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퀘이커 글 모음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 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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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 박노자

Daum 블로그




<한겨레21>  제628호
2006년09월19일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
불교적 신념이 강한 내가 한국 종단의 ‘신도’가 되길 거부하는 이유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동아시아 종단의 치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의 내면적 신앙이 어떻게 돼도 어떤 조직적 종교의 신도로 칭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 조직을 멀리할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야만의 극치에 대한 종교들의 무력함에 따르는 환멸이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을 해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국가가 자행하는 전쟁 행위에 대한 종교 집단들의 협력은 구미 지역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었다.

△ 샤쿠 소엔(왼쪽)은 메이지 시대 선불교의 최고 고승이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근대 학문을 배운 개화 인사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물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제동을 걸지 못한 구미 지역의 주류 교단들에 면죄부를 줄 일은 없지만, 구미 지역에서 전쟁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비주류 교단들마저 놀랍게도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의 협력자로 돌변하곤 했다.

일본 퀘이커의 변절

예컨대 구미에서 병역거부·반전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온 퀘이커들을 생각해보자.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일본인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국가와 천황에의 보은’을 앞세워 ‘전쟁 지지’와 ‘적극적인 협력’을 밝혔다. 결국 일본 퀘이커들은 세계 퀘이커 공동체와 일시적으로 관계를 끊어야 했다. 또한 일본인 퀘이커로서 가장 유명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 박사는 1898년에 영문으로 일본 무사도의 찬양론을 쓰는 등 군국 일본의 대외 홍보에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여호와의 증인 등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퀘이커와 같은 정통 평화 교단들마저도 병역 거부를 선언하지 못한 게 근대 동아시아의 현실이다. 성경책에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나오지 않았던가?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국민 총동원’을 상시적으로 실시하는 후발 근대화 사회에서, 내가 살인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이 아닌 시저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그 제자 함석헌(1901~89) 같은 위인들을 자랑할 수 있다. 서구에서 지금도 ‘전쟁 반대의 종교’로 인식되는 나의 신앙, 즉 불교는 과연 어떤가? 지난 백수십 년 동안 일본·한국의 불교 교단사를 보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합리화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전쟁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불교의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종교적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본 민초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커 정권에 이용가치가 높았던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오타니파(大谷派)라는 한 교파의 지도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으로서 당연히 용감하게 싸워야 하지만 특히 우리 신도로서 국가에의 충성이 부처님의 절대 진리에 상응되는 세속적인 진리라는 점을 자각하여 국은(國恩)을 갚는 데에 마음을 다 바치라”는 교시까지 내렸다. 그 지도자를 비롯한 오타니파의 성직자들이 ‘국가의 은혜’를 갚느라고 전선에 빈번히 왕래하면서 ‘군인 위안 방문’을 했고 병사의 사기를 고취하는 전쟁 선전의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다. “전장에서 쓰러지면 곧 정토 왕생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전사자를 위한 추도회까지 현지에서 열곤 했다. 그런데 그들을 비롯한 불교의 여러 교파들이 부처님의 교리를 총알받이들을 전장에 보내기 위한 정신적인 마약으로 변조하면서까지 열을 올렸음에도, 일본의 상류사회로부터 “기독교인에 비해 전쟁 협조를 덜 열심히 했다”고 빈축을 샀다.


△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오른쪽)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외래 계통의 소수파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그 당시의 일본 기독교인들의 ‘전쟁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는 이야기다.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중생을 살려라?

청일전쟁 때만 해도 일본의 종군 승려들은 전사자 추도회를 할 때 중국 병사들의 유해까지 함께 장례 치르는 등 ‘적병’에 대한 나름의 ‘예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에서는 불교계 석학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1858~1919)의 말대로 “부처님의 원수”였던 러시아에 대한 적대심은 광풍 그 자체였다. 주요 종단들이 징병 대상자에 대한 격려와 군영의 위문 방문, 군승 파견을 한 것은 물론,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참전했던 군승들이 “적들을 무수히 죽여버렸다”고 불교 언론에서 자랑할 정도였다. 선불교의 주요 종단인 임제종(臨濟宗)의 최고 고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미국에서 포교에 큰 역할을 맡았던 샤쿠 소엔(??宗演·1860~1919) 스님의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종군 포교사로 파견 중이던 그는 불교에 긍정적이었던 톨스토이가 “교전 중의 양국 대표자로서 반전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자 “공생이 불가능한 존재들 사이의 융화에 도달하자면 전쟁과 살인이 필수적”이라고 대답했다. 승려에게 참전은커녕 칼 찬 사람에의 설법까지 엄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생각해본다면, 속인 톨스토이의 제안에 “노”를 외쳐대는 ‘고승’의 모습은 괴이하게만 보인다.


△ 화폐 개혁 전 5천원권에는 니토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이미 그때에 불교계는 대량살인을 ‘일살다생’(一殺多生)이라 불렀다.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편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저 해로운 벌레를 죽임으로써 아시아 평화를 도달케 하는 우리 병사”들을 “보살행의 수행자”라 칭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르러서는 “천황 폐하는 여래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가 명하는 전쟁이란 크나큰 자비의 실천”이라는 주장으로 진일보했다.

일본 불교에 거의 편입된 식민지 조선의 주류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이후에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 불교의 거두 권상로(1879~1965). 그는 전쟁 때의 명령이 바로 “성전에 임하는 병사의 계율”이라든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망발을 계속했다.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로의 발언

오늘날의 한국 주류 불교 종단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불교의 군사주의를 그대로 담은 식민지 말기의 ‘호국을 위한 살생 허용’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종단의 신도증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불교적 신념이 강해도 말이다. 아니, 불교적 신념이 강하기에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최고 효과의 묘약을 잘못 이용하면 최악의 독약이 되듯이, 가장 고매한 종교의 교리 체계에서 비폭력·반전에 관한 부분을 빼버리면 결국 대중을 국가의 총알받이로 만드는 최강의 마취제로 변하고 만다.

△ 니토베 이나조는 전쟁에 관한 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천황폐하의 선량한 신민’으로서의 입장을 택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불교·기독교는 평화의 성현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각각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녀’는 이번호부터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으로 문패를 바꿉니다. 글의 소재를 동아시아 근현대로 확장해 독자 여러분의 역사적 안목을 더욱 높여 드리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성원 부탁드립니다.

참고 문헌:
1. <논집 일본불교사 8: 메이지 시대>, 이케다 에이(池田英俊) 외 엮음, 도쿄: 유잔가구(雄山閣)출판, 1987, 225~269쪽.
2. , Notto R. Thel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169~174쪽.
3. , Brian Victoria, Weatherhill, 1997.
4. <친일불교론> 상·하, 임혜봉, 민족사, 1993.

RISS 통합검색 - 학위논문 니토베 이나조 연구 : 식민지 조선관을 중심으로

RISS 통합검색 - 학위논문 니토베 이나조 연구 : 식민지 조선관을 중심으로



니토베 이나조 연구 : 식민지 조선관을 중심으로 = (A) study of Nitobe - Inazo
저자 : 배춘희
형태사항 : v, 192 p : 삽도 ; 26cm.
일반주기 : 지도교수:정하미
국문초록 : p.iv-v
Abstract : p.191-192
참고문헌: p.168-172
학위논문사항 : 학위논문(박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 일본언어문화학 2008. 2
발행국 : 서울
언어 : 한국어
출판년 : 2008
주제어 : 일본어
소장기관 :
  •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 한양대학교 중앙도서관

역사칼럼 -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출처: 중앙일보]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日 지배층 청결성의 뿌리, 무사도 '할복'

역사칼럼 -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출처: 중앙일보]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日 지배층 청결성의 뿌리, 무사도 '할복'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출처: 중앙일보] 생명 걸고 존엄을 지킨다··· 日 지배층 청결성의 뿌리, 무사도 '할복'

전후(戰後) 일본주식회사의 가치관, 지배계급의 청빈 세계관으로 정착… 한국에도 도덕적·윤리적 가치 기준의 구축이 절실하다


기사 이미지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 <하라키리>의 한 장면. 일본 무사도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다. / 사진·중앙포토



이번 달 주제는 무사도, 일본말로 ‘부시도(武士道)’ 즉 사무라이의 계율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영화 얘기부터 시작하자. 필자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1962년도 작품으로, 제목은 <하라키리(腹切)>, 즉 할복이다. 196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스타, 나카다이 모토히데(仲代元久) 주연으로, 1963년 칸 영화제에 최우수작품 결선까지 올라갔던 영화다. 당시 최우수상이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감독의 <레오파드(Leopard)>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라키리>가 어느정도 수준의 영화였는지 짐작이 갈 듯하다. 일본 영화, 아니 영화 전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윌리엄 와이럴(William Wyler) 감독의 작품 <벤허(Ben Hur)>에 비견될만한 명작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무사도(武士道)로 본 일본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언제부턴가 생긴 습성이지만, 신작 영화보다 고전을 반복해서 보는 식의 관람을 즐긴다. 넷플릭스(Netflix), 훌루(Hulu) 같은 영화전문채널을 통해 고전 명작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하라키리>는 다섯번 정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다. 하라키리는 싸우는 사무라이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신켄쇼부(眞劍勝負, 진검승부) 장면이 곳곳에 나오지만, 스토리 전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진짜 스토리는 대화를 통한 부시도의 정수(精粹)를 보여주자는 데 있다.

