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6

한용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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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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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1][2]
사망
1944년 6월 29일 (향년 65세)
본관
별칭
아명은 한유천(韓裕天)
본명은 한정옥(韓貞玉)
아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
활동 분야
학력
동국대학교 1기 졸업
종교
저서

1. 소개
1.1. 생애의 기록1.2. 유년 시절에서 출가까지1.3. 출가 후 독립운동 참여까지1.4. 민족대표 33인1.5. 출소 후 입적까지
2. 대처승 인정 논란
2.1. 왜 대처승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나?2.2. 불교 사회주의자 논란
3. 생전의 일화
3.1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봉변3.2. 굴라재의 신불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3.4. 개만도 못한 놈들3.5. 조선일보 지지자
4. 항일운동
4.1. 사진 합성을 당하다
5. 친일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6. 작품
6.1. 작품속 글귀들

1. 소개[편집]

한국의 시인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속명은 유천(裕天), 호는 만해.[5]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 태생. 동국대학교는 1기 졸업생인 그를 높이 기려 만해관, 만해광장, 만해시비 등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1. 생애의 기록[편집]

1.2. 유년 시절에서 출가까지[편집]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출가의 원인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하급관리였던 부친 한응준(韓應俊)이 의병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를 보아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3. 출가 후 독립운동 참여까지[편집]

1905년 영제(永濟)스님에 의하여 수계(受戒)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으로 이때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바로 용운(龍雲)이다.[6] 법호는 만해(萬海)였다.

이후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그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4. 민족대표 33인[편집]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1.5. 출소 후 입적까지[편집]

3년을 복역한 뒤 출소, 민족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며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내어 《불교대전》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글로써 민족의식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다림이 무색하게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 만 64세 나이로 입적했다. 사인은 뇌졸중. 왜인지 체온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혈색도 양호했기에, 사람들은 그가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사흘이 지나자 마침내 화장했다고 하며 화장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대한민국 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한용운이 생전에 지은 시집 님의 침묵은 그 불교적인 비유와 상징적 수법으로 지금도 초ㆍ중ㆍ고등학생 국어책에 수록되어 있다.

제자 중에는 기행으로 유명한 춘성 스님이 있다.

2. 대처승 인정 논란[편집]

대처승[7]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노자도 자기 칼럼에서 스님이나 그 외의 종교인들도 사랑을 할 권리가 있다고 했으니, 시대를 앞서갔다. 한용운 본인도 대처승이 되었는데, 원래 출가 전에 결혼을 해서 아들 1명(한보국)을 두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승려 시절인 1931년에 재혼하여 외동딸(한영숙)을 보았다. 첫째 아들인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둘째인 한영숙은 아버지의 기념 행사에 가끔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북동의 심우장을 지켰다.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아버지처럼 이를 보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떠났다는 야사가 있었으나, 이는 한영숙 씨가 부인했다.

한용운의 대처승 인정 요구는 주장할 당시에도 파격적인 소수파였고 해방 이후의 한국 불교의 주계종파가 된 조계종도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아 현대에도 소수파다. 태고종이 대처승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종파이다.

2.1. 왜 대처승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나?[편집]

한용운은 이른바 '근대적 불교'를 추구하고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고 그 과정에서 대처승의 인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한용운의 근대적 불교 추구는 사회진화론적 색채가 보인다고 비난받으며 불교 사회주의라거나[8] 하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용운이 근대적 불교를 추구한 것은, 일제침략기를 거쳐 불교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세대이며 동시에 그가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사회진화론은 사상적인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독립운동과 민족 운동에 큰 영향을 준 학파이기 때문이다.

2.2. 불교 사회주의자 논란[편집]

이른바 '불교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불교의 근본 정신이 청빈과 나눔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하다못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유명한 뉴라이트 학자 안병직도 한용운의 '불교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평했으며 관련 글 내내 한용운을 '선생'으로 칭하고 있다.

또한 한용운 처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안창호와 캉유웨이가 있으며 애국 계몽 운동 등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딱히 사상적인 문제를 엮을 이유는 없다.

