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9

퀘이커 서울 모임- <함석헌 (咸錫憲 1901-1989)> [1-7]

퀘이커 서울 모임입니다


함석헌 (咸錫憲 1901-1989)

1. 함석헌선생의 생애
2.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3. 펜들힐의 명상
4. 함석헌 대담
5. 명상기도에 대하여
6. 예배모임의 뜻
7. 예수의 비폭력 투쟁



 1]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2]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이후 “왜 퀘이커가 됐느냐?” 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싱긋이 웃고 맙니다. 옛날 시인같이 싱긋 웃고 대답 아니 함은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기 때문입니다.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떻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내 마음을 이해 못하고 추궁해 물을 때는 내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됐담 됐고, 아니 됐담 아니 된 것이란 말입니다.

되기는 새삼 무엇이 됩니까? 됐다 해도 나 이상이 될 것 없고, 아니 됐다 해도 나 이하가 될 것 없습니다. 나 나대로인데 무슨 문제가 될 것 있습니까? 나는 돼서 된 것이 아니라 됨이 없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나는 되자는 것이지 되자는 목적과 힘씀이 만일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한없이 되자는 것이야말로 사람입니다. 돼도 돼도 될 수 없는 것을 돼보자고 시시각각으로 애를 쓰는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퀘이커가 된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퀘이커는 돼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만일 돼서 될 수 있는 것이 퀘이커라면 나는 퀘이커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될 수 없는 것이 되자고 애를 쓰는 동안에 돼진 것이 퀘이커일 것입니다.

‘왜'를 묻지만 왜란 것이 없습니다. 물론 생각하는 인간에 까닭이 없을 리 있습니까? 까닭을 물어서야말로 사람입니다. 하지만 까닭을 물으면 누가 대답을 합니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까닭이 될 수 없고, 까닭이 되는 것은 대답으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삶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죽음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그럼, 첨이 그렇고 나중이 그런데 그 중간을 말해 무엇 합니까? 그럼 까닭은 묻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니 물을래도 아니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묻는다고 꼭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대신 대답은 꼭 물어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음 없는 대답도 있고, 대답 없는 물음도 있습니다. 대답 못할 물음이야말로 참 물음이요, 물음 없이 하는 대답이야말로 참 대답입니다. 물음으로 대답하고 대답으로 묻는 것 아닙니까? 참이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날까지 걸어온 내 생애를 돌아보며 나는 스스로 내린 하나의 판단이 있습니다. 나는 ‘실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날껏 해본 일은 많은데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만 되자는 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또 그러면서도 나는 역시 나였습니다. idea는 내게 반드시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idea를 실제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도 도리어 너무 잘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이 어떻게 먼 것이 너무도 빤히 내다뵈서 주저주저 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할 데로 가고 맙니다. 가 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 돼서 됐다기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일 것입니다. 거기도 분명히 발길에 채인 느낌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평화,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신의 뒤섞인 것이...

까닭은 있다면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까닭은 내 까닭이지 누구의 까닭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지성소 안에서의 일입니다. 거기는 말이 없습니다. 침묵 속에 불사르는 생명의 향기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생명의 지성소 안에는 시(詩)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설명이겠습니까? 설명은 현상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인 사람이 말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또 이웃 속에 사는 내가 어떻게 말을 아니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지성소에서 나온 사가랴 모양으로 서투른 시늉으로 내가 어떻게 그의 발길에 채여 굴던 경로를 간단히라도 그려서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에 대답을 해보려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To answer that of God in every men)

나는 1901년 3월 13일 한국 맨 서북 끝 황햇가 조그만 농촌에서 났습니다. 그때 한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민중을 건져줄 종교가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오는 유교도, 불교도, 선도(仙道)도 있기는 있었으나 굳어진 전통, 죽은 의식 형식 뿐이요, 창조적인 생명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는 무지와 미신과 부패가 가득 차 있어서 사람들은 자포자기 할 뿐이지 감히 희망을 가지고 생활을 개조해보려는 의욕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이 다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나는 다행이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고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새로 전파도기 시작한 기독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내가 난 평안도는 한국의 ‘이방의 갈릴리'여서 여러 백년 두고 ‘상놈'이라 천대받는 지방이었고, 그중에서도 우리 마을 같은 데는 ‘스불론, 납달리'처럼 ‘바닷가 놈들'이라고 해서 머리도 못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이기 때문에 그 심한 정치적 혼란기에도 거기는 평화가 있었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만큼 새것을 받아들이는데 빨라서 새 시대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해서 나는 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 속에 났으면서도 ‘큰 빛' 속에 인생의 뱃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받은 교육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것을 ‘새 문명'이라 했습니다마는 그것은 두 얼굴을 가지는 스핑크스였습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 이것은 그때에 적어도 세속적으로는 꼭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은둔국'은 봉건제도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 시대에 들어가야 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빨리 번져나간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중에 잊어서 아니되는 하나는 그것이 민족주의를 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구원도 처음 듣고 매력있는 소리지만 일본의 압박을 물리치고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하여는 서양 선진국의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회에 들어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교회는 장로파였으므로 우리는 거의 청교도에 가까운 엄격한 신조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 썩어진 망국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기독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양심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는 정말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나는 열세 살까지 지금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소년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 나라가 일본한테 아주 망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어린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아주 낙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담에 의사가 될 목적으로 자존심을 꺾고, 이때까지 더럽게 여기던, 일본말로 가르치는 공립학교에 다니기 위해 도시로 나갔을 때 내 순진성은 많이 없어졌고, 과학을 배우는 동안 성경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으로 인해 처음으로 조금 깊은 의미의 자각이 시작됐습니다. 3.1운동이란 것은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를 모이게 될 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출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입어 일본의 강제 압박을 면해보려고 전 민족적으로 일으켰던 비폭력 반항운동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불교, 천도교 세 종교가 연합해서 주동이 되어 일으킨 것인데, 한국 민족의 자각 운동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요, 그때의 젊은이로서 그 영향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운동은 물론 표면으로는 실패했습니다. 세계 큰 나라들의 정의감을 믿고 일어났던 것이나 그들이 그것을 알아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독립은 얻지 못했어도 깨기 시작한 민중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운동은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신문, 잡지, 책, 강연, 학교를 통해 문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나도 그 영향을 입었습니다.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그 운동에 참가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2년 동안을 있는 동안 속이 많이 썩었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에 다시 공부를 계속하려고 오산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학교는 3.1운동의 지도자인 이승훈 선생이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열한 살 때부터 남의 공장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제 주먹으로 인생을 닦아올린 열성과 의지의 사람이요, 전국적으로 큰 무역상이 됐다가 나라 일이 어려운 것을 보고 “우리도 교육해야 산다”는 생각에 생활을 일변하고 학교를 세워 거기 전력했습니다. 그의 교육은 기독교신앙과 인도주의와 민족주의가 한데 녹아든 철저한 정신교육이었습니다. 선생과 학생이 침식을 같이 하며 살아나가는 오산은 그때 그 민족운동의 한 중심이었습니다. 그가 주동이 되어 3.1운동을 일으키자 일본 헌병은 학교에 불을 지르고 그를 감옥에 넣었는데, 동지들이 그것을 다시 부흥시켰습니다. 내가 갔던 때는 옛 모습은 많이 없어지고 초라한 초가집에 학생들이 모여있는 때지만 그래도 나는 이제 정말 참교육을 본다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서 이담에 의사가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처음으로 나는 한국이 뭔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때에 교장이었던 유영모 선생의 영향이었습니다. 노자를 처음으로 안 것은 그에게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옛날같이 남을 따라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더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마음이 시작됐으나 교회에서 그것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과 민족주의가 한데 든 것은 처음에는 힘있어 좋은 듯 했으나 그 폐단이 차차 나타나게 됐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있어뵐 때 그것은 놀라운 형세로 번져나갔지만 일본의 통치가 점점 굳어지고 표면으로 어느 정도 개량된 문화정책을 쓰게 되자 지난날의 지사(志士)라던 사람들이 많이 타협을 하게 됐고, 종교는 점점 현실에서는 먼 신조주의(信條主義)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나는 싫어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23년 나는 대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갔을 때, 그해 9월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동경시의 3분의 2가 타버렸습니다. 그때에 불경기를 타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일본 정치가들은 민심수습책으로 일부러 유언(流言)을 만들어 한국인이 폭동계획을 한다 선전하고 한국 사람을 여러 천명 학살했습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내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현실 형편으로는 사회주의 혁명 밖에 길이 없는 듯 하나 그렇다고 신앙을 버리고 도덕을 전혀 무시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오래 두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뜻하지 못했던 빛을 만났습니다. 1924년에 나는 교육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형편으로는 교육이 시급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 갈 때부터 이미 목적은 교육으로 정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하숙도 들이지 않으려 해서 얼굴도 못들고 다니던 겨울도 지나가고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해 윗 학년인 김교신(金敎臣)이 우찌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찌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영모 선생에게서 이미 들었습니다.

그의 백치원에서의 유명한 일화를 듣고 감명이 깊었으나 그가 생존한 인물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우찌무라의 이름을 들었을 때의 내 놀람과 반가움! 물론 그의 신앙, 사상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존경하는 선생이 소개해 준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곧 그 무교회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는 홋카이도 대학 출신으로 저 유명한 윌리암 클락(William S. Clark)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미국 앰허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서 신학 공부를 한 일도 있고, 처음에는 일본에 돌아와 교회에서 일도 했으나 강직하고 자유?독립?정의의 정신에 불붙는 그는 교회 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 수 없어서 나와서 독립 전도를 시작했는데, 세상이 알기를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로 압니다. 아무 형식?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예배하는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아주 정통적인 신앙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는 저서도 많고, 지금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에는 그의 제자가 많습니다.

내가 첨으로 갔던 날, 그는 예레미야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애국심이 강한 그는 “이것이 참 애국이다”라고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번민이 해결되고, 나는 아주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다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면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 하기도 합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는 오산에 돌아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했는데, 나는 역사 교사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 투성이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나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낙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것같이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는 버리지 못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는 한민족이니 내 민족적인 전통은 버릴 수 없습니다. 다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나는 과학을 배웠습니다. 더구나 1차 대전 이후 나온 H. G. Wells의 The Outline of History 를 매우 탐독해서 그의 세계국가주의(世界國家主義)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신앙을 위해 과학을 무시한다는 일은 비겁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사 없이 진리를 탐구한 과학자가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야 한다면 나는 그까짓 종교는 믿지 않는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그 셋을 다 살리면서 어떻게 하면 역사 교육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떤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느냐?” 나는 십자가의 원리를 민족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얻고 교수를 계속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나의 ‘고난의 역사'입니다. 나는 한국 역사의 key note를 suffering으로 잡고, 그 견지에서 모든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우찌무라 모임에 있을 때 한국 학생이 여섯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이 동지가 되어 신앙 잡지를 내기로 하여 그 이름을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다 귀국한 후에 처음에는 여섯이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맡아서 혼자서 냈는데, 나는 내 역사와 그 밖의 글을 거기 실었습니다.

오산 10년은 대체로 십자가 중심 신앙의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교파적인 것을 싫어하여 무교회주의라는 말을 쓰려고 하지 않았는데 무교회도 차차 자기 주장을 너무 하여 하나의 교파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고, 또 우찌무라를 존경하는 나머지 개인숭배 같은 태도가 보이는데 나는 반동을 느껴 차차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자고 힘을 쓰게 됐습니다. 또 한편 독서의 범위를 넓혀가고 생각을 파 들어감에 따라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요한 것을 말하면, 하나는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人格)을 가진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유(自由)하는 의지(意志)를 가지는 도덕 인간에 대속(代贖)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다 생각하다가 나는 내딴으로 풀었습니다. 나는 역사적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다. 그는 예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도 본질적으로 있다. 속죄는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내가 서로 딴 사람이 아니요 하나라는 체험에 이르러서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인간 예수가 내 죄를 대신했다 해서 감사하는 것은 하나의 감정 뿐이지 그것으로 죄가 깨끗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우찌무라의 가르침과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그것을 남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아직 나는 무교회는 아니다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대로 몇 해가 갔습니다.

오산 있는 동안 나는 언제나 교육과 신앙과 농촌을 하나로 연결시켜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나는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으로 농촌을 살려내는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사명으로 오산에 끝까지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남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발길은 딴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936~37년으로 일본의 정책은 점점 가혹해져서 한국 사람에게서 민족정신을 아주 긁어내버리려고 했습니다. 나는 교문을 닫을지언정 거기 굴복하지는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학교 경영자의 생각은 타협주의였으므로 나는 부득이 거기서 죽을 줄 알았던 오산학교를 나와야 했습니다. 1938년 봄, 나는 눈물로 교문을 나왔습니다. 학교를 나왔지만 나는 차마 학생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을 다 뺏기고 가슴이 텅빈 느낌이었습니다. 드디어 농사를 하면서라도 오산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일요일 모임을 통해 학생들을 만나면서 두 해를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 평양 시외에 누가 정말식고등국민학교를 경영하던 것을 넘겨줄 것이 있다 해서 그리로 나갔는데, 가자마자 그 전의 설립자가 독립운동 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으로 나도 거기 관련이 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무슨 죄가 있는 것 아닙니다. 한국사람 된 죄입니다.

1년을 있다가 나오니 아버지는 그동안 세상을 떠났고, 집안은 엉망입니다. 빚 정리를 하려고 있는 땅을 가지고 농사를 하며 있노라니 한 해가 지나 1942년 봄 이번에는 서울서 사건이 생겨 또 잡으러 왔습니다. 우리가 내던 ?성서조선?이란 잡지가 문제된 것입니다. 이때 일본 군벌들은 태평양전쟁이 차차 어려워지자 한국이 만일 반항을 일으키면 자기네에게 치명상이라 생각해서 갖은 방법을 다해서 그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일본국민화 정책이란 것을 써서 한국의 말, 글, 의복을 다 못쓰게 하고, 나중에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제를 하고, 조금이라도 민족사상?자유사상이 있는 사람이면 모조리 구실을 만들어 감옥에 집어넣고 자기네 말로 ‘썩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조선?도 그 전에 다 허가를 얻어가지고 내던 순 신앙잡지인데, 이제 와서 새삼 문제를 만든 것입니다. 이리해서 1년을 있다가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수염을 자라는 대로 두고, 메트리를 신고 아주 농사군 할아버지가 되어 끝장이 나는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2년 후에 해방이 왔습니다.

감옥을 나는 인생대학이라고 합니다. 학교나 사회에서 못배우던 것을 거기서 많이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는 밖의 선생이 아니고 제 속에 있는 참 선생이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간 경험은 여러번 있습니다. 모두 다 나는 나 노릇 하잔 죄로 이것이 네 번째 아직도 세 번 더 있는데 이때에 얻은 것이 가장 많습니다. 불교 경전을 보게 됐고, 노자?장자를 더 읽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도 얻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소감은 조금 넓은 감방 뿐이지 다름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국이라는 혹은 집이라는 감방 속에 가만 앉아 역사의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한 내 생각을 간추리면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세계혁명의 시작이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가관이 달라져야 한다. 대국가주의시대(大國家主義時代)가 지나간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종교가 달라질 것이다. 아마 지금과는 딴판인 형태를 취할 것 아닐까? 종교의 근본 진리야 변할 리 없지만 모든 시대는 그 영원한 것의 새로운 표현을 요구한다. 각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 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거다.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 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이것은 아주 막연하고 조잡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도 나는 초점을 새 종교에 두고 줄곧 그 생각만 했습니다. 기성 모든 종교는 지금의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붙었기 때문에 거기서 손을 떼고 나오기가 매우 어렵고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해방이 갑자기 와서 전날에 나를 보고 “저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 일”이라고 하던 민중에 이끌려 임시 자치위원회 회장이 됐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평안북도 임시정부의 교육부장의 책임을 한때 맡기도 했습니다. 내게 맞지 않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정치적 공백기에 사회 질서를 위해 부득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소련군 감옥에 두 차례나 들어갔고, 나중엔 그냥 견딜 수 없어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와서는 무교회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협력으로 일요종교강좌를 열어서 1960년까지 계속하면서 내 생각을 발표했고, 혹은 글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많은 공명자를 특히 대학생층에서 많이 얻었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는 이단이라 낙인을 찍었고, 무교회 친구 사이에도 차차 소외하는 기미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주로 “십자가 소리를 아니하고” “기도를 아니한다”는 것과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바라볼 것이 아니라 몸소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요, 기도는 아니하는 것이 아니나 다만 공중기도는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일이 많으므로 될 수록 삼가는 것 뿐이며,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데 대하여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싸웁니다. 대개는 유교?불교의 깊은 뜻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라면 나는 역시 구태여 무교회를 나오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사건이 생겨서 나는 무교회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잘못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간디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습니다. 오산 시절에 이미 Young India 를 구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그의 죽음 이후 더 열심히 읽게 됐고, 조그만 연구회를 가지기도 했었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그의 아슈람(Ashram) 비슷한 것을 하나 만들자고 해서, 또 땅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1957년에 서울서 50여km 떨어진 천안이라는 곳에 농장을 하나 마련하고 젊은이 몇 사람과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농장 이름을 ‘씨알'이라 붙였는데, 씨알이라는 말은 물론 Seed의 뜻이지만 나는 또 이것을 민중이라는 의미로도 썼습니다. 당초에 친구들이 내가 중심이 되어 그것을 하자고 할 때도 나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공정하게 보아서 내가 그런 지도를 할 만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하는 권고에 못이겨 승낙을 했는데 거기서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시련에 못견뎠습니다.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형세는 돌변했습니다. 모든 친구가 다 외면했습니다. 잘못은 물론 큰 잘못이지만 나는 친구들이 나를 버리기까지 하리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내 상처를 어루만져 회복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외로웠습니다. 소련군에 붙들려 다발총 피스톨이 열개 스무개 한꺼번에 가슴에 와 닿았을 때는 도리어 편안히 견딜 수 있었는데 친구들 다 잃고 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게서나 남에게서나 생각으로 믿고 감정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어떻게 소용없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내가 죄인이 돼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잘못이 있는 사람일수록 친구가 필요한 것을 그때에야 알았습니다. 그때의 심경을 나는 이렇게 그렸습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러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러라
내가 쟝발장이 되어보자고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미리엘이 아니고 쟈벨 뿐인 듯이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 우뚝 서는 돌 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든다.

그때에 내가 그렇게 친구들 그리고 있는 때에 바로 내 앞에 퀘이커가 나타났습니다. 퀘이커에 관해서는 오산 시절에 칼라일(T. Carlyle)의 의상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을 읽다가 조지 폭스(George Fox)의 leather broach 대목에서 너무 감명이 깊어서 폭스의 전기를 하나 사오기는 했으나 못읽고 말았고, 그 다음 읽는 책 속에서 퀘이커라는 명사가 더러 나왔으나 언제나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밖에 아니 씌어있었습니다. 정말 흥미를 느낀 것은 2차 대전 때 많은 퀘이커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때였으나 언제 만나려니 하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이제 노 퀘이커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한국전쟁 후 구호사업을 하기 위해 왔던 퀘이커들을 만나 첨으로 퀘이커가 된 이윤구는 내 일요모임의 회원이었습니다. 이제 그를 통해 알게된 것입니다. 퀘이커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는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것이 1961년 겨울입니다. 맨 처음으로 만난 퀘이커 Arthur Mitchell이 내가 내 이 얘기를 다한 때의 대답은 “You were already a Quaker before you became a Quaker.”였습니다. 이리해서 나는 1962년에 Pendle Hill에 가서 열달 동안, 다음 해 봄에 Woodbrooke에 가서 석 달을 있게 됐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하룻밤 뽕나무 그늘 밑에서 자고 가려는 중의 심정이었습니다. 정말 회원이 되기로 결정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North California에서 열렸던 세계대회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무슨 각별한 좋은 것이 있어서보다도 나는 friend들이 나를 대해주는데 어떤 responsibility를 느껴서입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수평선너머'를 내다봅니다. 내가 황햇가 모래밭에서 집을 지었다 헐면서 놀 때에 내다보던 수평선, 피난 때 낙동강 가에서 잔고기 한 쌍 기르다 죽이고 울면서 내다보던 수평선, 영원의 수평선 너머를 나는 지금도 내다봅니다.

<끝>


3] 펜들힐의 명상


나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요한복음」을 좋아합니다 . 그것이 가장 내 속을 잘 풀어주는 듯합니다 . 퀘이커들은 일반으로 「요한복음」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의 교리는 대부분 거기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 그러나 내가 「요한복음」을 좋아하게 된 것은 퀘이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 내 속에서 말씀해 주시는 이에게 배워서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요한복음」을 좋아했기 때문에 퀘이커가 됐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

「요한복음」안에는 가슴을 찌르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내게 감격을 주는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는 제 4 장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문답하는 이야기 , 둘째는 제 8 장에 있는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와서 성전에서 예수 앞에 서는 여인과의 이야기 , 그리고 세째는 제 12 장에 있는 예수 돌아가시기 한 주일 전에 예수에게 값진 향유를 붓고 발을 씻어드리는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 이 세 여인이 다 인생에 실패한 멸시받는 것들이었습니다 . 요한이 다른 공관복음의 기자와 다른 점은 속의 예수를 그리려고 애쓴 점입니다 .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예수의 생애의 여러 사실 중에서 특히 그의 깊은 속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들을 골라서 썼습니다 .

내가 그다

우물가에서 하는 야곱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문답에서는 먼저 입을 연 것이 예수였습니다 . “나 물 좀 주셔요” 했습니다 . 왜 그러셨을까 ? 사실 예수는 그 여자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 그러나 사뭇 영적인 말로 시작을 하면 그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 또 예수에게는 종교 살림과 세속 살림이 서로 딴 것이 아니었습니다 . 외양으로는 그는 하나의 피곤한 길손으로 잠깐 쉬고 마른 목을 축이고 가자는 것이지만 ,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이 영적으로 목이 마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본 이상 육체상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쓰고만 갈 수는 없었습니다 .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우선 일상생활의 실지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 그 여자를 만났을 때 예수는 맘속에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움직일 수 있을까 ? ” 예수에게는 남의 속을 뚫어보는 힘이 있었습니다 . 겉으로 볼 때 그 여자는 한 집안식구에 물을 길어다주러 온 별것 없는 여자지만 속에는 저도 모르게 목이 타 마르고 있는 혼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는 물을 좀 달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 여자는 대답하기를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더러 물을 달라 합니까 ? ” 했습니다 . 그것은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 그러나 예수는 ( 겉으로는 내가 당신보고 물을 달라지만 ) “속으로 한다면 당신이야말로 나보고 물 달라 해야 할 것이요 , 또 그런다면 내가 산 생명 물을 당신께 줄 수 있을 터인데” 했습니다 . 여자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 못할 뿐 아니라 바로듣기를 거부하는 듯했습니다 . 그러나 그만 것으로 놔 보낼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 도망하려는 사람을 팔을 벌려 앞길을 지르듯이 끈질기게 여자를 추궁했습니다 . 그러다가 아주 안됐다 생각하자 갑자기 화제를 돌려 “가서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했습니다 .

예수는 그 여자가 어떤 살림을 하고 있는지 첨부터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 묻지 않고도 남편이 다섯 여섯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그럼 왜 새삼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까 ? 여자의 간지러운 데를 찌른 것입니다 . 거기를 찔리고는 그 이상 더 회피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 남편이라고 했을 때 그 여자의 마음의 주인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 이 날까지 여자는 사람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 자기도 자기를 사람으로 대접치 않았습니다 . 그럴수록 무엇을 찾는지 저도 모르면서 찾아 남편을 다섯 여섯 번 바꿨습니다 . 그러나 마음엔 여전히 얻은 것이 없고 세상을 낡은 신짝처럼 굴러다녔습니다 . 그러나 예수는 한번 보고 그 안에 사랑에 타 마르는 혼을 보았습니다 . 그것을 깨우려고 당신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했습니다 . 그 찔림을 받고 나면 그 이상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 이제 짓밟혀 피곤해 쓰러졌던 혼은 깼습니다 . 이제부터 말은 세속에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 여자가 “주여 , 내가 보니 예언자이십니다” 했을 때 그것은 완전히 투구를 벗고 무조건 항복을 한 것입니다 . 자기 내부를 부끄럼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 이제부터 대화는 시작됩니다 .

여자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합니다” 해서 참 종교는 어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 이것은 윤락여성이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 참 사람의 혼에서 나오는 물음입니다 .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나는 이것을 신약의 최고봉이라고 합니다 . 신약 안에 진리가 많습니다마는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 그런데 그 높은 진리를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 베드로도 요한도 아니요 남편이 다섯이던 윤락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 참 대화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 그러나 또 얼마나 쉬운 것입니까 ?

