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6

‘불교대전’에 드러난 만해의 사상 ② -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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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대전’에 드러난 만해의 사상 ②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승인 2019.07.10 23:00 댓글 0기사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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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문제 극복 노력이 빚어낸 시대정신의 산물



▲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기념관. <사진=위키백과>

그 동안 만해와 관련된 연구는 국문학이나 사학에 치우친 경향이 많았다. 대부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만해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 민족독립가, 개혁가, 혁명가의 이미지로 굳어져, 불교 수행자, 선사로서 만해의 문제의식이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가 미천하였다. 즉 역사 현장에서 드러난 외적 활동으로서 항일, 독립운동에 주로 관심이 집중되어, 승려로서 만해 본연의 모습이나 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평가마저 혼란스러운 실정이다. 근대 불교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결여와 식민지불교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용운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정확하게 이루어 질 수 없었다1)는 주장은 설득력 있는 문제 제기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어릴 적부터 한문 서적들을 통해 유가와 도가의 경서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한 전통적인 선비로서 탄탄한 학문적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백담사로 출가 이후 오세암에 있는 장경각의 수많은 불서들을 접함으로써 유·불·선을 통섭하는 동양적 교양을 갖추게 되었다. 9세 때 이미 《서상기(西廂記)》2)를 독파하고, 《통감(痛鑑)》3)의 문의(文義)를 해득하였으며, 《서경(書經)》의 기삼백주(朞三百註)을 통달하였다고 한다. 이후 입산하기 전 18세에는 숙사(塾師)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일련의 유학적 소양은 입산하여 불교를 공부하는 데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유교적 세계관은 만해 사상 형성에 있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만해 사상의 원형적 틀을 이루는 한 자락이 되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신을 바치는 의인이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 품었던 만해의 꿈은 유가적 전통에서 배태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며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유가사상에 정통해 있던 만해는 이에 대응할 논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불교대전》의 목차 구성상에 뚜렷이 유추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유가적 성격4)은 전통불교의 폐해와 이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불교경전 속에 들어있는 충효사상을 비롯한 윤리적인 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불교대전》에 스며있는 유가사상의 측면을 제대로 분석해 낸다면 만해 사상의 특징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는 5, 6년간 설악산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여러 근대 서양 교양서를 접하게 되었다. 세계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地略)》을 읽고 세계 사정에 눈 뜨는가 하면, 스승 김연곡 화상이 건봉사 등에서 구해다 준 중국의 근대 지식인 양계초(梁啓楚, 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5)을 통해 근대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익혔다. 타고난 진취적 기상에 힘입어 당시 승려로서는 드물게 일본에 순유(巡遊)하여 근대 문화를 경험하였으며, 또한 국내 문인들의 해외문학 번역서들을 통해 구미의 문예를 접하며6) 사상의 폭을 넓혀 나갔다.



급진적인 불교 개혁가로서 근대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한 한용운은 양계초로부터 배운 사회진화론을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철학과 조화시키려고 분투하였으며, 처음부터 불교의 구세(救世)적이고 평등주의적 본질을 역설하였다.7) 불교 자체 내에 이미 서구 근대 사상적 요소들이 내재해 있으나, 시대에 적절하게 구현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고, 당대와 미래 시대의 이정표로서 불교사상을 쇄신하고자 하였다.



만해는 유교를 극복하고, 서구 사상을 수용하며, 불교에 귀의한 당시 흔치 않는 인물이다. 불교에 귀의하고서도 은둔적인 산간 불교를 배척하고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새로운 불교로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을 되살리고 잇고자 한 것이었다.8) 《불교대전》의 편찬은 바로 만해가 전통과 근대를 아울러 당대 문제를 타개해 나가고자 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교의 병폐로 인한 많은 문제를 직시한 한용운은 소용돌이치는 시대 상황을 헤쳐 나갈 새로운 사상으로 불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구도열에 불타 깨달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혼란한 시대의 청년 한용운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고민 속에 서서히 불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불교 수행자로 입문하고도 조선 사회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불교에 안착하지 못하고, 국외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다. 드넓은 세상에서의 견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토대로 삼은 불교 안에서 자신의 불교 개혁사상을 정립하여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게 된다. 이것은 만해사상의 청사진으로서 이후 행적의 푯대가 된다. 즉 《조선불교유신론》이라는 사상적 뼈대 위에 그때그때 당면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 상황에 맞춰 현실적 대응을 해 나갔다.



만해는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세계관을 혁신하고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경전 공부과 참선 수행을 통해 불교적인 세계관을 체화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의 최종 목표인 해탈을 자유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하고, 자신의 핵심적인 가치로 삼게 된다. 그의 삶과 사상은 불교의 자유정신을 심리적 혹은 내면적 차원으로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연과 적용 범위가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었다. 만해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만해다움’의 출발점은 출가로 인한 불교와의 만남이었다고 평가된다9)는 지적처럼 만해에게 불교는 바로 조선의 현실과 세상의 변화를 읽고 해석하는 가장 유용한 렌즈였다. 그러므로 불교 개혁이 곧 조선의 개혁이었고, 세계 변혁의 시발점이었다.



유가 사상과 근대 사상의 흡수, 그리고 출가자로서 불교 내·외적 경험은 만해사상을 형성하는 주요한 줄기들이었다. 특히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과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과 맞물려 어떤 여정을 통해 만해의 독특한 사상이 정립되었는지 천착할 필요가 있다.《불교대전》은 바로 만해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만해는 탈세속적 구도의 초역사적 일탈을 부인하고, 끝임 없이 변화하는 역사의 현장 가운데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나가고자 하였다. 어릴 적 가슴 속 깊이 품었던 의인·걸사를 추구하던 지사적 정신은 대승 보살의 원력으로 승화되고,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의 불성론(佛性論)은 자유·평등의 근대적 사상 체계 안으로 포섭하는 등 만해 사상의 특성을 새롭게 읽고, 해석해 볼 수 있는 있는 체계를 모색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한용운은 전통의 기반 위에 서구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켜 그 사상이 현장성을 띠며 적극적인 힘으로 전화되어 작용할 수 있게 하였고, 한국 근대 사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10)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으로 《불교대전》의 편제 구성과 인용경전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 만해 사상의 새로운 이면이 조망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동의 시기를 살며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던 삶의 터전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한 만해는 자신의 사상을 고답적인 이론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낸 한 근대 불교계 지성인이었다.



은산철벽 같은 식민지 상황 속에서 대장경의 숲을 헤치며 자신을 연단하듯 인고의 시간을 보낸 만해가 집대성한 《불교대전》의 시대성이나 역사적 의의 등은 앞으로 활발히 개진되어야 연구 주제라 할 수 있다.



앎과 삶의 조화를 이루며 수행자(禪師), 종교인으로서 삶의 전범(典範)을 보여 주었던 한용운의 사상과 실천은 다문화, 다종교 상황이라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묵은 것과 새로운 것, 뿌리 내리고 있는 것과 새롭게 이식되는 것이 어떻게 조화롭게 만나 당대 문화에 합당한 몸짓으로 거듭나 창조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해의 치열한 자기 쇄신의 모습은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진정한 종교인, 사상가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주) -----



1) 최병헌, <일제 불교의 침투와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진산 한기두박사 화갑기념 《한국종교사상의 재조명》,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3, 451면.



2) 중국 원(元)나라 때의 왕실보(王實甫)가 지은 잡극(雜劇). 장생(長生)이란 남자와 최앵앵(崔鶯鶯)이란 여자가 어려운 고비를 겪은 끝에 사랑을 성취한 내용.



3) 중국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영종(英宗)의 명으로 편찬한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4) 송현주, <한용운의 《불교대전》과 난조분유·마에다 에운의 《불교성전》의 비교연구 - 구조의 차이와 인용 경전의 특성을 중심으로>, 《불교연구》 43, 한국불교연구원, 2015, 28면.



5) 음빙실(飮氷室)은 양계초의 호(號)로 ‘얼음을 먹어 차오르는 열을 식힘’ 이라는 뜻. 허도학 <근대계몽철학과 조선불교유신론>, 《불교평론》 2003년 가을 제5권 제3호, 96면 참고.



6) 고명수 <조선불교유신론과 만해의 불교관>, 《불교평론》 2003년 가을 제5권 제3호, 114면.



7) 블라디미르 티코노브(박노자) <1920~1930년대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 《천태학 연구》 8집, 천태불교문화연구원, 2006, 126면.



8) 김삼웅 《만해 한용운 평전》, 시대의 창, 2006, 29면.



9) 윤세원 <한용운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 자유관을 중심으로>, 《2003 만해축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2003, 211∼212면.



10) 이상철 <한용운의 사회사상에 관한 일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81∼82면.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03.07.31 17:49 수정 2003.08.01 08:42 | 종합 16면 지면보기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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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화기 불교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흔히 당시 젊은 승려들이 일본 불교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이며 대일 협력을 모색한 것을 지적합니다.







천민 수모 승려들 개벽 세상 돌파구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1920~30년대 승려들이 대대적으로 일본에 유학한 점과 대처.육식 풍토 조성 등도 비판의 도마에 오릅니다. 대체로 민족의식의 결여와 불교의 일본화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 관념을 절대적 척도로 삼아 1백년 전 승려들의 '비(非)민족성'을 규탄하기보다, 그들의 행동 논리를 당대의 문맥 속에서 가치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한층 생산적이고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민족독립'을 우선하는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1870년대 말부터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인 일본 승려들은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유생과 탐관오리, 토호들의 토색(討索)에 시달리며 천민대접을 받아온 조선 승려들에게, 가렴주구를 근절하고 모욕적인 도성 출입 금지법을 해제하도록(1895년) 갑오내각에 압력을 넣어준 일본의 '동류'들은 '밝은 세계'로 인도해주는 '선우(禪友)'로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개화승으로 잘 알려진 이동인이 이미 1880~81년 사이에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자 단체인 '흥아회'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와 같은 일본 외교관과 접촉하여 '종속발전' 계획안, 곧 조선이 일본의 투자를 받아가면서 일본에 원자재를 공급해야 한다는 등의 안을 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흥아회보고', 제4권, 1880년).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본의 투자에 의존하는 '종속 발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기는, 어윤중(魚允中.1848~1896) 등 갑오 내각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윤치호(1865~1945)와 같은 초기 기독교적 근대주의자들은, 아예 '열강'에 대한 의존을 넘어 어떤 한 강대국의 직접적.적극적인 간섭만이 '조선의 개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피력하였습니다.('윤치호 일기', 1894년 7월 31일).







즉 세계체제 중심부나 그 중심부의 '대리인'을 자임한 지역적인 '패권국가 후보생' 일본에 의존하려는 경향성은, 불교계뿐 아니라 1880~90년대 개화파 전체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흐름이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본격적으로 형성.보급되기 시작한 1900년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해서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새 시대의 기운이 융흥하다 전하는 일본의 상황을 보고 싶던 것이었다. …그래서 동경의 조동종(曹洞宗)대학 (오늘의 구마자와 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일본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내가 왜 중이 되었나', '삼천리', 1930년 5월).







이는 한용운이 1908년 자신의 일본 유학 동기에 대해 설명한 글입니다. 이 글이 말해주듯, 당시 개화적인 젊은 조선 승려들에게 일본은 불교 근대화의 방법을 배워야 할 '새 문명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후진국 일본이 아닌 선진국 미국 등을 모델로 삼았던 기독교계의 '따라잡기' 프로젝트가 훨씬 더 미래 지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미 주류사회가 극동의 대승불교를 '미신'이나 '우상 숭배'로밖에 보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불교계의 대미접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개화기.식민지 때 불교계가 일본을 '근대에 이르는 이동 경로'로 삼았던 사실은, 그 모든 부정적인 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근대성'의 발전 가능성 역시 나름대로 열어두었습니다.







예컨대 1930년대 한용운이 심취했던 '불교적 사회주의' 사상 등은 당시 일본 불교의 진보적 승려 운동에서 시사받은 바 컸습니다. 물론 대일 종속적인 불교계의 근대화가 남긴 짐도 여간 무겁지 않습니다.







'호국 불교'가 맹목적인 국가 옹호의 논리로 오해되고, 식민지 당국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받은 큰 사찰의 주지들이 당국과 유착하여 축재.사치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모두 그때부터 비롯된 일입니다. 일제 말기부터 굳어진 불교의 국가주의적.군사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는 일은 오늘의 한국 불자들에게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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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 26일 개최...서울 관문사에서 박노자 교수 등 5명 발표 - 뉴스와이어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 26일 개최...서울 관문사에서 박노자 교수 등 5명 발표 - 뉴스와이어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 26일 개최...서울 관문사에서 박노자 교수 등 5명 발표

출처: 대한불교 천태종

2005-11-21 16:24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에 대해 발표할 노르웨이 박노자오슬로대학 교수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에 대해 발표할 노르웨이 박노자오슬로대학 교수







단양--(뉴스와이어) 2005년 11월 21일 -- 제8회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가 오는 26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관문사 옥불보전에서 개최된다.



이번 대회에는 동국대 대학원장 서윤길 박사를 비롯해 미국 서부대 (University Of West) 루이스 랭카스터 총장, 중국 전 북경대 철학계 교수 루우열 박사, 일본 슈구토쿠 단기대학 학장(대정대학 명예교수) 이시카미 겐노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이날 행사는 오전 10시 기념법회에 이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제발표와 토론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날 발표에서 박노자 교수는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라는 논문을 통해 "한용운은 국가 독립을 위한 모든 중요한 투쟁에서 주로 공산주의자인 좌익과 독립 지향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우익의 단일체를 끊임없이 역설했다"며 "불교의 사회 경제적 이상을 사회주의 용어로 정의내리고 나타내려는 흥미롭고 생산적인 시도를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평등과 이타주의' 종교로서 '재건'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펴게 된다.



