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7

류기종 목사.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7) - Rudolf Otto, Whitehead, 틸리히, Suzuki, 머턴, 류영모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 류영모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토마스 머턴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 D. T, Suzuki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4) -폴 틸리히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 - 
기독교와 불교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기독교와 불교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4월 28일 (수) 17:59:29
최종편집 : 2010년 05월 04일 (화) 13:42:15 [조회수 : 6492]


* 류기종 목사가 발표한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편을 소개한다.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을 지난 이천년에 걸쳐서 가장 깊이 사색하고 묵상(체험)한 영적 큰 스승들의 통찰과 이해에 의거해서 살핀 글이다. Rudolf Otto, A. N. Whitehead, Paul Tillich, D. T, Suzuki , Thomas Merton, 다석 류영모를 조명한다.


<기독교와 불교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1. 한국 사회의 종교적 상황과 특수성
한국 사회는 종교사적으로 볼 때, 매우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찍부터 동양의 삼대 종교 즉 불교 도교 유교가 들어와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했을뿐 아니라, 한국의 고유문화를 창조했으며, 특히 불교와 유교는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교와 불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가까운 이웃 나라인 중국을 통해서 유입되기 시작했으나, 특별히 불교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삼국시대부터 였으며, 통일 실라 시대를 거처 고려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세기에 이르러 고려조의 붕괴와 함께 이씨 왕조의 등장으로 한국 사회는 불교의 영향이 뒤로 밀려나고 유교가 전 사회의 지배적 종교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한국의 근대사회는 유교중심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 서구문화가 동양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가 중국을 경유하여 한국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8세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리고 19세기에는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와, 불과 1, 2백년 동안에, 기독교가 한국의 주요 종교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불교와 함께 한국사회의 2대 종교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통계에 따르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의 한국인의 종교인 분포 중 가장 특이한 점은 지구상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종교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동서양에 걸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쳐온 두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가 대등한 분포의 종교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불교인 수와 기독교인(신 구교 합한)의 수가 각각 일천만 명에서 천오백만 명 선에 달하고 있다. 이 둘을 합하면 2천5백만 에서 3천만 명으로 한국인 전체인구의 과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기독교인과 불교도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또한 두 종교인의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서 대등한 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외에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종교사적으로나 인류 문화사적으로 매주 주요한 사실로 보여진다. 이 사실은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인의 두 사람 중 하나는 기독교인이거나 불교도란 사실을 의미하며, 따라서 한국인들은 길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즉 사회 전 분야에서 두 종교인들 즉 불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수시로 만나고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불교들은 이렇게 매일 만나고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그들 사이에는 종교라는 벽이 가로 놓여있어서 그들 사이에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오늘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임과 동시에 이것이 오늘의 한국의 사회적 갈등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요인들을 간추리면 (1)빈부의 갈등 즉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갈등, (2)출신 지역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그리고 (3)정치 이념적 갈등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사회적 갈등의 가장 저변에 깔려 있는 요인은 바로 다름 아닌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즉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적 신념이 우리 인간 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예로, 불교인 시어머니와 기독교인 며느리, 기독교인 직장 상사와 불교인 하급 직원, 불교인 선생과 기독교인 학생, 그리고 한 직장 안에서 종교가 다른 개인 혹은 구릅 간의 불편한 관계 등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한 사회 안에서의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사람들 간의 이러한 간격과 갈등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가 오늘의 우리 한국 사회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회적 갈등의 중요 원인이 되는 종교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대화의 채널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특히 한국 사회 전체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는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의 채널이나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들 두 종교는 그들 두 종교 구성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하여, 매우 배타적 성향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밖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마저 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들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흔이 보게 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충돌로 인해서 집단적 분쟁 즉 전쟁이나 종족 살육과 같은 극단적 행위들까지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은 특히 종교적 신념의 대립이 종족이나 민족적 대립과 결부되었을 때 더욱 격열해 지며 때로는 참혹한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한국은 고래로 세계의 큰 종교들 즉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 기독교 그리고 또한 한국의 고유 종교들인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이 함께 어울려 있으면서도, 종교적 신념들로 인한 극열한 대립이나 집단적 투쟁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특히 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가량을 점유하는 기독교인들과 불교인들 간의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관계의 단절의 심각성이다. 즉 한 사회 안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 간에 종교적 신념의 차이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깊은 골 즉 간격이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 한국 사회 안에 잠재해 있는 보이지 않는 불행한 요소이며 또한 정신적 고통의 요인인 것이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의 경우 한 가족 공동체 안에서 종교가 다름으로 인해서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그로 인해서 가족 구성원들이 정신적 고통과 불행을 겪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종교인들 간의 갈등 특히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의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대화의 통로가 닫혀 있으며, 그로 인해서 두 종교 간에 상호 이해의 길이 막혀있으므로 해서 상대방의 종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에 의한 지극히 피상적 이해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조건 적대적 종교로 이해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은 불교를 전적으로 무신론 종교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불교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종교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불교는 기독교를 인간의 감정을 지닌 신을 믿는 유치한 유신론 신관의 종교로 아니면 기복적 신앙의 종교로 곡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현상들은 두 종교 간에 상호이해의 기회나 대화의 통로가 전적으로 막혀 있는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기독교와 불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 동기는 필자가 1970년대 중반에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두루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철학 과목을 공부하는 중에 대승불교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이론 체계 수립자인 1세기 말의 인도의 대 사상가(철학자)인 나가주나(Nagarjuna, 한국명, 용수)의 “무”(無, Emptiness) 사상을 접하고서 이다. 담당 교수로가 필자에게 한 책을 주면서 그 책의 내용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 필자가 받은 책은 미국의 저명한 종교철학자 프레드릭 스트랭(Frederick Streng)이 풀이한 나가주나의 주저 <중도론/中道論>의 해설서였는데, 그 책의 내용은 주로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인 공(무)사상과 연기론(緣起論) 그리고 그것의 종교적 역할과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나가주나는 그의 공(空) 사상을 설명함에 있어 불타가 설한 공사상의 핵심인 연기론에 기초해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준 까닭으로 해서 제 2의 불타로 불려지기도 한다.

필자는 그 책을 접하고 큰 충격과 감동을 느꼈다. 왜냐하면 필자는 그 때 까지 불교의 중심사상에 대해서 체계적인 지식을 갖지 못하였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와 대화할만한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통해서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따리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 사상이 무신론이나 부정주의 철학 원리가 아니라 서양철학 혹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앞으로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은 그후 현대의 많은 대승불교 학자들의 나가주나 연구서들을 접하면서 한 층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 글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기독교와 대비되는 불교의 사상은 불교의 경전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바로 이 대승불교의 중심사상(Central Philosophy)에 해당하는 나가주나(Nagarjuna)의 중도론에 나타나 있는 공사상과 연기론에 주로 의존하고 있음을 미리 말해 두고자 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4) -폴 틸리히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한국신학 소고(溯考): 한국신학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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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10일 (월) 16:00:35
최종편집 : 2010년 05월 11일 (화) 20:11:05 [조회수 : 2804]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선각자들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지구촌 인류가 경험한 중대한 사건들은 먼저 1,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었으며, 그 후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이념적 대립에 의한 세계질서의 극한적 대립과 거기에서 파생한 긴장과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서 전 인류는 큰 고통을 경험했으며, 그 직접적 피해는 이 지구상 어느 민족이나 국가들 보다 더 우리 한국국민들이 가장 심각하게 경험한 바이였으며, 아직도 그 상처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20세기의 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의외로 20세기에 지구상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시작의 사건을 지목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싹트기 시작한 기독교와 불교와의 접촉과 대화의 시작을 이 지구상(역사상)에 발생한 어느 사건들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전 세계 인구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기하고 있는 두 종교 즉 동서양을 대표하며 또한 동서 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교 그리고 가장 심오한 인간의 도덕적 가치체계와 구원의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는 두 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서로 담을 높이 쌓고 문을 굳게 잠근 채 남남으 로 지내대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굳게 닫친 문을 열고 서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인류 역사의 정신적(내면적) 의미의 중대성을 간파한 토인비 박사의 예리한 판단과 통찰력에서 나온 결과로 사료된다. 뿐만 아니라 토인비 박사는 그의 <세계 종교 속의 기독교>란 소책자에서 인류의 평화 증진을 위해서는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긴밀한 대화의 필요성과 함께 기독교의 오만(교만)의 포기와 겸손의 필요성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토인비 박사의 지적대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와 불교는 비록 소수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대화가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동서양의 종교 사상가들의 주 관심사가 되다 시피 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주류 신학자들의 주 관심사의 하나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으며, 특히 우리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심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꽉 막혀있던 우리 한국 사회의 두 주류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상호이해와 소통의 길이 열리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지난 20세기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의 간의 대화의 물꼬를 터준 선각자들은 누구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1)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

▲ 루돌프 오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암시한 최초의 인물은 아마도 1917년에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 란 책을 저술한 독일의 신학자며 종교철학자인 루돌프 옷토 일 것이다. 이 책은 현재 종교학이나 종교철학 분야에서 하나의 고전이 되다 시피 하였다. 옷토가 기독교 사상을 넘어서 다른 종교 특히 동양의 종교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1910년에서 1911년까지의 2년에 걸친 긴 여행을 통해서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북아푸리카와 이집트, 팔레스타인을 거쳐서 인도와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5년 후인 1925년과 1927-1928년 사이에 다시 중동과 인도를 방문하여 동양의 종교전통에 대한 그의 지식을 한층 심화시켰다.

