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0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민중' 효과 리뷰(김현주), 비평연습 1회차 글쓰기

[프로그램 리뷰] 제237차 월례포럼 <'민중' 효과> 리뷰(김현주)


[프로그램 리뷰] 제237차 월례포럼 <'민중' 효과> 리뷰(김현주)
프로그램 리뷰

by 제3시대 2021. 2. 18. 11:42

제237차 월례포럼 <'민중' 효과> 리뷰


김현주(대전보건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우선 코로나 덕분에 지방에서도 비대면으로 포럼에 참석할 수 있어 감사했다. 민중신학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긴 시간 유학한 황용연 박사의 모습을 괄목상대하고픈 마음이 컸다. 강의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나와 같은 문외한도 이해할 만큼 쉬웠으며, 강의를 마친 후 다른 논문을 들여다보니 전과 달리 뜻이 들여다보일 만큼 눈을 띄우는 힘이 있었다. 강의를 들은 후 이전과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으니 상당한 배움이 있었던 것 같다. 논문에 담긴 복잡한 논의를 연구자의 정리된 언어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민중’이 누구냐는 질문을 학생운동권 시절에 자주 물었지만 뾰족한 답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대개 ‘그들’이라는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민중이라는 말을 놓지는 못했으니, 현실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 아니라는 괴리에 주목한 연구자의 문제의식에 개인적으로 납득이 되었다. 연구자는 이 괴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박권일의 ‘표준시민’이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표준시민은 수도권에서 나타나는 중산층 지향 대중 현상을 가리킨다. 표준시민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정투쟁을 수행한다. 이때 무능력자와 무자격자가 마땅하고 상식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배제되고 마는데, 바로 여기에 민중이라는 용어를 호출하자는 것이다. 1970년 전태일 사건으로 사람들이 눈을 뜨고 민중에 주목하였던 것처럼, 무능력자와 무자격자가 무자비하게 배제되는 사건을 지금 증언하기 위하여 민중이라는 안경을 쓰자는 것이다. 

제 눈에 안경이 같은 사건을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같은 증언을 요청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이주노동자, 난민, 여성, 성 소수자, 하층 노동자만 아니라, 범죄자, 채용시험 탈락자, 대학의 제2캠퍼스 재학생조차 이 무능력자 또는 무자격자로 배제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배제하는 칼금은 우리들 사이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 바울의 칭의론이 비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배제를 해소하기 위한 투쟁담론이라는 김창락의 민중신학적 해석이 흥미롭게 등장한다. 로마 식민지 도시의 디아스포라 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근거로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배제하고자 했다. 이 긴장관계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표준시민과 무자격자로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바울은 교회의 경계를 율법에서 믿음으로 옮김으로써, 무자격자인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이때 바울이 가졌던 남다른 눈이 바로 민중이라는 용어 작용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연구자는 안경을 쓰라고 하지 않고 안경 씌움을 당하라고 말한다. 나는 그가 바디우 식의 사건을 대망하고 있다고 느꼈다. 시각이 바뀌면 시야가 달라진다. 민중이라는 안경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과 경계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경계를 바라보게 할 것이다. 나-남을 알아보는 시력이 배제의 도구가 되어서는 우리가 직면한 시대적·사회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다. 우리의 증언은 우리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인식하고 해석하고 정의하여 마침내 경계를 옮기고 허무는 일이 될 것이다.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몸은 경계를 옮기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성벽이라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담을 허물고 지성소 안에서 사람과 신을 가르던 휘장을 찢었다. 우리들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조각내는 헝클어진 경계를 쳐다보고 경계 너머에 있는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이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증언할 수 있다.

강의 후 질의에 답하며 연구자는 ‘경계를 허무는 사건의 양면성’을 생각하는 민중신학자의 조심스러움을 덧붙였다. 문득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을 생각했다. 성이 다른 방향으로 무너졌다면 성을 돌던 백성들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현실에서는 경계를 움직이고자 하는 힘의 의도대로 결과가 펼쳐지지 않을 때도 많다. 이제 와서 우리가 촛불을 후회하겠는가? 사건은 영원으로부터 현실로 온다. 학자의 정교한 시각과 신중한 계산, 신학자다운 초월적 관점을 느끼며 이제는 다음 연구 결과물을 기다리겠다.

황용연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은 배제된 사람들이 자기식의 언어를 갖게 하자는 목적으로 글쓰기 강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다. 글쓰기는 두려운 일이다. 생각과 마음을 박제하는 결과물이 무겁고 의도와 다르게 적힌 내 글은 낯설기도 하다. 그러나 어려운 논문을 쉽게 설명하는 황용연 박사라면 때로는 표준시민인 듯싶다가 졸지에 무자격자 또는 무능력자로 전락하고 마는 우리들이 무겁거나 낯설지 않은 내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도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출처: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1297 [웹진 <제3시대>]


[#180, 비평연습 특집] 그의 이름은(창세기 2:4-3:24) : 
비평연습 1회차 글쓰기
웹진 제3시대

2021-11-07
조회수 166
그의 이름은 (창세기 2:4-3:24) : 비평연습 1회차 글쓰기

김현주(대전보건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첫 사람의 이름은 사람일까, 아담일까, 남자일까? 그대와 함께 사는 강아지의 이름은 개인가, 댕댕이인가? 시츄일수도 있고 푸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애완하는 강아지를 개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여느 강아지와 다른 내 아이이며 내가 이름을 부를 때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안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청소노동자들의 몸짓을 춤으로 담은 과정을 영상으로 보았다. 동대입구역에서 야간노동을 하는 그분의 이름은 배남이였다. “내가 배남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이제껏 누가 볼까 창피하던 청소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당하는 경험을 그분은 눈물로 감격했다.

성경의 첫 사람은 아담이다. 창조설화에는 개체의 이름과 종의 이름이 섞여 있다. 그래서 이 첫 사람을 좀 알아보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한다. 한글 성경에서는 아담을 사람이라고도 번역했고 남자라고도 번역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첫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첫 사람은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지어 불러줄 이가 아무도 없는 아담에게서 절대 고독의 무게가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이름이 없던 첫 사람의 직업은 작명가였다. 그는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며 살았다. 짐승을 보고 그가 이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었다. 허나 그가 지어준 이름은 상대와 관계를 구성하는 애칭이 아니라 공식적인 명칭이었다. 아담은 여러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으나 무엇과도 벗 삼지는 않은 것 같다(창 2:18-20). 첫 사람이 하나님이 데려온 강아지에게 ‘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아니면 ‘댕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전자였다. 만일 후자였다면 하나님이 추가로 여자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테다. 사람이 혼자라서 좋지 않으니 짝을 지어 주자던 하나님의 첫 시도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창조자가 첫 사람의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하나님이 첫 사람의 짝(돕는 베필)이 되어줄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마치 첫 사람이 어떤 짐승도 짝으로 삼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사람의 짝으로는 맞지 않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이 편지는 성경에 새겨져 기독교 세계에서 가부장을 지지하는 메시지로 기능해 왔다. 성인지 감수성이 좀 생기고 나서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에서 아내의 복종은 수월하고 남성의 사랑은 엄청 힘들다는 식으로 양보하기도 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계를 해체하지는 못한다. 비록 바울이 윤리적인 설교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였으나 이 비유를 부부관계의 첫 모형인 창조 설화의 첫 남자와 아내의 관계에 비추어 보면, 바울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동등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예수는 생전에 딱 한 번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미래형으로 말한 것 외에 교회라는 것을 시도한 적이 없다. 베드로와 긴장 관계에서 정통성이 간절했던 바울이 본격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관리하면서 자신이 세운 교회의 권위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주장하고 싶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 동등함은 동일함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고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처럼 존재는 구별이 되지만 남자와 여자는 그런 구별이 없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여도 교회의 위상은 상당히 올라간다.

