り添い」は, ロジャース批判や「見立て」論の展開を顧みないまま,いくぶん素朴にロジャース回帰を目指し ているようにも見えてくる。もちろん,伊藤にせよ藤井にせよ,あくまで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 一義的な役割としてロジャース的な対人援助関係を措定しているのであり,決して診断不要論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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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唱えているわけではない。しかし,藤井が「究極的な苦しみに向き合うとき,専門職者に求めら れるのは,専門職者としての自分自身を手放し,一人の人間としてただその傍らに寄り添うこと なのである」と言い(105),伊藤が「診断型ケア」と「対話型ケア」を「全く次元の異なるケア」と して位置付けるとき(106),そこでは診断的まなざしと実存的出会いとが切り離され,一見相反する 両者をいかに繋げるかという「見立て」論的な視座が捨象されている。言い換えれば,伊藤・藤 井の議論で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における実存的出会いの優位性が強調されるばかりで,診断 的まなざしと実存的出会いとの密接不可分な「絡み合い」(成田善弘)については言及がないので ある(107)。すると,ここに再びロジャース批判と同様の批判――診断的まなざしを欠いてはケア対 象者を理解するのに不足が生じ,またケア提供者が自らの主体性を発揮することが困難になるの ではないか,との批判――が浮上せざるを得ない。畢竟,「対話」や「寄り添い」を目的に掲げる ケアモデルは,診断的まなざしと実存的出会いの相互内在的な関係付け,或いは診断的まなざし の(「見立て」論的な)捉え直しによって補償されない限り,必ずしも臨床的妥当性を担保できな い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

本節の最後に,精神分析家の松木邦裕の次の指摘を引いておきたい。松木によれば,精神分析 における諸々の専門的技法は「ややもすると万能感や人間らしさ,人間性という便利なことばで 処理したくなる対人援助職にいる私たちの無意識の願望充足的発想,たとえば,不幸から救い出 したい,よい体験をさせたい,よい臨床家と思われたい,早く治したい等々を戒めるものでもあ る」(108)。スピリチュアルケアにおける実存的出会いの探求に,どれほどケア提供者側の「無意識 の願望充足的発想」が含まれているかは定かではない。しかし,少なくともその可能性を懸念し 続けることが(「戒め」となる諸々の技法が存在しないだけに一層)必要なのではないであろうか。

5.おわりに

ここまで本論文では,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を引き合いに出しつつ,スピリチュアルケア の目的の臨床的妥当性について検討してきた。その結果,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多 くが一意的な「望ましい状態」の実現を目的として掲げており,かつその望ましさを自明化して しまう傾向があることが認められた。また,「対話」や「寄り添い」といった目的に関しては,実 存的出会いと診断的まなざしの連続性・相補性に関する理論が欠落しているという点が明らかに なった。

しかし,そうした問題点を省み,規範的認識の相対性や,実存的出会いと診断的眼差しの連続 性・相補性を組み込んだケアの目的を掲げようとすること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営みを葛藤 に満ちた状況に追い込むように思われる。というのも,ケア対象者にとって何が望ましいのかを 一意的に定め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ケア提供者自身,自らの関わり方を方向付けたり評価した りする基準や指標を定められないからである。また,「対話」と「診断」,「一人の人間」と「専門 職者」の双方の役割を同時的に引き受けようとすることは,小此木啓吾が言う「フロイト的態度」 と「フェレンツィ的態度」の間で引き裂かれてあることにも等しい(109)。すると,ケアの在り方が 極端に消極的なものと化したり,限りなく微妙で言語化不可能な営みとして神聖化されたりする 可能性も浮上する。だからこそ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臨床的役割を可視化するようなケアモデル の構築が必要であるとも言えようが,いずれにせよ,ここでは上述した問題が現在のケアモデ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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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学年報 XXXIV

には認められるということを指摘するに留めておく。或いは,1ケア対象者を特定の望ましい状 態に囲い込もうとせず,かつ2ケア提供者が諸々の規範的態度(実存的出会いと診断的まなざし) の間で引き裂かれることを回避しようとしない,という否定的な要件を満たすことが,より臨床 的に妥当なケアモデル(ケアの目的)の在り方なのかもしれない。しかし,この点には事例研究 や他の様々なケアモデルの参照を踏まえたより綿密な考証が求められるであろう。

(1) C. ソンダース,M. ベインズ(武田文和訳)『死に向かって生きる――末期癌患者のケア・ プログラム』医学書院,1990 年,59 頁。

(2) 我が国では 1980 年代に全国各地に施設ホスピスが設立され,1990 年代に緩和ケア病棟が 医療保険制度に組み込まれている。また,2006 年の「がん対策基本法」制定以降,緩和ケ アの急􏰁な拡充が図られている。さらに 2012 年には,日本スピリチュアルケア学会により 「スピリチュアルケア師」資格が創設され,スピリチュアルケアそのものの制度化も推進 されている。

(3) 実際,臨床スピリチュアルケア協会や日本スピリチュアルケア学会は,いずれも臨床牧会 教育委員会(Association for Clinical Pastoral Education)の提供するプログラムに準拠 してスピリチュアルケア専門職の養成を試みている。

(4) 市野川容孝『身体/生命』岩波書店,2000 年,47 頁。

(5) 神谷綾子「スピリチュアルケアということ」(カール・ベッカー編著『生と死のケアを考え

る』法蔵館,2000 年),243 頁。辻内琢也「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残照」(湯浅泰雄・春木 豊・田中朱美監修『科学と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時代――身体・気・スピリチュアリティ』 ビイング・ネット・プレス,2005 年),53 頁。

(6) 安藤泰至「『病いの知』の可能性――プロフェッショナリズムを超えて」(『医学哲学医学倫 理』第 23 巻,2005 年),76‐79 頁。

(7) 安藤泰至「現代の医療とスピリチュアリティ――生の全体性への志向と生の断片化への流 れとのはざまで」(国際宗教研究所編『現代宗教 2003』東京堂出版,2003 年),75 頁。

(8) 同上,78 頁。

(9) 安藤泰至「現代医療文化における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位相 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医療

化を批判しながら」(樫尾直樹編『文化と霊性』慶應義塾大学出版会,2012 年),71 頁。

(10) 同上,75 頁。

(11) こうした状況は,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担い手の大部分が医療従事者であること(谷田憲 俊『患者・家族の緩和ケアを支援す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初診から悲嘆まで』(診断と 治療社,2008 年),112 頁),及び,村田久行のケアモデルが医療従事者の間で広く受容さ れていること(和田信「痛み」(『臨床精神医学』第 44 巻第 5 号,2015 年),755 頁)によ ってもたらされている。本論にて詳述するように,村田の理論は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を 取り除くことに焦点化されたものなのである。

