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

공화(republic)의 사상적 토양과 에토스 정의 : 유학의 화(和), 화동(和同)을 중심으로 김단아

 


【한국종교 분과】

[한국종교분과 4발표]

공화(republic)의 사상적 토양과 에토스 정의 :   유학의 화(), 화동(和同)을 중심으로

김단아(서강대학교 철학과

1. 서론

동아시아에서 공화(共和)는 왜 republic의 번역어로써 채택되었는가? 공화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들은 위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에 귀착한다.

이 지점에서 상상해 볼 만한 질문은, ‘만약 중국의 經書와 역사서를 통해 형성된 이러 한 동아시아의 지적 토양이 없었다면 과연 共和政體와 같은 제서구의 정치제도가 어 떠한 방식으로 수용 및 정착될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수용자에게 전혀 이질적인 정치제도라면 공화제 설립의 구호가 과연 대중에게 어떠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비록 그 이해의 방식이 오해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독립적 으로 발전해 온 두 전통이 조우한 데에는 그것을 전달, 융합, 재구성할 수 있었던 공 동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1)

, 공화주의는 republic의 공허한 번역어가 아니며 양자가 지닌 공통점 때문에 접목된 단어라는 주장이 선 행 연구들의 공통된 가정이다 이에. 더 나아가 정상호(2013: 2016), 신주백(2017)은 공화주의가 republic의 번역어로써 기능하게 된 이유는 대동(大同)이라는 사상적 토양이 마련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본 논문이 주목하였고 강조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군주제의 부정 테제로서 공화가 수천 년동안 중앙집권적 왕권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국과 중국에서 쉽게, 그리고 급속 하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토착적 맥락이다. 서양에서 공화(res publica)의 본질을공공의 일 로생각한 것처럼 동양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국민 공의의 대변자로 표상되 는 군주가 사사로움을 버리고 애민과 선정을 향한대동공화(大同共和)의 정치 를이상 향으로 꿈꿔왔다.2)

정상호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인식하고 애민정치의 시행을 목표로 하는 대동사회가 당시, 학자들이 공화주 의를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대동사회는 유가의 이상향으로 여

1)   이정환. 2013. “왕권찬탈과 정통주의 군주제 : 전근대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共和에 대한 재해석의 역사.” 대 동문화연구 제82, p. 449.

2)   정상호. 2016. “동아시아 공화(共和) 개념의 비교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505, p. 232.


겨졌으며, 실현을 위해 유학자 집단에서 여러 방법들을 고안해왔다. 대동사상이 유가에서 차지한 위상을 고 려한다면 정상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가설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정상호의 주장은 타당치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갈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포용하려는 마키아벨리나 메디슨의 공화 주의와 달리, 갈등을 부정하고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는 공화주의에 대한 동양적 또는 한국적맥락의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3)

위 주장은 대동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대동은. 정상호의 주장처럼 형식적인 동일(同一)이 아닌, 차 이를 인정한 채 한데 어우러짐을 추구하는 화동(和同)을 뜻하는 사상이다(장현근, 2012). 따라서 본고는 대동 사상이 공화주의가 수용될 수 있었던 사상적 토양이라는 정상호, 신주백의 주장을 수용하나, 다른 논거를 제 시하여 정당화하고자 한다. , 대동사상의 요체인 화동, 특히 화()에 주목하여 공화주의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실증적 연구나 개념사적 연구가 아닌, 사상사적 연구임을 미리 명시한다. , 화나 공화에 대한 사 료적인 해석을 주된 연구의 방법으로 삼지 않고 기존, 개념사적 연구에서 배재되어왔던화 사상에주목하여 공화주의의 기틀로 여겨졌던 대동사상을 재해석한다. 또한 공화를 화를 통해 정의하는 과정을 통해 현대 한 국에 부재하고 있는 공화의 에토스(ethos)를 우리의 사상적 토양 속에서 발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2. 유학의 화()

군자는 화하면서 동하지 않고 소인은, 화하면서 동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널리 알 려진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자의 화는 동일과 구분되는차등적 지위의 개체들이 분명히 구분된 상태 에서 서로 어우러지는 것 을말한다 김단아( , 2020 : 77). 즉 타자에 대한 순응을 전제하는 동일과 달리 화는 여러 개체들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화는, 여러 개체들이 구분되어진 정적인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활발히 벌어지는 동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질적인.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은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 며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개체들은 화해를 통해 균형을 찾아간다(Li Chenyang, 2014 : 9). 균형은 어느 한 쪽의 양보나 굴복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체들의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

화에 대한 이와 같은 추상적인 서술은 화를, 국 요리에 비유한 다음과 같은 안영(晏嬰)의 설명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과 화는) 다릅니다. ()는 국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물・불・식초・젓갈・소 금・매실로 어육을 끓일 때, 불을 때서 익히고서 요리사가 간이 알맞도록〔和〕알맞게 잘 조절합니다〔齊〕. 간이 부족하면 (양념을) 첨가하고, 간이 지나치면 (물을) 부어 요 리하므로, 군자는 이런 음식을 먹고 마음을 화평하게 지닐 수 있습니다.4)

3)    정상호. 2013. “한국에서 공화(共和) 개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현대정치연구 62, p. 11.

4)    春秋左氏傳 , 「魯昭公」 , 20, “. 和如羹焉, 水火醯醢鹽梅以烹魚肉, 之以薪, 宰夫和之, 齊之以味, 濟其不及, 以洩其過. 君子食之, 以平其心.” : 차민경. 2020. “『논어 에』 나타난 공자의 ()’의 세계관과 상생에 관한 소고.” 유학연구 50, p. 278에서 재인용.

국을 요리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릇 안에 재료들을 넣고 물을 붓는 것만으로 국은 완성되지 않는다. 각각의 재료들이 화학 반응을 통해 변용을 거쳐야만 국은 완성될 수 있다. 그런데 단 순히 국을 끓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맛있는,         국을 요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성을 갖춰야 하는가? 각 재료들 이 지닌 고유한 맛이 유지되면서도, 그것들이 국 전체의 맛을 해치지 않아야한다. 요리사는 재료들을 가감하 면서 마침내 그 지점을 발견한다 이처럼.   국의 재료들이 각각의 맛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맛을 내는 것처럼, 화는 여러 개체들의 종합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균형과 안정에 이르는 과정들을 총체적으로 뜻한다. 또한 국 요리의 목적이 재료들 간의 조화 그 자체이듯 화의,                목적도 화가 실현된 사회 조화로운, 사회 그 자체라고 이 해할 수 있다.

국을 끓이면서 간을 보는 사람이 필요하듯 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유학에서 그 기준 은 예()이다. 예의 주된 기능은 마디지음, 구분지음()으로, 개체들 간의 구별을 심화시킨다. 따라서 예에 는 계급의, 재생산을 정당화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예의, 적용 앞에서 모든 계급은 평등하게 여겨졌다. 즉 예의, 적용과 실천은 모든 계급에게 요구되었으며 왕조차도 엄격하게 예의 제약을 받았다 특히. 조선에서 예는 왕과 고위공직자들의 권력 남용과 자의적인 통치를 방지하는 기능을 해왔기에 조선의, 군주는 입헌군주 에 상응하는 지위를 유지해왔다(함재학, 2008).