이 동등한 여자와 남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나님은 첫 사람의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들어 데려왔다. 이제 첫 사람 아담은 더 이상 아담이 아니다. 계산을 해 보면, 갈빗대를 잃은 아담은 당연히 원래 아담보다 모자란다.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 아담에게서 떼어낸 갈빗대는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창 2:23). 여기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표현에 NASB는 fashion이라는 동사를 썼다. 상당히 모양을 낸 것 같은 느낌이다. 들짐승도 날짐승도 움직이지 못한 아담의 굳은 마음을 흔들어보겠다는 창조자의 의지겠다. 갈빗대를 잃어 아담보다 조금 모자라게 된 (첫 사람이 아닌) 첫 남자는 이제 여자에게서 자신의 모자람을 채워 줄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른다(창 2:24). 합본 편집된 성경에서 가장 앞자락에 기록된 노래다.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던 이름 없고 외로운 작명가에게 이제 재미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동안은 갈빗대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빗대를 잃고 부족함이 생기자 관계에 대한 갈망도 생긴 것이 우연일까? 처음 만들어진 완벽했던 첫 사람은 여러 짐승과 심지어 창조주에게도 무심했다. 세상에는 동식물이 가득하고 성부, 성자, 성령이 역동하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가 ‘홀로’라서 좋지 않다고 하였다. 복잡한 놀이공원에서 홀로인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창조자가 그의 벗이 되어주는 대신 그에게 벗을 만들어 준 이유는 아무래도 그에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부족함’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 같다. 갈빗대라는 것이 신체 기관인지 마음의 조각인지 영혼의 부스러기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빠져 나간 ‘빈자리’가 없는 첫 사람은 완벽하지만 무언가 모자랐던 것이다. 이름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던 그에게 결핍이 없어서 부족했다는 역설이 흥미롭다.

이어서 선악과를 먹는 장면에서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분명히 첫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다는데, 여자의 말에서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고, 어기면 우리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묘하게 달라져 있다. 남자가 들은 말을 여자에게 정확히 전달했다면 여자가 열매를 가져와도 바로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는 했겠지. 사실 남자도 헷갈렸을까? 여자가 열매를 먹었다는데 죽지 않고 와서 열매를 주니까 아마 괜찮은가보다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 중요한 장면에서 아담은 망설이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은 막연하지만 그걸 어기고도 생존한 아내가 와서 하는 말은 구체적이다. 그래 너만 먹을 순 없지. 나도 먹어보자.

그런데 여자만 열매를 먹어서는 나타나지 않던 열매의 효과가 남편도 먹고 나서야 나타난다. 그들은 눈이 밝아졌다. 이름이나 짓던 한량이 노동으로 옷을 지어 벗은 몸을 가린다. 벗은 몸이 부끄러울 수 있는 여건은 누군가가 쳐다볼 때다. 길고양이는 옷을 입는 법이 없다. 그래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고양이는 인간의 몸을 쳐다보지 않는다. 관심이 없으므로. 마치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 노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다던 상황처럼 상대의 시선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가, 눈이 밝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선악과를 먹은 효과는 일차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타났다. 만일 첫 사람이 홀로일 때 선악과를 먹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웠을까? 여자가 뱀을 만나 열매를 따 먹은 후 남편 것도 따서 가져올 때 옷을 입었을 리가 없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상대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져서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된 동산의 파국이자 인간이 만드는 새로운 관계, 사회의 시작이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의 몬스터는 괴롭힐 대상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두 찾아서 죽임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외롭게 살아가게 한다. 이 만화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존재도 없는 것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성경은 끝내 가인과 아벨과 셋의 아버지인 첫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내내 아담이었다. 그러나 첫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었다. 하와라는 이 이름은 창조된 동산을 떠나 인간의 사회로 가면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하게 될 아내에게 선물처럼 남편이 지어준다. 첫 남자가 죽을 때까지 아내를 ‘생명’이라고 불렀다니, 애절하지 않은가! 그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그의 입으로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말했을 것이다. ‘생명’이라고 불리는 그의 아내는 세 아들을 낳았고 가인과 셋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창 4:1, 15). 아벨의 이름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 ‘부족함’이 완벽함이 지닌 모자람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첫 사람이자 첫 남자인 이름 없는 사나이는 바울이 로마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장차 오실 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언급된다(롬 5:14). 죄를 지은 첫 사람이라는 멸칭을 장차 오실 분의 모형으로 역전시키는 바울의 논리가 흥미롭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갈빗대를 지녔던 첫 사람일까, 아니면 갈빗대를 잃고 여자의 짝이 된 첫 남자일까? 다시 묻자. 예수는 남자였을까? 요셉의 정자 없이 마리아의 태에서 성령으로 발생되었다면 일단 Y 염색체를 인간에게서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굳이 남성일 필요가 없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성이든 굳이 공개할 필요도 없었다. 분명히 예수는 남성이 아니라 인간으로 성육신하였고 인간으로 살았고 인간으로 부활하였다. 예수는 혼인하지 않았고 자녀를 낳지 않았다. 남성으로서 생식능력을 확인한 바 없으니 남성이었다고 주장할 생물학적 근거도 없다. 그러니 예수의 모형으로 언급되는 아담은 갈빗대를 지닌 첫 사람이라고 하자. 그 사람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그들의 관계도 들어있었다. 선악과를 먹고 죽음을 맛본 이는 개별적인 여자,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인간(人間)이었다. 이 비밀을 자기 몸에 간직한 아담은 누군가의 남편이기 전에 온전한 원형적 인간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지어 준 이름으로 불리며 개인적인 관계 속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어야 했고 모든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초주체(hypersubject)여야 했으니까. 그리고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는 아담의 이름으로 인류와 만났다. 첫 사람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비로소 모든 관계를 왜곡시킨 초주체로 이름을 얻는다. 이것은 공자가 논어에서 답한 세상을 바로 세우는 정명(正名)이다. 이제 나는 초주체라는 괴물이 해소된 새로운 세상에서는 hyposubjects가 이름을 얻을 수 있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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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posubjects are necessarily feminist, colorful, queer, ecological, transhuman, and intrahuman. Hyposubjects make revolutions where technomodern radar can’t glimpse them. They patiently ignore expert advice that they do not or cannot exist. They are skeptical of efforts to summarize them, including everything we have just said. Timothy Morton)

ⓒ 웹진 <제3시대>

2021/12/19

알라딘: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묻고 담정 답하다

알라딘: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묻고 담정 답하다  
도법, 신상환 (지은이) 비(도서출판b) 2021-12-15

269쪽
152*223mm (A5신)
416g


책소개

한국 실천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실상사 도법 스님과 중관학자인 담정 신상환이 2019년 봄부터 2020년 가을까지 10여 차례 만나서 중과 중도에 대한 대담을 나눴다. 실천불교와 교학불교를 각각 대표할 수 있는 두 지성의 대담이다. 그 결과물을 묶은 것이 이 책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편성되었다. 제1부는 중도로 부처님 생애에 대해서, 제2부에서는 중도로 불교와 중관사상의 기본 교리를, 제3부는 중도로 한국 불교를 논한다. 그리고 책 뒤에는 중과 중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 자료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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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ㅣ서문ㅣ
도법 스님: 친구 따라 강남 간다 9
담정 신상환: 강남 땅값이 비싸 강을 건너기로 했다 17

