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Philo Kalia - *한옥과 일본 전통집 --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Philo Kalia - *한옥과 일본 전통집 (Bauen Wohnen Denken)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 Facebook
*한옥과 일본 전통집
(Bauen Wohnen Denken)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일본인과 우리 한국인의 미의식은 확연히 다르다.
나는 이 두 그림을 통해서 형식의 의미보다는 그 형식을 낳게 한 의식을 지적코자 한다. 자의적인 절제가 언제든지 한계를 가지는 데 비하여 무의식적 절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숙명이다.”(승효상, <빈자의 미학>, 82)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의 요건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합목적성, 장소성 그리고 시대성이다. 합목적성이란 건축이 적합하게 수행해야하는 목적이며, 장소성이란 건축이 놓이는 땅에 대한 관계이며 시대성이란 그 건축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과 역사를 의미한다. 나는 셋 중에 특히 장소성에 이목이 쏠린다. 승효상은 장소성과 관련하여 오래된 말인 지문(地文), 즉 터무니를 모셔오기 때문이다. 터무니란 사람이 터(장소, 땅, 거주지)에 살면서 새기고 새겨진 공동체의 삶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관습의 무늬, 공동체적 삶의 역사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승효상은 오늘의 한국 도시가 효율성과 합리성, 기능과 속도를 중시하고 전호후랑으로 건축(아파트와 건물)을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종속시켰기 때문에 “터는 개발할 면적”으로만 계산된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옛 도시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죄다 터무니없이 뜯어고쳐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땅에 대한 성찰을 주장하면서 현대 도시가 메트로폴리스가 아닌 메타폴리스(metapolis, 프랑스의 도시학자 Ascher의 말), 즉 ‘성찰적 도시’를 현대도시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윤리의 건축이다. 윤리의 건축이란 땅과 건축 사이의 윤리를 따지는 것이고 건축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은 노동을 뜻하는 건축(建築)이 아니라 가꾸어서 만드는 영조(營造)라 했으며, 집은 그냥 물리적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짓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래의 건축(집짓기)에는 터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거주 그리고 사유의 과정이 함께 자랐던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글 “Bauen Wohnen Denken”(집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 글(1951년)은 『강연과 논문』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학원과 학위과정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도서였다. 나는 당시 도서관에서 해천 윤성범 선생님의 기증도서를 복사해 읽었는데, 지금 보니 이미 오래전에 우리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세 선생님에 의해 아주 말끔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집짓기(건축)란 근원적으로 거주하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란 이 땅위에서, 하늘 아래에서, 신적인 것들 앞에 머물러 죽을 자로서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소중히 보살핌에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건축물이란 사방(하늘-땅-신적인 것-죽을 자)을 저마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소중히 보살피는 사물들이다. “사방을 소중히 보살피는 것, 즉 땅을 구원하고 하늘을 받아들이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고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것, 즉 이렇게 사중적으로 소중히 보살핌이 거주함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본질이다.”(<강연과 논문>, 205) 그래서 하이데거는 거주의 본래적 곤경은 주택이 모자란다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 거주함으로 비로소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칭한다. 존재가 밝히 들어나는 장소가 인간이란 점에서 Sein(존재)의 Da(터/장소), ‘터-있음’(Da-sein)이다. 그러나 그 터-있음으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거주지를 그 터로서 모으고 보살필 때 그 본래적 의미에 가닿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승효상이 말하는 지문(터무니)을 살리는 집짓기와 하이데거의 Da-sein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집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본 전통집의 자의적인 절제가 언제든지 한계를 가지는 데 비하여 한옥의 무의식적 절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다”고 보는 승효상의 미의식은 한옥의 구조가 한국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는 대로 드러난 것이며, 그것은 터-있음의 터(장소) 안에서 열린 자세로 활연(豁然)하게 살았던 삶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숙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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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relevant

  • 박순영
    이리오너라.... 에 너무 어울리는~
    지나가다 해바라기가 반기는 집을
    발견 ~~ 좋아요 하면서..ㅎ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 Sun-joong Kim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품는다는 깊은 뜻이 집/건물에 있는 것을 처음 배웁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던 예수님의 말씀도 오늘 글의 관점에서 보니 예수님의 그 허전했을 마음이 가슴치며 다가오네요.
    신학과 철학과 예술, 미술과 건축, 그 경계를 바람처럼 막힘없이 넘나들며 풀어내는 그 깊이가 부럽고, 기가 막히고, "터(Da)무니"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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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 ‘상주사심(常住死心)’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3) Philo Kalia | Facebook:



