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9

애인/7장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애인/7장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抱擁[포옹]의 倫理[윤리]
1
부산서 이태 동안 지운은 학교에 나가 교편을 잡았다. 여성들과의 교제도 부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운은 결혼할 생각은 통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선가 불쑥 그 소녀가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기대를 전적으로 포기하지는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은 차차 여위어 가고 추억은 점점 산만 해졌다. 벌써 팔구 년이나 되는 낡은 기억이었다. 소녀는 확실히 죽은 것이라고 지운은 결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채정주와 이석란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무렵이었다. 결혼이라는 문제를 별로 염두에 넣지 않고 지운은 이 두 사람의 여성과 사귀어 왔다. 정치외교를 전공으로 한다는 석란보다도 의학을 전공하는 정주의 착실성이 지운의 조용한 성품에는 좀더 어울리는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대교로 영도다리 난간에서 영주는 조용히 별을 여러 번 쳐다보았고 광복동 네거리에서 석란은 꽃처럼 활개치기를 즐겨하였다. 정주를 만나면 지운의 마음은 고주넉히 가라앉았고 석란을 만나면 지운의 마음은 화려하게 들떠져 갔다. 정주와 같이 있을 때는 언제나 지운의 편에서 제안을 하고 리드를 해야만 행동이 있었지만 석란과 함께 있을 때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앞장을 서서 움직여 주었다. 정주에게는 신경이 씌워졌지만 석란에게는 그것이 별반 필요치 않았다.칠 · 이칠 휴전과 함께 환도한 후에도 이 두 여성과는 쭈욱 교제가 계속되 었다. 그러는 동안에 지운은 어느덧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망각(忘却)의 기능을 갖추고 있는 인간의 생리를 무한히 서글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대 독자의 결혼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늙어가는 어버이의 초조한 마음속을 생각한다는 것은 지운에게 있어서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기도 하였다.

어떤 일요일, 지운은 석란과 함께 정릉 계곡을 걸어 올라갔다. 구월 하순의 일이었다.

이날 석란은 선명한 회색 투피이스에 화장을 다소 짙으게 하고 나섰다. 까만 비로드 리봉은 석란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날도 석란은 리봉을 달고 왔다.

『선생님, 나 오늘 일부러 화장을 좀 짙으게 하고 왔어요.』

『왜?』

『그 누구에게 좀 더 곱게 뵈일려구요.』

계곡을 따라 사오간 거리를 앞서서 걸어가던 석란이 홱 돌아서며 마네킨 인형처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때요, 선생님? 이만함 미스코리아는 문제없죠?……』

지운은 웃었다.

2
『정말로 선생님 어때요?』

외국 영화를 남달리 많이 보고 자란 석란이다. 넌지시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창공을 반만큼 우러러 보는 포즈를 석란은 취하며,

『선생님, 멋지지?』

『아, 멋진 걸』

지운은 또 웃었다.

『예술적 향기가 저으기 높지?』

『칭찬은 제 입으로 하는 게 아니야.』

『노우, 노우! 제가 잘났다고 해야만 남도 잘났다고 보아 주는 거야요. 선생님은 현대적 성격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다소 부족해요.』

그것은 사실이라고 지운도 생각한다.

너 나 없이 모두들 자기를 내세우는 세상이 마침내 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일종의 미(美)까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석란이의 소위 현대적인 성격의 일면을 말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내가 인제 선생님과 결혼을 하게 됨 남편 교육에 톡톡히 힘을 써야겠어요.』

그러면서 석란은 두어번 쿡쿡 웃었다.

『허어?…… 석란과 결혼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석란의 그 한마디에는 정말로 지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운 자신의 입으로서는 그런 말을 단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선생님 보고 그러셨대요? 그저 나 혼자의 생각으로 그렇다는 말이야요. 그 생각을 솔직 명확하게 표현했을 따름이니까,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무방해요.』

『음 ─ 』

지운은 가벼운 신음 소리를 냈다. 정말로 솔직 명확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석란의 그러한 표현주의는 그때까지도 망설거리던 결혼 문제에 대한 지운의 마음을 거의 결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중요한 모멘트를 형성하고 말았다.

석란은 목에 걸었던 라이카로 다가오는 지운의 엄숙한 포우즈를 한 커트 찍고 나서,

『나 이 필름 커다랗게 확대 해 볼래요. 아주 커다랗게…… 전지(全紙)를 써서…… 솜털구멍이 숭글숭글 뵈도록.』

『그건 또 왜?……』

『선생님의 표정을 잘 한 번 연구해 볼려구요. 결혼 말이 튀어나온 그 순간에 있어서의 선생님의 그 엄숙한 표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걸 한 번 잘 검토해 봐야겠어요.』

무엇 하나 감추는 것이 없다. 석란의 말은 그대로 고스란히 석란의 마음의 풍경을 비쳐주고 있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밖에 안되는 마음 속은 모르는 거야.』

지운은 농담을 했다.

『정주 언니를 두고 하는 말씀이겠죠.』

『누가 또 정주씨를……』

『정주 언니는 고요하죠. 나는 다소 소란하구요.』

『잘 아는구먼.』

『정주 언니는 좀 찰거야요. 나는 다소 뜨겁구요.』

지운은 대답을 잃었다.『차서 얼어 죽는 것보담은 뜨거워서 데죽는 편이 현대적이겠죠.』

『또 자기 선전이야?』

『필요하다면 선전두 해야죠. 가만히 앉아서 얼어 죽기는 싫어요.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세상인데요. 선전 없이 진가(眞假)를 올리기에는 세상이 다소 무감각하지요. 남의 일에는 모두가 다 소경이구 귀머거린 걸요. 그러니까 제일은 제가 해야 잖어?』

석란은 곱게 웃었다. 웃으면서 지운의 팔 하나를 꼈다.

『누가 뒤에서 사진 한 장 찍어 줬음 좋겠네요. 정주 언니에게 좀 보여 주게요.』

『…………』

지운은 석란의 옆얼국을 후딱 바라보았다.

지운과 팔을 끼고 울툭불툭한 개천가를 걸어 올라가는 석란의 얼굴은 지극히 행복하였다. 그 행복한 자기의 모습을 정주에게 보이고 싶다는 석란이었다.

『석란, 그런 잔인한 말을 삼가해요. 그것이 경우가 바뀌어서 정주씨라면 그런 잔인한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요.』

『그럴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말을 안한달 뿐이지, 감정은 마찬가지지 뭐야요? 감정을 숨기는 것이 과연 미(美)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과연 추(醜)냐? 그건 성격이나 시대의 문제라기보다도 인식(認識)에 관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해요. 좋음 좋고 나쁨 나쁘고 솔직하게 살다가 솔직히 죽음 되지 뭘 그러세요? 몇백 년 살으실려고?…… 원자탄 하나만 콰앙함 선생님도 없고 저도 없어요.』

팔을 꼈던 손이 미침질을 하면서 밑으로 내려갔다. 손과 손이 잡혀지면서,

『잔인도 현대적 성격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지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럴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걸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건 시대적 착오야요. 자기 행복의 솔직한 향유(享有)를 의미하는 것뿐이니까요. 남자고, 여자고, 요즈음 모두들 옷 차림이 화려해졌지요. 그 거짓 없는 행복에의 추구는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다른 계급에게는 확실히 일종의 잔인을 의미하는 거니까요.』

석란은 힘을 주어 지운의 손을 꼭 쥐어 보며,

『그러니까 결국 하는 수 없지, 뭐예요? 남을 생각해서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다는 그러한 모랄은 이미 이 나라의 거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한낱 전설의 가치밖에는 못가질 거예요. 있다면 그건, 소설가 임지운씨의 작품 세계에서나 가끔 가다가 찾아 볼 수 있을 거예요.』

뚜렷했다. 그 뚜렷한 인생관을 한 편으로는 서글퍼하면서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작자 임지운은 자기분렬(自己分裂)의 의식이 괴로와졌다.

『선생님!』

말과 함께 석란의 손가락이 힘을 주어 왔다.

『응?……』

『힘차게 살아요.』

『어떻거면 돼요?』

『좋은 건 좋고 싫은 것은 싫음 돼요.』

『좋은 건 좋고……』

『선생님, 솔직히 대답하셔야만 해요.』

『대답하지요.』

『나는 선생님께 한 번 안겨 보고 싶은데…… 선생님은 절 안아 보고 싶지 않으셔요?』

낙엽송이 한 무더기 총총이 서 있는 개천가 길이었다. 발 밑에 물이 흘렀다. 멀리 사람들의 그림자가 희득희득 보였다.

『누가 보면 어떻거나?……』

『붙들어 가지는 않겠지, 뭐.』

『그래도……』

『너무 봉건적이야요. 나는 명동 거리 한 가운데서 선생님께 한 번 흐뭇하니 안겨 보았음 일생에 한이 없겠어요.』

지운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거역 할 수 없는 정열의 불덩어리 하나가 격렬한 충동과 함께 지운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저기 사람이 오는데……』

지운은 등뒤를 돌아다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동경의 극한(極限)을 사람들은 정열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이 석란의 두 눈동자 속에서 아우성을 치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굳세인 포옹에의 절실한 동경이었다.

3
포옹을 동경하는 의욕은 지운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의 솔직 명료한 욕구가 도덕의 압력을 대담하게 배척하면서 석란의 입으로부터 힘차게 튀어나오는 순간 지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의 성질을 명확히 분석하지 못한 채 지운은 우선 대답을 해야만 했다.

『사람이 온대두……』

『음 어때요, 선생님? 누가 못할 짓을 한데요? 포옹쯤……』

진실에의 논리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포옹에의 갈망이 진실의 발판을 얻으면서부터 갑자기 절박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지운은 놀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명동의 딸 이 석란의 스무 세 살과 근엄한 철학자의 아들 임지운의 갓설흔 사이에 가로놓인 모랄(道德律[도덕율])의 거리를 발견하고 지운은 또 놀랐다. 이 두 가지가 채 분석하지 못했던 놀라움의 정체였다.

그러나 행동인(行動人) 임지운은 작가 임지운처럼 대담하지는 못했다.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그처럼도 대담하게 인간의 진실을 실천시켜 온 임 지운도 하나의 행동인으로서는 그 진실이 선(善)의 후원을 받기까지는 언제까지나 하나의 생생한 논리대로의 자세로서 머리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좀더 저리로 올라가서…… 조금만 참아.』

지운은 석란의 손을 이끌고 계곡을 좀더 깊숙히 올라가기를 제안하였다.

『선생님은 참을성도 많으시나 봐. 올라갈 때까지에 안겨 보고 싶은 생각이 후딱 없어짐 어떻게요?』

그 말을 지운은 무척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석란은 무척도 무우디스트(氣分主義[기분주의])야.』

『그렇지만 무우드(氣分[기분])을 경멸해서는 안돼요. 기분이 있은 후에야 의욕이 생기는 거예요. 기분의 발판이 없는 의욕처럼 무서운 살풍경은 없을 거예요. 그건 이미 진실도 아니고 미도 아니예요.』

그것을 모르는 지운은 아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지운은 마침내 석란을 품었다.

육체의 감각보다 먼저 지분의 냄새가 관능에 왔다. 예상 이외로 토실토실한 풍만한 육체를 가슴과 손길에 느낀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목에 걸었던 카메라가 방해가 되어 제 손으로 석란은 등뒤로 넘겼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금 힘차게 안기워 왔다.

지운의 품은 생각하던 것보다 넓고 완강했다. 그 완강한 가슴에다 석란은 격렬한 몰부림과 함께 얼굴을 두어 번 부볐다.

석란은 세상이 갑자기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을 불현듯 느꼈다. 사방이 한 자 넓이밖에 안되는 이 품안이 이 순간에 있어서는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감미롭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아늑하고 탐탁한 느낌이 좀더 굳세게 왔다.

『사람이 다가왔어요! 인제 그만……』

지운의 도덕이 항거를 했다.

『괜찮아, 괜찮아! 옴 어때?…… 좀더 꼭……』

석란의 손길에 힘이 왔다. 명동 한 가운데서 안기워 보겠다는 석란이었다.

지운의 교양이 힘을 잃고 도금(鍍金)처럼 또다시 벗겨져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십 미터 거리에까지 사람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부인을 동반한 스프링 코우트의 중년 신사였다.

중년 신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엉거주춤히 서서 한 무더기 총총히 선 낙엽송 사이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4
일단 걸음을 멈추었던 중년 신사가 다시금 걸어 올라오기 시작한 것과 지운의 시선이 석란의 파아마 위로 그쪽을 다시 한 번 돌아다 본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아 ─ 』

지운의 모랄이 당황을 하며 석란의 어깨를 홱 떠밀어 냈을 때는 중년 신사의 얼굴 표정이 빤히 바라다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운은 부끄럼으로 말미암아 얼굴을 붉혔다. 사십대의 그 점잖아 보이는 중년 신사의 얼굴이 불쾌와 조소의 표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옆을 지나갔을 때 지운의 도덕적인 감정은 어린애처럼 울상을 지었다.

더구나 동반인 삼십 이삼 세의 부인이 표정없는 얼굴을 일부러 지으며 후딱 외면을 하고 지나가는 모양을 보았을 순간 지운은 역시 자기네의 행동이 하나의 불미스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세속적인 비난 앞에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과 행동 순수성과 도덕률의 중간 지대에 어색한 태도로 엉거주춤히 서 있는 삼십 대의 작가 임지운의 눈앞에서 석란은 그러나 태연자약하였다.

아니, 태연함을 한 걸음 넘어서서, 신사와 꼭 같은 종류의 불쾌감과 비웃음의 표정을 석란은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증오의 넘을 가지고 신사를 쏘아보고 있을 때였다.

『교양이라곤 손톱 만큼도 없는 것들! 세상은 말세가 되었소.』

자기네들 끼리 지나가면서 하는 신사의 중얼거림이 불행히도 석란의 귀에까지 왔다.

『뭐라고요? 교양이 없다고요?……』

석란의 표정이 격렬히 움직이었다.

신사가 돌아서며 걸음을 멈추었다. 외면을 했던 부인도 섰다. 신사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이었으나 부인의 표정은 다소의 놀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소!』

굵다란 목소리가 위압을 하듯이 맞받아 나왔다.

