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1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2009년 12월 15일 김조년 드림

늙은 전사의 노래 권총이야기 |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12/20/일/15;00 - Daum 카페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12/20/일/15;00|퀘이커이야기
권술룡|조회 98|추천 0|
2009.12.31. 09:02
http://cafe.daum.net/kwonsay/H7Jy/18

<고백>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12/20/일/15;00


대전퀘이커 공부모임이 5주년이 되는 날,
이제 '공부'를 떼고 정식으로 <대전 퀘이커 모임>으로 출범 합니다,
그간 참여하셨거나 애정과 관심을 가지신 친우들...그리고 서울모임에서
그리고 대구의 시작모임에서도 와 주셔서 모두 40여명이나 모여
작은 잔치 자리에 함께 하였지요,

이중 몆분은 퀘이커로 살기로 하였고
350여년의 퀘이커 역사에 전세계에 겨우 40만의 소수의 무리들,
세계평화운동의 핵심에는 늘 한줌밖에 않되는 퀘이커가...
그리고 고난속에 있었지요,

이날 6,25전란 직후인 60전 한국에 첫 퀘이커를 시작하여 그후
함석헌선생님이 참여한 이행우(80여세)선생님이 카나다에서,
그리고 대전퀘이커 공부모임을 처음 열게 시작해준 박성준선생과
매월 서울서 와주신 오철근선생등,,
그리고 독일에서 퀘이커가 되어 돌아와 이끌어 온 김조년/이종희님1
모두가 한결같은 모습들이 였지요,
40명가까운 이들의 소중한 시간이 엿지요,

서울모임 60년...5년준비한 <대전모임> 그리고 시작된 <대구공부모임>으로 3개 모임으로
<년회>가 때가오면 앞으로 가능해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회운동의 직임들을 모두 내려놓고 서울 삼청동에서 <길담서원>을 어렵게 꾸려가시는

박성준선생은
'한반도 중심인 대전에서 5년이나 기다리며 준비한 이 모임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그리고
영성을 키우는 큰 역활을 할것이라!" 고 <대전퀘이커 모임>의 출범의 의미를 부여, 격려했다,

<세계기독교 고전 20선>중에 한권인 <퀘이커>창립자 <조지 폭스의 일기>를
함께 읽어가는 동안 옷깃을 여미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의 생애내내 태산같은 파도와 맛서서 끊임없이 시대의 불의와 어둠, 열악한 감옥과
죽음의 위험, 테러와 고난에 찬 비 타협의 전도순레의 생애는 <퀘이커>이름 그대로 몸을 떨게 합니다,
사람의 영혼과 정신과 의기가 이렇게 높을수도 있구나! 하는 떨림이 였습니다,


소수의 작은 무리가 얼마나 높은 이상과 결기로 세상의 태풍의 눈으로 평화의 진군나팔수가 될수있기를! 소망하며 어떻게 키울것인가?!

어떻게 大鵬위 높고 깊은 뜻으로
세상을 다 가진것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움으로...
느림과 태풍같은 행동으로 태산같이... 깃털같음으로...
불의의 시대를 꿰뚫어 나갈수 있기를 !,
'너의 삶으로 이야기 하라!"고 할수있기를 !,

일시; 12/20/일/15;00부터
장소; 대전,동구 용전동 (한남대뒤) 한숲아파트 112동 1902호 <한숲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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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존경하는 친우님께,

우리가 2004년 12월 퀘이커 공부모임을 시작한 지 꼭 5년이 지났습니다. 모두가 다 이 짧지 않은 기간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때때로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만나면 좋았고 또 궁금하여 기다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해 말부터 정식 퀘이커모임으로 출발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 또 한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여러 친우님들에게 퀘이커모임으로 출발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부’라는 말을 떼고, ‘퀘이커모임’으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언제나 함께 했던 친우님께서 이 때 같이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다수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에 가입하는 절차를 통하여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본인이 직접 함께 퀘이커 신앙정신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을 표현하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내가 퀘이커로 살 수 있을까’, ‘그만큼 성숙되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정된 퀘이커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동의 신앙고백을 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과 삶은 자라는 것이기에 그렇게 살아보자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 믿습니다. 어린아이가 사람으로 갓 태어나서 성숙된 사람으로 자라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하면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약속이요 진리를 찾아나가는 공동의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조직과 이름 없이도 살고 일을 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최소한의 그러한 틀을 가지고 가는 것이 필요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틀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일단 함께 시작하겠다는 뜻을 저에게 주시면, 그날 같이 출발하는 사람들의 명단에 넣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미처 맘을 정하지 못한 친우님들이 부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부담 없이 전과 꼭같이 모이고 즐기고 감동하고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다만, 개미들이 이사할 대 앞에 가는 개미와 맨 뒤에 가는 개미도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다 한 개미군단에 속해서 한 길을 가는 무리들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잡아 보았습니다.

12월 20일 오후
15시: 고요예배
16시: 이러저러한 이야기 꽃
17시: 먹을거리 함께 나눔: 한밭레츠 두루부엌에 주문
18시: 우리끼리 하는 즐거운 마당; 음악, 춤, 기타

* 자기 악기를 하나 가지고 오셔서 연주하면 참 좋겠습니다.
언제나처럼 건강하시고 평화롭기를 빕니다.

2009년 12월 15일 김조년 드림

[박상익]무교회 기독교 신앙과 나

[박상익]무교회 기독교 신앙과 나


[박상익]무교회 기독교 신앙과 나

[박상익]무교회 기독교 신앙과 나



박상익 2000.03.27 11:30

평화와 영성 /박성준 20020909

평화와 영성 /박성준 20020909





박성준 (24)목록보기|요약보기|펼쳐보기



마리산인 2008.02.20 09:08 http://blog.daum.net/jebinae/9329205





<2002 아셈 민간포럼 종교영성분과 국내워크숍> 2002년 9월 9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기조발제문









평화와 영성

-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대응하는 평화의 영성과 종교의 역할 -

                                             



                      박성준 박사

(움직이는 학교 대표/성공회대겸임교수, 평화학)





오늘의 세계



냉전이 끝나자 세계 도처에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민족(ethnic: 정치적 단위인 nation과는 달리 ethnic은 어느 특정한 역사적 기억, 문화, 종교 등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집단)문제이거나 문화적 또는 종교적 문제였다. 그러나 한편 이런 문제의 사회적 원인을 함께 보지 않으면 문제의 본질을 놓지기 쉽다.



보스니아와 코소보 사태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냉전체제의 해체와 동시에 전지구적 규모로 전개된 [글로벌리제이션]의 반작용(reactions)으로 나타난 [중심부와 주변부의 분극화], [의미를 박탈당한 세계] 곧 [가치관의 혼미](Identity Crisis) {과거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사회 시스템(자본주의 vs. 공산주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돈에 의해서(위해서)만 움직일 뿐. 그 결과 사회성, 公共性이 쇠퇴하고 정체성의 위기가 도래. 아이덴티티 확인을 위해 민족의식과 종교의식으로 회귀} 특히 보스니아 내전의 경우를 보면,  티토의 시대에는 통합의 이데올로기(유고식 사회주의)가 있었는데 1980년 그의 사망 후 국민통합의 근거상실, 시장경제 도입, 경제악화, IMF 체제에 의존, 멕시코처럼 실패 케이스로 전락, 빈부격차 심화, 국가내부의 인간집단과 ethnic 간의 대립 갈등 격화, 내전과 폭력은 집단적 좌절감, 증오, 복수심 등 사회적 좌절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흔히 21세기적인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9.11 사태는 현재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너무 심각하고 거대해서 그 후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된다.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붙잡아야 한다. 그러한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 사회구조와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즉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온 것이다.

미국의 한 농사꾼이자 평화운동가인 월든 베리(Wendell Berry)씨는 “Thoughts in the Presence of Fear(의역: ‘무너지는 낙관론 - 공포 가운데서 살아가기’)라는 글에서 문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대략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9월11일 사건과 더불어, 기술적/경제적 낙관론이 의문의 여지없이 통하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신세계질서’, ‘신경제’ 운운하면서 마치 우리가 무한정 성장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던 낙관론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런 낙관론을 신봉했던 정치지도자들과 대기업간부들과 투자자들은, 번영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의 극히 일부인 한줌의 부유층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에서조차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번영은 전 세계에 걸친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딛고 서있으며, 그 번영의 생태적 비용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협으로부터 부유층들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발전된’ 나라들은 ‘자유시장’에게 신(god)의 지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은 한편 농민들과 농토와 마을 공동체와 숲과 습지와 평원을, 한마디로 전 생태계를 희생 제물로 삼아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전세계적으로 ‘경제의 비집중화’(economic decentralization), ‘경제정의’, ‘생태적 책임’을 요구하는 부르짖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9월 11일 사건 이후로 그러한 노력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일련의 연속적 기술혁신 조차도 이번에 경험한 더 엄청난 혁신, 즉 새로운 형태의 전쟁(a new kind of war)에 의해 마구 짓밟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치 못했다. 그 새로운 무기, 새 전쟁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기술혁신의 성과를 우리들의 재앙으로 바꾸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무한경쟁 자유무역의 지구경제시스템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부유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과 자기수정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군림해온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행복한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세계적 차원의 힘과 국민의 삶을 조정하는 매개자로서 국가는 초국가적 힘들의 횡포를 완화하고 세계화의 힘이 국민 전체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게 조정해야 한다. 국가는 신자유주의의 수혜자인 부유층에게 공공의식을 부활시키고 경제적 비용 부담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의 전횡을 견제하고 시장의 힘과 논리에 침식당한 시민사회에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부활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력의 결집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치의 힘은 세계적 차원과 국내적 차원에서 동시에 수립되어야 한다. 시장의 세계화에 대응하여 시장논리에만 맡겨둘 수 없는 공동의 문제들 - 시장의 논리가 도외시한 세계적 빈부격차의 해소, 환경 보존, 노동의 권리, 전쟁방지, 군축과 평화, 인권 등의 문제- 을 공론화하는 장으로서 [세계시민사회(global civil society)]가 건재해야 한다. 또한 정치적 경제적 결정에 있어서 소외된 집단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subtantative democracy)]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국적 차원의 시민사회도 발전, 강화되어야 한다. 시민사회운동의 세계적 연대를 강화해서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추진세력들을 규제, 조정하며 시장기구를 조정하여 소외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시민사회의 대항 헤게모니 블록]의 형성이 요망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 변화는 주어진 구조적 여건 속에서 인간의 주체적 선택과 참여에 의해 그 방향과 변화의 내용이 창조되는 것이다.



현재 일방주의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구조를 새로운 종합(synthesis)과 조화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러한 주체적 창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창조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힘의 담지자는 누구인가? 변혁의 수단과 방법은 무엇인가?



NGO 운동과 평화운동의 부분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는 피라밋식 권위주의 체제, 구조, 방법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뿌리 채 흔들어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며 그러한 근본적 변혁의 수단과 방법은 무엇인가?





그 힘과 [영성]은 어떤 관계?



<곳간 정리>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복음 13장 52절)



1) 서남동은 한국민중의 ‘恨’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독특한 기여를 했다. 나는 ‘한’을 민중신학의 핵심 주제로 설정하는 데 대하여 서남동에게 확고한 지지를 보내왔고 그 점에 있어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동학=崔水雲) 또는 ‘내재하는 빛’(the Light within) (퀘이커=George Fox)을 민중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놓는, 그래서 ‘한’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핵심되는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얼개를 구상해 보게 되었다. 민중의 ‘한’이라는 하나의 핵심에 편중되면 역사창조 주체로서의 민중의 생명력(자율성, 자주성, 창조성, 자기 구원의 주체성)이라는 다른 하나의 핵심이 가려지거나 약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중 안에 있는 ‘恨’은 보면서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빛’(=그리스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민중의 일면 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의 언어인 ‘한’을 제시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 안에 있는 ‘빛’을 제시할 차례이다. 민중의 ‘한’과 함께 ‘빛’을 보고 그 상호관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 양자를 민중신학의 중심에 역동적으로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남동의 신학에서 민중의 ‘한’과 ‘고난’이 민중의 ‘메시아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이라는 기독교의 正統 敎義에 있었다. 민중의 메시아성을 이렇게 대속적 능력 쪽으로만 치우쳐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민중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빛과 창조력에도 동시에 주목하면서 그 메시아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첫째로, 함석헌의 민중 이해로부터 ‘씨’을 받아들이되 <ㅇ  ㄹ>의 각 요소를 적극적으로 深化 發展시킨다. 즉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  >는 내재적인 하늘을,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나타낸다고 그가 스스로 설명해 놓은 그 각 項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한층 더 심오하고 풍부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민중의 목마름의 重層구조를 천착하는 것이다.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 곧 민중의 영성은, 예컨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日常의 안전과 편안함, 경제적 안정 등에의 갈망이라는 層位가 있는가 하면, 우정과 고독, 사랑의 아픔과 번뇌,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 등의 層位가 있으며, 영혼의 허기(虛飢),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인격의 성숙과 자기완성에의 갈구, 진실과 진리를 향한 목마름, 질고(疾苦)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등의 층위, 이렇게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



   셋째로, 민중신학은 ‘사건’의 신학을 보완하기 위해 ‘사건’과 ‘日常’을 손의 앞뒤면 처럼 설정하여, 사건과 일상이 갖는 각각의 의미와 함께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올바르게 밝힐 필요가 있다. 민중은 1970년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쇄적으로 분출하는 활화산 기슭에서, 또는 언제 터질지 모르게 꿈틀대는 화산맥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민중은 아마도 더 많은 일상의 시간을 너른 들녘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여름 한철 가뭄에 강바닥으로 스며들어 소리 없는 지하수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땅 속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없다면 장대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샘의 분출은 있을 수 없다. 물이 콸콸 솟는 샘은 실은 땅 속을 흐르는 저류(the underground stream)와 연결되어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sustained) 있는 것이다. 사건과 일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건’의 신학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가 요청된다.



