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이해 강의 목록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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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묵스님의 초기불교 이해 강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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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1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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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이해 강의




오늘부터 <초기불교이해 음성파일>이라는 방을 만들어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간행한 <초기불교이해>에 대한 강의 음성파일들을 틈 나는대로 하나씩 올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2010년 9월에 10일 간에 걸쳐서 총40시간을 대구 동화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에서 <초기불교이해>를 교재로 초기불교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때 강의한 내용을 이번에 모두 음성파일로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음성파일들은 <초기불교이해> 제1장부터 마지막인 제31장까지의 책 전체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강의는 기초선원 과정을 이수 중이신 사미/사니미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 음성파일은 대구에 있는 <삼영불교음반>(053-431-0072)에서 녹취하여 만든 MP3파일입니다. 이 음성파일을 모두 제게 보내주신 삼영불교음반 사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음성파일을 직접 구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전화번호로 연락해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이 강의 음성파일은 모두 41개의 MP3파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파일이 30M가 넘는 큰 용량이라 까페에 음성파일로는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동영상 파일의 형태로 만들어서 올리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긴 걸음으로 틈 날 때마다 동영상 파일로 편집해서 하나씩 올릴까 합니다.

제 목소리가 하도 천박하여 이런 목소리를 담은 음성파일을 올린다는 게 저로서는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천박한 목소리로 부처님의 원음을 강의한 음성파일을 자료로 올린다는 것이 부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어서 아주 망설였습니다. 그렇지만 법우님들의 초기불교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며칠의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서 올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법우님들의 불교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법우님들께서 금생에 해탈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를, 그리고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각묵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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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 海印 2005 실상사 화림원 각묵 스님

月刊 海印



실상사 화림원 각묵 스님이전 게시물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김영옥2005년 12월 286호