이와 같은 예의 이중적인 특성 작용은- 차이를 고착화하면서 적용에는 평등한 특성 은- 화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일러준다 즉 화는. , 개체들을 분별하는 기준과 그, 기준들을 모든 개체들이 수용하고 실천했 을 때 실현가능하다. 예컨대 오늘날 실행되고 있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적용을 위해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을 분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동시에 법에 대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와 실천이 필요하다. 두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해당 법을 통해 사회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다.

3. 공화(共和)의 개념사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따라 화에 주목하여 공화(共和)를 해석한다면 화, ()를 함께 한다()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3, 특히 조선과 현재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공화는 화의 함의를 담지하지 못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화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과 더불어, 좌우대립, 분단이라는 사건과 함께 정치적인 용 어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죽서기년 에서 공화는 주()대 폭정에 대항하여 여왕(呂王)을 내몰고 공백(共伯)의 화()라는 인물이 대 리 정치를 한 시기를 이른다 왕가의. 혈통을 받지 않은 이의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공화는 세습군주제 를 위협하는 정치체제로 여겨졌으며, 전근대 동아시아 3국에서 공화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 되었다(이정환,

2013).

사마천의 사기 에서도 주대 공화는 왕이 없는 시기로 묘사되지만, 공백의 화가 아닌 주공과 섭공이라는 두 신하가 공화, 즉 공동으로 화합하여 국정을 다스린 시기로 서술된다. 이와 같은 사마천의 서술에 따르면 공화는 세습군주제와 대치되는 시기가 아니며 세자가, 장성한 뒤 대를 이을 수 있도록 신하들이 일정기간 동 안 대리 청정하는 시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마천의 서술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공화는 임금이 부재한 정치체제로 주로 여겨졌다. 광해군일 기 와 고종실록 에 따르면 공화는 세습군주제가 시행되지 않은 시기로 이해되며, 특히 개화기 이후 공화는 구미의 정치제제를 이르는 말로 통용되었음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저들 독립협회 은( ) 구미(歐美)의 공화(共和) 정치를 우리의 전제(專制) 정치의 옛 법에 옮기려고 하며, 대신을 제멋대로 쫓아내는 것을 식은 죽 먹기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5)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요원한 것을 따르는 무리들이 (중략) 다른 나라의 민주와 공화 의 제도를 채용하여 우리나라의 군주 전제법을 완전히 고치려고 합니다.6)

이처럼 죽서기년 의 영향으로 공화는 통치의 에토스(ethos)보다는 정치 제도의 측면에서 주로 논의되었다

(이영록, 2010).

4. 화동(和同)

금기시 여겨졌던 공화 대신 조선에서 널리 사용된 단어는 대동(大同)이었다 오늘날. 대동에 대한 오해로 인 해 대동을 민주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동은 모든 분별과 구분이 없어지는 묵 가의 상동(尙同)과 달리 차이를, 인정하고 이견들의 조화를 이루는 화동(和同)을 의미한다(장현근, 2012).

신주백(2017)에 따르면 이와, 같은 대동사상은 동학농민운동과 대동단결선언 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무장기포의 포고문을 살펴보면 대동이 평등사상이나 신분 철폐와는 거리가 먼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신하된 자들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鳳位만 도둑질 하며,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으면서 忠課하는 선비를 요망한 말을 한다고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고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 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벼슬아치가 많다. 인민의 이목이 나날이 변하며, 들어와서는 삶을 즐길 생엽이 없고 나와서는 몸뚱이를 보존할 계책이 없도다. 훨政이 날로 심해지고 원성이 연이어져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융기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무너져 남김이 없도다.7)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군신, 부자, 상하라는 위계 질서의 흐림을 지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농민군들은. 삼강오륜에 따른 구분을 다시 바로 잡는 것이 민()들의 역할이라고 보았으며, 신분 제의 철폐나 민주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동은 프랑스 혁명과 달리 특정 계급의 배제나 타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를 모두 조화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처럼, 동학 농민군들은 군주 신하 민중들, , 중 어느 한 쪽을 배재하지 않고도 고유한 정치 공간만을 보장해준다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집강소를 통해 고유한 정치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의 실패와 한일 강제 합병으로 인해 군주제가 철폐되면서 대동에 기반한 정치 개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대동사상의 부활은 1910년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이 발표한 대동단결 선언 에서 살펴볼

5)   而彼以歐美共和之政, 欲移我專制舊規, 擅逐大臣, 視若茶飯常事, 其罪一也.”( 고종실록 38, 고종 35 12 11 일 陽曆 3번째기사). 한국고전종합DB

6)   而比年以來, 喜新遠之輩...欲用他國民主共和之俗, 一變我邦君主專制之規, 卒之有甲午、乙未之變.”( 고종실록 38, 고종 35 12 9일 陽曆 3번째기사).한국고전종합DB

7)   皮長東徒布告      : 신주백. 2017. “1910년 전후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정체로 정치이념의 전환 공화론과 대동론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93, p. 164 재인용.

수 있다 신주백. (2017)은 선언의 제목에 일치단결이나 총단결이 아닌 대동단결이 사용된 이유가 있으리라 짐 작한다. 대동을 화동으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대동단결 선언의 요지를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대동 단결선언 은 일제와의 동화(同化)를 거부하고 순종의 서거로 주권을 이양 받은 한민족(韓民族)간의 화합을 주 장한다.

불쌍한 우리 자손에게 유습이 대대로 전하여져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중독에 빠져서는 우리의 앞길은 영겁에 희망이 없다.8)

대동단결선언 은 당시 분리된 독립단체들 중 어느 쪽의 의견이 더 타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야 한다 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동단결선언 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각 단체들이 합의나 양보 없이 자신들의 의견만 이 옳다고 주장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단체들과 개인들은 회의를 통해 분리된 여론들을 종합하고통일적 유 기체 를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현 방식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통일적, 유기체의 건립을 지지한다는 언급을 통해 특정, 단체가 다른 단체들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 각, 단체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기관을 구상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대동단결선언에 영향을 받아 설립 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화동의, 정신을 이은 좌우 인사들과 단체들의 합작에 의하여 구성될 수 있었다.

신주백은 주권이 일반 민중들에 귀속되었다는 주장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공화(republic)과 대동사상의 접 합이 대동단결론 에서 성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의 쇠락함과 정치 질서의 문란을 걱정하며, 자신 들을 정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에서 이미 한국적 공화주의는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대동과, 공화는 다시 분리되었으며 이후 공화는 민주에 흡수되 거나 정치 체제를 이르는 표현에 그친다.

5. 공화(共和)

화는, 군주를 부정했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공화가 아닌 대동 속에서 그 사상적 명맥을 이어왔다. 한일 강 제 합병으로 군주제의 폐지로 형식적인 평등이 도래한 뒤 공화는 민주와 결합되어민주공화 라는단어로 대 한민국임시헌장의 제 조에서1 등장한다 그러나. 조소앙의 민주공화는 민주주의와 동일한 개념이며, 귀족공화 에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강정인 권도혁( · , 2018). 이후 임시정부, 건국헌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 지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 특히, 공화는군주가 없는 정치 체제 로이해되고 있다 민주와. 결합된 공화는 이 후,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가리키거나, 북한의 정치체제와 대비되는 민주정치를 이 르는 정치적인 용어로 변모하게 되었다(이영록, 2010).

공화주의, 민주공화의 에토스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에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적 전 통과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민주 공화의) 에토스를 정의할 수 있다 예컨대. 재야학자 설의식은 다음과 같이 민 주공화를 정의하였다.