2) 함석헌의 씨 사상

  함석헌은 씨의 은유로 역사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根幹이 되는 사람, 곧 민중을 나타내고자 했다. 민중은 씨이다. 태어난 그저 그대로인 씨, 풀씨 같은 존재. “씨이란 다른 거 아니고 자연이지요. 문명은 결국은 자연에서 멀어져 가는 방향이고(참 문명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니깐 지금은 사람의 큰 잘못이 자연을 잊어버리고 자연에 반항하고 하는 건데, 근본의 절대적인 의지랄까 그게 곧 자연인데, 자연 속에 있는 건데----”(“씨의 소리, 씨의 사상” <씨의 소리> 76년 9월호)



  씨은 이 끝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인 ‘나’이고 저 끝에서 보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결국 민중 곧 씨과 하나님은 이 끝과 저 끝으로 서로 연결된, 둘이 아닌  한 <>이다.

“민중이 뭐냐? 씨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 사람이다. 은 실(實), 참, real이다.............정말 있는 것은, 은, 한  뿐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씨의 설음”, 함석헌 전집 제4권, 66면)

 나아가,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한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불러내느냐가 문제다. 속에는 다 개인의 행위와 역사의 사건으로 영향을 입지 않는, 입힐 수 없는 혼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씨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일할 터를 찾고 일할 거리를 기다린다. 그것을 능히 알아 불러내어 동원하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바다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제4권 129면)

  민중은 자기 속 깊이에 계신 하나님, 그 창조적인 생명과 무한한 힘의 원천에 깊숙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 곧 씨은 자기 속의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  씨 속에, 곧 내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하나님(‘나라’, I am.)을 일깨우고 ‘불러내자.’ 그리하여 하나 하나의 씨은 함께 새 세상을 시대를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3) 퀘이커 사상과 민중신학의 만남

    퀘이커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격동의 시대, 혁명과 변화의 시대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에서는 외적인 종교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국교에 반대하는 침례파와 장로회파의 교회들은 신앙을 성경의 권위나 공식적 신조와 대체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이나 신조에 염증을 느끼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은 개인적 체험의 종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갈구하고 있었다.



  죠오지 폭스(George Fox, 1624-1689)도 그런 사람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구하는 자들’(seekers)이라고 불렀다--중의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했다. 製靴工의 徒弟, 소먹이 목동 등으로 지내는 동안 홀로 고요한 묵상에 잠기는 습관을 익혔고,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에 잠겼으며, 온 피조세계의 오묘하고 미세한 소리에도 예리하게 반응하곤 했다. 열 아홉 살 때에 집과 부모의 곁을 떠나 절절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찾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에 나섰다. 4년간의 영혼을 달구는 숱한 시험과 연단 끝에 Pendle Hill이라는 작은 山頂에서 그는 드디어 진리를 깨닫고 환상(vision)을 보았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성직자들)에게 걸었던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외적으로는 내가 의지할 아무 것도 없게 되었을 때, 내가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는 너의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은 환희작약(歡喜雀躍)하였다. ........ 주님을 향한 나의 갈구,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의 열망은 더욱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Fox, 11)



 그가 얻은 다음과 같은 진리는 재래적이고 인습적인 신조들(creeds)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정수(精髓)다. 우리 각자의 깊은 속에 하나님의 씨앗(the Seed), 하나님의 영(the Spirit), 그리스도(the Christ),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즉 성직자나 교회의 儀式이나 어떤 다른 매개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역사적인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아 (신적인)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계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영속된다는 것(the continuing revelation). 이것이 그의 새로운 깨달음의 내용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 불타오르는 이 깨달음(revelation)을 지니고서, 죠오지 폭스는 세상를 향해서 힘차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돌아섭시다. 자기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러한 (즉 하나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갑시다.”라고.



 그 깨달음을 근거로 그는 오늘날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는 별명이다.)로 알려진 신앙적 結社의 기치를 올렸다. 죠오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physically)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 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음으로 해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죠오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transformed)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私的인 내면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 초기 퀘이커들(Early Friends)은 당대의 사회에 불을 지피는 불씨의 전령이었다. 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 온갖 종교집단, 모든 사회조직에 불을 붙였다. 죠오지 폭스는 17세기 영국인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과 우리 시대를 위해서도 빛을 던져준다.



함석헌은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Pendle Hill; A Quaker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에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씨 사상을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 자신이 비교 검토해 본 바로는 그의 씨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거의 일치한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과 더불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에 주목할 수 있다면 주체로서의 민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민중을 세계와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데 새로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4) 동학의 전통으로부터

  우리는 이제 19세기 말엽 한반도에서 출현한 동학운동, 그 중에서도 1860년-98년의 水雲 崔濟愚와 海月 崔時亨, 그리고 갑오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동학의 재건을 의도했던 甑山 姜一淳의 사상과 실천에 주목할 차례다.



 동학은 19세기말, 조선의 봉건제가 한계에 도달, 근대사회로 이행되기 시작하는 세기말적인 일대 전환기에 피어난 한국사상문화종교의 꽃이고, 조선의 근대역사가 시작되는 發源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이 창시되던 1860년 당대의 조선의 현실에 대한 수운의 인식은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 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 위기 그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신분제의 문란(紊亂), 도탄(塗炭)에 빠진 민중의 잦은 봉기와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으로 과거의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구미제국의 근대문명이 압도해오는 가운데, 전통적 종교인 儒佛仙은 정신적 지주나 새로운 사회이념의 기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윤리와 가치규범의 붕괴, 사상의 혼돈, 민중의 정신적 방황이 극도에 달한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사회에는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민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절망과 암흑의 시대, 바로 그 한가운데서, 수운은 先天문화 질서의 종말과 후천개벽의 새 문화, 새 시대의 도래를 예감했다. 수운은, 동양문명의 해체와 몰락, 서양문명의 침략적 폭력성을 확인하면서, 전통적 지배이념인 朱子學을 대체할 새로운 道學을 갈구했다. 그는 前人未踏의 새 길, 동서양의 기존의 종교와 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찾아내어 新天地, 新文明을 구현하고자 고난에 찬 구도의 길을 홀로 걸었다.



   “庚申年에 이르러 전하여 오는 말을 들으니 서양사람들은 한울님을 위한다는 뜻으로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들의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의 교를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므로, 나는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東經大典, 前編 五>



   “서양사람들은 전쟁을 하면 이기므로 쳐서 빼앗아 그들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리하여 천하가 다 멸망한다면, 어찌 입술이 상하여 없어지면 이가 시려 견디기 어려운 것과 같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東經大典, 前編 九>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6년째 되던 1860년 음력4월, 그의 나이 37세 때 그는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통해 得道에 이른다. 그의 신비체험은 한울님 마음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天語’를 듣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울님과의 사이에 문답 형식으로 여러 달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내용을 냉철히 반성 체득하면서 한 해 남짓 걸쳐 동학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修行法 등을 글로 체계화해 나갔다. 득도한 이듬해(1861년) 6월부터 그는 布敎에 나섰다. 득도로부터 체포되기까지 불과 2년 6개월 사이에 수운은 漢文體의 <東經大典>과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수운의 가르침은 고통과 시련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그 시대의 민중들의 가슴에 심었다. 사방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거처인 경상북도 경주 용담정(龍潭亭)으로 찾아오는 민중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수운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따랐다. 1864년 3월 수운은 41세의 나이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졌는데, 세상을 어지럽게 한 邪術의 傀首라는 죄목이었다.



  - 수운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해월은 道統 承繼 후 殉道할 때까지 30여년 간 가시밭 길을 걸으며 조선 땅에 동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人乃天’, ‘事人如天’의 교의로써 교도들을 지도하는 한한편, 지배권력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接’조직을 확장해나가다가 1898년(72세)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스승 수운의 뒤를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 동학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데 있다. 사람이 곧 한울님, 한울사람, 섬김 받아야 할 신령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지극히 공경(敬人)하게 되고 한울님을 공경(敬天)하게 되며 한울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주체로서 바로 서게 된다. 즉 현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신령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울사람(God's person)을 통해서만 사회와 세상의 聖化(한울나라의 실현)가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주체성은 우주 가족의 일원으로서 더 큰 생명인 우주를 어버이로서 섬기며(敬物), 우주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相生(서로 살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적 존재이다.



- 동학에서는 지금까지 저 밖에 있는 신(God without)을 향해 놓았던 祭床과 位牌를 나를 향해(向我) 돌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祭祀法을 창안했다. 이것을 ‘向我設位’라고 하는데, 저 밖에 있는 초월적 신을 상정한 인류 문명 문화 樣式의 일대전환과 정신개벽을 이로써 상징한다.  



   또한 ‘同歸一體’라고 하여 후천개벽운동의 동반자들의 공동체, 새 인간(한울사람), 새 천지(한울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인류문명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신령한 도덕적 주체들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이 공동체는 타종교 공동체의 전통을 존중하며 관용의 정신과 개방적 태도로써 후천개벽의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길동무(道伴)들의 공동체이다. 동학에서는 특히 생활의 주인이자 新天地 창조의 주역으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강조된다.



 - 강증산은 스무 살 무렵에 동학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甲午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시체가 가득 널려진 폐허의 강산을 여러 해에 걸쳐 편력했다. 그때에 그는 구천에 사무치는 울부짖음과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민중의 고통을 보았으며 민중이 그 얼마나 절실하게 생명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가를 사무치게 절감했다. 따라서 간증산은 자기의 목표를 동학의 동세개벽 실패 이후의 민생의 재건과 활인(活人)에 두게 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이 민중반란의 조직적 확대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함으로써 후천개벽을 실현하려 했다면, 강증산의 실천은 하나 하나의 이름 없는 민중들의 그날 그날의 먹고, 살고, 입고(衣食住), 고통받고, 병들고, 죽고, 두려움과 굶주림과 죽임 당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구체적인 삶, 곧 민중생존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매일 매일의 自助 自活의 작은 공동체 건설과 협동생활의 조직을 통해 후천개벽을 실천해 나가는 방향이었다.(김지하 사상기행, 2권, 206-9면 참조)  



   그렇다면 강증산의 사상과 실천은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를 꾀하려는 우리들의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동학의 인간관은, 매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퀘이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민중신학은 퀘이커 사상의 인간이해로부터 배움과 동시에 동학의 인간관을 민중이해에 적극 도입함으로써 민중의 대상화, 객체화를 극복하고 민중의 ‘주체화’에 진실로 기여하는 큰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민중적 영성’(평화의 영성)의  가능성



- 함석헌이 말한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이 영성아닌지?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씨의 혼’이라!



 spirituality는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존재를 관통하고 그 존재를 떠받치고  그 존재를 推動하는 영적 힘, 에너지, 불꽃과 같은 그 무엇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우리가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spirituality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spirituality는 기독교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의 영성, 무신론자의 영성도 있을 수 있다.(나는 사실 감옥에서 무신론자들의 심오한 영성에 무수히 접했다.)