『교양이 없다고? 그건 누굴 보고 하는 말이예요?』

『당신네들 보고 했소.』

이 불량배의 일족(一族)인 두 사람의 젊은 남녀를 신사는 확실히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리어 교양이 없다고요? 그건 어느 편에서 해야 될 말인지, 잘 좀 생각해 봐요. 하기만 함 말인 줄 알아요?』

뒤로 넘겨졌던 카메라를 앞으로 돌려 메며 석란은 분명한 어조로 대들기 시작했다.

『허허?……』

신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연히 섰다가,

『그럼 우리가 도리어 교양이 없군요?』

『물론이지, 뭐야요? 당신이 만일 교양이 있는 신사람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던가, 그렇지 않음 저편 쪽 솔밭 사이로 길을 비켜가던가, 그만한 상식과 아량도 없담 적어도 우리를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에 비웃음의 표정만은 띠우지 않았어야 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부인은 당신 보담은 훨씬 교양이 있는 분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부인께 지도를 좀 발아야 할 거예요.』

『허어! 당신이 나에게 도리어 설교를 하는 거요?』

신사는 기가막히다는 듯이 하늘을 우러러 허어하고 웃으며,

『세상은 교양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나 보오!』

했다. 그리고는 담배 한 꼬치를 여유 있는 태도로 끄집어 냈다.

5
생각하니, 실로 턱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소의 반성 같은 것이 있을까 했었는데, 도리어 이편을 교양없는 사람이라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의(道義)는 이미 완전히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 신사는 처량한 심정과 함께 분노의 정을 금치 못했다.

『언어 도단이다! 젊은 것들이 한길가에서 부둥켜 안고 돌아가는 추잡한 행동을 연출하면서도 반성은 추호도 없이 교양의 위치를 바꾸어 놓는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훌륭한 논리가 튀어나온다는 말이요?……』

『뭐라고, 추잡한 행동?……』

석란의 빨간 입술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켰다.

『대답을 해요! 뭘 가리켜 추잡한 행동이라고 하는 거예요?』

석란의 본질주의적인 순수성이 마침내 발악을 했다.

석란은 분하고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아늑하고 탐탁한 품속 어느 구석에 추잡이 있었더냐? 거기에는 한 사람의 처녀로서의 감미로운 순정밖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다.

그 감미로움을 이 사십대의 사나이는 징그럽게도 추잡이라고 보는 것일까?…… 정녕 그렇다면 그 보는 눈이 삐두러진 것일 따름이지, 그 눈에 비치는 실체(實體)는 어디까지나 순결하고 맑은 그것이 아니었던가!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답고, 한 걸음 나아 가서는 성스러움까지를 느끼던 자기네의 순수한 애정의 표현이 이 위선의 탈을 쓴 사십대 사나이의 입으로부터 더럽고 추잡하다는 형용사로서 불리워졌다는 것은 전체 미혼여성들의 순결한 애정을 모독하는 괘씸한 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처녀들의 아름다운 순정을 위하여 그것을 한낱 추잡으로서 관념하고 추잡으로서 실천하여 온, 이 위선의 사나이에게서 받은 모욕은 반드시 보답을 해야만 되었다.

『그래 당신네들의 행동이 추잡하지 않다는 말이요?』

담배 연기를 호기있게 내뿜으면서 신사는 빙그레 웃었다.

『무엇이 추잡했어요? 어디 어느 대목이 추잡했다는 말이야요?』

석란의 추궁이 날세게 맞받아 나왔다.

『아이, 그만 두고 인제 가요.』

옆에 섰던 부인이 민망스럽다는 듯이 신사의 팔소매를 잡았다.

그러한 생각은 지운에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운의 작가 의식은 다소 잔인할이만큼 두 사람(두 세대라고 지운은 본다)의 논쟁을 관찰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침묵을 지키면서 부러진 나무그루 하나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꺼냈다.

처음에 느꼈던 부끄러운 생각은 이미 지운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다소 불미로웠다고 얼굴을 붉히던 생각도 이제는 점점 희박해가면서, 어느덧 자기가 순수성을 옹호하는 이석란의 세대(世代)에 가담하기 시작한 자기의 심정을 차차 발견하고 있었다.『여기는 침실이 아니요. 한길가요.』

『여기는 종로 네거리가 아니예요. 숲 사이에요. 우리는 포옹 이상의 것을 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침실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요.』

『어쨌든 당신네들의 무교양은 통행인을 불쾌하게 만들었소.』

『어쨌든 당신네들의 몰상식은 다른 제삼자의 행복을 파괴하였소.』

『대단히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앉았던 나무 그루에서 몸을 일으키며 지운은 비로소 논쟁에 참가하였다.

6
지운이가 논쟁이 참가하는 것을 보고 신사와 석란은 각각 기대를 달리하고 있었다.

『어디 당신 좀 말해 보쇼.』

하고 신사는 지운의 개입을 환영했고,

『선생님은 잠자코 계셔요.』

하고 석란은 지운의 발언을 막았다. 입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운을 석란보다 지식이나 언변이 낮은 사람으로 보고 신사는 환영했고, 지운이가 입을 열면 신사에게 금시 머리를 숙일 것만 같아서 석란은 막았다.

『어쨌든 선생, 그만하시고 어서 올라가시요.』

지운은 미소와 함께 점잖게 권했다.

『아니, 그렇지 않소. 당신은 당신대로 의견이 있을 것이 아니겠소? 이 당돌한 여성의 말이 옮으냐, 내 말이 옳으냐?……』

『물론 나로서의 의견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구태어 여기서 이야기 하여 논쟁을 더 계속시킬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서 부인을 모시고 올라가시요.』

지운으로서는 결말을 이미 짐작했었기 때문에 그 이상 논쟁을 계속하는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아니요 그렇지 않소. 똑똑히 좀 들어 봐야겠소. 아무리 오늘날 세상이 부패하고 풍기가 문란하다고는 하지만 그쪽에서 도리어 이쪽을 논란하고 공격할 만큼 이유가 당당하다고는 믿을 수 없소. 보와하니 노형의 나이도 지긋하오. 이 당돌무쌍한 여성의 교양을 위해서라도 노형이 잘 지도를 해야만 할 것이요.』

석란은 한두 번 쿡쿡 웃었다. 당돌무쌍하다는 말이 우스웠기 때문이다.『그러나 나에게는 이 학생을 지도할 만한 능력이 없읍니다.』

『뭐, 학생이라고?……』

『그렇습니다.』

『음 ─』

신사는 석란의 아래 위를 한참 동안 훑어 보면서 저으기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것이 또 석란은 우스워서 쿡쿡 웃으며,

『양공주 쯤으로 알았나 봐. 후훗……』

그러면서 석란은 무성한 송림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음, 배움의 집에 있는 사람이……』

『당돌무쌍해요?』

『하핫……』

지운은 웃었다. 신사 옆에서 부인도 시무룩했다. 웃지 않은 것은 석란과 신사 뿐이었다.

『그래 노형의 연륜으로 저런 애숭이 하나를 옳은 길로 지도하지 못한다는 말이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나 자신 확고한 지도 정신을 갖지 못 했으니까요.』

신사는 이번에는 지운의 아래 위를 다시 한 번 쭈욱 훑어보며 개탄하였다.

『음, 세상은 완전히 돌고 말았다! 노형도 그것을 모른다니……』

『사물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과정이 서로 다르니까요.』

『눈이 다르다?……』

『그렇습니다. 선행은 이곳을 한길가라고 완강히 규정을 지었지만 이 학생은 이곳을 숲 사이라고 완강히 주장하였지요.』

『길 옆이면 한길가가 아니요?』

『송림이 이처럼 총총히 서 있는 데니까 숲 사이가 아닙니까?』

『그것은 궤변이다!』

『이 학생의 입을 빌면 선생의 주장도 궤변이 되겠지요. 선생의 한길가라는 관념에는 종로 네거리 같은 인상을 다분히 강요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학생의 숲 사이라는 관념에는 심산 유곡을 의미하고 있을는지도 모르니까요.』

『음, 확실히 궤변이다. 해방 이후, 이런 종류의 궤변을 나는 젊은이들의 입으로부터 수없이 많이 들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동양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을 뿐이다. 음 ─ 』비분 강개의 빛이 신사의 얼굴을 어둡게 덮기 시작하였다.

7
미풍 양속의 파괴자로서 비분 강개하는 신사의 어두운 얼굴을 지운은 일종의 동정의 넘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상 지운은 이론으로는 석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지금까지 자기가 지니고 있던 모랄리티(道義感[도의 감])의 붕괴를 서글퍼하는 심정이 쭈욱 꼬리를 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행복의 파괴자를 아름다운 정열과 투명한 논리를 가지고 규탄하여 마지않는 이석란의 신선한 생태(生態)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동감의 념을 금치 못하는 것도 또한 지운으로서는 사실이기도 하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렬한 매력과 낡은 것에 대한 무한한 애석(哀惜), 혁명에 의 동경과 진통에의 애착, 파괴와 보수(保守), 모험과 안식, 불안과 평온의 중간 지대에서 삼십 대의 작가 임 지운은 허둥지둥 신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노형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오? 여기가 한길가요? 숲 사이요?

……』

이 신사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 대단히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송림 사이에 오솔길이 한 줄기 났을 따름이지요. 선생은 선생대로 종로 네거리 쯤으로 생각하고 어서 올라가시요.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달라서 그러는 거니까요.』

『무슨 말을…… 보는 눈은 다 똑같을 것이요. 다만 노형의 편에서 궤변을 논하고 있는 것 뿐이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운은 비로소 정색을 하였다. 지운의 어조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정열을 띠워왔다. 신사의 태도가 지나치게 집요하다.

『선생은 남녀의 포옹을 보는 순간, 침실을 연상하는 인격밖에 갖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일는지 몰라도 이 학생은 그러한 욕망도 체험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연상조차 불가능했을 거요. 그것으로 곧 침실을 연상하는 선생의 인격이야말로 이 학생의 순결성을 모독하는 추잡 이상의 추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아, 선생님, 멋지네요!』석란이가 옆에서 손벽을 치며 응원을 했다.

『여보, 어서 올라가요!』

부인이 얼굴을 붉히면서 신사의 팔소매를 힘차게 잡아 끌었다. 이러다가는 자기네 규방이 드러날는지도 몰랐다.

『아, 가만 좀 있어!』

신사는 잡힌 팔을 뿌리치며,

『도리어 내 인격이 추잡하다고?……』

신사는 모욕을 느끼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남녀 칠세에 자리를 같이 하지 않던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손만 잡아도 추잡을 느꼈지요. 그러나 오늘날, 종로 대로상에서 행하여지는 남녀의 악수에서 선생은 추잡을 느낍니까?』

『부둥켜 안고 돌아가는 것과 악수는 성질이 다르다!』

『마찬가지요. 선생은 과대 표현을 하여 부둥켜 안고 돌아간다고 했지만 우리들은 조용한 포옹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소. 그거야 말로 중인 간 시중에서 부등켜 안고 돌아가는 오늘의 사교춤은 어떻게 생각하시요?』

『그것도 추잡이다!』

신사는 사교춤의 경험이 있다. 거기서 신사는 추잡을 느낀 것이다.

『반 나체가 되어 부둥켜 안고 돌아가는 오늘의 발레춤은 어떻게 보십니까?』

『번거벗고 무대에서 뛰어다니는 것 말이요?』

8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절반 벌거숭이가 되어서 포옹 이상의 고혹적(蠱惑的)이요 선정적인 율동을 되풀이하지요.』

『음 ─ 』

신사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발레 무용을 이 신사는 한 두 번 보아왔다. 그러나 거기서 추잡하다는 생각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 아니요?』

신사의 입에서 예술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을 지운으로서는 적지않게 다행으로 여기면서,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하셨읍니다. 우리들의 포옹도 하나의 예술이었으니까요.』

『야아, 선생님 더 멋진 말씀만 하시네요!』석란은 어린애처럼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포옹은 예술이다! 얼마나 좋은 말이예요!』

했다.

『여보, 그만하구 인제 올라가요.』

자기의 남편이 천지난만한 이 젊은 불량배들에게 붙잡혀서 하나의 놀림감이 되어가고 있는 양을 불현듯 느끼며 그렇게 말했으나 신사는 신사대로,

『당신은 좀 가만 있어요. 그래 당신네들의 행동이 예술이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연애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예술을 의미하고 있지요.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발레 무용의 기본적인 정신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만일 남녀의 애정의 교환이 선생의 지론대로 하나의 추잡을 의미한다면 오늘의 발레 무용에서도 선생은 추잡을 느꼈어야만 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신사는 무엇인가 항변을 계속하려 했으나 논리의 궁핍이 앞을 칵 막았다.

『선생은 참으로 위대한 맥시미스트(格言者[격언자])세요? 연애는 인생의 예술이다! …… 오오, 원더풀!』

석란은 정말로 지운이가 좋아졌다. 말이 별로 없는 그저 온순하고 의젓한 인품으로만 알았는데, 이처럼 인간의 기미(機微)를 샅샅이 통찰할 수 있는 예지(叡知)의 소유자 더구나 남녀의 애정을 예술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는 연애 찬미자인 사실이 석란을 더우기나 황홀케 하였다.

『선생의 도덕적 감정은 남녀간에 행하여지는 오늘의 악수를 하나의 예의로서 허용을 하셨고 발레 춤은 하나의 예술로서 감상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읍니다. 남녀 칠세에 부동석하던 옛날에는 남녀가 단둘이서 하등의 사무적인 용건 없이 이러한 으슥한 산골을 찾아 올라간다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히 하나의 추잡을 연상시켰읍니다.…… 그러나 오늘의 선생은 추잡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 아내요. 야합인줄 알았소?』

대꾸에 궁해 있던 신사는 모욕이나 받은 것처럼 분연히 대답하였다.

『아, 그러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가지셔서 보는 눈에도 대단히 아름답읍니다.』

지운의 말이 다소 야유조로 들렸는지 신사는 대들 것처럼 억세게 물어 왔다.

『당신네들은 대체 무어요?』 『우리도 야합은 아닙니다. 이 학생은 나의 약혼자입니다.』

『음 ─』신사는 이제는 최후의 답변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멀지 않아 선생도 오늘의 사교춤을 예의로서 허용하게 될 것이고 종로 한 가운데 가 아닌, 조그만 오솔길을 가진 송림 속에서의 저희들의 행복을 조소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게 되시지요. 자아, 악수를 합시다.』

『싫소!』

내밀어진 지운의 손을 무시하고 신사는 부인과함께 획 돌아서 갔다.