제1부 중도로 부처님 생애를 논하다
인도 사상의 근간인 업과 윤회 23
부처님의 가르침은 응병여약, 표월지지 33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 36
부처님의 상가 운영과 중도의 실천 38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한 해석 43

제2부 중도로 불교 교리를 논한다

1. 부처님의 반열반 이후의 불교 53
역사 해석의 공시성과 통시성 53
경론의 형성과정 55
대승불교의 출발점 57
교학의 체계화는 무아이론에서부터 60

2. 중도로 중도를 논하다 83
중도와 여실지견 89
‘중도’라는 개념의 위치 100
전통에 따른 중도의 역사적 해석과 차이 108
다시 부처님의 재세 시로 134
본래법인 연기법? 139
십이연기와 삼세양중인과 147

3. ��중론��과 이제론 151
부처님과 14난 151
용수와 부처님, 그리고 시대 상황 156
용수의 사유와 ��중론�� 160
이제론 171

제3부 중도로 한국 불교를 논하다
선의 과잉 문제 197
한역 경전권 불교의 변화 선종과 교종 199
선종 이전의 중국 불교 200
21세기 불심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206
ㅣ참고자료ㅣ 중과 중도에 관하여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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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94
담정: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스님의 중도의 실천행이 아니다. 스님께서 중도를 여실지견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이론적인 문제는 이론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지금 스님은 연기 실상의 세계와 언설(言說)의 세계의 경계를 흩뜨리고 있다. 중도를 여실지견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진보가 아닌 후퇴다!

P.97
도법: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중도적으로 접근하면 복잡하지 않게 진실을 잘 드러냄으로써 문제를 잘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것을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여실이라는 말은 내가 만든 개념이 아니고, 경전에 있는 개념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P.118
도법: 중도는 가야 할 길이고, ‘중’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렇게 보면 되지 않을까? 여실지견을 중도행의 하나로 보면, 여기서 보는 것은 행위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연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붓다 생애의 맥락과도 잘 맞는다고 여겨진다.

P.119
담정: 그것은 그야말로 스님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스님은 지금까지 우리가 추적해왔던 중과 중도의 차이를 다시 뭉뚱그리고 있다. 중과 중도는 다른 것이다!
중도는 딱 하나다. 팔정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것이 중도가 경전에 등장하는 유일무이한 장면이다.

P.181
담정: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 또는 사성제를 강조하기 위한 수식어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용수 보살 이후, 중기 중관파를 지나면서 이제론은 사성제보다 더욱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P.182~183
도법: 나는 이제로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이 표월지지라고 본다. 달은 진제, 손가락은 속제인 것이다. …… 담정이 21세기 ��중론��을 저술했으면 한다. 그러면 좀 더 명료해질 것 같다. 우리는 불교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이라 한다. 담정에게 논파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 논파도 바로 이 파사현정을 위한 것 같다.

P.183
담정: 그렇다. 스님 말씀처럼 ��중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파’라는 말보다는 먼저 ‘고통에서 벗어남’이라는 부처님의 뜻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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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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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종교와 평화>,<내가 본 부처> … 총 26종 (모두보기)
1949년 제주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가했다. 66년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69년 해인사 강원을 거치고, 이후 13년 동안 봉암사와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선수행을 했다. 87년엔 금산사 부주지를 맡았고, 90년엔 청정불교운동을 이끈 개혁승가 결사체 선우도량을 만들었다. 95년부터 실상사 주지를 맡아 인간화 생명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 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98년 말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기존의 총무원과 정화개혁회의로 나뉘어 다툴 때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분규를 마무리짓고 미련없이 실상사로 내려갔다. 99년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하면서 귀농운동 차원을 넘어 생활협동조합?대안교육?생명평화운동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2010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 등 종단 소임을 맡아 다툼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다 2018년 실상사로 내려와 다시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 마을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화엄경과 생명의 질서》 《길 그리고 길》 《화엄의 길, 생명의 길》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내가 본 부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지금 당장》 등이 있다.

1968년 전남 광양에서 출생. 순천고등학교(1986),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1993)를 졸업하고,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을 통해서 인도로 들어간 후 인도?티벳?중국 등을 여행하였다(1993~1998).
티벳 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타고르 대학으로 알려진 인도의 비스바 바라띠 대학의 인도-티벳학과에서 티벳학 석사 및 같은 학교에서 산스끄리뜨어 준석사 등을 마쳤으며 캘커타 대학의 빠알리어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999-2008).
타고르 대학으로 알려진 비스바 바라띠 대학의 인도-티벳학과 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귀국하여 함양 안의 고반재에서 중관학당을 열어 용수의 중관사상과 불교사상사, 티벳불교 등을 연구하는 가운데 티벳 경전 한글 번역 등 역경(譯經)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의 대승불교와 중관사상, 팔불중도 등의 집필자이기도 한 역자의 주요 저서로는 2011년 상반기 문광부 우수학술 도서로 선정되었던 산스끄리뜨어.티벳어.한역 ≪중론≫을 비교 분석한 ≪용수의 사유≫, 티벳?타클라마칸 사막.고비 사막의 자전거 여행 기록인 ≪세계의 지붕 자전거 타고 3만리≫ 등이 있고, 역서로는 티벳 운문학의 정수인 싸꺄 빤디따의 ≪선설보장론≫의 해제본인 ≪풀어 쓴 티벳 현자의 말씀≫, 용수의 ≪권계왕송≫의 완역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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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실천불교와 교학불교의
중中과 중도中道에 대한 대담”


한국 실천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실상사 도법 스님과 중관학자인 담정 신상환이 2019년 봄부터 2020년 가을까지 10여 차례 만나서 중(中)과 중도(中道)에 대한 대담을 나눴다. 실천불교와 교학불교를 각각 대표할 수 있는 두 지성의 대담이다. 그 결과물을 묶은 것이 이 책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편성되었다. 제1부는 중도로 부처님 생애에 대해서, 제2부에서는 중도로 불교와 중관사상의 기본 교리를, 제3부는 중도로 한국 불교를 논한다. 그리고 책 뒤에는 중과 중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 자료를 덧붙였다.

이 책에서 도법 스님은 불교적 실천을 중도행이라 부르고 있다. 1970년대 선방에서 비롯된 깨달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90년대부터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생명 평화 운동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살아 있는 불교의 필요성에 강조의 방점을 찍는다. 이와 달리 신상환은 중도라는 그 이름마저도 방편교설로 가설적인 것, 희론(戱論)이라 부르는 중관학파의 태도로 일관한다.

연기법의 핵심이 중도라고 주장하는 도법 스님과 연기실상의 체화와 언어의 한계를 강조하는 신상환은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면서도 실천 불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하고 있다. 실천불교를 위해서 명확한 개념 정리를 바탕으로 한 교학불교를 강조하는 신상환과 달리 도법 스님은 그것이 현실 속에서 대중들에게 쉽고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대담자는 실천의 중요성, 삶의 변화에 유용한 불교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각자의 자세는 다르다. 최소한 이 둘이 주고받는 대담 속에서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경론의 다양한 해석, 그리고 ‘중과 중도’가 다른 것임을 경론을 통해 보여주는 ‘참고 자료’ 등은 한국 불교의 발전을 위한 대담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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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스님·신상환 대담
도서출판 b / 269쪽 / 1만6000원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지리산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과 중관학자 신상환 박사가 2019년부터 2020년 가을까지 10여차례 만나 불교교리와 실천 등을 주제로 나눈 대담집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됐으며, 중도의 관점에서 ‘부처님 생애’ ‘중관사상의 기본교리’ ‘한국불교’를 각각 논한다.