민주주의의 명분을 세우는 바에 우리의 국체는민주공화 라는이 글자에 요약될 뿐이 오 또 그로써 족하다. ‘민주 인지라모든 주권이인민 에게있음이 물론이오니 인민으 로부터 발원되지 않는 권력의 존재는 일절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공화 인

8) 조성일, 2020,  100년 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 서울: 다차원북스, p. 119.

지라 모든 정책이 전체의 조화에 있음도 물론이니 전체의 균형이 확보되지 않는 권력 의 편재도 일률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9)

설의식은 갈등의 조정을 통해 균형을 찾아가는 화의 특성에 따라 공화의 에토스를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 이 화에 주목한 공화의 에토스 서술은 republic의 의미와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전통 사상과 접목시킬 수 있 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설의식의 주장에 이어서 화를, 통한 공화의 에토스를 정의하고자 한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화는, 구성원들 간의 차이를 인정했을 때 추구할 수 있다 또한. 화는, 갈등을 회피하 지 않고 그것을 추동력 삼아 변화를 통한 합의와 균형에 이른다. 공화는, 화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 사 회 구성원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하거나 흡수시키려는 시도 대신, 화해를 추구 하는 노력들을 통해 균형에 이르는 것이다 공자가. 화의 도구로 예를 제시했듯이 현대에서는, 법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화의 목적이 화 그 자체이듯이 공화의, 목적도 공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 민주와 공화를 비교해보겠다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개체들은 형식적으로 평등해진 다. 가령 투표에서, 국민 일인이 행사하는 표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며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차이들은 모두 무시된다. 그러나 투표와 같은 형식적인 대의민주주의만으로 사회의 조화는 실현시킬 수 없다. 공화는 투표 를 통해 묵살되었던 소수자들의 의견, 형식적인 평등으로 인해 은닉되었던 차별과 갈등에 주목한다. 조화로 운 사회로의 진입을 방해하는 의견의 대립뿐만 아니라, 성 계급, , 장애에 따른 차별과 갈등을 직시하고, 그것 들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들이 바로 공화이다 가령. 수적으로 대표될 수 없는 소수자들을 각 정당의 비례대표 로 선출하는 시도들을, 공화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갈등의 형식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민주주의라면 갈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공화이다.

공화의 목적 그 자체가 조화로운 사회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republic의 에토스와 유 리되지 않는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대동사상을 통해 군주와 관료들은 국가를 공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예 로 인해 서구의 황제나 귀족과 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공화의 주재 자는 왕과 신하들로 한정돼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거점으로 민들 또한 공화의 주체로서 스스로 인식하기 시 작하였으며 3.1운동을 통해 온전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오늘날 공화는 다양한 계층의 사회구성 원들의 참여를 통해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 republic은 서구로부터 수용된 개념이지만, , 화동, 공화로 이어지는 사상적 토양 속에서 새로이 움틀 수 있는 개념이다.

6. 오늘날 공화의 함의

공화는 다양한 개체들의 차이를 존중하고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조절하며 균형과 안정을 지향하 는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을 의미한다 지난. 4월 투표를 통해 구성된 21대 국회는 공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 혹은 21대 국회 자체는 조화로운가? 이번 21대 국회는 이전과 달리 여성, 청년, 장애인, 북한 이탈주민 등 다양한 소수자들이 입성했다 그러나. 여전히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국회의원 평균 재산이 국민 평균치의 5.1배이고, 부동산재산은 4.5배 를기록하고 있다10). 대부분의 국민들과 유리되는 계층에 속한 다수가 국민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공화는 대의 민주주의가 지

9) 설의식, 「임정을 앞두고」, 새한민보편집국, 임시정부수립대강 : 미소공위자문안답신집 (새한민보사, 1947), 12 : 이영록. 2010. “한국에서의 민주공화국 의개념사.” 법사학연구 42, p. 66 재인용.

10)“[기자회견]         21        국회의원  부동산      신고재산  분석결과  발표”,        경실련,     2020   10        7          접속, http://ccej.or.kr/61638

닌 한계를 보완하여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과정을 통 해 구성된 국회는 수적인 대표성을 지니지만 계층의,       다양성 또한 대표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져야할 때이다. 다양한 계층들을 대변할 수 있도록 앞으로,                  국회를 다채롭고 조화롭게 구성하는 것이 공화의 과제가 될 것이 다.

참고 문헌

고종실록 , 한국고전종합DB.

강정인 권도혁·      . 2018.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재해석.” 한국정치학회보 521, 257-276. 김단아. 2020. “정도전의 조화의 통치철학.” 월간 공공정책 178, 76-80.

신주백. 2017. “1910년 전후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정체로 정치이념의 전환 공화론과- 대동론을 중심으로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93, 151-184. 이영록. 2010. “한국에서의 민주공화국 의개념사.” 법사학연구 42, 49-83.

이정환. 2013. “왕권찬탈과 정통주의 군주제 : 전근대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共和에 대한 재해석의                                                                                                                                                                                   

.” 대동문화연구 82, 415-452.

 

장현근. 2012. “초기유가 화동(和同)’ 논의의 정치철학적 의미.”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1권 호, 7-29.  정상호. 2013. “한국에서 공화(共和) 개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현대정치연구 62, 5-35. 정상호. 2016. “동아시아 공화(共和) 개념의 비교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505, 217-236. 조성일. 2020. 100년 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 서울: 다차원북스.

1

차민경. 2020. “『논어 에』 나타난 공자의()’의 세계관과 상생에 관한 소고.” 유학연구 권, 267-293. 함재학. 2008. “유교적 입헌주의와 한국의 헌정사.” 헌법학연구 14 3, 97-129.

50

Li Chenyang. 2014. TheConfucianPhilosophyofHarmony. London and New York:

알라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2001

알라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은이)궁리2001-10-23초판출간 2001년
312쪽

책소개

한국인의 죽음론을 총체적으로 분석한 책. 이 책에서 지은이는 식물이나 동물 등 폭넓은 생명의 죽음이 아닌, 문화와 인간의 상징적 표상으로서의 죽음론을 펼친다. 민속학자, 특히 한국학자로서의 지은이는 특유의 말솜씨로 '죽음' 에 관한 흥미로운 여러가지 사실들을 되짚어내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한국인의 죽음을 위한 서설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그대, 삶과 죽음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는 이여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몰라보게 되는 죽음들
과잉 상태의 죽음
열린 죽음
죽음이라는 전역(轉役)

제4부 죽음의 문화적? 신화적 형상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신화가 일군 죽음들

제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위한 몇 가지 슬픈 사연들
죽음의 유머

[에필로그]
죽음아, 이제 네가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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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소설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푸르메 刊)
저자 및 역자소개
김열규 (지은이) 

1932년에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인제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원장을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그의 글쓰기의 원천은 탐독이다. 어린 시절 허약했던 그에게 책은 가장 훌륭한 벗이었으며,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두고 간 짐 꾸러미 속에서 건진 세계문학은 지금껏 그에게 보물로 간직되고 있다. 이순(耳順)이 되던 1991년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삶을 살고자 고성으로 낙향했고, 자연의 풍요로움과 끊임없는 지식의 탐닉 속에서 청춘보다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펼쳐 보이고 있다. 여든의 나이에도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며 수십 차례의 강연을 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김열규의 휴먼 드라마: 푸른 삶 맑은 글」, 「한국인의 에로스」, 「행복」, 「공부」, 「그대, 청춘」, 「노년의 즐거움」, 「독서」, 「한국인의 신화」, 「한국인의 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외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한국 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읽기 쓰기 그리고 살기 (반양장)>,<한국 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 (반양장)> … 총 10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최근작 : <나의 바느질 수다>,<식물에게 배우는 네 글자>,<인생도 미분이 될까요>등 총 380종
대표분야 : 과학 5위 (브랜드 지수 295,710점), 청소년 인문/사회 20위 (브랜드 지수 31,328점), 미술 이야기 33위 (브랜드 지수 82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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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국어학자이자 한국학의 대가 김열규교수가 평생의 화두인 죽음을 다룬책으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착각하면서 아둥바둥 사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이미 김열규교수도 죽었다. 그는 사후세계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누구에게는 언어도단 이겠지만... 어떤 이는 궁금할 것이다.  구매
sprenown 2017-07-2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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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은 이유는. 새창으로 보기
끝까지 읽었다.

