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송필경 부처님 오신 날에 이용수 할머니와 윤미향 대표의 갈등 사태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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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에
이용수 할머니와 윤미향 대표의 갈등 사태를 보며…

깨달은 분께서 서로 다투는 논쟁의 한 복판에서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지혜가 생겼다. 이제 누구에게도 다시 이끌려가지 않으리라."

* 세상의 학자들은 저마다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싸우고 있다. 자신이야말로 진리의 숙달자라 하면서 논쟁을 일삼는다. "이것을 안 사람은 진리를 아는 자이며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자"라고 말하면서.
* 다른 견해를 품고 논쟁하면서, "저 사람은 어리석어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자기야말로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일까?
* 남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어리석고 저급하며 지혜가 뒤떨어진 사람이다. 자신의 편견만을 고집하고 있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고 지혜가 뒤떨어진 사람이다.
* 자신의 견해로 말미암아 깨끗해지고 진리에 도달하여 밝은 지혜를 지닌 사람이 된다면, 그런 사람의 견해는 지혜를 지니므로 모두 동일하게 완전할 것이다.
*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서로 비방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견해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할 것이 없다. 그들은 남을 어리석고만 말할 뿐이다.
* 어떤 사람이 ‘진리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거짓이다, 허황하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견해로 다툰다. 어째서 논쟁하는 자들은 똑같은 것을 똑같다고 말하지 않을까?
* 진리는 하나일 뿐, 둘은 없다.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 다투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진리를 찬양하고 있다. 논쟁하는 자들은 똑같은 것을 똑같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 “나와 다른 견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타락한 자. 불완전한 자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견에 탐닉하여 이미 물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 일방적으로 결정한 자신의 입장에 서서 자기 자신을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세상에서 논쟁에 휘말린다. 일체의 철학적 단정을 버린다고 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논쟁의 실마리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상 인용은 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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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에게 비판의식이 있는가, 나아가 우리사회에 비판의식은 있는가?
조국 사태와 윤미향의 사태를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태로 본다. (햐, 이것도 논란의 씨가 될 것이다.)
조국 사태가 촉발한 때부터 윤미향의 사태에 까지 많은 지성인들이 대체로 같은 틀로써 사태의 본질을 재단하고 있다. 조국을 바라본 견해가 고스란히 윤미향을 바라보는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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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사회 분위기는 사회적,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자기 견해만을 옳다고 일삼고, 남의 것은 병폐라 단정하는 경향이 무척 강하다. 그래서 툭하면 페이스북에서 폐친을 삭제하고, 대화를 하다 카톡을 탈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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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봉태 변호사의 소개로 이용수 할머니를 20여 년간 가까이서 뵈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언론과 SNS에서 노출된 사태의 사안을 거의 다 봤다. 대부분 내가 이미 아는 사안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무런 견해를 내놓을 수 없다.
왜냐?
서로 다투는 논쟁의 한 복판에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내가 말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지혜가 없다. 입을 놀린다면 논란에 휩싸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 십상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사회가 숫타니파다에서 말하는 논쟁의 본질을 되새김하면 어떨까?
Image may contain: 2 people, text that says "불교 최초의 경전 숫타니프 파타 법정 옮김 이레 이레"
崔明淑 and 12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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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地不仁 人間相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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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공장에서 내용파악하는데 이건 대놓고 정의연에대한 마녀사냥입니다. 국민 70프로가 사퇴해야한다니...적어도 40프로 가까이는 속아서 분노하는게 아닌가싶어요. 물론 여론 통계에 오류가 없다는 가정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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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화살경
    “그대는 지금 독화살에 맞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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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합니다. 조국사태와 윤미향사태는 본질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열성지지자들은 동일시 합니다. 그래서 조국이 윤미향이 되고, 윤석열이 이용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마치 윤석열 미워 하듯이 할머니를 미워 합니다. 윤미향을 비판하고 할머니를 옹호하면 친일프레임을 겁니다. 극우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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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와 B가 다투는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 A는 이야기에 자신의 목적을 더해서 B를 매장하려는 주변의 것들...가족, 지인을 넘어 정치인, 언론... 심지어 검찰까지... 그러자 B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서 A의 주변인들과 다툼을 벌임. 결국 A가 말하고자 한 바는 사라지고... A와 B의 주변인들 싸움으로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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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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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를 위해 한평생 희생헌신하신 우리집 할머니가 아무리 머라 하셔도, 우린 지혜롭게 번역해 그분의 본심을 올케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세대 미래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니까요. 티끌만한 비판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 엄마를 모신 딸이 있다면 모시는 과정에 티가 없을 수 없습니다. 과가 있을지라도 그 공이 막대합니다. 웬만하면 비판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근거 없는 막말은 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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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 송선생님다우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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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수할머니는최변호사까지싸잡아뭐라하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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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 태극기 조국 반조국 윤미향 이용수 .약간의 차이는.있겠지요. 시장성장주의에 빨려들어간 우리 사회의 반면들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배경이 같다고 보고 문제를 좀 바야 한다고 생각이 저는 듭니다.

