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2

130205 독서연찬회 대화 :사이엔즈에 대하여 - Daum 카페

130205 독서연찬회 대화 :사이엔즈에 대하여 - Daum 카페

맑은공기|조회 72|추천 0|2013.02.07. 09:08http://cafe.daum.net/nshumanschool/W0Aq/12

스마트폰 맹의 슬픔

녹음된 걸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녹음이 안 된 줄 알았는데 제 스마트폰 스승이신 임경환 선생님이 몇 번 터치 하니 녹음된 기록이 나옵니다.^^ 두 장의 사진과 대충 정리한 녹취록 올립니다. 녹취를 하면서 다시 들으니 재밌네요~



처음에

1 고정이 없는 과학· 철학, 즉 「사이엔즈」

「사이엔즈·S C I E N Z 」라고 하는 말은, Scientific Investigation of Essential Nature (과학적 본질의 탐구)의 머리글자 SCIEN 와Zero(제로)의 Z에 의한 것이다.

「사이엔즈」는, 특정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것이고, 「과학적 본질의 탐구」를 평이하게 말하자면, 쉽게 「알았다」 「됐다」 하고 결론짓지 않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상의 본다 · 듣는다고 하는 행위에서도,보았기 때문에 · 들었기 때문에 이해했다 · 알았다고 결론짓지 않고,「사실·실제·진상真相은 어떨까」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사이엔즈」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살펴보면, 현상에서는「이런 것을 말한 사람」「저런 행위를 한사람」이라고, 발언이나 행동을 파악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범죄라고 말해지는 행위를 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여겨지고, 모두가 기뻐할 것 같은 행위를 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다.

사이엔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는 현상면의 언동보다, 그 언동에 이르게 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나 생각 등에 중점을 두게 된다. 사람의 언동이나, 모든 사상事象에 대해서,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으로 파악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 배경이나 바탕에 있는 내면·진상·원리를 알려고 하는 지능의 작용이, 과학이며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2 「사이엔즈」의 실현 ― 본질적인 것에 중점을 둔다

사회조직에 대하여 보면, 현재까지의 사회 통념에서는, 규범이나 질서를 중히 여기고 규율을 지킨다든가, 성실하게 일한다든가,그러한 현상現象면의 것(행위)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인간교육·예의범절·도덕 등은, 마음을 소중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시 그 결과로서 좋은 행위를 하는 지 어떤 지를 중요시해서, 행위가 나쁘면 교육이나 예의범절의 효과가 없다고 본다.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 좋은 인간으로서, 마음이나 생각이 좋다고 보고 있다.

반대로,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은 나쁜 인간으로, 마음이나 생각이 나쁘다고 보여 진다.

올바른 마음이나 생각을 교육하며, 벌칙에 의해 나쁜 행위를 없애고, 누구나가 의무와 책임  규칙과 계약을 지키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고, 물건이 풍부해서 편리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의 행복이나 사회의 평화가 실현되는 것 같이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얕고, 행복이나 평화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현상면을 정리정돈하는 것에 시종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나 사회 통념에 의해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인간이나 사회를 본질적으로 보려고 하는 관점이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현상現状의 인간이나 사회조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는 발상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가 없다.

모든 동식물은, 자연체로서 그것답게 맥맥이 살아오고 있다. 왜, 인간에게는 노력이나 애씀, 인내와 참음, 규율이나 통제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분인 지성을 발휘하는 삶과는, 역방향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체로 그것답게 사는 인간본래의 모습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이엔즈는「인간이란, 사회란」하고, 그 본질을 과학 · 철학하는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이엔즈에 이르게 된 과정
  • 제1장 사이엔즈 라고 하는 사고방법
  • 제2장 사실ㆍ실제는 어떤가
  • 제3장 본래ㆍ본질ㆍ정말은 어떤가
  • 제4장 이상을 실현한다

본저는 위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실천과 연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경과를 요약하자면,

「이상을 실현하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여러 활동을 해오는 가운데, 멈춰 서서 재검토해 보니…, 무엇을 실현하려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의 목적은 무엇인가. 보편성이 있는 것을 바란다면, 먼저, 인간이나 사회에 대해 「본래·본질·정말은 어떤가」를 해명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現状의 인간 사회는 어떤가, 사회 속에서 살며,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의 「사실·실제는 어떨까」라고 검토해가자.

그렇게 하려면 , 사회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실제는 이렇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등, 서로 생각을 버텨서는 진행되지 않는다.

먼저, 인간의 생각이다 라는 것을 각자가 자각하고, 서로가 자신을 아는 것에 의해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이엔즈라고 하는 사고방법」에 다다랐다.

이러한 활동이나 연구의 프로세스를 거슬러 올라가,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해설해 보았다.

-----------------------------------------------------------------------------

-이전 단원들 보다 어려운 것 같다.

-사이엔즈 이거가 사실은 원래 연찬이라고 쓰던 말인데, 이게 야마기시 쓰던 단어가 되어서 거기를 나온 사람들이 나와서 처음에는 연찬과학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연찬이라는 말을 안 쓰고 사인엔즈 + 제로라고 쓴 것 같다. 제로라는 것이 영위에서 철저구명한다는 뜻입니다.

-책에 사이엔즈를 이렇게 요약했는데 “사람의 언동이나, 모든 사상에 대해서,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으로 파악한 것을 기초로 하여,그 배경이나 바탕에 있는 내면·진상·원리를 알려고 하는 지능의 작용이, 과학이며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감각이 아닌 걸 통해서 안 거는 사이엔즈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요즘 에크하르트 툴레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현시되지 않는 세계, 감각기관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점은 같이 이야기 해볼만한 것이 많다고 본다. 사이엔즈나 연찬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은 그동안 별로 다루지 않았다. 이런 부분이 이제 앞으로 많이 이야기 될 부분이 있다. 공자도 비슷하다. 감각기관을 통하지 않고 직관이나 톨레 처럼 현시되지 않는 세계라든지 순수의식이라든지는 별로 이야기 하지 않고 예수나 석가는 이야기를 한다. 예수나 석가는 그 세계를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사이엔즈에서 하는 내관코스가 이런 것을 다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네이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엔센셜 네이처는 본질을 말하는 것 인가봐요~

-본질이 감각기관 너머에 있는 순수한 그런 것이 아닌가봐요~

-전에는 그런 것이 과학적 탐구 부분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런 부분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그런 이야기를 안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누가 죽음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하기도 한다. 또 하도 평범한 말만 하니가 일부 사람들이 공자 제자 중 일부에게 비법을 따로 가르쳐주는 것 아닌가 하고 물으니 공자가 내가 말한 것이 전부다고 했다. 다만 제자들이 공자가 4가지를 끊었다고 했는데 무고, 무의, 무필, 무아가 그것이다. 에고를 넘어선 세계를 제자를 통해서는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도 보통사람들이 기이하게 들리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 이야기는 거의 안한다. 이번에 톨레 책을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라도 이야기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이라는 게 인간이 현실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극미와 극대의 세계를 기계나 장지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기초로 해서 현실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이 근대과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감각의 대상이 아닌 것이 감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기계를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 툴레로 말하자면 현시되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연찬적인 사고방식이 있으면서 그 영역을 현시되지 않는 세계까지 확대하는 것 같다.

-동물적 감각에 대해서 중요시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동물적인 감각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지 않을까? 원초적인 것에 대해서 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사회화되지 이전의 것?

-인간은 모르는데 동물은 아는 것이 있다. 감각의 능력이 다르다. 여기서의 감각은 인간이 지닌 감각으로 한다고 하는데 과학에서는 다양한 감각들이 밝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 많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 같다. 여기서 말하는 네이처는 인간의 의식 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에서 파악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골짜기에 다른 곳에 사는 땅 주인이 있다. 몇 년 전에 한번 봤는데 그때 그 사람의 이미지는 굉장히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무를 조금 베었다고 우리 마을 사람을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어제 보니 정말 화가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처음 봤던 그 사람과 다르게 느껴졌다. 아하~ 이것도 전후사정 없이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요소가 결국 여러 가지 감각에서 얻은 본질에 대해서 단정하지 않고 생각해 보자는 것 아닌가 한다.

-감각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난 것이 있다. 감각도 서열이 있다고 한다. 중세 시대에는 청각이 중심이었다면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는 시각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촉각이 더 본질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감각기관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길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는 건지?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감각기관으로 파악한 것을 기초로 한다는 것을 사이엔즈의 원리로 보자면 내 감각기관 조차도 제대로 감각하고 있나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동물적인 감각을 이야기했는데 사회를 살다보면 틀에다가 생각을 맞추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이란 틀이 아니라 근본적인 감각 자체를 논해보자는 것인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감각의 문제는 종교적인 곳에서도 첨예한 논쟁이다. 감각을 억제하는 문파가 있고 감각을 극대화하는 문파가 있다. 핵심은 감각적인 것 너머의 인식에 가기 위한 것이다. 오감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닐까합니다.