예지(叡智)

* 叡(예) *

*【叡】(밝을 예)  1. 밝다. 사리(事理)에 깊이 통함. 叡智. 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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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叡智]<예지>

①사물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지혜. 예지(叡知).
②우주(宇宙)의 본체(本體)인 이성(理性).
③기억력ㆍ상상력ㆍ사고력을 써서 이론적ㆍ실천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정신 능력
.
===

맹자(孟子)의 4단(四端)과 4덕(四德). 
불교열반의 4덕 : 상(常, 항상), 낙(樂, 기쁨), 아(我, 나), 정(淨, 깨끗함) 
○ 서양에서의 4덕 : 예지(叡知), 용기(勇氣), 절제(節制), 정의(正義).


책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 대하여
8 June 2020 — 전문적인 지식이 넓어지면 학자가 되고, 작가의 예지(叡知)가 깊어지면 사상가로 진급(進級)합니다. 학자의 저술은 다른 학자에게서 빌려오는 것이 ...

말이 별로 없는 그저 온순하고 의젓한 인품으로만 알았는데, 이처럼 인간의 기미(機微)를 샅샅이 통찰할 수 있는 예지(叡知)의 소유자 더구나 남녀의 애정을 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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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소/프랑스 사상가 소설가>

10세 때에는 과자로 움직이고,
20세 때에는 애인, 
30세 때에는 쾌락, 
40세 때에는 야심, 
50세에는 식욕에 움직인다. 
어느 때가 되어야 인간은 그저 예지(叡知)만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
===
오꾸짱!!@mayareki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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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일본 아줌마입니다. 
한국에 와서 24년째! 
남편은 한국사람이고 2남3녀의 한국인엄마입니다. 
일본어 강사 18년째. 상담심리 공부 6년째.(자격증 있음) 
20대는 한일관계가 좋아지면 좋겠다고 국제결혼을 선택했지만 여러가지 어려웠고 
30대는 남편을 바꾸겠다고 했으나 안됐었고 
40대는 아이들을 바꾸겠다고 했으나 안됐었고 
50대가 돼서 결국은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마음밖에 없다고 알아차려서 
지금은 마야력을 통해서 "진짜 나"를 찾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마야력의 예지(叡知)와 나의 경험이 여러분의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음mm"과의 만남...기대하세요^^ 
"감사로 지금을 산다, 당신은 더 하나의 나, 모든 것이 준비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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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叡智)

책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 대하여

흔히 독서(讀書)는 글을 통하여 빛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 속에 들어가서 별을 찾는 탐구(探究)라고 합니다. 또한 서재에서 우주와 대화를 나누는 소통이라 합니다. 이렇듯 독서는 깊은 체험을 통해 지식의 정수를 터득(攄得)하는 평생의 일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것만이 풍부한 지식을 장악(掌握)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를 찾는 영감을 불러와야 지고(至高)의 예지(叡智)와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식이 넓고 재주가 많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옛 문인이 말했습니다. “10년은 독서에 바치고, 10년은 여행에 바치고, 10년은 그 체험을 보존 정리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保存)과 정리에 10년씩 허비하기는 너무 낭비입니다. 빠르면 몇 년이면 족합니다. 대신 독서와 여행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면 좋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그 몇 배라도 많은 시간을 바쳤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한 백년을 살아야 하니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문장은 고독이나 불행에 봉착(逢着)했을 때 비로소 걸작(傑作)이 나온다고 합니다. 심장을 파고드는 인생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생활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피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주는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보다 불우한 사람의 글이 더 감화력(感化力)이 있다고 합니다.

글짓기에서 체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없다는 말은 이와 같은 이치(理致)에서 나옵니다. 상식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논증(論證)하다보면 논리적 사고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언어를 만들어야하고 그 언어를 또 설명(說明)하려면 논리가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는 언어에 의해 모호해지고 왜곡(歪曲)되며 잘못 표현되어 진리라는 것이 죽도 밥도 안 되고 맙니다. 지금까지의 대량의 글들은 많은 시비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思潮)를 만들어 내려면 또 새로운 학파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 학파가 많이 생길수록 모순당착(矛盾撞着)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글은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학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나가 있으면 심지어 지식무용론(知識無用論)까지 나오게 됩니다. ‘현자(賢者)는 무언, 능자(能者)는 담화하고, 우자(愚者)는 논한다’는 말처럼 말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이 경솔하고 어리석어집니다. 성현은 스스로 직접 체득한 삶을 말하고, 능자는 현자의 말을 하고, 우자는 능자(能者)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언수궁(多言數窮)은, 말이 많으면 탈이 많다는 경구(驚句)가 생겨납니다.

인간은 책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독서하는 서적이 있어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당(酒黨)은 술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마시고 취해서 유쾌해 질 수 있습니다. 만일 행락객(行樂客)이 꽃과 달이 없다면 무얼 즐길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다행히 책이 있어 독서의 즐거움이 있고, 술이 있어 취하는 흥락(興樂)이 있고, 꽃과 달이 있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과 술과 꽃과 달을 즐기면서 노닐지 않으면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
노자 도덕경, 36장

움츠려 들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잠시 동안 크게 확 펼치게 되며,
쇠약해지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잠시 동안 드세게 강해지고,
떠나버리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잠시 동안 더불어 친하게 함께 지내며,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잠시 동안 베풀어 주는 것이다.
이를 일러 미묘한 움직임을 알아채는 예지(叡知)라 하는데,
부드럽고 약하면서도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길 수도 있다.
그리고 물고기가 연못 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
죽음 후의 세계(죽음 이야기) 3.-

사람은 육체와 생명 자아가 방출하고 있는 에ㅡ텔체가 유체의 중간에 위치해서 육체의 육체적, 물질적 구조를 통일적으로 유지시키고 옹호하는 작용을 하였습니다.

에ㅡ텔체가 이탈된 육체는 분해되고 마는 것으로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육체 아닌 유체 영체 등 자아의 또 다른 자기표현의 몸을 구성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에ㅡ텔체는 타계의 거주자와 교통 연락을 할 수 있고,
영매들은 타계와 의사전달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육체 내부에서 서로 중첩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육체, 유체, 영체, 본체는 서로 침투하고 서로 겹쳐 있으면서 제각기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육체는 주로 욕망을, 유체는 감정을, 영체는 이성을, 본체는 예지(叡知)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에ㅡ텔체의 특징은 마음의 상태, 생각하는 것을 예민하게 반영합니다.
고정적이 아니고 유동적 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되 자아가 운용하는 기관입니다.
살았을 때 육체 구석구석에 일체를 이루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생명핵심과 함께 육체를 벗어나 영의 세계에 살게 됩니다.

영의 세계도 우리의 현계에 침투되어 있습니다.
죽으면 영혼은 옹색하고 둔중한 육체에서 벗어나 보다 맑고 경쾌한 의식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백년 뒤엔 내 살과 피는 한 방울의 물이 되여 갈증 난 나그네 목을 적셔 주겠지 !

육체를 떠난 영혼은 자기 시체에서 150cm 정도 높이에 떠서, 보고, 듣고, 비약하고(날고), 음식을 운감 하고(먹고), 의사를 전달하는 5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은 자기가 죽었는지 ?
잘 모릅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부터 아주 편안하고 시원하고 경쾌한 기분으로 자기 시체를 바라보고 가족들이 울고 있으면 자기는 편하다고 울지 말라고 하나 산 사람은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지(叡智)

 책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 대하여

흔히 독서(讀書)는 글을 통하여 빛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책 속에 들어가서 별을 찾는 탐구(探究)라고 합니다. 또한 서재에

서 우주와 대화를 나누는 소통이라 합니다. 이렇듯 독서는 깊은 체험을 통해 지식의 정수를 터득(攄得)하는 평생의 일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것만이 풍부한 지식을 장악(掌握)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를 찾는 영감을 불러와야 지고(至高)의 예지(叡智)

와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식이 넓고 재주가 많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옛 문인이 말했습니다. “10년은 독서에 바치고, 10년은 여행에 바치고, 10년은 그 체험을 보존 정리하는 데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보

존(保存)과 정리에 10년씩 허비하기는 너무 낭비입니다. 빠르면 몇 년이면 족합니다. 대신 독서와 여행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면 좋습니

다. 욕심 같아서는 그 몇 배라도 많은 시간을 바쳤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한 백년을 살아야 하

니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문장은 고독이나 불행에 봉착(逢着)했을 때 비로소 걸작(傑作)이 나온다고 합니다. 심장을 파고드는 인생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

은 생활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피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주는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보

다 불우한 사람의 글이 더 감화력(感化力)이 있다고 합니다.

글짓기에서 체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없다는 말은 이와 같은 이치(理致)에서 나옵니다. 상식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논증(論證)하다보

면 논리적 사고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언어를 만들어야하고 그 언어를 또 설명(說明)하려면 논리가 따라야 합

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는 언어에 의해 모호해지고 왜곡(歪曲)되며 잘못 표현되어 진리라는 것이 죽도 밥도 안 되고 맙니다. 지금까지

의 대량의 글들은 많은 시비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思潮)를 만들어 내려면 또 새로운 학파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 학파

가 많이 생길수록 모순당착(矛盾撞着)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글은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학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나가 있으면 심지어 지식

무용론(知識無用論)까지 나오게 됩니다. ‘현자(賢者)는 무언, 능자(能者)는 담화하고, 우자(愚者)는 논한다’는 말처럼 말을 많이 하

면 그 사람이 경솔하고 어리석어집니다. 성현은 스스로 직접 체득한 삶을 말하고, 능자는 현자의 말을 하고, 우자는 능자(能者)의 말

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언수궁(多言數窮)은, 말이 많으면 탈이 많다는 경구(驚句)가 생겨납니다.

인간은 책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독서하는 서적이 있어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당(酒黨)은 술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마시고 취해서 유

쾌해 질 수 있습니다. 만일 행락객(行樂客)이 꽃과 달이 없다면 무얼 즐길 수 있을까 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다행히 책이 있어 독서의 즐

거움이 있고, 술이 있어 취하는 흥락(興樂)이 있고, 꽃과 달이 있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과 술과 꽃과 달을 즐기면

서 노닐지 않으면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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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筒俊彦:叡知の哲学 : 若松 英輔: 이즈쓰 도시히코 Toshihiko Izutsu and the Philosophy of Word: In Search of the Spiritual Orient

Amazon.co.jp: 井筒俊彦:叡知の哲学 : 若松 英輔: Japanese Books
<이즈쓰 도시히코 : 예지(叡知)의 철학 井筒俊彦:叡知の哲学 > 와카마츠 에이스케 若松 英輔  (著)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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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out of 5 stars    23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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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읽으려고 하는 책. 알라딘 서점을 통해 일어책을 주문했는데, 이 책은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사기에는 너무 비싸지만,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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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소년기의 선 수도를 원점으로, 「동양철학」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경애境涯와 사상 조류를, 동 시대인과 교차시켜, 선렬한 필치로 그려내는 청신한 한권. ▼<읽으면 쓴다――이즈쓰 도시히코 에세이집>편자인 와카마츠 에이스케씨에 의한, 대망의 「이즈쓰 도시히코론」. 세계적인 이슬람 학자로서 저명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저작은 난해이기 때문에, 손에는 잡는 것의 통독을 포기해 버리는 독자는 많이 있었다. 

본서는, 이즈쓰 도시히코의 생애를 크게 3부로 나누어, 각각의 시절을 상징하는 저작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읽어들여, 실증적으로 논하는 것에 의해, 이즈쓰 철학에의 이해를 돕고, 깊게 하려는 의도로 기록된 의욕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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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 pages
=====
【목차】 
머리말 
제1장 『신비 철학』――시인 철학자의 탄생 
제2장 이슬람과의 邂逅 
제3장 러시아, 밤의 영성 
제4장 한 동시대인과 선지자 전
제5장 카톨리시즘
제6장 말과 코토바 
제7장 천계의 번역자 
제8장 엘라노스—그분에서의 대화 
제9장 <의식과 본질>
제10징 예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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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마존 독자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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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 5개 만점에 5.0 이즈쓰 도시히코 입문에 최적
2019년 7월 26일에 일본에서 작성함

이즈쓰 도시히코의 주저라고 하는 '의식과 본질'(이와나미 문고)을 읽었지만, 다방면에 걸친 깊은 논란과 지식이 담겨 있고, 솔직히 20% 정도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즉 오랜만의 「좌절감」을 맛봤다. 물론, 내 지식과 이해력이 없는 것이 원인이지만, 역시 저것은, 처음에 읽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구원의 신이 등장했다. 즉 본서이다.
세상적으로는, 이즈쓰 도시히코는 이슬람 문화(종교·철학)의 소개자로서 알려져 있는 것 같지만, 본서를 읽으면, 선, 그리스 철학, 러시아 문학, 기독교, 불교 등, 매우 광범위한 세계에, 각각에 원어로 익숙해진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 와카마츠씨는, 이러한 사상 편력을 매우 비비드하게 풀어 준다.
그 중에서도, 이즈쓰 도시히코의 「읽으면 쓴다」라고 하는 에세이집으로부터의 인용이, 무미 건조가 되기 쉬운 내용에 혈육을 준다는 의미로, 공을 연주하고 있다. '뒤로'도 훌륭합니다.

