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5

Hyeonpil Chung - YouTube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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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함석헌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고, 22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서울에서 그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을 마쳤다. 그래서 오는 3월 13일은 그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110주년이 된다.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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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 연세대학교 장기원기념관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강연회였다. 전두환이 총칼로 광주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권을 쥐고 있던 터라 사회분위기도 험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군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사복을 입고 강의장으로 향했다. 벌써 강의실 앞엔 많은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사복전투경찰인 백골단이나 '짭새'들이 캠퍼스에 많이 잠복했던 터라 주최 측 학생들은 강의실 입구에서 종이에 적힌 명단과 강의 수강자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머리가 짧아서 학생들이 나를 '짭새'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내 앞 학생신원을 확인하는데 어깨 너머로 보니 종이에 이름을 확인하고 X표를 긋고 있었다. 흘끗 보니 '철학과 황OO'이라는 이름에 아직 X표가 없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철학과 황OO"라고 뻔뻔스럽게 소리쳤다. 학생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강의실에 입장 시켜 주었다. 진짜 철학과 황OO 학생에게는 지금도 미안함을 느낀다.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되다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학생들 열기로 가득 찼다. 2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나는 그날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흰수염, 흰두루마기 차림을 해 신선같이 보이는 함석헌 옹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강렬한 전기처럼 내 몸과 마음을 통째로 감전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그날 그 순간은 내 생애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미칠 대상'을 찾았다. 그는 곧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고, 나를 '지상에서 영원으로' 매순간 이끄는 영감과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된 것이다.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지만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노벨평화상 후보자였다. 1979년과 1985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허나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중엔 그의 이름 석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바닷가 조약돌만큼이나 많다. 아마 그의 이름을 알고 모르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늘 한반도에 남긴 영향이 무엇인가가 아닐까.

함석헌은 무엇을 남겼나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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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네 가지 이념이나 사상은 ▲ 유교 ▲ 일본제국주의 ▲ 공산주의 ▲ 기독교다. 이 네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와 매일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함석헌은 이런 문제에 대해 동시대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쳐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그 희망의 빛을 우리는 '자유'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포용성'이나 '다양성 존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이 추상명사들이 오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혼신을 다한 고통과 열망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혹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과 열망을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주인공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들이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온 가치들을 손상과 상실의 위험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다. 함석헌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그의 삶을 영광으로 채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근거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감별해 내기 위해서다. 나는 함석헌이 크게 세 가지 그 삶의 흔적을 한반도에 남겼다고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체성 발견

첫째, 20세기 전반부 한반도를 지배한 암울하고 어두운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비전이라는 진액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1930년대 아시아의 슈퍼파워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의 숨통을 조르며 역사를 왜곡하고 정신을 말살하고자 했을 때, 그는 조선인의 자아 찾기, 즉 정체성 발견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를 강의하고 저술한다. 당시 함석헌의 친구이자 <성서조선> 주간 김교신은 그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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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시간의 연속 강연이었으나 강사와 청중이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 역사 반만년에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날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 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자 200인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贅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첨서 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心碑)에 명기할 뿐이었다…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치 않았다면 그는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본 호(성서조선)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당시 드문 지식인 김교신의 충격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이 받은 충격도 상상 할 수 있다. 후에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필화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데 그들을 취재하던 일본형사의 안목도 상당하다. "그냥 무력항쟁을 하는 놈들보다 500년 후를 내다보고 조선정신과 얼을 교육하는 너희 놈들은 훨씬 악질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 점령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희망'이라는 무기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나 민족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고난을 극복 할 힘을 얻을 수 있고 내일을 개척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조선역사>는 1965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되었고 2009년 아시아명저 100선에 선정된다. 함석헌 사후 22년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그가 이렇게 혼혈을 기울여 쓴 책에 대한 인세는 매년 2천만 원이 넘는다.