거룩함의 경험: 옷토는 기독교의 성서가 말하는 종교적 진리의 핵심은 우주의 근원적 실재인 하나님 곧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중심한 것인데, 이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적 차원의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그는 “거룩함에 대한 경험”, 혹은 "초월적 실재"(numen/the numinous)에 대한 경험으로 보았다. 그 한 예로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할 때,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들은 것은 초월적 실재인 하나님의 임재경험을 들어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 때 모세에게 준 신의 명칭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란 뜻을 지닌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신의 명칭은 이 세상 만물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신비 지극한 초월적 실재라는 뜻을 암시한다고 옷토는 이해하고 있다. 이 신비 지극한 존재로서의 신을 기독교 신비가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세상 만물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고 해서 “전적 타자”(the Wholly Other)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신비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루돌푸 옷토가 현대의 기독교계와 종교계에 공헌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비주의"(Mysticism)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제공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옷토는 유한자인 우리 인간이 초월자/무한자인 신의 임재를 경험할 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1)극치의 신비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tremendum majestorum)과 (2)감당하기 어려울 만한 “매혹적인 황홀한 마음”(tremendum fasinosum)이다. 이러한 경험이나 느낌과 깨달음은 신비주의의 특색을 잘 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옷토는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신비주의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따라서 신비주의는 기독교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임을 잘 표현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비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저 넘어"(beyond) 라는 것도 역시 모든 종교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합리적 요소가 극도의 긴장상태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신비주의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의 누멘적 대상을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되, 단순히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과의 대립으로 만족하지 않고 급기야는 “존재 자체(Being itself)”와 모든 “존재하는” 것 과 대립시킨다. 결국 신비주의는 그것을 무(無)라고 부른다. 여기서 무라는 것은 단지 어떤 것으로도 말할 수 없다는 뜻할 뿐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혹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과 단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반대적이라는 뜻이다.....우리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독특한 “무”(nihil)에 대한 고찰은 불교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공”(空)한 것 혹은 “공”(Sunyata)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타당하다.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신비적 언어나 지시어(ideogram, 상징적 표현)에 대하여 아무런 내적 감정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교적 신비주의자의 "공"과
"공화"에 대한 추구는 일종의 어리석음으로 보일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동양의 “공”(무)은 서양의 "없음"(nothing)과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것”(the wholly other)에 대한 누멘적 지시어인 것이다. 공이란 “기이한 것”(mirum) 그 자체,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언급하게 될 "역설"(paradox)과 “이율 배반적인 것으로 까지 고조되는 것이다.(거룩함의 의미, 길희성 역, 분도, 1987, pp.71-72).

위의 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옷토가 불교의 “무“ 혹은 “공”의 개념을 서양이나 혹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파악한 “전적 타자” 혹은 “이질적인 것”에 대한 신비적 방법에 의한 인식, 다시 말하면 궁극적 실재인 신에 대한 신비적 경험의 내용과 동일하게 보았다는 사실이다. 옷토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서구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도 이질적으로만 느껴지고 심지어는 일종의 허무주의 내지는 부정주의 종교철학 원리로만 인식되던 불교의 “공”사상을 새롭게 보았을 뿌 아니라, 기독교 신비가들이 경험하고 체득한 신(하나님) 체험의 내용과 동일한 차원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옷토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첫 물고를 터 준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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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16일 (일)  [조회수 : 2721]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계속 -

▲ A. N. Whitehead


(2)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33-1947)

20세기 들어와서 기독교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성과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이다. 그는 런던 대학에서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온 해인 1924년 2년 후인 1926년에 발표한 그의 종교론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란 책에서, 불교와 기독교 두 종교의 특색과 함께 두 종교의 대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1) 최고의 합리적 종교로서의 불교와 기독교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주된 합리적 종교가 있는데, 이들은 곧 기독교와 불교이다. 즉 기독교와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된 우주관에 적합한 합리화의 과정에 진입한 종교들이다. 이 들 두 종교의 주변에는 경쟁적 종교들이 있었지만, 이 두 종교는 이념의 명료성, 시유의 일반성, 도덕적 품위, 존속의 능력, 그리고 세계로의 확대의 폭 등을 고려할 때, 이런 성질들을 골고루 구비한 점으로 해서 그들의 경쟁자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들 두 종교를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판단한다면 현재 쇠퇘(퇴보)의 국면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두 종교는 현재 세계에 미치는 과거의 위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두 종교의 특색:
(1)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는 두 위대한 이물인 불타와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에 기초한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구원의 도리를 인간과 우주 만물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적 이해를 통해서 도달하려는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 활동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불타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리를 준 반면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표현이 불교와 기독교의 특색을 가장 잘 들어내는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불교는 다분히 혹은 본래적으로 철학적/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불교를 응용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례라고 말하며, 따라서 불교가 종교를 탄생시키는 형이상학 즉 종교적 기능을 하는 형이상학/철학 원리인 반면 기독교는 항상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종교 즉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정항에서 시작해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의 특색을 지녔다고 말한다.

(2)화이트헤드가 이해한 기독교와 불교의 또 하나의 특색(유사점과 차이점)은 악의 문제에 관해서이다. 기독교와 불교 둘 다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위대한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는 이 중대한 악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즉 악의 극복의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불교는 물질적 또는 감정적 경험의 세계의 본성 자체 안에 악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것을 깨닫게 하는 지혜는 그러한 경험의 방편이 되는 개체적 성격들로부터 “놓임”을 받도록 깨닫게 하며 또한 그렇게 삶을 살도록 유도한다.

기독교도 역시 악 혹은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놓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 있어서 불교보다 형이상학적인 관점으로는 덜 분명하지만, 반면에 더 구체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다. 즉 기독교는 처음에는 악이 세계 전반에 내재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악은 개개인의 삶/사실 그 자체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숭고한 이상의 실현과 선을 지향하는 삶을 통해서 즉 선으로서 악을 극복하려 한다고 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악의 문제이 있어서 즉 악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극복의 방법에 있어서 두 종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3. 두 종교의 퇴보의 원인과 대화의 필요:
화이트헤드는 기독교와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진보된/발전된 위대한 종교들이지만 현재의 상태는 그들의 발생 초기에 비해서 쇠퇴의 과정에 들어서 있다고 보고 있다. 두 종교의 쇠태/퇴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두 종교의 폐쇠성 즉 두 종교가 각각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에 빠져서 상대방에게서 더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에 빠져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두 종교가 초기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두 종교가 문을 열고 대화하며 상대방에게서 배우려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 사상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끼친 기독교와 불교의 퇴보는 부분적으로는 이들 각 종교가 지나치게 상대방으로부터 피해 숨어버린 상태에 기인한다. 배움에 대한 자기 충족의 폐쇄성과 무지한 열광주의자들의 확신이 결합하여 각 종교를 자기 자신의 사유의 형식 속에 갇혀 있게 만들었다. 더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한 상호간의 탐구와 고찰 대신에 그들은 자기만족과 메마른 상태로 머물러 온 것이다.(Whitehead, 종교론, 류기종 역, 제4장, 진리와 비판, p.111).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불교가 각각 자기 종교의 쇠퇴(퇴보)적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보다 높은 단계로의 성숙을 위해서 자기 종교의 문을 열고 상대방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두 종교 간의 긴밀한 상호 교류와 대화가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두 종교 간의 관계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 즉 서로에게서 배워야 하는 상보의 관계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상호교류는 양 종교를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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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4) -폴 틸리히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23일  [조회수 : 3899]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 폴 틸리히

20세기에 들어서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 이는 아마도 폴 틸리히일 것이다. 틸리히의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가 1960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수개월 간(5월에서 7월까지 약 8주간을) 도꾜와 교도에 머물면서 일본의 저명한 불교 학자들과의 깊은 교제와 대화를 나눈 점을 보와도 알 수 있다. 그의 일본 방문은 야사카 다까기(Yasaka Takagi) 교수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때 그가 만난 사람들은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D. Suzuki) 박사를 비롯하여 교도학파(the Kyoto School)의 철학자 및 불교 학자들과 또한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토(Shinto)의 스님들과 선승들(Zen Masters)도 포함되어 있었다. 틸리히는 그들과의 대담과 토론을 통하여 동양 사상 특히 선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증거로서 틸리히는 그의 일본 방문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이란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책에서 그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문제를 직접 취급하였다.

종교 간의 대화의 요건: 틸리히는 위의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 고찰함에 있어, 불교를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낫 설며, 동시에 가장 경쟁적인(most greatest, strangest, and competitive) 종교라고 칭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는 현재까지는 매우 미미했지만, 앞으로 두 종교의 대화는 가까운 장래에 가장 중심적 문제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왔는데, 그 이유는 현대 세계에 나날이 확산되어가는 세속주의와 그것의 영향을 받은 유사종교들(quasi-religions)의 발흥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한편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대화자가 취해야할 기본자세에 대해서 다음 네 가지로 언급하였다. (1)상대방 종교의 신념의 가치에 대해서 존중하고 인정할 것, (2)대화자는 지신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임할 것, (3)대화가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에 공통분모(common ground)를 찾아낼 것, (4)상대방의 비판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가질 것 등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요소(자세)들을 가지고 대화에 임한다면, 서로에게 지극히 유익하며(extremely fruitful), 또한 그것을 계속한다면, 자신의 일본에서의 경험에 비추어서 볼 때, 두 종교 및 다른 종교 간의 대화는 우리 역사에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인격주의 대 비인격주의: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함에 있어 가장 크게 부디치는 문제로서 기독교의 인격주의적인 특성과 불교의 비인격적인 특색을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개념이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과 불교의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와 “열반"(Nirvana)의 개념이다. 즉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특성으로 표현/상징화(symbolized)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궁극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현(상징)인 “공"(Void)이나 “절대 무”(Absolute Non-Being)는 비인격적 혹은 초인격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사실 이것은 틸리히가 기독교와 불교의 특징을 비교 고찰함에 있어서 정확한 진단이며 지적이라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불교는 인격주의적 표현이나 개념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표현들이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부적합하다고 보는 반면에, 기독교는 오리혀 그것을(인격주의적인 접근이나 표현을) 궁극적 실재 혹은 신의 실재를 표현하는데 있어 더 적극적(긍적적)이고 적합한 표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는 넓은 의미로 표현하자면 “인격주의”(personalism)와 “비인격주의” 혹은 “초인격주의”(trans-personalism)와의 대화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틸리히의 하나님 이해: 틸리히가 기독교와 동양종교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 크게 공헌한 점은 그가 기독교의 인격주의 중심의 신관을 초인격주의적인 신관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부르는 것은 “절대자”(혹은 절대 타자)인 하나님을 여러 존재들 중의 하나로 즉 비록 모든 존재들 중 최고의 존재라 하더라도 무한자를 유한자의 범주로 격하시키는 일이 때문에 부적합하다고 보왔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를 “하나님”(God)으로 호칭하지 않고, 모든 존재들의 근거가 되는 의미에서 “존재 자체”(Being-Itself) 혹은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으로 불렀다.