-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닌가. 나는 앞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이라는 범주로 다루어온 영역과 크게 겹치는(overlap) 영역이어서 민중의 恨과 민중 spirituality의 관계와 구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 spirituality는 우리의 日常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욕망과 애정, 고통과 슬픔, 고독, 야심과 좌절감, 불안과 초조, 공포와 희망 등등, 이 하나 하나가 spirituality와 깊이 관련된다. 어떤 사람의 영성은 그가 자기 속의 그 영적 에너지 혹은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깊이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매일 매일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compassion)과 자비(mercy), 평화와 화해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 참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갈구하는 정치적 각성, 깨어있는 양심, 도덕적 민감성 등은 민중적 영성의 불가결한 요소들(integral elements)이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의 영적 수련은 상호 의존적이다. 서로 보완하고 서로 북돋아 준다. 민중신학은 개인의 영적 체험 또는 개인적 영성수련과 공동체적 영성 또는 영적 공동 생활(spiritual life together)에 같은 비중을 두어 이 양자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 민중적 영성은 서로 모시고 섬기는 相生의 영성이다. 그 엣센스는 겸허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깊이 귀기울여 듣는 데(敬聽, mindful listening) 있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놓고  하나님에게, 자연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고요히,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민중신학에는 이 敬聽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겨진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보니 민중, 씨에게 귀기울여 듣는 마음의 餘白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말하는’(preaching) 종교지 ‘듣는’(listening)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관계의 그물에 얽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고 있는 이 우주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敬聽의 spirituality’가 없이는 相生의 관계를 창조해나갈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와 새 천년의 입구에서 기독교는, 그리고 민중신학은, 말하는 ‘입’으로부터 듣는 ‘귀’로의 radical한 파라다임 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언자적 선포(prophetic speaking)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언자적 경청은 권력과 富에 억눌리고 빼앗겨온 자연과 민중, 곧 씨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씨에게 경청한다 함은 하나님께 경청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을 때, 더 깊숙이 귀를 기울여 고요히 기다려 보라. 소리 아닌 소리가 내 마음의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민중인 씨(들)에게 말과 설교를 가지고 가는 대신에 마음의 귀를 가지고 가본 사람은 안다. 경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계획이나 용건, 판단이나 충고 따위를 완전히 접어놓고, 오로지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나를 내맡기는 방법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둘 사이에 싹튼다는 것을.



  듣기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씨이, 그래서 자기 주견이나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던 민중이 비로소 가슴을 열고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기 시작할 때, 그(들) 자신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놀라운 지혜와 꿈과 비전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오지 않던가. 이 새로운 관계, 새 카이로스 속에서 상처가 아물고 한풀이가 시작된다. 씨이 제 이야기에 스스로 격려를 받고 힘이 북돋아져 현재의 곤경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열리고 문제에 해답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말한 “씨의 혼(魂)을 불러내는” 방법이 아닐까.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이 영성아닌지? 그것을 불러내자.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  방법과 수단만 바르게만 쓴다면 ‘씨의 혼’의 위대한 힘으로 세계를 변혁할 수도 있다.



평화 문화의 창조



1. 제도/ 조직의 영성(spirituality of institutions)

spirituality는, 비록 여전히 모호하고 정의하기 어렵긴 해도, 이미 종교인이나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제도(institutions)나 조직(organizations)에 관련해서도 spirituality가 거론 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조직이나 단체의 목적과 정신, 가치체계, 구성원리 등에 관하여 그러한 것들의 영적 정신적 차원(spiritual dimensions)를 평가하고 논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영성론적 개념과 범주를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NGO의 영성, 시민사회단체의 영성 또는 노동조합의 영신적 측면(spiritual aspects)을 말할 수 있으며, [NGO 활동가의 영성]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은 전통적인 종교의 신앙체계에는 걸맞지 않겠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삶의 어느 부분이나 측면에 모종의 영적 차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어떤 사람(들)의 영성은 그가 자기(또는 집단) 속의 영적 에너지 혹은 혼의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긴밀히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일상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해방적 영성 vs. 억압적 영성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지닌 spirituality의 성격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영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해방적 성격의 영성이 있는가 하면 억압적 성격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예로 예수와 그 제자들의 집단을 들 수 있겠고 후자의 예로 미 부시행정부의 대테러 전쟁 정책 추진 팀(그 구성원은 부시, 딕 체이니, 럼스펠드, 라이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정책에는 영적 측면의 비중이 (아마도 오사마 빈 라덴의 경우에 못지 않게) 크게 두드러지는데, 그 성격은 해방적(liberating), 평화적이기보다는 억압적, 폭력적이며, 심지어는 [악마적](demonic)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NGO의 영성의 경우에도 그것이 해방적인가 아닌가를 따져볼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 가운데도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직원리와 구조, 분위기(ethos)와 관행을 가진 단체가 있는가 하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부단히 스스로를 쇄신해가는 단체도 있을 수 있다. 예수집단은 오늘의 교회와는 달리 [비제도화, 비권위주의, 전복적(subersive)성격, 바람처럼 자유로움, 자기쇄신의 능력]을 그 영성적 특징성으로 지닌 지극히 매력적인 단체였을 터인데, 이 점에서 예수집단은 오늘날의 교회보다는 오히려 NGO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단체나 여성단체, 평화운동 단체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그의 삼부작 ‘The Powers’ 의 제3권에서 특별히 ‘제도조직/기구)의 영성’(the spirituality of institutions)이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명제는, 신약성서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초등학문을 가진 자들과 권세자들](Principalities and Powers)이라 불렀던,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그 자들은  실재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성서시대의 사람들은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제도와 기구의 심장부를 겨냥하여 그 영적 성격(spirituality)을 분별(discerning)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권력의 영적 측면은 단순히 제도나 조직의 성격을 의인화(a personification of the institutional qualities)한 것만은 아니다. 그 권세자들이 의인화한 모습으로 우리들에 의해 지각되건 지각되지 않건 간에, 그 권력의 영적 측면은 엄연히 존재한다. 어떤 제도나 조직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제도나 조직은 실제로 영적 에토스(an actual spiritual ethos)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조직 생활의 이러한 면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그는 나아가 귀신들(demons)과 권세자들(Powers)이라는 전통적 표현이 하늘이 맡겨준 임무를 배반하고 이 세상의 ‘지배체제’(the Domination System)에 복무하는  제도들(systems)과 구조들(structures)의 영성을 실제로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윙크에게 있어서 ‘institution’이 의미하는 바는 인종주의, 나치즘, 분리주의(apartheid),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세력들이다. 예컨대, 교회에게 위탁된 본래의 임무는 그러한 악마적 세력들에 저항하고 대결하는 것인데, 많은 경우 교회는 그러한 자신의 임무를 방기했거나 멀리 일탈하고 있다.



어떤 단체나 조직이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기본적 임무를 망각하거나 그로부터 일탈했을 경우, 조직에 내장된 자기성찰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그러한 비정상의 상황을 분별(discerning)하여 경고를 발하고, 과오와 일탈을 극복하고 본래적 임무로 복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점은 개인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나 단체나 집단의 생활에 있어서나 공통되는 것이다.



오늘날 NGO 단체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조직의 이러한 영적 측면에 대한 요구와 반성의 소리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내가 [NGO 활동가의 마음공부]  라는 제목으로 아래의 글을 썼던 것(월간 ‘참여사회’ 2001년 3월호)은 그런 요구의 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말을 줄이고 남의 이야기에 조용히, 깊이 귀기울이는 지도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온후한 표정의,

그러면서도 유능한, NGO 활동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럴까?

NGO의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이,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의 여늬 지도층과 마찬가지로,

굳어져버린 표정에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말투와 제스춰를 배워버렸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몸과 마음에 평안과 휴식을 가져다 주는 고요한 명상과 내면의 성찰은

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운동가와 NGO 활동가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활동가들이 일에 지치는 것은 건강문제나 육체적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에 마음의 건강과 영적(정신적) 발전에 힘쓰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정신의 부실이 육신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

간디는, 중요한 사회적 행동을 앞에 두고는 반드시 그 준비를 위해 고독한 명상, 기도,

때로는 단식을 했다고 한다. 간디만이 그랬던 것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훌륭한 많은 NGO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적 변혁을 위한 성찰과 정진으로부터 얻은 것만큼 만 사회운동에 쏟아 부을 수 있을 뿐이다.(*"We can only spend in social works what we earn in contemplation." -Douglas Steere)”  



2. 평화의 문화(Peace Culture/ Cultures of Peace)

나는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이라는 말을 엘리스 보울딩(Elise Boulding)에게서 배웠는데, 그녀는 최근의 역작 [‘평화의 문화’(Cultures of Peace) - 역사의 숨겨진 측면(The Hidden Side of History)]에서, 전쟁과 폭력의 문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역사의 저류를 형성하며 맥맥히 흘러온 ‘평화의 문화’, ‘평화운동의 역사’를 탁월한 접근법으로 증언하고, 21세기를 보다 평화로운 세기로 만들기 위해 ‘평화를 이룩하는 활동들’(peace building activities)을 어떻게 전개할 지에 대해 그녀의 풍부한 ‘경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엘리스 보울딩에 따르면, ‘평화의 문화’란 무엇보다 먼저 '평화로운 다양성'(peaceable diversity)을 증진시키는 문화이다. 평화의 문화는 삶의 방식(lifeways), 신념체계, 가치관, 행동 패턴 등을 포함하며, 서로 돌봄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제도적 보장을 동반한다. 평화의 문화는 또한 차이(서로 다름)의 존중, 봉사정신, 지구 자원을 모든 중생들과 인류사회의 멤버들 간에 평등하게 나누어 쓰는 일(equitable sharing)을 포함한다.

평화의 문화는 모든 차이와 다양성 안에서 인류가, 종(species)과 개체의 심오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또한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체인 지구와의 혈연 의식을 느끼면서, 상호 안전(mutual security)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러한 문화이다. 우리가 이런 문화를 이룩한다면, 거기에는 ‘폭력’은 있을 수 없다. 폭력이 발붙일 토양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적으로 잔인해 질 수 있고 야수처럼 흉포해 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평화의 문화를 창조해 누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평화로움’(peaceableness)는 행동적 개념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위한 복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쉬임없이 생활세계를 변화시켜나는 가운데, 상호이해와 행동양식, 상황과 제도 등을 끊임없이 새로 만들고 다시 고치고 또 새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창조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문화는 소위 스테레오 타입의 평화와는 질을 달리 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평화는 지루함, 무미건조, 비현실, 무능력, 비활동성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그래서 ‘평화’를 말하면 하품이 나오고 졸리게 되곤 한다. 그러나 ‘평화의 문화’는 그런 정태적, 비행동적 평화개념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평화문화의 평화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평화요, 자기 쇄신의 과정(process)으로서의 평화요, 평화를 지키고 이룩하기 위한 지난한 싸움 가운데 있는 평화요, 모험과 탐구, 미지의 영역으로 진출하려는 용기와 의지로 충만한 그런 평화이다.



평화의 문화는 ‘평화의 영성’을 간직하기 마련인데, 평화의 영성의 해방적 성격은 위의 설명에서 해명되었으리라. 평화의 영성은 사람과 중생을 먹이고 보살피고 섬기는 살림의 영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평화로움]은 NGO와 사회운동이 바람직한  규범(social norm)으로 삼아도 좋을 만하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는 자기 성찰의 메커니즘이 건강하게 작동하고 그 조직과 구조와 사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다시 고쳐 만들어내는 그런 활동과 환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평화문화를 창조하는 쉬임 없는 노력의 과정은 다양한 수준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한 개인의 내면적 자기성찰과 수행과 훈련의 수준이 있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구, 이웃, 직장동료 사이의 사회적 교제의 차원이 있고, 한 도시의 주민운동체로부터 국제연합(UN)에 이르는 시민사회운동의 누진적 관계의 수준들과 관계망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도 그 한 부분인 우주적 생명세계와의 교섭과 상호작용이 포함될 것이다.  그 수많은 수준들(levels)의 간단없는 상호작용과 상호침투 가운데서 평화를 이룩해가는 사회적 능력(the societal capacity of peacebuilding)은 개인과 개인상호간, 집단, 국가, 국제사회, 지구환경 등의 상호관계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의 패턴과 문화를 만드는가에 달려 있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연 속에는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두 사람도 똑 같지 않다. 그러므로 평화문화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서로 ‘다름’(difference)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기초 위에서 ‘평화로운 사회’(peaceable society)를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방법과 수단은은 평화, 나아가 ‘비폭력적 평화’(nonviolent peace}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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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생명 평화 정의 -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사명과 과제 -박성준

생명, 평화, 정의 /박성준

<사단법인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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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10주년세미나
-지구촌 평화를 위하여

/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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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제10주년 기념세미나 [발제 3] 2006

생명 평화 정의
-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사명과 과제 -


박 성 준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
비폭력 평화물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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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는 禾=자연=생명=쌀=밥=하늘(*김지하, “밥이 하늘입니다”)과 口=食口=사람=민중=인민=만민, 그리고 平=고름=공평=공정=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평화의 ‘平’은 고르게 하다=공평/공정/평등하게 하다=정의롭게 하다와 같이 ‘동사’(verb)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和’를 고르게 하고 정의롭게 하다(‘平’)라는 뜻의 ‘평화’도 동사로 보아야 합니다. ‘평화’가 이처럼 명사가 아닌 동사라면, 평화는 관념(idea)이나 주의=이념(ideology)이 아니고 삶(life)이고 살림(*죽임의 반대)이고 행동(praxis)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를 뜻하는 말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흔히 “peace”라는 말로 영역됩니다만, peace는 샬롬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peace는 단지 현재 교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에 비해, 구약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샬롬은 전쟁행위가 중단된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샬롬은 일상적인 삶의 모든 관계, 영역, 차원과 관련되어 있는 지극히 풍부하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샬롬의 개념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삶의 토대로 여겼던 것, 곧 서로가 함께 일구는 공동체를 포괄합니다.

