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3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알라딘: 내가 본 함석헌



내가 본 함석헌

김용준 (지은이) | 아카넷 | 200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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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탄생 105주년을 맞이하여 원로 지성인 김용준 교수가 함석헌의 생애를 회고한 전기가 출간되었다. 1949년 첫만남 이후 1989년 함석헌이 타계하기까지 함께한 지은이는 전공인 유기화학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함석헌에게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사상적 동지이자 함석헌 생애의 완벽한 증인 중 한 명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함석헌의 생애 후반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그의 사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은 크게 세 줄기로 진행된다. 첫째가 지은이가 함석헌과 활동하며 다방면으로 영향을 받은 경험들을 돌아보고, 둘째로는 각종 문헌 인용을 통해 함석헌의 원숙한 사상이 본격적으로 구현되어가는 과정과 국면을 그려낸다. 또한 셋째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4.19 혁명과 민주화 운동 등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을 충실히 병행하여, 궁극적으로는 함석헌의 생애, 함석헌과 함께한 지은이의 삶, 그리고 이들 생애의 기저가 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종합적인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함석헌의 소박한 일상과 함께 그 사상의 근간과 형성과정, 씨알(민중)을 향한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알기 쉽게 전달해 준다. 자아에 대한 내적 성찰을 통해 사회 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함석헌의 외침은 정치, 사회적 혼돈의 시대에 우리 세대가 이어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임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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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풋내기 스무 살에 만난 빛의 메시지

전후(戰後)에 찾은 고향

역사는 예언이다

좁은 화학실에서의 재회

교사에서 이등병으로

가슴에 품은 잃어버린 편지

무한한 기다림의 삶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대학으로

서울대 조교 시절, 장자를 만나다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과의 인연

함석헌 선생과 류영모 선생의 닮은 삶

다석을 통해 생의 도약을 꿈꾸다

오산학교,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중운동

씨? 농장에 얽힌 사연

서릿발 선 글들로 옥고를 치르다

논쟁 속에서 깊어진 무교회 정신의 두 기둥

1960년, 부활의 호읍(號泣) 속에서 만난 예언자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내에게 바친 통한의 눈물

5?16의 운명을 예견한 예언자의 새벽 목소리

《사상계》와의 인연

워싱턴에서의 강연, 그리고 풍문

워싱턴에서 함께 보낸 날들, 마음을 엿보다

‘김형’이란 호칭, 그 속에 담긴 큰 인간의 체취

장준하, 씨?의 목소리로 정권 꾸짖다

함석헌, 마침내 장준하와 의기투합하다

공화당 정부를 향한 선전포고

불꽃 튀는 싸움과 화학자의 길

『돌벼개』를 선물받은 1970년 겨울

나이 일흔에 《씨?의 소리》를 낸 까닭은?

발 묶인 잡지, 복간호의 풍경들

7?4 공동성명 발표하던 겨울 무렵

KSCF 활동 때의 어떤 기억과 민청학련 주변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는가

1973년 4월, ‘아이레노 포이오이’의 봄

“어서 가거라!”, 눈물로 쓴 사모곡(思母曲)

긴급조치 시대, ‘남산’에서 장준하를 보다

다시 읽는 《금지된 씨?의 소리》

민청학련과 나의 출국금지

거기 씨?이 서 있습니다

1974년 겨울, 5년 뒤를 예언한 송년가

시 아닌 시를 쓰는 시인

‘건강상’의 이유로 해직된 사연

아, 나는 장준하를 위해 울 수 없습니다

자아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있다

긴급조치와 3?1 민주구국선언

참종교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늙은 지아비가 부르는 회한의 사부곡(思婦曲)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만화 같은 세월 속에 맞은 두 번째 해직

다스리는 데 아낌만 한 것이 없다

최후 승리가 아니라 절대 승리다

노끈의 역사에서 너와 내가 따로 있으랴

생명은 귀하다, 정신은 죽지 않는다

역사도 인생도 다 내 속에 있다

수상한 시절, 장자와 함께 노닐다

고난의 의미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 마는 그 일

복간에 이르는 어려운 과정

영원한 믿음의 구도자 잠들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갈매기가 흘린 것 먹고사는 바보새

새롭게 부활하는 생명의 힘

발행인의 편지 :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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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은 전체요 또 부분이다. 하나님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지만 그저 큰 알 속에 작은 알이 있고 작은 알 속에 큰 알이 있는 것이니라. 아니다. 크고 작음이 없느니라. 그저 알일 따름이다. 앞에는 안이 있고 밖에 안이 있다. 밖의 밖이 안이요, 안의 안이 밖이다. 전체, 밖을 그리면 ○이요, 하나, 속을 그리면 ·이다(전집 14:341)."



