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기독교사상 2008년 8월호특집 :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유영모와 함석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용수352 한종호

기독교사상 2008년 8월호(통권 제596호) - 대한기독교서회 논문 : 전문잡지 - DBpia, 연구자를 돕는 똑똑한 학술콘텐츠 플랫폼

기독교사상 2008년 8월호(통권 제596호)

발행기관명
 
대한기독교서회
저널명
 
기독교사상
주제분류
 
인문학 > 종교학/신학
발행연도
 
2008
권호 내 총 논문수
 
27

표지 이야기

특집 :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짦은 두레박

특집 :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짦은 두레박

특집 :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성서와 설교

옛글 나들이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 수련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 다석 유영모의 기도와 영성 김흡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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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2008년 8월호)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 다석 유영모의 기도와 영성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새 길을 열며

    다석 유영모(1890-1981)는 그의 제자 함석헌과 더불어 종교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된다. 이번 여름(7월 30일-8월 5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적 권위를 가진 제22차 세계철학대회(XXII World Congress of Philosophy)에서도 한국준비위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사상가로서 유영모와 함석헌을 선정하고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는 유영모가 과연 기독교인인가? 하는 등의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한국신학의 광맥”으로서 그의 중요성을 홀대하고 있다.1)

     그러나 유영모 사상의 기조는 확실히 성경에 있으며,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성 수련에 따른 통찰에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영어몰입교육 등 한글과 한국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고취보다는 언어와 경제적 실용이 서구화의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주장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유영모의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겼던 한글사랑이 한국 기독교인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많은 독자들은 이 글의 제목과 맨 앞에 인용된 키워드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순수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신기함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꼈으리라. 제목에서 ‘여러 밤’이라 한 것은 ‘밤 셋’이란 뜻을 가진 유영모의 호 다석(多夕)을 필자가 한글로 풀어서 표현해 본 것이고, ‘그이’란 ‘선생’ 또는 ‘군자’를 다석이 자주 그렇게 호칭했다. 그래서 ‘여러 밤 그이’는 다석 선생을 지칭한다. ‘하늘놀이’라는 것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다석에 있어서는 최상의 기도법을 말한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는 다석이 순 한글로 표출한 기독교 영성 수련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한나신 아들’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몸’, ‘참맘’, ‘참바탈’을 성취하기 위한 다석의 수양법, 곧 전통신학적인 용어로 굳이 말하자면 성화론을 지칭한다.
    다석의 수양법은 말로는 “성령! 성령!” 하지만, 구체적인 영성수련법이 빈곤한 한국 개신교에게 앞으로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며 큰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라는 구절을 화두로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자의 삶과 영성

    다석에 있어서 영성과 일상(聖과 俗)은 서로 따로 있던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전부가 곧 영성이고 곧 기도이다. 그의 ‘기독자’라는 다음의 한시(1956. 12. 8)에서 이러한 생각이 분명하게 표출된다.2)

    기독자(基督者)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체성극명야귀탁(      誠克明夜歸託)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다석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란 기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기도는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숨을 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숨을 쉰다는 것은 단지 상징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호흡하는 것을 의미한다.(元氣息: 기도는 본래 숨을 쉬는 것이다) ‘배돈’이란 “조심조심 후하게 또한 정중히 두텁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다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준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숨을 쉬면 두텁게 후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하는데 그 '원(元)'은 숨입니다. 그래서 기도드린다는 말은 안 됩니다. 호흡을 드린다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 곧 호흡하는 것을 바로 하느님에게서 받아서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즉, 기도는 우리의 ‘원기식’을 두텁게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기도배돈원기식’)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해석을 가할 여지가 있다. 즉 기도란 배돈하게 원기를 호흡한다(息)는 말이 된다. 기도란 원기(元氣), 즉 우주의 근원이 되는 기운, 곧 성령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숨 쉬는 것이다. 다석의 선도(仙道)와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석은 호흡하는 숨 하나하나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성 그리고 내가 기독교 신앙인이 된 의미를 음미하고 묵상하며 숨을 쉬었던 것이다. 숨을 흡(吸)하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숨을 호(呼)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과 공경을 바쳤던 것이다.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다석의 영성은 다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생물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 확인되고 체험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요 맥박이 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숨 쉬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도요,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찬미반주이다. 그는 말한다.
    맥박은 건강해야 합니다.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뚝딱뚝딱 하는 소리는 참찬미입니다. 다른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로 나가는 것이 ‘건맥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다석은 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박이 팔딱팔딱 찬미하며 반주합니다. 이렇게 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피입니다. 기도는 배돈하고 ‘원기식’을 드리며, 찬미에는 ‘건맥박’으로 반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 ‘건맥박’을 달성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했고. 이것을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정의했다.(롬 12:1) 그러나 많은 기독교 영성전통들은 희랍사유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서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만을 숭배하고 몸과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몸 신학’ 또는 ‘몸의 영성’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석의 ‘찬미반주건맥박’과 ‘몸성히’라는 통찰은 이러한 상황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성신학적 자원인 것이다.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물론 이러한 공경의 자세는 건강을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식사 때에도 적용된다. 모든 식사가 곧 성만찬이요, 곧 제사인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이 한마디만큼은 기억해주십시오. ‘상의극치일정식’은 제사이고 성찬입니다. 애식과 회식의 정신으로 먹는 것이 상의극치인데, 성찬은 제사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가짜가 들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예배당에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일상을 사는 것이 ‘상의극치’가 됩니다.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정신을 매끼 식사 때마다 표시하여야 극치를 이룰 것입니다.(좬다석 강의좭: 329)

    교회에서 예배할 때만이 아닌 모든 식사 때는 물론이고, 일상의 삶 전부가 바로 산제사요, 예배인 것이다.(롬 12:1)

    체성극명야귀탁(    誠克明夜歸託)
    다석은 하나님을 알기위해서는 ‘체성극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체(  )란 조상을 기리며 정성껏 봉양하듯 하나님을 추원하는 것이요. 성(誠)은 참을 존재론적으로 이룸을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추원(追遠)을 옳게 하는 것이 체(    )요, 이에 바로 들어가면 성(誠)입니다. 체성(    誠)은 치성(致誠)입니다. 이 ‘체’를 밝혀야 ‘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극은 늘 하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체성'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늘 ‘체성’을 밝히면 밤, 곧 신탁(神託)에 들어갑니다. 말씀이 늘 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래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떳떳하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밤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체성극명야귀탁! 이 한 구절로 다석은 신학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신학은 바로 다름 아닌 체성, 극명, 신탁에 들어가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몸성히
    기독자의 참 삶과 영성에 들어가려면 우선 “하나님의 성전”(고전 3:15)이요, “거룩한 산 제사”(롬 12:1)인 우리 몸을 성하게 ‘건맥박’하게 해야 한다. 다석은 이것을 ‘몸성히’라고 칭한다. 이 대목에서 다석이 “몸이 성하면 몸이 성하지 않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좬다석 강의좭:56) 왜냐하면 다석의 ‘몸성히’가 온전한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우생학적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맘놓이,  비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곧 마음을 비워야 한다. 다석은 이것을 ‘맘놓이’ 또는 ‘  비히’라고 칭한다. ‘  비히’는 ‘자기비움(kenosis)’의 영성(빌 2:7)을 다석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진공이 될 때까지 깨끗하게 비워야한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진공을 만들어 놓으면 한데 쏠려 몰려들어 옵니다.” 그 몰려들어 오는 참된 것들, 곧 ‘속’, ‘곧’, ‘믿’(忠信)을 말아서 채워야 한다(‘챔말기’). 이 ‘말기’는 결국 ‘맑기’에 이르게 된다고 다석은 설명한다.