뿐만 아니라 틸리히는 기독교의 전 역사를 살펴보면 신과 인간에 관해서 불교의 사상에 매우 유사한 신비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특히 오리겐, 어거스틴, 에크할트 등이 사용한 고전적 신개념인 “존재 자체”(esse ipsum)란 개념은 불교의 “공”(空) 개념이나 “절대무”(絶對無)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단서를 제공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즉 틸리히에 의하면, 존재 자체로서의 신은 어떤 하나의 위대한 존재나 혹은 모든 존재들의 총체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초월하면서 또한 모든 존재들을 존재 가능케 하는 “존재의 기반” 혹은 “모체”(Matrix)로서, 우리 인간의 언어나 상징이나 어떠한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대계”(the Absolute) 즉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아마도 틸리히의 이러한 신관(하나님 이해)은 불교의 “공”사상과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 or Emptiness) 혹은 “열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 이해와 대화에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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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 D. T, Suzuki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5월 30일 (일) [조회수 : 4065]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계속

(4) 다이세츠 스즈키(D. T. Suzuki, 1870-1966)




▲ D. T, Suzuki


일본의 경도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다로(1870-1947)의 친구이자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 박사는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 특히 일본의 선불교(Zen Buddhism)를 서방 세계에 알린 인물이며, 또한 동-서의 철학과 종교 사상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현대의 한 역사가인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1927년에 영문으로 출판된 스즈키 박사의 “선불교의 논문들”(Essays in Zen Buddhism)이란 책의 출현은 오는 세대에 있어서 마치 13세기의 윌리엄 모어베크(William Moerbecke)에 의한 아리스토틀의 라틴어 번역과 또는 15세기에 피치노(M. Ficino)에 의한 플라톤의 번역에 비견될만한 의미를 지닌 한 위대한 지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만큼 스즈키 박사의 이 책은 기독교 문화권인 서방 세계에 대승 불교의 사상을 알리며 그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즈키 박사의 여러 저서들 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기독교와 불교의 긴밀한 관계성을 말한 책으로 1957년에 출판된 <신비주의: 기독교와 불교>(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t)이다. 스즈키는 이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 특히 선불교와의 관계를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스즈키는 기독교의 많은 사상가들 중에서 특히 14세기에 독일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장으로 활동한 마이스터 에크할트(Meister Eckhart)의 신비주의 사상이 대승불교와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처음 마이스터 에크할트의 설교문들이 수록된 소책자를 읽고서 큰 감 명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과거나 현대에 걸쳐서 어느 기독교 사상가도 이 들 설교문들에 나타나 있는 사상들을 따라 갈만한 그런 기독교 사상가는 기 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설교문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거기 에 나타난 사상들은 확실히 불교적 사상들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너무도 가 깝게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이 거의 확실하게 불교적 사 유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나의 판단으로 는 에크할트는 특이한 ‘그리스도인’인 것 같다>(스즈키, 신비주의, 제1부 제1장, “에크할트와 불교”에서 인용)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와 신성(Godhead): 스즈키 박사가 발견한 마이스터 에크할트의 신비주의에서 대승불교와 가장 가까운 개념은 에크할트가 이해한 “신성” 으로서의 하나님관이다. 에크할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활동에 직접 간여하는 신(God)과 모든 창조활동에 전적으로 초월에 있는 “신성"(Godhead)의 두 면이 있다. 이것은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양면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개념은 신구약성서 전반에 들어 있으며, 오리겐을 비롯하여 어거스틴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교부들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칼 발트 등 현대 신학학자들에 이르기 까지 줄기차게 주장되어 온 개념이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에크할트는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차이를 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에크할트는 "신"(하나님)과 "신성"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이룩하신다. 그러나 신성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럴 필 요도 없으시다. 신성은 어떠한 행위도 추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하나님과 신성의 차이는 행위와 행위의 부재로서 구별된다. 나는 전에 말해 본 적이 없는 바, 하나님과 신성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 하고자 한다. 사람의 내면성과 외면성도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 그러 나 신과 신성과의 거리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다>. (Matthew Fox, Breakthrough, pp. 76-77)

에크할트는 “신(창조의 하나님)”은 무엇을 이룩하기 위해 활동하지만 “신성”(신의 본래 모습)은 그럴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신성”은 어떠한 행위도 부재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에크할트는 신의 참 모습은 그의 초월성인 “신성”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신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에크할트가 여기서 말하는 신의 초월성을 의미하는 행위의 부재로서의 “신성”은 대승불교에서 의미하는 “공”이나 “절대무”와 매우 유사한 개념임을 나타낸다고 스즈키는 보고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무”는 이것과 저것, 행위와 무행위, 있음과 없음 등의 모든 상대적 개념을 다 초월하며, 따라서 어떠한 상대적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대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로 여겨지는 불교의 "공"(空) 특히 선불교의 “절대무” 개념과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사이에는 비록 신비주의자들이나 혹은 영성가들의 이해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상호이해와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지적해 준 이가 바로 20세기에 들어서서 불교와 기독교 및 서구철학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다이세츠 스즈키 박사이다. 그런 점에서 스즈키 박사는 기독교와 불교(특히 선불교)와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자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겠다.

[관련기사]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3) - A. N. Whitehead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2) - Rudolf Otto
한국신학 소고(溯考): 한국신학의 과거, 현재, 미래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
예수의 종교(Religion of Jesus)


제이 씨 (184.146.115.16)

2012-04-27 08:08:18



기독교와 불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상호 이해와 대화가 가능한가?
종교란, 수평/竪直적 의미에서 “절대무” 찾기나 “존재자체” 찾기를 말한다면,
사람들에 의하여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상향식↑추구라고 사려되며,
기독교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인격적 하나님” 의 垂直적 계시↓에 의한
특수한 만남 (현현과 응답) 에 대하여, 신뢰↑함으로 “인격적 하나님” 과의
상응관계 곧 위로부터 아래를 향한 하향식↓의미가 전제 되어 상하↕관계
형성이 된다는 인과성의 체험적 의미가 부여 된다는 생각입니다.
“인격적 하나님” 의, 사람 존재 (창조) 이 전의, 그 분의 “인격” 이란,
어떤 분의 말을 빌리면,
“내적 개념내용과 고유한 자 의식,
The inner content and unique self-conteousness,”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인격” 으로의 내적개념내용이란, 하니님의 정체 (영, 스스로 존재
하는 창조자) 를, 그리고 하나님의 고유한 자의식이란, 자기 계시와 타자인식
(사랑) 을 의미한다고 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의 인격을 해석 함은,
내적개념내용인 사람의 정체를 영과 육체 곧 피조자로, 그리고 사람의
고유한 자 의식을, 자아 발견 의식과 타자 인식 으로 이해 됩니다.
그러므로 인격주의? 적인 체험(하나님 만나는 경험) 과 비 인격주의? 적인
궁구한 발상적 초월과의 대화적 공통점을 찾을수 있을까 라는 풀리지
않을것 같은 의문을 제기 합니다.


창공 (121.162.90.34)

2010-05-26 08:32:52




기독교와 불교를 하나님과 절대무, 인격과 비인격으로 표현한 것을 읽으며 실제 종교의 표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면 불교는 부처(인간모습의 불상)이고, 기독교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셔서 만들지 않아 오히려 역으로 보이고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아렇게 뒤바뀌어 보이니 진리를 알아채고 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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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토마스 머턴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0년 06월 06일 (일)  [조회수 : 4120]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6) -계속-

(5)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1916-1968)


▲ 토머스 머튼


20세기 중반 이후에 기독교와 불교 특히 기독교와 선불교와의 대화에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아마도 20세기의 “사막의 교부”(a Desert Father)라고 불리는 토마스 머턴일 것이다. 머턴은 1941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어렵게 얻은 뉴욕의 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켄터키 주에 있는 겟세마네 수도원에 한 수도사로 들어가 일생동안 명상수행에 전념했으며,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서 “명상” 및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세계 평화의 문제와 빈곤과 폭력과 사회악 등 사회정의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머턴은 오랜 동안의 자신의 명상수행의 과정에서 불교의 명상 의 방법 특히 선수행(Zen Practice)의 방법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머턴은 기독교 신비가들의 영적 체험의 방법과 선불교의 영적 체험의 방법이 본질적으로 깊이 통하는,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심오한 영적 체험과 깨달음을 표현하는 형식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67년에 <신비가와 선의 대가들> (Mystics and Zen Masters>이란 저술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머턴은 6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발전된 선의 역사와 내용 그리고 발전 과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선(禪/Zen)불교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인도에서 들어온 달마대사(Bodhidharma)에 의해 처음 중국에 소개되었고, 도교와 결합하여 발전된/꽃피운 대승불교의 한 지류이며, 그후 한국과 일본에 널리 소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불교(Zen Buddhism)와 기독교 신비주의(Christian Mysticism): 달마대사에 의해서 소개된 선의 기본정신은 “교외별전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4개의 한자성어로 된 내용이다. 이 시는 선불교(Zen)의 핵심을 집약적으로 들어내는 시이다. 즉 우리 인간이 진리를 깨닫는 득도에 이르는 길은 경전의 문자나 교리나 추상적인 개념들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내면을 직시함으로써, 즉 마음(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세계)의 신비(본질)를 깨달음으로써, 참 진리(실재)의 인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선종(선불교)은 선의 5대조 홍인(弘忍)의 두 제자 혜능(慧能)과 신수(信秀)에 의해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6대조의 선발과정에서 5대조 홍인의 수제자 신수의 시가 혜능의 시에 뒤떨어짐으로서 혜능이 6대조로 선택 되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신수의 시: (신수는 최고령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홍인의 후계자로 보였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깨끗한 거울 같구나,
항상 갈고 닦아서 한 올의 먼지도 묻지 않게 하려네>.