전북 남원시 실상사, 일주문 대신에 절 대문 구실을 하고 있는 사천왕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들은 텅 비어 있다. 절과 너른 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봉우리, 소설도 입동도 되기 전, 아니 서리도 내리기 전에 눈 모자를 하얗게 뒤집어쓰곤 하는 저 봉우리, 경상과 호남의 경계도 산 이름 하나로 허물어버리고, 수다한 봉우리와 계곡과 개울을 품되, 첫 시작은 모두 하나임을 선언하고 마는 산, 평지 사찰인 이곳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실상사 큰절에 있는 화엄학림은 개혁불사 이후로 1995년에 개설된 조계종 최초의 전문교육기관이다. 승가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사람들에게만 수강 자격이 주어지는 곳, 두 해의 과정을 끝내면 교수 아사리(강사 자격증)가 주어지는 이곳을 졸업한 학인들은 지난해 8기에 이르기까지 일흔 명쯤 된다. 《중론》, 《유식》, 화엄사상사, 화엄 본경, 그리고 《화엄현담》 등을 공부하는 본 수업말고도, 초기 불교, 팔리어, 아비담마 불교, 한문 등의 특강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지는 이곳 학림은 한 해에 두 달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 주일에 나흘 수업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수업 중에 사제간의 의견 나누기에는 격의가 없다. 인천의 스승이 되어야 할 사문들, 그러나 작금의 한국불교가 풀어야 할 ‘교육 부재’라는 문제점은, 문제 의식을 함께 촉발시켜 가면서 격렬한 공부 과정을 거쳐 배출되는 스님들이 강단에 서게 될 즈음에는 적잖은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화엄학림 강사 중 한 분인 각묵 스님은 확신한다.
현재 학림의 강사 스님은 넷, 그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화엄 본경 수업을 ‘의무적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본 《유식》을 강의하고 있는 각묵 스님은 화엄이 전공은 아니지만 수업이 ‘재미있다’. 인도에서 십 년 동안 유학하면서 그가 연찬해온 초기 불교의 관점에서 보아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데나, 상치되는 점을 짚어주면서, 또한 자신도 학인들과 ‘함께’ 배우기 때문이다. 각묵 스님이 큰절에서 천천한 걸음으로 1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화림원을 처소로 삼은 것은 2003년 3월부터이다. 학인들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함께 배우는 일의 즐거움이 없지 않지만 그가 금생에 해마치고 싶은 일, 그래서 ‘일의 순번’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당시에 쓰셨던 언어인 팔리어로 적힌 경·율·논 삼장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해 내는 일이다.
칠십년대 중반쯤에 출판물로써 그 징조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던 초기 불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대학 재학 시절 대불련과 부산대학교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던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것은 미미한 것이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 안정된 미래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이미 안중에 없어져버린 그로서는 선방의 좌복 위에 앉으려는 마음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 모친을 사별한 그의 아린 마음에서 비롯된 삶에 관한 작지 않은 물음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대학 시절에 만난, 구척 키만큼 뿜어내는 기가 엄청났던 스님, 버릴 수 있는 것 다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느냐?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대답한 그를 향해 벼락처럼 내린 할, 저놈 갖다 묻어버려라! 마조의 할로 백장의 귀가 사흘 동안 들리지 않았다더니, 사흘 동안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일을 몸소 겪으면서 그는 출가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7대 장손의 처지로 뜻을 세우기가 쉽지 않더니, 수련대회에서 사흘 용맹정진 끝에 천배 절을 하고 우물가에서 지쳐 쓰러졌다가, 눈을 뜬 순간에 홀연히 정리가 되었더라 했다.
《선문염송》 수준의 책까지 섭렵해버린 뒤이기도 했지만, 강원 과정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제방 선원에서 참구하는 세월은 7년, 나름대로 애썼던 시간들이었다. 새벽잠을 이기려고 오후는 불식하고, 주린 배를 물로 채우다 말고 조석으로 백팔배로 몸을 이기려던 시절, 뼈만 남은 그때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20kg쯤 몸무게가 늘어난 지금의 그를 못 알아 본다.
인도행도 ‘수좌식’으로 결정한 일이라며 그는 오늘 웃었다. 마지막 선방, 칠불암에서 결제중이었는데 한 달 보름이나 외국 망상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외국행, 푸나대학 입학 허가서를 받고 인도로 떠난 것이 89년이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철학을 전공, 박사 과정을 마치는 동안에 팔리어와 프라크리트어를 익혔다. 인도의 고문헌에 관한 폭넓은 섭렵도 이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엎드려 절하면서 올린 기도는 ‘이생에서 팔리어 삼장을 완역할 수 있게 해주십사’는 것이었고, 그것은 기도로 끝나지 않고,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역경을 위한 방대한 자료 저장도 함께 병행했으니, 지금 그의 컴퓨터에는 경전 주석서만도 일백오십 권 정도, 그리고 20만 단어를 자신이 뽑아 담은, 사전 여덟 권 분량의 자료가 입력되어 있다. (그는 요즘도 국내에서 역경 일에 전념할 형편이 못 된다고 판단이 되면 이 자료가 담긴 노트북 하나만 가지고 외국으로 ‘피신’을 간다)
그가 산문 안팎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1년에 《금강경 역해》(부제:금강경 산스끄리뜨 원전 분석 및 주해)를 출간하고 난 뒤부터였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싣되, 그의 주관적 과목 나누기(이것도 경전 해석의 관점이 된다)와 함께, 구마라습의 의역과 현장의 직역을 일일이 대조시키면서 역해해 낸 그의 역작물은 경전 연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겨울, 이 책을 교재로 삼아, 그는 논주로서 사부대중 대상의 동안거 간경看經 결제를 이끌면서 논의를 심화시켰다. 참선이 아닌 간경식 결제 형식도 그러했거니와, 승속이 함께 결제에 동참하는 일도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이었다. 40명의 스님들, 그리고 일천삼백 명쯤의 일반인이 참여, 한겨울 시린 지리산 자락을 후끈 달구었던 법석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무아’로서, 실체화될 어떤 것도 상정할 수 없다. ‘실체’란 없으며, 그저 인연의 조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연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아는 곧 연기이다. 《금강경》이 설파하고 있는 핵심적 내용이다. 주인공도, 여래장, 불성, 진아, 참나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불생불멸의 생명 자리가 따로 있다고 믿는 힌두의 믿음과 다를 것이 없다. ‘공空’을 꿰뚫어보는 것이 ‘반야’이며, 이는 허무가 아니라 ‘연기’인 것이다.”
그로서는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면서 겪어야 했던 지독한 충격 속에서도 접지 못한 간화선에 대한 애정이었다. 간화선이야말로 ‘무전제’의 수행이고, ‘무전제’는 바로 ‘무아’라는 초기 불교의 근본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그래서 최상승의 수행법이라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도그마이다. 간화선이 동북의 전통에 맞는, 팔정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수행 테크닉이듯, 비파사나 또한 구경 열반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니, 실은 자신에게는 그런 구분조차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의 관심은 부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말의 문제, 결국 뜻을 전하는 말의 문제였다. 그는 그 답을 ‘초기 불교’라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팔정도 가운데서도 수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념正念’을 이해함에 있어, 그는 ‘마음 챙김(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적고 있거니와, 한국불교 간화선이 화두를 들되, 면밀하고, 세밀하고, 정밀하고, 엄밀하고, 그리고 간절하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주객을 초월하고 있지는 않은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 자신도 역경을 하는 사람으로서 구마라습이나 현장에 대한 놀라움은 금할 수 없지만, 잘못 옮겨놓거나,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의도’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여긴다. 5세기에 구마라습이, 7세기에 현장이 정착시킨 한문은 현재의 이해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역 경전이란 결국 2차 자료일 뿐이다.