발표자와 발표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시가미젠노(슈구토쿠 단기대학 학장)-정토교의 사상과 법화경의 교섭

*미국-랭카스터(웨스트대학 총장)-천태의 전통과 우주론과 윤리에 관한 현재의 쟁점

*중국-루우열(樓宇烈)(전 북경대 철학계 교수)-인간불교의 이념과 실천

*노르웨이-박노자(오슬로대학 교수)-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

*한국-서윤길(동국대 대학원장)-천태교학과 밀교



웹사이트: http://www.cheontae.org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최근 구주한국학대회 (AKSE) 참가 건으로 이태리에 잠깐 갔다온 일은 있었습니다. 저는 자국에 대한 개탄의 소리가 가장 많이 들리는 나라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평소 생각했는데, 로마에서 며칠 보내다 보니 이태리는 우리와 호형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유럽에서 최악의 부정 부패 수준, 정치인과 정부에 대한 최저에 가까운 신뢰, 총국민생산의 7% 정도를 갖고 노는 마피아, 그리고 무솔리니 이후에는 가장 극우적인 금일의 이태리 내각...







시국에 대해 담론해보면 자연히 개탄의 소리밖에 안나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지역 문제', 그러니까 사실상 실패한 19세기말 이태리 통일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통합이야 됐지만, 통일은 안됐습니다. 사회, 경제적 의미에서의 통일 말입니다. 지금도 명목상의 1인당 총국민생산을 보면 북부 이태리의 '롬바르디아' 지역은 독일과 엇비슷하지만, 남부의 '칼라브리아'나 '시실리'는 그리스나 에스토니아, 우루과이보다 더 어렵게 사는 셈이 됩니다. 같은 나라에서 최북단과 최남단 사이의 2배 이상의 소득격차...사실 많은 면에서 과연 '같은 나라'인가 라는 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가장 부유한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가면 한 때 아예 부유한 북부 이태리의 독립, 즉 이태리 통일의 '취소'를 주장했던 "북부동맹"이라는 우파정당은 전체 표의 3분의 1이나 득하는데 말입니다. 북의 주류인 우파는 '통일 세금', 즉 남으로 들어가는 지원금 내기를 거부하려 하는 거고, 남은 남대로 차별에 지칠대로 지치고... 명목상의 통일은 인제 거의 150년이나 되었지만, 실은 '시실리' 주민은 이태리 국민이기 전에 '시실리' 주민이고 밀라노 주민은 이태리 국민이기 전에 먼저 밀라노 주민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 통합은 쉬워도 통일의 '실'을 거두는 것은 절대 쉬운 건 아닙니다.







"이태리 삼걸" (가리발디, 마찌니, 카푸르)이 한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 크게 주목한 구한말 지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만큼, 이태리의 '지역 문제'는 우리에게 절대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이 이태리를 - 독일과 함께 - 추격형 근대화의 '모범'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자국의 근대 통일국가 발전을 '성공작'으로 보는 이태리인들은 드뭅니다. 아주 드뭅니다. 사실 그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은 "도대체 지역 평준화 정책의 효과는 왜 이토록 없었는가"라고 자꾸 자문을 합니다. 1945년 이후에는, 민주화된 탈파시즘 시대의 이태리에서는 역대 정권들은 "남부 우선 개발"의 구호 하에서는 나름의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여 남부에서의 인프라 구축 등의 과제를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남부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성장시대에, 즉 1990년대 초반 이전까지 상당히 올라간 것도 엄연히 사실이죠. 그런데 아무리 '남부 개발'에 정책적 배려는 있었다 해도 격차는 그렇게까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북부도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무리 '정책적 개발'이라 해도 자본주의 국가인 이상 민간 자본으로 하여금 강제로 남부에서 공장을 건립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북부에 그대로 있는 공장으로 남부 출신들이 몰려가 자본에 이용당하는 꼴이 되고, 남은 가족들이 그 송금으로 살거나 미국 등지로 이민가는 꿈이나 키우고... 남부의 상대적 박탈감은 그냥 그대로, 여전해왔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평화공존레짐을 공고화시키기 위해, 이산가족들의 결합을 실시하기 위해, 쌍방 군인 머리수를 줄이기 위해, 나아가서 징병제의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 당연히 통일을 향한 '과정'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탈분단은 우리에게 생명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한데 문제는 통일이냐 아니냐 라기보다는 '어떤' 통일인가 라는 것인 듯합니다. 통일은 꼭 걸어야 할 길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만병통치약은 결코 아닙니다. 통일이 돼도 남한의 자본주의는 그대로, 즉 그 신자유주의적 형태로 남아 있다면, 통일 코리아의 나날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저는 심각하게 회의합니다. 일단 이태리의 경우와 달리 적어도 초기에는 남한 자본의 공장들은 분명 북으로 갈 것입니다. 북의 임금 수준이 여전히 중국 동백 삼성에 비해 낮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놓칠 자본가들은 아닐 것이죠.







그런데 이 자본가들이 북에 들어가서 만들 일자리들은 과연 정규직일까요? 남한에서도 제조업 공장에서까지 불법 파견 노동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과연 양질의 일자리일까요? 과연 그런 일자리들이 좀 생긴다고 해서 지금 20배 정도 되는 남북/북남 소득 격차는 빨리 줄어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소득격차가 부추기는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차별과 무시는 과연 어느 수준일까요? 북쪽 사람들이 이를 과연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요? 사실, 남한에서 살인적 차별에 시달리는 탈북민들의 상황만 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레짐 하에서의 통일 코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보입니다. 과연, 특히 북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적에 바람직한 모습일까요?







통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만큼 우리가 원하는 통일이 '어떤' 통일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먼저 필요하기도 하죠. 세계적 수준의 참극인 남한의 신자유주의를, 우리가 북쪽 동포들에게까지 수출하고 싶은가요? 약자에 대한 차별, 일년에 약 1700명의 노동자를 죽이는 최악의 산재사 현황, 만연돼 있는 과로사, 8할 이상의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당하게 돼 있는 성추행을 통일과 함께 수출하고 싶은가요? 통일을 지향하고 북쪽 동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인 이상, 그런 고민부터 정말로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남한은, 북쪽 동포는 물론이거니와, 남한 사람들도 하루도 편하게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유사 봉건적인 개인예속과 신자유주의적 과도착취의 중첩이기 때문입니다.











(기사 등록 2019.5.8)     







출처: https://www.anotherworld.kr/676?category=552392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한일 갈등 - 미국 이후의 동북아?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한일 갈등 - 미국 이후의 동북아?



[박노자] 한일 갈등 - 미국 이후의 동북아?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이번 일본의 경제 보복이 '대법원 판결 때문'이라고 본다면 이는 큰 오판입니다. 판결로 이어진 강제징용 문제는 하나의 '뇌관'이 됐지만, A국 사법부의 판결 때문에 B국 행정부가 사실상의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극히 비상식적이고 이례적인 일입니다. 일본이 그토록 일본의 장점으로 내세우려는 자유민주주의 구조상으로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권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어찌 할 수 없는 사법부 판결에 대해 해당 국가 전체를 겨냥하는 '제재'로 맞대응하는 건 결코 자유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거는 세계의 국제 관례는 아닙니다. 판결 사태가 '도화선'이 됐지만, 보복/제재 조치들이 오래전부터 검토, 준비되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건 판결 등 1회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후의 장기적인 한일 관계 흐름의 어떤 본질적인 '전환점'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실은 이 보복조치는 우리가 여태까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온 '일본'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뜨립니다. 본래 전후의 일본은 기본적으로 '경제 국가'를 자임해왔습니다. 미국이 미-중 수교로 가면 일본도 같이 중-일 수교로 가고, 1990년에 북-일 수교 준비를 하려다가 미국의 불허로 불발에 그치고, 이라크 파병을 미국이 명하면 파병을 해주는 등 미국의 성실한 '꼬봉'으로 살면서 경제 실익을 키워온 것은 여태까지 우리가 아는 일본이었습니다.







그런데...이번에는 보복조치는 실은 한국 기업뿐만 아니고 일본 기업에도 불리합니다. 그래서 닛케이 등 업계의 이해를 표방해주는 일본 언론들마저도 이 제재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전자제품 가격 상승으로 중국, 미국 소비자들까지 불이익 당할 것도 불보듯 뻔합니다. 구미권 기업계도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베가 이 모든 반대들을 다 무릅쓰고 한국 때리기에 올인합니다. '실익'을 물리치고 '싸움'에서 얻어지는 민족주의적 '열광', 사실상 일종의 광풍을 노리고... 여태까지 본 전후 일본의 모습과는 좀 다르죠?







경제 실익보다 더 큰 것은? 일본의 미래에 대한 어떤 '큰 그림' 같은 것입니다. 아베와 같은 부류의 정객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100년 전의 일본으로서는 대륙이 '먹잇감'이었다면 인젠 대륙은 다 '경쟁자'들입니다. 북한은 (핵 등으로) 일본을 위협할 수 있다 싶은 군사력이 있는가 하면 한국은 이미 기술력으로 따라잡아 추월하려 하는 거고, 중국은 군사력, 기술력, 재력 등등 모든 차원에서 이미 일본을 넘었거나 곧 넘을 셈입니다.







아베의 시각으로 본 동북아의 외교, 국제관계판은 '열강각축'이고 이는 '제로섬 게임'입니다. 즉, 이 게임에서는 상대방의 득은 나의 실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제살깎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 전자산업에 불이익을 주려 하는 것이죠. 결국 그런 일본은 북한을 무역 봉쇄하고 한국을 무역 제재하면서 대중국 관계를 조심스럽게 관리하면서 결국에 올지도 모를 중국과의 결정적인 대대적 대립에 은연중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앞으로는 아마도 다시 군수산업을 크게 키울 셈입니다.







어차피 세계 시장들이 경향적으로 이윤이 떨어져가는 추세에 관수라는 확실한 시장을 갖고 있는 무기 만큼의 효자 상품도 없으니까요. 물론 동시에 중, 북, 남도 군비를 계속 올릴 것이고요... 아베 류 정객들의 큰 그림은, 바로 이처럼 서로를 경제적으로 찌를 수 있을 때에 찌르고, 무기 생산을 늘리고 군사력을 키우면서, <삼국지연의>와 같은 치열한 대결을 이어나가는 동북아입니다. 동북아판 열강각축이죠. 1914년 직전의 유럽과 좀 비슷하죠?







이 큰 그림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미국입니다. 이번 조치는 미국과 조율한 것 같지 않고, 한국도 미국에 도움을 호소해봐야 소용없을 셈입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더이상 과거처럼 동아시아에서의 군사 보호국들 (한, 일 등)을 치밀히 관리하려 하지 않습니다. 더이상 과거와 같은 세계 제국을 계속 유지할 만한 여력이 없는 미국은, 인제 일부 '우선 순위 높은 과제'에 집중하고서, 나머지 부분들을 '대충대충' 현상 유지 위주로 관리합니다.







예컨대 이란(이라는 이스라엘/사우디 등의 적대국)에 대한 경제적 초토화, 중국에 대한 견제와 제재 등은 우선 과제지만, 한반도 그 자체는 우선 순위에서 빠진 것이고, 한반도에서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대북 관계를 나름 궤도에 올려놓고 주한 미군을 빼거나 축소시켜 돈을 절약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 스스로의 군사대국화를 미국이 대체로 허용해주면서 주일 미군 비용 등을 절약하려는 셈이 있는 것 같고요. 미국이 이처럼 천천히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는, 아베나 습근평(시진핑) 같은 (준)권위주의적인 세습 정객/통치자들이 군사주의적 노선으로 나아가면서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이런 '큰 그림' 차원에서는 아베의 행동은 국내에서의 민족주의적 광풍 조장, 그런 광풍을 배경으로 한 군사 대국화 노선의 지속적 추진 등, 그리고 국외에선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한국 전자사업 '타격 주기' 등을 목적으로 합니다. '판결'이 아닌 장기 전략의 문제입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는 한-일 양국의 진보 사회는, 우리가 과연 이런 동아시아를 원하느랴고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동아시아는 과연 군웅할거, 패권싸움의 도가니인가요? 중-한-일 군수 기업의 무한 발전을,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고 원하고 있나요? 그런 게 우리의 꿈이 아니라면, 우리가 국경을 넘어 같이 연대해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국경 넘는 연대와 투쟁만이 '열강각축'의 악몽을 막을 수 있습니다.



 





(기사 등록 2019.7.10) 







출처: https://www.anotherworld.kr/697?category=552392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한국 근현대사, 세계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한국 근현대사, 세계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박노자] 한국 근현대사, 세계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우리 나라 교육의 아주 큰 폐단은, 세계사와 자국사, 즉 한국사를 따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세계사는 대개 선택 과목이고 선택하는 경우도 많지 않고 하니까 일반적인 고졸, 대졸은 '광무개혁'이나 '한일 합병' 내지 '우리 나라 경제성장, 산업화, 민주화'를 어렴풋이 알아도 이 일들의 세계사적 맥락을 까막히 모르는 것입니다. 인식론적 민족주의라고나 할까요? 이런 식으로 배우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세계사적 맥락과도 무관하게, 오로지 '우리'만의 자랑 내지 '우리'만의 수치가 되고 말지요.







더군다나 그 '우리'라는 범주 안에 예컨대 연변조선족이나 구쏘련 고려인들은 아예 포함되지 않고, 북한사도 매우 단편적으로만 언급됩니다. 결국 '대한민국 사람'은 학교 과정만 착실히 밞으면 오로지 대한민국의 통치자와 '지식인'들이 서술해준 '대한민국만의 과거'밖에 잘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북맹(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도 그렇지만 예컨데 동남아 여행 다니면서 "그런 데도 역사가 있느냐"고 순진히 묻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실로는 한국사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가르친다면 훨씬 더 재미있고 훨씬 더 교육 수요자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잘 자극시킬 수 있는데, 아직 역사학계도 일제 시대식으로 "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삼분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제 시대 관학자들에게야 "세계 무비의 만손일계 천황을 모시는 신들의 나라인 일본"의 과거를 어떤 보편사적 맥락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단'으로밖에 안보였겠지만, 우리는 과연 지금도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요? 좌우간, 보편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본다면 몇 가지 중요한 지점들은 보입니다:







● 국가 주도의 개발: 남북한 사이의 수많은 공통점 중의 하나는, 양쪽의 초고속 개발이 바로 '국가'에 의해서 견인됐다는 것입니다. '5개년 계획' 같은 형태를 아예 양쪽이 공동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차이라면 북에서 국가가 경제를 '소유'까지 하는 반면 남에서는 처음 개발경제 소유권의 대부분을 재벌에다 맡겼다가 나중에 (1990년대 이후) 국가 자체가 재벌의 행정서비스센타처럼 돼버린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이와 같은 국가 주도의 개발이란, 한국 근현대사의 '장기추세'이기도 합니다. 일제 시기도 관 주도의 경제이었지만, '관 주도'라는 틀은 실은 이미 대한제국 시절에 나름 확립됐습니다.