혜능의 시: (혜능은 홍인의 절에서 계도 받지 못한 채 부엌에서 일만하던 시골뜨기 도반중 하나에 불과 했으나 선의 참뜻을 나타내는 탁월한 시를 썼다)
<보리수 나무 원래 없고, 깨끗한 거울 또한 아무데도 없는데,
어느 곳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까?>

혜능은 바로 이 시 때문에 신수 대신 홍인을 이어 선의 6대조가 되었다. 머턴은 이러한 선의 방법들이 기독교의 여러 상이한 신비체험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교류될 수 있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머턴(Merton)은 선불교와의 접촉에 있어서 선승이며 동시에 대학자인 다이세츠 스즈키와의 교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두 사람 간의 서신교환은 1959년부터 시작하였는데, 머튼은 고대 사막교부들의 관상적 영성과 선불교의 선승들의 영성의 유사성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서, 이점에 대해 큰 관심을 지녔던 스즈키와 깊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64년에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 교정에서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이후 깊은 교제를 나눴는데, 스즈키는 머턴을 가리켜서 선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한 서양인(기독교인)이라고 평한바 있다.

스즈키와의 교제 이후, 머턴은 1965년에 <장자의 도>란 책을 출간했으며, 1967년에는 자신의 선불교 연구서로 볼 수 있는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신비가와 선의 대가들>이란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머턴은 장자를 통해서, 언어와 개념을 넘어선 “실재”에 대한 체험적 인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머턴은 기독교의 문제점은 언제나 개념화와 교리화에 집착하는 약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머턴의 동양종교에의 깊은 관심은 1968년 태국 방콕(Bangkok)에 열린 종교회의에의 참석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 기회를 불교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종교성과의 접촉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마턴은 이를 계기로 인도, 태국, 스리랑카를 방문하려 했고, 다라이 라마와의 만남과 일본의 선승들과도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머턴은 회의 도중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 뜻을 다 실현하지 못했다.

머턴과 깊은 교제를 나눴던 틱낫한(Thich Naht Hahn)은 머턴에 대해 평하기를 대부분의 서구 신학자나 영성가들이 이원론적 사고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반해서 머턴은 그런 틀에서 벗어서 있다는 사실이라고 평했다. 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D. S. Rast)가 머턴에게 묻기를, 불교와의 접촉 없이 기독교의 가르침들 을 잘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머턴이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나는 불교의 빛으로 조명하지 않고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머턴의 이 말은 불교의 진리들은 기독교의 깊은 영적인 진리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머턴은 <신비가와 선의 대가들>의 서문에서 “선은 추상적인 형이상학도 아니며, 신학도 아니며, 이론적인 명제도 아니고, 의식과 앎의 굴레(속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행위로서, “구체적인 살아있는 존재론”이라고 정의 내렸다. 머턴은 이 책에서 기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교부시대, 초기 수도원제도(사막의 수도자들), 영국의 신비주의, 17세기 신비주의, 러시아 동방정교회 영성 그리고 개신교 수도원 공동체 등도 소개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머턴은 선불교 즉 불교의 선(Zen)의 방법에 매혹된 기독교 명상수도자로서, 영성주의 혹은 신비주의의 측면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깊은 대화의 길을 모색한 사람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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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 류영모 - 당당뉴스

류기종 | rkchg@hanmail.net
2010년 06월 13일 (일) 18:38:37 [조회수 : 3945]


(6) 류영모(柳永模, 1890-1981)



▲ 다석 유영모

다석(多夕) 류영모는 젊은 시절 한 평번함 과학도로 시작하여, 끊임없는 연구(진리탐구)와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서 세계(인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 불, 선, 기(기독교)의 회통과 창조적 조화를 이룩해 낸 인물로서, 20세기의 탁월한 통섭의 사상가인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사상가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일생동안 자신의 삶의 근거로 견지 하면서도, 단순한 교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 종교 사상들과 또한 한국고유의 전통종교 사상들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창조적 만남과 조화 회통을 통해서,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심층적으로 이해한 참으로 희귀하고 독특한 사상가이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 강좌를 맞게 되었는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 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박영호씨의 기록에 의하면, 연경반은 많이 모일 때는 수백명이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적게는 십여 명씩 모였으며, 평균 2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고 한다. 류영모는 이 연경반에서 기독교의 성경뿐 아니라, 유불선의 경전들즉 동양의 고전들도 강의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와 유불선의 종교적 가르침들과의 조화 속에서, 즉 기독교를 그 자체에 의해서만 이해하지 않고, 동양의 지혜를 통해서 이해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류영모는 1959년에 영경반에서 <노자>를 강의 했고 같은 해에 불교의 중요 경전인 <반야심경>을 강의하였다. 박재순 교수는 다석의 불교에 대한 친밀성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석은 공(空) 사상에 기초해서 만물을 공으로 보고 하느님의 본성도 공으로 보았다. 그는 23세 때부터 빔(空)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늘 빈탕한테를 말한 것도 불교적이고, 해혼 후 하루 한 끼 먹은 것도 금욕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모든 집착과 욕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는 것은 불교의 해탈을 추구한 것이다. 날마다 무릎 꿇고 앉아서 생각과 명상에 잠긴 것은 불교의 선(禪)을 수행한 것이다,...사람 노릇을 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했고 불교를 모르고는 이 세상을 바로 살 수 없다고도 했다. 다석은 자주 예수와 석가를 나란히 언급했다. 다석은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인 불성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보았고, 하느님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기독교와 불교를 연결시켰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pp. 313-314)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단순히 기독교와 불교(특히 선불교)의 대화나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 두 종교를 한 생명인 자신의 삶으로 직접 실천한,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의 창조적 일치를 실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보고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불타가 따로 있지 않고 둘이 진리의 스승으로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스승인 점에서 그 두 분은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통찰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류영모의 이러한 통섭의 정신은 바로 우리 한국인의 고유 철학인 “한사상”(韓思想) 즉 일즉다(一卽多)의 궁극적 조화와 일치의 원리인 “한사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참조, 류기종, 기독교와 동양사상, 황소와 소나무, pp. 12-37)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류염모는 인간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양측의 입장을 함께 종합해서 본 듯하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현존재를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에 의한 원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성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깃드려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불교는 인간이해의 핵심으로서 탐(貪,탐욕), 진(瞋,분노/시기/질투/미움), 치(痴,무지/어리석음/치정-성적충동) 3독을 보편적 성질로 이해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탐진치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나 생물들의 삶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이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탐진치 3독의 내재성으로 보는 불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죄성(롬1:29-3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에 대한 진술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동물적 요소인 탐진치의 속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참조, 박영호 풀이, 다석 류영모 명상록, 두레, pp. 472 이하).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 인간이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참 자유인 즉 진리를 깨달아서 참 자유함을 얻은(요8:32) “얼나” 곧 영적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3독을 제거하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류영모의 인간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가 함께 공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친밀성(공통점) 이해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바로 불교의 공(空/빔/없음)과 기독교의 하나님(하느님/한님/한얼)을 그 근본(본질)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어떤 의미로는 동일한 내용(개념)으로 이해한 점이다. 류영모에 따르면 허공(空)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순수하고/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하공을 알고 허공을 존중하여 맘에 품고 살 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와 인간의 바탕이 허공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석이 공 혹은 허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물의 근거로 본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류영모는 공(空)을 참된 실재로 보는 불교의 공의 철학 곧 공의 신비와 의미를 깊이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공)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내가 아버지(하나님) 안에 아버지(하나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여, 석가의 공 이해와 예수의 하나님(아버지) 이해를 대비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류영모는 이 “빔”(공/허공)을 최고로 높고 밝고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즉 류영모는 공 혹은 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령한 허공을 하느님으로 이해했으며, 허공, 마음(얼) 혹은 영(靈), 절대자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허공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그는 허공과 하나로 되어 하늘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물질과 허공을 하나로 보는 공색일여(空色一如)의 자유함을 얻는 다고 하였다. 그러나 류영모는 공(허공)을 참된 실재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라 이해하면서도 불경에 하나님이란 말이 없음을 못내 아쉽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의 저변에 기독교의 신관과 함께 한국인의 고유 종교성인 하느님 신앙이 흐르고 있음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참조, 박재순, 앞의 책, pp. 316-319)