상상해 보십시오 , 그것은 한 연극의 장면입니다 . 여기 깊고깊은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 쌓아올린 늙은 돌에 퍼렇게 이끼조차 돋아 이스라엘의 오랜 문화를 상징합니다 . 그것을 배경으로 그 앞에 세 사람이 섭니다 . 하나는 예수 , 하나는 윤락 여인 , 그리고 놀라는 제자들 , 클라이맥스에 가까왔을 때 여자는 말했습니다 . “나는 메시아가 오실 줄 압니다 .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일러 주실 것을 믿습니다 . ” 이것은 벌써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기쁨이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

그러나 아직 그는 분명히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 그것을 듣자 예수는 “당신과 말하는 내가 깁니다” 했습니다 . 그는 일찌기 누구에게도 이렇게 분명히 말한 적이 없습니다 . 여자가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 삼십 청년이 한나절 길에 피곤해서 이마에 땀을 철철 흘리며 티끌을 뒤집어쓰고 우물가에 주저앉아 나 물 좀 주시오 하는 것을 당하고 있는 그의 속에는 메시아라면 반드시 웅장한 체격에 얼굴에 광채가 나고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 것을 , 그는 메시아는 밖으로는 아무 특별한 것이 아니오 , 저같이 남편이 다섯 되는 타락 여성의 존재의 밑바닥에 졸고 있는 영혼을 불러낼 수 있는 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 그는 “너의 영혼과 고뇌를 참으로 알아준 이만이 정말 메시아다 . 그리고 그가 곧 나다” 하는 뜻을 말하신 것입니다 . 여자는 마침내 알아들었습니다 . 나와 너가 대면을 했고 그 가운데서 한 여인이 새로 났습니다 .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에서는 요한은 매우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 때도 정오 가 아니라 이른 아침이요 , 예수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거의 끝까지 수동적 태도로 계십니다 .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무지의 문제였지만 여기서는 죄 문제입니다 . 어떤 오랜 사본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지 않다 해서 더러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는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만일 이것이 신약에서 빠진다면 나는 신약이 그 가치를 절반은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 그 이야기로 살아난 영혼이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정말 허다한 파산한 영혼에게 등대가 되었습니다 . 요한은 이 이야기의 직전에 7 장 끝에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그립니다 . 예수의 능력 있는 말과 기적을 보고 수많은 군중이 열광적으로 따랐습니다 . 그러나 저녁이 될 때 모든 사람은 다 헤어져 가고 말았습니다 . 일본 시인 이시가와 다꾸보꾸의 노래가 있습니다 . “사람이 다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 마치 무덤에 들어가듯 돌아가 자버리는구나 . ” 꼭 그 말과 같습니다 . 또 돌아가 자버리거나 하면 괜치 않습니다 . 모든 죄악이 밤에 이루어집니다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낮에는 유한 세계를 보지만 밤엔 무한 세계를 봅니다 . 밤은 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 진실한 기도와 명상은 밤에 됩니다 . 그러나 또 사람의 나쁜 부분이 날뛰는 것도 밤입니다 .

사람의 눈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 둘입니다 . 영원 무한을 보는 눈과 유한 물질의 세계를 보는 눈과 . 영원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어둠 속 에서도 비쳐주는 영원한 빛을 따라 사람의 영혼을 뚫어 볼 수 있습니다 . 육신의 눈만을 가진 사람은 어둠속에서는 보지도 못하고 보는 사람도 없는 줄 압니다 . 그래서 물질계를 보는 눈만을 가진 사람은 밤에는 보는 사람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에 꺼림없이 온갖 죄악을 짓습니다 . 그러나 영적 눈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증인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밤에도 낮에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 예수를 따르던 군중도 낮에 그의 말을 들을 때는 알아들은 것 같았으나 밤이 올 때 , 소수의 사람을 제하고는 , 집으로 가서 다시 죄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 그랬다가 아침이 되면 그 영적인 사람과 육신의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 바로 이 전략적인 순간에 연극이 벌어졌습니다 .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 뒤에 장엄한 성전이 배경을 이루고 그 앞에 또 세 사람이 섭니다 .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눈이 새벽 이슬같이 반짝이는 예수 . 어둠의 그늘 속으로 정욕으로 한 밤을 지내다가 이불 속에서 끌려나와 도살장으로 가는 짐승처럼 떨면서 온 하잘것없는 여자 , 그리고 민족과 종교와 법을 대표하며 스스로 의롭다 하는 마음에 가슴을 제치고 거만히 서서 자기의 업신여기는 자를 잡아먹으려 제 잘난 것을 칼처럼 내두르는 서기관 바리새 교인들 . 그들이 그렇게 분노하며 그 불쌍한 여인을 끌고 온 것은 정말 그 여자와 그 여자의 한 일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 여자는 하나의 미끼로 이용이 됐을 뿐입니다 . 이렇게 거짓같이 간악한 마음에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잠잠하고 땅 위에 글자만 쓰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기세 당당하게 네가 이번에는 걸렸구나 하는 듯 추궁했으나 예수는 그저 잠잠했습니다 .

왜 잠잠합니까 ? 그들의 감정이 잔잔해지고 이성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숨을 태우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 그들이 제정신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예수는 땅위에 글만 쓰고 있었습니다 . 사실을 말한다면 그들의 가슴을 어루만진 것입니다 . 마치 어머니의 보드라운 손이 앓는 아이의 가슴을 쓸어주듯이 . 사람은 아무리 타락을 했다 하더라도 그 깊은 속에는 영혼이 있는 법입니다 . 예수는 양쪽을 다 불쌍히 보았습니다 . 남을 억누르는 사람이나 억누름을 당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그 잘못된 살림으로 영혼이 속에서 쭈그러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하나는 강한 서기관이요 하나는 약한 여자지만 그들 속사람은 다 같이 죽고 있었습니다 . 그래 그 둘을 다 불쌍히 보았습니다 . 손이 땅에 글자를 쓸 때 그의 마음은 그들의 가슴을 쓸어주고 있었습니다 . 아마 첨에는 ‘죄' 하고 썼는지 모릅니다 . 그 담은 그것을 슬쩍 지워버렸습니다 . 그리고 ‘영혼' 하고 썼습니다 . 또 슬쩍 지워버리고 이번은 ‘용서' 하고 썼습니다 .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차차 지나가고 마음들은 식기 시작했습니다 . 벌벌 떨던 여인도 숨을 쉬고 눈에 예수의 얼굴이 들어오게 됐고 , 노가 천장에 올랐던 서기관들도 차차 숨이 가라앉아 예수의 얼굴을 보게 됐을 때 거기는 어떤 거룩하고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 고개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구든지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했습니다 . 거기는 비난하는 기색도 , 타이르는 어조도 없었습니다 . 다만 한없이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빛뿐이었습니다 . 사람들은 하나씩하나씩 빠져나갔습니다 . 아무 말 없이 . 침묵의 말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리고는 가만히 돌이켜 여자를 보고 “그들이 다 어디 갔소 ? 당신을 죄 주는 사람이 없소 ? ” 했습니다 . 여자가 말하기를 “없습니다” 했습니다 . 놀라운 일입니다 . 음행의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입에서 “나를 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했으니 말입니다 . 참으로 거룩한 용서를 받아 깨끗해진 양심의 입에서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 그리고 예수도 “나도 당신을 죄 주지 않소 , 가시오 ,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했습니다 . 왜 예수는 그를 죄 주지 않았습니까 ? 그는 분명히 죄 속에 딩군 사람입니다 . 그러나 속을 본다면 그 여자의 속사람은 목이 타서 사랑을 찾고 있었습니다 . 그가 그렇게 더러운 죄를 지은 것은 바로 사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만나겠는지 그 방법을 몰랐습니다 . 정신적인 사랑을 그는 육체 속에 찾았습니다 .

예수는 그것을 뚫어보셨습니다 . 그때 그 한 행동을 옳다는 것 아니지만 그 불쌍한 것 속에 사랑과 아름다움을 찾아 더듬는 손을 보셨습니다 . 그 더듬는 손을 잘못 나가게 해서 죄를 빠지게 한 것은 다만 그의 어리석은 자아입니다 . 예수는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 이것을 인간에게 공동으로 있는 비참으로 보시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 내 생각으로는 예수의 첫째 가르침은 용서입니다 . 용서하는 심정이 없이는 대화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 동굴 속에 살던 이래 백만 년 동안 무지와 정욕으로 인해 막혔던 인간의 숨이 한 마디 대화로 열렸습니다 .



말 없는 대화

세 번째 이야기는 저녁에 됩니다 . 유대 사람에게는 새 날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 십자가에 못 박히기 바로 일주일 전입니다 . 거기도 세 사람이 나옵니다 . 자기의 죽을 것을 알고 그것을 제자에게 알려주려 애쓰는 예수의 몸에 값진 기름을 붓던 마리아 , 그도 아마 천한 여자 였습니다 . 그리고 그것을 보고 불평을 품는 가롯 유다 . 이번에는 셋이 다 말이 없습니다 . 예수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찾는 것도 아니고 , 수동적으로 참는 것도 아니요 , 조용히 사랑의 순간을 즐기시는 태도입니다 . 마리아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 말로 할 수도 없고 말이 필요치도 않기 때문입니다 . 예수는 이미 죽음을 당하기로 마지막 결심을 했고 그것을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 “이번은 평상시와 다르시다 .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 사랑은 직감을 가집니다 . 직감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

예수는 일찌기 말한 적이 있습니다 . “그 여자는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더 많기 때문에 더 나를 사랑한다 . ” 사랑했기 때문에 속 눈이 열렸고 , 그랬기 때문에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 겉으로 보면 예수는 천연하고 평상과 다른 것이 조금도 없지만 , 마리아의 눈에는 그의 마지막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 그는 예수께서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 말 아닌 말로 해 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 그러나 거기 말로 뭐라 대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 그럼 어떻게 하나 ? 사랑은 자기 할 것을 압니다 . 사랑은 제 말을 가집니다 . 사랑만이 사랑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 그 여자의 그 사랑의 표현이 곧 그 옥합을 깨고 값진 기름을 그의 발에 붓고 제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것입니다 . 그 기름은 무엇입니까 ? 그것을 보던 제자에 의하면 그것은 쓸데없는 낭비었습니다 . 그 여자는 아마 슬픈 일생을 두고 모아왔을 것입니다 . 그것을 이제 쓰는 것입니다 . 그럼 그것은 단순한 향기름이 아닙니다 . 그의 사랑의 결정입니다 . 이제 그것을 쓸 순간이 왔습니다 . 이제 그때입니다 . 두었다가 쓸 데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합을 깨쳐서 단번에 다 부어버린 것입니다 . 공리주의의 눈으로 하면 이것은 낭비입니다 .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이에서 더 중대한 순간이 없습니다 . 이제 여기서 다 쓰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 예수는 이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유다의 하는 그럴 듯한 비난을 물리치고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 . 그가 나를 위해 장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 마리아가 그의 속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마리아의 속을 알아주셨습니다 . 그런데 이것이 , 이 사랑의 하나됨이 도리어 유다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 사랑은 반동을 일으키는 때가 있습니다 . 그것이 샘입니다 .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난 듯하지만 사실은 엿새 후 마지막 만찬에서 계속 됩니다 . 이번에 비극의 주인공은 유다입니다 . 성경에서 수수께끼가 많습니다마는 모든 수수께끼 중에서도 수수께끼는 유다의 성격입니다 . 많은 주석가들이 그의 동기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은 합니다마는 그것은 추측뿐입니다 . 아무도 이 비극의 주인공에 대해 환하게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주는 이는 없습니다 .



깨어진 전체

그런데 11 월 어느 저녁 나는 펜들힐에서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 나뭇잎들은 누렇게 단풍이 들었습니다 . 아직 떨어지지는 않았고 ,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이었습니다 . 나는 내 방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 쓸쓸했습니다 . 내 일생은 실패다 .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 죽기 전에 내 속을 열어야 하겠는데 ,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할까 ? 누구에게다가 할까 ? 누구 하나 있어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겠는데 누가 그것을 할까 ? 누구에게다가 내 마음을 열 수 있을까 ,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일에 성공한 사람은 말할 자격이 있지만 실패한 사람은 아무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 실패한 사람이야말로 할말이 있습니다 . 많습니다 . 그런데 보통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 재판장은 말할 것도 없고 , 선생 부모도 실패자의 심정을 참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 그것은 혼자 골방에 갇힌 마음이요 , 막다른 골목에 든 심정입니다 . 그리고 실패한 사람이란 , 한 사람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고 귀를 기울여준다면 다시 살아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 그날 저녁 내 마음은 바로 그러했습니다 . 예수님이 지금 이땅 위에 계신다면 나는 달려가서 마리아처럼 그의 발 밑에 앉아서 내 속을 다 털어 내놓을 것입니다 . 그러나 세상에 그 같은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

나는 마이더스 왕의 이발사같이 마음이 터질 듯했습니다 .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 같은 것을 보기는 했는데 , 그 말을 하면 죽인다고 위협을 하고 ,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을 수도 없고 . 그는 견디다 못해 빈 들에 나가 땅에 구멍을 파고 거기다 대고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다” 했다고 합니다 . 그럼 나도 땅에 구멍을 파고 내 모든 이야기를 할까 ? 그러고 있는데 웬일인지 창 밖에 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나는 커튼을 젖치고 내다봤습니다 . 아무도 없었습니다 . 돌아와 앉았습니다 . 다시 거기 누가 섰는 것 같았습니다 . 또 내다봤습니다 . 물론 아무도 있을 이가 없습니다 . 그러나 눈에는 아니 뵈는데 꼭 저기 나무 밑에 누가 쭈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 문득 ‘가롯 유다' 일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습니다 . 나는 돌아와 앉아 명상에 잠겼습니다 .

유다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는 자기를 이해해주는 , 그에게다 자기 속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 마지막 저녁식사 때에 예수께서는 “내 마음이 참 괴롭다”고 했습니다 . 나는 그의 그 고민은 분명히 유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가 “당신들 중 한 사람이 나를 잡아 주려 합니다” 했을 때 그는 그때라도 유다가 제발 그 마음을 돌이켰으면 하는 애끓는 생각에 하셨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다만 “주님 그게 저 입니까 ? ” 하기만 했습니다 . “내가 당신들 열 둘을 택하지 않았소 ? ” 하는 예수께서 한 사람의 배반으로 그 열 둘의 전체 사귐이 깨지는 것이 문제였는데 , 제자들은 다만 개인적인 생각만 하고 나만 아니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저입니까 ? ” 했습니다 . 그들은 분명 나만 아니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저입니까 ? ” 했습니다 . 그들은 분명 그가 준 헤매는 양의 비유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 그는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보다 잃어버린 하나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 하나가 없음으로 전체가 깨지기 때문에 . 그렇지 않다면 아흔 아홉보다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논리가 서지 않습니다 . 열 두 제자는 순전히 개인주의였습니다 . 그들이 정말 전체의식을 가졌다면 “저입니까 ? ” 하고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전체가 깨지는 것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 선생을 참으로 이해 못한 것입니다 . 한 사람의 실패는 결코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닙니다 . 전체의 실패입니다 . 그렇기에 요한이 베드로의 시킴을 받아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그것이 누군가 물었을 때 예수는 포도주에 떡을 찍어주면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 예수는 그것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슬픔으로 “이제라도” 하는 마음에 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유다는 그 떡을 받아들고 먹을 새도 없이 어둠 속으로 나갔습니다 . 왜 그랬겠습니까 ? 아마 견딜 수 없는 무슨 실망 , 역정이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

유다는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그랬기에 회계를 맡겼을 것입니다 . 그는 똑똑했고 이성적이었기에 아무래도 현실 문제에 대해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열 한 제자들이 항상 예수 옆에 가까이 돌고 마지막 장면이 임박한 때에도 하늘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을 보았을 때 아마 구역질을 느끼지 않았나 ? 크게 반발까지 느끼지 않았을까 ? 그래서 아마 따로 돌면서 생각하기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 그래서 열 한 친구와의 사이에 대화의 길이 막혀 버렸을 것입니다 . 대화는 정신생활의 호흡입니다 . 대화가 한번 끊어지면 마치 통풍이 끊어진 것같이 곰팡이가 돋기 시작합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면 의심 , 억측 , 악의가 성해 그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 예수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여러 번 주의를 주었습니다 .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 붓는 것을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듯합니다 . 이것은 이상주의에 현실주의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가 “왜 이것을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느냐 ? ” 할 때 거기에 항의도 있고 빈정댐도 있습니다 . 복음 기자는 유다를 도둑이라고 비난하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것은 동정은 조금도 없는 심정에서 나오는 말이요 너무 가혹한 판단인 듯합니다 . 그래서 열 하나가 제각기 “저입니까 ? 저입니까 ? ”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유다의 마음은 그만 결정적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이 반발이 되어 예수께서까지 아주 멀어진 듯합니다 . 그래서 주는 빵을 먹을 겨를도 없이 나가버렸습니다 . 그 어둠 속으로 나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 이날까지 나는 유다를 배반자로만 알고 저주받아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이제는 좀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 가슴이 터질 듯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열 하나 중 한 사람도 따라나가며 “무슨 일이냐 , 왜 그렇게 달아나느냐 ? ” 묻지 않았습니다 . 스승을 저버리는 것이 하루아침에 , 한때 기분에 될 수가 없습니다 . 열 둘이 같이 먹고 자고 고락을 같이하며 같이 전도를 하며 가깝게 살아왔습니다 . 스승의 가르치는 대로 한 포도나무의 여러 가지로 하나가 되어 한 몸으로 살아왔습니다 . 그런데 이제 어떻게 잘못의 책임을 한 사람의 어깨에만 지웁니까 ? 유다는 사실은 전 인류의 짐을 맡아 진 것입니다 . 그의 행동은 마치 화산의 불이 지구의 깊은 속에서부터 전 지구의 압력으로 터져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 이것은 인간의 깊은 바탈의 알 수 없는 폭발입니다 . 만일 열 하나가 따라나가서 그를 위로하고 그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일은 그렇게 비극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런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 그렇게 생각해볼 때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어느 의미로는 예수를 죽인 것은 열 한 제자입니다 . 대화가 끊어질 때 얼마나 참혹한 것입니까 ? 그때까지 예수는 대화의 길을 다시 트려고 애를 썼습니다 . 그러나 이제부터 아주 죽음의 길로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

유다를 따라가는 예수 ( 친구여 !)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 “예수는 지금 어디 계실까 ? ”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가 구름을 타고 오려니 하고 하늘을 쳐다봅니다마는 그러니 그것은 수증기와 대기 오염의 쌓인 것뿐입니다 . 그가 어디 계신다면 그것은 유다가 있는 곳일 것입니다 . 모욕과 고뇌에 파묻혀 있는 유다 옆에 그는 가 있지 않을까 ? 왜 ? 지금도 그는 그와 대화를 열어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 유다가 마음을 열어야 세계 구원은 옵니다 . 사람들은 천당 지옥 소리를 하지만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고 있는 한은 천당이 무사할 수 없습니다 . 그 이빨 가는 소리에 천당이 흔들흔들할 것입니다 . 악마의 마지막 아들이 놓여날 때 , 그때에야 온 인류의 천국은 옵니다 .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는 순간도 유다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 그것을 보면 예수는 유다를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마 유다를 만나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왜 ? 예수는 유다의 갈 곳이 죽음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를 만나려면 자기도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 아무래도 유다의 마음은 열려야 합니다 .

지금까지 우리는 선한 사람은 상을 주고 악한 사람은 벌을 줌으로써 이 세상을 이끌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 종교에서도 ,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법으로는 이 세상을 다스려갈 수가 없어졌습니다 . 낡은 사고방식은 “못된 놈 집어치워라 . 그럼 세상 잘 된다”였습니다 . 이제 우리는 “형제 눈 속의 티를 빼려면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 선은 한 개인의 선이 아니라 전체의 선이요 , 악도 한 개인의 악이 아니라 전체의 악입니다 . 선악이 개인의 것이라면 문제가 간단합니다 . 그러나 아닙니다 . 전체의 것입니다 . 성냥 개비 하나를 훔쳤어도 인간 전체가 들러붙어서 한 일입니다 . 전체를 동원하지 않고 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전체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 전체로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대화 더구나도 실패한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 예수께서 유다의 손을 잡고 지옥 밑에서 올라오는 날 그날은 언제일까 ? 그가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 다시 옵니다” 했을 때 그것은 아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 내 임이 다섯입니다 . 고유 종교 , 유교 , 불교 , 장로교 , 또 무교회교 ,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 도덕과 종교로 비판을 받을 때 나는 한 마디의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 나는 내 속에 있는 일곱 악마를 그의 발 밑에서 고백해야 하고 내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 단번에 부어버려야 합니다 . 내가 유다입니다 . 나는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 내 가족과 스승과 친구에게 못한 것을 그의 앞에는 내놔야 합니다 . 나는 온 역사의 압력을 내 약한 등뼈 위에 느낍니다 . 한국도 하나의 사마리아 계집이요 갈보요 , 마리아요 , 유다입니다 .

아니오 , 세계가 결국은 무지와 정욕과 부패와 불신의 겹친 실패 아니겠습니까 ? 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어디에서 냉랭한 키스를 입에 받으면서도 “친구여 ! ” 하는 그이를 만날 것입니까 ?

------

4] 함석헌 - 한용상 대담



(다음의 글은 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함석헌님과 당시 [마당]지의 한용상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대담입니다.

신앙의 한 큰 선배로서 그분의 신앙과 퀘이커에 대한 이해를 알고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함선생님을 뵙게 되니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만은 오늘은 종교에 대해 주로 말씀 좀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함선생님은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으나 때로는 기독교를 초월하신 인상을 받게 되고, 또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란 건 잘못 알려진 것입니까?

― 예. 그 전에 무교회주의였으니까 그렇지요. 꼭 무교회주의였다는 것보다 그저 일본서의 사귐 때문에 그랬었지요. 교리적으로 그랬던 건 아니야요, 교리도 한두 가지는 맘에 들지만.

* 함선생님이 퀘이커교도이신 줄로 아는데 퀘이커교 교리가 무교회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우리(퀘이커교도)는 교리가 없고 제도도 없어요. 전연 없을 수야 없지만, 가능한 한 그것 없이 하려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한번 제도나 교리가 결정이 되어 놓으면 변경이 잘 안 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달라지고 시대도 달라지는데…….


* 사실 제도나 교회 때문에 본래의 기독교 정신이 구애를 받거나 생명력이 제약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 그렇지요, 퀘이커는 원래 대단히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고 주장하고 있으니까니, 종교적인 생각에 대해 가능한 한 ‘가타’, ‘그르다’ 그러지 않지요.


* 퀘이커교는 가장 규모가 작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 압니다만, 어떻게 이 교단과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까?

― 6?25직후 우리 나라 복구 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미 합작으로 수십 여명의 사람을 보내 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 병원을 복구했는데 여기에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었지. 그 다음 유엔에서 한국 부흥단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퀘이커 사람이 서너 명 있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시작이 된 거지요. 그래서 ’62년에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 퀘이커교는 제도나 교리가 없다는 것이 곧 교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교회나 예배형식도 없는지요?

― 예배도 형식 없이 하자는 것이나 전연 없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교회란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모임(meeting)이라고 하지요. 성직자라는 것도 없고, 목사 신부라는 이름도 없으며 조직 자체가 없지요. 예배 시간에는 강단이 있어서 격식을 차려 앉는 법도 없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명상과 침묵하는 거야요.


* 설교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 성경공부는 다른 시간에 하지요. 예배는 명상으로 하다가 감동을 받은 사람은 자기 맘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를 수 있으며, 성경을 읽고 싶으면 읽을 수도 있고 감동?감화를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 기독교 종파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신앙을 가진 것 같군요.

― 예. 그렇지요.

* 남?녀 동등권 문제가 제일 먼저 퀘이커교에서 나오는 등 앞질러 가는 운동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 남녀 동등 문제도 퀘이커에서 나왔고, 노예 해방 문제도 제일 먼저 제안했었지요. 그 다음 퀘이커 교도들이 감옥에 많이 드나들면서 인간 대접을 아니 한다고 항의하고 감옥 제도를 개선하자는 발언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 질환자들에게도 너무 인간대접을 아니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책을 부르짖는 등 이런 착상을 먼저 해왔지요. 이들이 사회적으로 문제화되어 그 운동이 잘 진행되어 가면 그들은 자기네들 공으로 내세우지 않아요.

* 평화운동과 반전운동도 퀘이커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 퀘이커가 수는 많지 않은데 이 운동을 굉장히 진지하게 벌이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평화증언(Peace Testimony)'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에도 크게 활동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적국에도 모금을 해 보내고, 적국의 부상자들을 위해 의약품을 보냈지요, 러시아에 대해서도 그랬고 베트남 전쟁 때도 적국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의약품을 보내곤 해서 미국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지. 그러나 그래야 된다는 주장을 갖고 계속하고 있지요.




* 투쟁과 분쟁 또는 전쟁까지도 평화의 범주로 옹호되는 예도 있지 않습니까?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는 둥 평화의 개념도 여러 가지인데….

― 그 분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고 한 것은 이런 전쟁이 아니고 사상적으로 충돌되는 것을 말한 것이지. 본래가 예수는 아주 평화주의자야요. 성경을 제대로 옳게 보기만 하면 모든 면에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한데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전쟁 문제를 참되게 다루지 않고, 전쟁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만 퀘이커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생각이라면서 거부하지요.

* 집총조차 거부한다지요?

― 제가 듣기에는 1차 대전 때 양심적 거부라 해서 집총을 거부했답니다. 그걸 듣고 나도 놀란 사람인데, 서양이 우리들보다는 생각이 나간 나라들이니까 순수한 종교적 동기로 보아주어 위생병으로 돌린다든지 다른 걸 하도록 허락했답니다. 그런데 근래 와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퀘이커들 중에 군 복무조차 할 수 없다, 즉 ‘집총만 안 하면 된다는 식’의 미온적 방법으로만 할 수 없다면서 거부하고 자진해서 감옥을 택해 복역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야.