-“모든 동식물은, 자연체로서 그것답게 맥맥이 살아오고 있다. 왜, 인간에게는 노력이나 애씀, 인내와 참음, 규율이나 통제가 필요한 것인가?”로 되어 있는데 동물들도 인간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요? 사람만 이렇게 하고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역방향이라는 건가요?

-이 책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바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좋은 행위를 하면 좋은 인간이고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인간 이라고...

-좋은 행위를 한다는 것이 선택적이지 않은가요? 좋은 행위를 한 사람도 나쁜 행위를 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나누는 것은 좀...

-일본에 갔을 때 연수소 참고 사항 중에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를 우리는 휴지통에 버리는 데 거기는 변기에 버린다고 한다. 이 두루마리 휴지를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아닌 곳에 돌아다니는 것을 매우 놀라기도 한다고 한다. 명품에 대한 기준도 그렇고 문명을 돌아보는 관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저도 아이들에게 제가 당연하게 여겼던 기준들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임시방편적인 것일 있는데 그런 기준들이 고정되어서 통용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나쁜 행위는 나쁜 해위를 한것이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주에 일가족을 죽인 사람도?

-그 행위가 있을 뿐인 것 같아요~ 그 행위를 나쁘다 좋다는 할 수 있지만 사람은...

-“사이엔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는 현상면의 언동보다, 그 언동에 이르게 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나 생각 등에 중점을 두게 된다.”고 되어있으니까? 이렇게 보다 달라질까요?

-그 사람의 서사를 알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감각에 기초한다고 했잖아요~ 감각자체는 좋고 나쁜게 없는 것 같다. 휴지를 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저니까 휴지를 버리는 것은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넘어가면 좋고 나쁨이 생기는 것 같다. 감각이후에 좋고 나쁨을 파악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을 역방향으로 보는데 그것도 가치 판단이 내려져 있는 것이다. 노력 애씀도 감각하고 실재하는 것인데 실재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는 것을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가 있느냐? 입장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인데 옳고 그름에 문제가 아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아까 유럽 사람들이 두루마리 화장지가 밥상에 올라가 있는 것을 의아해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휴지가 이렇게 쓰일수 있구나~ 많은 곳에서 쓰일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창의력이 더 생길 것 같다. 되돌려서 보면 어떨까?

-마트에서 봤는데 휴지에 화장실에서만 쓰세요~라고 쓰여있더라고요! 제품 설명에 그렇게 쓰여있더라구요~

-실제로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선생님들도 좋다 나쁘다의 집단적 틀이 있는 것 같다. 행복하다는 것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알게 모르게 무의식속에서 고정되어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 같다.

-요즘 식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부모가 말리지 않는다고 한다. 말리면 오히려 부모가 화를 낸다고 한다. 선생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

-같이 쓰는 공간이니까 소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러면 부모도 안 좋게 보게된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얼마 안 되서도 바뀐다. 선진국 어디서는 아이들 겨드랑이에 종이를 끼우고 다는 것을 연습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의 폭을 최대로 좁혀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연습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들리는가?

-답답할 것 같다.
-유럽에 학교 연수로 갔을 때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있다. 어린 아이들(저학년 이하) 식당같은 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했을 때 한 두 번 해서 안 되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매우 심한 체벌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당연한 문화로 여긴다고 해서 매우 놀랐다. 아이들에게 체벌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이 오히려 유럽은 반대이더라~

-그 행동이 나쁘다라고 하는 거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을 아는 거하고 다른 것 같다. 혼나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하고 다른 것 같다.

-어떤 나이까지는 인식보다는 감각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닐까?

-유럽의 경우도 아이들에 대한 변천의 과정을 알아보면 좋을 것 같다. 원래 처음부터 그랬는지 우리나라에서 그러면 군사문화라고 할 것이다. 유럽이 원래 처음부터 그랬는지 하는 과정에서 변했는지 궁금하다.

-공동체나 배려의 문화가 성숙해있는 것 같다.

-우리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억압된 사회에 살다보니 부모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군사문화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가하고 아이들 멋대로 산다는 것이 부자유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가없다. 엄청 부자유를 느낀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은 아이가 자유롭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겪는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자기 집 잔디를 관리를 안했다가 마을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성인 남녀의 시각인 것 같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청소년의 시각, 어린이의 시각이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장애우의 시각이 안착화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어려서부터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 더 부자유를 느끼다고 했는데 사회자체가 부자유인 곳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배려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인가? 아이들이 그 시대에 뛰어노는 것이 자유로운 것인가? 라는 부분이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노력과 애씀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우리 사회자체는 이것에 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은 뛰어노는 아이들을 어떻게 볼까? 아이니까 뛰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까? 저도 잘 못한다.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가치를 두고 사는 것 같다. 이번에 아이들이랑 원주 어느 가게에 갔는데 아이들이 가게 물건을 막 먹더라 그걸 보고 불편했지만 그냥 한번 보고 있어봤다. 그런데 지나가고 나니까 별걱정이 없었다.

-우리시대가 사회적 통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한쪽에서 옳다고 한들 한쪽에서는 부자유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통념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통제가 없을 때 자유는 누릴 수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무방비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절대자유라는 경지에서 볼 때 단일한 자유는 없다고 본다. 파시즘이나 전체주의가 자유를 하나로 만들려고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다양화되는 것이 아닐까한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다양한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 너머의 자유가 펼쳐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분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사실일까?하고 검토해가자는 것이 사이엔즈다. 이게 정말의 인간이나 사회의 본질일까?어떤것이 행복이고 어떤것이 불행인지 자기부터 검토해가자는 것이다. 처음은 결국 자기 자신부터이다. 자기의 고정된 틀을 검토해가면서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검토해가자는 것이 아닐까?

-내가 자유롭고 타인이 부자유인 것이 자유인가? 아니면 그 역이 자유인가?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부자유가 들어가 있는데 자유일까요?

-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자유인 것 같은데요

-그건 굉장히 좋은데 어려운 것 같다. 굉장히 어렵고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한번 보자는 것이다. 굉장히 어렵다라고 보는 것도 상당히 단정하고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을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하다 보면 하나 하나 나오지 않을까 한다.

-행위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 상태에 중점을 두게 된다면 아이가 뛰어 다니면 그 마음의 상태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뭐죠?

-식당에 아이는 가기 싫었어요~ 부모는 두 시간씩 이야기 하는데 아이는 밥을 먹고 한일이 없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부당하다. 심심하고 놀고 싶은 것이다. 행위는 뛰는 것이지만 마음상태는 아이가 지루하고 심심하고 놀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식당에 놀이방이나 오락실을 만들어 논 것 이다.

-저희 어머니와 통화할 때 아이들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면 어머니는 아이들이 건강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1학년아이들이 아무리 넘어지니까 뛰지 말아라 해도 뛴다. 5학년은 뛰지 않는다. 6학년은 어른 보다 늦게 걷는다.

-아이들 기르는데 식당을 데리고 자주가지는 않는다. 사실 피해 때문에 그렇다기 보다는 안전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부모가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안전의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못 알아 듣고 인식을 못한다. 안전에 대한 의식은 어른아이도 있다.

-곡성 기차 마을을 갔는데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데 한국 사람은 절대 못 가게 하는데 외국 사람은 결정적인데 재제한다. 그냥 놔두면 안 될까 생각해 봤다. 내 욕구가 있으니까 아이를 잡는 것이 아닐까? 그 아이를 보는 것도 보는 거지만 내가 왜 아이를 잡고 있을까를 보는 것이 어떨까?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 할 부분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 한 것 같다.

-이상을 실현하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잠시 멈춰서 재검토 한다는 것은 정말 필요한 것 같다. 평가 토론을 하는데 너무 형식적이고 그렇다. 진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걸 중간에 이야기 하면 굉장히 김 빼는 이야기로 듣는데...

-배가 산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보자는 것 같다. 뭔가를 하다보면 많은 문제에 직면할 것 같다. 그럴 때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각자 일을 하고 있는데 진짜 목적이 뭔가? 이야기 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진짜 목적이 무엇일까요? 한번 생각나는 사람은 이야기 해보지요?

-목표를 이야기 한 것인가요?