이즈쓰 도시히코의 조금 전 세대의 니시다 기타로스즈키 오오오키 등의 저작과 함께 읽음으로써,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던 동양 철학, 동양적 지혜의 분을 생각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꼭 읽어 주셨으면 한다 .
28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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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스토~루 TOP 1000 리뷰어
별 5개 만점에 5.0 

정상에서 기슭으로 가는 여러 길, 또는 기독교 이상으로 기독교적, 불교 이상으로 불교적, 이슬람 이상으로 이슬람

 나는 기독교인이다. 이 책은 기독교 책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에센스가 여기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경험해 온 것이 본서의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예지란 세계의 근원이며 유일한 의미와 통일, 전체, 일치라는 의미로 하나의 존재이며 세계에 존재하는 자에게 존재를 주는 진실한 존재이다. 철학이란, 이 지혜에 접한 것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 독자도 그 경험으로 초대해, 영혼을 구제하려고 하는 영업을 말한다. 철학을 하는 자가 지혜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접한 것을 깨달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자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배운 것은 기독교가 유일하게 절대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도 절대자를 접하고 절대자를 나타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의 창조주라든가, 하나님은 로고스(말, 말씀)이라든지, 하나님은 아버지, 자녀, 성령의 3가지 자격이 있다든가, 하나님은 세상 를 사랑한다든가,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격에 있어서 육체를 우리 몸에 받았다(수육)라고 하는 일이 있지만, 본서에서는, 그것이, 보다 깊어지고, 보다 보편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본저에서도, 예지의 주권, 예지의 주도가 대전제가 되고 있어, 모두는 여기로부터 전개해, 여기에 지지하고 있다.

 이즈쓰 도시카즈는 그것을 그리스 철학, 러시아 문학, 이슬람 학자, 가톨릭, 공해 등과의 대화에서 도출한 것이다. 그 발자취를, 저자의 와카마츠 에이스케씨가 안내, 아니, 동행해 주십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는 산의 정상으로의 다양한 루트에 비유될 수 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에 있는 지혜가 밑단의 다양한 현상, 말, 문화, 자연 등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독자에게 경험하게 해준다.

 아버지를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통해, 이슬람을 통해, 불교를 통해. 문학을 통해, 철학을 통해, 예술을 통해. 모두는 지혜의 사랑이다.

24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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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켄지 문고
별 5개 만점에 5.0 코토바에서 코코로
2014년 6월 24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평전이란 것은 미친 듯한 사상론이다. 권말의 연보는 전기에 상당하는 것이지만, 본론은 한 개인의 생애를 편년으로 추적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는 않지만, 사상이 하나의 철학에 결실해 가는 것이었던 이상은 반대로 사상론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시계열이 되어 있다고 우울하다.
 대학의 문학잡지에 연재시킨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문장이 간결하고 철학론으로는 압도적으로 읽기 쉽다.
 연보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몰랐던 에피소드가 많이 포함된다.
 이즈쓰 도시히코를 단지 아라비아 연구자, 언어학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독자에게, 간신히 한 철인으로서의 그 사상의 통체를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노작이다.
11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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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반니
별 5개 만점에 5.0 「예지」의 용출
2011년 7월 3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본서는, 비평가인 와카마츠 에이스케씨의 처녀작입니다.

 처녀작이라고 해도,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후기에도 쓰여진 것처럼, 20년 가까이의 시간을 들여 준비되어 온 저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즈쓰 도시히코의 매력적인 「말」에 의해, 말하자면 많은 씨앗을 뿌린 와카마츠씨의 마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발효시켜 온 통찰이 정리해져, 하나의 「예지」의 세계를 구축 있습니다.

 '예지의 철학'이라는 부제에 저자가 담은 생각은 단순히 이즈쓰 도시히코가 '예지'를 탐구한 철학자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예지」가 「이즈쓰 도시히코」이라고 하는 시혼을 가진 철학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놀라운 박식과 독창성을 겸비한 철학자이지만, 게다가 스스로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류의 지식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다시 말하려고 시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시도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항상 새로운'을 낳은 것입니다. 「예지」의 전통에 촉구되도록 저작을 쓰고 있는 가운데, 이통 자신의 의도를 넘어서, 놀라운 참신한 통찰이, 이렇게 끓어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와카마츠씨는, 이와 같은 이즈쓰 도시히코의 「말하고 만들지 않고」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통을 촉구한 같은 '예지'의 전통에 촉구되어 이통의 평전을 쓴 이 저작 속에서 저자인 와카마츠씨 자신의 의도를 넘어 놀라운 참신한 통찰이 페이지를 넘어질 때마다, 끓어오르는 것에 대해 독자는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즈쓰 도시히코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도, 아직 읽은 적이 없는 분도, 확실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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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Customer 스즈키 마키
별 5개 만점에 5.0 그 노작에 단지, 칭찬을
2014년 11월 13일에 일본에서 작성됨
 선인의 철학을 일본의 영성심에서 이슬람의 꾸란, 그리스 철학, 기독교까지 모든 언어를 구사하고 추구한 씨의 궤적을 따랐던 청신한 저서. 그 노작에 단지, 찬사를 줄 수밖에 없다.
 유언을 읽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 작품이 진실한 의미로 탄생하는 것은 쓰여진 때가 아니라 읽을 때이다. 또,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혈육화한 인물이 축복되면, 그것은 신생한다, 혹은 신생을 계속한다.
 '의식과 본질'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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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松 英輔
  • 1968年新潟県生まれ。批評家、随筆家。東京工業大学リベラルアーツ教育研究院教授。
  • 2007 年「越知保夫とその時代 求道の文学」にて第14 回三田文学新人賞受賞。
  • 2016年『叡知の詩学 小林秀雄と井筒俊彦』にて第2回西脇順三郎学術賞受賞。
  • 2018年詩集『見えない涙』で第33回詩歌文学館賞を受賞。
  • 2018年、『小林秀雄 美しい花』で角川財団学芸賞を受賞。
  • 2019年、『小林秀雄 美しい花』で蓮如賞を受賞。

著書に『井筒俊彦 叡知の哲学』(慶応義塾大学出版会)、『生きる哲学』(文春新書)、『霊性の哲学』(角川選書)、『悲しみの秘義』(ナナロク社)、『イエス伝』(中央公論新社)『霧の彼方 須賀敦子』(集英社)『言葉の贈り物』『弱さのちから』(亜紀書房)な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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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out of 5 stars
ワンダー
5.0 out of 5 stars 井筒ワールド入門に最適
Reviewed in Japan on July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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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筒俊彦の主著と言われる「意識と本質」(岩波文庫)を読んだものの、多岐にわたる深い論議と知識が詰め込まれていて、正直、二割くらいしか理解できなかった。つまり久しぶりの「挫折感」を味わった。
もちろん、私の知識と理解力のなさが原因だが、やはりあれは、最初に読むべきではなかった。

しかし、救いの神が登場した。すなわち本書である。
世間的には、井筒はイスラム文化(宗教・哲学)の紹介者として知られているようだが、本書を読むと、
禅、ギリシャ哲学、ロシア文学、キリスト教、仏教など、きわめて広範な世界に、それぞれに原語で慣れ親しんでいたすごい人だったことがわかった。

著者の若松氏は、これらの思想遍歴をきわめてビビッドに解き明かしてくれる。
なかでも、井筒の「読むと書く」というエッセイ集からの引用が、無味乾燥になりがちな内容に血肉を与えるという意味で、功を奏している。「あとがき」も素晴らしい。

井筒のすこし前の世代の西田幾多郎や鈴木大拙などの著作と合わせ読むことによって、彼らがめざしていた東洋哲学、東洋的叡智のありかたを考えようとする方々には、ぜひ読んでいただき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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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じん
4.0 out of 5 stars 井筒氏の全貌をつかめる本
Reviewed in Japan on August 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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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容の濃さは他の方のレビュウにもある通りだと思います。できれば「意識と本質」の各回Ⅰ~XⅡに表題をつけて欲し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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ぱすと〜る
TOP 1000 REVIEWER
5.0 out of 5 stars 頂上からふもとへのいくつもの道 あるいは キリスト教以上にキリスト教的、仏教以上に仏教的、イスラム以上にイスラム
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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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ぼくはキリスト教徒だ。この本はキリスト教の本というわけではない。けれども、キリスト教のエッセンスが、ここには満ちていた。キリスト教信仰の多様な側面を経験してきたことが、本書の旅の大きな助けになった。

 叡智とは、世界の根源のことであり、唯一という意味と、統一、全体、一致という意味で、一なる存在のことであり、世界に存在する者に存在を与えるまことの存在のことだ。哲学とは、この叡智に触れたことを表現することを通して、読者もその経験へと誘い、魂を救済しようする営みのことだ。哲学をする者が叡智に触れるのではなく、叡智に触れられたことに気づき、伝えようとするものが、哲学者なのだ。

 ぼくがこの本から学んだことは、キリスト教が唯一絶対なのではなく、キリスト教も絶対者に触れ、絶対者を示そうとしているということだ。

 キリスト教信仰には、神は世界と人間の創造主であるとか、神はロゴス(言・ことば)であるとか、神には父・子・聖霊の三つの位格があるとか、神は世界を愛しているとか、神はイエスという人格において肉体を我が身に受けた(受肉)とかいうようなことがあるが、本書では、それが、より深められ、より普遍に述べられている。

 キリスト教信仰の中核には、人間が神に到達したのではなく、神が人間に自分を啓示したということがある。本著でも、叡智の主権、叡智の主導が大前提になっていて、すべてはここから展開し、ここに支えらえている。

 井筒俊彦は、それをギリシャ哲学、ロシア文学、イスラム学者、カトリック、空海などとの対話から導き出したのだ。その足跡を、著者の若松英輔さんが案内、いや、同行してくださる。

 世界の様々な宗教は山の頂上へのさまざまなルートに例えられることがある。この本はそうは言わない。むしろ、頂上にある叡智が、裾野のさまざまな現象、言葉、文化、自然などを通してご自身を示していることを、読者に経験させてくれる。

 父を通して、イエスを通して、聖霊を通して。キリスト教を通して、イスラムを通して、仏教を通して。文学を通して、哲学を通して、芸術を通して。すべては、叡智の愛な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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剣持文庫
5.0 out of 5 stars コトバからココロへ
Reviewed in Japan on June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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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評伝というには物狂惜しいような思想論である。巻末の年譜は伝記に相当するものであるが、本論は一個人の生涯を編年で辿ったものではない。そうではないのだが、思想が一個の哲学に結実していくものであった以上は逆に思想論がそのままで自然に時系列になっていると謂える。
 大学の文学雑誌に連載させたものであるからかもしれないものの、とにかく文章が簡潔で哲学論にしては圧倒的に読み易い。
 年譜も含め、これまで一般に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知らなかったエピソードが多く含まれる。
 井筒俊彦をただのアラビア研究者、言語学者であるとは思えなかった読者に、ようやくちゃんとした一人の哲人としてのその思想の統体を明らかに示し得た労作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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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500 REVIEWER
5.0 out of 5 stars 存在はコトバである。
Reviewed in Japan on April 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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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は、伝記的形態を採る井筒俊彦解題である。
散りばめられている言葉を抽出する。
.異なる言語を用いる者は、異なる世界を経験している。
.ラテン語に訳された旧約は、既に中性化され毒気を抜かれている。
.セムの子、アラブの民は徹底的に感覚的人間であった。つまり、信じるでなく現象を見る。
.時間は、未来・現在・過去三つのエクスタシス(=脱自=外へ出ること)に展開することで時が生起する。それは、水平的・現象的存在論的脱自であるが、もう一つ垂直的・形而上的・次元飛躍的脱自がある。それは、「我なし」と共に「我あり」を感受する時間である。
.井筒は、阿頼耶識の更に奥に言語阿頼耶識という、意味の誕生、意識と存在の結合点をテーゼする。
.叡智も霊も心真如も「コトバ」の姿を以って現れる。バッハは音、ゴッホは色、ユングは元型という「コトバ」を用いた。
.全人類は、不可避に言語共同体的(=母語)に分節されている。母語には、音、色、香りも含まれる。言語感覚は、複数の感覚の結合から成っている。鳥の声、植物の生命活動、細胞の反応といった生命記号活動も言語たりうる。
.言葉は、世界を意味的に分節し、それはそのまま存在分節となる。意味が事象を掴む。
.外国語を読む時、どんなに熟達していても人は、母語に置き換えて理解している。
.事象の実在は、そもそも共感覚的である。その淵源は現象界の奥深くに潜んでいる。
.万葉の「見ゆ」という言葉は、古今には、姿を消し「眺め」となる。存在への接近と対峙に於いて大きな変革が起こっている。
.存在次元には、(一)日々、私たちが暮らす現実的次元 (二)出来事は、歴史を超えた次元にも刻まれ時代を超えて現在的出来事として継続的に生起する。信仰者にとっては、生理的な「死」の後も生存を続けている実在、例えば空海、中山みきなどの祭司が司る物語的次元(=言語阿頼耶識)である超歴史的次元 (三)イマジナル次元(=神話的・根源的イマージュ・巫者的次元)の三つがあり互いに絡み合っている。イマジナル次元で生起した事は、現象となって現実的世界に生起する。また、この逆もある。そこに、介入出来るのは、「祈り」である。イマジナル次元を垣間見るためには、超歴史的次元を通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かし、そこで現実界概念の解体を迫られる。
.言語の底に言葉を超える「コトバ(=メタ言語=哲学的共通言語)」がある。
.人間と超越者は、相即的関係にある。
.神秘主義とは、宗教的脱構築の異名である。驚異的な更生であり絶対者に死して後、新しく生まれ出るところにある。
.絶対無分節存在である「存在」は、現象となり感覚世界として自らを顕す。それは、花が存在するでなく、「存在」が花するという事である。それは、人間についても同じである。
.現象は、多層・多重的共時性が生起する傍証に過ぎない。共時性は、時間の壁を突破する。過去は、過去として存在する。永遠は、常に今である。そこでは、時間軸に捉われず思想あるいは思想家たちを現在に結集させ「今」の問題として論じることが可能となる。シャーマン、預言者等聖性との遭遇者は、時空の束縛を受けない。時も多層である。
.「読む」という事は、知的理解でなく言語以前のリアリティを理解する事である。
.サルトルの「嘔吐」は、東洋の哲人が「「無」」とか「空」」とかいう存在解体的概念の形で展開してきたものを実存的に「嘔吐」化する一種の言語脱落、つまり存在の言語意味秩序崩壊(=脱自)体験である。
.「意識」とは、元来、「脱自」的である。「「自分の外へ滑る出すこと」であり「自我の死」である。
.「本質」は、自らを与え尽くすことにある。そして、「脱自」を受け取る。万物は、「存在」に「本質」を賦与されて「存在者」となる。「見性」も同次元で生起する。
.仏教の「縁起」は、「本質」抜きの分節世界を正当化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禅は、「本質」抜きの流動的存在分節を実践的に認証することを要求する。井筒は、イマージュまでを「本質」とする。
.神話は、単なる作り話ではない。超越者の自己顕現の一形式である。「易」」の八卦の一つ一つに神話が刻印されている。「コトバ」の自己展開と意味誕生の過程が生々しく記憶されている。
.「意識」の底に無意識という怪物が横たわってはいない。それは、不要であり「意識」自体、元々得体がしれない。
.「意味」とは、混沌から生まれ出る存在の相貌、存在者の「顔」である。一つとして同じものがない。「コトバ」(=根源的絶対無分節のリアリティ)が万物を生む。「意味」は、生命である。そして、「意味」が言葉を求める。
.「業」は、障碍でなく変革、深化、あるいは解脱すべき対象を知らせる。