3. 생전의 일화[편집]

3.1.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봉변[편집]

한용운이 스님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인데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고 싶었던 한용운이 배를 타고 가다가[9]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동료 스님들과 같이 있었던 한용운을 한 무리의 조선청년들이 포위했다. 당시 일제의 앞잡이나 친일파들이 스님으로 많이들 위장했다하는데 진짜 스님인 한용운이 엉뚱하게 친일 밀정으로 몰린 것이다. 맞아죽을 위기에 처한 스님들이 '우린 단지 중일 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청년들은 쉬이 의심을 풀지 않았고 분위기는 험악해져갔다. 그때 한용운이 "우릴 죽여도 개의치 않겠으나 이국의 바닷물에 던지지 말고 조국 땅에 묻어주시오.'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그들이 친일파가 아님을 안 청년들이 사과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3.2. 굴라재의 신불[편집]

만주로 향하면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키가 작고 스님이라 머리를 매우 짧게 깎은 그를 주변을 정탐하러 온 일본인으로 오인한 조선 독립군 후보생 청년들이 한용운을 향해 총을 쏴서 총알이 머리에 박혔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쏜 사람을 욕하거나 허둥지둥 대지도 않고 침착한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을에 도착하였으며, 병원에서 무마취수술을 할 때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치료를 해준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활불(살아 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청년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한용운은 "뭐 그럴 게 있나? 청년들이여, 아무 걱정 마시오.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용감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난 이제 마음을 놓았소. 조선의 독립은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있어서 아주 희망적이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총격의 후유증으로 한용운은 한평생 머리를 이유없이 흔들거리는 체머리(한의학에선 풍두선이라고 칭함) 증상이 생겼으며, 뼈 속까지 박힌 총탄도 다 빼지는 못해 입적할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3.3.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편집]

어느 날 한용운이 친일 주지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에 우연히 참석하여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주지들은 모르겠다고 했고 한용운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하지만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건 송장입니다. 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썩어가는 송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다. 흥미가 동한 주지들이 귀를 기울이자 한용운은 단상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외쳤다. "바로 여기에 모인 네놈들이다!"

3.4. 개만도 못한 놈들[편집]

이광수최린 등의 유명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파로 전향하자 격노한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와서 "이보게, 만해. 어떻게 이런 개 같은 놈들이 있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한용운은 "벽초, 그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니네."라고 말했다. 홍명희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냐고 따지자 한용운은 "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네. 하지만 이들은 민족과 조국을 배신했으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네. 개들이 자네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하겠나?"라고 화답했다. 그러자 홍명희는 "이런, 개에게 큰 실례를 범했구만."이라고 수긍하고는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옛날부터 있던 드립이었다

3.5. 조선일보 지지자[편집]

살아생전 조선일보를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이던 1930년대 초 뿐만 아니라 폐간하던 1940년까지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했다. 조선일보가 친일 행적을 남긴 1938~1940년에도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한 사실을 보면 한용운은 조선일보가 친일 매국 신문으로 변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4. 항일운동[편집]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10],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11]. 일례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고 후에 최남선이 찾아오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 저입니다. 육당(최남선의 호)이 왔습니다."
"육당이 누구요?"
"아니? 선생께선 이 육당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선생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최남선-정인보, 이광수-홍명희에게도 있다.

3.1운동때 김윤식이 독립청원서 사건으로 작위를 박탈당한 얼마 뒤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우연의 일치[12]로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하게 된 사건이 벌어지자 한용운은 인도에도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칭찬하는듯 까는듯 하는 말을 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실 만해 선생의 시는 타고르의 영향을 꽤 받았고,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라는 제목의 시를 쓴적도 있다.

이광수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하루는 그의 집인 심우장에 젊은 시절의 이광수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행동을 잠시 관찰하더니 "네놈은 나라를 배신할 인물이니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마라!"하고 일갈하면서 내쫓았다고 한다.

하루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최린이 딸[13]에게 돈을 쥐어주자 대노하면서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돈을 빼앗아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님의 침묵을 비롯해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들은 대단히 여성적인 어조로 쓰였지만 한용운 본인은 대단히 호방한 사람이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도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4.1. 사진 합성을 당하다[편집]

같은 민족 대표였지만 30년대 이후 자치론, 40년대엔 친일이라는 전형적인 변절 루트를 밟은 박희도와의 재미있는 비교가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것도 합성 사진과 함께.