광무 시절에 관 주도 개발의 중심은 궁내부이었고, 궁내부 소속의 서북철도국(광무4~8년) 등은 관 주도 개발을 이끄는 '관영 공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영친왕이 바지사장으로 있고 실제로는 서북철도국과 마찬가지로 이용익이 실세로 있었던 대한천일은행(1899년 이후)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관치 금융'의 시초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고종과 이용익 등은 가까이 일본의 관 주도 개발 모델을 참고했지만, 크게 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신자유주의 도입 이전까지 일부 핵심부 국가 이외에는 관 주도 개발이 "세계적 대세"이었습니다.







새로이 통일된 독일은 그 상징이었고, <비사맥전>처럼 독일의 관 주도 개발의 상징인물인 비스마르크의 생애를 그리는 책들은 구한말 지식인층 사이에 베스트셀러이었습니다. '5개년 계획'은 인도 같은 나라에서도 1990년대 전까지 활용됐고, 관치 금융(공업 부흥을 이끌기 위해 국가가 정한 인위적으로 낮은 기업체에의 대출 이자율 등)은 핀란드에서 1980년대말까지 당연시돼왔습니다. 만약 남북한 산업화의 역사를 이와 같은, 세계사적 시야를 고려한 방식으로 서술해주면 오히려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 3.1 운동. 1919년은 세계사적으로 1848년이나 1968년 같은 "지구적 반란의 해"이었습니다. 그 해 반란들의 역사는, 지구인들이 사는 오늘날 현실의 '기반'을 조성해준 것이죠. 1919년 암리트사르 학살로 잘 알려진 인도 독립 운동의 폭발은 오늘날 같은 "제3세계 강대국" 인도의 건국으로 이어지고, 중국의 5.4운동은 결국 '신중국'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러시아를, 1919년에 박위군과 고전 중이었던 볼세비키 정권의 후계세력들이 지금도 통치하고 있죠. 반면, 미국에서의 대량적 파업 운동(1백만 명 이상 참가자)이나, 독일, 헝가리, 이태리 등에서의 급진적 (사회주의적) 혁명 시도들이 처참하게 진압됐습니다.







3.1운동은 그 세계적 반란의 일환이었고, 그 지도부 중에서는 특히 만해 한용운 등은 독일, 러시아 혁명에 아주 크게 고무됐습니다. 단, 독립을 '청구'하듯 하는 운동의 다수의 보수적 지도자와, 독립뿐만 아니라 소작지 아닌 자기 땅까지 가지고 싶었던 많은 민초 시위자 사이에서의 '거리'는 엄청났습니다. 결국 이 '거리'에서 태어난 것은, 바로 만세 시위 경험했던 사람들이 처음 만든 사회주의 운동이었습니다.







● 남북한 경제 개발 비교론. 북조선 경제가 위기에 봉착한 것은, 동구권 전반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중후반입니다.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서방에서 빌린 외채를 갚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위기는 그 유명한 1981년 정치적 위기국면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50~60년대에 대단히 잘 나갔다가 70년대에 접어들어 위기에 빠진 이유도 엇비슷했습니다. 양적 확장(새 공장 건설 등)의 한계점에 이미 왔으며, 질적 개선, 즉 서방시장에도 내다팔 수 있는 고양질 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핵심부로부터의 집중적 금융, 기술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은 1978년에 개혁개방에 착수하고, 북조선도 나아가서는 그걸 착안해 1983~4년부터 합작 회사 허용 등 외자유치에 착수했는데, 미국 주도의 외부적 봉쇄로 실패한 것이죠. 반면, 남한은 미-일로부터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계속 받는 상황에서는 초기 산업화(포철 등 철강생산, 자동차와 선박 생산 시작)부터 고품질 소비재 생산(1980년대말 이후 가전 대량 수출의 시대)로의 전환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산업화 성공의 비결은, 북조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내부 생산자원(인력 등) 동원도 아니고, 북조선에서도 당연히 가능했던 국가 주도 그 자체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외부환경'이죠.







● 한국 민주화의 국제정치비교론. 한국처럼 친미반공 군사 독재와 싸웠던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는 2003~16년간 사민주의적 성격의 노동자당이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엇비슷한 기간(2000년 이후)에는 민노당이라는 이름의 엇비슷한 사민주의적 성격의 정당은 집권 대신에 초기 성공들 이후의 고립과 침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분열과 그 후계세력들의 약체화 등을 겪었습니다. 브라질 같아서는 노조조직률 (15%)도 한국 (9%)보다 높지만, 무엇보다는 노조나 각종 사회운동들의 상대적 급진성 역시 눈에 띕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노조 활동가들에 대한 대단히 지능적인 탄압부터 시작해서 국가나 기업들의 인구, 노동자에 대한 '관리' 능력은 월등히 더 높습니다. 과거 급진 운동 유경력자들이 - 조국, 이인영, 이종석 등등처럼 - 아주 쉽게 자유주의 세력에게 포섭돼 각종 정당, 정부 등에 스카웃되는 것이고요. 결국, 남미 등과 비교한다면 한국에서는 지배 관벌, 재벌들이 민주화의 급진성을 대단히 잘 '소거'시킨 것입니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 근현대사 - 민중반란의 역사부터 외부조건에 민감한 관 주도의 개발, 그리고 급진파를 무장해제시키고 체제 속으로 빨아들이는 메카니즘까지 - 는 훨씬 더 체계적으로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국사'가 철폐되어 아이들이 세계 속 한국의 '역사'를 언제부터 배울 수 있을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기사 등록 2019.6.13)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 http://www.anotherworld.kr/608







출처: https://www.anotherworld.kr/690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박노자 강연 :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 네이버 블로그

박노자 강연 :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 네이버 블로그





박노자 종교 강연회 전문

출처 : 다함께 -  http://www.alltogether.or.kr/0330french/0318pnj.html

"짓밟힌 자의 신음소리"

이 글은 지난 3월 18일 연세대에서 열린 '종교·진

보운동·사회주의' 강연회를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일종의 변명 같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민중 신학과 가까운 한 기독교 계통의 잡지로부터

현대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죄송합니다. 못쓰겠습니다' 그렇게 넘어

갔습니다. 제 학술 분야가 원래 기독교보다 고대사였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좀더 많

이 한 부분도 있었고, 또 신자가 아닌 신분으로 비판하기에는 뭔가가 쉽게 내키지 않

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사실 그때 제가 거절의 말씀을 드렸을 때 어떤 생각

이 들었는가 하면 이건 굳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결국 불교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만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기업 활동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얼핏 보면 신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은 신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현존하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발언입니다. 그

리고 사실은 외국의 사회인류학이라든가 사회학 같은 부문에서는, 특히 종교사회학

에서는 요즘 '종교 시장'이라는 용어를 거의 별 거부감 없이 쓰다 보니까 저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의 경우 사찰이든 교회든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

하면, 일종의 기업 활동으로 보이는 신앙 활동의 형태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이념적 입장에서 비판하기가 왠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활동이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소위 기복 장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를 찾을 때는 마음 속에 일종의

거래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컨대 "내가 열

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겠지" 하고 생각할 때 여기

서 신의 축복이란 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기도를 잘 하면, 대학교 입학뿐 아니라 예컨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해져서 안 짤리겠죠. 그러니까, 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의 축

복을 받아 결국에는 여유있는 생활하고 잘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

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 신이나 어떤 초

자연적인 힘과 거래할 수 있다”는 조직에 가입해서, 헌금이라는 이름이든 성금이란

이름이든 불전이란 이름이든, 어떤 명목으로 거기에다 일종의 물질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신에 상당히 현실적인 성격의 축복을 돌려 받는, 성격의 신앙 생활이 우리한테

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기복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복 신앙은 꼭 구체적으로 ‘자녀 입학하게 해 달라',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 하는 것뿐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현실 생활이 원만하고, ‘현

실적인 잣대'로 봤을 때 행복한 생활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 돌려받으려는 것이 기

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든 교회든 수많은 종교단체에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기복을 제공함

으로써 상당한 대가를 받고, 또 그 대가로 사찰의 경우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

불상을 짓고, 교회 같으면 단일 교회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말하자면 기

복 장사를 잘 한다는 것을 건물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거래나 장사에 대해서 이념적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기복 장사, 종교를 신통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 거래

하는 곳으로 이해한다는 것, 또는 종교의 대상으로 신이나 초자연적 힘, 또는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제그제 생긴 일이 아니

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이차돈이 누군지 기

억하십니까? 신라 법흥왕 때의 순교자 이차돈을 잘 기억하시겠지만, 왕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시킨 거죠.

대신들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이차돈을 죽였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대가 무로 돌아가

사회관련 자료

박노자 강연 :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독학자

2006. 4. 18. 17:30

이웃추가 본

댓글 1

블로그 카 Alternative Plan

고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삼국유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동기가 됐는데, 이차돈

이 참수당하기 직전에 ‘만약 부처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부처님에게 기적을 일으킬

권세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참수당한 뒤

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 대신에 하얀 물, 그러니까 우유와 같은 색깔의 하얀

물이 갑자기 목에서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부처가 대단한 신통력

을 가진 무서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감복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이고, 불교를 믿는 수행자의 목을 칠 때 하얀색

의 액체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서 많이 읽을 수 있

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설화로서는 유래가 깊은 설화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신라에

서 생긴 설화도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라 사람들한테 초

기의 붓다, 초기의 부처가 바로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그런 신통한 존재였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 승려나 순교자 이차돈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킬 만한 신통

력의 소유자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다는 것을 상당한 민족적 긍지로 삼는데, 만약

≪일본서기≫, 일본의 공식 역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

수했을 때, ‘부처를 믿으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이고 붓다가 나라를 지켜줄 수 있

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 지배자의 입

장에서는 붓다라는 신이 힘이 세고 무서운 신통력을 갖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런 초자연적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종교에다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고,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섭고도 신비한 도사로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깊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기가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기복과 오늘날의 기복은 상당히 다릅니다. 기복은 복을 빈다는 이야기인

데, 복을 누구를 위해서 비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녀가 수능시험을 볼

때 어머님이 사찰에 가서 대입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입 기도라는 게 결국

내 옆에서 기도를 하는 다른 아줌마의 아들보다 내 아들을 먼저 입학시켜 달라는 이

야기가 들어 있는데(청중 웃음), 기도는 같이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상당한 경쟁 관

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대의 기복은 완전히 장삿속이 되기도 하지

만, 아주 원자화된 개인, 말하자면 옆의 아줌마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만을 입학시켜

달라는, 개인?개체 위주의 장사인데, 전통적인 기복이 이것보다는 약간 차원이 높았

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때 미륵상이나 아미타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어떤 명을 새겼는

가 하면, 나의 부모를 비롯한 칠세(七世) 친척들을 극락왕생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국토가 태평하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끔 하소서 하는 명을 새겼습니다. 결국

나뿐만 아니고 국가 전체가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뭔가를 받도록 비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이미 문화 속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 때는 그것에 대

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참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 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 삼기가 어려울 수

도 있습니다. 기복 장사에는 사찰이나 교회라는 공급자가 있는가 하면, 그 장사를 제

발 해 달라고 하는 수요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들이 갑자기 없어

지고 수요만 그대로 남는다면, 예를 들어 무당이나 점쟁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요자로 하여금 이런 기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

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급자나 수요자만을 인격적으로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삼을 순 없다 하더라도 소위 ‘상도덕'은 문제삼을 수 있

는 부분입니다. ‘상도덕' 아시죠? 장사할 때 그래도 어기면 안 되는 일종의 ‘상도'가

있는데, 기복 장사하는 과정에선 이것이 너무도 많이 어겨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

어서 일반 재벌들끼리 장사를 해도, 만약 LG 휴대폰 쪽에서 ‘삼성 휴대폰이 곧 고장

날 것이니 삼성 휴대폰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행복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악

성 흑색 광고를 낸다면 이것은 아마 당장 재판을 받아 상당한 돈을 물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불신지옥'이라고 외친다면 이건 사실 LG 휴대폰

만이 진리고 삼성 휴대폰이 거짓이라는 말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에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그걸 또 ‘불신지옥'이라고 외칠 때에는 꼭

‘불신(佛信)지옥', 그러니까 ‘불교를 믿는다면 지옥이다' 라고 들리기 때문에... (청중

웃음)

이것은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도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청중 웃음)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는 고용자를 막 다루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해서 삼성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데 삼성말고 무노조 경영하는 곳이 ‘종교 재벌'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혹시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에서 노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죠?(청중 웃음)

사실은, 삼성보다 대형 교회에서 주인이 아닌 ‘밑에 사람'으로 일하기가 훨씬 불안합

니다. 대형 교회의 부목이나 전도사, 운전사 정도면 ― 뭐 월급이 박한 건 그렇다 치

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죠. 주목의 마음에 안 들고 노선을 달리 하면 자르는

데 별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드는 시도를 2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아직 대다수 대형 교회들에 노조가 없습니다. 고용된 사람들이 많은데

도 말입니다.