長くなったが止められなくなった。
没後20年、「意識と本質」を手に取ったのが亡くなられる少し前であった。
30数ヵ国語に通じられた稀有の天才・達人の言説を成程と思えるようになったのは不思議なこと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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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知子
5.0 out of 5 stars 日本近現代思想史に新たな地平を拓く大著
Reviewed in Japan on May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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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前イスラーム哲学研究に世界的な規模で重大な貢献を果した井筒俊彦。本書は、イスラーム学者という限定的な枠組みから、哲学者井筒俊彦を解放し、壮大なスケールで展開される「井筒哲学」のエッセンスを抽出する画期的な作品だ。
そこでは、少年時代の禅的修道に始まり、ギリシャ哲学やイスラーム哲学との邂逅から、『意識と本質』等で独自の「コトバ」論に結実してゆく思想潮流が、井筒の生きた時代にそくして丹念に論じられてゆく。

数十か国語に通じた天才等として井筒俊彦はどこか神秘のベールに包まれていた印象が強かったが、本書『井筒俊彦―叡知の哲学』では、一人の哲学者として様々な人物と交わり、時代を生きた姿が真摯に描かれている。あたかも、近現代思想史の長編ドラマ、「物語」を読んでいるような気にさせてくれる貴重な一冊だ。 本書が井筒俊彦研究の先駆けとなることを祈念しつつ、新たな本格的批評家の誕生を祝福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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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5.0 out of 5 stars 「叡知」の湧出
Reviewed in Japan on July 3, 2011
 本書は、批評家である若松英輔氏の処女作です。

 処女作とはいえ、とても完成度の高い作品です。後書きにも書いてあるように、二十年近くの時間をかけて準備されてきた著作だからだと思います。
 
 井筒俊彦の魅力的な「言葉」によって、いわば多くの種子を蒔かれた若松氏の心が、長い時間をかけて発酵させてきた洞察がまとめ上げられて、一つの「叡知」の世界を築き上げています。

 「叡知の哲学」という副題に著者がこめた思いは、単に、井筒が「叡知」を探求した哲学者であった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叡知」の方が「井筒」という詩魂を持った哲学者を通して、我々に語りかけている、という意味なのです。

 井筒は、驚くべき博識と独創性を兼ね備えた哲学者ですが、ことさらに自らの「新しさ」を強調するような人物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うではなく、東洋から西洋にいたる、そして古代から現代にいたる人類の叡知を、現代的な文脈で語り直すことを試みた人物でした。そのような試みが、自ずと、汲み尽くせない「常なる新しさ」を産んだのです。「叡知」の伝統に促されるように著作を書いている中で、井筒自身の意図をも超えて、驚くべき斬新な洞察が、こんこんと沸き上がっているのです。

 若松氏は、このような井筒の「述べて作らず」の精神を受け継いでいます。そして、井筒を促した同じ「叡知」の伝統に促されて井筒の評伝を書いたこの著作の中で、著者である若松氏自身の意図をも超えて、驚くべき斬新な洞察が、ページをめくるごとに、沸き上がっていることに読者は気づくはずです。

 井筒を読んだことのある人も、まだ読んだことのない方も、間違いなく、多くのものを得ることができる、素晴らしい本だ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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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Customer 鈴木牧え
5.0 out of 5 stars その労作にただただ、賛辞を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13, 2014
 先人の哲学を日本の霊性心からイスラムのコーラン、ギリシャ哲学、キリスト教まであらゆる言語を駆使し追求した氏の軌跡をたどった清新な著書。その労作にただただ、賛辞を贈るしかない。
 遺言が読まれることによって完成するように、作品が真実の意味で誕生するのは、書かれたときではなく、読まれたときである。また、作品を理解するに留まらず、血肉化した人物に恵まれれば、それは新生する、あるいは新生し続ける。
 「意識と本質」をまた読み直したく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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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u Sun
5.0 out of 5 stars 叡智の哲学者 井筒俊彦 評伝
Reviewed in Japan on July 1, 2012
鈴木大拙Daisetsu Teitaro Suzukiが世界に名の知れた仏教学者だとすれば、井筒俊彦は何に当たるのだろう。イスラーム学者や哲学者だと評される事が常だが、そういったレッテルを貼って井筒を評するのは無理がある。人々が勝手につける肩書に井筒自身も居心地の悪さを覚える事もあったようだ。

「形而上学的言語学者」「密教思想的言語学者」、どのようにでも肩書を創作してあてる事が可能な程の知性を持っていた彼を司馬遼太郎が「20人の天才らが1人になった人のようだ」と評するのは頷ける。そのような日本人だからこそ今も世界中の探究者を魅了し続けるのだろう。

しかし、そんな世界的な井筒に今まで評伝らしい評伝が存在しなかった事が不思議だった。深層心理学者カール・グスタフ・ユング,ユダヤ教哲学者マルティン・ブーバー,仏教学者鈴木大拙,ユダヤ教神秘主義学者ゲルショム・ショーレムなどの井筒がエラノス会議で肩を並べた人物らには評伝や自伝が少なからずあったからだ。

評伝が人の価値を決める訳ではない。だが評伝の重要さは別にある。評伝によって新たな読者が井筒の存在に気づきその功績や学びを深くしてゆく可能性があるからだ。本著者、若松英輔氏は井筒著作を現存している物ほぼ全て読み込んでいる。井筒夫人、豊子氏の協力もあるのだという。そのような著者による「評伝 井筒俊彦」ともいえる画期的な本書。副題を「叡智の哲学」と名付けたは著者の井筒に対する思い入れの証なのだろう。叡智の哲学者の人物像と思想に迫る素晴らしい出来栄えに感嘆と感動をおぼ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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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び
5.0 out of 5 stars "井筒俊彦"をどう主体的に生きるか
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24, 2011
井筒俊彦の仕事って,あまりにも巨大でその全体像が見えづらいんだけど,この本は,いかにして「井筒俊彦は井筒俊彦になったのか」という思想形成とその核心がよく捉えられている。

「考えることは生きることだ」と言うのは簡単だけど,実際それはとても難しいことで,ネットでちょっとググってコピペすればいっぱしものを考えてるように見せることもできる今の時代だから,井筒のような本物の知性と向きあうことはより必要になると思う。その手がかりとしてこの本はとてもいい本だと思う。

この本て,井筒の足跡を著書から読み取れる思想だけじゃなくて(もちろんこれがいちばんの力点なのだけれど),井筒の師にあたる人間,友人関係,蔵書から推定される読書歴など実に丹念に追っていて,賛嘆に値する本なのだが,井筒の業績を批判を交えて正当に評価するっていう方向性じゃなくて,ほとんど井筒への帰依,あるいは信仰告白のようにすら感じられる。
それは確かに偏った方向性とも言えるのだけど,今のこの安っぽい揚げ足取りが幅を利かせてる時代には,もっとも必要とされることで,それがこの本の大きな魅力となっている。
井筒は思想を生きようとした。そして若松もまたそう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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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u Sun
별 5개 만점에 5.0 지치의 철학자 이통 슌히코 평전
2012년 7월 1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스즈키 오오조가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불교학자라면, 이츠키 슌히코는 무엇에 해당할 것이다. 이슬람 학자나 철학자라고 평가되는 일이 늘지만, 그런 레텔을 붙여 이통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붙이는 직함에 이통 자신도 아늑한 악을 기억하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형이상학적 언어학자」 「밀교사상적 언어학자」, 어쨌든 직함을 창작해 주는 것이 가능한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던 그를 사마료타로가 「20명의 천재들이 1명에게 온 사람 같다”라고 평하는 것은 수긍한다. 그런 일본인이기 때문에 지금도 전세계의 탐구자를 계속 매료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계적인 이통에 지금까지 평판다운 평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이상했다. 심층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 유대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 불교 학자 스즈키 오오키,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겔숀 쇼렘 등의 이통이 엘라노스 회의에서 어깨를 늘어선 인물들에게는 평전이나 자전이 적기 때문에 그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전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전의 중요성은 따로 있다. 평전에 의해 새로운 독자가 이통의 존재를 깨달아 그 공적이나 배우기를 깊게 해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본 저자, 와카마츠 에이스케씨는 이통 저작을 현존하고 있는 물건 거의 모두 읽고 있다. 이통 부인 토요코씨의 협력도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저자에 의한 「평전 이통 슌히코」라고도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본서. 부제를 「지치의 철학」이라고 명명한 것은 저자의 이통에 대한 추억의 증거일 것이다. 지혜의 철학자의 인물상과 사상에 육박하는 멋진 완성에 감탄과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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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별 5개 만점에 5.0 「이통 슌히코」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까
2011년 9월 24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이츠키 슌히코의 일은 너무 거대하고 그 전체상이 보이기 어려운데, 이 책은 어떻게 해서 「이통 슌히코는 이통 슌히코가 되었는가」라는 사상 형성과 그 핵심이 잘 파악되고 있다 .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로, 넷으로 조금 굶어서 뽀뽀하면 가득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지금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통처럼 진짜 지성과 마주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단서로서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이통의 발자취를 저서로부터 읽을 수 있는 사상만이 아니고(물론 이것이 가장의 역점이지만), 이통의 사에 해당하는 인간, 친구 관계, 장서로부터 추정되는 독서 경력 등 실로 정성껏 쫓고 있고, 찬탄할만한 책이지만, 이통의 업적을 비판을 나누어 정당하게 평가하는 방향성이 아니고, 대부분 이통에의 귀의, 혹은 신앙고백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확실히 편향된 방향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이 싼 튀김 발걸음이 폭을 이루고 있는 시대에는, 가장 필요하게 되는 것으로, 그것이 이 책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이통은 사상을 살려고 했다. 그리고 와카마츠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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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Japan
makoto k
5.0 out of 5 stars 2011年 最良の書
Reviewed in Japan on December 31, 2011
2011年、『井筒俊彦 叡知の哲学』と著者若松英輔氏のデビューは大きな反響を呼びました。

本書は、日経、朝日、毎日新聞等各紙で、中島岳志氏や安藤礼二氏といった現代思想界を担う論者に取り上げられ、
また、若松氏の連続講演(全四回)は毎回満員となるなど、その登場は衝撃的でした。

2013年で井筒俊彦が逝って20年になります。これまで、長い間、井筒俊彦とその哲学に真正面から挑んだ人はいませんでした。

古代ギリシアをも含む「東洋哲学」の「共時的構造化」という目の眩むような大きな問題に取り組み、
「意識」や「存在」の問題へと深化してゆく井筒哲学に対し、若松氏は距離を置くことなく、真摯に向き合っています。
本書は決して読む者に井筒哲学を「理解させる」解説書ではなく、読む者をも井筒哲学の深みへと誘う魅惑的な一冊です。

若松氏の言葉の根底には、井筒への深い愛情と尊敬が流れています。
しかし同時に、若松氏は一切の「自己表現」という狭隘な枠を越え、井筒哲学を蘇らせるために注力を注いでいるのが感じられ、好感を持ちました。

濃密な心を揺さぶられるような読書を望む方におすす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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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集素浪人
5.0 out of 5 stars インドラの網
Reviewed in Japan on May 20, 2011
 現代日本における数少ない未踏の思想的沃地とも言うべき井筒俊彦の生涯と著作に、資料の博捜と精読をもって臨んだ力作である。単なる学者の範疇をはるかに超える井筒のような思想家の本格的研究が、大学人あるいは職業的文筆家ではなく、ユニークな経歴をもつ、言葉の最良の意味でのアマチュアによってなされたことを慶ぶ。本書はまた、言葉の最良の意味でのブリコラージュである。悪しき「専門家」には書けないということを、著者はむしろ誇りとすべきであろう。
 インドラ神の宮居を飾る網(帝網)の結び目には無数の珠が用いられていて、そのおのおのが他を映し合っているという。空海的ともライプニッツ的ともボードレール的とも言えるこの広大な照応世界に、上田光雄、小辻節三、諸井慶徳、山崎弁栄といった、知られざるあるいは忘れられた変光星を見出すのは読書の歓びである。独創的な日本近現代思想史の素描としても本書を推すゆえん。さて、今後どんな星座が見えてくるのか、著者のさらなる研鑽に期待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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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토 케이
별 5개 만점에 5.0 2011년 최선의 서
2011년 12월 31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2011년 『이통 슌히코 지치의 철학』과 저자 와카마츠 에이스케씨의 데뷔는 큰 반향을 불렀습니다.

본서는, 닛케이, 아사히, 매일 신문 등 각 종이로, 나카지마 타케시씨나 안도 레지씨와 같은 현대 사상계를 담당하는 논자에 거론되고,
또, 와카마츠씨의 연속 강연(전 4회)은 매회 만원이 되는 등, 그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2013년에 이츠쓰 슌히코가 합쳐 20년이 됩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통 슌히코와 그 철학에 정면에서 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를 포함한 「도요 철학」의 「공시적 구조화」라는 눈의 눈부신 큰 문제에 대처해,
「의식」이나 「존재」의 문제로 심화해 가는 이통 철학에 대해, 와카마츠씨 거리를 두지 않고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결코 읽는 사람에게 이통 철학을 "이해시키는" 해설서가 아니라, 읽는 사람도 이통 철학의 깊이로 초대하는 매혹적인 한 권입니다.

와카마츠씨의 말의 근저에는, 이통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와카마츠씨는 일절의 「자기 표현」이라고 하는 좁은 틀을 넘어, 이통 철학을 되살리기 위해서 주력을 쏟고 있는 것이 느껴져, 호감을 가졌습니다.