* 퀘이커교의 신학은 어떤가요? 우선 신관(神觀)이 전통적 신학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인격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일은 별로 없고, 꼭 무슨 유일신(唯一神)이라든가, 물론 유일신이지만, 삼위일체 신을 꼭 믿어야 된다는 그런 신학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적어요. 서양 사람에게서 난 종교 중에서 동양 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동양과 관계를 가진 어떤 경로가 있어서 그런지 이를 확실히 밝힌 사람이 없어요. 역사를 쓴 사람 중에 이런 분은 있지. ‘과연 퀘이커 사상이 어디서 왔겠느냐?’ 아마 유럽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 소위 신비주의자들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한 사람은 있습니다. 유래를 찾으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유럽의 신비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그런 미스틱(mystic), 즉 성신 받고 병 고치고 하는 그런 식이 아니야요. 그들은 신비주의이면서도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는데 영국으로 들어갔다는 거지. 퀘이커가 시작된 지역은 영국 서북부의 농민들 사이였대요. 그때 영국 국교가 극도로 부패하니까니 종교의 윗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부호요, 호화로운 살림을 하면서 사회의 못된 것은 다 갖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순수한 농민들 사이에 국교에 반대하는 그룹이 생겼는데 그 당시는 퀘이커뿐만 아니라 그런 잔 교파가 여럿이 일어났어요. 농민들은 순진하게 불만을 품고 ‘이런 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되어 그들의 가정에 칠팔 명씩 혹은 육칠 명씩 모여 자기네끼리 기도하던 것이 시작이라는 거야. 그들은 스스로 우리는 시커(seeker)다, 진리를 찾는 자다, 탐구자다, 그러면서 모였는데 되도록 참되게 살아 보자는 사람들이니까 감동적이었대요. 이 운동이 차차 커지는 가운데 젊은 지도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조지 폭스(George Fox)란 사람이었어요. 그는 종교적으로도 재주를 좀 가진 사람이었고, 순진하지만 좋은 의미의 리더쉽을 가졌던 모양이지요. 그 후에 국교에 반대하던 작은 교파들은 내려오면서 다 없어지고 유일하게 퀘이커만이 영국 국교의 폭력에 견디었지요. 근 70~80년 동안 감옥에도 갇히고 죽기도 하면서 끝까지 반대한 끝에 비로소 종교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거야요. 여러 종파 가운데 유일하게 남게 된 것은 조지 폭스의 힘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어 내려온 거죠.


* 조지 폭스(George Fox)를 창시자로 봐야겠군요?

― 그렇지요. 그러나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은 아니야요. 농민들 사이에 자연히 일어났는데 이들은 대게 무식한 사람들이었지. 폭스도 남의 집 구두 수선공이었고, 그러나 솔직하고 정직하게 생긴 사람인데 장점이 있었나 봐요. 폭스는 상당히 번민을 했다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종교가 본래 뜻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이렇게 타락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래서 회의를 크게 느끼고 캠브리지 옥스퍼드에 찾아가 신학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신통한 대답 안 해주고 그래서 ‘내 문제 해결해 줄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야요.

* 폭스가 명상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은 싯달타가 불교의 진리를 깨우친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독교에서는 타종교와의 대화 문제가 아직도 제기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봅니다만, 하나님은 노자 사상이나 불교를 통해서도 자기 모습을 계시(啓示)하는 것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은데 함선생님은 어떠신가요?

― 예, 저도 그래요. 언제부터 그랬나 하면 타골과 간디를 읽으면서 그렇게 되었지요.


* 퀘이커사상에서는 이런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 퀘이커는 그 후에 된 것이고, 타골을 읽으면서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지요. 전에는 내놓고 보편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근년에는 공공연하게 어디서 강연을 할 때도 나는 한 종교의 특수성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보편주의에 선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지요.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자기네들을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생각은 성립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진리란 누구에게서도 완전히 표시될 수 없으니까.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 ―잡교는 모르지만― 라면 진리야 하나이고 같은 거지 다른 거 있을 리가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종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생각이 그런 사람이오.

그 다음 내가 노자, 장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요. 왜 그렇게 되었나 하니, 우리 나라 역사가 고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를 들여다보아 오면서 노장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촌(內村)선생(일본의 무교회주의 신학자)의 사상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에 있을 때도 그에 대해 조금은 반발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는 ‘동양적인 것 갖고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오. 꼭 그렇게 똑 떨어지게 이야기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이 그에게 있었지요.

* 노장 사상도 기독교만큼의 완벽한 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노장의 도(道)를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습니까?

― 다른 종교들도 모두 자기네 종교가 완벽한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진리가 완벽하다 해서 내가 노장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야요. 내가 노장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워 오면서부터 느낀 거지요. 나는 그 당시 세계가 대전으로 치닫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이면 인간의 사회 살림이 근본에서부터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내가 전문가는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차 대전이 끝나면 종전 모양 국경선이 달라져서 영토를 주고받고 하는 그런 정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달라지면 어떻게 달라지지? 종교의 역할이 뭐지? 종교는 새로운 문명이 나오려고 할 때 앞장을 서서 지도하려고 할까?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모양으로 생산제도가 달라지면 의식이 달라지니까 거기에 적응해서 종교도 따라갈까? 후자라면 종교를 안 믿는다. 존재에 의해서 의식이 결정되어 갖고 나오는 놈의 종교, 그까짓 것을 믿으면 뭘 해. 문명에 앞장서서 인류를 건진다고 하는 것이 옛날부터 성현들이 말한 것이니까 그래야겠는데, 과연 기존 종교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40대 때 그 대답을 부정적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종교는 못 쓸 거다. 웬고하니, 지금 있는 종교는 내가 믿는 기독교까지 넣어서 정치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때는 밀착이라고 하지 않고 야합이라 그랬지요, 야합을 해 붙어먹으니까 종교의 본래 사명을 다할 수 없을 것이고, 인류를 구하려면 정치하고 손을 떼야겠는데 너무 깊숙이 붙어 놔서 그렇게 안 될 것 같았어요. 내 해석대로 하면 이 제2차 대전이란 뭐냐 하면 지금까지 있던 대국주의, 대국가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라 해도 좋고, 이를 더 분명히 말하면 정부주의의 소산이야요. 이 국가들의 본질은 지배주의 정치니까. 본래 태고 적에 국가가 나올 때는 지배주의가 아니었단 말이야. 죽 내려오다가 농업을 멀리하게 되고 인류에게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노예 국가가 생기고 이렇게 하면서 지배주의가 형성된 거지. 이런 국가의 이상이 폭력을 가지고 세계 통일을 하자는 것이고, 이것이 이날까지 왔는데,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로 바뀌어져서 1, 2차 대전이 되었지요. 그 제국주의의 모순이 폭로되어 이건 도저히 이 이상 갈 수가 없단 말이야. 만일 이 국가주의가 그대로 갈려면 충돌할 테고, 충돌하면 전쟁 날 테고 전쟁한다면 핵무기 밑에서 생명의 종자가 없어질 거니깐 이걸 건질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국가관이 새로워져야 된다. 이런 이야기지요.

지배주의가 아니고 정말 민중을 위해 있는 국가라야지 민중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그따위 소리가 없어져야 된다는 것, 이것이 내가 두고두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이라면 이를 위해서 동양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왜 그런고 하니 서양의 근대화라는 것은 시작이 될 때 르네상스 운동으로 출발되었거든요. 그것이 알프스 산을 넘어 북유럽에 와서 종교 개혁으로 되어 가지고 영국으로 가서 산업 혁명을 일으키는 것, 그 셋을 치지 않아요? 정관사를 붙여 더 리포메이션(The Reformation)이라고 할 때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 혁명이 합해야 됩니다. 이 형식대로 꼭 된다고 할 수 없지만, 이제 인류가 또 한번 고쳐 나려고 한다면 무슨 일로든지 생각이 달라져야 될 것 아니야? 그럴려면 서양의 고전은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지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이 이상 더 써먹을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동양에는 수천 년래의 고전이 있지요. 다만 서양 사람들이 동양에는 종교 철학이 없다, 이렇게 봤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줄 알고 찾아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요.

이제 우리가 이것을 캐어 내 봐야겠다는 것이 2차대전 후에 내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본 적도 없고, 독학으로 한문을 공부했으니까 전문적으로 학구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나 살아가기 위해서 동양사상을 생각하게 된 거야. 그래서 노자 장자 소리가 그 동안 많았지요. 이젠 보니까 그것도 상당히 많이 퍼져 나갔어요.(웃음)




* 기독교 신학에서도 사회 구원이나 역사 구원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지금 함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여기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것 같이 들리네요.




― 우리 나라 기독교는 너무 후진성이래서, 너무 떨어진 사람들이라 못 쓰겠어요. 목사들이 아주 무식하기 한정이 없어요. 아이구!




* 너무 폐쇄적이란 말씀이신 것 같은데, 함선생님의 사상은 정말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의 해탈도 같은 걸로 보십니까?

― 내가 신학 전문가가 아니니까 설명해 보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만은 이름은 다르지만 자리는 같은 자리일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지요. 내 식의 설명이지요. 기독교는 샘 민족의 종교인데 구약 때부터 그들이 아라비아 반도 지대에서 살아 왔으니깐 그 지대가 사막이라 그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아주 실천적으로 행동적으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인도는 자연의 멋이 굉장히 놀라운 곳이기 때문에 명상적으로 시작이 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같은 종교인데 방향이 다르게 나타났어요. 인생에 대해 같은 문제를 놓고, 발표되는 것은 환경과 역사의 영향을 받아 다르게 나타난 거지.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죄 문제부터 시작하지 않아요? 죄다, 인간은 죄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하지요. 이것을 인도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무지다, 모른다, 모르니까 깨달아야 한다, 이런 건데, 발표되는 이름과 신학적인 명사가 다를 뿐이지 인간으로서 하는 자리야 한 자리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해요. 이것은 내 식의 소리지요. 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충돌될 요소가 아무 것도 없다고 봐요. 아마 기독교에서 찾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리를 노자 장자가 말하면 도(道)라 하지 않겠느냐,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면 차이도 있고 그럴는지 모르지만, 실지로 믿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지요.


* 저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흔히 불교에서는 정의 문제에 너무 소홀하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 정의 문제? 글쎄요, 김 동길 박사가 한 번 이야기했다가 불교도로부터 말을 듣기도 했지만, 뭐 그렇겠어요? 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갔디요.


* 함 선생님은 내세관에 대해서도 각 종교의 그것들을 통일한 종합적인 신앙을 갖고 계실 것 같은데요?

― 내세? 내세라는 것 나는 이것을 부정합니다. 그것보다 궁극적 목적은 사람이 영원 무한에 도달하는 거지요. 기독교에서는 죽어도 부활한다고 하는데, 이처럼 죽어 가지고 부활한다는 것보다 ‘예수는 부활해 가지고 죽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찾는 것이지요.

종교의 세계에서 보는 차원과 과학자가 보는 차원은 달라요. 그것을 혼돈 말아야 합니다. 현대 사람들은 과학적인 것을 새겨서 살려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과 종교를 혼돈하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했는데 진화론이 될 리가 있나’ 라고 논쟁하는 거야요.

종교에서는 의미를 찾으니까 의미의 세계에 서는 거고, 과학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 그 과정과 이치를 설명하자니깐 실험적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혼동해서 논쟁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지요. 이에 대한 생각이 노상 없으니까니, 부활이란 것도 몸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으로 알고, 어떤 사람은 아주 솔직하게 화장을 하면 못 살아 나는 것 아닌가 그래요. 무식해서 그러는 건데 부활이란 그런 말이겠어요?

나도 젊었을 때 이에 대한 번민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이렇게 풀었어요. 즉, 부활이란 나긴 물질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으로 났지만 생명이 인간에게 와서는 물질적인 단계를 초월해서 소위 정신적이라고 하는 데까지 갔으니깐 이젠 우리가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아직도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죽은 후에 무슨 형식으로 되갔는지 그 때 가봐야 알 것이니까 모르지만, 믿음으로 인해서 그 어느 세계에 벌써 올라갈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야요. 인간 속에 예수 같은 사람 또는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 하나만 있어도 정신계는 벌써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니까 자기가 경험 못 했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 없지요. 과학적 실험을 요구하는 모양인데, 과학이란 사색을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실험을 해서 깨닫는 것이니까. 실험은 만인이 실험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내가 해보지 않았다고 안 믿는 것은 안 된 생각이지요. 과학적 진리 그것 때문에 어떤 과학자들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해서 얻은 것인데 그걸 내 신조에 맞지 않는다고 안 믿을 수 있어요. 종교적 진리도 마찬가지지요. 여기에 대한 연구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위에 설 수 있는 보다 높은 정신계에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게 종교의 목적이지, 옛날 무식한 때 믿던 하나님 모양으로 그렇게 천진스럽게 묶어 두어야만 좋아하는 그런 식은 없다는 거지요. 나는 내세에 대한 충돌은 아무 것도 없지요. 내 나름대로 해결했으니까.




* 그러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세라는 것이 오늘의 세계를 시간적으로 연장해서 죽은 후에도 영원히 호화로운 생활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겠지요?




― 그렇지요, 그러니깐 죽어서 하늘 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높은 데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늘 나라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의 종교라는 게 체험을 존중하지 않고 교리만을 자꾸 존중해! 또 행복주의, 복리주의로 좋은 일이 있어야만 되는 것, 이것이 옅은 종교의 경우니까 샤마니즘을 탈피 못 했다고 그러는 거지. 그런데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교역자들에게 있어요. 교역자 자신들이 무식해! 무식할 뿐만 아니라 한 번 내가 영적인 정신적인 영역에 깊이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결심은 아니하고 어떻게 이대로 있어서 죽지 않고 오래 살수 있을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나라 종교가 요렇게 되었지요. 걱정이야요.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될려면 그러나 저러나 기독교인을 통해서 해야 될 것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썩어지니 어떻게 해야 될지! 나는 이럴 줄은 몰랐어요. 그들이 도무지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요. 그렇다고 절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래 와서 참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지네요. 어떻게 여기서 살 길을 뚫고 나가느냐가 문제이지요.

* 함 선생님은 명상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퀘이커교에서 명상하는 방법과 기본적인 자세, 이런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 그런 건 없어요. 자세라는 것을 별로 말하지 않으나 동양적으로 보면 각 종교가 공통인데 초보적인 자세는 지킬 필요가 있지요.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 아무리 정신 생활을 한다 해도 몸을 떠날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생명이 정신적인 데까지 갔지만 아직도 이 육신 속에 있으니까 육신은 육의 법칙이 있거든요. 가령 먹지 않고는 안 된다든지, 잘 만큼 잠을 자지 않고는 정신 활동을 할 수 없다든지 이런 것들을 벗어날 수야 없지요.

그런데 믿음이 강하면 무한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잠깐은 몰라도 그걸 계속한다면 무리가 되지요. 자세가 중요하지요. 서양 사람들의 경우, 우리 맘에 맞지 않는 태도가 많지요. 내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엘 첫 번 갔을 때 어느 신학자를 좀 면접하려 했더니 시간을 마치고 나오더군요. 그는 책상 위에 두 발을 척 올려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이야기하는 거야요. 그냥 보긴 보았오만은 웬만하면 욕을 하고 그만두고 싶었오. 그 담에 또 대학 강의에 들어갔더니 한 처녀가 애견이라면서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놈의 강아지가 가만히 있어야지 말이야. 이것이 서양 사람의 자랑이라면 자랑이지만, 동양 사람 생각으로 하면 역시 어느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지요.

적어도 초심자는 기본적인 자세를 훈련할 때 자세를 곧게 하는 것 등 지킬 것은 어느 정도 지키는 것이고 또 기본적인 태도를 권하기도 하지요. 꼭 강제로 요청하는 것은 없지만. 척추를 바르게 해라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진리요. 건강을 위해서나 정신적인 것을 위해서도 기본이고 생리학이나 심리학에서도 뒷받침해주니깐.

* 요즘 서점에 가면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같은 인도사상가들의 책이 제일 잘 팔리고 있고, 그 분들을 비롯한 동양사상의 공통방식이 명상인 것 같은데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나는 그 사람들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 사람 것 아니라도 바가바드 기타와 같은 인도 사람 것을 보면 어떤 내용인지 대게 짐작이 가지요. 노자도 어떤 전설에서는 명상을 인도에서 배워 가지고 들어갔다는 설도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또 우리 나라의 고유한 종교와 도교와의 관계가 어더러느냐가 문제인데, 이는 이능화씨의 학설이 좋다고 보아요. 나는 역사 공부를 하다가 못하고 그만둔 사람이지만, 중국 북경 지방은 은 나라였는데, 은 나라와 한국 민족과의 관계가 근래 와서 많이 거론되고 있어요. 나는 기자 조선 문제 때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만 가지 조선이 정말 중국의 기자가 평양에 와서 임금이 되었겠어요? 전혀 없는 말이 만들어졌을 리는 없고, 어떤 사실이 있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 당시 북 중국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배타적인 경계가 없었으니까 우리 나라 사람이 많이 섞여 살았을 것으로 추리가 되었지요. 그 증거는 북경 교외로 나가면 ‘꺼우리’ ‘꺼우리’하는 지명이 많다고 해요. 꺼우리 촌, 꺼우리 장 등 그것이 고구려를 가르킨다는 설이 있는데 아무튼 우리 나라 사람이 많이 섞여 있었던 것 같아요.

은 나라 문명이라는 게 그 속에 원시적인 종교 사상이 많았지요. 이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당이니 뭐니 하는 샤마니즘이라고 하는데 이는 종교 지경에는 채 못 가고 토속적인 것으로 내려왔다는 거죠. 한편 고구려 시대는 현인이라든가 선비, 도령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우리 나라 말이지 중국에서 온 말은 아니야요, 특히 도령은 종교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도령은 지금 있는 무당 같은 따위의 종교인이 아니고 본래 있었던 종교인데 제대로 발달을 못하고 퇴화해버렸는데, 이는 장자의 사상과 공통된 점이 상당히 있지 않나 보여집니다. 이능화씨는 이를 설명하면서 최치원의 말을 빌어 우리 나라에는 본래부터 현묘한 도가 있어 포함3교라, 유, 불, 선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했지요. 최치원은 그 당시 당 나라까지 다니면서 국제적 지식을 가진 사람인데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닐 것입니다. 이 도교 사상이 평화주의야요. 우리 나라의 선비 사상도 그렇고, 단군신화에 전쟁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고대 건국신화에는 모두 영웅적인 싸움이 있는데 그 말을 아니한 것 보면 우리 민족의 근본은 평화적으로 된 사람들인데, 그 후에 옳은 발전을 못해서 남의 식민지로만 돌아가게 되었지요.




*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싸움을 피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의 압박을 받으면서 달라졌어요. 구차하게 살아 갈려니 비겁하게 된 거지요.




* 불교의 해탈이나 도교의 마음을 비우는 것, 기독교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 받는다’는 말도 모두 비슷한 것 아닙니까?




― 그건 모두 같은 것으로 봅니다. 노자가 강조한 것이 비운다는 것, 즉 허정(虛精), 적막은 명상을 통해 하지요. 정신적인 것은 물력으로 될 수 없으니까 명상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지요.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고 그러지요. 그들의 명상은 동양 것과 다릅니다.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고 단체적인 명상이니까. 2, 3명에서부터 수백 명에 이르기까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인데, 현대적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개인주의가 아니니까. 동양의 명상은 열 사람이 참선을 해도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된 것이지요.




* 퀘이커교에 대해 아직도 궁금한 점이 많은데요. 퀘이커란 말 자체는 떤다는 뜻이 아닙니까? 무당이 신들리면 떤다든지 한국 교회에도 울며 떠는 신자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연상되는군요.


― 초기에는 무식한 농민들이었으니까 기도를 할 때 감동해서 떠는 사람도 있었나 봐요. 그래서 멸시하는 이름으로 저 사람들은 떠는 사람(Quaker)들이라고 불렀고, 처음에는 좀 별난 사람들로 지목을 받았대요.

* 신학교는 있습니까?

― 없어요. 교리가 없는데 신학교가 있을 리가 있나요?

* 그럼 퀘이커 신앙은 어떻게 전수가 됩니까?

― 그 모임을 존중하지요. 그 모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려 줍니다. 모임은 세 가지가 있는데 매월 모이는 월회가 있고, 그 지역의 월회가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4계회가 있으며 1년에 한 번씩 연회 즉 총회를 갖게 됩니다. 이 모임에서 행동에 지침이 될 만한 것을 결정해 주는데 이를 ‘퀘리’라고 부르지요.

퀘이커의 특색 중에 하나는 다수 가결이 없이 전원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진리가 다수에만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수가 많다고 한 사람 생각을 없이 할 수 있느냐, 이런 뜻에서 만장 일치가 돼야지요. 이렇게 하면 회의 진행이 어려울 것 같은데 잘 되거든요. 왠고 하니 의견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는 거야요. 충분히 말한 다음 사회자가 정리를 해서 발표를 하면 모두 가결이 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또 다시 말하게 하지요. 이렇게 해도 의견이 조정되지 않으면 명상을 가진 후 토론하고…, 덤비거나 급속히 서둘지 않지요. 5년이 되건 10년이 되건 일치되는 대로 실시하자는 태도이지요.


* 한국에는 퀘이커 신자가 얼마나 있습니까?

―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영해요. 이들을 참석자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참석해 보고 퀘이커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하면 원로들이 결정해서 회원이 됩니다. 회원이 되면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요. 물론 헌금을 거두거나 그런 것은 없어도 자기가 작정을 하고 내든지 하지요. 그러나 아주 자유롭지요. 미국에 약 10만 명, 세계 전체에 약 20만 명밖에 안 되지요. 한국에도 몇 십 명되지만 거의 참석자들이고 멤버쉽(membership)을 가진 사람은 몇 명 안 돼요. 내가 그것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지 않아 좀 적은 것 같은데 이제 좀 열심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세계 대회는 몇 년마다 열립니까?

― 세계 총회는 3년마다 열리는데 각국 연회(年會)대표들이 참석합니다. 우리는 작은 단체라서 연회가 없지만 나도 대표로 참석하라고 해서 참석하지요. 월회는 연회에 다 소속이 되어야 하나 명령 기관은 아니야요. 절대 자립 자결권을 가지며 협의 기관뿐이지요. 세계적인 협의 기관이 F.W.C.C.(Friends World Committee for Consultation)라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직속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하는 사람들인가를 보시오. 우리 나라도 어느 연회에 속해야 되겠는데 제일 가까운 곳이 일본이거든. 한국과 일본은 미묘한 점이 있는 줄 알고 FWCC에 직속시킨 거지요.

* 퀘이커교에서는 선교정책이나 전도 사업 같은 것이 없는지요?

―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한 것을 좋아하니깐 오는 사람들만 환영하지요. 오는 사람들에게도 야단스럽게 반기지를 않으니까 냉냉하다는 평을 듣지요.

* 성경 공부할 때 교재는 성경뿐입니까? 아니면 자녀 교육을 위한 체계적인 출판물이 있습니까?

― 서양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자인 사람을 본 퀘이커(Born Quaker)라고 하는데 자녀 교육을 대단히 신중하게 생각합니다. 어릴 때는 자녀를 꼭 데리고 모임에 참석하고 어린이들이 명상하기 힘드니까 10여분 있다가 먼저 내어 보내지요. 그리고 어른들은 40분 내지 1시간 동안 명상을 하는데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나오면 그가 원하는 종교를 선택하도록 하지요. 퀘이커가 마음에 들면 이것을 택하라고 자유에 맡깁니다. 아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각종 문서는 많이 나와요. 이것이 특색 중의 하나이지요. 선교용도 있고 또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그저 팜프렛을 만들어 배포를 하지요.

* 조직이 없는데 이런 활동이 원활하게 되겠습니까?




-그네들 중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써내지요. 물론 월회?연회에서도 유인물이 나오지만 개인들의 의사발표가 많지요. 이것도 자유롭게 하는 거니까.




* 퀘이커 교도들은 생활을 대단히 검소하게 하고 구제 사업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특이한 생활 태도를 갖고 있는지요?




― 퀘이커가 요즘은 돈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어 있거든. 세상이 정직할 때는 돈도 잘 벌었지요. 그래서 퀘이커들은 천국에도 가지만 이 세상에서 돈도 잘 번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지금은 퀘이커가 사업이 되겠어요. 돈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재정이 모자라니까 사업도 제대로 못하고 수도 적고 그렇지요.

생활 태도는 대단히 간소하지요. 교리가 없다고 하지만 교리가 있다면 ‘간소생활’과 ‘평화를 지키라는 것’, 이런 것 몇 가지가 있겠지요. 간소 생활은 옷을 검소하게 입은 것은 물론이고 말조차 간소화하라는 것이야요. 퀘이커들은 말도 필요 없는 말 많이 하면 못쓴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임금에게 간소한 말로 유(you)라고 하다가 죄를 받은 적도 있고 임금 앞에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간 적도 있어요. 임금도 나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왜 모자를 벗느냐는 거였지요. 한때는 아주 엄격한 살림을 했었오.




* 앞에서 퀘이커는 남녀 동등권 문제라든가 노예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고 했는데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없습니까?




― 지금은 핵 문제 때문에 제일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지요. 반핵 운동은 우리도 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무력한 사람이 되어서…….




* 반핵 운동을 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퀘이커들은 명상을 좋아하고 평화를 사랑하는데도 반핵 운동의 경우 데모와 행동주의로 나가는지요?




― 데모를 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게 해보니까 또 신통치 않은 점이 있으니까 요새는 많이 강조하지는 않는 편이더군요. 사실 액쇼니즘(Actionism, 행동주의)이 퀘이커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

* 반핵 운동도 평화주의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만 오늘의 정세를 보면 세계 평화에 대해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소 초강대국이 빚어내는 무기 경쟁에 제동을 걸 방법이 없고 가속화되는 문명의 발달은 결국 각종 공해와 생태계의 파괴로 인류의 존립이 큰 위기에 온 것이 아닙니까?

― 우리가 전력을 걸고 싸워 보아야지요. 공해도 같은 문제인데 싸워 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잘못은 많지만 인간이 이성을 갖도록 창조된 이상 어느 정도 이야기하면 듣지 않겠느냐 하는 소망을 가지는 것이지요. 그래도 정 듣지 않으면 인류는 망해버릴지 모르지요. 모든 전문가들이 예언하는 대로 아주 깡그리 끝장이 날지도 모르고 그 다음 것은 알 수 없지요. 지구 위의 문명이 없는 가운데서 창조되었으니까 인류가 끝난 후에도 또 어떤 무엇이 있게 되겠지요.