파일:/image/shindonga/2008/08/25/200808010500005_2.jpg

(5) 誘之不動(유지부동) 한용운 씨 :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女: 키-스를 해주어요.
한: 웨! 점잔치 못하게 이러시오.
女: 점잔이 다 무어 말너비트러진 거야! 엉 어서 키-스 해주어… 응.
이와가티 섹씨가 조르나 한용운 씨는 그래도 끔적아니하고잇습니다.
이 사진이 ‘카메라’놈의 작난이 아니고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한씨가 당한다면?

파일:/image/shindonga/2008/08/25/200808010500005_5.jpg

(6)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 씨 :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것을 분개한 박씨는 이삼일전에 불국 파리를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땐서와 이와가티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존으로 본사에 피송하야 독자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햇습니다.
‘카메라’놈도 행셋머리가 고약해!’

웃긴 것은 박희도의 묘가 바로 한용운 선생 묘로부터 관리사무소 쪽으로 좀 더 내려오면 있다는 것이다. 이도 악연인가.

5. 친일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편집]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대처문제와 관련하여 '헌의서'와 '건백서'를 보냈다. 건백은 정부나 임금에게 자신의 뜻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 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殿이란 경칭을 사용했고 조선왕조를 전 한국(前韓國)이라고 표현했다.[14] 또한 1937년 '지나사변과 불교'라는 글에서 중일전쟁을 옹호하고 총후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에 건백서을 올린 것은 당시에는 불교개혁이 절실했고, 개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또한 건백서 제출만으로 만해를 친일로 볼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사변과 불교' 글은 만해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글은 당시 불교지 편집장이 였던 이종욱[15]이 쓴 것임을 전 만해전집 편집자였던 최범술 씨가 확인했다고 한다. 참조 기사

따라서 이 논쟁은 오래전 1979년도에 끝난 논쟁이다.

6. 작품[편집]

6.1. 작품속 글귀들[편집]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糸)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룻배와 행인」
[1] 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2]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따르면 출생지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현 홍성읍 오관리 남문마을)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 마을은 만해가 7살 때 이주하여 성장한 곳이라 한다.[3]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심우장[4] 이양공파(夷襄公派) 33세손[5] 萬海 또는 卍海. 둘 다 큰 바다, 혹은 가득 찬 바다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6] 그러니까 '용운 스님' 인 것이다. 다만 일부 소개글에는 법명을 보통이름(속세시절 이름)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한용운이라는 이름이 워낙 잘 알려져 있다보니 이걸 본명으로 오해해 생긴 오류로 보인다.[7] 결혼을 하여 가정을 둔 승려를 말한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 속에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동안 많이 늘어났다. 현재는 기혼승이라고 부른다.[8]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가 자기의 독재와 줄타기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창한 동명의 이론과는 다르다.[9] 이때 당시에 이런 비범한 일화도 있었다. 난생 처음 백인을 본 한용운이 러시아인 선원을 보고 "여봐라, 이 아라사 뱃놈아! 넌 웬 키가 멋대가리없이 크기만 하냐! 그리고 눈은 또 왜 그런 색깔이냐!"하고 외쳤고, 이를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선원들이 히죽거렸다고 한다. 물론 인종차별적인 생각에 백인들을 깔보고 그런 건 아니고, 처음으로 세계에 발을 딛는 젊은 청년으로서의 기개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시비거는 투가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한테 신기하다는 투로 웃으면서 얘기한거라서, 배 안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고 한다.[10] 북반구에서는 태양이 남쪽 하늘에, 남반구에서는 북쪽 하늘에 치우쳐 뜨기 때문에 북반구의 집은 볕이 드는 남향으로 짓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심우장을 지으면서 조선총독부 꼴도 보기 싫다고 북쪽으로 집을 돌렸다. 그래서 여름엔 무진장 덥고, 겨울엔 무진장 추웠다고 한다.[11] 일제는 호적을 조사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가 도장만 가져와 찍으면 성북동의 땅 '20만 평을 그냥 주겠다고 했을 때도 도장이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12] 1919년 암리차르 학살사건 발생에 대한 항의였다.[13] 이 딸하고도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한용운이 신문을 보던 중 일본 글자가 나오자 딸이 '아버지, 이 글자는 무슨 글자에요?'라고 여쭤보니 한용운 왈, '그건 글자도 아니다. 몰라도 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글자인 가나(仮名)의 뜻이 만해선생 말대로 임시로 사용하는 글, 가짜 글이라는 의미라는 건 함정.[14] 출처필요[15] 일제 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과 동국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초년에는 항일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제에 협조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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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승인 2019.07.10 23:00 댓글 0기사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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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문제 극복 노력이 빚어낸 시대정신의 산물