-목표를 넘어서 그 목표를 넘어서 달성하고 싶은 진짜 목적~

-그것을 스스로 잘 물어보기 드물다.

-일관되게 사는 선배가 있다. 이주민노동권을 위해 일한다. 그 선배에게 물었다. 형은 이게 왜하냐고 그랬더니 그 선배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평등한 세상이 되면 형은 뭐가 좋으냐고~ 선배가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김창완이라는 가수가 이비에스에 나왔다. 김창완이 아주 어렸을 때 왜 사냐고 물어보고 다녔다고 안다. 어른들이 커보면 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어른이 되었는데 아이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고민이 된다고 했다. 김창완은 사는 동안이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답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답을 못 얻었던 것 같다. 목적이 뭐냐고 물었는데 공자나 예수님도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만인의 구원을 위해 사시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살았다. 근데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가졌냐고 물으니 하나님은 아무 뜻이 없다고 하더라~

-아까 평등 사회 이야기 했는데 진짜 그렇게 한다고 하고 있는데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다. 한참을 물어보면 보이는 게 있다. 내년에 나이가 70인데 내가 이야기 할 때 성숙한 인격이라는게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의 동요가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돌아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는 부끄럽다. 이거는 자기 스스로 검토했을 때 이야기 할 수 있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 아닐까?

-사람이 죽어가는 것은 현상인데 사는 동안에 뭔가를 하는데 진짜로 하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목적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이남곡 선생님의 진짜 목적을 듣고 싶습니다.

-그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말로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한참 묻다보면 뭔가 보이면 진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행복해질 것 같다고 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 못 찾았어요~ 죽을 때 까지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역 선생님이 그랬는데 자의식이 들어가면 다 허위라고 이야기 한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하더라도 자의식이 들어가 있으면 가짜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다가왔다. 내가 뭐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자의식이나 허위의식이 없는 것 아닐까? 자칫 하면 이상을 내걸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 자의식이 많은 경우가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 행복 등의 여러 가지 관념을 내려놓고 가보자고 서론에서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니까 행복 지수가 떨어지는 것 같다. 지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대 지속적이지 못하니까 문제다.

-그렇게 하니까 문제가 아닐까 행복했으면 그것으로 끝나면 된다. 그것을 지속하려면 이것 저것 어려울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행복하다기 보다는 꿈이 있어야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 꿈이 허망할 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지 않을까요?로또를 하나 샀을 때 일주일간에 충만감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꿈을 깨라고 하면 잔인하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연애 할 때는 좋은데 막상 결혼하면 환상이 깨진다.
-오늘 여기에온 각자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단서가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지금 뭐가 좋으니까 왔을 것인데 그게 뭘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에즈원커뮤니티에 다녀온 분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차이가 있어요~ 다녀 온 후하고 그 전하고...
-정다운 사회 같은 경우 어떤 바탕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이해가 더 되는 것 같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알라딘: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세실 앤드류스 (지은이) | 강정임 (옮긴이) | 한빛비즈 | 2013-10-21 |

원제 Living Room Revolution (2013년)

-----

강도현



진정한 행복이란 바로 공동체에서 시작된다고 역설하는 책이다. 저자는 경쟁 사회에서 묻힐 수밖에 없었던 본능적인 공동체 능력이 극한의 상황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사례를 통해 행복의 본래 의미를 되묻는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공동체성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민주주의와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가장 필요한 ‘스터디 서클’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조목조목 예를 들어 설명한다.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배려의 대화법에서부터 8주간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화두를 던지고 풀어나가야 할지 섬세하게 짚어준다.



특히 저자가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행복 서클’의 사례는 행복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문제들, 가령 개인의 행복을 위한 관계, 유희, 소명, 통제에 관한 담론에서부터 공동체 활성화와 환경문제 그리고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사회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화두에 대한 진솔한 대화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이를 실천하도록 독려한다.

----

추천의 말 - 강도현

감사의 말

서문



01 타인으로부터 기쁨이 온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한 적이 없다 | 유대감, 고요하게 차오르는 기쁨 | 협동심에 불을 붙이는 시스템 | 이기심과 탐욕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02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행복이 줄어들고 있다 | 행복을 부르는 4대 요소 | 관계: 나는 외롭지 않다는 착각 | 소명: 온 우주가 외친다 “이 일을 하라!” | 유희: 천국 입장이 노동 강도순이라고? | 통제: 내 삶을 내가 결정할 권리 | 불평등 그리고 존엄성에 대한 열망 | 좋은 정부는 행복을 실현한다



03 유쾌한 공동체를 소개합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것 | 지루한 연설은 이제 그만! | 화려한 점거 | 웃기는 비상사태 대비 모임 | 타인과의 대화를 피할 수 없는 장소 | 바느질을 다시 배우는 사람들 | 활기 넘치는 개인들의 공동체 | 평등하지 않다면 공동체가 아니다 | 거실로부터의 혁명 | 유쾌함을 전파하는 삶의 방식



04 나와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화법 1

왜 대화가 줄어들었을까 | 대화는 신성한 경험이다 | 죽은 대화에서 생명의 대화로 | 진정한 나를 찾아주는 대화법 | 행복을 위한 11가지 대화의 원칙



05 나와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화법 2

변화를 위한 3가지 대화의 원칙 | 곤란한 상황을 돌파하는 대화법 | 이만하면 됐다!



06 정중하고 절제된 담론



---

P.40~41 :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나는 행복이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4대 요소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4대 요소란 관계Connection, 소명Calling, 유희Celebration, 통제Control를 ...

P.64 : 사회적 저항에도 유쾌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회변화를 시도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분노로 가득 찬 비난과 공격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을 더 화나게 만들고 도중에 중단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대신 우리...

P.113 : 1929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 두 명이 대화를 시작했다. C. S. 루이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월요일은 새벽 2시 30분까지 깨어 있었네. 앵글로 색슨어 교수 톨킨과 대화하느라고 말이지. 그는 나와 함께 모임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아스가...

----

강도현 (카페바인 협동조합 운영위원장, 《골목 사장 분투기》저자)

: 이 책에는 ‘공’ 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공동체, 공생성, 공유, 공공, 공익, 공감……. 이 책은 ‘공’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통 그런 내용의 책이라면 90년대 대학에서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선배들이 새파란 후배들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책을 읽는 내내 옆집 누나가, 혹은 언니가 맥주 한 잔에 쥐포를 뜯으면서 수다 떠는 기분이 든다. 저자가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를 처음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행복’이라는 주제를 꼭 붙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 정의를 위해,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 공생성, 공유 등 ‘공’을 잘 다루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설파한다. 그런 삶이 진정 재미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소개하면서 말이다.



공은 둥글다. ‘공’으로 시작하는 단어들도 대개 그렇다. 대개 둥글둥글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친 경우가 많다. ‘공’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뾰족하다. 그것은 아마도 암울했던 우리의 근대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비참했던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30년이 넘도록 지속된 독재와 부패한 정치세력의 집권, 반세기 넘는 남북 대치, 그로 인해 사회 곳곳에 만연한 군사문화 등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성을 주장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각오해야 했던 시대가 불과 얼마 전이다. 지금도 공공성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사적 이익에 대해서는 끝없이 관대하면서 공공성을 이야기하면 껄끄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저자는 그런 사회에서는 공동체는 물론이고 개인도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국 사회가 돈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 경쟁 때문에 공동체성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진 슬픈 현실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다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차근차근 풀어간다.

미국 사회를 향한 저자의 눈물 어린 비판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 우리 한국이야말로 ‘돈’과 ‘계급상승’에 대한 끝없는 욕구로 인해 ‘공’이 제대로 굴러다니지 못하는 사회 아닌가? 공공성 회복이 곧 힘겨운 투쟁을 의미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치유를 위한 처방전과 같다. 물론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한 번에 병을 치유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읽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기초 체력은 다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면서도 시종일관 따뜻한 언어를 구사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함에도 주장보다는 대화를 시도한다. 저자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불편함보다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리고 저자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저자의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한국 사회의 가장 이상하면서도 어두운 단면 중 하나는 바로 정치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이율배반적이다.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중앙 정치의 온갖 미사여구에는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삶과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지역 정치나 마을 정치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정치 프로세스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다른 정치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은연중에 배척한다.