* 미?소간의 힘의 대결이 이 같은 보편적인 노력으로 해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새로운 차원의 특수한 방안이 있어야 된다고 보십니까?

―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선한 본성을 주었다는 것을 믿고 그 양심을 때리면 된다는 신앙을 가져야지요. 양심을 때리는 데는 내가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내 몸으로 폭탄이 되는 거지요. 평화주의자의 구령은 ‘자기희생’입니다. 자기 희생 않고는 평화 운동이 안 되지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턱턱 죽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지요. 내가 하는 것 아니고 위에서 올 것이니까, 그 자리에 가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없어지지요. 노자 장자는 생과 사가 따로 있는 것 아니라고 했는데 이런 자리에까지 가야 되는 것이야요.

* 오늘날 평화주의 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국경을 넘기 힘든 것 아닙니까?

― 힘들지요, 그러나 이성에 호소해서 말하노라면 국경을 초월해서 열리겠지요. 스위스의 피엘 세르도라는 사람은 건전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겁이 없디오. 잡혀 갔다가도 벌금 얼마 내면 나오고, 나와서 또 하지요.

스위스에서 방공연습을 하느라고 불을 끄는 훈련을 하는데 이 사람은 촛불을 켜 들고 거리로 나가는 거야요. “하나님이 세상에 빛을 비추라 했는데 깜깜은 왜 하란 말이냐.”이렇게 외치고서 ‘나는 어디까지나 빛을 증거할 것이다’ 라면서 평화 운동을 했지요. 그는 혼자서 인생을 그렇게 마친 사람이야요. 지독한 사람이지요.

그렇게 할 때 어느 구멍이 뚫리게 돼요. 구멍 하나 뚫어 놓으면 그 다음 또 살아나는 것이지요. 예수도 그랬고 순교자 없이 생명은 자라는 법 없습니다. 이런 점을 믿는 것이지요.




* 인도 간디의 평화주의가 혹시 퀘이커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없습니까? 간디가 영국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퀘이커를 알았다면 사상적으로는 잘 통하지 않았겠나 싶은데요.




― 간디를 제일 이해한 사람들이 퀘이커교도들이었답니다. 또 간디가 영국에 갔을 때 퀘이커 가정에서 숙박을 한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보아 서로 관계가 있갔지요.




* 퀘이커교가 미국 역사에 공헌한 바가 크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세계 퀘이커들의 반 수를 미국이 점유하고 있기도 한데 여기에 어떻게 건너갔습니까?




― 우선 퀘이커교가 미국 독립 운동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물론 다한 것은 아니지만. 윌리암 펜 장군이 귀족으로 났던 사람인데 조지 폭스에게 전도를 받고 감동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퀘이커가 미국 건너갔을 때 펜실바니아가 중심이 되었었지요. 펜실바니아는 윌리암 펜이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 한번 해보자고 한 곳이니까.

이를 홀리 엑스페리멘트(Holy Experiment)라고 그러지요. 그래서 미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펜실바니아가 되었었지요. 지금도 펜실바니아 정부 청사 꼭대기에 윌리암 펜의 동상이 서 있지 않아요?

그 당시 다른 지방에서는 인디언과 충돌해서 사람을 많이 죽이고 했는데 펜실바니아 주에서만은 평화주의를 내세워 인디언과 충돌 없이 지나지 않았겠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노예 해방 운동도 역시 퀘이커가 적극적이었지요. 이 때 남쪽에서 오는 흑인들을 퀘이커들이 숨겨 주고, 연락을 해주고 도망가도록 인도해 주기도 했었지요.




* 함 선생님은 몇 년 전 노벨 평화상 후보자가 되신 것으로 아는데, 역시 퀘이커교에서 추천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 그거는 나를 잘 모르고 겉으로 보고 괜히 그랬던 거지요. 겉으로 보아 뭐 한 일이 있는 줄 알고 그러는데 부끄러운 일이지요. 한국에 몇 번 나와서 알던 퀘이커들이 지나쳐 생각하고 그랬지요.

* 퀘이커교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 “미국퀘이커교 봉사위원회”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요.


* 한국 퀘이커교의 정식 이름은 무엇입니까?

― 종교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라고 그러지요. 퀘이커들은 서로 친구라고 하는데 이는 요한 복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구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 한국에도 예배당은 있겠군요.

― 이화여대 뒤에 조그만 집이 있습니다.

* 함 선생님은 부산 복음병원의 장기려박사의 성경 모임에 자주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도 퀘이커교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 그 분은 퀘이커가 아니고 전형적인 기독교인이며 골수 장로교회 교인이지요. 세상이 장 박사님 같으면 문제가 없어요. 참 어린애 같은 분이고 참 놀라운 분이지요. 돈을 벌려 했으면 제일 많이 벌었을 분인데 다 남 주고….

* 함 선생님은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 퀘이커에서는 십자가 소리도 많이 하지 않고 세례도 없는 곳인데, 나는 일본 있을 때 내촌(內村) 영감한테 세례를 받았어요. 내촌도 퀘이커와 공통한 점이 많아요. 나도 그 때부터 퀘이커를 다 알았지요. 그때 나는 우찌무라(內村)와 미도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 갔었는데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자가 되었고, 미도베는 퀘이커가 되었어요.

* 함 선생님은 ‘최고의 사치가 전쟁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가 알 수가 없습니다.

― 내가 근래에 오다가 이런 소리를 했어요. 쓸데 없는 것에 돈을 가장 많이 들여하는 게 전쟁이니까 사치이지요(웃음). 실은 사치 생활과 전쟁이 밀접한 관계에 있단 말이오. 왜냐? 자본주의에서 기업주들이 상품을 만드는데 실용품이기보다 거의 다 사치품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단 말이야, 전쟁 목적이 경제권 외에 뭐 있어요?

* 우리 나라의 교회는 기적적으로 급성장을 해 약 9백만에 이르는 양적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젠 종교 국가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종교가 뭐이요, 참 부끄럽소. 일본 사람들의 경우는 그래도 진지한 태도가 있는데, 일본도 성신 받는다, 방언을 한다, 이런 것이 있기야 있겠지요.

우리 나라 사람 결점은 유행을 쉽게 따라 가는 거야요. 내 소리가 없어. 나는 나를 지키는 무엇이 있어야겠는데 그것이 없단 말이야.

* 양적으로 많아지면 질적으로도 좋은 부분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 않아요. 양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이 질적으로 좋아지겠어요? 글쎄! 가다가 보면 또 깨닫게 되겠지! 고생하고 쓰라린 경험을 하면 깊어지갔지. 그런데 아직 정신들 못 차리고 있어요.

* 함 선생님은 과거에는 타종교에 대해 비판을 좀 하시는 것 같았는데 최근에는 전연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비판 안 하시지요?




― 그 전에는 가톨릭을 좀 좋아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의 기본은 자유인데 가톨릭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 좀 달라졌어요. 나 믿으면 그만이지 남 아니라고 할 것 없다고 생각했지요. 지금은 오히려 가톨릭 편이 좀 나은 편이고 개신교는 아주 규모가 없고 법이 없어요. 제멋대로야. 신부는 탈선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목사라는 사람들 형편없이 모자라는 인간들이 많은 걸요.




* 제가 볼 때 개신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분열입니다. 특히 정통이라 하는 사람들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잘 분열하는 것을 한국 교회 역사에서 잘 볼 수 있는데요. 퀘어커교는 조직이 없고 가장 자유로운 신앙을 가진 곳이니까 분열될 위험성은 전혀 없다고 보십니까?




― 퀘이커에서도 사업을 하려니까 최소한의 조직이 필요하고, 예배 인도자가 있어야겠다는 주장이 생겨서 한때는 목사 있는 모임과 목사 없는 모임 쪽으로 갈라졌었습니다. 목사 없는 모임을 언프로그램드 미팅(Unprogramed Meeting)이라고 하고, 목사 있는 모임을 프로그램드 미팅(Programed Meeting)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화해가 되어 하나가 되었지요. 아프리카에는 주로 목사가 있는 모임이 많지요. 케냐에는 신자가 한 만 명 될 겁니다.




* 또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과 명상하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 명상은 노자의 말처럼 마음을 비우라, 비울 수 있는 데까지 비우라, 비운다는 생각이 없으리 만큼 비우라 이것이야요. 기도는 마음을 채우는 것이지요. 교회에서 묵도할 때 피아노 치는 것, 저는 반대야요.




* 기독교에서 회개하고 새 사람 되는 것과 불교에서 참선을 하다가 도를 깨친 것과 같습니까?




― 교회에서 회개하고 성신을 받는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신을 받으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어요. 하나님의 영이라면 나의 에고(Ego)가 완전히 죽어 부정이 되어야 하갔는데 그것이 여간해서 됩니까? 완전은 못 되어도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가까워지지요.

이는 어떤 결과를 보려고 하지 말고 순수하고 단조한 마음으로 하노라면, 긴 세월 지나면 아 이런 건가 하는 뭐가 알려지는 것이 있지요. 말론 설명하기 어려우나 각자가 느끼는 것이 있을 거야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지요.


* 함 선생님의 종교 편력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걸 알기 위해서 묻고 싶은데요. 처음에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 처음에 장로교회에 있었지요. 그 다음 무교회주의, 그 다음 퀘이커가 되었는데 자꾸 변한다고 욕하는 사람들로 있어요. 처음에는 장로교회에서 순수하게 믿었는데 3?1운동 이후의 교회에 대해 불만이 좀 생겼습니다. 일본에 가게 되어 무교회를 택했었지요.

* 함 선생님은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은데 강연은 여전히 많이 하시지요? 피로를 느끼시지 않습니까?

― 아직 피로는 몰라요, 힘이 있어 할 수만 있다면 이젠 무얼 아끼겠어요? 허락이 되는 한도까지 말을 해보자고 하는데 말만 해서 뭘 하느냐는 사람도 있어요. 인도의 네루는 ‘나는 행동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으나 나는 ‘행동 못 하는 사람’이야요. 생각한다면 생각하는 사람이지.

우리 나라의 큰 결점이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야요. 국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을 만한 인격이 솔직한 말로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 참 걱정이 아닙니까? 그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목은 길러야지 기르지 않는 재목이 어떻게 큰답니까? 이조 이후 오늘까지 내려온 이 잘못을 어떻게 깨쳐 주겠느냐가 문제이지요, 내 생각과 다른 것은 없애버릴려고 해 왔지요. 그래서 나는 일부러 이제는 감정적인 문구는 사용 안하려 해요. 남들이 비겁하다고 볼는지 모르지만 나라가 잘 되는 것이 목적인데 욕을 해도 듣지도 않을 터이니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요. 참 걱정이지요.

* 우리의 사회와 역사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 그것은 내가 믿는 사람이니까 비관해서는 안되지요. 기독교 진리의 하나가 소망이요, 희망이니까. 무조건 긍정적 미래를 가져야지요. 세상을 내 지식 가지고 알 수 없지만 내 믿는 바에 의하면 바른 길, 잘되는 길로 가는 도중입니다. 산에 올라가다가 보면 내려가는 때도 있겠으나 그 다음 올라가기 위해 내려간다고 믿어야지요.

이런 믿음을 어떻게 심어 줄까가 문제이지요. 힘은 속에서 나오지 겉에서 들어오는 것 아닌데 믿는 사람들까지도 힘이 겉에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제야요. 젊은이들이 툭 하면 자살하는데 이는 생명이 위로 올라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생명의 길을 열어 주도록 노력해야 되겠는데 종교는 복 받고 재미있게 살아 갈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뭘 하겠오? 그래도 어려움을 이기는 정신적 힘은 종교 신앙에서밖에 나올 데가 없는데 종교가 그걸 못하니 종교 책임이지요. 핑계가 없거든요.

내가 어느 정도 한다는 의식을 갖고 하는 것은 내 용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것인데, 이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인 줄 안단 말이야. 노자?장자가 가만히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전국 시대에서는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서 했지요. 그래서 공맹(孔孟)은 퇴색해도 노장은 갈수록 서양에서도 자꾸 연구를 하지 않아요. 기독교 선배들이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나 나도 여기에 보람을 느끼지요. 동양에는 동양 진리가 있는데 먼지를 털고 끄집어내는 것이 옳지요. 나는 이제 크게는 못 하지만 내 뒤에 젊은이들이 하자고 하니까 보람을 느낍니다.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갔더니 노장 사상을 모르고서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더군. 좋던데, 그 소리 들으니까(웃음).

저 하늘 위에 올라가면 하나님이란 할아버지가 떡 앉아 있을 것으로 믿던 것보다 하나님이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는 그것, 얼마나 높은 사상이야요. 그러나 예수가 걸은 길 가운데 십자가라는 것, 이것이 참으로 독특한 데 이 점이 노장만 하고 가만 있을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이야기한 장기려 박사가 내가 노장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염려가 되어서 나에게 좀 분명히 말해 달라고 물었어요. 그때 ‘내가 노자도 좋아하고 장자도 좋아하지만 내가 믿는 내 주님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지 다른 이가 있겠느냐’라고 했더니 장 박사님이 울었어요. 나는 ‘야, 말도 안 하고 속으로 얼마나 염려했으면 그랬을까’ 이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 오늘의 병폐 중의 하나로 양극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마는 사상과 사회 정신에 있어서도 양극의 대립이라든가 흑백 논리 또는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 사고 방식 같은 것이 조화를 찾아 극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요. 난 이제 흑백 논리는 아주 싫어요. 한완상 씨는 그런 줄 다 알면서도, 현실의 필요가 있으니까, 이런 경우에는 흑백논리가 필요하다고 한 것, 그것도 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의 세계야요. 이 우주의 본의가 무엇인고 하니, 온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이나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이지요.

왜 이처럼 다원적이냐는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이 다 지적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가 다(多)이면서 하나(一), 하나이면서 여럿입니다. 생명의 단계는 처음에는 단세포이나 높아갈수록 다원화하게 되는데 여기에 따라 의식 작용도 미묘하고 복잡하게 발전해 가야하며, 이로 인해서 복잡하고 다원화된 조직을 가지지 않고는 안 된단 말이야. 이것들을 차차 과학이 헤쳐내는 것이지요. 바로 되면 이런 것들로 인해서 참 종교적 신앙에 갈 수 있거던요. 옛날 모양으로 모든 것을 의인화해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될 거야요.

이 담에는 종교가 그렇게 될 거야요. 공자가 하는 모양으로, 인도에서 브라만이라고 했던 모양으로 임퍼서날(Impersonal)한 것이 더 종교적이 될지 누가 알아요? 차차 의식이 높아지면 우리가 이 개체를 초월하는 모양으로 생각도 그렇게 될는지도 몰라요. 그릇이 깨어질려고 하는 현상인지도 모르지요. 지금 우리 보기에 싫은 것 나온다고 거기 너무 신경 쓰고 너는 없어져라, 그럴 수는 없단 말이야. 돋아날 때는 저것도 무슨 할 말이 있겠지, 공자 이야기가 나왔으면 그것도 무슨 발언권이 있으니까 나왔겠지!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 노자가 다 뭐냐 한다면 통쾌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너무 조그마해진단 말이야. 이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 하는 것입니다.

* 함 선생님은 이 같은 새로운 이야기도 “씨?의 소리”가 없으니까 강연에서밖에 못하시겠군요?

― 그러니까 강연이라도 열심히 해야지요. 씨?이란 말만은 어떻게든지 좀 널리 보급해서 새 말로 써 볼 필요가 있어요. 이걸 일반에게 널리 보급해서 국어사전에라도 올라야겠는데 아직도 생각있는 사람밖에 이 말을 모르지요. 국민, 인민이란 말 듣기 싫어서 오염 안된 말을 좀 썼으면 좋겠어요.

씨?과 민중이 같은 말이지만 기분이 좀 달라요. 바람은 새 바람이 시원한 것처럼 말도 새 맛이 나야 하는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는 말이 옳아요. 성경에는 사랑을 아가페란 말로 쓰지 않았어요? 이 말도 쓰이지 않던 것을 새 말로 쓴 것이지요. 요즘은 사랑이란 말이 또 진부해져서 사랑이란 말이 더러워진 것 같군요. 그 말 그만두고 옛날 모양으로 인(仁)이라든지 착하다든지 했으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시대의 말씀이 있으니까 생각이 새로 살아 나오는 제 옷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없는 말을 갑자기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 부문에서 쓰던 새 맛이 있는 말을 새롭게 채용할 수가 있어야겠지요.

선진국이란 말부터 더러운데 그것을 따라 갈려고 뱁새가 황새 좇는 격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스위스가 조그만 나라지만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잖아요? 무슨 독특한 정신으로 만들어 낼 것이 없나 이런 생각을 해야지요.

* 함 선생님은 책을 쓰실 때 항상 구어체를 사용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 글이라면 동양의 문장이라는 것 있거든요. 의미만 통하면 그만이 아니라 글은 글맛이 있거든요. 문체가 있어야 하는데 동양에는 소동파의 글이라든가, 성경에서는 이사야 시편이라든지 이런 글은 감흥이 오니까 생명을 움직입니다.

생명 자체가 음악적으로 교통이 안되면 글이 안 나오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걸 해볼려고 했더니 천재로 타고나야지 나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돼서 그만두었어요. 본래 재주를 못 타고 난 것 단념을 하고 생각나는 대로 쓰면 그만이지 해서 글체가 지금 그렇게 되고 말았지요.

* 함 선생님은 식사를 하루에 한 끼밖에 안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언제 하십니까?




― 예, 점심 한 끼만 하지요.




* 함 선생님을 비난한 책은 최근 서점 주인들이 진열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 그건 그러라고 그래요. 내버려두라고 그래요. 나는 믿으니까 하나님 일 아닌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 누가 어떻게 하겠나,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갔디. 내 잘못 없다는 것 아니야. 있기야 있지만... 이런 것을 내가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한국의 지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시험인지도 몰라요.




* 지금까지 함 선생님의 폭넓은 사상에 대해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함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종합적으로 느끼는 인상은 종교적 진리의 최고봉은 하나다, 높은 데까지 올라가면 동에서 출발하건 서에서 출발하건 서로 만날 수 있는데 중간에서 부분적인 것만 보니까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기독교 각 종파는 물론이거니와 각 종교간에 진리의 교류와 그 통합을 시도한다면 우리 종교와 사회의 조화는 물론, 전 인류가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지요.




― 그건 우리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 앞에서 말한 대로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사람 똑같은 얼굴은 하나도 안 만든다니 신기한 일 아니야요? 생명이 본래 그런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그리고 이 시대의 분위기가 큰 걱정이야요. 나야 아니지만 침체하고 기운이 죽어 있으니까.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

-----

5] 명상기도에 대하여

- 함 석 헌 -
『퀘이커서울모임월보』, 17, 1984년 7월.


명상을 해도 아무런 맛을 모르겠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무도 처음부터 명상의 맛을 아는 법은 없습니다. 쓸데없이 시간이 가는 것 같지만 1 분이 됐을까? 2 분이 됐을까? 시간이 이렇게 긴가? 시간이 다 됐을까? 그런 생각 마세요. 그런 것 하다가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그건 상관 말고, 어찌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내 마음을 온전히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한테 바칠 수가 있을까, 하나님만을 내 마음속에 바랄 수가 있을까 하고 노력하고 있노라면 차차 명상하는 것에 거기 무슨 맛이 있다고 할까, 그런 것을 짐작하시게 될 겁니다. 쉽게는 안됩니다. 그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늘 힘을 써야 되는 겁니다. 어린애가 공부하는 모양으로 외고 외고 뜻을 몰라도 자꾸만 외노라면 어느 때 홀연히 그 뜻을 알게 되는 모양으로 사람의 믿는 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잘못 배워서, 하나님의 뜻으로 되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건 아니라고 할 때에 그걸 잘못 배웠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고 손묶고 앉았는 것이 명상인 듯 생각한 데에서, 거기서 잘못이 왔는데,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산에 가면 만나는 것 아니고, 어느 물 속에 들어가서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이라고 하는 데에 없습니다. 어느 곳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어느 시간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거는 시간 ? 공간을 다 잊어버리고 내 마음을 될수록 순수하게, 잡념을 없애고 ― 그런다고 잡념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참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다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건데, 그런 거는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이 겸손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내 속이 살아서,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절대 하나님 그대로 의심없이 믿으려고 하는 생각에, 겸손한 마음으로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언제 끝이 날까 그런 생각에 붙잡혀버리지를 마시고 가만히 명상하시는 가운데 있노라면 그러면 아까 예언자가 했던 모양으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비우시고, 내 속에 말씀을 넣어주셨다고 하는 그런 체험을, 경험을 조금씩은 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그때 가서 비로소 남의 생각은 물을 것이 없이 스스로 짐작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이 우리 속에서 자란다는 것, 그게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언가 이제까지는 앞을 내다봐도 캄캄했었는데, 그러노라면 어둔 밤중에 무슨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어딘지 방향을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우리 속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 줄을 아시고, 우리가 공부를 도무지 안해서 우리가 그런 줄을 몰랐기 때문에 그러지, 우리보다 전에 있던 분들이 마치 이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지도해준 일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노라면 그속에 지금부터 수천년 전 사람들이 걸어가신 길이 있으니까, 그런 것을 다 아시는 것 같지만 될수록 읽고 또 읽고 해서 속을 읽노라면 그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보이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그래 우리가 몇이 모였든지간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지금 계시다 하는 확신을 이를 때까지 해보고, 그러는 게 명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보는 것, 하나님을 어느 처소에 가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을 명상하고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바라면서 생각하면 ― 다 되는 건 아니지만 ― 우리가 적당한 때 받을 만한 때가 되면 우리 속에, 우리 분에 적당하게 조금씩조금씩 아마 알게 되는 거 아닐까 합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6] 예배모임의 뜻

- 함 석 헌 -
『퀘이커서울모임월보』, 16, 1984년 8월.


하워드 브린튼 선생이 『퀘이커 300년』에서 미래의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이 있습니다. 퀘이커가 꼭 미래에 합당한 종교라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세상이 차차 달라져가는데 거기에 만약 미래 종교가 있다면 지금 퀘이커의 걸어가는 그런 노선 비슷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의 말을 했지요. 그건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무슨 의미로 그랬나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경험해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종교에서 문제되는 것의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퀘이커 발생 초기에는 신비주의가 상당히 강했다면 강했던 듯합니다. 영국 서북방 농민들이 타락한 국교의 모양을 보고, 자기네의 종교적 양심에 만족될 수 없음을 보고 자기네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모임을 같이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는데, 그 300년사(史)에 하워드 브린튼 선생이 그 모양을 묘사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7,8명 되는 사람들이 이 집 저 집에서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어떤 땐 아주 이상한 소릴 하는 사람들과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때 초기 기록들을 보고 하는 말 같은데,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 어떤 늙은 부인이 갑자기 “불이야, 불이야” 그래서 모두들 놀라고 있노라니까 “지옥 속에 있는 그 불” 그랬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저 사람은 뭐 정신나간 사람인가?” 그럴 것입니다. 그 사람들로서는 아마 명상을 하다가 감격해서 불, 불, 지옥 속의 저 불 그랬겠지요. 들여다본게 있어서 그랬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 지경을 알 리가 없지요.

거기서 문제되는 건 그럼 지옥이 땅 밑에 정말 있단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믿는 사람 중에라도 땅 속에 들어가면 지옥이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거요. 아주 단순하게 믿는 사람이 더러 있을는지 몰라도. 그러나 적어도 옛날엔 일반 사람들은 지옥이라는게 땅 속에 들어가면 있다고 그러고, 더구나 그걸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가 7층 지옥이라고 했기 때문에 땅 속에 들어가면 정말 그런 데가 있는 줄로 믿었습니다. 지금은 학문이 발달하고 그랬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모두 단순했고 물리적 지식도 없었으니까, 번개가 하나님의 눈빛이라든지 우뢰소리로 하나님이 노했다든지 그렇게 신화적으로 말을 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걸 그렇게 믿진 않아요.

그 말은 옳은 말이에요. 그렇지만 거기서도 우리가 주의할 거는, 그 사람들도 번갯불인 줄 알지 모르는 것 아닌데, 그러면서도 그때 사람이 그런 것은, 저것은 하나님의 눈빛이라든지 하나님의 노한 음성이라든지 한 것은 현실 자연계를 그렇게 믿었다는 것보다도, 그걸 보고 정말 하나님이 노하셨나 하는 그 깊은 속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속의 차원은 우리 현실 세계가 아니니까 형용할 수가 없는 건데, 그때 과학은 배운 것이 없고, 자연 현상은 살아있는 걸로 우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런 살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으로서 그렇게 뵈는 건 당연한 일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그럼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리가 있어서 우리 이성을 초월해서 계시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일이 어째 그런지, 어는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지, 개인의 노력만으로도 나라의 힘으로도 안되고 세계의 사람들이 들러붙어서도 안되고, 사실 일이란 사람의 힘으로 과학으로 미리 예측했다가 아는 것도 아니고, 인력으로 제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데, 그런 걸 어디 자기의 과학지식이 모르는 바라 해서 없는 걸로 여길 수가 있겠나.




그러니까 정신계라고 하는 그 차원은 어떤 과학자라도 그가 정직만 하다면 그걸 없다고 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신비 역시 없달 수는 없지요. 그런데 신비를 지금은 과학에 의해서 이게 단 줄로 아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신비라고 그러면 미신처럼 알아요. 그때에 번개를 그렇게 보고 우뢰를 그렇게 들었던 것을 지금은 미신이라고 그래도 좋지요.




