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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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19 조회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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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이와 같이 카르마 요가를 닦음에 의하여 이 세계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사람들과 그와는 반대로 세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어째서 생기느냐 하는 문제가 자연 일어나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인 “각 사람의 천성에 의하여서”라는 말을 앞의 제7장에서 했다. 그런데 그 3성, 즉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14장에서 했다. 이제 이 장에서는 그 세 성 때문에 어떻게 여러 가지의 신앙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말한 다음 전체의 제목인 즈나나 비즈나나의 설명으로 이 장 끝을 맺으려 한다. 같은 모양으로 제 9장에서 말이 났던, 신앙의 길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왜 나느냐 하는 문제도 이 장에서 하는 말 로 분명해진다. ―틸라크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크리슈나시여, 성전의 명령을 돌아보지 않으시면서도 믿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경은 어떤 것이옵니까. 선성입니까, 동성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암성입니까.

지경 니슈다(nishtha).

아르쥬나가 이런 의문을 일으킨 것은 앞장 끝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지켜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니슈다는 정신상태란 말이다. 그들의 마음은 어떤 경지에 가 있느냐 하는 말이다. 때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경전을 믿기는 하면서도 모르고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다. 예를 든다면, 무소부재하신 최고의 주재를 예배는 하면서도, 경전에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9: 23), “나는 신에게 갈 수가 있다”고 하는 사람, 아르쥬나가 묻는 말은 그런 사람의 정신상태가 어떤 것이냐 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서 경전과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 즉 귀신바탈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거기 대해서도 이 장에 서는 설명이 있다. ―틸라크

이들은 일부러 경전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렇게 한다. 샹카라는 어떤 사람의 신앙의 성질이 어떠하냐는 것은 경전의 명령을 지키고 아니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인격과 그 하는 예배에 달려 있다고 했다.

라마누쟈는 그보다는 좀 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해서,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간, 모르고 했어도 알고 했어도, 경전을 범한 것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육신으로 난 자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세 가지이니, 선성과 동성과 암성이다. 이제 그 설명을 들어라.

육신으로 난 자 인간, 생령.

아르쥬나의 질문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이 장의 뜻의 정말 알기 어려운 점은 크리슈나의 대답이 직접적이 아닌 데 있다. 그의 대답이 너무도 분명치 않기 때문에 샹카라는, 신앙을 가지는 일에 비하면 경전에 대해 무식하다는 것은 별일 아니라는 교리에 따라 크리슈나를 신용했지만, 라마누쟈는 거기 대한 대답을 5절, 6절에서 찾아냈다. 거기에는 아르쥬나가 말한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은 귀신바탈을 택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크리슈나의 견해를 넓은 마음의 것이라고 믿는 점에서 샹카라보다도 더 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샹카라는 적어도 아르쥬나의 말의 뜻을 “경전의 가르침의 뜻을 모르고”로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신을 예배하는 데 대한 경전의 명령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리낌 없이 제껴놓는 사람들을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다. 아난다기리(Anandagiri)는 거기에 덧붙여 말한다. “그와 같이, 경전은 모르면서도 신앙을 받아가지고 난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을 그들의 신앙의 성질에 따라, 선성이라 동성이라 암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경전을 등지는 사람을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샹카라의 견해가 옳을 수도 있지만, 아르쥬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지 못한달 법도 없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대답이 보여주는 주된 요지는 사실, 신앙이 경전을 무시하고도 있을 수 있다는 제자의 생각을 교정해주기 위한 데 있는 듯이 보인다. 16장 마지막 절에서 아주 결정적인 교훈을 하고 난 다음 크리슈나가 의무를 말하는 마당에서 경전을 낮추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기타」의 저자가 감히, 혹은 의향으로나마 그렇게까지 열렬히 비정통적이려고 했다고 가정할 이유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힐

 

3. 바라타의 아들아, 각 사람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람은 신앙으로 된다. 무엇을 신앙하든 간 그 신앙하는 대로가 그 사람이니라.

성질 본성, 사트바(sattva).

신앙 슈라다(shraddha).

