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알라딘: 김용옥, 노자: 길과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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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용옥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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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생물과, 철학과, 한국신학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하고 대만대학, 동경대학에서 철학석사학위를 받고, 하바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다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 6년의 학부수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대학, 중앙대학, 한예종, 국립순천대학교, 연변대학, 북경대학, 사천사범대학 등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제자를 길렀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등 90여 권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베스트셀러들을 통해 끊임없이 민중과 소통하여 왔으며 한국역사의 진보적 흐름을 추동하여왔다. 그는 유교의 핵심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와 <효경>의 역주를 완성하였으며, 그의 방대한 중국고전 역주는 한국학계의 기준이 되는 정본으로 평가된다. 그의 <중용>역주는 중국에서 번역되어(海南出版社) 중판을 거듭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신학자로서도 권위 있는 성서주석서를 많이 저술하였고, 영화, 연극, 국악 방면으로도 많은 작품을 내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국학國學의 정립을 위하여 한국의 역사문헌과 유적의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또 계속 진행되는 유튜브 도올TV의 고전 강의를 통하여 그는 한국의 뜻있는 독서인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금강경 강해(개정신판)>,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노자가 옳았다>는 모두 그의 새로운 국학의 여정을 예고하는 역작들이다. 접기


최근작 : <동경대전 2>,<동경대전 1>,<노자가 옳았다> … 총 9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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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동경대전 2>,<동경대전 1>,<이성의 기능>등 총 110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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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2014-07-27 공감 (0) 댓글 (0)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글에서 '공부와 학습'에 관련된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이미지-버전으로 올린다. 이 또한 오프라인용 글쓰기를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당시 글을 쓴 계기는 북매거진 <텍스트>에 실린 한 서평이었지만, 몇 호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호 <텍스트>에는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 2004)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서평자도 쓰고 있지만, 이 책이 ‘최초의 평전’이라는 건 다소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백범의 '나의 소원' 중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언제 읽어도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옮겨본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반 세기도 더 전의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보다 근본적인 건 계급적 적대인가?). 그런데 그걸 키워줄 수 있는 건 자연과학이 아니라(예컨대, 인간복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문화의 힘이다(그렇다면, 백범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이다.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문화이고 출판문화이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즐거움의 향유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즐거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히다’란 말은 (1)(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위해) 암기/습득하다 (2)(생활 속에서) 실천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러시아어 번역은 이 대목을 “배우고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옮기고 있다(세메넨코의 번역). 러시아어본에 따를 때, 군자(君子)란 ‘자기완성’의 인간이고, 유교는 자기완성을 위한 종교이다. 문제는 무엇이 ‘완성’인가라는 점. 무엇이 배움의 완성이고 자기완성인가?



열심히 사서삼경(혹은 육법전서)을 암기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배움의 완성인가? 그건 어떤 단계(혹은 집안의 부흥)를 뜻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으로는 좀 모자라 보인다(요즘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고시도 ‘자격증화’되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막연하다(사실 막연하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익힌다’는 말을 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공자가 ‘학이시교지(學而時敎之)’라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교(敎)’자는 너무 딱딱하긴 하다).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군자의 모델로서의 공자야말로 (자신이 배운/터득한 걸)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더불어 실습(實習), 즉 실제로/진짜로 배운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배운 걸 해보는 것인바, 교사들의 ‘교생 실습’이란 자신이 배운 걸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말한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즉, ‘자왈(子曰)’ 이전에는 공(孔)선생도 군자도 없는 것이다(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이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이다(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곧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이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동무’란 말처럼 북한에서 너무 자주 쓰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무’ 대신에 ‘친구’를 갖게 됐듯이, 우리는 주로 ‘학습’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것일까?).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는 ‘비변증법적’이다(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유물변증법 ‘학습’일 것이다).



























변증법적인 ‘학습’의 ‘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물론 '가르치다-배우다'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지만 여기서는 거기까지 나가진 않도록 하겠다),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德)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김용옥은 ‘덕(德)’을 ‘얻음’으로 옮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이다(지젝은 라캉에 대해 계속 씀으로써 비로소 라캉을 읽는다. 즉, 읽기 위해서 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 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이어야 하며, 그리고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렇다.



<도덕경>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나오는데(이 ‘대기만성’은 ‘인과응보’와 함께 중학생때 교내 가훈전시회를 위해서 급조해낸 우리집 가훈이었다. 사자성어 사전에서 뜻이 좋다고 골라낸 것인데, 그 ‘인과응보’에 나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대기만성’이라나!), 그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이다(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크지 않다!). 즉,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리킨다. 아무리 큰 유한도 무한보다는 작기 마련이기에 가장 큰 유한이란 곧 무한인 것. 해서, “큰 그릇의 바깥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 곧 군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가장 큰 유한)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무한)이다. 그래서 ‘자왈’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사르트르)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해서, 앙가주망은 그런 자동사적 글쓰기와 대립/모순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부른바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다소 상식적인) “컨텍스트의 바깥은 없다”와 등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텍스트-무한은 곧 컨텍스트 아닌가?)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란 ‘즐거운 계몽주의’이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자면(그는 한동안 경전 공부를 했었다), ‘세상과의 연애’이다: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

물론 매일같이 읽고 쓰는 우리의 ‘공부’, 혹은 ‘학습’이 당장에 좋은 세상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백범의 표현을 빌면,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데리다의 ‘민주주의’만큼이나, 혹은 ‘메시아’만큼이나 더디게 (하지만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울음’ 또한 당장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이성복, '아들에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작부들과 물수건과 속쓰림은 또 그 나름대로 자동사이다. 울음이 그러하듯이. “한 여인이 웬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흐느끼며, 흐느껴 울며 갔다 콸콸대는 물소리 같은 울음을 거푸 울며 여러 번 길을 건너갔다 아무한테도 그 울음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상 끝까지 울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듯이 울며 갔다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 꽃핀 벚나무의 검은 가지처럼 검은 길을 그 울음으로 적시며”(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7')

우리는 그렇듯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에 대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다만 기다려볼 따름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베풀면서 고대해볼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날을. 하지만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나라”는 “가장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계와 구별이 없는 나라일 것이니, 세계 자체와 등가일 것이다(우리나라=세계). 우리 나라도 너네 나라도 없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진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초월론적 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매일같이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06.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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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2 공감 (5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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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도올 김용옥 13경 번역작업.




지금 박상익 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고 있다.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쉽지 않은 역사서지만, 매끄러운 번역에 감사하며 읽고 있다.

박상익 교수가 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책이 있어 쭉 살펴보았다.

국내외 번역의 현주소와 나름대로의 제안을 내놓았다.

우선 중국은 서역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대 서양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서 번역하면서
그 나라 학문연구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서유럽도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하면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번역경시 풍조에 대해서도 말한다.

1. 번역은 학문성과로 인정받지 못함
2. '매춘교수' 또는 '기지촌교수'들의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주어 취합한 날림 번역의 문제
3. 번역료의 문제 : 원고지 1장당 1,300원 정도의 헐값

위 문제들은 1985년도에 출간된 도올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으로, 박상익 교수도 도올 김용옥을 계속해서 인용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서유럽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문명을 통해 받아들였다는 부분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이슬람 문명에 의해 번역되어 흡수, 발전되었고,
나중 서유럽이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할 때 발견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었고, 그 결과 르네상스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상익 교수의 말대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지금의 '잃어버린 100 년'이
'잃어버린 200 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번역가들의 노고를 날로 받아먹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의 원전을 번역하고 있는 천병희, 강대진 교수와
이 책을 쓴 서양사 부문의 박상익 교수,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이 분들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상한 시절을 헤쳐나갈 수 있는 해답은
인문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인문학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번역가들이 인정받는 시대도 곧 올 것이다.



- 도올 김용옥 번역 작업 리스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5) - 번역의 문제제기
화이트헤드 : 이성의 기능(1998)
금강경강해(1999)
노자 도덕경 : 길과 얻음 (2000)
요한복음강해(2007)
큐복음서(2008)
논어한글역주(2009)
효경한글역주(2009)

도올 김용옥 비판서들 중에 학문적 성과를 예로 들면서,
아직까지 제대로 이룬 것이 않느냐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럿인데,
이 사람들은 위에 말한 대로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
자기 소원이 13경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업에 돌입하신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끝까지 완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13경
<주역><서경><시경><주례><예기><의례><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논어><효경><이아><맹자>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민족문화추진위에서 고전 국역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중이다.
역사 좋아하는 분들은 위에서 모든 국역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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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튼 2009-11-04 공감 (2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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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배

노자, 길과 얻음/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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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24. 15:48

 이웃추가

1.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앞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뭇 묘함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

 

2.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못생김이다.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좋음의 좋음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좋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친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은 지어지면서도 잔소리 아니하고 낳으면서도 가지려 아니하고 하면서도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살 생각 아니한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 생각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3.
현명한 이를 숭상치 말라! 백성들로 다투게 하지 말지어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말라! 백성들로 도둑이 되게 하지 말지어다. 욕심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로 그 마음이 어지럽게 하지 말지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늘 백성으로 앎이 없게 하고 바램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알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4.
길은 빔으로 가득하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 그윽하도다! 온갖 것의 으뜸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는도다. 맑고 맑도다! 있는 것 같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네. 상제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5.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온갖 것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어질지 않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같고 대피리같도다. 속은 비었는데 구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오는도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다.

 

6.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어 있는 것 같도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곡신(谷神)이란 골짜기 가운데의 빈 곳이다. 형태나 그림자가 없고, 거스르거나 어기지 않으며, 낮은 곳에 처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함을 지켜 시들지 않으니,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되 그 형상을 보이지 않으니 지극한 존재다. 낮은 곳에 처하면서 고요함을 지키고 있어 이름을 지을 수가 없으므로 현빈(玄牝)이라고 부른다. 문이란 현빈이 말미암는 곳이다. 그 말미암는 바의 근본은 태극과 더불어 한 몸이므로 천지의 근본이라고 부른다. 있다고 말하려고 하니 그 형상을 볼 수 없고,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므로 '겨우겨우 이어진다'고 했다 모든 사물을 이루어 주면서도 힘들지 않으므로 '쓰는 데 힘들이지 않는다'고 한다.(왕필주석)

 

7.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8.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길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짐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다스림을 좋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함을 좋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도다.

 

9.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을 가득 채우면 그를 지킬 길이 없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10.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를 오로지 하고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가믈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능히 흠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또 밝아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길은 생겨나고 덕은 쌓아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지배치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네.

 

※움직이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기운을 모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때를 깨끗이 닦아내어 흠 하나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자연이 변화하는 대로 저절로 따를 수 있겠는가? 사방을 환히 알면서도 작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며,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일을 하지만 뽐내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부리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 한다.(임채우)

 

11.
서른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머리에 모인다. 그 바퀴머리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가 됨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12.
다섯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다섯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 달리며 들사냥질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감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상(爽)은 어긋나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입의 기능을 잃게 하므로 '상'이라고 했다. 저 귀 눈 입 마음은 모두 그 타고난 본성에 따라야 하는 것인데, 성명(性命)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그러함을 해치기 때문에 눈 멀고 귀 먹고 입맛 버리고 미친다고 했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바른 길을 막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요상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했다. 배를 위한다는 것은 사물로 자신을 기르는 것이고, 눈을 위한다는 것은 사물에 의지해 자기가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눈을 위하지 않는다.(왕필주석)

 

13.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사람은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한 것이다.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나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14.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荑)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이희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것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것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하다 하도다.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의 길을 잡어 오늘의 있음을 몬다. 능히 옛 시작을 아니 이를 일컬어 길의 벼리라 한다.

 

※(도는)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소리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므로,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더 이상 나의 귀 눈 몸으로는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캐물을 수 없고, 섞여서 하나이다.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려 하니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사물이 없는 형상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이른다.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이 만물의 근본이다. 비록 지금과 옛날이 같지 않고 때가 바뀌고 풍속이 변했지만, 참으로 모두 이(무형무명의 도)에 말미암아 치세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옛날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일들을 다스릴 수 있다. 아득한 옛날이 비록 멀지만 그 도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지금에 있어도 옛날의 시원을 알 수 있다.(왕필주석)

 

15.
옛부터 길을 잘 실천하는 자는 세미하고 묘하며 가물하고 통한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이 없다. 대저 오로지 헤아릴 길이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내를 건너는 것 같고. 쭈물거리네.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고.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 흩어지도다. 녹으려 하는 얼음과 같다.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 같고. 텅 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 혼돈스런 모습이여.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을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채우려 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새로이 이루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도를 얻은 이는 미묘하고 그윽히 통달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지만 억지로 말해보자면 마치 살언 겨울강을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듯 신중하며, 찾아온 손님처럼 엄숙하다가도, 얼음이 녹듯이 푸근하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질박하며, 계곡같이 비고, 혼탁한 듯 세속에 섞여 있다. 누가 능히 혼탁하게 섞여있음으로써 천천히 맑게 할 수 있겠으며, 누가 능히 가만히 놓아둠으로써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득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무릇 채우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덮어둘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임채우)

 

16.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온갖 것은 풀처럼 쑥쑥 자라지만 모두가 결국에는 각기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또 일컬어 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제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온갖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 맞으면 길에 들어 맞는다. 길에 들어 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위태롭지 아니하다.

 

※완전히 비우고 아주 조용함을 지키라. 만물이 다 함께 자라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되돌아감을 보나니, 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로 다시 되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고요해지니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한다고 하고, 명을 회복하면 영원하게 되며 영원함을 알면 밝다고 하나니, 영원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영원함을 알면 통하게 되니, 통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왕이 되고, 왕이 되면 하늘과 같게 되고, 하늘과 같으면 도를 얻게 되며, 도를 얻으면 오래갈 수 있으니, 평생 위태롭지 않게 된다.(임채우)

 

17.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친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곳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그윽하도다! 다스리는 자는 그 말을 귀히 여기는 도다. 공이 이루어지고 백가지 성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고 하는도다!

