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4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개념 마히야 후위야 : 네이버 블로그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개념 마히야 후위야 : 네이버 블로그

신학과 철학 과학 사이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개념 마히야 후위야

프로필

2017. 1. 16. 23:11

 이웃추가
의식과 본질이라는 책을 보다가 존재론에 대한 이슬람 철학의 개념이 있어서 검색을 하던 중에 이것을 일목요연히 정리한 아주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

혈자리 멤버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발제문을 2페이지 이내로 줄이라"고.
그 열화와 같은 성원에 부응하기 위해 줄이고 또 줄이고
그래도 3페이지가 나오는 발제문을 싹둑싹둑 가위질했었지요. ㅎ~
 
----

의식과 본질 3장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첫번째는 본질과 존재의 관계.
 
 본질이란 존재와 대립하여 상관하는 개념이다.
본질은 항상 존재에 대해 본질이고,
또한 역으로 존재는 항상 본질의 존재다. 
 
 X가 지금 여기에 현전하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 스콜라 철학에서는 X에 대한 지각이 성립하기 이전에 그것의 전단계로서 더욱 원초적인아직 분석적 이성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X의 의식을 생각해요그렇다면 X는 아직 꽃이 아닌 거죠.  다만 막연하게아니 혼연스럽게’, 무분별적으로 무엇인가가 우리의 의식을 향해 자기를 드러내고 있을 뿐. 지난 번엔 이 상태가 구토를 불러 일으킨다고 했었지요. ㅎ~~이 상태에서의 X는 아직 어디에도 갈라진 틈이 없는 하나의 존재론적 덩어리예요. 갈라진 틈도 접붙인 틈도 없는 덩어리에 인식의 제2단계에서 이성이 갈라진 틈을 만들어 본질과 존재로 나누면 그것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X가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인식된다고 보는 게 스콜라 철학의 입장이예요. 이제야 존재하는 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죠. 본질과 존재의 이 분할을 이성의 가장 본원적인 작용이라 하더군요. 
 
 지금까지 하나의 전체인 무엇인가로서 어디에도 갈라진 틈을 보이지 않고 막연하게 규정도 분절도 없는 양태로서 현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던 X이성의 존재론적 분석의 빛에 쬐어 존재와 본질의 조합이 된다는 거죠. X가 존재하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로서예컨대 꽃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존재란 현실성 혹은 현전성의 원리여서 그것이 X를 현실화시켜 현전하게 하는 측면을 말해요
X는 존재함으로 인해 가장 절실하게 현실이고 실재인 거죠
그러나 존재는 X를 실재하게는 하지만 결코 X로 하여금 꽃답게 하지는 못합니다.

 X를 꽃답게 만드는 것은 X의 존재성이 아닌거죠. 거기에는 뭔가 다른 원리가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을 본질이라고 불러요. 꽃은 그 본질즉 꽃의 성질 때문에 꽃인 겁니다. 
그러나 또한 반대로 X의 본질은 X를 ……로서 규정은 하고 있지만 X의 존재를 보증하지는 않아요꽃의 성질은 다만 꽃의 성질일 뿐이고 현실에서 한 송이의 꽃도 피어나게 하지 못해요. 본질과 존재가 조합해야  비로소 X는 존재하는 꽃 이 되는 것이죠. 
 
 꽃이라는 말은 X의 존재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만 꽃이다라는 X의 본질을 정하고 고정시킨다그것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하는 존재의 혼동 가운데에서 꽃이라는 하나의 응고점이 나온다. 의식의 대상에는 반드시 본질이 있어요그 대상이 구체적인 사물이건 추상적인 내용이든 (그 본질이 꽃이나 사람 같은 구체적인 규정성일 필요는 없어요순자의 대공명 같은 일반적인 규정성이라도 상관없다는 거.) 어쨌든 무엇인가의 형태로 안에서 본질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의 초점을 X에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존재와 본질은 서로 모순적인 상태로 뒤엉켜 있어요. 
 