정치가 대화와 합의가 아닌 분리와 배척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되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오히려 개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궤변이 난무한다. 그게 바로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빨갱이’니, ‘꼴통보수’니 하는 언어들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대화할 줄 모른다. 저자는 정치가 배척의 메커니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행동은 알지 못하는 타인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깊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분리와 배척이 아닌 대화와 이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검증된 방법이다. 그것은 비단 정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 전반에 필요한 처방전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얽히고설켜 있는 우리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 S. 루이스와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J. R. R. 톨킨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두 거장의 친분이 깊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두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톨킨은 원래 판타지 소설가가 아니었다. C. S. 루이스의 격려와 그들이 함께했던 대화 모임을 통해 얻은 영감이 두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화는 엄청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뜻을 세우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당장 대화 모임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실천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서문에서 밝히듯 저자는 언제든 자신을 대화에 초청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 요청에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직접 연락해보시기를 적극 추천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고 더 나은 사회, 더 행복한 개인을 위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저자 : 세실 앤드류스 (Cecile Andrews)


사라지는 지식인 -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사라지는 지식인 -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헨리 지루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우리는 많은 나라에서 '경제적 다원주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광범위하게 채택되는 것을 보아왔다. 경제적 다원주의는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적 비용이라는 담론에서 경제와 시장을 제외시킨다. 그 결과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적 파괴와 광범한 경제적 빈곤화에서부터, 인종과 계급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체포·투옥되는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금 경제는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동정심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광적인 개인주의와 가혹한 경쟁의 언어가 시장가치와 결부돼 있지 않은 모든 공공성과 연대의 관념을 해체하고 있다. 공공성에 대한 고려가 도덕적으로 공허한 사적 비전과 편협한 이기심의 늪으로 추락하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이 붕괴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적 고통이 보다 넓은 공적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제 장기적인 투자는 단기적인 이윤으로 대체도고, 동정심과 타자에 대한 관심은 약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공적 관점이 망가짐에 따라 공공선이라는 개념은 뿌리가 뽑혔다. 민주적 공공가치는 그것이 시장 노리를 공공선에 종속시킨다는 이유로 경멸당하고 있다. 여기서 도덕은 간단히 해체돼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이 서로서로에 대한 여하한 의무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영화, 규제완화, 상품화 따위의 언어가 공공선이라는 담론을 대체함에 따라 공립학교, 도서관, 교통체계, 핵심적 인프라, 공공서비스 등 모든 공적인 것은 시장을 왜곡시키는 요소 혹은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부패를 조장하는 금력과 집중화된 권력은 방위산업이라는 광정 폭력을 떠받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권 개념을 변질시키고 있다. 이제 주권은 부유층과 대기업 그리고 방위산업을 보호하는 정책과 동일한 것이 되었다. 토마스 프랭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소수에게 집중된 금권은 전문직과 소규모 투자자들을 파괴하고, 국가의 규제기능을 무력화시키며, 입법자들의 집단적 부패를 초래하고, 반복적인 경제위기를 가져왔다. 이제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자체를 노리고 있다."
  개인적 성공은 최고의 사회적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혁신을 추동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득이나 부의 격차는 적자생존 윤리를 정당화해주는 현상으로 오히려 칭송되고 있다. 사회국가에 의해 한때 보호를 받았던 취약계층은 이제는 골칫거리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비자로서 결격자(缺格者)이거나, 백인 프로테스탄트 중심 미국을 고집하는 우익 기독교도의 시각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노인, 젊은이, 실업자, 이민자, 가난한 백인과 유색인종들은 일종의 인간쓰레기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권리, 혜택, 보호를 나누어 가질 자격이 없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이 새로운 차별정치와 문화적 잔인성은 경제 위기 이상의 것을 표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육, 행동주체, 사회적 책임감에 관련된 뿌리 깊은 위기를 나타낸다.
  C. 라이트 밀스를 인용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붕괴, 비판적 지식인의 소멸 그리고 "비판적 주체와 사회적 상상력을 공급하는 공적 영역의 붕괴"이다. 1970년대 이래 시장근본주의 세력은 교육으로부터 공적 가치, 비판적 내용, 공민적 책임의식을 박탈해왔다. 이것은 소비주의, 리스크가 없는 관계 그리고 사회국가의 파괴와 결합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큰 목표의 일환이었다. 지금 많은 고등교육기관은 도구적인 목적과 계량적인 패러다임에 속박되어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목표에 매달려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단지 예비 노동력으로 취급받고 있을 뿐이다. 대학은 민주적 소명으로부터 일탈했을 뿐만 아니라 고실업이나 파멸적인 부채 등 닥쳐올 거친 새로운 미래에 직면해야 할 학생들의 곤경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지식을 갖춘 능동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고등교육이나 보다 넓은 문화적 장치들에 의한 일반적 교육공간 전체에 걸쳐 지금 우리는 교육, 자유, 주체, 책임에 관련하여 하나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시장주의 관념이 등장·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민주주의에 불가결한 '조직화된 책임감'을 배양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조직화된 무책임을 조장한다.
  자유시장 근본주의를 추동하고 있는 반민주적 가치는 지금 세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수준의 고등교육 정책 속에 구현되고 있다. 그러한 정책은 이제 낯익은 것이 되고, 갈수록 당연시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그러하지만 캐나다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공립교육과 고등교육을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재편하는 것은 기업 중심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커리큘럼의 표준화, 하향식 지배구조가 이루어지고,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강좌가 개설되며, 모든 교육이 직업훈련 장소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테크 회사를 설립하는 학생들에게 석사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전문직 경력자가 인문학 분야 고급 세미나를 지도하도록 허용하는 대학도 있다. 이런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브랜드가치를 드러내는 30초짜리 상업광고'를 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 고등교육관에서 핵심적인 것은 시장주의 패러다임이다. 그 결과 종신교수직이 없어지고, 인문학이 취직준비용 서비스로 전환되며, 대부분의 교수가 파트타임 임시 노동자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 노예적인 교수신분은 몇몇 대학들이 교수 채용업무를 '임시적 고용 대행기관'에 맡기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수직은 그저 또하나의 값싼 노동예비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대학은 학술노동자들의 욕구와 권리 그리고 학생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의 질은 도외시하면서 오로지 재정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무력한 교수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고등교육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 속에는 교수와 행정가들의 협치(協治)라는 개념도 없고, 잠재적인 월마트 피고용인이 아니라 비판적 시민으로서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교수들은 일정한 자율성과 힘을 보유한 학자나 공적 지식으로 보려는 노력도 없다. 그 대신 교수들은 점차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기술자나 보조금을 받는 작가로 규정된다. 이처럼 열화(劣化)된 교육 속에서 학생들의 처지도 나을 게 조금도 없다. 그들은 소비자로 취급되거나 혹은 자극적인 오락이 필요한 불안정한 아이들로 취급된다.
  고등교육의 정당성은 그것이 민주주의체제 유지에 필요한 주체를 길러내는 근원적인 공간이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그런 공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 대학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은 괴멸상태이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은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 교육적 투자라기보다는 지식과 교육의 물질적·인적 자본의 생산에 연결시키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등교육과 정당성의 위기