처음엔 조금 지나면 본론으로 들어가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었고

중간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읽었고

뒷부분은 꼭 끝까지 읽어서 자신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대학원 시절 아니 학부 시절에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최고는 원서, 다음은 번역서, 할 수 없을 때 국내서.'

그런 이야기가 왜 생겼는가 이해했다. 차라리 그냥 수필집으로 기획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각주없는 인문서는 또 참으로 새롭구나!

 

이책의 문제점을 대강 짚어보자면,

먼저 밀도가 없다. 문장은 매끄러우나 그 매끄러운 문장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처음부터 밀도있는 책은 매우 어렵게 읽게 된다. 어떤 책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보량이 늘어나며 열과 성을 다해 읽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권의 책안에 담긴 정보량 자체가 인문서라고 보기엔 너무 적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별로 중요치 않은 예도 두 세번씩 나오곤 한다.

죽음론에 대한 책이라고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의 죽음에 대한 풍습, 설화, 인식 등을 쉽게 이야기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인상을 쓴 책에 불과하다. 풍습의 의미를 해석할 때도 어떤 근거와 자료를 정확히 제시하기 보다는 그저 자기 생각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겠는가 하는 정도이다.

저자의 시각이 매우 재미있다. 저자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어떻게 보면 본능적으로 한국 전통의 장례 의식이 사라져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죽음이 좀더 존중되어야 하며 따라서 장례 절차가 길고 복잡하고 힘겨워야 함을 주장한다. 불교적 색채는 철저히 우리 고유의 것과 분리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유교적 색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꺼내지 않는다. 아마 저자는 유교적인 것을 우리 고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기분만 상하니 하지 않기로 하자. 

김열규 교수의 책은 학부때 숙제를 위해 부분부분 읽었을 뿐이다. 그래도 유명한 교수니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책을 샀다. 나도 국문과 출신으로서 참으로 부끄럽다. 국문학계에 대해 불신 하나 추가다. 궁리 출판사에 대해서도 불신 하나 추가다. 편집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죽음론이라고 저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편집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기획, 편집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의심스럽고 궁금하다.

이 책을 산 돈을 벌기 위해 쓴 시간, 책을 읽느라 쓴 시간, 화를 참느라 노력한 시간, 계속 읽을까 말까를 고민한 시간. 다른 분들이 이런 시간을 쓰게 되지 않길 바란다.

남에게 아픈 소리를 하면 나도 언젠가 아픈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좋지 않았던 책에 대한 리뷰는 쓰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 심한 것 같아 두서없이 지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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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란 2005-09-21 공감(5)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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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런 죽음의 강의록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이 책이 세상에 등장했을때, 각종 언론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죽음에 대해서 파헤쳤던 이유 탓일까? 아마도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달리 죽음에 대한 주제를 갖고 책을 쓴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내가 못봤을 경우도 많을테니 확실한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 간혹 외국에서 들어온 책들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걔중에서 "자살"이라는 이름의 책을 한창 흥미진진하게 읽어서 주변 지인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불길한 책을 읽는다고 말이다. 그저 알고 싶고 흥미로워서 읽는 것인데... + 더보기
습관 2005-01-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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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예습할 수 있을까 새창으로 보기 구매
죽음을 예습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진심으로, 잘 죽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아무리 모모한 삶을 살았다 해도 비참하고 능욕스런 죽음을 맞이한다면 평범하게 살다 평안하게 죽는 인생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아무리 멋진 삶을 살았대도 죽음 앞에서 삶에 연연하고 비굴하게 삶을 구걸하는 그런 마무리도 원치 않는다. 죽음 앞에 초연한 생명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래도, 마음의 연습이라도 해두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의연해지지 않을까...

내 기억 속의 한 아름다운 죽음은 김용택 '섬진강' 속에서 본 할머니의 죽음이다. 연세가 높으신데, 겨울 들판을 보면서 봄에 땅 녹으면 갈란다, 했다던가, 그 할머니의 장례를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로 풀었는지,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 가끔, 햇살이 좋은 날 마당이나 들판이나 운동장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그 가물가물한 조을음 속에서 내가 서른 몇의 젊은 아낙인지, 여든 몇 쯤 세월을 뛰어넘은 노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아지랑이처럼 주마등처럼 지난 일들이 홱 지나쳤다 드러났다 요동칠 때, 아, 이렇게 조을다가 가고 싶다, 그런 생각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 나라에 죽음에 관한 한 권의 책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썼다는 작자의 말만큼 그 사명을 다하며 매우 학술적이지도 않았고 나처럼 감상적으로 좋은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의 예습을 시켜주지도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도, 그렇다고 친밀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라면서 죽음을 삶의 예식으로 끌어들인 우리 민족의 의례도 말하고 죽음과 우주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적인 매개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죽음을 노래한 아름다운 만가들의 가사라도 죽 풀어 써주었더라면 그 선율에 미리 가슴 저려 해 볼만도 했으련만, 그런 것도 아니고...

한국인의 죽음론을 한두어 시간의 강의로 들은 강의록을 본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반갑게 만나길 기대했던 친구에게 느낀 무덤덤함에서 오는 서운함 같은 것이다. 문장이 쉽게 읽히길래 앞에서는 정말 많이 생각한 사람이 자기 것으로 녹아난 죽음의 철학을 쉬운 언어로 조근조근 말해줄 줄 알고 은근히 기대도 했는데... 나는 또 그, 예습해 봐야 소용도 없는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이런저런 사설들을 뒤적거리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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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선생 2003-04-2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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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이 심하고, 구성이 혼란스러운 책 새창으로 보기 구매
몇 년 전, 이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읽어본 결과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모호한 제목들이다. 언뜻 보면 굉장히 시적이면서도 본문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듯하지만, 읽어보면 아무런 내용도 없을뿐더러 이런 제목 때문에 오히려 내용이 더 모호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너무 동어반복이 많다. 마치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듯하면서 본론은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말만을 반복하거나 사변으로 흐르고, 또 끝에는 앞에서 한 말을 다시 언급하는 식이어서 읽는 데 약간 짜증이 났다. 그리고 책 밑에 페이지밖에 적혀 있지 않아 지금 내가 어디를 읽고 있는지 계속 앞으로 넘겨봐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어색한 문장이나 오문도 비교적 많은 편이고 띄어쓰기도 앞에서는 띄었다가 뒤에서는 다시 붙이는 식이 더러 눈에 보였다(그동안, 다름아닌과 같은 단어).