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원전을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한역의 오류와, 그 오류를 답습한 우리의 역사까지 객관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작업은 1600년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중국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나 자주 불교를 실현할 기회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는다. 그는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역경에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그가 세운 원력의 내용인 바, 팔리어 삼장을 제대로 역출해 내는 데 필요한 기본 소양은 어떤 것일까. 언어학적 이해나 소양, 그리고 아비담마와 이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주석서를 섭렵한 뒤에 얻을 수 있는 경에 대한 안목 등을 꼽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역경의 소양과 깊은 이해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를 지금 여기 내 삶에 적용시켜 해탈 열반을 실현하리라는 원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삼장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불사의 메시지는 바르게 읽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이어 말한다.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씀이 아닐까보냐.
그가 지도 법사로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은 그에게 아비담마의 의미를 다시금 깨우치게 한 소중한 도반인 대림 스님이 이끌고 있는 곳이다. (대림 스님은 남방 불교 부동의 준거, 번역하기 까다롭고 어렵기로 정평이 난 《청정도론》을 번역해 행원문화상 역경상을 받았다) 그가 사문의 몸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홍법과 포교의 뜻은 책으로뿐만이 아니라, 회원 수효가 이천 명이 넘는 곳, 월 회비로 후원금을 내는 회원 수도 적지 않다는 인터넷 까페(다음, 초기불전연구원)를 통하여 열정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초기 불교와 아비담마에 관한 한 다른 어느 사이트보다도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고 자부하는 곳이다.
그에게 한 해에 여섯 달은 다른 어떤 일과도 타협할 수 없는 역경 작업 시간이다. 한참 일에 매달릴 때는 열 시간쯤 사분정근 하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을 한다. 여섯 시간 잠을 자도 나머지 여덟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알고, 포행도 하고 그런다. 열 시간 작업, 눈에는 알 수 없는 흰 반점까지 생겼지만 뭐 괜찮겠죠, 그러면서 하하 웃는 그는 그간 《금강경 역해》를 비롯, 《아비담마 길라잡이》(공역), 《네 가지 마음 챙기는 공부》(대념처경과 그 주석서)를 세상에 내놓았고, 올해가 가기 전에 《디가 니까야》(장부)도 책으로 나오게 된다.
여름내 화림원 맑은 흙벽을 붙잡고 기어올라간 아기 담장이들, 이 늦가을 잎은 다 지고, 잎맥만 바닷가 새 발자국처럼 애잔히 남아 있다. 서쪽 하늘에 낮게 떠올랐던 개밥바라기가 큰절로 내려가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그를 반짝, 하고 맞아주었다. 별의 눈빛이 한결 서늘해졌다. 가을이 또 그렇게 지나가나보았다. 팔리어 삼장을 한글로 완역해 내는 것말고도, 주요 팔리어 주석서, 그리고 《아비담마》, 《중관》, <유식》 등을 비롯한 주요 산스크리트 불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초기 불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도 주요 고전도 번역해보고 싶어하는 각묵 스님, 바람맞이 언덕에서 눈부신 등불처럼 저를 켜들었던 은행나무 잎도 다 지고 만 줄을 알아챌 겨를이나 있으신지.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 YouTube[1-12]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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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할 것인가 [각묵스님의 마음이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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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두가지 의미 [각묵스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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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다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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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러가지 종류 [각묵스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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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경지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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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마음부수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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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과 과보의 관계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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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과 과보의 관계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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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연결식은 업의 과보이다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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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연결식은 업의 과보이다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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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 윤회하는가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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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 윤회하는가 [각묵스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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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전봉준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전봉준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입력2020.01.21. 오후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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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정면으로 대결한 전봉준 장군... 정부,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오마이뉴스 박용규 기자]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인 대표 인물이 전봉준 장군이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전봉준의 얼굴이 나온다. 우리 국민들은 전봉준에 대해서 대체로 고부 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를 고쳐나간 인사로 알고 있다. 조선왕조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려고 한 인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전봉준이 우리 역사 발전에 기여한 점은 항일투사로 맹활약을 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으로서 혁혁하게 활동한 인물이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전봉준이 항일 구국 투쟁의 선봉장이었음을 수많은 연구 성과를 통해 입증하였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났다. 그 뒤 동학농민혁명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2019년 5월 11일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행사를 치렀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적용 대상자)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는 독립유공자가 된다.