농밀한 마음을 흔드는 독서를 원하는 분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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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소랑인
별 5개 만점에 5.0 인드라 그물
2011년 5월 20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현대 일본에 있어서 몇 안 되는 미답의 사상적 요지라고도 말해야 할 이통 슌히코의 평생과 저작에, 자료의 박수와 정독을 가지고 임한 역작이다. 단순한 학자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이통 같은 사상가의 본격적인 연구가 대학인이나 직업적 문필가가 아닌 독특한 경력을 가진 말의 최상의 의미에서 아마추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경 . 이 책은 또한 단어의 최상의 의미에서 브리콜라주입니다. 악한 「전문가」에는 쓸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오히려 자랑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인드라 신의 미야이를 장식하는 망(제망)의 매듭에는 무수한 주름이 이용되고 있어, 그 각각이 다른 것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 공해적이라도 라이프니츠적이라도 보드레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광대한 조응세계에 우에다 미츠오, 코츠지부조, 제이경덕, 야마자키 변영 등,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변광성을 발견하는 것은 독서의 환영이다 . 독창적인 일본 근현대 사상사의 소묘로서도 본서를 추구하는 유엔. 그런데, 향후 어떤 별자리가 보일지, 저자의 새로운 연주에 기대한다.
 
35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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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筒俊彦 叡智の哲学』(2011)


2020-10-24 07:30:22
テーマ:読書時間

若松英輔『井筒俊彦 叡智の哲学』慶應義塾大学出版会、2011年、2014年第4刷


井筒俊彦の『意識と本質』(岩波文庫、1991年)を読もうと段ボール箱を開けたら、若松英輔氏の本が出てきた。これを読みながら、週末に心当たりの箱を開けて『意識と本質』を探そう。若松英輔氏の引用もページがないので本のどこに書いてあるか調べないといけない。


第六章 言葉とコトバ
第九章 『意識と本質』
第十章 叡智の哲学


井筒俊彦が使う「コトバ」が何であるかつかめないと読み続けるのが難しい。『意識と本質』にある「意識の構造モデル」をどう理解するかが重要だ。井筒俊彦は「コトバ」と「言葉」と使い分けるのは『意識と本質』以降であると若松英輔氏は云う。さらに「意味」がまたやっかいである。これらの「術語」を確認しながら読む準備をする。


若松英輔氏は云う。
「「意味」という言葉も、井筒俊彦が用いると、単語、文章、あるいは現象の指示内容ということに留まらない独自の術語となる。「意味」は混沌から生まれ出る存在の相貌、存在者の「顔」。一つとして同じものがない固有者である」(P379)。


若松英輔氏の指摘で「言語哲学としての真言」の講演録にあった「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関する記述が削除されていたことが分かった。『意味の深み』に収録した「意味分節理論と空海」を読んでいて、「存在はコトバである」という命題にこれほど相応しいものはないと思われるが、何故か井筒俊彦は削除した。なお「存在」は絶対超越者の異名である(P221)。


若松英輔氏は井筒俊彦の訳を「言語哲学としての真言」から引いてくる。


「太始(はじめ)に〔中略〕コトバがあった。コトバは神のもとにあった。というより、コトバは神であったのだ。ありとあらゆるものがこれによって成り、およそ成り出たもののうち、ただひとつもこらによらずに成り出たものはなかった」(P219)


ギリシャ語による「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最初にΕν αρχηι ην ο Λόγοςとある。「初めに言葉ありき」と昔は習ったが、αρχη(アルケー)は初め、始源、原理である。Λόγος(ロゴス)は言葉と論理。そのような日本語はないのでロゴスとする。すると「初めにロゴスがあった」とでも直訳してみる。ロゴスはキリストでありコトバであるとすれば、真言は大日如来でありコトバであると見事に符合する。


井筒俊彦が何故「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記述を『思想』(岩波書店)に掲載する時に削除したのかは若松英輔氏も指摘以上のことは書いていない。


「「存在」が「存在者」を「創造」するとき、「存在」は「コトバ」として自己展開する。コトバとは事象が存在することを喚起する力動的な実在、すなわち存在を喚起する「エネルギー体」に他ならない」(P221)。


「コトバ」の比喩として若松英輔氏が以下に書いている。


「叡智(ヌース)も霊(プネウマ)も「心真如」も、彼には「コトバ」の姿をもって現れた。井筒俊彦の「コトバ」は、言語学の領域を包含しつつ超えていく。バッハは音、ゴッホは色という「コトバ」を用いた。曼荼羅を描いたユングには、イマージュ、あるいは元型が「コトバ」だった」(P222)。


「意味」もつかみきれない術語である。


「言葉は世界を意味的に「分節」する。また、意味分節はそのまま存在分節となる。なぜなら、「意味」とは事象に付される記号ではなく、「意味」が事象をつかむ、と井筒は考えるからである」(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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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쓰 도시히코 叡智の철학』
2020-10-24 
https://ameblo.jp/trip2kyoto/entry-12633471706.html

테마:독서 시간
와카마츠 에이스케 『이즈쓰 도시히코 叡智の철학』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식과 본질'(이와나미 문고, 1991년)을 읽으려고 골판지상자를 열자 와카마츠 에이스케씨의 책이 나왔다. 이것을 읽으면서 주말에 마음가짐 상자를 열어 '의식과 본질'을 찾아보자. 와카마츠 에이스케씨의 인용도 페이지가 없기 때문에 책의 어디에 써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

제6장 말과 코토바
제9장 『의식과 본질』
제10장 지혜의 철학

이즈쓰 도시히코가 사용하는 「코토바」가 무엇인가 까다롭지 않으면 계속 읽는 것이 어렵다. '의식과 본질'에 있는 '의식의 구조 모델'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중요하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코토바」와 「말」과 구분하는 것은 「의식과 본질」이후라고 와카마츠 에이스케씨는 말한다. 게다가 "의미"가 또한 힘들다. 이 '술어'를 확인하면서 읽을 준비를 한다.

와카마츠 에이스케씨는 말한다.
「「의미」라고 하는 말도, 이즈쓰 도시히코가 사용하면, 단어, 문장, 혹은 현상의 지시 내용이라고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독자적인 술어가 된다. 「의미」는 혼돈에서 태어나는 존재의 상모, 존재자의 「얼굴」. 하나로서 같은 것이 없는 고유자이다”(P379).

와카마츠 에이스케씨의 지적에서 「언어 철학으로서의 진언」의 강연록에 있던 「요한에 의한 복음서」에 관한 기술이 삭제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의미의 깊이'에 수록한 '의미분절 이론과 공해'를 읽고 있어 '존재는 코토바'라는 명제에 그다지 적당한 것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어째서인지 이즈쓰 도시히코는 삭제했다. 또한 「존재」는 절대 초월자의 이명이다 (P221).

와카마츠 에이스케씨는 이즈쓰 도시히코의 번역을 「언어 철학으로서의 진언」에서 끌어온다.

"태시(처음)에 [중략] 코토바가 있었다. 코토바는 하나님의 밑에 있었다. , 단 하나도 이에 의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P219)

그리스어에 의한 「요한복음」의 처음에는 Εν αρχηι ην ο Λόγος라고 한다. 「처음에 말이 있어」라고 옛날은 배웠지만, αρχη(알케 )는 처음, 시원, 원리이다. Λόγος ( 로고스)는 단어와 논리. 그런 일본어는 없기 때문에 로고스로 한다. 그러자 「처음에 로고스가 있었다」라고도 직역해 본다. 로고스는 그리스도이자 코토바라고 하면, 진언은 대일 여래이며 코토바라고 훌륭하게 부합한다.

이즈쓰 도시히코가 왜 「요한에 의한 복음서」의 기술을 「사상」(이와나미 서점)에 게재할 때 삭제했는지는 와카마츠 에이스케씨도 지적 이상의 것은 쓰지 않았다.

「존재」가 「존재자」를 「창조」할 때, 「존재」는 「코토바」로서 자기 전개한다. 코토바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을 환기하는 역동적인 실재, 즉 존재를 환기하는 「에너지체」에 다름없다」(P221).

「코토바」의 은유로서 와카마츠 에이스케씨가 이하에 썼다.

'지혜(누스)도 영(푸네우마)도 '심진여'도 그에게는 '코토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통 슌히코의 「코토바」는 언어학의 영역을 포괄하면서 넘어간다. 바흐는 소리, 고흐는 색이라는 "코토바"를 사용했다. 만다라를 그린 융에는 이마주, 혹은 원형이 '코토바'였다'(P222).

「의미」도 잡을 수 없는 술어이다.

"말은 세계를 의미적으로 "분절"한다. 또, 의미분절은 그대로 존재분절이 된다. 왜냐하면, 「의미」란 사건에 붙는 기호가 아니고, 「의미」가 사건을 잡는다고, 이즈쓰 도시히코은 생각하기 때문이다」(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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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筒俊彦 叡知の哲学

若松 英輔
出版社:慶應義塾大学出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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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来にも残すべシA 個人的には超好ミA 初心者でも読めルB

「コトバ」を追い続けた世界的碩学の哲学
井筒俊彦さんの訳した岩波文庫の『コーラン』を持っています。
ただ、全く読めず本棚に置いてあるのですが。

コーラン 上
コーラン 上
著者: 井筒 俊彦
出版社:岩波書店
発行年: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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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にとっては井筒さんはイスラム専門の学者という認識だったのですが、若松さんはこういいます。

井筒俊彦をイスラーム学者と呼んでも、過ちを犯したことにはならないが、この人物を、単に言語哲学者と呼ぶ場合と似て、窮屈な感じが残る。こうした呼称は、あまりに実相を覆い隠してはいないだろうか。彼自身は、留保なく、イスラーム学者と自称したことはないのである。

そして井筒さんの著作とともに、イスラームだけではなく、言語そして深層心理にまで迫った仕事を論じます。
多岐にわたった井筒さんの仕事のテーマのひとつに「コトバ」があります。

「存在はコトバである」、この一節に井筒俊彦の哲学は収斂される。「存在」とは、事象が在ることではない。ここでの「存在」は、イブン・アルビーが用いたように絶対的超越者の異名である。「コトバ」とは言語学におけるラングやパロール、シニフィアンとシニフィエのテーゼにも収まらない。エクリチュールとも異なる。「存在」が「存在者」を「創造」するとき、「存在」は「コトバ」として自己展開する。コトバとは事象が存在することを喚起する力動的な実在、すなわち存在を喚起する「エネルギー体」に他ならない。

また、こうもいいます。

「コトバ」が意味を分節する、と彼は認識する。「コトバ」とは、万物の基底、「根源的絶対無分節のリアリティー」と同義である。すなわち「コトバ」が万物を生むと井筒は考えている。

難しそうですが、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冒頭を読むと分かる気がします。

初めに言(ことば)があった。言は神と共にあった。言は神であった。この言は、初めに神と共にあった。万物は言によって成った。成ったもので、言によらずに成ったものは何一つなかった。(新共同訳。孫引き)

井筒さんは、言葉と事象の関係について、日常の意識では「事象→言葉→意味の順序に従って生成するように映る」けれども、深層意識界では意味→言葉→事象の順に現れる、といいます。
「花があって花という言葉が生まれる」のではなく、「花という「意味」の「範型」に形づくられて、花は誕生する」というのです。
このあたりのスリリングな考え方は面白いです。
井筒さんの主著である『意識と本質』をきちんと読んでみたいですね。

若松さんの著作ですので、井筒さんの同時代人はもちろん、プロティノスやイスラーム神秘学者たちなど、「共時的な」人物もおおぜい召還されます。
そしてそのほとんどを私は知りません。
イスラーム神秘学や大川周明のことをもっと知りたくなりました。
若松さんの本を読むと、読書とは古くて新しい人に出会えることだ、とあらためて感じます。

*この記事はまだおべつおラジオからの転載です

나에게 있어서는 이통씨는 이슬람 전문의 학자라고 하는 인식이었습니다만, 와카마츠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통 슌히코를 이슬람 학자라고 부르더라도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인물을 단순히 언어 철학자라고 부르는 경우와 비슷하게 비좁은 느낌이 남는다. 이런 호칭은 별로 실상을 가리지 않았을까. 그 자신은 유보 없이 이슬람학자라고 자칭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통씨의 저작과 함께 이슬람뿐만 아니라 언어 그리고 심층 심리에까지 다가온 일을 논합니다.
다방면에 걸친 이츠키 씨의 일 테마 중 하나에 「코토바」가 있습니다.

「존재는 코토바이다」, 이 일절에 이통 슌히코의 철학은 수렴된다. 「존재」란,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존재"는 이븐 알비가 사용한 것처럼 절대 초월자의 별명입니다. 「코토바」란 언어학에서의 랭이나 파롤, 시니피안과 시니피에의 테제에도 맞지 않는다. 에크리츄르와도 다르다. 「존재」가 「존재자」를 「창조」할 때, 「존재」는 「코토바」로서 자기 전개한다. 코토바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을 환기하는 역동적인 실재, 즉 존재를 환기하는 「에너지체」에 다름없다.

또한 이것도 좋습니다.

"코토바"가 의미를 분절한다고 그는 인식한다. "코토바"는 만물의 기저, "근원적 절대 무분절의 리얼리티"와 동의어이다. 즉 '코토바'가 만물을 낳는다고 이통은 생각하고 있다.