도법 스님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창립해 귀농운동, 환경운동 등을 펼치고, 생명평화를 주제로 5년간 전국을 탁발순례하며 8만명을 만난 한국불교 실천불교의 상징이다. 신 박사도 여느 학자들과는 다르다.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1993년 인도로 떠나 그곳에서 불교학자로 변신해 용수보살의 중관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3년 귀국한 후 대학이 아닌 곡성에 중관학당을 열어 경전번역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서로 다른 듯 비슷한 대담자들은 중도와 연기법 등 교학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한다. 실천불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상대 의견에 적극 공감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각자의 자세는 미묘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도법 스님과 신 박사의 대담에서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경론의 다양한 해석은 참신하고 뜻깊다. 또 ‘중’과 ‘중도’가 다른 것임을 경론을 통해 보여주는 뒷부분의 참고 자료도 주목할 만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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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호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이남곡 (인문운동가)


공자의 군자(君子)론을 앞으로 몇차례 연재하려 한다.

내가 보기에는 공자가 이야기하는 ‘군자’에 대한 깊은 오해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첫째는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대립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다름을 인간
의식의 진화 방향에서 서술할 뿐 당위(當爲)로 강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미
치지 못함을 토로할 정도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했다. 
둘째는 군자(君子)는 한자의 뜻이 의미하는 것처럼 신분계급제 사회에서 군주(君主)의 아들
즉, 귀족이나 관료 등 지배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공자는 이 말의 내용을 혁명적으로
그러나 조용하게 바꿨다.
즉 신분의 귀천이 아니라, 그의 인격의 성숙이 군자의 조건이라고 바꿈으로서 신분계급을
넘어서는 사상적(제도까지 바꾸는 것은 그 시대에는 엄두를 못냈지만) 지평을 열었다.
나 스스로 진보적인 인문운동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10여 년 전 어떤 자리에서
‘진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려고 한다.
“오랫 동안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해 헌신해 오신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그 동안 1년 반여
인문학 강좌라는 모임을 통해 인연을 맺어온 여러분들과 함께 ‘진보의 미래’라는 주제로  오
붓한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주제를 선택하게 된 것은 4.11 총선을 치루면서 나타난 이른바 ‘진보정당의 위
기’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이나 목전의 대선을 앞둔 진보 정
치 세력의 전략 전술적 목표를 넘어서 꼭 한번 다루어 보고 싶은 테마였습니다.
왜냐하면 요즘의 이런 실태들은 오래 전부터 객관적인 정세의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른바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와  행동양식(문화) 속에 이미 ‘쇠퇴나 위기’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맞지 않는 신념체계(이데올로기)와 그에 바탕을 둔 낡은 정서 및 행동양식, 인류의식
의 일반적 진보에도 못 미치는 권력지향적 의식 및 헤게모니를 둘러싼 진영 싸움 등은 엄밀
하게 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와는 인연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사회적 부정의나 불평등, 착취나 독재와 싸워온 한국 진보세
력의 역할을 깎아내리거나 경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런 역사적 과제들을
자랑스럽게 수행해온 사람들과 조직들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실사구시하지 못하고, 낡은
시민제보~~!!!!
땅은 정해져 있고 인구는 계속 빠져…
답답하다 공동묘지처럼 죽은 골목…
어떤점이 억지일까 교통지옥을 당해…
억지 기사네
안해줘도 욕 해줘도 지랄 ~~
대중들에게 줄것이 있어야. 서로에…
소통신문을 빛내는 좋은 글들을 쓰…
그냥 내버려두세요.어차피 익산시 …
스물 몇 살에 문화재 문제를 깔끔하…
소통신문 외부 기고가 참 좋네요. …
바다 소리
가족, 그 영원한 이름
딩크족으로 산다는 것!
오고싶은 도시의 경쟁력, ‘익산…
이데올로기와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전위적 역할을 하
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충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진보의 위기’라는 말 자체가 잘못 쓰이고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진보는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수 없이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류는 ‘자유 확대’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자유는 ‘자연계의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자유’ ‘억압과 착취,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회적 자
유’ ‘의식을 가진 고등생명체인 인간만이 갖는 관념의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관념
계의 자유’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인류는 진보의 길을 걸어 왔다고 대긍정하는 입장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과거의 좌우나 진보·보수로 나누어진 진영논리에서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種)
의 입장에서 의식(意識), 생활양식, 사회구조의 일대 변혁이 없으면 어쩌면 종(種) 자체가 소
멸하거나 문명 이전의 혼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 동안의 자유를 위한 인류의 오래된 여정, 그리고 인간이 갖고 있는 특성에 기인하
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어쩌면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오래된 진영논리로 이야기
하는 ‘진보의 위기’는 사실의 세계와는 맞지 않습니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파의 위기를
진보의 위기로 혼동하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진보의 출발점이 될지 모르
겠습니다.
지금의 진정한 위기라면 그것은 과거의 진영 논리가 아닌, 인류 전체의 보편적 진화에 대한
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위기를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지금까지의 진보세력이 먼저 스스로를 대전환함으로
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진보’라는 이름표를 붙일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겠지요.”
“새로운 시대의 진보는 독재를 낳게 되어 있는 ‘민주집중제’의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 아
니라, 지금과 같이 편을 갈라 결국 다수가 지배하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방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진보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비록 소수당이라도 ‘조화의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자가 무슨 ‘조화’나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래 사회의 주체라는 주인의식으로 약자의식이나 피해자의식을 넘어서
는 것이 진보정당의 도덕적 힘이 되어야하고, 그것이 결국 진보정치의 가장 큰 자산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계급투쟁론을 비롯한 낡은 사상 이론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계급 발생을 비롯한 계급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급이 있고, 투쟁이 있습니다. 또 그 사회의 계급구조나 제도가 사람들의 의식(意
識)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거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
은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으로 인간과 사회의 실
상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온갖 이익에 집착하고 노동의 양극화를 낳고 있으면서도 ‘투쟁’과 ‘연대’의 빛바랜
기치를 들고 있는 일부 현실을 보면서 실사구시해야 합니다.
저는 ‘계급조화론’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맞다고 봅니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들도 많겠지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계급적 모순
을 호도하여 투쟁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음모에서 나왔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면 자본가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과 도덕적 힘을 가지고 계급조화론을 당당하게 선도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과거의 진보가 사회적·물적·제도적 진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
를 확대하는 바탕이었다면, 지금처럼 물질적 수준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고, 자유민주주
의가 절차나 제도로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는 ‘인간 자체의 진보’ 즉 ‘의식·문화
의 진보’가 사회적 진보를 견인하는 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슨 ‘의식(마음)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류(流)의 사고방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이름 패스워드
다.
다만 그 상대적 비중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사구시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성현(聖賢)보다도 공자의 사상은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상력과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알라딘: 성서의 구조인류학 1996 Edmund Leach Wikipedia, 2