권위주의 정권기, 민주화 운동가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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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황국신민의 잔재라고 여겨지는 '국민'이나 친북좌경으로 몰릴 수 있는 '인민'이라는 단어보다 오염되지 않았다는 '씨알'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썼다. 그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장준하가 만든 <사상계> 잡지에 글을 써서 불의한 정권을 비판하고 대항하여 옥고를 치르고 매를 맞았다.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 하에서 <사상계>가 폐간되자 그는 70세에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관주도 하의 거대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간다. '한계레신문사' 초대 대표 고 송건호는 박정희 독재정권 기간 중 함석헌의 두려움 없는 활동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아무도 독재적인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감히 말하거나 글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언론인, 대학교수, 지식층도 감히 박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만이 박정권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비판했다. 지금도 나는 함 선생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민주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고 할 때, 함석헌은 분명히 그의 직설적이고 통쾌한 말과 글을 통해서 한국에 언론의 자유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고, 양심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창했다.

그런 함석헌이 1970~80년대를 통해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씨알에게 민주주의가 현실이 아닌 하나의 미약한 꿈에 불과했을 때, 함석헌은 자유 하는 씨알의 상징이었고, 민주정신의 화신이었다. 그랬었다. 그래서 박정희정권 하에서 나온 거의 모든 시국성명서 앞부분엔 항상 함석헌의 이름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장준하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함석헌은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동대문운동장 선거유세 연설 중 함석헌은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외쳤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이렇게 열렬하고 헌신적인 그의 분투 덕분에 장준하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옥중 당선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던 것이다.

종교적, 이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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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4일 함석헌은 '대선언'이란 시를 발표한다. 이 시에서 그는 장로 대통령 이승만을 향하여 이렇게 직격탄을 날린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함석헌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편애주의 정책에 대항해(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다른 종교도 내 종교와 똑같이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종교적 보편성을 강조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 것이다.

그의 책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하며 쓴 아래 글에도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보편적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1961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셋째 판을 내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함석헌,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다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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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함석헌은 소외된 자, 약자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보았다. 그는 기득권자나 가진 자의 통치논리가 아닌, 서민과 소수자, 패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을 갖고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함석헌의 추종자들 또한 최소한 기득권자나 '부자의 대변자'가 아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서민, 힘없는 사람들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유럽인들도 우리보다 더 많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의 문제는 다르다. 강자독식과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사자가 토끼를 마음대로 죽이고 유린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자유민주주주의인가? 오늘 한국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함석헌이 살았던 길은 결코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고 수탈할 때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강자의 횡포를 바라만 보는 것은 결코 함석헌이 주장한 '같이살기운동'의 길이 아니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현실에서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강자와 재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이 경제의 틀에서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단연코 함석헌을 따른다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강자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앞장서는 가짜 씨알 쭉정이의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길과 궁극적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도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씨알의 소리', '약자의 대변자' 함석헌을 생각한다.


"함석헌 사상이라는 통일의 안경을 쓰자" 김은주박사 워싱턴강연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함석헌 사상이라는 통일의 안경을 쓰자" 김은주박사 워싱턴강연


등록 2015-10-29 11:58:03 | 수정 2016-12-28 15:49:22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남북평화통일의 해법을 제시한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사상을 조명하는 강연회가 최근 워싱턴에서 열렸다. 함석헌평화센터와 미국수도워싱턴한인회과 공동주관한 미주희망포럼에서 김은주 박사는 '한민족의 과제, 이상적 통일방안'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중립화 통일론과 민중 중심의 민주주의적 통일을 설파한 함석헌 선생의 평화통일사상이야말로 21세기 남북한 통일의 해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5.10.28. <사진=함석헌사상연구회 제공>


함석헌평화센터-함석헌사상연구회 초청강연회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21세기 남북통일, 함석헌 사상이 해법이다!"

일제 식민기간의 두배인 분단70년을 맞아 일찌기 평화통일의 해법을 제시한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사상을 조명하는 강연회가 최근 워싱턴에서 열려 관심이 모아졌다.