(12) 窪寺俊之『スピリチュアルケア学概説』三輪書店,2008 年,58 頁。 - 190 -


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13) 窪寺俊之「スピリチュアルケア」(石居基夫編著『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とそのケア』キリ スト新聞社,2015 年),99 頁。

(14) 窪寺俊之『スピリチュアルケア学概説』三輪書店,2008 年,62 頁。

(15) 窪寺によれば,超越的存在との関係こそが「わたしの人生の土台となってわたしを支え, あるいはわたしの生存の枠組みとなって生を意味づけし,人生を方向づけする価値観を作

っている」という(同上,23 頁)。

(16) 谷山洋三「仏教を基調とした日本的スピリチュアルケア論」(谷山洋三編著『仏教とスピリ

チュアルケア』東方出版,2008 年),23 頁。

(17) 具体的には,1人:家族,親戚,友人,2去:過去の自分,人生の結果,3今:現在の自分,

本当の自分,4来:未来の自分,人生の課題,5事:環境,芸術,活動,6理:宇宙の真理, 自然の摂理,7神:神,仏,霊,来世,8祖:先祖,亡くなった家族・近親者・友人,とい う 8 つの要素が挙げられている(同上,25‐26 頁)。

(18) 同上,24 頁。

(19) 村田久行「終末期患者の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構􏰀解明への現象学的アプローチ」(『京都

ノートルダム女子大学研究紀要』第 35 巻,2005 年),128‐129 頁。

(20) 同上,129 頁。

(21) 同上,129 頁。

(22) 村田久行「終末期患者のスピリチュアルペインとそのケア――現象学的アプローチによる

解明」(『緩和ケア』第 15 巻第 5 号,2005 年),389 頁。

(23) 同上,389‐390 頁。

(24) 同上,390 頁。

(25) 大下大圓編著『実践的スピリチュアルケア――ナースの生き方を変える“自利利他”のこ

ころ ナースの潜在力を高める/看護ケアに活かせる』(日本看護協会出版会,2014 年),

14 頁。

(26) 同上,57 頁。

(27) 岡本拓也『誰も教えてくれなかったスピリチュアルケア』医学書院,2014 年,153 頁。

(28) 同上,177 頁。

(29) 同上,177 頁。

(30) 谷田憲俊・大下大圓・伊藤高章編『対話・コミュニケーションから学ぶスピリチュアルケ

ア――ことばと物語からの実践』診断と治療社,2011 年,5 頁。

(31) 同上,9 頁。

(32) 小西達也「グリーフケアの基盤としてのスピリチュアルケア」(高木慶子編著『グリーフケ ア入門――悲嘆のさなかにある人を支える』勁草書房,2012 年),94 頁。

(33) 同上,94‐98 頁。

(34) 同上,101‐110 頁。

(35) 伊藤高章「スピリチュアリティと宗教の関係 スピリチュアルケアにおけるキリスト教的

シンボルの役割」(谷山洋三・伊藤高章・窪寺俊之『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語る――ホスピ ス,ビハーラの臨床から』関西学院大学出版会,2004 年),50‐53 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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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学年報 XXXIV

(36) 伊藤高章「チーム医療におけ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窪寺俊之・平林孝裕編著『スピリチ ュアルケアを語る 続――医療・看護・介護・福祉への新しい視点』関西学院大学出版会, 2009 年),51 頁。

(37) 伊藤高章「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三次元的構築」(鎌田東二企画・編『講座スピリチュアル 学 第1巻 スピリチュアルケア』ビイング・ネット・プレス,2014年),20‐21頁。

(38) 同上,34 頁。

(39) 同上,35 頁。

(40) 同上,36 頁。

(41) 谷田憲俊・大下大圓・伊藤高章編『対話・コミュニケーションから学ぶスピリチュアルケ

ア――ことばと物語からの実践』診断と治療社,2011 年,31 頁。

(42) 藤井美和『死生学と QOL』関西学院大学出版会,2015 年,189 頁。

(43) 同上,190 頁。

(44) 同上,191 頁。

(45) 同上,192 頁。

(46) 同上,193 頁。

(47) 同上,193 頁。

(48) ユングにとって,「自己」とは意識と無意識の両者を含む心の全周,すなわち決して十全に

意識化することは叶わないような「人生の目標」としての完全性・統合性を指す(C. G. ユ ング著・A. ヤッフェ編(河合隼雄・藤繩昭・出井淑子訳)『ユング自伝――思い出・夢・思 想 2』みすず書房,1973 年,271‐272 頁)。

(49) D. W. ウィニコット(牛島定信監訳・倉ひろ子訳)『ウィニコット著作集 8 精神分析的探 究 3 (子どもと青年期の治療相談)』岩崎学術出版社,1998 年,186‐187 頁。

(50) D. W. ウィニコット(橋本雅雄訳)『遊ぶことと現実』岩崎学術出版社,1979 年,91 頁。 ここで言う創􏰀性とは,乳児の抱く万能感に由来する普遍的な感覚を指している。具体的 には,乳児は乳房を欲すると,母親によってその欲求を感じ取られ,乳房を差し出される。 乳児はまさに今欲しているという状態で乳房を与えられるので,自らそれを創􏰀したと錯 覚する。つまり,「母親の共感的反応が乳児に万能感を体験させ」,また「乳児は満足の体験 を創􏰀する魔術的能力を感じ」るのである(S. A. グロールニック(野中猛・渡辺智英夫訳) 『ウィニコット著作集 別巻 2 ウィニコット入門』岩崎学術出版社,1998 年,90 頁)。 やがて外的現実と内的現実の区別がつくようになるにつれ,乳児はこの万能感が錯覚であ ることに気づいてゆくわけであるが,いずれにせよウィニコットの言う創􏰀性とは「赤ち ゃんの体験に帰属する生活を通して保持されるもの」,すなわち早期発達の段階の,かつて 乳房を創􏰀したという感覚に由来する錯覚の自由を持ち続けることなのである(D. W. ウ ィニコット(牛島定信監修・井原成男・上別府圭子・斉藤和恵訳)『ウィニコット著作集 3 家庭から社会へ』岩崎学術出版社,1999 年,28 頁)。

(51) D. W. ウィニコット(橋本雅雄訳)『遊ぶことと現実』岩崎学術出版社,1979 年,4 頁。

(52) 同上,66 頁。

(53) J. ヒルマン(入江良平訳)『魂の心理学』青土社,1997 年,318‐319 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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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54) 同上,318 頁。