이 절에서 사트바는 타고난 성격, 이성(理性), 혹은 양심의 의미다. 이 의미로 쓰인 것이「카다 우파니샤드」에 있다……쉽게 말해서, 2절에 있는 스바빠바(Svabhava)와 3절의 사트바와는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성질이란 프라크리티와 다른 것 아니요, 이성이란 것, 나가서는 양심이란 것도 프라크리티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은 베단타 철학에서도 삼캬철학에서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믿거나 그대로 그 사람이다” 하는 원리는 “신들을 믿는 사람은 그 신들에게로 간다” 하는 주장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들은「기타」7장 20절과 23절, 9장 25절에 나와 있다……모든 사람이 그 욕구하는 바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경향 혹은 욕망을 받게 되고 안 받게 되는 것은 프라크리티에 달렸다 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성질을 개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자연 일어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즉, 아트만(atman, 자아, 영혼)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성격은 훈련과 내버림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고쳐질 수 있다…여기서 생각할 것은 신앙의 그러한 차이가 왜, 어째서 일어나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에 따라 신앙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난 다음 크리슈나는 이제 설명을 한다. ① 프라크리티 자체가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 하는 세 가지 성(性)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세 종류의 신앙이 나타나게 되느냐 하는 것, ② 그러한 차이의 결과는 무엇이냐 하는 것. 교정해주기 위한 틸라크

(저자는 아마 당시의 신앙, 음식, 희생, 고행, 자선, 내버림, 폐지 등등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신앙’은 하나의 신조를 받아들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모든 힘을 어떤 주어진 이상에 집중함에 의하여 자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함이다.

신앙은 인간 위에 내리는 영의 압력이다. 인간을 몰아쳐 지식의 계열에서만 아니라 전영적(全靈的) 생명의 계열에 있어서 보다 나은 지경으로 올라가게 하는 힘이다.

진리에 대한 내적 감각으로서의 신앙은, 후에 가서는 더욱 광명한 빛이 비치게 되는 그 목적을 향하고 있다.

어쨌거나, 어떤 종교적 신앙의 궁극의 다룰 수 없는 증거는 그 믿는 자의 혼의 증거다.

누구나 잘 아는 노래의 귀절이 잘 증명해준다. 종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목적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어느만큼 신앙하느냐에 따라 증거가 된다. 「바가바타」(Bhagavata)는, “예배의 열매는 그 드리는 자의 신앙대로 된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인 것은 우리의 과거 때문이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이제와 이제 이후로 또 지을 수 있다. 플라톤은 “우리의 욕망의 경향이나 영혼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 자신도 각각 그대로 된다” 했고, 괴테는 “정성됨만이 인생을 영원으로 만든다”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4. 선성의 사람은 천신을 예배하고, 동성의 사람은 야차나 나찰을 예배하고, 그밖의 암성의 사람은 죽은 망령, 또는 유령의 무리를 예배한다.

천신(天神)데바(deva), 신(gods).

야차(夜叉)야크샤(yakshas).

나찰(羅刹)라자샤(raja놈).

망령(亡靈)인귀(人鬼). 귀신(ghosts).

유령(幽靈)지귀(地鬼), 영(spirits).

 

5. 위선과 교만에 쓸려 성전에서 명하지도 않은 고행을 맹렬히 행하는 사람이 애욕과 집착의 힘에 몰려,

 

6. 어리석게도 몸 안에 갖추어져 있는 원소의 무리들을 학대 하고, 또 그 몸 안에 있는 나까지도 괴롭히니, 그런 것은 귀신 바탈을 택한 것으로 알 것이니라.

원소의 무리들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 기관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5대원소로 되어 있다.

자기 몸을 스스로 괴롭히기 위해 머리털 내복을 입는다든가, 날카로운 쟁기로 몸을 찌르는 것 같은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면 혹시 환각을 일으키는 일이 있으므로 그것을 정신적 환상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몸을 괴롭히는 것을 자신의 단련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석가의 훈계를 들어보라. “금욕이나 고행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고통일 뿐, 아무 가치도 이익도 없다. 해서는 아니 된다.” ―라다크리슈난

 

7. 각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도 세 종류다. 희생도, 고행도, 보시도 또한 그렇다. 그 구별을 들어보아라.

