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2

알라딘: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



알라딘: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 - 다석사상전집 1
박영호 (지은이)두레2001-01-15







정가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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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00자평(2)리뷰(5)

422쪽
148*210mm (A5)
549g
ISBN : 9788974430283


[품절]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 - 다석사상전집 1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하) - 다석사상전집 2


저자 및 역자소개
박영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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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함석헌... 더보기


최근작 : <제나에서 얼나로>,<예수와 다석>,<청교도 실천신학> … 총 37종 (모두보기)




9.6







대단한 책입니다! 역사와 인물이 살아있는 진정한 전기!
yeisee 2011-05-0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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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이다!!!!!!11




은하계에 수많은 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듯이. 한 사람의 스승 주위에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공자의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 예수를 따르던 12제자, 그리고 석가를 따른 많은 제자들을 보라. 그런데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인물들을 감동시키고 그 인생을 변화시킨 진정한 스승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다석 류영모 선생이시다.

류영모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의 학생이었으며 함석헌, 이광수 등의 제자들을 가르친 교사였고, 고당 조만식과 함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였다. 이 책은 류영모 선생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박영호 선생이 스승의 곁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고 관련 자료를 찾고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 스승의 자취를 기록한지 10년 만에 탈고한 스승 류영모의 전기이다.

이 책은 진정한 스승도 진정한 제자도 보기드문 이 시대에 제자가 평생을 따르던 스승의 일생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 책은 류영모 선생의 제자인 김흥호 선생(전 이화여대 교수)이 스승의 난해한 일기를 알기 쉬운 우리말로 옮긴 책 "다석일지 공부"7권에 필적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 책을 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이승훈, 조만식, 함석헌, 이광수 이외에도 최남선, 문일평, 김정식, 이현필, 김교신, 류달영, 현동완을 비롯한 수많은 이름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직제자인 저자(박영호)와 김흥호 교수의 삶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분들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과 서로 만나 영혼과 영혼이 전광석화와 같이 감응하는 감동의 순간 순간들이 서로를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이 나라의 얼을 되찾고 인재를 기르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는 이야기들이 책 속에 면면히 흐른다.

아! 이런 스승이 있어 행복함을 느낀다. 아! 이런 제자들과 동지들이 있어 이 나라의 역사는 그 암울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결코 빛을 잃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책에서 단연 나의 관심을 끌었던 사람의 이름이 있으니 그 분은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 선생이다. 젊은 시절에 함선생으로 인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던 시절이 있었고, 그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또 가슴을 움켜쥐고 울어야 했던 애증이 교차하는 이름! 이 책에 다석 류영모의 수제자였던 함석헌의 발자취가 가감없이 그대로 묻어난다. 스승을 따르던 청년 함석헌, 종교 사상가로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던 장년과 노년 시절의 함석헌, 그리고.....함석헌의 변절을 두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던 스승 류영모! 진정 떠났는가? 진정 그대는 돌아올 수 없단 말인가? 그토록 사랑하던 함석헌을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함석헌을 내친뒤에도 그 제자를 잊지 못해 눈물흘리던 스승의 모습. 그리고 스승의 제삿날 눈물을 머금고 제자들 앞에서 모든 죄를 다 인정한다. 용서해달라. 머리를 조아린 함석헌, 그리고 제자 박영호에게 너는 나처럼 되지 말아라.....고개를 숙이던 함석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여러번 눈물을 훔쳐내야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고 스승이 제자를 알아본다. 그리고 제자를 진정 아꼈기에 스승은 그 늙은 제자를 향해 "돌아서라! 회개하라! 진정 돌이키라!" 호령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저자는 류영모가 진리의 화신이요 진주라면 함석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타산지석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류영모의 일생을 서술한 책이면서 동시에 류영모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그의 깨달음을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류영모의 사상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분들에게도 이 책을 큰 도움을 주는 바 류영모가 일제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 또 동족상잔의 혼란기를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를 알려준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여 의식을 되찾기 못하는 류영모가 무의식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들까지 활자화한 것을 보면 이 책을 지은 저자가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 해서 자료를 모았는지 짐작케 한다. 이 책을 독자 제위에게 일독을 권한다. 류영모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 아직 들어보시 못한 신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암흑기에 오산학교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를 알고싶은 분들, 모든 종교인들과 교육자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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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isee 2011-05-0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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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




'제나(自我)'와 '얼나(靈我)'라는 단어가 있다.
이 책에서 처음 보았다.

--깨달음이란 제나가 거짓인 줄 알고 얼나가 참나임을 아는 것이다.
알았다고 해서 몸뚱이의 제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영육(靈肉)을 분리시켜 줄 때까지 짐승인 제나를 최소한의 예우로 길러야 한다.(상권 257쪽)

'짐승인 제나를 최소한의 예우로 길러야 한다'는 표현에 무릎을 친다. 최소한의 예우.
다석 류영모는 자신의 육신에 정말 최소한의 예우만 하였으니,
일평생을 무명옷(저고리와 한복바지)을 입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그리고 소년시절부터 세운 자신의 뜻을 좇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상을 마치고
농사를 직접 지어 양식을 얻었다.
쉰 살부터는 또 한 가지의 욕망을 끊었으니,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로만 지냈다.
물 한 사발 가져오라는 심부름도 남에게 시키지 않았으며, 말이나 글로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하권 중간쯤에 나온 '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라는 소제목을 보고, 이 제목에 기대어 짧은 리뷰를 쓰기로 했다.
상하권 합해서 8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이지만 열흘 정도에 걸쳐 아껴가며 읽었다.
쌓아둔 소설들을 먼저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고 유익한 독서경험.

이승을 떠났을 때 신문에 부음 한 줄 나지 않은, 초야의 사상가 다석 류영모.
김교신과의 교유나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이름을 몇 번 접했을까, 그의 제자 박영호 선생이 쓴
평전으로 만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생각과 말과 글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남의 책이나 글을 인용하지 않으면 할 말이 하나 없는 학자나 교육가연然하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이런 사람, 이런 삶이 있었다니!
'진리' 가 그의 일생 화두였다.
젊은 날 마하트마 간디와 톨스토이의 삶에 경도되었지만, 그의 생각과 발언은 특정 종교나 사상에
갇히지 않았다.
종교와 인생에 대한 너무 독창적인 견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에 저항이나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데, 나로서는 모든 말과 행동을 받아적고 따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딱 하나(4.19와 관련된)만 빼고......

근대라는 시대 풍경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너무 인상 깊었다.
사람들의 교제는 또한 얼마나 진지하고 다정하던지......
공부와 교제와 나눔에 힘쓰는 모습들이 가슴 뭉클했다.

다음은 다석 류영모의 통찰이랄까, 독창적인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류영모는 결별의 기도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오소서"(요한 17:1 개역성경)의 영화롭게를 뚜렷하게로 옮겼다.
헬라어로 '도크사'인데 영어로 글로리(glory)이다. '영광'을 순 우리말로 '뚜렷'이라 옮겼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인간 저희끼리 주고받는 헛된 영광이 너무도 많아
영광이란 말을 그대로 쓰기가 싫어 뚜렷으로 옮긴다고 말하였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뚜렷하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옵소서"(요한 17 :1)

'인간 저희끼리 주고받는 헛된 영광'을 나는 한마디로 '수작'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 이 '영광'에 대하여 진지한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있었는데,
다석 류영모를 먼저 읽은 분이었다. 반가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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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4-25 공감(42) 댓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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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왜 스승이 없을까?




그간 논란이 되던 고액권 지폐가 곧 발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반쪽의 나라에선 그 지폐에 새길 인물상에 대해 논란이 심하다.
가장 큰 스승의 이름을 이 사람들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신 '세종대왕'에게 돌린 것은 일견 옳으면서도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이이, 이황, 이순신... 모두 이씨 일족 일색이었던 것은... 역사의 부정이자, 회귀였으리라.