대형 교회도 그렇지만 최근 부산의 삼광사라는 대형 사찰에서 노조 탄압 사건이 일

어났습니다. 비정규직 사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다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

를  <매일노동뉴스>에서 알게 됐습니다. 결국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사를

해서는 무노조 삼성보다 더 못된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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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를 들어, 아무리 장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업체가 정치에 부당하게 압박을

주면 안 된다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노무현 정부가 미국

과 FTA 투자 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실제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혜택을 볼 기

업체가 어느 기업체인지 뻔하거든요. 삼성입니다. 삼성에서는 아마도 FTA가 맺어지

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겠지만, 만약에 삼성이 이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히 노골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미군을 찬양한다든가 ‘We Love Americ

a!'를 부른다면 이것도 결국엔 일종의 기업체의 정치적 압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

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도 있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는 부

분이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정치를 한 집단 위주로 하려고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올 때 드는 생각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주류 지식인

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 중 하나, 즉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로마제국'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면서 사람들한테 라틴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동 문화를 만들어 주고 문명의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

것은 미 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 제국을 옹호하는 입장의 골자 중 하나인데, 그러면

미 제국의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이 되는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아닙니까? (청중 웃

음)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 관계까지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로마제국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무한의 힘의 상징인 성조기를 숭배하는 것인지 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체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 삼는 부분이 ‘탈세'인데, 종교단체 같은

경우엔 탈세도 아니고 ‘무세'입니다. 세금을 아예 안 냅니다(청중 웃음). 만약, 주요 종

교단체들의 수익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예컨대 대형

교회에서 세금을 내서 그 세금 전액이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의 실천에 쓰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선에 쓰인다든가 이런 조건을 내세워 세금을 낸

다면 이것은 교리에 반대되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탈세도 아닌 ‘무세'라니

이건 참 ‘상도덕'상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청중웃음).

또, 제가 늘 한국 종교에 관해 문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상품 강매'입니다.

일반 회사가 그렇게 하면 당장 걸리겠지만, 예를 들어 종교 재단이 세운 학교에서 학

생들한테 예배시키는 것은 결국 ‘상품 강매'와 다른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

인들이 신앙 시장에서 본인들의 상품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추진하는 것까진 좋은데,

본인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한테까지 그 상품을 사게끔 강제한다면

이건 헌법상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주류 종교를 얘기할 때, 이것은

단순히 기복 장사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

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인 사회에 왜 하필이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가 물어보면 그것은

신앙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교회가 일종의 네트워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 사회나 유럽의 한인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돼 있습

니다. 교회들이 일부러 왕따 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것이 좀더 극명하게 나타날 뿐이지만, 한국 안에서도 보이게 또

는 보이지 않게 교연, 즉 교회와 교맥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흔히 ‘관계 자본'이라고 말하는 3연, 즉 학연?혈연?지연말고도 ‘교연'을 분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사찰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나 기존 질서에 뭔가 신성한 듯한 외피를 덮어 주고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

는 데 신의 도움을 받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한국 사

람이 평생 살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공인(public figure)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일찍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주의적인 주입을 받아 국가를 대단한 숭

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국가를 존경하기가 좀 힘들어요.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다들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추상적인 국

가'를 숭배해도 ‘구체적인 국가'를 존경하기란 좀 힘듭니다. 존경하고 싶어도 곧잘 무

슨 최연희 의원의 성파문이든 무슨 파문이든 (청중 웃음)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추상적으로 운동 경기에서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든가 태극기로 상징되는 추상적인 대한민국이 숭배 대상이 돼도 구체

적인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관료들이 존경 대상이 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 의식이라든가 어떤 공적인 의식

에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아마 참석자들이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노무현 씨라는 한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대통령직에 추상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대통령도 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계 서열에서

는 대단히 높은 사람이 온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노사모 빼고는 인격적으로

노무현 씨를 아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청중 웃음)

그러니까, ‘추상적인 권위 인정'과 ‘구체적인 인격적 존경,' 이 두 가지는 조금 다릅니

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제도적으로도 존경하게끔 돼 있지만, 좀 신비한 옷을 입고

신비한 말씀을 하고 뭔가 신성한 듯한 아우라(청중 웃음), [즉] 후광을 갖고 나타날 추

기경님이나 큰스님이다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제도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까지도 하게 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이 이 체제가 나쁘다든가, 이 체제를 우리가

빨리 바꿔야 한다든가, 이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말씀을 잘 안 하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청중 웃음), 사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도 잘하시기 때문에, 이 분들의 존재 자체는 체제를 상당 부분 합리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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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높으신 스님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에 인터뷰하시고

법문다운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 어차피 그 말씀

상당 부분이 당나라 후기나 송나라 때 선사들의 책에서 다 베낀, 이미 역사적으로 검

증된 말씀이라 별 문제는 없는데 ― 주류 언론에다가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는 대한

민국 제도권의 권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이 체제가 인간이 살 만하고 이 체제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라는 환상을 피지배자들한테 상당히 효과적으로 덮어씌우는 면이 있는 건

데 이것은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피임을 종교적 죄악으로 본 겁

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특히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에이즈가 지금 대단

히 치성(熾盛)을 부리고 있어서 예컨대 잠비아나 나미비아의 경우에는 에이즈에 전염

된 사람이 이미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입니다. 이미 나라가 멸종으로 치닫고 있

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보호 없는 섹스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대단히 위협할 만한 부

분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교시에 피임하지 않을 경우 곧잘 에이즈가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의 말씀을 듣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과연 몇 만 명이 되는지 대단히 궁금할 따름입니

다.

낙태 수술에 대한 교황의 입장도 아주 단호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차피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가는 결국 사회적 살인처럼 되게 돼 있습니다. 그

런데 낙태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종교 입장을 따라서 많은 여인들이 결국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렸는지 생각

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적에 한국 언론들도 그렇지만 외국 언론에서도 그

것을 언급하는 언론이 몇 군데밖에 안 됐고, 대다수는 요한 바오로를 거의 새로운 성

인으로 모시고 그랬습니다. 요한 바오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여러 언론 중에서도

한두 군데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세계 지배계급에

게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하다 싶은 지도자로 상징되는 종교가 원자화?개체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여러분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

활이나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불행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언제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행복

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신과 종교

라는 매개체를 통해 거래하면 일단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죠.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예수님이나 부처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이자 노동자

들한테 모든 사회적 문제를 인격이나 수양 문제로 돌리기를 원하는 게 아마 자본주

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복 장사하는 기업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업체의 정체는

체제 전체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하고 아주 당연할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하다 싶은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맑스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제일 유명해졌는데, 그 문장에서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맑스가 보기에는 ‘짓밟힌 존

재의 신음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그런 면에서 맑스는 신

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

다. 맑스는 종교가 단순히 위에서 강요하는 ‘아편'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람들이 바꾸지 않는 한은  결국 민중이 저절로 찾게 돼 있는 불가피한

것, 또는 일부분이나마 민중의 현실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종교 이단들이 바로 민중의 반항 의지, 저항 의지를

대변했고, 말 그대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담았다는 것이 맑스의 종교론이기도 했습니

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의 한국 현실을 중심으로 본다면 종교는 과연 ‘짓밟힌 존재

의 신음 소리'에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민중을 위한 아편'에 더 가깝습니까? 둘 다

종교의 기능을 묘사하는 얘기인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보다 그 신음 소리를 진통시켜 주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

처가 아프지 않게 진통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에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주 아플 때 마취제를 먹게 돼 있지만, 마취제?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당분간 아프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종교가 기존 체제를 옹립하고 합리화하

고 체제로 인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적인, 상당히 자기 기만적인 행복으로 바꿀 수 있

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들의 원래 모습이 과연 맞

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가 정말 민중을 위한 아편 정도라면 하필이면 기독교나 불

교, 이슬람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

니거든요. 기만이라면 상당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실제로는 신음하는

소리, 짓밟힌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담지 않은 종교는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게 오래

안 가요.

예컨대, 최근에 만들어진 소위 신흥종교들 중에는 상당히 빨리 쇠퇴하는 종교들이 꽤

있는데, 통일교만 해도 1960~70년대에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교세 확장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실제로 교세가 상당히 쇠미해졌습니다. 기존의 신자도 많이 탈락하고

새로운 신자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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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중 하나는 실제 통일교 교리에서는 이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를 거의 들

어볼 수 없다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선명한테 카리스마가 있지만 문선명

이 미국의 지도층?지배층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래도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

리” 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신흥종교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대개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를 담아 주지

않는 종교는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이 때까지 장수해 온 비

밀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분명히 민중 편에 섰던

것이고, 민중의 그 신음 소리를 많이 담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쪽

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나 붓다, 무하마드의 카리스마

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용하려면 일단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붓다나 예수님, 무하마드에게 그 카

리스마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도 종교 속에 담겨 있는, 그러니까 초기 불교나 초기

기독교, 초기 이슬람에 담겨 있는 상당히 강력한 평등 정신이나 저항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저항 정신이란 말이 아마 지금의 불교를 보면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

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제도 불교는 저항과 전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데, 실제

로 붓다라는 사람 ― 원래 상류계급에 속했다가 진리를 찾겠다고 혼자 뛰쳐나와 6년

동안 고생해 결국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붓다 ― 은 그 깨달은 것이 공(空)과 연기(緣

起)라는 진리였는데, 이 진리대로라면 당시 인도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나 남녀차

별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경을 통해서

는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대다수 불경들이 붓다가 죽은 뒤 4~5백 년 뒤에 만

들어진 글들입니다. 거기에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고 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관

계 없습니다. 실제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들 중에서도 붓다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마 ≪숫타니파타≫라든가 그 정도 경전 몇 개

이고요, ‘니카야', ≪아함경(阿含經)≫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기 경전도 붓다가

죽은 지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실제로 무슨 얘기를 했

는지 아마 ≪숫타니파타≫를 보면 대충 알 수가 있겠지만 ― 윤색된 부분도 있고 가

미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 붓다는 처음에 깨닫고 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평등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진정한 바라문이 무엇이냐? 바라문은 인도의 성직자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계급 질

서 맨 위에 있었다는 성직자 계급인데, 이 바라문에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사람 귀하

다는 것이 결국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절대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내 종이다, 내 종이 아니

다. 동류다, 이류다' 이렇게 서로 차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다 이런 얘

기를 한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이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결과의 순환이다” 이런 것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영

구한 계급 차별이라는 부분이 개입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만든 것입니다.

붓다는 만인 평등을 외치기도 하고, 동물 죽여서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원칙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또, 붓다의 생활 방식

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탁발 아니었습니까? 탁발이라 하면 동냥을 구하는 것인

데, 실제 붓다가 탁발하면서 뭘 했었냐면 요즘 말로 아마 심리정신과의 상담 같은 것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밥을 줄 때는 뭘 물어보지 않습니까? 붓다가 그 대답

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생활 문제 풀어 주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

주고, 말하자면 상담을 해 주고 식량을 받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중과

아주 가까운 생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붓다는 기적을 절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통력이나 기적이라는 부분은

붓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한 여자한테

붓다는 ‘그래요? 한 번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에서 친척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 주면 제가 당신 아들도 부활시켜 보겠습

니다' 하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신통력,

초자연적 힘, 신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붓다는 대단한 카리스마

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민중한테 붓다는 존경받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한 가지 좀 아쉬운 점은, 붓다는 일종의 초기 공산주의적인 공동체

인 승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제자, 수행자들

과 함께 숲 속에서 살기로 한 것인데요. 그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저항의 태도, 아주 소극적인 저항의 태

도에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붓다는 자기 부인 야쇼타라와 아들 라후라를 내버려두어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훨씬 더 부담이 큽

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대개 수행 생활을 해도 되는 상당한 재력과 위치

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붓다가 죽자마자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편한 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노예 출신들

도 있었는데, 붓다가 죽고 나서는 노비는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계율이 만들어졌습니

다. 그러니까 노비나 왕의 고용자한테는 스님이 되는 기회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했는지 아니면 그 제자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 아마도

초기 불교의 주류 승단에서 한 것 같은데 ―, 처음부터 여성이 승려가 되는 데 대단

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팔경법'[尼八敬戒]이라는 건데, 여덟 가지로

여승이 남자 승려를 공경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여자 스님이 먼저 꼭 절해야 한다든가 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붓다

에게 가탁(假託)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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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불교는 상당 부분 아주 초기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

는데, 인도를 통일했다는 아쇼카왕 때는 불교가 왕의 국교가 돼서 거의 원래 정신을

이미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는 이미 절대평등

주의적이고 남녀평등주의적인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계 없다 싶은, 이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붓다라는 스승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후기의 승단, 후기의 승려들이 그것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바로 그런 붓다의 카리스마는 불교가 그래도

죽지 않고 계속 민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한 묘사는 기독교에 대한 묘사와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복음서를 읽

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특히 누가복음에는 계급투쟁적이라 할까요. 상류 계급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이 담겨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배

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리라' 하고 돼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그렇지만 그런 체제 반대적인 발언들이 가장 많은 책이 요한계시

록입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술을 하고, 하

나님의 나라가 올 때 로마제국이 망할 것이고, 로마제국에 협력했던 부자들이 결국

벌을 받을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최종 편집되는 것은 180년

대라고들 추정하고 있습니다. 180년대에 이미 기독교는 거의 체제에 편입된 종교였

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체제에 협력하고 있던 교단 지도자들이 ‘부자들이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

습니까?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예수의 카리스마가 그 사람들한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부자들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2세기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화됐는데, 그래도 예수의 원래 정신은 상징적으

로라도 복음서에 담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수의 정신이 있

었기에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짓밟힌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런데 복음서의 편집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합리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게 4복음서 ―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 ― 에는 재미있게도 노예의 존

재나 노예제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겁니다. 예수가 살았다고 믿어지는 1세기 초반

에는 노예제가 경제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단히 많았고, 예수가 부자 보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다면 분명히 노예 문제에 대해 발언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노예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 그러니까 기독교 보수

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 하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대로 신약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까 결국 그 편집 과정에서는 말하자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는 미끼 밥을 남겨 두기

는 했는데, 상당 부분은 바울 사도와 그 제자들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메워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또 아주 재미있는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

라는 사람은 메카라는 상업 도시에서 ‘거지가 왜 이렇게 많은가. 왜 부자들은 이렇게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왜 이렇게 못사는가' 이런 불만이 출발점이 돼서 새로운 종교

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그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망명중이었을 때, 당시

에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무하마드의 집뿐이었는데, 그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

께 예배를 봤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가 죽고 나서 무하마드의 계승자 우마르가 거의 맨 먼저 개악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는 예배를 따로 봐야 한다'는 법률을 정한 겁니다. 무하

마드의 원래 육성을 담은 코란의 기록을 보면 여성의 권리를 상당 부분 주장했습니

다. 이혼권이나 피임권리나 유산상속권이나, 여자와 남자는 원래 알라신에 의해서 평

등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등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중의 이

슬람 율법을 보면 이게 상당 부분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슬람권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상당 부분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도 영

감을 받지만, ‘무하마드의 진짜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을 페미니즘

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보든, 기독교를 보든, 불교를 보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계급 사회에

서 고등 종교의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제가 뭔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

는 입장에서 기존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

는데, 이제 그것을 결론 삼아 끝내겠습니다.