(55) J. ヒルマン(河合俊雄訳)『元型的心理学』青土社,1993 年,92 頁。

(56) 魂を特定の中心へと収斂させないということは,言い換えれば,魂に関して発達段階を想

定し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河合俊雄によれば,「ヒルマンは心理療法と宗教の違いを魂 (soul)と精神(spirit)の区別として捉えていく。魂が超越を求めず,同じ所に繰り返し 立ち帰ってそれを深めようとするのに対して,精神は超越を求めて高く舞い上がり,ゴー ルを目指そうとする。究極の目標があるからこそ,目標への直線的な動きや,発達の段階 という考え方も生じてくるのである。しかし魂の立場からすると究極の目標はないので, 発達の段階というものも存在しない。それゆえに元型的心理学は発達的見方に反対する」 (同上,178 頁)。

(57) A.グッゲンビュール・クレイグ(山中康裕監訳)『老愚者考――現代の神話についての考 察』新曜社,2007 年,78‐82 頁。

(58) 同上,105 頁。

(59) 同上,109‐127 頁。

(60) 窪寺俊之『スピリチュアルケア学概説』三輪書店,2008 年,62 頁。

(61) 例えば岡部健は,次のような事例を報告している。「T さんは当時,結核手術後の慢性呼吸

不全のなかで肺炎を患っていた。私〔岡部〕は痰を出すために気管を切開し,人工呼吸器管 を挿入したままの状態で,自宅でも痰を吸引できるようにした。......しかし二年余り経っ たある日,T さんは『もういい』と言った。若くて頑張っているあんたをみて,我慢しなが ら治療を受けてきた。しかし,もう治療は望まない。自分の結核はシベリア抑留時代以来 のもので,友人はみなシベリアで死んだ。友人たちとはあの世にいかなければ会えない。 それをわかってくれ。この状態では家族に迷惑をかけるだけで,自分に生きている意味は ない。しかし自殺は抵抗がある。だから挿入した管を外して自然に逝かせてくれ。T さんは そう私に訴えた」(岡部健・竹之内裕文編・清水哲郎監修『どう生きどう死ぬか――現場か ら考える死生学』弓箭書院,2009 年,18 頁)。生きる意味とは必ずしも死ぬ意味と異なら 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問いさえも喚起されるような局面である。

(62) S. グロフ(吉福伸逸・星川淳・菅靖彦訳)『脳を超えて』春秋社,1988 年,242 頁。

(63) J. ヒルマン(樋口和彦・武田憲道訳)『自殺と魂』創元社,1982 年,16 頁。

(64) 同上,34 頁。

(65) 谷山洋三「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構􏰀 窪寺理論に日本の仏教者の視点を加える」(窪寺俊

之・平林孝裕編著『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語る 続――医療・看護・介護・福祉への新しい 視点』関西学院大学出版会,2009 年),88 頁。また,井上ウィマラは,スピリチュアルケ アを受けると「自分を赦し,他者を赦す」「『ありがとう』と感謝の言葉を伝える」「『愛して いるよ』『大好きだよ』という思いを伝える」といった「人生で大切な仕事」を行うことが できると述べている(井上ウィマラ「終末医療におけ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可能性」 (中央学術研究所編『宗教と終末医療』佼成出版社,2009 年),92‐93 頁)。いずれの「仕 事」も一見して著しく道徳主義的である。

(66) 藤井美和「生命倫理とスピリチュアリティ 死生学の視点から」(窪寺俊之他編著『生命倫 - 193 -


宗教学年報 XXXIV

理における宗教とスピリチュアリティ』晃洋書房,2010 年),19 頁。

(67) M.ルノー(加藤誠訳)『緩和ケア――精神分析になにができるか』岩波書店,2004年,26‐

27 頁。

(68) 同上,27‐28 頁。

(69) 桑原知子『カウンセリングで何がおこっているのか――動詞でひもとく心理臨床』日本評

論社,2010 年,5 頁。

(70) A.グーゲンヴィル=クレイグ(樋口和彦・安溪真一訳)『心理療法の光と影――援助専門

家の〈力〉』創元社,1981 年,17 頁。

(71) 田村恵子・河正子・森田達也編『看護に活かす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手引き』青海社,2012

年,41‐42 頁。

(72) 大下大圓編著『実践的スピリチュアルケア――ナースの生き方を変える“自利利他”のこ

ころ ナースの潜在力を高める/看護ケアに活かせる』日本看護協会出版会,2014年,57

頁。

(73) やまだようこ「生涯発達をとらえるモデル」(無藤隆・やまだようこ編『講座生涯発達心理

学1 生涯発達心理学とは何か――理論と方法』金子書房,1995年),74‐91頁。

(74) 北山修『幻滅論』みすず書房,2012 年,142 頁。

(75) 神谷美恵子『ケアへのまなざし』みすず書房,2013 年,76‐77 頁。

(76) J. ヒルマン(河合俊雄訳)『元型的心理学』青土社,1993 年,77 頁。

(77) V. E. フランクル(山田邦男・松田美佳訳)『苦悩する人間』春秋社,2004 年,24 頁。

(78) W. ギーゲリッヒ(河合俊雄訳)「子どもの救助あるいは時間の横領――意味への問いにつ

いて」(『思想』第 759 号,1987 年),32 頁。

(79) 岸本寛史『緩和ケアという物語――正しい説明という暴力』創元社,2015 年,139 頁。

(80) Harold G. Koenig, Spirituality in Patient Care: Why, How, When, and What (West

Conshohocken, Templeton Press, 2002), pp. 136-137.

(81) 藤井理恵・藤井美和『たましいのケア――病む人のかたわらに』いのちのことば社,2000

年,58‐59 頁。

(82) Michael Kearney, Mortally Wounded: Stories of Soul Pain, Death and Healing (New

Orleans, Spring Journal, 2007), p. 48.

(83) 谷田憲俊・大下大圓・伊藤高章編『対話・コミュニケーションから学ぶスピリチュアルケ

ア――ことばと物語からの実践』診断と治療社,2011 年,31 頁。

(84) 伊藤高章「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三次元的構築」(鎌田東二企画・編『講座スピリチュアル

学 第1巻 スピリチュアルケア』ビイング・ネット・プレス,2014年),35頁。

(85) 同上,37 頁。

(86) 藤井美和『死生学と QOL』関西学院大学出版会,2015 年,190 頁。

(87) 同上,193‐194 頁。

(88) 同上,194 頁。

(89) ロジャーズ著・H. カーシェンバウム,V. L. ヘンダーソン編(伊東博・村山正治監訳)『ロ

ジャーズ選集――カウンセラーなら一度は読んでおきたい厳選 33 論文 上』誠信書房, - 194 -


スピリチュアルケアのケアモデルの検討 ―心理療法・精神療法の知見から―

2001年,267頁。一致とは「自由にかつ深く自己自身であり,現実に経験していることが, 自己自身の気づきとして正確に表現され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り,無条 件の肯定的関心とは「セラピストがクライエントの経験しているあらゆる局面を,そのク ライエントの一部として温かく受容しているという経験をしている」ことである。また, 共感とは「クライエントの私的世界をそれが自分自身の世界であるかのように感じとり, しかも『あたかも......のごとく』という性質(‟as if” quality)をけっして失わない」こと である(同上,270‐274 頁)。