▲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기념관. <사진=위키백과>

그 동안 만해와 관련된 연구는 국문학이나 사학에 치우친 경향이 많았다. 대부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만해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 민족독립가, 개혁가, 혁명가의 이미지로 굳어져, 불교 수행자, 선사로서 만해의 문제의식이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가 미천하였다. 즉 역사 현장에서 드러난 외적 활동으로서 항일, 독립운동에 주로 관심이 집중되어, 승려로서 만해 본연의 모습이나 사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평가마저 혼란스러운 실정이다. 근대 불교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결여와 식민지불교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용운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정확하게 이루어 질 수 없었다1)는 주장은 설득력 있는 문제 제기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어릴 적부터 한문 서적들을 통해 유가와 도가의 경서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한 전통적인 선비로서 탄탄한 학문적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백담사로 출가 이후 오세암에 있는 장경각의 수많은 불서들을 접함으로써 유·불·선을 통섭하는 동양적 교양을 갖추게 되었다. 9세 때 이미 《서상기(西廂記)》2)를 독파하고, 《통감(痛鑑)》3)의 문의(文義)를 해득하였으며, 《서경(書經)》의 기삼백주(朞三百註)을 통달하였다고 한다. 이후 입산하기 전 18세에는 숙사(塾師)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일련의 유학적 소양은 입산하여 불교를 공부하는 데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유교적 세계관은 만해 사상 형성에 있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만해 사상의 원형적 틀을 이루는 한 자락이 되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신을 바치는 의인이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 품었던 만해의 꿈은 유가적 전통에서 배태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며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유가사상에 정통해 있던 만해는 이에 대응할 논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불교대전》의 목차 구성상에 뚜렷이 유추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유가적 성격4)은 전통불교의 폐해와 이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불교경전 속에 들어있는 충효사상을 비롯한 윤리적인 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불교대전》에 스며있는 유가사상의 측면을 제대로 분석해 낸다면 만해 사상의 특징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는 5, 6년간 설악산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여러 근대 서양 교양서를 접하게 되었다. 세계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地略)》을 읽고 세계 사정에 눈 뜨는가 하면, 스승 김연곡 화상이 건봉사 등에서 구해다 준 중국의 근대 지식인 양계초(梁啓楚, 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5)을 통해 근대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익혔다. 타고난 진취적 기상에 힘입어 당시 승려로서는 드물게 일본에 순유(巡遊)하여 근대 문화를 경험하였으며, 또한 국내 문인들의 해외문학 번역서들을 통해 구미의 문예를 접하며6) 사상의 폭을 넓혀 나갔다.



급진적인 불교 개혁가로서 근대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한 한용운은 양계초로부터 배운 사회진화론을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철학과 조화시키려고 분투하였으며, 처음부터 불교의 구세(救世)적이고 평등주의적 본질을 역설하였다.7) 불교 자체 내에 이미 서구 근대 사상적 요소들이 내재해 있으나, 시대에 적절하게 구현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고, 당대와 미래 시대의 이정표로서 불교사상을 쇄신하고자 하였다.



만해는 유교를 극복하고, 서구 사상을 수용하며, 불교에 귀의한 당시 흔치 않는 인물이다. 불교에 귀의하고서도 은둔적인 산간 불교를 배척하고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새로운 불교로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을 되살리고 잇고자 한 것이었다.8) 《불교대전》의 편찬은 바로 만해가 전통과 근대를 아울러 당대 문제를 타개해 나가고자 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교의 병폐로 인한 많은 문제를 직시한 한용운은 소용돌이치는 시대 상황을 헤쳐 나갈 새로운 사상으로 불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구도열에 불타 깨달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혼란한 시대의 청년 한용운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고민 속에 서서히 불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불교 수행자로 입문하고도 조선 사회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불교에 안착하지 못하고, 국외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다. 드넓은 세상에서의 견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토대로 삼은 불교 안에서 자신의 불교 개혁사상을 정립하여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게 된다. 이것은 만해사상의 청사진으로서 이후 행적의 푯대가 된다. 즉 《조선불교유신론》이라는 사상적 뼈대 위에 그때그때 당면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시대 상황에 맞춰 현실적 대응을 해 나갔다.