얘기는 16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츠쿠모 한시로(津雲半四?)라는 이름의 사무라이가 에도(江?)에 있는 히코네한(彦根藩)의 한슈(藩主) 이이가(井伊家)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에도에는 300여 개에 이르는, 전국의 막부 대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지방 반란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막부의 자식을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에도 대저택들이 생겨난 것이다. 인질로 에도에 불러들이지만, 자기가 살 집은 막부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츠쿠모가 찾아온 이유는 할복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할복을 할 테니 자리를 빌려달라는 얘기다.

할복이라는 장엄한 의식



할복이 이뤄지는 장면을 묘사한 에도시대의 그림. 병풍과 대나무로 가려진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종교의식 같은 것이다. / 사진·유민호
 
1630년은 도쿠가와가 전국을 통일하고 평화에 들어선지 27년째에 접어든 때다. 평화는 일반인에게는 좋지만, 사무라이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한순간에 군축(軍縮)이 이뤄진다. 당당하던 사무라이도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돈에 목을 맨다. 주군을 잃어버린 실업자 사무라이, 즉 로닌(浪人)이 전국에 범람한다. 프라이드가 강한 로닌은 장사나 농사 같은 일을 할 수도 없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부채나 우산 만드는 일을 통해 근근이 살림을 이어갈 뿐이다. 그 같은 어려운 삶을 구차하게 연명해가는 것보다 아예 사무라이답게 할복으로 생을 깨끗하게 접겠다는 것이 ‘늙은 로닌’ 츠쿠모의 방문 이유였다. 이에 대해 히코네한 한슈의 총책임자인 사이토(?藤)는 할복 의사를 재차 확인한 뒤 장소를 제공한다.

‘셋푸쿠(切腹)’라고도 불리는 할복은 부시도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되는 의식이다. 자결(自決), 자재(自裁)란 말로도 표현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경우,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 부시도의 예의이자 미덕이다. 싸움에 진 사무라이를 가장 욕되게 하는 방법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살려 보내는 것이다. 죽일 만한 가치도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란 의미다. 패장 사무라이를 대하는 최상의 예의는 칼을 던져주며 할복를 허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 해도 목을 친 뒤 고향에 돌려보내는 것이 사무라이 사이의 암묵적인 예의다. 전국시대 때 풍습이지만, 적의 머리를 들고 오면 돈과 자리를 보장한다. 일단 머리를 통해 누구인지 확인한 뒤, 농민을 통해 시신을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는 것이 일상적 풍경이다.

전통적 의미의 할복은 예법에 따른 의식에 해당한다. 그냥 단순히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순서와 환경에 의해 치러지도록 명문화돼 있다. 에도시대 행해진, 죄인을 상대로 한 할복은 크게 11개 단계로 나눠져 진행됐다.

①할복이 이뤄질 것이란 통지가 죄인에게 전해진다.

②당일 할복에 앞서 목욕한다. 목욕물은 찬물을 먼저 넣고, 뒤이어 뜨거운 물을 넣어 온도를 맞춘 뒤 안에 들어간다. 뜨거운 물에다 찬물을 부어 온도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③머리카락을 깎고 흰옷을 입는다. 머리형과 옷은 할복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방식과 양식이 적용된다. 옷의 경우 흰색 마(麻)를 재료로 한 것으로 목의 뒷부분은 목이 쉽게 떨어져 나가도록 크게 열려 있다.

④할복 장소의 크기는 대략 10평 정도의 닫힌 공간으로 이뤄져 있으며, 남북으로 문을 열어두면서 행한다. 남문은 수행문(修行門), 북문은 열반문(涅槃門)으로 불린다. 공간의 사방은 병풍과 대나무 같은 것으로 규격화해서 장식한다. 공간의 중간은 뒤집어진 다다미(?) 2개를 설치한다.

⑤죄인은 북문에서 들어와 북문을 향해 두 장의 다다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 곳에 앉는다. 죄인에 이어 할복을 돕는 가이샤쿠닌(介錯人)은 남쪽 수행문에서 들어온다.

⑥할복 직전 흰 쌀에 따뜻한 물을 넣은 밥, 3개로 나눠진 야채, 소금이 제공된다.

⑦식사에 이어 두 잔의 술이 제공된다. 한 잔을 두 번에 걸쳐 마셔야 한다. 술을 더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다.

⑧이어 자신의 배를 가를 단도(短刀)가 제공된다. 길이가 11.35㎝로, 손잡이 부분은 약 5㎝ 정도다. 단도 손잡이는 나무가 아니라, 가는 실로 감싸져 있다. 날이 선 칼의 절반 정도는 종이로 28회 감싸서 제공된다.

⑨가이샤쿠닌은 할복 당사자 앞에 가서 이름을 밝히면서 인사한다. 뒤이어 뒤로 돌아서 칼을 물로 씻는다. 이어 하늘을 향해 칼을 들고 서 있는다.

단번에 목을 치는 게 최상의 예우



197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헬로키티. 표정이 없어 변형된 사무라이의 모습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 사진·유민호
 
⑩할복 당사자는 옷의 오른팔 부분을 벗어 아래로 내린다. 왼손으로 단도 손잡이의 중간 부분을 잡은 뒤, 오른손으로 손잡이 윗부분을 감싼다. 이어 왼손으로 배를 세 번 약하게 어루만지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배꼽에서 위쪽으로 약 1㎝ 윗부분을 중심으로 하면서, 단도를 배 안으로 찌른 뒤 서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이 순간 가이샤쿠닌이 뒤에서 목을 친다. 한번 만에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할복자에 대한 최고 예우로 해석한다. 단 한번에 잘려진 목은 ‘다키구비(抱き首)’라 불린다. 마치 어린아이의 머리를 안을 때와 같은 형상이란 의미다.

⑪이어 할복을 위해 설치된 병풍이 철거되고 사람들에게 사자(死者)의 모습을 확인시킨다. 떨어져 나간 목을 몸에 연결해 수의와 함께 관에 집어넣으면서 할복의식은 끝난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츠쿠모가 할복의식에 들어가면서 가이샤쿠닌에 관한 얘기가 등장한다. 아무리 로닌이지만, 할복을 통해 부시도를 증명해 보이는 만큼 가이샤쿠닌을 츠쿠모 자신이 지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한다. 책임자 사이토는 츠쿠모의 충정을 높이 산다면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무라이를 추천한다. 단칼에 목을 친다는 것은 고난도의 기(技)와 술(術)을 필요로 한다. 칼의 수준과 사무라이의 힘 등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 한순간 가능하다.

영화에서는 가이샤쿠닌의 일이 한순간에 끝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할복 가이샤쿠닌의 참수는 두 번, 세 번, 아니 네 번, 다섯 번에 걸쳐 이뤄진다. 프랑스혁명 당시 기요틴의 날이 무뎌지면서 목이 한꺼번에 안 떨어져나가 몇 번이나 시행한 것과 똑같다. 치다가 칼이 목에 꽂혀져 빠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제국군대의 만행을 얘기할 때 중국인 참수 경쟁스토리가 등장하지만, 사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목을 칠 경우 단번에 무뎌진다고 한다. 일본군이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과정에서 100명의 목을 쳤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 뼈의 강도는 짚을 넣은, 강한 대나무와 비슷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진검으로 대나무를 자를 때 고수의 실력을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잘려진 대나무의 단면이 직선인지 여부가 실력을 가늠한다. 일직선 단면은 검도 9단 정도 실력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일직선으로 간다는 것은 힘이 한순간에 모아지면서 상대방이 고통스러워할 겨를도 없이 절명(絶命)한다는 의미다. 한칼에 목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일직선을 통한 무고통 절명에 해당된다. 힘이 분산될 경우 잘린 대나무 결이 울퉁불퉁하다. 그만큼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다. 검도의 고수라 해도 대부분은 울퉁불퉁한 것은 물론이고, 단칼에 대나무를 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사이토가 로닌에게 가이샤쿠닌 지정권을 준 이유는 바로 최고 실력의 사무라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츠쿠모는 사이토가 추천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을 지정한다. 그러나 병이 나서 출근을 안 했다고 한다. 이어 두 번째 실력의 사무라이를 지정했다. 역시 병으로 인해 출근을 안했다고 한다. 세 번째 다시 사무라이를 지정하지만, 역시 감기로 출근을 안 했다고 한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맡은 사이토는 츠쿠모의 의사와 무관하게 다른 사람을 통해 당장 시행하라고 명령한다. 순간 츠쿠모는 머리카락 묶음 세 개를 던진다. 사이토가 자랑하는 실력자 3명의 머리카락으로, 츠쿠모가 가이샤쿠닌으로 지정했던 사무라이들의 흔적이다. 츠쿠모 자신이 세 명의 사무라이를 상대해 모두 이긴 것이다. 머리카락이 깎였다는 것은 사무라이로서 죽음 이상의 수치다. 세 명 중 한 명은 이미 할복한 상태지만, 두 명은 잘려진 머리카락 때문에 출근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집에 머물고 있다. 츠쿠모는 비웃음과 함께, 자신에 앞서 할복을 해야 할 사람은 사이토의 사무라이들이라고 말한다. 츠쿠모의 말이 떨어진 순간 사이토는 당장 죽이라고 명령한다. 곧이어 영화장면은 사무라이 칼싸움으로 들어간다. 100대 1의 장렬한 싸움을 벌이다가 츠쿠모는 온몸에 칼이 꽂힌 채 세상을 떠난다. 영화에서 왜 츠쿠모가 스스로 할복를 자청하면서 찾아가 싸움을 벌이다 죽었는지 궁금할 듯하다. 17세기 일본 전역이 로닌으로 넘치면서 부시도를 생활의 방편으로 오용(誤用)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극단적인 경우로, 사무라이답게 할복을 할 테니까 자신의 가족들을 부탁한다는 식의 행동이 나타난다. 죽음을 내건 비즈니스다.