(90) C. ロジャーズ(保坂亨・諸富祥彦・末武康弘共訳)『クライアント中心療法』岩崎学術出版 社,2005 年,200 頁。

(91) ロジャーズ著・H. カーシェンバウム,V. L. ヘンダーソン編(伊東博・村山正治監訳)『ロ ジャーズ選集――カウンセラーなら一度は読んでおきたい厳選 33 論文 上』誠信書房, 2001 年,165 頁。

(92) 安村直己『共感と自己愛の心理臨床――コフート理論から現代自己心理学まで』創元社, 2016 年,88 頁。

(93) 氏原寛『カウンセラーは何をするのか――その能動性と受動性』創元社,2002 年,133‐ 137 頁。

(94) 河合隼雄「日本における心理療法の発展とロージャズ理論の意義」(『現代のエスプリ』374 号,1998 年),183‐184 頁。

(95) 木村敏『木村敏著作集 5 精神医学論文集』弘文堂,2001 年,342‐343 頁。

(96) 土居健郎『「甘え」理論と精神分析療法』金剛出版,1997 年,174‐176 頁。

(97) 土居健郎『新訂 方法としての面接――臨床家のために』医学書院,1992 年,35 頁。

(98) 同上,29 頁。

(99) 河合隼雄『臨床心理学ノート』金剛出版,2003 年,17‐19 頁。

(100) 同上,18 頁。

(101) 氏原寛「心理臨床の立場から」(氏原寛・成田善弘共編『臨床心理学2 診断と見立て――

心理アセスメント』培風館,2000 年),18‐19 頁。

(102) 李敏子『ファーストステップ心理的援助――子どものプレイセラピーから思春期の面接ま

で』創元社,2011 年,30 頁。

(103) 岸本寛史『緩和のこころ――癌患者への心理的援助のために』誠信書房,2004 年,113 頁。

(104) 青木省三「初回面接で必要な精神医学的知識」(『臨床心理学』第 1 巻第 3 号,2001 年),

309 頁。

(105) 藤井美和『死生学と QOL』関西学院大学出版会,2015 年,191 頁。

(106) 伊藤高章「チーム医療におけるスピリチュアルケア」(窪寺俊之・平林孝裕編著『スピリチ

ュアルケアを語る 続――医療・看護・介護・福祉への新しい視点』関西学院大学出版会,

2009 年),55 頁。

(107) 精神療法家の成田善弘は,境界性パーソナリティ障害の患者との面接を通して,患者が求

める「人間と人間としての関係」(実存的出会い)と「医者と患者の関係」(診断的まなざ し)との「二重の関係」の絡み合いを生き延びることが治療者の役割なのではないか,と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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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学年報 XXXIV

考察を展開している(成田善弘『精神療法の深さ――成田善弘セレクション』金剛出版,

2012 年,114‐117 頁)。

(108) 松木邦裕『精神分析臨床家の流儀』金剛出版,2010 年,23‐24 頁。

(109) 小此木によれば,フロイト的態度とは「禁欲規則 abstinence rule」「分析の隠れ身 analytic

incognito」「中立性」「受け身性」「医師としての分別」等に依拠する知性優位・合理主義的 な態度であり,フェレンツィ的態度とは「柔軟性」「人間的な情緒交流」「愛情のこもった働 きかけ」等を重視する情緒的で人間的な態度である(小此木啓吾「フロイト対フェレンツ ィの流れ」(『精神分析研究』第 44 巻第 1 号,2000 年),28‐29 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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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ハーラ僧は、来ないで! | セクシーバディのためのダンシングD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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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라 승려는 오지 마!
2012-11-27

테마:비하라
계속해서 병원과 복지시설에서 활동

비하라 스님의 화제입니다.

상당히, 용기가 있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땀)



요 전날 말기 암 환자를 방문했던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노인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거나,

사교 사령을 말하거나하는 것이 능숙합니다.


노인은 특히 보씨에게 경의를 가지고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오는 사람에게는

"잘 와주었다. 보씨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와줘."

라고 말합니다.

비록, 사실은 스님의 방문이 싫어도, 어른이기 때문에,

그런 태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대로 받고, 그 스님은,
말기암 환자에게 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여행 준비에 들어갈 때,
가족분으로부터, 「오는 것은 삼가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해졌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지금까지 그 노인과 관계가 쌓여 왔습니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족이 종교를 싫어해 오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에,

본인은, 이미 말기이기 때문에, 만나러 가는 편이 좋은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니,
정말 오지 마세요! ! !

사교 사령으로, 노인은 「와 주어서 좋았다」라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보 씨가 돌아온 후에는 느긋하게 잠들었다고 합니다.

말기 암 쪽이, 없는 체력을 휘두르고, 아빠에게 실례가 없도록 하면,

필사적으로 된 노인이 계셨습니다.
본인의 성격으로부터 하면, 스님에게 직접,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이 본인의 딱딱한 표정을 살펴보고,
본인 대신에, "이제 오는 것은 삼가 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인은 매우 매너가 제대로되어 있습니다.
그 노인과 좋은 관계가 쌓여 있다는 것은
그냥 승려의 추억입니다.


어떤 비하라 연수에 참가했을 때,
스님의 모습을 하고 병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죽거나 살아가는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 속에 들어가는데,

복장이 어떠한지 고민하는 시점에서

상대의 느낌을 모르고,

상대는 옷차림을 신경 쓸 여유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감염증 대책 때문에 병원 직원조차도

환자 1명과 접할 때마다 갈아입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소독액에 담그지 못한 스님의 옷을 입고 가는 시점에서,

의료 현장에 들어갈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잠깐 말했다.

매우 실례했습니다.


의료나 복지의 현장에서는, 인손 부족입니다.
스님 앞에 직원을 늘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현장의 비명입니다.


개호 시설에서 법화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던 스님이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성가신가요?









법화가 행해지는 장소에, 노인을 데리고 가는 것은,

개호 직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회장으로 데려갑니다.

안에서는, 침대 그대로라든지.

또한, 법화 시간은 직원이 깨끗합니다.


개호 직원의 협력이 있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왔기 때문에 법화가 생겼다고 위로부터 시선.


개호 시설에서의 법화에, 무엇인가 의미는 있습니까

노인은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법화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편안한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서도,
법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의사나 간호사, 개호 직원이 할 수 없는 영적 케어를 하고 있으면
자신감이 있는 것 같지만,
의사가 환자의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의료 및 복지 직원은 전문입니다.
스님이 없어도, 제대로 환자님이나 이용자님의 케어는 할 수 있습니다.