내용도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바리데기 신화를 열 페이지가량 길게 인용하고 끝에서는 죽음은 떠나감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해석을 붙이는 것은 너무 무성의해 보인다. 신화를 이야기했다가 일상을 이야기했다가 외국의 시를 인용했다가 우리의 역사를 인용하는 식의 혼란스러운 구성이 좋은 주제를 조금 무의미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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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2004-02-0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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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망이군요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제목이 라틴어로 돼어있다는 것이 의미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자신은 국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출판의 상업주의적 안목의 소산인가? 아니면 저자의 유식함이 빗어낸 자연스러움인가? 어느 경우든 이상하군. 우리의 죽음은 라틴어인가?

죽음이라, 이 얼마나 아찔하고 현기증이 나는, 그리고 소위 책좀 읽었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두려움으로 쳐다보는 주제인가?
너무나 무거워 감히 가까이 가기도 두려운 그런 주제가 아닌가?
이 주제를 정면으로 일반인이 읽기에 적당한 내용의 글로 풀어낸 저자의 의도와 노고를 치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하나 밖에 줄수없는 이유는

첫째,앞에서도 나온 지적이지만 동의반복적인 설명이 돼풀이 된다는 점이다. 책이란 특히 훌륭한 책이란 한페이지가 무겁고 한 문장 한 문장이 촌철살인의 맛이 있어야 한다.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같은 개념과 예문이 빙빙돈다.이이야기 저이야기. 전체적 안목에서 쓰인것이 아니라 그때 끄때 쓰인것같다

두번째,나는 최소 이런 제목을 걸고 책을 쓸때는 편협하게 국문학적 관점만이 아닌 동양학 전체철학에서의 입장, 각종교에서의 입장 ,서양 철학에서의 입장 그리고 오늘날 세계화시대속에서 죽음의 의미등 이 모든 것이 반드시 다루어져야한다고 본다. 즉 거창한 제목에 부응하지 못한 내용의 부실함이다

셌째,서평을 보고 샀는데 내가 보기엔 나처럼 막연한 기대감으로 구매하기보다 이런 시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좀더 알찬 내용의 저자의 육성으로 된,머리와 자료가 아닌, 책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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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jhn 2002-04-2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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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쪽152*223mm (A5신)437gISBN : 978898880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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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한국인의 죽음론을 총체적으로 분석한 책. 이 책에서 지은이는 식물이나 동물 등 폭넓은 생명의 죽음이 아닌, 문화와 인간의 상징적 표상으로서의 죽음론을 펼친다. 민속학자, 특히 한국학자로서의 지은이는 특유의 말솜씨로 '죽음' 에 관한 흥미로운 여러가지 사실들을 되짚어내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한국인의 죽음을 위한 서설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그대, 삶과 죽음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는 이여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몰라보게 되는 죽음들
과잉 상태의 죽음
열린 죽음
죽음이라는 전역(轉役)

제4부 죽음의 문화적? 신화적 형상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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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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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인제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원장을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그의 글쓰기의 원천은 탐독이다. 어린 시절 허약했던 그에게 책은 가장 훌륭한 벗이었으며,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두고 간 짐 꾸러미 속에서 건진 세계문학은 지금껏 그에게 보물로 간직되고 있다. 이순(耳順)이 되던 1991년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삶을 살고자 고성으로 낙향했고, 자연의 풍요로움과 끊임없는 지식의 탐닉 속에서 청춘보다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펼쳐 보이고 있다. 여든의 나이에도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며 수십 차례의 강연을 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김열규의 휴먼 드라마: 푸른 삶 맑은 글」, 「한국인의 에로스」, 「행복」, 「공부」, 「그대, 청춘」, 「노년의 즐거움」, 「독서」, 「한국인의 신화」, 「한국인의 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외 다수가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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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었다.

처음엔 조금 지나면 본론으로 들어가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었고

중간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읽었고

뒷부분은 꼭 끝까지 읽어서 자신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대학원 시절 아니 학부 시절에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최고는 원서, 다음은 번역서, 할 수 없을 때 국내서.'

그런 이야기가 왜 생겼는가 이해했다. 차라리 그냥 수필집으로 기획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각주없는 인문서는 또 참으로 새롭구나!

 

이책의 문제점을 대강 짚어보자면,

먼저 밀도가 없다. 문장은 매끄러우나 그 매끄러운 문장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처음부터 밀도있는 책은 매우 어렵게 읽게 된다. 어떤 책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보량이 늘어나며 열과 성을 다해 읽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권의 책안에 담긴 정보량 자체가 인문서라고 보기엔 너무 적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별로 중요치 않은 예도 두 세번씩 나오곤 한다.

죽음론에 대한 책이라고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의 죽음에 대한 풍습, 설화, 인식 등을 쉽게 이야기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인상을 쓴 책에 불과하다. 풍습의 의미를 해석할 때도 어떤 근거와 자료를 정확히 제시하기 보다는 그저 자기 생각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겠는가 하는 정도이다.

저자의 시각이 매우 재미있다. 저자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어떻게 보면 본능적으로 한국 전통의 장례 의식이 사라져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죽음이 좀더 존중되어야 하며 따라서 장례 절차가 길고 복잡하고 힘겨워야 함을 주장한다. 불교적 색채는 철저히 우리 고유의 것과 분리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유교적 색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꺼내지 않는다. 아마 저자는 유교적인 것을 우리 고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기분만 상하니 하지 않기로 하자. 

김열규 교수의 책은 학부때 숙제를 위해 부분부분 읽었을 뿐이다. 그래도 유명한 교수니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책을 샀다. 나도 국문과 출신으로서 참으로 부끄럽다. 국문학계에 대해 불신 하나 추가다. 궁리 출판사에 대해서도 불신 하나 추가다. 편집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죽음론이라고 저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편집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기획, 편집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의심스럽고 궁금하다.

이 책을 산 돈을 벌기 위해 쓴 시간, 책을 읽느라 쓴 시간, 화를 참느라 노력한 시간, 계속 읽을까 말까를 고민한 시간. 다른 분들이 이런 시간을 쓰게 되지 않길 바란다.

남에게 아픈 소리를 하면 나도 언젠가 아픈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좋지 않았던 책에 대한 리뷰는 쓰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 심한 것 같아 두서없이 지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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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등장했을때, 각종 언론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죽음에 대해서 파헤쳤던 이유 탓일까? 아마도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달리 죽음에 대한 주제를 갖고 책을 쓴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내가 못봤을 경우도 많을테니 확실한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 간혹 외국에서 들어온 책들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걔중에서 "자살"이라는 이름의 책을 한창 흥미진진하게 읽어서 주변 지인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불길한 책을 읽는다고 말이다. 그저 알고 싶고 흥미로워서 읽는 것인데...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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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예습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진심으로, 잘 죽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아무리 모모한 삶을 살았다 해도 비참하고 능욕스런 죽음을 맞이한다면 평범하게 살다 평안하게 죽는 인생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아무리 멋진 삶을 살았대도 죽음 앞에서 삶에 연연하고 비굴하게 삶을 구걸하는 그런 마무리도 원치 않는다. 죽음 앞에 초연한 생명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래도, 마음의 연습이라도 해두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의연해지지 않을까...