이처럼, 샬롬이 공동체적 언어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샬롬은 단지 개인이나 작은 집단의 ‘내적 안녕’(internal well-being)을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community)를 말하는 것이며, 정의로운 정치와 균등한 부의 분배 위에 이룩되는 한 사회의 총체적 안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립했습니다. 예수가 뜻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샬롬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평화(peacelessness)

2차대전의 참화(慘禍)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고조시켜, 많은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각각의 학문분야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60년대에는 미소냉전의 격화를 배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살아남느냐 절멸하느냐󰡓가 전(全)인류적 의식(意識)이 되었던 그 시대에, 독일의 대표적 지성 C. F. 폰 바이cm제커는 “평화는 인류 생존 가능성의 조건이다󰡓라는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이 명제는 극한적 폭력이 만연하는 오늘날에도 타당합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국제사회의 현상유지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는 북반구 나라들의 국가 이해(national interest)를 반영한 연구들이 평화연구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나온 것은 제3세계, 발전도상국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제3세계에는 전쟁이 없는 때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쟁의 종식이 행복, 복지,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것, 빈곤, 기아, 환경오염, 착취, 억압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평화학자 수가타 다스굽타(Sugata Dasgupta)는 “비평화, 나쁜 개발󰡓(󰡐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 1968)이란 책에서 󰡒비(非)평화(peacelessness)󰡓라는 신조어로써 제3세계적 삶의 정황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비평화의 구성요소로서 빈곤, 기아, 영양실조, 질병, 오염 등을 들면서 이들은 반드시 전쟁이나 국제적 긴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이러한 비평화의 구성요소들을 제거하고 충분한 의식주, 의료, 위생적 생활환경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실현의 길이자 제3세계와 발전도상국의 평화연구의 과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의 현상유지가 아니라, 세계의 정치경제 구조의 근본적 변혁(變革)을 평화연구의 중심에 놓는 제3세계 평화학의 입장과 접근방법이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의(異議) 제기에 대해, 북유럽의 평화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대표자격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의미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하고, 이에 반해 행복, 복지,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고 했습니다. 즉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란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실현이며,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통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폭력에는 신체에 직접 위해를 가해오는 개인적이고(personal) 직접적이며 현재적(顯在的)인 폭력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이고 구조적이고 잠재적인 폭력이 있다고 하면서 전자의 예로는 전쟁, 테러, 린치, 폭행 등을 들고 후자의 예로는 나쁜 사회제도, 잘못된 관습, 불평등한 경제, 나쁜 정치나 법률, 환경파괴와 오염, 나쁜 개발 따위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독의 신학자로서 평화문제를 깊이 연구해오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는 전쟁의 방지가 긴급한 과제인 현대 세계에서,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negative(부정적, 소극적)하게 정의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소극적 평화라고 하는 개념은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국제 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버릴󰡓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류가 폭력의 악순환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도 결코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수가타 다스굽타의 ‘비평화󰡑의 개념과 요한 갈퉁의 ‘적극적 평화󰡑의 개념, 그리고 볼프강 후버의 비판은 각각 평화의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일깨워주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스굽타의 󰡐비평화󰡑나 갈퉁의 󰡐구조적 폭력󰡑 등의 개념을 매개로 하면서, 평화연구는 그 영역과 지평을 널리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의 빈곤의 문제, 전 지구적인 󰡐20대 80󰡑의 사회, 생태계와 환경 파괴 문제, 농업-농민 문제,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자차별, 학력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 등도 구조적 폭력으로서 평화연구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무관심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미국 동행안을 여행하다가 커넥티컷주의 팍스우드라는 곳에 그 때 막 문을 연 ‘피쿼트 뮤지엄󰡑이라는 미국 원주민 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피쿼트(Pequot) 민족은 거의 다 사라지고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인디언 거주구역에 살면서 후손들에게 남겨줄 이 박물관을 세운 겁니다. 박물관 안에는 자기들 옛 마을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모형마을이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우리 동네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쿼트 사람들의 피부색과 얼굴생김새도 우리와 엇비슷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식이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과 물레를 잣고 있는 모습, 개울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 농사를 짓는 도구들이 우리하고 너무나도 닮아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누이와 고모가 있었고 이웃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일만 년 이상 지금은 아메리카라 불리는 이 광활한 대륙에서 살아온 원래의 주인이었구나!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그들을 거의 다 학살해버렸구나! 피쿼트 박물관에서 그들의 순결하고 발랄한 옛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대륙이 원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의 땅이 아니라 우리와 멀지 않은 친척 뻘 되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감동에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국에 건너간 첫해, 말이 잘 되지 않아 그 스트레스로 위장병이 몹시 악화돼 있었는데, 그 날 이후 나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 위장병도 나아버리더군요. 키 크고 눈이 푸른 그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서투른 영어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언젠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좋은 책을 한 권쯤 번역 출판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9월 11일의 충격 뒤로 사태전개를 보는 데서도 미국과 서방측의 잣대와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 눈앞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알아보려고 해도 도움을 주는 자료나 책자가 거의 없었고 또 평소에 너무나도 게으르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슬람과 '지하드'에 대한 이해

전 세계 이슬람권 인구는 14억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인구 18억의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샬롬󰡑 즉 평화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슬람의 정신은 다양성의 존중과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알라󰡑라는 것은 이슬람의 특별한 신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을 말하는 이슬람 말일뿐입니다. 이슬람 종교의 뿌리는 히브리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멀지 않습니다.

흔히 ‘성전’이라고 번역되는 󰡐지하드󰡑가 갖는 의미는 󰡐내적 투쟁󰡑,󰡐악을 극복하고 선을 이룩하려는 정신적인, 내면적인 투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내적인 투쟁이야말로 지하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합니다. 󰡐지하드󰡑의 더 깊은 뜻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깊은 자기성찰에 의한 내적 쇄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만이 아닌 외적인 것이 될 때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불의와의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장투쟁이 지하드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경우는 도발이나 침략을 당했을 때, 자신들의 종교 가치가 짓밟혔을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손에 드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인 것처럼 얘기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지하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이슬람 사람들이 왜 폭력을 쓰게 되었는가. 그 폭력의 뿌리에 대해 모르면서 이슬람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어떻게 그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시각이 내면화되어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큰 병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이런 병에 대해 진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시각,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테러를 보는 눈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6천명이나 죽은 처참한 사건을 두고 이런 반응을 보여도 되는 것인가?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는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직 제3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고 해방되었다지만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으며,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 이래로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감돌고 있고, 미국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는 언제 다시 전쟁에 휘말릴지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앞선 채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그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어마어마한 초현대 무기를 동원해 보복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온 서방 세계가 미국의 편을 들고 있고 우리 정부도 그러한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을 천명하고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란 무엇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가령 6천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테러 사건이 미국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아랍지역에서 일어났다면, 그리고 그 행위자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었다면, 세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미국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폭력은 ‘테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방세계는 그런 미국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미국의 그런 행동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이 지구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사건들, 엄청난 규모의 참혹한 파괴와 살육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런 사건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났을 때 더 그러했습니다. 걸프전쟁에서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상하수도, 전기, 가스 시설 등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 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 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병으로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대부분 이런 것을 미국의 시각을 통해서, 미국이 전해주는 대로 보도해 왔고 우리들은 그저 먼 산 보듯이 하면서 보도의 진실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무덤덤히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미국이 당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테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왕 관심을 가질 바에는 이 기회에 󰡒테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한번 되짚어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즉, 어떤 집단이 미국 중심의 세계가 악으로 규정하는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한 것에 대해서만 테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강대국이 국가의 이름으로, 강대국들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엔의 승인까지 얻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파괴와 민간인에 대한 살육을 행하는 전쟁이나 군사공격은 테러로 볼 수 없는 것인가?

‘전쟁에 반대하는 인민의 연대󰡑(People's Coalition Against War; PCAW)라는 미국에 본부를 둔 평화단체에서는 이렇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테러에 대한 해결 방법은 정당한 절차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는 협상과 외교여야 하지 협박과 최후통첩, 봉쇄와 금수조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큰 증오와 분노를 불러올 것이기에. … 󰡐테러󰡑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에 찬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어떤 국가에 의해 승인된 테러, 파시스트에 의한 테러, 개인과 집단에 의한 테러 등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테러의 개념에 따른다면, 미국이 수단의 제약회사를 미사일로 공격한 것이라든가 걸프전에서 행했던 혹은 코소보에서 행했던 전쟁이라는 이름의 살상행위도 테러에 포함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平和’와 ‘샬롬’, ‘적극적 평화’와 ‘비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ism)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판 미 육군의 ‘테러리즘 정의’(the US Army definition of terrorism)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러리즘이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협박이나 강제, 공포의 주입등... 계산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을 행사하는 것이다.”(Terrorism is “....the caculated use of violence or threat of violence to attain goals that are political, religious or ideological in nature....through intimidation, coercion or instilling fear.”)

이 정의에 따른다면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테러’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테러’도 폭력과 협박과 공포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테러 전쟁’(war on terrorism)에 이르러서는 폭력과 공포의 사용은 더 한층 강화됩니다. 테러리스트와 그 동조자들로 간주되는 자들을 공격하고 살육하며 포로로 잡기 위해 한 국가의 무장력이 동원됩니다. 이렇게 볼 때, 테러와 대테러와 전쟁 사이에는 그다지 다른 점이 없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폭력과 협박과 공포의 사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월성’(moral superiority)이나 ‘정의’(justice)를 내세우지만, 그 점에서는 테러리스트 측에서도 할 말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전쟁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전쟁은 평화의 반대말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평화의 반대말이 반드시 전쟁인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없지만 평화도 없다”는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샬롬’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평화’라는 말에는 󰡐전쟁의 부재󰡑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만이라도 온전하지 않으면 나머지 두 가지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전(保全)하는 것이고, 생명의 살림과 지킴과 보전인 평화는 정의(正義;justice)가 살아 숨쉴 때에야 비로소 담보됩니다.

최근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한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에서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나라의 테러리스트는 종종 다른 나라의 애국투사입니다.” “세계는 자살 폭파범을 비난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긴 여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아랍에 편집증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 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를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 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요.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미국의 보복 군사행동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정치인 미국의 하원의원 바바라 리 여사가 말했듯이,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전에 “한 발짝 물러서서󰡓 테러의 원인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았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테러리즘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고 거기에 대한 깊은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미국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아랍과 이슬람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 왔기에 이슬람 민중들이 저렇게까지 처절한 증오심을 품고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자살테러를 감행했겠는가, 그들의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

어느 기자는 “미국 테러 참사는 일종의 부메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미하일 델랴긴(세계화문제연구소 소장)은 󰡒바람을 일으킨 자는 폭풍을 만난다.󰡓는 러시아 속담을 곁들이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약소국가들에 불안정을 조장해 이익을 챙기면서 약소민족들의 이권을 냉혹하게 무시했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균열이 심해졌고 그 결과 악마적 테러가 폭발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시사저널󰡑2001년10월25일자 참조)

또 우리나라 신문과 잡지에 자주 글을 써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친숙해진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는 ‘한겨레21󰡑 2001년10월2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노르웨이의 어느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 씨와 외과의사 후솜 씨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좀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의료봉사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솜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 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 손은 못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처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솜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솜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의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 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로 인한 아사사태에 시달려 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미국의 신무기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21세기 첫 전쟁은 겉으로는 빈라덴과 그 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은 명분일 뿐, 미국이 테러응징을 내세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지적합니다.(시사저널 2001년 10월25일자 참조) 숨겨진 전쟁목표는 또 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국토를 무기성능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번 테러 사건을 이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해가려 합니다.