만해는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세계관을 혁신하고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경전 공부과 참선 수행을 통해 불교적인 세계관을 체화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의 최종 목표인 해탈을 자유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하고, 자신의 핵심적인 가치로 삼게 된다. 그의 삶과 사상은 불교의 자유정신을 심리적 혹은 내면적 차원으로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연과 적용 범위가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었다. 만해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만해다움’의 출발점은 출가로 인한 불교와의 만남이었다고 평가된다9)는 지적처럼 만해에게 불교는 바로 조선의 현실과 세상의 변화를 읽고 해석하는 가장 유용한 렌즈였다. 그러므로 불교 개혁이 곧 조선의 개혁이었고, 세계 변혁의 시발점이었다.



유가 사상과 근대 사상의 흡수, 그리고 출가자로서 불교 내·외적 경험은 만해사상을 형성하는 주요한 줄기들이었다. 특히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과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과 맞물려 어떤 여정을 통해 만해의 독특한 사상이 정립되었는지 천착할 필요가 있다.《불교대전》은 바로 만해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만해는 탈세속적 구도의 초역사적 일탈을 부인하고, 끝임 없이 변화하는 역사의 현장 가운데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나가고자 하였다. 어릴 적 가슴 속 깊이 품었던 의인·걸사를 추구하던 지사적 정신은 대승 보살의 원력으로 승화되고,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의 불성론(佛性論)은 자유·평등의 근대적 사상 체계 안으로 포섭하는 등 만해 사상의 특성을 새롭게 읽고, 해석해 볼 수 있는 있는 체계를 모색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한용운은 전통의 기반 위에 서구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켜 그 사상이 현장성을 띠며 적극적인 힘으로 전화되어 작용할 수 있게 하였고, 한국 근대 사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10)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으로 《불교대전》의 편제 구성과 인용경전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 만해 사상의 새로운 이면이 조망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동의 시기를 살며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던 삶의 터전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한 만해는 자신의 사상을 고답적인 이론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낸 한 근대 불교계 지성인이었다.



은산철벽 같은 식민지 상황 속에서 대장경의 숲을 헤치며 자신을 연단하듯 인고의 시간을 보낸 만해가 집대성한 《불교대전》의 시대성이나 역사적 의의 등은 앞으로 활발히 개진되어야 연구 주제라 할 수 있다.



앎과 삶의 조화를 이루며 수행자(禪師), 종교인으로서 삶의 전범(典範)을 보여 주었던 한용운의 사상과 실천은 다문화, 다종교 상황이라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묵은 것과 새로운 것, 뿌리 내리고 있는 것과 새롭게 이식되는 것이 어떻게 조화롭게 만나 당대 문화에 합당한 몸짓으로 거듭나 창조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해의 치열한 자기 쇄신의 모습은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진정한 종교인, 사상가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주) -----



1) 최병헌, <일제 불교의 침투와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진산 한기두박사 화갑기념 《한국종교사상의 재조명》,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3, 451면.



2) 중국 원(元)나라 때의 왕실보(王實甫)가 지은 잡극(雜劇). 장생(長生)이란 남자와 최앵앵(崔鶯鶯)이란 여자가 어려운 고비를 겪은 끝에 사랑을 성취한 내용.



3) 중국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영종(英宗)의 명으로 편찬한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4) 송현주, <한용운의 《불교대전》과 난조분유·마에다 에운의 《불교성전》의 비교연구 - 구조의 차이와 인용 경전의 특성을 중심으로>, 《불교연구》 43, 한국불교연구원, 2015, 28면.



5) 음빙실(飮氷室)은 양계초의 호(號)로 ‘얼음을 먹어 차오르는 열을 식힘’ 이라는 뜻. 허도학 <근대계몽철학과 조선불교유신론>, 《불교평론》 2003년 가을 제5권 제3호, 96면 참고.