내 기억 속의 한 아름다운 죽음은 김용택 '섬진강' 속에서 본 할머니의 죽음이다. 연세가 높으신데, 겨울 들판을 보면서 봄에 땅 녹으면 갈란다, 했다던가, 그 할머니의 장례를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로 풀었는지,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또 가끔, 햇살이 좋은 날 마당이나 들판이나 운동장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그 가물가물한 조을음 속에서 내가 서른 몇의 젊은 아낙인지, 여든 몇 쯤 세월을 뛰어넘은 노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아지랑이처럼 주마등처럼 지난 일들이 홱 지나쳤다 드러났다 요동칠 때, 아, 이렇게 조을다가 가고 싶다, 그런 생각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 나라에 죽음에 관한 한 권의 책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썼다는 작자의 말만큼 그 사명을 다하며 매우 학술적이지도 않았고 나처럼 감상적으로 좋은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의 예습을 시켜주지도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도, 그렇다고 친밀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라면서 죽음을 삶의 예식으로 끌어들인 우리 민족의 의례도 말하고 죽음과 우주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적인 매개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죽음을 노래한 아름다운 만가들의 가사라도 죽 풀어 써주었더라면 그 선율에 미리 가슴 저려 해 볼만도 했으련만, 그런 것도 아니고...

한국인의 죽음론을 한두어 시간의 강의로 들은 강의록을 본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반갑게 만나길 기대했던 친구에게 느낀 무덤덤함에서 오는 서운함 같은 것이다. 문장이 쉽게 읽히길래 앞에서는 정말 많이 생각한 사람이 자기 것으로 녹아난 죽음의 철학을 쉬운 언어로 조근조근 말해줄 줄 알고 은근히 기대도 했는데... 나는 또 그, 예습해 봐야 소용도 없는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이런저런 사설들을 뒤적거리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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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이 심하고, 구성이 혼란스러운 책 새창으로 보기 구매
몇 년 전, 이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읽어본 결과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모호한 제목들이다. 언뜻 보면 굉장히 시적이면서도 본문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듯하지만, 읽어보면 아무런 내용도 없을뿐더러 이런 제목 때문에 오히려 내용이 더 모호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너무 동어반복이 많다. 마치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듯하면서 본론은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말만을 반복하거나 사변으로 흐르고, 또 끝에는 앞에서 한 말을 다시 언급하는 식이어서 읽는 데 약간 짜증이 났다. 그리고 책 밑에 페이지밖에 적혀 있지 않아 지금 내가 어디를 읽고 있는지 계속 앞으로 넘겨봐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어색한 문장이나 오문도 비교적 많은 편이고 띄어쓰기도 앞에서는 띄었다가 뒤에서는 다시 붙이는 식이 더러 눈에 보였다(그동안, 다름아닌과 같은 단어).

내용도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바리데기 신화를 열 페이지가량 길게 인용하고 끝에서는 죽음은 떠나감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해석을 붙이는 것은 너무 무성의해 보인다. 신화를 이야기했다가 일상을 이야기했다가 외국의 시를 인용했다가 우리의 역사를 인용하는 식의 혼란스러운 구성이 좋은 주제를 조금 무의미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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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2004-02-0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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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망이군요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제목이 라틴어로 돼어있다는 것이 의미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자신은 국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출판의 상업주의적 안목의 소산인가? 아니면 저자의 유식함이 빗어낸 자연스러움인가? 어느 경우든 이상하군. 우리의 죽음은 라틴어인가?

죽음이라, 이 얼마나 아찔하고 현기증이 나는, 그리고 소위 책좀 읽었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두려움으로 쳐다보는 주제인가?
너무나 무거워 감히 가까이 가기도 두려운 그런 주제가 아닌가?
이 주제를 정면으로 일반인이 읽기에 적당한 내용의 글로 풀어낸 저자의 의도와 노고를 치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하나 밖에 줄수없는 이유는

첫째,앞에서도 나온 지적이지만 동의반복적인 설명이 돼풀이 된다는 점이다. 책이란 특히 훌륭한 책이란 한페이지가 무겁고 한 문장 한 문장이 촌철살인의 맛이 있어야 한다.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같은 개념과 예문이 빙빙돈다.이이야기 저이야기. 전체적 안목에서 쓰인것이 아니라 그때 끄때 쓰인것같다

두번째,나는 최소 이런 제목을 걸고 책을 쓸때는 편협하게 국문학적 관점만이 아닌 동양학 전체철학에서의 입장, 각종교에서의 입장 ,서양 철학에서의 입장 그리고 오늘날 세계화시대속에서 죽음의 의미등 이 모든 것이 반드시 다루어져야한다고 본다. 즉 거창한 제목에 부응하지 못한 내용의 부실함이다

셌째,서평을 보고 샀는데 내가 보기엔 나처럼 막연한 기대감으로 구매하기보다 이런 시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좀더 알찬 내용의 저자의 육성으로 된,머리와 자료가 아닌, 책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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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jhn 2002-04-2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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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교보문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교보문고

소득공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궁리 | 2001년 10월 20일 출간
총 4 중4 10.0 (리뷰 2개) 클로버 리뷰쓰기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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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인문 > 철학 > 한국철학 > 한국철학일반

한국인의 죽음론 고찰서. 죽음의 의미를 끈기 있게 고찰하는 한편, 고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태도를 심도있게 서술했다. 이를 통해 우리네 삶과 죽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죽음의 공포를 덜어내고 정을 붙이려면 죽음과 절실하게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자소개

저자 : 김열규작가 정보 관심작가 등록
국어학자/국문학자
목차
제1부 거듭 되새기는 죽음들
- 삶을 위한 죽음의 사상 ...29
- 우리들. 죽음을 내다보는 존재 ...44

제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 ...59
- 우리들 죽음의 자화상 ...64

제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 그대. 삶과 죽음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는 이여 ...149
-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158
- 몰라보게 되는 죽음들 ...165
- 과잉 상태의 죽음 ...177
- 열린 죽음 ...196
- 죽음이라는 전역 ...204

제4부 죽음의 문화적.신화적 형상
- 지는 잎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217
- 신화가 일군 죽음들 ...258

제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 죽음을 위한 몇 가지 슬픈 사연들 ...273
- 죽음의 유머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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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이것은 삶이 그 자신의 숨결을 그리고 핏기운을 다그치기 위해서 있는 말이라야 한다. 죽음을 잊으면 삶이 덩달아서 잊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그 사이 '죽음론'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지 못했다면 삶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두려움과 몸서리, 비통과 탄식, 좌절감과 절망, 상실감과 허무, 그러면서도 엄숙과 장중함.

이것들을 죽음을 더불어서 우리는 경험한다. 더 이상 비길 게 없는 엄청난 감정의 복합체다. 그 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자니 어둡고 습지고 침울했다. 공포롭기조차 했다. 하지만 끝내는 밝음과 화함으로 책을 끝맺기로 했다.'메멘토 모리.'삶을 다그치듯 죽음을 잊지 말자.
- <책머리>중에서

본문 중에서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죽음을 죽는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똑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뿐이다. 잘 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 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죽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체 성장과 소멸의 당연한 과정의 일부로서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설혹 그 과정에 껴들어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값을 지닐 수 있는 엄연한 왕국이다.

