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뽀로농학과 식민

일본의 식민정책학의 기초는 내부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다. 일본의 식민공학은 일본 열도에 복수로 존재하던 선주민들을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습득된 식민지 경영에서 축적된 것이다. 이는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이인종들을 한 국민으로 통합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와 연동되어 진행된 것이다. 복수로 내부에 존재하는 종족들을 단수의 민족으로 묶어내어 일계의 일본 인종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은 새로운 국민국가를 창출하기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고모리 요이치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의 상황을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으로 설명한다. 즉 메이지 일본은 당시 러시아제국과의 국경 확정에 있어 서구열강에 의해 식민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에서 문명개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구열강을 모방하는 것에 내재하는 자기식민화를 은폐함으로써 식민지적 무의식을 구조화한 것이다.
메이지 일본은 문명국으로부터 문명국이 아닌 미개국으로 취급당하는 현실을 부정 하기위하여 자신을 식민지적 무의식으로 은폐하면서 주변의 야만을 발견하고 식민화함으로 스스로 문명국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로서 일본은 최초의 야만인으로 아이누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는 러시아와 아이누 사이의 관계에서 외부적으로는 동일 일본인으로 감싸 않는 동화의 정책을 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구토인’이라 명명하며 차별의 정책적 전략을 구사하여 일본형 식민주의의 전형인 동화와 배제의 논리를 구축하였다. 사실상 아이누에 대한 내부 식민의 역사는 메이지 시기 이전 도쿠가와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 이전부터 북쪽 국경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국경은 유동적이었으며 인근의 다인종이 함께 섞여 교역이 이루어지는 무경계의 변방이었다. 8∼9세기 일본 호족들은 혼슈 북부 각지에 거점을 확보하고 지배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누의 선조인 에미시 거주민을 축출하거나 동화시켜 나갔다. 12세기 이후에는 호슈 이남의 야마토인 와진의 이민이 에조치라 부르는 남쪽해안으로 이주가 시작되며 아이누인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여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주민의 범위가 축소되면서 이 지역의 통치자로 가키자키가 군림한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면서 가키자키는 훗카이도 남단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의 이름을 마쓰마에로 개칭한다. 마쓰마에번은 마쓰마에와 아이누인의 생활권인 에조치의 경계에 치안 유지를 위한 둔소을 설치하여 양쪽의 동향을 관리하게 된다. 와진 상인과의 교역은 점차 아이누인의 경제와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1720년 이후 일본의 농업혁명의 영향으로 와진 상인은 농업생산력의 증가를 가져다주는 금비라 불리어지는 청어의 기름 찌꺼기로 만든 비료의 생산을 위해 저임금의 반노예상태로 아이누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된다. 아이누인과 러시아인과의 교역은 큰 규모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쓰마에번은 빈번히 아이누인과 일본 내의 교역권을 독점하여 아이누인의 생활권을 통제함으로 중개 이득을 취하였다. 아이누인은 와진과 마쓰마에번의 이중적인 착취구조에 저항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막부로부터 근대식 화기를 지원받고 있는 마쓰마에번에 패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러시아가 쿠릴·사할린에서의 세력을 강화하게되자 막부는 위기의식과 함께 마쓰마에번과 에조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18세기 중엽 도쿠가와 지식인들 가운데 북방 경계선에 대한 전략적 위기의식이 싹트면서 에조에 대한 식민정책을 통해 해외 팽창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발흥한다. 이러한 식민정책의 근거는 풍부한 천연자원의 개발과 러시아의 남진에 대한 방파제로서의 역할이다. 도쿠가와 지식인들이 북문의 변경지에 대한 경계의식과 더불어 에조에대한 식민화를 추진하고자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806년부터 1807년 기간에 이루어진 사할린과 남부 쿠릴의 에토로프 에서의 와진 교역지에 대한 보복적 군사 도발에 기인한 것이다. 1875년 도쿠카와 말기에 와서는 일본과 러시아는 와진과 선주민 아이누라는 관계를 폐기시키고 협상을 통하여 양국이 각각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분쟁의 소지는 현재까지 여전히 남기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마쓰마에번의 지배층은 아이누 사회에 대하여 차별화 정책을 고수하여 왔다. 이는 그 차이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즉 에조 지역을 외국으로부터가 아닌 일본 내의 타 지역과의 관계를 고립시킴으로 중계권을 독점하여 이권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상인의 이주가 위협적으로 에조 지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변화시키자 막부는 직할통치를 통해 주민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 동화정책에는 두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을 동반한다. 