어려울 것 같지만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을 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말)이 있었다. 말은 신과 함께 있었다. 말은 하나님이었다. 이 말은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만물은 말로 이루어졌다. 이루어진 것으로, 말에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공동역. 손잡이)

이통씨는, 말과 사상의 관계에 대해, 일상의 의식에서는 「사상→말→의미의 순서에 따라 생성하도록 비친다」하지만, 심층 의식계에서는 의미→말→사상의 순서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꽃이 있어 꽃이라는 말이 태어난다」가 아니고, 「꽃이라고 하는 「뜻」의 「범형」에 형성되어, 꽃은 탄생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근처의 스릴 넘치는 생각은 재미 있습니다.
이통씨의 주저인 『의식과 본질』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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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評 『井筒俊彦-叡知の哲学-』(若松英輔、慶應義塾大学出版会、2011)-魂の哲学者・井筒俊彦の全体像に迫るはじめての本格的評伝


国際的にはイスラーム神秘哲学研究の大家として評価されながらも、かならずしも日本で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井筒俊彦

『井筒俊彦-叡知の哲学-』(若松英輔、慶應義塾大学出版会、2011)は、哲学者・井筒俊彦の全体像に迫るはじめての本格的評伝である。

出版されてからほどなく読んだのだが、書評を書き上げることなく現在まできてしまった。しかもいったん書いておいた下書きのファイルをパソコン事故によって消去してしまったので、あらためて一から書き直してみることに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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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たしは大学時代からリアルタイムで井筒俊彦(1914~1993)の著作に親しんできた。

新刊が出版されるたびに単行本を買い求めてきた(・・そのほとんどが岩波書店だったのは、合庭淳という編集者が伴走者として存在したからのようだ)。著作や論文のすべてに目を通したわけではないが、次は何がでるのかいつも楽しみにしていた。だから、著作のほとんどは単行本でもっている。

最初はイスラーム関係からのアプローチであった。だが、あるとき大学生協の書棚に『神秘哲学』(人文書院)を見出して手に取ったとき、イスラームとはまったく畑違い(と見えた)古代ギリシアの哲学者たちを扱った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たときの驚き、そしてまたロシア文学にかんする単行本の存在を知り大学図書館で借りだしてみたこと。あまりもの守備範囲の広さには驚嘆するばかりだった。

大学学部でユダヤ史にかんする卒論執筆のために資料収集していたとき、「東印度に於ける回教法制」という戦時中の報告書を図書館で発見した。そしてその報告書が、右翼思想家とされていた大川周明のもと、東亜経済研究所で戦時中にイスラーム研究を行っていた井筒俊彦によるものであることを知り、井筒俊彦という人が単なる学者の域をこえていたことを知る。これは司馬遼太郎との対談ではじめて明らかにされたことだ。

そしてまたサルマン・ラシュディーの『悪魔の詩』を日本語訳したために、勤務先の筑波大学のキャンパスで暗殺された五十嵐一氏が、イランのテヘランの王立アカデミーにいた井筒俊彦のもとで研究活動を行っていたこともあとから知った。

これ以上書いても意味はない。30年前から井筒俊彦の読者であったといいたいだけだ。

本書の著者である文芸評論家の若松英輔氏は、会社経営のかたわら、井筒俊彦のすべての業績を網羅してフォローしているだけでなく、さらには単行本や著作集にも収録されていなかった文章を探し出して『読むと書く-井筒俊彦エッセイ集-』に編集している。

『神秘哲学』の第二部の読者は知っていても、一般には知られざる一面であった、井筒俊彦におけるカトリック神秘主義への傾倒に大きな光をあてたことは大いに評価したい。

若松氏自身は井筒俊彦と同じく慶應義塾出身で、しかもカトリックだそうだが、同じくカトリック作家であった須賀敦子へのまなざしは十分に納得いく。だが、カトリックの枠にとらわれることなく、イスラームや仏教もふくめた諸宗教への目配りが素晴らしい

特筆すべきは、天理教の内側にいた宗教哲学者・諸井慶徳(もろい・よしのり)の再発見と、浄土宗の内側からでてきた山崎弁栄(やまざき・べんねい)上人について最後に言及していることだ。

偶然の機会によって古書店で出会ったという諸井慶徳の著作は、しかるべき人に発見された、しかるべき本であったといえよう。この知られざる宗教哲学者とその主著への言及が本書をより深く、より豊かなものにしてくれた。諸井慶徳と井筒俊彦の接点はなかったようであるが。

そしてまた山崎弁栄上人。恥ずべきことに、わたしは若松氏の文章を読むまで山崎弁栄上人にはまったく注目していなかった。数学者・岡潔(おか・きよし)が晩年に念仏に専念していたことは知られてるが、岡潔の先生の先生が山崎弁栄だったのだ。

「超在一神的汎神教」の境地に至った霊性の仏教者・山崎弁栄。著者は、井筒俊彦の最終的な境地をそこにシンクロさせている。

哲学とはギリシア語で愛知の学(ふぃろ・そふぃあ)である。それは、すべからく神秘哲学たるべきこと、絶対者との合一であり、魂についての学である。叡智世界に至る修道の道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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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書は井筒俊彦の全体像をつかもうとした試みであり、井筒俊彦の生涯と作品を読み込むための入門書にもなっている。日本が生み出した真の哲学者である井筒俊彦の全体像を知るためにぜひ読むことをすすめたい労作だ。

そこには膨大な知の集積とともに、それを突き抜けて探求された、たぐいまれな実り豊かな精神世界が待っているはずだ。



(2011年9月11日に行われた若松氏の講演会のチラシ)






目 次

まえがき

第1章 『神秘哲学』-詩人哲学者の誕生

 無垢なる原点
 スタゲイラの哲人と神聖なる義務
 預言する詩人
 上田光雄と柳宗悦
第2章 イスラームとの邂逅 
 セムの子-小辻節三との邂逅
 二人のタタール人
 大川周明と日本イスラームの原点
 殉教と対話-ハッラージュとマシニョン
第3章 ロシア、夜の霊性 
 文学者の使命
 見霊者と神秘詩人-ドストエフスキーとチュッチェフ
 前生を歌う詩人
 永遠のイデア
第4章 ある同時代人と預言者伝 
 宗教哲学者 諸井慶徳
 シャマニズムと神秘主義
 預言者伝
第5章 カトリシズム
 聖人と詩人
 真理への実践
 キリスト者への影響-遠藤周作・井上洋治・高橋たか子
第6章 言葉とコトバ 
 イスラームの位置
 言葉と意味論
 講義「言語学概論」
 和歌の意味論
第7章 天界の翻訳者 
 コーランの翻訳
 「構造」と構造主義
 イブン・アラビー
 老荘と屈原
第8章 エラノス-彼方での対話 
 エラノスの「時」
 オットーとエリアーデ
 伝統学派と久遠の叡智
第9章 『意識と本質』 
 「意識と本質」前夜
 東洋へ
 精神的自叙伝
 「意識」と「本質」
 コトバの神秘哲学
第10章 叡知の哲学 
 仏教と深層心理学-「無」意識と無意識
 文学者の「読み」
 真実在と万有在神論-西田幾多郎と山崎弁栄

あとがき
引用文献一覧
井筒俊彦年譜


著者プロフィール

若松英輔(わかまつ えいすけ)
1968年新潟生まれ。慶應義塾大学文学部仏文学科卒。批評家。㈱シナジーカンパニージャパン代表取締役社長。「越知保夫とその時代」で第14回三田文学新人賞評論部門当選。その他の作品に「小林秀雄と井筒俊彦」、「須賀敦子の足跡」など。『小林秀雄-越知保夫全作品-』、『読むと書く-井筒俊彦エッセイ集-』を編集。2010年より、三田文学に「吉満義彦」を連載中。






特設サイト 井筒俊彦(慶應義塾大学出版会)

井筒俊彦先生の著作


(井筒俊彦の著作の数々 わたしの書棚から)


井筒俊彦の主著は岩波文庫に収録されており、いまでは簡単にアクセスすることができる。

そのなかでも『意識と本質-精神的東洋を索めて-』は、日本語で書かれた哲学書のなかでは一級品といっていいだろう。

禅仏教の修行から始まり、セム的世界をキリスト教、ユダヤ教、イスラームと経て、同時に古代ギリシアの神秘主義哲学、カトリック神秘主義を経て、最終的には大乗仏教思想の研究に至る生涯をそのまま書きつづったような井筒哲学のエッセンともいうべき内容である。豊饒の海というべきであろう。

しかも、シャマンの託宣をそのまま文字にしたような井筒俊彦の文章は、学術論文でありながらほとんど散文詩に近い。

その意味では慶應義塾の学部時代の師であった英文学者で詩人であった西脇順三郎、そして学部時代にその盟友である池田弥三郎とともに聴講した国文学者で歌人であった折口信夫(=釈超空)をも髣髴(ほうふつ)させるのがある。

意味はすぐにはわからなくても、ぜひその文章を味わってほしいと思う。



PS 『井筒俊彦-叡知の哲学-』の英訳版が2014年1月に出版

英訳版の Toshihiko Izutsu and the Philosophy of Word: In Search of the Spiritual Orient が LTCB International Library Selection No. 33 として、International House of Japan(国際文化会館)から2014年1月に出版されている。

英訳者のジャン・コーネル・ホフ(Jean Connell Hoff)氏が「井筒哲学を翻訳する」(『井筒俊彦-言語の根源と哲学の発生-(KAWADE道の手帖)』(河出書房新社、2014 所収)で書いているように、二年間をかけて完成したものだという。



LTCB International Library は、LTCB(=Long-Term Credit Bank of Japan:日本長期信用銀行)が国有化とその後の外史への売却によって消滅して以降も、社会貢献事業として存続しているようだ。いまは亡き LTCB の関係者としては、なんだか不思議な感じもしている。

機会があれば英訳版を覗いて見てみたいものだ。

(2014年11月3日 記す)


<関連サイト>

たまには「難解」に挑んでみたい-世界的な学者の業績・井筒俊彦の全集を読む(福原義春 日系ビジネスオンライン 2014年2月4日)
・・このような文章を書けるのは経営者出身とては福原義春さん(元資生堂会長)くらいだろう。こういう重厚な「教養」の持ち主がもっと増えるといいのだが・・・

井筒俊彦の主要著作に見る日本的イスラーム理解 (池内 恵、『日本研究.36』(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2007年))
・・イスラーム思想のなかでも、規範としての法学ではなく、「神秘哲学」に主体的な関心の中心を置いていた井筒俊彦のイスラーム理解。若手イスラーム研究者による、井筒俊彦の主体的関心のありかとそれが近代日本の知識人のイスラーム理解に与えた影響を論じた重要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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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ookoffonline.co.jp/new/0016566041
★★★★★
Posted by 投稿日:2022/04/01 11:47:34
「大抵の言語は数ヶ月で読めるようになり、英独仏語にいたっては抵抗がなく外国語ですらない」
「ある日、イブラヒムはすごい学者が来たと、井筒をモスクへと連れて行った。東京、代々木上原にある東京ジャーミイとして知られる礼拝所とイスラーム学院を兼ね
た施設である。寺院に近づくにしたがって、東洋的哀感をおびた特有の節越しでコーランを朗読する声が聞えて来た。イブラヒムは言った。「ムーサーの朗調だよ」。
「ムーサー先生」と井筒俊彦が呼ぶこの人物こそ、文字通りの天才だった。聖典を丸ごと覚えるイブラヒムの記憶力も十分驚異的だが、ムーサーの記憶力は次元が遼っていた。聖典とその周辺の書物はいうに及ばない。「神学、哲学、法学、詩学、韻律学、文法学はもちろん、ほとんど主なテクストは、全部頭に暗記してある」。原典を記憶していただけではない。注解書も複数覚えていて、かつ自分の意見がある人物だった。
 初めて井筒が訪ねたとき、言伝通り、玄関ではなく庭に回って声をかけると、「よく来た、よく来た」と言いながらムーサーは押入れから出てきた。一軒はもちろん、一部屋さえ借りる資金がなく、大家もやむなく押入れの上段を貸したのだった。
 ある日、井筒が体調を崩すとムーサーがアラビア菓子を持って見舞いに来た。ムーサーは書斎にあった多くの蔵書を見て、出かけるとき、この本はどうするのかと聞く。行李に入れて移動すると井筒が答えると、それではまるでカタッムリではないかと笑った。
 徒手空拳、どこでも学問ができなくては真の学者ではないとムーサーは言った。
 晩年の井筒はあるインタヴューで当時を振り返って、イスラームのウラマーの教授法に接した最初の経験だったと発言している。ウラマーとは大学者のこと。
 ある日、井筒はアラビア語の原典をムーサーのところ
へ持参する。数日するとムーサーはそれらをすっかり記憶していた。」
★★★
Posted by 投稿日:2018/06/10 22:23:09
井筒俊彦の思想的遍歴を、彼を取り巻くさまざまな人物との関係について立ち入った解説をおこないながら論じた評伝です。

著者の目的は、おそらく井筒の言語哲学そのものを解明することに向けられていはいないように思います。その意味では、井筒の思想についてのコンパクトな解説を求める読者には、少し期待外れに感じられるかもしれません。

著者のねらいはむしろ、宗教哲学者の諸井慶徳や漢字の研究で知られる白川静など、井筒と密接なつながりはなかったものの、何らかの意味で共鳴しあうような仕事をおこなっていた人物もとりあげることで、井筒俊彦という独創的な思想家の多面性をあざやかに描き出すことに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アカデミシャンの仕事ではなく、批評家の立場から井筒という思想家をとらえる試みとしては、おもしろい本だと思いました。
★★★★★
Posted by 投稿日:2018/05/03 17:36:02
同じ若松英輔著の「吉満義彦 詩と天使の形而上学」を先に読了。

忘れられそうになっている過去の偉人が、
すぐれた伝記作家の手により蘇る。
素晴らしいものがどんどん過去の遺物化している中、
若松英輔氏の功績は計り知れない。

★★★★★
Posted by 投稿日:2013/07/25 12:39:13
こんなに素晴らしい評伝は久しぶりに読んだ。
人が学問をするのは実存的経験なんだ!