환자와 의료 스탭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말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나쁘지만, 우리는 그리 무능하지 않습니다!
핥는 것도 좋은 가감으로 해주세요!
라고 또 말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스님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직업은, 「무직」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스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빠의 모습은 하지 않고, 병원이나 개호 시설을 방문해도,

Bo-san은 Bo-san이 아닙니까?



살거나 죽을까 싸우는 사람은 옷차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진실을 파악하고 싶다.


현장을 보면, 의료나 복지의 현장에 스님이 필요한지 어떤지를
논의할 여유도 없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인적 부족이므로, 개호 직원으로서도, 청소의 자원봉사로서도

일해 주신 분이, 아직 좋은 것이 아닐까요.




생각했을 때, 어쩌면 인간의 생각은 옳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승려는 사람을 돕는 힘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병원에 옷을 입고 가고 싶다.
이것은 당신의 제멋대로입니다.


상근의 비하라 승려가 있는 병원에서, 직원에게 앙케이트가 취해졌다고 합니다.
결과가 비하라 승려에게 전해질 정도로 알기 때문에,
아무리 익명이라도 본심은 쓸 수 없습니다.

환자도, 직원도, 병원의 경영 모체와 같은 종교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별이 있다고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보씨의 모습으로, 걷지 마라!


환자도 신세를지고 있다는 틈이 있고,
잘 해줘야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개종을 제기하거나,

립 서비스를 하거나.


환자에게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가.

환자에게 전화하면 옷을 입고 승려로 환자를

방문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옷을 입은 스님이 상근이라는 것은,

환자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곤란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 앞에서는, 누가 개호 직원으로, 누가 스님인가라는 구별도 중요하지 않고,

모두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좋지 않아?

그렇게 복장이나 직업을 고집하지 말고.







해외에서도입니다만, 일본에서도, 원래, 의료나 복지라고 하는 것은,

사원과 교회에서 열렸다는 역사가 있으며,

비하라 활동이라는 것은 근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병원, 유치원, 학교, 개호 시설 등을 종교 법인이 경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조차, 병원이나 개호 시설에서, 종교라든가, 승려라든지, 의식하는 것은 아니고,

의식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부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승려의 역할은 병원에도 개호시설에도 없고 절에 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곤란했을 때, 언제나 갈 수 있는 절이 있는, 

병원에 부르면 언제든지 오는 승려가 있는데,

그 존재를 알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며,

이미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승려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안심하고,

안심을 제공하는 것이 절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멋지게 해도 내용은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 보주는 보주, 그래서, 좋지 않아?









승려도 병원이나 시설에서는 특별하지 않고 모두와 함께.

모두와 같다.











다양한 비하라의 형태가 있다, 보다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오케이.

아무도 정답.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서나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합니다.













나에게 비하라 활동은 교리 실천을 위한 활동의 ​​일부라는 인식이다.

포교 활동이 아닙니다.







법화는 하지 않아도 될까요?

옷도 필요 없어?













교리에 감동하는 것은 매우 꽤.

감동하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리에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면 좋을까요?













종교는 '나만 혼자를 위한' 것.

당신의 진실은? 뭐라고?













의료나 복지의 현장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논하는 시간이 있으면,

일찍 오세요!

함께 땀을 흘리자!













병원에 스님이 필요하다고 사회에 호소하고 싶은 마음은,

스님 여러분도 자신을 필요로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범주도 절에서 혼자서 녹슬어요.

절이 필요 없다고 말해, 녹슬고, 필요하다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자매라면, 자신의 존재, 자신의 필요성은 스스로 생각해라!

병원에 필요한지, 스스로 생각해라!















병원에서의 활동을 보고하고 있는 스님이,

스님을 받아들이는 병원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스스로 승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승려의 일은 장례식뿐만 아니라,

장례식 불교라고 불리지만, 경은 장례식 때만 읽는 것이 아니라,

경도도 승려도, 연기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옷을 입고 활동을 계속하면 언젠가 알 수 있을까?













그럼 사회의 이해가 부족할 뿐이라고 말하는 거야?

즉, 당신이 옳고, 사회의 사람이 잘못,

편견이다, 라고도 말하고 싶습니까?













확실히 말해, 스님을 받아들이는 병원이 늘어난다는 발언이,

위에서 시선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옳다, 모두는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모두는 알 것이다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원래, 나도, 스님 여러분과 같은, 「범부」입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맞는지 잘못되어 있는지는 모르고,
비록 알았더라도,
잘못한 것만 해 버리는 것이 「나」입니다.


스님 여러분도 같은 목적을 향해 걷는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꽤 지나친 발언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동료로서의 발언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례했습니다!







합장
===
ビハーラ僧は、来ないで!
2012-11-27

テーマ:ビハーラ
引き続き、病院や福祉施設で活動する

ビハーラ僧の話題です。

結構、勇気がいる発言をしております・・・。(汗)







先日は、末期がんの患者さんを訪問していた僧侶の方の話を聞いたのですが、

お年寄りは、他人の気持ちを考えたり、

社交辞令を言ったりするのが上手です。







年寄りは、特に坊さんに対して敬意を持っている人がいるので、

来る人には、

「よく来てくれた。坊さんと話ができて良かった。また来てくれ。」

と言います。

例え、本当は僧侶の訪問が嫌でも、大人ですから、

そういう態度は見せません。







それを、言葉のままに受けて、その僧侶は、

末期がん患者のもとへ通っていたそうです。

ところがある日、いよいよ旅立ちの準備に入るという時に、

ご家族の方から、「来るのは、遠慮して欲しい」と言われたそうです。









その僧侶は、今までそのお年寄りと、関係が築けてきたと

思っていたのです。

家族が宗教を嫌がって来るなと言っているだけだから、

本人は、もう末期だから、会いに行った方が良いか悩んでいたようです。







いやいや、そうじゃなくて、

本当に、来ないでください!!!