    ‘말기’만 채우지 말고 몸 성히 비어 있으면 영원히 맑고 맑아집니다. 이승에서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 저승에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가는 길에 속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3)

    바탈퇴히
    ‘몸성히’와 ‘맘놓이’의 두 단계는 ‘바탈퇴히’의 과정을 지향한다. ‘바탈’은 나의 바탕, 개성(個性)을 말한다. ‘퇴히’의 ‘퇴’는 본래 ‘ㅌ’ 밑에 ‘아래 아’자를 쓰는데, ‘태워버린다“(燃)라는 뜻과 ‘태워나간다’(乘)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좬다석 강의좭:174-6) 즉 나의 못된 버릇과 악한 바탕을 끊임없이 태워 변화시켜나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다석은 말한다.

    ‘나’밖에 없습니다. 단지 내 바탈을 태워서 자꾸 새 바탈의 나를 낳는 것밖에 없습니다. 종단에는 아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를 하느님 뜻대로 자꾸 낳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께서도 바탈을 태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좬다석 강의좭:206)

    ‘바탈퇴히’는, 내 바탈(自)을 스스로 태우는(燃, 然)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옮기면 곧 자연(自然)인 것이다. 그리고 다석은 스스로 ‘자(自)’자는 ‘코 속’을 형상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연은 또한 코가 불탄다, 즉 코로 숨 쉰다는 것을 표상한다.

    우리 동양 말로 ‘자연(自然)’은 불탄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숨쉬는 것은 불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 속이 불탄다는 말입니다.(좬다석 강의좭 377)

    이것 또한 다석과 선도의 연관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선도와 비교하자면, ‘참몸’을 만들어 가는 ‘몸성히’는 올바른 몸인 정체(正體)와 진체(眞體)를 체현하기 위해 몸을 고르는 ‘조신(調身)’에 해당하고, ‘참맘’을 향한 ‘맘놓이’는 올곧은 마음인 정심(正心)과 진심(眞心)을 구현하기 위해 맘을 고르는 ‘조심(調心)’과 유사하고, ‘참바탈’로 성화하려는 ‘바탈퇴히’는 ‘참숨’인 정식(正息)과 진식(眞息)을 이행하고자 호흡을 고르는 ‘조식(調息)’과 관련된다. 이와 같이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는 ‘조신(몸고르기), 조심(맘고르기), 조식(숨고르기)’과 대비된다. 그것을 도표로 하면 다음과 같다.

    몸성히 (참몸) 몸고르기 調身 - 正體 = 眞體
    맘놓이 (참맘) 맘고르기 調心 - 正心 = 眞心
    바탈퇴히 (참바탈, 참숨) 숨고르기 調息 - 正息 = 眞息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다석의 기도

    빈탕한데 맞혀 놀이(空與配享)
    다석의 영성에 있어서 사람살이(살림 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여배향(空與配享)’이다. 그는 그것을 “인간으로 나서 본 인간에 대한 결론”이라고 말한다.(좬다석 강의좭:458) 이 ‘공여배향’을 한글로 풀이한 것이 ‘빈탕 한데 맞혀 놀이’이다. ‘빈탕’은 크고 큰 허공, 즉 “공공허허대대실(空空虛虛大大實)”을 말한다. ‘안팎 한테’(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한데 + 하나 = 한테)에서 나온 ‘한데’는 ‘베풀’ 여(與)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좬다석 강의좭:466) ‘맞혀’는 맞추어 간다라는 뜻의 배(配)를, ‘놀이’는 제사(享)의 유희삼매에 빠져 노는 것을 말한다. 다석이 내린 “인생의 결론”을 한 마디로 하자면, 이와 같이 “빈탕 한데에 맞추어서 놀이하자!”이다.(좬다석 강의좭: 467) 그것은 곧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영적 예배”를 드리자는 것과 공명한다.(롬 12:1)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우주 산보

    다석의 ‘빈탕한데 맞혀 놀이’, 곧 거룩한 산제사와 영적 예배는 “산보” 또는 “정신하이킹”이라고 부른 그의 기도문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기도문을 살펴보자. 

    산보

    높고 높고 높고 산보다 높고 산들보다도 높고 흰 눈보다도 높고 삼만 오천육백만 리 해 보다도 높고 백억 천조 해들이 돌고 도는 우리 하늘 보다 높고 하늘을 휩싼 빈탕(虛空)보다도 높고 허공을 새겨낸 마음보다 높고 마음이 난 바탈(個性)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아버지 한나신 아들 참거룩하신 얼이 끝없이 밑없이 그득 차이시고 고루 잠기시며 두루 옮기시사 얼얼이 절절이 사무쳐 움직이시는 얼김 맞아 마음 오래 열려 예여오른 김 큰김 굴려 코뚤리니 안으로 그득 산김이 사백조 살알을 꿰뚫고 모여 나린 뱃심 잘몬의 바탕 힘 바다보다 깊이 땅 아래로 깊이 은하계 아래로 깊이 한 알 알을 꿰어 뚫다. 이 긴김 깊이 코김 뱃심으로 잇대는 동안 얕은 낯에 불똥이 튀고 좁은 속에 마음종 울리다 마니 싶으지 않은가, 우는 이는 좋음이 있나니 저희가 마음 싹임(消息)을 받을 것임이라. 우리 마음에 한 목숨은 목숨키기 깊이 느껴 높이 살음 잘몬의 피어 울리는 피도 이 때문 한 알 알의 부셔져 내리는 빛도 이 때문 우리 안에 밝은 속알이 밝아 굴러 커지는 대로 우리 속은 넓어지며 우리 꺼풀은 얇아지니 바탈 타고난 마음 그대로 왼통 속알 굴려 깨쳐 솟아나와 오르리로다.4)
     
    다석은 이것을 노래처럼 외우면서 깊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정신하이킹”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우주를 관통하고 “높이 높이 올라 하나님의 보좌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얼김[성령]을 받아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왔다가 다시 내 목숨을 키워 올려 결국은 마음의 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다석의 기도는 그야말로 하늘을 무대로 우주 산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늘을 덧붙여 ‘빈탕한데 맞혀 하늘 놀이’라는 이름하고, 이것이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와 더불어 다석 영성신학의 요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 대한 다석의 해설을 직접 들어보자.

    맨 처음에 산에서 부터 시작하여 해를 거쳐서 은하계 저편 우주를 싸고 있는 빈탕 한데 저편에 거기가 마음인데 그 마음 한복판에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고 그 보좌에서 생명의 강처럼 흘러 내려오는 얼김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슬이 내리듯 내 마음에 내려 그 얼김으로 입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눈이 뚫리고 귀가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지혜가 뚫려서 사백조 살알 세포를 다 뚫고 그 기운이 배 밑에 모여 자연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은하계를 뚫고 태양계를 뚫고 내리어 우리 얼굴에 불똥이 튀게 하고 우리 마음에 종을 울리게 하여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목숨 키우고 우리의 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이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다석의 기도, 하늘 산보는 빈탕한데 우주(大宇宙)와 맞혀 노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우주(小宇宙)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내 안팎에서 성령(얼김)을 통해 소통되고 있고 나는 그것에 맞혀 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대주천(大周天)과 소주천(小周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구체적으로 이 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영성의 단계와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땅 위: 지구-우주 (우주인) -> 빈탕한데(虛空): 노자(도교) -> 마음(心): 부처(불교) -> 바탈(性): 공자(유교) -> 아버지 하나님: 성부 -> 한나신 아들: 예수(성자) -> 참거룩하신 얼: 성령 -> 얼(숨)김(성령): 김(氣) -> 큰김 - 코 뚤리니 -> 산김 - 사백조 살알 뚫고 -> 뱃심 잘몬의 바탕 힘(단전) -> 바다 - 땅 아래 -은하계 -> 한 알 알 꿰어        다(玄牝一窺) -> 긴김 - 코김 - 뱃심 - 낮에 불똥 - 마음 종 - 마음 싹임(소식) - 목숨 - 올리는 피 - 내리는 빛 - 밝은 속알(덕) - 속은 넓어지고 - 거플 얇아지니(피부호흡) - 바탕 울려 속알 굴려 - 깨쳐, 솟아나와, 오르리로다.