하나는 북방문제의 방어 장치로서의 아누이인의 적개심을 최대한 완화시키고자 와진과 아이누를 동일시 할 용모 예절 의식 등의 신체적 상징을 가시화하는 것과 자원착취를 위해 와진 농업이민자를 증가시키면서 아이누의 생활양식인 말린 청어 산업 등의 어업 주력 산업을 농업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막부는 후자의 정책이 수월하지 않은 정책임을 알게 되자 동화정책을 정신에서 부터가 아닌 두발이나 의복 같은 신체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신체에 부착된 상징물을 통하여 인종적 동일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계층적으로 차별화된 서열구조에 따라 다양한 상징물의 편차가 존재하였던 막부의 사회구조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드러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동화의 과정은 동시에 우열을 내포한 동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표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막부의 동화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메이지유신의 때가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메이지유신 정부는 서구 근대화라는 야심찬 기획아래 1869년 아이누의 땅인 에조치에 개척사를 설치한 후 이 북방도서를 훗카이도로 개명하고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세계를 문명국과 미개국으로 나눌 때 문명국은 미개국의 영토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로 야만, 미개의 땅인 훗카이도는 선주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유할 수 있다는 의미로 그리고 훗카이도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 아이누의 활기찬 교역의 땅은 공백의 땅, 주인 없는 땅의 상징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만들어진 주인 없는 원시의 땅은 메이지 초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천연자원의 개발을 위해 적극적인 식민정책을 펼쳐야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때 메이지 정부는 전직 미국 농무부 장관이었던 호레이스 캐프론의 지도하에 서구의 전문가들을 초정하여 훗카이도 지역에 대한 과학적 지질 조사를 실시한다. 캐프론은 신속한 지역개발을 위해서 서구의 농업기술을 이용한 대규모의 농장을 구축하여 서구형 메이지 유토피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메이지 정부는 훗카이도 개척을 위한 식민정책으로 더욱 철저한 동화정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메이지정부의 식민동화정책은 막부에 의한 신체적 상징물을 통한 질서의 동화가 아니라 생산구조에 따르는 문명의 질서로의 교체가 된다. 이러한 신질서의 핵심은 아이누를 농민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토지는 전통적인 아이누의 공동체적 수렵적 토지소유방식에서 서구의 만국공법적인 법전적 국가 토지 소유방식으로 바꾸어졌다.
메이지 식민주의에 있어 아이누의 정체성은 식민권 밖의 외부인 에게는 일본인이라는 동일성을 부여하고 식민권 안의 내부인 에게는 다른 일본인으로서의 차별성을 부여받는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다. 메이지기의 지식인들에게 아이누인은 일본인과 민족적 기원을 공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아이누 사회를 경제적 생산관계에서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메이지기의 원시사회 기원 신화에서 아이누는 수렵채집 문화의 한 형태로서 일본의 가장 초기에 속하는 조문 문화의 담당자가 된다. 아이누 문화는 가장 순수한 조문 문화로 남겨진다. 하지만 아이누를 일본 역사의 고층에 자리 잡고 있는 원시 사회로 해석함에 있어서의 난점은 아이누 사회를 수렵과 채집사회로 그리고 현재의 메이지 사회를 진화된 농업사회로 규정하는 문제인데 여러 역사적인 고증은 아이누 고대 사회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고도의 농업적인 유제가 발견된다는 것으로 수렵채집의 원시 사회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서 아이누 고대사회의 농법을 원시적인 기술로 묘사하고 메이지 일본인의 농법을 현대적 기술로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고대 아이누의 농법과 현대의 농법이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 큰 차이가 없는 동일한 농법이 사용되었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소규모의 화전 농업이 이루어진 것은 어업과 수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사회에 적합한 형태로 특이한 발전의 형태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누의 농업이 에도시기 동안 점차 소멸되어지는데 이는 와진의 어업진출이 아이누의 농업노동력을 강제적으로 축출하여 어업노동력으로 점차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누 사회의 자급자족 경제는 무차별적인 와진의 공격적인 자원 착취로 인하여 붕괴되어 갔다. 메이지기의 아이누 사회에 대한 기원신화는 메이지 근대의 상상물이다. 그것은 현실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미개를 문명화한다는 메이지 식민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기능적 의미로서만 존재하였던 허구이었다.
일본식민정책학 계보의 출발점을 삿뽀로농학교를 거점으로 한 ‘훗카이도 대학파’로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의미심장한 관점이다. 초기의 식민정책학은 메이지 정부의 훗카이도 개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농업개발정책의 한 과정으로서 과학적 식민경영학이라기 보다는 농업적인 척식학-척식이란 국외의 영토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을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함, 개척하여 자국민을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의 성격을 지니면서 진행되었다. 삿뽀로농학교는 1876년 훗카이도에 설치된 통치기구인 개척사의 관립부설학교로서 내국 식민화에 대한 연구와 인재양성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삿뽀로농학교는 창립과 더불어 개척자 정신의 함양을 목표로 하여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해외로의 직업진출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졸업생들의 해외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니토베 이나조였다.