대한민국의 지폐에 당연히 '대한민국'을 이끌어낸 인물이 새겨져야 함이 당연한 일이거늘...
이승만을 국립현충원에 모신 것조차도 부끄러운 일임을 알기에 하는 짓들이 아닐까?
그렇다고 다카키 마사오를 새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 우리에겐 '스승'이 없을까?
나는 그 이유를 '이승만 독재와 군부 독재'의 탓이라 생각해 보았다.
옳은 정신 가진 사람을 몽땅 감옥에 집어넣어버리던 일본에게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대문 형무소는 마찬가지 반정부주의자들로 가득했다.
말 많은 사람은 빨갱이였고, 추잡한 사바사바가 판을 치는 친일파의 후예들이 권좌를 잡았다.
이 나라는 '정통성'을 상실한 나라였던 것이다.

북한 지폐에 '김일성'이 당연히 들어 앉고,
중국 지폐에 '마오 선생'이 당연히 들어 앉고,
미국 지폐에 '워싱턴'이 당연히 들어 앉는데...
한국 지폐엔... 애석하게도... 대통령들이 앉아있지 못한 과거와 현실...

다석 류영모 선생에 대해서는 함석헌만큼도 알려져있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김구' 선생에 대해서 정말 무식하게 존경했듯이,
함석헌 선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이 좋아했던 것 같고,
그건 비유하자면, 내가 박정희 영정을 보면서 <평생 들을 레퀴엠을 1979년 10월 끝자락에 몽땅 들어버린> 그런 슬픈 무식함과도 상통했던 것 같다.

올바른 가르침을 결코 줄 수 없으니, 여운형 선생처럼 진실로 진실로 통일을 원했던 이는 파묻혀 버리고, 김구처럼 어정쩡한 인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생겼으니... 이 나라의 미래도 그리 밝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사는 날수를 헤아린다. 다석이란 호도 多夕... 여러 저녁을 살았다는 뜻이니, 백범 김구 선생의 흰옷 입은 평범인이란 호만큼이나 평범하다.

나도 휴대폰의 디-데이 기능을 이용해서 살아온 날 수를 헤아려 보니 15035일을 살고 있다.

선생이 33200날 살고 이 땅을 뜨셨으니... 나는 절반 가량 산 셈일까?

살아온 날 수를 셈하는 일은... 하루하루를 그만큼 깨인 정신으로 살아보란 의미로 새긴다.
아무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이 지나가버리는 날들이 얼마나 많던지...
고3 아이들이 하루하루가 아쉬워 칠판에 D-95일 이렇게 표시하는 정신으로 매일을 살아야 한다는 큰 가르침을 배운다.

다석 선생은 정치가도 특별한 사상가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아니지, 유명하지 않을 따름일는지도...

그렇지만... 선생의 전기를 읽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 속에선 예수의 혁명적 삶을 읽을 수도 있었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형형한 눈빛도 배울 수 있었다. 노자의 정신도 느낄 수 있는 선생을 읽는 일은 나를 돌아보는 큰 계기가 된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이 육신 하나, 이 육신에 새겨진 정신 하나.
나의 마음이 오로지 <일체를 만들고> 이 육신 없이는 내 존재도 없으니 노자의 <다투지 말라>가 살아온다. 한 호흡 한 호흡에 내 삶이 있고, 올바른 정신이 있음을 꼬장꼬장한 삶을 통해 보여주는 큰 스승이 될 만한 분이 아닐까?

나고 죽는 <몸나>를 여의고 <얼나>로 솟나신 석가와,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옮기신 예수를 보고 배우지 못한 나는,
그이들을 보고 배우신 다석 선생을 만나 제대로 <얼나>를 생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썩어버릴 육신, 어버이가 낳은 <제나>의 사람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삶일진댄,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술을 멀리하고, 색욕을 불러올 일을 피하고, 육신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데 온갖 신경을 쓰는 <제나>를 늘 <관찰하고> <얼나>로 옮길 일을 <지혜롭게> 생각해야 하리라...

우리 삶이 <시>가 되고, <음악>이고 <숭고 정정한 종합적인 예술>인데, 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하고(선생의 말로 솟나게 하지 못하고) 늘 <몸나>와 <제나>에 얽매인 채, 하루하루 고뇌할 가치도 없는 일들에 온 정신을 빼앗겨버리는 나를 발견한 일은 감사, 또 감사할 일이다.

성경을 몇 번 읽었지만, 혼자서 읽어서는 뜻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
이 땅의 교회들이 올바른 성경 읽기 보다는 솟구친 예배당 짓고, 우상 섬기기에 치우친 탓도 크지 않을까? 성경을 언젠가 공부해보고 싶단 생각도 들게 하는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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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8-1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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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빛, 한 얼의 빛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참다운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배움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완전한 존재와의 만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정신을 가지고 깨우친 이의 영성을 접하며 산다면 자신도 깨달음의 길목을 환히 비추고 있는 등불을 보게 됨은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비록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이 공간에 그와 육체의 현현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그의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와 나와의 만남을 이루어지게 한다.

그는 유, 불, 선의 종교를 모두 섭렵하여 종교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는 육체인 제 나를 죽여서 영원한 존재인 얼 나를 살리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의 말은 그의 영성과 깊은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가벼이 넘기지 못하는 커다란 무게가 있으며, 비록 책 속에 담긴 그의 말이지만 나의 마음 속에 그의 마음을 따르게 하는 그 무언가를 남겨 주었다. 지금까지 많은 가르침을 주는 책들을 접하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왜 내가 따를 만한 훌륭한 분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에 마침내 종지부를 뚜렷하게 찍어준 이가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물론 위대한 사람은 많았지만 내가 마음과 몸으로 따르고 싶고 따를 수 있는...) 물론 그의 삶과 의식이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거쳐 온 성장과정과 결혼생활을 통해서도 깨우침의 길을 걸어간 그의 행로는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이미 지나간 발자국을 남겨 준 것이다.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쫓아 마음의 수련을 시작할까 한다. 비록 그가 처음으로 절대자인 얼의 존재, 참 존재를 느끼고 믿음을 가진 나이에 비하면 너무나도 느리고 게으른 행보이긴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작은 능력이라도 진리의 길을 밝혀준 그의 행로를 따라 나아가 보는 것 외의 기쁨이 또 어디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쫓아 그의 말대로 산 사람들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제 나를 한 인간으로 보고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그 길을 직접 걸어가고자 한 류영모, 그는 석가와 예수가 20세기에 우리 나라에서 부활한 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석 사상을 통하여 우리는 나와 민족이라는 틀을 넘어 더욱 큰 '진리'에게로 이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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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2-05-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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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에 이르기까지


다석은 언제나 혁명적인 말을 한다. 참으로 하기 어려운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과 인류에 대한 미련도 모두 버리고 예수처럼 살려는 사람. 길지않은 인생에서 그를 알게 된것이 기쁨이 될것 같다. 믿음이 어떻해야하고, 생활이 어떻해야 하고, 생각이 어떻해야 하는지 잘은 몰라도 하느님을 드러내고 자기를 숨기고 세상의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 그의 삶처럼 살고 싶다. 마흔 이전에 깨달은 것은 모두 헛거라는 그의 말이 맞을지 틀릴지 모르지만 그를 알게되고 그를 통하여 생각하게된 것들이 영원한 존재로 향하는 첫발걸음이 될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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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2-11-0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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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03 다석 류영모




그는 유, 불, 선의 종교를 모두 섭렵하여 종교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는 육체인 제 나를 죽여서 영원한 존재인 얼 나를 살리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의 말은 그의 영성과 깊은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가벼이 넘기지 못하는 커다란 무게가 있으며, 비록 책 속에 담긴 그의 말이지만 나의 마음 속에 ... ...@@이님리뷰에서..(본 책은 1996년 문화일보사 출간본 상,하를 읽은 뒤였음)



책을 통해 느낀 것은 오히려 곁가지, 간디와 톨스토이에 대해 다시 볼 것 같고, YMCA의 역사, 일제시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또 다시 되돌아보게 될 것 같다. 사실은 내심 우리 기독교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 기록들을 통해 얻게 된 것이 많았다. 우리 기독교가 어찌 이토록 사회를 공란으로 두게 되었는지? 그 지난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얼치기인 나로서 다시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공동체를 통해 결국 얻고자 하는 것은 세속에 시달림을 씻고자하는 일차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초발심이나 가난한 자과 함께하고자 하는 진정한 공동체 의식이 얼마나 냉정하게 내맘 속에서 차단되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고 여긴다.