 X의 의식을 성립시키는 본질은 일반자이다. 결국 꽃의 성질이란 어떤 꽃에게도 공통되는 일반적인 성질이다. 이렇게 본질이 일반성을 갖는데 반해 실재하는 존재는 개별적이다.   
이 꽃을 진짜 이 꽃으로 체험하는 경우, 이 꽃에는 그냥 꽃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있다는 존재감각이 활동하고 있다. 이 꽃을 일반적인 꽃이 아니라 이 꽃답게 만드는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가 있고 그것은 일반자, 즉 보편적 본질과는 다른 또 다른 하나의 본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이 근원적 존재감각으로부터 나온다.
  
 이슬람의 스콜라 철학은 이런 시점을 가지고 본질을 둘로 나누었어요. 일반자, 즉 보편적 본질 마히야와 개체적 본질 후위야로. 요컨대 실재하는 꽃을 앞에 두고 '이 꽃'의 '이'에 절대적인 역점을 둘 것인가(후위야), '꽃'에 역점을 둘 것인가(마히야)에 의해 본질론은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심지어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독특한 개별 사물의 독자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리얼리티를 개별 사물의 존재론적 구조 자체의 내부에서 찾아 본질로 삼는 것이 후위야입니다. 이런 입장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려고 한다면 '보편적 본질'은 이성의 추상작용에 의해 만들어낸 개념적 일반자의 위치로 폄하되어 그 실재성을 박탈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요. 그러나 이런 개체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마히야의 실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상가들이 동서양에 적지 않게 존재했고 그들은 보편적 본질이 실재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어요. 이들에게 보편적 본질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농밀한  존재감을 지닌 리얼리티를 말하구요.
 
 일반자로서의 본질은 말즉 사물의 이름과 매우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요본질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입장이건 부정하는 입장이건 이 점에 관해서는 똑같죠본질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말이 본질 환기적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고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말이 본질 지시적으로 작용한다고 봐요. 쉽게 말하자면 꽃이라는 이름이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꽃의 본질을 망상적으로 불러일으킨다고 보는 입장(본질 환기)과 실재하는 꽃의 실재하는 본질을 지시한다고 보는 입장 차이가 있을 뿐인 거죠. 이렇게 말이 의미하는 일반자즉 '마히야가 실재인가 비실재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철학의 입장과 힌두철학의 입장의 존재론적 대립의 주축으로 인도사상의 오랜 역사를 통해 왕성하게 논의되어 왔구요.
 
불교처럼 마히야를 부정하여 떨쳐 버리려는 입장과 달리 일반자인 본질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마히야가 어떤 형태로 실재하는지, 의식 차원에서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를 규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거죠.
 
보편적 본질의 실재성에 관한 주장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보여주는 것이 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기준은 '실재하는 본질'을 사람이 의식의 어떤 층에서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이는지예요. 이 작업을 위해 의식을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으로 나눴어요. 물론 의식에 표면이나 심층이 있을 리 없지만 일상적인 조건아래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의식들(대승불교의 무의식, 릴케의 의식의 피라미드 밑바닥 같은)을 심층의식이라고 하기로 한 거죠. 

 
1
보편적 본질은 존재한다그것은 실재한다 해도 존재의 심층부에 실재하는 것이어서 존재의 표면에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식의 주체의 측면에서도 의식차원의 근본적인 전환이 당연히 요청된다.
신유학의 격물궁리
말라르메
2
보편적 본질이 체험적으로 인식되는 장소가 의식 심층 중에서도 샤머니즘과 어떤 종류의 신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가 성립하는 의식영역이다모든 존재자의 보편적 본질이 농후한 상징성을 갖는 아키타이프(원형)로 나타난다.
유무중도의 실재빛의 천사, 64만다라유대교 신비주의 세피로트 등
3
1형이 심층의식적 체험에 의해 포착하는 보편적 본질을 의식의 심층에서가 아니라 표층에서 이지적으로 인지한다형이상학적 일반자의 실재를 형이상학적 체험을 통해 직접 매개 없이 포착하려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표층의식적으로) 본질의 실재를 확인하는 것에 그친다.
공자의 정명론고대 인도의 니야바바이세시카 학파의 존재범주론
 