社交辞令で、お年寄りは「来てくれて良かった」と言っていたので、

坊さんが帰った後は、ぐったり寝込んでいたそうです。

末期がんの方が、ない体力をふりしぼって、お坊様に失礼がないようにと、

必死になっていたお年寄り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







本人の性格からすると、僧侶の方に直接、もう来ないでと言えないので、

ご家族の方が、本人のぐったりした表情を察して、

本人の代わりに、「もう来るのは遠慮して欲しい」と

言われたそうです。







お年寄りは、とてもマナーがしっかりしておられます。

そのお年寄りの方と、良い関係が築けているというのは、

ただの僧侶の思い込みです。







とあるビハーラ研修に参加させていただいた時に、

僧侶の格好をして、病院に入って行きたいと言っていた人がいました。







死ぬか生きるかの戦いをしている人の中に入って行くのに、

服装がどうのこうのと悩んでいる時点で

相手の気持ちが分かっていない、

相手は、身なりを気にする余裕もない状態ということが理解できていない証拠だと

思います。







また、感染症対策のため、病院の職員でさえ、

患者さんお1人と接する毎に着替えていることもあるのに、

消毒液に漬けることができない僧侶の衣を着て行っている時点で、

医療現場に入る資格はないと思います。







あ、ちょっと言い過ぎました。

大変失礼いたしました。










医療や福祉の現場では、人手不足です。
僧侶の前に、職員を増やして欲しいというのが、現場の悲鳴です。







介護施設で法話をしたと自慢げに話していた僧侶がおりました。

何で迷惑か、分かりますか?













法話が行われる場所に、お年寄りを連れて行くのは、

介護職員です。

お一人お一人を、ベッドから車いすに移乗し、会場へお連れします。

中では、ベッドのままでとか。

また、法話の時間は、職員が付きっきりです。













介護職員の協力があって、「させていただいている」ということ、

お気付きになられますでしょうか?

でも、いかにも、自分が来たから法話ができたと上から目線。







介護施設でのご法話に、何か意味はありますか?







お年寄りは、僧侶のお話を、聞いてあげているんです。







法話があったからと、何にも変わりません。

死を受け入れるためにも、安らかな最期を迎えるためにも、

法話はいりません。













医者や看護師、介護職員ができないスピリチュアルケアをしていると

自信を持っているようですが、

医者に、患者の心が分からない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医療や福祉のスタッフは、プロです。

僧侶がいなくても、ちゃんと患者さまやご利用者さまのケアはできます。







患者と医療スタッフとをつなぐ橋として、って言ってた僧侶がいました。

悪いけど、私たちは、そんなに無能ではありません!

なめるのも、いい加減にしてください!













って、また言いすぎました。

謝ります。

すみませんでした。







僧侶は、職業ではなく、生き方だとお伺いしております。

でも職業は、「無職」と答えておられる僧侶を知っております。







だったら、お坊さんの格好はせずに、病院や介護施設を訪問しても、

坊さんは、坊さんじゃないんですか?













生きるか死ぬかと戦っている人は、身なりを気にする余裕はないです。

現場の声を聞いてください。

お年寄りとお話をして、真実を見極めていただきたい。









現場を見れば、医療や福祉の現場に僧侶が必要かどうかを

議論する余裕もないのは分か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人手不足なので、介護職員としてでも、掃除のボランティアとしてでも

働いていただいた方が、まだ良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考えたところで、所詮、人間の考えることは、正しいことはないのでしょう。

人間は無力だ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るでしょうから、

僧侶には人を助ける力があるはずはないんです。













病院に、衣を着て行きたい。

これは、あなたの自分勝手な思いです。













常勤のビハーラ僧がいる病院で、職員にアンケートが取られたそうです。

結果が、ビハーラ僧に伝わることくらい分かるので、

いくら匿名でも、本音なんて書けないです。







患者さんも、職員も、病院の経営母体と同じ宗教ならいいのですが、

そうでなければ、

差別があるのではと不安に思ってしまいます。







坊さんの格好で、歩くな!







患者さんも、お世話になっているという引け目があるし、

良くしてもらわないといけないという思いがあるので、

改宗を申し出たり、

リップサービスをしたり。













患者さんに、どれだけ気を遣わせているか。

患者さんに呼ばれたら、衣を着て、僧侶として、患者さんを

訪問されても良いと思いますが、

衣を着た僧侶が常勤というのは、

患者さんのストレスになっていることがあります。













困っている人が目の前にいるというのは、事実。

その人の前では、誰が介護職員で、誰が僧侶かという区別も重要ではなく、

みんなで一緒に生きていく仲間で良いんじゃない?

そんなに服装や職業にこだわらないで。







海外でもですが、日本でも、元々、医療や福祉というのは、

お寺や教会で行われてきたという歴史があり、

ビハーラ活動というのは、近代始まったものではなく、昔からあったものです。







病院、幼稚園、学校、介護施設などを宗教法人が経営していることが多いのです。







今さら、病院や介護施設で、宗教とか、僧侶とか、意識することではないし、

意識させようとするから、拒否されることもあるのではないかなと思います。









僧侶の役割は、病院にも介護施設にもなく、お寺にしかないのでは?

困った時に、いつも行けるお寺がある、 

病院に呼んだら、いつでも来てくれる僧侶がいる、

その存在を知っているかどうかの方が重要で、

すでにあることに、気付いてもらうための努力をしていく方が

僧侶がすべきことではないかと。











いつも、変わらないものがあ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ることが

安心で、

安心を提供するのがお寺の仕事な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どうせ格好つけても、中身はない、
分からないものは、分からない、坊主は坊主、それで、良いんじゃない?









僧侶も病院や施設では、特別でもなくて、みんなと一緒。

みんなと同じ。











いろんなビハーラの形がある、というよりは、

形がないものだから、

何でもオッケー。

どれも正解。

何にでもなれる、どこでもできる、何でもできるはず。













私にとって、ビハーラ活動は、教義の実践のための活動の一部だという認識です。

布教活動ではありません。







法話はしなくても良いでしょう?

衣もいらないでしょ?













教義に感動するのは、大いに結構。

感動したら、誰かに話したくなるという気持ちは分かります。

同じく教義に喜んでいる人と一緒に

喜べばい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宗教は、「私ただ一人のため」のもの。

あなたの真実は?ってとこかな?













医療や福祉の現場で宗教の必要性を論じる時間があったら、

早く来い!

一緒に汗を流しましょう!













病院に僧侶は必要だと社会に訴えたい気持ちは、

僧侶のみなさんも、自分を必要とされた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坊主も、寺で1人で、さびしいんですよ。

寺がいらないと言われて、さびしいし、必要だとみんなに言いたいんだと思います。













坊主なら、自分の存在、自分の必要性は自分で考えろ!

病院に必要かどうか、自分で考えろ!















病院での活動を報告している僧侶の方が、

僧侶を受け入れてくれる病院が増えてきていると言っていましたが、

それは、自分で僧侶の必要性を強調したいだけだと思います。













僧侶の仕事は葬式だけではない、

葬式仏教と言われるが、お経は葬儀の時にだけ読むものではなく、

お経も僧侶も、縁起が悪いものではないから、

病院に衣を着て活動を続けると、いつか分かってもらえる?













じゃ、社会の理解が足りないだけと言っているの?

つまり、あなたが正しい、社会の人が間違っている、

偏見だ、とでも言いたいのでしょうか?