또 하나 후학들 역시 문제를 현실에서 읽고자 노력하였던 선인의 흔적보다 신성화하여 따르고자하는 행간이 많이 거슬린다. 일관된 반공주의 흐름도 곁가지인 듯 내내 튄 듯한 인상이다. 오히려 객관적이고자 기술하는 편이 본 뜻을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

앞의 것을 각설하고라도 무교회주의나 퀘이커주의 모두 충격이었고,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다원주의 관점에 대해서는 다시 되돌아보아야 된다는 점, 노자,장자, 공자, 맹자, 불교를 비롯한 범신?주의, 비정통성에 대해 열려있지 못한 작금의 상황은 우리의 관점을 돌이켜보는데 시사하는 점이 많다는 점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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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1-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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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다석사상전집 5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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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다석사상전집 5

박영호 (지은이)두레2001-11-29



408쪽152*223mm (A5신)571gISBN : 9788974430320



책소개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의 사상에 입각해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반야심경>을 역해(譯解)했다. 지은이 박영호는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다석사상을 일반에 널리 알려온 다석 류영모의 제자. 이 책은 지난 1961년 서울중앙 YMCA 연경반 강좌에서 들은 다석의 <반야심경>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반야심경>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 풀이한 뒤, 다석의 종교다원주의적 관점과 비교종교학인 관점에서 <반야심경>과 <성경>을 비교했다. 필요한 부분에는 해설을 붙였다. 결론적으로 석가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스승인 다석 선생은 여러 종교의 교의(敎義)와 방법를 통합해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를 발견해 낸 분이다. 그것이 귀일(歸一)사상이다. 상대세계를 벗어나 절대세계를 추구할 때, 인간은 니르바나님(하느님)을 만나고 니르바나님(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나가 된다는 내용. 그런 맥락에서 부처님과 예수님의 사상도 같다고 보았다.




제자인 박영호도 같은 관점에서 <반야심경>을 해석했다.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prajna-paramita)>의 준말로 불교 가르침의 요체. 여기에서 prajna-paramita(반야바라밀다)는 '니르바나님(절대세계)에게 이르는 지혜(얼나)'라는 뜻이다.




박용호는 이 '얼나'로 솟아남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했다. 삶의 참뜻을 깨닫고, '제나'(自我)에서 영생의 '얼나'(靈我)로 솟아나자는 것이다. 탐진치(貪瞋痴)로 사는 '나'(自我)는 '거짓된 나'이므로 영(靈)적인 '나'로 거듭나 '참다운 나'에 이르자고 말했다. 이 '참나'는 다시 '절대존재(니르바나님)'와 이어진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다석의 사상의 핵심을 <반야심경>을 통해 다시 펼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

1.영원한 생명을 깨달은 석가 붓다 ...19 2.석가붓다의 말씀인 불경 ...26 3.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산물 ...35 4.반야바라밀다심경의 가치 ...43 5.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 ...50 본편 - 금강경 풀이1.관자재보살은 누구인가 ...59 2.니르바나님은 내 맘속에 있다 ...72 3.짐승인 제나는 거짓나 ...85 4.얼나는 모든 괴로움을 떠났다 ...98 5.지혜 으뜸의 샤리푸트라 ...112 6.있다 없어지는 것은 거짓이다 ...123 7.제나가 죽어야 맘이 빈다 ...134 8.다시 샤리푸트라를 불렀다 ...148 9.니르바나님은 없이 계신다 ...159 10.영원한 절대존재 니르바나님 ...169 11.얼나에는 육근이 없다 ...181 12.얼나에는 죽지 않는다 ....194 13.제나로 죽어야 얼나를 깨달아 ...208 14.얼나는 얻는 것이 아니다 ...222 15.짐승 성질을 이긴 참사람 ...234 16.니르바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247 17.'나'라는 생각이 없어야 빈 맘 ...260 18.얼나는 두려움이 없다 ...271 19.거꾸로 박힌 꿈꿍이를 멀리 떠나자 ...286 20.깨달으면 얼나로 하나다 ...316 21.니르바나님이 참나이다 ...333 22.마음 모아 외우면 뚫린다 ...346 23.니르바나님께 가자 ...358 24.니르바나님께 이르는 말씀을 바친다 ...370 부록-천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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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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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함석헌... 더보기