 

18.
큰 길이 없어지니깐 어짐과 옳음이 있게 되었다. 슬기로움이 생겨나니깐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육친이 불화하니깐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국가가 어지럽게 되니깐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19.
성스러움을 끊어라. 슬기로움을 버려라. 뭇사람의 이로움이 백배할 것이다. 어짐을 끊어라. 옳음을 버려라. 뭇사람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다. 교사스러움을 끊어라. 이로움을 버려라.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셋은 문명의 장식일 뿐이며 족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아감이 있게 하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을지니 사사로움을 적게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20.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네와 아니요가 다른 것이 얼마뇨? 좋음과 싫음이 서로 다른 것이 얼마뇨? 사람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 또한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으리. 황량하도다! 텅 빈 곳에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네. 뭇사람들은 희희낙낙하여 큰 소를 잡아 큰 잔치를 벌리는 것 같고, 화사한 봄날에 누각에 오르는 것 같네. 나 홀로 담담하도다. 그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아니함이 웃음 아직 터지지 않은 갓난 아기 같네. 지치고 또 지쳤네.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왜 나홀로 이다지도 부족한 것 같은가? 내 마음 왜 이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혼돈스럽도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 홀로 흐리멍텅할 뿐일세. 세간의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 홀로 담담할 뿐일세. 담담하여 바다같이 너르고, 거센 바람 일 때는 그칠 줄을 모르네. 뭇사람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완고하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네.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온갖 것을 먹이는 엄마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21.
빔의 덕의 포용만을 오로지 길은 따를 뿐이다. 길의 것됨이 오로지 황하고 오로지 홀하다. 홀하도다 황하도다! 그 가운데 모습이 있네. 황하도다 홀하도다! 그 가운데 것이 있네. 그윽하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 그 정기가 참으로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니 이로써 뭇 처음을 살필 수 있지. 뭇 처음의 모습을 어찌 알랴! 이 길로 알 뿐이지.

 

22.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으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하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를 껴안고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니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니 빛난다. 스스로 뽐내지 않으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치 아니하니 으뜸이 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 옛말에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진다 한 말이 어찌 헛말일 수 있으랴! 진실로 온전할지니 길로 돌아갈지어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다즉혹)

 

23.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오래갈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서랴! 그러므로 길을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길을 구하는 자는 길과 같아지고 얻음을 구하는 자는 얻음과 같아지고,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길과 같아지는 자는 길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얻음과 같아지는 자는 얻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겨이 얻으리.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말은 적은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사나운 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퍼붓는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다.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이는 도와 동화되고, 덕을 추구하는 이는 덕과 동화되며, 잃을 일을 좇는 자는 잃어 버리게 된다. 도와 하나가 되면 도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덕과 같아지면 덕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를 잃는 일에 같이 하면 바로 잃어 버리게 되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므로, 불신이 있다.(임채우)

 

24.
발꿈치를 올리고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길에 있어서는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살이라 한다. 세상은 그것을 혐오할 것이다. 그러므로 길이 있는 자는 처하지 아니하리니.


25.
혼돈되이 이루어진 것이 있었으니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겼다. 적막하고 모습이 없네. 쓸쓸하도다. 짝없이 외로이 서서 함부로 변하지 않는다. 가지 아니하는 데가 없으면서도 위태롭지 아니하니 가히 하늘 아래 어미로 삼을만 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해, 그것을 글자로 나타내어 길이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지어 크다고 하네. 큰 것은 가게 마련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게 마련이고,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게 마련이네. 그러므로 길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의 주인 또한 크다. 너른 우주 가운데 이 넷의 큼이 있으니 사람이 주인이 그 중의 하나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을 뿐이다.

 

※서(逝)는 가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돌아다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서'라고 했다. 원(遠)은 끝닿는 것이다. 두루 다니면서 끝까지 가지 않은 바 없어서, 한쪽으로만 치우쳐 가지 않으므로 멀어진다고 했다. 가는 바대로 따르지 않고, 그 몸은 우뚝 서 있으므로(즉 도는 독립해 있으므로) '반(反)'이라고 했다.(왕필주석)

 

26.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안정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된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종일 걸어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 놓지 않고, 비록 영화로운 모습이 보이더라도 한가로이 처하며 마음을 두지 않는다. 어찌 일만수레의 주인으로서 하늘 아래 그 몸을 가벼이 굴릴 수 있으리요?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조급히 하면 그 머리를 잃는다.

 

27.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잘 맺는 자는 끈을 쓰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늘 사람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늘 사물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잇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며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요체라 한다.

 

28.
그 수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 계곡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아니하니 다시 갓난아기로 되돌아 간다. 그 밝음을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하늘 아래 모범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어긋나질 아니하니 다시 가없는데로 되돌아 간다. 그 영예를 알면서도 그 굴욕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골이 된다. 하늘 아래 골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이에 족하니 다시 질박함으로 되돌아 간다.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그릇이 생겨난다. 성스러운 사람이 이 그릇을 써서 세상의 제도를 만들고 따라서 그 우두머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큰 다스림은 자르지 않는 것이다.

 

※수컷은 앞서는 성질을 가진 분류이고, 암컷은 뒤쳐지는 붙이다. 세상에서 앞서려고 하면 반드시 뒤쳐지게 됨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두지만 앞서고, 계곡은 사물을 부르지 않지만 사물이 스스로 돌아가고, 어린아이는 꾀를 쓰지 않지만 저절로 자연의 지혜에 합치한다... 크게 짓는다는 것은 천하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 것이므로 자르지 않는다.(왕필주석)

 

29.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 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도무지 거기다 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자는 패할 것이요, 잡는 자는 놓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물의 이치는 앞서 가는 것이 있으면 뒤 따라가는 것이 있고, 들여 마시는 것이 있으면 내 뿜는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 작게 꺽이는 것이 있으면 크게 무너지는 것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리고 과분한 것을 버린다.

 

※만물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따를 수는 있어도 작위할 수는 없고, 통할 수는 있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물에는 일정한 본성이 있는데 (억지로) 작위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사물은 오고 가는데(즉 자기 나름대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붙잡으려하기 때문에 필히 놓치게 된다.(왕필주석)

 

 30.
길을 가지고 사람의 주인을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무력의 댓가는 반드시 자기에게 되돌아 오기 마련이다. 군대가 처한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고, 대군이 일어난 후에는 반드시 흉해가 따른다. 부득이 해서 어려움을 잘 구해줄 뿐이지 무력으로 남을 취하지 않는다. 좋은 성과가 있어도 자고치 아니하며 좋은 성과가 있어도 뽐내지 아니하며 좋은 성과가 있어도 교만치 아니한다.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부득이해서 그러했을 뿐이니, 성과를 올렸다고 해서 강함을 나타낼려 하지마라. 모든 사물은 강장하면 할수록 일찍 늙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길답지 아니하다고 한다. 길답지 아니하면 일찍 끝나버릴 뿐이다.

※장(壯)은 무력으로 사납게 일어나는 것이니, 군사로 천하에 강포함을 비유한 것이다. 사나운 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하므로, 사납게 일어난 것은 반드시 도에 맞지 않으므로 일찍 그친다.(왕필주석)

 

31.
대저 아무리 정교한 병기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것을 혐오할 뿐이니 그러므로 길이 있는 자는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 덕을 갖춘 사람은 평상시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전쟁시에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무기란 것은 도무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며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해서 그것을 쓸 뿐이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선 항상 담담초연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개가를 올려도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일 뿐이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하늘 아래 뜻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고례에 길사때에는 왼쪽을 높은 자리로 하고 흉사 때에는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하는 법이다. 부관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이것은 곧 상례로써 전쟁에 처하란 말이다. 사람을 그다지도 죽였으면 애통하는 마음으로 읍할 것이다. 전쟁엔 승리를 거두어도 반드시 상례로써 처할 것이다.

 

32.
길은 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제후 제왕이 능히 이 길을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스스로 질서 지워질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면 단 이슬이 내리듯이, 백성들은 법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제 질서를 찾는다. 스스로 그러함에 제동을 걸어 비로소 이름이 생겨난 것이니, 이름이 이미 생겨난 연후에는 대저 또한 그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침을 알아야 위태롭지 아니할 수 있다. 길이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온갖 계곡의 시내들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3.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 말로 밝은 것이다.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 말로 강한 것이다.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꾀를 쓰는 것은 그 꾀를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힘을 쓰는 것은 그 힘을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니, 스스로에 밝으면 사람들이 그를 피하지 않고(혹은 다른 사람들도 밝게 알 수 있고) 자신에게 힘을 쓰면 다른 사물을 고칠 필요가 없다.(왕필주석)

 

34.
큰 길은 범람하는 물과도 같다.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이 이 길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데도 그 길은 잔소리 하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만물을 입히고 먹이면서도 주인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다. 늘 바램이 없으니 작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 만물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는데 주인노릇을 하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5.
큰 모습을 잡고 있으면 천하가 움직인다. 움직여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안락하다.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손을 멈추게 하지만, 길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도무지 담담하여 맛이 없다. 그것을 보아도 보기에 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들어도 듣기에 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써도 쓰기에 궁함이 없다.

 

36.
장차 접을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거라. 장차 약하게 할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 주거라. 장차 폐할려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주거라. 장차 뺏을려면 반드시 먼저 주거라. 이것을 일컬어 어둠과 밝음의 이치라 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이니라. 물에 사는 고기는 연못을 튀쳐나와서는 아니 되나니, 나라의 이로운 기물은 사람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將欲廢之, 必固興之(장욕폐지 필고흥지)

 

※강압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을 제거하려고 하면 마땅히 이 네가지로써 해야 한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해치게 하는 것이니, 형벌을 빌리는 것을 능사로 삼아 사물을 해치지 않으므로 '미명(微明)'이라고 한다. 충분히 펴고 흡족하게 해주었는데도 다시 펴려고 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빼앗김을 당하게 되지만, 이와는 달리 상대에게 부족하게 펴주어서 다시 더 펼침을 구하게 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보탬이 되고 자신은 위태로워진다.(왕필주석)

 

37.
길은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제후와 제왕이 만약 이를 잘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장차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누가 교화한다고 무엇을 하려 한다면 나는 그 놈을 이름도 없는 통나무로 때려 눕힐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망이 없을지니, 바램이 없어 고요하면 하늘 아래 인간세가 스스로 질서를 찾아갈 것인지.

 

※道常無爲, 而無不爲(도상무위 이무불위)

 

38.
윗덕은 덕스럽지 아니하다. 그러하므로 덕이 있다. 아랫덕은 덕스러우려 애쓴다. 그러하므로 덕이 없다. 윗덕은 함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서 함이 없다. 아랫덕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좋은 어짐은 함이 있으되 무엇을 가지고서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좋은 옳음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좋은 예법은 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꿈치를 잡아 내동갱이 친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린 후에나 덕을 얻는 것이요, 덕을 잃어버린 후에나 어짐을 얻는 것이요, 어짐을 잃어버린 후에나 옳음을 얻는 것이요, 옳음을 잃어버린 후에나 예법을 얻는 것이다. 대저 예법이란 것은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믿음의 엷음이요 모든 어지러움의 머리다. 시대를 앞서 간다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길의 허황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시단이다. 그러하므로 어른스러운 큰사람은 그 도타움에 처하지 그 잃음에 살지 아니한다. 그 열매에 처하며 그 꽃에 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부실덕 시이무덕)

 

※상덕은 덕스럽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있고, 하등의 덕은 덕을 잃으려 하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없다. 상등의 덕을 지닌 사람은 무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작위하지 않고, 하등의 덕을 지닌 사람은 작위하되 일부러 한다. 상등의 인은 작위하지만 일부러 하지는 않고, 상등의 의는 작위하면서 일부러 하며, 상등의 예는 자기의 행위에 응답이 없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시킨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 버린 후에야 덕이 있고, 의를 잃어 버린 후에야 인이 있으며, 인을 잃어 버린 후에야 의가 있고, 의를 잃어 버린 후에야 예가 있으니, 저 예라는 것은 충직스러움이 사라지고 혼란으로 가는 시초이다. 남보다 앞서서 안다는 것은 도의 꽃, 즉 화려함이면서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장부는 후덕하게 행동하고 각박하지 않으며, 그 열매에 처하고 꽃에 머물지 않으므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이다.(왕필주석)

 

39.
옛날에 하나를 얻은 사람들은 그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이치에 도달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말갛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코, 하늘의 기운은 하나를 얻어 신령하고, 땅의 골은 하나를 얻어 빔으로 차고, 만가지 것은 하나를 얻어 생겨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 하늘 아래를 평안히 다스린다. 이는 모두 하나로써 이룰 뿐이다. 하늘은 하나로써 맑지 못하면 갈라질 것이요, 땅은 하나로써 편안치 못하면 짜개질 것이요, 하늘의 기운은 하나로써 신령치 못하면 가물 것이요, 땅의 골은 하나로써 비어차지 못하면 마를 것이요, 만가지 것은 하나로써 생겨나지 못하면 멸할 것이요, 제후와 제왕은 하나로써 고귀하지 못하면 실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으로 뿌리를 삼고, 높음은 낮음으로 바탕을 삼는다. 그러므로 제후와 제왕은 늘 스스로를 일컬어 고독한 사람이라 하고 부족한 사람이라 하고 불곡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함으로 뿌리를 삼는다 함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주 가마를 타는 것은 가마를 아니타니만 못하다. 녹녹하여 옥석같이 빛나기를 삼가고 낙낙하여 보석같이 빛나기를 삼가라.