    여기에서 다석의 영성이 지닌 다섯 가지의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다석의 영성은 지구의 좁은 범위를 넘어 선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하는 우주적 영성(영적 우주인)이다.(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둘째, 다석의 영성은 동양의 모든 영성 전통들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전하여 더 높이 승화된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동양적 지평을 열고 있다. 빈탕한데(虛空)는 노자와 도가 사상의 단계를, 마음(心)은 부처와 불교의 차원을, 바탈(性)은 공자와 유교를 함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성은 그 단계의 하늘들을 훌쩍 넘어 더 높은 차원의 하늘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 다석의 영성은 삼위일체적 영성이다. 다석에 있어서 영적 에너지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한나신 아들’(성자), ‘참 거룩하신 얼’(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넷째, 다석의 영성은 성령중심적이며, 그 얼김은 숨과 김(氣)을 통하여 역사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氣)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 우리 몸에서 구체적으로 육화한다.
    다섯째, 다석의 영성은 몸의 영성이다. 정신하이킹은 정신적 유희삼매로 끝나지 않고, 그 성화의 과정은 우리 몸의 변화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체화된다. 그야말로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가 몸의 실질적인 변화와 징조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영적 ‘하늘놀이’가 아니라, 성령과 기를 통해 소통과 연합에 이르는 ‘하늘몸놀이’인 것이다.

    새 하늘을 열며.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삼 천 년대의 새로운 기독교 영성

    인간이 대기권을 뚫고 지구 밖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 이전에 다석 유영모는 이미 우주적 영성을 체득하고 스스로 “영적 우주인”이 되었다. 그가 자주 오른 북한산 등반은 단순한 하나의 등산이 아니라 우주를 단전 안에 품고, 굴리고, 더불어 숨 쉬었던 우주 산보, 영성 수련이었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단지 물질적 축복을 요구하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우주적 호연지기를 숨쉬며, 체화시키며, 그것(율려)에 맞춰서 춤을 추는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였던 것이다. 값싼 표피적 기독교 영성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 다석의 영성은 마치 진흙탕 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석과 같이 그 중요한 가치의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다석의 영성은 비단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만 아니고, 서양의 문턱을 벗어나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세계 기독교에 큰 영성적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다석 영성신학의 중요성은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배타적 인식론적 관념론을 넘어서서 다원종교가 실재하는 동양적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의 통전적 정체성(또는 보편적 구체성)을 구현했다는 점에 있다. 다석의 기독교적 사유 속에는 글로벌 시대의 현대신학이 갈망하는 패러다임(다원종교, 다원문화, 학제간)을 위한 거의 모든 단초들이 내포되어 있다.(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을 “도의 신학”이라고 부른다.)5) 또한 다석은 첨단과학과 디지털 문명에 의해 인간이 사이보그로 기계화되어가는 트랜스휴먼(trans-human),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몸과 숨의 영성’의 한 지평을 선보이고 있다.(매트릭스 속의 분신과 기계 인간에게는 몸과 숨이 없다.)6) 그러므로 다석이 기독교인인가에 하는 등의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폄훼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한 소중한 영성적 유산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일이다. 다석 사상의 기조는 성경에 있으며,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성 수련에 따른 통찰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다석의 새벽 기도는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나를 반성하고 알아가는 ‘나알’의 과정에서 시작하고, 성경말씀을 품고 알을 낳는 ‘알나’의 과정에서 종료된다.(이 ‘알나’의 과정을 통해 그의 주옥같은 한시들이 탄생했다)
    더욱이 언어와 문화적 주체성보다는 경제적 실용성이 우선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다석의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겼던 한글사랑이 주는 의미를 지금까지 서구화 과정에서 오는 반사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던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 번 깊이 음미해야 하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운 미래에 대한 징조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곧 다석 선생의 기도는 우리에게 호방한 호연지기를 숨 쉬게 한다. ‘한나신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몸’, ‘참맘’, ‘참바탈’을 체득하고 구현하기 위한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의 다석 수련법은 지금은 비록 밤하늘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듯하지만,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와 삼 천 년대에 높이 떠오를 세계 기독교 영성의 새 하늘을 준비하고 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 주간동아 수련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 주간동아

    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⑭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기독교와 결합한 노장 사상으로 김범부·박종홍의 ‘국민윤리’ 비판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
    2015-12-07 15: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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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 제정, 선포됐다. 종전의 홍익인간이라는 추상적 교육이념 대신 전통과 변화를 조화시킨 주체적 교육이념을 제시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이가 박종홍이다. 동아DB

    1956년 1월 ‘사상계’에 실리면서 함석헌의 이름을 일약 대중에게 알린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다음과 같이 첫 문장을 시작한다.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교회’에 강조 표시를 한 이 문장은, 함석헌이 무교회주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교회당 수가 늘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했다. 고려에 절이 성하고 조선에 서원이 성하면서 나라들이 망한 것에 비유해 당시 기독교회의 번창을 비꼰 말이었다. 기독교는 교회의 종교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종교라는, 무교회주의적 견지에서 교회를 비판한 글이었다.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렸지만, 동갑내기 동지 김교신에 비해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이 그다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함석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따로 있었다. 다석(多夕) 류영모였다.
    류영모와 함석헌이 처음 만난 것은 1921년 오산에서였다. 21년 9월 류영모가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당시 21세의 3학년생 함석헌을 가르치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60년 자신의 과오로 스승으로부터 내침을 당하기까지 40년 동안 류영모를 극진히 따르는 제자로 살았다.

    류영모-함석헌의 독특한 계보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다석 류영모(1890〜1981)는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했다. 1910년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 당시 학교 설립자 이승훈을 기독교에 입교하게 했고, 21년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돼 김교신, 함석헌 등에 영향을 끼쳤다. 동아DB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났을 때 류영모도 투옥됐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김교신과 류영모 사이에 사상적 유대가 그리 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평구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김교신은) 동양학의 권위이신 류영모 씨의 기독교에 대한 동양적인 해석 내지는 범신주의, 금욕주의 등에 대해서 심한 경계를 표시했다.”(노평구의 ‘내가 생각하는 김선생’)
    류영모의 사상에는 노자가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류영모는 종교 다원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류영모에 비해, 김교신 등 성서조선 그룹의 핵심 멤버들은 기독교 정통신앙에 훨씬 가까웠다. 무엇보다 류영모의 노자 사상에 대한 강조가 김교신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김교신이 훗날의 함석헌과 가지는 차이이기도 하다.
    류영모-함석헌 계보에는 특이하게도 도교적 수련 전승이 있는 듯하다. 류달영이 회고한 에피소드 하나를 보자. ‘성서조선’ 사건으로 함석헌과 류달영이 서울 서대문경찰서 유치장 옆방에 나란히 수감돼 있을 때였다.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통방이 왔다. 유치장 안에서 할 일이 없으니 정신통일 공부를 시작하자는 제의였다. 깊은 밤중에 정좌를 하고 두 손바닥을 맞대어, 합장한 손에 전기가 올라서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중략) 나는 매일 깊은 밤중에 정좌하고 정신통일을 수련하였다. 함석헌 선생은 감방 안에서 뜨거워진 손으로 환자의 아픈 곳을 만져서 치료한다는 정보도 받았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함석헌(1901~89)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했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면서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고, 5·16 군사정변 직후에는 군사정권에 도전하며 민중운동가로 활동했다. 동아DB