함석헌평화센터와 미국수도워싱턴한인회가 공동주관하고 함석헌사상연구회가 협찬한 미주희망포럼에서 김은주 박사는 '한민족의 과제, 이상적 통일방안'을 주제로 발표했다. 페어팩스의 성십자가한인성공회에서 열린 강연에서 김은주박사는 "함석헌 선생의 평화통일사상이야말로 21세기 남북한 통일의 해법이 될 것"이라며 "멋진 역사관이라는 통일의 안경을 쓰자"고 제안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민권운동가로 잘 알려진 씨알 함석헌 선생은 독재정권 시절 명동사건,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투쟁으로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김은주박사는 이날 "함석헌선생은 1960년대부터 남북한의 평화통일은 정치 체제의 통일이 아니라 민심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민심 통일이 되지 않는 통일은 설령 남북통일이 된다 해도 진정한 통일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박사는 "함석헌의 평화통일 사상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주의 사상을 넘어서는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리를 향한 종교적 구도 사상이 기반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함석헌 평화통일 사상이 다른 정치적 평화통일론과는 구별되는 사상사적 의미"라고 소개했다.

이어 "당시 선생이 강조한 통일의 두가지 길은 중립화 통일론과 민중민주주의적 통일이었다. 우리 민족의 통일은 남북한 어느 일방의 정치 이념에 의해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민중들이 스스로 깨어날 때 통일은 이뤄지고 참된 통일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함석헌의 민심 통일론이야말로 갈등과 미움, 불신과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하다"면서 "남북의 평화통일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은주박사는 미국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빙햄턴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헌터 칼리지에서 교육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뉴욕의 한 초등학교에서 과학교사로 봉직하고 있으면서 통일운동에 열정을 쏟아왔다.

이날 강연에 앞서 이선명 US뉴스 주필은 "김은주박사는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대학 시절 우리말과 민족사를 공부하고 한국의 열악한 인권과 노동자 및 소외계층 등 사회 전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평화와 교육개혁 운동의 전위에서 20년간 활동했다"면서 "우리 민족의 통일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는 우리들 앞에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찾았다'를 외치며 나타난 통일운동가"라고 소개했다.

뉴욕출신인 김은주 박사는 뉴스쿨과 빙햄튼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모국의 고려대 대학원에 역유학, 공부를 마친 후 유대인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헌터칼리지에서 교육행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있다'는 신념으로 지난 25년간 미국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으로 꼽히던 뉴욕 할렘가의 초등학교에서 과학교사로 봉직해왔다. 중고교 교감이나 교장으로 영전할 자격을 충분히 갖췄음에도 일선교사를 고집하고 심지어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원으로 초빙해도 고사한 채 어린이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신념을 지켰다.

지난 2011년엔 예일대 세미나에서 전통풍물과 랩, 재즈를 이용한 '라자풍(RAJAPOONG)' 교습법을 발표해 주류 교육계에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어린이 교습방안의 개선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뉴욕 교육위원회로부터 우수 교사로 여러 차례 선정됐고 뉴욕한인교사회장 당시 공립학교 설날휴교 캠페인을 주도한 바 있다.