시대는 문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이번 사태가 21세기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가 너무 심각하고 거대해서 그 후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첨단 무기를 가진 초강대국의 폭력에 맞서 아무 힘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하는 생물학 무기가 등장하고 해서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이 사태가 인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 사회구조와 문화 등 모든 것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농부이자 평화운동가인 월든 베리(Wendell Berry)씨는 ‘무너지는 낙관론 - 공포 가운데서 살아가기’(Thoughts in the Presence of Fear)라는 글에서 문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대략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9월11일 사건과 더불어, 기술적/경제적 낙관론이 의문의 여지없이 통하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신세계질서’, ‘신경제’ 운운하면서 마치 우리가 무한정 성장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던 낙관론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런 낙관론을 신봉했던 정치지도자들과 대기업간부들과 투자자들은, 번영의 결과가 전 세계 인구의 극히 일부인 한줌의 부유층들에게 귀속된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과 같은 잘 사는 나라에서조차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그 번영은 전 세계에 걸친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딛고 서있으며, 그 번영의 생태적 비용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 위협으로부터 부유층들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발전된’ 나라들은 ‘자유 시장’에게 신(god)의 지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은 한편 농민들과 농토와 마을 공동체와 숲과 습지와 평원을, 한마디로 전 생태계를 희생 제물로 삼아왔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경제의 비집중화’(economic decentralization), ‘경제정의’, ‘생태적 책임’을 위한 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9월 11일 사건 이후로 그러한 노력은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일련의 연속적 기술혁신 조차도 이번에 경험한 더 엄청난 혁신, 즉 새로운 형태의 전쟁(a new kind of war)에 의해 마구 짓밟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치 못했다. 그 새로운 무기, 새 전쟁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기술혁신의 성과를 우리들의 재앙으로 바꾸어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무한경쟁 자유무역의 지구경제시스템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부유한 산업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과 자기수정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군림해온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행복한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4차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이래로 걸프전,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주기로 해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기 상인들의 투자와 자본회전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는 완전 초토화라는 자연과 생활환경의 파괴가 가능하고 생태적 질서 자체를 완전히 변형해버리는 가공할 무기들이 등장했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를 생산해내는 군수산업의 경쟁은 종착점도 브레이크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경쟁의 결과 무기체계는 이미 ‘전쟁무기’라는 한계선을 넘어섰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재래적 의미의 전쟁 도구가 아니라, 그 악마적인 힘은 신의 영역을 침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를 먹고사는 전쟁상인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미국경제의 체질도 근본적인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식 삶의 방식, 미국식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제도를 세계의 모든 지역과 나라에 전파하고, 심지어는 이슬람권과 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이러한 방식은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을 꿈꾸라

이런 모든 문제-인류가 안고 있는 질병들-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서 말했듯이 문제 자체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평화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지금의 반 평화 흐름보다 더 거대하고 도도한 물결로 일어나야 인류가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거대한 전 인류적인 평화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디 옹의 저 놀라운 통찰에 깊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들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꿈을 꿔야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해내야 합니다. 그것은 차가운 현실주의적인 분석과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9월 11일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보면서 전 세계 인류가 평화를 위해서 커다란 각성을 해야 하고 서로 연대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거대한 연대가 그 반대 방향, 즉 폭력의 악순환으로 가려고 하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통제를 가하고 그 고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9. 11 직후, 뉴욕 타임스 9월 24일자 논단 ‘새로운 세계에서의 미국의 주권󰡑이란 글에서 펜실베니어 주립대학 로버트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공격은 그래도 전통적인 성격의 공격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생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미국 땅에서 6천명이 아니라 60만 명도 죽일 수 있다.”

어마어마한 최첨단 과학무기로 잔뜩 무장하고 있는 세계 초 강대 제국이 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오해이거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로버트 라이트 교수의 지적처럼, 이른바‘테러 집단’도 미국의 첨단무기에 못지않은 가공할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대 세계에서는 무기가 지나치게 발달해 버려서 전쟁이나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이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과 정보와 과학기술의 전 세계적인 소통의 결과로 ‘무기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오직 공멸이 있을 뿐 일방적인 승리가 불가능해져버렸습니다.

미국은 지금 이라크라는 수렁에 깊이 발이 빠져있습니다. 사건의 결과가 미국의 보복공격과 그에 대한 재 보복으로, 탄저균 같은 생물학적 무기가 사용되는 바이오전쟁으로, 그리고 다시 원자력발전소 공격과 같은 더 무서운 재앙으로… 이렇게 끝 모르는 폭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전 세계와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자랑인 ‘시민적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옹호해야 하며, 미국이 더 강화된 군사주의나 전시 파시즘 체제로 가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을 통제하려면 먼저, 또는 적어도 동시에 미국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스스로를 통제 할 수 있도록, 미국 안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이성을 되찾고 평화적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미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점차 확산되어 갈 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무력감, 우리가 미국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적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것이 창조적 상상력입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평화의 새 문명을 여는 열쇠꾸러미 중 가장 큰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엮어놓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 세계 반전 평화 연대세력의 힘으로 선의의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현재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화운동가 한상진님의 최근 편지를 조금 인용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바그다드 상황은 현재 최악의 상황에서 별로 나아진게 없습니다.

제가 나오기 전날 잠깐 시내를 나갔을 때, 무장저항 세력이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이 지나가지 않는 시간은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 그린존 인근마저도 무장 저항세력이 순찰을 돌 정도로 무장 저항 세력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아마도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내부에서 조차 이번 전쟁에 대한 회의가 상당하게 퍼져 있습니다.

즉 스스로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빨리 이라크에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무장저항 세력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지만, 미군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미군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막강한 화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민간인과 저항세력 구분하지 않고 폭격을 퍼붓고 있습니다만 이런 미군의 행위는 안그래도 이미 멀어진 이라크의 민심을 더욱 멀게만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미군은 민간인과 저항세력을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미군 검문소 앞에서 미군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방향을 돌리는 차량에 마저도 무차별 사격을 해 댑니다. 하다못해 기자와 무장 세력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 합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강한 화력을 이용하여 2,500 만 모든 이라크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뿐입니다.“ (2004. 9.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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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의 굴레를 벗고 자율의 대지에 서자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현실적 관계를 어찌할 수 없어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부터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옳을 것인가? 이 물음을 품고 한걸음 물러나 간디 옹을 찾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간디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간디가 직접 저술한 글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드문 글들 가운데 그의 ‘자서전’과 더불어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글 한편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어 있습니다. ‘힌두 스와라지’(안찬수 옮김, 출판사 강)가 바로 그 글입니다.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가 1909년 12월 남아프리카 트란스발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투쟁을 대표하는 주간 신문 ‘인디언 어피니언’지에 구자라트어로 발표한 글입니다.

그 글의 서문에서 간디는, “ ‘인디언 오피니언’의 독자들에게 제시하려고 인도의 자치라는 주제를 놓고 몇 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습니다. 스스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들이기에 간디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진솔하게 표출되어있습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라는 말은 간디의 방식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방식’이란 다른 사람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스와라지’(Swaraj)는 ‘자치’를 뜻하는 힌두어로, 간디 사상의 한 핵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swa=self; raj=govern, 따라서 self-government, self-rule 등으로 영역됩니다. 간디는 ‘민족적 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은 간디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때 그 주체는 계급이나 계층 또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개인인 나 자신이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 그 소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고 하는 이 점을 간디는 주목하고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의 제10장에서 ‘폭력’의 문제에 언급합니다. 그 장의 구자라트어 제목은 ‘darugolo’인데, 이 단어는 4장에서는 ‘무기와 탄약’으로, 15장에서는 ‘총’으로 번역되었다. 간디는 이 말 대신에 ‘육체의 힘’ ‘총의 힘’ ‘무기의 힘’ 등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들로 ‘혼의 힘’(atmabal)을 사용하는 것과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려 했습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sat=truth, agraha=firmness), [진리파지], [비폭력적(또는 수동적) 저항] [시민적 불복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이 말은 고통을 견뎌내면서 오로지 ‘혼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곳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연민이 있는 곳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무기의 힘은 사랑의 힘이나 혼의 힘과 싸울 때에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과 연민의 힘이 무기의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간디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의 힘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척결하고 근본적 변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 세계를 변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간디가 말하는 ‘사티아그라하’ 곧 수동적, 비폭력적 저항은 현실 속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가 간디에 관해서 가장 큰 오해가 일어나는 대목입니다. 간디는, “나는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비폭력 저항을 믿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사티아그라하‘를 현실과 세계를 변혁하는 가장 힘 있는 수단으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비폭력적 저항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적 대안’(a realistic alternative)으로 얘기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간디가 [사티아그라하]를 군사적 언어(military terms)로 얘기했다고 말하는 해설가들 -‘A Force More Powerful’의 저자 Peter Ackerman과 Jack Duvall 같은 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로 간디는 “비굴한 굴복 보다는 차라리 폭력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간디는 누구보다도 ‘행동’과 ‘피동성’(passivity)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간디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대해 우려하면서 베를린의 한 유태인 지도자인 랍비에게, “저항을 조직하고 나치의 위협에 맛서 싸울 수 있도록 많은 유태인들과 유태인 동조세력을 동원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간디는 불의한 상황에서의 피동성을 볼 때 마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비폭력적 저항이 피동성과 대체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라크 파병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간디 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혜를 얻습니다.

먼저, ‘간디의 방식’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라크 파병과 같은 중대한 문제는 미국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내면의 요구가 있을 때, 타율이 아닌 자율(‘스와라지’)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육체의 힘’ ‘폭력=무기의 힘’(darugolo)을 사용하는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고, 끝내는 패배하고 이라크로부터 물러날 것입니다. 미국에 추종하는 이라크 파병 한국군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우리는 ‘사티아그라하’ 곧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의 방법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미국정부의 압력에 의한 결정’이라는 데 공감하는 85%이상의 국민들이 있습니다. 그 국민들이 파병반대의 이유와 정당성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각가지 방법으로 도와드리며 그 국민들과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파병결정이 철회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전후재건을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현실적 대안’을 구체적, 세부적으로 마련하여 전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국민들이 그 안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파병에 반대한다면, 정부는 파병결정을 철회해야만 한다. 이러한 자율적이고 성숙한 ‘의사결정 과정’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파병반대운동의 내실(內實)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짓밟아버린 ‘절차적 정당성’을 국민과 시민의 차원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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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성준-움직이는 학교(새길이야기 3호)

[인터뷰] 박성준-움직이는 학교(새길이야기 3호)





움직이는 학교 박성준 선생



김문음(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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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음: 호칭을 뭐라고 붙이면 좋을까요?

박성준: 그냥 '씨'가 어떨까요?



무슨 위원장님, 회장님, 이사장님, 사무총장님, 박사님, 교수님 등 호칭의 홍수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이들을 만난다. 인터뷰가 진행된 양천구 신정동 아파트 거실. 직접 차를 내오는 선생님의 인상이 무척이나 차분하다.



특이한 이력



김: 박성준 선생님 이력을 보면,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릿쿄오(立敎)대학 신학박사..., 그런데요, 감옥엔 왜 이렇게 오래 계셨어요?



박: 함석헌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발꿈치에 채여서랄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한편으론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감옥에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기사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나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두 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됐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친구들 교과서를 빌려 헌 종이 묶음에 베껴 쓰면서, 그에겐 무슨 책이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생겨났다.



대학 시절, 그는 성서를 읽기 시작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경제학도로서 여러 경제학 책을 섭렵했다. 미국 경제학은 사회의 모순을 설명해내지 못했다. '함께 잘 사는 세상', 복음과 사회과학을 결합시키는 대안을 모색하던 그는,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고, (어릴 때부터 익힌, '빌린 책을 단숨에 베끼는' 재주를 발휘해) 일어로 된 책들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했다. 이는 당시, 국가보안법 1조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는, 같은 서클 후배였던 한명숙과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투옥, 13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박: 우리 한명숙이가, 나 옥에 있을 때, 한국의 주요 신학교 교과서를 다 보내줬어요. 13년 반 만에 재결합해 태어난 아들이, 이제 고 1입니다.