 

※일은 숫자의 시초이자 사물의 궁극점이다. 각각의 사물들은 일이 낳은 것이니 일이 만물의 주가 된다. 사물은 모두 각각 이 하나를 얻어서 만들어지니, 만들어진 뒤에는 하나를 버리고 만들어진 데에 거한다. 만들어진 데 거하면 그 근원, 즉 하나를 잃게 되므로, 갈라지고 흔들리고 없어지고 말라버리고 소멸되고 쓰러진다.(왕필주석)

 

40.
그 반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 길의 늘 그러한 움직임이다. 약한 것은 길의 늘 그러한 쓰임이다. 하늘 아래 만가지 것들이 있음에서 생겨났는데,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도다.

 

41.
훌륭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열심히 그를 실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중간치기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긴가민가 할 것이다. 그런데 하치리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깔깔대고 웃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치리들이 웃지 않으면 내 길은 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전해 오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밝은 길은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윗덕은 아랫 골 같고,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너른 덕은 부족한 것 같고, 홀로 서 있는 덕은 기대 있는 것 같고, 질박한 덕은 엉성한 것 같다. 큰 사각은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 진 것 같지 않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길이란 늘 숨어 있다. 길이란 늘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대저 길처럼 자기를 잘 빌려 주면서 또한 남을 잘 이루게 해 주는 것이 있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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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像無形(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큰 도는 평평하지 않은 것 같고 : 뇌는 깊은 웅덩이이다. 크게 평평한 도는 사물의 본성에 따르기 때문에 사물을 잘라서까지 평평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평평함이 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깊은 웅덩이 같다. 최상의 덕은 아무 것도 없는 골짜기 같고 : 그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아 마음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흰 것은 때 묻은 듯 하고 : 흰 것을 알되 어두운 것을 지키는 것은 아주 희어야 가능하다. 솔직한 진실은 틀린 것 같고 : 질박한 참모습은 그 참됨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마치 사실과 위배되는 듯하다.(왕필주석)

 

42.
길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데 셋은 만가지 것을 낳는다. 만가지 것은 어둠을 등에 지고 밝음을 가슴에 안고 있다. 텅빈 가운데 기름 휘젖어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독과 부족과 불곡인데 제왕과 제공들은 이것들로 자기를 부른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보태지고 보태면 덜어지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칠 뿐이다. 모든 강폭한 것은 제명을 살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이것으로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는다.

 

43.
하늘 아래 가장 여린 것이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것을 앞달린다. 사이가 없는 곳에 까지라도 아니 들어감이 없다. 나는 이로써 함이 없음의 위대함을 안다. 말하지 아니하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을 하늘 아래 미치는 자가 없다.

 

44.
이름과 내 몸, 어는 것이 나에게 가까운 것이냐? 내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귀중한 것이냐? 얻음과 잃음, 결국 어느 것이 병이냐? 이 까닭으로 심히 아끼다간 크게 쓰게 되고, 많이 간직하다간 반드시 크게 망하게 되리.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으리. 그리하면 머리가 되고 또 오래 가리.

 

45.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크게 정교로운 것은 졸한 것 같고, 크게 말하는 사람은 더듬는 것 같다. 뜀으로 추위를 이기고, 쉼으로 더위를 이기는데, 그래도 쉬어 깨끗함이 하늘 아래 바른 것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대성약결 기용불폐), 大盈若沖 其用不窮(대영약충 기용불궁), 大直若屈(대직약굴), 大巧若拙(대교약졸), 大辯若訥 (대변약눌)

 

46.
하늘 아래 길이 있으면 전장에서 달리는 말도 되돌려 똥구루마를 끌게 하는데, 하늘 아래 길이 없으면 아기밴 암말조차 전장에서 해산을 한다. 족함을 모르는 것처럼 인간에게 큰 화는 없다. 바램을 계속하는 것처럼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족이야말로 늘 족한 것이다.

 

47.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알고 창밖을 내다 보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나갈수록 멀어지고, 알수록 적어진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니지 아니하여도 알고, 드러내지 아니하여도 드러나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엿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不出戶 知天下) : 사물마다 종주(본질과 근원) 되는 것이 있으니, 길은 다르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고, 생각은 갖가지이나 이르는 곳은 하나다.(왕필주석)

 

48.
세상이 말하는 배움을 하면 매일 불어난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길을 하면 매일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들어 함이 없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함이 없는데까지 이르면 되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하늘 아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일이 없음으로 하라. 일이 있는데 이르게 되면 하늘 아래를 다스리기엔 부족하리로다.

 

49.
성스러운 사람은 항상스런 마음이 없다. 오로지 백가지 성의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 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 준다. 그러하므로 나의 좋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믿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나는 믿을 뿐이다. 그러하므로 나의 믿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하늘 아래에 임할 때에는 늘 화해롭다. 하늘 아래를 위하여 늘 그 마음을 혼돈되이 한다. 모두 귀와 눈을 곤두 세울 때, 성스러운 사람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

 

50.
삶을 떠나면 죽음으로 가게 마련이다. 삶의 무리가 열에 셋이 있다면, 죽음의 무리도 열에 셋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 움직여 죽음의 땅으로 가는 기회 또한 열에 셋이 있다. 대저 왠 까닭인가? 그 삶을 살려고 하는 발버둥이 너무 후하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대,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아니하고, 군대를 들어가도 갑옷을 입거나 병기를 차지 아니한다. 코뿔소가 그 뿔을 드리댈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내밀 곳이 없고, 병기가 그 칼날을 내리 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저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그 죽음의 땅이 없기 때문이다.

 

51.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다. 덕이란 얻어 쌓는 것이다. 것이란 드러내는 것이다. 세란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가지 것들은 길을 높이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다. 길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대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요 덕이란 얻어 쌓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길은 온갖 것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가 하면 멈추게도 하고 또 독을 주기도 한다. 또 길러 주고 덮어 감싸주는 것이다.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아니하고, 되게 주면서도 거기에 기대지 아니하며, 자라게 하면서도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는 것이다.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도생지 덕축지 물형지 세성지)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부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사물이 생겨난 후에는 길러지고, 길러진 뒤에는 형체를 이루고, 형체를 이룬 후에는 완성된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가? 도다. 무엇을 얻어 길러지는가? 덕이다. 무엇으로 인하여 모양을 이루는가? 물(物)이다. 즉 사물의 종류에 의해 각자의 형상이 정해진다. 타고난 종류대로 따르기만 하므로 사물은 형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처해진 형세대로 맡기므로 사물은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무릇 사물이 생겨나는 소이와 공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말미암는 바가 있다는 것은 결국 도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므로, 끝까지 미루어보면 또한 도에 이른다. 그 인한 바를 따르므로 각자 알맞게 된다.(왕필주석)

 

52.
하늘 아래 시작이 있었다. 그러니 그 시작으로 하늘 아래의 어미를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을진대, 그 아들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아들을 알았을진대, 다시 그 어미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몸이 없어질 때까지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얼굴의 감정의 구멍을 막고 사타구니의 욕정의 문을 닫아라! 그 몸이 다할 때까지 다함이 없을 것이다. 구멍을 열고, 일로만 바삐 건너다니면, 그 몸이 끝날 때까지 구원이 없을 것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연약함을 지킬 줄 아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드러내어 다시 그 밝음으로 되돌려라! 네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곧 향상됨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53.
나에게 조금만큼의 지혜가 있어서 하늘 아래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큰 길은 매우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나니, 조정의 뜨락이 심히 깨끗할 때 백성들의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어있다. 정교로운 무늬비단옷을 입고 시퍼런 칼을 띠에 두르고 마시고 먹는 것을 싫도록 하고 가진 재화에 남음이 있는 그자들은 누구인가? 도둑놈이라 하는 것이다! 길이 아닐진대!

 

54.
잘 심는 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 잘 껴안는 자의 것은 뺏을 수 없다. 이 길의 사람들은 자손들이 제사 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그 길을 내 몸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참되며, 그 길을 내 집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남음이 있으며, 그 길을 내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자라며, 그 길을 내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곧 풍요로우며, 그 길을 내 하늘 아래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두루한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써 몸을 볼 것이요, 그 집으로써 집을 볼 것이요, 그 마을로써 마을을 볼 것이요, 그 나라로써 나라를 볼 것이요, 그 하늘 아래로써 하늘 아래를 볼 것이다. 내 어찌 감히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안다고 말하리요? 이 때문일진대!

 

55.
덕을 머금음이 도타운 것은 바알간 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벌이나 뱀도 그를 쏘지 않고, 맹수도 그에게 덤비지 않고, 날새도 그를 채지 않는다. 뼈가 여리고 근이 하늘한데도 꼭 움켜쥐면 빼기 어려우며, 암수의 교합을 알 까닭이 없는데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로지게 꼴린다. 정기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매일 하루가 다 하도록 울어제키는데 그 목이 쉬질 않는다. 조화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화를 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늘 그러한 삶에 덧붙이는 것을 요상타 한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사물은 강장하면 곧 늙어 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길답지 않다고 한다. 길답지 않으면 일찍 사라질 뿐이다.

 

56.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감정의 구멍을 막고, 그 욕정의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그 빛이 튀지 않게 하며, 그 티끌이 고르게 되도록 한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고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도 없고,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천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만 하늘 아래 귀하게 되는 것이다.

 

57.
나라를 다스릴 때는 정법으로 하고 무력을 쓸 때는 기법으로 하고 천하를 취할 때는 무사로 하라! 내 어찌 그러함을 알겠는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 아래 꺼리고 피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이 이로운 기물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나 가정은 점점 혼미해져가고, 사람이 기교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괴한 물건이 점점 생겨나고, 법령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적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함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질서를 찾고, 내가 고요하기를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게 일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하게 된다. 나는 바램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백성들은 스스로 통나무가 될 뿐이다.

 

58.
그 정치가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그 백성은 순후해진다. 그 정치가 똘똘하면 똘똘할수록 그 백성은 얼얼해진다.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 있도다! 복이여! 화가 너에게 숨어 있도다! 누가 저어 가없는 근원을 알리! 세상에 절대적인 정상이라곤 없오. 정상은 늘 다시 비정상이 되게 마련이요. 그리고 또 좋음은 다시 나쁨이 되기 마련이요. 사람의 어리석음이 너무 오래 되었도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모나면서도 가르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자르지 아니하며, 곧으면서도 뻗대지 아니하며, 빛나면서도 튀쳐나지 아니한다.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기, 복혜화지소복) : 누가 잘 다스린다는 것의 표준을 알겠는가? 다만 바르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형상으로 이름 지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둑어둑하게 천하가 크게 교화되는 이것이 그 표준이다.(왕필주석)

 

※光而不燿(광이불요) : 밝지만 비춰내지 않는다.

 

59.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 대저 오로지 모든 것을 아낄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이다.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덕을 거듭 쌓으면 못 이루는 것이 없고, 못 이루는 것이 없으면 그 다함을 알지 못한다. 그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나라를 얻는 그 어미는 너르고 오래 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뿌리깊고 단단한 길, 오래살고 오래 보는 길이라고 한다.

 

60.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조리기 같이 하라. 길로써 하늘 아래에 임하면 그 귀신들도 영력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실은 그 귀신이 영력을 아니 부린다함이 아니요, 그 귀신의 영력이 사람을 해하지 아니한다 함일러라. 그 귀신의 영력이 사람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스러운 사람 또한 사람을 해하지 아니한다. 대저 귀신도 사람도 서로를 해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귀신과 사람 서로에게 쌓여가는 것이다.

 

※신도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못한다. 사물이 타고난 천연을 지키고 있으면 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신이 신령스러운 줄 알지 못하게 된다.(왕필주석)

 

61.
큰 나라는 아랫물이다. 그래서 하늘 아래의 모든 윗물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며, 하늘 아래의 모든 숫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써 자기를 낮춘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자기를 낮추면 작은 나라에 믿음을 주고, 작은 나라는 자기를 낮추면 큰 나라에 믿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는 자기를 낮춤으로 취할 수 있고 하나는 자기를 낮춤으로 취하여 질 수 있다. 큰 나라는 사람들을 밑에 두고 거느리기를 좋아할 뿐이며 작은 나라는 사람 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대저 양편이 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진대, 큰 나라가 마땅히 자기를 낮추기를 잊어서는 아닐될 것이다.

 

62.
길이라는 것은 만가지 것의 속 깊은 보금자리요, 좋은 사람의 보배며, 좋지 못한 사람도 지닌 것이다. 아름다운 말은 시장에서 사람을 홀리며 고매한 듯한 행위는 사람의 위선을 더할 뿐이다. 사람의 이러한 좋지 못함도 모두 길에서 나온 것일진대 내 어찌 외면할 수만 있으랴! 그러므로 천자를 옹립하고 삼공을 세우는데 비록 보석을 두손으로 바쳐들고 사두마차행렬을 앞세우며 융성한 헌례를 다해도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라도 이 길을 헌상하느니만 못하다. 옛부터 이 길을 귀하게 여긴 뜻은 무엇이었든가? 구하면 이 길로 얻고 죄가 있어도 이 길로 사함을 받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하늘 아래 귀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니.