선생님이 '씨알의 소리' 창간호(1974년 4월 호)에 쓴 '씨알의 울음'이라는 장시(長詩)의 한 부분이다. 이상의 두 인용문에서 독자들은 '씨알'이라는 말의 유래와 '씨알'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과학자인 나로서는 이 장시 중에서 "과학의 시대는 씨알의 시대, 씨알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트고 입을 열게 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알은 과학으로 말한다."라는 구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과학관에서 오늘의 과학철학의 편모를 엿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본문 19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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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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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작 :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내가 본 함석헌>,<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대학교에서 유기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 및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갈릴레오의 고민』, 『내가 본 함석헌』, 『사람의 과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 『부분과 전체』, 『인간을 묻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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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의 한 마디

지금 함석헌 선생에 대한 글을 남긴다는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함 선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특히 자기를 찾는 노력, 역사의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함 선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함석헌과 한국교회>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 뉴시안

<함석헌과 한국교회>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


<함석헌과 한국교회> 함석헌 오모여인과 동침…자신의 죄 고백(19)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1
박신애 기자 | sisazum@sisazu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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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죄는 참말로는 없다던 함석헌이 이제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떻게 된 일인가? 우선 그가 1960년 9월 30일에 독일에 있는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18-23)를 읽어보자.

“안 형, 편지 받았습니다. 멀리 계신 형께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때 가서는 해야 하지만, 그래도 본국에 돌아오시기나 한 다음 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래서 지난 봄 이래 편지 아니 드렸었는데, 이렇게 자꾸 형께로부터 글을 받으니 회답은 해야 하고, 회답을 하게 되니 이 이상 더 속이고 있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만 들어두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유(영모) 선생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여성문제에서 잘못을 했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가? 이 사람은 이말 하고 저 사람은 저말 하지마는 김용준 교수가 <내가 본 함석헌>에서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내용일 것이다.


함석헌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천안에서 ‘씨알의 농장’을 경영한 일이 있는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이 자진하여 이 농장에 와서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고 있다가 함석헌과 동침을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자기의 은사인 김석묵 교수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 초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고난의 세월을 지나가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당시 심정을 잘 읽을 수 있다.

“미국을 간다 한 것도 이래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낡은 나를 완전히 장사지내고 새로 나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 그러니 외국 간다 하여도 신이 나는 것도 아니요 한낱 연옥(煉獄)걸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가)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잘못했으나 이 이상 더는 할 수 없으니 안면으로 친구 노릇을 할 수는 없고, 정말 용서를 하신다면 친구관계를 계속하지만 만일 형의 마음에 그리 못된다면 차라리 교통 아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시오. 아아!”

이 편지에서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라는 구절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웠을 때 그를 찾아온 이윤구 박사의 권유를 받아드려 퀘이커가 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는 세계적인 퀘이커 지도자가 된다. 1979년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에서, 그리고 1985년에는 세계 퀘이커회에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받는다.

이 편지뿐만 아니고 1960년대 초에 쓴 그의 글들은 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인하여 일어난 그의 처절한 회한과 새로운 다짐으로 가득 차있다. 일례로 1960년 겨울에 그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16-211)를 번역했는데, 그 서문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울부짖으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 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온 모래 탑은 와르르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 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 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고 갔는지 손뼉 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들은 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그동안 왔대야, 무한의 장변을 헤매어 다니는 거지들이 세상모르고 와서 저희보다 더한 나보고 도와 달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도 도둑질을 해먹는 것들이 와서 그나마 같은 내 누더기 속에서 뽑아간 것이 있고, 그 남은 모래탑 자국을 다시 한 번 더 짓밟고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낯에 또 한 번 침을 뱉고 간 것뿐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날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지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
그러다가 그는 7년 전에 읽었던 <예언자>를 다시 읽고 그 안에서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시를 만난다. 지브란은 이 시에서 “악인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뿐이니라”고 노래한다. 드디어 그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노래한다.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의 심장의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 - Wikipedia

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 - Wikipedia



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

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
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JPG
国公私立の別私立学校
設置者学校法人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
校訓本校に学ぶ者は、聖書を真剣に学び、真理を探究しようとする態度をもつ。
本校に学ぶ者は、酒を飲まない、タバコを吸わない、うそをつかない。
本校に学ぶ者は、作業や当番を誠実に果たし、学校や寮の約束ごとを守る。 
設立年月日1988年
創立者高橋三郎
共学・別学男女共学
課程全日制課程
単位制・学年制学年制
設置学科普通科
学期2学期制
高校コード32513K
所在地695-0002
島根県江津市浅利町1826-1
外部リンク公式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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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キリストきょうあいしんこうとうがっこう)は島根県江津市にある私立の全日制普通科・全寮制・男女共学の高等学校無教会主義系列で、キリスト教学校教育同盟の加盟校である。1988年開校。

概要[編集]