요컨대, 류영모가 이해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의 욕심(3독)을 뽑아내서 “빔”에 이르러 공색일여(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진리를 깨달음에서 오는 참 자유 곧 궁극적인 자유(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다석이 허공을 진리 곧 참 실재로, 만물의 바탕으로 본 것은 불교의 중심 진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공(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은 불교의 기독교적 이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점에서도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조화와 통섭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얼나”의 현시자로서의 불타와 그리스도>: 류영모의 사상에서 또 하나의 독특한 개념은 “얼나”의 개념이다. “얼나”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인 “제나”(selfish ego) 즉 인간의 죄성인 탐진치 3독을 제거하지 못한 인간에서 “빔”(공)의 진리를 깨우쳐서 신의 본성인 "빔"(空性)과 하나가 된 영원한 자아, 즉 시공을 초월하는 공한 마음(空心)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참 자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삶의 목표는 바로 이 동물성(獸性) 곧 죄성으로 인하여 죽어 없어질 존재인 “제나”(육적인 자아 곧 땅의 존재)에서 영원한 생명과 광채를 지닌 “얼나”(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제나”가 “얼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나”가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이 제나의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다. 류영모에 있어서 완전한 자기부정의 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타(불교)의 진각(眞覺)에 이르는 4대 진리인 고집멸도(苦執滅道)의 완성/성취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얼나”는 득도 진각을 이룬 초월적 자아 곧 영적인 자아(enlightened/spiritualized self)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불타와 그리스도는 둘 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인류에게 득도 해탈의 길 곧 구원의 길을 제시해준 위대한 참 스승이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진인(眞人) 곧 “얼나”의 모형이다. 그런 점에서 불타와 그리스도는 이 “얼나”의 현시자요 화신(incarnation)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불타는 공(빔)의 진리와 또한 공과 만물이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모든 집착과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해탈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그리스도는 참 빔(참 실재)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길,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죽음까지도 포함된 모든 속박과 억매임으로부터 완전히 놓임 받는 참 자유함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에게는 불타와 그리스도 두 구원자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실은 이 둘은 하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타와 그리스도 두 분이 다 참 "빔"(공/허심/태일太一/하나님/궁극적 실재)과 하나가 됨으로써, 즉 “빔의 신비"(mystery of emptiness) 곧 “없이 있으며 참으로 있음”의 신비를 깨달음으로써, 궁극적 자유함(해탈)인 구원에 이르는 길(진리)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에 있어서 불타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태극의 음양 리기의 관계처럼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의 관계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류영모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와 만남을 넘어서 두 종교의 아름다운 조화와 상보관계를 실현한 독보적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류영모는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시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에 있어서 두 종교의 관계를 류영모 처럼 깊이 통찰한 사람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맺는말>: 이상에서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크게 기여한 즉 두 종교 간의 대화의 개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았는데, 필자는 그들 중에서 우리 한국의 기인(奇人) 다석 류영모의 방법이 가장 탁월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두 종교의 대화를 넘어서서, 양 종교를 친밀한 형제와 친구의 관계로 즉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이 꼭 필요한 (태극의 음양과 리기의 관계처럼) 필수적 동반자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독교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불교를 필요로(알아야)하고, 또한 불교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필요로(알아야) 하는 상보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류영모는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이해와 대화에 있어서 최대의 공헌자로 평가되리하고 사료된다.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요약) [새창] 류기종 2010-06-20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7) - 류영모 [새창] 류기종 2010-06-13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5) - D. T, Suzuki [새창] 류기종 2010-05-30
[류기종의 영성강좌] 한국신학 소고(溯考): 한국신학의 과거, 현재, 미래 [새창] 류기종 2010-04-28
[류기종의 영성강좌]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1) [새창] 류기종 201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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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요약)
류기종 | rkchg@hanmail.net
2010년 06월 20일 (일) 16:42:46 [조회수 : 3801]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과정사상과 영성적 관점에 본-

이 글은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와 상호이해에 크게 기여한 사상가들의 중심사상을 고찰해 봄으로써 두 종교 간의 사상적 연대성과 협력방안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불교와 기독교를 지구상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된 합리적 지적 체계를 지닌 종교라고 보았는데, 그러나 두 종교가 서로 문을 닫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으므로 해서 현재 쇠퇴의 과정에 들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한편 역사가 Arnold Toynbee는 20세기에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의 닫힌 문을 열고 대화를 시작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오늘에 와서는 동서의 많은 철학자/종교가 및 신학자들이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문제를 중요 이슈로 다루고 있는 실정에 있다.

한국사회의 종교적 사항과 특수성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불선 3대 종교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가 양대 종교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종교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녔으면서도 전혀 대화의 챈널을 찾지 못한 체 기름과 물처럼 높은 담이 그어져 있다.

1. 로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물고를 터준 사람은 독일의 신학자며 종교철학자인 옷토이다. 그는 1910-11년의 2년에 걸쳐서 북아프리카, 이짚트, 팔레스타인을 거처 서 인도와 중국과 일본까지를 방문하여 동양의 종교와 사상들을 접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1917년에 <성스러움/Das Heilige-영역 the Idea of the Holy>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경험과 직관의 공통적 요소를 언급하였다.

1). 옷토는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방법과 경험(mysticism) 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고했다..
옷토에 따르면, 신비체험은 거룩함/신/전적타자/초월적 실재(numen)에에 대한 체험/인식으로서 (1)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tremendum majestorum)과
(2)심히 매혹적인 황홀한 경험(tremendum fasinosum) 을 동반한다.
2). 동양 종교(불교)의 공(空/Sunyata) 체험과 서양종교(기독교)의 신神 체험은 공히 절대타자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계 혹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경험(혹은 깨달음)의 표현들이다. 이로써 옷토는 신비주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2.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화이트헤드는 런던대학에서 은퇴하고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로 옮겨온 그 다음해인 1926년에 과정사상의 종교이해의 기초가 되는 책 <종교의 형성/Religion in the Making>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종교란 처음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의식(우주관)의 고양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도의 지적/합리적인 종교로 발전해 왔는데, 그 과정에는 여리 지역의 문화(종교, 철학, 윤리체계)들의 교합작용(mutual assimilation)을 통해서 발전해왔으며, 지금도 그 작용은 진행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 기독교와 불교는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진화된 최고의 합리적 종교이다.
2) 불교는 종교의 기능/역할을 하는 형이상학 즉 철학적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종교이다(불교는 응용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례이다)
3) 불타와 그리스도는 둘 다 깊은 영성체험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교는 악의 문제를 형이상 학적 원리로 해결하려 하는데 반해서 기독교는 선한 행위로 악을 극복하려 한다. .
4) 두 종교는 현재 쇠퇴의 과정에 들어있는데, 그 이유는 두 종교가 각기 상대방에게서 더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자만과 자신의 사유의 틀 속에 안주하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사상 중 불교의 사상과 유사한 개념들은 다음 셋으로 요약된다:
1)신의 존재를 무한한 잠재성(absolute wealth of unlimited potentialities)의 세계로 보아 불교의 공사상과 유비되는 점(그 본질은 언어나 개념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2)모든 현상들이 잠정으로 발생했다 살아지는 계기적 존재들로서, 또한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의 자료와 원인이 되는 점(인과관계)을 들어, 사물의 비실체성(non-substance)을 말함으로써 불교의 연기설과 비자성성(제행무상/제법무아)과 유비되는 점을 들 수 있다.
3)신(제일 본성)과 우주(제이 본성)는 한 실재의 양면의 관계이다(색즉시공/공즉시색)

3. 다이세츠 스즈키(D.T. Suzuki, 1870-1966)

일본의 경도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다로(1870-1947)의 친구이자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는 대승불교 특히 일본의 선불교를 서방세계에 알린 인물이며, 또한 동서의 철학/종교 사상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1957년에 발표한 <기독교와 불교의 신비주의/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m> 라는 책을 통해서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접근성과 상호교류의 가능성을 피력하였다. 스즈키는 기독교의 많은 영성가/신비가들 중에서 특히 14세기의 독일의 신비가 Meister Eckhart의 사상에서 선불교의 방법과 너무도 일치하는 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에크할트는 神(God)과 神性(Godhead)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성”은 모든 언어적 표현과 어떠한 상대적인 개념으로도 설명 불가능하며, 또한 거기에는 어떠한 행위(action/motion)도 부재한 절대 태허의 세계를 지칭한다. 따라서 스즈키는 에크할트의 “신성”의 개념은 선불교의 “절대무”의 개념과 너무나 가까운 개념으로서, 그는 에크할트가 기독교인지 선불교인이지 분하기 곤란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신비가들이나 영성가들의 방법이 선불교와의 대화에 중요한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우린 사람은 폴 틸리히이다. 그는 기독교의 인격주의적 신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존재론적인 신관으로 바꾸었다. 그에 따르면 신은 모든 존재들 중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존재 가능케 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지칭한다. 그래서 그는 신을 "존재 자체"(Being-itself), "존재의 근거" (Ground of being), “존재의 심연”(Abyss of being) 등으로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체로서의 신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있다 없다” 란 어떠한 상대적인 존재론적 개념이나 언어로도 설명하기 블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최상급의 개념이나 언어로 표현해도 그것은 신의 절대성을 훼손하거나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신에 대한 모든 표현들은 상징에 불과하다.(예를 들면, 아버지, 왕, 심판자, 구원자 등등). 틸리히의 신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틸리히는 1960년에 8주간에 걸친 일본 방문을 통하여 스즈키 박사를 비롯하여 불교학자 및 선승들과 신토교의 지도자들과 교제면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60년에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이란 책을 저술했으며, 거기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문제를 심도있게 취급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의 특색 및 큰 차이점은 기독교의 인격주의적 성향과 불교의 비인격주의적 성향을 들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의 신비주의자들에서 초인격주의적 색체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하고, 동시에 기독교 역사 속에는 불교의 “절대무”를 지칭하거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개념들이 다분히 있음을 언급했다. 이로서 신비주의가 양 종교의 공통성/접촉점임을 알수있다.