결국 지금 성직자 집단이 대표하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 종교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

나 다릅니다. 사실, 옛날에 한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약 붓다의 가르

침이 맞다면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해야 하

는가. 나 자신에게 절해도 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또는 “명부전에 가서 부모님들이

나 내 자신이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재판관한테 뇌물 주는 것하고 무엇

이 다르냐. 결국에는 내가 죄가 없으면 왕생할 거고 죄가 있다면 아무리 빌어도 안

될 텐데, 뇌물 주듯이 비는 게 다 뭐냐”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기존 종교가 분명히 그 원래 정신과 다른

부분을 당연히 비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맑스주의자가 된다 하더라

도 속류 맑시스트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 그 정체는 무용지물이다. 마약이다'

하고 버리기보다는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진짜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사람

들한테 그렇게 많은 민중이 모였는지, 왜 그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한테 이렇게 귀중

한 이름들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들의 집에 딱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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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차베스 대통령이죠. 그러니까

양쪽을 상당히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튼 왜 하필이면 수많은 빈민들한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영감을 주는지, 우리가

진정한 맑시스트라면 스탈린주의 식으로 종교를 무조건 팽개치기보다는 종교를 비

판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원래 종교의 모습에 대해 나름으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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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자와의 대담

김하영 :

무릇 모든 종교에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있습니다. 가령 불교의 경우,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의 “호국불교”가 있었는가 하면, 암베드카르를 지지한 인도 불가촉 천민(달리

트)의 불교가 있었고, 또 1980년대 한국의 “민중불교”가 있었습니다. 박노자 동지의

경우 민중불교와 흡사한 데가 적잖이 있는 듯합니다. 민중불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

십니까?

박노자 :

한국에서 민중불교의 창시자는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입니다. 민중불교는 일본과 한

국에서 1920~30년대에 상당히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민중불교의 주장이 결국 이거

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사찰들이 산송장,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시체

에 불과한 것이고요, 붓다의 원래 정신이 초기에 수행자 공동체, 즉 승가의 무소유 공

산주의적인 생활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원래 승가에서는 한 승려가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옷 한 벌과

밥 그릇 하나 정도였고요, 민중한테 상담을 해 주고 민중한테 여러 가지 살고 죽는

일에 대해서 생각을 심어 주고 식량을 받아 살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불교

에서 모든 고뇌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게 ‘탐진치(貪瞋痴)'라는 건데, ‘탐진치'가 뭐냐

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한용운 스님도 그렇고, 일본의 민중불교

도 그렇고, 성냄이나 어리석음보다 가장 무서운 게 탐욕이라고 생각했고, 탐욕을 그

기반으로 삼으면서 늘 재생산시키는 자본주의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자본축적과 확대재생산이라는 것이 심리적으로 분석하자면 결국 탐욕과

공포 심리 없이 개인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내고 낙오

자가 될까 봐서 늘 겁에 질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세계는 만약 축적이 안

되고 확대재생산이 안 되면 죽게 돼 있는 세계인데, 공포와 탐욕의 이중주입니다.

그래서 민중불교는 거기에 주목을 해 “자본주의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중생들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불교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의 삶은 자본주의 하

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겁니다. 그래서 일본 민중불교 같은 경우 전후에 소

수자로나마 남아 있고, 비판불교라는 이름으로 1970~80년대에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는데, 한국 같은 경우 잘 아시겠지만 1950~7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얘기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민족 지도자로 상당히 우상화됐는데, 그렇다고 해도

만해 한용운의 진짜 사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하영 :

불교가 초기 단계를 벗어날 때 보인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운동과 닮은 데가

많은 듯합니다. 초기 불교의 승가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의 사회적 기반은 도시의 상인과 금융업자, 장인 들이었습니다. 이들로부터 재정 지

원을 받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기부금으로 부유해져, 노예를 부리게까지

됐습니다. 중세 스리스도교 수도원들이 농노를 부린 것처럼 말입니다. 비폭력 교리도

7세기 왕 하르샤 실라디티야의 경우처럼 아주 간단히 무시되곤 했습니다.

이런 모순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종교적 모순 때문에 또한

각 종교는 부패와 쇄신 운동이 충돌하곤 합니다. 또, 다양한 사회 계급들이 같은 종교

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충돌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박노자 :

노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원래 불교에서는 스님이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돼 있

습니다. 구족계를 받아야 자격을 갖춘 스님이 되는 것이고, 이 구족계는 남자 승려의

경우에는 2백50 가지 계율이나 됩니다. 그런데 구족계 내용을 보시면 ― 불교 서점에

가셔서 ≪사분율≫이라는 책을 보시면 거기에 내용이 나오는데 ― 그 계율 중에 “금

전을 취급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제정한 계율이죠. 또, “노예를

소유하거나 부리면 절대 안 된다”는 계율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계율을 진짜 계율답게 하자면, 노예 내지 농노를 부린다든가

[하는 것은] 불교 공동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아쇼카왕 때 불교가 주류

종교가 된 뒤에는 인도에서도 불교 사찰에서 노예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고요. 중국이

나 조선에서는 사찰이 노비를 부리는 데 별다른 제한이 없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에서 사대부들이 더 이상 가만두면 안 된다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서

그렇지, 빼앗기 전까지 사찰들은 주요 노비주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불교가 중국에 들어서면서부터 초기 계율을 원천적으로 무시해 왔다고 봐야 하

는데, 불교의 경우에도 이것에 대한 쇄신 운동이 몇 번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

에는 많이 안 들어왔지만, 중국에는 삼계교(三階敎)라는 중세의 민중불교 교단이 있

었습니다. 6세기, 7세기에 수나라와 초기의 당나라에서 많이 유행했는데, ‘다 불성(佛

性: 부처로서의 성격)을 갖춘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곧 평등하게 사는 것이

종교의 진짜 교리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운동인데, 당나라 중기 때 탄압을 받아 무산

됐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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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쇄신 운동이 있었다는 것은 맞습니다. 기독교만 해도 예를 들어, 16세기의 종

교개혁은 주로 루터 교회라든가 칼뱅 교회에서도 출발했지만, 또 한편으로 수많은 소

수자 교회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소수자 교회 중에는 예를 들어서 퀘이커라는 종파

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다들 아시죠? 박정희 때 곧은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

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신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한국 종교인이 함석헌 선생이죠.

한국에서 함석헌 선생님이 한국 퀘이커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퀘이커라는 종파가 영국에서 17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퀘이커 교도들이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였고요. 국가권력을 부정했고요, 또 제일 중요한 것

으로 노예제를 부정했습니다. 미국에서 퀘이커 교도들이 흑인 노예 해방운동에서 늘

선두에 섰습니다. 수많은 다른 소수 종파들이 미국에서 노예제와 전투를 벌였던 것입

니다. 지금의 퀘이커는 그 모습이 전혀 아니지만, 18세기 이전에는 계급 타파 운동,

계급 전복적인 운동을 봐도 종교적이지 않은 운동이 거의 없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은

속세적인 반계급 운동은 18세기 이후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

가 종교를 좀더 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양면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김하영 :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충돌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부시 일당은 미국의 보수우익 기독교인 집단입니다.

미국의 보수 우익 기독교는 어떤 성격입니까?

박노자 :

이런 얘기를 들으면 듣자마자 무엇이 생각났느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바티

칸의 교황청이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합니까? 절대 반대하는 거죠.

그것은 교황청이 꼭 착해서 그런 것이기보다는 만약 전쟁에 찬성한다고 하면 지금

카톨릭 신도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빈민들이 과연 가만히 두

겠습니까? 아마 신자들 대다수가 탈락할 것입니다. 어쨌든 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이

번 이라크 전쟁뿐 아니고 1991년 제2차 걸프전쟁도 교황청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니

까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기독교는 전쟁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중에서 다수파라 할 수 있는 가톨릭은 전쟁하면 안 된다고 하니 종교 전쟁이

라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데, 아까 말씀하신 미국의 일부 기본주의[근본주의]

적인 신학자들, 부시와 상당히 가까운 기본주의적인 교파들은 대충 어떤 신앙을 가지

고 있냐면, 인류의 최후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그 인류의 최후는 바로 아마겟돈이

라고 할 만한 악과 선의 마지막 전투에서 결정될 것이고, 선은 물론 미국이고, 악은

물론 이슬람 세계입니다. 그래서 최종 전투에서는 결국 핵폭탄도 사용될 수가 있는

데, 그 최종 전투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고, 인류가 멸망함과 동시에 선택받은 자들만

이 “휴거”(携擧: “들어올림”, “이끌어 올림”의 뜻)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인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끔찍한 이야기인데, 어쨌든 이 얘기가 미국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배경 중 하나는 지금 미국의 중산층이 ― 한국도 그렇지만 ― 해체 중에 있다는

겁니다. 상당 부분의 중산층의 위치가 하락하고 있는데, 기본주의적인 신앙은 위치가

하락되는 중산층의 불만을 체제가 아닌 종교적인 관심으로 돌리는 데 상당히 사용되

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 전체 노동인구 중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8퍼센트도 안 됩니

다. 제조업은 그 비중이 지난 50년 동안 거의 3~4배 정도 줄어든 것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돼 지금은 아주 불안정한 서비스 직종을 찾아 헤매야 되는 것이고,

미국은 지금 의료보험이 안 돼 있는 사람들만 해도 4천만 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적 불만을 종교적인 관심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아까 말씀하신 부시와 같

은 종류의 기본주의적인 신학이죠.

김하영 :

최근 덴마크 일간지 <율란트 포스텐>이 예언자 무하마드를 모욕적으로 묘사한 만평

을 실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 혐

오가 인종차별의 가장 뚜렷하고 또 유력한 형태가 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

었습니다. 이슬람 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인터넷을 통해 무하마드 만평을 직접 보신 분들 계십니까? 어떻

게 생각하세요? 혹시 독후감이라도 있습니까? 이따가 저도 제 독후감을 말씀드리겠

습니다.

그 만평을 보면 무하마드는 모자 대신 커다란 폭탄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났느냐 하면, 코란에는 ‘만약에 이슬람교인 여러분들 중에서 기독

교인이나 유대인한테 누군가 악을 끼치면 나(즉, 무하마드) 자신이 최후의 심판의 날

에 당신의 죄악을 증거할 것이다' 하고 써 있습니다. 무하마드의 부인들 중에는 유대

인과 기독교인이 한 명 있었고요. 무하마드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 대해 상당한 호

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한테 배운 바도 있고 해서요.

그리고 실제로 유대인들에게는 중세 이슬람 국가야말로 제일 살기 좋았던 곳입니다.

그들은 중세 유럽에서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박해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래 이슬람이야말로 다른 종교, 특히 같은 계통의 기독교나 유대교에

대해 대단한 똘레랑스를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자살 공격이라든가 하는 것은 종교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종교적

인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무력감의 발로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율란트 포스텐>이라는 신문이 무하마드 ―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괴롭힌

사람을 내가 최후 심판 때 고발하겠다고 한 무하마드 ― 를 마치 기독교도나 유대인

을 죽이겠다고 폭탄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무하다드 만평이야말로 종교 왜곡일 뿐이죠. 더 할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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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있겠습니까?

그 만평 중에는 또 어떤 것이 있었던가 하면, 자살 테러로 숨진 사람들이 낙원에 들

어서자 무하마드가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처녀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더 이상 여러

분들한테 붙일 처녀가 없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데, 코란은 자살 공격은 물론이

거니와 자살 자체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습니다. 자살 공격은 이슬람에서 주장된 적

이 없습니다.

유럽인들이 요즘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 이슬람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삼는 것이 이

슬람의 지하드인데, 이 지하드라는 말이 유럽에서는 가끔 ‘신성한 전쟁', ‘성전'이라고

번역되는데, 원래 지하드가 무슨 뜻이냐 하면 불교의 용맹정진(勇猛精進)과 똑같은

뜻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이에요. 다만 알라신을 받드는 공동체를 외적이 괴롭

힌다면 지하드는 방어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용맹정진을 뜻하는 이 말이 유

럽에서 갑자기 신성한 전쟁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니, 이것은 왜곡 중에서도

아주 심한 왜곡에 속합니다. 유럽인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왜곡하고 일종의 위협으로

꾸미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을 넘는 이야기죠. 뭐 히틀러의 반유태주의 공포하고 거

의 차이가 없습니다.

김하영 :

그리스도교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1980년대에 민중신학에 근거한

민중교회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이나 그 주의주장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습니

까?

박노자 :

안병무 선생이나 서남동 선생 등 몇 분의 저서를 읽었는데, 이분들의 이야기는 ‘우리

가 기존 교회라는 매개체를 넘어서 예수라는 사건, 예수가 나타났다는 그 사건을 직

접 체험하고, 우리와 그 사건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는 역사 속의 예수도 있는데 역사 속의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

스 말로는 ‘오흘로스'(ochlos), 즉 민중이죠. 그러니까 민중에게 둘러싸여 있고, 민중

을 위해서 부자들은 축복받을 수 없다고 말한 예수라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

사이에도 예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주장이었습

니다.