그 세월의 갈피에 끼인 절절함을 어찌 쉬이 알 수 있겠는가. 현재 부인 한명숙은 여성부 장관이다. 박성준은 출소 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서남동, 안병무 등과 교류하며 한국 신학연구소 학술부장을 역임하고,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인 '한백교회'를 설립, 8년 동안 목회를 했다.



퀘이커와의 만남



김: 건너뛰어서, 퀘이커 얘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저처럼 무지한 사람을 위해서 소개해 주신다면.



박: 퀘이커(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났지요. 당시, 외적인 종교의식이나 성경의 권위, 공식적인 신조에 중점을 두고 있던 기존 교회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체험의 종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갈구하고 있었는데, 영국에서 이런 이들을 '구하는 자들(seekers)'이라 불렀습니다.

목동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유난히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조지 폭스(Gorge Fox, 1624∼1689)가 '영적인 여행(spiritual journey)' 끝에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작은 산정에서 진리를 깨닫고 환상(vision)을 보았는데 이것이 퀘이커의 시초입니다.



김: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나요?



박: 그가 들었던 소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는 너의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인습적인 신조들(creeds)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이었지요. 퀘이커들은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정수(精髓)죠.



김: 놀랍게도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통하는군요.



박: 19세기 말엽 한반도에 출현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의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동학의 핵심은, 지금까지 저 밖에 있는 신(God without)을 향해 놓았던 제상(祭床)과 위패(位牌)를 나를 향해(向我) 돌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제사법을 창안했습니다. 이는 훗날 강증산의 사상과 실천, 함석헌의 씨알 사상과도 연결되지요(함석헌은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에서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민중신학의 창시자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알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퀘이커 신앙과 민중신학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지금도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습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한(恨)'과 더불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의 '빛'­ 퀘이커들은 이것을 '영', '그리스도', '씨앗'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 에 주목할 수 있다면, 그 민중을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와 역사 창조의 중심에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 박선생님께서도 펜실베니아주 퀘이커 학교 공동체 '펜들 힐'에 가서 직접 생활하셨지요?



박: 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 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 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처음엔 일주일 코스로 펜들 힐 영성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후에 결국 2년 동안 거주하며 주로 '평화'를 주제로 공부하였습니다.



예언자적 경청의 힘



김: 펜들 힐에선 무엇을 발견하셨는지요?



박: '경청의 힘'이지요. 우리는 말하는 데 익숙해 있지, 자신이나 남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언자적 말하기(prophetic speaking)'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예언자적 듣기(prophetic listening)입니다. 말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신은 바뀌지 않지요.

'경청'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훨씬 강력한 것이라는 게 제 경험이에요.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는 것이 뿌리가 되어, 각 사람의 말을, 마음을 듣는 것 - 새벽 여명처럼 존재하는 자신과 상대방의 씨앗을 일깨우는 '경청'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김: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기존의 설교 중심의 예배 방식에도 이의를 제기하시겠군요.



박: 그렇습니다. 예배에서 말과 소리를 좀 줄이고, 고요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 예배의 주체인 각 사람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그 여백을 타고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시리라 생각합니다.



김: 경청에도 훈련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박: 예컨대 틱 낫한 스님은 '숨쉬기'를 수련하라고 권합니다.



그는 베트남 출신인 틱 냣한 스님의 'mindfulness'란 사상으로부터 '경청'(mindful listening)이라는 중심 개념을 얻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mindfulness'란 보름달처럼 어느 한군데 이지러짐이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경청은 그런 마음의 상태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 '깨어 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과 깨어 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 줍니다. 언제라도 마음이 산만해질 때면, 그대의 숨을 사용해서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숨을 다스리는 것은 몸과 마음을 그대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고 싶으면, 즉시 그대의 숨을 먼저 관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mindfulness(깨어 있는 가득한 마음)'의 상태라 하겠습니다.  펜들 힐에 있는 동안 저도 매일 아침 '고요한 예배'에서 '깨어 있는 가득한 마음'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저는 이것을 '따뜻한 의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체험이 저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금도 매일 아침 묵상 가운데, 내 안에 있는 빛을 마음의 눈으로 응시하며 깊고 고른 숨을 길게 내쉬고 들이쉽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라고 생각하지요.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맑은 샘이 솟듯이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움직이는 학교



김: '따뜻한 의식'은 '사회 문제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박: 예전엔 운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의식화'를 위해 많이 노력했죠. '의식화'도 중요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된 '따뜻한 의식'으로 사회적 행동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 펜들 힐에서 돌아오실 땐 보람이 있으셨겠어요. 5년 반 만의 귀국이셨다죠?



박: 예. 저는 '선물'을 준비해 갖고 온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습니다. 81년, 크리스마스날 새벽, 13년 반 만에 감옥에서 돌아오던 때보다 더 큰 기쁨과 희망에 찬 귀향이었습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학교'라는 제 새로운 꿈(vision) 때문이었습니다.



김: '움직이는' 학교요?



박: 예. 움직이는 학교는 위치가 없습니다. 고정된 건물이나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학교는 사람과 사람이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마치 처음이듯 새롭게 다시 만나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가 아니고 '소프트웨어'지요.



그의 부연에 의하면,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이내의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임을 갖는다. '움직이는 학교'에선 한 사람이 너무 길게 말하거나 이야기를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둘러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며 누구나 이야기에 참여한다. 남이 이야기할 때 잘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잠기거나 상대방의 이야기 속의 허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온전히 내맡겨서 남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각자 1분 정도씩 말을 한다. 이야기할 준비가 미처 안 됐다고 느끼거나 혹시라도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말없는 손짓으로 옆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넘겨 주면 된다.



상대방의 말을 분석 비판하면서 듣고 허점을 발견하여 논박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통째로 듣기'가 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연습이 거듭되면서 조금씩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돌아가며 무르익어 간다.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 속에 잠자던 이야기를 일깨우는 실마리가 되고 상대의 진실이 나의 심금에 부딪쳐 와 내 소리를 울려낸다. 개성과 차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공감의 깊이가 더해지며, 나와 너의 진실이 맞닿고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며 해답이 주어진다.



김: 하나의 운동인 셈이군요.



박: 브랜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 학교의 정신적 푯대가 되는 원리는 물론 '경청'입니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놓고 하나님에게, 자연에게,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 학교에는 선생과 학생이라는 이분법적 분리가 없습니다.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이라고나 할까요. 이 선물을 받게 되는 이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김: 예수님이야말로 움직이는 학교 선생님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동안 개교를 많이 하셨나요?



박: 소리없이 퍼져가고 있지요. 움직이는 학교도 끊임없이 변해가야 합니다. 끝없이 배우고, 끝없이 비우고 가득 차고... 방법론 자체도 변해갈 겁니다.



김: 최근 우리 모두를 걱정시키고 있는 세계의 테러리즘에 대한 대안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박: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와 질병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문제 자체를 공격하는 방법이 아닌, 평화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국제 테러리스트의 행동을 통제하려면, 먼저, 또는 적어도 동시에 미국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 간디옹은 이렇게 놀라운 통찰의 말을 했지요.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들,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꿈 꾸라



그는 2001년 봄 학기부터 성공회 대학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박: 마음과 정성을 다해 우리가 서로 경청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지하수'를 뿜어 올릴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 '마중물'이요? 처음 들어요. 참 아름다운 단어네요.



박: 개인의 우물 하나 하나는 우리가 다 갖고 있는 기반이죠. 그 뒤에는 더 큰 하나님의 영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김: 말씀 나누다 보니까, 감옥에 계셨든, 외유를 하셨든, 선생님께서는 삶의 정수(精髓)만을 찾아다니는, 진짜 욕심쟁이같군요.



그가 환하게 웃었다. 대책 없어 보이던 첫 모습은, 공생(共生)의 삶을 끝없이 궁리하고 꿈꾸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보였다. 헤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오늘 나는 박성준 선생님이 주재하는 '움직이는 학교'의 1人 학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만치... 새로운 문이 열리고, 하얀 빛이 느껴졌다.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in the 1970s and 1980s: From Solidarity to Reflexive Democracy |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in the 1970s and 1980s: From Solidarity to Reflexive Democracy |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in the 1970s and 1980s: From Solidarity to Reflexive Democracy 1970年代、80年代の日韓連帯運動 連帯から自己変革を目指す民主主義へ
Misook Lee
September 21, 2014
Volume 12 | Issue 38 | Number 1





Introduction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to support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was active throughout the 1970s and 1980s in Japan among Korean residents (Zainichi1) and Japanese intellectuals and activists. Korean activists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have recalled the widespread international support of that era (Chi 2003, 2005; Park 2010; Kim 2010; Oh 2012), and Zainichi and Japanese activists have written about their activities in numerous books and memoirs (Chung 2006; Tomiyama 2009; Shouji 2009; Chung 2012). However,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has been relatively neglected in both Korean and Japanese scholarship. The few academic articles that mention the movement mainly focus on the activities of Zainichi (Cho 2006) and Christians (Lee 2012). This article extends analysis of the solidarity movement to show how its activities led to a process of self-reflection and self-transformation within Japan.

In order to understand the movement, we need to examine its historical context. Although the mass anti-US-Japan Treaty movement of 1960 (Anpo Tōsō) pivoting on tightly organized ideological sects ultimately failed, it paved the way for a new type of civic activism based on independent, self-organizing, and voluntarily participating individuals.2 This new type activism came to the fore in the subsequent anti-Vietnam War movement, which began to reconsider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Asia (particularly Vietnam). While denouncing US imperialism and aggression in Vietnam, many public intellectuals and activists came to question Japan's own past imperialism in Asia and its contemporary role in supporting the war under the US-Japan military alliance. This questioning led to “a shift from a comfortable mythology of national victimhood to a new morality founded on individual responsibility for both the past and the present” (Avenell 2010, 122). In other words, the sense of responsibility for Asia that emerged during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extended to Japan’s previous misdeeds as a colonial power.

The first part of this paper examines the international political and economic conditions surrounding South Korea and Japan in the postwar era and societal reactions to these conditions. It then traces the development of the movement through four stages: 1) from a support movement toward a process of self-questioning; 2) from self-questioning to recognition of the need for self-reformation through solidarity; 3) expansion of networks within the solidarity movement, and 4) evolution of the solidarity movement toward reflexive democracy. These phases were identified through analysis of publications and documents published by, and interviews with, key participants. By illuminating the evolution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and its role in Japanese society’s turn toward reflexive democracy, I hope to contribute to the understanding of Japanese social movement history, particularly transnational activism studies in Asia.

Background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1) International political-economic structure and the Japan-Korea Treaty of 1965

U.S. occupation, the Cold War and the division of Korea defined the economic and political situation of post-colonial South Korea. Following liberation from Japanese rule in 1945, South Korea experienced U.S. military rule and was heavily dependent on the United States for aid and political direction. As part of the U.S.-led anti-communist bloc in northeast Asia, the governments of South Korea and Japan opened talks in 1951 for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amidst the Korean War. Given the huge gap in perceptions of the two governments concerning the colonial era, the talks stalled. However, after Park Chung Hee seized power in South Korea in a military coup in May 1961, the talks eventuated in the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in 1965. The treaty adopted the language of “economic cooperation” instead of “apology” and “reparations” for the colonial past, as shown by its name: “Agreement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concerning the Settlement of Problems in regard to Property and Claims and Economic Cooperation.” The Japan-Korea Treaty established political-economic ties between the two U.S. allies under the Cold War system, rather than normalizing relations between the former colonizer and the former colonized. In the wake of the Japan-Korea Treaty, the politics and economy of South Korea became more dependent on Japan as well as the United States. In the context of this hierarchically linked three-party political-economic structure, Korean activists struggled, not only for human rights and democracy domestically, but also against U.S. and Japanese support for the military regime in South Korea.

Korean intellectuals and students, in particular, criticized the Japan-Korea Treaty for failing to obtain Japan’s apology and reparations for its colonial past. Korean thinkers and activists denounced the subordinate economic relationship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as “neocolonialism,” arguing that the Japan-Korea Treaty and Japanese economic advances in South Korea marked the “re-establishment of a high degree of influence and control by the colonial power whose depredations are so vividly remembered – Japan” (McCormack and Selden 1978, 9). Thus, in order to democratize Korean society and improve human rights and labor rights, Korean activists protested not only against their own government, but also agains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Japanese corporations. However, in part because of the military regime’s control of the media, the harsh critiques leveled by Korean activists against Japan’s colonial past were little noted in Japanese society.