5.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1916-1968)

20세기 사막의 교부라 불리는 머턴은 1941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어렵게 얻은 뉴욕의 한 대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 켄터키 주에 있는 엄률수도원(Trappist Monastry)에 들어가 일생도안 명상과 수도생활을 하며,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는 한편, 전쟁과 폭력의 근절/평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종교간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선불교와의 대화와 상호교섭의 문제를 숙고했다. 머턴은 스즈키 박사와 틱낫한과의 교제를 두텁게 가지면서, 장자의 도사상과 선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기독교)신비가와 선의 대가들> 그리고 <장자의 도>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영성수행의 경험을 통하여 기독교 신비가들의 영적 수행의 방법과 선불교의 수행의 방법이 근본에 있어서 다른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선불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선불교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6세기)에 인도의 달마 대사에 의해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후에 중국의 도가 사상과 결합하여 동북아 지역의 토착불교로 발전하여, 중국, 한국,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선불교의 근본정신은 불입문자, 교외별 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로 요약된다. 중국의 선불교는 일대조 달마를 필두로 혜가, 승찬, 도신을 거쳐 5대조 홍인에 이르러, 6대조를 뽑는 과정에서 혜능의 선시가 신수의 것을 능가하여 혜능이 6대조로 피택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머턴은 선(Zen)은 추상적인 형이상학도, 신학/철학도, 이론적인 명제도 아니며, 의식과 앎의 굴레(속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행위로서 “구체적인 살아있는 존재론”라고 정의내렸으며, 이러한 방법은 기독교 영성가/신비가들이 추구하던 방법들과 매우 유사 내지 일치함을 발견했다. 머턴은 불교와의 접촉없이 기독교를 잘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불교의 조명 없이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잘 설명하기란 불가능할 것임을 피력하기도 했다. 머턴은 기독교 영성가로서 선불교에 매료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6. 류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多夕) 류영모는 한 평범한 과학도로 시작하여, 동서의 종교 사상들에 대한 부단한 연구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하여, 세계(인류)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불.선.기(기독교)의 상호 회통과 창조적 조화에 의한 웅대한 영성적 고봉을 이룩해 낸 특이한 인물이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16세의 소년시절에 기독교를 접한 후 신앙인의 삶을 견지하면서도 그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고, 한국의 전통종교들과 특히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는 구도자의 길/삶을 살았다. 그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을 맞게 되었으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했다. 거기서는 기독교의 성경만이 아니라, 동서의 고전들도 강의했는데, 1959년에는 <노자>를 강의 했고, 같은 해에 <반야심경>을 강의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 한시 형식으로 일기처럼 쓰여졌는데, 그의 제자들 중 하나로 연경반에 참여했던 박영호씨에 의하여 풀이되어 <다석전집>으로 출판되었다.

1) 공(空)과 하느님: 공(빔)과 하느님은 참(영적/궁극적/영원한) 실재를 지칭한다
류영모는 불교의 공(空)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한 내용으로 이해했다.그에 따르면 공(허공/빔/하늘)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공/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인간이 공/허공을 알고 마음에 품고 살 때 진실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이 내맘 안에, 내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하느님(아버지)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아버지) 안에 있음과 그 둘은 그 근본/본질에 있어 하나/같음을 깨달았다고 보았다. 이것을 깨달음이 참 깨침이다.

2)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다석은 인간의 고통/불행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성(동물성)인 탐진치 3독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불행/타락의 원인을 교만과 탐욕/이기심에 근거한 죄성에 의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 인간이해에 대비된다.

3) 제나(selfish Ego)와 얼나(spiritual/enlightened Ego)
제나는 공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탐진치 3독을 버리지 못한 옛 인간, 옛 자아, 이기적 자아를 물적/육적인 자아를 지칭힌다. 반면에 공과 무상/무아의 진리를 깨닫고 탐진치 3독에서 해방된 자아를 얼나, 즉 영적인 자아, 득도 해탈 즉 참 깨침에 이른 자아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 수행의 최종 목표는 제나에서 얼나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은 존재가 되는 일이다.

4) 얼나의 현시자로서의 불타와 그리스도
류영모에 따르면 불타와 그리스도는 진정한/완전한 “얼나”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또한 얼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알려준 지고한 스승/현자들이며, 따라서 참 얼나의 현시자들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들의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통해서 “얼나”로 태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류염모에 있어서는 불타와 그리스도는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요컨대 류영모는 동양종교 특히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동양의 종교들과 특히 불교를 이해한 특이한 모델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재 활동 중인 인물들: 아베 마사오, 한스 발덴펠스, 틱낫한, J. Hick, Marcus Borg 등.

결론: 불교와 기독교의 깊은 대화를 통한 두 종교의 접근과 제휴 및 융합의 가능성 모색

(1) 기독교와 불교를 친밀한 형제 종교로 만드는 일, 그래서 기독교적 불교도/불교적 기독교도(Christian Buddhist/Buddhist Christian)의 길을 가능케 함(류영모 모델),
(2) 여기에 유교와 도교 및 한국의 고유종교들을 융합하고 또한 유대교의 카발라, 이스람의 수피즘, 힌두교의 아드바이티즘(不二학파)도 포함시켜서 범세계영성종교(Universal Spiritual Religion)를 탄생시키는 일(한국의 고유철학인 한(韓)사상의 일즉다의 원리를 적용해서). 이것은 곧 종교간의 담을 헐고 전인류의 평화실현이란 큰 목표를 위해서 종교들이 긴밀히 협력/교류/ 연대함을 의미한다.

한국이란 나라에 일찍이 유불선이 들어왔고 근대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와 현재 불교와 기독교가 양대 종교로 자리하게 된 것은 이들의 영성을 융합하고 고양시켜서 범우주적인(전인류를 포괄하는) 영성적 종교를 탄생시키라는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사료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의 평화실현의 가장 중요하고 바람직한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몸(유기체/생명체)으로 보는 과정사상과 영성주의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곧 만유/만인을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 하나님 신앙과 사도 바울의 만유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신앙(롬11:36, 엡4:6)의 귀결이 아닐까 사료된다.







기독교의 사랑(agape)과 불교의 자비(karuna)의 비교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아가페 "사랑"과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한 이 두 개념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공통점이란 자기 사랑이 아닌 철저한 "이타성"과 사랑의 대상에 대한 "무조건성"( unconditionality)과 "무제한성"(unlimitedness), 그리고 그 힘의 "강렬함" (intensity)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마음에 근거하고, 불교의 자비는 불타의 마음과 깨달음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하나님 및 그리스도의 마음과 불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하시려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를 아낌없이 주는 자기 희생적 사랑의 마음이고, 불타의 마음은 색계(현상세계)와 공계(본질세계)의 동일성 즉 불이(non-difference)의 진리인 "연기의 법측"을 간파한 무한한 지혜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서, 만인을 무지와 고통으로부터 제도(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인 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과 불교의 자비인 불타의 마음은 다 같이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란 외연적인 공통점/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1-2) - 당당뉴스




한국이 낳은 진인(眞人) 류영모의 생애와 영성 (1)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1년 03월 27일 (일) 14:08:35

한국이 낳은 진인(眞人) 류영모의 생애와 영성 (1)



▲ 다석 류영모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경인년 음력 2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냈다. 아버지 류명근은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모친 김완전은 정동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두 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류영모가 16세(만15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인지 5년 후의 일이었다. 류영모는 어릴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통감과 맹자를 배웠다. 신식 학교가 생기자 서울에 있는 수하보통학교를 거쳐서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기독교계 학교인 경신학교에 들어간 데는 사연이 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후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차에, 15세의 소년 류영모는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종료에 있는 YMCA를 드나들었다. 거기서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연설을 듣고 감동되어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경신학교와 관계가 있는 연동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가 경신학교 졸업반에 있을 때, 남강 이승훈의 부름을 받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신학교 교사로 부임되어 갔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0살이 되던 해였다.

류영모가 오산학교 교사로 갔을 때 그곳에는 여준, 신채호, 윤기섭, 이광수 등이 교사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독실한 신자였던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전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당시 교장이던 남강 이승훈도 기독교 신자가 되어, 후에 3.1 운동 33인 가운데 기독교 측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3.1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산파역 중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산학교 재직 중 류영모에게는 사상적인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그는 거기서 톨스토이, 노자, 불경 등을 접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교회의 전통신앙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영성적 종교/신앙을 추구하게 되었다.

류영모는 대학에 진학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물리학교에서 과학(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거기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버렸다. 그때 그의 심경의 큰 변화를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톨스토이의 사상적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귀국한 후 류영모는 김효정과 결혼하여 슬하에 삼남 일녀를 두었고, 자신은 부친의 사업(피혁업)을 도우면서 당대의 천재들이라고 불리던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등과 교우하면서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지>에 종종 기고하였다.

그후 류영모는 3.1운동으로 인해 폐허되었던 오산학교가 재건되면서 일제에 의해 쫓겨난 고당 조만식 교장에 이어 오산하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인준을 거부하는 바람에 일년 반 만에 물러나야 했다. 이로 인해 류영모는 마음의 아픔을 겪었지만 당시 그 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함석헌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후로 함석헌은 불과 11년 연상의 류영모를 평생 동안 큰 스승으로 존경하고 극진히 모셨다.