 

8. 선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목숨과, 원기, 힘, 건강, 기쁨,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들이니 구수하고, 부드럽고, 자양분 있고, 입맛이 나는 것들이니라.

 

9. 동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쓰고, 시고, 짜고, 뜨겁고, 맵고, 아리고, 입이 화끈거리는 것들이니 아프고 괴롭고 병이 나게 하느니라.

 

10. 암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때가 지난(식은) 것, 맛이 빠진 것, 쉰 것, 썩은 것, 먹다 남은 것, 부정한 것들이니라.

 

11. 희생의 바친 결과를 생각함 없이 의무로 알고,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경전에 지시한 법식대로 바치는 희생은 선성적인 것이니라.

 

12. 그러나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희생의 결과를 기대하며 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바치는 희생은 동성적인 것인 줄을 알라.

 

13. 법식에 맞추어 하지도 않고, 드린 음식을 나눠줌도 없고, 찬송(진언)을 부르지도 않고, 헌금을 바치는 것도 없이 하는 희생은 믿음 없는 희생, 이는 암성적이라 하느니라.

음식을 나눠주고 헌금을 바치는 것은 남을 돕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니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뿐이다. ―라다크리슈난

아스리슈탄남(asrishtannam)을 보통 “음식을 나눠주는 일도 없이”로 번역 하는데, 간디지는 일부러 “거기서는 음식을 생산함이 없이”로 했다. 그렇게 한 것은「마누」(Manu)와「기타」3장 14절에 따라서 한 듯하다. 희생에서 비가 나오고, 비에서 밥이 나온다. 모든 희생은 창조적이 아니면 안된다.

간디지의 아다크쉰남(adakshinnam)의 번역(which involves no 〔dakshina〕 giving up)도 보통의 번역(devoid of prescribed feesto the priests)과 다르다. 정통적인 해석 속에 들어있는 미숙한 이기주의는 그만두고라도, 다크쉬나(dakshina, gift)란 말이 분명히 아주 높은 정신적 의미로「우파니샤드」속에는 씌어 있다. “고행, 자비, 진지, 비폭력, 성실”을 희생으로 바칠 만한 예물(gift)이라고 했다(「Chh Up.」3:17, 4) “내준다, 버린다” (giving up)란 말은 간디지의 번역에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을 내버린다는 의미로 한다. 그런데「우파니샤드」는 한걸음 더 나가서, 희생드리는 자가 위에서 말한 기본적인 맹세를 지켜서 살겠다고 한 그 약속 자체를 바쳐버린다는 뜻으로 보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을 바쳐버리는 순수한 희생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14. 천신, 두 번 나신 이, 스승, 어진 이를 공경하는 것과 깨끗, 정직, 브라마차랴, 아힘사, 이것을 몸으로 하는 고행이라 하느니라.

 

15.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참되고 유쾌하고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과, 날마다 베다를 외는 것, 이것을 말로 하는 고 행이라 하느니라.

 

16. 마음의 안정, 인자, 침묵, 자제, 혼의 순결, 이것을 마음으로 하는 고행이라 하느니라.

 

17. 이 세 가지 고행이 마음이 통일된 사람에 의하여 최고의 신앙으로 결과를 기대함이 없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선성적인 것이라 하느니라.

 

18. 존경, 명예, 대접을 받기 위해 허영심을 가지고 하는 고행은 동성적이라 하나니, 흔들리고 튼튼치 못하니라.

 

19. 그릇된 고집으로 자기를 학대하기 위해, 또는 남을 파멸시키기 위해 하는 고행은 암성적이라 하느니라.

 

20. 보시(布施)란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은혜 갚음이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게 할 것인데, 적당한 곳과 때에 그러한 사람에게 하면 그 보시는 선성적이라고 하느니라.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여라. ―예수

 

21. 그러나 은혜갚음을 기대하거나, 다른 무슨 소득을 바라면서, 혹은 본의 아니게 하는 보시는 동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2. 적당치 못한 때와 곳에서 적당치 못한 사람에게 예의도 없이 업신여기는 태도로 하는 보시는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3. 아, 타트, 사트는 브라만의 세 가지 이름이라고 한다. 거기 따라 브라민과 베다와 희생이 규정됐던 것이다.