  미국에 있어서 고등교육의 문제는 대부분 재원 부족, 시장메커니즘의 지배, 영리 추구 대학의 부상, 안보국가의 침투, 교수 자치의 결여와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은 고등교육이라는 문화와 민주적 가치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대학의 의미와 소명을 비웃는다.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감소는 부유층을 위한 세제 혜택, 거대은행, 국방예산, 대기업에 대한 지원 증가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학생들의 도덕적 상상력과 비판적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예비 헤지펀드 매니저를 기르면서 정치의식이 없는 학생들을 만들어내는 대학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하여 대학들은 ‘기술적으로 훈련된 유순함’을 장려하는 고육방식을 고안해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총장은 지금 CEO(최고경영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월스트리트나 기업 펀드매니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과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기업과 학교 이사회 사이를 오가고 있다. 벤처기업가들은 특허계약, 지적재산권 관리, 대학 산하(傘下) 사업체에 대한 투자를 통해 큰돈을 벌기 위해서 부지런히 대학을 이용한다. 이 새로운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학문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 상황은 최근의 한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악화일로에 있다. 금융지주회사 BB&T코퍼레이션은 에인 랜드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자유방임경제와 이기적 이윤추구 논리를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유명한 소설 - 역주)를 정규과정에서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마셜대학 경영대학원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돈을 주는 기업이나 부유한 후원자의 뜻에 따라 무엇을 가르치고 교과과정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정할 때, 대학의 진실성은 어떻게 되는 걸일까? 어떤 기업과 대학들은 이제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는 학문적 결정 사항이 아니라 시장논리에 의거한 고려 사항이라고 믿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민교육과 공적 가치를 훼손시키고 교육과 훈련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쇼핑몰로, 학생을 소비자로 보는 논리를 강화하여 지식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한다. 상황은 악화일로이다. 스탠리 아러노위츠가 지적하듯이, 공원이나 해변에서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공재에 대해 사용자들이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극단적으로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치솟는 등록금으로 인해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이 지금 빚에 얽매여 있는데, 이것은 장래에 그들의 삶을 파산시킬 것이다.
  불행하게도,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 감퇴가 어느 정도인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많은 주(州)에서 고등교육보다 감옥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소득 소수집단들을 위한 교육은 징벌국가의 대두와 더불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세력, 민간 감옥회사 그리고 간수(看守)노조로 이루어진 비신성동맹(非神聖同盟)에 의해 훼손되어 왔다. 이들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소수집단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기보다는 감옥에 넣어두어야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정도는 덜하지만 캐나다도)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기관에 대해서는 투자를 줄이면서 감옥산업을 늘리고 국가의 징벌 및 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데 투자를 늘려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육보다는 처벌을 중시하는 데 따른 사회적 비용은 최근의 한 연구가 보여주는 충격적인 통계에 명확히 드러난다. “23세에 이를 무렵이면, 미국인 전체 중 거의 3분의 1, 즉 30.2%가 범죄 혐의로 체포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노출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뉴욕타임즈>, 2011년 12월 19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예민한 예언자적 정의감을 가지고, 비판적인 분석기술을 활용하고, 타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윤리적 감성을 계발하도록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장논리에 지배된 대학에서 갈수록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있다. 인문학과 자유교양 과목이 축소되고, 민영화·상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적·공민적·도덕적 발판을 제공하지 못하면서도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적 처지에 놓여있다.
  기업화된 대학의 타산적 논리는 생명력 있는 민주주의와 주체적 사회 참여의 지속에 필요한 도덕적·정치적 비전과 실천을 감퇴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의 제기나 비판적 대화, 사회적 책임감과 정의감은 학생들이 나라와 지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데 불가결한 자질들이지만, 오늘의 대학은 이러한 자질이 존중받는 공적 공간의 학대를 막고 있다. 민주적 공적 공간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기성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비판적 사상가들”을 육성하기 위한 공간이, 강력한 경제적·정치적 기득권층에 의해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 고등교육은 진리를 탐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서 권력이란 마땅히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에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대학이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과거에 그랬던 것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고등교육의 목적을 말할 때, 그리고 민주적 가치의 옹호자로서 대학이 공적 생활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할 때,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고등교육은 공적 가치와 비판적 희망,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양하는 교육적 가능성이 남아있는 매우 드문 공적 영역의 하나라는 점이다. 일상생활이 갈수록 시장원리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시장 주도 사회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고등교육의 전통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고등교육의 가장 깊은 뿌리는 도덕적인 것이지 상업적인 게 아니다. 이 성찰은 오늘의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이 점차로 주류 미디어에 의해 밀려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아이디어들은, 설령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지 않는다 해도, 대개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망가 중심 문화 및 문화의 상업화는 심각한 대중적 문맹화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제도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 문맹화는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EH한 반대의견을 억누르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살리고자 하는” 지식인들은 흔히 불필요한 존재, 극단주의자 혹은 비(非)미국적 인물로 취급·무시당한다. 더욱이 지금은 반(反)공적 지식인들이 문화적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반대자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거기에 대한 보답을 획득하는 데 기꺼이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강력한 경제력을 보유한 기득권층의 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살아있는 비판적 민주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기르는 고등교육의 역할을 옹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서는 대학인들은 너무나 적다.
  이 문제는 고등교육의 목적과 의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간과해서는 안될 정치적·교육적 현안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공민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의미 있는 공민적 가치, 자치활동에의 참여, 민주적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넓은 토대의 비판적 교육의 필요성이 포함된다. 오직 그러한 교육문화를 통해서만 학생들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개인적·사회적 주체가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기

  민주적 공적 공간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재생시키자면 무엇보다 시장근본주의자, 종교적 극단주의자, 완고한 이데올로그들에게 맞서야 한다. 이들은 비판적 사유와 건강한 회의주의에 대해 깊은 경멸감을 품고 있으며, 학생들이 글과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비판적 상상력은 권력자들에게는 위험스러운 위협이다. 노골적인 예는 최근에 전 상원의원 릭 센토럼에 의해서 표명되었다. 그는 공화당에는 지식인이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교육이란 노동과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정의, 사회적 자유, 민주적 주체와 실천 및 변화의 역량 그리고 권력, 포용, 시민권에 관계된 문제들을 포괄한다. 이들은 교육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들 문제는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 지구적 투쟁에 힘을 불어넣는 광범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뤄져야 한다.
  고등교육이 비판적 사유, 집단적 작업, 공적 서비스를 함양하는 장소가 되려면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현재의 대학에서 중시되는 지식, 기술, 연구, 지적 관습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검토작업에서 핵심적인 것은, 지적 실천을 “도덕성, 엄격함, 책임감으로 구성된 정교한 그물망의 일부분”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발언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고등교육과 보다 넓은 사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대안적 모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연결’ 혹은 ‘관계’를 맺어주는 실천이다.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 토대를 둔 지적 실천을 발전시키고, 대학의 도구화와 특권적 고립화를 거부하고, 비판적인 사유와 현상(現狀) 거부를 연결시키며, 인간의 주체성을 사회적 책임과 가능성의 정치라는 개념과 결부시켜야 한다.
  대학은 갈수록 공포의 문화에 지배되고 있다. 이의 제기는 배신 혹은 반역 행위와 동일시되고 있고, 객관성·중립성을 지킨다는 것은 흔히 조지 오웰이 말한 공식적 진실 혹은 기성체제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민주적 정치라는 초점을 결여한 교원들은 대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 기술자나 기능인으로 지낼 뿐이다. 이들은 보다 넓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이나 자신들의 교육적 실천과 연구행위가 낳는 결과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기만적인 개념에 충실한 이런 모델과는 정반대로, 나는 대학은 비판적인 교육자와 능동적인 시민을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교실에서의 수업이 보다 큰 사회에서의 권력행사와 무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학은 학생들이 비판적 주체가 되어 권력자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 학생들은 그저 일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만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보다 넓은 세상과의 수많은 관계들을 규정하는 제도, 정책,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묻도록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유토피아적 기획으로서의 교육은 단순히 비판적 의식을 조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혹은 세계적인 것이든, 책임질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학생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키는 이데올로기적·구조적 힘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단지 문제를 인식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지적 실천 - 타자의 고통과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이다.
  교육은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다가올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언제나 “비판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 있는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기획 속에서 교육은 밝은 지식 기반 위에서 행해지는 정치적·도덕적인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교육은 교조적이거나 도구화된 교육이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교육논리가 모든 수준의 학교교육에서 작동해야 한다. 이 비판적 교육학은 또한 대학을 마치고 학교와 교회, 시너고그, 혹은 일터로 돌아갈 학생들 때문에 활력을 얻는다. 그들은 장차 대학을 떠나서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을 생산하고, 남녀노소가 함께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방식을 발전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 실천과 책임은 지나치게 실용적이며 섬처럼 고립되어 특권을 누리는 대학상(大學像)을 거부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학습에 대한 보다 폭넓은 비전이다. 그리하여 지식은 자신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민주적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고, 교육·정치·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학생들의 능력에 연결돼야 한다.
  비판적 교육, 대화, 사유가 실질적 효과를 가지려면, 모든 시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등한 자격 - 동등한 능력은 아닐지라도 - 이 있다는 메시지가 제창돼야 한다. 캐나다의 퀘백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서 등록금 인상과 시민적 자유 및 복지서비스의 후퇴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감한 학생들에게서 우리가 듣는 게 바로 이 메시지이다. 만일 교육자들이 공적 지식인이 되고자 한다면, 세계 전역에서 투쟁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지금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해방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역사와 경험이 중요하며, 특권을 해체하고 인간관계를 생산적으로 재구축하고,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투쟁에서 그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자들은 대학과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교육이론을 천명해야 한다. 커리큘럼은 지역사회와 문화 및 전통에 대한 지식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학생들에게 역사, 아이덴티티, 장소,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 안팎에서의 사회운동 형성에 직접 연관되는 새롭고 급진적인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과 함께 자유의 실천에 참여하는 일이다.
  아직 노엄 촘스키, 안젤라 데이비스, 스탠리 아러노위츠, 슬라보예 지젝, 러셀 자비코, 코넬 웨스트 등 공적 지식인이 상당히 있지만, 이들은 흔히 주류 미디어에서 배제되어 있다. 혹은 주변적 인물, 심지어는 체제 파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동시에 많은 대학인들은 끔찍한 노동조건 밑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한 글쓰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거의 노예처럼 취급당하는 시간강사들뿐만 아니라 점차로 전임교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상황에서 이들은 학문적 능력을 평가하는 공식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극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적 언어의 세계로 갇혀버린다.
  이러한 지식인은 흔히 일반 대중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부터 절연된 은둔처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이 기업과 군사권력의 부속물로 변형되는 데에 적잖게 공모해왔다. 이런 학자들은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옹호할 능력을 상실해왔고, 비판적 사유와 복잡한 아이디어 그리고 대중을 위한 진지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대중적 문맹화를 초래하는 방화벽 - 전문용어 과잉- 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있다.
  때이른 나이에 죽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모범적인 공적 지식인이었다. 죽음에 앞서서 그는 대학의 동료들에게 현대사회를 더럽히고,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하는 사회적 어려움들을 직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들이 공적 지식인이 되어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자율적이고 자기성찰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교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낼 것을 원했다. 사이드는 시장논리에 지배되는 교육개념을 거부했다. 그것은 유쾌한 로봇을 만들어내고, 조직화된 무사려(無思慮)와 불법적인 합법성을 옹호하는 논리일 뿐이다. 그러한 교육에 반대하여, 사이드는 ‘깨어 있음의 교육학’과 비판적 참여정치를 제창했다.
  나는 사이드의 ‘깨어있음의 교육학’과 그것이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인에 대한 그의 견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논함에 있어서 그가 쓴 글 한 대목을 먼저 인용하고 싶다. 이 대목은 내 생각에 사이드의 글 전체의 윤리적·정치적 힘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그의 회고록 ≪제자리를 벗어나서≫에 나오는 대목인데, 여기서 그의 어머니가 뉴욕의 한 병원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몇 달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진 채 몹시 힘든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잊을 수 없는 아픈 경험을 회상하는 사이드의 마음은 현실과 반역, 개인적 고통과 현실참여, ‘견고한 자아’와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아이덴티티 감각 사이를 오간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잠을 잘 수 있게 도와다오, 에드워드.” 한번은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처로운 음성은 이것을 쓰고 있는 지금도 들린다. 그러나 그 때 암은 이미 어머니의 뇌까지 퍼져 있었다. 지난 6주간 그녀는 내내 잠만 잤다. 내 불면증은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유산인지도 모른다. 잠들기 위한 어머니의 몸부림의 대가로서 말이다. 내게 잠이란 가급적 빨리 해치워야 할 어떤 것이다. 나는 매우 늦은 시간이 돼서야 잠들 수 있지만, 그러고서도 실제로 새벽에 일어난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오래 잘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나는 잠을 원치 않는 지점까지 와버렸다. 내게 잠은, 여하한 축소된 의식상태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상태이다. … 불면은 내가 어떤 비용을 치르든 작고 싶은 바람직한 상태이다. 이른 아침에 전날 밤 동안의 몽롱한 반(半)의식상태를 즉각 떨쳐버리고, 몇 시간 전에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탈환하는 것만큼 내게 기분 좋은 일은 없다.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이 여러 흐름들의 묶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견고한 자아라는 것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정체성 - 보다는 이게 좋다. 이 흐름들은 내 삶의 주제곡처럼 깨어있는 동안 계속 흐르지만, 그것들은 최고의 순간에도 어떠한 화해도, 조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탈’하고, 제자리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언제나 움직임, 시간, 장소 속에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묘한 조합을 형성한 채, 반드시 전진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상호 충돌하면서, 대위법적으로 그러나 중심주제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이게 자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확신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회의(懷疑) 또한 내가 각별히 아끼고 싶은 주제의 하나이다. 내 삶의 수많은 불협화음과 더불어, 나는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닌 상태,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선호하는 것을 배웠다.