전봉준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을 반대하여,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일본군에 맞서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사령관 전봉준(1855∼1895)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이었던 전봉준이 일본 제국의 일본군과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전봉준은 일본군과 어떻게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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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장군의 모습 전봉준 동상

ⓒ 박용규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겁박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같은 해 7월 25일 일본 제국은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데에 나섰다.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낸 이유는 척왜(斥倭)을 부르짖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고, 동시에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어 조선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에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지배되지 않으려면 초대받지 않고 들어온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 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거병한 것은 외세의 국권 침탈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유지하는 구국투쟁이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같은 해 8월 전라도 남원 땅에서 들었다. 당시 그는 전라도 지역을 순시하며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폐정 개혁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1894년 10월 8일에 전라도 삼례에 도착하여 대도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군에게 다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통문에서 그는 "충의지사(忠義之士)는 같이 앞장서서 정의를 부르짖으라"고 호소하면서 "이 의거에 호응하지 아니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한 무도(無道)한 자"라고 질타하였다. 그러자 4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하였다. 이후 그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충청도 은진, 논산, 공주에 이르며 동학농민군이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봉준은 <전봉준 공초>에서, 2차 거병 이유를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고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전봉준을 심문할 때에는 일본 영사가 참가하였다.



심문자 : 다시 군대를 일으킨 연유는 무엇인가?

전봉준 : 일본이 개화라 일컬으며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민간에 알림이 없고, 또 군대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가 저녁에 왕궁을 격파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로, 초야의 선비와 인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로운 군대(의병)를 규합하여 일본과 싸워 이 사실을 일차로 따지고자 함이었다.



심문자 : 일본군의 대궐 침범을 어느 곳, 어느 때에 들었느냐?

전봉준 : 7월 사이에 남원 땅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심문자 : 재차 기포는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하였다는 연고로 다시 봉기하였다고 하니, 다시 봉기한 뒤에는 일본군에게 무슨 조치를 하려고 하였느냐?

전봉준 : 대궐을 침범한 연유를 따져 묻고자 함이었다.



심문자 : 그렇다면 일본군이며 외국인으로 경성에 거주하는 자를 모두 몰아내려고 했느냐?

전봉준 : 그렇지 않다. 외국인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일본인은 군대를 거느리고 경성에 주둔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략하는가 하는 의심이 있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의 최고지도자 최시형도 1894년 10월 16일 항일전에 나서라고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일제히 일어나 항일 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휘의 전권을 주었다.



같은 해 11월 12일경에 손병희 통령이 동학농민군 5천 명을 이끌고 논산에 이르렀다. 논산에서 전봉준이 이끌고 온 동학농민군 부대와 연합하였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형제의 우의를 맺어, 전봉준이 형이 되고, 손병희가 동생이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향해 나아갔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같은 해 11월 20일에서 11월 22일까지, 12월 4일에서 12월 7일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과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티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죽창과 창·칼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과 신식 기관총 등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동학농민군 학살의 전담 부대였던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미나미 고시로 소좌 휘하의 모리오 마사카즈(森尾雅一) 대위가 지휘한 제2중대가 12월 4일과 5일에 걸친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대량 학살하였다.