생활고에 찌든 할복 자원자들의 행렬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하라키리>에서 사무라이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 사진·유민호
 
17세기초 에도에 모인 300여 막부는 각자의 위상과 위신을 높이려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일본에 가면 형형색색 각 지역 특산품의 종류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부들간의 경쟁 속에서 지역 내 독자상품을 열심히 개발·판매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지역특산물들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부시도에 맞춰 할복을 행할 경우 막부 자신의 위상도 부시도에 어울리는 명가(名家)로 부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로닌이 늘어나고 할복 신청자도 넘쳐나면서 문제가 생긴다. 공급이 늘어나면서 할복에 걸맞은 보상이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가난에 몰려 찾아온 사무라이들에게 ‘충정은 알겠다’면서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서 되돌려 보내는 일들이 발생한다.

청년 큐조(求女)는 그 같은 상황 속에 나타난 비극적 인물이다.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 생활하던 큐조는 부인과 자식조차 병으로 쓰러지면서 결심을 하게 된다. 사이토를 찾아가 할복을 요청한다. 충절을 보이면 적당한 선에서 돈을 주면서 돌려보낼 것으로 판단했다. 사이토도 그 같은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큐조 같은 로닌이 계속해서 몰려들 경우 돈도 들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고 판단한다. 사이토는 큐조의 상황을 알면서도 할복을 진짜로 실행하도록 명령한다. 큐조는 겁을 먹지만,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죽기 전 집에 가서 자신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보고하고 오겠다고 부탁한다. 사이토는 그 같은 요청을 거부한다. 도망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모욕을 준다. 결국 큐조는 사이토와 다른 사무라이들 앞에서 할복을 행한다.

말이 할복이지, 차갑고도 잔인한 인간의 야만적 심리를 충족시켜주는 공개참살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가난했던 큐조는 자신의 칼조차 팔아, 대나무로 된 가짜 칼을 차고 다녔다. 사이토는 사무라이답게 자신의 칼로 할복을 하라면서 대나무 칼을 큐조에게 준다. 큐조는 무뎌진 대나무 칼로 수십 차례 자해를 한 끝에 고통과 함께 세상을 떠난다.

츠쿠모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 같은 할복에 처해진 큐조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강제로 죽임에 처하고, 사무라이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항의의 근거다. 스스로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찾아온 것은 큐조가 츠쿠모 자신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잘려진 3명의 사무라이는 바로 큐조 참살의 주모자에 해당된다. 같은 사무라이를 모욕한 죄로 츠쿠모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응징한 셈이다.

<하라키리>의 고바야시 감독은 ‘안티(Anti)’라는 접두사에 걸맞은 인물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광기와 봉건 일본의 모순을 고발·비판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남겼다. 무죄로 투옥된 전범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그린 <두꺼운 벽의 방(壁あつき部屋)>, 전쟁 중 만주에서 벌어진 일본의 만행을 그린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같은 작품은 집단 일본의 광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일본판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이다. 고바야시 감독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스토리 한 부분에 반드시 한국인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 <하라키리> 역시 죽음을 매개로 한,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 극단적인 모순을 그렸다는 점에서 ‘안티’ 영화의 본보기라 해석된다.

190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만난 <부시도>



1. 일본 요츠야 괴담(四谷怪談)에 나오는 이이와(お岩)를 모신 신사(神社). 요츠야 괴담은 부시도 이면의 추한 사무라이 모습을 묘사해놓았다. 2. 올해 화제를 모은 영화 <제로>의 한 장면. 2차대전 당시 죽음의 비행에 나서는 청년에 관한 얘기로 출격 당일 술이 두 잔 내려진다. / 사진·유민호
 
필자가 영화 <하라키리>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츠쿠모의 거대한 모순과의 대립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의 맛과 멋을 더하기 위한 소재로서의 갈등관계이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메시지는 다른 곳에 있다고 판단된다. 바로 부시도다. 사무라이의 원칙과 가치에 관한 부분이 츠쿠모와 사이토로 대표되는 17세기 일본인의 세계관을 통해 영화에 반영되고 있다. 큐조의 죽음을 둘러싼 대립관계를 통해 선과 악으로 나눠진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무라이가 지켜야 할 부시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 스토리 전체에 투영돼 있다. 영화 속에서 츠쿠모는 사위 큐조의 죽음 자체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명예와 존엄을 무시한, 사악한 인간의 심리를 부정할 뿐이다.

사실 사이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름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부시도에 의거해 큐조를 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돈을 위해 찾아온 큐조에게 사무라이로서 진짜 할복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나무로 된 검을 주면서 할복하라고 한 점, 할복에 앞서 집에 가서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무시했다는 부분에 대해 츠쿠모는 반발한다. 부시도를 따르는 사무라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 감독의 영화는 안티라고는 하지만, 사무라이와 부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부시도의 해석에 관한 부분에서의 갈등과, 부시도를 지켜야만 하는 사무라이의 고통과 고난을 묘사한 명작이라 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부시도로 대표되는 일본 전통사상을 한층 더 갈망하고 추구하는 영화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과연 부시도란 것은 어떤 것일까?

부시도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니토베이나조(新渡??造)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지만, 유럽·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라면 메이지(明治) 천황에 비견될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부시도: 일본의 혼 (Bushido:The Soul of Japan)>이란 책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책이 출간된 것은 20세기로 들어선 1900년이다. 일본어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영어로 출간된다.

곧바로 미국과 유럽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잡는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은 8년이 지난 1908년이다. 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쓰라-태프트조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루스벨트가 가진 일본관의 대부분은 니토베가 쓴 <부시도>에서 온 것이다. 존F. 케네디를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은 물론,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접하는 일본 이해의 기본서다.

니토베의 <부시도>는 서방만이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큰 영향을 준 책이다. 아마존 일본에 들어가 ‘니토베 부시도’란 키워드를 치면 348권의 책이 나온다. 1908년 이와나미(岩波) 출판사에서 번역·출간된 이래 매년 각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새로 번역해 펴낸 책들이다.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니토베의 영어를 보다 알기 쉽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매년 신판 번역서가 출간된다. 저작권과 무관하기 때문에 출판사 모두가 경쟁적으로 출간한다. 물론 매년 새롭게 업그레이드해서 나온다. 필자의 경우 1990년 이와나미 출간 40판을 갖고 있지만, 출판사마다 보통 50판 가까이 중판(重版)해 왔다. 일본 국민이라면 모두가 읽는 국민 기본서에 해당된다.

니토베는 저술의 동기를 자신의 부인과 친구들에게 두고 있다. 원래 농학학자로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많은 친구를 만난다. 미국 여성과 결혼하면서 사무라이, 부시도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영어로 설명하는 가운데 저술의 필요성을 느껴 출간하게 됐다는 것이다. 니토베의 책과 관련해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출간된 해가 1900년이란 점이다. 미국에 영어로 된 한국 관련 책은 거의 전무할 때다. 단편적인 글은 있겠지만, 역사와 심리를 파고드는 저서는 전무하다고 봐도 된다. 최근 화제가 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어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41년 진주만 공격 직전이다. 한국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일본의 호전성을 알린 책이 영어로 된 한국인 저서의 출발점이다. 문(文)의 나라라 자랑하지만 자국을 외국에 알리려는 노력은 한참 뒤졌다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상황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변화가 없다. 한국이란 나라의 심층을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제대로 된 영어책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니토베가 1900년에 책을 낸 것은 당시 한반도 상황과 연결해 해석될 수 있다. 1894년부터 시작된 청일전쟁이다. 일본이 중국을 격퇴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상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중국이 아시아의 대표주자라 생각하던 서방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흔든 것이 청일전쟁이다. 일본에 대한 수요와 궁금증이 더해지는 과정에서 때마침 미국에서 요양 중이던 니토베가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인 부인과 친구들의 질문에 답하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책의 골자다.

죽음 염두에 둔 사람일수록 삶에 집착


1908년 이와나미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래 국민 필독서로 자리잡은 니토베 이나조의 <부시도>(왼쪽). 한국에도 <무사도란 무엇인가> 등의 제목으로 번역됐다. / 사진·유민호
 
두 번째는 동과 서를 오가며 비교 분석한, 입체적 차원의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란 점이다. <부시도>는 전부 17장으로 이뤄진 150쪽 정도의 책이다. 도덕 체계로서의 부시도, 부시도의 연혁, 의(義)·인(仁)·용(勇)·예(禮)·성(誠)·충(忠), 할복, 일본도, 부시도의 장래 등에 관한 얘기로 이어진다. 사실 한말의 유학자가 본다면 한국인이 중시하는 가치나 덕목과 비슷하다고 말할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용의 대부분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나 현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니토베는 프로테스탄트의 일종인 퀘이커 교도다. 서양을 이해하고, 학자로서 동과 서를 오가며 체득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동서비교문화론으로서의 책이 <부시도>다. 예를 들어 제 2장의 부시도의 연혁에 언급된, 비교문화론적 관점의 분석을 살펴보자.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비교한 몸젠의 책에 따르면, 그리스인은 예배를 할 때 눈을 하늘에 두면서 신을 생각지만, 로마인은 머리로 신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리스인이 응시(凝視)라고 한다면 로마인은 내성(內省)이란 측면에서 신을 대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은 종교관은 로마인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성에 주목하는 것으로….”