알라딘: 성서의 구조인류학
에드먼드 리치 (지은이)
한길사1996-01-01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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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01. 서문 
002. 20세기 성서 연구의 인류학적 접근들 
003.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 
004. 멜기세덱과 황제:전통의 상과 역전의 상 
005. 반 장르론:성서의 비유는 감추어진 것인가,드러난 것인가 
006. 롯의 아내의 운명:성서신화에서 구조적 매개 - 엘런 에이콕
007. 카인의 징표 - 엘런 에이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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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리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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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레비스트로스>,<성서의 구조인류학> … 총 2종 (모두보기)

평점분포

8.3


너무 어렵네... 그래도 다 읽었습니다.
거북이 2011-08-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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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누이

[성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고고학이 발전되면 될수록 그 역사적 사실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성서의 역사적 사실에 가장 큰 추진력을 준 것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가 해독되면서부터였다. 이 두 지역의 신화를 조사하던 신학자들은 이들 이야기가 성서의 창조이야기와 유사한 관계에 있음을 주목하고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지금은 성서의 내용이 이스라엘인들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인들은 그 지역의 다신교적 입장을 자신들만의 일신교적 체제로 변형시켰다는 점이 독창적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성서의 구조인류학은 쉽게 말하면 이 지역의 신화의 유사성에 근거한 성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영국의 기능주의프랑스의 구조주의가 집대성 되어 있다. 구조주의는 여러 다양한 사회는 서로 다른 양상과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특성과 양상에는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법칙이 있다고 본다.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본질을 추구하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겉을 해체하여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셀 모스는 전세계 모든 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인 것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모스는 사회존재의 기본요소로 교환과 증여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반면 구조주의의 집대성자인 레비 스트로우는 언어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즉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음소와 음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를 만들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마찬가지로 신화에 있어서도 언어의 음소와 같은 신화소가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우는 각 민족의 신화에 나타난 신화소를 종합해보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기능주의는 사회란 각부분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사회 안에서 생존하는 부분적 존재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회현상이나 제도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사회의 변동이나 갈등은 일시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공유된 가치나 규범에 대해 폭넓은 합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능주의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보통 보수적인 곳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서를 혁명적 자유와 보수의 힘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치는 대립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적인 것이 가진자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힘이라면 혁명적인 것은 갖지 못한자들이 기존의 권위에 대한 자기 정당화로서의 적합한 이론이다.

리치는 이런 이론을 성서의 해석에 적용하고 있다. 즉 신화소로 구성된 하나의 신화적 원리가 어떻게 종교적인 원리로 이행되어가는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적 원리에서는 구조주의적 시각을 종교적 원리로의 이행에는 기능주의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관계는 분석과 해석의 열쇠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결과에 따르면 성서는 신화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리치의 해석은 이 신화적인것을 넘어서서 성서속에는 그 무엇인 종교적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는것이다.]

dohyosae 2005-03-07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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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는 다른 시각


'구조인류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잘 몰랐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교 등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반 이상이 믿고 있는 종교들의 공통적 뿌리인 구약과 기독교 경전인 신약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말씀'이라는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스나 아집트의 옛 경전들이 지금에와서는 '신화'란 이름의 옛 이야기 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내게는, 성서는 읽으면 읽으수록, 역사와 계시의 혼합물이라기 보다는 신화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어 왔는데, 에드먼드 리치의 이 책이 갖고 있는 시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리치는 표면적인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해 구조인류학의 해석 방법을 이용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나 역사적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고찰하고 그것들이 어떠한 구조로 배열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라는 장에서는 모세에 관한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 그리고 같은 중근동 지방 신화인 이집트의 이시스 신화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여인들이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며 신화에서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신화는(성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표면에 나타나는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의와 연결된 이면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리치는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구약의 여러 이야기들이 시간적 관계의 선후를 뛰어 넘는 의미를 보여준다. 인류의 공통적 심성이 신화라는 표현 양식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수영 2004-02-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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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성서의 구조인류학

퀴즈를 하나 풀어 보자.

Q) <성서>는 역사일까 신화일까?
A) 정답은......

맞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정답이다.

우리의 마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고, 어지간한 말빨로는 그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리숙하지 않은 당신은 이미 이 문제는 문제가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성서>가 종교 경전이라는데 있다. 이 논의는 층위가 서로 다른 곳에서 그 전제를 깔고 논리를 펼쳐가기 때문에 적절한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산더미 같은 자료와 증거들을 가져오더라도, 역사라고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역사라는 증거들로만 보일 것이고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는 모든 것이 신화로 해석이 될 것이다. 이렇게 철로처럼 영원히 서로가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에 어중간한 타협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서>는 읽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역사, 신화, 문학, 문화 인류학(고고학)적 방법 등 여러 각도로 접근 가능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는 종교의 경전으로서, 다음으로는 신화로서 이해하는 태도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에드먼드 리치는 성서를 역사로서가 아니라 신화로서 취급하고 있다.

저자는 성서의 이야기들이 역사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성서의 이야기들이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성서에 쓰여 있는 이야기들을 역사라는 틀에 짜 맞추는 작업만 하지 않는다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성서의 이야기들도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세의 기독교는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성서의 한 이야기를 성서의 다른 이야기와 연관 지어 이해했을 뿐, 성서의 연대기적 의문이나 사실주의적 기술과 관련지어 이해하고자 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이렇게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6개의 논문을 모아 편집한 저작이다. 표지에는 표기가 안 되어있는데, 사실 이 책은 엘런 에이콕과의 공저이다. 에이콕은 이 책에 두 개의 논문을 수록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 
  • <멜기세덱과 황제>, 
  • <롯의 아내의 운명>, 
  • <카인의 징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롯의 아내의 운명>과 <카인의 징표> 가 에이콕의 논문이다. 6개의 논문 중 <카인의 징표>가 그나마 가장 흥미로웠는데 주된 내용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구조에 대해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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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콕은 예수와 카인이 서로 정확한 구조적 변형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주인공들로 밝혀진다고 주장한다. 변형의 관계라는 것은 예수와 카인이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카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사는 도시를 건설한다. 반면 예수는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교회의 기반을 구축한다. 죄 많은 카인은 아벨이라는 제물을 통해 하나님과 맺어진다. 반면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맺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유형화해서 보면 예수는 아벨의 등가물이 된다.

이처럼 신화적으로 해석되는 내용이 새롭거나 흥미로운 부분들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초판 번역된 지 20여 년이 넘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이 책을 10여 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에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별 감흥이 없어서 뭐가 달라진 것인지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책은 신학적 방식이 아닌 신화적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고자 할 때 한 번쯤은 참고할 만한 저서이다.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으로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이 책의 주된 해석이라는 것들이 결국 현재의 결과를 바탕으로 과거를 재창출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기에 전체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가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설명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성서>는 이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답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성서>는 방대한 내용에 걸맞게 다양한 저자와 여러 겹으로 덧대어온 시간, 오랜 기간의 필사와 번역의 과정을 겪어왔다. 2500여 년의 역사를 관통해 온 인류의 유산이 21세기에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놀라운 책이다.