 

63.
함이 없음을 함으로 삼고, 일이 없음을 일로 삼고, 맛이 없음을 맛으로 삼는다. 작은 것에 큰 것으로 갚고, 적은 것에 많은 것으로 갚으니, 원한을 덕으로 갚을 뿐이다. 어려운 것을 쉬울 때부터 도모하고, 큰 것을 미세할 때부터 도모하라! 하늘 아래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지어지며, 하늘 아래 아무리 큰 일이라도 반드시 미세한데서부터 지어지느니.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끝까지 큰 일을 하는 법이 없으면서도 늘 큰 일을 이루어간다. 대저 가볍게 응낙하는 것은 믿음이 적고, 너무 쉬운 것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몰고 온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온갖 것을 늘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끝내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 무위로 거하고, 말하지 않음으로 가르치며, 담백함으로 맛을 삼으니 이것이 다스림의 극치다. 大小多少, 報怨以德(대소다소 보원이덕) : 작은 원망이라면 보복할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한이라면 곧 천하가 죽이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같이 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왕필주석)

 

64.
사물이 흔들리지 않을 때 가지고 있기 쉽고, 드러나지 않았을 때 도모하기 쉽다. 그 연약할 때는 바스라지기 쉽고, 눈에 띄지 않을 때는 흩어지기 쉽다. 그것이 드러나기 전에 하고 그것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라! 아람드리 나무도 털끝같은 싹에서 생겨나고, 아홉층의 높은 투각도 한 줌의 쌓인 흙에서 일어나고, 천리의 걸음도 발아래서 시작한다. 할려 하는 자는 반드시 패할 것이요, 잡으려 하는 자는 반드시 놓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기에 패함이 없고, 잡음이 없기에 놓침이 없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늘 다 이루어질 듯하다가 꼭 패한다. 끝을 삼가기를 늘 처음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패하는 일이 없을지니.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아니함을 배우고 뭇사람이 지나치는 본바탕으로 돌아간다. 이리하여 만가지 것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65.
예로부터 길을 잘 실천하는 자는 길로써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길로써 바보같이 만든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복이다. 이 둘을 아는 것이야말로 또한 늘 그러한 본받음의 틀이니, 가믈한 덕이라 일컫는다. 가믈한 덕이여! 깊도다! 멀도다! 이 세계와 반대로 돌아가는구나! 그런 뒤에야 다시 큰 따름에 이를지니.

 

66.
강과 바다가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백성의 위에 서려는 자는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의 앞에 서려는 자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위에 처해 있어도 아랫백성이 무겁다 아니하고, 앞에 처해 있어도 뒷백성이 해롭다 아니한다. 그러므로 하늘아랫 사람들이 즐거이 그를 추대하면서도 싫어하지 아니한다. 항상 그는 다투지 않으니 하늘아랫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다툴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67.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내 길이 너무 커서 같지않다고들 빈정댄다. 그런데 오로지 크기 때문에 같지 않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 말대로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보잘 것 없는 것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나에겐 세 보배가 있는데 이를 늘 지니고 지킨다. 첫째는 부드러움이다. 둘째는 아낌이다. 셋재는 하늘 아래 앞서지 않음이다. 부드럽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아끼기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하늘 아래 앞서지 않기 때문에 온갖 그릇 중에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부드러움을 버리고 용감하려고만 하고, 아낌을 버리고 널리 베풀기만 하려하고, 뒤를 버리고 앞서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것이다! 대저 부드러움으로써 싸우면 이길 것이요, 그것으로써 지키면 단단할 것이다. 하늘이 장차 사람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부드러움으로 그를 막아줄 뿐일 것이다.

 

68.
장수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잘 싸우는 자는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맞서지 않는다. 사람을 잘 쓰는 자는 자기를 잘 낮춘다. 이것을 일컬어 않음의 덕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쓰는 힘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짝한다 한다. 이것은 모두 예로부터 준칙이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69.
병가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주인이 될 생각을 아니하며 손님이 될 뿐이요, 나아갈 때는 촌으로 함도 삼가고, 물러날 때는 척으로 한다고. 이것을 일컬어 감이 없이 가고 팔뚝이 없이 내동댕이 치고 무기가 없이 무력을 쓴다고 한다. 이러하면 곧 무적인 것이다.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보다 적을 가벼이 여기면 나의 세 보배를 거의 다 잃을지니. 그러므로 접전하는 군대가 서로 비등할 땐 애통해 하는 자가 이기느니.

 

70.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하늘아랫 사람들이 능히 아는 사람이 없고 능히 행하는 사람이 없다. 말에는 그 뼈대가 있고 일에는 그 사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대저 그것을 알지 못하니 나를 알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도 거의 없고 나를 본받는 자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겉에는 남루한 갈포를 입고 속에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1.
알면서도 아는 것 같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 같은 것은 병이다.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알고 있으면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병이 없다. 병을 병으로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72.
백성이 다스리는 자의 권위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 결국 가장 두려운 것이 오고야 만다. 백성이 사는 곳을 들들 볶지 마라! 백성이 사는 것을 지겹게 느끼지 않게 하라! 다스리는 자들이 자기 삶을 지겹게 느끼지 말아야 백성들도 자기 삶을 지겹게 느끼지 않는 법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자기를 알면서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아끼면서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73.
감히 무엇을 하는데 용감한 자는 죽임을 당한다. 감히 무엇을 하지 않는데 용감한 자는 산다. 둘다 용기는 용기다! 그런데 하나는 이롭고 하나는 해롭다. 하늘이 미워하는 바 누가 그 까닭을 알 수 있으리요?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늘 매사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아니하면서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아니하는데도 저절로 온다.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또 너르다.

 

※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74.
백성들이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는데도 이상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나는 그 놈을 붙잡어서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항상 죽임을 관장하는 자가 있으니 죽인다면 그마저도 죽여야 할 것이다. 대저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목수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한다고 한다. 목수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하는 사람치고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75.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세금을 너무 받어 쳐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굶주리는 것이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윗사람들이 너무 꾀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너무 그 사는 것을 후하게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대저 오로지 사는 것에 매달려 있지 아니하는 자가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자보다 슬기로운 것이다.

 

76.
사람의 생명은 부드럽고 약하며, 사람의 죽음은 단단하고 강하다. 만가지 것, 풀과 나무는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한데, 죽으며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러하므로 군대로써 강하게 하려하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나무도 강하기만 하면 꺽이는 것이다. 나무에서 딱딱하고 커다란 것은 밑으로 내려가기 마련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위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77.
하늘의 길은 그것이 활을 펴는 것 같도다! 높은 것은 아래로 누르고, 낮은 것은 위로 들어 올린다.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탠다. 하늘의 길은 남는 것을 덜고 부족한 것을 보태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의 길은 그러하지 못하다. 오히려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 남는 것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능히 남음이 있으면서도 하늘 아래 모자람을 보태 받들 수 있으리오? 길이 있는 자만이 그러하리로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면서 기대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처하지 아니 하고, 그 슬기로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78.
하늘 아래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없다. 그런데 단단하고 강강한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 것은 없다. 물의 쓰임을 대신할 게 없는 것이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기는 것은 하늘 아랫 사람들이 모르는 이 없건마는,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하노라.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말한다. 나라의 온갖 더러움을 한 몸에 지녀야 그 땅과 곡식의 주인이라 할 것이요, 나라의 온갖 상서롭지 못함을 한 몸에 지녀야 하늘 아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바른 말은 반대로 들린다.

 

79.
커다란 원한은 아무리 잘 화해시켜도 반드시 그 여한이 남는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어찌 잘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채권자의 왼쪽 어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채무자를 독촉치 아니한다. 덕이 있는 자는 어음거래로 결제하고 덕이 없는 자는 현물거래로 닦아센다. 하늘의 길은 편애함이 없으면서도 늘 좋은 사람과 더불어 하느니.

 

80.
될 수 있는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 하라!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중하게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게 하라!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베풀 일이 없게 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끈을 매듭지어 쓰게 하라! 그 먹는 것을 달게 해 주며, 그 입는 것을 아름답게 해 주며, 그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해 주며, 그 풍속을 즐겁게 해 주어라! 이웃하는 나라들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 꼬끼요 소리와 멍멍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왔다갔다 하지 아니한다.

 

81.
믿음이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아니하다. 좋은 사람은 따지지 아니하며, 따지는 사람은 좋지 아니하다. 아는 자는 떠벌리지 아니하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아니한다. 성스러운 사람은 쌓아두지 아니하니, 힘써 남을 위하면 위할수록 자기가 더 있게 된다. 힘써 남에게 주면 줄수록 자기가 더 풍요롭게 된다. 하늘의 길은 잘 이롭게 하면서도 해치지 아니하고, 성스러운 사람의 길은 잘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한다.

 

※聖人之道 爲而不爭(성인지도 위이부쟁)

2021/05/22

빌 게이츠가 제시한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사회주의자

빌 게이츠가 제시한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사회주의자: 빌


빌 게이츠가 제시한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글쓴이: 김민정
-2021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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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he Times]


[편집자 설명] 최근 기후위기 문제를 다룬 빌 게이츠의 책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이 출판되면서 책의 내용이 주류 언론과 정치인들을 통해 많이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김민정의 기고 글은 빌 게이츠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자신의 글 「빌 게이츠가 못 보는 기후위기 해법」(『진보평론』, 2021) 중 일부 내용을 가져와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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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류 정치인의 빌 게이츠 활용법

출간하자마자 교보 문고의 베스트셀러에 2주 연속 1위를 차지한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은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다소 벗어나, 한국에서는 핵발전소 옹호의 근거와 문재인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주간조선」과 「중앙일보」의 입장과 주류 정치인의 행보 등이 있다.

민주당 K뉴딜 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광재 의원은 2021년 3월 30일에 주최한 ‘미래 대담’에서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 ‘0’을 달성해야 하는데, 풍력이나 태양광 같은 자연 에너지는 땅을 많이 차지하고 효율이 떨어져서 새로운 에너지 생산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빌 게이츠가 제시한 소형 모듈러 반응로(SMR)를 대안으로 소개한다. 다른 한편 4월 15일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국민의 힘, 기후에너지 5대 정책 방향 제안”에서 “재생에너지와 미래형 스마트 원전의 조화”를 언급한다. 미래형 스마트 핵발전 개발의 근거로 빌 게이츠가 화석에너지 퇴출과 재생에너지 보완을 위해 SMR 소형 모듈러 반응로 개발에 투자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협력하는 부분이 바로 핵발전 기술 개발이다. 빌 게이츠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주목한 기술도, 미 바이든 행정부가 지목한 차세대 첨단 핵발전소도 SMR이라면서, ‘혁신형 SMR’의 전략적 추진을 위해 4월 14일 국회‧정부‧산업계‧학계‧연구계는 ‘혁신형 SMR 국회포럼’을 출범했다.

빌 게이츠가 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총 342쪽이다. “무탄소 전기 만들기”라는 소제목 장에서 핵분열, 핵융합, 해상풍력, 지열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언급은 7쪽(그 중 핵융합은 대략 2쪽)분량에 불과하다. 책의 핵심 내용은 연간 510억 톤에 달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하고(여기서 사용하는 ‘0’(제로)는 탄소 배출이 0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의 순배출 제로’(near net zero)혹은 순배출 제로(net zero)는 배출되는 양과 제거되는 양이 같은 상황인 탄소 중립으로 쓰인다. 이에 대해서는 황정규의 「‘순’배출제로의 문제점: 탄소 포집 기술은 사기다」를 볼 것[편집자]), 이를 위해서 태양광과 풍력 등 이미 보유한 수단을 더 빨리 그리고 더 현명하게 사용하고, 획기적인 기술 개발로 배출량 제로 달성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주류 정치인의 주장은 빌 게이츠의 책 내용 중 일부를 아전인수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차세대 핵반응로 개발의 위험성

물론 저서에서의 빌 게이츠와 달리 ‘투자자’ 빌 게이츠는 기후변화 대처를 위한 기술에 15년간 2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차세대 핵발전소 개발에 대한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빌 게이츠는 차세대 핵반응로 개발을 위해 2006년 테라파워(TerraPower)를 창립했다. 이 회사가 개발 중인 나트륨 핵반응로는 열화우라늄을 원료로 사용하며, 냉각재로 끓는점이 높은 액체 나트륨을 사용한다. 테라파워는 이러한 기술 개발이 핵발전소 사고에도 폭발하지 않고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지 않은 안전성이 보장되며, 기존 핵발전소에 비해 건설비용도 4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이 핵반응로는 현재 컴퓨터 안의 시험(demo) 핵반응로로 존재할 뿐 공식적으로 가동하기까지 몇 십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빌 게이츠 자신도 인정한다. (백번 양보해서 핵발전소의 반대여부를 떠나서) 기후위기를 대응하기 위해서 10년 안에 획기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하는데, 언제 실용화될지도 모르는 차세대 핵반응로를 기다리기 보다는 현재 진행 중인 재생에너지의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무엇보다 핵에너지는 기후위기에서 인류를 구하기는커녕 가장 심각한 환경 재난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기후위기에 대한 최악의 처방이다.

체제 유지의 기후 해법

빌 게이츠는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사업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 화석연료와 직접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업종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그러다보니 기후위기를 보는 시각이 화석연료에 기초한 자본가보다는 이해관계에서 다소 벗어난 듯하다. 기후위기에 대한 빌 게이츠의 진단은 다른 자본가보다 현실적이다. 그는 “인류가 매년 배출하는 510억 톤의 온실가스를 2050년까지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기술자답게 현대 문명을 뒷받침하고 있는 과학기술 및 공학에서 탄소 저감을 위해 필요한 혁신적인 기술을 세부적으로 소개하고 정리한다. 그는 기술의 실효성을 우선에 두기에, 지구의 대양과 대기에 일시적 변화를 가해 지구 온도를 낮추는 지구공학 연구보다는 기후 ‘완화’와 ‘적응’에 대한 연구에 더 주목하는 듯하다.