일본 농학자가 쓴 책이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풀이해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과 지혜에 기초한, 이른바 리버럴아츠 관점에 입각한 저서였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판단된다.

부시도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는 일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침반에 해당된다. 과거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위기 시의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 부시도에 관한 것이다. 2012년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등장 이후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것이 니토베의 <부시도>다. 중국발 위협이 가속화되면서 부시도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이라 분석된다. 부시도의 내용 가운데 한국인이 가장 잘 모르는 부분은 하라키리, 즉 할복에 관한 부분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따르면 부모에 앞서 죽거나, 몸을 자해하거나 절단하는 행위는 인륜과 예에 어긋나는 최악의 케이스에 해당된다. 충·인·의·예·성처럼 한국의 유교와 비슷하지만, 어떻게 해서 죽음을 염두에 둔 세계관으로 나아갔는지 궁금하게 느껴진다.

여러 측면에서 풀이될 수 있겠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삶에 더 집착한다는 점이 최적의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의 공포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맞선 삶의 즐거움이 하라키리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해낸 것이다. 따라서 하라키리는 극단적인 경우에 나타나는 것일 뿐, 일상에서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이 1945년 8월 11일 심야회의다. 당시 군부 내각을 대표하는 6명이 참가해 천황의 항복의사를 듣는다. 돌아가서 할복을 한 사람은 육군대신 ‘아나미고레치카(阿南 惟幾)’ 단 한 명이다. 나머지 5명은 모두 살아남아서 이후 일본 재건에 나선다. 필자는 6명 전원 할복하는 것이 부시도의 전통이라 믿는다. 그러나 전통은 전통일 뿐 현실과 다를 수도 있다.

일본 지배층의 윤리적 청결성의 뿌리

부시도는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닌, 삶에 주목하는 가치관이다. 한국인이 보면 오해하기 쉬운 세계관이지만 1940년대 전쟁 중 ‘1억 결사 옥쇄(玉碎)’와 같은 광기는 부시도를 오용한, 일본판 탈레반들의 생각이었다고 보면 된다. 평화시의 부시도는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시 일본판 탈레반이 득세할 경우 죽음의 행진곡으로서의 부시도로 둔갑하기 쉽다. 한국전쟁 당시의 인민재판,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니토베의 부시도는 전후(戰後) 일본주식회사의 가치관이자 세계관으로 확립된다. 하라키리 부분이 아니라 하라키리를 염두에 둔 비장한 세계관이 핵심이다.

상대적이지만 일본의 경우 부정부패나 상위층의 경제독점같은 것이 거의 없는 나라다.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회장이나 사원의 대우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회장의 월급도 같은 연령대의 직원보다 조금 많을 뿐이다.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무라이가 지켜야 할, 청빈의 세계관에 따른 것이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일본 역시 갖가지 모순과 갈등으로 뒤덮인 나라다. 상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부시도에 입각한 사무라이, 즉 일본 지배층의 도덕적·윤리적 청결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과 중국이 부족한 부분으로,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갈등의 정도가 미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 상황을 보면, 무도(武道)는 있어도 무사도(武士道)는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자고 나면 방산비리, 정치인·기업인의 부정부패 관련 뉴스로 넘쳐난다. 최근에는 운동선수, 연예인도 가세하는 판이다. 국민소득 5만, 10만 달러가 된다 해도 행복해지기 어려운 나라가 한국이다. 도덕적·윤리적 가치 기준의 구축이 절실한 나라가 2015년 겨울, 한국의 모습이다.

글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니토베 이나조

칼럼 니토베 이나조



(황 진) 사과드립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보아도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너그럽게 양해가 될 수만 있다면 자격은 모자라고 그럴 입장에 있지도 못한 사람이지만 이런 말을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드립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동쪽으로 밀려오던 서세동점의 시기인 19세기 말 일본의 위대한 선각자 중에 니토베 이나조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5천엔권 구화폐에 초상화가 올려 질 정도로 현대 일본인들에게는 위인의 반열에 오른 분입니다. 그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클라크가 설립한 삿보로 농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에 유학하여 사학과 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본 대학에도 유학하여 농학에 대한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는 농업 행정가로, 교사로 그리고 야학을 설립해 운영하는 등의 사회사업가로, 나중에는 미일 교환교수로, 국제연맹 사무차장으로 국내외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말년에는 귀족 의원으로, 마이니치신문의 고문 등으로 일본 최고의 원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를 일본 내외 최고의 저명인사로 만들어준 저술이 있는데 그것은 1905년 영문으로 쓰여진 “무사도”라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무사도 정신을 이어받은 일본인이 탁월하게 고상하고 이성적이며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품성을 지녔다는 점을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서술하였다고 합니다. 일본 사회의 대중적인 의식인 무력에 대한 숭상을 종교적 수준으로까지 승화시킨 저술가였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한 종파로 영성의 지극한 고양을 지향하고 자유로운 신앙 양심을 추구하던, 함석헌 선생님도 몸담았던,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 퀘이커 기독교인인 그는  “식민은 문명의 전파다. 제군들은 비전을 잘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태양은 반도 왕국에서 가라앉으면 떠오르고, 그곳에서 떠오르면 또 가라앉는다. 언젠가 역사가들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계획을 흥망성쇠의 지표로 볼 것이다. 가장 현저하지만 어중간한 정복 시도는 이미 히데요시가 행한 바 있다. 그 이후 일본은 반도에 손을 댈 수가 없었지만 동면중이었을 때조차 조선이 속국이었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았다.”  또한 그는 조선과 타이완의 일본 병탄에 적극 협력한 극렬 제국주의자였고 자국 원주민인 아이누 족에 대하여 가혹한 통치를 부축인 국수주의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내의 극렬 정한론 자와 똑같이 조선을 폄하하고 조롱하며 정부 당국자에게 조기 병합을 독촉하였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자기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의무라고 까지 믿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실례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창시자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다고 하였으며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 바울 역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까지만 이여야 합니다. 그것이 공세적이고 배타적으로 까지 나아가서는 결코 안 되는 일입니다. 폭력적인 것은 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와는 결코 공존될 수 없는 적대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같이 사랑해야할 가까운 이웃으로서의 보편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에게 위인인 한 인물이 타민족에게 원흉일 경우에는 그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는 부를 수 없습니다. 니토베 이나조가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한 일원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한 인간으로, 구체적으론 한 기독교인입니다. 나는 한국 민족으로서 니토베 이나조에게 적대적이기 전에 한 기독교인으로서 니토베 이나조가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나는 일본이 참 부럽습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그들이 시기가 날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와 똑같은 개화기를 거쳤던 당시에 오로지 멸사봉공하던 무수한 선각자들을 둔 일본 백성이 너무나도 부럽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일본의 모든 것을 그때 결정해 버렸습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도 여기로부터 연유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신앙하는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가 함유하고 있는 창조적 생명력이 이 땅에 뿌리를 내려 이 땅의 사람들을 가치 있고 유력하게 고양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독교가 미미한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우위에 있는 한국이 그 기독교의 창조 역량을 통하여 부럽고 무서운 일본을 극복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종교란 인간 개개인의 삶 자체 외 에 그 어떠한 것에도 수단이 될 수가 없지만 민족은 기독교가 지향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고 역사는 그 이웃들의 총체적인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의 기독교가  이 땅에 사는 국민들의 삶과 그들의 역사에 진정으로 유익을 주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이나 삶 너머의 문제가 종교에서 빠뜨릴 수 없는 궁극의 영역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신앙의 진정성과 성실성은 인간의 육체적 삶과 현세 안에서 평가되고 검증 될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 반대는 공허하고 명목적인 것입니다. 여기가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유대인의 몸을 입고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로 들어오신 지점이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빈약한 일본 사회보다 그 반대인 한국 사회의 수준이 더 우월하다고 자신할 수 없고 개인적으로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일본에서의 생활보다 언어가 통하는 한국생활이 더욱 불편하다는 말을 경험자로부터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아름답지 못하고 불편한 것의 책임은 최소한도 신자 비율 이상만큼은 기독교에게 있습니다.

  이웃에게 불편과 불행을 가져다 주는 니토베 이나조 같은 기독교인은 없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기독교 종교인 인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무례하고 지혜롭지 못하기가 그지없는 일명 ‘땅 밟기’ 라는 것을 하는 미숙하고 맹목적인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간구하셨습니다.  “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슨 짓인지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  이들이 그와 같습니다.

    복음의 진실 된 내용은 이웃을 스스로에게 하듯이 최대한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이웃과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민족도, 이념도, 빈부귀천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여기에서 더욱 나아갑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고....”

 

   감히 자격도 없는, 그리고 사실은  가장 먼저 이 말을 들어야 할 처지에 있는 제가 모세만 알고 예수님을 모르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니또베 이나조 같은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깊은 반성을 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아직 동의하지 않는 우리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사죄드립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올해 2010년은 불행한 한일강제병탄 100년이 되는 해이며 조금 있으면 다가오는 25일은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기쁜 성탄절입니다.



황 진/군산시민연대 운영위원/중앙치과 원장/byul-bada@hanmail.net

항상 깨어있어라. : [도올고함(孤喊)] `취업률 96%` 도쿄대 교수에 물어보니.

항상 깨어있어라. : [도올고함(孤喊)] `취업률 96%` 도쿄대 교수에 물어보니.



[도올고함(孤喊)] `취업률 96%` 도쿄대 교수에 물어보니.