전봉준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일본군이 먼저 공주를 차지하였으니, 사태가 접전하지 아니할 수 없어, 2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사를 점고한즉 남은 자가 불과 3천여 명이요, 그 뒤에 또 2차 접전 후 점고한즉 군사가 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패주하여 금구에 이르렀다." (<전봉준 공초>)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의 군사가 3천여 명으로 줄어들고, 급기야 남은 군사가 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전사자가 많았음을 밝힌 증언이라고 하겠다.



"적국인 일본에 내 살 길을 구함은 본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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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티 고개에 있음

ⓒ 박용규



12월 8일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노성으로 이동하였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경군과 영병에게 고시하고 인민에게 교시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금년 6월 개화 간당이 왜국과 손잡고 밤을 틈타 경복궁을 넘어와 임금을 핍박하고 국권을 제멋대로 하였다...... 살육을 좋아하고 인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어, 우리 동학 교도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멸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斥倭斥和)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않게 하고,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할지라. 갑오 십일월 십이일 동도창의소."



이렇게 전봉준은 관군에게 골육상전을 그만하고, 척왜의 기치에 동학농민군과 함께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자고 호소하였다. 이후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농민군은 12월 일본군과 금구의 원평 전투(12월 21일)와 태인 전투(12월 23일)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전봉준은 태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전봉준은 동지 3∼5명과 의론하여 각자 옷을 갈아입고 몰래 서울 한성으로 들어가 정탐하고자 하였다. 그는 12월 25일 입암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 학살 현지 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아카마쓰 고쿠호(赤松國封) 지대가 전봉준을 추적하고 있었다. 같은 달 26일에 전봉준은 백양사로 피신하였다. 상인 모습으로 바꾸고 혼자서 상경하려고 태인을 떠나 순창으로 들어갔다. 12월 28일 밤에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순창관아에 수감되어 있었다.



12월 30일 미나미 고시로는 아카마쓰 지대로부터 전봉준을 체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같은 달 31일에 미나미 고시로는 순창에 도착하여 아카마쓰 지대와 합류하여 전봉준을 인계받아 부상을 치료하였다.



1895년 1월 1일에 미나미 고시로는 자신에게 "동학당은 모조리 죽여 없애라"라고 훈령을 내린 인천병참사령관 이토 스케요시,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 조선 정부에 전봉준을 체포하였다는 전보를 보냈다. 미나미 고시로는 1월 2일 순창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본부가 있는 나주 초토영으로 전봉준을 이송시켰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군대에 대한 지휘권·명령권을 가지고 있었고,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체포·관할권도 가졌다. 조선의 관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조선의 관아도 마찬가지였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체포된 전봉준에 대해 개입하려고 하자, 미나미 고시로는 "전봉준의 압송에 관한 것은 이미 우리 공사로부터 명령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의 참견을 받지 않는다"(<동학당 정토략기>)라고 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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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미 고시로의 <동학당 정토경력서>(1895) 표지 동학농민군 학살 집행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

ⓒ 박용규



나주 초토영에서 미나미 고시로는 1월 9일 동학농민군 포로에 대해 취조를 시작하면서, 주한 일본공사관에 전봉준 호송과 전봉준 부상 치료의 건을 보고하였다. 다음은 미나미 고시로가 전봉준을 취조한 공술서의 내용이다.



미나미 : 너희들이 거병한 대목적을 숨기지 말고 말해보라.

전봉준 : 7월 일본군이 경성에 들어가 왕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동지를 모아서 이를 쳐서 없애려고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사회와 사상>, 1988. 9, 261쪽.)



미나미 고시로 소좌의 서울 압송 명령에 의하여, 전봉준은 1895년 1월 30일 나주를 출발하여 같은 해 2월 18일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영사관 순사청에 수감되었다. 들것에 실려와 일본공사관 앞뜰에 앉아 있는 전봉준에게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가 묻자, 전봉준이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이노우에 : 어찌해서 이 폭거를 일으켰는가?