구체적으로 그는 전체 사회를 조망하면서 전기 생산, 제조, 사육과 재배, 교통과 운송, 냉방과 난방 등의 배출원에 따른 온실가스 절감 기술 및 혁신의 방향을 제시한다. 기술 개발에 있어서 핵심이 “돈이 얼마나 들어갈까?”라면서, 탄소 저감 기술의 확대에 있어서 ‘그린 프리미엄’을 낮추자는 것이 주요 과제라고 설명한다. 가령 온실가스 배출 없는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할 때 들어가는 추가 비용을 꾸준히 낮춰 시장에서 친환경이 채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 각 분야에서 어떻게 그린 프리미엄을 낮추는 혁신이 가능한 지를 현실적으로 논증한다. 갑부이자 기술자의 이러한 현실적 방안 제시에 매력을 느낀 환경론자(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는 빌 게이츠의 행보를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 초창기에 함께했던 동료 두 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듣다가 과학적인 데이터들이 전망하는 암울한 지구의 전망에 충격을 받고,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약 10년간의 학습결과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기후 재앙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 경영자로서, 창업자로서, 그리고 자선사업가로서 현실적인 대안을 정리한 책이다. …… 이 책의 미덕은 아주 현실적인 대안들이다. 탄소배출이 안 되는 자연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되, 아주 싼값에 빨리 저개발 국가에 제공해야 하며,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사업기회가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사업가라면 다양한 기후솔루션이 정확하게 정리된 이 책을 한 편의 신규사업 진출 기획안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경향신문』, 2021. 2. 6.)

기후 시대에 걸맞게 사업 투자도 탄소를 저감할 수 있는 사회 공헌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사업 수완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는 환경론자의 입장은 공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동시에 가해자의 개과천선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사업가에 대한 이러한 관대함은 공해 산업에서 벗어난 정보통신기술에 토대를 둔 신흥 IT 자본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단일 사안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환경 문제‘만’으로 세상을 파악한다.

하지만 사회는 기후위기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착취와 억압, 천대 등의 문제가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화석연료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사업장이라도 다른 기업처럼 환경 비용을 외부화하며, 노동자가 만든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코로나19로 늘어난 택배를 감당하는 물류업체의 살인적 노동 강도 및 과로사의 이면에는 이들 업체의 영업이익 창출로 미소 짓는 기업가가 존재한다. 자본과 노동의 이해가 일치한다고 하거나 자유 경쟁의 결과로 전반적으로 조화와 국민 복리가 실현된다고 하는 주류 이데올로기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회 불평등을 체감하면 할수록 그 입지가 좁아진다.

재생에너지 개발의 장애물

기술 찬양론자인 빌 게이츠는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이런 태도는 분명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기술을 도입하려는 경제 및 사회 환경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린 프리미엄이 낮춰지지 않는다면 현재 탄소 저감 기술이 존재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더라도 현실화되지 않은 냉철한 사회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재생에너지의 효율적 활용을 방해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재정과 정치다. 화석연료와 핵에너지는 수십 년 동안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엄청난 규모의 투자 지원 및 법, 제도적 지원을 받아왔다. 그래서 화석에너지 및 핵에너지가 ‘저렴한’ 것처럼 평가되지만 이 평가 항목에서 제외된 부분은 외부비용으로 전가된다. 이 점을 파악한 빌 게이츠는 재생에너지에 투자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의 조성을 요구한다. 그는 가격 기제에 의해 기술이 도입되는 시장경제 체제의 운영 원리에 맞게 재생에너지의 기술 도입을 위한 가격 기제 장벽을 시장의 논리로 해결하는 방식보다 국가의 지원 방식에 중점을 둔다. 자유 시장 경쟁 체제에‘만’ 의존해서는 현행 화석연료에 기초한 에너지 산업을 혁신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도 인정하듯이 “에너지 산업은 5조 달러 규모의 거대한 산업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개별 기업의 투자로는 에너지 산업을 혁신시킬 수 없다. 그래서 노골적인 국가의 지원과 재정 투입을 요구한다.

기업 육성을 위한 정부 정책

빌 게이츠의 책 10장은 “정부 정책은 얼마나 중요할까?”이다. 그만큼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 저감 기술의 도입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친시장주의자라고 알려진 빌 게이츠가 정부가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에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다”라고 그 자신도 인정한다.

그가 제시하는 정부의 역할은 제로 탄소 기술 개발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고, 연구 개발비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민간 부문의 투자 갭을 메꿔줘야 하고, 화석연료로 인한 피해를 가격에 반영해서 상품을 비싸게 만들고, 저탄소 기술 도입에 있어서 불필요하고 낙후된 법률의 개정 및 규제를 허물고, 정부 규제에 최신 기술과 제로 탄소화의 시급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뒤처지지 말아야 하며, 탄소 없는 경제로의 전환에 있어서 공정한 경제구조가 될 수 있도록 계획해야 하고, 기존 산업 체계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도입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상의 정부 정책의 핵심은 기술, 정책, 시장이 상호 작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의 혁신이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 및 산업구조 전환이 필요한데, 이는 몇 개의 기업만으로는 수행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빌 게이츠도 기술 도입에 개입하여 기업의 이윤 창출을 원활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보모 역할을 국가에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제안에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와 인민이 기술을 통제하고 정책에 관여 할 수 있는 여지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입장에는 국가와 정부가 계급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책을 수행한다는 전제가 있다. 하지만 계급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정치인과 고급 행정 관료, 사업가 사이의 부패의 고리는 개인의 부도덕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 내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나눌 이해관계가 적어진다면 서로 폭로하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기후 불평등

빌 게이츠는, 개인이 시민으로서, 소비자로서, 고용주 혹은 직장인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실천을 제안한다. 시민은 기후변화 정책을 요구하는 유권자로서 정치적 압력을 가해 정치인이 실제로 행동에 옮기도록 해야 한다. 소비자는 저탄소 제품을 선택하는 수요자로서 정부와 기업이 혁신 기술에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청정 전기를 신청하고, 가정 내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고, 전기차를 구매하고, 인공 고기를 먹어야 한다. 직장인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 예를 들면 탄소를 상쇄하는 나무 심기 등과 같은 실천을 함으로써 회사가 더 중요한 일을 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기업은 친환경 혁신을 가져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내부적인 탄소세를 도입하고, 그린 프리미엄이 큰 분야(그리드 스케일의 에너지 저장, 전자연료, 핵융합, 탄소포집, 제로 탄소 시멘트와 강철 등)를 찾아내 시장이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에게 요구하고 협력해야 한다.

제시한 각자의 역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개인이 기술 혁신 과정에 참여하거나 결정할 구조보다는 기업과 정부의 역할을 크게 본다. 무엇보다 현행 제도에서는 기업과 정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 및 인민의 권한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기후 불평등적 관점에서 본다면, 기후위기를 일으킨 가해자인 기업과 정부는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를 일으킨 책임은 소비자, 노동자 등과 함께 져야 한다는 이러한 접근은 틀렸다.

기술 개발을 통한 기후 해법은 어떤 기술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기술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민주주의’를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의 기후위기는 자본 축적을 위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낳은 문제인데도 자본주의 생산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개별 자본의 이윤 추구를 목표로 생산이 진행되기 때문에 사회적 필요에 바탕을 둔 생산의 민주적 계획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팔지 못한 식료품이 버려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식료품을 구매하지 못한 이들이 굶는다.

체제 변혁의 필요성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 그리고 미국의 교육 기회 확대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 확대를 목표로 제시한 게이츠 재단은 재단 유지를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운영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계급 관계, 사회 불평등, 기아 및 빈곤 등을 고려하면, 게이츠 재단이 빈곤 퇴치의 장애물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빌 게이츠 자신도 자본가 계급의 일부이다. 이는 그가 막대한 부를 소유한다는 것 이상으로 이 사회를 유지하고 지배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현행 계급 관계와 사회 불평등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사회 구조를 문제의 핵심으로 주목해야 하지만, 빌 게이츠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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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기고 | 대학 강사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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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함석헌과 『노자』

◆ 함석헌의 ‘노자’ 읽기


▲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자, 오늘 제목은 “철학자인가 정치가인가”라고 되어 있는데, 그 동안 주로 읽었던 것이 하상공 주와 왕필 주를 소재로 하면서 어떤 식으로 변화돼 있는가.

달리 말하면 본래 정치가들 사이에서 읽힌 책이 지금에 와서 노자하면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붙게 된 거죠.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장 사상 자체가 과연 철학적이냐? 정치적이냐? 당연히 섞여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방식의 노자 읽기가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가. 상식이 되어있는가를 검토하는 것.

사실은 노자 원전을 읽는 것보다 지금 우리들이 읽고 있는 노자에 관한 책들이 어떤 시선으로 쓰여졌는가를 이해하는 게 사실 더 중요한 일이거든요.

제가 중국철학을 전공했지만, 중국철학을 공부할 때 희한하게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공부하다보니까 본격적으로 전공을 찾기 전에, 우리 사회에서 중국 철학과 관련된 내용을 생산하고 있는 현대신유가에 관한 부분부터 먼저 공부를 시작했어요. 세미나 팀에서.

그러니까 내 주변에서 혹은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까지도 어떤 시각과 입장을 갖고선 고전들을 읽고 있는지 이미 정체를 어느 정도 나름대로 판단한 다음에 어떤 식으로 읽어야 되겠다는 관점을 가지고 접근한 거죠.

현재도 상대화시키고 과거도 상대화시키고. 그러다보니까 노자가 어쩌고 저쩌고 라고 한 것 특히 논어나 노자를 비교해 보면 두 가지가 상당히 다르다. 다른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고.

그러다보니까 『철학에서 이야기로』와 같은 책을 쓸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다 출판되어 있지 않고, 라는 책에 몇 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석헌 기념사업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도덕경이라고 해서 한 두 장 누락된 게 타이핑돼서 실려 있어요. 그걸 출력해서 읽어보시면, 우리가 알고 있던 노장 얘기가 여기서 나왔구나 하며 새삼 감탄하게 되실 거예요.

그 중에 몇 가지도 오늘 확인하게 될 거고요. 그 중 상당 부분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 노자 강좌를 하면서 많이 채용하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면서 어떻게 그것이 누적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노자 읽기를 본다” 뒤에 부제로 붙어 있는 것은 제가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강의를 접하고 제가 처음 썼던 논문의 제목이에요. 이 양반의 노장 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붙여야 하는가.

이 양반의 노장 해석은 한국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나오기가 어려워요. 독특한 지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노자에 대한 주석서는 다 독특하기 때문에. 다 다르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제안한 하나의 표현이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를 만들어보았거든요. 어떤 분이 논문을 쓰면서 이걸 쓰더라고요.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무한수를 말하는 거죠. 주석서가 나올 때마다 색다른 노자가 창조된다. 다른 얼굴이 들이밀어진다는 뜻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제가 학위논문을 쓰면서 제안했던 표현이죠.

그러다보니까 함석헌 선생의 노자읽기의 독특성은 정확한 질문의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자를 다양하게 읽는다. 다원주의가 존중받는 시대에 백 명이 모이고 천 명이 모이면, 천 개의 노자, 백 개의 노자가 만들어진단 말인데 소통이 가능하겠습니까. 도대체 뭘 소통하느냔 거죠.

따라서 고전을 읽는다고 할 때 고전에 대한 정확한 번역. 번역자들은 정확한 번역을 해야 하죠. 하지만 정확성이라는 척도는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노자를 의미 있게 읽는다는 작업은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 함석헌의 노자 읽기

제가 생각해낸 함석헌 선생의 노자 해석의 독특성 혹은 특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창조적 해석이 있다기보다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한국사람 대다수가 알고 있는 노자라는 사람과 노자라는 책과 관련된 말, 언설, 이미지를 창조한 데 있다.

그 당시에는 새롭지만 지금에 와서는 누구에게나 상식이 돼버린. 상식의 창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게 제가 철학공부를 하는 모토예요. 저는 철학이 철학으로서 끝까지 있는 한 무의미하고 철학적인 방식이 언어와 내용, 삶의 양식이 상식으로 퍼져나갈 때 의미 있는 철학, 살아있는 철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역할이라는 것이 불건전한 상식을 몰아내고 건전한 상식을 정초하는 과정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고전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동아시아 철학자들이 철학적인 활동을 했다고 하면 어떤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도출해내고 그러한 건전한 상식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고 행동에서 득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이론적 노력이 동아시아 전통철학의 내용일 것 같아요.

오늘 그것을 바로, 함석헌 선생이 어떤 방식으로 했는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의 고전읽기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논어는 물론이고 노자는 물론이고 맹자, 중용, 다른 모든 문헌들에까지도 확장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논의의 주제는, 지금 여기에서 노자나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삶 속에 어우러진 노장을 읽는다는 것인데 그것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오늘의 가장 커다란 주제입니다.

그러면 함석헌 선생님의 노장읽기를 이야기할 때, 이 분이 어떤 위치를 갖느냐는 당연히 전제해야겠죠. 1페이지 맨 밑을 보면 시작됩니다.

함석헌의 노장 읽기는 19세기 이래 동아시아 전교의 특징인 서구 종교(기독교)와의 화해적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게 특징적인 겁니다. 문제는 화해적 만남이 중요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본 사람은 많이 느끼겠지만, 도올 선생의 노자 강의는 화해적이지 않습니다.

동양철학의 핵심 특징은 화해론. 자연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인간의 화해. 지식과 삶의 화해. 이런 3대 화해를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노자 철학의 화해적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어둠의 세력으로 부각이 되죠. 대비시킨단 말이죠.

저는 그런 대비효과가 동양적 사유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는 판단은 할 수 없죠, 하지만 읽는 방식이, 분명히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와 노장 사상을 대비시키는 방식이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의 노자 해석은 대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화해적 방식입니다. 노자를 만난 까닭 자체도 화해적이고. 원래 이 분이 노자라는 책을 읽어보지 못 했다가 스승이진 유은봉 선생님께 선물로 이 책을 받았죠. 그걸 평생 갖고 읽으셨다고 해요. 이때 비로소 함석헌 선생님은 비로소 동양학에 입문하신 거죠.

두 번째는, 조선조의 ‘노장’ 읽기 전통의 연장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19세기부터 기독교와의 화해적 만남을 주선하는 이 분위기는 함석헌 샌생님의 고유한 특징이 아닙니다.