그럼 신비가 없단 말이냐? 이성으로 모든 걸 다 안단 말이냐? 모든 사건의 원인은 사람의 조사한 걸로 다 설명이 되며, 일의 결과는 그럼 사람의 예측으로 다 알 수 있단 말이냐? 그게 안될 것은 뻔한 일, 그런데 어떻게 감히 신비가 없다고 그럴 수 있나. 지금의 인류를 가지고도 알 수 없는 점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란 말이오. 알 수 없는 점을 설명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그걸 뭣으로든지 느끼긴 느끼니까 인정을 안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걸 인정 안하는 사람은 현실에 있는 제 욕심을 채우려고 장난을 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에이 그까짓 게 있긴 뭣이 있단 말이야” 그러는 것뿐이지, 어디 그 사람이 그런다고 그게 없어지느냐 그 말이오.

그래 그런 면은, 그 하워드 브린튼이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 무슨 영향을 받았다든지 하는 증거는 내가 아는 한에는 없지만, 그렇지만 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요.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에선 어떤고 하니, 근대 사람은 현실적으로 이렇게 봐서 설명이 되는 거를 진리로 믿지 설명 안되는 건 진리가 아니다 그래요. 그건 현상계에 있어서는 옳은 말이에요.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까지를 그렇지 않고도 될 수가 있다든지, 기도함으로써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든지 그러는 걸 그대로 믿는 건 또 미신이라고 그래야지, 그걸 아니라고 고집하면 되느냐 말이오.

내가 아는 사람도,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뻔히 사람이 죽었는데 자기는 믿는다고, 그것도 처음 믿는 여잔데, 오래 믿은 이도 아니고 그런 여잔데 기도하면 된다고 해서, 시체가 자꾸 썩어 냄새가 나는데 나흘 동안을 붙잡고 낫는다고 그러고 고집을 하다가 마지막에 사람들이 막 시체를 잡아 끌어내고 그래서 그만뒀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거는 정말 어리석은 일이란 말이에요. 그거는 뭐 신비도 아니고 은혜도 아니고 성령도 아니고 그래요.

그런 일을 보니까 종교는 미신이다, 그걸로 인해서 괜히 무식한 사람이 세력있는 놈에게 잡히어가지고 밤낮 종살이만 한다 그렇게 유물론자들이 반대하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런데서 해방이 되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퀘이커는 그건 걸 뭐 꼭 가리러들지 않아요. 가령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냐? 역사적 사실이라고 ―뭐 아니라고까지 말할 자격도 없지만― 난 반드시 그걸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야만 된다고 그러진 않아요.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말이 나온 까닭이 있긴 있겠지요. 있긴 있어요. 그것이 반드시 요셉과는 관계가 없이 저 혼자만 나았다든지 뭐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지금 과학을 가지고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성립이 안되는 말이니까 그런 걸 기어이 고집을 해서 그래야만 믿는 거라고 그럴 건 없어요. 안 믿어지면 안 믿어도 괜찮아요. 난 안 믿어도 괜찮다고 그래요. 일 없어요. 또 부활을 했다면 정말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느냐? 그래선 뭘해요? 그런 건 아닐거요. 그럼 그 시체가 지금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했다면 하늘로 올라갔다는데, 하늘로 올라갔다면 어디로 올라갔단 말이냐. 그것은 분명 죽은 줄로 알았는데, 자기네가 모이는 가운데 예수가 나타나 말씀하시는 거를 체험했어요. 종교적인 체험을 속일 수 없이, 한두 사람만 아니고 여럿이 다 있는 데서 그런 게 한 번 아니고 여러 번 그랬기 때문에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 그래 그렇게 된 건데, 그런 문제는 과학으로는 안 풀리는 것, 그런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속에 깊은 곳에 있다는 거요. 사람이라면 결국 우주의 깊은 속에 뭣인지가 아직도, 이담에 가면 그것도 설명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설명은 안 되는데, 분명히 사람이 체험을 하는 그런 게 있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그럼 병을 고치는 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심리적으로 정신통일을 해서 됮는 것도 있고, 그 정도를 넘은 것도 있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노상 없는 건 아니지요. 우리도 해봤어요. 나 자신도 뭐 저 한동안은 우리 집에 있는 아이들보고도 그랬는데, “감기가 들어오면 그걸 맘대로 못 내쫓는단 말이냐? 내가 쫓으면 나가는 거지” 그런 소리까지 해본 일도 있는데, 그런다고 그게 반드시 오래 가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런 체험이 또 어느 정도 있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기도를 해서 병을 고친다고 그러고 예수님은 그걸 하시면서도 이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셨지요. 왜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을까. 그걸로 인해 잘못되는 일이 있을 거니까 말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니오? 자기는,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었다고 그러셨는데, 그런 능력을 주어서 사람을 고치기는 고쳐요. 그때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예요. 지금같이 의술이 발달된 것도 아닌 그런 때니까.




지금은 몇 발짝 건너에 하나씩 병원이 있는데, 하필이면 기도해서 낫겠다고, 가서 약을 조금 바르면 되겠는데 안하고 기도하면 낫겠다고 하다가 안되면 망신만 하면서 그 고집은 또 뭔가.




그러니까 기도함으로 해서 낫는 ― 그건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속에 스스로 내 생명을 유지해가는 힘이 있으니까 ― 그러나 그것도 절대는 아니오. 죽을 때 이르면 죽거든. 아무리 정신통일이 돼서 그걸로 인해 건강했다고 그러더라도 죽을 때 안 죽는다는 법은 없어요.




사람은 죽게 마련인 거니까. 그러나 엘리야 같은 사람은 안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겠지만, 그건 그때로 봐선 안 죽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르지요. 그 다음에 엘리야가 어떻게 됐는지 요새 세상 사람으로 봐서는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어쨌거나 사람인 다음엔 이 세상에 나서, 어느 정도 살다가 나이가 오래기도 하고 짧기도 하지만 반드시 죽는 거다 하는 걸 사실로 인정해야지, “이제도 잘 살기만 하면 안 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안 죽는 거 해 보여 봐!” 하는데 해 보일 수 없지 않아요? 그건 되는 때가 있고 안 되는 때도 있으니까. 그런 거는 우리 힘을 초월한 그런 거 아니오? 그런데 대해서는 알 수 없어 분명히 말은 못하지만 이런 게 있다는 정도는 알고, 그러나 그 이상은 또한 모르겠고……, 그런 건 그만큼 인정을 하는 게 옳을 거예요.


어쨌거나 퀘이커들은 그 점에 관해선 그걸 강조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예수가 말씀하신 그 정신적 의미들, 그걸 우리 생활에 실현하는 그 점을 강조하는 거, 그러니까 이렇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그러면, 나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서 앉아서 이 가운데에 정말 참하나님이 계시다는 그런 확신에까지 가보도록 노력하는 것, 내 마음의 속의 빛이, 속의 빛이란 말로 하기가 어려운 건데, 있기는 분명히 있지 않아요? 그거는 무슨 이상한 걸 봐야만 아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있어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속이 캄캄 어두울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건 우리도 환히 아는 일, 우리 정도로도 그것은 아는 거지요.

그런데 밝은 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힘써 된 거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에요. 또 깜깜하다고 해서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런 거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요.

어쨌거니 마음이라고 하는 세계에 들어가면 아직도 이치로만 설명이 안되는, 분명 그런 것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 게 있다면 그럼 우주적으로 무슨 근본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되는 게 당연한 거고, 지금에 와선 어느 편에선 너무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걸 하시면서도 이걸 이용해서 자기의 전도하는데 응용하려고 그러고, 무슨 운동을 일으킨다든지 그런 마음 없었어요.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그러고 가서 말해주셨어요. 할 수 없으니까 불쌍한 것들을 위해 주시고 그러셨지. 그럼 세상에 오셔서는 돌아다니면서 병이란 병은 내가 다 고친 다 그러셨나? 그런 거 아니오.

지금 종교 믿는 사람은 아주 그걸 본업으로, 돈을 벌고 그걸로 인기가 올라가고, 그건 전혀 예수님의 가르침으론 안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건 반대해 마땅한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가 뭐하는 건, 이렇게 앉아서 각 개체가 다 있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있는 ― 나도 지내봐서 아는 대로 ― 내 속의 빛이 밝은 지경엘 가면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지 하는 맘이 있어요. 평상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래도 정말 계실까 d니 계실까 그런 때가 많은데 말이오. 다 과거에 어느 정도 체험을 해본 게 있으면서도 역시 현실의 사람은 “어디 하나미 보여 주시오” 하게 돼요. 그렇지만 거 보여줄 수 없지요. “그럼 거짓말 아니오?” 거짓말은 아니지만 보여줄 순 없지. 그 이상을 말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렇지만 지내본 것이 분명 있지요.

목적은 이러는 가운데 나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 모였거나 셋이 모였거나 우리 속에, 이 가운데서 체험을 하자는 거요. 나 하나의 개인의 체험이라면 나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그런 체험을 하고 좋을는지도 몰라요. 그런 지경은 애들도 찾아요. 요새 보니까 애들이 본드를 사다 말고 그러는데 이놈들이 죽는 놈들이 생기는데도 그러는 건 황홀경을 추구한다는 건데, 이걸 봐도 마음속에 있는 황홀경 그걸 원하는 건 사실이란 말이에요.

거 왜 원할까? 알 수 없지요. 그걸 하나가 잘못하면 죽고 폐해가 나는 줄 알면서도 황홀지경에 들어가려 하는 것은, 그건 그네들이 모르면서 무지하게 그러기는 하지만, 본래는 종교적 욕구에서 나오는 거요. 뭣인지 모르게 이 현실에서 좋기도 하지만 왜 내가 걸음을 걸으면 요것밖에 못 걸을까, 왜 요것밖에 못 들을까? 내가 말을 한다면 내 뜻이 얼마든지 퍼질 수가 있으면 좋겠는데 왜 못할까. 이 속에 갇혀있는, 소위 육신이라는 게 좋긴 하지만 참 내가 이 속에 갇혀 있어서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런 줄을 모르는 때가 많지만, 스스로 스스로에게 충실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육체가 없으면 내가 못살긴 못살지만, 이걸로 인해서 요것밖에 못 된단 말이냐 하는 거기에 슬픔이 있어요. 만일 그게 없다면 시가 나올 리도 없고 그림도 나올 리 없고 음악도 나올 리 없어요. 그런 깊은 곳이 있기 때문에 시가 그림이 음악이 나오는 건데, 이런 거를 한편으론 근래에 과학이 발달해서 미신적 요소를 우리에게서 제거해 주니까 도리어 좋지 그게 우리에게 방해되는 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이렇게 앉아있는 이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다든지, 더 나아가 우리가 아무리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한다 해도 내 몸뚱이 네 몸뚱이 이 사람 저 사람이 갈라져서 서로 이거를 잊을 수가 없는데, 어느 순간에 가면 이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그 생각이 개인을 초월해서 시공도 초월해서 역사를 초월해서 있는 무슨 그런 일이 있는 것을 느껴보는, 시원하게 느껴봤다고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걸 바라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역사에 비추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 이리 앉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하는 게 참되게 하질 못해요. 그래 힘이 드는 거예요. 난 분명 개인의 마음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개인의 마음속에 나오는 잡념을 제거해버리는 거고, 기도를 한다면 내 속의 기도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것이 하나로 이 속의 전체의 것이 서로 통해서 이 속에 정말 우리 속에, 수가 많지도 않고 또 우리가 별 사람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정말 우리 속에 이 시간에 계시다는 것.




그러는 걸 느껴보는 시간, 감히 우리가 그걸 완전하게까진 못 가도 비슷한 데를 느껴보기만 해도, 그래도 우리 안에 무엇이 있지 않아요? 감히 다 됐다고 증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거니까, 참 수도 적고 그렇지만, 이제 앞으로 이 세계 속에서 사람의 생각이 달라지니까 종교도 많이 달라져야 할 거에요.

그런 점이 있어서 과학이라든지 이런 거를 지내보고 여기서 전혀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던 가지가지 험악한 죄악도 짓고, 나쁜 짓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걸 경험하면서, 그러면서도 역시 사람의 근본을 버릴 수 없는데, 사람이란 너나의 구별이 없이 사랑하는 것이 그 본능이에요. 사람만 아니라 생명을 사랑할 줄 알아야지 하는, 거기서 보람을 느끼고 그런 게 없이는 나는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종교적인 그런 것을 비교적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려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

7] 예수의 비폭력투쟁

- 함 석 헌 -
<바보새>에서

통사람 예수

예수는 통사람(全人)이지, 조각 사람이나 어느 모의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이지, 무슨 사상이나 어떤 운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란 말은 그런 뜻에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대하는 태도도 통사람적이고 산 숨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느 모서리에서나, 무슨 주의에서 하는 봄이나 들음이나 만짐이나 끌어댐•맞춰봄•본뜸•내세움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믿을 때 우리는 그를 몸•마음•혼을 다해 충성으로 섬겨야 하고, 그를 증거하는 것을 우리 일생의 사명으로 삼아야 하는 그는 ‘생명-참-길'의 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비폭력투쟁이라는 말은 마지못해 하는 말입니다. 그는 비폭력주의자도 아니요, 투쟁을 한 쌈군도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도 통채로이신 이요, 산 숨이신 이입니다. 그는 그저 그뿐이므로, 그저 ‘그이'라고 부를 일이지, 어떤 이름이 가 붙을 수 없는 이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두루뭉수리(混沌)에다가 구멍을 뚫자고 손가락을 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지못해라니 그 마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심인가? 싸울 것인가 싸우지 말 것인가 하는 의심, 또 싸우는데 폭력을 쓰는 것이 옳으냐 쓰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의심입니다.

환하다면 처음부터 환한 것입니다. 물결없는 바다가 어디 있을까? 물결이 있는 이상 그것과 싸우지 않을 고기가 어디 있으며, 고기를 배워 된 것이 배인 이상 물결과 싸우지 않는 배가 어디 있을까? 바람 안 부는 허공이 어디 있을까? 바람이 있는 이상 그것을 타지 않을 새가 어디 있으며, 새를 배워 된 것이 비행기인 이상 바람 타지 않는 비행기가 어디 있을까? 맨 처음부터 숨이 있었고, 숨의 진동이 바람이고, 바람 있으니 물결 있고, 물결 속에 사는 것이 싸움 아닌가? 숨은 본래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니, 폭력이란 것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환하다면 맨 처음부터 환한 것입니다.

환한데 의심은 왜 일어났을까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없는 동물•식물에 의심이란 것은 없습니다. 의심을 하면 했지 왜 싸웁니까? 너 나 때문입니다. 아담이 혼자일 때 싸움은 없었습니다. 혼자던 것이 왜 너 나로 갈라졌을까? 왜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다고 했을까? 싶어서며 고파서입니다. 무엇이 하고 싶어서, 또 하고 파서입니다. 알고 싶고 사랑하고파서, 한 나가 너 나로 갈라졌습니다.

앎은 물건에 대한 사랑이요, 사랑은 나에 대한 앎인데, 그렇게 하고파서 한번 갈라지고 보니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앎에는 모름이 따라왔고, 사랑에는 미움이 따라왔습니다. 해 아래 있는 것이니 그림자가 없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어딘가에 모를 것, 잘못된 것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러 동생을 죽였습니다.

예수는 본래 잘하잔 노릇이 잘못된 사람의 근본적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 나타나신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된 것을 고치는데 물질과 정신의 오고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싸우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싸움이라 해도 좋습니다. 적어도 너는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싸움, 너를 모르는 놈으로 만들고 나만을 옳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전체를 건지자는 것이 그의 싸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 일 하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으니 싸움이라면 싸움이지만, 그것은 싸움아닌 싸움입니다. 인류 역사상에서 그것과 같은 종류의 싸움은 하나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찌 폭력으로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어떤 위대한 인물도 그의 마음 속 깊은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내 심리에 비추어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이 통으로 산 생명의 사람, 하늘 숨의 사람은 내 심리를 미루어 보는 방법으로는 못 가 닿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감정•이성만으로는 이해 못하는 인격입니다. 사람인 이상 그도 감정과 이성이 있었을 것은 사실이지만, 또 누구보다도 더 맑은 감정이요 뚫린 이성이었겠지만 그것만이 그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 자신이 바로 “새로 나지 않고는, 영과 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히 구별해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보다 먼저 온 자는 강도”

현대는 학문이 발달한 시대이므로 무지가 많이 없어진 대신 소박한 무지보다 더 무서운 지식적 무지가 사람들 특히 정신적인 일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높은 영적 체험은 이성의 경지를 초월하는 데 가지 않고는 안 되지만, 그것을 인간 사이에 나눠주기 위해서는 말과 글로 써 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웬만큼 이성이 발달한 사람은 읽으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이해냐 하면 결코 아닙니다. 이런 것은 정신세계에서는 초보적인 주의 사항인데도 지금은 그것도 지키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남이 일생을 걸려서 가시덤불, 불꽃 속이라고 형용해도 부족한 정신적 시련 끝에, 그의 인간적•지적 노력을 다 내버리고 나서 비로소 얻은 체험을, 몇시간 몇날 동안 읽어보고는 다 이해한 것처럼 옮깁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의 소매상이며, 그나마 그것이 그대로 있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팔 경우 변질이 되지 않지만, 영적 체험은 본인의 입에서 일단 나온 순간 벌써 식어서 굳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다시 생명적이 되려면 나 자신의 혼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 가지고 내 것으로 다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보다 먼저 온 것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는 지독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모르긴 모르지만 서점에 홍수처럼 넘치는 종교 서적들이 이 잘못에 빠지지 않은 것이 몇 개나 될까요? 성경 그대로를 읽어주어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 말씀은 아닌데, 그것을 하나님 말씀이라 하니 잘못이 거기서부터 나오고, 또 그것만이라면 좋겠는데 심지어는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귀절을 끌어댑니다.

그러나 말하는 그 자신이 예수와 같이 영으로 새로난 사람은 아닙니다. 백 중에 아흔아홉은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물론 시대는 달라지는 것이고, 시대가 달라지면 종교의 경전도 고쳐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석을 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그 달라짐은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고쳐났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의 사람의 눈이 뜨이지 않고는 시대 변천을 당해도 뚫어볼 줄을 모릅니다. 제 나름대로 뚫어본다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사탄의 무리도 하는 말입니다.

그 어느 것이 옳으냐는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한 말로 선(善)인데, 그럼 선은 무엇입니까? 현대 학자는 곧 선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잘못이 생깁니다.

물론 변합니다. 그러나 그 변하는 것은 겉에 속한 것, 일상의 생활에 속한 것이고, 그 밑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보수적으로 죽은 종교를 믿는 사람은 곧 대답하기를 하나님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절대계에 있는 하나님이요, 죽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를 만나려면 그가 현실 속에 내려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현실계의 어디에 계십니까? ‘전체'입니다. 부족에서 계급으로, 계급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세계로 그 수에서는 달라졌지만, 언제나 그 전체가 나만도 아닌 너만도 아닌 또 누구만도 아닌 대다수만도 아닌 전체인 성격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동서고금의 어떤 종교에서도 그 위대했던 예언자, 성자란 사람들은 다 자신의 사람인 동시에 전체에 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의미에서 그들은 선했고 옳았습니다.

이러한 영만이 옳은 영인데, 그렇지 못하고 제가 스스로 새로 났고 뚫어본다 하면 그것은 협잡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탄입니다. 일러 말씀이 있기를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이지 분열케 하시는 이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폭력이 뭡니까? 나만을 옳다는 것, 나만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근본부터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쪽이 잘못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 아니나, 영의 눈으로 볼 때 그 저쪽도 남일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참 나이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할 때 그에게 잘못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입니다. “本是同根生인데 相煎何太急고”,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왜 이렇게도 뜨겁게 서로 지지는 것입니까?

예수가 가르쳐 주신 첫째 교훈은 사람이 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에 벌써 모든 것은 환해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몰랐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원수로 알았고 그리하여 죽였습니다.

잘하고 잘못한 것이 형제의 관계를 변경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 잘못은 내 마음이 택하여서 한 것이고 형제 관계는 창조 당시부터 한 영에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유기물입니다. 서로 한 데 들어 하나로 있는 생명입니다. 지극히 작은 어느 부분을 잘라도 전체는 상합니다. 이 점이 어려운 점입니다. 이 점이 어려운 점입니다. 생각하는 인간에 있어서 감정은 이 작은 나에 붙어 있는 것이므로 특별히 힘써 그 나의 갇힌 생각을 깨치지 않고는 우리 이성은 그 좁은 감정의 지배를 받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옳은 것을 위하여서는 잘못된 놈은 죽여도 좋다는, 제법 옳은 것 같으면서도 크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신학적 설명을 할 것 없이 예수는 창조의 첫날부터 인간의 영혼을 가두고 있는 무섭게 잘못된 감정을 깨우치고 제 위신을 잃은 이성을 해방시켜 온전히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다른 말로 해서, 전체에 봉사하는 것이 멸망을 면하고 살아나는 길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 특히 지배자들과 잘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던 분입니다.

예수는 간단명료하신 이였지, 복잡하고 넓은 지식을 동원하여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모를 것을 가르쳐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만 아니라 위대한 스승들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진 것은 문명 때문인데 문명의 목적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할 것을 아니하고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꾀부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에 잘못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마다 제 할 것을 의무로 알고 정직히 그것을 했다면, 그리고 마땅히 할 것을 피할 생각을 아니했더라면, 인간 사회가 이렇게 까다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을 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보지 않고는 사치•향락을 위한 대규모 공장조직의 기업을 하면서 평화를 추구하기란 어렵습니다. 절대 안될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사는 목적이 영의 사람에 이르는데 있는 줄 알고 그것을 잊지 않았던들, 행복을 약속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지옥으로 끌어넣는 이런 문명병의 수렁에 빠지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근본에서 보면 환한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장자의 말대로 기계가 있으면 기심(機心) 즉 깜찍한 마음이 생기고, 그 깜찍한 마음이 가슴에 한번 들면 진리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여러 말 할 것 없어 비폭력을 실행 못하겠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뒤에 세워 논 그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대를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그런 것이 없고 인간 대 인간으로 싸운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입니다. 누가 먼저 사람 죽이기를 좋다 하겠습니까? 예수에게 대들던 바리새 사람들조차 누구나 자신 있는 사람 먼저 돌을 던지라 하니까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수께서 만일 칼이라도 뽑아들고 호령했다면, 그까지 갈 것 없이 욕지거리라도 했다면, 어찌 물러갔을까요? 가만히 수그리고 앉아 무한히 불쌍히 여기는 얼굴에 조용한 목소리로 했으니 도망갔을 것 아닙니까?

양심 하나만 깨면 무기가 문제없습니다. 왜입니까? 양심은 하나기 때문입니다. 네 양심, 내 양심이 따로 없습니다. 아버지 아들에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인종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폭력을 생각할 때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가 해방자라는 말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주의하여 쓰지 않으면 도리어 큰 잘못을 일으킵니다. 보라, 세상에 해방자를 자칭하는 혁명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들이 정말 혁명가입니까? 레닌, 스탈린이 그렇게까지 해방 선전을 아니했던들 세계가 오늘같이 이렇게 어지러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좌우익을 물론하고 모든 혁명가는 다 협잡꾼이었습니다. 하도 학대에 시달려서 행여 그가 바라던 해방자인가 했다면 동정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경우에도 그렇단 말입니까? 거기 속는단 말입니까? 그것도 뚫어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것을 못 뚫어 본다면 눈이 아직 어두운 것입니다. 그럼 예수한테 무엇을 배웠습니까? 가짜 혁명가, 해방자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의무입니다. 눈에 있는 들보와 티의 비유는 왜 하신 줄 압니까? 너희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높지 못하면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하시는 말은 무엇으로 들었습니까?




생명-참-길의 님

해방이라니, 그저 좋다는 것은 먹으라니 다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독을 넣은 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독든 사상은 더 많습니다.

글쎄, 무엇이 부러워서 예수를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보자는 것입니까? 그렇게 부러워 뵙니까? 그렇다면 예수의 혁명은 아직 못 경험해 본 것이 사실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는다. 묵은 술 마신 사람은 그것이 좋다 한다”고 한 말씀 무얼로 들었습니까? 우리 예수의 가르침보다 더 높은 가르침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거야말로 사람을 더럽힌다 했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조금도 진동이 일어나지 않았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해방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주, <생명-참-길>의 님을 레닌, 스탈린, 판쵸빌라의 계열에 세우고 싶어 한단 말입니까? 혁명, 해방, 승리에 미쳤습니까? 미치지 않는 것이 해방입니다. 종교조차도 미친 건 참 종교가 아닙니다. 이성이 초롱초롱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스스로 자기를 깨울 능력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온다고밖에 할 수 없는 빛에 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파라독스입니다.

물어봅시다. 자아에서 해방되지 못한 내가 누구를 해방시킨다는 말입니까? 역사가 있은 이래 오늘까지 되풀이되어 온 악순환에 대하여 인간은 그런 것 아니냐 하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말이 끊어집니다.

네 눈 속에 큰 들보를 먼저 뽑아내면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뽑을 수 있다 했습니다. 티는 무엇이고 들보는 무엇입니까? 나의 자아 주장이야말로 전 세계와 그 역사를 못 보게 하는 대들보 같은 악이고, 강도 살인하는 온갖 무서운 죄란 것은 도리어 내 속에서 들보가 빠지기만 하면 문제도 아니되는 작은 것이란 말이 아닙니까?

그대는 현실주의를 자랑하렵니까? 나는 영원한 실패자란 말을 들으면서도 예수의 발밑에 서서 이상주의자가 되겠습니다. 이상주의가 뭡니까?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다 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직공들조차도 변변히 먹지도 못하면서도 우리는 봉급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권을 위해 싸운다 하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우선 내 인권은 지켜야 할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인권을 아는 사람은 내 인권을 지키기 위해 남의 인권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싸움에서는 사람 죽이는 전쟁에서보다 더 엄격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감정으로 치닫는 것이므로 본래의 목적이 정당하면서도 어떤 해를 입을 때에는 본능적으로 원래의 정당한 목적을 잊고 폭력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전도하실 때는 제자를 골라 뽑아 자세히 일러주고 친히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저 하신 줄 알면 크게 오해입니다. 공자(孔子)의 말에 “가르치지도 않고 싸움시키는 것은 씨?을 버리는 일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싸움은 보통 사회혁명과 같은 계열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당장의 목표는 같을 수 있습니다. 악제도를 고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관, 역사관이 보통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만일 다를 것 없다고 생각되거든 일반이 하는 투쟁의 대열에 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필 예수의 언행을 빌 필요 없습니다. 필요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진리에 충성하여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어, 혼 속에 내리는 그 절대자의 명령대로 하기 위해, 빌라도 앞에서 말 한마디도 아니하고 십자가 위에 고스란히 죽은 그, 미안해서 어찌 그 이름을 도둑질할 수가 있습니까? 욕지거리를 맘대로 하고 주먹질도 참지 못하고 하는 이 내가.