브라민(brahmins) 범서(梵書).

 

3장 10절을 보라.

아옴(aun, 唵)은 브라만(梵)의 절대, 최고 성(性)을 나타내는 것이고, 타트(tat, 彼)는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사트(sat, 有)는 실재를 나타내는 것이다.「타이르리야 우파니샤드」에는 “이것이 사트(sat, 존재하는 것)와 타트(tat, 그 너머)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이 물질적 우주인 동시에, 또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의식의 세 경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깰 때(jagrat), 꿈꿀 때(svapna), 잘 때(susupti). 그리하여 마침내 초월의 지경(turiya)으로 올라간다.「만두캬 우파니샤드」와「바가바드기타」7장 8절과 8장 13절을 보라. ―라다크리슈난

 

24. 그러므로 브라만을 닦는 이들은 늘 ‘아옴’을 부름으로써 「베다」에 규정되어 있는 희생, 보시, 고행의 의식을 시작한다.

 

25. 그리고 해탈을 원하는 사람들은 ‘타트’를 먼저 부르고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없이 희생과 고행과 보시의 식을 행한다.

 

26. 프리다의 아들아, ‘사트’라는 말은 실재와 선(善)의 뜻으로 쓰이고, 또 칭찬할 만한 행동에 대해서도 쓰인다.

 

27. 희생과 고행과 보시에 굳건히 서는 것을 가지고도 사트라 한다. 또 타트를 위한 어떠한 행작(行作)도 사트라고 한다.

 

28. 어떤 희생과 보시를 했거나, 어떤 고행을 했거나, 어떤 의식을 지켰거나 만일 믿음이 없이 했다면 그것을 ‘아사트’라고 한다. 오, 파르다야, 그것은 현세에서도 아무것도 없음이요 죽은 후에도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아사트(asat) 비유(非有) 또는 무(無).

 

이것이 세 종류의 신앙이라 이름 붙여진 제 17장의 끝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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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지상의 자아(푸루쇼타마)에 대한 공부는 가멸과 불멸에 대한 지식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사실로 한다면 제7장에서 시작된, 즈나나 비즈나나에 대한 설명, 즉, 사람들이 카르마 요가에 의하여 도를 닦아나갈 때에는 최고 주재자를 깨달음으로써 해탈에 도달하게 된다는 그 설명은 여기서 완결이 됐어야 할 것이고, 그리고 결론이 시작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제 9장에서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느껴 알 수조차 없이 뛰어나신 ‘그이’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을 그저 간단히 했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이 장에서 그러한 믿지 않는 자들의 성격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어찌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그런 차이가 있게 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 다음,「기타」전체에 대한 결론을 제 18장에서 한다. ―틸라크
 
1. 두려움 없음, 마음 깨끗함, 지식 요가에 굳게 섬, 자비, 자제, 희생, 경전 외기, 고행, 곧음,
 
2. 비폭력, 참, 노염 없음, 내버림, 안정, 몹쓸 소리 아니함, 산 것을 불쌍히 여김, 탐내지 않음, 온화함, 수줍음, 신중함,
 
3. 정신왕성, 참아줌, 억셈, 깨끗함, 샘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음, 이런 것들은, 바라타의 왕자야, 거룩한 바탈로 난 사람 들의 받아가지고 있는 것이니라.
인도의 종교적인 상징 중에서 광명을 표시하는 ‘데바’(deva)와 ‘어둠의 아들’인 아수라의 대립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다. 「리그베다」에는 신들과 암혹의 대적들이 싸우는 것이 있고, 라마야나(Ramayana)도 고등한 문화 대표자들과 무절제한 이기주의 대표자들의 충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하바라타」는 진리와 법과 정의의 신봉자인 판다바족(Pandavas)과 권력의 숭배자인 카우라바족(Kauravas) 사이의 싸움이다. 역사를 보면 인류는 놀랄이만큼 변함없이 그 특징을 지켜온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도 마하바라타의 시대나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거룩하게 착하고, 어떤 사람들은 악마 같이 타락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고약하게 무관심하다. 이것들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갈 수 있는 길들이다. ‘데바’ 도 ‘아수라’도 다 마찬가지로 프라쟈파티에서 나온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스물여섯 개의 거룩한 특성은 제 13장(7〜11절)에서 말한 즈나나의 특징과 실질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 거룩하지 못한 특성들을 들 때에 그 속에 아즈나나(ajnana,무지)를 넣었다. 이 26개 항목의 말들을 서로 각각 구별해 설명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요, 또 크리슈나의 뜻이 그렇게 하잔 것도 아닐 것이다……위의 세 절에서 이 모든 특성들을 열거한 목적은 오직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으로써 선성의 거룩한 천분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가 어느 한 말로 분명치 않을 경우에는 다른 어느 말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틸라크
 