読後に興奮して眠れなくなりました。
★★★★★
Posted by ネタバレ
投稿日:2012/04/21 14:40:39
対話の達人・井筒俊彦のはじめての本格的評伝
若松英輔『井筒俊彦--叡知の哲学』慶應義塾大学出版会、2011年。

世界的イスラム学者・言語哲学者として知られながら、国内ではほとんど真正面から論じられることのなかった大碩学のひとりは、間違いなく井筒俊彦氏だろう。

ギリシャ哲学、言語学、ユングから老荘、仏教、そしてイスラームと神秘主義……。関連するキーワードをあげてもきりがないほどだ。数十カ国語に通じ、その探究の射程も深広である。それ故か、まとまな「井筒研究」はこれまでなかったし、解説しようにも解説できなかったのが知的世界の現状ではなかっただろうか。

本書はその著作と生涯を丹念に論じた待望の一冊であり、氏の思索の軌跡を生き生きと描き出している。

天才ともいうべき井筒俊彦にはどのようなイメージがあるのだろうかーー。
そびえ立つ孤高の霊峰のような姿は、どこか神秘のベールにつつまれたような感もあり、言語と綿密に対峙したその研究スタイルからは、ひととの交わりの淡い・近寄りがたい印象があるだろう。しかし本書はそうした先入見を払拭してくれる。

井筒は様々なひとびとと交わった対話の人だった。西田幾多郎、大川周明、吉満義彦、ジャック・デリダ……。本書は一人の哲学者として様々な人物と交わり言葉を交わしている。そして生きた人間だけでなく、過去の言葉や資料とも対話をしているのである。

ひととあって言葉を交わし、書物と言葉を交わし、歴史と対話をしているのだ。語ることが記すことであり、記すされた言葉を読むこと自体が語ることでもあるのだろう。

さて初めての井筒伝を著した若松氏は、いわゆる職業「学者」でも「文筆家」でもない。生業をもちビジネスに打ち込む一方で、研究・執筆にも取り組んでいるという。ユニークな経歴を持つ著者の意欲作は、本格的批評家の誕生を予見させるものである。

若松氏は2年前に『読むと書く―井筒俊彦エッセイ集』(慶應義塾大学出版会)を編んでいる。本書と併せて読むことをおすすめする。氏の思索の深化は本年3月に出版された『魂にふれる 大震災と、生きている死者』(トランスビュー)でもいかんなく発揮されている。

蛇足ながら、筆者は、学生時代に観覧した井筒俊彦展(慶應三田図書館にて手記やノートの展示)の記憶を鮮やかに思い出した。びっちりと数カ国語で記されたノートやカードにワクワクしたことが懐かしい。本書を読了後、あの日経験した昂奮がふつふつとわき上がっ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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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jikenorio 의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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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1일


대화의 달인· 이츠키 슌히코 의 처음 본격적 평전


세계적 이슬람 학자·언어 철학자로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거의 정면에서 논할 수 없었던 대석학의 한사람은, 틀림없이 이통 슌히코씨일 것이다.

그리스 철학, 언어학, 융에서 노장, 불교, 그리고 이슬람과 신비주의… 관련 키워드를 올려도 별로 없다. 수십개 국어로 통하여, 그 탐구의 사정도 심각하다. 그러니까, 괜찮은 「이통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고, 해설하듯 해설할 수 없었던 것이 지적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을까.

본서는 그 저작과 평생을 정성껏 논한 대망의 한 권이며, 씨의 사색의 궤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천재라고도 할 수 있는 이통 슌히코에는 어떤 이미지가 있을까-.
우뚝 솟은 고고의 영봉과 같은 모습은, 어딘가 신비의 베일에 얽힌 것 같은 느낌도 있어, 언어와 면밀하게 대치한 그 연구 스타일로부터는, 사람과의 교제의 밝은·근접하기 어려운 인상이 있다 겠지. 그러나 본서는 그러한 선입견을 불식해 준다.

이통은 다양한 한사람과 어우러진 대화의 사람이었다. 니시다 기타로, 오카와 슈아키, 요시만 요시히코, 잭 데리다… 이 책은 한 명의 철학자로서 다양한 인물과 나누어 말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뿐만 아니라 과거의 말이나 자료와도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말을 나누고, 책과 말을 나누고, 역사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기록하는 것이고, 기록된 말을 읽는 것 자체가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첫 이통전을 저술한 와카마츠씨는, 이른바 직업 「학자」도 「문필가」도 아니다. 생업을 가지고 비즈니스에 박는 한편, 연구·집필에도 임하고 있다고 한다. 독특한 경력을 가진 저자의 의욕작은 본격적인 비평가의 탄생을 예견시키는 것이다.

와카마츠씨는 2년 전에 『읽는다고 쓴다―이통 슌히코 에세이집』(게이오 대학교 출판회)을 짜고 있다. 이 책과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씨의 사색의 심화는 올해 3월에 출판된 『영혼에 접하는 대지진과 살아 있는 죽은 자』(트랜스뷰)에서도 갑자기 발휘되고 있다.

뱀족이면서, 필자는, 학생시절에 관람한 이통 슌히코전(게이오 미타 도서관에서 수기나 노트의 전시)의 기억을 선명하게 생각해 냈다. 깜짝 몇 개 국어로 적힌 노트나 카드에 두근거린 것이 그리운다. 이 책을 읽은 후 그 날 경험한 혐분이 보통 솟아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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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5개 만점에 5.0 존재는 코토바입니다.
2014년 4월 12일에 일본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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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기적 형태를 채택하는 이통 슌히코 해제이다.
흩어져있는 단어를 추출합니다.
.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 라틴어로 번역된 구약은 이미 중성화되어 독기를 빼앗긴다.
. 셈의 아들 아랍 백성은 철저히 감각적 인간이었다. 즉, 믿지 않고 현상을 본다.
. 시간은, 미래·현재·과거 3개의 엑스타시스(=탈자=밖에 나오는 것)에 전개하는 것으로 때가 생기다. 그것은 수평적·현상적 존재론적 탈자이지만, 또 하나 수직적·형이상적·차원 비약적 탈자가 있다. 그것은 ‘나 없음’과 함께 ‘내 있음’을 감수하는 시간이다.
. 이통은 아요야식의 더 안쪽에 언어아요야식이라는 의미의 탄생, 의식과 존재의 결합점을 테제한다.
. 지혜도 영도 마음진여도 '코토바'의 모습을 따라 나타난다. 바흐는 소리, 고흐는 색, 융은 원형이라는 '코토바'를 사용했다.
. 모든 인류는 불가피하게 언어공동체적(=모어)으로 분절되어 있다. 모국어에는 소리, 색, 향기가 포함됩니다. 언어 감각은 복수의 감각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새의 목소리, 식물의 생명활동, 세포의 반응 등 생명기호활동도 언어할 수 있다.
. 말은 세계를 의미적으로 분절하고, 그것은 그대로 존재분절이 된다. 의미가 사건을 잡는다.
. 외국어를 읽을 때 아무리 숙달해도 사람은 모국어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 사건의 실재는 원래 공감각적이다. 그 근원은 현상계의 깊숙히 숨어있다.
. 만엽의 「미유」라는 말은, 옛날에는, 모습을 끄고 「전망」이 된다. 존재에의 접근과 대치에 있어서 큰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 존재 차원에는, (1)날마다, 우리가 사는 현실적 차원 신앙자에게 있어서는, 생리적인 「죽음」 후에도 생존을 계속하고 있는 실재, 예를 들어 공해, 나카야마 미키 등의 제사장이 사는 이야기적 차원(=언어 아요야식)인 초역사적 차원(삼 이마지널 차원(=신화적·근원적 이마주·무자적 차원)의 3개가 있어 서로 얽혀 있다. 이마지널 차원에서 생기는 것은 현상이 되어 현실적 세계에 생기게 된다. 또, 이 반대도 있다.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이다. 이마지널 차원을 엿볼 수 있으려면 초역사적 차원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현실계 개념의 해체를 강요당한다.
. 언어의 밑에 말을 넘는 「코토바(=메타언어=철학적 공통언어)」가 있다.
. 인간과 초월자는 상속적인 관계에 있다.
. 신비주의란 종교적 탈구축의 별명이다. 경이적인 갱생이자 절대자에게 죽은 후 새로 태어나는 곳에 있다.
. 절대 무분절 존재인 「존재」는 현상이 되어 감각 세계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꽃이 존재하지 않고 '존재'가 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현상은 다층·다중적 공시성이 생기는 방증에 지나지 않는다. 공시성은 시간의 벽을 돌파한다. 과거는 과거로 존재한다. 영원은 항상 지금이다. 거기에서는, 시간축에 잡히지 않고 사상 혹은 사상가들을 현재에 결집시켜 「지금」의 문제로서 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샤먼, 선지자 등 성성과의 조우자는 시공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 때도 다층이다.
. "읽는다"는 것은 지적 이해가 아닌 언어 이전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는 것이다.
. 사르토르의 '구토'는 동양의 철인이 ''무''라든지 '하늘'이라고 하는 존재 해체적 개념의 형태로 전개해 온 것을 실존적으로 '구토'화하는 일종의 언어 탈락, 즉 존재의 언어 의미 질서 붕괴(=탈자) 체험이다.
. 「의식」이란, 원래, 「탈자」적이다. 「자신의 밖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며 「자아의 죽음」이다.
. '본질'은 스스로를 주고 다니는 데 있다. 그리고 '탈자'를 받는다. 만물은 「존재」에 「본질」을 부여되어 「존재자」가 된다. 「견성」도 같은 차원에서 생기게 된다.
. 불교의 '연기'는 '본질'이 없는 분절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선은 "본질" 없는 유동적 존재분절을 실천적으로 인증할 것을 요구한다. 이통은 이마주까지를 「본질」로 한다.
. 신화는 단순한 제작 이야기가 아니다. 초월자의 자기현현의 한 형식이다. '이'의 팔갓 중 하나 하나에 신화가 각인되어 있다. 「코토바」의 자기 전개와 의미 탄생의 과정이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 '의식'의 바닥에 무의식이라는 괴물이 누워 있지 않다. 그것은, 불필요하고 "의식" 자체, 본래 얻어질지도 모른다.
. 「의미」란, 혼돈으로부터 태어나는 존재의 상모, 존재자의 「얼굴」이다. 하나로서 같은 것이 없다. 「코토바」(=근원적 절대 무분절의 리얼리티)가 만물을 낳는다. "의미"는 생활이다. 그리고 '의미'가 말을 구한다.
. "업"은 장애가 아닌 변혁, 심화, 또는 해탈해야 할 대상을 알린다.

길어졌지만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몰후 20년, '의식과 본질'을 손에 넣은 것이 사망되기 조금 전이었다.
30여 국어로 통한 희유의 천재·달인의 언설을 성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덜 읽기
13명이 이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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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코
별 5개 만점에 5.0 일본 근현대 사상사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대저
2011년 5월 21일에 일본에서 검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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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이슬람 철학 연구에 세계적인 규모로 중대한 공헌을 이룬 이통 슌히코. 이 책은 이슬람 학자라는 한정적인 틀에서 철학자 이통 슌히코를 해방하고 장대한 스케일로 전개되는 '이통 철학'의 에센스를 추출하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거기서는, 소년 시대의 선적 수도로 시작되어, 그리스 철학이나 이슬람 철학과의 만남으로부터, 「의식과 본질」등으로 독자적인 「코토바」론에 결실해 가는 사상 조류가, 이통의 살았던 시대에 그렇게 해서 정성껏 논해져 간다.

수십 국어로 통한 천재 등으로서 이통 슌히코는 어딘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던 인상이 강했지만, 본서 『이통 슌히코-지치의 철학』에서는, 한 명의 철학자로서 다양한 인물과 교제 , 시대를 살았던 모습이 진지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근현대 사상사의 장편 드라마,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 같은 걱정을 해주는 귀중한 한 권이다. 이 책이 이츠키 슌히코 연구의 선구자가 되는 것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본격적 비평가의 탄생을 축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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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 와카마쓰에이스케

슬픔의 비의 - Google Books

슬픔의 비의
By 와카마쓰에이스케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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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pages


OverviewGet the bookMore by author
About this edition
ISBN:9791162203101
Page count:184
Published:20 March 2018
Publisher:위즈덤하우스
Language:Korean
Author:와카마쓰에이스케
Translator:김순희
 국내 처음 소개되는 영혼의 문장가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대표 에세이집

“빛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비출 수 없다. 절망 뒤에는 반드시 희망이 나타난다.”



일본의 문예비평가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전하는 순도 높은 에세이 25편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2016년 상반기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3.11 대지진 이후 오랫동안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큰 위로를 전했다는 평을 받은 책이다. 말, 슬픔, 사랑의 근원을 탐구하며 인생의 참된 의미와 마주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문장이 단단하게 빚어져 읽는 이의 마음을 웅숭깊게 파고든다.

Source: Publisher
Common terms and phrases
가슴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이
같은
것이다
게이오 대학
겐지 이야기
경험
고독
구절
그것은
그것을
그녀
그는
그렇게
기도
나는
나쓰메 소세키
남편
내가
내면
노래
눈물
느낄
다른
다음
다카 무라
독자
되는
되었다
된다
때문
말로
말이
말한다
말했다
모른다
모습
목소리
문학
뭔가
미나마타 병
미키
밀라노
벚꽃
보이지
비통함
사건
사람
사람들
사랑
사랑하는
사실
살아
생각
세계
소리
소세키
소크라테스
속에
수가
순간
스승님
슬픔
시간
시인
시작
아니다
아니라
않는
않았다
어머니
없는
없다
없을
에게
엔도 슈사쿠
영혼
와카
요코
용기
의미
이라고
이란
이야기
이와사키
이케다
인생
인지
일본
읽는다
있었다
있을
자신
작가
작품
전혀
조각
존재
지금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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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work
Originally published: 20 March 2018
Subject: Literary Collections / Essays
Author
와카마쓰에이스케
Author
저자 : 와카마쓰 에이스케저자 와카마쓰 에이스케 (若松英輔)문학평론가. 1969년 니이가타에서 태어남. 게이오대학 문학부 불문학과 졸업. 

「오키 야스오(越知保夫)와 그 시대, 구도의 문학」으로 제14회 미타문학 신인상수상. 
저서로는 「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 예지의 철학」, 「예지의 시학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雄)와 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게이오대학출판회), 「영혼에 접하다 대지진과 살아 있는 사자(死者)」, 「이케다 마사코(池田晶子) 불멸의 철학」(토란스 뷰), 「요시미쓰 요시히코(吉?義彦) 시와 천사의 형이상학」, 「우치무라 간조(?村鑑三)를 읽다」(이와나미쇼텐), 「눈물방울에 씻기어 피어나는 것」(가와데쇼보신샤),「살아 있는 철학」(문예춘추), 「영성의 철학」(가도카와선서(選書)) 등이 있다.

역자 : 김순희역자 김순희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칸세이가쿠인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본어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일본 도요(東洋)대학교에서 “源氏物語?究”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강사 및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겸임교수를, 한국문학번역원 아카데미 일본어과의 교수도 역임했다. 2012년 9월 일한문화교류기금상을 수상했다. 한국어로 옮긴 책으로 「다도와 일본의 미」,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등이 있고, 일본어로 번역한 책으로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이승우 작가의 「생의 이면」,「식물들의 사생활」, 「한낮의 시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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