  이처럼 깨어있고, 이탈된 채, 다양한 상황들 속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감각은 코스모폴리턴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한다. 윤리적·정치적 실천으로서의 깨어있는 공적 교육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관심사, 역사와 인간고통, 사회적 정의와 유리된 교육형태를 거부한다. 사이드의 깨어있는 교육이라는 생각 속에는 “복합적인 아이디어들을 공적 공간으로 들어올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즉, 대학 안팎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현실을 인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론을 비평의 형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육이고, 개인적 이슈보다 넓은 사회적 이슈 사이의 연관을 명확히 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 교육이다.
  사이드에게 깨어있음이란 공적 지식으로서의 대학인의 역할을 드러내는 중심적 비유가 되었다. 이 비유로써 그는 핵심적인 공공영역으로서의 대학을 옹호하고, 문화가 어떻게 권력을 전개하는가를 지켜보며, 인간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늘 경계선상에서, 즉 한 발은 안쪽에 다른 발은 바깥쪽에 둔 채 망명객이자 동시에 내부자로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집이란 언제나 집 없음의 형태를 취했다.
  망설임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으로서 사이드는 참여적 지식인을 가리키는 중요한 비유로 ‘여행자’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스티븐 하우가 사이드를 언급하며 말하듯이, “그것(여행자)은 권력이 아니라 움직임에 의존하는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는 여러 다른 세계들로 용감하게 들어가며,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다양한 위장(僞裝), 가면, 레토릭을 이해하는’ 움직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행자는 새로운 리듬과 의식(儀式) 가운데 살기 위해서 판에 박은 관습을 유보해야 한다. … 여행자는 경계를 넘어가서 영토를 횡단하고, 항상 고정된 자리를 포기한다.” 사이드는 경계선에 선 지식인이자 여행자로서 언제나 ‘반드시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체현했다. 그것은 모든 고정관념과 도그마를 비판하고, 세계 곳곳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현실에 직면하여 침묵을 거부한 그의 원칙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깨어있음’이란 엄격한 지적·이론적 작업 없이 조잡한 선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매도하는 - 오늘날 인기 스포츠가 돼 있는 -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성과 명료함의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시민적 용기와 정치적 참여를 뜻한다. 그리하여 비판적 독해력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세계에의 개입 가능성을 열어주는 하나의 해석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인의 입장에서 세계의 복수성(複數性)을 해독하는 행위, 즉 저마다 다른 주체의 다양한 입장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교육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은 한나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드러나 있는 인식에 빚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으로 보장된 공적 영역 없이는 자유가 모습을 드러낼 현실적 공간은 없다.”
  사이드, 촘스키, 부르디외, 안젤라 데이비스 그리고 그 밖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공적 지식이란 권력을 불편하게 하고, 합의사항을 문제 삼고, 상식에 도전할 책임이 있는 인간을 뜻한다. 참여하는 공적 지식인이라는 개념 자체는 학자로서의 존재를 침해하는 개념도 아니고, 학자라는 존재에 낯선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학자란 무엇인가를 정의(定義)할 때 중심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이다. 사이드에 의하면, 대학인은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 두려움 없이 입장을 취하고 논쟁을 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덕적 증인이 되고, 정치적 의식을 제고시키며, 흔히 대중이 보지 못하는 권력이나 정치적 이슈들 간의 연관성을 밝혀 “공적 토의의 소음 속에 가려진 도덕적 질문들을 대중에게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이드는 ‘공평무사한 전문가’ 라는 새로운 교조주의(敎條主義) 속으로 물러난 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그들이 “공공영역뿐만 아니라 동일한 전문용어를 구사하지 않는 다른 전문가들로부터도 절연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현상을 그가 특히 우려한 것은, 복합적 언어와 비판적 사유에 대한 반민주적 세력들로부터의 공격이 온갖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때문이다.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이라는 개념은 지난 30년간 빈사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가르칠 책임을 이행하고자 할 때는, 그들은 흔히 직업적 성실의무를 저버리고 교실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거나 혹은 심지어 비애국자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심한 경우에는 일자리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특히 그들이 권력의 작동방식이나 사회적 부정의, 인간적 비참을 명확히 드러내고, 사회질서란 변경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 그러하다. 교양교육이나 인문학이 자유의 실천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 대해서 묻기를 꺼리거나 물음을 던질 능력이 없는 사회, 시민보다 소비자를 더 중시하는 사회, 그리하여 기업의 이해관계라는 좁은 가치에 전적으로 매달린 사회일수록 비판적 사유와 대화의 공간으로서의 대학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시장근본주의가 국가, 자본, 다국적기업의 동맹관계를 조장해왔다는 점증하는 대중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동맹이 고등교육기관과 주류 미디어 문화를 통해서 구축되고 강화돼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난 30년간의 경제적 다원주의의 결과는 금융과 신용의 위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주체와 이성 그리고 의미 있는 반론을 지지하는 모든 사회적 기관들을 공격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온 세계가 겪고 있는 금융붕괴를 교육의 위기현상으로 보는 눈의 거의 없다. 실제로 그동안 공교육 및 고등교육은 민주적 가치를 파괴하는 전쟁에 동원돼왔다. 그러한 교육기관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시장 중심적 신념, 사회관계, 정체성, 이해방식을 재생산하는 데에 지대한 - 뻔뻔스럽다고는 할 없을지라도 - 공헌을 해왔다. 윌리엄 블랙은 그러한 기관들을 ‘범죄 유발 환경’ 공급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것들은 속임수, 규제철폐, 그 밖의 시장 주도형 제도와 관습을 장려하고 정당화해온 기관이라는 것이다. 블랙에 의하면,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경영대학원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경영대학원을 ‘협잡꾼 양성 공장’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금융붕괴 현상과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장 주도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온 세대가 지금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가. 분명한 것은, 이 세대가 지금의 위기를 기업 및 전쟁국가의 하인으로 전락한 교육시스템과 관련해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등교육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 현장의 하나이다. 그 곳은 보다 넓은 해방담론의 일환으로서 희망, 주체, 정치, 도덕적 책임을 결합시키는 비전과 교육적 실천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에의 약속이 생겨나는 장소이다. 물론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엄격한 학술적 방법이나 전 문화의 규율에 맞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지속시키는 데 핵심적인 주체들을 위하여 지식과 정열, 가치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생활양식이며, 인간을 성장·교육시키는 문화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들은 젊은이들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력을 행사하며, 활기 있는 논쟁에 참가하여, ‘정치적 삶의 정수(精髓)’를 이루는 공적 공간을 창조하도록 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민주적 미래를 상상하는 게 더 어려워지긴 했지만, 지금 세계 전역에서 젊은이들이 신자유주의와 그 ‘쓰고 버리기 식’ 교육 및 정치에 항거하는 시대로 우리가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무력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가 전쟁 수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시장이 민주주의의 척도가 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집단적인 조직화를 행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노예폐지론자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더글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공허한 개념일 뿐이라고, 그리하여 “투쟁이 없으면 진보가 없다”고 용기 있게 말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상위 1%만이 아니라 99%까지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들이 파편적인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교육하며, 민주주의 재생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나아가도록 힘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스탠리 아러노위츠의 말은 옳다. “이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급진적 상상력의 쇠퇴, 일반대중 속에 뿌리를 둔 활기찬 정치적 반대세력의 부재 그리고 상아탑의 안락한 공간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의 순응주의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퇴각, 패배, 침묵이 하룻밤 새에 역전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중심을 구성하는 기관, 작업장, 거리를 통한 ‘대장정(大長征)’이다.”
  지금 미국, 캐나다, 그리스, 스페인에서의 항의운동은, 이것이 오로지 단기적 개혁을 위한 기획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운동이며, 이 운동을 위해서는 공적 공간의 재생과 더불어 디지털기술의 진보적 활용, 공공영역의 확대, 새로운 교육의 창조, 민주적 표현과 정체성과 집단적 희망이 조성될 수 있는 장소의 확보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교회와 공교육 및 고등교육에서부터 지식과 욕망과 가치의 유통에 관여하는 모든 문화적 제도와 장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민주적 인간 형성을 위한 문화가 교육적으로, 제도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노력은 점진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이 아니라 민주적 혁명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최저 임금과 일자리(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권력의 민주화, 경제적 평등 그리고 군사조직과 거대은행에 대한 자금투입의 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판만이 아니라 실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화를 통해서 희망을 진정한 가능성으로 만드는 사회운동이어야 한다. 지금은 실패할 여유가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우리는 다시 권위주의의 손아귀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계급, 인종, 연령, 성적(性的) 지향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절박한 현실을 고려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데리다의 도발적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행하고 사유해야 한다. 만약 가능한 것만 일어난다면, 그 이상의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암흑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열려 있고, 가능성의 공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넓다. (이승렬 옮김, 녹색평론(2013년 5-6월), pp.120~137.)