그러니 내 말은 곧 이것입니다. 영이고 정신이고 없다면 모릅니다. 있다고 확신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길이야말로 참 길이라 믿어서 그 이름 밑에 싸우려거든 우선 그의 뜻을 깊이 이해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킬 것을 서로 약속하고 나서자는 말입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가 아주 형편없이 어지러워진 때에 났습니다. 그는 결코 오늘날의 보수주의 신자들이 믿는 것처럼, 이 세상은 꿈 같은 곳이고 죽은 후에 무슨 환상같이 영혼이 가서 행복하게 사는 그런 따위의 하늘나라가 있어서, 그리로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기도에서 보는 대로 이 세상 나라 내놓고 또 무슨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것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주권은 망한 지 벌써 오래되었고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서, 그 밑에 있는 유대인의 괴뢰 정권이나 종교의 지배자들이 모두 다 썩어 있어서 그는 한마디로 그 백성을 목자 잃은 양이라 했습니다.

유대 역사의 등뼈가 되는 정신은 ‘메시아'라는 말로 표시되는 하나님과의 약속인데, 그들은 그 시대 시대에 있어서 그 메시아의 실현을 기다리다 못해 실망하고 지쳤습니다. 다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언자란 오늘날 말로 한다면 자유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언제나 그 시대의 메시아의 산파역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와서 그 예언자란 것조차 끊어진 지 4백년이 넘었다고 하니 그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런 때에 나서 그가 하려 하신 것은 결코 전에 모든 거짓 위대한 지도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근래에 학자 중에는 그를 하나의 정치혁명가로 보려 하기도 한다지만 그것은 현대적인 학문 연구의 잘못으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예수를 바로 알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해 보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역사만이 결코 참은 아닙니다.

결과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결코 정치적이라는 한 부류 속에 집어넣을 인물이 아닙니다. 참 의미에서는 나는 성경 안에 갇힌 예수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또 성경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계시라 한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성경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 비판하여서 예수의 사실을 다 밝힐 수도 없을 것이고, 또 밝힌다 해도 예수는 그것으로 모두가 아닙니다.

예수라는 인격은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가 인류를 건지기도 했지만, 또 역사를 건지는 생명이기 때문에, 역사는 예수의 인격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미완성입니다. 역사적인 예수는 그것의 그때의 나타남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한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하나의 정치혁명가로 본다는 것은 망발입니다. 학자의 소린 될지 모르나 그는 참 예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인격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라는 말에 단적으로 표시됩니다. 그러므로 폭력을 썼느냐 안 썼느냐 하는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가 나타내 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나는 내 말을 하는 것밖에 없지만, 내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민주주의가 구경의 목적이어서도 이 나라가 구경의 목적이어서도 아니요, 예수가 보여주셨고 앞으로도 보여주실 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는 것이 이 나라를 내놓고는 할 수 없고, 또 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내놓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한다는 것을 밝혀 말합니다.

민주주의와 나라를 비할 때 나라가 보다 더 큰 개념이요, 나라와 진리를 비할 때 진리가 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진리를 위해 나라를 부정하면 나라가 살아나지만, 나라를 위해 진리를 부정해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어집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과 권세 있는 자 앞에서, 사람의 아들을 아노라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아노라 하겠지만, 만일 사람들 앞에서 사람의 아들을 부인하면 자기도 그를 부인하겠다 한 것은 그가 어떤 권위를 가지신 것을 밝혀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이용하려 했던 자는, 그 이용하는 목적이 아무리 큰 것이라도, 아니 온 우주라 하더라도, 그는 그 돌 위에 떨어져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등불이다” 하셨습니다. 소금은 뭐고 등불은 뭡니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생활원리임을 밝히신 것이라 믿습니다. 소금은 참이요, 등불은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이치가 있지만 요약하면 이 둘에 그칩니다. 우리 투쟁의 원리도 이 둘에서 벗어나서는 아니됩니다.

소금에 관하여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할 수 있을까?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밟힘이 될 것이다” 했고, 또 다른 데서는 “너희도 소금을 지고 서로 화목하라” 했습니다. 등불에 관해서는 “누가 불을 켜서 발 아래 두겠느냐? 높이 대 위에 올려놓아 모든 사람을 비추도록 하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 자명한 진리로, 누구나 설명을 요치 않고 다 아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짓된 수단을 쓰고 비밀리에 계획을 꾸며 폭력으로 투쟁을 해 바른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마치 짠맛이 없는 소금으로 생선의 썩기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등불을 발 밑에 두고 방안이 밝고 서로서로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모든 교리 대신 오직 평화를 존중합니다.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모든 교리 대신 오직 평화를 존중합니다.
wy 0 2019.06.05 10:27







철원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포천으로 뚫린 새 길을 강남에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리니 도착했다.
개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철원, DMZ의 봄은 이미 지났고 녹슨 기차 길에 녹음이 울창했다.

평화학교를 안내하기 위해 마중 나온 정지석박사가 온화한 미소로 필자를 반겼다.
그는 퀘이커 교도이고 국경선 평화학교 교장이며 목사님이다.
얼마 전 성공리에 마친 “4 27DMZ민+평화 손잡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최: 우선 ‘4 27평화 손잡기’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정: 공식 명칭은 “4 27DMZ민+평화 손잡기운동”입니다.

남북의 분단이 너무 길고 아파서 이제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남북 평화 통일의 열망과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는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운동입니다.

이 일은 시민들의 안전과 삶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적극적으로 평화 통일에 대한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작년 4월 27일, 남북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손을 잡은 지 1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DMZ 500Km의 국경선 마을에 시민들이 평화의 손잡기 운동을 하자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런 운동을 한 것이지요.

최: 상당히 감격적이고 성공적인 행사였습니다. 어려운 점도 많으셨지요?

정: 네, 저희들은 처음부터 확실히 잘 된다는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많은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런 큰 관심과 행사 일정에 대한 세부적인 질문에 충분한 설명과 안내가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조직적 단체가 아니고 순수히 시민들의 마음을 합쳐서 시작하다 보니까 그런 면에서 당황도 좀 했고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좀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 일을 하자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이 별로 신통치 못했던 점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일을 하실 만한 분들, 주로 지식인들인데 이분들을 만나면 “뜻은 좋은데 과연 되겠느냐” 며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이럴 때 힘이 좀 빠졌습니다.

최: 네 워낙 엄청난 일이라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지요.



반면에 이 일을 추진하는데 같이 동참한 분 들도 많이 계시지요?







정: 우선 이 일은 종교적인 체험으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하지만 실질적인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저도 어떤 때는 현실감이 좀 없었어요.





몇몇 목사님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계속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안바나바 목사님이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해 나가자는 권유에 다시 활력을 얻었습니다.









왼쪽부터: 백용석 정동수 노정선 한정석 정지석 이환진 나핵집 안바나바 김찬수 (존칭생략)





최: 구불구불한 DMZ 500km를 시민들이 손을 잡아 연결하려면 50만명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20만이 넘는 분들이 이 평화 손잡기에 동참하였습니다.



참 많이 오셨네요.







정: 저는 처음에는 100만이 오실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ㅎㅎ



다만 이분들이 왔을 때 어떻게 안전하고 즐거운 행사가 되게 하느냐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여 인원의 윤곽이 잡히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의 헌신적 봉사가 이번 행사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해 철원에서는 영접 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또 어디서 어떻게 손을 잡고 서야 할지거리 곳곳에서 실측을 해주셨어요.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이 이번 행사 성공의 큰 힘이었지요.











최: 이번 일로 DMZ 주위 시민들이 이런 행사에 동참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년 4 27에도 계속 이러한 행사를 하실 건가요?







정: 저는 그런 생각이 없고요…그때가 되면 또 그런 뜻을 가진 분들이 하실 수 있겠지요.



다만 이 손잡기 운동이 평화의 불길 운동이라면 이 불길이 생각지 못한 다른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평화 컨퍼런스도 열었는데 여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교 선생님들이 참석하였지요.





이 분들이 4 27행사를 보시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 운동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지대에서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했고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오신 어느 신부님은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서도 이런 운동을 하자는 제안에 내년 9월에 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6Ydb2Uvk0&t=256s




최: 네 한국의 평화 손잡기 운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박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국경선 평화학교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정: 국경선 평화학교는 ‘피스메이커’, 남북한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로서 2013년 3월 1일 개교를 했습니다.





그 전에는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러한 피스 메이커를 길러야 한다고 말만 해왔는데, 어느 순간 내가 직접 해야겠다는 각성이 들면서 미국에서 철원으로 2011년에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 이 학교는 아직까지 한국의 교육 제도에는 없는 학교입니다.



대안학교도 아니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신앙 운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간혹 고마운 분들이 학교 재정에 보탬이 되라고 얼마씩을 주시는데 현 제도상으로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 자발적으로 기여한 돈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통일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평생교육기관으로 등록을 해서 정식으로 교육부의 산하 기관이 되려고 합니다.







최: 국경선 평화학교의 뜻에 동참하여 강의를 하시는 분들 중 저명인사도 많이 있으시지요?







정: 네, 석좌교수 중에 한완상박사님, 서광선목사님, 박경서박사님 등이 있으시고요, 해외의 평화학자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최: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정박사님은 퀘이커 교도로 알고 있는데 퀘이커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공식명칭은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정: 네, 이사람들은 교단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개신교는 독일의 루터로부터 시작 되었지만 퀘이커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국 퓨리탄으로 시작 되었는데 퀘이커는 퓨리탄의 spiritual 좌파입니다.







최: spiritual 좌파가 무슨 뜻인가요?







정: 여기서 좌파라는 것은 종교적 의미이고, 제도권을 싫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도에 종속되는 순간 영적인 자유가 손상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최: 전통적 기독교로서는 생소한 개념인데요…교리도 일종의 제도라고 보는 건가요?







정: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라는 것은 어떤 신앙단체의 방향이나 믿음의 근간을 규정하는 것이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런데 퀘이커는 이런 제도적 교리들을 일체 거부합니다.



퀘이커가 가장 철저히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 것은 평화입니다.







최: ‘4 27 평화손잡기’나 국경선 평화학교가 모두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정박사님이 하는 일들은 이런 퀘이커리즘의 평화 정신과 직결 된 것 같습니다.





퀘이커 자체는 기독교이지만 교리가 없고 폭이 넓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도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더군요.







정: 네, 사실 퀘이커만큼 포용적인 기독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퀘이커들을 보면서 좀 어색하고 이상했는데 이들의 포용력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단이라는 생각, 그런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꾸로 제도권 기독교에서 퀘이커를 약간 이단시 하고 있지요 ㅎㅎ







최: 지금 한국 전통 교회에서는 퀘이커를 이단으로 보고 있나요?







정: 감리교나 통합 측에서는 이단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외에 근본주의 보수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퀘이커 창시자 조지 폭스





최: 정박사님이 쓰신 ‘퀘이커리즘으로의초대’ 라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서 박사님은 ‘퀘이커리즘은 오랫동안 잃어버린 기독교의 원형과 본질을상기 시켜준다’ 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정: 퀘이커들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Faith and practice 입니다.





믿음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은 미신이고 실천만 있고 믿음이 없는 것은 단순한 행동주의겠지요.



그래서 믿음과 실천의 일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저는 거기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그 일을 세상 속에 들어와서 실천하신 분이니까요.







최: 그렇게 좋은 퀘이커를 믿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정: 네, 퀘이커 교도는아직 극소수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전도’ 라는개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퀘이커는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 신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전도를 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모든 지구촌이 교회라고 봅니다.







최: 한국에 퀘이커가 들어온 지는 얼마 안되지요?







정: 퀘이커는 6 25가 나고 1953년에 한국에 처음 들어 왔습니다.



주로 개인적으로 와서 구호 봉사와 함께 병원을 했습니다.





군산에 있는 군산 의료원이 바로 퀘이커 개인 의사들이 처음 와서 시작한 겁니다.



이후 함석헌선생이 무교회주의 신앙을 거쳐 퀘이커가 되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또 퀘이커는 상당히 개인주의 같으나 동시에 공동체의 영성을 추구합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조직이 아닌 공동체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영성을 보장하면서같이 성장하는 것이지요.







최: 퀘이커가 역사적으로 이룩한 최초가 참 많더군요.





노예제도 반대부터 시작해서 전쟁 반대, 여성 투표권 보장 등 어느사회 단체 보다 이런 운동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는 것도 여호와의 증인보다 먼저지요?







정: 네, 그래서 처음에는영국 사회에서 퀘이커들에 대한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은 전투에는 참여 안 하지만 전쟁터에는 나갑니다.





나가서 전투 못지 않게 위험한 일들을 하는 데 전쟁터에서 부상 당하여 쓰러진 사람들을 나르는 작업 등이지요.



자신을 방어할 무기인 총도 들지 않은 채 말이지요.





독일 폭격기가 런던에 폭탄을 퍼부을 때도 퀘이커들은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시내 곳곳에서 폭탄의 잔해에 깔려있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운반하는 일을 했지요.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러한 일들을 하는 퀘이커를 보고 당시 영국 사회의여론이 퀘이커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점차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습니다.





그 결과, 단체로는 최초로 1947년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는 줄어들고 있는데 퀘이커는 2만 명을넘어서는 성장을 하고 있지요.



주로 젊은이들이 퀘이커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 왜 젊은이들이 그런가요?







정: 우선 그들은 퀘이커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 모임은 한 시간 동안 침묵 기도만 하니까 누가 나와서 이것을 따르라거나 무엇을 회개하라등의 지시가 없는 겁니다.



목사 없이 침묵 기도 후 원하는 사람은 느낀 바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종교성을 체험할 수 있으니 젊은이들이 모이는 듯합니다.





다음에는 Peace , 사실 토니 블레어가 미국 클린턴의 요청으로 이락을 폭격 할 때에도 퀘이커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렇게 퀘이커의 유일한 교리랄 수 있는 평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영국만 아니라 미국 북동부, 청교도의 후예들이 많은 곳에서도 퀘이커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 한국에서는 아직 좀 이상한 이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ㅎㅎ







최: 퀘이커의 침묵기도도 특이하지만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도 특이합니다.







정: 네, 형식으로는 정반대지요.



퀘이커 침묵의 핵심은 체험입니다.





무엇을 체험 하느냐 하면 신적 체험, 신과의 만남을 침묵 속에서 하는것입니다.



이를 위해 침묵 속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waiting, 기다림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퀘이커의 침묵은 그래서 적극적 침묵입니다.



이 것의 핵심은 mystic. 신비입니다.



통성기도 하는 분들은 오순절 파인데 형식은 다르지만 내적인 신비체험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 퀘이커는 이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보나요?







정: 이 사람들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이 세상이 곧 죄로 멸망하고, 이 땅은 마귀가 공중 권세 잡았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Original sin이 아니라 Original goodness로 보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아주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최: 정박사님이 미국에서 아무 연고 없는 철원으로 오신지 8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기서 지내온 느낌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말씀 해주시지요.







정: 50이 넘어서 기도 중에 인생의 후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하면서 그 길을 찾은 게 여기 였는데.. 저는 하나님께 행복하게 그리고 허무하지 않게 살고 싶다고 기도 했습니다.







최: 그 동안에는 좀 허무하게 사셨나 봅니다. ㅎㅎ







정: ㅎㅎ 네 사실 그런 느낌이 많았습니다.



목사로 일하면서도 그러한 허무감이 점점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이 여기 철원인데 처음에는 너무 엉뚱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지요.



제가 2011년 9월에 철원에 왔는데 그 후에는 허무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을 지켜 주셨고 저도 이 곳에서 지금처럼 학교일과 평화운동을 계속 하려 합니다.



철원이 공기도 좋고 먹거리도 참 건강식입니다.



모든 면에서 분에 넘치게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최: 네, 정지석박사님.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퀘이커를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좋은 사람’ 동시에 ‘좋은 기독교인’ 이란 말이 있던데 이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오늘의 만남을 퀘이커의 침묵 기도로 끝냈으면 합니다.







정: 네, 좋은 대화 감사합니다.



잠깐 침묵하고 마치겠습니다.







파주 '온생명교회' 에서 2019 5 27

18 김조년 -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Backhouse Lecture 2018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

김 조 년(Cho-Nyon Kim)




* 왜 나는 이 강의를 맡았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서 항상 경험하는 것이 변화다. 관점도 달라지고, 세계도 달라진다.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철학도 그 내용이 달라지면서,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달라짐은 때때로 있던 것들이 사라짐이지만 동시에 새로 운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이요 풍부하여짐이다. 그래서 동시에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 로운 것은 덧붙여진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과 정체성의 문제이 면서 새롭게 첨가되는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뒤부터 퀘이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어떤 것도 규정하거나 기준이나 신조를 만들려 하지 않는 퀘이커의 전통과는 아 주 먼 시도였다. 그러나 내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정식 등록 된 뒤에도 이에 대한 노력을 끝없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퀘이커 됨이란 무엇인가를 내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 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형성된 퀘이커됨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찾는 자(seeker)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노력할수록 퀘이커들이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잡히기보다

는 모두 추상적이었다. 막연하였다.

예를 들면,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 안에 계신 그 님’. 퀘이커들이 말하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유교와 도가와 한국 고유의 생활(민속)종교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 따위, 또는 기독교인이 된 뒤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온 ‘하느님’, ‘성령’, ‘메시아’, ‘그리스도’, ‘구 원’, ‘해방’이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Tao), ‘진인’(眞人), ‘자연’ 또는 불가(佛家)에 서 말하는 ‘내 안의 부처’나 ‘성불(成佛; 부처가 됨)’, 해탈 등이 모두 추상적으로 다가왔

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러한 추상개념들은 일상생활과 매우 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런 개념들의 설명이나 이해보다는 좀 더 일상생활과 긴 한 관계가 있다는 퀘이커들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더 끊임없이 궁금하였다. 다시 말해서 퀘이커가 매우 좋 아하고, 모두가 실천하려고 하는 말들, 즉 평화(Peace), 단순함(Simplicity), 평등 (Equality), 컴뮤니티(Community), 진리(Truth),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진실 (Integrity) 등도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이것들 역시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매우 쉽지가 않다. 그 말들에 대해 매우 깊은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하여 실 천하려 할 때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상황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생활공동체는 깨지고, 평화보다는 다툼과 전쟁의 위험으로 가 득하고, 통합과 함께하는 삶보다는 분별, 분열이 가득하고, 점점 더 차등이 심화되며, 자 연파괴를 넘어 생명의 종말을 촉구하는 문명의 발달과 사건들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런 퀘이커의 전통처럼 내려온 삶을 실현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특히 가장 단순하게 산다는 것이 곧 복잡하고 화려하게 살도록 규정된 현대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 삶의 전통을 지 키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세계는 전과 같이 민족과 나라와 지역을 넘어 인류를 생각하고 전 지구를 하나로 보며 문화의 융합과 공존을 꾀하는 지금, 어느 한 종교의 종파성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고 본다. 퀘이커는 어떤 종파성에 얽매는 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끊 임없이 하여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함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때 동양의 고전 중에서 가장 평화롭고, 단순하며,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아 끼고 귀하게 보며, 형식과 규범을 넘어 자연(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장한 도가의 이론과 삶을 찾아보는 것은 퀘이커 종교성 확장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교하 는 것이 아니라 퀘이커를 보충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도가의 영성, 또는 신비를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성과 신비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건들에서 들어나기 때 문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내가 낳고 자란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생활, 종교성과 나의 성

장을 살펴보고, 한국사회를 오래도록 이끌어 온 유교, 불교, 민속종교들의 진화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의 토착과정을 간단히 살핀 뒤, 퀘이커가 추구하는 것들과 도가에서 추구 하는 핵심점들의 만남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살아간 한국의 초기 퀘이커 중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퀘이커로서의 내 삶의 방향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주로 질문 형태로 정리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주장이 아니라 내 궁금함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퀘이커 됨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요구이다. 이것은 동시에 미래의 퀘이커를 걱정할 만큼 젊 은 퀘이커들이 현격하게 줄고, 퀘이커들의 노화현상은 바로 직면한 문제다. 이것은 퀘이 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러한데도 많은 사람들은 바로 퀘이커 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 퀘이커를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화전통과 종교전통의 진수와 퀘이커의 진수를 접목시켜 확장된 종교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퀘이커의 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 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것을 매우 큰 기쁨이요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동시에 매우 큰 삶 의 부담으로 느낀다. 신앙과 그 믿음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문제에서 퀘이커들이 모 범이 되어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싶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 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형식화한 세계에서 실제를 살고 싶은 맘에서는 내 자신 이 퀘이커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믿음에 성실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내가 퀘이커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주저스럽게 한다. 특히 초기의 퀘이커 선배들, 조지 폭스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는 그런 감동과 떨림과 진리에 대한 헌신의 움직임 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흘 던 것같은 느낌이 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흐름과 기성종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 등에서 사회 전체 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러한 때이지만 조지 폭스 등 초 기의 친우들의 삶은 매우 곤고하였으며 이상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 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곧 진리를 따르려는 그 삶은 매우 감동스럽다. 그것은 마치 신약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과 같다. 내 자신도 그런 삶 속에 있고 싶다. 그 러나 지금은 매우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종교없는 종교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사는 느 낌이다. 물론 종교라는 조직과 교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지만, 형식화한 종교에서 내용에 충실한 종교생활을 실천하는 수는 매우 적다. 동시에 종교,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일상생활의 친분과 교류에서 비종교적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이러 한 때 깊은 종교성을 띈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초기의 퀘이커 친우들이 가졌던 철저한 진리추구와 그 삶을 실 현하려다가 겪은 고난의 경험이 없다. 매우 평범하고 평이한 종교의 삶을 살아왔다. 그 러므로 내 말 속에서 종교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을 찾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내 속에 있는 빛의 작동을 따라서 내 일상생활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철저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퀘이커의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을 던져 주기가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서도 이 강좌를 하겠다고 대답한 것은 단순히 이런 내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문화체계 속에서 어떻게 종교와 비종교가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펼치겠다. 그러니까 이 말 은 나의 퀘이커 깨달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묻 는 것이다.