2) Information networks amplify the voices of struggling Koreans

Most Japanese activists in the 1960s were scarcely aware of the nationwide movement of 1964-65 opposing the Japan-Korea Treaty movement in South Korea (Takasaki 1996). However,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in Japan provided a pool of Japanese activists, many of whom would become interested in the anti-government movement in South Korea.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increased interest in Third World liberation movements in Asia. Specifically, it raised question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Asia, and the nature of the Zainichi, who comprised 88 percent of foreign residents in Japan in 1965.3 In the late 1960s and the early 1970s, Zainichi had launched an anti-ethnic-discrimination movement with the cooperation of principled Japanese intellectuals and students. As Japanese became more interested in the voices of Zainichi, the Zainichi movement for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also caught the attention of some Japanese activists.4 Increasing awareness of Asia and the Zainichi led to growing interest among some Japanese in learning about the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At the same time, Korean activists sought to raise international awareness of and support for their movement. In late 1972, when the Yushin Constitution5 strengthened Park’s grip on the presidency and blocked domestic opposition, Korean opposition leaders like Kim Dae Jung tried to pressure the military regime by criticizing it from outside, and by building solidarity among overseas Korean compatriots. In addition, in 1973 in Tokyo, Oh Jae Shik, the secretary of the Urban Industrial Mission of the Council of Churches in Asia, established a Documentation Center for Action Groups in Asia to collect and translate information about and for South Korean activists (Lee 2012; Oh 2013). The effort to collect and share the voices of Koreans internationally became more systematic with the cooperation of Japan’s leading progressive opinion magazine, Sekai, and with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Japanese and Korean churches.

The monthly magazine Sekai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troducing the voices and thoughts of Koreans. Sekai published “The Korean Student Movement in the 1970s” by Nakagawa Nobuo, a Zainichi intellectual. Nakagawa introduced the argument of Korean students who held that Japan was an obstacle to the democratization and reunification of Korea, and that students should therefore advance the anti-Japan movement (Nakagawa 1972). In an interview with the editor in chief of Sekai, Yasue Ryōsuke, Kim Dae Jung criticized the Japan Socialist Party and the Japan Communist Party as well as progressive social groups for aligning themselves with North Korea while neglecting movements for social change in South Korea. He called on conscientious Japanese to “correctly recognize” South Korean democracy movements (Kim 1973: 118). Moreover, “Letters from South Korea,” written by T.K Sei, a pseudonym of Chi Myung Kwan, was serialized in Sekai soon after the Kim Dae Jung kidnapping incident in August 1973. This series (1973~1988), made possible by messengers who secretly carried underground information from South Korea to Japan, provided detailed information on the Korean struggles in the face of the Park regime’s repression (Chi 2003, 2005; Lee 2012).

International Christian networks operating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haring information. Many Korean Christians had studied at Japanese theological seminaries during the 1950s and the 1960s and had met Japanese Christians in other countries where they had gone for study or for international conferences and workshops. These networks linking Japanese and Korean Christians, especially progressive Christians, were strengthened in the context of the world ecumenical movement. In the early 1970s,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and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Japan (NCCJ) institutionalized annual meetings; the first was held in Seoul on July 2-5, 1973. The participants discussed (1) Japan’s economic advance, (2) the legal status of Zainichi, (3) Koreans in Sakhalin, (4) Japan’s immigration law, (5) Korean victims of the atomic bombing, (6) the YasukuniShrine, (7) sex tourism, and (8) history textbooks. The meeting produced a resolution calling for further cooperation (NCCK 1987). In short, Christian networks started to discuss and share their mutual criticisms of the Japanese government and mainstream Japanese society, Japan-Korea relations and the Park dictatorship.

These religious, social, and media pathways linking activists created a discursive political space for a transnational “imagined community” (Anderson 1983). Koreans and Japanese intellectuals and activists, who indirectly and directly communicated with each other, started to construct a common 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of Japan-South Korea relations. This was the background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in Japan.

Development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1) “Saving” in the early 1970s: from “helping” to “self-questioning”

In the early 1970s, when information infrastructure was not yet systematized, several groups formed a support movement for Korean prisoners of conscience. These prisoners included Kim Chi Ha, a poet with a strong anti-authoritarian stance, and the Suh brothers (Suh Sung and Suh Joon-sik), Zainichi who had come to South Korea for education and were arrested and sentenced as spies. The groups were formed in the context of growing interest in revolution and activism in Asia and Zainichi issues.

Poet Kim Chi Ha was one of the earliest Korean democratic figures to gain prominence in Japan. The movement to support Kim Chi Ha was formed upon his arrest under the anti-Communist Act6 for his poem “Groundless Rumors” (Piŏ), published in the Catholic magazine Changjo in April 1972. Two advocacy groups formed in Japan: one was founded by artist-activist Tomiyama Taeko, and the other by Oda Makoto, novelist and spokesperson of the Citizen’s League for Peace in Vietnam (Beheiren 1965-1974). The former group7(organized on April 19, 1972) mainly sought to convey Kim Chi Ha’s ideas through paintings and plays8 (figure 1 and 2).




Figure 1. Postcard of AI Japan. Tomiyama’s painting is based on Kim Chi Ha’s poem “Bronze Yi Sun-sin”


The latter group (organized on May 9, 1972 and headed by Oda) organized a “group to visit South Korea” to hand the Korean government a petition demanding the release of Kim Chi Ha (Tsurumi and Kim 1975). With little information on Kim or the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meeting him at the prison hospital came as a shock for the group. According to writer Tsurumi Shunsuke, when he presented Kim with the petition “for which we collected signatures from all over the world to demand that you not be given the death sentence,” Kim replied, “Your movement cannot help me, but I will add my voice to help your movement” (Tsurumi et al. 2004, 337). Tsurumi recalled his surprise at Kim’s strong statement, having expected gratitude. However, this response made him reflect on his naivety concerning a distant sufferer like Kim Chi Ha. As an activist opposing the Japan-Korea Treaty during 1964 and 1965, Kim had problematized the emerging collaboration between the Korean military regime and the former Japanese colonial power. Kim’s reaction to Tsurumi and the support movement enabled Japanese activists to that they should support the struggles of Korean activists through their own movement to question Japan’s role in Korea (Wada 1975a).

The arrest of the Suh brothers (Suh Sung and Suh Joon-sik) presented another important issue in the early 1970s. The Army Security Command of South Korea arrested fifty-one people in the “Zainichi students spy incident” on April 20, 1971, just one week before the presidential election in South Korea. Suh Sung was singled out as the leader of the alleged spy group. During interrogation, he underwent torture severe enough to make him attempt suicide, and he was sentenced to death.9In respondse to the arrest and the court proceedings, the Suh brothers’ family, classmates, and friends, as well as Zainichi organizations and various Japanese activists organized a movement supporting the Suh brothers.

The Committee to Save the Suh Brothers (organized on October 23, 1971) was an umbrella organization intended to unify activities in Tokyo and Kyoto. Shoji Tsutomu, a Protestant pastor and representative of the committee, was almost entirely ignorant of the historical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and of the conflict resulting from the division of Korea at that time (Shoji 2009, 28). Initially, the call to save the Suh Brothers was based on a humanitarian approach and their “Japanese-ness.” The death sentence appeal, published in the Committee’s first bulletin (October 1971), ended by noting: “these Zainichi Korean brothers were born in Japan and spent their youth in Japan. When they face death in the severe political situation, how can we Japanese remain silent?”10 By emphasizing the “Japanese-ness” of the Suh Brothers, the committee tried to attract sympathetic attention from Japanese citizens.




Figure 2. Leaflet from theatrical performance based on “Bronze Yi Sun-sin”


However, the humanitarian initiative calling for support of the Zainichi brothers, who were born and raised in Japan, soon developed into more reflexive questioning of Japan’s role in their suffering. Shoji reflected that Suh Sung’s final statement in court11provided the movement with a turning point; they started to question Japanese policies that supported the military regime of South Korea and prevented the unification of Korea (Shoji 2009, 62-63). Thus, commitment to the support movement led activists to greater awareness of the Zainichi perspective, and to question Japan's relationship with South Korea.

The movement began with a small number of Japanese intellectuals and activists as a support movement based on helping the distant other, the Japanese-like Zainichi. However, it soon evolved into a questioning of Japan’s role in shaping Japan-Korea relations and the division of Korea. This critical attitude emerged with direct contact and communication with Kim Chi Ha, Suh Sung and others, as well as a growing atmosphere of civic activism that questioned Japan’s role during the global anti-Vietnam War movement.

2) “Self-reformation” through solidarity in the mid-1970s

On August 8, 1973, Kim Dae Jung, South Korea’s opposition leader, was kidnapped in Tokyo by 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KCIA). This incident made even ordinary Japanese aware of opposition to the military regime in South Korea. Right after the kidnapping incident, Zainichi dissident groups became active to support Kim Dae Jung and made efforts to raise awareness among Zainichi and Japanese citizens about the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The first Japanese group to respond to the kidnapping incident was from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Aochi and Wada eds. 1977, 62-63). Triggered by the kidnapping and the ensuing protests and demonstrations in South Korea,12 anti-Vietnam War and other activists in Japan held a series of meetings to organize an umbrella group to bring together the disparate support groups that had emerged earlier. They called the new group the Council for correcting Japanese policy on South Korea and for solidarity with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日本の対韓政策をただし、韓国民主化闘争に連帯する日本連絡会議), for short, the Japan-Korea Solidarity Council (organized on April 18, 1974).

As their formal name suggests, solidarity implied changing Japanese foreign policy, which, by supporting the military regime in South Korea, obstructed democratization and unification. In the November 1975 issue of Sekai, Wada Haruki, general director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Council, wrote: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is teaching us the meaning of pursuing democracy and human rights. Moreover, it teaches us what Japan has done in South Korea. From our current situation, we still need to learn more. This is the meaning of solidarity (Wada 1975a 53-54).

Solidarity was understood as a process of listening to and learning from the voices of the struggling others toward the goal of self-reformation. This attitude was also found among Japanese Christians.

Japanese Christians organized a solidarity group called the Emergency Christian Conference on Korean Problems (ECC, on January 15, 1974). Responding to harsh critiques from Korean Christians and activists, progressive Japanese Christians formed the ECC to address Japan's colonial past as well as ongoing neo-colonialism, both of which structured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Korea. In its founding statement, the ECC explained how it was inspired by Korean activists to begin a process of self-reformation:


We were shocked to receive such harsh critiques and demands, born from their fearless faith-based struggles. That is, the Korean political situation in which people are risking their lives is related to Japan’s past colonization and current economic invasion. This problem is what we Japanese have to be responsible for before God.13

At its founding meeting, the ECC decided to investigate Japanese corporate encroachment in South Korea, as well as sex tourism and other issues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In other words, through solidarity activities, the ECC tried to learn not only about the situation of others, i.e. Koreans, but also the cause of their suffering structured by the Japan-South Korea relationship. This learning process was the basis for a new imagined community linking activists beyond borders.




Figure 3a. Cover Photo of Asian Women’s Liberation. From the first to third issues, covers depicted Korean women’s struggle for democracy and labor rights.


3) Enlarging networks among Zainichi, women, and laborers in the mid-1970s to the early 1980s

Cooperation among Zainichi and Japanese activists, including Christians, was remarkable, especially on the issue of Zainichi prisoners of conscience who were held in South Korea on charges of espionage. Zainichi family members organized the family association in May 1975 and fifty-four groups of Japanese activists formed the National Council to support Zainichi Political Prisoners in June 1976. These groups worked together to raise public support,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and to promote activities such as visiting and sending letters and cards to–prisoners of conscience in South Korea. In addition, representatives working for Zainichi prisoners of conscience visited the United Nations and Amnesty International in London to appeal for global support for the Zainichi prisoners.14

The growing networks among solidarity groups extended to the women’s movement. The women’s solidarity movement was born out of the issue of sex tourism, called Kiseng15 Kankou. The Japanese an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met together officially for the first time in July 1973; responding to a special request by the Council of Korean Christian women, the problem of sex tourism was placed on the agenda. Korean Christian women inspired Japanese Christian and non-Christian women to organize the group Women against Kiseng Kankou. At that time, anti-sex tourism movements sprung up not only in Korea but in Taiwan as well. Matsui Yayori, a well-known Asahi Shimbun foreign correspondent, played an active role in the anti-sex-tourism movement in Japan and in forging bonds with women activists throughout Asia.