도올 김용옥.키튼 2007/05/18 13:54
일본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이 96%를 넘고, 주요 기업들의 5년 연속 매출이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곧바로 일본 사회의 날카로운 평론가로 정평이 있는 도쿄(東京)대학 윤리학과 구로즈미(黑住眞)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운 좋게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그를 복도에서 잡아챘다.

-대졸자 취업률 최고 수준, 기업과 노동시장의 활황, 이런 기록 숫자들이 사실인가?

"사실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일본 경제는 성장을 멈추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부터 경제가 활성화되고 성장세가 회복되었다. 그 꾸준한 사회 변화가 그런 수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나.

"전반적 사회 변화의 정황을 서너 방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대학 졸업생 취업률의 증가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내 나이 또래의 전쟁 직후 태어난 단카이(團塊)세대가 인구비례로 볼 때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정년퇴직이 시작되어 빈자리가 많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대학과 기업의 체제가 공(公)에서 사(私)로 대대적인 구조적 이행을 했기 때문이다. 옛날의 관학(官學) 중심, 인문학 중심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일종의 경영회사처럼 대학이 변해버렸다. 기업도 위계 중심의 질서가 사라지고 상부에서의 정보.경영독점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결정권이 공유되는 다양한 포스트들이 생겨났다. 셋째, 인터넷 사용에 따른 미디어혁명을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취업이라고 하지만 그 취업 형태가 옛날과는 다른 다양한 양상이 있다. 한마디로 공공성이 사라지고 마켓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변화가 바람직한가?

"일본화폐 5000엔(円)권에는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 초상이 있었고 1만 엔권에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 얼굴이 있었는데 몇 년 전 니토베는 사라졌으나 후쿠자와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이것은 현재 일본을 움직이는 자들이 후쿠자와 계열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세운 게이오(慶應)대학 출신들이 일본을 장악하고 있는데, 후쿠자와는 탈아론자(脫亞論者: 일본은 아시아에 속하지 않는다)였고 그의 후예들은 탈아시아, 친아메리카, 친유럽적 성향을 갖는다. 그리고 철저히 중앙집권적 경제관료 멘털리티에 젖어 있다. 

니토베는 일본 최초의 퀘이커교도였으며 이상주의자였다. 일본의 이상주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우려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은 표밭을 항상 계산하는 정치인들이다."
-무엇이 우려되나?

"과거의 자민당에는 그래도 사회의 '중간집단'을 의식하는 분배론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민당은 '막가는' 자민당이다. 사회 소수의 급성장이 다수를 먹여살린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대학생들의 취직 자리는 늘고 있지만 실제 중간층 상인들의 경기는 별 볼일 없으며 농촌은 붕괴되고 있다. 자살이라든가 살인범죄는 훨씬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의 건강한 중산층의 윤리가 해체되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경제성장을 빌미로 한 국제감각의 상실이다. 평화헌법을 폐지하고 국수주의적 군국주의로 가겠다는 것이며 국가지상주의적 이념이 판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도쿄대 학생 중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학생도 있다. 일본의 경제성장을 한국인이 기뻐해야 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취직 잘하니 좋지 않나?

"대학생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글로벌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취직이 잘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현재의 생활데이터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런 나라는 희망이 없다."

-일본의 문제는 무엇인가?

"공공(公共) 정신에서 뒷글자의 공(共),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그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7.05.17 04:31

'뜻으로 본 한국역사' 와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와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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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권위에 대한 저항''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p.s - 함석헌 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 예배에서 발표했던 글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많큼의 땅이 필요한가? — 삿뽀로농학과 식민