전봉준 : 작년 6월(음력) 일본병이 경성에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 함께 물리치려고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우리 동학당의 군, 그 무리들은 훈련이 없고 무기는 완구적인 것이다. 사람, 무기 모두 정예한 일본병에 비길 수 있다고는 본디 믿지 않았던 바, 그렇지만 임금이 굴욕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 죽음을 당하고서 끝낼 결심을 가지고 일어섰다. (위의 책, 256∼257쪽.)



전봉준에 대해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총 다섯 차례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가 1895년 3월 15일, 4월 1일, 4월 4일에 3차례 걸쳐 전봉준을 심문하였다. 조선 정부의 비자주성이 극렬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 있는 일본, 그 영사에게 전봉준을 심문하도록 방치한 것이었다.



재판이 진행될 때, 일본인들이 전봉준에게 접근하여,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을 받아 살 길을 구해 보라고 회유까지 하였다. 전봉준은 이렇게 말하여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본은 곧 나의 적국이다.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적국에 살 길을 구함은 본의가 아니라." (오지영, <동학사>(초고본))



법관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는 말을 듣고,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좋겠다. 어찌 컴컴한 적굴(賊窟) 속에서 몰래 죽이느냐."



전봉준은 1895년 4월 2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4월 24일 새벽 2시에 의금부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전봉준은 항일 구국 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장본인이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일투쟁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한 전봉준의 업적을 제대로 반영하여, 그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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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시골 농부가 전하는 ‘마음 농사 짓기’ - 전라일보

글쓰는 시골 농부가 전하는 ‘마음 농사 짓기’ - 전라일보


글쓰는 시골 농부가 전하는 ‘마음 농사 짓기’<마음 농사 짓기>_전희식 지음이병재 기자l승인2019.03.25l12면




글 쓰는 농부 전희식이 내 마음 농사를 짓는 이야기들을 담은 <마음 농사 짓기>(모시는 사람들)를 펴냈다.
‘마음 농사’는 농작물을 기르고, 사람과 더불어 일하고, 세상을 살리는 ‘농사 너머의 농사’다.
‘마음 농사’의 필요성은 우리가 처한 암울한 현실에 있다.

1인당 소득 1000불일 때도, 자식 둘 셋은 대학을 다녔는데, 소득 3만 불이 되어서는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들고 50, 60대는 일할 곳이 없는 데 산업현장에서는 일손이 부족하고, 5000만이 넘는 인구에도 ‘출산율’이 안 오른다고 아우성인 실정이다.
‘나는 자연인인다!’ 같은 프로그램이 장년층에게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숙고하기보다 여전히 외형의 크기와 성장 신화에 매여 있는 현실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들을 스스로 해방시키 위해서는 ‘농사 너머의 농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농사 너머의 농사’는 참으로 다양하다. 먹을 것을 기르는 일, 입을 것을 만드는 일, 살 집을 만들고 가꾸는 일, 함께사는 세상, 더불어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 모두 농사가 된다.

마음(영성)수행, 민주화운동 역사증언, 이웃 할머니와 어울리기, 마실 다니기, 농촌 체험 단체손님 안내, 해외 명상 유적 탐방, 귀농과 마음수양 강연, 동네 쓰레기 청소, 환경 친화적 난방(땔감나무), 강아지 분양, 농사 용품 재활용, 친환경 생활여건 조성 공공신고 활동, 촛불시위 참여, 동네 어른들 봉양, 동네사람들, 농부의 시각으로 세상 바라기, 농업 관련 국제행사 참가, 귀농 강연, 시민사회활동, 한울살림 활동, 한울농법 보급, 사회장 장례 치르기 등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나도 살고, 농사도 살고, 땅도 살고 그래서 지구도 살 수 있는, 글 쓰는 농부 전희식의 지혜가 아름답고 즐겁다.”(강성미 사단법인 유기농문화센터 원장)
전희식은 2006년부터 장수에서 농사짓고 산다. 농민단체와 생명평화단체, 채식과 명상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똥꽃>(2008, 그물코), <소농은 혁명이다>(2016, 모시는사람들), <옛 농사 이야기>(2017, 들녘) 등 여러권이 있다.