2500년 전의 지식과 문화와 멘탈리티로 기록된 지침서를 현대에 적용하고자 하면 반드시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마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오설, 문자 주의, 세대주의 등 텍스트 신봉자들이 정말 많이 득세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느 종교든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자들이 존재하기에 그렇게 놀란 척할 필요는 없겠지만, 굳이 새 술(현시대)을 헌 가죽 부대(전통교리)에 욱여넣는 게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 이러한 의문들이 별 의미는 없겠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특정 종교의 교리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모쪼록 반지성적이고 극단적인 세력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자정(自淨)효과가 압도하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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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tclub 2020-10-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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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ucturalist Interpretation of Biblical Myth
by  Edmund Leach

Through the application of anthropological techniques for analysing myth the essays in this 1983 volume offer interesting and thought-provoking structuralist insights for a variety of particular cases in the Scriptures. They also give some account of past interactions between anthropologists and Christian theologians, and enter the debate on the historicity of Biblical events. 
Edmund Leach has been interested for many years in the implications of a structuralist mode of myth analysis for the explanation of scriptural texts and problems. His essays in this book continue the line of enquiry he first developed in Genesis as Myth (1969) and he pursues his arguments here with characteristic colour and brilliance of exposition. With the two pieces by Dr Alan Aycock on related themes, this volume makes a fascinating and controversial contribution to the stud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less)

Paperback, 154 pages
Published October 28th 1983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first published September 22nd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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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und Leach   From Wikipedia


Sir Edmund Ronald Leach
Born 7 November 1910

Sidmouth, England
Died 6 January 1989 (aged 78)

Cambridge, England
Nationality British
Alma mater Cambridge University
Known for Ethnographic work in Sarawak and Burma
Theories of social structure and cultural change, Kinship as ideal systems
Disagreement with French structuralist Claude Lévi-Strauss[1]
Awards Provost of King's College (1966–1979)
Chairman of Association of Social Anthropologists (1966–1970)
President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1971–1975)
President of British Humanist Association (1970)
Knighted (1973)
Trustee of the British Museum (1975–1980)[2]
Scientific career
Fields social anthropology
Institutions Burma Army
London School of Economics
Cambridge University
Thesis Cultural chang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hill tribes of Burma and Assam (1947)
Doctoral advisors Bronisław Malinowski
Raymond Firth

Doctoral students Fredrik Barth
Influences Claude Lévi-Strauss


Part of a series on
Political and
legal anthropology

Sir Edmund Ronald Leach Kt FRAI FBA (7 November 1910 – 6 January 1989) was
 a British social anthropologist and academic. 
He served as Provost of King's College, Cambridge from 1966 to 1979. 

Early years[edit]

Personal life[edit]

Leach was born in Sidmouth, Devon, the youngest of three children and the son of William Edmund Leach and Mildred Brierley. His father owned and was manager of a sugar plantation in northern Argentina. In 1940 Leach married Celia Joyce who was then a painter and later published poetry and two novels. They had a daughter in 1941 and a son in 1946.
Education and career[edit]

Leach was educated at Marlborough College and Clare College, Cambridge, where he graduated with a BA with honours in Engineering in 1932.

After leaving Cambridge University, Leach took a four-year contract in 1933 with Butterfield and Swire in China, serving in Hong Kong, Shanghai, Chungking (now Chongqing), Tsingtao (now Qingdao), and Peking (now Beijing). He found out after his contract expired that he did not like the business atmosphere and never again was going to sit on an office stool. He intended to return to England by way of Russia on the Trans-Siberian Railway, but increasing political turmoil in Russia convinced him otherwise. While in Peking, Leach had a chance encounter with Kilton Stewart, a psychiatrist, former-Mormon missionary, and published author who invited him on a trip to the island of Botel Tobago off the coast of Formosa. And so, on his way home Leach spent several months among the Yami of Botel Tobago, an island off the coast of Formosa. Here he took ethnographic notes and specifically focused his efforts on local boat design. This work resulted in a 1937 article in the anthropology journal Man.[3]

He returned to England and studied social anthropology at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with Raymond Firth who introduced him to Bronisław Malinowski. He was an active member of Malinowski's "famous seminar".[4] In 1938, Leach went to Iraq (Kurdistan) to study the Kurds, which resulted in Social and Economic Organization of the Rowanduz Kurds.[5] However, he abandoned this trip because of the Munich Crisis. He wrote: "I’ve got an enormous amount of ability at almost anything, yet so far I’ve made absolutely no use of it… I seem to be a highly organized piece of mental apparatus for which nobody else has any use" (D.N.B. 258).

In 1939 he was going to study the Kachin Hills of Burma, but World War II intervened. Leach then joined the Burma Army, from the fall of 1939 to summer 1945, where he achieved the rank of Major. During his time in Burma, Leach acquired superior knowledge of Northern Burma and its many hill tribes. In particular, he grew very familiar with the Kachin people, even serving as commander of the Kachin irregular forces.[6] This resulted in the publication of the "Jinghpaw Kinship Terminology: An Experiment in Ethnographic Algebra" in 1945.[7]

After he left the Army in 1946, he returned to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to complete his dissertation under the supervision of Raymond Firth. In spring of 1947 he received a PhD in anthropology. His 732-page dissertation was based on his time in Burma and titled Cultural chang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hill tribes of Burma and Assam.[8][9] Later that same year, at the request of Sir Charles Arden Clark, the then Governor of Sarawak (then under British Colonial rule) and a referral by Raymond Firth, the British Colonial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invited Leach to conduct a major survey of the local peoples.[10] The resulting 1948 report, Social Science Research in Sarawak (later published in 1950), was used as a guide for many well-known subsequent anthropological studies of region. In addition to the report, Leach produced five additional publications from this field work. Upon returning from his fieldwork in Borneo, Leach became a lecturer at LSE.

In 1951, Leach won the Curl Essay Prize[11] for his essay The Structural Implications of Matrilateral Cross-Cousin Marriage, which drew on his extensive data on the Kachin to make important theoretical points as it related to kinship theory.[12]

In 1953, he became a lecturer at Cambridge University, and promoted to Reader in 1957.

Along with his wife, Celia, Leach spent a year from 1960 to 1961 at the Center for Advanced Study of Behavioral Studies in Palo Alto, California. Here he met Roman Jakobson, the Russian linguist, popularizer of Saussurean structural linguistics, and a major influence on the theoretical thinking of Levi-Strauss, leading to his structural anthropology.

In 1972 he received a personal Chair. He was elected provost of King's College, Cambridge in 1966 and retired in 1979; President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1971–1975); a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 (from 1972) and was knighted in 1975.

Academic contributions[edit]

Leach spanned the gap between British structural-functionalism (exemplified by Radcliffe-Brown and Malinowski), and French structuralism (exemplified by Levi-Strauss). Despite being a central interpreter of Levi-Strauss' work, producing several introductory works on Levi-Strauss' theoretical perspective, Leach considered himself "at heart, still a 'functionalist'".[13]

His book Lévi-Strauss was translated into six languages and ran three editions. His turn of phrase produced memorable quotes, such as this on Lévi-Strauss:


"The outstanding characteristic of [Lévi-Strauss's] writing, whether in French or English, is that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his sociological theories combine baffling complexity with overwhelming erudition. Some readers even suspect that they are being treated to a confidence trick".[14]

Leach's work on Lévi-Strauss is often relied on by other authors. For example, in Richard Wrangham's (2009) book Catching Fire: How Cooking Made Us Human, he relies on Leach in describing Lévi-Strauss's analysis of cooking in relation to human culture.[15]

Leach's first book was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1954); it challenged the theories of social structure and cultural change. Throughout, Leach was "fiercely critical of generalisations from one society to a narrative about 'politics' in so-called 'primitive societies'".[16]

His second book was Pul Eliya, a Village in Ceylon (1961), where he directed his attention to theories of kinship as ideal systems. Leach's interest in kinship was first exemplified by his 1951 article (which won the Curl Essay Prize), and it was here that he first cites Levi-Strauss, disagreeing with several aspects of the latter's kinship theory outlined in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Leach applied his analysis of kinship to his disagreement with Lévi-Strauss in Pul Eliya, introducing Levi-Strauss's work into British social anthropology in doing so.