서울에 온 류영모는 YMCA 총무 현동완의 간청으로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硏經班)을 맡게 되었다. 이 강의는 1928년부터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되었으며, 함석헌, 김흥호, 서영훈, 류승국, 박영호 등도 참석하였다. 여기서는 성경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이 많이 강의되었으며, 동양의 고전/경전들 즉 도덕경, 반야심경, 금강경, 논어, 중용 등의 내용도 다루어졌다. 한편 류영모는 일본의 우찌무라(內村)에게 영향 받은 김교신, 송두용 등 성서조선지 동인들과 사귀면서 그 모임에도 종종 참석했으며, 성서조선지에 기고도 하였다. 그리고 성서조선사건 때는 함석헌, 김교신, 송두용, 류달영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57일간)도 하였다. 그런 중에도 때때로 광주(빗고을)에 있는 한국의 토착 수도원이라 할 수 있는 동광원에 내려가 말씀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도 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류영모는 아버지의 반대로 농촌생활을 못하였으나, 부친의 상을 벗은 후 북한산 비봉 아래에서 과수원 농사도 하였다. 그 후 구기동 산자락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계속 생활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일 일식의 금욕생활을 하며 아내와는 해혼(解婚)을 선언하고 잣나무 판자 위에서 혼자서 자며 깊은 사색과 명상의 수도생활을 영위했다. 이것은 류영모가 고대 이집트의 수도사들이나 성안토니와 같은 사막의 수도자의 금욕적 영성생활을 몸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6년 4월 26일에 생애를 마친다고 일년 앞서 선언하고,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30년 동안 쓴 것이 다석일지(多夕日誌)이다. 그것이 그가 남긴 유일한 유저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주목할 일은 류영모는 그의 일지나 강좌에 있어서 깊은 종교적/철학적 사상들을 순수 우리 말 한글로 풀이하여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생전에 노자, 중용, 금강경, 반야심경, 천부경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그 중 일부는 김흥호 씨와 박영호 씨에 의해 정리 출판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류영모는 1981년 2월 3일 33200일을 살고 91세의 나이로 특별한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 특히 함석헌 김흥호 류달영 박영호 박재순 제씨에 의해 그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최근(1998년)에는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강의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특별한 티를 내지 않고 보통사람으로 살았으나 그를 가까이서 보고 따르건 사람들은 그를 보통 사람이 아닌 큰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심지어 한국 땅에 보낸 공자나 노자와 같은 진인(眞人) 혹은 성인(聖人)으로 느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살았지만, 전통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및 한국의 고유종교사상까지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상호 조명 내지 통섭하여 웅대한 통전적/우주적 영성으로 승화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한국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요 또한 심오한 영성(사상)을 지닌 탁월한 영성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인상에 대해 박영호씨의 형 박인호씨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분장되지 않은 예수, 석가, 공자의 본 모습을 알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그 런데 다석 류영모 선생의 모습을 뵙고는 옛 성자들의 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초라하리만큼 소박한 생활, 송구하리만큼 겸손한 태도, 천진하리만큼 순수한 마음,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번쩍이는 지혜를 느꼈다."(박영호 엮음, 다석 유영모, 100쪽)

끝으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즉 류영모는 과연 그리스도 신앙인이었나 하는 질문이다. 어떤 이가 예수, 석가, 공자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류영모는 그런 비교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고는, 객관적으로 서열을 매길 수은 없지만 주관적으로 누구를 더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에게도 의중 인물이 있다고 했으며, 내가 잘못하였을 때 내게 잘하라고 책망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나의 의중지인(意中之人)인데, 그가 바로 자신의 참 스승인 예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자신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아무리 유불선 등 여려 종교 사상들을 섭렵하고 그들 속에 깊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의 심중 깊은 곳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교회 지도자들은 다석 류영모에게서 참 종교인의 바른 자세와 영성적 삶의 모범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먼 과거의 사람들이 만든 "교리"(dogma)와 문자주의라는 틀 속에 갇혀서 생명이 깜박거리고 있는 종교 혹은 교회를 살려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한 그에게서 성경의 심오한 진리들을 깊이 탐구하고 해석해 내는 영적 통찰력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성경 속에 담긴 깊은 사상과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로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바로 오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사료된다. <계속>


▲ 류기종 박사


인봉 (211.232.208.151)

2011-03-28 15:41:12




오늘날 한국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 체제 내에서 다석선생을 되돌아보고 공부하며 학이시습의 즐거움을 반추할 수 있는 인사가 있다는 것이 반갑고 놀랍군요?

앞으로의 글이 무엇을 말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할 것입니다. 건필을 기도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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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2) - 당당뉴스




> 영성 > 류기종의 영성강좌

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2)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1년 04월 03일 (일) 16:13:21
최종편집 : 2011년 04월 05일 (화) 16:52:05 [조회수 : 3042]







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2)

다석 류영모의 <중심 사상>



1. 하나님 곧 일자(一者)와 귀일(歸一) 사상

▲ 류기종 박사


다석은 하나님을 태일(太一)이라고 불렀다. 태일은 곧 궁극적 일자(the Ultimate One)라는 뜻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궁극적 실재로서의 일자(一者) 혹은 절대자로서, 만유와 모든 인간은 이 궁극적 일자(한아님/한얼님)에 힘입어 살고(존재하고)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모시고 위로 하나를 향해 올라가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궁극적 일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귀일 철학사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상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엡4:6, 롬11:36).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궁극적 하나(일자)이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the whole)가 하나님이다. 궁극적 하나로서의 하나님은 만유를 자신 안에 포함하며 또한 만유는 하나님 안에서 노닌다. 여기서 우리는 다석의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과 우주만물과의 관계를 일즉다(一卽多)의 관계로 이해한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범재신론적 신관 및 우주관의 색채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류영모에 따르면 이 궁극적 일자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 인간들에 대해서는 없는 상태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비적 존재로서의 얼(靈)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얼은 보이는 실체가 아니며 어떤 모양도 지니지 않기에 무(無)와 같은 존재이다. 즉 하나님은 텅 빈 허공과 같이 없이 계시는 분이이시다. 아마도 다석은 불교의 궁극적 실재로서의 절대무(絶對無) 혹은 공사상(空思想)의 원리를 깊이 파악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류영모는 하나님을 장횡거(張橫渠)가 말한 태허(太虛)로도 표현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은 본디 이름이 없다. 하느님에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우리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살며, 또한 얼나(영적인 존재)로 거듭나서 이 근원적인 궁극적 일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임을 거듭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그 길을 바로 알려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가 이해한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반대로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초인격적인 실재(하나님)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가온찍기

다석은 55년 9월 22일 일지에서 “가온찍기”란 뜻을 지닌 말로서 “직상일점심”(直上一點心, 마음에 한 점을 찍고 곧장 위로 오른다) 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 이후로 그는 이 "가온찍기"([.])란 뜻을 나타내는 말을 여러 형태로 설명하였다. 우선 가온이란 말은 하늘과 땅의 중심 즉 모든 시간(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원)과 공간의 중심을 나타낸다. 고로 “가온찍기”란 하늘과 땅 즉 모든 시간과 공간과 영원의 한 복판/중심에 한 점을 찍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가온찍기"란 자신의 존재의 중심과 또한 우주(만물의) 중심을 정확히 맞추어서 저 무한/영원의 세계로 직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류영모의 "가온찍기"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또한 우주만물의 생성 변화의 깊은 이치 곧 존재의 신비(mysteries of beings/existences)를 올바로 깨닫는 견성(見性) 혹은 대각(大覺)의 순간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가온찍기"는 우리 인간의 큰 깨달음의 순간 즉 붓다의 정각(正覺) 혹은 영성가들의 영적 대각성(spiritual enlightenment)의 순간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류영모는 "가온찍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히듯이
곧이곧고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
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긋
(끝)이 나타난 것이다.... 가고 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 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딱 찍는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곧이 곧 가온찍기"[.]"가 인생의 핵심이다. 그러나 깨닫는
가온찍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끝끝 내내 표현해보고 또 표현해보고
나타내보고 또 나타내보여야 한다. 내가 내 속알을 그려보고 내가 참나를
만나보는 것이 끝끝 내내이다.(다석어록, 박영호 편, 홍익재간, 31쪽)


3, 얼나와 제나

다석 류영모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얼나"라는 개념일 것이다. 류영모에 따르면 얼(靈/Pneuma/신성)은 영적 생명 혹은 성령 혹은 진리을 지칭한다. 따라서 제나(selfish ego) 혹은 몸나(bodily person)는 인간의 죄성인 탐진치를 완전히 벗지 못한 인간 곧 육적인 사람 혹은 자연인을 의미하며, 얼나는 진리를 완전히 깨친 사람으로서 득도견성(得道見性)한 사람 즉 영적인 사람(spiritual person)을 지칭한다. 따라서 얼나는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진리를 깨친 사람 곧 진리를 깨침으로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온전한 자유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얼나는 영인靈人) 곧 영적인 사람, 진인(眞人) 곧 진리를 소유한 사람, 도인(道人) 곧 도(道)와 하나가 된 사람, 법인(法人) 곧 무상정등정각(正覺)을 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석가는 진정한 의미의 "얼나"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류영모는 이 얼나의 개념을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류영모에 따르면 얼(靈)은 개체가 아니라, 전체이며, 무소부재며,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얼 혹은 얼나(신 혹은 신성)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신성 혹은 불성인 얼 혹은 얼나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나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제나가 죽고 없어질 때, 철저히 회개/회심하고 새로 태어날 때 "얼나"가 탄생하게 된다. 다석은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여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말한 나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한 나,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한 "나"는 바로 지연인/육신의 예수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의 "얼나"를 칭한다고 말했다. 다석은 얼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의 의미란 내가 깨달은 얼나로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얼나)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얼나는 죽
지 않는 생명이기에 이 몸은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밥 먹고 똥누고 하
는 일을 얼마나 더 보자고 애쓰는 일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얼나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것이지 참 나인 얼(얼나)은 죽는 것이 아닙니
다. 죽음이란 이 몸이 퍽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는 영원한 것입니다.