1985年、内村鑑三の弟子である、高橋三郎が「人は何のために生きるのか」という、人間の根本問題を教育の中心とした学校の設立を提唱したのが始まり。
少人数・全寮制により、平和を愛する国際的精神を備えた人間形成をめざして、聖書に基づく全人教育を行っている[1]

沿革[編集]

  • 1988年
  • 1989年
    • 3月 第1回愛真アートフェスティバル(文化祭)、第3回からは9月に実施している
  • 1991年
    • 4月 西田潔、第2代校長に就任
    • 6月 キリスト教学校教育同盟に加盟
  • 1993年4月 三宅登、第2代理事長に就任
  • 1995年4月 風間文子、第3代校長に就任
  • 1997年10月 創立10周年記念礼拝、プルム農業高等技術学校(韓国)と姉妹校締結
  • 1999年1月 創立10周年記念事業として特別教室棟(普通教室2室、視聴覚教室)、新グラウンド竣工
  • 2001年4月 渡邊信雄、第4代校長に就任
  • 2006年4月 佐藤全弘、第3代理事長に就任
  • 2009年4月 安昌美、第5代校長に就任
  • 2010年6月 創立責任者高橋三郎召天
  • 2012年
    • 8月 創立25周年記念事業として男子寮、女子寮、内装リフォーム
    • 10月 第1回ホームカミングデイ

教育[編集]

教育方針[編集]

少人数教育を行っており、詰め込み教育ではなく、自らが関心を持って取り組むことを求めている[3]。 校内への携帯電話および漫画・雑誌の持ち込みは禁止されている。[4]

作業[編集]

「自分たちの生活は自分たちの手で整える」という方針により、週2回作業の時間があり、養鶏班、製パン班、菜園班、園芸班、リサイクル班、修繕班、水田山林班、保存食品班に分かれて、それぞれの作業を行う。また、朝昼晩の食事すべてを、生徒が用意する[5]

礼拝[編集]

朝夕に礼拝が行われており、朝拝は教員が、夕拝は生徒が輪番制で礼拝を行う[6]

平和学習[編集]

韓国研修旅行と慰安婦問題への取り組み[編集]

上記の平和学習のほか、毎年春休みに希望者を募り、日本統治時代のことを学んだり、ナヌムの家を訪問して元慰安婦の話を聞いたり、板門店を見学したりする韓国への研修旅行も実施している[9][10]
挺対協初代代表で韓国梨花女子大学英文科名誉教授の尹貞玉が愛真高校を訪問し、交流を行っている[11]

芸術活動[編集]

隔週土曜には、必修クラブにあたる「全校活動」が行われており、陶芸や、美術、茶道などがある。また、音楽の授業にも力を入れており、特に合唱に力を入れている[12]

行事[編集]

AAF(Aishin Art Festival)[編集]

文化祭。二日間にかけて開催される。毎年、各学年でのクラス劇や、ミニライブが行われる。

大山登山[編集]

一年生全員で、鳥取県の大山の麓で一泊二日し、大山に登る。

クリスマス礼拝・祝会[編集]

クリスマス礼拝では、外部の方をお呼びして、礼拝を行う。 祝会では、歌や劇を、食事とともに楽しむ。 夜には、キャンドルサービスを行う。

卒業音楽会・感話会[編集]

卒業式前日には、卒業生を歌で送る会として、卒業音楽会が行われる。 感話会では、3年間で感じたことを、伝える。

姉妹校[編集]

出身著名人[編集]

関連書籍[編集]

参考文献[編集]

  • 関千枝子『長い坂―現代女人列伝』影書房 1989年
  • 無教会史研究会『無教会史 第四期 連帯の時代』教文館 2002年

出典[編集]

^建学の精神”. 同校HP. 2015年9月20日閲覧。
^ 関千枝子『長い坂―現代女人列伝』影書房 1989年
^学習指導”. 同校HP. 2015年9月20日閲覧。
^ [1]
^作業・調理”. 同校HP. 2015年9月20日閲覧。
^礼拝”. 同校HP. 2015年9月20日閲覧。
^ a b c平和学習”. 同校HP. 2015年9月20日閲覧。
^ “荒らされた辺野古テント 全国から支援続々”. 琉球新報. (2014年6月25日)
^ 茨木のり子/金裕鴻『言葉が通じてこそ、友だちになれる: 韓国語を学んで』筑摩書房 2004年
^ 現場を見る 話を聞 く - 全寮制高校・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 (PDF)
^ 女性・戦争・人権学会学会誌編集委員会『女性・戦争・人権 (第6号)』 行路社 2004年
^芸術活動”. 同校HP. 2015年9月20日閲覧。
^ シールズ奥田さん大学院進学へ 「民主主義って何だ」追い求め 北海道新聞 2016年3月20日


関連項目[編集]
島根県高等学校一覧
寮がある日本の中学校・高等学校の一覧



外部リンク[編集]
キリスト教愛真高等学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