'노자'를 좋아하고 닮고자 했던 장일순 - 오마이뉴스

'노자'를 좋아하고 닮고자 했던 장일순 - 오마이뉴스


'노자'를 좋아하고 닮고자 했던 장일순[무위당 장일순평전 64회] 장일순이 오염되지 않는 정신과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19.01.27 15:16l최종 업데이트 19.01.27 15:16l
김삼웅(solwar)


▲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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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의 하나로 지도층 인사들의 언행불일치를 드는 사람이 많다. 말은 '요(堯)'처럼 하면서 행동은 '도척(盜拓)'을 방불케 한다는 점이다. 요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성군, 도척은 공자 시대 도적 무리의 수괴를 일컫는다. 정치인ㆍ언론인ㆍ종교인ㆍ재벌ㆍ문화계의 내로라하는 작자들의 언행이중성을 보면 실망을 넘어 분노케 한다.

그래서 어떤 분은 대한민국 엘리트의 능력과 도덕성이 일치가 될 때 민주공화국이 제대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말 따로 행동 따로를 밥 먹듯이 하면서, 시민들은 감쪽같이 속거나 더러는 알면서도 공범의식에서 뽑아주고 덮어준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출세자들의 모습(방법)을 따르려 든다. 그것이 빠르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그리고 그 아류들이 집권하면서 보여준, 변칙과 탈선의 행태이다.


광란의 시대에도 정도를 당당하게 걷는 분들도 없지 않았다. 장일순도 그중의 한 분이다.

'수심청정(守心淸淨)'이란 글씨를 자주 썼다.
"맑은 심성을 지니고 착하게 살라"는 뜻이다. 착하게 살려면 맑은 심성을 지녀야 한다. 도척의 마음을 갖고 요처럼 행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장일순은 일체의 삿(邪) 됨과 속(俗) 됨이 없는 품격 있는 생각과 행동을 하고자 하였다. 세속에 살면서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는 궁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비어 있는 사람 같았다. 기교를 모르고 어리숙하지만 진정성이 있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 그러니까 일제말기부터 이승만~노태우로 이어지는 야만성이 짙은 한국사회에서 지명도 있는 사람이 품격을 지키며 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장일순이 오염되지 않는 정신과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과 행동거지의 준거는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큰 줄기의 밑둥은 해월의 사상과 노자의 사유가 아닐까 싶다. 장일순은 노자를 유독 좋아하고 그를 닮고자 하였다.


▲ 교재로 쓰고 있는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이다 교재로 쓰고 있는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이다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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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속물들이 주류가 되던 시절에 장일순은 인품이 속되지 않고 고아한 자세로 살았다. 행동이 형식적인 인습의 굴레에서 얽매이지 않고 활달 무애하였다. 일반적으로 유교를 중정지도(中正之道), 불교를 원명지도(圓明之道), 도교를 현허지도(玄虛之道), 풍류도를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하는데, 장일순은 도교와 풍류도 쪽에 가깝다.

노자를 좋아하고 그의 저술 『도덕경』은 늘 착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苦懸) 여향(厲鄕)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 씨이고,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라 하였다. 주(周) 왕실의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를 지냈다고 한다. '사'는 주나라 천자의 궁전 안에 있는 장서실의 책임자를 말한다.

우리 나라에는 오래 전부터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노장사상ㆍ노장철학이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왕조 500년 간 공자의 유교사상이 중심이 되면서 노장사상은 아웃사이드의 처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습성 속에는 노자의 사상이 살아 있다.

"지금도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흐뭇한 광경에서, 또는 각박한 세파 속에서도 자기 분수를 알고 여유 있는 태도를 취하는 의젓한 사람에게서 또는 온갖 불행의 도전에 조금도 굴하는 법 없이 초연한 모습으로 자기소임을 다하는 사람에게서 늘 노자의 도가적 낌새를 느낀다. 그만큼 노자는 동양인의 생활 속에 또는 동양의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주석 1)

그중의 하나가 장일순이었다.

속물의 시대에 구원을 찾던 장일순이 노자를 놓칠 리 없었다. 노자의 사상은 그의 생활철학이 되고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각박한 세태, 속물의 시대에도 청아한 마음과 청초한 생활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노자의 영향이 컸다.

주석
1> 김학주,『노자의 도가사상』, 3쪽, 명문당, 199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마방] 왜 사는가? 1-유초하_2016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