최근작 : <제나에서 얼나로>,<예수와 다석>,<청교도 실천신학> … 총 3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종교사상가이자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의 사상에 입각해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반야심경』을 역해(譯解)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미 다석사상을 소개하고 알리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바 있는 다석의 제자 박영호(朴永浩)이다. 그는 1961년 서울중앙YMCA 연경반 강좌에서 다석의 『반야심경』 강의를 들은 것을 바탕으로 『반야심경』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 풀이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석의 종교다원주의적 관점과 비교종교학인 관점 하에 『반야심경』을 『성경』등과 비교해 해설을 붙여 놓았다. 따라서 불교인은 물론 타 종교인들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으며, 또한 석가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는데, 이것이 이 책의 특징이자 다른 『반야심경』 해설서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의 주요 종교와 고전을 깊게, 폭넓게 연구했던 다석은 여러 종교의 교의(敎義)와 방법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一)'로서 끝내는 같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다석의 귀일(歸一)사상이다. 즉 그것은 상대세계를 벗어나 절대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며, 상대세계를 넘어설 때 인간은 니르바나님(하느님)을 만나고 니르바나님(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 하나(一)로 돌아가자는 것이 부처님과 예수님의 사상이며 신앙이다. 따라서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어떤 서물(庶物)이나 인물(人物)이나 조형물(造型物)을 예배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절대이며 전체인 하나(一) 외에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절대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제나'(自我)와 육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몸나'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아인 '얼나'(靈我, 영적인 나, 불교에서 말하는 法身)를 찾는 것이라고 다석은 보았다. 사람이 이 '얼나'(法身)를 찾아 참다운 자아에 이를 때 절대세계와 하나가 되어 생사(生死)를 넘어서는 참다운 자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다석사상의 핵심이다. 다석은 기독교의 성령(聖靈)이나 불교의 불성(佛性), 유교의 속알(德), 노장사상의 도(道)도 깨우치면 모두 하나의 진리로 귀착된다고 가르쳤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 서서 불교와 석가붓다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반야심경』(반야다라밀다심경)은 불교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불교의 경전이다. 이런 까닭은 『반야심경』이 260자에 한자로 씌어진 짧은 경전이지만 불교의 핵심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석 류영모도 서울 종로에 있는 중앙YMCA 연경반 강좌에서 불경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불교는 그 역사가 2천5백 년이나 되는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사상이다. 우리가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자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 불교를 모르고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의 경전은 어느 종교의 경전보다 방대하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알면 불교 전반을 알 수 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불교의 요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반야심경』을 아는 것과 얼나를 깨닫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얼나(法我)를 깨달아 제 맘속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뛰어넘어 얼나(法我)의 근원인 니르바나님을 우러러야 한다고 말한다. prajna-paramita(반야바라밀다)는 니르바나님(절대세계)에게 이르는 지혜(얼나)라는 뜻이다. 이 책은 각자 맘속에 있는 참 붓다를 깨닫고 그것을 의지해 '얼나'로 솟나는 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참뜻을 깨닫고, '제나'(自我)에서 영생의 '얼나'(靈我)로 솟나 니르바나님으로 영원 무한하자고 일러 준다. 탐진치(貪瞋痴)로 사는 '나'(自我)는 '수성(獸性)의 나이기 때문에 '거짓된 나'이며 이러한 수성을 벗어나 영(靈)적인 '나'로 바꾸어야만 '참다운 나'에 이르러 절대존재(니르바나님)와 이어진다는 다석의 깨우침을 이 책을 읽은 독자들도 얻게 될 것이다. ♣ 다석 류영모의 반야바라밀다심경 풀이 있다시보이(觀自在)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갔을 적에 다섯 꾸럼이(五蘊) 비임(空)을 비춰보니 모든 쓴 걸림(苦厄)을 건넜다. 눈 맑은 이(舍利子)야, 빛깔(色)이 비임(空)과 다르지 않고 비임이 빛깔과 다르지 않다. 빛깔이 바로 이 비임. 비임이 바로 이 빛깔. 받·끎·가·알(受想行識)이 또한 다시 이 같으다. 눈 맑은 이야. 이 모든 올(法) 비임 보기는 낳도 않고 꺼지지도 않고. 때 끼지도 않고 깨끗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이러므로 비임 속엔 빛깔 없고, 받·끎·가·알도 없고, 눈계(眼界)도 없고 뜻알계(意識界)까지도 없고, 어둠(無明)도 없고, 또 어둠 다 함도 없고, 늙어 죽음도 없고, 또한 늙어 죽음 다함까지도 없다. 쓴·몬·끄·길(苦集滅道) 없고, 앎(智) 없고, 얻(得)도 없다. 얻음이 없음으로써 보리살타가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마음의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무서움 있을 게 없어, 거꾸로 박힌 꿈꿍(夢想)에서 멀리 떠났다. 마지막 니르바나(涅槃) 셋계(三世) 모든 부처가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아누다라삼먁 삼보리를 얻었으므로 반야바라밀다가 이 크게 신통한 욈(呪), 이 크게 밝은 욈, 이 위없는 욈, 이 댈 수 없는 댐(等)욈으로 온갖 씀(苦)을 저칠 수 있음이 참이고 거짓 아님을 앎으로 반야바라밀다 욈을 말하노니 곧 욈을 말하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사바하. ♣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 류영모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젊어서 기독교에 입신(入身)했던 다석은 불교와 노장(老莊), 그리고 공맹(孔孟)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철학사상을 두루 탐구하여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아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1910년대에 우리나라 3천재, 5천재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고 남강(南岡) 이승훈,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외경을 받았다. 다석은 평생을 오로지 수도와 교육에 헌신하면서 일생 동안 '참'을 찾고 '참'을 잡고 '참'을 드러내고 '참'에 돌아간 '성인'이다. 김교신(金敎臣), 함석헌(咸錫憲), 이현필, 류달영 같은 분들이 다석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오산학교 제자였던 함석헌은 생전에 다석을 그리며 "내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묻혀 있었던 보화와 같은 다석의 사상이 다시 드러나 빛을 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어 큰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처럼 드높은 경지에 이른 위대한 정신적인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자들은 다석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다석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의 에딘버러(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자기를 꼭 지키고 있는 분이란 것이 몸매에나 말씨에나 걸음걸이에나 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도 마음을 헤쳐놓음(放心)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앉으면 언제나 꿇어 앉으셨고 한번도 무릎을 세우거나 다리를 뻗거나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석헌 저자 소개박영호(朴永浩) 1959년부터 1981년까지 20여 년 동안 다석(多夕)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다. 현재 성천(星泉)문화재단의 다석사상 연구위원으로 있으며 성천아카데미에서 다석사상과 함께 노장(老莊)사상을 강의하고 있다. 「문화일보」에 다석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 밖의 저서 및 엮은 책으로는 『중용(中庸) 에세이』,『다석어록』,『다석 추모문집』,『노자(老子)』,『장자(莊子)』,『다석 류영모 명상록』,『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상)』,『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다석 류영모가 본 불교, 금강경』 등이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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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많은 듯; 김흥호의 노자익 강해 4권 참조 구매

madwife 2015-12-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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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 생각이 난다. 박영호씨에게 감사하다. 허나 소소한 점과 치명적인 점을 지적한다.




-원어 인용이 실수가 많다 (프뉴마 표기가 모두 잘못되었다. p. 298 메타베베켄에도 철자가 빠져있다)




-몸 없는 부활이 아니라, 예수 부활은 `얼몸`이다.(얼나 얼몸=참나, 눅9:29을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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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2014-04-0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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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생각과 믿음(최성무)-9/10 새길교회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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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생각과 믿음(최성무)-9/10 새길교회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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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새길이야기 :: 최성무 -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Webzine 새길이야기 ::
3호 한국의 종교개혁자들 / 생각하다


2017.11.29 17:15








최성무

다석학회




다석 류영모(1890~1981)의 삶



다석 류영모는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그는 성경·불경·노자·장자·공자와 맹자를 두루 탐구하였으며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을 세웠다.



류영모는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청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에서 2년간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1년에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돼 1년간 봉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종로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강의하였다. 51세에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일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을 걸치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생전에는 함석헌과 김흥호 같은 20세기 한국 기독교를 이끈 지도자들의 스승으로 알려졌다. 1981년 세상을 떠난 후에야 독창적인 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로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박영호(유일하게 마침보람을 받은 이)의 많은 저서에 의해 그의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으며 2008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인 사상가로 소개되었다. 2016년 ‘다석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여의도 ‘성천문화재단’에서 매주 ‘다석사상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35년 동안 이어진 연경반 강의에서 다석은 스스로 지은 시조와 한시뿐만 아니라, 유교경전, 성경, 불경의 경구를 직접 모조지에 써서 칠판에 붙여놓고 강의하였다. 다석의 강의는 예수와 붓다와 공자, 삶과 죽음, 절대세계와 상대세계, 민주주의 인권을 넘나들었다.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이 어우러지는 지혜의 향연이었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고 때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류영모의 생각



오늘날 이 사회는 도덕, 윤리의식의 파탄이라 할 수 있는 아노미(Anomie) 증상을 보인다. 이는 한마디로 진리인 하나님의 성령 결핍증이다. 이 나라는 여러 종교가 번창한 종교의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결핍증이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나라 종교집단은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진리의 성령(불성)과는 거리가 멀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 알뜰히도 착한 일을 하면 순(舜) 같은 사람들이고, 닭 울면 일어나 살뜰히도 잇속을 챙기면 도적 같은 사람들이다.”(「맹자」 진심 편)라고 하였다. 착한 일을 하는 순(舜) 같은 이는 드물고 잇속을 챙기는 도적 같은 이들만 많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은 예수는 팔레스타인 유혹의 돌산이 있는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다. 그때 예수는 밥을 먹어야 사는 요셉과 마리가 낳은 몸의 나가 참나(眞我)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성령)으로 사는 얼의 나가 참나인 것을 깨달았다. 얼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이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자아(自我)의 의식(意識)을 점령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율성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물처럼 붓는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얼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요한 3:5~7)고 하였다. 이것은 석가가 부다가야에서 진리를 깨달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류영모(柳永模)도 말하기를 “나도 예수, 석가가 마음으로 경험한 것을 체험하였다.”고 하였다. 류영모 자신도 얼나로 솟났다는 말이다. 우리도 얼나로 거듭난 사람의 언행을 보고 들어서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을 신격화해서 하나님처럼 받들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과 참으로 예배드릴 분은 하나님뿐이다. 신비한 일 가운데 신비한 것은 이 우주 속에 내가 있다는 점이다. 우주가 있는 것이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주와 나는 하나이다. 우주의 탄생이 나의 탄생이다. 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우주의 죽음이다. 우주의 탄생에서 나의 탄생이 이어졌듯이 나의 죽음이 우주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이 뇌관의 폭발이 되어 남산 외인 아파트가 허물어지듯 우주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우주가 가리고 있던 참나의 모습이 문득 드러났다. 문득 깨달음(頓悟)이다. 그리하여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생의 존재가 나타났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신령(神靈)의 존재가 밝았다. 이 절대존재가 참나인 하나님이시다. 예수가 말하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으면서 숨은 것이 없고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 감춘 것이 없다.”(마가 4:22)고 하였다.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류영모가 말하기를 “이 우주는 거짓이다. 이 생명은 가짜다. 이것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거짓이요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한 참생명을 찾아야 한다. 참나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거짓 존재는 없어져야 하고 가짜 생명은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죽을 몸뚱이를 위해서 애를 쓴다. 그리하여 이제는 평균수명이 여든 한 살로 늘었다. 일이십년 더 살게 된 것이 큰 복이라도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늙고 병든 몸으로 가족과 사회의 푸대접을 받으면서 서럽게 사는 것이 어찌 복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몸뚱이를 위해 바치는 정성을 영원한 생명을 위해 바쳐야 한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인 얼의 나를 위해 맘과 뜻과 힘을 다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류영모에게 배우고자 하는 것은 멸망의 몸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할 얼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얼나를 위해 살면 멸망의 몸나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영광을 입고 보람을 얻게 된다.