はっきり言って、僧侶を受け入れてくれる病院が増えるという発言が、

上から目線だと感じます。

自分が正しい、みんなは誤解している、だから、いつかみんなは分かるだろうと

言っているように聞こえます。













私も、自分が正しいとは思っていませんが。

そもそも、私も、僧侶のみなさんと同じ、「凡夫」です。













人間には、何が正しいか間違っているかは分からないし、

例え分かったとしても、

間違ったことばかりしてしまうのが「私」です。













僧侶のみなさんも、同じ目的に向かって歩む、仲間だと思っています。

かなり行き過ぎた発言もあったかもしれませんが、

仲間としての発言だとご理解いただければと思います。







失礼いたしました!







合掌


【仏教の窓】臨床宗教師って何だろう?【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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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年1月3日

読了時間: 6分


【仏教の窓】臨床宗教師って何だろう?【コラム】



 副住職は2017年の春から夏にかけて、東北大学が主催している「臨床宗教師」の研修を受けてまいりました。そこで今回は臨床宗教師の社会的な役割についてご紹介させていただこうと思います。 日本版チャプレン「臨床宗教師」  皆さんは「チャプレン」という職業をご存知でしょうか。チャプレンとは主にアメリカなどのキリスト教文化圏において、病院などの公共の場で心のケアを提供するために専門実習を受けた宗教者のことです。日本では、緩和ケア病棟やホスピスに配属されている例はわずかです。一方、欧米では病院の他に福祉施設、教育機関、警察・消防署・軍隊・刑務所など様々な公共空間で、当たり前のようにして雇われている馴染み深い宗教者の専門職なのだそうです。  これまで日本においてはお寺・神社・教会などの宗教施設以外で宗教者が活動すること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近年、公共の場においても生死の問題と向き合う宗教者が求められるようになってきています。その要望に応えるべく生まれたのが、チャプレンの日本版ともいえる「臨床宗教師(苦悩・悲嘆・不安の現場に寄り添う活動をする宗教者)」です。










■東北大学主催「臨床宗教師研修」の様子 僧侶だけでなく様々な宗教者とともに学びを深める





臨床宗教師の主な特徴  臨床宗教師は公の場で活動するということもあり、一般的な宗教者の立場とは異なる点があります。主な特徴は次の通りです。


①布教伝道を目的としない(要望がある場合には適宜対応する) ②傾聴※を基本とする心のケア ③宗教間協力を前提とする ④信徒以外の相談にも応じる ⑤「臨床宗教師」の倫理綱領を遵守する


(※傾聴…相手の話をただ聞くのではなく、注意を払って、より深く、丁寧に耳を傾けること。自分の訊きたいことを訊くのではなく、相手が話したいこと、伝えたいことを、受容的・共感的な態度で真摯に聴くこと)


 宗教者のホームグラウンドは基本的にはお寺や教会といった宗教施設です。そのため、そうではない公共の場において「宗教者が活動するとはどういうことなのか」「何を提供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をより考慮した行動が求められます。  ①や②の特徴にはそれがよく表れています。例えば、お寺や教会であれば仏教やキリスト教の話をしても違和感はありませんが、病院や老人ホームですれば、教義・価値観の押し付けと思われても何ら不思議ではありません。場合よっては利用者のみならず、職場のスタッフにも混乱を招く恐れがあります。そのため、こちらから宗教に関する話を一方的に持ち出すことは厳禁なのです。ただし、全く宗教の話をしないというわけではなく、相手が宗教宗派に関する話を望み、その場の環境・人間関係などを考慮した上で問題がなければ応えます。  また、病院や福祉施設、被災地などではこちらが何かを教えるよりも、その人の気持ちに耳を傾けることが癒やしになる場合が多々あります。そのために必要なのが「傾聴」の姿勢です。傾聴とは、ただ話を聞くのではありません。全身全霊で相手の話したいこと、伝えたいことに向き合うことです。自分自身の存在が受けとめてもらえること、自分の気持ちを口に出して語ることが新たな気づきや癒やしに繋がります。  このように、その場の環境・人間関係に配慮し、宗教者としての特性を活かした心のケアを行うのが臨床宗教師であると言えます。一方で、①~⑤のような決まりごとがあると「宗教者としての意義が失わ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った声もあります。とはいえ、公の場で皆が安全安心に過ごすためには最低限必要なことなのです。













■被災地の公営住宅で行なわれた傾聴喫茶「カフェ・デ・モンク」





 具体的な一例をあげると、京都府では、自殺対策の一貫として臨床宗教師を活用した事業が2015年より始まっています。これは布教や勧誘をせず、宗教宗派の違いを超えて、悲嘆や苦悩に「傾聴」という姿勢で寄り添う宗教者だからです。特定の宗教団体が利することがないこと、政教分離の原則に抵触しないことから、安心して現場にいることができると判断されたのです。公の機関が宗教者を採用するというのは驚くべきことですが、これも①~⑤のような立場が明確に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が大きな要因である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








科学によって解決しえない領域  では、なぜ宗教者が公共の場で求められるようになってき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これからの日本は超高齢多死社会をむかえると言われており、どのように生を全うし、死を迎えていくかが深刻な問題となっています。緩和医療、在宅医療、高齢者施設など「老病死」と密接した現場では様々な喪失体験の連続です。また、身体的な痛みを取り除くだけでは解決できないこと、―生きる意味や自分自身の存在そのものが問われるような問題とも向き合わなくてはなりません。すると、これまでの医療・福祉の専門職のみではケアをしきれない問題が出てきています。  「なぜ自分がこんな理不尽な目に合うのか」「何のために生きるのか」「死んだ後はどうなるのか」といった問いに向き合うときには、大きな不安や苦悩が伴います。しかし、それらの問いに対して科学的な答えを出すことはできません。科学的思考に支えられて生活している私たちにとって、独りで向き合うにはあまりにも難しい問題です。  そこで、生と死について日々考える立場である宗教者が現場に入れば、それらの問題に一緒に向き合う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医療・福祉の領域を中心に注目され始めているのです。





自分自身を受けとめてもらえる場所 つながりを感じることができる場所  私は現在、緩和ケア病棟、宗教者による傾聴喫茶「カフェ・デ・モンク」、在宅医療クリニックなどで臨床宗教師として活動する機会をいただいています。そこでお会いする方々の中には、ずっと誰にも話すことなく抱え込んできた思いを口にされる方も少なくありません。在宅医療の現場では部屋から一歩も出ることができず、医療・福祉関係者以外と話す機会が全くないという方もいます。また、傾聴喫茶「カフェ・デ・モンク」には毎回30~40人ほどの方が来店しますが、20代、30代の若い方もいらっしゃるので正直驚いています。