특히 제3형의 본질론에서 그 일반자를 마음 밖의 실재성을 무시하여 단지 순수하게 일반자로서 취급하면 순식간에 개념적 일반자결국은 보편적 개념이 되어 버리게 되는데요공손룡의 유명한 궤변(흰 말은 말이 아니다)은 보편적 본질을 경험적 실재성의 차원으로부터 일단 완전히 잘라내어 추상적 사유로 옮겨 본질론을 철저하게 개념구조이론으로서 전개시킨 예이고공자의 정명론에도 본질 개념화의 경향이 다분히 인정된다고 하네요.
 
-----


다음장부터 하나 하나 공부해 나가기로 했어요. 다음 번 발제자는 효진. 
 
침뜸공부에서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 우리 몸이 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 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선입견과 관념을 털어내고 투명하게 사람을 만나는 게 진단과 치료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침뜸은 신경 및 체액의 조절을 거쳐 유기체 내의 병에 대한 저항력을 움직여서 통증을 멎게 하고, 열을 끄고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임을. 경혈과 내부 장기가 현저히 떨어져 있지만 그 경혈에 내부 장기의 반응이 나타나고, 
그 경혈에 침을 놓아서 해당장기의 이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동양의학의 정체관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었어요. 
 
후기가 늦어져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진땀 좀 흘렸네요. ㅋㅋ 
다음 번엔 깜박하지 않아야겠어요.   


출처: http://gamidang.com/bbs/board.php?bo_table=0401&wr_id=1132&sca=&sfl=wr_subject&stx=%EC%9D%98%EC%8B%9D%EA%B3%BC+%EB%B3%B8%EC%A7%88&sop=and

세미나
홈 > 세미나>세미나


[혈자리서당 세미나]2014.02.19 후기 /의식과 본질 3장 본질과 존재, 일반화와 개체성/
 글쓴이 : 얼음마녀 | 작성일 : 14-02-27 00:56
조회 : 3,646  
혈자리 멤버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발제문을 2페이지 이내로 줄이라"고.
그 열화와 같은 성원에 부응하기 위해 줄이고 또 줄이고
그래도 3페이지가 나오는 발제문을 싹둑싹둑 가위질했었지요. ㅎ~
 

연찬문화연구소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Daum 카페

연찬과생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남곡추천 
13.05.18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필부지용 - 나무위키
11 Jan 2022 —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함부로 부리는 소인의 용기라는 뜻. 
===
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
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

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

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
나와 같은 인문운동가에겐 고전(古典)이야말로 중요한 인문운동의 도구다.
고전 가운데 가장 신뢰할만한 것은 고등종교의 가르침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을 보며, 민주주의의 생활화나 새로운 시민운동 그리고 협동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운동들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생각한다.
원자화된 차가운 개인주의를 지양(止揚)하는 것이 결코 과거의 공동체가 서 있던 집단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실제로 실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낀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과거의 집단주의에서는 ‘나’라는 개인이 집단 속에 묻혀 있다.
이 개인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 개인이 해방되기 시작한다.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개인의 자유’에 환호하지만, 얼마 안가 서로 부딪치는 차가운 이기주의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관계가 보인다.
이것이 일체성(一體性)의 자각이다.
이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적 사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자각을 통과해서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돌아오는데,
이 단계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을 뭐라고 부를까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공인주의(公人主義)라고 부르는게 어떨까 생각한다.
공인(公人)이란 일체성(一體性)을 자각한 개인을 말한다.
사실은 자각하던 안하던 모든 사람은 공인(公人)이지만,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에 임하는 현실적 태도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예컨대 공인의 자각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하면, 저항성을 넘어 책임성과 관용 그리고 공공성과 세계성을 가지게 된다.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이다.
협동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운동, 실제적인 민주적 운영의 능력 등이 바로 이 공인(公人)의 자각이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공인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지금의 역사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전에 썼던 글이다.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에서 발췌>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 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