    이때 이미 함석헌은 도교적 양생 수행에서 경지에 들어가 있었던 듯하다. 함석헌의 수행법은 류영모에게서 온 것으로 보인다. 류영모는 매일 새벽 냉수마찰과 함께 수련을 하고 하루 한 끼 식사에, 평소 30~40리  길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는 등 기인(奇人)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수제자가 함석헌이었다.
    함석헌의 가장 유명한 용어인 ‘씨’이라는 말도 실은 류영모로부터 온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가져왔다는 것은 동양적 사유 없이는 이 용어에 대한 풀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들 ‘씨’을 민중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이 말은 사회학적 집단으로서의 민중과는 별 관련 없는 개념이었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 ‘씨’와 극대의 하늘을 의미하는 ‘ㅇ’,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를 의미하는 ‘·’, 활동양태로서의 ‘ㄹ’이 결합한 말인 씨은 하나님(우주)의 생명이 내려와 인간의 얼(靈)이 된 존재로 해석된다(함석헌의 ‘우리가 내세우는 것’). 씨 하나에 우주가 있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런 생각은 그 뿌리가 류영모에게 있었다. 류영모는 한글도 한자처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는 독특한 사유 습관이 있었다.

    김범부와 박종홍의 국가주의 철학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범부 김정설(1897〜1966)은 경북 경주 출신의 동양철학자로 소설가 김동리의 친형이며,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동아DB

    그런데 이 정신주의적 사상가들이 국가주의 철학자들과 한자리에서 만나는 상황이 일어났다. 1961년 11월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중앙위원회를 두면서 그 위원들을 사회 명망가로 채운 일이 있었다. 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명망 있는 인사들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류영모와 함석헌도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이 명단에는 김범부가 끼어 있었다.
    김범부는 누구인가. 범부(凡夫) 김정설은 함석헌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재야 사상가로, 소설가 김동리의 큰형이자 영남대학교의 뿌리 중 하나인 계림대(계림학숙) 초대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1963년 김범부는, 박정희가 회장으로 있던 ‘오월동지회’에 민간 측 부회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그의 비공식 정치자문역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김범부는 노자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함석헌과 류영모에게 중요한 노자의 평화주의는 김범부에게는 이상주의자의 망상에 불과했다. 김범부는 세계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역사의 현실, 역사의 원칙을 잘 모르는 ‘코즈모폴리턴’들의 망상”이라는 것이다.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과 관련해 침묵시위를 하고 있는 함석헌(오른쪽에서 두 번째). 당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를 빌미로 정부가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전복선동 혐의로 대량 구속한 사건이다. 동아DB

    김범부가 강조한 것은 ‘국민윤리’였다. 국민윤리를 구성하는 초점은 ‘효(孝)’와 가족의 가치에 있었다. 효에서 어떻게 국가 윤리가 나오는가. “효는 부모한테 하는 것이고, 이것을 나라에 옮길 때는 충(忠)이 되는 것입니다”(김범부의 ‘동방사상강좌’). 요컨대 효에서 출발해 효의 확장으로서 충이 나온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르면, 효는 집안의 윤리이고 충은 ‘보다 큰 집안(國家)’의 윤리이다. 따라서 국민윤리는 관념이 아니라 ‘생리(生理)’가 된다. 김범부의 이런 생각은 다음 글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돼 있다. 1961년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행한 ‘최고회의보’ 2호에 실려 있는 글이다.
    “나라에 대한 심정도 기실인즉 이해득실을 초월해서 당연히 그리 해야 하고 그리 않고는 할 수 없는 ‘무조건의 감분(感憤)’ 다시 말해서 효자가 부모에게 대한 측달(惻)한 심정 곧 지정(至情)이라 할밖에 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심정들은 이것을 국가관으로 규정하자면 역시 윤리적 혹은 ‘인륜적 국가관’으로 해야 할 것이다”(김범부의 ‘방인(邦人)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인륜적 국가관’이라는 한마디로 김범부의 국가관은 깨끗이 요약된다. 국가는 하나의 큰 집안이며 따라서 국민은 그 가족이라는 것이다.
    김범부가 재야사상가로서 국가철학을 내세웠다면, ‘공식적으로’ 국가주의 철학을 확립한 사람은 박종홍이다. 1903년 평양 출신의 박종홍은 제1세대 서양철학자로서 한국 철학계의 태두로 공인된다. 경성제국대 철학과를 나오고 독일철학을 전공한 박종홍은 후일 서울대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5·16 군사정권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사회분과 위원이었으며, 70년에는 대통령특별보좌관(교육문화 담당)을 맡았다. 68년 서울대를 퇴임한 후 그해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다.
    김범부가 유교의 충효 논리를 국가철학의 기반으로 삼았다면, 박종홍 역시 유교적 천명사상에 바탕을 두고 국가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박종홍이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는 논리는 북한의 주체철학과도 닮은 것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의 첫 문장은 이렇게 나왔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 개개인의 인생 사명이 ‘민족중흥’을 위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생각을 교육헌장으로 명문화했다.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1950년께 류영모(앞줄 가운데)와 함석헌(앞줄 오른쪽)이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이는 ‘다석 강의’ 속기록을 작성한 김흥호 목사다. 동아DB


    노장 사상과 국민윤리의 충돌

    국가주의에 맞선 류영모와 함석헌

    박종홍(1903~76)은 평양 출신으로 경성제국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동아DB

    김범부가 국민윤리를 주장하던 즈음, 류영모는 강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학생을 국가의 동량이라고 하는데, 그 따위 말은 집어치워야 합니다. 애당초 민족국가라는 말이 틀렸습니다. 국가의 ‘가(家)’는 집어치워야 합니다. 이 ‘집 가’의 가족제도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한 게 아니겠습니까? 전 세계 인류를 생각하면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민족이라는 것을 넣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육당국에서는 국가의 동량과 민족의 광명이란 슬로건을 내겁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한 나라만 망하는 게 아니라 전 인류가 망하게 됩니다.”(1956년 11월 22일 ‘다석 강의’)
    류영모는 ‘효’의 국가주의적 이념화를 극력 비판했다. 류영모에게 효와 충은 전혀 상관이 없는 개념이었다. 김범부에게 효란 충으로 확장되는 기본 바탕에 해당한다면, 류영모에게 부모에 대한 효는 그다음 단계에서 충으로 확장됨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즉 신에 대한 경애로 상승한다. 국가는 ‘효’와 무관한 것이었다.
    유교윤리에 기대 김범부와 박종홍이 국가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류영모의 국가주의 비판의 밑바탕에는 노장 사상이 있었다. 제자 함석헌이 스승의 생각을 이어 노자의 평화주의에 입각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했다. 안병무에 의하면, 함석헌은 ‘국민’이란 용어를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함석헌이 ‘나라 국(國)’ 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도둑놈’이란 뜻이라고 했다(안병무의 ‘씨과 평화사상’).
    함석헌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의 정신적 파산! 사상의 빈곤! 한다는 소리가 벌써 케케묵은 민족 지상, 국가 지상, 화랑도나 팔아먹으려는 지도자들, 이 민족의 정신적 빈곤을 무엇으로 형용할까?”(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
    류영모와 함석헌의 노자 이해는, 기독교 사상과 결합한 형태로 한국 현대지성사에서 독특한 정신주의의 맥을 이룬다. 이들의 사상은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진영을 형성했다. 평화와 세계를 강조하고 국가주의 철학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민족’은 부차적 가치였다. 모두가 ‘조국 근대화’를 외치던 시기 ‘물질’보다 ‘정신’을, 국가이념보다 보편윤리를 강조한 이들은 확실히 이상주의자였다. 이런 이상주의는 대개 한 사회가 나락으로 떠내려가지 않게 잡아주는 거멀못으로 자기 소임을 다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한국 역사에서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 