돈에 물든 교육과 비판적 지성의 죽음

지혜의 환상 
돈에 물든 교육과 비판적 지성의 죽음


크리스 헤지스1)


  경제파탄에서부터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의 붕괴보편의료보험의 부재중동에서 겪고 있는 제국주의 군대의 패주에 이르기까지미국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다방면의 실패들은영리한 엘리트 계층을 생산하고 지탱하는 교육기관들 탓인지도 모른다하버드예일프린스턴스탠퍼드옥스퍼드케임브리지토론토대학교파리정치학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엘리트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기껏해야 보통 수준밖에 안되는 교육만 실시하고 있다대신에 그들은 표준화된 시험심화학습활동입시를 위한 우등반 수업인 AP클래스고액개인교습호화로운 사립학교입학시험권위에 대한 맹종과 같은 거름망을 통해 학생들을 선발하여유능한 체제 관리자 집단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세계경제 붕괴에 대한 책임은 하버드와 MIT가 있는 케임브리지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토론토파리 등의 정갈한 건물과 강의실에서 금융과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곧장 연결된다.

  엘리트 대학들은 정직한 지적 탐구를 경멸한다그것은 본질상 권위를 의심하고지독히 독립적이며종종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대학들은 세세하게 분화된 학과한정된 대답그런 대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안된 엄격한 체계를 중심으로 학문을 조직한다이 교육기관들이(경제·정치·사회적으로따르는 기존의 기업위계(corporate hierarchies)규제 없는 자유시장을 최우선시한다는 분명한 기준과 고도로 전문화된 용어를 숭배한다. '전문가'이 상징이자 엘리트의 표지이기도 한 이런 용어는 보편적 이해를 방해한다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의 불쾌한 질문을 막아내며공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한다또한 학과교수진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가들을 잘게 썰어작고 전문화된 파편들로 만든다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자족적인 영지 안에 숨게 하고매우 긴급한 도덕·정치·문화 문제들을 놓치게 만든다이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를테면 노엄 촘스키하워드 진데니스 쿠치니크랄프 네이더 같은 사람들은 과소평가되고 주류 논쟁에서 배제된다이 엘리트 대학들은 자기비판을 멀리해왔다그들은 자기정당화 체계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중요한 것은 조직테크놀로지사리추구정보시스템뿐이다.

  1967년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이란 논문을 썼다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도덕 타락은 "대체로 변하지 않은 채남아있으며우리는 "사람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메커니즘들"을 교육을 통해 밝히고조사하고비판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학교는 기술 이상의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학교는 가치관을 가르쳐야 한다그렇게 하지 않으면언제든 또다른 아우슈비츠가 생길 수 있다. "모든 정치교육은 궁극적으로 아우슈비츠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그는 썼다.
----
베짱이에게도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나?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경제와 마르크스경제학의 도전》,
《정보혁명의 정치경제학》, 공저로
《경제학자, 교육혁신을 말하다》,
《더불어 행복한 민주공화국》등이 있다.


캘리포니아주 말리부 해변은 서퍼들의 낙원으로 꼽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평일에도 파도와 젊음을 즐기는 서퍼들로 들떠있다.《정의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가장 불행한 사람을 가능한 한 행복하게 만드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마땅히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리부 서퍼를 보고는 하루 종일 여가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기본소득을 보장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노동과 관계없이 무조건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① 왜 부자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나?
 ② 왜 베짱이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나?
질문 ①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무상급식 논쟁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나
질문 ②에 대한 대답은 조금 어려워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대답해 보려고 한다.

베짱이가 종일 노래를 불러야 개미가 더 행복하다
실질 자유지상주의(real libertarian) 입장에서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판 파레이스는 롤스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는《모두를 위한 실질 자유주의(Real Freedom for All)》라는 책을 쓰면서 표지에 말리부 서퍼의 그림을 실었다. 그리고 그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말리부 서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내용을 약간 바꾸어서 서술하자.
개미와 베짱이 - 판 파레이스의 표현에 따르면 ‘미친 자’와 ‘게으른 자’(Crazy and Lazy) - 가 있다고 가정하자. 개미는 일에 미친 자이고 베짱이는 노래에 미친 자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 똑같은 크기의 땅을 상속받았다. 개미는 자기 땅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서 4데나리온(이 글에서는 하루분의 곡식을 살 수 있는 돈을 1데나리온이라고 가정하자)을 벌지만 더 벌지 못해서 불행하다. 베짱이는 1데나리온만 벌고 나머지 시간에는 노래를 부르지만 종일 노래를 부르지 못해서 불행하다. 개미가 꾀를 하나 내어 베짱이에게 제안한다. - 너의 땅을 나한테 빌려주면1데나리온을 줄게. 베짱이는 기꺼이 합의한다. 개미는 이제 8데나리온을 벌어서 베짱이에게1데나리온을 주고 7데나리온을 가지니까 행복하다. 베짱이는 이제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면서도 1데나리온이 생기니까 더 행복하다. 이와 같이 베짱이에게 1데나리온(기본소득)을 주는 이유는 개미와 베짱이가 모두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베짱이가 개미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베짱이와 개미가 공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본소득의 근거이다.