robi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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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상 교수님의 철학적 근원인 '존재와 시간'을 바탕으로 현대 시대정신의 흐름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존재'와 '나'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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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3. 28.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을 철학의 이름으로 생각하게 된 동기를 내게 처음 제공한 것은 미국의 에머슨(1803-1882)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에머슨은 그와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후학 소로우와 더불어 미국적인 학문의 터를 닦았다. 한때 함석헌과 에머슨의 글을 동시에 읽기도 하면서 내린 결론은 두 사상가 사이에 유사함이 많다는 것이고, 그 유사함의 일부는 철학적이란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살았던 시대도 달랐던 두 사상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결론만을 도출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 두 사람을 연결해보는 이유는 함석헌이 서구사상과 맺은 인연이 주로 에머슨과 같은 낭만주의의 사상가들과의 교감 속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함석헌이 자주 언급하는 서양의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알 수 있고, 이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에머슨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미국의 사상에 끼친 영향,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유럽의 정신적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상적 독립의 발판을 마련했던 그의 역할이 바로 함석헌이 한국 사상의 독립을 위해 자처했던 역할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미국 내에서 에머슨의 그런 역할이 미국학문의 전통을 가능케 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함석헌이 남긴 정신적 유산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에머슨에 대해 많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주로 동시대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에머슨과 콩코드라는 마을에 함께 살았던 소로우와 함께 언급된다. 함석헌이 소로우의 유명한 <시민불복종>이란 글을 한국어로 번역까지 한 것에 비하면 에머슨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함석헌은 이 세 사람을 미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들로 이해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함석헌의 글에는 미국의 정체성을 이들과 연관 지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에머슨, 소로우, 휘트먼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미국의 어떤 면이 가능했고, 미국을 가능케 만든 사상적인 조건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또 에머슨은 빠졌지만 <월든>을 쓴 소로우와 <풀잎>의 저자 휘트먼이 없었으면 ’미국은 더 썩었을 것’이란 주장도 했다. 큰 맥락에서 에머슨의 이름을 포함하여 이해해도 무리는 없어 보이는 주장이다. (함석헌이 미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했기에 그들의 사상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더 썩었을 것이라 했는지는 다른 각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이들이 야인이라면 함석헌과 추구했던 인간성에 부합하는, 즉 함석헌적인 인물들이 된다.