민중신학자들 중 몇 사람은 전태일 분신 사건 때 대단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분

신하고 있는 전태일을 보면서 예수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예수와 같은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을 위해 이렇게 자기를

아끼지 않는, 그리고 민중편에 서서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고, 평등한 세계가 오

게끔 노력하는 것이 예수를 재현하는 하나의 체험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원래 기독교 정신을 회복하자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민중신학이 하나의 첩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쉽게도 한

국에서 1970~80년대 민중신학의 열기가 높았다가 결국 그것이 주류 교회에서 따돌

림을 당해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화되지 못했습니다. 대단히 아쉬운 일이죠.

함석헌 선생님 같으면 민중신학자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실제로 함석헌의 기독

교 이해는 주류 신학하고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아마 20세

기가 낳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비주류” 신학은 귀중한 문화적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김하영 :

천주교는 최근에 교황이 바뀌었습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전 교황 요한 바

오로 2세 못지 않은 보수파, 전통파인데요. 최근 우리 나라에서 새로 추기경이 된 정

진석 추기경도 사회 문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더는 198

0년대의 진보 인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제는 진부한 얘기가 됐죠. 반면에, 천주교 고

위 성직자층의 이런 보수화에 저항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목소리는 들릴까 말할 할

정도로 미약한 듯합니다. 왜 이런지 설명해 주십시오.

박노자 :

한국 천주교는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1970년대 천주교는 반독재 운동의 대명사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외국 학자들이 많이 지적한 부분입니다만, 사실 1970년대

한국의 천주교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학적으

로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오로지 개신교 속에서, 그것도 기독교장로회를 중심으

로 해서 일어난 것인데, 천주교 같은 경우 신학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에 그대

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천주교가 군사독재에 반대했던 것은

군사독재가 그만큼 부르주아적인 사회질서를 위협한다는 의식이 있어서였기도 했습

니다.

대개 부르주아 질서로는, 소위 제도적인 민주주의 이상으로는 안정적인 것이 없거든

요. ‘박정희가 결국 나라를 파멸로 끌고간다, 박정희의 무제한 종신 집권 같은 성격의

군사독재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잘못하면 사회적인 급진적 변동의 가능성까지

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1970년대부터 이분들은

박정희를 일종의 불안 요소로 간주해서, 정상적으로 부르주아 국가가 작동되기 위해

서는 박정희가 물러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에는 사실 더 이상 한국 천주교가

바랄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한국 천주교는 사실 중남미의 해방신학

같은 진보적 흐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질서가 회복됐다

면 이 질서를 옹호하는 데 그냥 사력을 다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면에서는 김

수환 추기경이라든가 하는 분의 보수화는 어찌 보면 합법칙적인 행동이 아닌가 싶습

니다. 그렇게밖에 될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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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중 질문에 대한 박노자의 답변

1.

수행 단체가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인데요. 문제는, 불

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생 모두가 수행자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수행 단체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꿔 보자는, 일종의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모든 속인들을 포함하는 한 제도의 대

안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아까 언급하신 도법 스님처럼

탁발 수행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본인들의 수행의 의미를 알린다면, 그것이 자

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는 못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은 될 수 있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2.

‘만약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눈에 그림이 선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서에서 읽으셨겠지만, 예수님

이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와서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막 내쫓아버리지 않았습

니까? 만약 지금 예수님이 한국 대형교회 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르실 겁니다. 그것은 거의 안 봐도 그림이 선합니다. 예수

님 같으신 분이 만약 지금 다시 오신다면 대충 지금의 교회를 어떻게 보실 것인지,

또는 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그것은 보지 않아도 볼 수가 있

는 겁니다.

붓다만 하더라도 사회적인 발언을 꽤 많이 했습니다. 붓다의 사회적인 발언을 종합해

보면,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악법을 남발해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고, 전쟁을 하고, 지

배계급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그런 국가는 악이라고 봤습니다. 국가의 긍정적인 기

능으로 붓다가 딱 두 가지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재분배 기능입니다. 사람들이 가난

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는데, 부자한테서 재물을 거두고 그것을 평등하게 나눠 주

는 것이 국가의 긍정적인 기능이라고 본 것이고요. 또 하나는 갈등의 조절자라는 부

분입니다. 꼭 폭력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들 사이에서는 평화

를 찾아 줘야 한다.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라 그

중간에서 국가라는 조절자가 필요하다'는 점도 본 거죠.

아마 붓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국가, 아마도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국가로부터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일단 분쟁에 대한 비폭력적인 조절과

재물에 대한 세계적 분배를 요구하실 겁니다. 초기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발언을 종

합해 보면 그런 요구를 하실 것 같습니다.

3.

정의구현사제단이나 도법 스님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요. 아마 한국에서 지금 만나

볼 수 있는 종교인 중에서는 가장 올바른 길로 가시는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일단은

본인들의 종교적인 수행도 하시고 도법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불교 교

리에 대해서 많은 논문도 쓰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본인의 불교적인 이

상을 사람들과 나눌 줄 알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줄 아시는 분이시라서, 지금

종교인으로서 가야 할 길로 가시는 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불교 승려들의 정치에서 약간 아쉬운 점은 불교 교리 ― 그런데 불교 교리는

대단히 난삽합니다. 공부하기가 아주 쉽지 않은 교리입니다 ― 를 많이 배우신 분들

이 예컨대 사회과학이라든가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제기 방법을 많이 외면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배울 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

도 현 사회에 대해서 발언할 때 꼭 2천 년 전의 말씀으로 해도 되지만 조금 더 사회

과학적으로 정리를 해서 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이 있습니

다.

4.

‘종교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지금 같은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이 있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으냐'는 질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매일노동뉴스> 같은 매체에서 여승무원들이 파업하는 모습을 보

지 못하셨습니까? 파업 투쟁한 지 거의 2주가 다 돼 가는데 성과는 없고, 공사나 국

가 쪽에서는 절대 양보할 생각도 없고, 결국에는 다 해고하겠다는 방침을 만들어 놓

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 매체에서는 동정 여론이 많이 없다 보니 국가에서는

막 나가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일단 여론 조작에서는 공사와 국가

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싶은 겁니다.

만약 진정한 종교인이 그런 상황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 아마

도 조금 성격이 강인하신 종교인이라면 부산과 서울 사이의 철로에 누워서 ‘승무원

문제가 풀릴 때까지는 기차가 안 다니게 하겠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에서

민중한테 아주 강력하게 호소하는 부분 하나는 정의감 표출입니다. 종교는 정의가 구

조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구할 수 없는 그 정의를 종교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적인 호소력입니

다. 그래서 아마도 진정한 종교인이 나타난다면 종교의 정의라는 본질을 행동으로 보

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승무원 문제는 지금 질질 끈 지 거의 2~3주가 다

돼 가는데, 종교인들이 아직 말 한 마디 안한 것 같습니다. 진정한 종교인들이 많이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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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같은 경우 아무리 민중적이라 하더라도 현실화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았

느냐', 그러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하늘나라로 못 간다는

것이 물론 계급 질서에 대한 비판이지만, 구체적인 행동 방법이 제시돼 있지 않은 것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의 사회 인식 수준과 우리의 인식 수준이 당연히 조금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당시로서는 계급 질서를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체념적인

생각이 거의 모든 고대?중세 사회에 아주 만연해 있었습니다. 예컨대 붓다도 사회개

혁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수행자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들끼리 국가를 벗어나서 공산

주의적인 생활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에서도 ‘최후의 날에

부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요한계시록 같은 곳에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 손

으로 부자들을 심판해서 부자들도 빈민들도 없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그 당시로서는 제시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소농들과 노예, 그리고 장인들의 사회인데, 생산력의 발달 수준이 미

미하고 분산되다 보니까 서로 힘을 결합하는 데 한계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종족?부족?도시국가로 나뉘어 있는 그 당시의 세상에서는 민중이라는 종합적인

개념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당시의 사회적 한계가 있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는데, 초기 기독교의 정신을 오늘날에 와서 살리자면

분명히 오늘날의 우리 수준에 맞는 그런 현실화 방안을 고민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

다.

결국 정의를 구할 수 없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를 타파하자면, 일단 그 질서 속에

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행동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 테고, 지금에는

생산력의 발달 수준과 교육의 발달 수준 등으로 봐서 이것은 꼭 폭력적인 행동이 아

닐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생산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다면 그 다음에 자본주의

를 폐기한다는 게 지배계급의 저항만 끈질기지 않다면 굳이 폭력을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제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물으셨는데요, 저한테는 사실 제일 고통스러운 질문입

니다. 예컨대 불자라 하더라도 제가 사찰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조계종 신도증도

없고, 그러니까 가짜 신자라고 해야죠. 그리고 ‘신자'에서 ‘신' 할 때 ‘믿을 신(信)' 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기 불교에서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실

제 초기 불교에서 가장 많이 썼던 용어가 뭐였냐면 ‘냐나'(이해), ‘브라즈냐'(般若: 지

혜) 같은 용어였습니다. 초기 불교에서 가르침은 무조건 믿으라는 그런 소리가 아니

었고요. 이해해서 실천하라는 소리였죠. 만약 진짜 불교를 가지고 뭔가를 한다면, 믿

을 신 자는 웬만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불교를 종합적으로는 공부를 많이 해

서 그쪽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7.

‘우리가 그렇게 기복신앙에 열중하는데 왜 하필이면 삼신할머니라든가 하는 민속신

앙이 기독교와 맞물릴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느냐'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 민

속신앙의 하나의 큰 문제는 뭐였냐 하면,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자로부터 천시를 많이

받았던 거구요, 근현대에 와서는 성리학자를 대신한 기독교인으로부터 그것보다 훨

씬 더 심한 멸시라든가 악마시하는 그런 것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속신앙

인이 지배자들로부터는 천대를 많이 받아온 것입니다. 시장화하는 데에는 지배자들

이 늘 낮은 것으로 취급해온 민속신앙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고급 신

앙'이 상품화하는 데서는 훨씬 쉬운 거죠. 이것은 한국의 사회?문화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요.

8.

단군 이야기를 하자면, 하도 폭발력 있는 주제라 간단하게 [답변]하겠는데요. 조선 시

대에는 민중 생활이라든가 민중의 신화를 보면, 단군이 민중에게 신앙의 대상이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왕조실록에서나 “단군묘가 있다”는 기록은

있는데, 민중들이 단군을 찾고 신앙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개화기에 와서 단군이 민족주의적인 신앙의 대상이 됐는데, 단군 신앙, 즉 대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호남의 유림들이었습니다. 민중이 아니라 유림들. 나철 선생 같은 사

람들이 대종교를 만든 동기는 일본에 가서 일본의 국가 신도(神道)의 주된 신격인 태

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보고 ‘한국에서도 부국강병을 이루자면 그런 국가

신도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쪽에 아마테라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단군이

있다'는 얘기를 해서, 1909~10년에 초기 대종교를 만든 겁니다.

거기에 상당히 동조한 사람들이 일부 개화주의자였습니다. 박은식 선생 같은 사람이

많이 동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단군 신앙이 당시 민중적이라기보다는 사회 상류층 일

부의 일종의 반대모방, 일본과 정치적으로 싸우면서도 일본의 신도를 모방하고자 하

는 욕망의 표출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때는 수많은 반일적?항일

적인 저항적 지식인이 단군 신앙을 갖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일제 말기에 대종교는

일제와 협력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군정기에 들어서 대종교뿐만 아니고 천도교라든가 동학을 이은 기타의 신

앙 단체들이라든가 거의 모든 토착적인 신앙 단체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

군정이나 초기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기독교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종교 시장이 아주 급격하게 기독교 위주로 재편됐습니다. 그것이 미군정이나 이승만

시절의 일인데, 그 뒤로는 교회가 고성장을 계속 거듭해 온 겁니다. 한국 종교시장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9.

제가 질문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논리가 결국 신앙을 지

배하는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인 것 같은데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앙을 표방하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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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단체들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일종의 기업의 형태로 꾸려져 있는 것이고, 기업

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금을 안 낸다는 것 빼고는 [다른 점이] 거의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기업 형태로 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신앙 행위는 결국 말 그대

로 장사 가까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를 갖고 있는데, 물론 모든 교회들이 꼭 그

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향린교회라든가 몇 군데의 민중신학 계통의 교회에서는 전

혀 다른 모습의 신앙과 신학을 볼 수는 있으나 아쉽게도 그것은 소수 아닌가 싶습니

다.

10.

‘전태일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 같은데, 전태일이라는 분의 수기 등을 보면

한 사람이 어떻게 계속 변해 갔는지, 어떻게 사람의 사상?이념 세계가 계속 바뀌어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초기에 전태일은 대통령한테 “상소”를 하면, 즉 대통령한테 노동자의 생활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편지를 쓰고 얘기한다면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말

하자면 기존의 권력 체제를 이용해서 노동자 생활을 개조하고자 했는데, 결국 그 미

련을 버리고 전투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노동자 투쟁 과정에서 한 사람의

사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아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은 그 당시 한국 사회, 아마 1960~70년대에 가장 큰 충격이 아니

었나 싶고 민중신학을 만드는 데 기폭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라든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신 자살합니다. 최근 몇 년

만해도 자살한 노동자들이 벌써 수십 명이 되는 것 같은데, 그 중에서 분신하신 분들

만 해도 적어도 열 명 안팎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노동자가 그냥

자살하면 신문에서 보도도 없고요. 분신자살한다 하더라도 신문에는 짤막한 보도 하

나 나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자본주의에는 확실히 제

도적인 민주주의가 유리한 겁니다. 소프트한[연성] 독재죠. 그런 체제 안에서는 노동

자의 죽음은 별다른 충격이 될 수 없습니다. 여론 형성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받기 때

문에 결국 전태일처럼 요즘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해도 결국 사회에서는 아주 외로운

위치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박노자의 전체 강연회 요약 발언>

종교라는 게 우리 사회에서 비판할 수 없는 아마 유일하다 싶은 분야가 아닌가 싶습

니다. 지금은 국가나 대자본은 물론이거니와, 예를 들어서 군이라든가 여태까지 거의

비밀로 싸여져 있던 그런 분야에 대한 비판도 거의 다 가능해진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안기부 내지 국정원의 최고 비밀 중 하나라고 여겨지고 있는 1987년 KAL기 사

건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것이 거짓이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라면 더 이상 이 얘기

도 성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에 딱 하나 남은 성역이 있다면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해서는 뭔가 깊이 있

는 해부 작업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 서적 시장을 봐도 여러 가지 책들이 많아 거

의 홍수인데, 한국 대형 교회 사회경제학은 한 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터부시되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도 너무 이야기한 게

없다는 거죠.