    주간동아 1016호 (p68~71)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김경재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수련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김경재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김경재
    작성자 바보새 15-09-30 04:24 조회600회 댓글0건
    목록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김경재(한신대,신학)
    1. 들어가는 말
     

    함석헌 연구에 있어서 그의 다양한 면모를 연구주제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양고전 해석학자로서, 역사철학자로서, 탁월한 문필가로서, 비폭력 시민 평화운동가로서, 자생적 생명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 등등이다. 그러나, 그가 바로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제대로 영글은 심원한 '기독교적 종교사상가'이며 '기독교적 시인'중 대표적 한사람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말하기 꺼려하지만, 그 점을 간과하여버리면 함석헌의 사상연구에 있어서 척추손상을 입히는 꼴이 되어서 바로 서서 활보하는 함석헌이 보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함석헌이 함석헌 되는 가장 중요한 비밀은 퇴비로써 옥토가 된 동아시아 정신적 토양 속에 헤브라이즘(Hebraism)의 핵심요소를 씨앗으로 받아 꽃피어난 한국사상사에서의 신품종 '씨알'이라는 알곡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동안 함석헌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져 오지 못한 '기독교 시인'으로서 함석헌의 면모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함석헌 연구사에서 '종교인으로서의 함석헌'을 밝히려는 노력을 주저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그가 좁은 의미에서와 경직된 도그마적 의미에서의 '종교'라는 울타리안에 그의 풍성하고도 생동적인 현실적 사상가를 가두어 버리는 위험을 경계하려는 무의식적 동기이다.
    둘째 이유는, 종교중에서도 전통적 기독교라는 '종파적 종교', '역사적 실체로서의 종교'라는 한계 안에 가두어 버릴 때 발생할 손실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계의 눈초리는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축적된 전통' 이라는 의미에서의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마음의 초월체험'을 하면서 살다간 올곧은 신앙인 이다. 스스로 이단자가 되기를 선언하면서 교권제도 속에서 화석처럼 교리화된 기독교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운사람 이지만 그는 갈릴리의 예수와 예수의 낙인(스티그마)을 몸에 지닌 바울을 지극히 사랑하고 흠모한 분이다. 그러한 이유로서, 이 글은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글의 숨겨진 동기는 두가지인데, 그 한가지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주체적 체험과 사상이 응축된 형태로서 미학적 언어형태를 갖춰 나타난 것이 '시'라는 작품이라고 보기 때문에 함석헌의 내면세계를 드려다보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가지는 한국 국문학계를 비롯한 문학전문가들이 문필가로서의 함석헌, 아름답게 우리말과 글을 다듬고 사용한 시인으로서의 함석헌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주기를 요청하려는 것이다.
    문학과 시를 전혀 알지 못하는 필자는 시문학 이론 관점에서 함석헌 종교시의 문학적 형태와 그의 시론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몇가지 함석헌의 종교시 작품 속에 나타난 그의 신앙체험을 독자로서 뒤따라 체험(追體驗)해 보려는 제한적 목적을 지닐 뿐이다. 
     

    2. 시작품 문헌자료에 내포된 연구의 문제점
     

    함석헌의 시작활동 기간의 제한성과 작품이 실려있는 시집 또는 문헌자료 속에 작품 발표일의 정확한 연대확정 문제가 시 연구를 통한 함석헌 인물탐구에 난제를 안겨준다. 
    함석헌의 시작활동은 대체로 1945년 해방직후부터 시작해서 4.19가 발생한 1960년도에 정지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가 시형태로서 작품을 활자로 인쇄하여 시집으로 발표하기를 허락한 것은 그의 영혼의 울부짖음이 절정에 다다른 약15년간 기간이다(1945-1960). 그 자신의 표현대로하자면 '시 아닌 시'를 세상에 내놓는 변을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임 앞에다 바칠 뿐이다'1) 라고 말한다.
    문헌자료로서 함석헌의 시작품이 세상에 간행되는 계기로는 이래와 같은 몇단계가 있었다.
    제1단계(1945-1947) 『쉰날』: 
    해방정국에서 '신의주학생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50일간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쓰여진 300여편의 시집인데, 함석헌이 1947년 남하 와중에서 거의 유실되어 버렸다. 2)
     
     
     
    제2단계(1947-1952) 프린물 시집 회람기:
    남하한후 작품과 남하전 작품 일부가 살아나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자, 독자들이 자 발적으로 작품중 부분부분을 모아 한국동란후 어려운 상황중에서도 각지방에서 프린트물로 간행하여 읽혀지게된 단계이다. 개성에서 『영원의 젊은이』, 공주에서 『장작불』, 대전에서 『기러기』등으로 간행되어 회람되던 단계이다.
     

    제3단계(1953-1960) 최초인쇄물 시집 첫째판 간행기:
    한국동란의 상처가 온 누리에 고통을 가중시킬때, 항도 부산에서 최초로 인쇄활자로 격조높게 출판된 시집으로 간행되어 읽히던 시기이다. 1953년 3월18일자로 삼협문화사 에서 『수평선 넘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3) 이 시집을 함석헌 시작품 '첫번째판'이라고 부른다.
     

    제4단계(1961-1982) 서울에서 둘째판 간행시기:
    서울환도 이후, 4.19학생의거와 5.16군사구테타로 나라가 어수선하던 때, 서울에서 최초 의 인쇄물 시집 『수평선 너머』속에서 몇편을 빼고 새로 중요한 몇편의 시를 추가하여 도서출판 생각사에 의해 두 번째 판을 발간한 시기이다(1961-1982). 그러나 여 러 가지 사정으로 1980년에 들어서서 재판발행 되었는데, 이 시집속에 대체로 함석헌 시작활동의 후기작품중 중요한 '하나님', '대선언'등이 실리게 되었다.
     

    제5단계(1983- 현재) 『함석헌 전집』의 제6권으로 셋째판 간행 시기:
    도서출판 한길사가 함석헌 전집 출간을 기획하고, 전집의 제6권으로 『수평선 너머』세번째 판을 출판한 시기이다(1983-현재). 이 세번째 판의 특징은 그 동안 앞서 언급한 모든 작품들을 다 수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4부 '세상 떠나는 이 를 보내면서'라는 큰 제목아래 '말씀살이'등 8편의 작품을 실어 놓은 점이다.
     

    함석헌의 시의 세계 연구 특히 종교시 연구에서 겪는 어려운 점 하나는, 그의 시 속에서 발전해가는 사상변화의 단계나, 그 각각의 시가 태어나오던 시대적 배경 및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추적하는데 필요한 시작품 창작년대 또는 발표연대가 명기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에밀레'라는 시의 첫 운에서  에밀레 운다. 이해가 간다(1959) 라고 연대표기를 해놓은 것 이외 발견하기 어렵다. 약15년동안의 시작활동 중, 격변하는 시대사 속에서 그의 생각과 영혼의 깊은 체험도 몇단계 결정적 변화가 없을 수 없겠지만, 작품년대의 미확정으로 우리는 그의 시들이 1945-1960년동안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되었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며, 각 작품의 보다 정밀한 연대구분은 작품 분석을 통해 밝혀내고 추론하는 길 밖에 없다.
     