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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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늙고,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다하자, 죽어서 조상들 곁으로 갔다.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창세기 35:29)

올 겨울에는 겨울이 가기 전에 유난히 장례식이 많다. 보통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무렵 많았던 것 같다. 부친께서도 봄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2월 23일 돌아가셨다. 자연의 생명이 봄의 기운을 받고 올라올 때 노쇠한 인간의 몸은 생동하는 자연의 기운에 감응하지 못해 죽음의 길을 택한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죽음의 길을 춤추는 길로 묘사한 Berner의 Totentanz<사자死者의 춤>과 함께 하루의 벽두에 묵상한다.
 
Memento Mori라는 말도 좋지만 ‘상주사심(常住死心)’이란 용어도 좋다. 시인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은 시인이 자신의 책상 옆 달력 한구석에 써놓은 글귀라 설명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이는 어느 불경책에 쓰여 있는 말로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이런 뜻이지. 늘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을 고맙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어”


「끝이 시작되었다」* / 이문재
끝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 관을 들쳐 메고
춤추는 아프리카 청년들처럼
춤을 추자
낡은 것이 가고 있다
낡은 것이 잘 갈 수 있도록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자 우리 함께 배웅하자
드디어 끝이 시작되었다
서로 손을 잡고 끝의 시작을 바로 보자
낡은 것은 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저녁 같은 혹은 새벽 같은 이 시간
마침내 끝이 시작되었다
땅끝에서처럼 바다의 끝에서처럼
끝에서 끝을 똑바로 보고 돌아서자
이 끝을 시작으로 만들어내자
오래된 아침 그래서 처음인 새 아침이
우리 앞에 있다 아니 우리 안에 있다.
바야흐로 끝이 시작되었다
춤추고 노래하자 안팎의 새것을 마중하다
이번이 마지막 끝일지도 모른다
이 시작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첫 시작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관을 메고 춤추자
요람을 들고 노래하자
저 낡은 시대의 인간을 위하여
기필코 두 눈 뜰 우리 안의 인류를 위하여
다시 뭇 생명 보듬어 안을 어머니 지구를 위하여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대사.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는」(책세상 2021)에서 빌려왔다.



Taechang Kim

常住死心입니까?
이제 나이 여든 아홉되는 저는
死即開新이라는
스스로 지어낸 말
글을 삶살이의 바탕으로 삼고 있
는데 많이 다르군
요. 재림과 부활
에 대한 희망과 설레임이 느껴지
지않는 생사관이
라는 인상입니다.


Philo Kalia

Taechang Kim "死即開新", 귀한 멘트 감사합니다. "常住死心"은 불경에 나오는 말이라 하니, 부활 대신 윤회가 은닉되어 있겠지요. 전통적으로 '死卽生'은 재림 및 부활 사상과 부활의 실재를 수용할 수 있는 조상들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Taechang Kim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열반에
들어야 성불한다는 거니
까 재림과 부활에
대한 희망과는 아
주 다른 사생관이
지않습니까? 일본
친구들이 거의가
불교적 사생관을
가지고 있어서 우
정있는 대화를 계
속하는데 기독교
적 생사관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게
되를 바라는 심경에서 생명개
신미학대화를 계
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년기인생
을 살아가는 전직
교수나 고급공무
원, 시민단체지도
자와 기업인들과
의 대화로 한일간
상호이해를 깊이
하자는 취지입니
다. 구약전문가와
신약전문가,이스
람전문가와 인도
중국 티벹 불교,그
리고 힌두교전문
가로 원로급 학자
들이 대화상대라
조심스럽게 천천
히 성서적 생사관
을 함께 살펴 가고 있는 거지요.


Philo Kalia

Taechang Kim 성서적 생사관을 펼치시는 선생님의 사유의 노고를 응원합니다.

최지영

끝이 시작되었다.
죽음과 종말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죽음도 종말도 어쩔수없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우리인생의 여정으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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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최지영 안녕하세요 반가운 이름을 보니 마음이 아침해를 닮아가는듯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