1. 나의 성장과 내 주변의 종교성 나는 무종교적이지만, 유교적 가정생활의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가정은 유 교전통의 교육과 생활윤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불교나 무속 또는 한국 적 샤마니즘의 생활풍속이 우리 가정에는 없었다. 우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무 속신앙의 전통을 우리 가정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점을 치거나 절을 찾아 부처에게 기도하고 시주하는 일이 없었다. 그분들의 언어생활에서 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

다. 그 대신 사람이 죽고 나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살아 있 때는 하나였던 것이 어떻게 죽 은 다음에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각각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가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그에 대 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신 적도 없다. 그러나 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할 때, 그 하늘 이라는 곳이 어디일까가 몹시 궁금했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채 그 냥 자랐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집안에 차려놓은 빈소에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혼백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른이 돌아가시면 집에는 빈소를 차렸다. 빈소에는 종 이상자로 만든 혼백함이 있었다. 그 안에는 청색실과 홍색실을 꼬아서 혼백을 상징하는 실무더기를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빈소를 차리는 동안은 그 혼백상자가 죽은 사람을 상 징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 빈소에 아침과 점심과 저녁 세 번의 상식(밥상)을 올렸다. 그 때는 언제나 혼백함을 열어서 죽은 혼령이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완전히 상 징을 통한 의식행위(儀式行爲)지만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삼년이나 일 년이 되어 탈상할 때는 그 혼백함 속에 있는 청실과 홍실을 꺼내어 땅에 묻거나 불에 태 웠다. 백을 상징하는 청실은 무덤 앞에 묻고, 혼을 상징하는 홍실은 불에 태워 날렸다. 이렇게 하여 죽은 사람은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예식을 치 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집에서 하는 유일한 종교행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 은 엄 히 따지면 종교행위라기보다는 단순히 조상신을 섬기는 효도행위에 속하는 것이 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를 이끌어 왔던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계통의 신유교를 생활 윤리로 믿었던 가정 전통은 다른 종교행위에 대하여 배타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 유교와 성리학 전통과 위배되거나 배치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매우 크게 배척을 받았 던 조선시대의 전통이 우리 가정에는 일상생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이변이 생겼다. 내 증조할머니의 큰아들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며

느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큰 손자가 죽었다. 이에 그녀는 매우 크게 상심하였다. 이 때 예수교전도사를 만나서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된다. 그 뒤 그녀는 매우 열심히 교회 에 나갔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 방식은 한국 전통가정의 기도방 식과 같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두 손을 모으거나 비비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젊어서 죽은 영혼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 남은 큰 아들의 안녕된 삶을 비는 기도였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몸을 단장하 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생활신앙전통과 일치하는 행위였다. 가정 에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멀리 떠난 가족을 위하여 빌 때는 언제나 그 와 비슷한 기도를 하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였다. 그렇게 빌고 난 뒤 일 상에서 일을 하면서 찬송가를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많이 부른 것이 ‘예 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네’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그녀의 며느리에게 내려 졌고, 나중에는 손주며느리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녀가 직접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 지만, 그런 가정의 영향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 할아버지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큰 갈등은 아니었지만, 유교전통의 가정분위 기와 기독교 신앙이란 새로운 흐름 사이에 묘한 갈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물 론 내 증조할머니나 할머니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에, 유교식의 가정윤리나 조상에 대한 제사행위를 진행하는 데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중국에 가톨릭이 전달되었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 때 한반도 에 전달된 가톨릭과 유교 사이에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제사갈등 같은 것이 우리 가 정에서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의 삶이 나 일상생활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고향 마을에는 불교사원도 없었고, 유교식 사당도 없었다. 향교나 서원이 있는 마 을이 아니었다. 내 고향마을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양반들이 사는 곳 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식 예식이나 예법으로 마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한 해를 시작하는 날 동네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이 있었고, 성황당이 있었으며, 마을 입구에는 마을수호신으 로 장승이 세워졌었다. 많은 사람들은 절기에 따라서, 각자 자기집의 전통에 따라서 자 기들이 믿는 신에게 빌었다. 때로는 부엌신에게, 때로는 장독대신에게, 때로는 우물신에 게, 때로는 나무신에게 빌었다. 묘하고 큰 바위나 몇 백년 묵은 큰 나무나 깊은 골짜기 나 우물은 또한 기도터가 되었고, 그것들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애니미즘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에게 신은 일상생활 속에 있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을 지키는 지킴이, 즉 업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 는 것같은 유일신 개념이 없었다. 신은 매우 다양하였고, 많았으며, 각각 기능을 담당하 는 것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신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념상의 신이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조상에 대한 숭배심은 매우 강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 런 모든 제사와 비는 행사에는 언제나 음식이 마련돼 있었고, 그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마련하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그에 맞는 의식행위가 있었다. 그러할 때는 언제나 전통으 로 내려오는 신의 이름들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개별적이지 체 계를 갖춘 조직이 아니었다. 아플 때나 깊은 병에 걸렸을 때, 가정이나 한 사람에게 어 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 것들은 조직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종교적 예식행위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에 나갔다. 매우 낯설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다. 열심히 다녔지 만 의심스러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중에 왜 기도할 때 꼭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하 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빌고 기도하는 것이지, 꼭 누구를 대신 불 러서 그의 이름으로 내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라 고 하였다. 내 죄를 그가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점 이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렇게 나를 대신 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요 그는 그인데 그가 어떻게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교나 기도 또는 찬송가를 부를 때 피, 죄, 원죄, 죽음, 구원, 부활, 영생, 멸망, 지옥, 천당, 천사, 마귀, 싸움, 승리, 사랑, 평화 따위의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피와 죄라는 말이 들어간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매우 거북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찬송가의 내용들이 매우 전투적인 것이 많아서 함께 부르기가 많이 불편하였다. 사랑과 저주나 멸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평화와 싸움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없었다. 유교나 도가에서, 또는 일반 민속신앙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 았기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원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받은 교육은 유

교식 윤리교육이었다. 그것은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이 자기를 갈고 닦아 가는 생활윤리를 매우 귀중한 것으로 알고 지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흠결이 없이 사는 것을 매우 훌륭한 덕목으로 알고 지내기를 바랐

다. 인(仁)한 삶, 즉 자비와 사랑의 삶과 의(義)의 삶, 즉 정의로운 삶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조화하면서 살 것인가를 배웠다. 오랜 논쟁의 유교전통인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냐 아니면 악한 것이냐 라는 결론 없는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지만,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무조건 모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수히 많이 설교하였지만, 그것을 들으면서도 시원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대신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없이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듣기 전에 살았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두가 다 멸망의 구 텅이 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인가? 아직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 은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매우 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을 발견하 였다. 그것을 내가 따라 믿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전혀 심각하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 는 서방정토, 또는 극락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물론 끊없는 윤 회를 말하는 불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인간은 인격존재다.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결

정하는 아주 고유한 분야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어느 인간이든 남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지 않던 가?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으 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 러나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맴도는 논리였다. 여러 신학적인 글들 을 읽을 때도 이 부분에 대한 논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서 계속하여 교회에 나갔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인격을 가진 나라는 존재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과정이 곧 나의 기독교교회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중에 하워드 브린턴(Howard H. Brinton)의 책 『퀘이커 300년』이 함석헌의 번

역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다.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한 공감을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함석헌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 퀘이 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의 퀘이커 모임에 가끔 참석하고, 독일에 서 머무는 동안 퀘이커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차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면서 퀘이커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 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함께 독 일 북서부 4계회에서 회원이 되었다. 물론 이 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왜 내가 퀘이커가 되는 형식절차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하였다. 독일에 계 속하여 있겠다면 회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면 회원이 아닌 데 퀘이커모임을 주관하는 것은 이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백을 하였고 인 터뷰를 통하여 정식 독일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전에서 몇 친구들과 함께 퀘이커리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 하였다. 처음에는 매일요일마다 짧은 고요예배에 긴 공부를 하였다. 차차 고요예배 시간 을 늘려 한 시간의 고요예배를 마친 뒤에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여러 참여자들이 정식으로 퀘이커 월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공부를 시작한 지 6년만에 대전 월회로 출발하고 FWCC에 등록하였다. 나는 종교경전을 다양하게 읽는다. 기독교의 성 경 신약과 구약을, 불교경전과 도가경전을 읽으며, 때때로 유교의 경전을 읽는다. 이러할 때 나의 기독교에 바탕을 둔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폭넓은 종교성을 얻게 된다. 이미 내 성장배경을 말하면서 밝혔듯이 내 삶 속에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 가와 민속신앙의 전통이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체계있는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삶과 사회공기로서 내 속에 그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낀 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기독교와 퀘이커리즘의 삶이 나를 이끈다.



2. 한국의 종교다원성; 유교, 불교, 도교, 생활(민속)신앙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다원성을 가진다. 국가지배이데올로기와 생 활윤리로 유교, 불교가 오래도록 지배하였고, 도교와 민간신앙은 바로 이러한 외래 종교 들과 조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왔다. 다시 말하면 학자들의 주장들이 서 로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재래종교로 도가 또는 도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에 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이 어떠한 것과 상관 없이 도가사상과 도교신앙은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넓고 깊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중국과는 달리 도가 사상이나 도교신앙이 한국 역사상의 어떤 왕조의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적은 없

다. 그렇지만 근 1천년 가까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불교나 그 뒤를 이어 유교가 역할하던 시대에도 이것들은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체계를 잡거나 거대한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민간신앙 위 에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가 지배한 뒤,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유입되었 다. 이 두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문화계에서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였다. 때로는 박해 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된 적은 없다. 그러 니까 왕조가 바뀌거나 사회 질서가 기존 이데올로기로 지탱할 수 없이 되었을 때는 언제 나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들어와 새로운 기운을 사회에 불어 넣었다. 고대국가들 이 기틀을 잡기 시작할 때 민간신앙으로는 국가제도를 이끌거나 새로운 국민정신을 집합 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의 힘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고대국가 형성과 틀을 같이 한다. 한반도에 있었던 왕조들을 이끈 종교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그러나 달라진 사회와 국제간의 교류는 새로운 종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들어온 것이 신유교였다. 신유교는 조선 왕조의 굳 건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협한 유교유일체제는 정신세계뿐 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경제, 정치생활에 매우 좁은 한계를 가지게 했다. 이 때 중국을 거쳐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도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에 들어온 가톨릭이 었다. 아주 철저한 신분체계와 현실중심의 유교윤리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이들 은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소식은 신분사회에 살던 그들에게 복음 이었다. 그러한 사상과 믿음은 지배계층에게는 기존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 개혁성향을 가지거나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엘리트집단들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일반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킴 에 새로운 종교이데올로기를 도입하기에 이르 다.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지배계층은 아 주 강력하게 새로 유입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논란이 된 제식논쟁과 직결된다.

그 뒤 백년이 지나서 개신교가 새로 유입되었다. 가톨릭은 당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여 매우 큰 저항에 부딪혀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낸 반면, 그 뒤 들어온 개신교는 전교의 어려움은 없었다. 의료와 교육과 자연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개신교는 많은 일반 사람들과 왕조와 지배엘리트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 이 됐다. 특히 왕조가 힘을 잃고 일본에 의한 강제 통합과 통치가 시작되면서 한국민의 민족의식과 개신교는 일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여 발생한 민족의식과 새로 들어온 개신교는 공통의 관심사항을 가지게 됐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한국은 미국과 유럽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들의 과학과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러한 것들은 민족주의와 함께 성장하였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때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상은 이제까지 한 국을 지배했던 유교나 불교의 생활관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 때에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역사상에 있었던 종교체계들을 다시 정리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크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중 동학(東學)은 려오는 서양의 문물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민간에 깊이 파고들었으나 양반지배계층을 중심으 로 정치를 이끌던 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핵심 은 기존의 유교나 불교에서 주장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 간신앙으로 깊게 자리를 잡았고 널리 퍼졌다. 이 동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할 때 개신 교와 함께 민족 독립의 입장에서 공동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정부의 강력한 박해로 공개활동을 금지당했으며,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상호 경쟁과 공존의 과정을 겪는다. 동학, 천도교 등으로 이름이 바뀐 이 신흥종교는 한 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통합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결국 한국사회에는 역사적으로 불교, 유교, 재래종교와 기독교가 차례로 유입되어 사 회에 매우 중요한 정신활동과 일상생활에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체계가 들 어왔을 때는 언제나 기존의 종교나 사상체계와 갈등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는 과거로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존의 정신세계와 사상체계, 그리고 생활습관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신유교는 불교의 것을 흡수하 였고, 불교는 새로 들어온 유교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맨 뒤에 들어온 기독교 역시 이미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 그리고 민간 신앙의 이데올로기와 생활습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리와 교리 상으로는 서로 배치되는 점이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혼용하고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사상체계는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를 부분적으로 받 아들여 자신의 것을 개선하였고,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는 기존의 사상과 생활습관을 받 아들여 토착화하거나 정착하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갈등과 공존을 가능 하게 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혼용, 또는 혼합은 곧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체계 들 속에서 자기 종교나 사상체계의 핵심사상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완전 히 배제할 수밖에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수용할 가능성이 큰 유사성이나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갈등과 공존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가져오게 한다. 자신의 종교나 사상체계를 확정하고 유지하기 위하여는 다른 종교나 사상체계와 다르다 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들 속에 있는 핵심요소들을 활용하거나 차용할 수밖 에 없다. 그것은 곧 현실 종교의 모순과 딜레마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과 같은 다원종 교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교섭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 여 진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극단적 진보론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 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다원성은 곧 종교일원성에서 만난다. 즉 개별 종교들의 다양한 차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갔을 때 궁극에서 만나는 것은 한 점이라 는 것이다. 바로 궁극의 그 한 점을 찾기 위하여 모든 종교는 각각 자기의 자리에서 자 기의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궁극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고 인정하게 되는 데, 그것의 이면에는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일 원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확신이 뒷받침한다. 바로 이 점이 종교의 진화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나 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의 것들은 중국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

다. 중국으로부터 왔거나 중국을 통하여 왔기 때문이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왔지만, 불교와 가톨릭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많이 진화된 모습이 거나 토착화와 전교의 갈등을 경험한 뒤에 들어왔다. 그 대신 개신교는 부분적으로 중국 을 통하여 왔고, 큰흐름은 미국과 서양의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다. 일찍 들어온 것들 은 민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고, 뒤에 들어온 것들은 앞에 들어온 외래종교와 민 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큰 종교들,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는 고유한 민속종교와 다른 외래종교들과 부딪치면서 융합된 복합성을 띈다. 그렇 게 하여 한국화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 개인 자신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옛날이 야기나 선조들의 이야기 또는 생활이야기를 통하여 유교, 도교, 불교와 민속신앙이 혼합 된 삶의 지혜, 체험, 학문, 도덕과 종교의 체험담을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자랐다. 체계 있는 교육이나 종교행위로서가 아니라, 비공식 일반 삶의 이야기와 생활을 통하여 여러 종교들이 녹은 생활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내 속에는 한국사회의 오랜 종교전통들이 녹아서 흘러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가형성을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민속종교와 유, 불, 도 교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영향은 그 뒤 국가가 형성되고, 견고하게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을 때에도 다른 사상들과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대개의 흐름은 서로 용납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3. 한국의 종교들과 기독교의 만남 어떤 종교가 되었든 새로운 지역에 전파 되어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것을 주장하고 유지할 수가 없다. 종교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곳의 긴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문화 속에 정착되는 것을 말한다. 한 종교가 새로운 사 회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한 사회가 새로운 종교를 유입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왔던 삶의 자세들, 생각들, 의 식(儀式)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개념) 속으로 들어가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전래되는 종교들의 변이가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는 굉장히 심한 갈등에 부딪치게 된다. 때로는 대화라는 상황으로, 때로는 박해라는 양 상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란 자세로 나타난다.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이 미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다. 이런 과정에서 종교들은 새롭게 진화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종교들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됐고, 생활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종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있었던 종교와 생활문화는 주류의 자리에서 곁 가지로 려 났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삶과 생각과 제도와 의식 속 이나 밑바닥에 남아서 기능한다. 새로운 체제에서 살아남는 것과 새로운 지역에서 널리 퍼지는 것은 바로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접촉점이 바로 공 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종교들의 대화가능성과 토착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보편성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인류라 는 존재가 어떤 상황, 어디에 있든지 꼭 가지게 되는 공통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

다. 이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근거가 되며, 모든 종교들이 다른 종교에 의하여 진화하는 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에 있었던 많은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해 볼 이유가 생긴다. 한국에 고유하게 오래도록 전통으로 내려오는 종교들과 기독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 가능하고 의미가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 개념들이나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화 되었으며, 같은 존재를 두고 각각 다르게 이름을 붙이고 있기도 하지만, 같은 이름을 쓰 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 다. 때로는 신, 하늘, 도, 절대자 따위로 각각 불리지만 그것들은 궁극존재 즉, 최초, 최 후, 지고하고 심오하며, 개인 안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데서는 일치한다. 신앙의 대상으로 서 그것들은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동시에 인간 삶의 실천에서도 역시 용어와 이미지가 각각 달랐다. 죄로부터 벗어나며, 고통을 넘어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노력이었

다. 그러니까 믿음과 실천의 부분에서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가를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점과 비슷한 점 또는 같은 점을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 미가 있을 것이다.

유교와 도가 또는 도교는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

왔다. 물론 중국에서도 많은 변화를 거치고, 새로 들어온 종교들과 공존하고 다투면서 변화된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각 종교들은 또 한 번 굴절 내지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쓰지만 내용은 매우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나 도가에서는 직접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인격존재로서의 신개념이 그들에게는 없지만, 신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는 궁극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그것들의 종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비인격적이고, 비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또 인격적이 다. 그러니까 신이 어떠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나 교리가 아니라 만남의 체험이라고 보아 야 한다. 비록 개념 설명에서는 인격과 비인격이라는 것이 구별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만남은 모든 곳에서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격적 만남이 아니고는 결코 삶의 변화 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궁극존재와 직접 만남을 통하여 자신과 그가 하나 가 되는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각종 신들에게 빌고 기도 를 하지만, 그것은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집단인 국가와 민족(종족) 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현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과 집단이 할 일의 핵심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었

다.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양, 곧 성인에 이르는 자기 닦음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인 (仁)을 행하는 것이면서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큰 갈등을 일 으켰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종교행위는 아니지만 가족전통의 예식행위였다. 그 문제는 온갖 가족행사에서 항상 부딪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도 크게 부각된 것이었 고, 한국에서도 꼭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과의 갈등은 지금은 해소 되었으나 개신교와는 아직까지도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았다. 기독교인도 물론 조상에 대 한 생각을 깊이 하지만, 예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한 유연성 을 가진다. 즉 상당한 부분 타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윤리문제에 서는 크게 부딪칠 문제가 아니다.

민속종교와 기독교의 관계: 샤마니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교와 민속종교는 한국사 회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서양식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신앙이 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 신이 있었지만 그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종 족, 가족, 시대에 따라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신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변하였다. 이 경우 모든 신들은 일종의 기능상의 신이었다. 다신인데 어떤 우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능상의 문제로만 일상생활에 대두되었다. 이 민속신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예식과 생 활에도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민속종교 즉 무교는 지금도 살 아서 계속하여 생성되는 현대종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유교는 생활윤리로 작용할 뿐, 어떤 종교적 교육이나 체계있는 조직으로 존재하

지는 않는다. 사원이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위 있는 유교교사나 학파의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이 유교사회라고 서양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화된 문화들이 있기 때문만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정당 한 것인지는 매우 궁금하다. 유교는 인간과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윤리를 강조하였기에, 그것이 곧 일상생활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숭상하는 입장 에서가 아니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유교사회라고 할 때는 의미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맹자와 순자로 나뉘는 인간의 본 성이 선하냐 악하냐는 논쟁을 통하여 인간은 온전함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 정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수양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받아들임에도 계속된 자기성장과 성찰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자 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많은 사원이 있고 승려를 양성하는 학교가 많았다. 여러 해 전부터 학생수가 줄고 승려지망생들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신도들에게서 불교신앙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고 있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대학, 고등학교가 있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 관이 많다.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극락에 이르는 길을 찾고,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힘든 이들이 고요함을 찾고 평안을 누리기 위한 프로그램 을 절에서 많이 진행한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한 희망을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를 주 장하는 파가 있지만, 어느 것을 주장하든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상대 안에 절대가 있고, 삼라 안에 열반이 있으며, 속된 것 안에 성스러움이 있음을 인정하는 대승 불교의 입장이 한국불교에서는 강하다. 불교 내 종파들끼리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지 만, 불교와 민속종교인 무교와의 결합은 특이하다. 이것은 불교가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전파하는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의 예식이 불교식으로 정착되기 도 하였다. 열반과 해탈의 전통과 서방정토나 극락을 그리워하는 정서는 구원과 천당을 말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도교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당도 없고, 교사도 없다. 다만

일을 마친 사람들,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도 교나 도가적 삶을 흠모하여 추구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힘있게 삶을 영 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도가스러운 삶을 사는 것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바닥의 정서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문명비판적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가철학은 현대인들의 쉼없는 삶, 끊임없이 급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무의미성을 체험할 때 도가에서 강조하는 관조와 놓음 의 삶은 새로운 숨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반 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를 운영하며 특히 기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병원과 각종 사회서비스기관을 운영하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사회전반에 서 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운동을 벌여 정치와 경제계에 깊이 관 여한다. 진보경향이 있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지지만, 보수경향 의 기독교는 개종과 선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진다. 종교간 갈등은 이러한 분파에서 많이 심화돼 있다. 각 종교를 신봉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토착화를 생각하는 이들은 서로 교류가 많다. 에큐메니칼 차원의 기독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나 신도들과 교류를 많이 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개종을 전제로 하는 논쟁은 지금은 별로 없다. 다만 자기 종교 속에 타종교 의 교리나 윤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인정하고 생활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한다. 진보 경향이나 보수 경향의 종교인들은 각각 자기들이 관심을 가지 는 부분들에 대한 공동대응을 많이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 진 보와 보수 경향의 흐름들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와 보수 끼리, 진보와 진보끼리는 풀어야 할 문제들을 놓고 다른 종교들과 함께 할 때가 많다.





4. 기독교 또는 퀘이커에서 주의할 도가사상의 핵심

도가에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할 수 있는 도(道, Dao)는 유한한 우리 인 간의 생각, 연구, 언어, 느낌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 터 나왔다는 도는 무한히 신비롭고 오묘하다. 모양이 없고 이미지가 없다. 이름도 없고 성질도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유나 추 리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다만 상징으로만 이야기 될 뿐이다. 이미 도라고 말한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이라고 이름한 순간 그것이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결국 부정을 통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존재다. 다 시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함으로 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그램이 없는 퀘이커에서 예배나 일상생활에서 하는 고요히 함은 불교에서 하 는 참선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은 혼탁해진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방법 이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다. 맘을 깨끗이 하는 것이 첫째 길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상태로 접어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 여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초월한 궁극의 실재로서의 무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면의 세계를 직관하므로 그 속에 있는 불성을 만나는 일이다. 이것 은 기독교 수행자들이 드린 기도, 즉 마음을 비워 생각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오로지 내맡기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찾고 말씀 을 기다리는 퀘이커의 예배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부정을 통한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에 도달하려는 도가의 사상체계는 퀘이커 리즘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도가의 사상체계를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정리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가 있다고 본다. 관계 또는 사회윤리의 실천으로서의 무위, 박(樸; 소박, 단순), 도 그리 고 근본으로 돌아감을 간단히 살펴본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 위로감은 무엇일까? 거기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 지극한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실되게 하면 다 이룬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다 시 말하면 사람이 도달해야 할 고정된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능력 상황 처지에 따른 진실된 과정을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청장년과 노인이 도달 할 기준을 일정하게 설정할 수가 없다. 각자 그들에게는 각각 다른 기준이 제시된다. 다 양한 기준은 곧 다양한 사람들의 그들 나름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도가의 신비체험은 황홀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중립적이며 불확실하다. 그래서 믿음 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직접 체험에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체험 이란 단순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삶의 신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 히 도가철학을 원칙과 역동적 힘과 행위 또는 삶의 실천자세를 나누어 생각하여 본다. 우선 도(道, Dao)에 대한 이해다. 도는 궁극적 절대실재로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 자애롭고 생산하는 실재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이미지를 그릴 수 없는 무의 존재다. 부정으로서만 설명이 되는 없음의 존재다.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냥 작용만 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원천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까 맣고 까만 카오스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주 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꼭 설명이 필요하다면 텅 비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깊은 골짜기, 가장 낮은 넓고 깊은 바다, 어머니 또는 낮은 곳으로만 흘러드는 물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계시성과 구원성을 가진다. 그래서 영생의 개념을 가진다. 구원과 영생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도는 어떤 특정한 상층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도의 나타남과 실현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 지만 언제나 일상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로고스이면서 길이다. 길은 곧 길을 가는 것이

다. 원칙과 삶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 원칙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상대성과 평등성이다. 균형을 잡기 위한 작용은 언제나 상대세계를 이용하면서 그것을 넘는 절대 적 평등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귀함이나 천함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빠르 고 느림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도(道)가 작용하거나 인간들이 그 도를 따라 올바르게 활동하고 생활하는 자세

는 바로 무위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이나 흐름을 보면 ‘하지 않음으로 함’이란 모순스런 해석이 된다. 도는 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그릇이나 연못에 물이 차면 넘쳐흐르듯 이, 길이 기울면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하면 새싹이 돋아나 듯이, 더위가 극에 달하면 차차 기온이 내려가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기온이 올라가듯 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인간의 힘을 더하여 작용하지 않게 하 는 일이다. 이것은 때를 기다리는 일이요, 기다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지나치 게 문명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규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위는 도덕과 예법과 형식을 떠나는 삶을 추구한다. 아나키스트적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드럽고, 자비롭고, 겸손하며, 약하고 비우는 삶의 자세는 무위의 한 가 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다툼과 폭력의 사회양상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모순스런 용어, 즉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러한 삶은 원초적 상태, 즉 박(樸, natural disposition)으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박의 상태는 쉽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소박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물이 들여지지 않은 상태, 타고난 그 모습 그대로의 상태, 영아와 같은 상태, 뿌리로 돌아간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다 섯 가지 소리는 귀를 어둡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더럽힌다. 이러한 꾸밈들은 사 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여 탐심에 가득한 삶으로 이끈다. 그것이 잘못된 문명과 삶을 유 발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언제나 투박하지만 갈고 닦이지 않은 원시상태를 희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생명본질인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이미지로 표시하고 설명해보자. 도가의 신비주의와 궤이커 신비주

의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에 대한 설명을 위의 이미지

를 통하여 할 수 있다. 퀘이커를 상징하는 Q자는 퀘이커의 믿음과 실천을 의미한다. Q글 자의 O부분은 믿음, 원칙을 의미한다면 ~는 생활실천을 의미한다. Q자 중 O에 해당하 는 것은 신, 퀘이커식 표현으로는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면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 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Tao)와 같다. 이것이 어떻게 생활에 작용하는가? 퀘이커들 은 기다리고 찾는다. 그 행위는 일상이나 예배시간이나 깊은 침묵으로 연결된다. 고요히 함으로 말씀을 기다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어떤 행동이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을 도가식으로 말하면 무위(Wuwei; 無爲)다. 하지않음의 함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로 하면 성령이 내려질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신, 내면의 빛, 또는 도에 다다르는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 활동이 일어난다. 이 활 동이 작동하는 방법은 단순성, 단순함이다. 그것을 도가에서는 박(樸; Po´)이라고 한다. 박은 전혀 작업을 하지 않은, 깎지 않은 그냥 통나무다. 그것을 의역한다면 단순함이다. 순수함이다.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이다. 그러니까 도가 일상생활에서 실현되고 실천되려면 무위, 즉 하지않음의 함으로서 도를 체득해야 한다. 그것을 체득한 다음에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어 떤 문화나 교양이나 기교를 섞지 않은, 받은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퀘이커의 삶의 증 언이란 바로 단순함,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퀘이커의 증언이 되는 Peace, Equality, Integrity, Community는 바로 Simplicity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곧 퀘이커와 도가의 만남의 핵심이면서, 두 체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상체계와 삶의 체 계는 만난다. 이렇게 볼 때 퀘이커가 동양사상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가 있다. 이렇게 하여 퀘이커가 확장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자란다. 완성된 교리가 없다. 그것이 살아있는 종교의 핵심이다. 이러 한 종합된 삶을 살고자 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함석헌이 주장하는 씨의 자세와 삶이 바 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도가적 사상체계를 어떻게 기독교적 체계와 합 하여 자기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5. 함석헌(Ham Sok Hon)의 삶과 사상; 종교적 신비와 일상생활 한국의 초기 퀘이커요 현대사상가인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삶에 대한 간단한 고찰이 필 요하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접촉하고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길 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처음 장로교인으로 시작하고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 우 찌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신앙’을 배우고 상당한 기간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원숙 기에 퀘이커가 되었다. 한국의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향이 크고, 나 자신도 그에게서 받 은 영향이 크다고 믿는다.