4.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원죄)

류염모는 특히 인간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의 양측의 입장을 함께 종합해서 본 듯하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현존재를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에 의한 원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성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깃드려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불교는 인간이해의 핵심으로서 탐(貪,탐욕), 진(瞋,분노/시기/질투/미움), 치(痴,무지/어리석음/성적충동) 3독을 보편적 성질로 이해한다. 이 탐진치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나 생물들의 삶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류영모는 이 탐진치의 속성을 동물의 속성 곧 수성(獸性)이라고 말하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즉 도덕적인 존재로 혹은 영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이 수성인 탐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탐진치 3독의 내재성으로 보는 불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죄성(롬1:29-3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분쟁, 악독, 수군거림,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 등)에 대한 진술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동물적 요소인 탐진치의 속성 혹은 죄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류영모는 말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 인간이 참 자유인 즉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참사람 곧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인 '얼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 3독(죄성)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자유함을 얻는 일이 바로 제나 혹은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 삼독(죄성)을 극복하는 일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각자의 믿음(하느님에 대한 충신(忠信)과 깨달음 및 자신의 영적 정진을 통해서 이룩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종교(신앙)가 있고 경전이 있고 철학이 있고 도덕이 있고 과학이 있는 것이다. 류영모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와 불교는 이 탐진치(죄성)의 극복을 위한 최고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5. 씨알과 하느님의 아들

"얼나"의 개념과 함께 다석 류영모 사상의 가장 독특한 것의 하나는 그의 "씨알"사상이다. 류영모의 씨알 사상은 요한 일서3장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알)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의 말씀에 기초한 듯하다. 류영모는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요한일서의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예수 자신의 말씀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6)란 말씀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다. 둘 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과 영(성령)으로 났다는 공통성이 있다.

따라서 씨알이란 육적인 나에서 영적인 나로 솟난(승화된) 인간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인간의 자연적 상태(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씨알의 원형은 바로 전적으로 위로부터 난자 곧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하느님께로부터 옹글게 혹은 전적으로 난자가 바로 하나님의 동생자이다. 따라서 내 속에 와 있는 얼인 하느님의 아들(로고스 혹은 영적 생명)이 바로 내속의 하나님의 씨알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하나님의 씨 혹은 씨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알인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 것이다. 위로
거듭날 생각을 안 하니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
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 이 몸이 죽지 않는다거나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 난 생명(얼나)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 게 멸망이 아니다. 벗어
질게 벗어지고 멸망할 게 멸망하고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자란다. 거듭난 생명
의 씨알로서 위로 나야 그게 사람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얼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의 새끼다.(박영호 편, 동
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 도서출판 무애, 369쪽 이하)

류영모는 그의 씨알사상을 농사짓고 일해서 먹고 사는 모든 평민들에게도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 혹은 민주(民主)라는 말을 "씨알님"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어 썼다. 따라서 "위로 머리 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다. 모든 사람은 거듭날 생명의 씨(알)로 위로 솟나(거듭나)야 한다. 그게 바로 사람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에게는 민(民)이 씨알이고 주(主)로 받들어야 할 님들이다. 따라서 백성인 씨알님(民主)을 잘 받드는 것이 민주정치라고 하였다. 그래서 "씨알을 위함이 곧 하나님을 위함이다. 이 소자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씨알을 모른다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함도,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이 씨알 사상은 후에 그의 제자인 함석헌에 의해서 민중 신학의 중요개념의 하나인 "씨알철학" 사상으로 옮겨져서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와 운동의 중요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씨알사상의 뿌리는 바로 다석 류영모에게서 나온 것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the Seed of God)란 말(요일3:9)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 기독교와 동양 종교들과의 만남

류영모는 그의 신앙생활의 초기 특히 그의 오산학교 교사 시절에는 열정적인 십자가 신앙의 소유자여서 그의 영향으로 교장 이승훈을 비롯하여 학교 전체가 기독교학교로 발전하였고, 거기에서 주기철, 한경직, 김주항, 함석헌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오산학교를 떠나오면서 그는 톨스토이의 탈 전통신앙의 영향과 함께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양의 종교들의 경전들을 접하고 또한 그들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의 신앙은 점차 그들을 통섭(通涉)하는 통전적(統全的) 영성으로 승화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류영모는 특히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깊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류영모가 이해한 기독교와 불교의 친밀성 혹은 공통점의 가장 중요한 점은 불교의 공(空/빔/없음)과 기독교의 하나님(靈/하느님/한얼님)을 그 근본(본질)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어떤 의미로는 동일한 진리를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본 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빔(Emptiness) 속에 계시는 분" 혹은 "없이 계시는 분"이라는 말을 지주 했다. 이 말은 고대 기독교 신비가(영성가)들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앎의 한계를 전적으로 넘어서는 절대초월의 "궁극적 실재"(Absolute Reality) 혹은 "캄캄한 어둠 속에 계시는 하나님"(God in Darkness) 사상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빔" 곧 공(空) 혹은 허공은 지순(至純/ultimate purity)의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순수하고/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허공(빔)을 알고 허공(빔)을 존중하여 맘에 품고 살 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다석이 아무리 유불선 등 동양의 전통 종교 사상들 속에 깊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다원주의적 입장으로 흐르거나 또는 종교 혼합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해한 하나님 아버지 신앙 곧 만인과 만유를 하나님의 한 부분(씨알들)처럼 차별 없이 대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신앙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석은 늘 (하나님을) 아버지(아버디) 아버지(아버디)라고 불렀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고 그 분을 위로(존귀히) 모시고 살며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서 잠시적인/물질적인 세상에 함몰되지 말고 참사람 곧 영적인 사람 즉 "얼나"로 거듭나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살 것을 강조했다.

다석 류영모의 신앙(영성) 혹은 그의 종교적 입장에 관해 그의 사상적 제자인 박영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는 공가가 못한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유친(父子有親)을 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야 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석가는 하나님 아버지를 입에 올리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류영모는 크리스천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박영호의 이 표현은 다석이 동양의 전통종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 사상에 깊이 침전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큰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나오는 말:

▲ 다석 류영모


다석은 신학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또한 목사나 장로와 같은 교회의 직분자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한 평신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깊은 (영성적인) 사상들이 나올 수 있을까? 필자는 그의 사상은 바로 그의 진지한 수도사적인 영성적인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의 깊은 사상과 영성이 그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의 가정을 통해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가정이 곧 한 수도원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일생은 한 가정에서 행해졌으나 그의 삶은 고대 이집트나 시리아의 수도사들의 삶과 같이 (동양의 고전/경전들과 함께)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와 병행하여 지속적인 깊은 사색과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호 다석(多夕)은 바로 깊은 사색과 명상(기도)에 대한 그의 강한 애호(愛好)를 나타고 있다. 그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상사(相思) 혹은 영적인 밀애(密愛) 행위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삶은 곧 연속적인 기도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의 영성은 바로 그의 지속인 기도(영적 혹은 신비적 사색)의 산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석은 진정한 의미의 탁월한 영성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필자는 서구 기독교의 영성가들 즉 고대교회의 영성가들인 이레니우스와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비롯해서 버나드와 마이스터 엑크할트 같은 중세교회의 영성과 루터와 칼빈을 중심한 종교 교개혁자들의 영성 및 근대 경건주의자들의 영성 그리고 토마스 머턴이나 샤르댕과 같은 현대의 영성가들에 이르기 까지 주로 서구 기독교의 영성가들의 중심사상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영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들을 접하고 큰 감명(환희)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류영모의 영성 곧 그의 삶과 사상이 서구교회의 어느 뛰어난 영성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심오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으며 또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그의 영성(사상)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널리 알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세계교회가 주목하는 큰 교회들이 있으나 세계에 내놓을만한 신학(특히 영성신학)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석의 사상과 영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정양모씨는 "앞으로 다석사상 연구가 진척되어 널리 알려지면 세계의 신학계가 놀날 날이 반듯이 오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고, 심일섭씨는 "21세기에 다석사상 이상의 신학사상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박재호씨는 세속화된 이 나라 기성종교들이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석사상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성천재단을 세운 고 류달영씨는 "다석을 공자 못지않게 어진 분이라고 말한다 해도 다석의 인품을 아는 한 사람으로써 거부감 없이 수긍하게 된다. 다석사상이라는 값진 유산을 이 민족의 정신적 뿌리로 삼고 나아가 국경과 시대를 넘어서서 인류의 유산으로 꽃피우도록 힘써야 하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위의 분들은 다석 류영모의 사상과 영성이 비단 우리 한국(교계 및 종교계)뿐 아니라 세계적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함을 인식한 분들이라 사료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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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 (211.232.208.151)

2011-04-05 21:39:12




예수고 다석이 자기 이름을 알리고자 했겠습니까?
다석이 가장 좋아하고 스승으로 삼아 닮고자 했던 이가 예수였지요. 예수를 그냥 믿기만 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삶을 자신도 살고자 했어요. 그런 이가 어찌 다석 뿐이었겠어요? 그리고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것도 어떻게 예수가 산 것과 똑같아야만 하겠냐고요?

생김새도 다르고, 삶의 여건, 조건들이 다 다르거늘, 수많은 예수가 각각 그 자리에 서있다면 어떤 삶을 살았겠어요? 그것을 찾는 것이 결국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행동에서 나오는 그 모양을 보면 어디 겁나서 예수를 믿을 수 있겠냐고요?

아마도 다석의 예수 사랑은 그런 점에서 지금 이 땅의 예수믿는다는 사람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저는 kinbong 이란 이름으로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필자의 건필과 이 땅의 예수 사랑에 훈풍이 불기를 기도하는 사람이지요. 예수나 다석이라는 이름이 우상이 되어서도 아니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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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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