    실제 에머슨과 소로우가 없는 미국의 사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함석헌이 19세기 중반에 완성된 이들의 사상이 미국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아낸, 미국을 대표하는 학문으로 이해했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받던 인물은 존 듀이(1859-1952)였다. 듀이를 에머슨과 소로우나 휘트먼 같은 인물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잠시나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완성시켰고, 진보적인 사회개혁에도 큰 관심이 있었고, 실험적인 학교까지 세워 교육이론을 펼쳤던 듀이는 함석헌의 사상적이고 실천적인 행적과도 괘를 같이 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듀이는 함석헌이 미국을 처음 방문하기 10년 전에 이미 사망했지만, 그의 명성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세계적인 것이었다. 듀이는 동아시아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1919년 봄 두 달간 일본을 방문해 동경제국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그 내용은 <철학의 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중요한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듀이는 일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그의 콜롬비아 대학 제자였던 호적의 초청을 받아들여 중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2년이란 긴 시간으로 보내면서 많은 강연을 했고, 특히 5.4운동으로 고조된 중국의 사회개혁과 교육개혁을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 가운데 그의 존재는 큰 화제가 되었다. 1919년 북경에 머물던 듀이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로부터 한국방문을 요청받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했었다. 미국을 여러 번 방문했고, 미국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함석헌이 듀이를 몰랐다고 보긴 힘들다. 함석헌은 1962년 첫 미국 방문 때 하버드 대학의 은퇴 교수였던 철학자 Ernest William Hocking을 만났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의 제자였고 훗날 듀이와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고, 한때 듀이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란 평가도 받았던 사람이다. 큰 틀에서 듀이와 마찬가지로 실용주의의 시각으로 유럽의 철학과 대화를 이어갔던 미국의 철학자였다. 함석헌은 Hocking 교수와의 만남과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만약 듀이가 그때 살아 있었다면 미국 국무성에서 함석헌과 듀이가 만나 미국의 정신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하지 않았을까 상상도 할 수 있다. 듀이에 대한 함석헌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사상가로 듀이가 아니라 에머슨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미국의 실용주의에 대한 함석헌의 판단일 수도 있다. 특히 실용주의가 기술주의로 흐르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가능성이 생긴다. 20세기 중반 미국이 썩었다는 함석헌의 판단도 에머슨과 소로우가 꿈꿨던 이상적인 미국은 사라지고 자본주의와 결탁한 기술과 폭력의 문화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에머슨과 듀이를 좀 더 연결시켜 보자. 미국 내에서도 최근까지 에머슨의 학문적 유산을 철학적인 것이라 보는 시각은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낭만주의 학풍의 에세이 형식의 글을 썼고, 자립적인 인간이해를 통해 미국의 독립정신을 표현해냈고, 시를 쓰기도 했고, 미국 실용주의의 동기를 제공했고, 당시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는 등의 이력이 그를 이해하는 주된 관점이었다. 문학적인 사상가로도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부각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에머슨을 니체와 하이데거와도 연결시키며 독창적인 철학적인 작가로 부각시킨 사람은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이라는 미국의 철학자다. (지식사의 사적인 연결점들에 대해 비교적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니체가 에머슨의 책을 항상 들고 다녔고, 반복해 읽으며 밑줄을 긋고 여백에는 극찬의 감탄사까지 남겼을 뿐 아니라 글의 스타일까지 모방하려 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에머슨을 철학적인 사상가로 부각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존 듀이였다. 1903년 시카고 시절 그는 “Emerson: the Philosopher of Democracy”(에머슨: 민주주의의 철학자)란 글을 썼다. 듀이는 에머슨의 글을 어떤 철학으로 이해했을까? 에머슨에 대한 듀이의 평가는 함석헌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듀이의 글을 들여다보자(이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듀이는 에머슨의 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를 잘 알고 있었다. 듀이는 에머슨에 대해 철학적이라고 하기엔 논리가 약하다는 평가를 논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비판했다. 듀이에게 논리는 논증의 도구만이 아니라 직관의 반응을 구하는 논리가 있을 수 있었고, 침묵마저도 논리의 양식이 될 수 있었다. 에머슨은 ‘말’이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침묵이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들에서 사유의 동기를 찾았다. 에머슨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방법론을 묻거나 그가 발전시킨 논리의 형식을 묻기 전에 그의 글에 담겨 있는 그만의 논리와 방법을 깨달아야 했다. 또 에머슨을 철학자라 부르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에머슨이 철학 이상의 학문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머슨은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시인으로 철학을 했고, 반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창조적인 사유를 했다. 이성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사유를 했던 에머슨에게 철학은 ‘아직도 거칠고도 기초적인’ 상태에 있었다. 에머슨은 미래의 철학을 시인들이 가르칠 것이라 예고했다. 그에게 철학자는 믿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철학자와 시인 사이의 분쟁은 고대 희랍의 철학과 함께 시작했다. 형이상학과 예술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내는 글을 써온 에머슨은 그 분쟁을 19세기에 재현해냈다. 에머슨에게 철학과 문학의 방법론적인 구분은 인위적이고 유치한 것이었다. 에머슨이 문제 삼은 것은 정신이었다. 그 정신의 본질은 새로움에 있었다. 이전 시대의 지치고 낡은 원칙의 한계를 파헤칠 지식인을 찾았고 타성에 젖지 않은 새로운 사유를 찾았다. 에머슨이 추구했던 철학은 시스템이나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고, 삶에 정직하고 일상의 경험에 충실한 철학이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사상이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경험을 설명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요구했고, 모든 사상의 대한 판단의 기준이 일상의 삶 속에 있음을 설파했다. 그에게 모든 진리는 일상에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논리의 싸움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철학이나 자신의 생각을 체계화 시키려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머슨은 교리나 제도, 관습이나 체계적인 것을 싫어했고, 철학과 종교, 예술과 도덕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되돌려놓고자 했다. 신학과 형이상학의 기술과 속임수로 인해 감춰진 진리의 단순함을 찾고자 했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했다. 그를 실패한 개혁자, 지혜의 철학자, 또는 덕의 삶을 가르친 선생으로 보는 등 다양한 시각이 있었다. 오늘날 플라톤의 글에서 체계와 논리의 철학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해석의 역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듀이는 에머슨 철학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듀이는 20세기가 에머슨에게 그런 역사를 제공할 것이고, 역사는 결국 에머슨을 민주주의의 철학자로 기억할 것이라 예언했다. 20세기에 민주주의가 사상적인 자기표현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에머슨에게서 찾을 것이란 예언이었다. 듀이가 말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맛서는 이념적인 제도가 이니라, 일반 대중의 경험이 사유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정신적인 평등이라는 에머슨적인 이상을 말한다.