■「東京カフェ・デ・モンク」の様子


 今日、全国的に、どこの地域であっても人と人との交流が少なくなっています。特に都市部ではそれが顕著です。厳念寺周辺にも次々とマンションが建っていますが、「お隣さん」や「ご近所さん」との交流は限られており、一人暮らしの人は老若男女問わず増え続けています。また、家族がいたとしても耐え難い苦悩を背負って生活している方も少なくありません。目に見えていないだけで、実際には孤独な思いを抱えている人はとても多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日々の生活を維持するのが精一杯で、人とのつながり、ぬくもりを感じることができる機会や、生と死の問題としっかりと向き合う時間を持てる人は極わずかです。そのような状況で、突然大切な人やものを喪失し、生と死の問題と向き合わなくてはならなくなったとしたら大変なことになります。  そのような中、臨床宗教師が求められた背景には、安心できること、存在を受けとめてもらえること、つながりを感じることができることが社会全体で求められてき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かもしれません。


【菅原耀 記】

【불교의 창】임상 종교사란 무엇일까? 【칼럼

 부주직은 2017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도호쿠대학이 주최하고 있는 「임상종교사」 의 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임상 종교사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일본판 챠프렌 「임상 종교사」 

 여러분은 「챠프렌」 이라고 하는 직업을 아시겠습니까. 챠프렌은 주로 미국 등 기독교 문화권에서 병원 등 공공 장소에서 마음의 케어를 제공하기 위해 전문 실습을 받은 종교자입니다. 일본에서는, 완화 케어 병동이나 호스피스에 배속되어 있는 예는 적습니다. 한편, 구미에서는 병원 외에 복지 시설, 교육 기관, 경찰·소방서·군대·형무소 등 다양한 공공 공간에서, 당연하게 고용되고 있는 친숙한 종교자의 전문직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사원·신사·교회 등의 종교 시설 이외에서 종교자가 활동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공공의 장소에서도 생사의 문제와 마주하는 종교자가 요구되게 되어 왔습니다. 그 요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챠프렌의 일본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임상 종교사(고뇌·비탄·불안의 현장에 다가가는 활동을 하는 종교자)” 입니다.
 

■도호쿠 대학 주최 「임상 종교사 연수」의 모습 스님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자와 함께 배우기를 깊게 한다

 
임상 종교사의 주요 특징 

 임상 종교사는 공공장소에서 활동한다고 하는 일도 있어, 일반적인 종교자의 입장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포교 전도 
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요망이 있는 경우에는 적절히 대응한다) 
② 경청※을 기본으로 하는 마음의 케어 

윤리강령 준수


( ※ 경청… 상대의 이야기를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보다 깊고, 정중하게 듣는 것.자신의 묻고 싶은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전하고 싶은 것을 , 수용적·공감적인 태도로 진지하게 듣는 것)

 종교자의 홈그라운드는 기본적으로 사원이나 교회와 같은 종교 시설입니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은 공공의 장소에서 「종교자가 활동한다고는 어떤 것인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인가」를 보다 고려한 행동이 요구됩니다. ①이나 ②의 특징에는 그것이 잘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절이나 교회라면 불교나 기독교 이야기를 해도 위화감은 없지만, 병원이나 노인홈이라면, 교리·가치관의 압박이라고 생각되어도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용자뿐만 아니라 직장 직원도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쪽으로부터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꺼내는 것은 엄금입니다. 다만, 전혀 종교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고, 상대가 종교 종파에 관한 이야기를 바라며, 그 자리의 환경·인간 관계 등을 고려한 후에 문제가 없으면 응합니다. 또, 병원이나 복지 시설, 재해지 등에서는 이쪽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보다, 그 사람의 기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치유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경청"의 자세입니다. 청취는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전신 전령으로 상대의 말하고 싶은 것, 전하고 싶은 것에 마주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받아 들일 수있는 것, 자신의 마음을 입에 내고 말하는 것이 새로운 눈치와 치유에 연결됩니다. 이와 같이, 그 자리의 환경·인간 관계를 배려해, 종교자로서의 특성을 살린 마음의 케어를 실시하는 것이 임상 종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①~⑤와 같은 결정이 있을 때 「종교자로서의 의의가 상실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공의장에서 모두가 안전 안심에 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필요한 것입니다.

■재해지의 공영 주택에서 행해진 경청 카페 「카페・데・몽크」

 구체적인 예를 들면, 교토부에서는 자살 대책의 일관으로서 임상 종교사를 활용한 사업이 2015년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포교나 권유를 하지 않고, 종교 종파의 차이를 넘어, 비탄이나 고뇌에 「경청」이라고 하는 자세로 다가오는 종교자이기 때문입니다. 특정 종교단체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정교분리 원칙을 저촉하지 않기 때문에 안심하고 현장에 있을 수 있다고 판단된 것입니다. 공공기관이 종교자를 채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만, 이것도 ①~⑤와 같은 입장이 명확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큰 요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과학에 의해 해결할 수 없는 영역 

 에서는 왜 종교자들이 공공 장소에서 요구되게 되어 왔는가? 앞으로의 일본은 초고령 다사 사회를 맞는다고 하며, 어떻게 생을 완치하고, 죽음을 맞이해 나가는가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완화의료, 재택의료, 고령자 시설 등 「노병사」와 밀접한 현장에서는 다양한 상실 체험의 연속입니다. 또, 신체적인 통증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 ―사는 의미나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묻는 문제와도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의료·복지 전문직만으로는 케어를 할 수 없는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 자신이 이런 불합리한 눈에 맞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마주할 때에는 큰 불안이나 고뇌가 수반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대답을 낼 수는 없습니다. 과학적 사고에 힘입어 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혼자 마주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 대해 날마다 생각하는 입장인 종교자가 현장에 들어가면, 그 문제에 함께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의료·복지의 영역을 중심으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곳 합니다. 거기서 만나는 분들 중에는, 계속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안아 온 생각을 입에 되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재택 의료의 현장에서는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의료·복지 관계자 이외라고 말할 기회가 전혀 없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경청 카페 「카페・데・몽크」에는 매회 30~40명 정도가 내점합니다만, 20대, 30대의 젊은 분도 계시기 때문에 솔직히 놀라고 있습니다.
 

■「도쿄 카페・데・몽크」의 모습


 오늘날, 전국적으로, 어느 지역이라도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현저합니다. 엄념사 주변에도 차례차례로 맨션이 세워져 있습니다만, 「이웃」이나 「이웃씨」와의 교류는 한정되어 있어, 혼자 사는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가족이 있었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고뇌를 짊어지고 생활하고 있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실제로는 외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은 너무 많지 않을까요?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고, 사람과의 연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나, 생과 죽음의 문제와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상실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면 힘들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임상종교사가 요구된 배경에는 안심할 수 있는 것,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연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회 전체에서 요구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스가와라 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