6) 고명수 <조선불교유신론과 만해의 불교관>, 《불교평론》 2003년 가을 제5권 제3호, 114면.



7) 블라디미르 티코노브(박노자) <1920~1930년대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 《천태학 연구》 8집, 천태불교문화연구원, 2006, 126면.



8) 김삼웅 《만해 한용운 평전》, 시대의 창, 2006, 29면.



9) 윤세원 <한용운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 자유관을 중심으로>, 《2003 만해축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2003, 211∼212면.



10) 이상철 <한용운의 사회사상에 관한 일고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81∼82면.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03.07.31 17:49 수정 2003.08.01 08:42 | 종합 16면 지면보기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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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화기 불교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흔히 당시 젊은 승려들이 일본 불교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이며 대일 협력을 모색한 것을 지적합니다.







천민 수모 승려들 개벽 세상 돌파구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1920~30년대 승려들이 대대적으로 일본에 유학한 점과 대처.육식 풍토 조성 등도 비판의 도마에 오릅니다. 대체로 민족의식의 결여와 불교의 일본화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 관념을 절대적 척도로 삼아 1백년 전 승려들의 '비(非)민족성'을 규탄하기보다, 그들의 행동 논리를 당대의 문맥 속에서 가치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한층 생산적이고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민족독립'을 우선하는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1870년대 말부터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인 일본 승려들은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유생과 탐관오리, 토호들의 토색(討索)에 시달리며 천민대접을 받아온 조선 승려들에게, 가렴주구를 근절하고 모욕적인 도성 출입 금지법을 해제하도록(1895년) 갑오내각에 압력을 넣어준 일본의 '동류'들은 '밝은 세계'로 인도해주는 '선우(禪友)'로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개화승으로 잘 알려진 이동인이 이미 1880~81년 사이에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자 단체인 '흥아회'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와 같은 일본 외교관과 접촉하여 '종속발전' 계획안, 곧 조선이 일본의 투자를 받아가면서 일본에 원자재를 공급해야 한다는 등의 안을 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흥아회보고', 제4권, 1880년).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본의 투자에 의존하는 '종속 발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기는, 어윤중(魚允中.1848~1896) 등 갑오 내각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윤치호(1865~1945)와 같은 초기 기독교적 근대주의자들은, 아예 '열강'에 대한 의존을 넘어 어떤 한 강대국의 직접적.적극적인 간섭만이 '조선의 개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피력하였습니다.('윤치호 일기', 1894년 7월 31일).







즉 세계체제 중심부나 그 중심부의 '대리인'을 자임한 지역적인 '패권국가 후보생' 일본에 의존하려는 경향성은, 불교계뿐 아니라 1880~90년대 개화파 전체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흐름이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본격적으로 형성.보급되기 시작한 1900년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해서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새 시대의 기운이 융흥하다 전하는 일본의 상황을 보고 싶던 것이었다. …그래서 동경의 조동종(曹洞宗)대학 (오늘의 구마자와 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일본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내가 왜 중이 되었나', '삼천리', 1930년 5월).







이는 한용운이 1908년 자신의 일본 유학 동기에 대해 설명한 글입니다. 이 글이 말해주듯, 당시 개화적인 젊은 조선 승려들에게 일본은 불교 근대화의 방법을 배워야 할 '새 문명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후진국 일본이 아닌 선진국 미국 등을 모델로 삼았던 기독교계의 '따라잡기' 프로젝트가 훨씬 더 미래 지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미 주류사회가 극동의 대승불교를 '미신'이나 '우상 숭배'로밖에 보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불교계의 대미접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개화기.식민지 때 불교계가 일본을 '근대에 이르는 이동 경로'로 삼았던 사실은, 그 모든 부정적인 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근대성'의 발전 가능성 역시 나름대로 열어두었습니다.







예컨대 1930년대 한용운이 심취했던 '불교적 사회주의' 사상 등은 당시 일본 불교의 진보적 승려 운동에서 시사받은 바 컸습니다. 물론 대일 종속적인 불교계의 근대화가 남긴 짐도 여간 무겁지 않습니다.