    3. 함석헌의 시론에 관한 예비적 고찰
     

    함석헌의 종교시 감상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먼저 함석헌 자신이 시에 대하여 특히 그자신의 시작품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고찰해보는 것은 독자들이 그의 종교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함석헌은 다행히도 그의 시집 초판(1953년판) 『수평선 넘어』맨 끝에 그의 시론 이랄 수 있는 별기(別記)를 붙여 수록했는데 그 별기의 제목은 '詩․信'이라고 붙여놓았다.4)
    그 뒤 둘째판(1961) 『수평선 넘어』 맨 끝에 동일한 원고를 실었는데 초판과 다른점은 '詩․信'이라는 논제를 붙여 그의 시론을 논하기전 바로 책 한페이지를 여백으로 놔두고 '발'(跋)이라고 표기하여 '詩․信' 이라는 글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5) '발'은 '발문'(跋文)의 준말로서 책의 본문 끝에 그 내용의 대강이나 또는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말한다. 요즘용어로서 권말기(卷末記)나 후기(後記)의 뜻이다.
    '발'(跋)의 글제목 다시말해서 그의 시집 후기(後記)의 제목을 '詩․信'이라고 표기한 것 자체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다시말해서 함석헌은 적어도 자기의 시의 세계에서 시란 마음의 지성소에서 쏟아져 나온 신앙적 체험사건의 결정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발문'(跋文)의 맨끝을 다음과 같은 매우 종교적인 명언으로 끝맺는다: '시는 지성소에는 없다. 거기 들어가지 전의 말이요, 들어갔다 나와서의 말이다. 지성소 안에는 말이 없다. 생명을 불사르는 범향(梵香)이 있을 뿐이다'.6) 
     

    첫째, 함석헌의 시론에서 그는'시적 언어'의 이해불가능성의 문제 즉 시적 언어의 해석학적 문제를 들고 나온다. 시인의 마음 한복판에서 체험한 고유한 정신세계의 체험표현인 시작품을 독자가 작가 자신이 체험한 그대로 이해 가능한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함석헌의 결론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듣는자는 역시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 뿐이다. 내 시야 말로 내 것인데, 내 속에서 나간 내 혼정(魂精)인데, 내 아들인데, 나 만이 낳고 나 만이 아는 것인데,
    내 생명의 지성소에서 나와 내 임 만이 만나서 지난 일인데,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일인데, 그것을 누가안단 말이냐?'7)
     

    위의 인용문에서 만큼 인간 정신세계의 지고한 체험이 지닌 고유성, 독자성, 반복불가능성, 원체험 그대로의 재생불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글이 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남의 시를 이해하거나 감상하면, 시를 창작한 시인이 지녔던 본래 그대로의 정신체험이나 느낌을 자동차부품 조립결과로서 원설계도의 자동차가 만들어지듯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함석헌이 말한바처럼 시의 이해란 남의 시를 통해 자기의 시를 짓는 것이다. 시를 이해한다는 정신현상의 본질적 특성에 관한 위와 같은 함석헌의 견해는 현대 '정신과학의 꽃'이라고 부르는 해석학 (Hermeneutics)의 핵심적 본질을 함석헌은 해석학 담론에 접촉함 없이도 당신 스스로 이미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현대 해석학 담론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딜타이와 가다머는 중요한 큰 획을 긋는다. 딜타이에 의하면, 인간적 삶의 특징인 역사성 때문에, 무릇 정신적 작품(택스트)의 이해란 원작품을 그대로 재생 (再生) 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작가의 체험이 표현된 작품이해 과정을 통해 추체험 (追體驗)하는 것이다.8) 가다머의 표현을 따라 말한다면, 이해란 창작자의 정신지평과 감상자(해석자)의 정신지평의 진지한 만남 곧  地坪의 融合 사건인 것이다.9)
    둘째, 함석헌의 시론에서는 시적 언어만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로서 두기능 곧 언어란
    '알리면서 가리는 것', '드러내면서 숨기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시를 짓는자 맘과 뜻 그대로는 이해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이해되는 것이라고 시의 역설을 말한다. 그것 곧 진리의 계시와 은폐가 동시적이라는 점은  생명의 신비 이며 영원의 하나님이 일하는 쏨씨라고 말한다.10) 기독교 신학의 계시론에서 하나님 자기계시의 역설적 측면에 관해 이르기를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 (Deus Revelatus)이면서 감추이신 하나님 (Deus Absconditus) 이라고 언표한다. 한번은 계시하고 또 다른 한번은 은폐한다거나, 이곳에서는 계시하고 저곳에서는 숨는다는 말이 아니다. 계시가 곧 은폐라는 역설을 말하려는 것이다.
    함석헌의 표현을 따르자면 '시는 公然한 비밀'이며, 하나님이나 생명 또한 '공개된 비밀'이라는 말이다. 모든 시적 언어는 지성소에서 경험한 일을 더듬거리며 말하는 사가랴의 반벙어리 몸짓말(누가복음 1: 5-25)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시를 이해한다는 사건은 단순한 '감정이입'사건을 통한 정서적 합일만도 아니요, 지적인 동의도 아니다. 타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생명과 진리와 진실에 대하여 이해한만큼 보이는 세계요 이해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함석헌의 시를 함석헌 자신의 체험그대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래서도 아니되는 일인 것이다.
    셋째, 시란 짓는 것이 아니요 '낳는 것' 이라고 표현함으로서, 함석헌은 시창작의 신비한 종교적 차원을 강조한다.11) 난해하기도하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로고스를 낳았다'고 표현한다. 창조란 짓는 것(만드는 것)이요, 낳는 것이란 자기와 닮은 또 다른 자기를 출산하는 것이다.'짓는 행위'와 '낳는 행위'는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시란  내 속에서 나간 혼정(魂精) ,  신랑과 신부, 부부의 비밀 ,  감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애기를 배는 처녀 등의 비유로서 진정한 시창작 행위란 마치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가 소리없는 말을 듣고, 지성소 밖으로 나와 그가 받은 신탁이나 지존자의 뜻을 어눌한 입술로 말하는 것과 같은 사건이라고 한다. 델피의 신전에서 신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여 전해준다는  헤르메스 라는 신화적 존재이야기가 그점을 상징한다.
    시적 표현이 본래 그러하지만, 함석헌의 종교시는 특히 비유, 역설, 은유가 많고 신비주의의 특징마져 드러낸다. 왜냐하면 신비체험의 특징은 단순히  '그 진리를 알았다. 깨달았다' 는 표현보다는 '그 진리와 합일했다. 그 진리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는 표현에서 절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12) 그러므로, 다분히 일반독자가 능히 오해할만큼 함석헌의 서정적 종교시에는 신비주의적 에로티시즘마져 상기 될 정도로 은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함석헌의 종교시를 시의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근현대시의 통상적 삼분법 서정시, 서사시, 극시 중에 서정시에 가깝지만, 시란 정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심원한 사유작용으로서 깨달음이나 사상을 포함하기 때문에 함석헌의 종교시를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서정시 범주에 넣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자유시 라는 범주에 넣어 분류함이 가능할런지 모르겠다. 시 형태론 관점에서 말한다면 자유시의 경우 시적 형태는 작가가 표현하려는 시상 또는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형식과 내용의 역동적 상관관계 속에서 새롭게 시형태를 조형해가는 형국을 갖게된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종교시는 어떤 경우는 형태적 완결성이나 시적 운율성이 최고형태로 조화된 경우도 있지만, 산문시 형태로 나타날 적엔 시로서의 형태적 완결성이나 예술성은 무시되어버리는 작품도 비일비재하다.13) 함석헌의 대표적 종교시 '하나님'은 전자의 경우요, '흰손'이나 '대선언'은 후자의 경우라 할 것이다.
    시가 '인간정신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의 한 양식'14) 이며 시인의 심원한 체험과 세계관이 응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시 몇편을 감상함으로써 그의 마음의 세계의 진수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4. 함석헌의 종교시 특징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넘어』에 실린 모든 시들이, 저자 자신의 '발문'(跋文)에서 암시한대로 초월의 지평, 궁극적 성격, 무조건적 성격, 영원한 것등과 같은 종교적 요소를 상징적으로나 은유적으로 갖지만, 시의 주제나 소재들 자체가 명시적으로 종교시임을 숨기지 않는 시들만 헤아려도 십여편이 넘는다.15) 그 중에서 이 글에서는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미완성', '하나님' 이라는 세 작품을 순서에 따라 음미하기로 한다. 많은 시중에서 위의 세편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말한다면, 첫번째 시는 저자의 초기 종교사상을 잘 나타내면서 마음의 순수성, 종교적 체험의 조건으로서 마음의 지성소적 성격을 누차 강조하는 특징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두번째 시는 그의 『뜻으로 한국역사』의 사관(史觀) 밑바탕에 깔려있는 생성론적 실재관 및 과정적 신관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16) 세 번째 시는 저자의 후기 종교사상 곧 성서적 헤브라이즘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유불선 삼교가 그의 마음 안에서 완전히 융해되어 동아시아적 그리스도인의 신체험의 정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감상할 첫 번째 시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는 9연으로 구성된 짧지않는 시이며, 시 제목은 시의 첫째연 첫구절 '그대는골방을 가졌는가?' 첫 문장을 그대로 시 제목으로 삼았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 이 세상의 냄새가 들 어오지 않는 /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
     