우리에게는 얼마많큼의 땅이 필요한가? — 삿뽀로농학과 식민



삿뽀로농학과 식민

일본의 식민정책학의 기초는 내부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다. 일본의 식민공학은 일본 열도에 복수로 존재하던 선주민들을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습득된 식민지 경영에서 축적된 것이다. 이는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이인종들을 한 국민으로 통합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와 연동되어 진행된 것이다. 복수로 내부에 존재하는 종족들을 단수의 민족으로 묶어내어 일계의 일본 인종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은 새로운 국민국가를 창출하기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고모리 요이치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의 상황을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으로 설명한다. 즉 메이지 일본은 당시 러시아제국과의 국경 확정에 있어 서구열강에 의해 식민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에서 문명개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구열강을 모방하는 것에 내재하는 자기식민화를 은폐함으로써 식민지적 무의식을 구조화한 것이다.
메이지 일본은 문명국으로부터 문명국이 아닌 미개국으로 취급당하는 현실을 부정 하기위하여 자신을 식민지적 무의식으로 은폐하면서 주변의 야만을 발견하고 식민화함으로 스스로 문명국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로서 일본은 최초의 야만인으로 아이누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는 러시아와 아이누 사이의 관계에서 외부적으로는 동일 일본인으로 감싸 않는 동화의 정책을 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구토인’이라 명명하며 차별의 정책적 전략을 구사하여 일본형 식민주의의 전형인 동화와 배제의 논리를 구축하였다. 사실상 아이누에 대한 내부 식민의 역사는 메이지 시기 이전 도쿠가와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 이전부터 북쪽 국경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국경은 유동적이었으며 인근의 다인종이 함께 섞여 교역이 이루어지는 무경계의 변방이었다. 8∼9세기 일본 호족들은 혼슈 북부 각지에 거점을 확보하고 지배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누의 선조인 에미시 거주민을 축출하거나 동화시켜 나갔다. 12세기 이후에는 호슈 이남의 야마토인 와진의 이민이 에조치라 부르는 남쪽해안으로 이주가 시작되며 아이누인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여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주민의 범위가 축소되면서 이 지역의 통치자로 가키자키가 군림한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면서 가키자키는 훗카이도 남단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의 이름을 마쓰마에로 개칭한다. 마쓰마에번은 마쓰마에와 아이누인의 생활권인 에조치의 경계에 치안 유지를 위한 둔소을 설치하여 양쪽의 동향을 관리하게 된다. 와진 상인과의 교역은 점차 아이누인의 경제와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1720년 이후 일본의 농업혁명의 영향으로 와진 상인은 농업생산력의 증가를 가져다주는 금비라 불리어지는 청어의 기름 찌꺼기로 만든 비료의 생산을 위해 저임금의 반노예상태로 아이누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된다. 아이누인과 러시아인과의 교역은 큰 규모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쓰마에번은 빈번히 아이누인과 일본 내의 교역권을 독점하여 아이누인의 생활권을 통제함으로 중개 이득을 취하였다. 아이누인은 와진과 마쓰마에번의 이중적인 착취구조에 저항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막부로부터 근대식 화기를 지원받고 있는 마쓰마에번에 패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러시아가 쿠릴·사할린에서의 세력을 강화하게되자 막부는 위기의식과 함께 마쓰마에번과 에조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18세기 중엽 도쿠가와 지식인들 가운데 북방 경계선에 대한 전략적 위기의식이 싹트면서 에조에 대한 식민정책을 통해 해외 팽창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발흥한다. 이러한 식민정책의 근거는 풍부한 천연자원의 개발과 러시아의 남진에 대한 방파제로서의 역할이다. 도쿠가와 지식인들이 북문의 변경지에 대한 경계의식과 더불어 에조에대한 식민화를 추진하고자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806년부터 1807년 기간에 이루어진 사할린과 남부 쿠릴의 에토로프 에서의 와진 교역지에 대한 보복적 군사 도발에 기인한 것이다. 1875년 도쿠카와 말기에 와서는 일본과 러시아는 와진과 선주민 아이누라는 관계를 폐기시키고 협상을 통하여 양국이 각각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분쟁의 소지는 현재까지 여전히 남기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마쓰마에번의 지배층은 아이누 사회에 대하여 차별화 정책을 고수하여 왔다. 이는 그 차이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즉 에조 지역을 외국으로부터가 아닌 일본 내의 타 지역과의 관계를 고립시킴으로 중계권을 독점하여 이권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상인의 이주가 위협적으로 에조 지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변화시키자 막부는 직할통치를 통해 주민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 동화정책에는 두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을 동반한다. 하나는 북방문제의 방어 장치로서의 아누이인의 적개심을 최대한 완화시키고자 와진과 아이누를 동일시 할 용모 예절 의식 등의 신체적 상징을 가시화하는 것과 자원착취를 위해 와진 농업이민자를 증가시키면서 아이누의 생활양식인 말린 청어 산업 등의 어업 주력 산업을 농업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막부는 후자의 정책이 수월하지 않은 정책임을 알게 되자 동화정책을 정신에서 부터가 아닌 두발이나 의복 같은 신체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신체에 부착된 상징물을 통하여 인종적 동일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계층적으로 차별화된 서열구조에 따라 다양한 상징물의 편차가 존재하였던 막부의 사회구조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드러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동화의 과정은 동시에 우열을 내포한 동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표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막부의 동화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메이지유신의 때가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메이지유신 정부는 서구 근대화라는 야심찬 기획아래 1869년 아이누의 땅인 에조치에 개척사를 설치한 후 이 북방도서를 훗카이도로 개명하고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세계를 문명국과 미개국으로 나눌 때 문명국은 미개국의 영토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로 야만, 미개의 땅인 훗카이도는 선주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유할 수 있다는 의미로 그리고 훗카이도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 아이누의 활기찬 교역의 땅은 공백의 땅, 주인 없는 땅의 상징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만들어진 주인 없는 원시의 땅은 메이지 초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천연자원의 개발을 위해 적극적인 식민정책을 펼쳐야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때 메이지 정부는 전직 미국 농무부 장관이었던 호레이스 캐프론의 지도하에 서구의 전문가들을 초정하여 훗카이도 지역에 대한 과학적 지질 조사를 실시한다. 캐프론은 신속한 지역개발을 위해서 서구의 농업기술을 이용한 대규모의 농장을 구축하여 서구형 메이지 유토피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메이지 정부는 훗카이도 개척을 위한 식민정책으로 더욱 철저한 동화정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메이지정부의 식민동화정책은 막부에 의한 신체적 상징물을 통한 질서의 동화가 아니라 생산구조에 따르는 문명의 질서로의 교체가 된다. 이러한 신질서의 핵심은 아이누를 농민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토지는 전통적인 아이누의 공동체적 수렵적 토지소유방식에서 서구의 만국공법적인 법전적 국가 토지 소유방식으로 바꾸어졌다.
메이지 식민주의에 있어 아이누의 정체성은 식민권 밖의 외부인 에게는 일본인이라는 동일성을 부여하고 식민권 안의 내부인 에게는 다른 일본인으로서의 차별성을 부여받는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다. 메이지기의 지식인들에게 아이누인은 일본인과 민족적 기원을 공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아이누 사회를 경제적 생산관계에서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메이지기의 원시사회 기원 신화에서 아이누는 수렵채집 문화의 한 형태로서 일본의 가장 초기에 속하는 조문 문화의 담당자가 된다. 아이누 문화는 가장 순수한 조문 문화로 남겨진다. 하지만 아이누를 일본 역사의 고층에 자리 잡고 있는 원시 사회로 해석함에 있어서의 난점은 아이누 사회를 수렵과 채집사회로 그리고 현재의 메이지 사회를 진화된 농업사회로 규정하는 문제인데 여러 역사적인 고증은 아이누 고대 사회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고도의 농업적인 유제가 발견된다는 것으로 수렵채집의 원시 사회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서 아이누 고대사회의 농법을 원시적인 기술로 묘사하고 메이지 일본인의 농법을 현대적 기술로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고대 아이누의 농법과 현대의 농법이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 큰 차이가 없는 동일한 농법이 사용되었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소규모의 화전 농업이 이루어진 것은 어업과 수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사회에 적합한 형태로 특이한 발전의 형태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누의 농업이 에도시기 동안 점차 소멸되어지는데 이는 와진의 어업진출이 아이누의 농업노동력을 강제적으로 축출하여 어업노동력으로 점차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누 사회의 자급자족 경제는 무차별적인 와진의 공격적인 자원 착취로 인하여 붕괴되어 갔다. 메이지기의 아이누 사회에 대한 기원신화는 메이지 근대의 상상물이다. 그것은 현실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미개를 문명화한다는 메이지 식민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기능적 의미로서만 존재하였던 허구이었다.
일본식민정책학 계보의 출발점을 삿뽀로농학교를 거점으로 한 ‘훗카이도 대학파’로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의미심장한 관점이다. 초기의 식민정책학은 메이지 정부의 훗카이도 개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농업개발정책의 한 과정으로서 과학적 식민경영학이라기 보다는 농업적인 척식학-척식이란 국외의 영토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을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함, 개척하여 자국민을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의 성격을 지니면서 진행되었다. 삿뽀로농학교는 1876년 훗카이도에 설치된 통치기구인 개척사의 관립부설학교로서 내국 식민화에 대한 연구와 인재양성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삿뽀로농학교는 창립과 더불어 개척자 정신의 함양을 목표로 하여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해외로의 직업진출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졸업생들의 해외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니토베 이나조였다.
니토베 이나조는 1901년 대만 고토 신페이 민정장관에 의해 식산국장 직무대리로 취임한 후 「당업개량의견서」기획안을 대만 총독부에 제출하여 당업을 중심으로 한 농업 정책을 구체화하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재임 3년 기간동안 그의 농정개혁 프로그램에 삿포로농학교의 후배들을 대거 참여시켰다.이러한 연유로 삿뽀로농학교의 졸업생들의 다수가 진출하였던 대상 국가는 주로 대만이었다. 1896년에는 3명, 1907년에는 20명, 1912년에는 35명, 1918년에는 64명으로 늘었고 1939년에는 136명이나 되었다.
일본 근대농학연구의 주요한 추진기관은 농사시험장이었다. 농사시험장은 농산물 전반의 증식개량을 위해 과학적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응용실험을 통해 농민에게 근본적인 품종개량을 장려하는 연구기관이었다. 농사시험장은 매해 각각의 사업의 실행 정황과 실험 성적을 출판하였고 특정사업의 조사와 연구 그리고 성과 등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였다. 일본은 1890년대 후반부터 각 부와 현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였고 농사개량을 위한 다양한 시험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대만에도 이러한 농사시험장을 총독부산하에 두고 농정을 시행함으로 대만에서는 가장 빠르게 근대 농학연구의 선도적 기관이 되었고 삿보로계가 리더로서 자신들의 전공을 심화시키는 무대가 되었다.
삿뽀로농학교는 근대일본에서 식민학을 최초로 개설한 고등교육기관이다. 1887년에는 ‘식민책’, 1889년 ‘식민사’로 개명 그리고 1896년에는 ‘식민론’으로 개칭된 교과 강좌 식민정책학 강의는 1890, 1893, 1896∼1904 까지는 사토 쇼스케가 1894, 1895년도에는 니토베 이나조가 1905, 1906년도에는 다카오카 구마오가 각각 맡았었다. 식민학 강좌가 개설되자 서구의 식민사상이 학생들의 사고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삿뽀로농학교 초기 식민정책학의 선구적 연구자는 사토 쇼스케 니토베 이나조, 그리고 다카오카 구마오로서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경력의 연구자들이다.
쇼스케는 삿뽀로농학교 제1기로서 1882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독일역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보호무역론 경제학자 리처드 엘리로부터 경제학을 사사받아 삿뽀로농학교에 독일적인 농학과 경제학을 도입하였다. 그는 1886년 삿뽀로농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1899년 처음으로 일본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에는 삿뽀로농학교가 훗카이도 제국대학으로 개편 되면서 총장에 취임하여 훗카이도대학 육성의 아버지로 불리어졌던 인물이다. 그의 식민론의 특징은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식민론’이다. 즉 일본의 좁은 국토면적에 비해 농가인구는 과잉상태가 되어 농촌을 궁핍하게 함으로 이러한 농촌문제의 해결방안은 낙토인 훗카이도로 이민자 인구를 증가시켜 독립적인 자작농을 형성해야 한다는 내국 식민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1900년경부터는 내국식민론이 해외식민론으로 바뀌면서 러일전쟁 중 해외이주를 주장한다.
‘식민을 번성시켜 과잉인구를 해외로 이주시켜야 한다… 식민 머리수를 늘려 다수로 하여금 그 지방에 우리 국민의 세력을 확립시켜야 한다…아무튼 둥근 지구 곳곳에 우리 야마토민족의 식민지를 개척하는 일은 우리의 국권확장의 근거를 만드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로 우리나라의 부력을 증진시킴에 막대한 효과가 있다…이에 성공하지 못하는 나라는 국부를 증진시킬 수 없고, 세계의 열패자가 된다…세계열강의 반열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열심히 식민정책에 힘써야 한다.’
사토의 식민정책론의 전환에는 러일전쟁 전후로 한 그의 1903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친 조선과 만주의 시찰 후에 이루어졌다. 사토는 조선 방문에 대한 소감을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하고 풍물은 처참하다’, ‘인민은 수세기에 걸친 극심한 악정과 압박으로 생활은 최악이다’, ‘다행이도 우리나라와 병합 이후 선정이 착착 시행되어 인민의 행복이 넘쳐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방문 후 사토는 그의 해외식민론을 구체화하기 위해 삿뽀로농학교의 졸업생들을 한국통감부로 파견하여 소작제 농장경영을 실행하였다. 