인간에게 목숨이 있는 동안, 인간은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에 매여 있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다. 이 생물의 사슬을 깨기 위해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당위이고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애써 얻어낸 수확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생물학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생물학적인 사실로 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형이상학과 영혼의 종교학에 짙게 물든 빛과 더불어 우리들을 찾아든다. 정신과 영혼의 자기 증명을 위해 우리들은 죽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법도 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명료하게 정신 및 영혼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최종적인 여행 목적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음은 거듭 자유의 징후가 될 수 있다. 죽음의 필연성은 종국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쿠제의 말은 그러기에 음미해봄직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에 기댄 피아론적인 명제가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목숨이 지는 그 순간에 자기 죽음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숨이 지는 순간의 죽음은 이미 자기 죽음이 아니다. 남의 죽음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흔히 임종이라고 하는 그 죽음이 자기 죽음이 아님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의식, 인간의 자의식 저 바깥으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사뭇 먼 암묵의 어느 우주공간으로 유성처럼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으로 잡혀지지 않는 것을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식과 주먹은 인간이 뭣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두 개의 큰 도구다.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미 죽음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과 따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죽음을 미래의 어느 모르는 시점에 두고, 그 시점에 도달하기까지 죽음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인간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수시로, 죽음을 갖는다.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게 다름아닌 인간적 삶의 양상이다. 그것은 무척 개성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삶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 누군가의 말은 매우 그럴듯한 것이다. 또한 죽음과 성애(性愛), 곧 타나토스와 에로스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둘을 서로 얽혀서 상호 기생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아주 그럴듯하다고 해야 한다.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도 생물학적인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로서 명기되어야 할 명제다.

죽음을 문화로 가꾸다
인간은 죽음을 생물학에서 풀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연에서 풀어놓았다. 죽음이 자연의 이법으로 절로 인간을 찾아오는 것을 인간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떠오른 해가 지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갈잎이 지는 것은 자연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인간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그것에 기댄 비유법으로만 처리하기를 인간은 바라지 않았다.

인간들은 죽음을 대단히 인위적인 것, 매우 인공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그런 뜻으로 인간은 죽음을 만들고 생산한 것이다. 제 손으로 손수 죽음을 제작한 것이다. 죽음을 만드는 생산 공정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꽤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규격적이고 엄정한 것은 공산품이 아니다. 인공위성 따위도 아니고 유전공학 따위도 아니다. 그렇다면 뭣일까.

그것은 바로 의식, 종교적 의식이다.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이 육체의 것이기를 그만두게 된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인간 죽음은 인간 육체에 딸린 게 아니다. 육체의 종말, 말하자면 시신의 해체와 부패는 사실 죽음의 의식의 관여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인간 죽음을 떠난 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질적인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문화로 가꾸어왔다. 죽음을 문화가 되게 가꾸었고 뒤이어서 죽음을 문화 속에 가꾼 것이다. 에드가 모랭이 그의 유명한 저서 『인간과 죽음』에서 “이리하여 인간은 그 기원이 있은 뒤 줄곧 죽음을 그들의 풍족함과 그들의 갈망에 의해 길러온 것이다”라고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들은 소극적으로 죽음이 문화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사형제도가 빚는 죽음, 전쟁이 빚는 죽음은 인간 문화가 생산한 죽음의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앞서와는 좀 달리 이런 뜻으로도 인간은 죽음을 생산한다. 죽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러 고안해낸 인간적인 장치가 다름아닌 사형이고 그리고 전쟁이다. “죽음의 의식(意識)이 남겨놓은 마지막의 것, 그것이 곧 인간 자아이다”라는 명제에 맞추어서 “죽음의 의식이 남겨놓은 또 다른 마지막의 것, 그게 곧 문화다”라고 해도 큰 잘못은 없다.

'죽음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니라 문화였기 때문이다. 하긴 자연에도 역사란 말을 쓰기는 한다. 가령, 지각의 역사, 지구의 역사, 그리고 우주의 역사란 말이 실제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란 것이 결정론적인 변화인데다, 그 변화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몇십, 몇백만 년을 예사로 넘나든다. 거기에다 그런 것을 역사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것에는 주체가 없다.

일어날 변화가 확인될 수 있는 것뿐이다. 따라서 자연의 경우는 역사라고 부르기보다 변화라고 부르는 게 옳다. 덩달아 자연의 역사란 개념에 또 다른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다. 이 경우, 시간이란 게 완전한 중성이다. 변화의 주체가 능동적인 행위로 참획하는 그런 시간 개념의 존립이 불가능하다.

역사란 아무래도 문화의 몫이지만, 죽음의 역사가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닌 문화라는 것에 대해 말해주게 된다. 이른바 가정의례준칙에 묶인 오늘의 사람들이 조선조 말의 사람들이 누렸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누릴 수 없음은 사뭇 뻔한 일이다. 또한 주자가례에 묶인 조선조인들의 죽음이 불법에 귀의한 고려인들의 죽음과 다르리란 것은 아주 뻔한 일이다.

이같이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의 테를 벗어나고 자연의 테를 벗어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닌 죽음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죽음은 정신이나 영혼의 몫이 되고 문화의 몫이 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경우, 조선조 말기를 거쳐 극히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도 확연하게 가족구성원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죽은 이는 가버린 가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족으로서 한 집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보이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끼리 사이의 교섭보다 더 긴밀한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는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호적부에서 삭제될 때, 죽은 이는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서 삭제되는 것이다. 사망신고서는 영원한 퇴거증명서다. 이 두 가지 죽음 사이에, 커다란 문화체계의 차이가 있음을, 역사의 차이가 있음을, 그리고 죽음을 정신화하고 영혼화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 소개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밑속학 전공.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역임.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 연구교수 역임. 현재 인제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저서:『한국인의 시적 고향』『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아리랑, 역사여 겨레여 소리여』『어머니, 동화는 이렇게 읽어주세요』『빈 손으로 돌아와도 좋다』『한국인의 신명』 등이 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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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l 2018-07-05 07:33:36 총 4 중4 구매 정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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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ha88 2018-06-22 01:26:44 총 4 중4 구매 좋아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내려놓게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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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죽음학의 대부! he**kmh | 2013-06-2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김열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서울: 궁리, 2001.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308)
 
이 책은 한국 학자에 의해 쓰여진, ‘죽음’에 대한 에세이의 대표적인 서적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작품과는 비슷한 관점이지만, 좀 더 한국스러운 글들이 담겨져 있다. 오히려 서양서적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워낙에 방대한 내용의 글들이 담겨있을뿐 아니라 한국사를 잘 모르는 까닭일 거다. 하지만 한글이라는 문자로 너무나도 잘 쓰여진 ‘죽음’에 대한 산문집이다. 너무 매력적이고, 인용할만한 문구들이 너무도 많았다.
 
문제제기를 하는 대목들은 다채롭고도 폭넓다. 죽음이라는 것이 절망적인 까닭은 그야말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38-9), ‘죽음의 몰개성’(67-8), 삶에 이어 죽음마저 박탈당하고(214),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이 산 자를 위해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져 형식을 존중하는 의례는 지나치게 간소화되었다.(167, 282-3) 한편, 우리 모두 홀로코스트의 공범이 될수 있다는 점까지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306)
 