    그대는 님 맞으려 어디 갔던가? / 네거리 에던가? / 님은 티끌을 싫어해 /
    네거리로는 아니 오시네.
     

    그대는 님 어디다 모시려는가? / 화려한 응접실엔가? / 님은 손 노릇을 좋아
    않아 / 응접실에는 아니 오시네.
     

    님은 부끄럼이 많으신 님 / 남이 보는 줄 아시면 /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여 /
    말씀을 아니 하신다네.
     

    님은 시앗이 강하신 님 / 다른 친구 또 있는 줄 아시면 / 애를 태우고 또 눈물
    흘려 / 노여워 도망을 하신다네.
     

    님은 은밀한 곳에만 오시는 지극한 님 / 사람 안보는 그윽한 곳에서 / 귀에다 입 을 대고 있는 말을 다 하시며 /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하신다네.
     

    그대는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어디다 차리려나? / 깊은 산엔가 거친 들엔가? /
    껌껌한 지붕 밑엔가? / 또 그렇지 않으면 지하실엔가?.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 깊은 산도 아니요 거친 들도 아니요 / 지붕밑도 지하실 도 아니요 / 오직 그대의 맘 은밀한 속에 있네.
     

    그대 맘의 네 문 은밀히 닫고 /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면 / 극진하신 님의 꿈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위 시는 함석헌의 종교세계, 특히 지존자 체험의 조건적 장소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종교체험은 외면적, 외양적, 객관적, 대중적, 교리적, 종교의례적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체적, 내면적, 개인적, 실존적 , 직접적 체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현존처는 보편적 역사과정이나, 우주자연이나, 민중의 집단의지나, 성스러운 종교의례 가운데가 아니라, 철저하게 '맘의 지성소' 한 곳 뿐임을 갈파한다. 왜냐하면 '맘' 만이 수십억년 준비한 하나님 보좌의 '결정체'로서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온갖 형상의 어머니'17)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소위 동양종교 일반의 특징인 '맘 공부, 맘 수련'의 차원인가?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 함석헌 종교이해의 기독교적 특징이 드러난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라는 시의 바로 앞에 실린 다른 시 '님이 오신다'의 마지막 두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마음의 체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쓸자 딱자 하던 마음 / 그것조차 맘 뿐이고 / 님이 손수 쓸으시고 /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맑히자면서 못 맑힌 맘/ 나중엔 맑아졌으니 / 내라곤 없소이다, 님 곁에만 사오리. 
     

    그의 장편 산문시 '흰 손'에서 수련, 실천, 행동, 노력, 정진, 희생 없는 개신교의 변질되어 버린 죄의 대속신앙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칭의 신앙을 무섭게 질타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종교이해가 자기수련과 노력에 힘입어 자기완성과 자기구원에 도달한다는 소박한 수양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인지함이 중요하다. 오늘날, 종교들이 업적주의, 물량주의, 과시주의, 교조적 경전중심주의에로 치달아 종교체험의 물화(物化)와 속화(俗化)가 가속화 되어가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하게 역사현실참여를 감행했던 함석헌 자신의 종교이해는 지극히 내면적․인격적 맘의 지성소에서의 체험이라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감상할 두번째 시 '미완성'은 함석헌의 역동적 실재관과 그의 내면에서 절대 고요함과 쌍을 이루는 궁극적 실재의 창조적 의지에 대한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철학사적으로 고찰 할 때, 실재를 결정된 형태와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열려진 실재관을 가지고 모든 것을 창조적 형성과정, 자기조직화의 운동과정 으로 볼 것인가의 두 견해가 맞서왔다. 이 시 속에서 우리는 함석헌의 역동적 실재관이 산문시 형태로 노래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미완성' 시는 6연으로 구성된 자유시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높은 봉우리에 애타는 동경의 얼굴 빛 있고 / 날뛰는 바다에 풀지못한 분노의 울부짖 음 있고 / 오고 가는 바람에 잊지 못하는 탄식의 속삭임 있고 / 흐르는 구름에 끝없 는 추궁의 헐떡임 있고 / 벌럭거리는 심장엔 영원히 이루지 못한 이상의 불탐 있고.
     

    모든 무덤 무엇이라 말하던가? / 모든 기념탑 무엇이라 일러주던가? / 모든 천인의 엄 숙한 사색은 무엇이라 가르치던가? /모든 시인의 이상 환상은 그 무엇을 노래하던가?
    자연과 맘의 섞어 짜는 역사의 음악은 그래 무엇이라 아뢰던가?
     

    영원의 이상 / 영원의 찾음 /
    영원의 씨름 / 영원의 벌어짐 /
    아아, 우주야 인생아 생명아 너는 영원의 미완성 이더냐?
     

    완성은 반갑다고 누가 그러나? / 끝 맺음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나? / 얻어 들음은
    즐겁다고 누가 그러나? /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靈感의 巨匠 / 역사는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절대의 意志.
     

    영원의 미완성 /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그가슴엔 /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마다
    제대로 무한 즐거움 / 끝없이 닫는 영의 헐떡이는 염통엔 / 찰나 찰나의 고동의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의 이김.
     

    영원의 미완성품 만세! / 영원히 높아가고 확대해 가는 정신 만세! / 영원히 영광을 더해가며 벌어져 나가는 생명의 불바다 만세! / 아키레스 거북을 쫒아잡지 못하듯이/ 
    그칠줄 모르고 닫는 인생아 네 걸음걸이에 무한한 기쁨 있을 지어다.
     