19세기 말부터 이미 서구 선교사가 시도했고 동아시아에서도 많이 이용을 했습니다. 불교도 이용했고 유교도 이용했지만 도교, 노자도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런 방식의 이해가 사실은 전통 조선사회에서는 사실 노자는 이지단서였습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의 머릿속에서는 사실 이단까지는 아니었죠. 동서 문명의 대화라는 축에서 양자를 소통시키려 하셨으니까. 특히 종교적인 내용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그 읽는 태도의 방식이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유림이 노자나 장자를 읽고 대했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학계라는 좁은 울타리에 계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최초의 문제의식 자체가 한국의 현실과 대화한 하나의 ‘이야기’로써 출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대중성을 가질 수 있었고 현실성을 가질 수 있었어요. 나름대로 개인의 진정성, 당신께서 갖고 있는 뛰어난, 함석헌 문체라고 함석헌 선생의 문장은 다르게 평가받기도 하잖습니까. 그런 등등의 것들과 그 분의 이력이 다 포함된 거겠죠.

이와 같은 점들은 사실 우리가 많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가서 연구해보시면 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두 세 부류로 갈라져요.

하나는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 가운데 도가를 연구하는 사람이 해요. 또 몇 권의 책들이 나와 있는데 그 분들이 누구냐. 신학대학 소속이 꽤 있어요. 그리고 목사님이거나.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누구지. 장자에 관한 주석서도 많이 내고, 갑자기 이름이 떠오르질 않네. 감리교 계통의 목사님이 신데, 이연현주 목사님.

그 분만의 독특한 개인적 기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리고 신학계에 계신 분 가운데서 그와 같은 주제로 학위논문을 따신 분들이 꽤 많아요.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신학 하시는 분들 가운데 노자를 연구하는 분들이 꽤 있다. 꽤 특징적이죠. 이게 함석헌 선생만의 독특성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장해석의 중요한 지류를 타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현실성을 가질 수 있었던 거죠.


▲ 함석헌 노자 읽기의 특징

그런데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해석이 어떻게 다르냐. 노자 해석의 역사 과정 속에서 독특성, 차별성, 새로움은 무엇이냐고 묻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건 함석헌 선생의 해석방식의 기조와도 맞지 않습니다. 그 분은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함석헌 노자 해석에 접근해 나가야 하느냐. 그 다음 3페이지를 보시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물음을 제기해야 합니다. 첫 번째,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던진 글, 내용, 화두들이 얼마나 우리와 닮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함석헌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다르단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이미 그가 해석해놓은 마당 위에서 노자를 읽고 있기 때문에 함석헌과 나와의 차이를 연구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 된다는 거죠. 내가 알고 있던 내 모습의 원주소가 여기 있었구나. 하지만 다 기억나는 게 아니잖아요.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를 따져 봐야겠죠.

그 다음에, 그가 말하고 있는 독창성은 얼마나 진리에 가까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이다. 노자를 통해 페미니즘이나 생태 사상의 접속을 시도합니다. 그럼 노장 철학에 생태주의나 페미니즘의 심오한 철학이 있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죠.

노자를 통해서 태와 페미니즘 문제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노자 철학 자체에 무슨 대단한 얘기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들어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그 분의 철학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구분해야 하거든요. 대한민국에 철학자가 나오지 못 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새로운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원전 중심으로 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 아까 수박 주고 가신 이진경 선생님, 『자본론 읽기』그건 자본론을 얼마나 제대로 읽었느냐 아니냐를 얘기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한국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현실 속에서 이진경이라고 하는 사상가가 자본론을 어떻게 읽었는가 라고 하는 점에서 평가해야 하잖습니까. 『노마디즘』도 마찬가지고. 그런 문제로 요즘 여러 지면에서 논쟁이 붙기도 하는데.


그 질문의 토론가운데 가장 난감한 경우가, 번역을 할 때 어떤 텍스트의 어떤 용어는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는 건 분명히 원전의 맥락을 쫓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번역 용어를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쓰는가 하는 것은 여기 듣고 있는, 프랑스 사람을 위해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게 아닌 이상, 한국 사람을 위해서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어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의 파장도 고려해야 하고 그 의미의 파장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는가가 바로 그 책을 내고 쓰는 사람의 자기 생각이 들어가는 거죠. 그가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땅과 호흡하는 철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런 방식의 질문을 던지는 데 인색하다고 생각해요. 많이 좋아 졌어요 요즘에는. 저를 소개할 때, 동양철학자라고 하거든요. 옛날에는 철학가냐, 철학자냐, 철학인이냐를 가지고 대학 강단에서 별의별 논쟁을 많이 했거든요.

대한민국에 철학자는 없다, 철학가가 있거나 철학인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방송가 같은데서 소개할 때,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철학하는 사람, 주로 철학자라고 편하게 불러요. 많이 언어의 민주화가 된 거예요.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함석헌의 해석학

마지막으로 함석헌 선생이 노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귀 기울였는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이야기예요. 이 지점은 뭐와 다르냐면, 제가 『철학에서 이야기로』 책을 쓰면서 첫 번째 챕터 제목이 ‘철학 만들기에서 철학하기’ 라는 걸 구분했습니다. 즉,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에요. 하지만 철학이 아닌 그 무엇의 내용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철학적인 방식을 부여함으로써 철학적인 위상을 획득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런 책들을 쓰신 분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서양의 철학하는 사람들이 관심 있게 읽는다. 그 다음에,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이 철학적 관심으로 대해줬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무게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달리 말하면, 서양 철학적인 용어들, 쉽게 말하면 도(道하)라고 하면 이게 실체라고 하는 용어로 해석될 때만 이게 철학이 되는 거예요. 도 자체는 철학이 안 된다는 거죠. 이게 바로 신빙성입니다.

실체라는 말은 노자에 안 나오잖아요.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만 우리는 철학이라고 인정한단말이에요.

그냥 도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되죠? 불합리하다, 비과학적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가 ‘안녕히 계세요’ 그렇잖아요. 도망가야 하잖아요.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신비주의로 빠지게 되는.

달리 말하면, 도와 실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실체가 되는 거고, 가까이 있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라고 하는 판단의 근거는 사실 판단의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저쪽에 있다는 거죠.

중요한 건 뭐냐. 노자라는 텍스트에 대해서 실체니, 로고스니 하는 어려운 용어들을 자꾸 결합시키는 노력도 중요하죠. 새로운 재해석을 제공하는 행위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 자체가 텍스트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고 당시 사회의 어떤 결들을 전해주고 있는지를 먼저 귀 기울여보는 것. 이것이 먼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런 것 때문에 과거를 보세요. 과거에는 주석사 연구를 안 했어요. 90년대 들어서 비로소 주석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바로 그런 것들이 철학이라는 개념 지형도가 바뀌는 것과 맞닿아 있는데.

뭐가 달랐느냐.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양철학을 하는 분들은 철학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 했습니다. 90년대 넘어서면서부터 동양철학도 대등하다고 얘길해요.

같은 과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서양 철학 하시는 분들이 동양철학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동양철학은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좀 문제가 있어.” 했다는 거죠.

하지만 장구한 기간 동안 논문이 축적되고 어려운 용어들이 동원되고 해석이 쌓이게 되니까 이제는 “아”

이것만 가지고는 이해를 못 하거든요. “실체, 로고스” 하니까 “오” 이렇게 되는 거죠. 사실은 이게 선생님들이 그랬다기보다도, 그렇게 이야기해야지만 듣는 사람들이 철학이라고 인지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것들은 이제는 아니라고 보는 거죠. 옛날 선생님들도 생각이 많이 바뀌어서 그렇지 않고, 도 자체에 맥락적 의미가 무엇이냐.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방식으로 질문의 방식이 바뀝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님의 읽기는 그와 같은 ‘해석적 읽기’가 아니라 ‘참여적 읽기’예요. 삶 속에서 대화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 분은 귀를 기울인다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인데, 해석이라는 말은 헤르메스가 말을 보여주는 거잖습니까.

달리 말하면, 말 하는 자에게 권력의 무게가 실려 있어요. 해석학의 특징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무게가 듣는 사람에게 있어요. 말하자면, 노자에 대해 이야기한다하더라도 함석헌 선생 당신이 새로운 노자를 창조해서 그걸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귀를 기울이는 자고 또 자기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들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무게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삶이라고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함석헌 선생의 해석은 다른 겁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들이야말로 전통동아시아철학이 갖고 있었던 나름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러한 접근 방식을 따라 읽을 때야말로 함석헌을 따라서 함석헌을 해석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함석헌 선생이 당시에 페미니즘을 말했다, 과학을 말했다고 하지만 무엇을 말했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단 말입니다. 즉, 함석헌 선생이 어떤 방식으로 귀를 기울였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말했는가.

그럼 우리가 노자를 가지고 페미니즘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그 방식에 대해서 배우는 겁니다. 즉, 철학 용어가 아니라 철학하기의 모델로서 함석헌을 읽는 게 더 타당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상당히 함축적으로 이미 하고 계세요, 직접.

3페이지를 보면, 특히 이 두 단락은 다른 분야를 연구하시는 분들에게 상당히 도움 되는 구절입니다. 제가 왜 말하기가 아니라 귀 기울임으로 해석했는지도 이걸 보면 맥락이 나옵니다.

[사실 이날까지의 옛 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 강의라고 하는 공간만큼 권위적인 게 없어요. 만약에 제가 노자 전문가라고 하는 소문을 못 들었으면 여기 오실 리가 없잖아요. 강의를 들을만한 이유가 없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옛글을 고쳐 씹는 데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 있는 종교로부터 올 반대이다... 그럴 때 제일 문제되는 것은 권위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는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코 형식에 거리끼지 않았다. 또 저쪽을 숭인시키자는 것이 목적 아니었다. 그들에게 권위는 영(靈)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쳤다. 그리고는 옛날의 전통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하지 않노라고 했다.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었다.”(, 21-22쪽)]

이 표현은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는다는 한 마디는 서구에서 그 유명한 해석학자들의 논의와 동일한 격에 속하는 무게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문장은 더 재밌습니다.

[나는 노자·장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숲 속에 깃들인 뱁새’ 같이 ‘시냇가에서 물 마시는 두더지’ 같이 날마다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개념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고전과 나의 대화고 그 자체가 삶의 과정이다.

이런 말들은 지평융합이 이미 돼 있는 경지가 아닐까요. 가다마가 말한 지평융합이 이미 돼 있는 거예요. 지평융합은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하는 새로운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 해석학은 신앙도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내용이 당연히 섞여 있는 거죠. 하지만 말이 쉽잖습니까. 함 선생님의 말이.

[나는 일제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 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6쪽)다.]

멋있잖습니까. 말을 이렇게 멋있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사람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외모가 잘 생겼는가 못 생겼는가가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이 아름다워야 하고 그가 하는 행동, 그가 하는 말, 입 속에서 향기가 나와야 해요. 향기 있는 말과 향기 없는 말은 마음으로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데 향기가 난다,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금 앞에 읽었던 단락에서 “ 그들에게 권위는 영(靈)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왕필이 뜻을 해석하기 위해서 문자를 버릴 수 있다, 이건 득의 망상. 이미 장지를 원용해서 왕필이 말하는 해석학의 태도와 동일합니다. 이런 점들이 놀라운 거예요.

경전에 대한 해석 태도라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고도로 발전돼 있어요. 우리는 서양의 논리 방식에만 익숙해 있다보니까, 동아시아는 그걸 논증적으로 하는 방식이 적었잖습니다. 하지만 이미 들어있다는 거죠.

이 때 “권위는 영(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성인 공자의 뜻, 오경 속에 살아 숨 쉬는 성인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체득한다면 오경 속에 들어있는 문자, 글자는 잊어도 된다. 이게 왕필의 태도입니다.

마찬가지의 태도를 지금 함석헌 선생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게 성서 해석학과 관련해서 자유분방하게 하는 것과도 연관 있지만 적어도 그 맥락 없이 이런 건 통하는 자세라는 거죠.

제가 여태까지 했던 얘기들이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대단하다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하자면 저는 배우거든요,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되게 쉬운 말로 적혀 있지만 나름대로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게 드러나니까요.

다른 한편에서 보면, 노자에 대한 번역서나 해석서는, 요즘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가 노자를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함석헌 선생의 노자만큼, 저는 최근에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읽은 것들과 비교해봤을 때 함석헌 선생이 훨씬 더 일관되고 진솔하고 쉽고 공감이 되고 나름대로의 근거도 있고. 그래서 굉장히 훌륭한 작품, 철학적으로도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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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노장 읽기’의 역사적 연속과 불연속


▲ 한국 사회에서 노장 해석의 갈래

자, 그럼 이제 함석헌 선생님이 상식을 창조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다 끝이냐? 그게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역사적인 시각으로 전향해보면, 상식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굉장히 중요한 한국 땅이라고 하는 지형도와 맞닿아 있는 중요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 점이 그의 위대함을 더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겠죠. 즉 그 연속과 불연속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이 그 다음 부분입니다.

6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의 부분들은 앞 시간에 많이 한 얘기이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정리 차원에서 현재는 조금 달라졌는데 제가 이 글을 쓸 당시가 몇 년 전이었으니까, 처음 학위 논문을 시작할 때 이런 식의 제안을 했으니까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결들을 잡는다면은 대략 지금에 와서도 노자나 장자를 해석하는 절, 특히 노자를 해석하는 절이 훨씬 더 복잡한데 한 여덟가지 정도로 분류를 할 수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제왕지술(帝王之術) 혹은 법가적 해석 특히 무위를 치술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갈래가 소수이긴 하지만 있습니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爲無爲, 則無不治.); 2장,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교령을 행한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 새롭게 발견된 『황제사경』(黃帝四經), 韓非子, 申不害 등등]

특히 이러한 건 황로학 붐과 더불어 일어나면서 이러한 정치적 재해석이 상당히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말하는 황로학은 정치사상으로서의 황로학을 중심으로 이야기 합니다. 한나라 초기를 지배했던 통치사상으로서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황로학이 앞에도 뒤에도 껴 있지만 여기서는 황로라는 말이 한 대에서의 전반기의 황로와 후반기의 황로라는 말이 조금 달라요. 즉, 동일한 황제의 노자라고 하는 두 문헌군, 혹은 황제와 노자를 숭앙하는 시조를 따지는 학문 풍토 혹은 학술 운동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적어도 그 글자 자체만 놓고 본다면 한 대와 후 한 대에 이것이 의미가 많이 바뀌는데 그 의미가 바뀌는 과정이 도교적인 성격이 충분히 더 강화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상공 주석의 경우도 철학적인 입각점, 방향은 한 초에 청정무위 사상을 중심으로 돼 있다고 했죠. 하지만 치신 사상등과 같은 것이 굉장히 깊이 들어가 있고, 표현 중에 불사(不死)가 나옵니다.