Bibliography[edit]

  • Social And Economic Organization of the Rowanduz Kurds (Berg Publishers, 1940)
  •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4) ed. Aspects of Caste in South India, Ceylon and North-West Pakist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0; revised edition 1971)
  • Rethinking Anthropology (Robert Cunningham and Sons Ltd., 1961)
  • Pul Eliya: A Village in Ceylon: A Study of Land Tenure and Kinship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1)
  • Dialectic in Practical Relig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8) ed. Structural Study of Myth and Totemism (Routledge, 1968)
  • A Runaway World? (London: BBC, 1968)
  • Genesis as Myth and Other Essays (Jonathan Cape, 1969)
  • Lévi-Strauss (Fontana Books, 1970; new edition 1985)
  • Claude Lévi-Strauss (Viking Press, 1970; revised edition in 1974; 2nd revised edition 1996)
  • Culture and Communication: The Logic by which Symbols Are Connected. An Introduction to the Use of Structuralist Analysis in Social Anthrop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 Custom, Law and Terrorist Violence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77)
  • ed. The Kula: New Perspectives on Massim Exchange with Jerry W. Le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 Social Anthrop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 Structuralist Interpretations of Biblical My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 The Essential Edmund Leach (Anthropology & Society & Culture & Human Nature) ed. by Stephen Hugh-Jones and James Laidlaw (Yale University Press, 2001, 2 vols.) ed. Elites in South Asia with S. N. Mukherje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Literature[edit]

References[edit]

  1. ^ Meiser, Heather (2007) "Edmund Ronald Leach 1910-1989" E-Museum @ Minnesota State University webpage" Archived 17 October 2006 at the Wayback Machine Accessed 6 May 2010
  2. ^ Tambiah, Stanley J (2002) "Edmund Leach: an Anthropological lif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Accessed 6 May 2010
  3. ^ Leach, E. R (1937). "220. Boat Construction in Botel Tobago". Man. 37: 185–187. doi:10.2307/2790297. JSTOR 2790297.
  4. ^ Tambiah, Stanley Jeyaraja; Tambiah, Stanley J (14 February 2002). Edmund Leach: An Anthropological Life. ISBN 9780521521024.
  5. ^ http://libarch.nmu.org.ua/handle/GenofondUA/22029[bare URL]
  6. ^ Tambiah, Stanley Jeyaraja; Tambiah, Stanley J (14 February 2002). Edmund Leach: An Anthropological Life. ISBN 9780521521024.
  7. ^ Leach, E. R (1945). "Jinghpaw Kinship Terminology".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75 (1/2): 59–72. doi:10.2307/2844281. JSTOR 2844281.
  8. ^ Leach, Edmund (1947). Cultural chang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hill tribes of Burma and Assam (PhD thesis). London School of Economics – via British Library.
  9. ^ Leach, Edmund (1947). Cultural chang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hill tribes of Burma and Assam (PDF) (PhD Thesis). London School of Economics.
  10. ^ Strickland, Simon (September 1989). "Obituaries - Edmund Leach" (PDF). Borneo Research Bulletin. 21 (2): 78–79 – via Borneo Research Council.
  11. ^ "Curl Essay Prize Past Awards". therai.org.uk. Retrieved 2 December 2016.
  12. ^ Leach, E. R. (1 January 1951). "The Structural Implications of Matrilateral Cross-Cousin Marriage".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81 (1/2): 23–55. doi:10.2307/2844015. JSTOR 2844015.
  13. ^ Leach, Edmund (15 October 1989). Claude Levi-Straus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SBN 9780226469683.
  14. ^ Leach, Edmund (1974), Claude Levi-Strauss (Revised ed.), New York: Viking Press, p. 3
  15. ^ Wrangham, Richard (2009), Catching Fire: How Cooking Made Us Human, New York: Basic Books, ISBN 978-0-465-01362-3
  16. ^ Laurie, Timothy (2012), "Epistemology as Politics and the Double-Bind of Border Thinking: Lévi-Strauss, Deleuze and Guattari, Mignolo", PORTAL: Journal of Multidisciplinary International Studies, 9 (2): 1–20, doi:10.5130/portal.v9i2.1826
External links[edit]