    우리가 앞에서 감상한 첫 번째 시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에서 함석헌의 영성 한쪽 끝 극소세계의 고요하고도 거룩한 점을 본다면, 둘째번 시 '미완성'에선 그의 극대 무한세계 무극태극의 역동적 숨결을 듣는다. 아니 무극태극의 음양리듬, 동과정의 반복운동, 영원회귀순환운동마져 초탈 돌파하고, 그리스철학에 사로잡혀버린 기독교 완성된 종말론마져 넘어서서, 스스로 이단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니이체의 추종자가 되는듯한 착각마져 든다. 
    이러한 '열려진 존재론'은 기존의 모든 절대이데올로기를 상대화시키는 비판적 안목을 준다. 이것이 그가 1950년대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넷째판 서문에서 밝힌 '내 믿음이 달라진 것이다'18) 라는 말뜻 중 중요한 한가지 내용이다. 함석헌은 내촌감삼의 '무교회 신앙’도 넘어서고, 정통기독교 교리신학종교와 종말론도 넘어선다. 그의 태도를 새로운 관점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요소가 세계주의와 과학주의였는데,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다른 말로하면 진리, 생명, 존재,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열린자세를 견지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같이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 이다. 하나님도 죽은 하나 님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 ��19)
     

    위와 같은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는 현대 종교철학 중에서도 화잇트헤드의  과정사상 (Process Thought)과 가장 닮았다고 보여진다.20) 과정사상에서는  새로움 (novelty), '창조성 (creativity), '창조적 전진 (creative advance), 현실적 존재의  능산성 (productivity)등이 강조된다. 새로움과 창조적 전진을 감행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자들은 고난이나 악을 이기고 넘어서야 한다. 물론 함석헌과 화잇트헤드의 차이도 지적되어야 한다. 함석헌은 여전히  통일적 하나 를 주목하는 일원주의자 이지만, 화잇트헤드는 차이와 다양성에 주목하는 다원주의자 이다.
    "미완성�� 시구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구절은 제4연 끝부분의 두 구절이다: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줄 모르는 靈感의 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절대의 意志��
     

    위와 같은 표현속에서 자연과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기 쉬운 단순한 전통적인 동양의 자연철학과 단순한 기독교의 목적론적 역사신학을 함석헌은 넘어서면서 통전시킨다.
     

    세 번째 감상할 시는 제목이 너무나 거창하고 직접적이기도 한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 시는 앞에서 음미한 두편의 시보다 짧지만 구성면에서 보면 응축된 시적 형태성이나 미학적 운율성이나 시적 상징성에서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그의 대표적 종교시이다.
    몰랐네 / 뭐 모른지도 모른 /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몰라서 겪었네 / 어림없이 겪어보니 /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벅차서 떨었네 / 떨다 생각하니 / 야릇한 지혜의 뚫음 이었네.
     

    하두 야릇해 가만이 만졌네 / 만지다 꼭 쥐어보니 /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었네.
     

    따뜻이 그 사랑에 안겼네 /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 영광 그윽한 빛의 타오름 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 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일반적으로 시의 창작기법에서 시제목 붙이기는 제목이 시의응집과 확장에 기여하기 때문에 거창하거나 추상적인 제목은 피하는게 관례일 터이다. 그런데 위의 '하나님'이라는 시는 가장풍부하고 다양한 은유,비유,상징, 수사어를 동원한 짙은 서정적 종교시인데도 불구하고, 제목은 독자들에게 너무 압도적인 무거움을 안겨준다.
    문학평론가의 견해처럼  서정시는 개인의 체험을 토대로 한 내적 고백의 장르로 인식된다 .21) 위의 '하나님' 이라는 제목의 작품역시 서정적 종교시이므로, 직접적 설명이나 멧시지전달이 아니라 작자의 체험을 전달하는 여러 가지 정서적 은유와 상징적 어휘구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그 내적 체험의 경지를 공명하도록 유도하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 시는 함석헌의 동서양 종교체험의 진수가 녹아든 시처럼 보이며, 그의 직접적 신비체험에 가까운 종교적 황홀체험의 결과물인 듯 싶다. 그만큼 위 시는 쉬운 듯 하면서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시이다. 왜냐하면 그가 구사하는 종교체험을 나타내는 형상화된 시적 표현어구들이 평이한 것이면서도 동서양 종교철학이나 신앙체험의 진수가 미학적 상징표현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대드는 계심', '벅찬 힘의 누름', '야릇한 지혜의 뚫음', '따뜻한 사랑의 뛰놂', '그득한 빛의 타오름', '텅빈 빈탕', '얼빠지는 계심' 등등이 유교, 불교, 기독교, 노장철학, 신비주의 최고 수준의 정신체험의 경지가 글자그대로 어우러져 단순히 병열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통전된 종교체험으로 승화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독자의 독서, 사색, 정신적 순례, 영적 성숙도에 따라서 그만큼 영글음의 정도대로 이해되는 운명을 지닌다.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서서, 헤브라이즘 전통을 물려받은 아가페적 기독교 영성과 동아시아 고등종교들로서 훈련받은 지혜와 무위의 초탈적 영성이 창조적으로 만나면 어떤 음색과 형태를 드러내는 영성체험이 될 것인가 궁금해 한다. 그 기대반 우려반 섞인 호기심어린 물음에 대하여 함석헌의 '하나님'이라는 시작품은 시로서 가장 적절한 한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004.11.13)
    [씨알사상 연구회, 정례발표모임, 2004년 11월13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
     
     
     
    1) 함석헌 수평선 넘어, 제1판 서문에서 인용. 『함석헌 전집』, 제6권, 4쪽. (한길사, 1988)
    2) 『전집』, 제6권, 4쪽.
    3) 최초 활자인쇄물로 간행된 『수평선 넘어』가 1953년 한국동란 휴전협정(1953년 7월27일 서명)의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전쟁후유증의 와중에서 함석헌의 시집이 피난집결지 항도부산에서 최초 인쇄유인물로 출판(1953.3월18일)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발행소는 삼협문화사, 인쇄소는 삼협인쇄소, 책값는 정가 250환 이었다. 이 최초의 시집에 담겨있던 대부분의 시들은 후일 간행된 다른 출판사의 시집속에 대부분 재수록 되었지만, 몇 개의 시들은 저자에 의해 (도서출판 생각사 간행,1961) 빠지게되었다: 빠진 시들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절망의 장미‘, 일이 없더라’, 가을비, 가을하늘, 할미꽃‘, 결혼에 비는 마음 등이다.‘
    4) 『수평선 넘어』,초판(1953), 485쪽-491쪽.
    5) 『수평선 넘어』, 둘째판(1961), 245쪽.
    6) 위와 같은 책, 250쪽.
    7) 발(跋) 중에서, 『수평선 넘어』, 둘째판(1961), 246쪽.
    8) 리챠드 팔머(이한우 역), 『해석학이란 무엇인가?』,171쪽(문예출판사, 1989)
    9) 위와 같은 책, 302쪽.
    10) 함석헌 시집, 둘째판, 발문, 247쪽.
    11) 위와 같은 책, 248쪽.
    12) 수렌드라나트 다스굽타(오지섭 역), 『인도의 신비사상』, 서문. (영성생활사, 1997)
    13) 시의 산문적 확산과 시적응축에 관해서. 최두석, 『시와 리얼리즘』,134-137쪽.(창작과 비평사, 1996)
    14) 위와 같은 책, 32쪽.
    15) 대표적 종교시로서 맘, 썩어지는 큰 나무,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님이 오신다, 수평선 넘어, 님이 가신길, 님이 그리워, 미완성, 내집은 좁아요, 님찾아 가는길' 하나님, 님이여 나는 작은 등불이외다, 내 맘에 오시는 님, 대선언‘, 흰손등의 눈에 띈다.
    16)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전집 제1권, 57쪽.(한길사, 1983)
    17) 맘의 한구절 인용.
    18) 『뜻으로 본 한국역사』, 넷째판 서문중에서., 17쪽.(한길사,1983)
    19) 위와 같은 책. 57쪽.
    20) A.N. 화잇트헤드(오영환역), 『과정과 실재』(민음사,1991), 『열린사고와 철학』(고려원,1992), 『관념의 모험』,(한길사, 1996). 참조.
    21) 김완하, 「화자와 청자」, 『시창작이란 무엇인가?』, 61쪽.( 화남, 2003).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김경재
     
    2006.1,2   씨알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