불사라고 하는 사상은 사실은 고대 중국 도가 사상에는 없던 거예요. 나중에 신설술기라고 하는 신선사상이 들어오고 나서 그 영향으로 인해 이 전통에 들어오게 됩니다.

선진 도가의 중요한 용어는 뭐냐. 불사가 아니라 장생(長生)이에요. 우린 이걸 구분해야 해요. 장생과 불사는 다릅니다. 그럼 뭐가 다르냐. 특히 불사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 방식의 불사가 있어요.

하나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하는 영혼, 영혼불멸론과 연결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몸 자체가 죽지 않는 거예요. 신선이 되는 거죠. 서구에서는 영혼불사로서의 immortality가 중심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영혼과 몸은 뗄 수 없는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몸이 죽으면 안 돼요. 그래서 신선이라고 하는 건데, 장생은 달라요.

장생은 몇 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존연령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죽을 사람이 대낮까지 활달하게 활동하는 날 죽는 날 갑자기 죽는 거예요. 물론 수(壽)를 다하고 나서. 대략 한 120년. 의학적으로 가능한 수가 한 120살 정도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을 보면 다 꽤 오래 살았어요.

황로학(黃老學) 및 도교적 해석은 치신치국(治身治國之道) 및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전통입니다. 이렇게 불어버려요. 장생과 불사가.

노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가져다가 유덕화가 나오는 영화의 제목으로 할 때 ‘천장지구’라고 했잖습니까. 천지는 장구하다고 할 때 천장지구. 그게 천지가 장구하다는 것은 무지하게 오래간다는 거잖습니까. 그것처럼 인간도 오래 간다는 것은 명 안에서의 생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걸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양생에 해당하는 겁니다. 양생이라는 의미도 전한 시대에서 후한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특히 신선술과의 결합과정에서 의미의 폭이 상당히 바뀌게 딥니다.

그래서 도교 전공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이 구분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구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그 다음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게 현학(玄學) 혹은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특히 왕필이 노자를 해석했던 방식을 후대의 학자들이 기무론이다, 무를 중시하는 철학이라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때 무가 형이상학적 절대 무가 아니라는 걸 지적하고 싶어요.

특히 이런 걸 추적할 때 중요한 점은, 아라비아에서 발명한 게 0이잖습니까. 0이라는 개념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진짜 개념이거든요. 고대 중국의 수학책을 보면, 제가 뒤져봤어요. 중국에서 0이라는 걸 개념적으로 흡수하게 되는 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입니다.

즉 공(空)개념을 흡수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하나는 막대기 하나놓고, 막대기 두 개 놓으면 2고 막대기 세 개 놓으면 3이에요. 그럼 0은 막대기 없다. 이게 0이에요.

개념으로 정립돼 있지 않는다는 거죠. 0이라는 개념이 정립돼 있을 때 형이상학적 무라는 개념이 이해되거든요. 조사를 해보니까 중국에서 상당히 늦게 0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만 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회남자 책을 보면 유와 무를 둘러싸고 겹쳐놓고서 복잡한 논리식을 만들어놓은 게 꽤 있는데 그때 무에 관한 규정이 나와요. 넝쿨 있죠, 만물이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엉켜 있는 상태를 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와 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식적이고 개념적인 틀이라는 거죠. 무엇이라 규정한 수 없다. 그래서 무명유형이라는 말이 쓰이는 까닭이 분명한 형체가 지각되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 이름 붙일 수 없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왕필이 도를 해석하면서 무명유형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쓰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많이 가미된 건 사실이에요. 왕필 대에 들어가서.

특히 이 도가 주역의 태극으로 해석됩니다. 제가 엊그저께 서점엘 나가보니까 조선시대 서명 선생이 지은 『도덕지귀』라는 책이 있는데 아주 꼼꼼한 주석과 더불이 번역이 돼 있어요.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하신 전공자들이 했기 때문에 참고가 될 만한데, 거기서도 도를 태극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건 왕필이 없었으면 불가능한데, 바로 이 왕필 식의 새로운 형이상학적이고 현학적인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필 식의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이 노자의 주이고 노자의 원이라고 확장합니다. 그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죠. 이것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고 말하는 거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처세술 혹은 권모술수라는 이단으로서의 해석. 이 얘기는 사실 앞에 나와야 하는데, 제왕지술과 같은 건데. 제왕지술로 읽는 사람은 노자를 읽을 때 의리적으로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읽고선 말 안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권모술수적 성향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말과 붙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때 이단은 종교적 이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온전한 삶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거죠.

그 다음 다섯 번째, 신과학 혹은 신비주의적 해석. 80년대에 노자가 유행하게 된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무위를 해석할 때 엔트로피를 이용해서 해석하시죠. 우리나라에서는 신과학 운동과 연관 있고 특히 프리쳐 카프라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

문제는, 과학을 얘기하지만 이때 주장되는 동아시아의 사상들은 과학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이해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신비주의는 불합리하다는 거죠. 불합리하지만 뜬금없이 갑자기 통찰을 준대요. 많은 책들이 그렇게 돼 있어요. 우린 이런 논리에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신비주의라고 몰아붙일 때, 종교학 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럴듯하게 높여주면서 철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고, 아마존에 들어 가고 ‘노자와 타오이즘’ 이라고 쓴 책들을 보면 mysterious 혹은 mystericism religious 라고 붙어 있는 책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왜냐하면 노자 속에 철학적인 내용이 있다고 말하지 노자라는 텍스트가 철학책이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드물어요. 얼마 전에 독일 출신 학자 가운데 욀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굉장히 재미난 책을 썼어요.

읽어보니까, 노자에 나온 테마를 상당히 새롭게 재해석하는 문인인데, 나중에 세미나 하게 되면 그런 세미도 느끼실 거예요.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해석하는 게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것이거든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데.

그걸 근원학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서 그럴듯하다 싶을 정도로 해석하는 게, 사실 그런 것을 위해 주석서를 보는 건데, 외국인들이 가끔씩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다니까요. 고문헌에는 해박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출간된 책이에요. 『노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들』『Religious and Philosophical Aspects of the Laozi』(Csikszentmihalyi, Mark (Edt)) 라고 하는 편집된 책이 있어요. 이 책에 대한 서문을 써달라고 제안 받았다가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읽느냐. 그건 곤란하다.

즉, 이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 Philosophy를 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여섯 번째, 문화사적 종교사적 해석. 이 부분이 굉장히 넓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묶어버린 까닭은 우리나라 학자층이 좁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런 식의 해석을 하는 사람은 중문과에 계신 분들이거나 전문번역가인데. 예를 들면 소병(簫兵), 『노자와 성』과 같은 책이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뭐냐. 노자에도 나오는 용어들이 당시의 문화적 지형도와 동격으로 해석해버리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의 주석학적 전통에서 나오는 용어의 전통과 틀릴 수도 있어요.

반드시 고문자학이 주석사와 꼭 일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을 갖고 공부하던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와 조건이 다르다는 거죠.

이런 부분은, ‘아 저런 방식으로 읽을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게 좋지, 철학과 곧바로 연결시켜서 왜 저기랑 여기가 다르냐고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섯 번째와 관련해 소개할만한 책이 있는데, 노먼 J 지라드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혼돈신화’를 해석한 책이에요. 고대 중국에도 이른바 창조, creation myth가 있었다는 걸 논증한 책인데. ‘창조신화’ 이 사람이 그 다음에 두꺼운 책을 썼는데 제임스 레게라고 하는 동아시아 고전을 많이 영역했던 사람을 다룬 책이에요.

그런데 제임스 레게 같은 사람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는가를 당시 빅토리아 시대를 훑으면서 쓴 책이거든요. 굉장히 비중있는 사람이고, 콜로라도 대학인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사람 얘기를. 그리고 『철학에서 이야기로』에 약간 소개돼 있기도 하죠.

일곱 번째가 소박한 유물변증법과 역사유물론의 중국적 기원, 즉 마오이즘. 193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대륙중국에서 많이 강조했던 노자를 보는 해석이었죠.

여덟 번 째, 유가적 다윈적 해석. 함석헌 선생님이 포함되기도 하고 저도 포함돼 보고 싶은 부류에 속하는데. 이게 조선시대 노장읽기의 방식입니다.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첫 째는 유가적이다. 왜 그러냐.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는 절성기지, 절인기의 즉 도덕성을 의존하지 마라. 그 다음에 지적, 합리적, 반성적인 삶의 방식은 최고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잖아요.

그런데 유가적 해석이라고 붙일 수 있는 까닭은, 그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책을 갖다가 유학의 타락한 점, 사회의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는 방식의 논리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절성기지나 절인기의를 말하지만, 그런 도덕성을 가지고 사회의 도덕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쓴다는 게 역설적이라는 거죠. 이게 유가적인 겁니다. 왕필이 유가적인 이유도 그런 점에서 성립되는 거예요.

지난 번에도 봤잖아요. 상현, 불상현. 노자 연구는 현명하다고 판단되는 놈들을 정치나 행정관료로 임용하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하상공은 말 번지르르하게 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을 임용하지 말라고 그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왕필은 어떻게 했었죠? 제대로 될 사람을 임용하면 다툼이 없을 거니까 숭상하지 않게 된다고 말을 바꾸잖아요. 그럼 무슨 뜻입니까.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해라.

동일한 노자의 구절을 하상공과 왕필은 전혀 다른 방식의 의미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곡이 아니라, 그가 유가이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절인기의, 절성기지와 같은 반문명적 혹은 반주지주의적 혹은 반도덕적 이런 식의 표현을 통해서 오히려 도덕성을 세우고 사회성을 높이는 데 이용한다. 그래서 이건 분명 유가적입니다.

그리고 다원적이죠. 노자의 기본적인 뜻. 공자를 얘기하면서 성인의 뜻을 이야기하지 왕필의 책을 읽어가면서 성인의 뜻과 같은 얘기 안 나옵니다.

물론 노자지략이라는 책 속에서 노자의 핵심저인 내용을 숭본의식말이라는 표현으로 집약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방법론적인 차월인 뿐이에요.

즉, '공자와 같은 성인의 위대한 뜻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와 같은 태도가 노자를 읽는 데에는 없습니다.


▲ 비판 무기로서 노자

따라서 노자라는 책은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는 통찰을 얻어낼 수 있느냐는 정도만 중요하지, 도덕성과 같은 핵심적인 부분은 이미 있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하면 될 것 같아요. 노자라는 프로그램이 있고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과거에 도가겠죠.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활용하는 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을 깔아서 상대되는 다른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못 하도록 제어하는 장치로서만 이용한다는 거죠. 내용은 상관없이.

그래서 이 유가적, 다원적 해석의 특징은 바로 비판철학의 기능. 유가철학 자체에는 비판철학으로서의 논리적 무기가 상당히 적어요.

즉, 사회비판으로서의 무기는 많지만 철학 대 철학이 싸울 때 그걸 비판하는 논리적 무기는 상당히 적어요. 왜냐. 이미 진리의 말씀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예요.

그런데 도가 쪽이나 장자를 한번 읽어보세요. 자기 철학은 무엇이다고 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타자에 대해서 다른 족에 대해서 비판하고 조소하고 풍자하고 은유하는 내용이 훨씬 많잖습니까. 당연히 비판의 논리가 더 많이 들어있죠.

그래서 노장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은 유학자끼리 싸울 때 유학을 가지고 유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노장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할 때만 써요 주로. 이것이 바로 노장전통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용당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유학은. 노자는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지만, 유가는 상대적으로 이념지향성격이 분명한 데 비해서 노장철학은 이념지향적인 성격이 모호해집니다.

충과 효를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이야기 하는 유가가 충효를 비판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노자를 원용해서 비판하는 건데. 그런데 그때 비판하는 게 제대로 된 충효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거잖아요.

같은 용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상대방을 비판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생각하시면, 노장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술적 무기였는가. 그래서 노장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의 도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는 게 훨씬 더 정확한 판단입니다.

노자나 장자를 이용하고 활용했지 노자나 장자라는 철학 자체를 승화하거나 그걸 펼치려고 했던 바가 적었다는 겁니다. 그건 도가, 예술철학으로 가면 쫙 펼쳐지죠.

◆ 함석헌 ‘노장 읽기’의 역사적 연속과 불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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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노장 읽기’의 역사적 연속과 불연속


▲ 한국 사회에서 노장 해석의 갈래

자, 그럼 이제 함석헌 선생님이 상식을 창조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다 끝이냐? 그게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역사적인 시각으로 전향해보면, 상식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굉장히 중요한 한국 땅이라고 하는 지형도와 맞닿아 있는 중요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

그 점이 그의 위대함을 더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겠죠. 즉 그 연속과 불연속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이 그 다음 부분입니다.