손민석 장신기 선생의[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를 읽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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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선생의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를 읽는데 굉장히 잘 읽힌다. 좋은 연구서이면서 대중서라 생각한다. 다만 몇몇 지점에서 불만이라고 해야 할까, 의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있다. 예를 들어 장신기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의 박현채 버전과 유종근 버전 간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김대중 정부 시기의 최장집 등이 간여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적 발전'이라는 구호에 맞춰서 해석해버린다. 생산적 복지와 시장경제 중시론으로 묶어서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해석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김대중의 사상은 계속해서 변해왔고 박현채가 깊이 관여한 대중경제론과 유종근의 조력이 들어간 대중경제론은 완전히 그 내용과 지향이 다르다.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은 단순히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개발방식만을 비판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를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가 담겨 있다. 환경문제와 연결된 농민 문제, 중소기업 문제까지 모두 아우르는 건 그런 맥락이다.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보수우파 측에서는 역시나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겠지만 이건 당대의 경제학사 차원의 맥락도 있다.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라 본다. 최상오였나 주익종이었나 연구논문 분석한 게 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초기 김대중은 아무리 보아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민족사회주의 계열에 가깝다. 시장경제를 중시한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마지노선으로 시장경제를 채택하는 방향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재생산의 주도권을 중소기업 등의 '민족자본'이 차지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박현채는 통일전선적 인민민주주의 단계를 고려하면서 김대중과 이론적 접점을 이루고 있다. 설사 김대중이 비록 자유주의적이 색채가 있었을지라도 통일전선적 인민민주주의 단계 내에 포섭된 자유주의로서 집권기의 자유주의와는 색채가 많이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본래 김대중은 여운형 계열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한국 정치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유주의자로 스스로를 재편해나간 정치인이다. 이것을 반공주의에 대한 자기검열로만 해석하는 것도 오류이고,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인물이라 해석하는 것도 오류라 본다. 김대중이 민족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여운형계 정치인에서 출발해 어떻게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조로 점차 변모해갔는지를 추적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의 황혼을 예비한 최후의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거대한 면모가 더 잘 드러난다고 본다.
근데 뭐.. 김대중을 각잡고 연구한 게 아니라 전집 몇 개 읽어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더많은 저작을 내주시길 바라며 많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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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om Chang Kang
    여운형과 김대중
    인간적 매력과 국제적 시야를 갖춘
    한국 현대 정치의 첫 거인과 마지막 거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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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 손민석
      여운형이 거인인 건 맞지만 과연 실무적으로도 그랬을지.. 별명이 은도끼였다지요.. 보기는 좋은데 막상 쓸 데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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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h
  • 장신기
    손민석선생님, 제 책을 읽어주시고 이렇게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의견주신 내용에 대해서 제가 아는 범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제 책이 김대중 관련 주요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두었고 그렇다보니 한참 작업을 하고 나니깐 너무 양이 방대해져서 전체적으로 줄여야했고 그와 동시에 부분별 균형도 고려해야 해서 대중경제론 관련 부분에서도 일부 반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쪽에는 좀 약해서 같은 양을 적으려고 해도 더 많은 학습이 필요했었을 것이라고 결과적으론 제게 다행(?)이기는 했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와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니 2공화국 장면 정권 시절 주요 인사들의 경제관을 경세사적 관점에서 정리한 글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앞의 문제제기 정도만 읽고 나중에 본격적으로 보려고 했다가 위에서 설명드린대로 양을 조절해야 해서 더 파고들진 않았었는데요. 전 그글을 보고 김대중의 경제관이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추정을 했었습니다. 민주당 신파는 관료들이 많았고 특히 친미적 성향이 두드러졌으니깐요. 김대중의 외교관도 보면 김대중이 해방공간 시절 좌우합작노선 + 신파의 친미적 성향 두가지가 잘 조화를 이룬 것에서 보듯 경제관도 그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김대중이 1950년대에 쓴 여러 글에는 그의 경제관을 알 수 있는 글도 많은데요, 대표적으로 55년 사상계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입니다. 이런 글들을 보면 김대중은 경제개발에 있어 국가의 역할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만 정경유착 및 관권통제 등이 시장경제발전을 저해시키고 불평등을 강화시킨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민주당 신파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외국자본에 대해서는 열린 자세 + 능동적 수용을 통한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현채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책에도 썼지만 1971년 김대중씨 대중경제 100문 100답의 경우 박현채 등 당시 반박정희 입장에 따라 김대중과 결합했던 지식인들이 작성한 책입니다. 김대중은 50-60년대 여러 글과 연설 등에서 그의 경제관을 알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박현채 등도 그것을 감안했는지 이 책은 실제 김대중 경제관과 실제 박현채 경제관이 어정쩡하게 믹스된 면이 있습니다. 근데 50-60년대 김대중 텍스트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고 그리고 김대중에 대한 박현채 영향력이 강했다고 인식한 진보 경제학자들이 훗날 김대중의 경제관을 비판하려는 입장에서 그와 같은 전제를 했었던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구요.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시한번 제 책을 읽어주시고 여러의견 주신 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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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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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민석
      아닙니다. 좋은 책에서 많이 배울 기회가 있어 제가 감사드리죠. 김대중에 대한 좋은 연구서가 필요한 참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위에서 드린 말씀을 약간만 보족하자면 선생님께서는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맥락에서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위치시키다보니 대중경제론의 핵심이자 그것이 구현하고자 하는 기본 목적을 "복지"에 두고 계신데 저는 그것은 물론 중요한 맥락이고, 이 책에서 대중경제론을 다루는 부분이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온전히 분석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그 기원적 탐구를 행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소급해서 독해하는 것 자체에 동의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역시나 대중경제론은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과의 대결 속에서 나온 내포적 공업화 전략으로 보아야 하며, 복지는 그 내포적 공업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공업화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독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부분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김대중이 1960~70년대에 대중경제론으로 수렴되는 경제적 지향을 제시한 맥락과 1998년 집권 이후의 경제 상황에서의 그의 지향점을 별다른 구별 없이 등치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고 봅니다.
      예컨대 저는 김대중의 1960~70년대 수출주의와의 대결 혹은 비판은 외자도입에 기초한 수출주의, 즉 한미일 삼각안보 - 무역체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도출된 거시적 관점이었다면 1998년 이후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론은 기존의 삼각무역구조가 해체되는 상황 속에서 중국과의 관계개선 등을 꾀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국제분업관계의 재구성이라는 거시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 질적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전자가 한국 경제가 미일 중심의 세계시장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한 입장이라면, 후자는 한국 경제가 놓인 국제분업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고민한 입장인 것이라 봐요. 이 맥락 위에서 보아야 남북관계개선뿐만 아니라 동북아공동체론에 대한 선생님의 강조도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봅니다.
      경제학사의 맥락에서도 1950년대 이후의 후진국 개발론의 입장을 좀더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마 보신 게 박태균 선생이 정리하신 1950년대 경제개발론 연구들 같은데 중요한 연구임은 분명하지만 이 일련의 연구들은 말씀하신 정치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된 것이기 때문에 정치사, 혹은 정책사적 맥락의 성격이 강합니다. 국제적으로나 한국의 경제학 수준에서나 당대의 후진국 개발론은 라울 프레비쉬(Raul Prebisch)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에서 도출된 넓은 의미의 수입대체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박현채 등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민족경제론자들까지도 외자도입이나 시장경제의 활용을 거부하는 이는 없습니다. 수입대체화와 수출주도형 간의 차이를 내자동원 대 외자동원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여 보는 것은 김일영, 이영훈 등의 보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김일영은 이 맥락에서 김대중의 정책이 무책임한 이상론에 불과했으며 그의 낙선이 한국 경제의 차원에서는 축복이었다는 식으로 말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 비판하시는 김대중=신자유주의론을 주장하는 진보학자들의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뉴라이트 식의 논리로 넘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진영의 김대중=신자유주의론에 대한 핵심적 반론은 당대의 한국 경제가 김대중이 비판했던 것과 같은 관치경제, 권위주의적인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의 폐해로 외환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자유화 하는 게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자유화와 구조개선 과정 속에서 한국 경제가 고도화 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당대의 상황에서 관치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자유화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에 너무 의식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봅니다.
      반대로 저는 김대중과 박현채는 신자유주의론과 내자동원형 경제개발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을 논파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의 핵심적 논지는 외자도입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김대중이 경부고속도로 반대를 위해 건설현장에서 누웠다는 식의 거짓이 퍼지는 것처럼 박현채의 주장도 그런 식으로 곡해되고는 하는데요, 박현채의 주장의 핵심은 한국경제가 "외국자본의 재생산"의 한 부분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국내의 수요, 민중의 요구 등이 아니라 외국 자본의 축적욕망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필수불가결했다고 인식하는 지점에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김대중의 민주주의론과 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민족자본, 한국인의 자본에 기초해서 경제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경제개발의 성과가 민주주의를 통해 향유되지 못하고 외국 자본의 재생산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는데 김대중과 박현채의 박정희 비판이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봅니다. 즉 만약 김대중의 입장을 1960~70년대로 소급할 수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긴밀한 연결이야말로 경제개발의 참뜻을 구현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김대중의 복지국가론을 단순히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선취한 것으로만 보기 어렵게 합니다. 김대중의 복지국가론은 단순히 생산적 복지론을 넘어서서 민주주의야말로 민중의 욕구를 드러내는, 경제개발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적 발전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발전이 시장경제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김대중이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지, 김대중이 단순히 한국형 복지국가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그의 독창성을 드러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독창성의 차원에서 박현채가 초기에 기여한 지점이 크다는 것 또한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자한테 문자 가르친다고 김대중 연구자이신 선생님께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게 건방지지만 읽고 느낀 바가 많이 이리 길게 적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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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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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신기
      손민석 우선 이렇게 상세한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고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경제사 관련 내용은 선생님께서 훨씬 더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의견을 드리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네요. 우선 상세한 댓글을 남겨주신 것에 대한 에의 차원에서 말씀드리구요, 남겨주신 글에 대한 저의 의견은 다시 고민해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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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h
    • 손민석
      장신기 아유, 아닙니다. 저보다 선생님께서 훨씬 많이 아실텐데요. 제가 많이 배웁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신 것도 있지만 일종의 김대중에 관한 백과사전식 책이라 필요한 부분만 쏙쏙 골라 볼 수 있어 더 편리합니다. 핸드북과 같은 편리함과 내용의 풍부함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읽어보니 편집하신 김대중전집을 꼭 구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도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연구를 더 많이 내주셨으면 합니다. 제 글은 별 게 아니니ㅠ 독자의 소감정도로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