'호국 불교'가 맹목적인 국가 옹호의 논리로 오해되고, 식민지 당국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받은 큰 사찰의 주지들이 당국과 유착하여 축재.사치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모두 그때부터 비롯된 일입니다. 일제 말기부터 굳어진 불교의 국가주의적.군사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는 일은 오늘의 한국 불자들에게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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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 26일 개최...서울 관문사에서 박노자 교수 등 5명 발표 - 뉴스와이어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 26일 개최...서울 관문사에서 박노자 교수 등 5명 발표 - 뉴스와이어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 26일 개최...서울 관문사에서 박노자 교수 등 5명 발표

출처: 대한불교 천태종

2005-11-21 16:24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에 대해 발표할 노르웨이 박노자오슬로대학 교수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에 대해 발표할 노르웨이 박노자오슬로대학 교수







단양--(뉴스와이어) 2005년 11월 21일 -- 제8회 천태 국제불교 학술대회가 오는 26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관문사 옥불보전에서 개최된다.



이번 대회에는 동국대 대학원장 서윤길 박사를 비롯해 미국 서부대 (University Of West) 루이스 랭카스터 총장, 중국 전 북경대 철학계 교수 루우열 박사, 일본 슈구토쿠 단기대학 학장(대정대학 명예교수) 이시카미 겐노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이날 행사는 오전 10시 기념법회에 이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제발표와 토론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날 발표에서 박노자 교수는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라는 논문을 통해 "한용운은 국가 독립을 위한 모든 중요한 투쟁에서 주로 공산주의자인 좌익과 독립 지향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우익의 단일체를 끊임없이 역설했다"며 "불교의 사회 경제적 이상을 사회주의 용어로 정의내리고 나타내려는 흥미롭고 생산적인 시도를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평등과 이타주의' 종교로서 '재건'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펴게 된다.



발표자와 발표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시가미젠노(슈구토쿠 단기대학 학장)-정토교의 사상과 법화경의 교섭

*미국-랭카스터(웨스트대학 총장)-천태의 전통과 우주론과 윤리에 관한 현재의 쟁점

*중국-루우열(樓宇烈)(전 북경대 철학계 교수)-인간불교의 이념과 실천

*노르웨이-박노자(오슬로대학 교수)-만해 한용운의 불교사회주의

*한국-서윤길(동국대 대학원장)-천태교학과 밀교



웹사이트: http://www.cheontae.org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박노자] "어떤" 통일인가가 중요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최근 구주한국학대회 (AKSE) 참가 건으로 이태리에 잠깐 갔다온 일은 있었습니다. 저는 자국에 대한 개탄의 소리가 가장 많이 들리는 나라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평소 생각했는데, 로마에서 며칠 보내다 보니 이태리는 우리와 호형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유럽에서 최악의 부정 부패 수준, 정치인과 정부에 대한 최저에 가까운 신뢰, 총국민생산의 7% 정도를 갖고 노는 마피아, 그리고 무솔리니 이후에는 가장 극우적인 금일의 이태리 내각...







시국에 대해 담론해보면 자연히 개탄의 소리밖에 안나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지역 문제', 그러니까 사실상 실패한 19세기말 이태리 통일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통합이야 됐지만, 통일은 안됐습니다. 사회, 경제적 의미에서의 통일 말입니다. 지금도 명목상의 1인당 총국민생산을 보면 북부 이태리의 '롬바르디아' 지역은 독일과 엇비슷하지만, 남부의 '칼라브리아'나 '시실리'는 그리스나 에스토니아, 우루과이보다 더 어렵게 사는 셈이 됩니다. 같은 나라에서 최북단과 최남단 사이의 2배 이상의 소득격차...사실 많은 면에서 과연 '같은 나라'인가 라는 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가장 부유한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가면 한 때 아예 부유한 북부 이태리의 독립, 즉 이태리 통일의 '취소'를 주장했던 "북부동맹"이라는 우파정당은 전체 표의 3분의 1이나 득하는데 말입니다. 북의 주류인 우파는 '통일 세금', 즉 남으로 들어가는 지원금 내기를 거부하려 하는 거고, 남은 남대로 차별에 지칠대로 지치고... 명목상의 통일은 인제 거의 150년이나 되었지만, 실은 '시실리' 주민은 이태리 국민이기 전에 '시실리' 주민이고 밀라노 주민은 이태리 국민이기 전에 먼저 밀라노 주민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 통합은 쉬워도 통일의 '실'을 거두는 것은 절대 쉬운 건 아닙니다.