우주와 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70억에 이르러도 주관으로 나뿐이다. 이 나란 누구인가? 나만은 나를 알아야 할 터인데 아는 것 같아도 사실은 모른다. 기껏 안다는 것이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사는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나를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나란 우주적 소산(所産)이다. 이 우주가 없으면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낳은 우주를 모르고는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우주의 주체인 실재(實在)와 나와의 관계가 밝혀져야 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을 학문화 시킨 것을 우리는 종교라 한다. 종교의 경전 맨 처음에 반드시 우주론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종교란 우리들 각자의 의식에 눈뜨는 장(場)인 우주현상의 배후 내지 그것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뜻한다.”(아놀드 토인비, 「회고록」)



“이성(理性)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와 사람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제 모든 사람의 우주에 대한 관계는 동일하기에 이 관계를 설정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한다.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다를 수 있는 육체 정신의 최고의 행복을 준다. 종교란 인간과 무한(無限)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톨스토이 「종교론」) 그 우주론이 얕고 깊고는 둘째 문제이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우주인으로서의 자각이 중요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로 말하신 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둔하고 무식하도다.”(예레미야 10:12~13)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우주인의 관념을 가진다면 주소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우주에 산다고 하면 그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우주공간에 태어난 것으로 알면 어디에서도 잘 수 있고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적어도 태극천하(太極天下)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주를 삼킬 듯이 돌아다녀야지 집 없다 걱정, 방 없다 걱정, 병 난다 걱정, 자리 없다 걱정, 그저 걱정하다가 판을 끝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주여행가가 되어 훨훨 돌아다닌다고 꼭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의 불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어떤 이(칸트)는 일생동안 고향에서 사십 리 밖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생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써 우주인으로 사는 것이 된다.”(류영모, 「다석 어록」)



그런데 오늘의 종교는 어떤가. 기독교·불교·유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가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도 않는다. 천문학자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같은 우주물리학자들에게만 우주를 맡기려 한다. 그들은 우주의 일부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주 전체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할 생각조차 못한다. 우주 전체와 나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밝힌 이가 예수·석가·공자·노자 같은 성현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종교 본연의 의미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엉뚱한 복(福) 타령만 한다. 화복(禍福)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복을 사고팔기에 여념이 없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화에는 복이 붙어 있고 복에 화가 엎드려 있다(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노자」 58장)고 하였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아무런 신앙도 없이 살고 있다. 일부 교양 있고 부유한 소수인은 교회의 암시(暗示)에서 풀려나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모든 신앙을 어리석은 짓으로 보거나 또는 대중 위에서 권세를 휘두르는데 유리한 무기로 본다. 이와는 달리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신앙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가 교회의 최면에 걸려 신앙의 형태로 암시되는 것을 맹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우주에 있어서 사람의 좌표를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아리송하게 한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무엇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소수와 교회의 최면술에 걸려 있는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두 부류의 상호관계로 오늘의 소위 종교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톨스토이, 「종교론」)



우주의 실재(實在)와 나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밖으로 멀리멀리 나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밖 길은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우주를 벗어나 무한우주로 광속(光速)보다 몇 만 배 더 빠른 심속(心速)으로 우주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속한 은하우주에만도 1천억 개 이상의 별들이 구름덩어리를 이루고 있어 성운(星雲)이라 한다. 은하우주와 같은 우주가 1천억 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별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대우주의 태극계에는 약 1백50억 년 전에 우주란(宇宙卵)이란 덩어리(樸)가 터져서 우주 개벽이 이루어졌다고 짐작하고 있다. 이를 대폭발(Big Bang)이라 이른다. 노자의 「도덕경」에 등걸이 흩어져서 그릇이 되었다(樸散則爲器)고 하였는데 박산위성(樸散爲星)이 된 것이다. 우주란이란 박(樸)이 터져서 별이 되는 그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꽃놀이처럼 별구름꽃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이 별 불꽃놀이에 비하면 사람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란 소꿉장난도 못 된다. 대우주의 별구름 불꽃놀이는 1백50억 년을 이어져오고 있다. 블랙 홀(black hole)이니 화이트 홀(white hole)이니 하는 것이 바로 이 불꽃놀이의 연속이요 준비다. 이것이 불경에서 말하는 수많은 꽃으로 장엄하다는 화엄(華嚴)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성운단(星雲團)의 대우주가 장엄하지만 그 성운단들을 포용하는 허공(虛空)이야말로 무한광대(無限廣大)의 신비가 아니겠는가!



밖 길로 가서 이르는 곳은 무한의 허공이 마지막이다. 불경에서 허공을, 노장(老莊)에서 무(無)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의 근원은 허공이요 무(無)이기 때문이다. 공(空)과 무(無)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다. 류영모는 허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주 빈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야말로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 허공이 참이다. 이것이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한데, 허공이다. 백간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허공인 하느님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또한 타고르는 「인간의 종교」에서 “진리는 형이상학에 의해 탐구된 무한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나란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다. 무한허공에서는 먼지 한 알만한 은하우주이고 은하우주에서는 먼지 한 알만한 지구이고 지구에서는 먼지 한 알만한 것이 나이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나란 있다고 하기가 쑥스럽고 부끄럽다. 차라리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란 위이무(位而無)이다. 이게 나다.



“땅 위의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벌레가 이 우주 안에 없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지구도 달과 같이 생물이 없이 빤빤하게 있다고 해서 무슨 서운한 것이 있는가. 우주조차도 마침내 다 타버린다는 사상이 있다. 우리가 옷에 묻어 있는 먼지 하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는가. 똥벌레 같은 인류지만 생각함으로써 사상을 내놓아 여느 동물과 다르다고 하는데 이 사상(思想)이 문제다.”(류영모, 「다석어록」)



석가·노자·장자·류영모는 무극(無極)인 허공에서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았다. 모든 유(有)는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불생불멸의 허공이 사람의 본성이라면 생멸(生滅)의 유물(有物)은 사람의 가성(假性)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有)를 낳는 무(無)를 그리며 무와 하나 되려고 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안길이 있다. 태극우주의 궁극적인 실재(實在)를 찾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도 “하늘나라가 너희 속에 있다.”(누가 17:21)고 말하였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지성(至誠)을 다하고 정성(精誠)을 다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서 자기의 속알(德)이 밝아지고 자기의 정신이 깨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같은 세상을 걸어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맘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나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로는 우선 몸이 있다. 이 몸이 참나인가. “몸사람으로는 호기심과 살맛(肉味)을 찾아다니는 짐승이다. 그래서 몸의 근본은 악과 친하려고 한다. 우리의 몸은 어찌 보면 원수요 감옥이다. 그런데 몸이 성하지 않으면 이중(二重)으로 갇힌다. 우리의 혈육(血肉)이란 이런 것이다. 이건 짐승이다. 몸을 쓰고 있는 한은 별수 없이 이런 것이다. 이 몸은 며칠 전에 어쩌다가 부모님의 정혈(精血)로 내가 시작되었으며 실없이 시작했으니 조만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사람이란 우스운 것이다. 잘 먹고 빨래를 잘 내놓는다. 그러면 제가 잘 살거니 한다. 이게 다 꿈지럭거리며 벌레노릇 하는 거다. 나는 몸의 일은 부정이다. 모든 것을 몸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거다. 나는 이를 부정한다. 그거 남 먹는 것 남 입는 것에 빠지지 않겠다는 게 살살이(肉體生活)다. 요새 사람들은 모두 육체의 건강, 수명의 연장에만 신경을 쓴다.”(류영모, 「다석어록」) 이제 내 살(肉)을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다음에 만나는 것이 맘이다. 맘이 맘을 심판한다. 이것이 반성이다.