니토베 이나조는 1901년 대만 고토 신페이 민정장관에 의해 식산국장 직무대리로 취임한 후 「당업개량의견서」기획안을 대만 총독부에 제출하여 당업을 중심으로 한 농업 정책을 구체화하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재임 3년 기간동안 그의 농정개혁 프로그램에 삿포로농학교의 후배들을 대거 참여시켰다.이러한 연유로 삿뽀로농학교의 졸업생들의 다수가 진출하였던 대상 국가는 주로 대만이었다. 1896년에는 3명, 1907년에는 20명, 1912년에는 35명, 1918년에는 64명으로 늘었고 1939년에는 136명이나 되었다.
일본 근대농학연구의 주요한 추진기관은 농사시험장이었다. 농사시험장은 농산물 전반의 증식개량을 위해 과학적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응용실험을 통해 농민에게 근본적인 품종개량을 장려하는 연구기관이었다. 농사시험장은 매해 각각의 사업의 실행 정황과 실험 성적을 출판하였고 특정사업의 조사와 연구 그리고 성과 등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였다. 일본은 1890년대 후반부터 각 부와 현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였고 농사개량을 위한 다양한 시험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대만에도 이러한 농사시험장을 총독부산하에 두고 농정을 시행함으로 대만에서는 가장 빠르게 근대 농학연구의 선도적 기관이 되었고 삿보로계가 리더로서 자신들의 전공을 심화시키는 무대가 되었다.
삿뽀로농학교는 근대일본에서 식민학을 최초로 개설한 고등교육기관이다. 1887년에는 ‘식민책’, 1889년 ‘식민사’로 개명 그리고 1896년에는 ‘식민론’으로 개칭된 교과 강좌 식민정책학 강의는 1890, 1893, 1896∼1904 까지는 사토 쇼스케가 1894, 1895년도에는 니토베 이나조가 1905, 1906년도에는 다카오카 구마오가 각각 맡았었다. 식민학 강좌가 개설되자 서구의 식민사상이 학생들의 사고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삿뽀로농학교 초기 식민정책학의 선구적 연구자는 사토 쇼스케 니토베 이나조, 그리고 다카오카 구마오로서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경력의 연구자들이다.
쇼스케는 삿뽀로농학교 제1기로서 1882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독일역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보호무역론 경제학자 리처드 엘리로부터 경제학을 사사받아 삿뽀로농학교에 독일적인 농학과 경제학을 도입하였다. 그는 1886년 삿뽀로농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1899년 처음으로 일본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에는 삿뽀로농학교가 훗카이도 제국대학으로 개편 되면서 총장에 취임하여 훗카이도대학 육성의 아버지로 불리어졌던 인물이다. 그의 식민론의 특징은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식민론’이다. 즉 일본의 좁은 국토면적에 비해 농가인구는 과잉상태가 되어 농촌을 궁핍하게 함으로 이러한 농촌문제의 해결방안은 낙토인 훗카이도로 이민자 인구를 증가시켜 독립적인 자작농을 형성해야 한다는 내국 식민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1900년경부터는 내국식민론이 해외식민론으로 바뀌면서 러일전쟁 중 해외이주를 주장한다.
‘식민을 번성시켜 과잉인구를 해외로 이주시켜야 한다… 식민 머리수를 늘려 다수로 하여금 그 지방에 우리 국민의 세력을 확립시켜야 한다…아무튼 둥근 지구 곳곳에 우리 야마토민족의 식민지를 개척하는 일은 우리의 국권확장의 근거를 만드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로 우리나라의 부력을 증진시킴에 막대한 효과가 있다…이에 성공하지 못하는 나라는 국부를 증진시킬 수 없고, 세계의 열패자가 된다…세계열강의 반열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열심히 식민정책에 힘써야 한다.’
사토의 식민정책론의 전환에는 러일전쟁 전후로 한 그의 1903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친 조선과 만주의 시찰 후에 이루어졌다. 사토는 조선 방문에 대한 소감을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하고 풍물은 처참하다’, ‘인민은 수세기에 걸친 극심한 악정과 압박으로 생활은 최악이다’, ‘다행이도 우리나라와 병합 이후 선정이 착착 시행되어 인민의 행복이 넘쳐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방문 후 사토는 그의 해외식민론을 구체화하기 위해 삿뽀로농학교의 졸업생들을 한국통감부로 파견하여 소작제 농장경영을 실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