우리에게는 얼마많큼의 땅이 필요한가? — 제국/식민지와 무사도

우리에게는 얼마많큼의 땅이 필요한가? — 제국/식민지와 무사도



제국/식민지와 무사도

1. 제국일본의 무사도 동원 이데올로기: 사무라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개혁의 속도를 가속화 시키면서 천황제 중심의 이데올르기를 근본으로 하여 중압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복구하였고 특히 서구의 신군사무기체를 빠르게 구축함으로서 아시아 대륙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적 모델을 실험하였다.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에서 명치유신까지 약 700년간은 직 간접으로 지배계급으로서의 영주와 천황 그리고 무사계급인 사무라이와의 관계로서 권력관계가 규정되어져 왔다. 중세 막부체제의 성립 그리고 메이지 혁명의 근대화를 추진 시켰던 주도세력들이 사무라이 출신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평지가 협소한 산지지형을 이루며, 대륙에서 볼 수 있는 광대한 구조성의 평탄지역은 볼 수 없다.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생산 활동의 무대로 삼아온 평탄지는 산간의 분지나 하천의 퇴적 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곡저평야 그리고 충적평야 등으로서, 좁은 일본열도 안에 점점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점이 분포한 평지를 중심으로 막부체제의 특징인 270여 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인 ‘번’으로 구성되어지는데 이는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로서,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킨다. 오늘날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 그 밑의 가신들을 번사라고 부르지만 실제 그 당시에는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 호칭을 붙이거나 본래 관직명을 부름으로써 번주를 호칭한다. 에도 시대부터 ‘폐번치현’ 직전까지 존재했던 번들은 보통 ‘에도 300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어 졌지만 실제 존재했던 번들의 수는 500여개에 이르지만 신설, 폐지 합병을 거듭하면서 평균적으로 270개의 번이 열도에 분포되어 있었다. 에도시대에는 국가를 뜻하는 ‘구니’가 ‘번’을 의미했다. 그 당시에는 통일국가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으로서 도쿠가와막부에 의해 전국통일은 이루어 졌지만, 그것은 막부의 수장인 쇼군과 번의 영주인 다이묘의 군사적 관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막부는 약 800만 석 규모의 직할영지에 대해서만 징세권과 지배력이 있었고 각 지방, 곧 번에 대한 징세권과 주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영주에게 전권이 주어져있었다. 다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각 번은 그 규모에 따라 군사동원의 의무만 있었다. 막부의 수장인 쇼군을 정이대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납세와 국방의 의무라 본 다면 번의 주민은 막부에 대해서 국방의 의무만 있었고 납세의 의무는 전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번에 대해서만 부담했다. 번의 주민은 영주의 승인 없이는 번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일반 주민에게 번은 곧 국가였다. 각각의 번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번의 지역을 벗어나려면 번청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번의 경계지점에는 ‘세키쇼’라는 검문소가 있고 다른 번으로 갈 때는 지금의 여권에 해당하는 ‘데가타’가 있어야 통과 할 수 있었다. 무단으로 번의 경계를 넘을 때는 탈번의 죄를 짓게 되고 영주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며 사형에 처할 정도의 무거운 범죄행위가 되었다.
사무라이란 기본적으로 번주에 의한 자기 무장세력 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부담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집단이다. 근대국가의 군인이 국가의 중앙 행정관청으로 부터 무기를 부여 받아 무장하고 국고로부터 급료를 받는 관료적이고 타율적인 무장 집단이라고 한다면, 사무라이란 지방의 번주의 재정으로 전투를 위해 농민으로부터 분리된 전문적인 전사 집단을 가리킨다. 본래 이러한 전사 집단은 고대국가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의 실력자가 자기 집단을 방어하기위해 무장하였던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 탁월한 사무라이의 지도 아래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생활규율과 에토스를 가지고 집단을 형성하여 중앙화된 율령 국가의 바깥쪽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천황이나 귀족들에게는 그러한 무장 세력이 사병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그들은 독립적으로 장원을 개척하여 중앙의 귀족이나 승려들에게 기부하면서 조건적으로 징세권이나 재판권의 중재로부터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치외법권적인 무장집단간의 헤게모니 각축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기까지 전국적인 동란을 거쳐 1615년 도요토미의 붕괴와 도쿠가와에 의한 통일과 전국지배의 확립에 이르게 되는데, 사무라이들에 의한 일본의 지배는 12세기말 가마쿠라 막부에서 막번체제에 이르기기까지 수백년의 시기를 거쳐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무라이에 의한 장기적인 제도의 완성이 근대의 메이지 혁명까지 이르러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사도라는 말은 전국시대 말기와 근세 초기에 걸쳐 무장들에 의해 사용되어 지던 용어로서 가훈류의 형태로 전승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일본과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된 것은 1899년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잠시 체류하면서 영문으로 집필한 퀘이커 신자이며 미국과 독일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나 있었고 1920년대 국제연맹에서 중역을 맡았던 일본의 국체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인 니토베 이나조의 ‘일본의 영혼, 무사도’가 저술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에 참여하고 4년 뒤에 저술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5년 뒤에 러일전쟁을 일으키었다. 두 차례의 일본인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해외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무사도’는 일본인의 전쟁에서 승리한 정신력의 우월성의 골격을 설명하는 해설서로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근대일본은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비서구권의 세계에서 유례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는 국가이었다. 니토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사이에서 무사도와 기독교적 기사도를 대비하면서 일본을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 둔다. 그는 여기서 서구인들이 설정한 동양에서 일본을 분리해내어서 서구와 일본을 동등하게 위치 지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일본의 위상을 이웃 나라인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일본을 분리해내어 ‘인류가 고안해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인 무사도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등 국민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 시킨다. 이 책에서 니토베는 외국인들에게 유럽의 역사와 문학을 소재로 비교하면서 일본인의 정신생활을 중심을 설명한다. 니토베에게 있어 무사도란 무사가 그 직업에서 또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 이해하였는데 무사의 법도, 즉 무인계급의 신분에 수반하는 의무이다. 그에게 있어 무사도는 현재에도 과도적인 일본의 지도원리이며, 또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힘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원동력, 청일전쟁에서 나타난 불굴의 인내와 용기도 무사도의 유산이다. ‘일본인이 외국으로부터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되는 것을 못 견디는 명예심’이 무사도의 발현에 따른 결과이다. 러일전쟁 후 문명개화의 반동으로 일본의 복고주의가 대중화될 즈음에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동양의 정신문명 그 가운데 일본의 특수성의 산물인 일본정신 으로 무사도를 소개한 이가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원로이며 천황제 국가의 이념적 틀을 준비한 관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 이다. 그는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비판하면서 무사도에는 경전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무사도의 지적계보 중에서 야마다 소코의 ‘무교소학’을 가리키며 일본의 전통과 사상에 기원을 두지 않은 니토베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단순히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연속적인 승리를 기초로 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으로서의 자의식의 통합을 강조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서양과 동양의 대등성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서구의 역사와 철학이나 문학의 설명이 필요치 않고 무사도는 오히려 야마가 소코로부터 시작해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거쳐서 막부말기의 지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으로 이어오다가 메이지 군인을 통해 발현되는 일본민족의 정통성안에서 그 실천적인 가치를 이끌어 낸다. 무사도란 실행에 따르는 일종의 정신훈련이며 일본고유의 상무기상과 유교, 선 이 삼자가 융합 조합되어 발전된 것으로서 그 시원과 운명을 일본민족과 함께하는 초역사적인 것이다. 금후 일본의 도덕을 정립하는 방식은 반드시 무사도의 정신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노우에는 무사도를 민족과 함께하는 역사적 실체로 봄으로서 도쿠카와 시대의 무사의 생활윤리로 기능하였던 무사도는 메이지유신에서 국민도덕으로 변용되어야한다. 각 번의 번사가 주군에 대하여 충절을 지키던 도투가와 시대의 무사도는, 명치국가의 성립과 함께 무사의 조직이 군대의 조직으로 바뀌었으므로 군대는 천황에 대해 충절을 지키는 무사도가 되어야한다. 이와 같이 이노우에게 있어서 무사도는 번과 주군에 대한 충절로서의 윤리는 천황제국가에서 국민도덕인 천황에 대한 충성의 윤리로 재정립된다.
이노우에 이후 무사도 담론은 총력전 체제하의 기능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이는 와쓰지 데쓰로이다. 와쓰지 데쓰로는 1980년대의 신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서 조명 받은 인물로서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서구철학자에도 정통해 있는 도쿄제국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와쓰지는 전전 일본인문학의 총제적 대표주자로 불리 우기도 한다. 그는 초기작인 ‘니체연구’(1914)와 ‘시렌 키에르케고르’(1915)를 통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니체나 키에르케고르는 유럽의 대표적인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자로 ‘초인’ 그리고 ‘단독자’등의 주요개념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러한 명성을 얻고 5년 만에 ‘일본고대문화’(1920)에서 기존의 실존주의적 연구에서 전향하여 ‘천황이 폭압을 쓸 것도 없이 모든 백성의 마음을 표현했던 군신일체의 무비의 고대 국체’를 찬양했다.
2. 식민지 조선의 무사도 동원 이데올로기: 화랑도
한국인의 정신을 표상하는 대표적인것 하나는 화랑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열망하였던 대한제국 애국계몽기의 이상적인 국민상이라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화랑을 개인의 도덕적 완성의 모델이자 국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국민의 자질로서 소환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화랑은 근대 한국의 자기구성 과정에서 100여 년 동안 변주되며 만들어진 전통표상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기에 발명되기 시작한 화랑도 이데올로기는 고정된 형태로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자들의 조선적인 고유한 것에 대한 구성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민족 이데올로기와 식민 말기의 총동원 체제하에서의 동원 이데올로기로서의 화랑도에 대한 표상은 그 의의를 달리하고 있다.