"이태리 삼걸" (가리발디, 마찌니, 카푸르)이 한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 크게 주목한 구한말 지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만큼, 이태리의 '지역 문제'는 우리에게 절대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이 이태리를 - 독일과 함께 - 추격형 근대화의 '모범'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자국의 근대 통일국가 발전을 '성공작'으로 보는 이태리인들은 드뭅니다. 아주 드뭅니다. 사실 그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은 "도대체 지역 평준화 정책의 효과는 왜 이토록 없었는가"라고 자꾸 자문을 합니다. 1945년 이후에는, 민주화된 탈파시즘 시대의 이태리에서는 역대 정권들은 "남부 우선 개발"의 구호 하에서는 나름의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여 남부에서의 인프라 구축 등의 과제를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남부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성장시대에, 즉 1990년대 초반 이전까지 상당히 올라간 것도 엄연히 사실이죠. 그런데 아무리 '남부 개발'에 정책적 배려는 있었다 해도 격차는 그렇게까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북부도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무리 '정책적 개발'이라 해도 자본주의 국가인 이상 민간 자본으로 하여금 강제로 남부에서 공장을 건립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북부에 그대로 있는 공장으로 남부 출신들이 몰려가 자본에 이용당하는 꼴이 되고, 남은 가족들이 그 송금으로 살거나 미국 등지로 이민가는 꿈이나 키우고... 남부의 상대적 박탈감은 그냥 그대로, 여전해왔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는 '통일' 자체를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평화공존레짐을 공고화시키기 위해, 이산가족들의 결합을 실시하기 위해, 쌍방 군인 머리수를 줄이기 위해, 나아가서 징병제의 악몽을 벗어나기 위해 당연히 통일을 향한 '과정'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탈분단은 우리에게 생명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한데 문제는 통일이냐 아니냐 라기보다는 '어떤' 통일인가 라는 것인 듯합니다. 통일은 꼭 걸어야 할 길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만병통치약은 결코 아닙니다. 통일이 돼도 남한의 자본주의는 그대로, 즉 그 신자유주의적 형태로 남아 있다면, 통일 코리아의 나날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저는 심각하게 회의합니다. 일단 이태리의 경우와 달리 적어도 초기에는 남한 자본의 공장들은 분명 북으로 갈 것입니다. 북의 임금 수준이 여전히 중국 동백 삼성에 비해 낮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놓칠 자본가들은 아닐 것이죠.







그런데 이 자본가들이 북에 들어가서 만들 일자리들은 과연 정규직일까요? 남한에서도 제조업 공장에서까지 불법 파견 노동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과연 양질의 일자리일까요? 과연 그런 일자리들이 좀 생긴다고 해서 지금 20배 정도 되는 남북/북남 소득 격차는 빨리 줄어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소득격차가 부추기는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차별과 무시는 과연 어느 수준일까요? 북쪽 사람들이 이를 과연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요? 사실, 남한에서 살인적 차별에 시달리는 탈북민들의 상황만 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레짐 하에서의 통일 코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보입니다. 과연, 특히 북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적에 바람직한 모습일까요?







통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만큼 우리가 원하는 통일이 '어떤' 통일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먼저 필요하기도 하죠. 세계적 수준의 참극인 남한의 신자유주의를, 우리가 북쪽 동포들에게까지 수출하고 싶은가요? 약자에 대한 차별, 일년에 약 1700명의 노동자를 죽이는 최악의 산재사 현황, 만연돼 있는 과로사, 8할 이상의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당하게 돼 있는 성추행을 통일과 함께 수출하고 싶은가요? 통일을 지향하고 북쪽 동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인 이상, 그런 고민부터 정말로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남한은, 북쪽 동포는 물론이거니와, 남한 사람들도 하루도 편하게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유사 봉건적인 개인예속과 신자유주의적 과도착취의 중첩이기 때문입니다.











(기사 등록 2019.5.8)     







출처: https://www.anotherworld.kr/676?category=552392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