종교라는 게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고요,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종교가 있을 수

없는 것 같고요. 기독교 내지 불교를 가진다,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마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 내지 불교는 어차피 개체적으로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 없이 ‘남과 다른 형태의 신앙과

실천을 한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내지 불교를 생각하고 실천한다' 해도 그것

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종교, 특히 불교에서 영감을 많이 얻고 있다 해도 가장 귀중한

한 가지 교본이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철학은 회의(懷

疑)로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회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모

든 것을 의심해야 결국에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무비판

적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이 꼭 마약이 되는 겁니다. 종교가 마약이냐 아니냐 하는 해

묵은 논쟁이 있지만, 결국 제가 보기에 회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

여지는 종교는 마약이 아닐 것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야말로 “민중

의 아편”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알라딘: [전자책] 박노자의 만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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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0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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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파일 : ePub(14.32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367쪽, 약 19.6만자, 약 5.1만 단어


책소개
<당신들의 대한민국>,<나를 배반한 역사>등의 지은이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부교수 박노자가 인터넷 블로그에 쓴 자신의 일기들, 다양한 고민과 번뇌의 흔적들을 모은 글 모음집.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인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궁금증과 생각이 담겨 있다.

'나를 넘어', '우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경계를 넘어'등 총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 자신이 일관되게 고민해온 사회적 문제들과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상적인 고민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 둘은 때로는 따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긴밀하게 얽혀있기도 한다. 그는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폭력과 사회변혁에 대해 고민하고, 귀화인으로서 민족주의와 국가를 고민한다.

때로는 학자적 통찰로, 때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입장에서 진술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 인간 박노자가 바라본 한국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목차


일기를 쓰는 의미에 대하여: 번뇌가 깊어지면 ‘꽃’이 핀다

1부 나를 넘어

조국애란 무엇인가 | 타향살이, 불안의 일상화 | 거절의 미학 | 부처님 오신 날 | 절망을 느끼는 순간 | 너무 쉽게 망각된 그들, 고려대 출교자 | 자리가 사람을 명예롭게 만든다? | 학문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된 계기 | 근대적 ‘민중’에 대한 생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 노르웨이 직장의 송년회 | 성욕과 종교에 대한 짧은 생각 | 등수 없는 학교의 추억 | “코리안 호스티스가 필요하세요?” | ‘친절’이라는 국제자본주의체제의 코드 | 불만과 불안의 수위,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 | 우리들의 중독(들) | 마광수 교수의 연구실을 보고 | 인권, 아직 오지 않은 ‘근대’ |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 권위주의 사회엔 권위가 없다 | <효자동 이발사>와 지배?복종의 심리 | 군 폭력 관련 보도를 보고

2부 우리를 넘어

한국 유학생들의 핸디캡 | ‘테러리스트’는 욕인가? | <겨울연가> 열풍, 그렇게 자랑스럽기만 한가? | ‘악플’의 문화 | 한국 자본주의 미래 비관 | KTX 여승무원의 단식을 보며 | 여행잡감, 영어를 못(안)하는 유럽 | 포섭, 감옥보다 더 무서운…… |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행위 | 한국의 자유주의, ‘말의 잔치’ | 보수가 표를 얻는 비결? | 전교조 죽이기, 골프 버금가는 한국 지배계급의 취미 | 아니, ‘백인’이 뭐가 좋다고 이러는가? | 대학 신문을 보다 눈물 흘리다 |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한다 | 내가 현실정치를 평생 못할 이유 |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 | 한국사 교과서를 쓰면서 역사 속의 선악을 생각하다 | 숫자놀이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 내가 방효유 선생을 내심 좋아하지 않는 이유 | ‘삼성관’에서 회의를 해본 느낌 | 제 손으로 제 무덤파기, 과잉성 혹은 예방성 폭력 | 강정구 선생 유죄 판결, 혹은 절망의 시간 | 우리가 도대체 그때 노무현에게 왜 기대를 걸었을까? | ‘바람직한 우익’, 한국에서 가능할까?

3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민족주의자’를 포용하는 방법 | 희망과 절망 사이, 북한 학자들과의 ‘만남’ | 사회주의자가 ‘예수쟁이’ 구출에 사활을 걸어야 할 이유 | 국기에 대한 쓴웃음 | 통일, 디스토피아의 그림자 | 한국 사랑? | ‘일심회’ 판결 유감 | 의사 폴러첸의 강의를 갔다 와서 | 귀화인도 ‘한국인’인가? | ‘노무현’에 대한 가장 위험한 착각 | ‘국민’, 해체되지 않는…… | 미국의 주요 일간지가 전하는 북한의 ‘진짜 의도’ | 김일성 대학 기숙사의 국제 사랑 이야기 | 황장엽의 회고록을 읽다가…… | ‘그들’의 ‘민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 북한 인권 문제를 생각한다 | ‘반미’보다 차라리 ‘반미제’ | 역사학자들이 파업을 벌인다면? | 극단주의는 왜 위험한가 | 남이 하면 ‘우경화’, 우리가 하면? | 김영남, 그리고 ‘일본인 납치’ 문제 | 월드컵, 스포츠, 그리고 국가 |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 북한은 과연 ‘깡패 국가’일까? | 불교는 평화의 종교? |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4부 경계를 넘어

러시아의 ‘인간 사냥’ | 악의 일상성에 대한 명상 | ‘고향 방문’의 슬픈 회상 | 노르웨이 국치일 | 발이 빠지기 쉬운 징검다리 | 원칙을 배반한 타협의 결과 | 일본 잡감 | 일본공산당원이 서대문 감옥을 둘러보는 심정? | ‘진짜 사회주의’? 슬랴프니코프와 트로츠키 | 배울 것만 배우자 | 노르웨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오해 | 사담 후세인과 서구인들의 인종주의 | 러시아에 스킨헤드라는 망종이 생긴 까닭 | ‘주니어 제국주의자’들의 발흥 조짐? | 우리가 영어에 매달리는 이유 | 후쿠오카 단상, 의아한 평화 | 성개방과 보수성의 관계? | 일본공산당을 생각한다 | 트로츠키 아이러니 | 모리타 어민의 죽음 | 다민족 국가 미국의 진일보한 인재등용책 | 미 제국이 몰락해버린다면……? | 언어를 빼앗긴 자의 언어, 프랑스 무슬림 청년들의 봉기


책속에서



매우 독선적으로 보이는 전통시대 지배계층, 사대부의 문화에서도 '대의명분'과 얽힌 지점에서는 '거절'이 잘 통했다(물론 미화할 순 없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이상은 '둥글게 둥글게' 관계를 잘 관리하면서 '거절'로 거래처를 화나게 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는, '민간 외교관'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p2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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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노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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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와 불교사 등을 연구했고 지금은 근대사, 특히 공산주의 운동사에 몰입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1·2) 『우승열패의 신화』 『주식회사 대한민국』 등이 있다.


최근작 : <전환의 시대>,<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총 87종 (모두보기)
인터뷰 : 이중의 타자, 박노자 교수와의 e-만남 - 2002.07.31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박노자의 새로운 얼굴
사적 번뇌의 벽을 넘어 더 넓은 소통의 세계를 꿈꾼다

‘노르웨이의 한국인’ ‘우리 시대의 반항아’ 박노자는 궁금하다. 대체 어째서 인터넷의 악플들은 사라지지 않는 건지, 한국에서 유난히 ‘거절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뭔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에 표를 몰아주고, 경제만 살리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지……. 그런 궁금증을 박노자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간 인터넷 블로그에 쓴 그의 일기들은 이러한 ‘번뇌’의 흔적이며,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바로 그 흔적을 모은, 최초의 사적 기록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에는 개인과 가정,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적인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궁금증과 생각이 담겨 있다. 그간 너무 민감해서 혹은 너무 개인적이라서 신문, 학술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단상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걱정, 민족주의와 국가, 폭력과 사회변혁에 대한 염려까지, 다양한 소재와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고민들은, 때로는 학자적 통찰을 담아, 때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입장에서 진술된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누군가의 일기를 들춰볼 때 느껴지는 은근한 즐거움과 함께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넓은 관심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접기







개념없는 정부에 따끔한 일침을 가할 이런 책을 많이 많이 읽혀야되지 않을까?
순오기 2008-05-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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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은 한국인의 아픈 지적들이 가득
소금연못 2008-12-0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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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아프게 찔러주시는 박노자 님, 책 잘 읽었습니다.
zikomo 2011-05-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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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의 전작들의 연장이자 확장. 순발력과 시의성을 겸비한 공유와 소통. ▩
befreepark 2011-01-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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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투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모두 매한가지. 우리는 그걸 보지 않고(또는 않으려 하고) 박노자 교수는 그걸 보려 하는 것의 차이.
감기군만쉐 2013-08-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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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께 보내는, (다 쓰지 못한) 만감편지




박노자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오슬로의 먼 하늘 아래에서 강건하신지요? 저는 선생의 10년 독자이자, '88만원세대'란 이름조차 갖지 못한, 대한민국의 30대 초년병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생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최근 펴낸 선생의 『만감일기』을 읽고 10년 독자로서 느낀 바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선생께 한풀이도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일기가 던져주는 "그 어떤 정답도 제공해" 주지 않지만, 그 뜨거운 '화두'들에 저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오랜 독자로서, 매번 선생의 저서들은 나온 즉시 구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만감일기』도 읽은 것은 몇 날 전의 일입니다. 읽는 내내 선생의 "무거운 번뇌, 번민"들이 제게도 뜨겁게 다가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께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쓰기까지는 여러번 찢고 다시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연찮게도 이명박 씨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더군요.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선생께 편지 띄우기를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의 20대에게 '88만원세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부여해 준 우석훈 선생의 책 『88만원세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여전히 이 '88만원세대'는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이 시대 20대들에게 비극적이게 뜨거운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88만원세대'라는 명명 속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30대의 반열에 들어섰고, 이제는 이 사회의 그 비열한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남기에 바등거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와 함께 바리케이이드도 짱돌도 들지 못하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일 뿐입니다.

제 20대의 오롯한 10년을 저는 선생의 독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제 삶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비참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을 읽는다는 것의 결과였던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선생께는 죄스러운 것이지만, 선생이 부르짖던 좌파적 심성들에 공감하고, 그렇게 살고자 했지만, 지금의 제 현실, 우리 현실은 그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제 20대의 10년을 선생을 알지 않았더라면, 선생을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어땠을까? 지금의 제 삶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까? 이 사회가 한결 좋게 여겼을까? 삶에 희망이 있었을까? 저는 그랬을 것이었다고 봅니다. 선생을 알지 못했고, 선생의 사유들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제 20대의 10년을 타인을 이기기 위해 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고, 사회의 경쟁 속에서 보다 가열차게 싸워 이겼을 것이고, 경제적 부를 꿈꾸고, 이 나라 이 민족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언젠가 나도 부자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박노자 선생을 알고, 선생의 사유에 지극히 공감하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빛과 희망도 이 사회에서는, 지금의 제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모든 국민이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신자유주의라는 무자비한 메커니즘에 갇혀 인간이 인간을 밟고 뭉개야 하며, 내 민족, 내 나라만이 제일이고, 타인을 배제하는 이 사회에서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아니 어떻게라도 살아남는 다는 것은, 정말 생각할 수록 무서운 것이기만 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라는 공자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누군가는 패배주의자의 자기 변명이라고 욕하겠지만, 적어도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대로라면, 제게는 지금의 이 패배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선생을 통해 이 사회의 배반적 역사, 국가와 제국주의의 폭력,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무한경쟁,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척, 권위주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구속 등이 얼마나 뿌리 깊고 굳건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저는 누구 못지 않게 분노하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령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부가 검은 청년들을 노르웨이 오슬로 시의 캄캄한 길거리에서 갑자기 만날 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겁'을 느낀다. 이것을 인터넷 일기에서 솔직히 '고백(?)'할 때 무의식 속에 내재돼 있는 '나'의 인종적 편견을 스스로에게 알려 '자정'을 다짐함으로써 나름의 반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읽은 독자들이 '아, 나에게도 그러한 부분이 있구나!'라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같은 반성의 길로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순기능이 아닐까?(7쪽)



도대체 저는 얼마나 고백하고, 자정을 다짐하며, 반성해야 할까요? 선생이 줄곧 비판해 온 그것들을 제 몸이 무비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때마다 반성은 한다지만, 또 반복하는 저를 봅니다. 선생의 독자로 10년을 살아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마다 뼈아프게 아파하고, 치를 떨며 분노하고, 이 사회의 그 모든 악을 몰아낼 듯한 의분을 갖지만, 거기까지 뿐입니다. 선생은 고백하고, 자정하며, 반성하는 '소통'을 말하지만, 그러한 소통을 통해 변화와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왜 저는 그러하지 못 하는 걸까요?