[김종철의 수하한화]백합이 썩을 때

[김종철의 수하한화]백합이 썩을 때

[김종철의 수하한화]백합이 썩을 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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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8.03 20:48 수정 : 2016.08.03 20:49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김종철의 수하한화]백합이 썩을 때
절집에서는 밥을 공양이라고 말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왜 그렇게 부르는지 꽤 궁금했다. 어떤 사람은 “자연과 뭇 중생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보살로서 살겠다는 의지와 깨달음을 얻겠다는 의식”이 공양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즉 ‘발우공양’을 줄인 말이 공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밥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내가 확실히 납득한 것은 그게 공희(供犧)와 같은 말이라는 것, 그리고 공희란 산스크리트어 야즈나(yajna)의 번역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야즈나’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전체를 통해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고대 이래 인도의 성자들은 생명·삶의 원리는 무엇인가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야즈나’라는 말로 설명해왔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명·삶은 누군가가 내게 바치는 희생 없이는, 그리고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바치는 희생 없이는 한순간도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간단히 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밥을 못 먹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데 밥은 쌀로 짓지만, 쌀은 땅과 하늘, 바람과 구름과 비의 ‘자기희생’, 농부와 그 가족의 헌신적인 땀, 그리고 그들의 이웃과 공동체의 노고와 협력이 없으면 단 한 톨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밥 한 그릇을 알면 만사(萬事)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말을 쓰는 우리는 때때로 밥이라는 말을 ‘희생물’이라는 뜻으로 노골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넌 내 밥이야” 혹은 “내가 당신의 밥이란 말이냐”라고 우리는 종종 말할 때가 있는데, 그때 밥이란 제물(희생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내가 당신의 밥이 되어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지만, 여하튼 한국어 어법 자체에 벌써 밥=희생물이라는 생명사상이 명확히 내포돼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는 대개 우리 자신이 남의 밥=제물이 되는 것은 별로 내켜하지 않지만, 무의식중에나마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인가는 잘 알고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수많은 민담·전설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돼온 전형적인 미담일 것이다. 그리고 비근하게는 가령 야구시합에서도 늘 큰 박수를 받는 선수는 ‘희생번트’로 자기는 죽고 그 대신 앞선 주자를 살리는 선수이다.

그런데 인도의 고대사상에서 ‘야즈나’를 만물의 존재 원리로 파악한 것은 ‘희생’이 반드시 생명·삶의 손실을 뜻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희생하는 존재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의 밥이 된다는 것은 돌고 돌아서 결국 누군가가 내 밥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 만물이 이런 생명·삶의 사슬로 엮어져 있음을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매우 시적인 언어로 갈파한 분이 바로 동학의 두 번째 지도자 해월 선생이었다. 동학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 만물은 전부 ‘한울님’이다. 그러므로 모든 ‘한울님’은 다른 ‘한울님’들을 먹여살리는 밥이자, 동시에 다른 ‘한울님’을 밥으로 삼아 살아간다. 그래서 이천식천인 것이다.

해월 선생의 이 간명한 은유는 뛰어나게 심오한 생명사상의 표현이다. 피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 속 생명붙이들의 관계는 서로서로를 잡아먹는 극히 살벌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월 선생은 그것을 오히려 생명체 상호간의 상호부양과 공여(供與)의 관계로 파악한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평소에 새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감옥에서 쓴 어떤 편지 속에는 철새들의 이동에 관한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북유럽에서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철새들은 아프리카의 나일강 쪽으로 대거 이동을 하는데, 그 먼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독수리 등 맹금류들에게도 심히 힘든 여정이다. 그래서 새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완전히 탈진하여 모래밭에 며칠이나 쓰러져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맹금류들에게도 험한 고행길인데 노래하는 작은 새들은 어떻게 그 먼 길을 가는가? 과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철새가 이동하는 계절에는 하늘에서 잠시 ‘휴전’이 성립한다. 즉 작은 새들은 큰 맹금류의 등에 업힌 채 머나먼 길을 간다는 것이다. 오래전, 로자의 서간집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기는 이 모든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원래 극히 낯익은 상식이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天地同根萬物一體)”이라든지 “세상은 순환하며 뭇 중생을 살린다(空界循環濟有情)” 등의 표현은 모두 그러한 근원적인 생명사상·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 사상적 뿌리에서 밥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언어습관이 생겨났을 테지만, 어쨌든 공양이라는 말로써 한국불교는 우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먹는 밥이지만 그때마다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우리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전통을 세우고 계승해온 것만으로도 나는 한국불교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일개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삶의 근본이치를 가르치고, 그 근본이치에 따라 사람이 겸허한 마음으로 단순·소박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는 실천적 지식·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절집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나는 산중 사찰들에 즐비한 자동차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척 편치 않다. 게다가 한국불교의 기둥이랄 수 있는 조계종에서는 선거 때마다 금품이 난무한다는 소문이고, 동국대에서는 비리 혐의를 받는 총장(스님)이 외려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과 교수를 탄압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졌다. 며칠 전에는 미국인 출가자 현각 스님이 한국과 인연을 끊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돈을 너무 밝히고 권력자에게 굴종적인” 한국 사람들에게 질린 모양이다. 범부들이라 할지라도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하물며 출가 수행자들이 돈과 권력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백합이 썩을 때 그 냄새는 잡초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셰익스피어)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608032048005#csidxa42ea7a0fdd5192992fba59ece0ce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