대안대학 인드라망대학 | 인드라망대학 2015학년 신입생 모집 - Daum 카페

대안대학 인드라망대학 | 인드라망대학 2015학년 신입생 모집 - Daum 카페



인드라망대학|조회 488|추천 0|2014.08.20. 16:21http://cafe.daum.net/indramangdaehak/KQEW/33 

"청년의 꿈과 도전, 마을공동체와 사회변혁의 주체"
                 인드라망대학 2015학년도 신입생 모집


나와 세상을 평화롭고 더불어 살게 하는 가치와의 만남,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꿈꾸고 연대할 사람들과의 만남,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다같이 하고 싶은 과의 만남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인드라망대학 ?
지리산실상사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다함께 만드는 2년 과정의 대안대학으로(2014년 3월 개교)
우리시대 청년 예비 활동가들이 인드라망의 생명평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지속가능한 대안문화를 일구어 나가기 위해 더불어 꿈꾸고, 배우고, 도전하는 곳입니다.


■ 대상 및 인원
√ 우리대학의 설립취지와 운영과정에 동의하는 청년
√ 인드라망의 생명평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기 삶을 변혁하고, 긍정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며
   더불어 살아갈 가치 있는 직업을 창조하고자 하는 청년
√ 우리시대 청년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태적·공동체적 삶을 살고픈 청년
√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머리, 가슴, 손발이 조화되는 삶을 살고픈 청년
○ 학력무관
 만 20세 ~ 40세 (예외 시, 심층면접)
○ 12명 내외


■ 과정 및 방법
○ 원서교부·접수 : 8월 20일(수) ~ 10월 17일(금)
                          대학카페 입학원서 Download / E-mail 접수
                          전형료 3만원 (농협 351-0589-1057-03 인드라망생명공동체)
○ 학교설명회 : 9월 19일(금) 19:30 (인드라망교육도량, 서울 양천구 신정동)
                      9월 26일(금) 19:30 (사단법인 한생명 느티나무사랑방,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서류전형 발표 : 10월 18일(토)
○ 단기대학·면접 : 10월 20일(월) ~ 10월 24일(금)
                           참가비 10만원 (농협 351-0589-1057-03 인드라망생명공동체)
○ 합격자 발표 : 10월 27일(월)
○ 등  록 : 10월 27일(월) ~ 11월 27일(목)


문  의 : 070-4155-5688, 010-5525-2556


입학원서 등 (다운로드)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인드라망대학 14.08.20. 17:06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 오시는 길 : 지하철 & 도보 (약 10분)
지하철 5호선 오목교역 6번 출구 → 왼쪽방향(농협, 하이마트) → 던킨도너츠 사거리 → 목동중학교 앞 사거리(SK주유소) → 신호등 건너편 "서울감자탕해물뼛집" 골목길 → 왼쪽 양천중앙교회, 오른쪽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길 → 왼쪽방향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붉은 톤의 4층 벽돌건물, 1층 인드라망생협 매장)이 있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144-35 / 02-576-1886)
인드라망대학 14.08.20. 17:06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 오시는 길 : 지하철 & 마을버스
지하철5호선 오목교역 7번 출구→ 6624번 마을버스 → 신목초등학교(3번째 정거장) → 길 건너 한영서적 골목 → 왼쪽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담장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들어오시면 오른쪽 바로 5~10미터 앞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붉은 톤의 4층 벽돌건물, 1층 인드라망생협 매장)이 있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144-35 / 02-576-1886)
인드라망대학 14.08.21. 12:04
사단법인 한생명 : 전북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508 번지
"느티나무사랑방"은 한생명 사무국과 매장 사이에 있습니다.
인드라망대학 14.09.17. 07:17
학교설명회에 참석하시거나 지원서를 접수하시는 분들께서는 미리 전화로 연락하여 주시면, 자료 및 다과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070 4155 5688 / 010 5525 2556)
인드라망대학 14.09.04. 05:01
산내지역 학교설명회 일정을 9월 26일(금)로 조정하였습니다.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대안대학 인드라망대학 | 인드라망대학 2015학년 신입생 모집 - Daum 카페

대안대학 인드라망대학 | 인드라망대학 2015학년 신입생 모집 - Daum 카페



인드라망대학|조회 488|추천 0|2014.08.20. 16:21http://cafe.daum.net/indramangdaehak/KQEW/33 

"청년의 꿈과 도전, 마을공동체와 사회변혁의 주체"
                 인드라망대학 2015학년도 신입생 모집


나와 세상을 평화롭고 더불어 살게 하는 가치와의 만남,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꿈꾸고 연대할 사람들과의 만남,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다같이 하고 싶은 과의 만남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인드라망대학 ?
지리산실상사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다함께 만드는 2년 과정의 대안대학으로(2014년 3월 개교)
우리시대 청년 예비 활동가들이 인드라망의 생명평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지속가능한 대안문화를 일구어 나가기 위해 더불어 꿈꾸고, 배우고, 도전하는 곳입니다.


■ 대상 및 인원
√ 우리대학의 설립취지와 운영과정에 동의하는 청년
√ 인드라망의 생명평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기 삶을 변혁하고, 긍정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며
   더불어 살아갈 가치 있는 직업을 창조하고자 하는 청년
√ 우리시대 청년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태적·공동체적 삶을 살고픈 청년
√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머리, 가슴, 손발이 조화되는 삶을 살고픈 청년
○ 학력무관
 만 20세 ~ 40세 (예외 시, 심층면접)
○ 12명 내외


■ 과정 및 방법
○ 원서교부·접수 : 8월 20일(수) ~ 10월 17일(금)
                          대학카페 입학원서 Download / E-mail 접수
                          전형료 3만원 (농협 351-0589-1057-03 인드라망생명공동체)
○ 학교설명회 : 9월 19일(금) 19:30 (인드라망교육도량, 서울 양천구 신정동)
                      9월 26일(금) 19:30 (사단법인 한생명 느티나무사랑방, 전북 남원시 산내면)
○ 서류전형 발표 : 10월 18일(토)
○ 단기대학·면접 : 10월 20일(월) ~ 10월 24일(금)
                           참가비 10만원 (농협 351-0589-1057-03 인드라망생명공동체)
○ 합격자 발표 : 10월 27일(월)
○ 등  록 : 10월 27일(월) ~ 11월 27일(목)


문  의 : 070-4155-5688, 010-5525-2556


입학원서 등 (다운로드)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인드라망대학 14.08.20. 17:06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 오시는 길 : 지하철 & 도보 (약 10분)
지하철 5호선 오목교역 6번 출구 → 왼쪽방향(농협, 하이마트) → 던킨도너츠 사거리 → 목동중학교 앞 사거리(SK주유소) → 신호등 건너편 "서울감자탕해물뼛집" 골목길 → 왼쪽 양천중앙교회, 오른쪽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길 → 왼쪽방향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붉은 톤의 4층 벽돌건물, 1층 인드라망생협 매장)이 있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144-35 / 02-576-1886)
인드라망대학 14.08.20. 17:06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 오시는 길 : 지하철 & 마을버스
지하철5호선 오목교역 7번 출구→ 6624번 마을버스 → 신목초등학교(3번째 정거장) → 길 건너 한영서적 골목 → 왼쪽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담장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들어오시면 오른쪽 바로 5~10미터 앞 인드라망 서울 교육도량(붉은 톤의 4층 벽돌건물, 1층 인드라망생협 매장)이 있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144-35 / 02-576-1886)
인드라망대학 14.08.21. 12:04
사단법인 한생명 : 전북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508 번지
"느티나무사랑방"은 한생명 사무국과 매장 사이에 있습니다.
인드라망대학 14.09.17. 07:17
학교설명회에 참석하시거나 지원서를 접수하시는 분들께서는 미리 전화로 연락하여 주시면, 자료 및 다과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070 4155 5688 / 010 5525 2556)
인드라망대학 14.09.04. 05:01
산내지역 학교설명회 일정을 9월 26일(금)로 조정하였습니다.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