On March 1, 1977, Matsui, Tomiyama Taeko, and several other women activists, most of whom had participated in the anti-sex tourism movement, organized the Asian Women’s Association. The founding statement declared their opposition to economic invasion and sex-exploitation. Reacting to the voices of Korean and other Asian women and “learning” from them, these Japanese women activists also formed a solidarity movement dealing with such issues as human rights, labor rights, and the colonial past, all of which were pertinent to East and Southeast Asian women.

Korean women’s struggles were the primary focus of the Asian Women’s Association. The cover photo of Asian Women’s Liberation, the bulletin of the Association, showed Korean women fighting against the repressive military regime (figure 3). In later years, the members of the Asian Women’s Association focused more specifically on war crimes committed against women, particularly the wartime “comfort women.”16




Figure 3b. Cover Photo of Asian Women’s Liberation. From the first to third issues, covers depicted Korean women’s struggle for democracy and labor rights.


The solidarity movement further broadened to include organizations devoted to the labor movement, which had long shown great sympathy toward North Korea. In the late 1970s, responding to the increasingly wide-ranging solidarity movement among Japanese activists, Christians, and Zainichi, Japanese labor-movement activists also joined in solidarity activities.17 The involvement of the General Council of Trade Unions of Japan (Sōhyō) in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was triggered by the Kwangju Uprising and the Kim Dae Jung crisis in 1980.18 Responding to the arrest of Kim, Zainichi dissident groups, civic solidarity groups, Christian groups, and even Sōhyō joined the solidarity movement. In order to coordinate their activities, a Meeting of Representatives to Free Kim Dae Jung was held on July 11, 1980 by Sōhyōand other groups; progressive political parties and the Council for Japan-Korea solidarity also joined. At this meeting, the participants organized the Japan Council for Saving Kim Dae Jung and set a goal of collecting ten million signatures.19According to Watanabe Tetsuro, the secretary for political affairs of the Tokyo office of Sōhyō, the campaign to collect ten million signatures on behalf of a foreign national was “the first and might be the last time”20 such an effort was undertaken in Japan. With Sōhyō’s participation, the number of people who attended the rallies and signed petitions dramatically increased21 compared to previous solidarity activities based on mainly civic participation (Figure 4).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peaked when Kim Dae Jung was sentenced to death on September 17, 1980. The movement quieted down when his sentence was eventually commuted to life imprisonment, and he and his family left for the United States at the end of 1982. Although the mass movement subsequently declined, it continued to work on specific issues, such as Zainichi prisoners of conscience, while responding to new issues that arose in the 1980s.

4) Reflexive democracy in the 1980s

By the early 1980s, Japan’s initial support movement based on humanitarian ideals developed into a more reflective phase of self-reformation (自己変革) through listening to and learning from the voices of others. Self-reformation involved questioning Japan’s role in Korea and rectifying Japanese foreign policy concerning Korea. After the intensity of the Kwangju Uprising and the life-threatening crisis for Kim Dae Jung, solidarity movement activists broadened their agenda to include such issues as history textbook treatments of Japanese colonialism and war and the movement protesting the fingerprinting system that singled out Zainichi, while continuing to call for solidarity with the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2, China and South Korea challenged the revision of Japanese history textbooks, which softened the description of Japanese aggression in Asia as mere “advance.”22 The Emergency Christian Conference on Korean Problems (ECC) and the Council for Japan-Korea Solidarity demanded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correct the wrong descriptions of Korea, … learn from the critiques by Koreans,” and “apologize for past colonial rule and strive to relax tensions on the Korean peninsula” (Leaflet, August 6, 1982). In addition, the Tokyo local of Sōhyō raised the history textbook issue in a document titled “Call for Japan-Korea Solidarity Actions” (October 16, 1982) and sent to their affiliated labor unions. Solidarity movement activists started to speak out about unsettled issues of the colonial past, demanding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ccept responsibility for thirty-six years of colonial rule in Korea.23




Figure 3c. Cover Photo of Asian Women’s Liberation. From the first to third issues, covers depicted Korean women’s struggle for democracy and labor rights.


On September 4, 1984, a collective meeting to protest the visit to Japan by South Korean president Chun Doo Hwan brought together the Japan Socialist Party and Sōhyō24 with groups associated with Wada Haruki (general director of the Japan-Korea Solidarity Council), Tomiyama Taeko, and Yoshimatsu Shigeru (general director of the National Council to Support Zainichi Political Prisoners). The meeting issued the following resolution:


The genuine resolution of the colonial past should begin with an apology to all Korean Minjung expressing the will of the people, including a resolution in the Diet. … With today’s meeting opposing the visit of Chun Doo Hwan, we strive to establish true friendship between Japan and Korea and will work to achieve the civil rights of Zainichi, including abolition of the fingerprinting system, and promote the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As shown,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turned to issues that directly addressed Japan’s internal concerns. Thus, while committing to the solidarity movement with Zainichi activists and sharing the cause of struggling Koreans, Japanese conscientious intellectuals and activists reflected on Japan's unsettled colonial past and on discrimination against Zainichi.

During the 1980s, the cooperation between Zainichi and Japanese intellectuals and activists broadened to include the “anti-fingerprinting system”, which resulted in the abolition of the system in 1992. Subsequently, efforts related to unresolved colonial problems came to the fore in both South Korea and Japan after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The Kono Statement (1993) on the recognition of and apology for comfort women and the Murayama Statement (1995), which apologized to Asian victims of Japanese imperial rule for the first time at the level of the Diet, may be seen as accomplishments due in part to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While the Japanese sense of responsibility and attitude of self-questioning began to emerge as early as the 1960s with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concrete proposals and actions toward “self-reformation” did not become central to civic activism until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s of the 1970s and 1980s.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provided an opportunity to listen to and learn from others’ viewpoints. With direct voices of the others, Japanese society became more sensitive to issues of war crimes and the human rights of Zainichi and other minorities. Thus, solidarity with “others” (Korean activists and Zainichi) simultaneously spurred a movement for reflexive democracy.

Conclusion




Figure 4. Japanese protesters rally under the banner, “Don’t Kill Kim Dae Jung!” on Nov 27, 1980 (photographed by Hashiguchi Jōji, February 1981, Sekai). According to Wada (1982), 7,000 people attended this rally.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touched off public questioning in postwar Japanese society on the nature and history of its relationship with Asia. This self-questioning of Japan’s role evolved into self-reformation with concrete agendas and actions during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ranging from rectifying Japanese support for the South Korean military dictatorship to calls to settle the colonial past and cooperate with Zainichi’s anti-ethnic discrimination movement. Ultimately, Japanese citizens pushed for internal change toward a more reflexive democratic system. This evolution toward reflexive democracy through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should be understood not only in the context of the worldwide anti-Vietnam War movement, but also as a product of the growth of formal and informal networks among Koreans, Zainichi, and Japanese.

Through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in the 1970s and 80s, progressive Japanese and Korean activists and intellectuals constructed an imagined community by sharing issues and concerns about democracy, peace and social justice in Asia. However, many critics have noted that these networks, which transcend national borders, peoples, and sectors, have faced increasing challenge in public discourse since the mid-1990s. Over the last twenty years, Japanese society has witnessed a counteroffensive to erase and deny Japan’s war crimes, including the sexual exploitation of women. Recently, hate speech vilifying Zainichi has found a new younger audience and mobilizing force through the Internet.

World geopolitics and political economy have changed dramatically since the end of the Cold War with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and the demise of the Communist bloc. The counteroffensive, including hate speech against Zainichi, could be interpreted in part as a Japanese reaction to neoliberal globalization intensified by the collapse of the Japanese bubble in 1990 and subsequent economic crisis. However, just as principled Korean, Zainichi, and Japanese activists countered the Cold War political economic system that structured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in the 1970s and 80s, the question remains whether new forms of transnational solidarity will emerge to give voice to those who have been silenced and to promote peace in Asia today.

Misook Lee is Project Assistant Professor, Graduate School of Arts and Sciences, University of Tokyo.

Recommended citation: Misook Lee, “The Japan-Korea Solidarity Movement in the 1970s and 1980s: From Solidarity to Reflexive Democracy,”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38, No. 1, September 22, 2014.

Notes

1 Zainichi are Korean residents of Japan who trace their roots to Korea at the time of Japanese colonial rule and who remain Korean citizens, including those born in Japan. The Zainichi community was politically divided between Sōren, established in 1945 and affiliated with North Korea, and Mindan, established in 1946 and affiliated with South Korea. However, many Zainichi did not align with either Sōren or Mindan, and some who were originally affiliated with Mindan separated from that group and espoused solidarity with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2 The Anpo Tōsō was “a moment remembered by academics and activists alike as the birth of independent citizen protest in postwar Japan” (Avenell 2010, 13).

3 Data from Statistics Bureau, Ministry of Internal Affairs and Communication.

4 The movement was led by several groups: the Korean Student Coalition, the Korean Youth Coalition, and the Mindan Tokyo office, which were critical of Mindan. Basically Mindan is affiliated with South Korea. However, when Park Chung Hee came to power with a military coup in South Korea, several groups within Mindan opposed its decision to support the military regime and separated from Mindan. See Miyata (1977) and Cho (2006).

5 President Park Chung Hee consolidated and systematized his power through the Yushin Constitution, which stipulated that the president would be elected for a six-year period with no limitation on the number of terms. See Dewind and Woodhouse (1979).

6 The act was passed in 1961, just after Park Chung Hee’s military coup. It “provides that persons who belong to, are affiliated with, praise or in any other way encourage or benefit a communist organization may be punished by imprisonment at hard labor for five to seven years” (Dewind and Woodhouse 1979, 15). The act was abolished in 1980, when it was integrated into the National Security Law.

7 In 1973, this group was dissolved and was absorbed by Amnesty International in Japan’s newly formed group “Kakyō” (架橋).

8 Theatrical performance based on Kim Chi Ha’s “Bronze Yi Sun-sin.” The original Korean title is Kuri Yi Sun-shin. Yi Sun-shin was a naval commander in the Chosŏn dynasty, famed for his victories against the Japanese navy during the Imjin War; he became a national hero. In this play, Kim Chi Ha criticized the Korean power elites who enjoyed wealth and power from collaboration with imperial Japan and exploited the poor and powerless people.

9 For more details, see Suh (1994). Suh Sung spent 19 years in the prison.

10 The Committee to Save the Suh Brothers (1992, 11).

11 See, Suh (1994). In his final statement, Suh Sung articulated that he would keep struggling for the Unification of Korea and pursuing positive nationalism. See, also, The Committee to Save the Suh Brothers (1992, 166).

12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students’ uprising on October 2, 1973, the one-million-person petition movement in December 1973, and a series of student uprisings in early 1974 had occurred in South Korea.

13 ECC statement, January 15, 1974. See, ECC (1976).

14 See Kim (1986). Representatives working for Zainichi prisoners of conscience visite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eleven times from the beginning until 1985.

15 The term Kiseng was originally made and used in pre-modern Korea, meaning a female entertainer and courtesan. The same term was also used to describe the sex tourism of Japanese businessmen in the 1960s and 1970s.

16 Matsui Yayori established the Asia-Japan Women’s Resource Center in 1994, organized the 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VAWW-NET) in 1998, and proposed 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which was held in Tokyo in 2000 with international cooperation. For more about Matsui Yayori, see the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17 Interview with Watanabe Tetsuro (November 9, 2011).

18 On May 18, 1980, in Kwangju, a city in southwestern South Korea, pro-democracy students and citizens demonstrated against martial law in Kim Dae Jung’s political base. The military regime sent in the army to crush the uprising. The result was a massacre. The government accused Kim Dae Jung of leading the Kwangju Uprising in an attempt to overthrow the government.

19 The number of signatures they had been able to collect by April 1981 was 5,258,819 (Wada 1982).

20 Interview with Watanabe (November 9, 2011).

21 The number of people who attended the national rally was approximately 15,000 on August 8, 17,000 on September 17, 6,000 on November 13, 7,000 on November 27, 7,000 on December 5, and 15,000 on December 22 (Wada 1982).

22 On the dispute concerning Japanese textbooks, see Nozaki and Selden (2009),

23 See Wada Haruki, Ishizaki Koichi, and the Sengo Gojunen Kokkai Ketsugi o Motomerukai, eds. (1996).

24 The Japanese government chose to compensate the victims through a private Asian Women’s Fund collected by voluntary Japanese citizens. Because the Japanese government did not accept national responsibility for compensation, many South Korean victims refused to accept monetary compensation from the Asian Women’s Fund. See Kim (2006), Morris-Suzuki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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