이러한 잔혹한 현실을 직면할 때에라야 비로소 대안을 세울 수 있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한계가 인간 존재의 실제 모습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270) 그런 까닭에 “죽음을 예성하며 삶이 재구성될 때부터 사람들은 죽음조차 살게 된다. 에누리없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사는 것이다.”(221) 죽음을 달관하고 미리 준비하고 연습했던 사람들의 ‘비창감’을 본받아야 하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닫기
'죽음의 선물을 받다'- 한국인의 죽음론을 통해 본 죽음의 의미와 가치 ch**edu59 | 2010-11-25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우리의 삶 주변엔 수많은 죽음이 공존하고 있고 죽음을 떼어놓고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와 가까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외면한다.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기억은 나 또한 가지고 있는데, 어릴 적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두려움 또한 컸다. 항상 부모님이나 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무서워 밤잠을 못 이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두려움은 커가면서 조금씩 극복이 됐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부정하고 망각하려는 태도를 갖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들이 외면하는 ‘죽음’이 ‘삶’만큼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란 ‘소멸’과는 구분되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를 뛰어넘은 것이며, ‘죽음’은 오직 인간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서도 큰 의미를 가지며 그러므로 인간이 ‘죽음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떠한가? 전 세계는 전쟁, 대량학살 등으로 죽음을 ‘대량생산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유명 연예인의 자살부터 노인, 초등학생의 자살까지 ‘자살공화국’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또한 뇌사, 안락사 등이 윤리적 문제로 이슈가 되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 이 시대에 저자의 죽음에 대한 담론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특히 우리, ‘한국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적 문화 중 많은 부분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언어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반된 모습들이었다. 사람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 말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쓰는 대신에 ‘돌아가시다’, ‘숨이 끊어지다’와 같이 돌려 말하는 우원법을 흔히 사용하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도피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죽겠다’, ‘기가 죽는다’처럼 사람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말들에는 오히려 죽음이란 낱말을 과용하고 오용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은 죽음을 ‘떠나감’이 아닌 ‘돌아감’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은 생명의 원천이며 본향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죽음에 관한 인식과는 매우 다른 부분이다.
이처럼 조상들은 죽음을 단지 두렵기만한 것이 아니라 신성하고 경건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례와 관련된 여러 의식들이 존재했다. 저자는 지붕위에서 떠도는 영혼을 부르는 초혼 의식부터 곡성, 염, 상복과 상장 등의 다양한 의식들이 죽음과 관련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어찌 보면 복잡해 보이는 이러한 의식들은 조상들이 그만큼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저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의 모습과 더불어 현재의 죽음의 모습까지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인의 죽음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죽음이 의학적 결함이나 한계 등으로 간주되는 등 죽음은 인간의 물리적, 생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 장례 의식이 간소화 되고, 장례가 상업화되었다. 이제는 집이 아닌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장례의 모든 절차 또한 가족이 아닌 장례 관련 업체에서 모두 해 준다. 이러한 장례 의식의 쇠락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결국 죽음을 중요하게 생각해 장례를 경건하고 신성한 절차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시신을 ‘처리’하는 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장례 문제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좀 더 확대하면, 본질을 잊은 채 편리성만을 추구하는 현대 물질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전통적 장례 의식이 사라지고 변해가는 모습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행태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에서 관을 크레인으로 옮기고 아픈 환자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게 하는 것 등이 악상중의 악상에 해당한다며 이를 무성의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는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흐름이 있는 것인데, 오늘날 과거 조상들이 행하던 전통 의식을 모두 행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여건이 여의치 않다면 의식을 간소화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의식을 간소화함에 따라 거기에 깃든 사상이나 생각까지 없어지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러나 전통적 의식을 간소화한다고해서 이를 모두 악상이고 무성의 한 것이라 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인 듯 해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나의 생각 또한 ‘산 자의 관점’에서만 죽음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일면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러한 전통적 의식에 너무 비중을 두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오히려 관의 이러한 형식적 요소들이 죽음을 무겁고 이질적이게 느끼게 할 것이다. 죽음을 웃으면서 맞이하자는 작가의 메시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과 문화와 연관된 ‘한국인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새롭게 조명한 이 책은 오늘날 죽음의 의미를 되살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삶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이 곧 삶으로 이어진다. 즉, 오늘날 우리사회의 죽음의 위기는 거꾸로 삶의 위기임을 말해준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책의 제목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 큰 메시지가 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알고 생에 대한 열정, 열의를 불태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죽음의 선물’이다.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대신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되니, 나 역시 죽음에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닫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qu**tz2 | 2001-12-18 | 추천: 0 | 5점 만점에 3점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통곡한다. 마치 그것이 모든것의 끝이라도 되는 마냥. 상가집에 갔다온 사람들의 몸가짐은 조심스러워진다. 다른 이의 불행이 나에게 악을 가져다 주진 않을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때부터인지 잘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배척했던 것 같다. 삶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의 말도 있긴 했지만, 이러한 표면화된 표현이 굳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은 산 자들에게 늘 배척되기 마련이었다. 무덤이나 화장터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 동네마다 일어나는 님비현상은 어쩌면 산 자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주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늘 그렇듯 산자들은 죽은자들에 대해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거만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피함을 원했던...

이 책은 그러한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바라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도입과 함께 죽음에 있어서도 도래된 몰개성화, 무가치화, 대량화 등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차량이 지나갈 지라도 어느 누구 하나 그 차량을 보며 성호를 긋는다던지 조용히 묵념한다던지 하는 사람은 존재치 않는, 오히려 그 장례식 차량 조차도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차량과 속도경쟁을 벌이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차가운 외침이랄까.

이 책의 그러한 관점이 때론 신선하게 느껴진다. 삶과 죽음은 정확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삶의 태동에 죽음이 숨쉬고 있고, 죽음은 삶을 영양분으로 삼아 서서히 커가고 있는 것이라고... 영양분인 삶이 다 떨어졌을 때 마침내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가끔씩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보다 그것을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으리라 본다.

이 책은 죽음의 역사에 대해 굉장히 정확하게 고찰하고 있었다. 각 시대의 죽음에 대한 관점, 무덤의 모양 등을 통해, 태초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고 두려워하진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는 동쪽방향을 향해 일제히 뻗은 무덤과, 산이 있는 곳을 향해 자리잡고 있는 무덤들은, 죽음이 한 사람의 영원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상징함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예였다. 아이가 죽었을 경우 번데기처럼 나뭇가지에 매달아 또 다른 삶이 잉태되길 기원했던 모습, 죽은 이의 옷가지를 흔들며 그의 영혼이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갈망해보았던 것. 이와 같은 것들은 오늘날은 도무지 꿈꾸지 힘든 것인듯 하다. 단 4일만에 죽음의 모든 과정이 끝나야 하는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에....

중간에 인용된 제망매가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누이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부모와 자식이 나뭇가지와 낙엽에 불과하다는 식의 표현을 담고 있다. 자식의 모든 삶은 부모로부터 비롯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모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땅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존재임을... 어떻게 보면 너무도 쓸쓸하고 오늘날 죽음이 가지는 단절의 의미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낙엽의 떨어짐이 부식 아닌 보다 더 큰 세계, 미타찰을 향한 나아감임을.... 또 다른 영생을 위한 한걸음 다가섬임을,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잊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신선한 내용의 이 책에도 무언가 문제점이 있긴 있는 듯 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무슨 죽음을 기억할 것인가. 처음 이 책을 손에 잡았을 때 나는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을 기대했었다. 그 내용이 조금은 어려울지라도,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이 이 책을 통해 벌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난 지금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역사적 고찰, 현재의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 정도에 그친 듯 하다. 새로운 의미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애초에 기대했던 거대한 의미는 함의하지 못하고 있는듯 해 조금은 아쉽다.

둘째, 계속적인 내용의 반복성이다. 역사적 고찰은 정말로 신선하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그 어떤 책에서조차도 죽음, 그것도 우리 나라 죽음의 역사를 이렇게 내실있게 다루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읽은 내용이 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뒤에서 2-3번씩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문장 자체가 아주 비슷하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으나, 조금은 다른 말로, 요약 정리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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