    19세기 미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상가였던 에머슨과 20세기에 그 역할을 맡았던 듀이의 관계는 미국의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듀이의 사상에 에머슨이 얼마나 어떻게 반영됐는지, 에머슨의 사상에서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의 뿌리를 얼마나 찾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듀이가 에머슨의 사상을 철학으로 이해하고 옹호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듀이는 에머슨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 해석의 역사를 직접 참여했다. 듀이에게 미국의 철학은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나 이념과 분리될 수 없었고, 에머슨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미국의 철학이 논리의 놀이터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와 함께 발전한 정신사의 산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머슨에 대한 듀이의 평가를 함석헌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듀이의 글 곳곳엔 에머슨 대신 함석헌의 이름을 넣어도 이해가 될만한 문장들이 있다. 듀이가 제시한 논리와 방법의 한계, 시와 철학의 경계에 대한 성찰, 일상의 경험이 기준 되는 철학은 분명히 함석헌의 철학을 위한 논변으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듀이는 에머슨의 철학을 말했지만, 그 내용을 철학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 작업은 앞서 언급한 스탠리 카벨이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해왔고, 카벨의 이름은 앞으로 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함석헌과 에머슨 사이에 비교가 가능한 부분을 몇 가지 언급해보자.

    약 10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지구 반대편에서 각각 태어난 두 사람의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다. 에머슨은 교회의 낡은 교리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의 이유로 3년간의 목회를 그만두었다. 특히 교리나 관습에 따라 성만찬을 집전할 수 없다는 게 사임의 직접적인 이유였다. 함석헌은 예수의 대속이란 교리를 자유로운 인격이 받아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단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그 후 두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발전시킨 사상은 ‘스스로’, ‘자기 신뢰’, ‘자유로운 인격’과 같은 인간이해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인간은 그들에게 제도와 관습이 묶어놓을 수 없는 생각하는 영적인 존재였다. 에머슨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자아를 찾았고, 함석헌은 문명에 가려진 야성의 영성을 찾았다. 에머슨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생각의 사람’(Man Thinking)이었고, 함석헌은 좀 더 집단적인 ’생각하는 백성‘이었다. 철학의 사유를 “창백한 생각”(Pale cast of thought - 에머슨이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햄릿 대사)에서 벗어나 생각의 조건인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 되돌리려는 노력도 하나의 공통점이다. 자연과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함석헌은 한국의 정신을 가로막는 숙명적인 세계관이 있음을 경고했고 이를 극복할 삶의 자세를 믿음이라 했다. 에머슨이 미국을 약속과 미래와 새로움의 언어로 이해한 이유는 미국이 유럽의 낡은 제도와 교회의 교리가 낳는 억압적인 자아의식을 극복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두 퀘이커의 영향을 받았고, 한때 힌두교에 심취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퀘이커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공중기도를 싫어했다). 함석헌과 에머슨을 함께 생각할 근거를 말하면서도 기억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에머슨과 개인과 전체가 긴장관계 속에서도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했던 함석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또 에머슨이 당시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했다고는 할 수 없는 반면에 저항과 참여정신을 배제한 함석헌의 사상은 생각할 수 없다. (함석헌과 에머슨을 함께 읽는 글은 1회 더 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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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946?fbclid=IwAR0oYggfItZx-EcUGotWWqKivHIWVoZHOp3rx2ak89PovIV7I895W3kAOYg [웹진 <제3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