6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의 부분들은 앞 시간에 많이 한 얘기이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정리 차원에서 현재는 조금 달라졌는데 제가 이 글을 쓸 당시가 몇 년 전이었으니까, 처음 학위 논문을 시작할 때 이런 식의 제안을 했으니까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결들을 잡는다면은 대략 지금에 와서도 노자나 장자를 해석하는 절, 특히 노자를 해석하는 절이 훨씬 더 복잡한데 한 여덟가지 정도로 분류를 할 수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제왕지술(帝王之術) 혹은 법가적 해석 특히 무위를 치술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갈래가 소수이긴 하지만 있습니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爲無爲, 則無不治.); 2장,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교령을 행한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 새롭게 발견된 『황제사경』(黃帝四經), 韓非子, 申不害 등등]

특히 이러한 건 황로학 붐과 더불어 일어나면서 이러한 정치적 재해석이 상당히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말하는 황로학은 정치사상으로서의 황로학을 중심으로 이야기 합니다. 한나라 초기를 지배했던 통치사상으로서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황로학이 앞에도 뒤에도 껴 있지만 여기서는 황로라는 말이 한 대에서의 전반기의 황로와 후반기의 황로라는 말이 조금 달라요. 즉, 동일한 황제의 노자라고 하는 두 문헌군, 혹은 황제와 노자를 숭앙하는 시조를 따지는 학문 풍토 혹은 학술 운동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적어도 그 글자 자체만 놓고 본다면 한 대와 후 한 대에 이것이 의미가 많이 바뀌는데 그 의미가 바뀌는 과정이 도교적인 성격이 충분히 더 강화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상공 주석의 경우도 철학적인 입각점, 방향은 한 초에 청정무위 사상을 중심으로 돼 있다고 했죠. 하지만 치신 사상등과 같은 것이 굉장히 깊이 들어가 있고, 표현 중에 불사(不死)가 나옵니다.

불사라고 하는 사상은 사실은 고대 중국 도가 사상에는 없던 거예요. 나중에 신설술기라고 하는 신선사상이 들어오고 나서 그 영향으로 인해 이 전통에 들어오게 됩니다.

선진 도가의 중요한 용어는 뭐냐. 불사가 아니라 장생(長生)이에요. 우린 이걸 구분해야 해요. 장생과 불사는 다릅니다. 그럼 뭐가 다르냐. 특히 불사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 방식의 불사가 있어요.

하나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하는 영혼, 영혼불멸론과 연결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몸 자체가 죽지 않는 거예요. 신선이 되는 거죠. 서구에서는 영혼불사로서의 immortality가 중심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영혼과 몸은 뗄 수 없는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몸이 죽으면 안 돼요. 그래서 신선이라고 하는 건데, 장생은 달라요.

장생은 몇 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존연령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죽을 사람이 대낮까지 활달하게 활동하는 날 죽는 날 갑자기 죽는 거예요. 물론 수(壽)를 다하고 나서. 대략 한 120년. 의학적으로 가능한 수가 한 120살 정도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을 보면 다 꽤 오래 살았어요.

황로학(黃老學) 및 도교적 해석은 치신치국(治身治國之道) 및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전통입니다. 이렇게 불어버려요. 장생과 불사가.

노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가져다가 유덕화가 나오는 영화의 제목으로 할 때 ‘천장지구’라고 했잖습니까. 천지는 장구하다고 할 때 천장지구. 그게 천지가 장구하다는 것은 무지하게 오래간다는 거잖습니까. 그것처럼 인간도 오래 간다는 것은 명 안에서의 생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걸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양생에 해당하는 겁니다. 양생이라는 의미도 전한 시대에서 후한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특히 신선술과의 결합과정에서 의미의 폭이 상당히 바뀌게 딥니다.

그래서 도교 전공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이 구분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구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그 다음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게 현학(玄學) 혹은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특히 왕필이 노자를 해석했던 방식을 후대의 학자들이 기무론이다, 무를 중시하는 철학이라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때 무가 형이상학적 절대 무가 아니라는 걸 지적하고 싶어요.

특히 이런 걸 추적할 때 중요한 점은, 아라비아에서 발명한 게 0이잖습니까. 0이라는 개념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진짜 개념이거든요. 고대 중국의 수학책을 보면, 제가 뒤져봤어요. 중국에서 0이라는 걸 개념적으로 흡수하게 되는 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입니다.

즉 공(空)개념을 흡수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하나는 막대기 하나놓고, 막대기 두 개 놓으면 2고 막대기 세 개 놓으면 3이에요. 그럼 0은 막대기 없다. 이게 0이에요.

개념으로 정립돼 있지 않는다는 거죠. 0이라는 개념이 정립돼 있을 때 형이상학적 무라는 개념이 이해되거든요. 조사를 해보니까 중국에서 상당히 늦게 0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만 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회남자 책을 보면 유와 무를 둘러싸고 겹쳐놓고서 복잡한 논리식을 만들어놓은 게 꽤 있는데 그때 무에 관한 규정이 나와요. 넝쿨 있죠, 만물이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엉켜 있는 상태를 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와 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식적이고 개념적인 틀이라는 거죠. 무엇이라 규정한 수 없다. 그래서 무명유형이라는 말이 쓰이는 까닭이 분명한 형체가 지각되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 이름 붙일 수 없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왕필이 도를 해석하면서 무명유형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쓰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거든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많이 가미된 건 사실이에요. 왕필 대에 들어가서.

특히 이 도가 주역의 태극으로 해석됩니다. 제가 엊그저께 서점엘 나가보니까 조선시대 서명 선생이 지은 『도덕지귀』라는 책이 있는데 아주 꼼꼼한 주석과 더불이 번역이 돼 있어요.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하신 전공자들이 했기 때문에 참고가 될 만한데, 거기서도 도를 태극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건 왕필이 없었으면 불가능한데, 바로 이 왕필 식의 새로운 형이상학적이고 현학적인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필 식의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이 노자의 주이고 노자의 원이라고 확장합니다. 그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거죠. 이것도 있었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고 말하는 거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처세술 혹은 권모술수라는 이단으로서의 해석. 이 얘기는 사실 앞에 나와야 하는데, 제왕지술과 같은 건데. 제왕지술로 읽는 사람은 노자를 읽을 때 의리적으로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읽고선 말 안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권모술수적 성향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말과 붙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때 이단은 종교적 이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온전한 삶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거죠.

그 다음 다섯 번째, 신과학 혹은 신비주의적 해석. 80년대에 노자가 유행하게 된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무위를 해석할 때 엔트로피를 이용해서 해석하시죠. 우리나라에서는 신과학 운동과 연관 있고 특히 프리쳐 카프라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

문제는, 과학을 얘기하지만 이때 주장되는 동아시아의 사상들은 과학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이해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신비주의는 불합리하다는 거죠. 불합리하지만 뜬금없이 갑자기 통찰을 준대요. 많은 책들이 그렇게 돼 있어요. 우린 이런 논리에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신비주의라고 몰아붙일 때, 종교학 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럴듯하게 높여주면서 철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고, 아마존에 들어 가고 ‘노자와 타오이즘’ 이라고 쓴 책들을 보면 mysterious 혹은 mystericism religious 라고 붙어 있는 책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왜냐하면 노자 속에 철학적인 내용이 있다고 말하지 노자라는 텍스트가 철학책이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드물어요. 얼마 전에 독일 출신 학자 가운데 욀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굉장히 재미난 책을 썼어요.

읽어보니까, 노자에 나온 테마를 상당히 새롭게 재해석하는 문인인데, 나중에 세미나 하게 되면 그런 세미도 느끼실 거예요.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해석하는 게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것이거든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데.

그걸 근원학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서 그럴듯하다 싶을 정도로 해석하는 게, 사실 그런 것을 위해 주석서를 보는 건데, 외국인들이 가끔씩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다니까요. 고문헌에는 해박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출간된 책이에요. 『노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들』『Religious and Philosophical Aspects of the Laozi』(Csikszentmihalyi, Mark (Edt)) 라고 하는 편집된 책이 있어요. 이 책에 대한 서문을 써달라고 제안 받았다가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읽느냐. 그건 곤란하다.

즉, 이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 Philosophy를 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여섯 번째, 문화사적 종교사적 해석. 이 부분이 굉장히 넓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묶어버린 까닭은 우리나라 학자층이 좁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런 식의 해석을 하는 사람은 중문과에 계신 분들이거나 전문번역가인데. 예를 들면 소병(簫兵), 『노자와 성』과 같은 책이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뭐냐. 노자에도 나오는 용어들이 당시의 문화적 지형도와 동격으로 해석해버리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의 주석학적 전통에서 나오는 용어의 전통과 틀릴 수도 있어요.

반드시 고문자학이 주석사와 꼭 일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전을 갖고 공부하던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와 조건이 다르다는 거죠.

이런 부분은, ‘아 저런 방식으로 읽을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게 좋지, 철학과 곧바로 연결시켜서 왜 저기랑 여기가 다르냐고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섯 번째와 관련해 소개할만한 책이 있는데, 노먼 J 지라드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혼돈신화’를 해석한 책이에요. 고대 중국에도 이른바 창조, creation myth가 있었다는 걸 논증한 책인데. ‘창조신화’ 이 사람이 그 다음에 두꺼운 책을 썼는데 제임스 레게라고 하는 동아시아 고전을 많이 영역했던 사람을 다룬 책이에요.

그런데 제임스 레게 같은 사람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는가를 당시 빅토리아 시대를 훑으면서 쓴 책이거든요. 굉장히 비중있는 사람이고, 콜로라도 대학인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사람 얘기를. 그리고 『철학에서 이야기로』에 약간 소개돼 있기도 하죠.

일곱 번째가 소박한 유물변증법과 역사유물론의 중국적 기원, 즉 마오이즘. 193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대륙중국에서 많이 강조했던 노자를 보는 해석이었죠.

여덟 번 째, 유가적 다윈적 해석. 함석헌 선생님이 포함되기도 하고 저도 포함돼 보고 싶은 부류에 속하는데. 이게 조선시대 노장읽기의 방식입니다.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첫 째는 유가적이다. 왜 그러냐.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는 절성기지, 절인기의 즉 도덕성을 의존하지 마라. 그 다음에 지적, 합리적, 반성적인 삶의 방식은 최고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잖아요.

그런데 유가적 해석이라고 붙일 수 있는 까닭은, 그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책을 갖다가 유학의 타락한 점, 사회의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는 방식의 논리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절성기지나 절인기의를 말하지만, 그런 도덕성을 가지고 사회의 도덕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쓴다는 게 역설적이라는 거죠. 이게 유가적인 겁니다. 왕필이 유가적인 이유도 그런 점에서 성립되는 거예요.

지난 번에도 봤잖아요. 상현, 불상현. 노자 연구는 현명하다고 판단되는 놈들을 정치나 행정관료로 임용하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하상공은 말 번지르르하게 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을 임용하지 말라고 그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왕필은 어떻게 했었죠? 제대로 될 사람을 임용하면 다툼이 없을 거니까 숭상하지 않게 된다고 말을 바꾸잖아요. 그럼 무슨 뜻입니까.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해라.

동일한 노자의 구절을 하상공과 왕필은 전혀 다른 방식의 의미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곡이 아니라, 그가 유가이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절인기의, 절성기지와 같은 반문명적 혹은 반주지주의적 혹은 반도덕적 이런 식의 표현을 통해서 오히려 도덕성을 세우고 사회성을 높이는 데 이용한다. 그래서 이건 분명 유가적입니다.

그리고 다원적이죠. 노자의 기본적인 뜻. 공자를 얘기하면서 성인의 뜻을 이야기하지 왕필의 책을 읽어가면서 성인의 뜻과 같은 얘기 안 나옵니다.

물론 노자지략이라는 책 속에서 노자의 핵심저인 내용을 숭본의식말이라는 표현으로 집약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방법론적인 차월인 뿐이에요.

즉, '공자와 같은 성인의 위대한 뜻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와 같은 태도가 노자를 읽는 데에는 없습니다.


▲ 비판 무기로서 노자

따라서 노자라는 책은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는 통찰을 얻어낼 수 있느냐는 정도만 중요하지, 도덕성과 같은 핵심적인 부분은 이미 있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하면 될 것 같아요. 노자라는 프로그램이 있고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과거에 도가겠죠.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활용하는 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을 깔아서 상대되는 다른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못 하도록 제어하는 장치로서만 이용한다는 거죠. 내용은 상관없이.

그래서 이 유가적, 다원적 해석의 특징은 바로 비판철학의 기능. 유가철학 자체에는 비판철학으로서의 논리적 무기가 상당히 적어요.

즉, 사회비판으로서의 무기는 많지만 철학 대 철학이 싸울 때 그걸 비판하는 논리적 무기는 상당히 적어요. 왜냐. 이미 진리의 말씀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예요.

그런데 도가 쪽이나 장자를 한번 읽어보세요. 자기 철학은 무엇이다고 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타자에 대해서 다른 족에 대해서 비판하고 조소하고 풍자하고 은유하는 내용이 훨씬 많잖습니까. 당연히 비판의 논리가 더 많이 들어있죠.

그래서 노장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은 유학자끼리 싸울 때 유학을 가지고 유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노장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할 때만 써요 주로. 이것이 바로 노장전통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용당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유학은. 노자는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많지만, 유가는 상대적으로 이념지향성격이 분명한 데 비해서 노장철학은 이념지향적인 성격이 모호해집니다.

충과 효를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이야기 하는 유가가 충효를 비판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노자를 원용해서 비판하는 건데. 그런데 그때 비판하는 게 제대로 된 충효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거잖아요.

같은 용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상대방을 비판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생각하시면, 노장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술적 무기였는가. 그래서 노장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의 도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는 게 훨씬 더 정확한 판단입니다.

노자나 장자를 이용하고 활용했지 노자나 장자라는 철학 자체를 승화하거나 그걸 펼치려고 했던 바가 적었다는 겁니다. 그건 도가, 예술철학으로 가면 쫙 펼쳐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