“맘은 덧없는 거다. 심무상(心無常)이다. 나는 예수 믿소 하고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흔히 ‘맘 하나만 잘 쓰면 되지’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맘이 덧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하지만 맘이 모든 죄악의 괴수라고도 했다. ‘네가 맘의 스승이 되어야지 맘을 너의 스승으로 하지 말라’(「열반경」)고 하였다. 맘에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 맘속에는 더러운 게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 속을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이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다. 이게 우리의 착각인 것 같다. 하느님의 성전은 저 위의 나라인데 이 속에 반영(反映)되어서 그렇지 우리 속에 정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반영을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다. 맘은 생사(生死)의 제한을 받는다.”(류영모, 「다석어록」)



몸의 나도 참나가 아니고 맘의 나도 참나가 아니다. 몸과 맘의 나가 참나가 아니라고 하는 나만 남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 곧 얼나다. “사람은 몸으로는 분명히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고 거룩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얼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태어나서 다른 것을 직접·간접으로 잡아먹고 살지만 얼이 있어 맘속을 밝혀 위로 한없이 솟아나려 함이 인생길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이것이 맘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예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 7:13~14)라고 하였다. 제나(自我, ego)의 종족보존으로 사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얼나의 진리보존으로 사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맘속으로 들어가서 궁극으로 만난 것은 위로부터 온 성령의 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보았다. 보내신 그리스도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에게 산소가 공급되듯이 성령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줄곧 오는 영원한 생명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성령의 나로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는 아버지시고 성령의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주의 실재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반드시 몸과 맘으로 된 제나가 참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제나가 참나거니 하고 있으면 참나인 성령은 만나지 못한다. 제나가 거짓나임을 알 때 성령이 온다. 이를 회개(悔改)라 회심(回心)이라 견성(見性)이라 자각(自覺)이라 한다. 그러면 이제까지 제나가 지닌 탐진치(貪瞋痴)에 좇아 살던 제나가 나라는 주권을 성령인 얼나에게 바친다. 그러면 얼나가 제나를 다스리며 부리게 된다. “종교는 우리가 깨달은 진리에 동물적인 수성(獸性)을 종속시킴으로써 갈등을 조화시키는 데 그 생명이 있다.”(타고르, 「인간의 종교」) “동물적 개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모든 조건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며 또 불필요하기도 하다. 동물적 개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개체의 행복을 부정하고 동물적 개체를 인생으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적 개체를 이성적 의식에 종속시켜야 한다.”(톨스토이, 「인생론」)



밖으로는 허공이라는 절대, 안으로는 성령이란 절대가 이 우주의 실재다. 허공과 성령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다. 허공처럼 없이 계시는 성령의 님이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이는 사람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삶의 절대목적이다. 이것을 못하면 실패의 삶이다. 예수·석가·공자·노자의 일치된 생각이다. 불생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예수는 영의 나, 석가는 법의 나, 공자는 덕의 나, 노자는 도(道)의 나라고 하였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 3:5~8)



구경(究竟)에서는 예수·석가·공자·노자의 생각이 일치하기 때문에 종교 간에 갈등이나 대립할 까닭이 없다. 종교 사이에 갈등하고 대립한다면 아직 그들이 받드는 스승이 가르친 구경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어떠한 종교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자기의 종교와 신앙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 인간성이 다양한 것을 찬양하고 신앙의 형태가 다양한 것을 찬미하고 싶다. 나는 자기들만의 종교와 신앙이 옳다고 하는 특정 종교의 교도가 아닌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고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의 고귀성과 자유가 결여된 교회가 자만에 빠져서 다른 종교와 교회를 무시하는 것에 실망한다.”(헤르만 헤세, 「종교에 대하여」)



일원다교(一元多敎)



나는 종교근본주의자도 다원주의(多元主義)자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범신론적 유일신을 믿는 평범한 신앙인이다. 범신론이라 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는 그 분의 영(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고 유일신이란 오직 한분 계시고 그 분을 믿는 사상을 유일신관이라 한다.



일원다교란 한분 하나님께 가는 길이 한길만이 아니라는 뜻이고 여러 길(多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길들은 기독교, 불교, 유교 등 어느 종교로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 시카고에서 세계종교학자들이 모여 종교 대회를 하였는데 거기서 나온 결론은 모든 종교의 내용과 성격이 약 80%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종교가 역사를 살펴보면 80%이상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고 제일 비참한 전쟁이 종교전쟁이었던 것이다.(십자군 전쟁, 중동전쟁 등)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없고 불교에는 석가의 명상이 사라지고 유교는 공자의 하늘 가르침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 종교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첫째, 호칭만 다르지 한분의 절대자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열반(니르바나)이 있다. 극락세계나 하늘나라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천제(天帝)도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하늘의 덕이 나를 낳았다.”라고 한 공자의 말은 하늘의 성령이 나를(德, 참나, 얼나)낳았다는 말이다.



둘째, 기독교의 성령, 불교의 불성(다르마), 유교의 덕성, 노자의 도까지도 글자만 다를 뿐 다 같은 뜻의 동의어다.



셋째, 인간 죄의 근원을 예수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누가 12:15)” “화내지 말라(마태5:22)” “음욕을 품지 말라”(마태 5:27)라고 했고 석가도 열반경에 보면 삼독(三毒)이라 하여 탐진치 곧 탐욕(貪欲) 진에(瞋恚) 치정(痴情)을 끊어야 한다고 설법하였다. 공자도 삼계(三戒)라 하여 여색을 경계하고 얻음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예수 석가 공자의 내용이 일치한다. 그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밖에도 많이 있다. 진리는 꿰뚫어보아야지 관념으로는 찾을 수 없다. 다른 데로 같음을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다. 조화란 모든 것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특함을 간직한 채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나와 다르기에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뚜렷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빛은 어둠이 있기에 그 빛이 뚜렷하게 빛나는 것처럼,.. 예수가 말한 것처럼 “세상 끝 날에는 하늘의 영(성령)을 만인에게 부어줄 것이다.” 여기서 세상 끝이란 지구가 끝나는 종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자아(自我, ego)의 세계가 성령을 받은 참나(얼나, 성령의 나)로 인하여 종말을 고하고 하늘의 영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수의 주기도문의 “하늘나라를 이 땅에 저희들이 나타나 뵈오리다.” 이것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소명이 아니겠는가.



다(多) ᄋᆞᆯ(All) 사상



‘ · ’자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졌지만 하늘을 뜻한다. 우리 말 한글의 원초 모음인 천( · ) 지(ㅡ) 인(ㅣ)에서 하늘을 뜻한다. 발음으로 ‘ · ’은 상황에 따라 ‘어’, ‘오’, ‘우’로 소리를 낸다. 그래서 다ᄋᆞᆯ은 ‘다얼’, ‘다올’, ‘다울’의 세 가지 뜻을 지녔다.



먼저 ‘다얼’에 대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는 그분의 영(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는 그분의 얼(영)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내가 생각하는 원수에게도 하나님의 영(얼)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얼을 강조했다. ‘한 민족의 얼’이라든가, 어른(얼이 온 분), 얼래(신기할 때), 얼빠진 놈, 얼이 섞인 놈 등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요즘 농가에서 동물이나 식물에게 음악을 듣게 해서 키워 잘 자라게 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믿음에서 실제적인 믿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막연히 사랑하는 것에서 확실한 사랑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하신 뜻을 살펴야 할 것이다.