화랑도에 대한 담론의 문제는 화랑에 대해 어떤 것을 논하기 전에 화랑 그 자체의 실체 즉 화랑의 실재성에 관한 문제이다. 화랑의 존재를 확인 해 줄 수 있는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아직까지는 문헌학적 검증이 이루어지 않은 가설의 단계에 있다. 이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540년부터 681년까지 기간 동안의 전기이다.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이 문헌에 대한 해석은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의 견해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일본제국 시대 관 학자들의 식민사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강한 민족, 자랑스러운 역사의 실증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사를 탄생시켰던 학자들은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역사소설로 폄하하면서 위작으로 판정하였다. 다른 하나는 관학사학자들의 민족사학 그리고 실증사학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한국사의 원류를 내물왕 이전의 신라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화랑세기’를 진본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화랑세기의’ 위작이냐 진본이냐의 시비를 떠나서 화랑에 대한 전승 문헌은 단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 기사와 ’삼국유사의 권3, 미륵선화 미시랑 전자사 조‘ 기사와 함께 두 기사만이 원본으로 남아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413-491)은 국토를 넓혀 북으로는 부여성과 요동성을 포함한 만주일대를 지배했고, 남으로는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을 점령했다. 수도를 통구에서 평양으로 옮긴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게도 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리하여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523-554)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기에 이른다(551). 그러나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독점하게 되자 백제와는 또 다시 적대관계가 된다. 이러한 시점에 진흥왕은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주체성의 확립된 청소년의 양성을 목적으로 화랑제도를 조직하게 된다. 고구려의 군사대국과 백제의 문화대국에 맞서 후발 주자인 신라의 진흥왕은 남쪽의 가야을 병합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등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황륭사를 건립하여 호국불교의 이념을 확립하여 국기를 다졌다. 특히 진흥왕은 가야의 우륵으로 하여금 전통 가무 예술을 정립하고 이러한 전통을 승계할 목적으로 화랑제도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에는 화랑의 전말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겨있다.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보다 먼저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놀게 하며 그들의 행실을 보아서 이를 등용하려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인을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라 하였고, 하나는 준정이라 하였다. 그들은 그 무리를 300여명이나 모았는데, 두 여인은 차츰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게 되었다. 준정은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독주를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그를 이끌어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나 사건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그 무리들은 실망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락을 즐기고,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랑을 하였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 좋은 사람을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말하기를 ‘어린 재상과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뛰어난 장사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모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하는데,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 하였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실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라’ 하였고, 당나라 연호징이 ‘신라국기’에서 말하기를 ‘귀인의 자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섬겼다’고 하였다”
대한 제국기의 여러 문서들을 통해 볼 때, 이때의 지식인들에게 상무정신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공의 장에서 담론화 되고 있었다. 1901년과 1904년의 황성신문에 실린 논설문과 기고문에서는 “문을 숭상하고 무을 숭상하지 않는 민은 필히 멸망할 것”을 주장하거나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길은 상무로써 정신을 삼고 ‘유혈’로써 주의를 삼고, 모험으로써 성질을 삼고, ‘파괴’로써 방침을 삼는데 있다”고 하여 상무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무정신을 강조하는 기고문에는 상무정신의 모범적인 예로 일본의 무사도를 들고 있다. 박은식의 경우 서우학회지인 ‘서우’에서 조선의 문을 숭앙하고 무를 천시하는 풍조가 극에 달해 조선은 남의 노예가 되는 처지에 놓였으나 일본의 경우에는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무사도와 같은 상무적 국풍이 청국과 러시아에서 승전할 수 있었다‘고 논술하였다. 1906년 6월 8일 황성신문 서점광고란에 양계초의 ’중국의 무사도‘ 그리고 ’일본유신세년사‘,’일본유신활력사‘,’일본무비교육‘ 등의 책명이 실려 있었고 이러한 책들을 통해 일본의 무사도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906년 5월 황성신문에는 ’일본유신삼십년사‘ 제1회 학술편 제4장의 번역문이 실렸고 이 글의 논지는 명치유신 이후에도 무사도가 쇠미한 것 같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07년 2월의 황성신문에 실린 ’정신과 감각‘이라는 논설에서는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의 발전은 서양으로부터의 신문화나 신기술이 아니라 무사도의 정신에 기인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의 유학생 최석하도 ’조선혼‘이란 논설에서 양계초가 ’중국혼‘을 그리고 무사도를 숭상하는 일본에서 대화혼을 강조한 것처럼 ’조선혼‘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한국 근대 내셔널리즘의 정초자이면서 무정부주의자였던 단재 신채(1880-1936)는 1920년경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여 단군조선 2000년의 정치제도, 종교, 철학, 문학, 풍습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종교와 관련해서 선교와 화랑을 언급한다. ‘단군은 선인의 시조이고 선인은 곧 우리의 국교이며, 우리의 무사도며, 우리 민족의 넋이며 정신이며 우리 국사의 꽃’ 이라고 언급하면서 선교를 화랑의 연원이고 조선의 무사도의 연원임을 강조한다. 1920년경에 쓴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화랑은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 선언하고 이러한 화랑정신이 나말여초의 유교도에 잔멸을 당하여 그 역사의 형체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채호는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쓴 ‘조선상고사’에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 책의 제8편 제1장 ‘신라의 발흥’에서 화랑을 신라가 발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으로 보고 후세의 역사는 한문화의 지나친 사대주의로 인하여 조선의 중국화로 화랑의 정신이 잃어져 가는 것으로 보며 통단한다. 그러므로 단재는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짓 이라고 질타를 가한다. 신라의 화랑은 이제 무사도에서 벗어나 조선에 까지 확장되어 조선을 조선되게 하여온 것으로서 평가를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화랑도에 대한 인식은 점차 유가나 불가의 수준과 같은 낭가로 발전해 나아가지만 낭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신채호의 기본적인 사상적 구성이 양계초의 중국사상사 구성에서 보여 지는 ‘중국지무사도’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조선의 무사혼론은 양계초의 중국의 무사도론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진다. 신채호의 화랑도 논의는 1890년대 이후에 동아시아의 담론으로 부각된 일본의 무사도론과 이것에 도전을 받은 양계초의 중국 무사도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것 이다. 양계초는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상무정신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그는 1904년 ‘중국지무사도’라는 그의 책에서 중국사에 있어 춘추 전국시대를 가장 무사도가 왕성했던 시기로 보나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유교 국교화로의 과정에서 무사도가 쇠퇴하게 되었다는 논지를 핀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 ‘중국혼안재호’라는 글에서는 사라져버린 무사도를 회복시켜 중국의 혼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는 삼국에 국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었다. 이는 일본의 경우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측면에서 국민의 동원이 필요하였고 무사도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1940년대부터 조선은 제국 일본의 한 지방으로 통합되면서 조선의 문화도 제국의 문화 안으로 서서히 통합되어 간다. 화랑도는 더 이상 일본의 무사도와 구별되는 조선 고유의 표상이 아니라 일본과 조선이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서 기록된다. 일제는 국가총동원과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충성을 위해 일본의 무사도와 한국의 화랑도는 그 기원에 있어 하나가되어 지고 공통된 기원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서 고대의 일본과 조상의 관계가 재구성되고 이러한 신화를 통하여 조선은 현실적으로나 상상의 영역에서도 일본제국의 동일자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고대 신라무사 화랑은 대동아 전장으로 불려진다. 1943년 10월20일에는 ‘반도인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의 소환은 각계의 명사들이 신문을 통해 혹은 직접 강연에서 화랑도 이데올로기를 통해 학병의 출진을 독려하게 된다. 정운형이 엮은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는 징병에 대한 당시의 공통된 인식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주체화’의 논리‘와 ’숭무의 논리‘로 압축할 수 있다. 무기가 주어지는 것은 국민적 평등의 구체적인 실현이며, 조선의 멸망이 유교의 숭문에서 망하게 된 것이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나약한 문이 아니라 무인 화랑도의 정신 이라고 말한다. 유명인사 중 최남선은 ’매일신보‘에 다가 시국에 직면하여 고민을 물어오는 조선의 청년들이 많다고 전제하고 ‘임전무퇴’ 의 계율을 도덕적 명령으로 제시한다. 화랑 오계 중 임전무태의 강조는 임전무태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하고 죽음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안재홍도 ‘1943년 11월 15일자의 ’매일신보‘, ‘특집: 학도에게 고한다’에서 ‘우리 역사는 고려 말엽부터 숭문천무의 사상이 반도를 휩쓸어 이조에 들어와서는 더욱더 그 경향이 농후하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무사정신을 결한 이조 중엽의 우리 선조를 원망하기 전에 제군은 멀리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상기하라’고 학도병을 지원을 독려하였다. 또한 1943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 ‘특집: 학도에게 고한다’에서도 조만식은 ‘이 땅에도 장구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무인의 늠름한 대오가 다시 소생되었다. 제군의 선배된 우리들이 그처럼 숙원하고 고대하던 무장반도가 지금 제군의 세대에 이루어지려 함을 목전에 보게 되었으니 이 이상 더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무인의 재현‘,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제군의 광영, 반도의 영예를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학도병을 권유한다. 마찬가지의 권유문도 1943년 11월 8일자에서도 양주삼도 ‘반도의 문약을 일소하고 무의 전통을 이곳에 창조’하자고 쓰고 있다. 이러한 지배집단과 사회명사들의 화랑을 활용한 동원 이데올로기의 권유문을 통해 수많은 학병들은 실제로 화랑도의 구현하기위한 신라의 청년처럼 전장으로 나갔다. 이러한 학도병 동원 이데올로기로 쓰였던 저명인사들의 화랑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원의 장애였던 주부들에게도 향하게 된다. 그 당시의 매일신보의 한 특집호에서는 반도 여성이 ‘상무적 교양에 힘써 국군의 어머니로서 손색없는 총후여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과 출진 학도와 어머니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신라시대의 화랑의 정신과 그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학도에게 전한다. 이병도는 신라의 어머니 교육의 정형으로 화랑 원술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을 군국의 어머니의 상으로 주조한다. 원술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짧은 이야기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당병과 싸우다 패해 적진에 돌진해 죽으려다 부하의 만류로 살아 돌아오자 김유신이 이를 수치로 여기고 원술을 평생 만나주지 않고 죽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찾아간 원술을 그 어머니인 지소여인도 역시 자신도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이다. 이광수의 ’원술의 출정‘은 위의 기록에 원술의 정혼녀 아좌희라는 인물을 추가한 단편으로서 삼국사기의 서사를 통해 학병들에게는 임전무퇴, 조선반도의 여인들은 지소부인처럼 상무적 교양을 갖춘 국군의 어머니 그리고 아내는 화랑의 아내 아좌지 처럼 자식과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총력전에 가담하는 총후부인이 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