“나는 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처 음에는 『기탄잘리』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타고르의 책을 계속해 읽었다. 범신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신앙하여 가는 데 아무 지장이 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좋았다.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를 읽게 되었다. (…)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 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찌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우찌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쉬바이쩌를 알고 읽게 됐는데 쉬바 이쩌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 오산에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에 동경서 받은 영향으 로 무교회적인 독립 신앙의 입장에서 성경을 원문에 따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줄곧 웰즈(H. G. Wels)의 문화적인 자리에서 보아왔고 과학에 충실하면서 옛 신앙을 건질 수 있는 데까지 건져보자는 고등비평학자의 정신을 따랐다. 그렇게 성경 을 보았다. 역사에서는, 그 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는 없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그 결과 근본에서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 실적인 면에서 어느 부분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단정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울 감 옥에 있는 동안 불교 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 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 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 피난 중에 해를 두고 이름만 듣고 보지 못한 『바가밧 기타』를 우연히 헌책집에서 발견했을 때 기쁘던 생각,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 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점점 껍질 이 좀 떨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 이렇게 오는 동안 역사적 예수를 믿느냐 하는 것, 속죄는 어떻게 해서 되느냐 하는 것, 하나님은 정말 인격신이냐 하는 것,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는 무어냐 하는 의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 각이다. (…)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켸켸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어디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 될 것이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갈 뿐이지, 그 자체를 규정할 자격은 없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람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1] 이런 선언 뒤에 그는 자기의 독자적 신앙노선을 걷는다.

무교회와 헤어지는 데는 우선 자신보다는 인생 전체를 보자는 것, 앞에 올 것을 보자

는 것, 무엇에 들어붙지 말고 자유하자는 것,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되어 보자는 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니 나만이 아버지 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산에 오르는 길은 매우 많은 것이 눈에 보였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그 길만이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 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이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이다.(9, 예: 314) 상대의 세계에 있는 ‘종교’, 기독교는 이제 그에게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일 뿐이다. 그러니깐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것은 상대계의 좁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겸손해야 한다. 개별종교는 하느님을 담을 만큼 크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고, 사도를 뽑은 것은 최소 한의 껍질을 가지는 상징행위였다. 그래서 함석헌도 가능한 한 상징으로 시작된 ‘엉터리’ 를 붙잡지 말고 자유의 영으로 살자는 것이었다.(9, 예: 315)

그래서 그에게 참 길은 너도 나도 기독교도도 이교도도 다 같이 더듬어가는 길이다. 나만이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은 동물희생을 했지만, 이제 네 신조희생을 해야 할 것”(9, 예; 317)이라는 것이다. 정통이냐 미신이냐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만 알 뿐이다. 획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내자는 것이 참찾아 나가는 길이다.(9, 예;318) 나만을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믿고 세계가 구원되어야 한다.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해 믿는 믿음이 정말 구원하는 믿음이다. 나(진리)는 지나간 모든 인류 속에 있고, 장차 올 인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멸망할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9, 예; 318-9) 만인 구원론이다.

함석헌은 새시대에 맞는 종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지금의 종교들은 새 시대에 맞 지 않는 낡은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로: 1) 기독교 교리의 완성, 2) 점점 제도적으로 되 어 가는 점, 3) 공세적이 되지 못하고 수세적이라는 점, 4) 점점 더 피안적이 되어가는 점, 5) 내분이 심하다는 것이 바로 새 종교를 필요로 하는 징표라는 것이다.(3, 새종: 221-222) 낡은 것은 새 것을 예견하고 주문한다. 썩음이 지극하거나 충격이 강력할 때 새로운 흐름은 솟아오른다.

이 시대가 새로운 종교를 낳을 ‘그때’가 멀지 않다는 표시의 두서너 가지 징표가 있다.

1) 현대의 전쟁의 성질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 원자학의 발달이다. 3) 세계관 문제다. 4) 생명공학의 발달이요, 5) 전 세계가 하나의 연결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3, 새 종: 223-228)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게 될 새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그 새 종교의 모습을 그려보면 대강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모습을 그러보는 것

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맘에서 새 종교는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얼굴의 테두리를 말한다면 둥글 것이다. 하나란 말이다. (....)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 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 (....) 세계를 온통 한 집안으로 만드는 말씀을 주실 것이다. (....) 앞으로 세계는 하나 될 터이요, 그것을 위해서 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2) “그 담 그 얼굴의 빛깔을 말하면 무색일 것이다. 더 합리적이 되어간단 말이다. (....) 이 이성의 문제는 과학에 대한 문제다. (....) 과학도 종교도 다 생명의 자라가는 일면인데 이 날까지 반대방향에서 서로 욕을 하며 파 들어간 셈이다. (....) 이기고 지고의 감정에 붙잡 혀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 과학이 이긴 것도 종교가 진 것도 아니다. 영원무 한의 세계에 들어갈 때까지의 종교요 과학이지, 들어가면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3) “이것은 인간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자연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데 가서 맺힌다. (....) 미래의 종교는 이 지친 인생을 다시 일으키는 종교여야 할 터인데, 그렇기 위하여서는 그 분열된 인격을 재통일 하는 새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뚫려 비친다고 하였다. 육이 영의 거침이 되는 것도 아니요, 영이 육을 배척하는 것도 아닌 인간이다.”(3, 새종: 229-235) “미래의 종교는 인격의 종교, 논리의 종교기 때문에 맘의 종교요, 맘의 종교기 때문에 깨달음의 종교다.”(3, 새종: 239) 그것은 언제나 ‘시재(時在, now-here)’, 이 지금-여기에 산다.(3, 말 씀: 143) 지금-여기가 바로 현실이다. “종교는 현실을 잊어버림이 아니다. 현실을 건지는 것이다. 현실을 건지기 위해 가장 작은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5) 거대조직 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직과 형식이 필요할 뿐이다. 미래의 종교는 시재의 종교이기에 지금-여기를 놓고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없고, 회개가 될 수도 없다. 잠 꼬대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6) 물론 목적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오르잠이 종교의 길이다. 그러나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없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이다’ 한 것은 바로 시재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3, 말씀: 146)

그래서 현실의 종교라면 현실을 사는 민중, 밑을 중하게 여긴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악과 싸우 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 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 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3, 말씀:

146-7)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과 싸울 것인가?

싸울 목표는 둘이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

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민중이 하나님의 발이라 하는 말 은 민중은 보이는 전체란 말이다. (....) 발을 씻음은 민중을 씻음이다. 절대 거룩한 하나 님, 그에게는 문제가 있을 것 없고, 더러워진 발인 민중을 깨끗이 하면 된다. 그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민중이다. 작지만 크다. 작다는 것은 낮단 말이다. 하늘에 비하면 말할 수 없 이 낮지만 땅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교회요, 나라요, 문화요, 세계요, 그것은 다 이 밑바닥 위에 세운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7-8) 이 민중, 이 씨을 일으키는 하나되는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9) 그래서 그는 이미 퀘이커 를 만나기 이전에 퀘이커가 돼 있었고, 그래서 만나서 서로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 이다.



6. 항상 자라는 종교와 인생; 절대구원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뜻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국가나 기독 교사회를 만드는 것이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민족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 수하는데 그 책임을 맡겨 준 것이라고 판단한다. 불교가 못한 것 유교에게, 그것이 못한 것 기독교에게 책임을 맡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기독교가 다하지 못할 때는 다 른 것에게 그 자리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목적이 아 니라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수단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단순히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선택한 것과는 다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앞 에 평등하다. 다만 그가 노는 역할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는 선생에게서 해방되고, 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고, 자기 종교를 가지고 싶었다. 즉 ‘내 생각, 내 믿음’을 가지기에 맘을 모았다. 이렇게 되어 그는 서대문감옥에 있는 동안 크게 달라졌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 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 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여기에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 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

야 한다는 것이다.”(1, 뜻: 17-18) “성한 혼에 모든 종교는 다 하나님 말씀”(죽, 열: 280)인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의 입’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다.

오직 제 종교만을 가지자는 한 사람의 노력에서 세상의 구원을 본다. ‘제 종교’란 하

느님과 맞대결하는 종교, 그래서 신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 즉 중간자 없이 하느님과 마주 서는 한 신자만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대신 시키지 않는 다. 누구를 대신 내세우지도 않고 누구의 대신 노릇을 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는 인격, 그것이 그리스도다.”(죽, 열: 285) 하느님 앞에 직접 서고자 하는 그는 기독교인 으로서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고(끝: 56),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면 그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는 간디를 좋아하였다.(끝: 62) 동 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궁극적 긍정인 영원한 긍정에 도달한다는 칼라일 을 통하여 절대긍정주의자가 된다.(끝: 58)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네가 이제 알아서 살다 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봐’ 하고 하느님이 준 자유를 사랑한다.(끝: 68) 이 렇게 그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 자유하는 개인은 독 불장군이 아니라, 전체를 나타내는 개인이다. 그래서 그러한 개인과 전체의 융합이 중요 하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바로 개인의 삶 속에서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나 타낸다.(끝: 역, 150)

하나라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 음 것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람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걸 받 아가지고 베드로와 바울이 ‘머리는 예수요, 우리는 다 몸이다’ 라고 말한다. 머리는 제일 높고 몸은 낮다는 것이 아니고, ‘우린 다 하나다’ 하는 걸 말하는 거다.”(끝: 고, 192-3) 개인과 전체는 함석헌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속에 다른 개인이 들어 있고, 다른 개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전체를 이룬다. 개인은 전체의 표현이면서 전체는 개개인 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동성이다. 개인이면서 전체, 전체를 중심에 두면서 개인을 자 유롭게 하는 영성공동체를 함석헌은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을 그는 퀘이커 에서 느낀다.

가능하다면 평화주의자 예수의 삶을 따르자는 것이다.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퀘이커의 성경읽기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투신한다.”(3, 퀘: 154) 그런 퀘이 커는 동양사상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특히 노장사상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수밖에 없다. 양심을 때리는

데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내 몸으로 폭탄이 되는 거다. 특히 평화주의자의 구령은 ‘자 기희생’이다. 죽자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역

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3, 퀘: 165-6)

타종교와 대화를 좋게 보고, 노장사상이나 불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기를 계시한다 고 본다. 함석헌은 타골과 간디를 읽으면서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꼭 기독교 에만 진리가 있다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 종교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 다.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라면 진리는 하나이고 같은 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즉 종

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다.(3, 퀘: 155)

그는 언제부터 노장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리스도교와 같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 두 사이에 충돌은 없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 워 오면서부터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간의 사회 살림이 근본 에서부터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계가 달라지 는 정도가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회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달 라지면 어떻게 달라질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 종교는 새로운 문명이 나오려고 할 때 앞장을 서서 지도하려고 할까? 문명에 앞장서서 인류를 건진다고 하는 성현들이 말한 것처럼, 과연 기존 종교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40세 때 그 대답을 부정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종교는 못할 거라고 보았다. 종교 들이 정치에 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대전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던 대국주의, 대 국가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정부주의, 지배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관 이 새로워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민중을 위해 있는 국가라야지 민중이 국가를 위해 서 존재해야 된다는 그따위 국가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뜻이라면 이를 위해서 동양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3, 퀘: 156-7)

그렇게 하여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의 해탈도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 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죄,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무지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으로서 하 는 자리는 한 자리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충돌될 요소가 아무 것도 없

다. 아마 기독교에서 찾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자리를 노자 장자가 말한다면 도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지 말고, 실제로 믿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느냐고 본다.(3, 퀘: 158)

함석헌은 내세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부정한다거나 긍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궁극 목적은 사람이 영원 무한에 도달하는 거라고 본다. 죽어가지고 부 활한다는 것보다 ‘예수는 부활해 가지고 죽었다’고 함석헌은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 명을 찾는 것이다. 즉 부활이란 나긴 물질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으로 났지만 생명이 인 간에게 와서는 소위 정신적이라고 하는 데까지 갔다. 아직도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죽은 후에 무슨 형식으로 되겠는지 그 때 가봐야 알 것이 니까 모르지만, 믿음으로 인해서 그 어느 세계에 올라갈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수 와 소크라테스 같은 이가 나왔다는 것은 정신계가 있다는 증거다.(3, 퀘: 159-160) 그러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세라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시간적으로 연장해서 죽은 후에도 영원히 호화로운 생활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높은 데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 라 가는 것이다.(3, 퀘: 160) 그래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는 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우는 것을 통하여 진리의 자리에 선다.(3, 퀘: 169) 이것에서 기독교와 선이 만 나게 된다.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갔더니 노장사상을 모르고서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 더군. (…) 하나님이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는 그것 얼마나 높은 사상이야요? (…)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의 세계입니다. 이 우주의 본의가 무엇인고 하니, 온 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이나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이지요. 왜 이처럼 다원적 이냐는 샤르뎅이 다 지적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가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 입니다. (....)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3, 퀘: 172) 다원, 전체, 하나, 동양과 서양, 기독교, 불교, 선, 노장 따위를 구별하는 것을 그 는 싫어한다. 관념으로는 나눔이 될는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포섭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종교는 완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종교는 완성된 것이 없다. 계속하여 변하고 흐르며 새롭게 달라진다. 그래서 과정의 종교, 길 위에 있는 믿음이요 자라나는 것만이 있다. 그것은 생 활종교라야 그 길을 따를 수 있다. 신도 미완성이요 자라는 것으로 보는 그에게 현실종 교와 믿음이 완성되어 나타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되어갈 뿐이다.



7. 함석헌의 기독교이해와 다른 사상체계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는 동양사상과 긴 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예수 이해 와 동양철학의 관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정 리하고 주장한 씨이란 것은 ‘맨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맨사람의 좋은 예가 예수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예수에게서 맨사람은 ‘어린아이’ 였다. 어린아이가 되는 그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태어남은 어머 니 탯집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다시남이 아니다. 꼭같이 육으로 낳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남은 영으 로 낳는 것이다. 다시남은 곧 그렇게 낳는 것을 통하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도 다시 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다시 나고, 모 든 것에서 다시 낳는 것이 곧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도 함께 말하였다. 특히 노장사상에서는 동심론(童心Q)에서 이것에 깊이 관여하였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그는 현덕(玄德)한 사람이다. 노자 28장을 보자.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知其雄 受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上德不離 復歸於嬰兒). 수컷(하늘, 양)을 알고 암컷(땅, 음)을 수호하면 천하의 생명수 인 골짜기의 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덕인 자연을 잃지 않고, 영아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함덕지후 비어적자(含德之厚 比於赤子). 덕을 돈후하게 품게 되면 마치 영아와 같이 된다. 벌이나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나 새들도 덤비거나 쪼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맨사람이다. 혹시 함석헌은 씨을 이 지경의 사람들로 본 것일까?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어린아이의 손아귀와 같이 단단하게 잡고, 부드럽기 한이 없어서 물컹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함유하는 영아. 부드럽고 약함으로 주변을 다 정리하는 어린아이.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요, 진심은 최초부터 있었던 맘, 곧 흠이 없는 동심 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그 진심을 잃으면 참 사람, 즉 맨사람으로서의 씨을 잃는 것이 다. 이것이 씨의 맘이지 않을까? 함석헌은 기독교에서나 노자가 추구하는 진실된 사람 을 그것으로 본 듯하다. 조금 더 노장사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살펴보자. 함석헌은 노장이해, 아니 노장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이해했다.

“노자ㆍ장자는 한마디로 이 현상세계를 초월해 살자는 것이다. 초월한다는 말은 결코 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현상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꿈도 아니요, 허망한 것도 아니요, 내버려야 하는 악한 것도 아니다. 노자ㆍ장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다. 이 현상의 세계는, 그 안에 태어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피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것,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이므로 필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 태도가 문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생각하므로 알게 되고(知), 좋고 나쁘고가 판가름되며(情), 그에 따라서 선택하고 버리고가 나타난다(意). “그럴 때 이 생각하는 나와 나를 둘러싸는 세계 또는 그 안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 각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아 절대에서 상대가 나왔음을 안다. 그렇게 함이 현실을 초월함이 다. 절대도 영원 무한, 상대도 영원 무한, 상대에 살면서 절대에 하나 되기 때문에 ‘현지 우현’(玄之又玄)이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속에서 그대로 절대와 하나 되기 때문 에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노자ㆍ장자의 삶은 도에서 시작되고 도에서 끝난다.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이다.”[3]

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은 원인 없는 원인이다. 스스로 그런 것, 곧 자 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음, 곧 무라고 하기도 한다.”[4] 그 도를 깨달으려면 어 떻게 하면 될까? 노자는 지적으로는 허무(虛無), 적막(寂寞), 염담(염淡)을 강조했고, 실 행으로는 무위(無爲), 유약(柔弱), 부쟁(不爭), 복귀(復歸)를 말했다.[5]

이렇게 주장한 노자를 평화주의자로 이해한다. “노자처럼 시종일관 순수한 평화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6] 노자는 무위 로 하자는 것, 정치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현한 이가 장자다. 무치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삶의 원리에 적용된다. 즉 모든 생 명존중과 생명의 자기통치능력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장자는 가난했지만, 벼슬을 싫어했고, 제삿집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구

는 돼지가 좋다고 했다. 높은 관직을 주어 모시려는 왕이 보낸 사자에게 그것을 강조해 말한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포악한 지배자의 착취 아래 사는 씨을 건져주기 위하여 불같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임금, 학자, 호걸, 영웅이라는 존재들이 그의 붓끝에서는 한갓 지푸라기도 되지 못해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의 삶과도 통한다. 함 석헌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그의 유명한 논설 ‘들사람 얼’(야인정신)에서 잘 표현한다. 이러한 정신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아와 아모스 같은 선지자의 삶에서 그 모 범을 본다. 함석헌의 국가주의비판은 이러한 노ㆍ장의 무치의 정치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에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현실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서 새로운 참의 세계와 나라를 꿈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들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8 퀘이커로서의 나의 삶 나는 퀘이커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믿음과 실천을 꼭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아니 하나로 보는 퀘이커로서 그러한 전통을 내 자신이 지킬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가 온다. 특히 옛날에 비하여 사치스럽게 살 수밖 에 없는 오늘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과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무엇 일까? 태어남 자체가 환경파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과연 자연 생태계를 파괴 하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로지 경쟁과 다툼을 부추기는 삶의 패턴에서 함께 살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사회에서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과 같은 영의 인도를 받아서 살 수 있을까? 점점 국가주 의가 굳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는 하나의 생명체계 속에 있다는 믿음과 철학을 어 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맹세를 하지 않고, 서약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아왔던 퀘이 커의 삶을 모든 것이 서류와 사인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화한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양 심을 주장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내 숨이 막히는 듯하다. 그 러나 그러한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현실에서 작은 활로를 찾아 나가는 것이 또 퀘이커 가 찾아나갈 길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느낌으로 잡는 실천 가능한 좁 은 길을 찾는 것이 계시를 기다리는 삶이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이 되지 않 을까? 그러니까 신비함이 없는 듯한 삶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자세로 내 삶을 이끌고 싶다.

한반도는 한 민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두 나라로 갈 라져서 다투는 현실 속에 있다. 나는 전 인류는 민족과 개별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철 학과 믿음 속에서 현상태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에 깊 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내 개인이 먼저 평화가 되고, 화평한 맘으로 살아갈 것을 노력할 일이다. 그것과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한 삶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하여 일단 나는 내 얼굴과 맘 속에서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함을 실천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용하는 훈련을 쌓아야 함과 동시에 획일화하려는 전통과 사회흐름과 대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을 벌이려 한다. 그것은 좌우의 이 념이나 노선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전쟁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진 늙은이들과 함께 전 국토를 순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던 지역을 찾아서 평화의 기운 을 불어 넣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동시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들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자 한다.

평화의 기운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창의적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상태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자신이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활동 가로 참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결과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돌보고, 모든 문제를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과 빠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기 전에 깊게 생각하여야 하고, 최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 생활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훈련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것은 내 자 신이 AVP훈련가로 여러 번에 걸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확신하게 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워크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중요한 생의 과제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일반 시민과 비폭력 평화사상에 대한 연구와 강좌와 포럼을 통한 평화분위기 의 확산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적대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신뢰가 없는 자도 그것이 있 는 자처럼 신뢰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삶을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드러움 이 강력함을 포섭하고, 유연함이 경직된 것을 녹인다는 도가철학의 일상화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특수한 사람만이 그러한 훈련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 사람이 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이 있다는 것, 내면의 스승이 있다는 것, 불성을 가지며 도와 접촉 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신비체 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곧 지극한 정상생활이다.

그러나 현대생활, 특히 문명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쉼이 부족하고 깊은 숨쉼이 부족하다. 그래서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분위기에 끌려가면서 힘 들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철학자가 분석했듯이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다. 나 에게는 피로를 느끼는 그들을 이끌고 평안한 곳으로 안내할 능력과 비전이 없지만, 그분 들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나는 특별 상담사도 아니고, 갈등해결사도 아니며, 그와 같은 훈련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방황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은 맘이 참으로 많다. 그것이 내 나름으로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느낀다. 그런 접촉, 만 남은 일대일의 개별만남도 가능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으로 만날 수도 있 다고 확신한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 즉 모든 것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옷도 다르며, 생활하는 모습도 다르다. 그 다름은 하나의 큰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서 종국 에는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 있 는 지역의 시냇물은 가까운 산골짝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그것은 곧 내 농토와 내 집의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제공한다. 나는 그 물 때문에 산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서 거대한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한없이 넓지만 하나의 바다다. 거기에서 하나가 된다. 결국 모든 실개천과 강을 거쳐서 바다로 흘러든 물은 한 물로 친하게 지낸다. 모든 물은 곧 친구들이다. 이런 비유를 우리의 논의인 종교와 생활, 신앙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들은 각각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출발하고 다르게 실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궁극은 하나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결 국 친구다.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민속종교가 곧 한 물에서 친한 친구로 살되 자기의 고유한 전통과 삶의 길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것이 내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리의 종류는 각종 분야별로 다양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 가지의 참여를 통하여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Quaker 그리고 Amnesty International의 적극활동가로서 국경 없는 삶으로 다리를 놓은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다른 문화 종교, 사람(인종), 문명, 관습 따위를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 고, 그 속에서 알짬을 찾아서 새롭게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린 자세에서 항 상 찾아가는 자의 삶을 이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

[1]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in: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1983, 한길사. 195-7

[2] 함석헌: 함석헌 저작집 24, 『씨의 옛글 풀이』, 한길사 2009, 34쪽)

[3] 위의 책, 36쪽

[4] 위의 책, 37쪽

[5] 위의 책, 37쪽

[6] 위의 책, 39쪽

퀘이커 서울 모임 자유계시판 13 장동만 종교인의 현실 참여



jboard


장동만 [ E-mail ]
종교인의 현실 참여
http://dmj36.blogspot.com



첨부화일1 : Think Global!.wps (899072 Bytes)


종교인의 현실 참여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해) ‘No!’ 라고 말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Evangell Gaudium)‘에서

카톨릭 전주 교구 박 창신 신부의 ‘시국 미사’가 일파만파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 사회적으론 종교인의 정치적 발언 내지 행위의 타당성 정당성을 에워싼 논란이 뜨겁고, 학계에선 새삼 정교 분리 (statecraft vs. soulcraft)의 역사를 고찰하는가 하면, 카톨릭 내부에선 교리(서) 해석이 분분하다.

이 모두가 근본적인 시각이 다르고, 그 문제 접근 방식이 달라 마치 백가쟁명 양상인데, 나로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종교인, 특히 목회자 (신부/목사)의 현실 참여 문제에 대해 평소 생각하던 바를 좀 적어 보고저 한다.

종교 (신앙) 인으로선 인간 만사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인간 생명의 존립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적인 정치 경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하나님의 뜻대로 정의롭고 공평하고 선(善)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번 박 신부의 ‘시국 미사’ 파동에 대해 서울 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이 임무를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평신도의 소명 으로 (카톨릭 교리서는) 강조하고 있다.”
“사제들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신자들의 고통과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참여 내지 정치 행동이 평신도들에게 소명이라면 사제에게는? 그리고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통과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비교인 (非敎人)에겐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어딘가 앞뒤가 안 맞는 논리적인 모순을 느낀다.

브라질 돔 헬더 까마라 대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사람들이 왜 빵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When I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me a saint.
When I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me a communist.)”
자비를 베푸는 것은 종교 행위이고, ‘가난의 이유’를 묻는 것은 곧 정치 행위가 된다? 참 아이로닉한 이야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강론한다.
“지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Listen to the voice of the earth)”
“지상의 목소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아닌가.
“귀를 기울여라.” 곧 거기에 관심을 갖고 행동라는 말 아닌가.

보수 전통 종교, 많은 보수 주의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설교한다. 인간의 하루 하루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경제 문제는 그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란다. 그것들은 정치 경제하는 사람들의 몫, 정교는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가 잘못 돌아갈 때, 그로 인해 숱한 생명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 듯’을 이 땅에 펼친다는 그들로서 이를 외면, 오불관언 해도 좋을 것인가.
그래서는 안될 줄로 안다.

그들은 누구보다 앞서 하나님 정의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의 불의, 죄악, 불공평, 불선 (不善)을 증언하고 규탄해야 한다. 이는 한갓 정치(적) 발언 / 행위가 아닌, 곧 ‘하나님 말씀’의 대변이자 실천이며 그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이는 한 생명을 구원하는 소선 (小善)을 뛰어넘어 다수를 함께 구원하는 공동선 (共同善)의 길이기 때문이다.

<장동만> <12/01/13>

P.S. 첨부한 글, ‘잉여 청춘이여,
Think Global!”

관심 있으신 분, 한 번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