들에 핀 이름 없는 꽃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사람에게서야,...... 그래서“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메말라가는 풀에게 물 한 컵 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 짓는 것, 이것이 말로 외치는 사랑보다 더 크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면서 지으신 작품은 미워하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다음은 ‘다올(옳)’이다. 다 옳다. 옳고 틀림은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상대방에서 보면 틀릴 수도 있다. 또 상황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뀌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라 하였다.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영원한 옳음(참, 진리)은 없다. 때문에 그냥 옳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아량이 필요하다. 분쟁과 싸움을 방지하는 지혜이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싹튼다.



끝으로 ‘다울’(우리, 울타리)이다. ‘울’은 우리라는 뜻과 한 울타리라는 뜻이다. 나 혼자는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 속에 나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대기권을 울타리로 한 지구마을의 공동체이다. 지구가 사라지면 모두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지구어머니 뱃속에 있는70억의 쌍둥이 형제, 자매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땅에서 마치고) 하늘로 가는 것이 죽음이라지만 하늘에서 보면 탄생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가면 지구 어머니 형제, 자매로 만날 것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이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 아버지라고 했지 야곱의 하나님 할아버지라 하지 아니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한 형제, 자매임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어려움, 고통, 즐거움을 같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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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 (2017)평점9.4/10다큐멘터리 한국2018.05.10 개봉96분, 15세이상관람가(감독) 구자환누적관객1,5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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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남한에서의 민간인 집단학살은 1946월 8월 화순탄광사건과 대구 10월항쟁으로 시작됐다.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해 남한 전역으로 확대된 대구 ‘10월 항쟁’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항일독립군을 토벌하고 고문•처형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청산되지 않고 미군정에 의해 경찰과 국가기관의 수장이 되면서 이후 자행될 민간인학살의 전주곡이었고, 반역사의 시작이었다.

숙청되어야 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에 기대여 살 길을 찾은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 척결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가리고 생존을 위해 반정부주의자, 좌익세력, 민족주의자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 주민들의 78%가량이 사회주의를 원했고, 14% 가량만이 자본주의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와 우익인사를 기용해 정치적 걸림돌이 되는 집단과 민간인을 학살했다.

1947년부터 불거진 제주 4.3항쟁과 1948년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은 보수우파와 좌익세력을 제거하며 본격적인 반공국가 건설에 들어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민간인 대량학살은 본격화 된다. 좌익인사를 선도하고 계몽하기 위해 설립한 국민보도연맹은 한국전쟁 초기에 대량 학살 대상이 됐다. 친일 출신의 군인과 경찰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더욱 참혹한 학살극을 벌인 측면도 있다.

한국전쟁으로 전시작전권을 이양 받은 미국도 민간인학살의 주체가 되었다. 이 시기 퇴각하던 인민군과 내무서, 지방좌익에 의해서도 민간인학살은 자행됐다.



기획의도

우리나라 민간인학살의 기원은 일제 해방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해방직후 남과 북에는 사회체계가 다른 미국과 소련이 주둔하면서 민족분단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남한사회에서는 미군정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기용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남한단독선거로 벌어지는 분단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친일행위자들을 앞세워 정국을 주도해 나간다. 신탁통치를 두고 갈라진 찬탁과 반탁운동은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 이후 불거진 단독정부 수립을 두고 민족주의자와 항일독립운동가, 보수주의자들까지도 정적으로 제거된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에 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은 민간인학살이 최고조에 도달한 야만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경찰, 군인, 미군, 우익, 좌익, 인민군은 노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한국의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매카시즘으로 인해 왜곡되고 진실이 가려져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민간인 최대 100만 명이 학살된 우리의 현대사가 국가 구성의 한 주체인 국민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역사가 된 것은 슬픈 일이다.

영화 ‘해원’ (解寃)은 우리의 현대사 가운데 민간인 학살의 역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를 통해 현시대에도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는 유족들의 눈물을 보듬고 피해자들이 신원이 해원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진실규명으로 갈등의 역사를 종식하고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 해원(解寃)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 해원(解寃)

해원(解寃)


문자적 의미

‘원을 푼다’, ‘원통함을 해소한다’는 뜻이다.


본질적 의미

해원은 선천 5만년간 상극의 질서 속에서 쌓여온 모든 원한을 증산 상제님의 해원공사에 의해 풀어버리고 상생의 새질서를 여는 것을 뜻한다. 만고의 원을 푸는 해원은 천지공사를 통해서 후천 5만년 상생의 선경세계를 여는 첫걸음이다.


기존문헌의 용례

해원은 중국 고대 문헌에도 용례가 나타난다.

당송시대의 문헌으로 알려진 '돈황변문집(敦煌變文集)' 「착계포전문(捉季布傳文)」의 “依卿所奏休尋捉, 解寃釋結罷言論。(그대가 주청한 대로 찾아서 잡는 것을 그만 둘 것이니, 원을 풀고 맺힌 것을 풀어서 더 이상의 논의를 그만두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외에 '고금소설(古今小說)'과 청대(淸代) 기윤(紀昀)이 쓴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에서도 나타난다. 그 의미는 마음에 맺힌 원을 푼다는 뜻이다.


핵심 사상

증산 상제님은 해원이 인간이 가진 원을 푼다는 단면적 차원에서 이해되던 지금까지의 논의를 벗어나, 원시반본하는 우주와 인간, 천지만물에까지 그 적용범위를 확장한다. 다시 말해서 증산 상제님은 해원에 대해서 선천 상극의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원한에 의해서 잃어버린 본성을 찾고 본래적 생명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제일이념이라고 밝혀주었다.




증산도에서 말하는 우주 전체는 생명적 유기체로 이해되고 우주 내 모든 존재자들은 상호 유기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해원은 단지 인간의 원을 해소하는 의미를 넘어서 확장된다. 해원은 인간의 원과 신명의 원한, 그리고 동물의 원한 등등 모든 생명존재의 원한을 해소하는 총체적 의미를 갖는다.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이제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뜯어고치고 신도(神道)를 바로잡아 만고의 원을 풀며 상생의 도(道)로써 선경의 운수를 열고 조화정부를 세워 함이 없는 다스림과 말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교화하여 세상을 고치리라.('도전' 4:16:2~7)



이러한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원이 쌓이면 세상에 참혹한 재앙이 생겨나므로 만고에 쌓인 원을 푸는, 즉 해원을 통해서만 선경, 다시 말해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원은 후천의 선경을 이루기 위한 가장 일차적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증산 상제님은 “선경을 건설하는 첫걸음”('도전' 4:17:8)이 바로 해원이라고 하였다.




천지일월의 기운이 바르지 못해서 생긴 선천의 하늘과 땅과 인간의 문제인 원한은 곧 하늘과 땅과 인간의 개벽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제는 판이 크고 일이 복잡하여 가는 해와 달을 멈추게 하는 권능이 아니면 능히 바로 잡을 수 없다”('도전' 4:111:4)는 말씀처럼 삼계대권의 절대권능을 갖는 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에서 개벽의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증산 상제님이 이러한 권능으로 집행한 해원공사는 지금까지 쌓여 온 만고의 원한을 다 풀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시대, 새 역사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에 있어서 원은 현상적․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욕망구조에 의한 것이지만 근원적․일차적으로는 지축의 경사로 인한 음양의 불균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원이란 것은 인간들 사이의 우연적 관계만을 해소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원의 기원이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갈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해원의 방법은 선천 우주의 상극질서 즉, 원의 우주론적 기원과 선천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인류 역사상 원한의 시발점은 단주(丹朱)에서 시작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때는 해원시대(解寃時代)라… 이제 원한의 역사의 뿌리인 당요(唐堯)의 아들 단주(丹朱)가 품은 깊은 원(寃)을 끄르면 그로부터 수천년동안 쌓여 내려온 모든 원한의 마디와 고가 풀릴지라… 그러므로 단주해원을 첫머리로 하여 천지대세를 해원의 노정으로 나아가게 하노라.('도전' 2:24:1~9)

원한의 역사를 끝맺는 기점이 단주해원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단주의 원한과 바둑, 그리고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라는 지운이 상호 연관되어서 해명된다. 단주 해원공사의 단서인 오선위기혈과 조선의 국운공사, 그리고 상씨름공사는 해원을 통한 후천선경의 실상을 마련하는 천지공사의 중요한 한 축이다.