4. 위선, 건방짐, 자부, 분노, 각박, 무지, 이런 것들은, 프리다의 아들아, 귀신 바탈로 난 것들의 특성이니라.
 
5. 거룩한 바탈은 해탈을 위한 것이고 귀신 바탈은 얽어매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두족의 아들아, 슬퍼하지 말라, 너는 거룩한 바탈로 났느니라.
1절에서 5절까지에 있는 모든 말에 관하여는 갈라디아 사람들께 보낸 바울의 편지 5장 끝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지도하신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육정을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슬립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육정이 빚어내는 것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 더러운 것,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가 되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5: 1~26)
그 덕들을 하나님이 주신 유산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열매라 하고, 그 악을 귀신이 주는 유산이라기보다 육(肉)의 작용이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바탈과 귀신의 바탈이란 어쩔 수 없이 꼭 짜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다.「기타」에 인생더러 지옥의 세 문을 피하라고 한 것을 참조하라.
그리고 깎아내리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비평에서, 위에 열거한 덕목을 보면 그 주요한 것들이 다 소극적인 도덕뿐이라는 말은 온전히 잘못된 비판이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이 덕목들이 실지로 살려는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그 하나하나의 뜻을 설명하는 즈나네슈바라(Jnaneshvara)의 글을 보면 된다.
맨 첫머리에 있는 두려움 없음은 아마 무엇보다도 더 적극적인 도덕일 것이다.「우파니샤드」는 두려움 없음의 조건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자기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다름’이라는 데서부터기 때문이다.” “브라만의 즐거움을 안 사람에게는 두려움이란 것이 없다.” “볼 수 없는, 구체적이 아닌, 두려울 것 없는 것 안에 턱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진다.” 다른 모든 덕이 다 여기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간디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네가 만일 참에 대한 맹세를 지키려 한다면 두려움은 필연적으로 없어질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6. 이 세계 피조물에는 두 종류가 있다. 거룩에 속한 것과 귀신에 속한 것. 거룩한 종류에 관하여는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프리다의 아들아, 이제 귀신 종류를 들어보아라.
 
7. 귀신 바탈의 사람은 어떤 것이 할 것이요, 어떤 것이 하지 않을 것임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정결도, 올바른 행동도, 참도 없다.
 
8. 그들은 생각하기를 세계는 실존도 아니요, 근저도 없고, 주인도 없다. 그럴 만한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요, 다만 서로 간의 정욕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뿐이라고 한다.
실존도 아니 아사챠(asatya), 진실하지 않음.
‘근저가 없다’ 함은 어떤 도덕적인 근거도 없다는 말, 이것이 물질주의적인 견해다.
아파라스파라삼부탐(aparaspara-sambhutam)은 일정한 원인이 있어서 된 것 아니다 하는 뜻. 이것은 또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다. 이슈바라(창조주)가 통솔하고 있는 세계는 일정한 질서에 맞는 세계다. 거기서는 한 물건에서 다른 물건이 나을 때는 법칙에 의해서 된다. 그런데 물질주의자들은 세계에 그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저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실은 일정하게 계속되는 것이란 없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세계는 오직 쾌락을 위해서만 있다고 한다. “모든 생물이 존재하는 유일한 원인은 오직 성욕 그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로카 야티카스(Lokayatikas,오랜 옛날 있었던 물질주의자―역주)의 견해다”라고 샹카라는 말했다. ―라다크리슈난
 
9. 이러한 생각에 달라붙어서, 그 영혼을 잃고, 이성에 부족한 것들은 흉악한 행동을 하며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그 원수로 나타났느니라.
 