솔직히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겹습니다. 더 솔직히는 잘 살고 싶습니다. 남보다 더 부유하고, 건강하며, 풍족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남을 이기고, 그들 위에 홀로 우뚝 서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이 사회가 요하는 어떤 능력도 힘도 소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허황된 이 사회 지배층들의 교묘한 술법임을 알게 되었고, 머리속에서나마 함께 공존하고, 남을 존중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해 함께 연대하고, 사회 곳곳의 그 악한 이데올로기에 맞서 부르짖고,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지금은 무척 괴롭고 아픕니다.

선생이 꿈꾸는 "'나'와 '타자' 사이에서 지위와 돈, '국민에의 소속' 여부 등의 매개가 없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적 사회"를 선생의 독자로 살아오면서 저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좌파라 욕하고, 빨갱이라 낙인 찍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가까운 친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런 저의 생각과 사상을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선생도 느끼듯이 이것은 "우리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선생께 한탄하고 울부짖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이명박 씨가 취임하면서 말한 바는, 기업이 잘 되는 나라, 경쟁력 있는 나라,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명박처럼 성공의 신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향후 5년의 절망을 상상했습니다. 제가 너무 지나친 것입니까? 어쩌면 선생도 저와 같은 절망을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현실에서 저는, 그리고 선생은, 나아가 선생께 공감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앞으로도 선생의 글을 꾸준히 읽어간다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해답만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인 줄 알지만, 얼마나 더 그 답을 찾고자 괴로워 할 수 있을지 저 스스로도 저를 믿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워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지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계시지만, 선생이 계시는 곳은 먼 하늘 너머 노르웨이의 오슬로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춘향전의 아름다움보다 이 나라 이 땅의 잔인하고 참혹하며, 무자비한, 폭력적 현실들을 더 많이 알게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춘향전의 나라가 그리우십니까?


글쎄, 아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 '나리님'들에게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이념문제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실존적 문제이다. 물론 이용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해, 국내 대학들이 학생과 교직원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자율적인 공공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작은 왕국'들이 민주공화제가 되기 전까진 거기에서 녹봉을 받아 먹고살긴 싫다. 물론 어느 날 향수가 하도 깊어져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훌쩍 한국으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데도 없을 테니 다 실체 없는 공상인 듯도 싶다. 어쨌든 '나리님'이 영접받는 광경을 목도한 그때 그 순간은 내겐 절망의 순간이었다.(34쪽)



지금까지 선생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선생의 그런 절망의 순간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구태여 태어난 나라를 뒤로 하고, 집도 절도 없는 이 나라의 국적을 갖은 것은 왜인지 묻고 싶습니다. 애써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것만 알고, 행복하게 사실 수는 없으셨던 건가요? 10년의 독자에게 선생은 선생의 그런 절망만을 얘기해야 했던 것입니까? 누군가는 선생을 일러 독설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을 외부인으로 치부하고 내 나라, 내 조국만을 감싸고 돌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기에, 선생의 그런 독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선생을 '경계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 그러합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선생을 그 경계 내부로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부로 들어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들도 선생이 있는 그 경계로 나오라고 말이죠. '나'와 '타인'의 그 경계에 설 때, 우리 사회는 선생이 꿈꾸는 그 이상적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가운데는 그 경계에 설 것을 상상하지만, 내부에 있는 제 무거운 몸은 한 발걸음도 경계쪽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네킹'이 되고 '로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끔찍한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개인 대다수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마네킹'에 더 가깝다. 무슨 제복이나 장교복, 귀족복을 입히면 입힌 대로 그 모델이 되는 것이다. 외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없어지고 외부의 '표준' 욕망들이 그대로 내면에서 복제되고 만다. SF 영화에서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형 인간'의 비율이 꽤나 높다. 더 끔찍한 문제는 그들을 프로그램하는 자들도 '로봇'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40~41쪽)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 편지를 그냥 접겠습니다. 괜히 한탄만 하고 말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더이상을 말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선생의 '만감'을 화두로 삼아 되새겨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1년 후, 5년 후, 아니 10년 후면, 또 이런 한탄만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내일 또다시 오늘 말하지 못한 남은 속내를 참지 못하고 토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꾸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그만 그쳐야 되겠습니다. 선생께 이 마치지 못한 편지가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편지가 선생께 일말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입니다. 이국의 먼 하늘 아래 오슬로에서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8년 2월 25일 자정에
선생의 10년 독자 올림.

(이 편지가 공교롭게도 내 100번째 리뷰가 됐다. 그런데 이것은 공교로운 것만은 아니다. "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렇게 100권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 한 나에게도 일말의 "스스로 깨우침"의 그 경지에 살짝 턱이라도 걸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100번째 리뷰를 쓰면서, 그 백편이 주는 '義自見'을 생각하자니, 이 100번째의 자리에 무언가 뜻과 의미를 두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었던 것이고, 오래 묵혀두다가 이렇게 100에 맞춰 리뷰, 아니 편지를 썼다. 100번째 리뷰가 다 쓰지 못한 편지가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조금이나마 내 삶에서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 것은 바로 박노자였다. 그러하기에 이 100번째가 박노자의 차지가 되기에 마땅했던 것이다. 아무튼, 박노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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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8-02-26 공감(7) 댓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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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국인으로 인정한다. 탕 탕 탕!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는 전생에 이 땅과 깊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많은 사람들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는 이 땅에 머물고 싶지만 "북방의 먼 땅에서 매일 밤 한국의 산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향수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 백기투항할 생각은 없다"고 그 먼 곳에서 지내고 있다.

그 먼 곳에 있지만 그의 푸른 시선은 늘 여기를 향하고 있다. 그런 그가 꿈꾸는 세상은 아니더라도 그가 머물 곳이 없다는 건 이 땅의 큰 부끄러움이다. 그는 언젠가는 여기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그래, 한국인으로 인정한다. 탕 탕 탕!"

누구나 그렇겠지만,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는 늘 크다. 돈을 주고 본다고 그 재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니 100퍼센트 동의하면 싫어할 것이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는 넘쳐난다. 우리가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채하는 많은 일들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읽는 사람도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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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보(드)는곤 2008-01-18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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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일기도 예술일세





이건 전에도 했던 얘긴데, 어떤 사람이 사업이 잘 안되어 자살을 하려다 막무가내로 춘천에 사는 모 소설가를 찾아갔다. 그는 소설가를 붙잡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얘기를 했고, “이 사람 안도와주면 진짜 죽겠구나” 싶었던 소설가는 버리려고 창고에 놔둔 원고뭉치를 그와 함께 뒤졌단다. 그 원고는 결국 ‘말더xxx xxxx'이란 제목으로 출간이 됐고, 그 책은 상당한 부수의 판매고를 올려 그 남자의 목숨을 살렸다. 남자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소설가는 상당 기간 동안 그의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소설가의 기대에 걸맞게 사장이 된 남자는 제법 좋은 책들을 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거다. 나같은 사람이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좋은 책이 나오기 힘들지만, 소설가는 버리려고 구겨둔 원고뭉치를 모아도 양서가 된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으면서 그 소설가의 일화를 떠올린 이유는, 박노자 선생이 블로그에 썼던 일기가 훌륭한 책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보통 일기 하면 날 괴롭힌 사람에 대해 뒷담화를 하거나, 직접 말하지 못할 타인에 대한 감정을 써내려간다든지 하는 식이 될 텐데, 어찌된 게 이 책은 일기가 아닌 칼럼 모음집 같다. 그의 주장을 익히 들어왔기에 특별히 새롭다 이런 건 없을지 몰라도, 정신을 좋게 만들어 주는 약은 자주 먹는다고 해로울 건 아니다 싶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발하고, 나 또한 그 가해자의 위치에서 자유로울 게 없기에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자꾸 읽다보니 화끈거림의 정도가 엷어지고,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진다. 이런 것도 면역이 생기는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유부남이 돼서 좀 뻔뻔해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되었건 나이가 들수록 바르게 사는 건 어려워지는 것 같다. 젊은 학생들이 이런 책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학교 과제로 읽으라는 책도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읽고 그러는 요즘 학생들이 이 책을 사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알라딘의 세일즈 포인트를 보니 14,016,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지만 재테크의 비밀을 다룬 책이 35,000을 넘는 걸 보면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헷갈리기 시작한 사실 하나. 방효유라는 중국 선비가 왕위를 찬탈한 연왕에게 협조를 거부하다 그의 일가친척 847명이 옥사를 했다. 내가 배운대로라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행위일 수 있겠지만, 박노자의 말은 다르다. “지배계급의 정통성 논리로야 찬탈이냐 정통 계승이냐가 중요하겠지만 농민의 입장에서는 세곡을 거두는 게 누구인가가 별 상관이 있을까?... 아이들을 포함한 847명의 목숨이 희생되도록 왕고집을 부린 걸 보면 그 양반이 고집불통이거나.. 허영의 위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169-170쪽)]



그러니까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했던 사육신을 우리가 받들어 모시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누가 왕이든 그게 뭐 중요하냐는 거다. 전혀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논리라면 군사독재에 협력하는 것도 용납이 되는데, 이거이거 내가 박노자의 글을 잘못 읽은 건지 심히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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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8-06-03 공감(3)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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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도 국적을 따지는 나라




"에이, 이 더러운 나라. 이민이나 가야겠다"라는 소리를 낸 이, "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욕해. 더러우면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이가 일치하는 나라. '다문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하자면서도, 인터넷에서 국가 우열 순위를 매기며 한국과 동남아시아가 비슷한 레벨이라는 의견에, "어떻게 우리나라를 동남아시아 따위"에 비교할 수 있냐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우리는 이 나라를 괄호나 물음표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노자의 책을 읽으면 늘 그렇듯이, 괄호나 물음표 안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집어넣게 된다.

"어떻게 네가 '한국인'이냐, '귀화인'이라고 말해야지"라는 책 속 에피소드가 말해주듯이, 어쩌면 우리는 박노자의 한국 비평을, '경계인'이라는 차원에서 소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박노자는 실제로 법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인이 되었고, 우리는 이 '되었고'의 차원을 의식하면서, 그를 '타자'로 위치시킨 채, 그의 비평에 뜨끔하는지 모른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그를 상징하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박노자는 '한국인'이지만, '비-한국인'이라는 상징성을 옆에 둔 채, 존재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 묘한 구분의 심리는 따가움을 느끼고 싶은 비평의 참 맛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박노자 개인을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위치 안에서 바라보려는 심리 또한 강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국가가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지 새삼 돌아보게 되고, 그 경계 짓기에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치거나, 아니면 내면 속에서 '과감하게' 그 '경계 짓기' 에 동참함으로써 비평 속 따가운 맛을 받아들이되, 여전히 너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까주거라"고 하는 이상한 '주인의 심리' 또한 이 연약한 자아는 드러내고 만다.

'주인의 심리'라는 이 위험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주인됨'은 마치 (한국이란 나라를) '중국- 일본- 러시아' 가 둘러싼 한반도라는 영토 안에서 나는 태어난 사람이며, '한국적인 것'이라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역사라는 학습 효과를 통해 '한국인 됨'을 가졌다고 인식하는 나를 둘러싼 존재 증명이리라 그러나 이 존재 증명은 다들 알다시피 매우 불안한 것이며, 확언할 수 없다고 본다. 고로 이 '주인됨'에서 오는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딱 듣고 싶은 만큼의 비판, 듣고 싶은 만큼의 성찰에 머무를 것을 무의식적으로 주문해 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노자를 존경하는 것은, 그는 바로 이런 나의 '주인됨'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는 점,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따가운' 비평어들을 과감히 끄집어 내어 그 '날 것'의 효용을 체험하라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박노자의 만감 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국민의 이중구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국가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당연히 받아들이면서, 그 책임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서도,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사태와 사건들에 때로는 그 개인의 책임의식을 '희생양'을 삼을만한 대리적 존재에 맡긴 채, '근거없는' 사회에 대한 힐난을 일삼기. 때론 그 힐난을 무마하기 위해, '국가적 쾌락'을 내면화한 '스펙타클한' 국가적 카니발리즘에 자신의 육체를 던지고, 그것을 긍정의 힘에 맡기기.

우린 이런 지적을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 지적을 이성과 논리로 받아들이려는 경우는 적었다. 그 지적을 '외국인/ 한국인'으로 구분하면서, 비판의 자격을 따지는 게 더 일상화된 것은 아닌가."아무리 그래도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비판하는 거 좀 그렇지 않나요?"라고 심정적 동의를 구하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곳의 부정성을 '합리화'하려는 것에 우리는 더 친숙하지 않은가.

재범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주문을 쉼없이 외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야! 네가 뭔데 우리나라(에서 돈 잘 벌면 되었지. 우리 그릇이나 빼앗는 주제에) 함부로 말해!" 사실 여기서 '우리나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정작 우리의 입술에서 '우리 그릇이나 빼앗는 주제'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독촉한다.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생기는 사태들에 대하여, 우리는 이 '정념의 상품'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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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0-2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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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처럼.





내게는 요즘 ‘소통’이 화두다.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나와 소통하고 싶다.



그런데 소통할 사람을 만나기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그들의 매너리즘에, 베낀 듯한 사유에 질린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과 그가 쓴 글의 거리에 놀라고, 세상을 바꾸는 그 현장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게으른 사유에 기가 막힌다. 게다가 내가 가족이나, 조직을 안전망으로 선택하지 않은 인간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가족문화와 조직문화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어서 늘 겉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번도 고백한 적이 없지만 사실, 나는 좀 외롭다.


박노자의 글은 내 삶에 위로가 된다. 그의 고독과 낯설음이 내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는 위로. 그와 같이 자기 사유에 성실한 사람도 늘 회의하고 방황하는데, 난들 어떠랴, 라는 위로. 나와 같이 이렇게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위로...



이번에 본 그의 글은 특히나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



늘 자신의 의견을 꼿꼿하게 피력하던 친구의 아픈 속내를 들여다본 듯한 느낌.



나와 비슷한 연배인 그에게 나도 위로 한마디 건네고 싶다.



“당신 덕에 늘 이렇게 다시 기운 차리는 사람도 있으니, 당신도 씩씩하게 사세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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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나무 2008-01-29 공감(2)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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