내가 이제 천지의 판을 짜러 회문산(回文山)에 들어가노라. 현하 대세를 오선위기(五仙圍碁)의 기령(氣靈)으로 돌리나니 두 신선은 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고 한 신선은 주인이라.('도전' 5:6:1~3)


천지의 판을 짜는 단서로서의 오선위기혈은 곧 바둑의 시조인 단주와 그의 원의 해원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가장 원한이 깊기 때문에, 그리고 그 원이 원의 역사의 시초이기 때문에 단주해원은 인류사에 뿌리 박힌 ‘원의 고’로 생각될 수 있다. 이는 오선위기혈이 갖는 지운에 단주해원도수를 붙여 선천의 모든 겁액을 걷어내려는 증산 상제님의 공사방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증산 상제님은 단주해원이라는 인류원한의 풀이의 기점과 오선위기혈이라는 지기(地氣), 그리고 후천개벽으로 넘어가는 상씨름의 판세를 상호 연관지어서 천지해원공사의 큰 줄기를 잡고, 천지와, 인간과 신명의 원한이 풀어지는 도수를 정하셨다. 단주해원과 오선위기 그리고 상씨름은 후천개벽을 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후천개벽상황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해원의 의미 - 대순회보 147호 청계탑



해원의 의미 - 대순회보 147호 청계탑

해원의 의미

글 교무부


대순진리회의 종지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이다. 이중 해원상생은 수도인들의 윤리적인 실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순지침』에서도 신앙체계의 정립을 ‘대순진리의 바른 이해’와 ‘진리에 의한 포덕·교화의 강화’ 이후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윤리 실천’이라는 순서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것은 신앙체계의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도전님께서는 이 해원상생 대도의 윤리와 관련하여 “양편이 척이 풀려 해원이 되고 해원이 되어야 상생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처럼 상생을 이루기 위해서는 해원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해원은 어떤 의미인 것인가? 도전님께서는 “해원은 척을 푸는 일이며”라고 하시며 해원의 한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지만 『전경』에는 다양한 용례에서 ‘해원’이라는 말씀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전경』에는 먼저 ‘해원시대’라는 말씀이 자주 보인다. 관련 내용을 보면, 이제는 해원시대이므로 남녀의 분별을 틔워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았으나 이후로는 건곤의 위치를 바로잡아 예법을 다시 세운다고 하셨으며(공사 1장 32절),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한다고 하셨고(교운 1장 32절), 지금이 해원시대이며 양반의 인습을 버리고 천인을 우대하여야 척이 풀려 빨리 좋은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교법 1장 9절). 그리고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명색이 없던 사람이 기세를 얻고 땅도 버림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온다고 하셨으며(교법 1장 67절), 선령신들이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선자 선손을 척신의 손에서 빼내어 내세운다고 말씀하셨다(교법 2장 14절). 또 해원시대이므로 덕을 닦고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라고 하셨으며(교법 2장 20절),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교법 3장 15절).

이 말씀에서 해원시대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에 원한이 쌓이고 맺혔던 선천시대와는 대비되는 시대이다. 선천시대가 포원(抱冤)과 결원(結冤)의 시대였다면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의한 해원시대는 이런 원한을 푸는 시대이며 지상낙원의 후천 상생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상극지리에 의한 선천시대에 소외와 차별 그리고 배제를 당했던 무당, 여성, 천인(賤人) 등의 사회계층은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속박에서 벗어나 기세를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얻은 기세로 거리낌이 없이 마음대로 행한다든가 설움과 차별에 대한 복수 심리로 남의 위에 군림한다는 부정적 의미를 말한 것은 아니다. 즉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풀어놓았으나 예법이 다시 세워지며,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고,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해원’의 용례를 살펴보면 ‘OO의 해원’ 또는 ‘OO를 해원한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전명숙과 최수운(공사 3장 2절) 그리고 단주를 해원하셨으며(공사 3장 6절), 진시황의 해원도수를 보셨고(공사 3장 17절), 중국의 해원공사를 행하셨다(공사 3장 18절). 그리고 왕후장상의 해원(공사 2장 19절)과, 신인의 해원에 대해 언급하셨고(교운 1장 17절), 만고 역신을 해원하여 성수에 붙여 보내셨으며(교법 3장 6절), 진묵을 해원시키셨다(권지 2장 37절).

여기서의 해원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그 해원의 대상이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쓰인 전명숙, 진묵, 최수운인 경우다. 전명숙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킬 때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며, 진묵은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고, 최수운도 상제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아 대도를 펴고자 하였다. 즉 이들은 모두 인류의 지선(至善)을 지향하였고 남을 잘 되게 하는 상생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의 원은 개인적인 사사로운 원한이 아닌 대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상생의 후천선경을 여시려는 상제님의 뜻과 통하였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이들의 해원은 지상낙원의 후천선경을 여는 천지공사에 그들을 앞장 세우셔서 진력을 다하게끔 하신 것이다.

반면, 진시황, 왕후장상, 만고 역신 등의 해원은 전자의 경우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이 경우의 원은 불로장생, 권력욕, 부귀영화 등의 사사로운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여 생긴 집착과 원통함이다. 따라서 해원도 왕후장상의 해원에서처럼 그 욕망을 일시적으로 이루어 해소하게 한다는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인간의 의욕 발동을 반성하고 조정하여 수심연성(修心煉性)으로 허영과 야망을 경계하고 분수에 합당케 하여 후회 없이 하는 것이 해원(解冤)의 묘사(妙事)”(『포덕교화기본원리2』)라는 말씀처럼 수심연성한 욕망의 승화라는 내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마음이 무욕청정이 되어 도통진경에 이르고 지상낙원의 후천선경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궁극적 의미의 ‘해원’이다.

이 외에도 ‘해원을 구하다’(행록 2장 15절, 행록 4장 54절), ‘해원도수’(공사 2장 3절), ‘해원공사’(공사 3장 4절)라는 표현을 볼 수 있으며 여기서 한 가지 더 부가할 수 있는 해원의 의미는 상호간에 맺힌 척을 푸는 의미다. 관련 구절은 공사 1장 25절로 촌 양반과 읍내 아전 간의 반목과 갈등을 푸는 해원을 말씀하셨다. 이렇듯 『전경』에 나타난 ‘해원’의 의미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경』 외에 『대순진리회요람』의 취지에는 “해원을 위주로 하여 천지공사를 보은으로 종결하시니 해원 보은 양원리인 도리로 만고에 쌓였던 모든 원울이 풀리고 세계가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으로 이루어지리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해원’은 천지 안에 모든 원울을 풀고 상생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오직 무변의 덕화와 위대한 권능의 소유주이신 상제님만이 계획하시고 성사하실 수 있다. 즉 해원의 주체가 바로 상제님이시고 그 대상은 단주, 진시황과 같은 역사적 인물,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 신과 신명, 국가 등 천지 안의 모든 존재와 무리를 망라하고 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해원시대다. 그리고 해원시대이므로 남녀의 분별을 틔워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았다고 하셨으며 난법을 세우고 그 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진정한 해원은 자신의 욕망대로 마음껏 하는 것이 아니다. 상제님을 진실로 믿고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하며 척을 풀고 남을 잘 되게 하여 도통진경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해원이라 할 수 있다. 즉 상제님께서 열어 놓으신 후천선경에 이르도록 힘써 수도하며, 또한 많은 창생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어 함께 가는 것이 바로 수도인들의 해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