10. 물릴 줄 모르는 애욕에 빠져들어 위선과 교만과 방종에 몸을 맡기고, 허망한 생각으로 그릇된 견해에 빠져 부정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11. 한이 없고, 죽음으로야 끝이 나는 근심 걱정에 싸여, 욕망의 만족을 최상의 목적으로 알고, 인생은 그저 이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12. 천 가지 백 가지 공상의 줄에 걸려 애욕과 노여움의 종살이를 하며, 욕망의 만족을 위해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쌓기를 일삼고 있다.
 
13. 이것을 오늘 내가 얻었다. 이 나의 소원을 내가 성취하리라. 이 제물은 내 것이요, 이후에도 역시 내 것일 것이다.
 
14. 나는 내 대적을 이미 멸했고, 또 다른 대적도 내가 멸할 것이다. 나는 주인이다. 나는 즐거워하는 자다. 나는 성공자다. 나는 강한 자다. 나는 행복자다.
 
15. 나는 부자요, 귀한 자다. 감히 나와 견줄 자 누가 있느냐? 제사도 내가 드릴 것이요 자선도 내가 베풀 것이다. 그리 하여 나는 스스로 즐거워하리라. 이와 같이 무지에 미혹된 자는 말하더라.
 
16. 그렇듯 허다한 생각에 미혹되어 미망의 그물에 걸리고, 욕망의 만족에 물들어 그들은 더러운 지옥에 빠지느니라.
 
17. 자부하고, 완고하며, 부(富)함으로 일어나는 교만과 방종에 빠져, 그들은 허영심에서 규칙을 무시하고 이름뿐인 재물을 바치느니라.
 
18. 자부와 힘과 교만과 또 애욕, 분노에 사로잡혀 그 악한 자들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나’를 미워하느니라.
나 크리슈나, 곧 각 사람 속에 계시는 지상의 주재자.
 
19. 그 미워하는 자들은 잔혹하고 사나운, 인간 중에서 가장 천한 것들이므로 이 윤회의 바다에서 나는 그들을 끊임없이 마귀의 태 속에 집어넣는다.
윤회의 바다 나고는 죽고, 죽어서는 또 난다는 고통의 바다인 이 현상의 세계 속세.
 
20. 쿤티의 아들아, 이 악마의 태 속에 들어간 것들은 다시 나고 또다시 나면서 헤매어 내게 이르지 못하고 마침내 가장 낮은 지경으로 떨어져 들어가느니라.
 
21. 이 영혼의 멸망으로 이르는 지옥의 문은 세 겹으로 되어 있으니, 애욕과 분노와 탐욕이다. 그러므로 이 셋을 버려야 하느니라.
애욕, 분노, 탐욕 치(痴), 진(膜), 탐(貪)의 3 독(三毒).
 
22. 쿤티의 아들아, 이 어둠의 세 겹 문을 벗어난 사람은 자아에 대해 좋은 일을 한 다음,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느니라.
 
23. 그러나 누구나 성전의 계명을 내버리고 애욕의 행동에 멋대로 머물러 있는 자는 완전에 이를 수도 없고, 안락을 얻을 수도 없으며,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를 수도 없느니라.
 
24. 그러므로 무엇이 할 것이며 무엇이 하지 않을 것임을 결정하는 데는 경전만이 네 표준이 되어야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먼저 경전이 명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다음 행동하여야 하느니라.
무엇이 할 것이며, 무엇이 하지 않을 것 카랴(karya, 의무), 아카랴(akarya, 의무 아닌 것), 우야바슈디타우(uyavashthitau, 결정).
욕망의 충동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으로 바뀌어야하지만 정신의 자유에 대한 지상목적이 달성되면 사람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아니요, 법에 따라 하는 것도 아니요, 모든 생명의 정신에 대한 깊은 뚫어봄에 의하여 행동하게 된다. 사람의 일만으로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행동하다가, 그담은 사회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법에 따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고, 구경에 가서는 생명의 깊은 뜻에 도달해서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욕망의 지배(18: 59), 법의 지도(16: 24) 정신의 자유(18: 64, 11: 33)—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 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 속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